Ὅτι δὲ μοναχῶς οὕτω λύεται καὶ ἡ τῶν ἀρχαίων ἀπορία, λέγωμεν μετὰ ταῦτα. ζητοῦντες γὰρ οἱ κατὰ φιλοσοφίαν πρῶτοι τὴν ἀλήθειαν καὶ τὴν φύσιν τῶν ὄντων ἐξετράπησαν οἷον ὁδόν τινα ἄλλην ἀπωσθέντες ὑπὸ ἀπειρίας, καί φασιν οὔτε γίγνεσθαι τῶν ὄντων οὐδὲν οὔτε φθείρεσθαι διὰ τὸ ἀναγκαῖον μὲν εἶναι γίγνεσθα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ἢ ἐξ ὄντος ἢ ἐκ μὴ ὄντος, ἐκ δὲ τούτων ἀμφοτέρων ἀδύνατον εἶναι· οὔτε γὰρ τὸ ὂν γίγνεσθαι (εἶναι γὰρ ἤδη) ἔκ τε μὴ ὄντος οὐδὲν ἂν γενέσθαι· ὑποκεῖσθαι γάρ τι δεῖν. καὶ οὕτω δὴ τὸ ἐφεξῆς συμβαῖνον αὔξοντες οὐδ' εἶναι πολλά φασιν ἀλλὰ μόνον αὐτὸ τὸ ὄν.
  고대인들의 난관 또한 오직 그렇게만 해소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다음으로 논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철학의 영역에서 최초로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와 본성을 탐구하는 자들은 난관에 의해 떠밀려 이를 테면 무언가 다른 길로 돌아섰고, 생성되는 것은 존재로부터 또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됨이 필연적이지만, 둘 중 어느 쪽으로부터든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것들 중 아무것도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존재는 (그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생성되지도 않고 비존재로부터 아무것도 생성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무언가가 아래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결론을 과장하며 다수도 아니라 오직 존재 자체뿐이라고 말한다.
ἐξετράπησαν : ἐκτρέπω aor.
ἀπωσθέντες : ἀπωθέω aor. pass.

  ἐκεῖνοι μὲν οὖν ταύτην ἔλαβον τὴν δόξαν διὰ τὰ εἰρημένα· ἡμεῖς δὲ λέγομεν ὅτι τὸ ἐξ ὄντος ἢ μὴ ὄντος γίγνεσθαι, ἢ τὸ μὴ ὂν ἢ τὸ ὂ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ὁτιοῦν τόδε γίγνεσθαι, ἕνα μὲν τρόπον οὐθὲν διαφέρει ἢ τὸ τὸν ἰατρὸ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ἐξ ἰατροῦ εἶναί τι ἢ γίγνεσθαι, ὥστ' ἐπειδὴ τοῦτο διχῶς λέγεται,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ὸ ἐξ ὄντος καὶ τὸ ὂν ἢ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οἰκοδομεῖ μὲν οὖν ὁ ἰατρὸς οὐχ ᾗ ἰατρὸς ἀλλ' ᾗ [Bekker page 191b, line 5] οἰκοδόμος, καὶ λευκὸς γίγνεται οὐχ ᾗ ἰατρὸς ἀλλ' ᾗ μέλας· ἰατρεύει δὲ καὶ ἀνίατρος γίγνεται ᾗ ἰατρός. ἐπεὶ δὲ μάλιστα λέγομεν κυρίως τὸν ἰατρὸ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γίγνεσθαι ἐξ ἰατροῦ, ἐὰν ᾗ ἰατρὸς ταῦτα πάσχῃ ἢ ποιῇ ἢ γίγνηται,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ὸ ἐκ μὴ ὄντος γίγνεσθαι τοῦτο σημαίνει, τὸ ᾗ μὴ ὄν. ὅπερ ἐκεῖνοι μὲν οὐ διελόντες ἀπέστησαν, καὶ διὰ ταύτην τὴν ἄγνοιαν τοσοῦτον προσηγνόησαν, ὥστε μηθὲν οἴεσθαι γίγνεσθαι μηδ' εἶναι τῶν ἄλλων, ἀλλ' ἀνελεῖν πᾶσαν τὴν γένεσιν· ἡμεῖς δὲ καὶ αὐτοί φαμεν γίγνεσθαι μὲν μηθὲν ἁπλῶς ἐκ μὴ ὄντος, πὼς μέντοι γίγνεσθαι ἐκ μὴ ὄντος, οἷον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ἐκ γὰρ τῆς στερήσεως, ὅ ἐστι καθ' αὑτὸ μὴ ὄν, οὐκ ἐνυπάρχοντος γίγνεταί τι· θαυμάζεται δὲ τοῦτο καὶ ἀδύνατον οὕτω δοκεῖ γίγνεσθαί τι, ἐκ μὴ ὄντος)· ὡσαύτως δὲ οὐδ' ἐξ ὄντος οὐδὲ τὸ ὂν γίγνεσθαι, πλὴν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ὕτω δὲ καὶ τοῦτο γίγνεσθαι,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οἷον εἰ ἐκ ζῴου ζῷον γίγνοιτο καὶ ἐκ τινὸς ζῴου τι ζῷον· οἷον εἰ κύων <ἐκ κυνὸς ἢ ἵππος> ἐξ ἵππου γίγνοιτο. γίγνοιτο μὲν γὰρ ἂν οὐ μόνον ἐκ τινὸς ζῴου ὁ κύων, ἀλλὰ καὶ ἐκ ζῴου, ἀλλ' οὐχ ᾗ ζῷον· ὑπάρχει γὰρ ἤδη τοῦτο· εἰ δέ τι μέλλει γίγνεσθαι ζῷον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ὐκ ἐκ ζῴου ἔσται, καὶ εἴ τι ὄν, οὐκ ἐξ ὄντος· οὐδ' ἐκ μὴ ὄντος· τὸ γὰρ ἐκ μὴ ὄντος εἴρηται ἡμῖν [Bekker page 191b, line 26] τί σημαίνει, ὅτι ᾗ μὴ ὄν. ἔτι δὲ καὶ τὸ εἶναι ἅπαν ἢ μὴ εἶναι οὐκ ἀναιροῦμεν.
  그러므로 저들은 이야기된 점들 때문에 그 의견을 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로부터 혹은 비존재로부터 생겨난다' 라는 것, 혹은 '비존재나 존재가 무언가를 행한다'거나 '겪는다'거나 '무엇이든 여기 이것이 된다'는 것은, 한 가지 방식에서는 '
의사가 무언가를 한다'거나 '겪는다'거나 '의사로부터 무언가가 있다'거나 '된다'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그래서 이것이 두 가지로 진술될 경우, 존재로부터의 것도 존재도 행하거나 겪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의사가 의사로서가 아니라 건축가로서 건축하고, 의사로서가 아니라 검은 자로서 희게 된다. 다른 한편 의사로서 의술을 행하고 비의료인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특히 정당하게 '의사가 무언가를 뭔가를 행한다'거나 '겪는다'거나 '의사로부터 생성된다'고 말하기에, 의사로서 이런 일들을 겪거나 행하거나 그로부터 생성될 것이라면 그러하기에,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이 이것을, 비존재로서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저들은 바로 그것을 나누지 않고 빠뜨렸고, 또한 이러한 무지로 인해, 여타의 것들 중 아무것도 생성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모든 생성을 제거할 정도로 무지한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우리는 스스로도 한편으로 단적으로는 비존재로부터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고 말하자미나, 어떤 식으로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고, 이를 테면 우연적으로 그러하다고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는 비존재인, 그러한 결핍으로부터, 그것이 존속하지 않음에도 그로부터 무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놀라운 것이고 그런 식으로, 비존재로부터 무언가 생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우연한 경우를 제외하면, 존재로부터 존재가 생성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식(예외적)으로 그것이 생성되니, 이를 테면 동물로부터 동물이 생겨나고 또 특정 동물로부터 특정 동물이 생겨난다면 그와 같은 방식에서이다. 예를 들어 <개로부터> 개가 <혹은> 말로부터 <말이> 생성된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특정 동물로부터만이 아니라, 동물로부터, 그러나 동물로서가 아니라 개가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동물로서의 동물)은 이미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무언가 장차 우연적이지 않게 동물이 생성될 것이라면, 동물로부터 있을 것이 아니고, 또 만일 무언가 존재한다면(~이라면), 존재로부터가 아닐 것이다. 비존재로부터도 아니다. 왜냐하면 '비존재로부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비존재로서'라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존재나 비존재 모두 우리는 폐기하지 않았다.
διελόντες : διαιρέω aor. part.

  εἷς μὲν δὴ τρόπος οὗτος, ἄλλος δ' ὅτι ἐνδέχεται ταὐτὰ λέγειν κατὰ τὴν δύναμιν καὶ τὴν ἐνέργειαν· τοῦτο δ' ἐν ἄλλοις διώρισται δι' ἀκριβείας μᾶλλον. ὥσθ' (ὅπερ ἐλέγομεν) αἱ ἀπορίαι λύονται δι' ἃς ἀναγκαζόμενοι ἀναιροῦσι τῶν εἰρημένων ἔνια· διὰ γὰρ τοῦτο τοσοῦτον καὶ οἱ πρότερον ἐξετράπησαν τῆς ὁδοῦ τῆς ἐπὶ τὴν γένεσιν καὶ φθορὰν καὶ ὅλως μεταβολήν· αὕτη γὰρ ἂν ὀφθεῖσα ἡ φύσις ἅπασαν ἔλυσεν αὐτῶν τὴν ἄγνοιαν.
  그래서 한 가지 방식은 이러한 것이고, 다른 방식은 그러한 것들을 능력(잠재)과 발현(현실)에 따라서 논함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타의 경우들에서 상당한 정확함을 통해 정의된다. 그래서(우리가 말했던 바로 그대로) 이야기된 것들 중 일부를 폐기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난점들이 해소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앞서의 사람들도 그 만큼이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변화를 향한 그 길에서 이탈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것으로 관찰됨으로써 자연은 그들의 모든 무지 일반을 해소시켰다.

  Ἡμμένοι μὲν οὖν καὶ ἕτεροί τινές εἰσιν αὐτῆς, ἀλλ' οὐχ ἱκανῶς. πρῶτον μὲν γὰρ ὁμολογοῦσιν ἁπλῶς γίγνεσθαί τι ἐκ μὴ ὄντος, ᾗ Παρμενίδην ὀρθῶς λέγειν· εἶτα φαίνεται αὐτοῖς, εἴπερ ἐστὶν ἀριθμῷ μία, καὶ δυνάμει μία μόνον εἶναι. τοῦτο δὲ διαφέρει πλεῖστον. ἡμεῖς μὲν γὰρ ὕλην καὶ στέρησιν ἕτερόν φαμεν εἶναι, καὶ τούτων τὸ μὲν οὐκ ὂν εἶναι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τὴν ὕλην, τὴν δὲ στέρησιν καθ' αὑτήν, καὶ τὴν μὲν ἐγγὺς καὶ οὐσίαν πως, τὴν ὕλην, τὴν δὲ οὐδαμῶς· οἱ δὲ τὸ μὴ ὂν τὸ μέγα καὶ τὸ μικρὸν ὁμοίως, ἢ τὸ συναμφότερον ἢ τὸ χωρὶς ἑκάτερον. ὥστε παντελῶς ἕτερος ὁ τρόπος [Bekker page 192a, line 9] οὗτος τῆς τριάδος κἀκεῖνος. μέχρι μὲν γὰρ δεῦρο προῆλθον, ὅτι δεῖ τινὰ ὑποκεῖσθαι φύσιν, ταύτην μέντοι μίαν ποιοῦσιν· καὶ γὰρ εἴ τις δυάδα ποιεῖ, λέγων μέγα καὶ μικρὸν αὐτήν, οὐθὲν ἧττον ταὐτὸ ποιεῖ· τὴν γὰρ ἑτέραν παρεῖδεν. ἡ μὲν γὰρ ὑπομένουσα συναιτία τῇ μορφῇ τῶν γιγνομένων ἐστίν, ὥσπερ μήτηρ· ἡ δ' ἑτέρα μοῖρα τῆς ἐναντιώσεως πολλάκις ἂν φαντασθείη τῷ πρὸς τὸ κακοποιὸν αὐτῆς ἀτενίζοντι τὴν διάνοιαν οὐδ' εἶναι τὸ παράπαν. ὄντος γάρ τινος θείου καὶ ἀγαθοῦ καὶ ἐφετοῦ, τὸ μὲν ἐναντίον αὐτῷ φαμεν εἶναι, τὸ δὲ ὃ πέφυκεν ἐφίεσθαι καὶ ὀρέγεσθαι αὐτοῦ κατὰ τὴν αὑτοῦ φύσιν. τοῖς δὲ συμβαίνει τὸ ἐναντίον ὀρέγεσθαι τῆς αὑτοῦ φθορᾶς. καίτοι οὔτε αὐτὸ αὑτοῦ οἷόν τε ἐφίεσθαι τὸ εἶδος διὰ τὸ μὴ εἶναι ἐνδεές, οὔτε τὸ ἐναντίον (φθαρτικὰ γὰρ ἀλλήλων τὰ ἐναντία), ἀλλὰ τοῦτ' ἔστιν ἡ ὕλη, ὥσπερ ἂν εἰ θῆλυ ἄρρενος καὶ αἰσχρὸν καλοῦ· πλὴν οὐ καθ' αὑτὸ αἰσχρόν, ἀλλ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ὐδὲ θῆλυ, ἀλλ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그러므로 다른 어떨 이들도 그 길에 가 닿았지만, 충분치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선 그들은 단순히 비존재로부터 무언가 생성된다는 것을 동의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옳게 논한다는 측면에서. 다음으로 그들에게는, 만일 정녕 수적으로 하나가 존재한다면, 가능적으로도(잠재적으로도)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료와 결핍이 다르다고 말하고, 이것들 중 한쪽은 우연적으로 비존재라고, 즉 질료가 그러한 반면, 결핍은 그 자체로 비존재라 말하며, 또한 어떤 식으로든 실체에 근접한 것을 질료라고, 그런데 결핍은 전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비존재를 큼 그리고 작음과 유사하게, 양자를 합쳐서든 그 둘 각각을 따로든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 방식은 저들의 그 셋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기, 즉 무언가 본성이 기저에 놓여야 한다는 데에까지 이르렀지만, 이 본성을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누군가 그 본성을 큼과 작음이라 말하면서 둘로 만든다 하더라도, 조금도 못지 않게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본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즉 기저에 놓인 본성은 생성되는 것들에 대해 형태와 공동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처럼. 그런데 반대의 또 다른 몫은 그것의 악영향에 사유를 집중하는 자에게는 자주 전적으로 비존재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신적이고 선하며 바람직한 것이 존재할 때, 우리는 한쪽을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본디 그 본성상 바랄 만하고 추구될 만한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반대로 그것의 소멸이 추구되는 일이 귀결한다. 그렇지만 형상 그 자체가 그 자신을 소위 바라는 일도 결핍이 결여된 것이라는 이유로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되며 (반대쌍은 서로 소멸시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료가 그런 것이다. 만일 계집이 사내를 바라고 추함이 아름다움을 바란다면 그러할 것처럼. 그 자체로 추한 것을 제외하고, 우연적으로 추한 것이, 그리고 계집의 경우도, 오히려 우연적인 한에서.
Ἡμμένοι : ἅπτω pf. mp.
  φθείρεται δὲ καὶ γίγνεται ἔστι μὲν ὥς, ἔστι δ' ὡς οὔ. ὡς μὲν γὰρ τὸ ἐν ᾧ, καθ' αὑτὸ φθείρεται (τὸ γὰρ φθειρόμενον ἐν τούτῳ ἐστίν, ἡ στέρησις)· ὡς δὲ κατὰ δύναμιν, οὐ καθ' αὑτό, ἀλλ' ἄφθαρτον καὶ ἀγένητον ἀνάγκη αὐτὴν [Bekker page 192a, line 29] εἶναι. εἴτε γὰρ ἐγίγνετο, ὑποκεῖσθαί τι δεῖ πρῶτον ἐξ οὗ ἐνυπάρχοντος· τοῦτο δ' ἐστὶν αὐτὴ ἡ φύσις, ὥστ' ἔσται πρὶν γενέσθαι (λέγω γὰρ ὕλην τὸ πρῶτον ὑποκείμενον ἑκάστῳ, ἐξ οὗ γίγνεταί τι ἐνυπάρχοντος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εἴτε φθείρεται, εἰς τοῦτο ἀφίξεται ἔσχατον, ὥστε ἐφθαρμένη ἔσται πρὶν φθαρῆναι. περὶ δὲ τῆς κατὰ τὸ εἶδος ἀρχῆς, πότερον μία ἢ πολλαὶ καὶ τίς ἢ τίνες εἰσίν, δι' ἀκριβείας τῆς πρώτης φιλοσοφίας ἔργον ἐστὶν διορίσαι, ὥστ' εἰς ἐκεῖνον τὸν καιρὸν ἀποκείσθω. περὶ δὲ τῶν φυσικῶν καὶ φθαρτῶν εἰδῶν ἐν τοῖς ὕστερον δεικνυμένοις ἐροῦμεν. ὅτι μὲν οὖν εἰσὶν ἀρχαί, καὶ τίνες, καὶ πόσαι τὸν ἀριθμόν, διωρίσθω ἡμῖν οὕτως· πάλιν δ' ἄλλην ἀρχὴν ἀρξάμενοι λέγωμεν.
  그런데 <질료는> 한편으로는 소멸하고 생성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안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소멸하지만 (왜냐하면 소멸되는 것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결핍이), 가능적으로는, 그 자체로서 소멸하지 않고, 그것이 불생이자 불멸임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생성된다면, 그것이 그로부터 나올 그리고 그것 안에 존속하는 무언가가 기저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본성 자체이다. 그래서 생성 이전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개물에 처음 기저에 놓이는 것, 그로부터 무언가 생성되고 그것 안에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속하는 것을 질료라 말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소멸된다면, 궁극적으로 그것에 당도하고, 그래서 소멸 이전에 소멸되어 있을 것이다. 형상에 따른 원리에 관하여서는, 그것이 하나인지 여럿인지 또 무엇인지 혹은 무엇들인지 하는 문제는, 정확함을 통해(정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제1 철학의 일이고, 그래서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그런데 자연적이고 소멸하는 형상들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이후의 설명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들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무엇들이냐는 것, 수적으로 얼만큼이냐는 것은, 그렇게 정의된 것으로 하자. 그럼 다시 여타의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논의해 보자.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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