Ἐπεὶ δὲ διώρισται ποσαχῶς ἡ φύσις, μετὰ τοῦτο θεωρητέον τίνι διαφέρει ὁ μαθηματικὸς τοῦ φυσικοῦ (καὶ γὰρ ἐπίπεδα καὶ στερεὰ ἔχει τὰ φυσικὰ σώματα καὶ μήκη [Bekker page 193b, line 25] καὶ στιγμάς, περὶ ὧν σκοπεῖ ὁ μαθηματικός)· ἔτι εἰ ἡ ἀστρολογία ἑτέρα ἢ μέρος τῆς φυσικῆς· εἰ γὰρ τοῦ φυσικοῦ τὸ τί ἐστιν ἥλιος ἢ σελήνη εἰδέναι, τῶν δὲ συμβεβηκότων καθ' αὑτὰ μηδέν, ἄτοπον, ἄλλως τε καὶ ὅτι φαίνονται λέγοντες οἱ περὶ φύσεως καὶ περὶ σχήματος σελήνης καὶ ἡλίου, καὶ δὴ καὶ πότερον σφαιροειδὴς ἡ γῆ καὶ ὁ κόσμος ἢ οὔ.
자연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으니, 이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수학자가 자연학자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물체들은 평면도 입체도 선도 점도 지니는데, 수학자들은 그것들에 관하여 고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천문학이 자연학과 다른 것인지 혹은 그 일부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자연학자에게 태양 혹은 달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속한다면, 그런데 이것들에 대해 부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고, 다른 것보다도 자연에 관하여 논하는 자들이 달과 해의 형태에 관하여서도 논하고, 더욱이 대지와 우주가 구형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논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상한 일이다>.

περὶ τούτων μὲν οὖν πραγματεύεται καὶ ὁ μαθηματικός, ἀλλ' οὐχ ᾗ φυσικοῦ σώματος πέρας ἕκαστον· οὐδὲ τὰ συμβεβηκότα θεωρεῖ ᾗ τοιούτοις οὖσι συμβέβηκεν· διὸ καὶ χωρίζει· χωριστὰ γὰρ τῇ νοήσει κινήσεώς ἐστι, καὶ οὐδὲν διαφέρει, οὐδὲ γίγνεται ψεῦδος χωριζόντων. λανθάνουσι δὲ τοῦτο ποιοῦντες καὶ οἱ τὰς ἰδέας λέγοντες· τὰ γὰρ φυσικὰ χωρίζουσιν ἧττον ὄντα χωριστὰ τῶν μαθηματικῶν. γίγνοιτο δ' ἂν τοῦτο δῆλον, εἴ τις ἑκατέρων πειρῷτο λέγειν τοὺς ὅρους, καὶ αὐτῶν κα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τὸ μὲν γὰρ περιττὸν ἔσται καὶ τὸ ἄρτιον καὶ τὸ εὐθὺ καὶ τὸ καμπύλον, ἔτι δὲ ἀριθμὸς καὶ γραμμὴ καὶ σχῆμα, ἄνευ κινήσεως, σὰρξ δὲ καὶ ὀστοῦν καὶ ἄνθρωπος οὐκέτι, ἀλλὰ ταῦτα ὥσπερ ῥὶς σιμὴ ἀλλ' οὐχ ὡς τὸ καμπύλον λέγεται. δηλοῖ δὲ καὶ τὰ φυσικώτερα τῶν μαθημάτων, οἷον ὀπτικὴ καὶ ἁρμονικὴ καὶ ἀστρολογία· ἀνάπαλιν γὰρ τρόπον τιν' ἔχουσιν τῇ γεωμετρίᾳ. ἡ μὲν γὰρ [Bekker page 194a, line 10] γεωμετρία περὶ γραμμῆς φυσικῆς σκοπεῖ, ἀλλ' οὐχ ᾗ φυσική, ἡ δ' ὀπτικὴ μαθηματικὴν μὲν γραμμήν, ἀλλ' οὐχ ᾗ μαθηματικὴ ἀλλ' ᾗ φυσική.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관하여서는 수학자 또한 문제 삼지만, 자연적 물체의 한계인 한에서 각각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부수적인 것들도 이와 같은 존재하는 것들에 부수하는 한에서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분리(독립)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부수적인 것들> 사유상으로 운동과 분리된 것들이고,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분리된 것들 중에 거짓이 생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데아를 논하는 자들도 남몰래 이런 일을 행한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것들보다 덜 분리된 자연적인 것들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의 것은 분명해질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것들에 대해서도 또한 부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 두편 각각의 정의들을 진술하고자 시도한다면. 왜냐하면 한편은 운동 없이, 홀과 짝 그리고 곧음과 휨일 것이고, 더욱이 수와 선과 도형일 것이나, 살과 뼈와 인간은 더 이상 없을 것이지만, 이런 것들은 매부리코처럼 진술되지 휨처럼 진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학적인 것들보다 더 자연적인 것들도, 이를 테면 광학과 화성학 그리고 천문학 같은 것들도 이 점을 분명히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역전된 기하학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기하학은 자연적 선에 관하여 고찰하지만, 자연적이라는 그러한 한에서 그리하지는 않는 반면, 광학은 수학적인 선을, 그러나 수학적인 것인 한에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인 한에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ἐπεὶ δ' ἡ φύσις διχῶς, τό τε εἶδος καὶ ἡ ὕλη, ὡς ἂν εἰ περὶ σιμότητος σκοποῖμεν τί ἐστιν, οὕτω θεωρητέον· ὥστ' οὔτ' ἄνευ ὕλης τὰ τοιαῦτα οὔτε κατὰ τὴν ὕλην. καὶ γὰρ δὴ καὶ περὶ τούτου ἀπορήσειεν ἄν τις, ἐπεὶ δύο αἱ φύσεις, περὶ ποτέρας τοῦ φυσικοῦ. ἢ περὶ τοῦ ἐξ ἀμφοῖν; ἀλλ' εἰ περὶ τοῦ ἐξ ἀμφοῖν, καὶ περὶ ἑκατέρας. πότερον οὖν τῆς αὐτῆς ἢ ἄλλης ἑκατέραν γνωρίζειν; εἰς μὲν γὰρ τοὺς ἀρχαίους ἀποβλέψαντι δόξειεν ἂν εἶναι τῆς ὕλης (ἐπὶ μικρὸν γάρ τι μέρος Ἐμπεδοκλῆς καὶ Δημόκριτος τοῦ εἴδους καὶ τοῦ τί ἦν εἶναι ἥψαντο)· εἰ δὲ ἡ τέχνη μιμεῖται τὴν φύσιν, τῆς δὲ αὐτῆς ἐπιστήμης εἰδέναι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ὴν ὕλην μέχρι του (οἷον ἰατροῦ ὑγίειαν καὶ χολὴν καὶ φλέγμα, ἐν οἷς ἡ ὑγίεια,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οἰκοδόμου τό τε εἶδος τῆς οἰκίας καὶ τὴν ὕλην, ὅτι πλίνθοι καὶ ξύλα· ὡσαύτως δὲ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καὶ τῆς φυσικῆς ἂν εἴη τὸ γνωρίζειν ἀμφοτέρας τὰς φύσεις. ἔτι τὸ οὗ ἕνεκα καὶ τὸ τέλος τῆς αὐτῆς, καὶ ὅσα τούτων ἕνεκα. ἡ δὲ φύσις τέλος καὶ οὗ ἕνεκα (ὧν γὰρ συνεχοῦς τῆς κινήσεως οὔσης ἔστι τι τέλος, [Bekker page 194a, line 30] τοῦτο <τὸ> ἔσχατον καὶ τὸ οὗ ἕνεκα· διὸ καὶ ὁ ποιητὴς γελοίως προήχθη εἰπεῖν “ἔχει τελευτήν, ἧσπερ οὕνεκ' ἐγένετο”· βούλεται γὰρ οὐ πᾶν εἶναι τὸ ἔσχατον τέλος, ἀλλὰ τὸ βέλτιστον)·
그런데 자연이 두 가지로, 형상도 질료도 진술되기에, 우리가 매부리꼴에 관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고찰한다면 그러할 것처럼, 그런 식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을 질료 없이도 질료에 따라서도 고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더욱이 그 자연들이 둘이기에, 그 자연적인 것의 둘 중 어느 쪽에 관한 것인지 이에 관련하여 누군가 당혹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양자로부터 나온 것에 관하여서인가? 하지만 만일 양자로부터 나온 것에 관하여서라면, 그 둘 각각에 관하여서이기도 하다. 그럼 양편 각각을 아는 일은 같은 앎에 속하는가 아니면 다른 앎에 속하는가? 왜냐하면 한편으로 고대인들에 주목할 사람들에게는 질료에 속하는 것이라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는 형상과 '무엇인 바의 것임'에 고작해야 미미한 부분에만 닿았으니까). 그런데 만일 기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면, 그런데 형상을 아는 일과 질료를 아는 일이 어느 정도까지 같은 앎에 속한다면 (예를 들어 의사의 경우 건강을 알고 담즙과 열, 그것들 안에 건강이 드는 것들을 알듯, 또한 건축가의 경우 집의 형상과 또한 그 질료 또한, 즉 벽돌들과 목재들도 알듯이. 여타의 경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자연학에도 그 양편의 자연본성 모두를 아는 일이 속할 것이다. 더욱이 무엇 때문인지 하는 것과 목적도 같은 앎에 속하고, 그것들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자연은 목적이자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의 지속적인 운동이 존재할 때에 거기에 모종의 목적이 있고, 그 각각의 끝이 또한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하 이유로 시인도 우스운 말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그가 그 때문에 태어났던 바, 바로 그 목적을 지닌다."라고. 왜냐하면 모든 끝이 목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이 목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ἐπεὶ καὶ ποιοῦσιν αἱ τέχναι τὴν ὕλην αἱ μὲν ἁπλῶς αἱ δὲ εὐεργόν, καὶ χρώμεθα ὡς ἡμῶν ἕνεκα πάντων ὑπαρχόντων (ἐσμὲν γάρ πως καὶ ἡμεῖς τέλος· διχῶς γὰρ τὸ οὗ ἕνεκα· εἴρηται δ' ἐν τοῖς περὶ φιλοσοφίας). δύο δὲ αἱ ἄρχουσαι τῆς ὕλης καὶ γνωρίζουσαι τέχναι, ἥ τε χρωμένη καὶ τῆς ποιητικῆς ἡ ἀρχιτεκτονική. διὸ καὶ ἡ χρωμένη ἀρχιτεκτονική πως, διαφέρει δὲ ᾗ ἡ μὲν τοῦ εἴδους γνωριστική, ἡ ἀρχιτεκτονική, ἡ δὲ ὡς ποιητική, τῆς ὕλης· ὁ μὲν γὰρ κυβερνήτης ποῖόν τι τὸ εἶδος τοῦ πηδαλίου γνωρίζει καὶ ἐπιτάττει, ὁ δ' ἐκ ποίου ξύλου καὶ ποίων κινήσεων ἔσται. ἐν μὲν οὖν τοῖς κατὰ τέχνην ἡμεῖς ποιοῦμεν τὴν ὕλην τοῦ ἔργου ἕνεκα, ἐν δὲ τοῖς φυσικοῖς ὑπάρχει οὖσα. ἔτι τῶν πρός τι ἡ ὕλη· ἄλλῳ γὰρ εἴδει ἄλλη ὕλη. μέχρι δὴ πόσου τὸν φυσικὸν δεῖ εἰδέναι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ὸ τί ἐστιν; ἢ ὥσπερ ἰατρὸν νεῦρον ἢ χαλκέα χαλκόν, μέχρι τοῦ τίνος [γὰρ] ἕνεκα ἕκαστον, καὶ περὶ ταῦτα ἅ ἐστι χωριστὰ μὲν εἴδει, ἐν ὕλῃ δέ; ἄνθρωπος γὰρ ἄνθρωπον γεννᾷ καὶ ἥλιος. [Bekker page 194b, line 14] πῶς δ' ἔχει τὸ χωριστὸν καὶ τί ἐστι, φιλοσοφίας ἔργον διορίσαι τῆς πρώτης.
  또한 기술들이 질료를 만드는데 어떤 기술들은 단적으로 그리하고 다른 기술들은 유용하게 만들며, 우리는 모든 현존하는 것들이 우리를 위한 것인냥 그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또한 어떤 식으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은 두 가지이다. 이는 철학에 관한 글에서 이야기된다). 그런데 질료를 지배하는 기술들과 이를 아는 기술들은 둘로서, 사용하는 기술 그리고 제작술에 대한 규제적 기술이다. 이런 이유로 사용하는 기술 또한 어떤 식으로는 규제적 기술이지만, 한쪽, 즉 규제적 기술은 형상에 대한 인식적 기술인 반면, 다른 쪽, 질료에 속하는 쪽은 제작술로서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조타수는 조타기(키)의 형상이 어떤 무엇인지 알고 또한 그것을 부여하지만, 다른 자는 어떤 목재로부터 어떤 움직임들을 통해 그것이 성립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에 따른 것들 내에서 우리는 기능(일, 작품)을 위해 질료를 만들고, 자연적인 것들 내에는 존재하는 질료가 현존한다. 더 나아가 질료는 어떤 것에 관련한(상대적인) 것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타의 형상에는 여타의 질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자연학자는 형상과 무엇인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 의사가 힘줄을 알거나 대장장이가 청동을 아는 것처럼, 그 각각이 무엇을 위한 것들인지까지를, 그리고 형상에는 독립적이지만, 질료에는 내재하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서 알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인간도 태양도 인간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독립된 것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인지, 이를 정의하는 것은 제일 철학의 일이다.


Διωρισμένων δὲ τούτων ἐπισκεπτέον περὶ τῶν αἰτίων, ποῖά τε καὶ πόσα τὸν ἀριθμόν ἐστιν. ἐπεὶ γὰρ τοῦ εἰδέναι χάριν ἡ πραγματεία, εἰδέναι δὲ οὐ πρότερον οἰόμεθα ἕκαστον πρὶν ἂν λάβωμεν τὸ διὰ τί περὶ ἕκαστον (τοῦτο δ' ἐστὶ τὸ λαβεῖν τὴν πρώτην αἰτίαν), δῆλον ὅτι καὶ ἡμῖν τοῦτο ποιητέον καὶ περὶ γενέσεως καὶ φθορᾶς καὶ πάσης τῆς φυσικῆς μεταβολῆς, ὅπως εἰδότες αὐτῶν τὰς ἀρχὰς ἀνάγειν εἰς αὐτὰς πειρώμεθα τῶν ζητουμένων ἕκαστον. ἕνα μὲν οὖν τρόπον αἴτιον λέγεται τὸ ἐξ οὗ γίγνεταί τι ἐνυπάρχοντος, οἷον ὁ χαλκὸς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καὶ ὁ ἄργυρος τῆς φιάλης καὶ τὰ τούτων γένη· ἄλλον δὲ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ὸ παράδειγμα, τοῦτο δ' ἐστὶν ὁ λόγος ὁ τοῦ τί ἦν εἶναι καὶ τὰ τούτου γένη (οἷον τοῦ διὰ πασῶν τὰ δύο πρὸς ἕν, καὶ ὅλως ὁ ἀριθμός) καὶ τὰ μέρη τὰ ἐν τῷ λόγῳ. ἔτι ὅ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ἡ πρώτη ἢ τῆς ἠρεμήσεως, οἷον ὁ βουλεύσας αἴτιος, καὶ ὁ πατὴρ τοῦ τέκνου, καὶ ὅλως τὸ ποιοῦν τοῦ ποιουμένου καὶ τὸ μεταβάλλον τοῦ μεταβαλλομένου. ἔτι ὡς τὸ τέλος· τοῦτο δ' ἐστὶν τὸ οὗ ἕνεκα, οἷον τοῦ περιπατεῖν ἡ ὑγίεια· διὰ τί γὰρ περιπατεῖ; φαμέν “ἵνα ὑγιαίνῃ”, καὶ εἰπόντες οὕτως οἰόμεθα [Bekker page 194b, line 35] ἀποδεδωκέναι τὸ αἴτιον. καὶ ὅσα δὴ κινήσαντος ἄλλου μεταξὺ γίγνεται τοῦ τέλους, οἷον τῆς ὑγιείας ἡ ἰσχνασία ἢ ἡ κάθαρσις ἢ τὰ φάρμακα ἢ τὰ ὄργανα· πάντα γὰρ ταῦτα τοῦ τέλους ἕνεκά ἐστιν, διαφέρει δὲ ἀλλήλων ὡς ὄντα τὰ μὲν ἔργα τὰ δ' ὄργανα.
이런 사항들이 정의되었기에 그 원인들에 관하여 고찰되어야만 한다, 어떤 것들이며 그 수는 얼만큼인지. 왜냐하면 문제화하는 것은 앎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각에 관하여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원인)를 파악하기 이전에는 그보다 앞서 각각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은 일차적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 역시 이러한 일을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자연 변화 전체에 관하여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런 일들의 원리들을 앎으로써 탐구되는 것들 각각을 이 원리들로 이끌고자 시도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한 가지 방식으로는 원인이 '무엇으로부터' 뭔가가 되는 그 내속하는 무엇이라 진술되는데,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청동과 쟁반에 대해 은 그리고 이런 류(類)들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는 그 형상(種)과 본으로 진술되며, 이것은 무엇인 바의 것임에 대한 정의와 그런 류들 (예를 들어 음계의 2:1, 또 일반적으로 수) 그리고 그 정의 내의 부분들이다. 나아가 이런 연유로 변화나 정지의 일차적 원리로도 진술되는데, 예를 들어 바라는 자가 원인이며, 또한 아버지가 출산의 원인이고, 일반적으로 작용자가 작용받은 것의 그리고 변화시킨 것이 변화되는 것의 원인이다. 나아가 목적(완성)으로서도 진술된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이다, 이를 테면 산책에 대해 건강이다. 왜냐하면 무엇으로 인해 산책을 하는가? 하면 우리는 "건강하고자"라 답하고, 또한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원인을 밝힌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타의 것이 운동하여서 그 완성의 중간이 되는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 이를 테면 건강에 대해 체중감소나 배설 또는 약품들이나 (의료)도구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 목적 때문인 바의 것이며, 한편은 활동들인 반면 다른 편은 도구들이기에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τὰ μὲν οὖν αἴτια σχεδὸν τοσαυταχῶς λέγεται, συμβαίνει δὲ πολλαχῶς λεγομένων τῶν αἰτίων καὶ πολλὰ τοῦ αὐτοῦ αἴτια εἶναι, οὐ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ἷον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καὶ ἡ ἀνδριαντοποιικὴ καὶ ὁ χαλκός, οὐ καθ' ἕτερόν τι ἀλλ' ᾗ ἀνδριάς, ἀλλ' οὐ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ἀλλὰ τὸ μὲν ὡς ὕλη τὸ δ' ὡς ὅθεν ἡ κίνησις. ἔστιν δέ τινα καὶ ἀλλήλων αἴτια, οἷον τὸ πονεῖν τῆς εὐεξίας καὶ αὕτη τοῦ πονεῖν· ἀλλ' οὐ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ἀλλὰ τὸ μὲν ὡς τέλος τὸ δ' ὡς ἀρχὴ κινήσεως. ἔτι δὲ τὸ αὐτὸ τῶν ἐναντίων ἐστίν· ὃ γὰρ παρὸν αἴτιον τοῦδε, τοῦτο καὶ ἀπὸν αἰτιώμεθα ἐνίοτε τοῦ ἐναντίου, οἷον τὴν ἀπουσίαν τοῦ κυβερνήτου τῆς τοῦ πλοίου ἀνατροπῆς, οὗ ἦν ἡ παρουσία αἰτία τῆς σωτηρίας. 
그러므로 한편으로 원인들은 거의 이 만큼의 가짓수로 진술되지만, 그 원인들이 여러가지로 진술됨으로써 같은 일의 원인이 여럿이라 귀결되는데, 부수적으로서가 아니라,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조각술과 청동이, 다름 아닌 조각상인 바로 그 측면에 따라, 허나 똑같은 방식에서가 아니라, 한편은 질료로서 다른 한편은 그 운동이 연원하는 바로서 (여러 원인들로 진술된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상호 원인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노동함은 강건함에 대해 또 이 강건함이 노동에 대해서도 (원인이다). 허나 같은 방식에서가 아니라, 한편은 완성으로서 다른 한편은 운동(변화, 즉 나약함에서 강건함으로의 운동)
의 원리로서 그러하다. 나아가 똑같은 것이 반대되는 것들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여기 이것의 현존하는 원인인 바, 그것이 부재함도 우리가 종종 그 반대의 것에 대해 원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배의 전복에 대해, 그의 현존이 그 배의 무사에 대해 원인이었던, 그 조타수의 부재가 원인이다.

ἅπαντα δὲ τὰ νῦν εἰρημένα αἴτια εἰς τέτταρας πίπτει τρόπους τοὺς φανερωτάτους. τὰ μὲν γὰρ στοιχεῖα τῶν συλλαβῶν καὶ ἡ ὕλη τῶν σκευαστῶν καὶ τὸ πῦρ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τῶν σωμάτων καὶ τὰ μέρη τοῦ ὅλου καὶ αἱ ὑποθέσεις τοῦ [Bekker page 195a, line 19] συμπεράσματος ὡς τὸ ἐξ οὗ αἴτιά ἐστιν, τούτων δὲ τὰ μὲν ὡς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οἷον τὰ μέρη, τὰ δὲ ὡς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τό τε ὅλον καὶ ἡ σύνθεσις καὶ τὸ εἶδος· τὸ δὲ σπέρμα καὶ ὁ ἰατρὸς καὶ ὁ βουλεύσας καὶ ὅλως τὸ ποιοῦν, πάντα ὅ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ἢ στάσεως [ἢ κινήσεως]· τὰ δ' ὡς τὸ τέλος καὶ τἀγαθὸν τῶν ἄλλων· τὸ γὰρ οὗ ἕνεκα βέλτιστον καὶ τέλος τῶν ἄλλων ἐθέλει εἶναι· διαφερέτω δὲ μηδὲν εἰπεῖν αὐτὸ ἀγαθὸν ἢ φαινόμενον ἀγαθόν.
지금 이야기된 모든 원인들이 전부 가장 두드러진 네 가지 방식들로 분류된다. 즉 음절들의 철자들과 인공물들의 질료 그리고 신체들의 불과 이런 종류의 것들 또한 전체의 부분들과 결론의 전제들은 '출처(무엇으로부터)'로서 원인이고,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밑에 놓이는 것으로서, 이를 테면 부분들인 반면, 다른 것들은 무엇인 바의 것으로서, 그 전체와 결합과 형상이다. 그런데 정자와 의사와 바라는 자 그리고 일반적으로 작용자는, 모두 변화나 정지가 연원하는 기원(원리)이다. 어떤 것들은 목적(완성)과 그것들의 선(좋음)으로서 (원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해'는 그것들의 최선과 완성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으로 말하든 선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든 그 둘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τὰ μὲν οὖν αἴτια ταῦτα καὶ τοσαῦτά ἐστι τῷ εἴδει· τρόποι δὲ τῶν αἰτίων ἀριθμῷ μὲν εἰσὶ πολλοί, κεφαλαιούμενοι δὲ καὶ οὗτοι ἐλάττους. λέγεται γὰρ αἴτια πολλαχῶς, καὶ αὐτῶν τῶν ὁμοειδῶν προτέρως καὶ ὑστέρως ἄλλο ἄλλου, οἷον ὑγιείας ἰατρὸς καὶ τεχνίτης, καὶ τοῦ διὰ πασῶν τὸ διπλάσιον καὶ ἀριθμός, καὶ ἀεὶ τὰ περιέχοντα πρὸς τὰ καθ' ἕκαστον. ἔτι δ' ὡς τὸ συμβεβηκὸς καὶ τὰ τούτων γένη, οἷον ἀνδριάντος ἄλλως Πολύκλειτος καὶ ἄλλως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ὅτι συμβέβηκε τῷ ἀνδριαντοποιῷ τὸ Πολυκλείτῳ εἶναι. καὶ τὰ περιέχοντα δὲ τὸ συμβεβηκός, οἷον εἰ ὁ ἄνθρωπος αἴτιος εἴη ἀνδριάντος ἢ ὅλως ζῷον. ἔστι δὲ κα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ἄλλα ἄλλων [Bekker page 195b, line 2] πορρώτερον καὶ ἐγγύτερον, οἷον εἰ ὁ λευκὸς καὶ ὁ μουσικὸς αἴτιος λέγοιτο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πάντα δὲ καὶ τὰ οἰκείως λεγόμενα καὶ τ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τὰ μὲν ὡς δυνάμενα λέγεται τὰ δ' ὡς ἐνεργοῦντα, οἷον τοῦ οἰκοδομεῖσθαι οἰκίαν οἰκοδόμος ἢ οἰκοδομῶν οἰκοδόμος. ὁμοίως δὲ λεχθήσεται καὶ ἐφ' ὧν αἴτια τὰ αἴτια τοῖς εἰρημένοις, οἷον τουδὶ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ἢ ἀνδριάντος ἢ ὅλως εἰκόνος, καὶ χαλκοῦ τοῦδε ἢ χαλκοῦ ἢ ὅλως ὕλης· καὶ ἐπ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ὡσαύτως. ἔτι δὲ συμπλεκόμενα καὶ ταῦτα κἀκεῖνα λεχθήσεται, οἷον οὐ Πολύκλειτος οὐδὲ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ἀλλὰ Πολύκλειτος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ἀλλ' ὅμως ἅπαντα ταῦτά ἐστι τὸ μὲν πλῆθος ἕξ, λεγόμενα δὲ διχῶς· ἢ γὰρ ὡς τὸ καθ' ἕκαστον, ἢ ὡς τὸ γένος, ἢ ὡς τὸ συμβεβηκός, ἢ ὡς τὸ γένος τοῦ συμβεβηκότος, ἢ ὡς συμπλεκόμενα ταῦτα ἢ ὡς ἁπλῶς λεγόμενα· πάντα δὲ ἢ ἐνεργοῦντα ἢ κατὰ δύναμιν. διαφέρει δὲ τοσοῦτον, ὅτι τὰ μὲν ἐνεργοῦντα καὶ τὰ καθ' ἕκαστον ἅμα ἔστι καὶ οὐκ ἔστι καὶ ὧν αἴτια, οἷον ὅδ' ὁ ἰατρεύων τῷδε τῷ ὑγιαζομένῳ καὶ ὅδε ὁ οἰκοδομῶν τῷδε τῷ οἰκοδομουμένῳ, τὰ δὲ κατὰ δύναμιν οὐκ ἀεί. φθείρεται γὰρ οὐχ ἅμα ἡ οἰκία καὶ ὁ οἰκοδόμος.
그러므로 원인들은 이런 것들이고 그 형상(종)에서 그 만큼의 것들이다. 그런데 그 원인들의 방식들은 수로는 여럿이나, 요약되면 이것들도 소수이다. 왜냐하면 원인들이 여러가지로 진술되고, 똑같은 동종의 것들 중에서도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앞서거나 뒤서는 식으로, 이를 테면 건강에 대해 의사와 전문가처럼 진술되며, 음계에 대해서도 2:1과 수가 진술되고,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서 언제나 포괄적인 것들이 (원인으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들의 유들도 부수적으로,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는 폴뤼클레이토스가 다른 식으로는 조각가가 (원인으로) 진술되는데, 그 조각가에게 폴뤼클레이토스로 존재한다는 것이 부수한다는 점 때문이다. 부수하는 것을 포괄하는 것들도 (그럴 것이다), 이를 테면 만일 인간이 조각상의 원인이거나 혹은 일반적으로 동물이 그러하다면. 그런데 부수하는 것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이 어떤 것들보다 더 멀고 또 더 가까운데, 이를 테면 흰 사람과 교양있는 사람이 그 조각상의 원인으로 진술될 경우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고유한 방식으로 진술되는 것들도 부수적인 방식으로 진술되는 것들도 모두 일부는 가능적인 것들로서 진술되고 일부는 현실화디는 것들로 진술되는 바, 이를 테면 건축물이 건축되었음에 대해 건축가나 건축 중인 건축가가 진술된다. 어떤 것들에 대해 그 원인들이 원인들인 것들도 이야기된 것들로 유사하게 진술될 것이다, 이를 테면 여기 이 조각상이나 조각상 혹은 일반적으로 상(象)에 대해, 또한 여기 이 청동이나 청동 혹은 일반적으로 질료에 대해. 부수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그러하다. 나아가 바로 저 똑같은 것들도 복합적인 것들로 진술될 것이다, 이를 테면 폴뤼클레이토스도 아니고 조각가도 아니라, 조각가 폴뤼클레이토스로.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부 그 수로는 여섯이라 하더라도, 이중으로 진술되는 것들이다. 즉 개별적인 것으로서, 또는 유로서, 혹은 부수적인 것으로서, 또는 그 부수적인 것의 유로서, 혹은 그것들이 복합된 것들로서나 단적으로 진술되는 것들로서. 그런데 모든 것들은 현살화된 것들이거나 가능적이다. 그 차이는 이하의 정도이다. 한편으로는 현실화된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이 그것들이 어떤 것들의 원인들인 바의 것들과 동시에 존재하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데, 이를 테면 여기 이 건강하게 되는 중인 자에게 치료를 행하는 중인 자와 여기 이 건축되고 있는 것에게 건축을 행하고 있는 여기 이 사람이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 가능적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건축물과 건축가는 동시에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δεῖ δ' ἀεὶ [Bekker page 195b, line 22] τὸ αἴτιον ἑκάστου τὸ ἀκρότατον ζητεῖν, ὥσπερ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οἷον ἅνθρωπος οἰκοδομεῖ ὅτι οἰκοδόμος, ὁ δ' οἰκοδόμος κατὰ τὴν οἰκοδομικήν· τοῦτο τοίνυν πρότερον τὸ αἴτιον, καὶ οὕτως ἐπὶ πάντων)· ἔτι τὰ μὲν γένη τῶν γενῶν, τὰ δὲ καθ' ἕκαστον τῶν καθ' ἕκαστον (οἷον ἀνδριαντοποιὸς μὲν ἀνδριάντος, ὁδὶ δὲ τουδί)· καὶ τὰς μὲν δυνάμεις τῶν δυνατῶν, τὰ δ' ἐνεργοῦντα πρὸς τὰ ἐνεργούμενα. ὅσα μὲν οὖν τὰ αἴτια καὶ ὃν τρόπον αἴτια, ἔστω ἡμῖν διωρισμένα ἱκανῶς.
그런데 항상 각각의 최고 원인이 추적되어야 한다, 여타의 주제에 관련하여서도 그러하듯 (이를 테면 인간은 건축가이기 때문에 건축하지만, 그 건축가는 건축술에 따라 그리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더 앞선 원인이며,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이다). 나아가 유들의 유(-적 원인)들,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인 것들의 개별적인 것(원인)들이 (추적되어야 한다)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서는 조각가가, 여기 이 조각상에 대해서는 여기 이 조각가가). 또한 가능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가능적 원인들이, 반면 현실화된 것들에 대해서는 현실화된 것들이 (추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인들이 얼만큼이며 원인인 방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충분히 정의된 것으로 하자.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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