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 muß denn der Leser von der unumgänglichen Notwendigkeit einer solchen transzendentalen Deduktion, ehe er einen einzigen Schritt im Felde der reinen Vernunft getan hat, überzeugt werden; weil er sonst blind verfährt, und, nachdem er mannigfaltig umher geirrt hat, doch wieder zu der Unwissenheit zurückkehren muß, von der er ausgegangen war. Er muß aber auch die unvermeidliche Schwierigkeit zum voraus deutlich einsehen, damit er nicht über Dunkelheit klage, wo die Sache selbst tief eingehüllt ist, oder über die Wegräumung der Hindernisse zu früh verdrossen werde, weil es darauf ankommt, entweder alle Ansprüche zu Einsichten der reinen Vernunft, als das beliebteste Feld, nämlich dasjenige über die Grenzen aller möglichen Erfahrung hinaus, völlig aufzugeben, oder diese kritische Untersuchung zur Vollkommenheit zu bringen.
→ 그래서 참으로 독자는 그러한 초월론적 연역의 불가피한 필연성에 대해 그가 순수 이성의 분야에 독보적인 걸음을 내딛기 전에 납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는 맹목적으로 행동했고, 그리고, 그 후 그는 여러모로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그가 출발하였던 바로 그 무지로 되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사태 자체가 깊숙히 감추어진 암담함에 탄식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때 이르게 거슬리는 장애물의 제거에 대해 낙담하지 않음으로써, 우선 먼저 불가피한 난관을 분명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장 호평받는 분야로서, 즉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완전하게 내놓는 것으로서, 순수 이성의 통찰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나, 아니면 이러한 비판적 연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Wir haben oben an den Begriffen des Raumes und der Zeit mit leichter Mühe begreiflich machen können, wie diese als Erkenntnisse a priori sich gleichwohl auf Gegenstände notwendig beziehen müssen, und eine synthetische Erkenntnis derselben,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möglich macheten. Denn da nur vermittelst solcher reinen Formen der Sinnlichkeit uns ein Gegenstand erscheinen, d.i. ein Objekt der empirischen Anschauung sein kann, so sind Raum und Zeit reine Anschauungen, welche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als Erscheinungen a priori enthalten, und die Synthesis in denselben hat objektive Gültigkeit.
→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 개념들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선험적 인식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지 작은 수고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종합적 인식을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왜냐하면 단지 감성의 그러한 순수 형식들에 따라서만 우리에게 대상이 현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에 따라서만 대상이 감각적 직관의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순수 직관들이다. 그리고 종합은 그 직관들 안에서 객관적 정당성을 갖는다.



So muß denn der Leser von der unumgänglichen Notwendigkeit einer solchen transzendentalen Deduktion, ehe er einen einzigen Schritt im Felde der reinen Vernunft getan hat, überzeugt werden; weil er sonst blind verfährt, und, nachdem er mannigfaltig umher geirrt hat, doch wieder zu der Unwissenheit zurückkehren muß, von der er ausgegangen war.
그래서 참으로 독자는 그러한 초월론적 연역의 불가피한 필연성에 대해, 그가 순수 이성의 분야에 독보적인 걸음을 내딛기 전에, 납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는 맹목적으로 행동했고, 그리고, 그 후 그는 여러모로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무지로 되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에, 그 무지로부터 그가 출발하였던.
→ 그래서 참으로 독자는 그러한 초월론적 연역의 불가피한 필연성에 대해 그가 순수 이성의 분야에 독보적인 걸음을 내딛기 전에 납득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에는 맹목적으로 행동했고, 그리고, 그 후 그는 여러모로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그가 출발하였던 바로 그 무지로 되돌아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Er muß aber auch die unvermeidliche Schwierigkeit zum voraus deutlich einsehen, damit er nicht über Dunkelheit klage, wo die Sache selbst tief eingehüllt ist, oder über die Wegräumung der Hindernisse zu früh verdrossen werde, weil es darauf ankommt, entweder alle Ansprüche zu Einsichten der reinen Vernunft, als das beliebteste Feld, nämlich dasjenige über die Grenzen aller möglichen Erfahrung hinaus, völlig aufzugeben, oder diese kritische Untersuchung zur Vollkommenheit zu bringen.
그러나 그는 또한 불가피한 난관을 앞서서 분명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그가 암담함에 탄식하지 않음으로써, 거기에 그 사태 자체가 깊숙히 감추어진, 혹은 때 이르게 거슬리는 장애물의 제거에 대해, 왜냐하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순수 이성의 통찰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거나, 가장 호평받는 분야로서, 즉 이것이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완전하게 내놓는 것으로서, 아니면 이러한 비판적 연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 그러나 그는 또한 그 사태 자체가 깊숙히 감추어진 암담함에 탄식하지 않음으로써, 혹은 때 이르게 거슬리는 장애물의 제거에 대해 낙담하지 않음으로써, 우선 먼저 불가피한 난관을 분명하게 통찰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가장 호평받는 분야로서, 즉 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완전하게 내놓는 것으로서, 순수 이성의 통찰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나, 아니면 이러한 비판적 연구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Wir haben oben an den Begriffen des Raumes und der Zeit mit leichter Mühe begreiflich machen können, wie diese als Erkenntnisse a priori sich gleichwohl auf Gegenstände notwendig beziehen müssen, und eine synthetische Erkenntnis derselben,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möglich macheten.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 개념들을 작은 수고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선험적 인식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지, 그리고 종합적 인식을,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 개념들이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선험적 인식으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들에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야만 하는지 작은 수고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종합적 인식을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Denn da nur vermittelst solcher reinen Formen der Sinnlichkeit uns ein Gegenstand erscheinen, d.i. ein Objekt der empirischen Anschauung sein kann, so sind Raum und Zeit reine Anschauungen, welche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als Erscheinungen a priori enthalten, und die Synthesis in denselben hat objektive Gültigkeit.
왜냐하면 단지 감성의 그러한 순수 형식들에 따라서만 우리에게 대상이 현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감각적 직관의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순수 직관들이다, 현상들로서 대상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그리고 종합은 그 직관들 안에서 객관적 정당성을 갖는다.
→ 왜냐하면 단지 감성의 그러한 순수 형식들에 따라서만 우리에게 대상이 현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에 따라서만 대상이 감각적 직관의 객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시간은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순수 직관들이다. 그리고 종합은 그 직관들 안에서 객관적 정당성을 갖는다.

-蟲-
Gleichwohl geht die Geometrie ihren sichern Schritt durch lauter Erkenntnisse a priori, ohne daß sie sich, wegen der reinen und gesetzmäßigen Abkunft ihres Grundbegriffs vom Raume, von der Philosophie einen Beglaubigungsschein erbitten darf. Allein der Gebrauch des Begriffs geht in dieser Wissenschaft auch nur auf die äußere Sinnenwelt, von welcher der Raum die reine Form ihrer Anschauung ist, in welcher also alle geometrische Erkenntnis, weil sie sich auf Anschauung a priori gründet, unmittelbare Evidenz hat, und die Gegenstände durch die Erkenntnis selbst, a priori (der Form nach)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Dagegen fängt mit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die unumgängliche Bedürfnis an, nicht allein von ihnen selbst, sondern auch vom Raum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zu suchen, weil, da sie von Gegenständen nicht durch Prädikate der Anschauung und der Sinnlichkeit, sondern des reinen Denkens a priori redet, sie sich auf Gegenstände ohne alle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allgemein beziehen, und die, da sie nicht auf Erfahrung gegründet sind, auch in der Anschauung a priori kein Objekt vorzeigen können, worauf sie vor aller Erfahrung ihre Synthesis gründeten, und daher nicht allein wegen der objektiven Gültigkeit und Schranken ihres Gebrauchs Verdacht erregen, sondern auch jenen Begriff des Raumes zweideutig machen, dadurch, daß sie ihn über die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zu gebrauchen geneigt sind, weshalb auch oben von ihm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von nöten war.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은 기하학 스스로, 그 기하학의 공간에 대한 근본개념의 순수하고 정당한 출신으로 말미암아, 철학으로부터 증명서를 청구할 필요 없이 순수한 선험적 인식들을 통하여 그 학문의 안전한 길을 간다.→ 오로지  개념 사용만이 이러한 학문 안에서 또한 단지 그 외부 감각세계로 나아간다. 그러한 감각세계에 대해 공간이 그 감각세계의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고, 그 감각세계 안에서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인식이, 그 인식 자체가 선험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를 지니고, 대상들이 인식 자체를 통해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형식에 따라) 주어진다.→ 반면에 순수 지성개념들과 함께 오로지 그 개념들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간에 대한 초월론적 연역도 시도해야 하는 불가피한 필요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 그 순수 지성개념들이 직관과 감성의 술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 사유의 술어들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진술하므로, 그 순수 지성개념들 자체가 대상들에 감성의 모든 조건들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이 경험에 근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그로부터 그 개념들이 모든 경험에 대해 그 개념들의 종합을 근거짓는 어떠한 객체도 제시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오로지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과 사용의 한계들에만 말미암아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를 통하여 그 개념들이 공간에 감각적 직관의 조건들을 뛰어넘어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 때문에 또한 위에서 공간에 대해 초월론적 연역이 필요했던 공간의 이러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애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Gleichwohl geht die Geometrie ihren sichern Schritt durch lauter Erkenntnisse a priori, ohne daß sie sich, wegen der reinen und gesetzmäßigen Abkunft ihres Grundbegriffs vom Raume, von der Philosophie einen Beglaubigungsschein erbitten darf.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은 그 안전한 길을 순수한 선험적 인식들을 통하여 간다, 기하학 스스로, 그 기하학의 공간에 대한 근본개념의 순수하고 정당한 출신으로 말미암아, 철학으로부터 증명서를 청구할 필요 없이.
→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은 기하학 스스로, 그 기하학의 공간에 대한 근본개념의 순수하고 정당한 출신으로 말미암아, 철학으로부터 증명서를 청구할 필요 없이 순수한 선험적 인식들을 통하여 그 학문의 안전한 길을 간다.
Allein der Gebrauch des Begriffs geht in dieser Wissenschaft auch nur auf die äußere Sinnenwelt, von welcher der Raum die reine Form ihrer Anschauung ist, in welcher also alle geometrische Erkenntnis, weil sie sich auf Anschauung a priori gründet, unmittelbare Evidenz hat, und die Gegenstände durch die Erkenntnis selbst, a priori (der Form nach)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오로지 개념 사용만이 이러한 학문 안에서 또한 단지 그 외부 감각세계에 간다, 그러한 감각세계에 대해 공간이 그 감각세계의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고, 그 감각세계 안에서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인식이, 왜냐하면 그 인식 자체가 선험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를 지니고, 대상들이 인식 자체를 통해, 선험적으로 (형식에 따라) 직관 안에서, 주어진다.
→ 오로지  개념 사용만이 이러한 학문 안에서 또한 단지 그 외부 감각세계로 나아간다. 그러한 감각세계에 대해 공간이 그 감각세계의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고, 그 감각세계 안에서 그러므로 모든 기하학적 인식이, 그 인식 자체가 선험적으로 직관에 근거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거를 지니고, 대상들이 인식 자체를 통해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형식에 따라) 주어진다.
Dagegen fängt mit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die unumgängliche Bedürfnis an, nicht allein von ihnen selbst, sondern auch vom Raum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zu suchen, weil, da sie von Gegenständen nicht durch Prädikate der Anschauung und der Sinnlichkeit, sondern des reinen Denkens a priori redet, sie sich auf Gegenstände ohne alle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allgemein beziehen, und die, da sie nicht auf Erfahrung gegründet sind, auch in der Anschauung a priori kein Objekt vorzeigen können, worauf sie vor aller Erfahrung ihre Synthesis gründeten, und daher nicht allein wegen der objektiven Gültigkeit und Schranken ihres Gebrauchs Verdacht erregen, sondern auch jenen Begriff des Raumes zweideutig machen, dadurch, daß sie ihn über die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zu gebrauchen geneigt sind, weshalb auch oben von ihm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von Nöten war.
반면에 순수 지성개념들과 함께 불가피한 필요가 발생한다, 오로지 그 개념들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간에 대한 초월론적 연역도 시도해야 하는,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 그 순수 지성개념들이 직관과 감성의 술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 사유의 술어들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진술하므로, 그 순수 지성개념들 자체가 대상들에 감성의 모든 조건들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고, 그 개념들이, 그 개념들이 경험에 근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어떠한 객체도 제시할 수 없고, 그로부터 그 개념들이 모든 경험에 대해 그 개념들의 종합을 근거짓고, 그런 이유로 오로지 그것의 객관적 정당성과 사용의 한계들에만 말미암아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공간의 이러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애매하게 만들고, 그를 통하여, 그 개념들이 공간에 감각적 직관의 조건들에 대해 사용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 때문에 또한 위에서 공간에 대해 초월론적 연역이 필요했다.
→ 반면에 순수 지성개념들과 함께 오로지 그 개념들 자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공간에 대한 초월론적 연역도 시도해야 하는 불가피한 필요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 그 순수 지성개념들이 직관과 감성의 술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수 사유의 술어들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진술하므로, 그 순수 지성개념들 자체가 대상들에 감성의 모든 조건들 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이 경험에 근거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그로부터 그 개념들이 모든 경험에 대해 그 개념들의 종합을 근거짓는 어떠한 객체도 제시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오로지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과 사용의 한계들에만 말미암아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를 통하여 그 개념들이 공간에 감각적 직관의 조건들을 뛰어넘어 사용하는 경향을 보이며, 그 때문에 또한 위에서 공간에 대해 초월론적 연역이 필요했던 공간의 이러한 개념으로 말미암아 애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蟲-
Allein eine Deduktion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kommt dadurch niemals zu Stande, denn sie liegt ganz und gar nicht auf diesem Wege, weil in Ansehung ihres künftigen Gebrauchs, der von der Erfahrung gänzlich unabhängig sein soll, sie einen ganz andern Geburtsbrief, als den der Abstammung von Erfahrungen, müssen aufzuzeigen haben. Diese versuchte physiologische Ableitung, die eigentlich gar nicht Deduktion heißen kann, weil sie eine quaestionem facti betrifft, will ich daher die Erklärung des Besitzes einer reinen Erkenntnis nennen. Es ist also klar, daß von diesen allein es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und keinesweges eine empirische geben könne, und daß letztere, in Ansehung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nichts als eitele Versuche sind, womit sich nur derjenige beschäftigen kann, welcher die ganz eigentümliche Natur dieser Erkenntnisse nicht begriffen hat.
→ 오로지 선험적인 순수 개념들의 연역만이 그를 통하여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연역은 전혀 이러한 방식으로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해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는 그 방식의 장래의 사용의 고려 속에서, 그 경험은 경험으로부터의 혈통의 출생증명서와는 전혀 다른 출생증명서를 제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된 생리학적 추론, 그것은 원래 전혀 연역이라 부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추론이 사실의 연구들에 관계되기 때문이고, 나는 그런 이유로 순수 인식의 점유의 해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직 초월론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 연역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의 고려 속에서, 그로써 그저 이러한 인식들의 전적으로 독특한 본성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러한 사람만이 몰두할 수 있을 뿐인 공허한 시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Ob nun aber gleich die einzige Art einer möglichen Deduktion der reinen Erkenntnis a priori, nämlich die auf dem transzendentalen Wege eingeräumet wird, so erhellet dadurch doch eben nicht, daß sie so unumgänglich notwendig sei. Wir haben oben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vermittelst einer transzendentalen Deduktion zu ihren Quellen verfolgt, und ihre objektive Gültigkeit a priori erklärt und bestimmt.
→ 이제 그러나 비록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한 연역의 유일한 방식, 즉 초월론적 방법으로의 연역이 용인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이 그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리라는 것이 규명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고, 초월론적 연역에 따라서 그 개념들의 기원을 추적하였고,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해명하고 규정하였다.


Allein eine Deduktion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kommt dadurch niemals zu Stande, denn sie liegt ganz und gar nicht auf diesem Wege, weil in Ansehung ihres künftigen Gebrauchs, der von der Erfahrung gänzlich unabhängig sein soll, sie einen ganz andern Geburtsbrief, als den der Abstammung von Erfahrungen, müssen aufzuzeigen haben.
오로지 선험적인 순수 개념들의 연역만이 그를 통하여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연역은 전혀 이러한 방식으로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방식의 장래의 사용의 고려 속에서, 그 사용이 경험에 대해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경험이 전혀 다른 출생증명서를, 경험으로부터의 혈통의 출생증명서와, 제시해야 할 수밖에 없는.
→ 오로지 선험적인 순수 개념들의 연역만이 그를 통하여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연역은 전혀 이러한 방식으로 놓이지 않기 때문이다. 경험에 대해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하는 그 방식의 장래의 사용의 고려 속에서, 그 경험은 경험으로부터의 혈통의 출생증명서와는 전혀 다른 출생증명서를 제시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Diese versuchte physiologische Ableitung, die eigentlich gar nicht Deduktion heißen kann, weil sie eine quaestionem facti betrifft, will ich daher die Erklärung des Besitzes einer reinen Erkenntnis nennen.
이러한 시도된 생리학적 추론, 그것은 원래 전혀 연역이라 부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추론이 사실의 연구들에 관계되기 때문이고, 나는 그런 이유로 순수 인식의 점유의 해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 이러한 시도된 생리학적 추론, 그것은 원래 전혀 연역이라 부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추론이 사실의 연구들에 관계되기 때문이고, 나는 그런 이유로 순수 인식의 점유의 해명이라 부르고자 한다.
Es ist also klar, daß von diesen allein es eine transzendentale Deduktion und keinesweges eine empirische geben könne, und daß letztere, in Ansehung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nichts als eitele Versuche sind, womit sich nur derjenige beschäftigen kann, welcher die ganz eigentümliche Natur dieser Erkenntnisse nicht begriffen hat.
그러므로 분명하다,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 오로지 초월론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 연역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의 고려 속에서, 공허한 시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로써 그저 이러한 사람만이 몰두할 수 있을 뿐인, 이러한 인식들의 전적으로 독특한 본성을 파악할 수 없었던.
→ 그러므로 이러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직 초월론적 연역만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식으로든 경험적 연역은 있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의 고려 속에서, 그로써 그저 이러한 인식들의 전적으로 독특한 본성을 파악할 수 없었던 이러한 사람만이 몰두할 수 있을 뿐인 공허한 시도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Ob nun aber gleich die einzige Art einer möglichen Deduktion der reinen Erkenntnis a priori, nämlich die auf dem transzendentalen Wege eingeräumet wird, so erhellet dadurch doch eben nicht, daß sie so unumgänglich notwendig sei.
이제 그러나 비록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한 연역의 유일한 방식, 즉 초월론적 방법으로의 연역이 용인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명되지는 않는다, 그 방식이 그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리라는 것이.
→ 이제 그러나 비록 순수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한 연역의 유일한 방식, 즉 초월론적 방법으로의 연역이 용인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통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식이 그래서 불가피하게 필연적이리라는 것이 규명되지는 않는다.
Wir haben oben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vermittelst einer transzendentalen Deduktion zu ihren Quellen verfolgt, und ihre objektive Gültigkeit a priori erklärt und bestimmt.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고, 초월론적 연역에 따라서 그 개념들의 기원을 추적하였고,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해명하고 규정하였다.
→ 우리는 위에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가지고 있고, 초월론적 연역에 따라서 그 개념들의 기원을 추적하였고, 그 개념들의 객관적 정당성을 선험적으로 해명하고 규정하였다.

-蟲-
  Ich habe elf Söhne.
  나에게는 열 한 명의 아들들이 있다.

  Der erste ist äußerlich sehr unansehnlich, aber ernsthaft und klug; trotzdem schätze ich ihn, wiewohl ich ihn als Kind wie alle andern liebe, nicht sehr hoch ein. Sein Denken scheint mir zu einfach. Er sieht nicht rechts noch links und nicht in die Weite; in seinem kleinen Gedankenkreis läuft er immerfort rundum oder dreht sich vielmehr.
첫째는 겉보기엔 꽤나 볼품없지만 진지하고 똑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를, 비록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사랑하긴 하지만, 높이 쳐주진 않는다. 내게는 그 아이의 생각이 단순해 보인다. 그 아이는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폭넓지도 보지도 않는다. 녀석은 자신의 작은 생각의 범위 안에서 둘레를 맴돌거나 되려 되돌아 온다.

  Der zweite ist schön, schlank, wohlgebaut; es entzückt, ihn in Fechterstellung zu sehen. Auch er ist klug, aber überdies welterfahren; er hat viel gesehen, und deshalb scheint selbst die heimische Natur vertrauter mit ihm zu sprechen als mit den Daheimgebliebenen.
둘째는 멋지고, 날씬하고, 잘생겼다. 그 아이를 마주 보는 건 아주 매혹적인 일이다. 또한 그 아이는 영리할 뿐 아니라 세상 물정에 밝기까지 하다. 그 아이는 많은 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자신만만해 보인다 그와 고국의 자연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고국에 남아있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Doch ist gewiß dieser Vorzug nicht nur und nicht einmal wesentlich dem Reisen zu verdanken, er gehört vielmehr zu dem Unnachahmlichen dieses Kindes, das zum Beispiel von jedem anerkannt wird, der etwa seinen vielfach sich überschlagenden und doch geradezu wild beherrschten Kunstsprung ins Wasser ihm nachmachen wil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장점이 오직 여행 덕분인 것만이 아니고 본질적으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건 확실하고, 그 장점은 오히려 그 아이만의 독특한 특징에 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공중제비를 돌고 물속으로 정말로 강력하게 억제된 뛰어들기를 하는 그 녀석을 따라하고자 하는.
Bis zum Ende des Sprungbrettes reicht der Mut und die Lust, dort aber statt zu springen, setzt sich plötzlich der Nachahmer und hebt entschuldigend die Arme. - Und trotz dem allen (ich sollte doch eigentlich glücklich sein über ein solches Kind) ist mein Verhältnis zu ihm nicht ungetrübt.
용기와 의지가 도약대의 끝에까지 나아가지만, 거기에서 뛰어 오르는 대신에, 갑자기 그 모방자는 주저앉고 변명하려고 두 팔을 든다. - 그리고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내가 또한 그러한 아이에 대해 실로 행운이라 해야 할) 그 아이에 대한 나의 관계는 석연치 않다.
Sein linkes Auge ist ein wenig kleiner als das rechte und zwinkert viel; ein kleiner Fehler nur, gewiß, der sein Gesicht sogar noch verwegener macht als es sonst gewesen wäre, und niemand wird gegenüber der unnahbaren Abgeschlossenheit seines Wesens dieses kleinere zwinkernde Auge tadelnd bemerken. Ich, der Vater, tue es.
녀석의 왼쪽 눈은 약간 작다 오른쪽 눈보다 그리고 자주 깜빡인다; 작은 결점은 단지, 확실히, 녀석의 외모가 더욱이 저돌적이도록 만든다 그 외모가 평소에 그러했을 것보다, 그리고 그의 특성의 범접키 어려운 독특함에 비해 이러한 작고 깜빡이는 눈은 전혀 꾸짖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아버지인 나는 그런다.
Es ist natürlich nicht dieser körperliche Fehler, der mir weh tut, sondern eine ihm irgendwie entsprechende kleine Unregelmäßigkeit seines Geistes, irgendein in seinem Blut irrendes Gift, irgendeine Unfähigkeit, die mir allein sichtbare Anlage seines Lebens rund zu vollenden. Gerade dies macht ihn allerdings andererseits wieder zu meinem wahren Sohn, denn dieser sein Fehler ist gleichzeitig der Fehler unserer ganzen Familie und an diesem Sohn nur überdeutlich.
자연스러운 것은 이러한 육체적 결함이 아니라, 내가 안타까워하는,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정신의 작은 불일치에 상응하는
 
  Der dritte Sohn ist gleichfalls schön, aber es ist nicht die Schönheit, die mir gefällt. Es ist die Schönheit des Sängers: der geschwungene Mund; das träumerische Auge; der Kopf, der eine Draperie hinter sich benötigt, um zu wirken; die unmäßig sich wölbende Brust; die leicht auffahrenden und viel zu leicht sinkenden Hände; die Beine, die sich zieren, weil sie nicht tragen können. Und überdies: der Ton seiner Stimme ist nicht voll; trügt einen Augenblick; läßt den Kenner aufhorchen; veratmet aber kurz darauf - Trotzdem im allgemeinen alles verlockt, diesen Sohn zur Schau zu stellen, halte ich ihn doch am liebsten im Verborgenen; er selbst drängt sich nicht auf, aber nicht etwa deshalb, weil er seine Mängel kennt, sondern aus Unschuld. Auch fühlt er sich fremd in unserer Zeit; als gehöre er zwar zu meiner Familie, aber überdies noch zu einer andern, ihm für immer verlorenen, ist er oft unlustig und nichts kann ihn aufheitern.


  Mein vierter Sohn ist vielleicht der umgänglichste von allen. Ein wahres Kind seiner Zeit, ist er jedermann verständlich, er steht auf dem allen gemeinsamen Boden und jeder ist versucht, ihm zuzunicken. Vielleicht durch diese allgemeine Anerkennung gewinnt sein Wesen etwas Leichtes, seine Bewegungen etwas Freies, seine Urteile etwas Unbekümmertes. Manche seiner Aussprüche möchte man oft wiederholen, allerdings nur manche, denn in seiner Gesamtheit krankt er doch wieder an allzu großer Leichtigkeit. Er ist wie einer, der bewundernswert abspringt, schwalbengleich die Luft teilt, dann aber doch trostlos im öden Staube endet, ein Nichts. Solche Gedanken vergällen mir den Anblick dieses Kindes.


  Der fünfte Sohn ist lieb und gut; versprach viel weniger, als er hielt; war so unbedeutend, daß man sich förmlich in seiner Gegenwart allein fühlte; hat es aber doch zu einigem Ansehen gebracht. Fragte man mich, wie das geschehen ist, so könnte ich kaum antworten. Unschuld dringt vielleicht doch noch am leichtesten durch das Toben der Elemente in dieser Welt, und unschuldig ist er. Vielleicht allzu unschuldig. Freundlich zu jedermann. Vielleicht allzu freundlich. Ich gestehe: mir wird nicht wohl, wenn man ihn mir gegenüber lobt. Es heißt doch, sich das Loben etwas zu leicht zu machen, wenn man einen so offensichtlich Lobenswürdigen lobt, wie es mein Sohn ist.


  Mein sechster Sohn scheint, wenigstens auf den ersten Blick, der tiefsinnigste von allen. Ein Kopfhänger und doch ein Schwätzer. Deshalb kommt man ihm nicht leicht bei. Ist er am Unterliegen, so verfällt er in unbesiegbare Traurigkeit; erlangt er das Obergewicht, so wahrt er es durch Schwätzen. Doch spreche ich ihm eine gewisse selbstvergessene Leidenschaft nicht ab; bei hellem Tag kämpft er sich oft durch das Denken wie im Traum. Ohne krank zu sein - vielmehr hat er eine sehr gute Gesundheit - taumelt er manchmal, besonders in der Dämmerung, braucht aber keine Hilfe, fällt nicht. Vielleicht hat an dieser Erscheinung seine körperliche Entwicklung schuld, er ist viel zu groß für sein Alter. Das macht ihn unschön im Ganzen, trotz auffallend schöner Einzelheiten, zum Beispiel der Hände und Füße. Unschön ist übrigens auch seine Stirn; sowohl in der Haut als in der Knochenbildung irgendwie verschrumpft.


  Der siebente Sohn gehört mir vielleicht mehr als alle andern. Die Welt versteht ihn nicht zu würdigen; seine besondere Art von Witz versteht sie nicht. Ich überschätze ihn nicht; ich weiß, er ist geringfügig genug; hätte die Welt keinen anderen Fehler als den, daß sie ihn nicht zu würdigen weiß, sie wäre noch immer makellos. Aber innerhalb der Familie wollte ich diesen Sohn nicht missen. Sowohl Unruhe bringt er, als auch Ehrfurcht vor der Überlieferung, und beides fügt er, wenigstens für mein Gefühl, zu einem unanfechtbaren Ganzen. Mit diesem Ganzen weiß er allerdings selbst am wenigsten etwas anzufangen; das Rad der Zukunft wird er nicht ins Rollen bringen, aber diese seine Anlage ist so aufmunternd, so hoffnungsreich; ich wollte, er hätte Kinder und diese wieder Kinder. Leider scheint sich dieser Wunsch nicht erfüllen zu wollen. In einer mir zwar begreiflichen, aber ebenso unerwünschten Selbstzufriedenheit, die allerdings in großartigem Gegensatz zum Urteil seiner Umgebung steht, treibt er sich allein umher, kümmert sich nicht um Mädchen und wird trotzdem niemals seine gute Laune verlieren.


  Mein achter Sohn ist mein Schmerzenskind, und ich weiß eigentlich keinen Grund dafür. Er sieht mich fremd an, und ich fühle mich doch väterlich eng mit ihm verbunden. Die Zeit hat vieles gut gemacht; früher aber befiel mich manchmal ein Zittern, wenn ich nur an ihn dachte. Er geht seinen eigenen Weg; hat alle Verbindungen mit mir abgebrochen; und wird gewiß mit seinem harten Schädel, seinem kleinen athletischen Körper - nur die Beine hatte er als Junge recht schwach, aber das mag sich inzwischen schon ausgeglichen haben - überall durchkommen, wo es ihm beliebt. Öfters hatte ich Lust, ihn zurückzurufen, ihn zu fragen, wie es eigentlich um ihn steht, warum er sich vom Vater so abschließt und was er im Grunde beabsichtigt, aber nun ist er so weit und so viel Zeit ist schon vergangen, nun mag es so bleiben wie es ist. Ich höre, daß er als der einzige meiner Söhne einen Vollbart trägt; schön ist das bei einem so kleinen Mann natürlich nicht.


  Mein neunter Sohn ist sehr elegant und hat den für Frauen bestimmten süßen Blick. So süß, daß er bei Gelegenheit sogar mich verführen kann, der ich doch weiß, daß förmlich ein nasser Schwamm genügt, um allen diesen überirdischen Glanz wegzuwischen. Das Besondere an diesem Jungen aber ist, daß er gar nicht auf Verführung ausgeht; ihm würde es genügen, sein Leben lang auf dem Kanapee zu liegen und seinen Blick an die Zimmerdecke zu verschwenden oder noch viel lieber ihn unter den Augenlidern ruhen zu lassen. Ist er in dieser von ihm bevorzugten Lage, dann spricht er gern und nicht übel; gedrängt und anschaulich; aber doch nur in engen Grenzen; geht er über sie hinaus, was sich bei ihrer Enge nicht vermeiden läßt, wird sein Reden ganz leer. Man würde ihm abwinken, wenn man Hoffnung hätte, daß dieser mit Schlaf gefüllte Blick es bemerken könnte.


  Mein zehnter Sohn gilt als unaufrichtiger Charakter. Ich will diesen Fehler nicht ganz in Abrede stellen, nicht ganz bestätigen. Sicher ist, daß, wer ihn in der weit über sein Alter hinausgehenden Feierlichkeit herankommen sieht, im immer festgeschlossenen Gehrock, im alten, aber übersorgfältig geputzten schwarzen Hut, mit dem unbewegten Gesicht, dem etwas vorragenden Kinn, den schwer über die Augen sich wölbenden Lidern, den manchmal an den Mund geführten zwei Fingern - wer ihn so sieht, denkt: das ist ein grenzenloser Heuchler. Aber, nun höre man ihn reden! Verständig; mit Bedacht; kurz angebunden; mit boshafter Lebendigkeit Fragen durchkreuzend; in erstaunlicher, selbstverständlicher und froher Übereinstimmung mit dem Weltganzen; eine Übereinstimmung, die notwendigerweise den Hals strafft und den Körper erheben läßt. Viele, die sich sehr klug dünken und die sich, aus diesem Grunde wie sie meinten, von seinem Äußern abgestoßen fühlten, hat er durch sein Wort stark angezogen. Nun gibt es aber wieder Leute, die sein Äußeres gleichgültig läßt, denen aber sein Wort heuchlerisch erscheint. Ich, als Vater, will hier nicht entscheiden, doch muß ich eingestehen, daß die letzteren Beurteiler jedenfalls beachtenswerter sind als die ersteren.


  Mein elfter Sohn ist zart, wohl der schwächste unter meinen Söhnen; aber täuschend in seiner Schwäche; er kann nämlich zu Zeiten kräftig und bestimmt sein, doch ist allerdings selbst dann die Schwäche irgendwie grundlegend. Es ist aber keine beschämende Schwäche, sondem etwas, das nur auf diesem unsern Erdboden als Schwäche erscheint. Ist nicht zum Beispiel auch Flugbereitschaft Schwäche, da sie doch Schwanken und Unbestimmtheit und Flattern ist? Etwas Derartiges zeigt mein Sohn. Den Vater freuen natürlich solche Eigenschaften nicht; sie gehen ja offenbar auf Zerstörung der Familie aus. Manchmal blickt er mich an, als wollte er mir sagen: ›Ich werde dich mitnehmen, Vater.‹ Dann denke ich: ›Du wärst der Letzte, dem ich mich vertraue.‹ Und sein Blick scheint wieder zu sagen: ›Mag ich also wenigstens der Letzte sein.‹


  Das sind die elf Söhne.



-작성중-
Wir haben jetzt schon zweierlei Begriffe von ganz verschiedener Art, die doch darin mit einander übereinkommen, daß sie beiderseits völlig a priori sich auf Gegenstände beziehen, nämlich,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als Formen der Sinnlichkeit, und die Kategorien, als Begriffe des Verstandes. Von ihnen eine empirische Deduktion versuchen wollen, würde ganz vergebliche Arbeit sein; weil eben darin das Unterscheidende ihrer Natur liegt, daß sie sich auf ihre Gegenstände beziehen, ohne etwas zu deren Vorstellung aus der Erfahrung entlehnt zu haben. Wenn also eine Deduktion derselben nötig ist, so wird sie jederzeit transzendental sein müssen.
→ 우리는 이제 이미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을 가진다. 그 개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이 쌍방에 완전히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상호간에 부합한다. 즉, 그 개념들은 감성의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 그리고 지성의 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그 개념들에 대해 경험적 연역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으로부터 그것들의 표상에 대한 어떤 것을 차용해 옴이 없이 그 개념들이 그것들의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그 점에 그것의 특수한 본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연역이 필연적일 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초월론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Indessen kann man von diesen Begriffen, wie von allem Erkenntnis, wo nicht das Principium ihrer Möglichkeit, doch die Gelegenheitsursachen ihrer Erzeugung in der Erfahrung aufsuchen, wo alsdenn die Eindrücke der Sinne den ersten Anlaß geben, die ganze Erkenntniskraft in Ansehung ihrer zu eröffnen, und Erfahrung zu Stande zu bringen, die zwei sehr ungleichartige Elemente enthält, nämlich eine Materie zur Erkenntnis aus den Sinnen, und eine gewisse Form, sie zu ordnen, aus dem innern Quell des reinen Anschauens und Denkens, die, bei Gelegenheit der ersteren, zuerst in Ausübung gebracht werden, und Begriffe hervorbringen. Ein solches Nachspüren der ersten Bestrebungen unserer Erkenntniskraft, um von einzelnen Wahrnehmungen zu allgemeinen Begriffen zu steigen, hat ohne Zweifel seinen großen Nutzen, und man hat es dem berühmten Locke zu verdanken, daß er dazu zuerst den Weg eröffnet hat.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모든 인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능성의 원칙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의 산출의 계기원인들을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경험에서 그리하여 감각의 인상들은 전체 인식능력이 그와 함께 시작하는, 그리고 경험을 성립시키는 첫번째 기회를 부여한다. 그 경험은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를 포함한다. 즉 감각으로부터 인식을 위한 질료를 포함하고, 순수 직관과 사유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질서지우는 확실한 형식을 포함한다. 그 직관과 사유가 첫번째 계기와 함께 처음으로 실행에 사용되고 개념들을 산출해낸다.→ 개별적인 지각들로부터 보편적인 개념들로 올라가기 위한 우리의 인식능력의 첫번째 기획들의 그러한 탐색은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의 커다란 이익을 지니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다는 것을 저 유명한 로크에게 빚진다.


Wir haben jetzt schon zweierlei Begriffe von ganz verschiedener Art, die doch darin mit einander übereinkommen, daß sie beiderseits völlig a priori sich auf Gegenstände beziehen, nämlich,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als Formen der Sinnlichkeit, und die Kategorien, als Begriffe des Verstandes.
우리는 이제 이미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을 가진다, 그 개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상호간에 부합하는, 그 개념들이 쌍방에 완전히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적용되는, 즉, 그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감성의 형식으로서, 그리고 범주들을, 지성의 개념들로서.
→ 우리는 이제 이미 전적으로 상이한 방식에 대한 두 가지 개념들을 가진다. 그 개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이 쌍방에 완전히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상호간에 부합한다. 즉, 그 개념들은 감성의 형식으로서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 그리고 지성의 개념들로서 범주들이다.
Von ihnen eine empirische Deduktion versuchen wollen, würde ganz vergebliche Arbeit sein; weil eben darin das Unterscheidende ihrer Natur liegt, daß sie sich auf ihre Gegenstände beziehen, ohne etwas zu deren Vorstellung aus der Erfahrung entlehnt zu haben.
그 개념들에 대해 경험적 연역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만 그 안에서 그것의 본성에 구별하는 것 , 그 개념들이 그것들의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경험으로부터 그것들의 표상에 대한 어떤 것을 차용해 옴이 없이.
→ 그 개념들에 대해 경험적 연역을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경험으로부터 그것들의 표상에 대한 어떤 것을 차용해 옴이 없이 그 개념들이 그것들의 대상들에 적용된다는 그 점에 그것의 특수한 본성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Wenn also eine Deduktion derselben nötig ist, so wird sie jederzeit transzendental sein müssen.
그러므로 그것의 연역이 필연적일 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초월론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 그러므로 그것의 연역이 필연적일 때,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초월론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Indessen kann man von diesen Begriffen, wie von allem Erkenntnis, wo nicht das Principium ihrer Möglichkeit, doch die Gelegenheitsursachen ihrer Erzeugung in der Erfahrung aufsuchen, wo alsdenn die Eindrücke der Sinne den ersten Anlaß geben, die ganze Erkenntniskraft in Ansehung ihrer zu eröffnen, und Erfahrung zu Stande zu bringen, die zwei sehr ungleichartige Elemente enthält, nämlich eine Materie zur Erkenntnis aus den Sinnen, und eine gewisse Form, sie zu ordnen, aus dem innern Quell des reinen Anschauens und Denkens, die, bei Gelegenheit der ersteren, zuerst in Ausübung gebracht werden, und Begriffe hervorbringen.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모든 인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능성의 원칙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의 산출의 계기원인들을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서 그리하여 감각의 인상들은 첫번째 기회를 부여한다, 전체 인식능력이 그와 함께 시작하는, 그리고 경험을 성립시키는, 그것은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를 포함한다, 즉 감각으로부터 인식을 위한 질료를, 그리고 확실한 형식을, 그 형식이 질서지우는, 순수 직관과 사유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그것이, 전자의 계기에 있어서, 처음으로 실행에 사용되는, 그리고 개념들을 산출해내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서, 모든 인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능성의 원칙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의 산출의 계기원인들을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경험에서 그리하여 감각의 인상들은 전체 인식능력이 그와 함께 시작하는, 그리고 경험을 성립시키는 첫번째 기회를 부여한다. 그 경험은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를 포함한다. 즉 감각으로부터 인식을 위한 질료를 포함하고, 순수 직관과 사유의 내적 원천으로부터 질서지우는 확실한 형식을 포함한다. 그 직관과 사유가 첫번째 계기와 함께 처음으로 실행에 사용되고 개념들을 산출해낸다.
Ein solches Nachspüren der ersten Bestrebungen unserer Erkenntniskraft, um von einzelnen Wahrnehmungen zu allgemeinen Begriffen zu steigen, hat ohne Zweifel seinen großen Nutzen, und man hat es dem berühmten Locke zu verdanken, daß er dazu zuerst den Weg eröffnet hat.
우리의 인식능력의 첫번째 기획들의 그러한 탐색은, 개별적인 지각들로부터 보편적인 개념들로 올라가기 위하여, 그것의 커다란 이익을 의심 없이 지니고, 사람들은 그것을 저 유명한 로크에게 빚진다, 그가 그에 대해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던.
→ 개별적인 지각들로부터 보편적인 개념들로 올라가기 위한 우리의 인식능력의 첫번째 기획들의 그러한 탐색은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의 커다란 이익을 지니고, 사람들은 처음으로 그 길을 열었다는 것을 저 유명한 로크에게 빚진다.

-蟲-
  A digression You will need to learn new ways to use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You are probably familiar with Mathematical Induction as a tool for verifying formulas. We will need to use Mathematical Induction for other purposes. For example, we will need to know whether certain kinds of functions from N to N exist. There may be one function for each n, or maybe our statement will be that there is NO such function, for ANY n. We will then construct a set S := {n ∈ N : a function fn : N → N exists such that “thus and so” is true about fn}.

  Then we will follow the “same” pattern as in school induction:

  Step 0: Showthat 0 is in S. The way we show that 0 is in S will depend on what the criterion is for membership in S. But the objective of Step 0 is always the same: make sure 0 ∈ S.

  Step 1: Let someone choose an arbitrary element n of N, then showthat the statement “n ∈ S ⇒ s(n) ∈ S” is true. This is the objective of Step 1, then: showthat (∀n ∈ N)(n ∈ S ⇒ s(n) ∈ S) is true. Since this is a statement with a universal quantifier, we have to be able to show that every one of the statements n ∈ S ⇒ s(n) ∈ S is true. We knowb y nowthat there is one easy way for this statement to be true: in case n ∈ S is false! We usually don’t mention this possibility; we just assume that n ∈ S is true. Then we try to use the truth of “n ∈ S” to deduce the truth of “s(n) ∈ S.” But we can’t always work that way! Sometimes we have to use the contrapositive of “n ∈ S ⇒ s(n) ∈ S, ” namely “s(n) not ∈ S ⇒ n not ∈ S.” That is, we assume that “s(n) not ∈ S” is true. Then we try to use the truth of “s(n) not ∈ S” to deduce the truth of “n not ∈ S.” This second approach is logically equivalent to the first way, but it is not psychologically the same! Step 1 is the “heart” of an induction proof. But Step 0 is essential!

  Step 3: We apply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by noting that S = N. This step is one we do automatically; it’s like a coda in a piece of music. . . end of this digression

  (04) Example: Let’s prove that s(N) = P. We need to recall that P = N\{0}. We want to show that every n in P is s(m) for some m in N. By Postulate (01C) we know that (∀n ∈ N)(s(n) ≠ 0) is true. Thus s(N) ⊆ N\{0} = P. To showequalit y, it remains to showthat P ⊆ s(N). We do already knowof one element of P that is in s(N), namely 1 = s(0). Thus 1 ∈ {n ∈ P : there exists m ∈ N such that n = s(m)} =: E. We will use induction for P instead of N. We already did Step 0 (or ought it be Step 1, for P?)! We need to showthat, for all n in P, “n ∈ E ⇒ s(n) ∈ E” is true. Well, “n ∈ E ⇒ s(n) ∈ E” is true if “n ∈ E” is false. Since “n ∈ E” has to be true or false, we have to see what happens if “n ∈ E” is true. So, we next suppose that “n ∈ E” is true. Now, “n ∈ E” means that there exists m ∈ N such that n = s(m). But then, s(n) = s(s(m)), by the Substitution Rule. The criterion for membership of s(n) in E is that there exists m ∈ N such that s(n) = s(m). This is confusing at first, because we just saw that n = s(m) because n ∈ E. The important thing to learn here is that variables in quantifiers are “dummy” variables; we can use any convenient letter to denote them! In the present context, we just use “s(m)” as our convenient “letter!” Thus, s(n) ∈ E. Then, by Mathematical Induction (set version, for P), E = P. In other words, every n in P is the successor of some m in N, as desired.

  If you have time, I recommend that you read (listed as [3] in the References at the end of this Note) Foundations of Analysis, by Edmund Landau, Chelsea Publishing Co., NewY ork, 1951. Despite the author’s request, do read the preface for the teacher. Read the preface for the student too, and the book too, a little bit at a time. What Landau does is to carefully develop the properties of the positive integers from the axioms (the version for P). Here are some exercises, adapted from theorems in that book. In these exercises, do not use your prior knowledge, just use the axioms.

(05) Exercise: Showthat, for all n in N, and for all m in N, if n ≠ m then s(n) ≠ s(m).
(06) Problem: Showthat, for all n in N, s(n) ≠ n. You will need induction!
(07) Exercise: Showthat, for all n in N, if n ≠ 0 then there exists exactly one m in N such that n = s(m). You may need induction!
(08) Notation: If n ∈ N and n ≠ 0 we let n−1 denote the unique m in N (provided by Exercise (07)) such that n = s(m). That is, n = s(n − 1). An important point: n − 1 does not exist for all n in N; n − 1 exists only for n 0. This is not subtraction! The meaning of n − 1 is “predecessor of n.”

-작성중-
Es gibt indessen auch usurpierte Begriffe, wie etwa Glück, Schicksal, die zwar mit fast allgemeiner Nachsicht herumlaufen, aber doch bisweilen durch die Frage: quid juris, in Ansrpuch genommen werden, da man alsdenn wegen der Deduktion derselben in nicht geringe Verlegenheit gerät, indem man keinen deutlichen Rechtsgrund weder aus der Erfahrung, noch der Vernunft anführen kann, dadurch die Befugnis ihres Gebrauchs deutlich würde.
→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떤 운수, 운명과 같은 찬탈된 개념들이 있다. 그 개념들은 더욱이 거의 보편적인 검열을 피해 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검열을 요구받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바로 그 개념들의 연역으로 말미암아 경미한 곤경에조차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떠한 명백한 권리근거도 경험으로부터든 이성으로부터든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를 통하여 그 개념의 사용의 권한은 명백해질 것이다.
Unter den mancherlei Begriffen aber, die das sehr wermischte Gewebe der menschlichen Erkenntnis ausmachen, gibt es einige, die auch zum reinen Gebrauch a priori (völlig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bestimmt sind, und dieser ihre Befugnis bedarf jederzeit einer Deduktion; weil zu der Rechtmäßigkeit eines solchen Gebrauchs Beweise aus der Erfahrung nicht hinreichend sind, man aber doch wissen muß, wie diese Begriffe sich auf Objekte beziehen können, die sie doch aus keiner Erfahrung hernehmen. Ich nenne daher die Erklärung der Art, wie sich Begriffe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können,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selben, und unterscheide sie von der empirischen Deduktion, welche die Art anzeigt, wie ein Begriff durch Erfahrung und Reflexion über dieselbe erworben worden, und daher nicht die Rechtmäßigkeit, sondern das Factum betrifft, wodurch der Besitz entsprungen.
→ 그러나 인간 인식의 매우 혼잡한 작업을 형성하는 여러가지 개념들 아래에서, 또한 그것들이 순수한 선험적 사용으로 (모든 경험들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으로) 규정되는, 그리고 이러한 그 개념들의 권한이 언제나 연역을 필요로 하는 몇몇의 개념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용의 정당성에 대해 경험으로부터의 방식은 충분치 않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어떻게 어떠한 경험으로부터도 대상을 취하지 않는 이러한 개념들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어떻게 선험적 개념 자체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방식의 해명을, 그 개념들의 초월론적 연역이라고 명명하며, 그 연역을, 어떻게 한 개념이 경험과 반성을 통해 이와 같은 대상들에 대해 취득되는지 그 방식을 가리키는,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하여 점유가 일어나는 행위에 관계하는 감각경험적 연역과 구분한다.


Es gibt indessen auch usurpierte Begriffe, wie etwa Glück, Schicksal, die zwar mit fast allgemeiner Nachsicht herumlaufen, aber doch bisweilen durch die Frage: quid juris, in Ansrpuch genommen werden, da man alsdenn wegen der Deduktion derselben in nicht geringe Verlegenheit gerät, indem man keinen deutlichen Rechtsgrund weder aus der Erfahrung, noch der Vernunft anführen kann, dadurch die Befugnis ihres Gebrauchs deutlich würde.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찬탈된 개념들이 있다, 어떤 운수, 운명과 같은, 그 개념들은 더욱이 거의 보편적인 검열을 피해 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요구받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바로 그 개념들의 연역으로 말미암아 경미한 곤경에조차 빠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떠한 명백한 권리근거도 경험으로부터든 이성으로부터든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그를 통하여 그 개념의 사용의 권한은 명백해질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어떤 운수, 운명과 같은 찬탈된 개념들이 있다. 그 개념들은 더욱이 거의 보편적인 검열을 피해 다닌다. 하지만 그럼에도 때때로 무엇이 정의인가 하는 물음을 통해 검열을 요구받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바로 그 개념들의 연역으로 말미암아 경미한 곤경에조차 빠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떠한 명백한 권리근거도 경험으로부터든 이성으로부터든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그를 통하여 그 개념의 사용의 권한은 명백해질 것이다.

Unter den mancherlei Begriffen aber, die das sehr vermischte Gewebe der menschlichen Erkenntnis ausmachen, gibt es einige, die auch zum reinen Gebrauch a priori (völlig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bestimmt sind, und dieser ihre Befugnis bedarf jederzeit einer Deduktion; weil zu der Rechtmäßigkeit eines solchen Gebrauchs Beweise aus der Erfahrung nicht hinreichend sind, man aber doch wissen muß, wie diese Begriffe sich auf Objekte beziehen können, die sie doch aus keiner Erfahrung hernehmen.
그러나 여러가지 개념들 아래에서, 그 개념들이 인간 인식의 매우 혼잡한 작업을 형성하는, 몇몇의 개념들이 있다, 또한 그것들이 순수한 선험적 사용으로 (모든 경험들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인) 규정되는, 그리고 이러한 그 개념들의 권한이 언제나 연역을 필요로 하는; 왜냐하면 그러한 사용의 정당성에 대해 경험으로부터의 방식은 충분치 않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러한 개념들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개념들이 대상을 어떠한 경험으로부터도 가져오지 않는.
→ 그러나 인간 인식의 매우 혼잡한 작업을 형성하는 여러가지 개념들 아래에서, 또한 그것들이 순수한 선험적 사용으로 (모든 경험들에 대해 완전히 독립적으로) 규정되는, 그리고 이러한 그 개념들의 권한이 언제나 연역을 필요로 하는 몇몇의 개념들이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용의 정당성에 대해 경험으로부터의 방식은 충분치 않고,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어떻게 어떠한 경험으로부터도 대상을 취하지 않는 이러한 개념들이 대상에 적용될 수 있는지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Ich nenne daher die Erklärung der Art, wie sich Begriffe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können,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derselben, und unterscheide sie von der empirischen Deduktion, welche die Art anzeigt, wie ein Begriff durch Erfahrung und Reflexion über dieselbe erworben worden, und daher nicht die Rechtmäßigkeit, sondern das Factum betrifft, wodurch der Besitz entsprungen.
그런 이유에서 나는 그 방식의 해명을, 어떻게 선험적 개념 자체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개념들의 초월론적 연역이라고 명명하며, 그 연역을 감각경험적 연역과 구분한다, 그러한 연역이 그 방식을 가리키는, 어떻게 한 개념이 경험과 반성을 통해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 취득되는지,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행위에 관계하는, 그를 통하여 점유가 발생하는.
→ 그런 이유에서 나는, 어떻게 선험적 개념 자체가 대상들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 방식의 해명을, 그 개념들의 초월론적 연역이라고 명명하며, 그 연역을, 어떻게 한 개념이 경험과 반성을 통해 이와 같은 대상들에 대해 취득되는지 그 방식을 가리키는,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정당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통하여 점유가 일어나는 행위에 관계하는 감각경험적 연역과 구분한다.

-蟲-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is our principal source of “mathematical energy!”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는 "수학적 능력"에 있어서 우리의 원칙적 원천이다!
  We usually don’t make axioms in a vacuum - there is usually some thought behind them. But that thought can be hidden! So here is an “explanation” of the axioms. First, let’s imagine that we go into the “back room,” where we don’t have to prove anything - just work on ideas! We “know” the integers exist, positive, zero and negative.
   우리는 보통 진공에서 공리들을 만들지 않는다 - 일반적으로 그것들 이면에 어떤 생각이 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감추어질 수 있다! 그래서 공리들에 대한 '설명'이 있다. 첫째로, 위가 "무대 뒤"로 들어간다고 상상해 보자, 거기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증명해야 하지 않다 - 단지 계속 생각하기만 하자! 우리는 정수의 존재, 양수, 0 그리고 음수를 "안다."
  The natural numbers are going to be our model of the non-negative integers. The successor function is “really” the function whose value at n, n ≥ 0, is n + 1 : s(n) = n + 1. Different non-negative integers “should” have different successors. This is what “s” is one–one” means. This is an assumption about the successor function! Saying 0 is not the successor of any non-negative integer means that 0
 n + 1 for any non-negative integer n. The postulate about sets of non-negative integers is not something we usually take for granted. But the idea makes sense: if a set S contains 0, and contains the successor of each of its elements, then it also contains 1, and 2, and 3, and so on. So it ought to contain every non–negative integer, namely S = N.
 자연수는 우리의 비-음수인 정수의 원형이 될 것이다. 후속자 함수는 "실제로" n이 0보다 크거나 같을 때 n 값이
n + 1 : s(n) = n + 1인 함수이다. 상이한 비-음수 정수는 상이한 후속자들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s"가 "일대일 대응"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후속자 함수에 대한 가정이다! 0이 어떠한 비-음수 정수의 후속자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비-음수 정수 n에 대해서도
0 ≠ n + 1임을 의미한다
. 비-음수 정수의 집합들에 대한 그 공준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당연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말이 된다: 만일 한 집합 S가 0을 포함하고, 그 집합의 원소들 각각의 후속자를 포함한다면, 그것은 또한 1, 2, 3 등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그 집합은 모든 비-음수 정수 각각을 포함해야 한다, 즉 S=N이다.

  In your experience, perhaps N starts with 1, not 0. There is an equivalent version of these axioms for that version of N. We simply replace each “0” in the first version with “1, ” and call the newset P, for positive integers. We will want to use induction “starting with 1.” But, instead of making another set of axioms, we can give the name 1 to s(0), and then we can deduce the proposed axioms, from the Peano Postulates, so they become a Theorem: a set of true mathematical statements whose truth is logically deduced from axioms, instead of being assumed.
 당신의 경험에서, 아마도 N은 0이 아니라 1로 시작할 것이다. N의 그 판에 대한 이러한 공리들에 상응하는 판이 있다. 우리는 간단하게 첫번째 판에서 각각의 "0"을 "1"로 대체하고, 새집합 P라고 부른다, 양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로 시작하는" 귀납법을 사용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공리들의 또 다른 집합을 만드는 대신, 우리는 s(0)에 1이란 이름을 줄 수 있고, 그 다음으로 우리는 제시된 공리들을 연역할 수 있다, 페아노의 공준들로부터, 그래서 그것들은 정리가 된다: 참인 수학적 진술들의 한 집합, 그 진술의 참이 논리적으로 공리들로부터 연역된, 가정되는 대신에.
  (03) Theorem and Definition and Notation: There is a non-empty set P, whose elements we will call positive integers, a one-to-one function s : P → P, that we will call the successor function, and an element 1 ∈ P such that 1 is not in the image, s(P), of s. In addition, for all subsets E of P, if E contains 1, and s(E) ⊆ E, then E = P.
  (03) 정리와 정의 그리고 기수법: 비-공집합 P가 있다. P의 원소들을 우리는 양의 정수들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일대일 대응 함수 s : P → P가 있다, 우리가 후속자 함수라고 부를. 그리고 1이 s(P)라는 s의 관념 속에 있는 1이 아닌 한 원소
1 ∈ P이 있다. 덧붙여서, P의 모든 부분집합들에 대해서, 만일 E가 1을 포함하고 s(E)
 ⊆ E 라면, E = P이다.
  The idea of the proof is to remove 0 from N to construct
P: P := N
 {0}
. Then we have to check that each of the postulates can be re–interpreted in the newset. The Induction property is deduced by temporarily putting 0 back, then taking it out after applying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for N. We will not carry out the details of this proof unless you ask.
  그 증명에 대한 생각은
P: P := N
 {0}를 구성하기 위해 N으로부터 0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집합에서 재-해석될 수 있는 그 공준들의 각각을 점검해야 한다. 그 귀납법 특성은 주기적으로 0을 되돌려 놓고, 다음으로 그 0을 N에 대한 수학적 귀납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 뒤로 끄집어 냄으로써 연역된다.
  You have probably seen Mathematical Induction before, but it looked a little different then.
  당신은 아마도 이전에 수학적 귀납법을 봤을 테지만, 그것을 조금 다르게 봤을 것이다.
  Example (unofficial!): Use Mathematical Induction (school version) to show that for all positive integers n,
1 + 2 + 3 + · · · + n = n(n + 1)/2. In this Example, we will use your prior knowledge about P.
  예시 (비공식!): 수학적 귀납법을 사용하라 모든 양의 정수 n에 대해서
1 + 2 + 3 + · · · + n = n(n + 1)/2 임을 보이기 위해. 이 예시에서, 우리는 P에 대한 여러분의 사전지식을 사용할 것이다.
  The procedure is this:
1. Let P(n) denote the statement to be proved: P(n) must have n as its only free variable.
2. Verify that P(1) is true.
3. Show that, by assuming P(n) is true, you can deduce that P(n + 1) must be true.
  절차는 이러하다:
1. P(n)이 다음과 같이 증명될 진술을 표시하도록 하라: P(n)은 반드시 그것의 자유 변수로서만 n을 가져야 한다.
2. P(1)이 참임을 입증하라.
3. P(n)이 참임을 가정함으로써, 당신이 P(n+1)이 반드시 참이어야만 함을 연역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라.
  That is, prove the quantified mathematical statement “For all n in N, P(n) ⇒ P(n + 1).”
  Then Mathematical Induction assures us that P(n) is true for all n.
  즉, 양화된 수학적 진술 "N에서 모든 n에 대해 P(n)
 ⇒ P(n + 1)"을 증명하라.
  Let’s do it, for review.
  검코를 위해 해 보자.
  Step 1. Let P(n) denote the statement “1 + 2 + 3 + · · · + n = n(n + 1)/2.”
 
Step 2. P(1) is the statement
“1 = 1(1 + 1)/2.” This is true, by a very quick computation.
 
Step 3. Assume that P(n) is true for some n.
Then P(n + 1) is the statement “1 + 2 + 3 + · · · + (n + 1) =
(n+1)(n+2)/2.” We have 1+2+3+· · ·+(n+1) = 1+2+3+· · ·+n+(n+1) = (1+2+3+· · ·+n)+(n+1) = n(n+1)/2 +2(n+1/2) = (n+1)(n+2)/2, by a few basic algebraic manipulations. The equality of the first and last expressions in
this chain of equalities is P(n + 1), shown to be true under the assumption that P(n) is true. The truth of P(n) for all n is now established, by Mathematical Induction.
   
1단계. P(n)이 "
1 + 2 + 3 + · · · + n = n(n + 1)/2"라는 진술을 표시하도록 하라.
   2단계. P(1)은 "
1 = 1(1 + 1)/2"라는 진술이다. 이것은 참이다, 매우 즉각적인 계산에 의해.
   3단계. P(n)이 어떤 n에 대해 참이라고 전제하라. 그래서 P(n + 1) 은 "
1 + 2 + 3 + · · · + (n + 1) =
(n+1)(n+2)/2"이라는 진술이다. 그래서 우리는 약간의 기초적인 대수적 조작들을 통해
1+2+3+· · ·+(n+1) = 1+2+3+· · ·+n+(n+1) = (1+2+3+· · ·+n)+(n+1) = n(n+1)/2 +2(n+1/2) = (n+1)(n+2)/2 를 가진다, P(n)이 참이라는 저제 하에 참이라 보여지는. 모든 n에 대한 P(n)의 참은 이제 확정된다,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서.
 
  Remark: Note that, were P(n) false, the statement P(n) ⇒ P(n + 1) would be true vacuously. Thus we can
eliminate that possibility, and concentrate on what happens if P(n) is true.
   주의: 다음을 주의하라. P(n)이 거짓이라면,
P(n) ⇒ P(n + 1)이라는 진술은 허황된 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고, P(n)이 참이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집중할 수 있다.
  The way we will often “do” Mathematical Induction differs only a little from this (and you may certainly use the old way in your papers in this class). The set–theoretic version of the argument for this example:
Let E := {n ∈ P : 1 + 2 + 3 + · · · + n = n(n+1)2}. We show 1 ∈ E (just as we just did), and that n ∈ E implies n + 1 ∈ E (just as we just did). Then E = P by Mathematical Induction.
  우리가 자주 '할' 수학적 귀납법의 방식은 이것(그리고 당신이 확실히 이 수업에서 당신의 paper들에서 사용했을지 모르는 그 오래된 방식)과 약간만 다르다. 이 예시에 대한 논증의 집합론적 판:
E := {n ∈ P : 1 + 2 + 3 + · · · + n = n(n+1)2}라고 하자. 우리는
1 ∈ E 임을 보이고(바로 우리가 방금 했던 것처럼),
n ∈ E 이
n + 1 ∈ E을 시사함을 보인다(바로 우리가 방금 했듯이). 그래서 수학적 귀납법에 의해 E = P이다.

-蟲-
출처 : www.math.umn.edu/~jodeit/course/Peano3.pdf

  THE NATURAL NUMBERS
  자연수
 
  We are ready for the official introduction of the natural numbers. I ask you to suspend belief in the truth of the things you already know about the natural numbers. I insist you keep every bit of your knowledge - just stop taking things for granted. “The Natural Numbers” is now a name only, to be used in the following list of mathematical statements, each of which you are asked to regard as true.
  우리는 자연수에 대한 공식적인 입문(개론)의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당신에게 당신이 자연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진실성에 대한 믿음을 보류할 것을 요청한다. 나는 당신이 당신 지식의 모든 낱낱을 붙들어 둘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 그것들을 당연시 하는 것은 확실히 중단하자. "자연수"는 이제 하나의 명칭일 뿐이다. 그 명칭은 아래의 수학적 진술들의 목록에서 사용될 것이며, 당신에게는 그 진술들의 각각을 참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
  This is where the course really starts. What came before was “preliminary.” We still have some preliminary stuff to do. But the natural numbers will literally be the foundation on which are built the ordinary integers, the rational numbers, and then the real and the complex numbers, which all form the foundations for Calculus.
  그 교육 과정은 실제로 여기서 시작한다. 앞서 나왔던 것은 "예비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아직 해야할 몇몇 예비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연수는 문자 그대로 기초가 될 것이다. 그 기초 위에 정수, 유리수, 그리고 실수와 복소수가 세워진다. 그 모든 수들은 계산을 위한 기초를 이루는 것들이다.

(01) The Peano Postulates (or Axioms)
(01) 페아노 공준 (혹은 공리)
  We assume that the four following mathematical statements are true.
  우리는 다음 네 가지 수학적 진술들이 참이라고 가정한다.
(01A) There exists a non-empty set N, whose elements we will call natural numbers.
(01A) 공집합이 아닌 하나의 집합 N이 있다. 우리는 그 집합의 원소들을 자연수라 부를 것이다.
(01B) There exists a one-to-one function s : N → N, that we will call the successor function.
(01B) 하나의 일대일 대응 함수 s : N → N이 있다. 우리는 그 함수를 후속자 함수라고 부를 것이다.
(01C) There exists an element 0 ∈ N such that 0 is not in the image, s(N), of s.
(01C) N에 포함되는(0 ∈ N) 하나의 원소 0이 있다. 그 같은 0은 s집합의 상인 s(N) 내에 없다.
(01D) For all subsets S of N, if S contains 0, and s(S) ⊆ S, then S = N.
(01D) N의 모든 부분집합 S에 대해서, 만일 S가 0을 포함하고, s(S)가 S에 동치이거나 포함된다면(s(S) ⊆ S), S는 N이다.
  Here is a restatement of these axioms, in a less dense form:
  여기 이 공리들에 대한 조금은 덜 난해한 형식의 재진술이 있다:
  (02-1) There exists a non-empty set N, called the set of natural numbers, and a function s on N, called the successor function, whose value, s(n), at any n in N, is called the successor of n, such that (02-2) Different elements of N have different successors (s is one-to-one), (02-3) There is an element, 0, of N that is not the successor of any element of N (0 is not in the image of s), (02-4) Every subset S of N that contains 0 and also contains the successor of each element of S must be equal to N (if S contains 0, and s(S) ⊆ S, then S = N).
  (02-1) 공집합이 아닌 집합 N이 있다. N은 자연수의 집합으로 부른다. 그리고 N에 대해 함수 s가 있다. 함수 s는 후속자 함수라 부른다. 함수 s의 값 s(n)은, N 내에서 어떠한 n에서든, n의 후속자라고 부른다. (02-2) N의 그러한 서로 다른 원소들은 서로 다른 후속자들을 가진다 (s는 일대일 대응이다). (02-3) N의 원소 0이 있다. 0은 N의 어떠한 원소에 대해서도 후속자가 아니다 (0은 s의 상 내에 없다). (02-4) 0을 포함하고 또한 S의 각 원소들에 대한 후속자를 포함하는 모든 부분집합 S는 반드시 N에 동치여야만 한다 (만일 S가 0을 포함하고, s(S) ⊆ S라면, S = N).

  According to the Encyclopedia Britannica, 15th edition, the five Peano postulates are:

  브리트니 백과 15번째 편집본에 따르면, 다섯 가지 페아노 공준들이 있다:
1. 0 is a number.
1. 0은 수이다.
2. The successor of any number is also a number.
2. 어떤 수의 후속자든 또한 수이다.
3. No two distinct numbers have the same successor.
3. 그 어떤 별개의 두 수도 동일한 후속자를 가지지 않는다.
4. 0 is not the successor of any number.
4. 0은 그 어떤 수의 후속자도 아니다.
5. If any property is possessed by 0 and also by the successor of any number having that property, then all numbers have that property.
5. 만일 어떤 특성이든 0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 특성을 지닌 어떤 수의 후속자에 의해 소유된다면, 모든 수는 그 특성을 지닌다.
  Postulate 5, (01D) and (02-4) are certainly different. But all three versions amount to the same thing mathematically, when expressed in terms of set–selector notation. For, “property” has to refer to a mathematical statement P(n) about elements n of N. Thus, {n ∈ N : P(n) is true } is the set of all elements of N that possess the property P(n). If the “property” satisfies the conditions of postulate 5, then 0 ∈ {n ∈ N : P(n) is true }, and s({n ∈ N : P(n) is true }) ⊆ {n ∈ N : P(n) is true }, so {n ∈ N : P(n) is true } = N. On the other hand, let S be a subset of N. We define the “property (of n)” to be that n belongs to S. That is, P(n) is the statement “n ∈ S.” This “property” is then covered by postulate 5.
  공준 5, (01D)와 (02-4)는 확실하게 다르다. 그러나 세 가지 설명들 모두 수학적으로 동일한 것에 이르게 된다, 집합-선택자 기수법이란 용어로 표현될 때. 왜냐하면, "특성"은 N의 원소들 n에 대한
수학적 진술 P(n)를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 "특성"이 공준 5의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0 ∈ {n ∈ N : P(n) 가 참 }, 그리고 s({n ∈ N : P(n) 가 참 }) ⊆ {n ∈ N : P(n) 가 참 }, 그래서 {n ∈ N : P(n) 가 참 } = N 이다. 다른 한편, S를 N의 한 부분집합으로 두자. 우리는 그 "(n의) 특성"을 n이 S에 속한다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P(n)은 "
n ∈ S"라는 진술이다. 이 "특성"은 그래서 공준 5에 의해 포섭된다.
  Postulate 5 is about sets of natural numbers. You probably did not bring this postulate with you to this course, at least not explicitly. And yet, it will seem natural to you shortly, I hope. Here are the three versions of Postulate 5, collected in one place:
  공준 5는 자연수 집합들에 대한 것이다. 당신은 아마도 이 공준을 갖고 이 과정을 수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명백하게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아직, 그것이 당신에게 곧 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내가 희망하기로는. 여기 공준 5의 세 판이 있다, 한 자리에 모은:
  For all subsets P of N, if P contains the element 0, and s(P) ⊆ P, then P = N; Every subset of N that contains 0 and also contains the successor of each of its elements must be equal to N; If any property is possessed by 0 and also by the successor of any number having that property, then all numbers
have that property.
  N의 모든 부분집합 P에 대해서, 만일 P가 원소 0을 포함한다면, 그리고
s(P) ⊆ P라면, P = N이다; 0을 포함하고또한 그 원소들의 각각에 대한 후속자를 포함하는 N의 모든 각각의 부분집합은 N과 동치여야만 한다; 만일 어떤 특성이든 0에 의해 그리고 또한 그 특성을 지니는 어떤 수든지 그에 대한 후속자에 의해 소유된다면, 모든 수는 그 특성을 지닌다.
  This Postulate is called The Principle of Mathematical Induction.
  이 공준은 수학적 귀납법의 원리라 부른다.

-蟲-
Der Analytik der Begriffe
Zweites Hauptstück
개념의 분석
제 2 부문
Von d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순수 지성개념들의 연역에 대하여
Erster Abschnitt
제 1장
§ 13. Von den Prinzipien einer transzendentalen Deduktion überhaupt
§ 13. 초월론적 연역 일반의 원칙들에 대하여

Die Rechtslehrer, wenn sie von Befugnissen und Anmaßungen reden, unterscheiden in einem Rechtshandel die Frage über das, was Rechtens ist, (quid juris) von der, die die Tatsache angeht, (quid facti) und indem sie von beiden Beweis fordern, so nennen sie den erstern, der die Befugnis, oder auch den Rechtsanspruch dartun soll, die Deduktion. Wir bedienen uns einer Menge empirischer Begriffe ohne jemandes Widerrede, und halten uns auch ohne Deduktion berechtigt, ihnen einen Sinn und eingebildete Bedeutung zuzueignen, weil wir jederzeit die Erfahrung bei der Hand haben, ihre objektive Realität zu beweisen.
→ 법학자들은, 그들이 권한들과 월권에 대해서 말할 때, 소송에 있어서 정당한 것(ius, iuris. 법에 속하는 것)에 대한 물음을 사실과 관계있는(사건에 속하는 것) 물음과 구별하고, 그들이 양자에 대해 증명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권한을, 혹은 권리주장을 내놓아야 하는 전자를 연역이라고 명명한다.→ 우리는 상당수의 경험적 개념들을 누구의 이의도 없이 사용하고, 또한 그 개념들에 의미와 상상된 의의를 바치는 정당화된 연역 없이 견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경험을 손안에 지니기 때문이다.

Die Rechtslehrer, wenn sie von Befugnissen und Anmaßungen reden, unterscheiden in einem Rechtshandel die Frage über das, was Rechtens ist, (quid juris) von der, die die Tatsache angeht, (quid facti) und indem sie von beiden Beweis fordern, so nennen sie den erstern, der die Befugnis, oder auch den Rechtsanspruch dartun soll, die Deduktion.
법학자들은, 그들이 권한들과 월권에 대해서 말할 때, 소송에서의 그것에 대한 물음을 구별한다, 정당한 것, (ius, iuris. 법에 속하는 것) 그것과, 사실과 관계있는 물음, (사건에 속하는 것) 그리고 그들이 양자에 대해 증명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전자를 이름한다, 그것이 권한을, 혹은 권리주장을 내놓아야 하는, 연역이라고.
→ 법학자들은, 그들이 권한들과 월권에 대해서 말할 때, 소송에 있어서 정당한 것(ius, iuris. 법에 속하는 것)에 대한 물음을 사실과 관계있는(사건에 속하는 것) 물음과 구별하고, 그들이 양자에 대해 증명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은 권한을, 혹은 권리주장을 내놓아야 하는 전자를 연역이라고 명명한다.
Wir bedienen uns einer Menge empirischer Begriffe ohne jemandes Widerrede, und halten uns auch ohne Deduktion berechtigt, ihnen einen Sinn und eingebildete Bedeutung zuzueignen, weil wir jederzeit die Erfahrung bei der Hand haben, ihre objektive Realität zu beweisen.
우리는 상당수의 경험적 개념들을 누구의 이의도 없이 사용하고, 견지한다 또한 정당화된 연역 없이, 그 개념들에 의미와 상상된 의의를 바치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경험을 손안에 지니기 때문이다,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 우리는 상당수의 경험적 개념들을 누구의 이의도 없이 사용하고, 또한 그 개념들에 의미와 상상된 의의를 바치는 정당화된 연역 없이 견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재성을 입증하는 경험을 손안에 지니기 때문이다.

-蟲-
Woraus erhellet, daß diese logische Kriterien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überhaupt die drei Kategorien der Größe, in denen die Einheit in der Erzeugung des Quantum durchgängig gleichartig angenommen werden muß, hier nur in Absicht auf die Verknüpfung auch ungleichartiger Erkenntnisstücke in einem Bewußtsein durch die Qualität eines Erkenntnisses als Prinzips verwandeln. So ist das Kriterium der Möglichkeit eines Begriffs (nicht des Objekts derselben) die Definition, in der die Einheit des Begriffs, die Wahrheit alles dessen, was zunächst aus ihm abgeleitet werden mag,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sen, was aus ihm gezogen worden, zur Herstellung des ganzen Begriffs das Erforderliche desselben ausmacht; oder so ist auch das Kriterium einer Hypothese die Verständlichkeit des angenommenen Erklärungsgrundes oder dessen Einheit (ohne Hülfshypothese) die Wahrheit (Übereinstimmung unter sich selbst und mit der Erfahrung) der daraus abzuleitenden Folgen, und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 Erklärungsgrundes zu ihnen, die auf nichts mehr noch weniger zurückweisen, als in der Hypothese angenommen worden, und das, was a priori synthetisch gesammenstimmen. - Also wird durch die Begriffe von Einheit, Wahrheit und Vollkommenheit die transzendentale Tafel der Kategorien gar nicht, indem das Verhältnis dieser Begriffe auf Objekte gänzlich bei Seite gesetzt wird, das Verfahren mit ihnen unter allgemeine logische Regeln der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sich selbst gebracht.
→ 그로부터 인식 일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표지들이 그 안에서 양의 산출에 있어서 통일성이 일반적으로 동종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크기의 세 가지 범주들을, 여기에서 단지 또한 이종적인 인식의 부분들의 결합에의 의도로서만 의식 안에서 원칙으로서 인식의 질을 통해 전환시킨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래서 개념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표지는 정의이다. 그 정의 안에서 개념의 통일이, 맨 먼저 그 개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올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의 진리를, 궁극적으로 그 개념으로부터 증명된 것의 완전성을, 전체 개념의 재건을 위해 그 개념의 필수적인 것을 형성한다; 혹은 그래서 또한 가설의 표지는 수용된 설명근거의 이해가능성이거나 그 근거의 통일성 (보조가설 없이) 그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의 진리 (그 자체 아래에서의 일치와 경험과의 일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결론들에 대한 설명근거의 완전성이다, 가설 안에서 수용될 때 그 귀결들은 많든 적든 그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고, 선험적 종합적으로 생각되었던 그것을, 후험적 분석적으로 다시금 산출하고 거기에 일치시킨다.→ - 그러므로 통일성, 진리 그리고 완전성에 대한 개념들을 통하여 범주들의 초월론적 도표는 전혀, 마치 그 도표가 약간 불충분하기라도 한 듯, 보완되지는 않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개념들의 객체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제쳐 놓여짐으로써, 그 개념들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 인식 그 자체의 일치에 대한 일반 논리학적 규칙 아래에서 사용될 뿐이다.


Woraus erhellet, daß diese logische Kriterien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überhaupt die drei Kategorien der Größe, in denen die Einheit in der Erzeugung des Quantum durchgängig gleichartig angenommen werden muß, hier nur in Absicht auf die Verknüpfung auch ungleichartiger Erkenntnisstücke in einem Bewußtsein durch die Qualität eines Erkenntnisses als Prinzips verwandeln.
그로부터 밝혀진다, 인식 일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표지들이 크기의 세 가지 범주들을, 그 범주들 안에서 양의 산출에 있어서 통일성이 일반적으로 동종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여기에서 단지 또한 이종적인 인식의 부분들의 결합에의 의도로서만 의식 안에서 인식의 질을 통해 원칙으로서 전환시킨다는 것이.
→ 그로부터 인식 일반의 가능성에 대한 이러한 논리적 표지들이 그 안에서 양의 산출에 있어서 통일성이 일반적으로 동종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크기의 세 가지 범주들을, 여기에서 단지 또한 이종적인 인식의 부분들의 결합에의 의도로서만 의식 안에서 원칙으로서 인식의 질을 통해 전환시킨다는 것이 밝혀진다.
So ist das Kriterium der Möglichkeit eines Begriffs (nicht des Objekts derselben) die Definition, in der die Einheit des Begriffs, die Wahrheit alles dessen, was zunächst aus ihm abgeleitet werden mag,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sen, was aus ihm gezogen worden, zur Herstellung des ganzen Begriffs das Erforderliche desselben ausmacht; oder so ist auch das Kriterium einer Hypothese die Verständlichkeit des angenommenen Erklärungsgrundes oder dessen Einheit (ohne Hülfshypothese) die Wahrheit (Übereinstimmung unter sich selbst und mit der Erfahrung) der daraus abzuleiten den Folgen, und endlich die Vollständigkeit des Erklärungsgrundes zu ihnen, die auf nichts mehr noch weniger zurückweisen, als in der Hypothese angenommen worden, und das, was a priori synthetisch gedacht war, a posteriori analytisch wieder liefern und dazu zusammenstimmen.
그래서 개념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표지는 정의이다, 그 정의 안에서 개념의 통일이, 그 모든 것의 진리를, 맨 먼저 그 개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올지도 모르는, 궁극적으로 그것의 완전성을, 그 개념으로부터 증명된, 전체 개념의 재건을 위해 그 개념의 필수적인 것을 형성하는; 혹은 그래서 또한 가설의 표지는 수용된 해명의 전제의 이해가능성이거나 그 전제의 통일성이 (보조가설 없이) 그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의 진리를 (그 자체 아래에서의 일치와 경험과의 일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해명의 전제의 완전성을 그것들에, 그것들이 많든 적든 그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는, 가설 안에서 수용될 때, 그리고 그것이, 선험적 종합적으로 생각되었던, 후험적 분석적으로 다시금 산출하고 거기에 일치시킨다.
→ 그래서 개념의 (대상 자체가 아니라) 가능성의 표지는 정의이다. 그 정의 안에서 개념의 통일이, 맨 먼저 그 개념으로부터 이끌려 나올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의 진리를, 궁극적으로 그 개념으로부터 증명된 것의 완전성을, 전체 개념의 재건을 위해 그 개념의 필수적인 것을 형성한다; 혹은 그래서 또한 가설의 표지는 수용된 설명근거의 이해가능성이거나 그 근거의 통일성 (보조가설 없이) 그로부터 도출한 결론들의 진리 (그 자체 아래에서의 일치와 경험과의 일치),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결론들에 대한 설명근거의 완전성이다, 가설 안에서 수용될 때 그 귀결들은 많든 적든 그 어떤 것도 인용하지 않고, 선험적 종합적으로 생각되었던 그것을, 후험적 분석적으로 다시금 산출하고 거기에 일치시킨다.
- Also wird durch die Begriffe von Einheit, Wahrheit und Vollkommenheit die transzendentale Tafel der Kategorien gar nicht, als wäre sie etwa mangelhaft, ergänzt, sondern nur, indem das Verhältnis dieser Begriffe auf Objekte gänzlich bei Seite gesetzt wird, das Verfahren mit ihnen unter allgemeine logische Regeln der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sich selbst gebracht.
- 그러므로 통일성, 진리 그리고 완전성에 대한 개념들을 통하여 범주들의 초월론적 도표는 전혀, 마치 그 도표가 약간 불충분하기라도 한 듯, 보완되지는 않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개념들의 객체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제쳐 놓여짐으로써, 그 개념들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 인식 그 자체의 일치에 대한 일반 논리학적 규칙 아래에서 사용될 뿐이다.
→ - 그러므로 통일성, 진리 그리고 완전성에 대한 개념들을 통하여 범주들의 초월론적 도표는 전혀, 마치 그 도표가 약간 불충분하기라도 한 듯, 보완되지는 않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개념들의 객체와의 관계가 전적으로 제쳐 놓여짐으로써, 그 개념들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 인식 그 자체의 일치에 대한 일반 논리학적 규칙 아래에서 사용될 뿐이다.

-蟲-
Diese vermeintlich transzendentale Prädikate der Dinge sind nichts anders als logische Erfordernisse und Kriterien aller Erkenntnis der Dinge überhaupt, und legen ihr die Kategorien der Quantität, nämlich der Einheit, Vielheit und Allheit, zum Grunde, nur daß sie diese, welche eigentlich material, als zur Möglichkeit der Dinge selbst gehörig, genommen werden müßten, in der Tat nur in formaler Bedeutung als zur logischen Forderung in Ansehung jeder Erkenntnis gehörig brauchten, und doch diese Kriterien des Denkens unbehutsamer Weise zu Eigenschaften der Dinge an sich selbst machten. In jedem Erkenntnisse eines Objektes ist nämlich Einheit des Begriffes, welche man qualitative Einheit nennen kann, so fern darunter nur die Einheit der Zusammenfassung des Mannigfaltigen der Erkenntnisse gedacht wird, wie etwa die Einheit des Thema in einem Schauspiel, einer Rede, einer Fabel. Zweitens Wahrheit in Ansehung der Folgen. Je mehr wahre Folgen aus einem gegebenen Begriffe, desto mehr Kennzeichen seiner objektiven Realität. Dieses könnte man die qualitative Vielheit der Merkmale, die zu einem Begriffe als einem gemeinschaftlichen Grunde gehören, (nicht in ihm als Größe gedacht werden,) nennen. Endlich drittens Vollkommenheit, die darin besteht, daß umgekehrt diese Vielheit zusammen auf die Einheit des Begriffes zurückführt, und zu diesem und keinem anderen völlig zusammenstimmt, welches man die qualitative Vollständigkeit (Totalität) nennen kann.
→ 이러한 사물의 소위 초월론적 술어들은 사물 일반의 모든 인식의 논리적 조건들과 표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 술어들은 그 조건들에 양의 범주들을, 즉 하나, 다수와 모두를 기초에 둔다. 오로지 본래 질료적인 사물 자체의 가능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해져야만 하는 이러한 범주들을, 실제로 형식적 조건에 있어서 각 인식의 고려 속에서 논리적 요구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이러한 사유의 표지들을 경솔한 방식으로 물자체의 성질들로 만들었다.→ 각각의 인식에 있어서 객체는, 연극에 있어서 주제, 대사, 줄거리의 어떤 통일과 같이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인식의 잡다들의 총괄의 통일이 생각되는 한에서, 사람들이 질적인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즉 개념들의 통일이다.→ 두번째 것은 결론들과의 관련 속에서 참이다.→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참인 결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의 표지들도 더욱 더 많다.→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그 개념에서 크기로서 생각되지 않고) 공통된 토대로서 개념에 속하는 표지들의 질적 다수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세번째 것은 반대되는 이러한 다수성이 동시에 개념의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것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 질적 완전성(총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안에 존립하는 완전함이다.


Diese vermeintlich transzendentale Prädikate der Dinge sind nichts anders als logische Erfordernisse und Kriterien aller Erkenntnis der Dinge überhaupt, und legen ihr die Kategorien der Quantität, nämlich der Einheit, Vielheit und Allheit, zum Grunde, nur daß sie diese, welche eigentlich material, als zur Möglichkeit der Dinge selbst gehörig, genommen werden müßten, in der Tat nur in formaler Bedeutung als zur logischen Forderung in Ansehung jeder Erkenntnis gehörig brauchten, und doch diese Kriterien des Denkens unbehutsamer Weise zu Eigenschaften der Dinge an sich selbst machten.
이러한 사물의 소위 초월론적 술어들은 사물 일반의 모든 인식의 논리적 조건들과 표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그 조건들에 양의 범주들을, 즉 하나, 다수와 모두를, 기초에 둔다. 오로지 그 범주들이 이러한 것들인, 본래 질료적인, 사물 자체의 가능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해져야만 하는, 실제로 형식적 조건에 있어서 각 인식의 고려 속에서 논리적 요구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하며, 또한 이러한 사유의 표지들이 경솔한 방식으로 물자체의 성질들로 형성하는.
→ 이러한 사물의 소위 초월론적 술어들은 사물 일반의 모든 인식의 논리적 조건들과 표지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 술어들은 그 조건들에 양의 범주들을, 즉 하나, 다수와 모두를 기초에 둔다. 오로지 본래 질료적인 사물 자체의 가능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해져야만 하는 이러한 범주들을, 실제로 형식적 조건에 있어서 각 인식의 고려 속에서 논리적 요구에 속하는 것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이러한 사유의 표지들을 경솔한 방식으로 물자체의 성질들로 만들었다.
In jedem Erkenntnisse eines Objektes ist nämlich Einheit des Begriffes, welche man qualitative Einheit nennen kann, so fern darunter nur die Einheit der Zusammenfassung des Mannigfaltigen der Erkenntnisse gedacht wird, wie etwa die Einheit des Thema in einem Schauspiel, einer Rede, einer Fabel.
각각의 인식에 있어서 객체는 다시 말해 개념들의 통일이다, 사람들이 질적인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인식의 잡다들의 총괄의 통일이 생각되는 한에서, 연극에 있어서 주제, 대사, 줄거리의 어떤 통일과 같이.
→ 각각의 인식에 있어서 객체는, 연극에 있어서 주제, 대사, 줄거리의 어떤 통일과 같이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인식의 잡다들의 총괄의 통일이 생각되는 한에서, 사람들이 질적인 통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즉 개념들의 통일이다.
Zweitens Wahrheit in Ansehung der Folgen.
두번째 것은 결론들과의 관련 속에서 참이다.
→ 두번째 것은 결론들과의 관련 속에서 참이다.
Je mehr wahre Folgen aus einem gegebenen Begriffe, desto mehr Kennzeichen seiner objektiven Realität.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참인 결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의 표지들도 더욱 더 많다.
→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참인 결론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개념의 객관적 실재성의 표지들도 더욱 더 많다.
Dieses könnte man die qualitative Vielheit der Merkmale, die zu einem Begriffe als einem gemeinschaftlichen Grunde gehören, (nicht in ihm als Größe gedacht werden,) nennen.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표지들의 질적 다수성이라고, 그 다수성이 공통된 토대로서 개념에 속하는, (그 개념에서 크기로서 생각되지 않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러한 것을 사람들은 (그 개념에서 크기로서 생각되지 않고) 공통된 토대로서 개념에 속하는 표지들의 질적 다수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Endlich drittens Vollkommenheit, die darin besteht, daß umgekehrt diese Vielheit zusammen auf die Einheit des Begriffes zurückführt, und zu diesem und keinem anderen völlig zusammenstimmt, welches man die qualitative Vollständigkeit (Totalität) nennen kann.
끝으로 세번째 것은 완전함이다, 그 안에 존립하는, 반대되는 이러한 다수성이 동시에 개념의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것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 질적 완전성(총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 끝으로 세번째 것은 반대되는 이러한 다수성이 동시에 개념의 통일성으로 환원하는, 그리고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것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들이 질적 완전성(총체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안에 존립하는 완전함이다.

-蟲-
Aber jeder, der Platon auch nur wenig kennt, weiß, daß bei Sokrates die Frage in völlig neuer Bedeutung gestellt wird. Er zeigt, daß es nicht nur äußere Kraftentfaltung ist, die den Menschen zum >Guten< macht, sondern daß seine Bestheit darauf beruht, daß er Kräfte in sich verwirklicht, die wir Tugenden nennen; Einzel-Bestheiten, die in den ethischen Bereich gehören, wie die Besonnenheit, Tapferkeit, Gerechtigkeit usw. Das Gut-Leben wird gleichsam mit einer Hundertachtziggrad-Drehung in eine andere Richtung gekehrt und meint nun die Verwirklichung des Höchsten im Menschen, die nur durch die Gerechtigkeit möglich ist, und auch die Eudaimonie gewinnt ganz anderen Charakter. Also aus dem gleichen Bereich kommend wie die Sophisten, vollzieht nun Sokrates diese Drehung, indem die Dinge ganz neuen Wertcharakter bekommen. Aber es ist doch der gleiche Bereich der Menschendinge, den auch Cicero in jenem Wort deutlich abhebt gegen den der Vorsokratiker, die nach ganz anderen Dingen gefragt hatten.

Wir können noch von einer anderen Ecke her diese Wendung verdeutlichen, und zwar von dem eigentlichen Anfang her, damit ein Raum frei bleibt für das, was dann wirklich die Vorsokratiker bedeuten. Da wollen wir zunächst von dem Begriff des Philosophierens allgemein sprechen. Es ist nötig, daß wir, die wir uns mit diesen Dingen beschäftigen, einmal versuchen, solche Worte, die zu unserem geistigen Hausgebrauch gehören, da wir nun einmal an ihrem Wurzelbereich stehen, auch von dorther neu zu fassen. Zunächst ist es auffällig, daß der Begriff für die Vorsokratiker noch nicht existiert. Er tritt erst ein bei jener Tätigkeit, die eben wirklich schon Philosophie ist, auch in unserem Sinne, und das ist bei Platon. Von da ab hat er solche Relevanz, erscheint als so völlig entsprechend dem, was man tut, daß er nun fest mit dieser Tätigkeit verbunden bleibt bis auf den heutigen Tag. Und wenn man auch öfter versucht hat, ihn durch andere Begriffe zu ersetzen, wie >Lebensweisheit< u.a., so ist das nie durchgedrungen und hat den Begriff der Philosophie nicht verdrängen können aus den europäischen Sprachen und wohl auch darüber hinaus.

Man wird sich auch diesen Begriff, philosophia und verbal philosophein, vorstellen müssen als einen Begriff der Alltagssprache. Die früheste Stelle ist Herodot Ⅰ30, wo von Solon gesagt wird, er sei, nachdem er sein Gesetzeswerk in Athen abgeschlossen hatte, auf Reisen gegangen >um der theoria willen< - nicht unsere >Theorie<, sondern eigentlich >heilige Schau<: die Weise, wie ein Festgesandter etwa den Olympischen Spielen oder sonst einer kultischen Veranstaltung beiwohnte.



Aber jeder, der Platon auch nur wenig kennt, weiß, daß bei Sokrates die Frage in völlig neuer Bedeutung gestellt wird.


Er zeigt, daß es nicht nur äußere Kraftentfaltung ist, die den Menschen zum >Guten< macht, sondern daß seine Bestheit darauf beruht, daß er Kräfte in sich verwirklicht, die wir Tugenden nennen; Einzel-Bestheiten, die in den ethischen Bereich gehören, wie die Besonnenheit, Tapferkeit, Gerechtigkeit usw.


Das Gut-Leben wird gleichsam mit einer Hundertachtziggrad-Drehung in eine andere Richtung gekehrt und meint nun die Verwirklichung des Höchsten im Menschen, die nur durch die Gerechtigkeit möglich ist, und auch die Eudaimonie gewinnt ganz anderen Charakter.


Also aus dem gleichen Bereich kommend wie die Sophisten, vollzieht nun Sokrates diese Drehung, indem die Dinge ganz neuen Wertcharakter bekommen.


Aber es ist doch der gleiche Bereich der Menschendinge, den auch Cicero in jenem Wort deutlich abhebt gegen den der Vorsokratiker, die nach ganz anderen Dingen gefragt hatten.



Wir können noch von einer anderen Ecke her diese Wendung verdeutlichen, und zwar von dem eigentlichen Anfang her, damit ein Raum frei bleibt für das, was dann wirklich die Vorsokratiker bedeuten.


Da wollen wir zunächst von dem Begriff des Philosophierens allgemein sprechen.


Es ist nötig, daß wir, die wir uns mit diesen Dingen beschäftigen, einmal versuchen, solche Worte, die zu unserem geistigen Hausgebrauch gehören, da wir nun einmal an ihrem Wurzelbereich stehen, auch von dorther neu zu fassen.


Zunächst ist es auffällig, daß der Begriff für die Vorsokratiker noch nicht existiert.


Er tritt erst ein bei jener Tätigkeit, die eben wirklich schon Philosophie ist, auch in unserem Sinne, und das ist bei Platon.


Von da ab hat er solche Relevanz, erscheint als so völlig entsprechend dem, was man tut, daß er nun fest mit dieser Tätigkeit verbunden bleibt bis auf den heutigen Tag.


Und wenn man auch öfter versucht hat, ihn durch andere Begriffe zu ersetzen, wie >Lebensweisheit< u.a., so ist das nie durchgedrungen und hat den Begriff der Philosophie nicht verdrängen können aus den europäischen Sprachen und wohl auch darüber hinaus.



Man wird sich auch diesen Begriff, philosophia und verbal philosophein, vorstellen müssen als einen Begriff der Alltagssprache.


Die früheste Stelle ist Herodot Ⅰ30, wo von Solon gesagt wird, er sei, nachdem er sein Gesetzeswerk in Athen abgeschlossen hatte, auf Reisen gegangen >um der theoria willen< - nicht unsere >Theorie<, sondern eigentlich >heilige Schau<: die Weise, wie ein Festgesandter etwa den Olympischen Spielen oder sonst einer kultischen Veranstaltung beiwohnte.



-작성중-
Sokrates und, wie ich gleich sagen will, auch die Sophisten - die in diesem Sinne auch nicht zu den Vorsokratikern gehören, aber solche Inkonsequenzen stören nicht, wenn man terminologisch vorgeht - fragen nicht nach diesen vorhandenen Dingen, sondern, kurz gesagt, nach der menschlichen Tauglichkeit, der arete. Wir befinden uns hier im Bereich der Polis, in der die Menschen zusammen leben und in der sie etwas werden wollen, vor allem politisch etwas werden wollen. Da geht es primär darum, wie man tauglich wird im Leben, wie man vorankommt und möglichst in eine herrschende Stellung. Man sieht, dies Fragen nach der menschlichen Bestheit ist ursprünglich durchaus nicht im ethischen Sinne zu verstehen, sondern umfassend nach der vollen Entfaltung dessen, was der Mensch als Mensch an Kräften mitbekommen hat, wodurch er das möglichst >gute Leben<, eu zen, erlangt, was auch ganz materiell verstanden werden kann, dann aber vom Wohlergehen zum Wohlbefinden wird und schließlich zur eudaimonia, >Glückseligkeit< in dem Sinne, daß der Mensch einen guten Daimon hat. Von all diesen Begriffen werden wir noch eingehend zu sprechen haben.
→ 소크라테스와, 내가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하듯이, 또한 소피스테스들은 - 그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전 소크라테스에 속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용어적으로 우선할 때 그러한 불일치들이 방해하지 않는 - 이러한 수중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짧게 말하면, 인간적인 쓸모, 아레테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 안에서 인간들이 다 함께 살아가고 그 안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폴리스의 범위 안에 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어떻게 사람이 삶에 있어서 쓸모있게 되는지, 어떻게 사람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인간적 최선에 대한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넓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능력들을 동시에 얻는 것, 그를 통하여 인간이 가능한 한, 에우 젠, >좋은 삶<을 얻는 그러한 것의 풍부한 전개에 대한 물음임을 본다. 에우 젠은 또한 전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무사로부터 평안에까지 결국 에우다이모니아가 되는, 인간이 좋은 다이몬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행복<이다.→ 이러한 모든 개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상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Die Frage nach diesem Gut-Leben und dieser Eudaimonie ist die in der Gemeinschaft sich stellende Frage, die jeden als Lebensfrage angeht und in die die Sophisten hineinzielen vor allem mit dem Mittel des gekonnten Worts, das zum Machtmittel werden kann. Sie versprechen, daß sie den Menschen möglichst tauglich und fähig machen können, so daß er zum >guten Leben<, zu Stellung und Machteinfluß gelangt und also auch glücklich wird. Sie sehen, es ist ein ganz anderer Bereich als der, vor dem die Vorsokratiker stehen, die sich vor dem Ganzen des Seienden fühlen. Es sind durchaus die Menschenwelt und die Menschendinge und -bestrebungen, die von den Sophisten behandelt werden, die nun bestimmte Praktiken entwickeln, wie man etwa den schwächeren Logos zum stärkeren machen kann; die aber über diese Kunstgriffe hinaus auch Wissen vermitteln, das den Menschen ertüchtigen und zur Arete erziehen soll - worauf mit Sokrates die Frage entsteht, ob und wie man die Arete überhaupt lehren und vermitteln kann. Es wäre ja schön für den Menschen, wenn er sich diese Höchstfrom irgendwo beschaffen könnte, wenn es Menschen gäbe, die sie vermitteln könnten. Die Sophisten behaupten, sie seien solche Lehrer der Arete.
→ 이러한 좋은-삶과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물음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된, 그 물음 각각이 삶의 물음으로서 시작되고 그 물음 안으로 소피스테스들은 무엇보다도 그 방법이 권력수단으로 될 수 있는 능란한 말의 방법을 가지고 내부를 겨냥하는 물음이다.→ 그들은, 그들이 인간들을 가능한 한 쓸모 있고 유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가 >좋은 삶<을, 지위와 권력을 얻고 그러므로 행복하게 된다고 약속한다.→ 그들은 그것이 그 영역에 대해 전 소크라테스들이 마주 서 있는, 그것들이 있는 것들의 전체를 채우는 것과 전혀 다른 영역임을 본다.→ 그것은 소피스테스들에 의해 다루어진, 그들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 더욱 약한 말을 더욱 강한 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규정된 취급방식들을 전개한, 전적으로 인간계와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인간적 활동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교들을 넘어서 또한 인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 소크라테스와 함께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혹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아레테 일반을 배우고 전할 수 있는지 그 물음이 생겨난 - 아레테로 가르칠 그러한 앎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이러한 최상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면, 만일 그들이 전할 수 있을 그것이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일 터이다.→ 소피스트들은 그들이 덕에 대한 그러한 교사라고 주장했다.



Sokrates und, wie ich gleich sagen will, auch die Sophisten - die in diesem Sinne auch nicht zu den Vorsokratikern gehören, aber solche Inkonsequenzen stören nicht, wenn man terminologisch vorgeht - fragen nicht nach diesen vorhandenen Dingen, sondern, kurz gesagt, nach der menschlichen Tauglichkeit, der arete.
소크라테스와, 내가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하듯이, 또한 소피스테스들은 - 그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전 소크라테스에 속하지 않지만, 그러한 불일치들이 방해하지 않는, 사람들이 용어적으로 우선할 때 - 묻는다 이러한 수중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짧게 말하면, 인간적인 쓸모, 아레테에 대해서.
→ 소크라테스와, 내가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하듯이, 또한 소피스테스들은 - 그들이 이러한 의미에서 또한 전 소크라테스에 속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용어적으로 우선할 때 그러한 불일치들이 방해하지 않는 - 이러한 수중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짧게 말하면, 인간적인 쓸모, 아레테에 대해서 묻는다.
Wir befinden uns hier im Bereich der Polis, in der die Menschen zusammen leben und in der sie etwas werden wollen, vor allem politisch etwas werden wollen.
우리는 여기에서 폴리스의 범위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인간들이 다 함께 살아가고 그 안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 우리는 여기에서, 그 안에서 인간들이 다 함께 살아가고 그 안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폴리스의 범위 안에 있다.
Da geht es primär darum, wie man tauglich wird im Leben, wie man vorankommt und möglichst in eine herrschende Stellung.
여기에서 처음으로 그것이 문제가 된다, 어떻게 사람이 삶에 있어서 쓸모있게 되는지, 어떻게 사람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로 나아갈 수 있는지.
→ 여기에서 처음으로, 어떻게 사람이 삶에 있어서 쓸모있게 되는지, 어떻게 사람이 가능한 한 지배적 지위로 나아갈 수 있는지 그것이 문제가 된다.
Man sieht, dies Fragen nach der menschlichen Bestheit ist ursprünglich durchaus nicht im ethischen Sinne zu verstehen, sondern umfassend nach der vollen Entfaltung dessen, was der Mensch als Mensch an Kräften mitbekommen hat, wodurch er das möglichst >gute Leben<, eu zen, erlangt, was auch ganz materiell verstanden werden kann, dann aber vom Wohlergehen zum Wohlbefinden wird und schließlich zur eudaimonia, >Glückseligkeit< in dem Sinne, daß der Mensch einen guten Daimon hat.
사람들은 본다, 인간적 최선에 대한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넓게 그것의 풍부한 전개에 대한 물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능력들을 동시에 얻는 것, 그를 통하여 인간이 가능한 한 >좋은 삶<, 에우 젠, 그것을 얻는, 그것이 또한 전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러나 그 경우 무사로부터 평안에까지 결국 에우다이모니아가 되는, >행복<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인간이 좋은 다이몬을 가진다는.
→ 사람들은, 인간적 최선에 대한 이러한 물음이 근본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넓게 인간이 인간으로서 능력들을 동시에 얻는 것, 그를 통하여 인간이 가능한 한, 에우 젠, >좋은 삶<을 얻는 그러한 것의 풍부한 전개에 대한 물음임을 본다. 에우 젠은 또한 전적으로 물질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경우 무사로부터 평안에까지 결국 에우다이모니아가 되는, 인간이 좋은 다이몬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행복<이다.
Von all diesen Begriffen werden wir noch eingehend zu sprechen haben.
이러한 모든 개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상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 이러한 모든 개념들에 대하여 우리는 아직 상론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Die Frage nach diesem Gut-Leben und dieser Eudaimonie ist die in der Gemeinschaft sich stellende Frage, die jeden als Lebensfrage angeht und in die die Sophisten hineinzielen vor allem mit dem Mittel des gekonnten Worts, das zum Machtmittel werden kann.
이러한 좋은-삶과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물음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된 물음이다, 그 물음 각각이 삶의 물음으로서 시작되고 그 물음 안으로 소피스테스들은 무엇보다도 능란한 말의 방법을 가지고 내부를 겨냥하는, 그 방법이 권력수단으로 될 수 있는.
→ 이러한 좋은-삶과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물음은 공동체 안에서 제기된, 그 물음 각각이 삶의 물음으로서 시작되고 그 물음 안으로 소피스테스들은 무엇보다도 그 방법이 권력수단으로 될 수 있는 능란한 말의 방법을 가지고 내부를 겨냥하는 물음이다.
Sie versprechen, daß sie den Menschen möglichst tauglich und fähig machen können, so daß er zum >guten Leben<, zu Stellung und Machteinfluß gelangt und also auch glücklich wird.
그들은 약속한다, 그들이 인간들을 가능한 한 쓸모 있고 유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가 >좋은 삶<을, 지위와 권력을 얻고 그러므로 행복하게 된다고.
→ 그들은, 그들이 인간들을 가능한 한 쓸모 있고 유능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그래서 그가 >좋은 삶<을, 지위와 권력을 얻고 그러므로 행복하게 된다고 약속한다.
Sie sehen, es ist ein ganz anderer Bereich als der, vor dem die Vorsokratiker stehen, die sich vor dem Ganzen des Seienden fühlen.
그들은 본다, 그것이 전혀 다른 영역임을 다음과 같은 것과, 그 영역에 대해 전 소크라테스들이 마주 서 있는, 그들이 있는 것들의 전체를 채우는.
→ 그들은 그것이 그 영역에 대해 전 소크라테스들이 마주 서 있는, 그것들이 있는 것들의 전체를 채우는 것과 전혀 다른 영역임을 본다.
Es sind durchaus die Menschenwelt und die Menschendinge und -bestrebungen, die von den Sophisten behandelt werden, die nun bestimmte Praktiken entwickeln, wie man etwa den schwächeren Logos zum stärkeren machen kann; die aber über diese Kunstgriffe hinaus auch Wissen vermitteln, das den Menschen ertüchtigen und zur Arete erziehen soll - worauf mit Sokrates die Frage entsteht, ob und wie man die Arete überhaupt lehren und vermitteln kann.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계와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인간적 활동들이다, 그것들이 소피스테스들에 의해 다루어진, 이제 그들이 규정된 취급방식들을 전개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더욱 약한 말을 더욱 강한 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교들을 넘어서 또한 앎을 전달한다, 그 앎이 인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아레테로 가르칠 -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 물음이 생겨난, 혹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아레테 일반을 배우고 전할 수 있는지.
→ 그것은 소피스테스들에 의해 다루어진, 그들이, 사람들이 어느 정도 더욱 약한 말을 더욱 강한 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과 같은 규정된 취급방식들을 전개한, 전적으로 인간계와 인간적인 것들 그리고 인간적 활동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기교들을 넘어서 또한 인간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 소크라테스와 함께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혹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 아레테 일반을 배우고 전할 수 있는지 그 물음이 생겨난 - 아레테로 가르칠 그러한 앎을 전달한다.
Es wäre ja schön für den Menschen, wenn er sich diese Höchstfrom irgendwo beschaffen könnte, wenn es Menschen gäbe, die sie vermitteln könnten.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일 터이다, 만일 그가 이러한 최상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면, 만일 그것이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면, 그들이 전할 수 있을.
→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그가 이러한 최상의 조건을 얻을 수 있다면, 만일 그들이 전할 수 있을 그것이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람들에게 멋진 것일 터이다.
Die Sophisten behaupten, sie seien solche Lehrer der Arete.
소피스트들은 주장했다, 그들이 덕에 대한 그러한 교사라고.
→ 소피스트들은 그들이 덕에 대한 그러한 교사라고 주장했다.

-蟲-
§ 12.

Es findet sich aber in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der Alten noch ein Haupstück vor, welches reine Verstandesbegriffe enthält, die, ob sie gleich nicht unter die Kategorien gezählt werden, dennoch, nach ihnen, als Begriffe a priori von Gegenständen gelten sollten, in welchem Falle sie aber die Zahl der Kategorien vermehren würden, welches nicht sein kann. Diese trägt der unter den Scholastikern so berufene Satz vor: quodlibet ens est unum, verum, bonum. Ob nun zwar der Gebrauch dieses Prinzips in Absicht auf die Folgerungen (die lauter tautologische Sätze gaben) sehr kümmerlich ausfiel, so, daß man es auch in neueren Zeiten beinahe nur ehrenhalber in der Metaphysik aufzustellen pflegt, so verdient doch ein Gedanke, der sich so lange Zeit erhalten hat, so leer er auch zu sein scheint, immer eine Untersuchung seines Ursprungs, und berechtigt zur Vermutung, daß er in irgend einer Verstandesregel seinen Grund habe, der nur, wie es oft geschieht, falsch gedolmetscht worden.
→ 그러나 고대인들의 초월철학 내에서도 순수 지성개념들을 포함하는 그 한 장이 발견된다. 그 개념들이, 비록 그것들이 범주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따르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개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경우 그 개념들은 범주들의 수를 늘릴 것이지만, 그러한 범주일 수 없다.→ 이러한 개념들은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명제를 내놓는다: 있는 것은 어디서든 일이요, 진이요, 선이니라.(ens: sum present participle sons. modified form ab-sens, prae-sens, The simple form ens.)→ 이제 비록 그 결과들에 대한 의도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의 사용이 (순수한 동의이어적 명제를 주는) 매우 옹색한 결과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또한 새로운 시대에 형이상학 안에서 거의 체면치레만을 위해 제시하곤 한다고는 할지라도, 그래서 또한 그렇게나 공허하게 보이는 것이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것은 언제나 그것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생각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그것이 좌우간 지성규칙 안에 자주 그러하듯이 단지 그릇되게 납득되었던 근거를 가진다고 추측하게끔 한다.

Es findet sich aber in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der Alten noch ein Haupstück vor, welches reine Verstandesbegriffe enthält, die, ob sie gleich nicht unter die Kategorien gezählt werden, dennoch, nach ihnen, als Begriffe a priori von Gegenständen gelten sollten, in welchem Falle sie aber die Zahl der Kategorien vermehren würden, welches nicht sein kann.
그러나 발견된다 고대인들의 초월철학 내에서도 그 한 장이, 순수 지성개념들을 포함하는, 그 개념들이, 비록 그것들이 범주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따르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개념들로서, 그 개념들이 그러나 범주들의 수를 넘어서게 될 경우, 그러한 것일 수 없는.
→ 그러나 고대인들의 초월철학 내에서도 순수 지성개념들을 포함하는 그 한 장이 발견된다. 그 개념들이, 비록 그것들이 범주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따르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개념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경우 그 개념들은 범주들의 수를 늘릴 것이지만, 그러한 범주일 수 없다.
Diese trägt der unter den Scholastikern so berufene Satz vor: quodlibet ens est unum, verum, bonum.
이러한 개념들은 내놓는다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명제를: 있는 것은 어디서든 일이요, 진이요, 선이니라.(ens: sum present participle sons. modified form ab-sens, prae-sens, The simple form ens.)
→ 이러한 개념들은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그렇게나 유명한 명제를 내놓는다: 있는 것은 어디서든 일이요, 진이요, 선이니라.(ens: sum present participle sons. modified form ab-sens, prae-sens, The simple form ens.)
Ob nun zwar der Gebrauch dieses Prinzips in Absicht auf die Folgerungen (die lauter tautologische Sätze gaben) sehr kümmerlich ausfiel, so, daß man es auch in neueren Zeiten beinahe nur ehrenhalber in der Metaphysik aufzustellen pflegt, so verdient doch ein Gedanke, der sich so lange Zeit erhalten hat, so leer er auch zu sein scheint, immer eine Untersuchung seines Ursprungs, und berechtigt zur Vermutung, daß er in irgend einer Verstandesregel seinen Grund habe, der nur, wie es oft geschieht, falsch gedolmetscht worden.
이제 비록 그 결과들에 대한 의도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의 사용이 (순수한 동의이어적 명제를 주는) 매우 옹색한 결과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또한 새로운 시대에 형이상학 안에서 거의 체면치레만을 위해 제시하곤 한다고는 할지라도, 그래서 또한 생각할 가치가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것은, 그것이 그렇게나 공허하게 보이는, 언제나 그것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그리고 추측하게끔 한다, 그것이 좌우간 지성규칙 안에 그것의 근거를 가진다고, 그것이 단지, 그것이 자주 일어나는 것처럼, 그릇되게 납득되었던.
→ 이제 비록 그 결과들에 대한 의도 속에서 이러한 원칙들의 사용이 (순수한 동의이어적 명제를 주는) 매우 옹색한 결과가 되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또한 새로운 시대에 형이상학 안에서 거의 체면치레만을 위해 제시하곤 한다고는 할지라도, 그래서 또한 그렇게나 공허하게 보이는 것이 그렇게 오랜 시간 유지해 온 것은 언제나 그것의 기원에 대한 연구를 생각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그것이 좌우간 지성규칙 안에 자주 그러하듯이 단지 그릇되게 납득되었던 근거를 가진다고 추측하게끔 한다.

-蟲-
Um sich dieser Übereinstimmung zu versichern, muß man bemerken: daß in allen disjunktiven Urteilen die Sphäre (die Menge alles dessen, was unter ihm enthalten ist) als ein Ganzes in Teile (die untergeordneten Begriffe) geteilt vorgestellt wird, und, weil einer nicht unter dem andern enthalten sein kann, sie als einander koordiniert, nicht subordiniert, so daß sie einander nicht einseitig, wie in einer Reihe, sondern wechselseitig, als in einem Aggregat, bestimmen (wenn ein Glied der Einteilung gesetzt wird, alle übrige ausgeschlossen werden, und so umgekehrt), gedacht werden.
→ 이러한 일치를 확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모든 선언적 판단들에 있어서 그 범위는 (그 판단 아래에 속해지는 모든 것의 집합) 전체로서 부분(종속된 개념)으로 표상되고, 하나가 다른 것 아래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상호 병렬하고, 종속시키지 않으며, 그래서 줄에 있어서 처럼 그것들 상호에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집합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 상호적으로 규정 (구분의 마디가 놓일 때, 모든 남은 것들은 제외되고, 정반대된다) 되고, 사유된다.

Nun wird eine ähnliche Verknüpfung in einem Ganzen der Dinge gedacht, da nicht eines, als Wirkung, dem andern, als Ursache seines Daseins, untergeordnet, sondern zugleich und wechselseitig als Ursache in Ansehung der Bestimmung der andern beigeordnet wird, (z.B in einem Körper, dessen Teile einander wechselseitig ziehen, und auch widerstehen,) welches eine ganz andere Art der Verknüpfung ist, als die, so im bloßen Verhältnis der Ursache zur Wirkung (des Grundes zur Folge) angetroffen wird, in welchem die Folge nicht wechselseitig wiederum den Grund bestimmt, und darum mit diesem (wie der Weltschöpfer mit der Welt) nicht ein Ganzes ausmacht. Dasselbe Verfahren des Verstandes, wenn er sich die Sphäre eines eingeteilten Begriffs vorstellt, beobachtet er auch, wenn er ein Ding als teilbar denkt, und, wie die Glieder der Einteilung im ersteren einander ausschließen und doch in einer Sphäre verbunden sind, so stellt er sich die Teile des letzteren als solche, deren Existenz (als Substanzen) jedem auch ausschließlich von den übrigen zukommt, doch als in einem Ganzen verbunden vor.
→ 이제 유사한 결합이 사물의 전체 안에서 사유된다. 왜냐하면 작용으로서 어떤 것이 그 사물의 현존의 원인으로서의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고, 동시에 상호적으로 원인으로서 다른 것의 규정에의 고려 속에서 병렬되며, (예를 들어 육체에 있어서, 육체의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끌어 당기고, 또한 맞선다,) 그 안에서 결과가 상호적으로 다시금 근거를 규정하지 않고 그 근거에 대해 이 결과를 가지고 (조물주가 세계를 가지고)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그러한 작용에 대한 원인의(결과에 대한 근거의) 순전한 관계 내에서 발견되는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그러한 결합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지성은 지성이 분할된 개념의 범위를 표상할 때의 동일한 방식들을 지성이 사물을 가분적으로 생각할 때 또한 주시하고, 그리고, 분할의 마디가 전자에 있어서 상호 제외하고 또한 한 범위 내에서 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지성은 자신에게 후자의 부분을 그러한 것으로서, 그 부분의 현존(실체들로서)이 각각에 또한 남은 부분들에서 배타적으로 속하고, 더욱이 전체 내에서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한다.



Um sich dieser Übereinstimmung zu versichern, muß man bemerken: daß in allen disjunktiven Urteilen die Sphäre (die Menge alles dessen, was unter ihm enthalten ist) als ein Ganzes in Teile (die untergeordneten Begriffe) geteilt vorgestellt wird, und, weil einer nicht unter dem andern enthalten sein kann, sie als einander koordiniert, nicht subordiniert, so daß sie einander nicht einseitig, wie in einer Reihe, sondern wechselseitig, als in einem Aggregat, bestimmen (wenn ein Glied der Einteilung gesetzt wird, alle übrige ausgeschlossen werden, und so umgekehrt), gedacht werden.
이러한 일치를 확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모든 선언적 판단들에 있어서 그 범위는 (그 판단 아래에 속해지는 모든 것의 집합) 전체로서 부분(종속된 개념)으로 표상되고, 하나가 다른 것 아래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상호 병렬하고, 종속시키지 않으며, 그래서 그것들 상호에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줄에 있어서 처럼, 오히려 상호적으로, 집합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 규정 (구분의 마디가 놓일 때, 모든 남은 것들은 제외되고, 정반대된다) 되고, 사유된다.
→ 이러한 일치를 확신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모든 선언적 판단들에 있어서 그 범위는 (그 판단 아래에 속해지는 모든 것의 집합) 전체로서 부분(종속된 개념)으로 표상되고, 하나가 다른 것 아래에 포함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들이 상호 병렬하고, 종속시키지 않으며, 그래서 줄에 있어서 처럼 그것들 상호에 일방적으로가 아니라, 오히려 집합체 안에 있는 것으로서 상호적으로 규정 (구분의 마디가 놓일 때, 모든 남은 것들은 제외되고, 정반대된다) 되고, 사유된다.

Nun wird eine ähnliche Verknüpfung in einem Ganzen der Dinge gedacht, da nicht eines, als Wirkung, dem andern, als Ursache seines Daseins, untergeordnet, sondern zugleich und wechselseitig als Ursache in Ansehung der Bestimmung der andern beigeordnet wird, (z.B in einem Körper, dessen Teile einander wechselseitig ziehen, und auch widerstehen,) welches eine ganz andere Art der Verknüpfung ist, als die, so im bloßen Verhältnis der Ursache zur Wirkung (des Grundes zur Folge) angetroffen wird, in welchem die Folge nicht wechselseitig wiederum den Grund bestimmt, und darum mit diesem (wie der Weltschöpfer mit der Welt) nicht ein Ganzes ausmacht.
이제 유사한 결합이 사물의 전체 안에서 사유된다, 왜냐하면 작용으로서 어떤 것이, 다른 것에, 그 사물의 현존의 원인으로서, 종속되지 않고, 동시에 상호적으로 원인으로서 다른 것의 규정에의 고려 속에서 병렬되며, (예를 들어 육체에 있어서, 육체의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끌어 당기고, 또한 맟선다,) 전적으로 다른 결합의 방식이다, 그것으로서, 작용에 대한 원인의(결과에 대한 근거의) 순전한 관계 내에서 발견되는, 그 안에서 결과가 반면에 상호적으로 근거를 규정하지 않고, 그것에 대해 이것을 가지고 (조물주가 세계를 가지고)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 이제 유사한 결합이 사물의 전체 안에서 사유된다. 왜냐하면 작용으로서 어떤 것이 그 사물의 현존의 원인으로서의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고, 동시에 상호적으로 원인으로서 다른 것의 규정에의 고려 속에서 병렬되며, (예를 들어 육체에 있어서, 육체의 부분들이 상호적으로 끌어 당기고, 또한 맞선다,) 그 안에서 결과가 상호적으로 다시금 근거를 규정하지 않고 그 근거에 대해 이 결과를 가지고 (조물주가 세계를 가지고)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그러한 작용에 대한 원인의(결과에 대한 근거의) 순전한 관계 내에서 발견되는 그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그러한 결합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Dasselbe Verfahren des Verstandes, wenn er sich die Sphäre eines eingeteilten Begriffs vorstellt, beobachtet er auch, wenn er ein Ding als teilbar denkt, und, wie die Glieder der Einteilung im ersteren einander ausschließen und doch in einer Sphäre verbunden sind, so stellt er sich die Teile des letzteren als solche, deren Existenz (als Substanzen) jedem auch ausschließlich von den übrigen zukommt, doch als in einem Ganzen verbunden vor.
지성의 동일한 방식들을, 지성이 분할된 개념의 범위를 표상할 때, 지성이 또한 주시하고, 지성이 사물을 가분적으로 생각할 때, 그리고, 분할의 마디가 전자에 있어서 상호 제외하고 또한 한 범위 내에서 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지성은 자신에게 후자의 부분을 그러한 것으로서, 그 부분의 현존(실체들로서)이 각각을 또한 남은 부분들에서 배타적으로 나타나고, 더욱이 전체 내에서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한다.
→ 지성은 지성이 분할된 개념의 범위를 표상할 때의 동일한 방식들을 지성이 사물을 가분적으로 생각할 때 또한 주시하고, 그리고, 분할의 마디가 전자에 있어서 상호 제외하고 또한 한 범위 내에서 결합되는 것처럼, 그렇게 지성은 자신에게 후자의 부분을 그러한 것으로서, 그 부분의 현존(실체들로서)이 각각에 또한 남은 부분들에서 배타적으로 속하고, 더욱이 전체 내에서 결합된 것으로서 표상한다.

-蟲-
So ist die Allheit (Totalitat) nichts anders als die Vielheit als Einheit betrachtet, die Einschrankung nichts anders als Realitat mit Negation verbunden, die Gemeinschaft ist die Kausalitat einer Substanz in Bestimmung der andern wechselseitig, endlich die Notwendigkeit nichts anders als die Existenz, die durch die Moglichkeit selbst gegeben ist. Man denke aber ja nicht, daß darum die dritte Kategorie ein bloß abgeleiteter und kein Stammbegriff des reinen Verstandes sei. Denn die Verbindung der ersten und zweiten, um den dritten Begriff hervorzubringen, erfodert einen besonderen Actus des Verstandes, der nicht mit dem einerlei ist, der beim ersten und zweiten ausgeubt wird. So ist der Begriff einer Zahl (die zur Kategorie der Allheit gehort) nicht immer moglich, wo die Begriffe der Menge und der Einheit sind (z.B. in der Vorstellung des Unendlichen), oder daraus, daß ich den Begriff einer Ursache und den einer Substanz beide verbinde, noch nicht so fort der Einfluß, d.i. wie eine Substanz Ursache von etwas in einer anderen Substanz werden konne, zu verstehen. Daraus erhellet, daß dazu ein besonderer Actus des Verstandes erfoderlich sei; und so bei den ubrigen.
→ 그래서 '모두(총체성)'는 '하나'로 간주된 '여럿'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제한'은 사실의 부정과의 결합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결합은 상호간에 다른 실체의 규정 속에서 한 실체의 인과성이고, 끝으로 필연성은 가능성 자체를 통하여 주어지는 현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세번째 범주는 순전히 파생된 것이고 전혀 순수지선의 기초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의 결합은, 세번째 개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성의 특수한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그 활동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에 있어서 수행되는 활동과 동종이 아니다.→ 그래서 수의 개념은 ('모두'의 범주에 속하는)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은데, 양의 개념과 '하나'의 개념이 있는 곳(예를 들어 무한의 표상 안에서)에서 그렇고, 혹은 내가 원인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과 함께 결합하는 것으로부터, 즉각 유입이, 즉 어떻게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에 있어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그로부터, 그에 대해 지성의 특수한 활동이 필수적이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3te Anmerk. Von einer einzigen Kategorie, namlich der der Gemeinschaft, die unter dem dritten Titel befindlich ist, ist die Ubereinstimmung mit der in der Tafel der logischen Funktionen ihr korrespondierenden Form eines disjunktiven Urteils nicht so in die Augen fallend, als bei den ubrigen.
→ 세번째 주해. 유일한 범주, 즉 세번째 제목 아래에 있는 결합의 범주에 대해서, 논리적 기능들의 도표에서의 그 제목과 선언판단의 그 제목의 상응하는 형식의 일치는,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 만큼 그렇게 눈에 띄이지는 않는다.


So ist die Allheit (Totalitat) nichts anders als die Vielheit als Einheit betrachtet, die Einschrankung nichts anders als Realitat mit Negation verbunden, die Gemeinschaft ist die Kausalitat einer Substanz in Bestimmung der andern wechselseitig, endlich die Notwendigkeit nichts anders als die Existenz, die durch die Moglichkeit selbst gegeben ist.
그래서 '모두(총체성)'는 '하나'로 간주된 '여럿'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제한'은 사실의 부정과의 결합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결합은 상호간에 다른 실체의 규정 속에서 한 실체의 인과성이고, 끝으로 필연성은 가능성 자체를 통하여 주어지는 현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 그래서 '모두(총체성)'는 '하나'로 간주된 '여럿'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고, '제한'은 사실의 부정과의 결합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결합은 상호간에 다른 실체의 규정 속에서 한 실체의 인과성이고, 끝으로 필연성은 가능성 자체를 통하여 주어지는 현존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Man denke aber ja nicht, daß darum die dritte Kategorie ein bloß abgeleiteter und kein Stammbegriff des reinen Verstandes sei.
그러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관해 세번째 범주는 순전히 파생된 것이고 전혀 순수지선의 기초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세번째 범주는 순전히 파생된 것이고 전혀 순수지선의 기초개념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Denn die Verbindung der ersten und zweiten, um den dritten Begriff hervorzubringen, erfodert einen besonderen Actus des Verstandes, der nicht mit dem einerlei ist, der beim ersten und zweiten ausgeubt wird.
왜냐하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의 결합은, 세번째 개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성의 특수한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그 활동이 활동과 동종이 아니다,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에 있어서 수행되는.
→ 왜냐하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의 결합은, 세번째 개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성의 특수한 활동을 요구하기 때문인데, 그 활동이 첫번째 것과 두번째 것에 있어서 수행되는 활동과 동종이 아니다.
So ist der Begriff einer Zahl (die zur Kategorie der Allheit gehort) nicht immer moglich, wo die Begriffe der Menge und der Einheit sind (z.B. in der Vorstellung des Unendlichen), oder daraus, daß ich den Begriff einer Ursache und den einer Substanz beide verbinde, noch nicht so fort der Einfluß, d.i. wie eine Substanz Ursache von etwas in einer anderen Substanz werden konne, zu verstehen.
그래서 수의 개념은 ('모두'의 범주에 속하는)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은데, 양의 개념과 '하나'의 개념이 있는 곳(예를 들어 무한의 표상 안에서)에서, 혹은 그로부터, 내가 원인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과 함께 결합하는 것, 즉각 유입이, 즉 어떻게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에 있어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
→ 그래서 수의 개념은 ('모두'의 범주에 속하는)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은데, 양의 개념과 '하나'의 개념이 있는 곳(예를 들어 무한의 표상 안에서)에서 그렇고, 혹은 내가 원인의 개념을 실체의 개념과 함께 결합하는 것으로부터, 즉각 영향이, 즉 어떻게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에 있어서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
Daraus erhellet, daß dazu ein besonderer Actus des Verstandes erfoderlich sei; und so bei den ubrigen.
그로부터 자명하다, 그에 대해 지성의 특수한 활동이 필수적이리라는 것은;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 그로부터, 그에 대해 지성의 특수한 활동이 필수적이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도 그렇다.

3te Anmerk. Von einer einzigen Kategorie, namlich der der Gemeinschaft, die unter dem dritten Titel befindlich ist, ist die Ubereinstimmung mit der in der Tafel der logischen Funktionen ihr korrespondierenden Form eines disjunktiven Urteils nicht so in die Augen fallend, als bei den ubrigen.
세번째 주해. 유일한 범주, 즉 결합의 범주에 대해서, 세번째 제목 아래에 있는, 논리적 기능들의 도표에서의 그 범주와 선언파단의 그 범주의 상응하는 형식의 일치는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 만큼.
→ 세번째 주해. 유일한 범주, 즉 세번째 제목 아래에 있는 결합의 범주에 대해서, 논리적 기능들의 도표에서의 그 제목과 선언판단의 그 제목의 상응하는 형식의 일치는, 그 밖에 다른 것들에 있어서 만큼 그렇게 눈에 띄이지는 않는다.
Die erste ist: daß sich diese Tafel, welche vier Klassen von Verstandesbegriffen enthält, zuerst in zwei Abteilungen zerfällen lasse, deren erstere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der reinen sowohl als empirischen), die zweite aber auf die Existenz dieser Gegenstände (entweder in Beziehung auf einander oder auf den Verstand) gerichtet sind.
→ 첫번째 주해는: 지성개념들에 대한 네 가지 부문들을 포함하는 이러한 도표가 먼저 두 구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중의 첫번째 것은 직관의 대상들에 대해 (순수한 직관뿐만 아니라 경험적 직관까지도), 그러나 두번째 것은 이러한 대상들의 현존에 대해 (상호에 관해서든지성에 관해서든) 향해진다는 것이다.

Die erste Klasse würde ich die der mathematischen, die zweite der dynamischen Kategorien nennen. Die erste Klasse hat, wie man sieht, keine Korrelate, die allein in der zweiten Klasse angetroffen werden. Dieser Unterschied muß doch einen Grund in der Natur des Verstandes haben.
→ 그 첫번째 부문을 나는 수학적 범주들의 부문, 두번째 부문을 역학적 범주들의 부문이라 명명할 것이다.→ 첫번째 부문은, 사람들이 보았듯이, 오로지 두번째 부문에서만 발견되는 어떠한 상관개념들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구분은 지성의 본성에 이유를 가짐에 틀림없다.

2te Anmerk. Daß allerwärts eine gleiche Zahl der Kategorien jeder Klasse, nämlich drei sind, welches eben sowohl zum Nachdenken auffodert, da sonst alle Einteilung a priori durch Begriffe dichotomie sein muß. Dazu kommt aber noch, daß die dritte Kategorie allenthalben aus der Verbindung der zweiten mit der ersten ihrer Klasse entspringt.
→ 두번째 주해. 어느 곳에서나 각 부문의 범주들의 수는 똑같이 셋이다. 더욱이 모든 구분들은 선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양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똑같이 숙고를 요구한다.→ 그러나 게다가 세번째 범주들이 어디에서나 그 범주들의 부문의 두번째 것과 세번째 것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 있다.


Die erste ist: daß sich diese Tafel, welche vier Klassen von Verstandesbegriffen enthält, zuerst in zwei Abteilungen zerfällen lasse, deren erstere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der reinen sowohl als empirischen), die zweite aber auf die Existenz dieser Gegenstände (entweder in Beziehung auf einander oder auf den Verstand) gerichtet sind.
첫번째 주해는: 이러한 도표가, 지성개념들에 대한 네 가지 부문들을 포함하는, 먼저 두 구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중의 첫번째 것이 직관의 대상들에 대해 (순수한 직관뿐만 아니라 경험적 직관까지도), 그러나 두번째 것은 이러한 대상들의 현존에 대해 (상호에 관해서든지성에 관해서든) 향해진다는 것이다.
→ 첫번째 주해는: 지성개념들에 대한 네 가지 부문들을 포함하는 이러한 도표가 먼저 두 구분으로 나뉘어 있고, 그 중의 첫번째 것은 직관의 대상들에 대해 (순수한 직관뿐만 아니라 경험적 직관까지도), 그러나 두번째 것은 이러한 대상들의 현존에 대해 (상호에 관해서든지성에 관해서든) 향해진다는 것이다.

Die erste Klasse würde ich die der mathematischen, die zweite der dynamischen Kategorien nennen.
그 첫번째 부문을 나는 수학적 범주들의 부문, 두번째 부문을 역학적 범주들의 부문이라 명명할 것이다.
→ 그 첫번째 부문을 나는 수학적 범주들의 부문, 두번째 부문을 역학적 범주들의 부문이라 명명할 것이다.
Die erste Klasse hat, wie man sieht, keine Korrelate, die allein in der zweiten Klasse angetroffen werden.
첫번째 부문은, 사람들이 보았듯이, 어떠한 상관개념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 상관개념들이 오로지 두번째 부문에서만 발견되는.
→ 첫번째 부문은, 사람들이 보았듯이, 오로지 두번째 부문에서만 발견되는 어떠한 상관개념들도 가지지 않는다.
Dieser Unterschied muß doch einen Grund in der Natur des Verstandes haben.
이러한 구분은 지성의 본성에 이유를 가짐에 틀림없다.
→ 이러한 구분은 지성의 본성에 이유를 가짐에 틀림없다.

2te Anmerk. Daß allerwärts eine gleiche Zahl der Kategorien jeder Klasse, nämlich drei sind, welches eben sowohl zum Nachdenken auffodert, da sonst alle Einteilung a priori durch Begriffe dichotomie sein muß.
두번째 주해. 어느 곳에서나 각 부문의 범주들의 동일한 수가, 즉 셋이, 똑같이 숙고를 요구하는, 더욱이 모든 구분들은 선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양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 두번째 주해. 어느 곳에서나 각 부문의 범주들의 수는 똑같이 셋이다. 더욱이 모든 구분들은 선험적으로 개념들을 통해 양분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똑같이 숙고를 요구한다.
Dazu kommt aber noch, daß die dritte Kategorie allenthalben aus der Verbindung der zweiten mit der ersten ihrer Klasse entspringt.
그러나 게다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세번째 범주들이 어디에서나 그 범주들의 부문의 두번째 것과 세번째 것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
→ 그러나 게다가 세번째 범주들이 어디에서나 그 범주들의 부문의 두번째 것과 세번째 것의 결합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것이 있다.

-蟲-

Σωκράτης

[14a] καὶ γὰρ οἱ στρατηγοί, ὦ φίλε· ἀλλ᾽ ὅμως τὸ κεφάλαιον αὐτῶν ῥᾳδίως ἂν εἴποις, ὅτι νίκην ἐν τῷ πολέμῳ ἀπεργάζονται· ἢ οὔ;

그야 장군들도 그러니까요, 친애하는 이여: 그러나 그대는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통틀어 쉽사리 말할 테죠, 전쟁에서의 승리를 성취하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나요?

ὅμως : equally, likewise, alike.

εἴποις : εἶπον opt. sin.-2nd.

 

Εὐθύφρων

πῶς δ᾽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Σωκράτης

πολλὰ δέ γ᾽, οἶμαι, καὶ καλὰ καὶ οἱ γεωργοί· ἀλλ᾽ ὅμως τὸ κεφάλαιον αὐτῶν ἐστιν τῆς ἀπεργασίας ἡ ἐκ τῆς γῆς τροφή.

그런데 많은 것들은, 제 생각에, 또한 빼어나기도 한 것들은 농부들도 그렇죠: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은 통틀어 성취로 인한 땅으로부터의 양식이죠.

ἀπεργασίας : finishing completing, execution, workmanship. cuasing, producing. working off. treatment. upkeep. effcacy.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Σωκράτης

τί δὲ δὴ τῶν πολλῶν καὶ καλῶν ἃ οἱ θεοὶ ἀπεργάζονται; τί τὸ κεφάλαιόν ἐστι τῆς ἐργασίας;

그런데 더욱이 많고도 빼어난 것들 중에 무엇이, 신들이 성취하는 것들인가요? 무엇이 그 성취의 통틀은 것인가요?

 

Εὐθύφρων

καὶ ὀλίγον σοι πρότερον εἶπον, ὦ Σώκρατες, ὅτι [14b] πλείονος ἔργου ἐστὶν ἀκριβῶς πάντα ταῦτα ὡς ἔχει μαθεῖν· τόδε μέντοι σοι ἁπλῶς λέγω, ὅτι ἐὰν μὲν κεχαρισμένα τις ἐπίστηται τοῖς θεοῖς λέγειν τε καὶ πράττειν εὐχόμενός τε καὶ θύων, ταῦτ᾽ ἔστι τὰ ὅσια, καὶ σῴζει τὰ τοιαῦτα τούς τε ἰδίους οἴκους καὶ τὰ κοινὰ τῶν πόλεων· τὰ δ᾽ ἐναντία τῶν κεχαρισμένων ἀσεβῆ, ἃ δὴ καὶ ἀνατρέπει ἅπαντα καὶ ἀπόλλυσιν.

저는 당신께 조금 앞서 말했어요, 소크라테스,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은 더욱 큰 일이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대에게 지금 당장 간단하게 말합니다, 만일 한편으로 누군가 신들에게 기꺼울 만한 것들을 말하고 생각할 줄 안다면 기원하고 제물을 바치면서, 이와 같은 것들은 경건한 것들일 것이고, 이와 같은 것들이 가정들에서는 개인들과 또 폴리스들의 공공의 것들을 지킨다고 말이죠: 다른 한편 기꺼운 것들의 반대되는 것들은 불경할 것인데, 그것들이 더욱이 또 그 모든 것들을 어지럽히고 파괴하는 것들입니다.

μαθεῖν : μανθάνω aor. inf.

κεχαρισμένα : χαρίζω pass. pf. part. as Adj. acceptable, welcome. things pleasing to one.

ἐπίστηται : ἐπίσταμαι subj. sin.-3rd. know how to do.

εὐχόμενός : εὔχομαι pray.

θύων : offer, sacrifice.

σῴζει : σῴζω. save, keep, preserve.

ἰδίους : private, personal.

οἴκους : at home.

ἀνατρέπει : overturn, upset. overthrow, ruin.

 

Σωκράτης

ἦ πολύ μοι διὰ βραχυτέρων, ὦ Εὐθύφρων, εἰ ἐβούλου, εἶπες ἂν τὸ κεφάλαιον ὧν ἠρώτων· ἀλλὰ γὰρ οὐ [14c] πρόθυμός με εἶ διδάξαι--δῆλος εἶ. καὶ γὰρ νῦν ἐπειδὴ ἐπ᾽ αὐτῷ ἦσθα ἀπετράπου, ὃ εἰ ἀπεκρίνω, ἱκανῶς ἂν ἤδη παρὰ σοῦ τὴν ὁσιότητα ἐμεμαθήκη. νῦν δὲ ἀνάγκη γὰρ τὸν ἐρῶντα τῷ ἐρωμένῳ ἀκολουθεῖν ὅπῃ ἂν ἐκεῖνος ὑπάγῃ, τί δὴ αὖ λέγεις τὸ ὅσιον εἶναι καὶ τὴν ὁσιότητα; οὐχὶ ἐπιστήμην τινὰ τοῦ θύειν τε καὶ εὔχεσθαι;

사실 나에게 훨씬 더 짧은 말로, 에우튀프론, 그대가 원했다면, 묻고 있던 것들을 통틀어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를 가르치는데에 열심이 아니니까요 -- 그대가 그런게 분명해요. 또 이제와서는 그대가 이것들에 있었다가 되돌왔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답했었다면야, 이미 충분히 그대에게서 경건한 것을 배웠을 것들로. 그러나 이제 질문한 자가 질문받은 자에게 따를 수밖에 없네요 저 자가 이끌 길로, 그래서 또 그대는 경건과 경건한 것을 뭐라고 할 건가요? 제물을 바치고 기원하는 것에 대한 어떤 앎이라고 하지 않을 건가요?

πρόθυμός : ready, willing, eager.

ἦσθα : εἰμί impf. sin.-2nd.

ἀπετράπου : ἀποτρέπω mid. impf. sin.-2nd. turn back.

ἐμεμαθήκη : μανθάνω plpf.

ἀκολουθεῖν : inf. follow one

ὑπάγῃ :

 

Εὐθύφρων

ἔγωγε.

저로서는요.

 

Σωκράτης

οὐκοῦν τὸ θύειν δωρεῖσθαί ἐστι τοῖς θεοῖς, τὸ δ᾽ εὔχεσθαι αἰτεῖν τοὺς θεούς;

그러니까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신들에게 선물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 기원한다는 것은 신들에게 애원하는 것이 아닌가요?

 

Εὐθύφρων

καὶ μάλα, ὦ Σώκρατες.

바로 그것이죠,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14d] ἐπιστήμη ἄρα αἰτήσεως καὶ δόσεως θεοῖς ὁσιότης ἂν εἴη ἐκ τούτου τοῦ λόγου.

그러니까 신들에게 청하고 주는 것에 대한 앎이 경건한 것이겠군요 말들에 따르면.

 

Εὐθύφρων

πάνυ καλῶς, ὦ Σώκρατες, συνῆκας ὃ εἶπον.

매우 훌륭하게, 소크라테스, 제가 말한 것을 들으셨네요.

συνῆκας : συνίημι 2nd-aor. sin.-2nd. bring or set together. perceive, hear.

 

Σωκράτης

ἐπιθυμητὴς γάρ εἰμι, ὦ φίλε, τῆς σῆς σοφίας καὶ προσέχω τὸν νοῦν αὐτῇ, ὥστε οὐ χαμαὶ πεσεῖται ὅτι ἂν εἴπῃς. ἀλλά μοι λέξον τίς αὕτη ἡ ὑπηρεσία ἐστὶ τοῖς θεοῖς; αἰτεῖν τε φῂς αὐτοὺς καὶ διδόναι ἐκείνοις;

왜냐하면 친애하는 이여, 나는 그대의 지혜에 열심이고 또 주목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그 곳에서 그대가 말할 것이 떨어져 나가질 않도록 말이에요. 그러나 그대는 나에게 말해주시오 신들에게 이와 같은 봉사가 어떤 것인지? 그대는 신들에게 청하고 또 저들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말하나요?

προσέχω : attention

χαμαὶ : on the ground.

πεσεῖται : πίπτω mid. fut.

 

Εὐθύφρων

ἔγωγε.

저로서는요.

 

Σωκράτης

ἆρ᾽ οὖν οὐ τό γε ὀρθῶς αἰτεῖν ἂν εἴη ὧν δεόμεθα παρ᾽ ἐκείνων, ταῦτα αὐτοὺς αἰτεῖν;

그러니까 올바르게 청한다는 것은 저들에게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 이와 같은 것들을 그들에게 청하는 것이겠군요?

 

Εὐθύφρων

ἀλλὰ τί;

아니면 무엇이겠어요?

 

Σωκράτης

[14e] καὶ αὖ τὸ διδόναι ὀρθῶς, ὧν ἐκεῖνοι τυγχάνουσιν δεόμενοι παρ᾽ ἡμῶν, ταῦτα ἐκείνοις αὖ ἀντιδωρεῖσθαι; οὐ γάρ που τεχνικόν γ᾽ ἂν εἴη δωροφορεῖν διδόντα τῳ ταῦτα ὧν οὐδὲν δεῖται.

그리고 또 올바르게 준다는 것은,  저들이 우리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들, 이와 같은 것들을 저들에게 다시 되돌려 주는 것이겠군요? 왜냐하면 아마도 이와 같은 주는 것들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이에게 선물한다는 것은 유능한 일이 아니겠으니까요.

ἀντιδωρεῖσθαι : present in return

δωροφορεῖν : bring presents, give as presents or bribes.

 

Εὐθύφρων

ἀληθῆ λέγεις, ὦ Σώκρατες.

참된 말씀이세요,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ἐμπορικὴ ἄρα τις ἂν εἴη, ὦ Εὐθύφρων, τέχνη ἡ ὁσιότης θεοῖς καὶ ἀνθρώποις παρ᾽ ἀλλήλων.

그러니까 어떤 상인의, 에우튀프론, 기술이겠네요 신들에게도 인간들에게도 서로간에 경건한 것은.

 

Εὐθύφρων

ἐμπορική, εἰ οὕτως ἥδιόν σοι ὀνομάζειν.

상술이라, 그대에게 그렇게 이름붙이는 것이 기쁘다면요.

 

Σωκράτης

ἀλλ᾽ οὐδὲν ἥδιον ἔμοιγε, εἰ μὴ τυγχάνει ἀληθὲς ὄν. φράσον δέ μοι, τίς ἡ ὠφελία τοῖς θεοῖς τυγχάνει οὖσα ἀπὸ τῶν δώρων ὧν παρ᾽ ἡμῶν λαμβάνουσιν; ἃ μὲν γὰρ διδόασι [15a] παντὶ δῆλον· οὐδὲν γὰρ ἡμῖν ἐστιν ἀγαθὸν ὅτι ἂν μὴ ἐκεῖνοι δῶσιν. ἃ δὲ παρ᾽ ἡμῶν λαμβάνουσιν, τί ὠφελοῦνται; ἢ τοσοῦτον αὐτῶν πλεονεκτοῦμεν κατὰ τὴν ἐμπορίαν, ὥστε πάντα τὰ ἀγαθὰ παρ᾽ αὐτῶν λαμβάνομεν, ἐκεῖνοι δὲ παρ᾽ ἡμῶν οὐδέν;

그러나 제게는 전혀 기쁘지 않아요, 만일에 그것이 옳지 않다면 말이죠. 저에게 설명해 주세요, 신들에게 마침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우리에게서 그들이 받은 그 선물들로부터? 한편으로 그들이 주는 것들은 모든 이들에게 분명하니까요: 우리에게 그들이 주지 않을 좋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요.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에게서 그들이 취한 것들은, 뭐가 이득이 될까요?

 

Εὐθύφρων

ἀλλ᾽ οἴει, ὦ Σώκρατες, τοὺς θεοὺς ὠφελεῖσθαι ἀπὸ τούτων ἃ παρ᾽ ἡμῶν λαμβάνουσιν;

그러나 그대는, 소크라테스, 신들이 우리에게서 취한 이러한 것들로부터 이득을 본다고 생각하세요?

 

Σωκράτης

ἀλλὰ τί δήποτ᾽ ἂν εἴη ταῦτα, ὦ Εὐθύφρων, τὰ παρ᾽ ἡμῶν δῶρα τοῖς θεοῖς;

하지만 그러면 대체, 에우튀프론, 우리에게서 신들에게 선물들일 이같은 것들이 뭔가요?

 

Εὐθύφρων

τί δ᾽ οἴει ἄλλο ἢ τιμή τε καὶ γέρα καί, ὅπερ ἐγὼ ἄρτι ἔλεγον, χάρις;

그렇지만 찬사와 영광 그리고, 제가 앞서 말했던 종류의, 감사가 아니면 뭐라고 생각하세요?

 

Σωκράτης

[15b] κεχαρισμένον ἄρα ἐστίν, ὦ Εὐθύφρων, τὸ ὅσιον, ἀλλ᾽ οὐχὶ ὠφέλιμον οὐδὲ φίλον τοῖς θεοῖς;

그러니까 만족이, 에우튀프론, 경건함이고, 하지만 신들에겐 이득도 아니고 사랑스러운 것도 아닌 건가요?

 

Εὐθύφρων

οἶμαι ἔγωγε πάντων γε μάλιστα φίλον.

저로서는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

 

Σωκράτης

τοῦτο ἄρ᾽ ἐστὶν αὖ, ὡς ἔοικε, τὸ ὅσιον, τὸ τοῖς θεοῖς φίλον.

그러면 이게 또 다시, 그렇게 보이기로는, 경건이군요, 신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이요.

 

Εὐθύφρων

μάλιστά γε.

바로 그렇습니다.

 

Σωκράτης

θαυμάσῃ οὖν ταῦτα λέγων ἐάν σοι οἱ λόγοι φαίνωνται μὴ μένοντες ἀλλὰ βαδίζοντες, καὶ ἐμὲ αἰτιάσῃ τὸν Δαίδαλον βαδίζοντας αὐτοὺς ποιεῖν, αὐτὸς ὢν πολύ γε τεχνικώτερος τοῦ Δαιδάλου καὶ κύκλῳ περιιόντα ποιῶν; ἢ οὐκ αἰσθάνῃ ὅτι ὁ λόγος ἡμῖν περιελθὼν πάλιν εἰς ταὐτὸν [15c] ἥκει; μέμνησαι γάρ που ὅτι ἐν τῷ πρόσθεν τό τε ὅσιον καὶ τὸ θεοφιλὲς οὐ ταὐτὸν ἡμῖν ἐφάνη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ἢ οὐ μέμνησαι;

그러면 당신은 놀랄 건가요 이러한 것들을 말하면서 만일 당신에게 그 말들이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나아가면, 그리고 저를 다이달로스라고 비난할 건가요 그것들을 나아가는 것들로 만들었다고, 당신 자신이 다이달로스보다 훨씬 더 능란하고 둘레를 돌도록 만들면서 말입니다? 아니면 그대는 모르시나요 그 말이 우리에게 있어서 돌고 돌아서  다시 똑같은 곳으로 왔다는 것을요? 왜냐하면 아마도 그대가 기억할 테니까요 앞선 곳에서(말에서?) 경건과 또 신이 사랑하는 것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다른 것들로 우리에게 여겨졌다는 것을요: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βαδίζοντες : go about

αἰτιάσῃ : accuse

 

Εὐθύφρων

ἔγωγε.

저로서는 (기억하지요).

 

Σωκράτης

νῦν οὖν οὐκ ἐννοεῖς ὅτι τὸ τοῖς θεοῖς φίλον φῂς ὅσιον εἶναι; τοῦτο δ᾽ ἄλλο τι ἢ θεοφιλὲς γίγνεται; ἢ οὔ;

그러니까 지금은 신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이 경건한 것이라고 그대가 말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나요?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Σωκράτης

οὐκοῦν ἢ ἄρτι οὐ καλῶς ὡμολογοῦμεν, ἢ εἰ τότε καλῶς, νῦν οὐκ ὀρθῶς τιθέμεθα.

그러니 우리가 앞서 훌륭하게 동의하지는 못했거나, 만일 그 때 훌륭하게 했었다면, 지금 우리가 옳게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나요.

 

Εὐθύφρων

ἔοικεν.

그렇게 보입니다.

 

Σωκράτης

ἐξ ἀρχῆς ἄρα ἡμῖν πάλιν σκεπτέον τί ἐστι τὸ ὅσιον, ὡς ἐγὼ πρὶν ἂν μάθω ἑκὼν εἶναι οὐκ ἀποδειλιάσω. [15d] ἀλλὰ μή με ἀτιμάσῃς ἀλλὰ παντὶ τρόπῳ προσσχὼν τὸν νοῦν ὅτι μάλιστα νῦν εἰπὲ τὴν ἀλήθειαν· οἶσθα γὰρ εἴπερ τις ἄλλος ἀνθρώπων, καὶ οὐκ ἀφετέος εἶ ὥσπερ ὁ Πρωτεὺς πρὶν ἂν εἴπῃς. εἰ γὰρ μὴ ᾔδησθα σαφῶς τό τε ὅσιον καὶ τὸ ἀνόσιον, οὐκ ἔστιν ὅπως ἄν ποτε ἐπεχείρησας ὑπὲρ ἀνδρὸς θητὸς ἄνδρα πρεσβύτην πατέρα διωκάθειν φόνου, ἀλλὰ καὶ τοὺς θεοὺς ἂν ἔδεισας παρακινδυνεύειν μὴ οὐκ ὀρθῶς αὐτὸ ποιήσοις, καὶ τοὺς ἀνθρώπους ᾐσχύνθης· νῦν δὲ εὖ οἶδα ὅτι [15e] σαφῶς οἴει εἰδέναι τό τε ὅσιον καὶ μή. εἰπὲ οὖν, ὦ βέλτιστε Εὐθύφρων, καὶ μὴ ἀποκρύψῃ ὅτι αὐτὸ ἡγῇ.

그러니까 처음부터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무엇이 경건인지가 숙고되어야 하는 것이군요, 제 자신이 알기 전까지는 겁을 집어먹고 움츠러들지 않으려 하는 한 말이에요. 그러나 그대는 나를 업신여기지 않을 거에요, 오히려 무엇보다도 지금 진실을 말하는 것에 모든 방식으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이죠: 왜냐하면 설령 사람들 중에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또한 마치 프로테우스 처럼 그대가 말하기 전까지 그대는 결코 풀려날 수 없을 테니까요. 왜냐하면 만일 그대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았었다면 경건과 또한 불경건을, 그럴 수는 없을 테니 말이에요 도대체 품팔이 사내를 위해 아버지인 노인을 살인죄로 고발하는 일을 시도할, 하지만 그대가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험을 시도할 수도 없을 테지요 옳지 못하게 이러한 것을 그대가 하지 않을까, 또 사람들을 해하지는 않을까: 그러나 지금 나는 아주 잘 알고 있어요 그대가 정확하게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경건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니 말씀하세요, 가장 뛰어난 사람 에우튀프론, 또 그대가 아는 것을 감추지는 마시고.

μάθω : μανθάνω 2nd-aor. 1st-sin.

ὡς ἑκὼν εἶναι : as far as depends one's will, as far as concerns one. S.2012.c.

ἀποδειλιάσω : to be very fearful

ἀτιμάσῃς : ἀτῖμάω aor. subj. 2nd-sin. dishonour, disdain.

προσσχὼν : προσέχω aor. part.-nom. with τὸν νοῦν τινι. give heed to him, pay court to him.

ἀφετέος : one must dismiss, to be let go, dismissed.

ᾔδησθα : ἔιδω plpf. 2nd-sin.

ἔδεισας : δείδω aor. 2nd-sin.

παρακινδυνεύειν : make a venture.

ᾐσχύνθης : αἰσχύνω pass. aor. 2nd-sin. make ugly, disfigure.

ἀποκρύψῃ : ἀποκρύπτω mid.&pass. hide from sight, keep hidden, conceal.

ἡγῇ : ἡγέομαι 2nd-sin.


Εὐθύφρων

εἰς αὖθις τοίνυν, ὦ Σώκρατες· νῦν γὰρ σπεύδω ποι, καί μοι ὥρα ἀπιέναι.

그러면 다음 기회에, 소크라테스: 왜냐하면 지금은 제가 어디를 바삐 가야 해서요, 또 제게 있어선 떠나야 할 것 같기도 하고요.

σπεύδω : press on.

ὥρα : with inf. it is seems to do a thing.

 

Σωκράτης

οἷα ποιεῖς, ὦ ἑταῖρε. ἀπ᾽ ἐλπίδος με καταβαλὼν μεγάλης ἀπέρχῃ ἣν εἶχον, ὡς παρὰ σοῦ μαθὼν τά τε ὅσια καὶ μὴ καὶ τῆς πρὸς Μέλητον γραφῆς ἀπαλλάξομαι, ἐνδειξάμενος [16a] ἐκείνῳ ὅτι σοφὸς ἤδη παρ᾽ Εὐθύφρονος τὰ θεῖα γέγονα καὶ ὅτι οὐκέτι ὑπ᾽ ἀγνοίας αὐτοσχεδιάζω οὐδὲ καινοτομῶ περὶ αὐτά, καὶ δὴ καὶ τὸν ἄλλον βίον ὅτι ἄμεινον βιωσοίμην.

그대는 무얼 하는 게요, 친구여. 그대는 큰 희망으로부터 나를 내팽개치고 떠나겠군요 내가 품고 있던 희망을, 그대에게서 경건한 것들도 경건하지 않은 것들도 배워 또한 멜레토스의 고발로부터 풀려날 것을, 저자에게 이미 제가 신적인 것들에 있어서 에우튀프론 곁에서 지혜로운 자가 되었다는 것과 또한 더 이상 무지에 의해 그 신적인 것들에 대해 그 어떤 새로운 것들로도 지어내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특히나 더욱 훌륭하게 살아갈 그러한 다른 삶을.

ἀπέρχῃ : ἀπέρχομαι subj. 2nd-sin. go away.

ἀπαλλάξομαι : ἀπαλλάσσω mid. fut. sin.-1st. get off free, escape.

οὐκέτι : no more.

αὐτοσχεδιάζω : offhand, extemporize.


-蟲-

Σωκράτης
ἆρ᾽ οὖν καὶ πᾶν τὸ δίκαιον ὅσιον; ἢ τὸ μὲν ὅσιον [12a] πᾶν δίκαιον, τὸ δὲ δίκαιον οὐ πᾶν ὅσιον, ἀλλὰ τὸ μὲν αὐτοῦ ὅσιον, τὸ δέ τι καὶ ἄλλο;
그렇다고 하면은 모든 정의로운 것도 경건한가요? 아니면 한편으로 경건한 것은 모두 정의롭지만, 다른 한편 정의로운 것이 모두 경건한 것은 아니고, 그러나 그것의 일부는 경건하고, 다른 어떤 일부는 또 다른 것인가요?
 
Εὐθύφρων
οὐχ ἕπομαι, ὦ Σώκρατες, τοῖς λεγομένοις.
저는 따라가지 못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야기된 것들에.
ἕπομαι : ἕπω only mid. to be or come after, follow.
 
Σωκράτης
καὶ μὴν νεώτερός γέ μου εἶ οὐκ ἔλαττον ἢ ὅσῳ σοφώτερος· ἀλλ᾽, ὃ λέγω, τρυφᾷς ὑπὸ πλούτου τῆς σοφίας. ἀλλ᾽, ὦ μακάριε, σύντεινε σαυτόν· καὶ γὰρ οὐδὲ χαλεπὸν κατανοῆσαι ὃ λέγω. λέγω γὰρ δὴ τὸ ἐναντίον ἢ ὁ ποιητὴς ἐποίησεν ὁ ποιήσας--
더 새로울 것도 없어요 만일 바로 나보다 못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지혜롭다면: 그러나, 내가 말하는 것은, 지혜의 부에 의한 사치스러움입니다. 그러나, 복된 자여, 그대 자신의 일을 애쓰시오: 왜냐하면 내가 한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전혀 아니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이와 같이 쓴 것을 썼던 그 시인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τρυφᾷς : luxuries, daintiness.
μακάριε : blessed, happy.
σύντεινε : συντείνω imp. strain.
κατανοῆσαι : κατανοέω aor. inf. understand.
 
                  Ζῆνα δὲ τὸν [θ᾽] ἔρξαντα καὶ ὃς τάδε πάντ᾽ ἐφύτευσεν
                  [12b] οὐκ ἐθέλει νεικεῖν· ἵνα γὰρ δέος ἔνθα καὶ αἰδώς. (Stasinus Cypria Fr. 20)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길우기도 하곤 하던 그 제우스가 가는 곳들은  
                  맞서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두려움이 있는 곳이 또한 경외도 있는 그러한 곳이니까.
ἔρξαντα : ἔρχομαι aor. part. pl-n-acc. come or go.
ἐφύτευσεν : φυτεύω aor. plant. beget, engender. produce, bring about. set up.
νεικεῖν : νεικέω inf. quarrel, wrangle with one.
 
ἐγὼ οὖν τούτῳ διαφέρομαι τῷ ποιητῇ. εἴπω σοι ὅπῃ;
그러니까 나로서는 이 시인과 다른 거지요. 그대에게 내가 그렇게 말하겠지요?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Σωκράτης
οὐ δοκεῖ μοι εἶναι “ἵνα δέος ἔνθα καὶ αἰδώς” πολλοὶ γάρ μοι δοκοῦσι καὶ νόσους καὶ πενίας καὶ ἄλλα πολλὰ τοιαῦτα δεδιότες δεδιέναι μέν, αἰδεῖσθαι δὲ μηδὲν ταῦτα ἃ δεδίασιν· οὐ καὶ σοὶ δοκεῖ;
나에게는 "두려움이 있는 곳이 경외도 있는 그러한 곳이다"라고는 보이지 않아요 많은 왜냐하면 많은 이들이 나에게 평판과 질병들 그리고 이러한 다른 많은 것들을 두려워 함으로써 한편으로 두려워 한 것으로 보이고, 다른 한편 그들이 두려워 한 이러한 것들이 경외받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보이니까요: 그대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나요?
δεδιότες : δείδω pf. part. pl.-m.-nom. fear.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 그렇습니다.
 
Σωκράτης
ἀλλ᾽ ἵνα γε αἰδὼς ἔνθα καὶ δέος εἶναι· ἐπεὶ ἔστιν ὅστις αἰδούμενός τι πρᾶγμα καὶ αἰσχυνόμενος οὐ πεφόβηταί [12c] τε καὶ δέδοικεν ἅμα δόξαν πονηρίας;
그러나 바로 경외가 있는 곳이 두려움도 있는 그러한 곳이지요: 그 누구든 어떤 일을 불명예스러워 하는 자가 수치스러워하면서 동시에 나쁜 평판을 두려워 하고 무서워 하지는 않나요?
 
Εὐθύφρων
δέδοικε μὲν οὖν.
그러니까 한편으론 두려워합니다.
 
Σωκράτης
οὐκ ἄρ᾽ ὀρθῶς ἔχει λέγειν· “ἵνα γὰρ δέος ἔνθα καὶ αἰδώς”, ἀλλ᾽ ἵνα μὲν αἰδὼς ἔνθα καὶ δέος, οὐ μέντοι ἵνα γε δέος πανταχοῦ αἰδώς· ἐπὶ πλέον γὰρ οἶμαι δέος αἰδοῦς. μόριον γὰρ αἰδὼς δέους ὥσπερ ἀριθμοῦ περιττόν, ὥστε οὐχ ἵναπερ ἀριθμὸς ἔνθα καὶ περιττόν, ἵνα δὲ περιττὸν ἔνθα καὶ ἀριθμός. ἕπῃ γάρ που νῦν γε;
그러니 말한 것이 올바르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있는 그 곳이 또한 경외도 있는 곳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경외가 있는 곳은 두려움도 있는 그러한 곳이고, 두려움이 있는 어느 곳이든 경외가 있는 곳은 아니지요: 나는 두려움이 경외에 가득 찬다고 생각하니까요. 왜냐하면 전체에 대해 여분처럼 두려움의 경외가 부분이기 때문에, 그래서 전체인 바로 그 곳이 여분이기도 한 그러한 곳은 아니고, 그러나 부분인 곳은 전체이기도 한 그러한 곳이죠.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 그렇습니다.
 
Σωκράτης
τὸ τοιοῦτον τοίνυν καὶ ἐκεῖ λέγων ἠρώτων· ἆρα ἵνα [12d] δίκαιον ἔνθα καὶ ὅσιον; ἢ ἵνα μὲν ὅσιον ἔνθα καὶ δίκαιον, ἵνα δὲ δίκαιον οὐ πανταχοῦ ὅσιον· μόριον γὰρ τοῦ δικαίου τὸ ὅσιον; οὕτω φῶμεν ἢ ἄλλως σοι δοκεῖ;
바로 지금 이것을 그 문제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묻고 있었습니다: 혹시 정의가 있는 곳이 경건도 있는 그러한 곳인지? 아니면 한편으로 경건이 있는 곳이 정의도 있는 그러한 곳이고, 다른 한편 정의가 있는 곳은 경건이 있는 그러한 모든 곳은 아닌지: 왜냐하면 정의의 일부가 경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말할까요 아니면 그대에게는 다르게 보입니까?
ἐκεῖ : there. in that place. in that matter.
 
Εὐθύφρων
οὔκ, ἀλλ᾽ οὕτω. φαίνῃ γάρ μοι ὀρθῶς λέγειν.
아니요, 그렇게. 왜냐하면 저에게는 옳게 이야기한 것으로 여겨지니까요.
 
Σωκράτης
ὅρα δὴ τὸ μετὰ τοῦτο. εἰ γὰρ μέρος τὸ ὅσιον τοῦ δικαίου, δεῖ δὴ ἡμᾶς, ὡς ἔοικεν, ἐξευρεῖν τὸ ποῖον μέρος ἂν εἴη τοῦ δικαίου τὸ ὅσιον. εἰ μὲν οὖν σύ με ἠρώτας τι τῶν νυνδή, οἷον ποῖον μέρος ἐστὶν ἀριθμοῦ τὸ ἄρτιον καὶ τίς ὢν τυγχάνει οὗτος ὁ ἀριθμός, εἶπον ἂν ὅτι ὃς ἂν μὴ σκαληνὸς ᾖ ἀλλ᾽ ἰσοσκελής· ἢ οὐ δοκεῖ σοι;
또한 이 다음 것을 보시오. 만일 경건이 정의의 일부라면 그 때문에, 우리들은 더욱이 경건이 정의의 어떠한 부분인지 탐구해야 해요. 그러므로 한편으로 만일 그대가 내게 바로 지금 그것들 중의 어떤 것을 묻는다면, 수의 어떠한 부분이 짝수이고 무엇이 바로 그 수이기도 한지, 나는 말할 거에요 홀수가 아닐 것이나 똑같은 두 부분들로 나뉘어질 수 있을 수이리라고: 아니면 그대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나요?
ἐξευρεῖν : ἐξερέω inf. inquire into.
ἄρτιον : even number.
ἰσοσκελής : that can be divided into two equal parts.
 
Εὐθύφρων
ἔμοιγε.
제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Σωκράτης
[12e] πειρῶ δὴ καὶ σὺ ἐμὲ οὕτω διδάξαι τὸ ποῖον μέρος τοῦ δικαίου ὅσιόν ἐστιν, ἵνα καὶ Μελήτῳ λέγωμεν μηκέθ᾽ ἡμᾶς ἀδικεῖν μηδὲ ἀσεβείας γράφεσθαι, ὡς ἱκανῶς ἤδη παρὰ σοῦ μεμαθηκότας τά τε εὐσεβῆ καὶ ὅσια καὶ τὰ μή.
또한 그대도 나를 그렇게 가르치는 것을 정의의 어떤 부분이 경건인지, 우리가 멜레토스에게도 더 이상 우리를 해치지 말고 불경건하다고 고발하지도 말라고 말하도록 말이죠, 이미 충분히 당신에게서 신실하고도 경건한 것들도 그렇지 않은 것들도 배웠기에.
μηκέθ᾽ : μηκέτι. no more, no longer, no further.
μεμαθηκότας : μανθάνω pf. part. pl.-acc.
 
Εὐθύφρων
τοῦτο τοίνυν ἔμοιγε δοκεῖ, ὦ Σώκρατες, τὸ μέρος τοῦ δικαίου εἶναι εὐσεβές τε καὶ ὅσιον, τὸ περὶ τὴν τῶν θεῶν θεραπείαν, τὸ δὲ περὶ τὴν τῶν ἀνθρώπων τὸ λοιπὸν εἶναι τοῦ δικαίου μέρος.
저에게는 지금 이것이, 소크라테스, 정의의 부분은 신실하고도 경건한 것으로 보이고, 신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 인간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대한 것은 정의의 나머지 부분이라고 보이네요.
θεραπείαν : with gen. of persons, service paid to.
λοιπὸν : that which remains, the rest of.
Σωκράτης
καὶ καλῶς γέ μοι, ὦ Εὐθύφρων, φαίνῃ λέγειν, ἀλλὰ [13a] σμικροῦ τινος ἔτι ἐνδεής εἰμι· τὴν γὰρ θεραπείαν οὔπω συνίημι ἥντινα ὀνομάζεις. οὐ γάρ που λέγεις γε, οἷαίπερ καὶ αἱ περὶ τὰ ἄλλα θεραπεῖαί εἰσιν, τοιαύτην καὶ περὶ θεούς-- λέγομεν γάρ που--οἷόν φαμεν ἵππους οὐ πᾶς ἐπίσταται θεραπεύειν ἀλλὰ ὁ ἱππικός· ἦ γάρ;
매우 훌륭하게도 나에게는, 에우튀프론, 이야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만, 그러나 나는 작은 어떤 것이 아직 필요해요: 왜냐하면 당신이 무엇을 봉사라고 말하는지 모르니까요. 아마도 그대가 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다른 것들에 대한 보살핌인 그러한 것, 신들에 대한 이것-우리는 아마도 말하고 있으니까-우리가 말들을 모든 관리자들이 보살피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말 사육사가 보살핀다고 말하고 있는?
ἐνδεής : wanting or lacking in, in need of.
οὔπω : not yet. not at all.
συνίημι : bring or set together. perceive, hear. to be aware of, take notice of, observe
ὀνομάζεις : express.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Σωκράτης
ἡ γάρ που ἱππικὴ ἵππων θεραπεία.
아마도 말타기가 말들에 대한 보살핌이기 때문이지요.
 
Εὐθύφρων
ναί.
네.
 
Σωκράτης
οὐδέ γε κύνας πᾶς ἐπίσταται θεραπεύειν ἀλλὰ ὁ κυνηγετικός.
사냥개들도 모든 관리자들이 보살피는 것은 아니고 사냥꾼이.
 
Εὐθύφρων
οὕτω.
그렇습니다.
 
Σωκράτης
ἡ γάρ που κυνηγετικὴ κυνῶν θεραπεία.
왜냐하면 아마도 사냥술이 사냥개들을 보살핌이기 때문이지요.
 
Εὐθύφρων
[13b] ναί.
네.
 
Σωκράτης
ἡ δέ γε βοηλατικὴ βοῶν.
소몰이는 또 소들에 대한 것이죠.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 그렇습니다.
 
Σωκράτης
ἡ δὲ δὴ ὁσιότης τε καὶ εὐσέβεια θεῶν, ὦ Εὐθύφρων; οὕτω λέγεις;
경건하고도 신실한 것은 또 신들에 대한 것인가요, 에우튀프론? 그대는 그렇게 말하고 있나요?
 
Εὐθύφρων
ἔγωγε.
저로서는요.
 
Σωκράτης
οὐκοῦν θεραπεία γε πᾶσα ταὐτὸν διαπράττεται; οἷον τοιόνδε· ἐπ᾽ ἀγαθῷ τινί ἐστι καὶ ὠφελίᾳ τοῦ θεραπευομένου, ὥσπερ ὁρᾷς δὴ ὅτι οἱ ἵπποι ὑπὸ τῆς ἱππικῆς θεραπευόμενοι ὠφελοῦνται καὶ βελτίους γίγνονται· ἢ οὐ δοκοῦσί σοι;
그러니 그 모든 보살핌들은 이러한 것을 성취하지 않을까요? 이와 같은 어떤 것을: 어떤 것 어떤 식으로 보살핌받는 것의 훌륭함과 이득에 대한 것 말이지요, 그대가 말들이 말타기에 의해서 보살핌을 받음으로써 도움받고 더욱 좋은 말들로 되는 것을 보듯이 말입니다: 아니면 그대에게는 그것들이 그렇지 않아 보이나요?
διαπράττεται : διαπράσσω
 
Εὐθύφρων
ἔμοιγε.
저로서는.
 
Σωκράτης
καὶ οἱ κύνες γέ που ὑπὸ τῆς κυνηγετικῆς, καὶ οἱ [13c] βόες ὑπὸ τῆς βοηλατικῆς, καὶ τἆλλα πάντα ὡσαύτως· ἢ ἐπὶ βλάβῃ οἴει τοῦ θεραπευομένου τὴν θεραπείαν εἶναι;
사냥개들도 또한 아마 사냥술에 의해, 소들도 소몰이에 의해서, 다른 모든 것들도 또한 그런 식으로: 아니면 그대는 보살핌받는 것의 해에 대한 것이 보살핌이라고 생각하시나요?
 
Εὐθύφρων
μὰ Δί᾽ οὐκ ἔγωγε.
제우스께 맹세코 저로서는 아닙니다.
 
Σωκράτης
ἀλλ᾽ ἐπ᾽ ὠφελίᾳ;
그러나 이득에 대한 것이고요?
 
Εὐθύφρων
πῶς δ᾽ οὔ;
어찌 아니겠습니까?
 
Σωκράτης
ἦ οὖν καὶ ἡ ὁσιότης θεραπεία οὖσα θεῶν ὠφελία τέ ἐστι θεῶν καὶ βελτίους τοὺς θεοὺς ποιεῖ; καὶ σὺ τοῦτο συγχωρήσαις ἄν, ὡς ἐπειδάν τι ὅσιον ποιῇς, βελτίω τινὰ τῶν θεῶν ἀπεργάζῃ;
물론 경건함도 신들의 보살핌이어서 신들의 이득이기도 하고 신들을 더욱 좋게 만들지는 않겠지요? 그대도 이러한 것을 동의할까요, 언제든 그대가 어떤 경건한 것을 할 때에는, 신들 중의 누군가를 더욱 좋게 만들 것이라고?
ἦ : εἰμί imperfect sin. 3rd.
οὖσα : εἰμί part. sin. f. nom.
ἀπεργάζῃ : ἀπεργάζομαι subj. cause. make so.
 
Εὐθύφρων
μὰ Δί᾽ οὐκ ἔγωγε.
제우스께 맹세코 저로서는 아닙니다.
 
Σωκράτης
οὐδὲ γὰρ ἐγώ, ὦ Εὐθύφρων, οἶμαί σε τοῦτο λέγειν --πολλοῦ καὶ δέω--ἀλλὰ τούτου δὴ ἕνεκα καὶ ἀνηρόμην [13d] τίνα ποτὲ λέγοις τὴν θεραπείαν τῶν θεῶν, οὐχ ἡγούμενός σε τοιαύτην λέγειν.
나로서도, 에우튀프론, 그대가 이러한 것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내가 많이 바라고요-- 그러나 이것에 관한 것을 물었죠. 도대체 어떤 것들을 그대가 신들에 대한 보살핌이라 말할지, 나는 당신이 이와 같은 것을 말한다고는 믿지 않으니까요.
ἕνεκα : on account of. as far as regards.
ἀνηρόμην : ἀνείρομαι aor. inquire of, question. ask about.
λέγοις : λέγω opt. sin. 2nd.
ἡγούμενός : ἡγέομαι part. sin. m. nom.
 
Εὐθύφρων
καὶ ὀρθῶς γε, ὦ Σώκρατες· οὐ γὰρ τοιαύτην λέγω.
정말이지 옳습니다, 소크라테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것을 제가 말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Σωκράτης
εἶεν· ἀλλὰ τίς δὴ θεῶν θεραπεία εἴη ἂν ἡ ὁσιότης;
그것들은 그럴 터이고: 그러나 또한 신들에 대한 어떤 보살핌이 경건일까요?
εἶεν : εἰμί opt. pl. 3rd.
εἴη : εἰμί subj. sin. 3rd.
 
Εὐθύφρων
ἥνπερ, ὦ Σώκρατες, οἱ δοῦλοι τοὺς δεσπότας θεραπεύουσιν.
말하자면, 소크라테스, 노예들이 주인들을 보살피는 것이지요.
 
Σωκράτης
μανθάνω· ὑπηρετική τις ἄν, ὡς ἔοικεν, εἴη θεοῖς.
알겠습니다: 어떤 봉사이겠군요, 보이기로는, 신들에게 대할.
 
Εὐθύφρων
πάνυ μὲν οὖν.
한편으로는 그렇습니다.
 
Σωκράτης
ἔχοις ἂν οὖν εἰπεῖν ἡ ἰατροῖς ὑπηρετικὴ εἰς τίνος ἔργου ἀπεργασίαν τυγχάνει οὖσα ὑπηρετική; οὐκ εἰς ὑγιείας οἴει;
그러니까 그대는 의사들에게 봉사하는 기술이 어떤 일의 성취를 위한 것이면서 봉사술이기도 하다고 말하려고 할 것인가요? 건강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나요?
οἴει : οἴομαι sin. 2nd.
 
Εὐθύφρων
ἔγωγε.
저로서는요.
 
Σωκράτης
[13e] τί δὲ ἡ ναυπηγοῖς ὑπηρετική; εἰς τίνος ἔργου ἀπεργασίαν ὑπηρετική ἐστιν;
그러나 무엇이 선박장인들에게 봉사하는 기술인가요? 어떤 일의 성취를 위한 봉사인가요?

Εὐθύφρων
δῆλον ὅτι, ὦ Σώκρατες, εἰς πλοίου.
소크라테스, 배를 위한 것이 분명하죠.
 
Σωκράτης
καὶ ἡ οἰκοδόμοις γέ που εἰς οἰκίας;
또 건축가들에게 봉사하는 기술은 아마도 집을 위한 것이겠지요?
 
Εὐθύφρων
ναί.
네.
 
Σωκράτης
εἰπὲ δή, ὦ ἄριστε· ἡ δὲ θεοῖς ὑπηρετικὴ εἰς τίνος ἔργου ἀπεργασίαν ὑπηρετικὴ ἂν εἴη; δῆλον γὰρ ὅτι σὺ οἶσθα, ἐπειδήπερ τά γε θεῖα κάλλιστα φῂς εἰδέναι ἀνθρώπων.
그러나 말하시오, 가장 뛰어난 자여: 신들에게 봉사하는 기술은 무슨 일의 성취를 위한 봉사이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대가 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죠, 바로 신적인 것들인 가장 빼어난 것들을 사람들 중에서(보다?) 그대가 안다고 말했으니까요.
οἶσθα : εἴδω 2nd-pf. sin.-2nd.
ἐπειδήπερ : inasmuch as, since, seeing that.

Εὐθύφρων
καὶ ἀληθῆ γε λέγω, ὦ Σώκρατες.
또한 진실을 저는 말하고 있지요,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εἰπὲ δὴ πρὸς Διὸς τί ποτέ ἐστιν ἐκεῖνο τὸ πάγκαλον ἔργον ὃ οἱ θεοὶ ἀπεργάζονται ἡμῖν ὑπηρέταις χρώμενοι;
그러면 제우스께 맹세코 그대는 말하시오 도대체 무엇이 저 탁월한 일인지 신들이 봉사하는 우리에게 필요로 하여 이루는 그 일은?
ἀπεργάζονται : άπεργάξομαι pl.-3nd. finish off, complete, bring to perfection.

Εὐθύφρων
πολλὰ καὶ καλά, ὦ Σώκρατες.
많고도 아름다운 것이지요, 소크라테스.

-蟲-
In einem System der reinen Vernunft würde man sie mit Recht von mir fordern können: aber hier würden sie nur den Hauptpunkt der Untersuchung aus den Augen bringen, indem sie Zweifel und Angriffe erregten, die man, ohne der wesentlichen Absicht etwas zu entziehen, gar wohl auf eine andre Beschäftigung verweisen kann. Indessen leuchtet doch aus dem wenigen, was ich hievon angeführt habe, deutlich hervor, daß ein vollständiges Wörterbuch mit allen dazu erforderlichen Erklärungen nicht allein möglich, sondern auch leicht sei zu Stande zu bringen. Die Fächer sind einmal da; es ist nur nötig, sie auszufüllen, und eine systematische Topik, wie die gegenwärtige, läßt nicht leicht die Stelle verfehlen, dahin ein jeder Begriff eigentümlich gehört, und zugleich diejenige leicht bemerken, die noch leer ist.
→ 순수 이성의 체계 내에서 사람들은 그 파생개념들을 정당하게 나에 대해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파생개념들은 사람들이, 본질적인 목적에서 어떤 것을 박탈하지 않고, 다른 연구에 대해 더욱이 잘 비난할 수 있는 의심들과 공격들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단지 연구의 주안점을 눈 밖에 놓을 뿐이다.→ 그에 반해 또한 내가 이것에 관해 제시한 그 작은 것으로부터, 완벽한 사전이 그에 대해 꼭 필요한 모든 해명들과 함께 그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쉽사리 확립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 분야들은 실로 여기 있다; 그것들을 가득 채우는 것만이 필요하다. 그리고 체계적인 총체론이, 현재의 그것과 같이, 쉽사리 거기에 각각의 개념이 속하는 그러한 자리를 놓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여전히 비어있는 자리를 쉽게 알아차리도록 한다.

§ 11.

Über diese Tafel der Kategorien lassen sich artige Betrachtungen anstellen, die vielleicht erhebliche Folgen in Ansehung der wissenschaftlichen Form aller Vernunfterkenntnisse haben könnten. Denn daß diese Tafel im theoretischen Teile der Philosophie ungemein dienlich, ja unentbehrlich sei, den Plan zum Ganzen einer Wissenschaft, so fern sie auf Begriffen a priori beruht, vollständig zu entwerfen, und sie mathematisch nach bestimmten Prinzipien abzuteilen; erhellet schon von selbst daraus, daß gedachte Tafel alle Elementarbegriffe des Verstandes vollständig, ja selbst die Form eines Systems derselben im menschlichen Verstande enthält, folglich auf alle Momente einer vorhabenden spekulativen Wissenschaft, ja sogar ihre Ordnung, Anweisung gibt, wie ich denn auch davon anderwärts¹ eine Probe gegeben habe. Hier sind nun einige dieser Anmerkungen.
→ 범주들의 이러한 도표에 대해 아마도 중요한 결과들을 모든 이성인식들의 학문적 형식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가질 수 있을 정중한 고찰들이 시도되도록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도표는 학문이 개념들에 선험적으로 근거하는 한 학문 전체에 대해 설계를 완전히 구상하기 위해, 그리고 그 개념들을 수학적으로 규정된 원칙들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철학의 이론적 부분들 안에서 대단히 유용하고,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또한 그에 대해 다른 곳에¹ 표본을 제시했던 것처럼, 이미 생각된 학문이 지성의 모든 기초개념들을 완전히, 더욱이 인간 지성 안에서 그 기초개념들의 체계의 형식을 포함하고, 그 결과 현존하는 사변적 학문의 모든 동인들에 대해, 더욱이 그것의 질서를, 명령을 부여한다는 그 결과 자체로 밝혀진 것이다.→ 여기에는 이러한 주해들의 몇몇만이 있다.

¹Metaphys. Anfangsgr. der Naturwissensch.
¹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In einem System der reinen Vernunft würde man sie mit Recht von mir fordern können: aber hier würden sie nur den Hauptpunkt der Untersuchung aus den Augen bringen, indem sie Zweifel und Angriffe erregten, die man, ohne der wesentlichen Absicht etwas zu entziehen, gar wohl auf eine andre Beschäftigung verweisen kann.
순수 이성의 체계 내에서 사람들은 그 파생개념들을 정당하게 나에 대해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파생개념들은 단지 연구의 주안점을 눈 밖에 놓는다, 그 개념들이 의심들과 공격들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그것들을 사람들이, 본질적인 목적에서 어떤 것을 박탈하지 않고, 다른 연구에 대해 더욱이 잘 비난할 수 있는.
→ 순수 이성의 체계 내에서 사람들은 그 파생개념들을 정당하게 나에 대해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파생개념들은 사람들이, 본질적인 목적에서 어떤 것을 박탈하지 않고, 다른 연구에 대해 더욱이 잘 비난할 수 있는 의심들과 공격들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단지 연구의 주안점을 눈 밖에 놓을 뿐이다.
Indessen leuchtet doch aus dem wenigen, was ich hievon angeführt habe, deutlich hervor, daß ein vollständiges Wörterbuch mit allen dazu erforderlichen Erklärungen nicht allein möglich, sondern auch leicht sei zu Stande zu bringen.
그에 반해 또한 그 작은 것으로부터 명백하다, 내가 이것에 관해 제시한 것, 확실하게 밖으로, 완벽한 사전이 그에 대해 꼭 필요한 모든 해명들과 함께 그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쉽사리 확립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
→ 그에 반해 또한 내가 이것에 관해 제시한 그 작은 것으로부터, 완벽한 사전이 그에 대해 꼭 필요한 모든 해명들과 함께 그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한 쉽사리 확립시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Die Fächer sind einmal da; es ist nur nötig, sie auszufüllen, und eine systematische Topik, wie die gegenwärtige, läßt nicht leicht die Stelle verfehlen, dahin ein jeder Begriff eigentümlich gehört, und zugleich diejenige leicht bemerken, die noch leer ist.
그 분야들은 실로 여기 있다; 그것은 단지 필요하다, 그것들을 가득 채우는 것, 그리고 체계적인 총체론이, 현재의 그것과 같이, 쉽사리 자리를 놓치지 않도록 하고, 거기에 각각의 개념이 속하는, 동시에 그것을 쉽게 알아차리도록, 그것이 여전히 비어있는.
→ 그 분야들은 실로 여기 있다; 그것들을 가득 채우는 것만이 필요하다. 그리고 체계적인 총체론이, 현재의 그것과 같이, 쉽사리 거기에 각각의 개념이 속하는 그러한 자리를 놓치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여전히 비어있는 자리를 쉽게 알아차리도록 한다.

§ 11.

Über diese Tafel der Kategorien lassen sich artige Betrachtungen anstellen, die vielleicht erhebliche Folgen in Ansehung der wissenschaftlichen Form aller Vernunfterkenntnisse haben könnten.
범주들의 이러한 도표에 대해 정중한 고찰들이 시도되도록 한다, 그 고찰들이 아마도 중요한 결과들을 모든 이성인식들의 학문적 형식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가질 수 있을.
→ 범주들의 이러한 도표에 대해 아마도 중요한 결과들을 모든 이성인식들의 학문적 형식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가질 수 있을 정중한 고찰들이 시도되도록 한다.
Denn daß diese Tafel im theoretischen Teile der Philosophie ungemein dienlich, ja unentbehrlich sei, den Plan zum Ganzen einer Wissenschaft, so fern sie auf Begriffen a priori beruht, vollständig zu entwerfen, und sie mathematisch nach bestimmten Prinzipien abzuteilen; erhellet schon von selbst daraus, daß gedachte Tafel alle Elementarbegriffe des Verstandes vollständig, ja selbst die Form eines Systems derselben im menschlichen Verstande enthält, folglich auf alle Momente einer vorhabenden spekulativen Wissenschaft, ja sogar ihre Ordnung, Anweisung gibt, wie ich denn auch davon anderwärts¹ eine Probe gegeben habe.
왜냐하면 이러한 도표는 철학의 이론적 부분들 안에서 대단히 유용하고, 빼놓을 수 없을, 학문 전체에 대해 설계를, 그 학문이 개념들에 선험적으로 근거하는 한, 완전히 구상하기 위해, 그리고 그 개념들을 수학적으로 규정된 원칙들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이미 그 결과 스스로에 대해 밝혀졌다, 생각된 도표가 지성의 모든 기초개념들을 완전히, 인간 지성에 그 기초개념들의 체계의 형식을 포함하고, 그 결과 현존하는 사변적 학문의 모든 동인들에 대해, 더욱이 그것의 질서, 명령을 부여한다, 내가 또한 그에 대해 다른 곳에¹ 표본을 제시했던 것처럼.
→ 왜냐하면 이러한 도표는 학문이 개념들에 선험적으로 근거하는 한 학문 전체에 대해 설계를 완전히 구상하기 위해, 그리고 그 개념들을 수학적으로 규정된 원칙들에 따라 구분하기 위해 철학의 이론적 부분들 안에서 대단히 유용하고,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또한 그에 대해 다른 곳에¹ 표본을 제시했던 것처럼, 이미 생각된 학문이 지성의 모든 기초개념들을 완전히, 더욱이 인간 지성 안에서 그 기초개념들의 체계의 형식을 포함하고, 그 결과 현존하는 사변적 학문의 모든 동인들에 대해, 더욱이 그것의 질서를, 명령을 부여한다는 그 결과 자체로 밝혀진 것이다.
Hier sind nun einige dieser Anmerkungen.
여기에는 이러한 주해들의 몇몇만이 있다.
→ 여기에는 이러한 주해들의 몇몇만이 있다.

¹Metaphys. Anfangsgr. der Naturwissensch.
¹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


-蟲-
Es sei mir erlaubt, diese reine, aber abgeleitete Verstandesbegriffe die Prädikabilien des reinen Verstandes (im Gegensatz der Prädikamente) zu nennen. Wenn man die ursprüngliche und primitive Begriffe hat, so lassen sich die abgeleiteten und subalternen leicht hinzufügen, und der Stammbaum des reinen Verstandes völlig ausmalen. Da es mir hier nicht um die Vollständigkeit des Systems, sondern nur der Prinzipien zu einem System zu tun ist, so verspare ich diese Ergänzung auf eine andere Beschäftigung. Man kann aber diese Absicht ziemlich erreichen, wenn man die Ontologischen Lehrbücher zur Hand nimmt, und z.B. der Kategorie der Kausalität die Prädikabilien der Kraft, der Handlung, des Leidens; der der Gemeinschaft die der Gegenwart, des Widerstandes; den Prädikamenten der Modalität die des Entstehens, Vergehens, der Veränderung usw. unterordnet. Die Kategorien mit den modis der reinen Sinnlichkeit oder auch unter einander verbunden, geben eine große Menge abgeleiteter Begriffe a priori, die zu bemerken, und wo möglich, bis zur Vollständigkeit zu verzeichnen, eine nützliche und nicht unangenehme, hier aber entbehrliche Bemühung sein würde.
→ 이러한 순수한, 그러나 파생된 지성개념들을 순수 지성의 준술어들(술어들과 달리)이라 부르는 것이 나에게 허락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개념들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 개념들에 파생된 하위의 개념들을 쉽게 덧붙이도록 할 것이고, 순수 지성의 계보를 완전히 그려 넣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여기에서 체계의 완전성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단지 체계에 대한 원칙들에 대해 관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보완을 다른 연구로 미룬다.→ 그러나 사람들이 만일 사람들이 존재론적인 교과서들을 손에 넣는다면, 그리고 예를 들어 인과의 범주에 힘, 능동, 수동의 준술어들을, 상호성의 범주에 현존, 저항의 준술어들을; 양태의 술어들에 생성, 소멸, 변화 등의 준술어들을 종속시킨다면 이러한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할 수 있다.→ 그 범주들은 순수 감성의 양식들과 결합하거나 또한 상호간에 결합하고, 선험적으로 엄청난 수의 파생된 개념들을 주며, 그것들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완전성에까지 기입하는 것은, 유용하고 곤혹스럽지 않은, 그러나 여기에서는 불필요한 수고일 것이다.

Der Definitionen dieser Kategorien überhebe ich mich in dieser Abhandlung geflissentlich, ob ich gleich im Besitz derselben sein möchte. Ich werde diese Begriffe in der Folge bis auf den Grad zergliedern, welcher in Beziehung auf die Methodenlehre, die ich bearbeite, hinreichend ist.
→ 나는 이러한 논의에서 이러한 범주들의 정의들로부터 고의적으로 벗어난다. 비록 내가 그 정의들을 갖고자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러한 개념들을 다음 장에서 내가 다루는 방법론과 관련이 있는 충분한 정도까지 분해할 것이다.


Es sei mir erlaubt, diese reine, aber abgeleitete Verstandesbegriffe die Prädikabilien des reinen Verstandes (im Gegensatz der Prädikamente) zu nennen.
그것이 나에게 허락될 것이다, 이러한 순수한, 그러나 파생된 지성개념들을 순수 지성의 준술어들(술어들과 달리)이라 부르는 것.
→ 이러한 순수한, 그러나 파생된 지성개념들을 순수 지성의 준술어들(술어들과 달리)이라 부르는 것이 나에게 허락될 것이다.
Wenn man die ursprüngliche und primitive Begriffe hat, so lassen sich die abgeleiteten und subalternen leicht hinzufügen, und der Stammbaum des reinen Verstandes völlig ausmalen.
만일 사람들이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개념들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 개념들에 파생된 하위의 개념들을 쉽게 덧붙이도록 할 것이고, 순수 지성의 계보를 완전히 그려 넣도록 할 것이다.
→ 만일 사람들이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개념들을 가진다면, 그래서 그 개념들에 파생된 하위의 개념들을 쉽게 덧붙이도록 할 것이고, 순수 지성의 계보를 완전히 그려 넣도록 할 것이다.
Da es mir hier nicht um die Vollständigkeit des Systems, sondern nur der Prinzipien zu einem System zu tun ist, so verspare ich diese Ergänzung auf eine andere Beschäftigung.
그것은 나에게 여기에서 체계의 완전성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단지 체계에 대한 원칙들에 대해 관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보완을 다른 연구로 미룬다.
→ 그것은 나에게 여기에서 체계의 완전성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단지 체계에 대한 원칙들에 대해 관련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보완을 다른 연구로 미룬다.
Man kann aber diese Absicht ziemlich erreichen, wenn man die Ontologischen Lehrbücher zur Hand nimmt, und z.B. der Kategorie der Kausalität die Prädikabilien der Kraft, der Handlung, des Leidens; der der Gemeinschaft die der Gegenwart, des Widerstandes; den Prädikamenten der Modalität die des Entstehens, Vergehens, der Veränderung usw. unterordnet.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존재론적인 교과서들을 손에 넣는다면, 그리고 예를 들어 인과의 범주에 힘, 능동, 수동의 준술어들을, 상호성의 범주에 현존, 저항의 준술어들을; 양태의 술어들에 생성, 소멸, 변화 등의 준술어들을 종속시킨다면.
→ 그러나 사람들이 만일 사람들이 존재론적인 교과서들을 손에 넣는다면, 그리고 예를 들어 인과의 범주에 힘, 능동, 수동의 준술어들을, 상호성의 범주에 현존, 저항의 준술어들을; 양태의 술어들에 생성, 소멸, 변화 등의 준술어들을 종속시킨다면 이러한 목적을 상당부분 달성할 수 있다.
Die Kategorien mit den modis der reinen Sinnlichkeit oder auch unter einander verbunden, geben eine große Menge abgeleiteter Begriffe a priori, die zu bemerken, und wo möglich, bis zur Vollständigkeit zu verzeichnen, eine nützliche und nicht unangenehme, hier aber entbehrliche Bemühung sein würde.
그 범주들은 순수 감성의 양식들과 혹은 또한 상호간에 결합하고, 선험적으로 파생된 개념들의 엄청난 수를 주며, 그것들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완전성에까지 기입하는 것은, 유용하고 곤혹스럽지 않은, 그러나 여기에서는 불필요한 수고일 것이다.
→ 그 범주들은 순수 감성의 양식들과 결합하거나 또한 상호간에 결합하고, 선험적으로 엄청난 수의 파생된 개념들을 주며, 그것들을 인지하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완전성에까지 기입하는 것은, 유용하고 곤혹스럽지 않은, 그러나 여기에서는 불필요한 수고일 것이다.

Der Definitionen dieser Kategorien überhebe ich mich in dieser Abhandlung geflissentlich, ob ich gleich im Besitz derselben sein möchte.
이러한 범주들의 정의들로부터 나는 자유롭다 이러한 논의에서 고의적으로, 비록 내가 그 정의들의 점유를 원한다 할지라도.
→ 나는 이러한 논의에서 이러한 범주들의 정의들로부터 고의적으로 벗어난다. 비록 내가 그 정의들을 갖고자 하더라도 말이다.
Ich werde diese Begriffe in der Folge bis auf den Grad zergliedern, welcher in Beziehung auf die Methodenlehre, die ich bearbeite, hinreichend ist.
나는 이러한 개념들을 다음 장에서 어느 정도까지 분해할 것이다, 그 정도가 방법론과 관련이 있는, 내가 다루는, 충분한.
→ 나는 이러한 개념들을 다음 장에서 내가 다루는 방법론과 관련이 있는 충분한 정도까지 분해할 것이다.

-蟲-
Es war ein eines scharfsinigen Mannes würdiger Anschlag des Aristoteles, diese Grundbegriffe aufzusuchen. Da er aber kein Principium hatte, so raffte er sie auf, wie sie ihm aufstießen, und trieb deren zuerst zehn auf, die er Kategorien (Prädikamente) nannte. In der Folge glaubte er noch ihrer fünfe aufgefunden zu haben, die er unter dem Namen der Postprädikamente hinzufügte. Allein seine Tafel blieb noch immer mangelhaft. Außerdem finden sich auch einige modi der reinen Sinnlichkeit darunter, (quando, ubi, situs, imgleichen prius, simul,) auch ein empirischer, (motus,) die in dieses Stammregister des Verstandes gar nicht gehören, oder es sind auch die abgeleiteten Begriffe mit unter die Urbegriffe gezählt, (actio, passio,) und an einigen der letztern fehlt es gänzlich.
→ 이러한 근본개념들을 찾아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도에 걸맞는 통찰력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원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개념들이 그에게 떠오르는 대로 긁어 모았고 그가 범주들(빈사)이라 명명했던 것들의 10개를 우선 부풀렸다.→ 그 결과 그는 또 그가 후빈사라는 이름으로 첨언하였던 그 범주들 다섯개를 발견해 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도표만은 여전히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성의 몇몇 양식들(시간, 장소, 위치, 마찬가지로 선행, 동시)이 또한 그 아래에서 나타난다. 또한 감각적이며 지성의 이러한 명단에 결코 속하지 않는 것(운동), 혹은 또한 유도된 개념들이 때때로 근본개념들로 헤아려진 것(능동, 수동)도 나타나고 후자의 고유한 것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부족하다.

Um der letztern willen ist also noch zu bemerken: daß die Kategorien, als die wahren Stammbegriffe des reinen Verstandes, auch ihre eben so reine abgeleitete Begriffe haben, die in einem vollständigen System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keinesweges übergangen werden können, mit deren bloßer Erwähnung aber ich in einem bloß kritischen Versuch zufrieden sein kann.
→ 그러므로 후자를 위하여: 순수 지성의 참된 근본개념들로서, 또한 그것들이 마찬가지로 초월론적-철학의 완전한 체계에서 어떤 식으로도 넘어서게 될 수 없는 순수 파생개념들을 가지는 범주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나는 순전히 비판적 연구에 있어서 그 파생개념들의 순전한 언급을 가지고 만족할 수 있다.


Es war ein eines scharfsinigen Mannes würdiger Anschlag des Aristoteles, diese Grundbegriffe aufzusuchen.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도에 걸맞는 통찰력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러한 근본개념들을 찾아내는 것은.
→ 이러한 근본개념들을 찾아내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도에 걸맞는 통찰력 있는 방법의 하나이다.
Da er aber kein Principium hatte, so raffte er sie auf, wie sie ihm aufstießen, und trieb deren zuerst zehn auf, die er Kategorien (Prädikamente) nannte.
그러나 그는 어떠한 원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개념들을 긁어 모았다, 그 개념들이 그에게 떠오르는 대로, 그리고 먼저 그것들의 10개를 부풀렸다, 그것들을 그가 범주들(빈사)이라 명명했던.
→ 그러나 그는 어떠한 원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그 개념들이 그에게 떠오르는 대로 긁어 모았고 그가 범주들(빈사)이라 명명했던 것들의 10개를 우선 부풀렸다.
In der Folge glaubte er noch ihrer fünfe aufgefunden zu haben, die er unter dem Namen der Postprädikamente hinzufügte.
그 결과 그는 또 그 범주들 다섯개를 발견해 냈다고 믿었다, 그 범주들을 그가 후빈사라는 이름으로 첨언하였던.
→ 그 결과 그는 또 그가 후빈사라는 이름으로 첨언하였던 그 범주들 다섯개를 발견해 냈다고 믿었다.
Allein seine Tafel blieb noch immer mangelhaft.
그의 도표만은 여전히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 그러나 그의 도표만은 여전히 언제나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 있었다.
Außerdem finden sich auch einige modi der reinen Sinnlichkeit darunter, (quando, ubi, situs, imgleichen prius, simul,) auch ein empirischer, (motus,) die in dieses Stammregister des Verstandes gar nicht gehören, oder es sind auch die abgeleiteten Begriffe mit unter die Urbegriffe gezählt, (actio, passio,) und an einigen der letztern fehlt es gänzlich.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성의 몇몇 방식들이 또한 나타난다 그 아래에서, (시간, 장소, 위치, 마찬가지로 선행, 동시,) 또한 감각적인 것, (운동) 그것들이 지성의 이러한 명단에 결코 속하지 않는, 혹은 또한 유도된 개념들이 때때로 근본개념들로 헤아려진, (능동, 수동) 그리고 후자의 고유한 것에 있어서 전적으로 부족하다.
→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성의 몇몇 양식들(시간, 장소, 위치, 마찬가지로 선행, 동시)이 또한 그 아래에서 나타난다. 또한 감각적이며 지성의 이러한 명단에 결코 속하지 않는 것(운동), 혹은 또한 유도된 개념들이 때때로 근본개념들로 헤아려진 것(능동, 수동)도 나타나고 후자의 고유한 것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부족하다.

Um der letztern willen ist also noch zu bemerken: daß die Kategorien, als die wahren Stammbegriffe des reinen Verstandes, auch ihre eben so reine abgeleitete Begriffe haben, die in einem vollständigen System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keinesweges übergangen werden können, mit deren bloßer Erwähnung aber ich in einem bloß kritischen Versuch zufrieden sein kann.
후자를 위한 것에 대해서는 그러므로 또한 언급하는 것이다: 범주들은, 순수 지성의 참된 근본개념들로서, 또한 그것들이 마찬가지로 순수 파생개념들을 가지는, 그 파생개념들이 초월론적-철학의 완전한 체계에서 어떤 식으로도 넘어서게 될 수 없는, 그러나 나는 그 파생개념들의 순전한 언급을 가지고 순전히 비판적 연구에 있어서 만족할 수 있다.
→ 그러므로 후자를 위하여: 순수 지성의 참된 근본개념들로서, 또한 그것들이 마찬가지로 초월론적-철학의 완전한 체계에서 어떤 식으로도 넘어서게 될 수 없는 순수 파생개념들을 가지는 범주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나는 순전히 비판적 연구에 있어서 그 파생개념들의 순전한 언급을 가지고 만족할 수 있다.

-蟲-
Tafel der Kategorien 범주들의 도표

 

 1. Der Quantität

1. 양의 범주

 

 

 Einheit 하나

Vielheit 여럿

Allheit. 모두.

 

 2. Der Qualität

2. 질의 범주

 

 3. Der Relation

3. 관계의 범주

 Realität 사실



Negation 부정



Limitation.제한.



 

der Inhärenz und Subsistenz

(substantia et accidens)

 내재와 지속(실체와 우연)의

der Kausalität und Dependenz

(Ursache und Wirkung)

인과와 종속(원인과 작용)의

der Gemeinschaft

(Wechselwirkung zwischen dem Handelnden und Leidenden).

결합(행하는 것과 겪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

 

 4. Der Modalität

4. 양태의 범주

 

 

Möglichkeit-Unmöglichkeit

가능-불가능

Dasein-Nichtsein

현존-무

Notwendigkeit-Zufälligkeit.

불가피성-우연성

 



Dieses ist nun die Verzeichnung aller ursprünglich reinen Begriffe der Synthesis, die der Verstand a priori in sich enthält, und um deren willen er auch nur ein reiner Verstand ist; indem er durch sie allein etwas bei dem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verstehen, d.i. ein Objekt derselben denken kann. Diese Einteilung ist systematisch aus einem gemeinschaftlichen Prinzip, nämlich dem Vermögen zu urteilen, (welches eben so viel ist, als das Vermögen zu denekn,) erzeugt, und nicht rhapsodistisch, aus einer auf gut Glück unternommenen Aufsuchung reiner Begriffe entstanden, von deren Vollzähligkeit man niemals gewiß sein kann, da sie nur durch Induktion geschlossen wird, ohne zu gedenken, daß man doch auf die letztere Art niemals einsieht, warum denn gerade diese und nicht andre Begriffe dem reinen Verstande beiwohnen.
→ 이러한 것은 이제 지성이 선험적으로 내포하는 종합의 모든 본래의 순수 개념들에 대한 기입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을 위해 지성은 또한 단지 순수한 지성일 따름이다; 지성은 개념들을 통하여서만 직관의 잡다에 있어서의 어떤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즉 그 지성의 대상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은 체계적으로 내재적 원칙으로부터, 즉 판단하는 능력으로부터, (그 능력이 생각하는 능력과 같은,) 산출되고, 시적으로, 요행으로 수행된 순수한 개념들의 발견으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또한 후자의 방법으로는 도대체 왜 다른 개념들이 아닌 바로 이 개념들이 순수 지성에 내재하는지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유함이 없이는, 그 개념들이 단지 귀납을 통해서만 완결되기 때문에, 그 개념들의 완비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Dieses ist nun die Verzeichnung aller ursprünglich reinen Begriffe der Synthesis, die der Verstand a priori in sich enthält, und um deren willen er auch nur ein reiner Verstand ist; indem er durch sie allein etwas bei dem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verstehen, d.i. ein Objekt derselben denken kann.
이러한 것은 이제 기입이다 종합의 모든 본래의 순수 개념들에 대한, 그 개념들을 지성이 선험적으로 내포하는, 그리고 그 개념들을 위해 지성은 또한 단지 순수한 지성일 따름이다; 지성은 개념들을 통하여서만 직관의 잡다에 있어서의 어떤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즉 그 지성의 대상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 이러한 것은 이제 지성이 선험적으로 내포하는 종합의 모든 본래의 순수 개념들에 대한 기입이다. 그리고 그 개념들을 위해 지성은 또한 단지 순수한 지성일 따름이다; 지성은 개념들을 통하여서만 직관의 잡다에 있어서의 어떤 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즉 그 지성의 대상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Diese Einteilung ist systematisch aus einem gemeinschaftlichen Prinzip, nämlich dem Vermögen zu urteilen, (welches eben so viel ist, als das Vermögen zu denekn,) erzeugt, und nicht rhapsodistisch, aus einer auf gut Glück unternommenen Aufsuchung reiner Begriffe entstanden, von deren Vollzähligkeit man niemals gewiß sein kann, da sie nur durch Induktion geschlossen wird, ohne zu gedenken, daß man doch auf die letztere Art niemals einsieht, warum denn gerade diese und nicht andre Begriffe dem reinen Verstande beiwohnen.
이러한 구분은 체계적으로 내재적 원칙으로부터, 즉 판단하는 능력으로부터, (그 능력이 같은, 생각하는 능력과,) 산출되고, 시적으로, 요행으로 수행된 순수한 개념들의 발견으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 그 개념들에 대해 완비를 사람들은 결코 확실할 수 없다, 그 개념들이 단지 귀납을 통해서만 완결되기 때문에, 사유됨이 없이, 사람들이 또한 후자의 방법으로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 도대체 왜 다른 개념들이 아닌 바로 이 개념들이 순수 지성에 내재하는지.
→ 이러한 구분은 체계적으로 내재적 원칙으로부터, 즉 판단하는 능력으로부터, (그 능력이 생각하는 능력과 같은,) 산출되고, 시적으로, 요행으로 수행된 순수한 개념들의 발견으로부터 발생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또한 후자의 방법으로는 도대체 왜 다른 개념들이 아닌 바로 이 개념들이 순수 지성에 내재하는지 결코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유함이 없이는, 그 개념들이 단지 귀납을 통해서만 완결되기 때문에, 그 개념들의 완비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

-蟲-
Derselbe Verstand also, und zwar durch eben dieselben Handlungen, wodurch er in Begriffen, vermittelst der analytischen Einheit, die logische Form eines Urteils zu Stande brachte, bringt auch, vermittelst der synthetischen Einheit des Mannigfaltigen in der Anschauung überhaupt, in seine Vorstellungen einen transzendentalen Inhalt, weswegen sie reine Verstandesbegriffe heißen, die a priori auf Objekte gehen, welches die allgemeine Logik nicht leisten kann.
→ 그러므로 동일한 지성이, 그리고 더욱이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지성이 개념들 안에, 분석적 통일에 따라서, 그 통일이 판단의 논리적 형식을 성립시켰던 동일한 활동들을 통하여, 직관 일반에서 잡다의 종합적 통일에 따라서, 그 잡다의 표상들 안으로 초월론적 내용을 또한 가져오고, 그 때문에 그 표상들을 선험적으로 대상에 속하는 순수지성개념들이라 부르는데, 그러한 것을 일반 논리학은 수행할 수 없다.
Auf solche Weise entspringen gerade so viel reine Verstandesbegriffe, welche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gehen, als es in der vorigen Tafel Tafel logische Funktionen in allen möglichen Urteilen gab: denn der Verstand ist durch gedachte Funktionen völlig erschöpft, und sein Vermögen dadurch gänzlich ausgemessen. Wir wollen diese Begriffe, nach dem Aristoteles, Kategorien nennen, indem unsre Absicht uranfänglich mit der seinigen zwar einerlei ist, ob sie sich gleich davon in der Ausführung gar sehr entfernet.
→ 그러한 방식으로부터 직접, 앞선 도표에 모든 가능한 판단들에 있어서 논리적 기능들이 있던 그 만큼의, 선험적으로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속하는 순수 지성개념들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논의된 기능들을 통하여 완전히 다 길어내어지고, 그 지성의 능력들이 그를 통해 완전하게 측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아리스토테레스에 따라서 범주들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범주들 자체가 비록 그로부터 수행 중에 꽤나 많이 멀리 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도가 애초부터 그의 의도와 더욱이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Derselbe Verstand also, und zwar durch eben dieselben Handlungen, wodurch er in Begriffen, vermittelst der analytischen Einheit, die logische Form eines Urteils zu Stande brachte, bringt auch, vermittelst der synthetischen Einheit des Mannigfaltigen in der Anschauung überhaupt, in seine Vorstellungen einen transzendentalen Inhalt, weswegen sie reine Verstandesbegriffe heißen, die a priori auf Objekte gehen, welches die allgemeine Logik nicht leisten kann.
그러므로 동일한 지성이, 그리고 더욱이 마찬가지로 동일한 활동들을 통하여, 그를 통하여 지성이 개념들 안에, 분석적 통일에 따라서, 그 통일이 판단의 논리적 형식을 성립시켰던, 또한 가져오는, 직관 일반에서 잡다의 종합적 통일에 따라서, 그 잡다의 표상들 안으로 초월론적 내용을, 그 때문에 그 표상들을 순수지성개념들이라 부르는, 그 개념들이 선험적으로 대상에 속하는, 그러한 것을 일반 논리학은 수행할 수 없다.
→ 그러므로 동일한 지성이, 그리고 더욱이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지성이 개념들 안에, 분석적 통일에 따라서, 그 통일이 판단의 논리적 형식을 성립시켰던 동일한 활동들을 통하여, 직관 일반에서 잡다의 종합적 통일에 따라서, 그 잡다의 표상들 안으로 초월론적 내용을 또한 가져오고, 그 때문에 그 표상들을 선험적으로 대상에 속하는 순수지성개념들이라 부르는데, 그러한 것을 일반 논리학은 수행할 수 없다.

Auf solche Weise entspringen gerade so viel reine Verstandesbegriffe, welche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gehen, als es in der vorigen Tafel logische Funktionen in allen möglichen Urteilen gab: denn der Verstand ist durch gedachte Funktionen völlig erschöpft, und sein Vermögen dadurch gänzlich ausgemessen.
그러한 방식으로부터 직접 그 만큼의 순수 지성개념들이 발생한다, 선험적으로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속하는, 앞선 도표에 모든 가능한 판단들에 있어서 논리적 기능들이 있던 만큼: 왜냐하면 지성은 가정한 기능들을 통하여 완전히 다 길어내어지고, 그 지성의 능력들이 그를 통해 전체적으로 측정되기 때문이다.
→ 그러한 방식으로부터 직접, 앞선 도표에 모든 가능한 판단들에 있어서 논리적 기능들이 있던 그 만큼의, 선험적으로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속하는 순수 지성개념들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지성은 논의된 기능들을 통하여 완전히 다 길어내어지고, 그 지성의 능력들이 그를 통해 완전하게 측정되기 때문이다.
Wir wollen diese Begriffe, nach dem Aristoteles, Kategorien nennen, indem unsre Absicht uranfänglich mit der seinigen zwar einerlei ist, ob sie sich gleich davon in der Ausführung gar sehr entfernet.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아리스토테레스에 따라서, 범주들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우리의 의도가 애초부터 그의 의도와 더욱이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 범주들 자체가 비록 그로부터 수행에 있어서 꽤나 많이 멀리 떨어졌다 하더라도.
→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아리스토테레스에 따라서 범주들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범주들 자체가 비록 그로부터 수행 중에 꽤나 많이 멀리 떨어진다 하더라도 우리의 의도가 애초부터 그의 의도와 더욱이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蟲-
Die reine Synthesis, allgemein vorgestellt, gibt nun den reinen Verstandesbegriff. Ich verstehe aber unter dieser Synthesis diejenige, welche auf einem Grunde der synthetischen Einheit a priori beruht: so ist unser Zählen (vornehmlich ist es in größeren Zahlen merklicher) eine Synthesis nach Begriffen, weil sie nach einem gemeinschaftlichen Grunde der Einheit geschieht (z.E. der Dekadik). Unter diesem Begriffe wird also die Einheit in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notwendig.
→ 순수 종합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순수 지성개념을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종합을 종합적 통일의 토대에 선험적으로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의 계산은 (특히 큰 수들에서 명백한데) 개념들에 따른 종합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통일의 공통된 근거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진법).→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들 아래에서 잡다의 종합에 있어서 통일은 불가피하다.
Analytisch werden verschiedene Vorstellungen unter einen Begriff gebracht, (ein Geschäfte, wovon die allgemeine Logik handelt). Aber nicht die Vorstellungen, sondern die reine Synthesis der Vorstellungen auf Begriffe zu bringen, lehrt die transz. Logik. Das erste, was uns zum Behuf der Erkenntnis aller Gegenstände a priori gegeben sein muß, ist das Mannigfaltige der reinen Anschauung;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ldungskraft ist das zweite, gibt aber noch keine Erkenntnis. Die Begriffe, welche dieser reinen Synthesis Einheit geben, und lediglich in der Vorstellung dieser notwendigen synthetischen Einheit bestehen, tun das dritte zum Erkenntnisse eines vorkommenden Gegenstandes, und beruhen auf dem Verstande.
→ 상이한 표상들은 분석적으로 개념 아래로 옮겨진다. (일반 논리학이 하는 작업)→ 그러나 표상들이 아니라 오히려 표상들의 순수한 종합을 개념들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초월론적 논리학이 가르친다.→ 우리에게 모든 대상들의 인식의 목적으로 주어져야만 하는 최초의 것은 순수 직관의 잡다이다; 구상력을 통한 이러한 잡다의 종합은 두번째 것이나 어떠한 인식도 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순수한 종합에 통일을 주는, 그리고 다만 이러한 불가피한 종합적 통일의 표상 안에서만 존립하는 개념들은 현존하는 대상의 인식들에 대한 세번째 것을 행하며, 지성에 근거한다.
Dieselbe Funktion, welche den verschiedenen Vorstellungen in einem Urteile Einheit gibt, die gibt auch der bloßen Synthesis verschiedener Vorstellungen in einer Anschauung Einheit, welche, allgemein ausgedruckt, der reine Verstandesbegriff heißt.
→ 상이한 표상들에게 판단 안에서 통일을 주는, 또한 직관 안에서 상이한 표상들의 순전한 종합에 통일을 주는 그러한 동일한 기능이, 일반적으로 표현되면, 순수 지성개념이라 부른다.


Die reine Synthesis, allgemein vorgestellt, gibt nun den reinen Verstandesbegriff.
순수 종합은, 일반적으로 의미될 때, 순수 지성개념을 제시한다.
→ 순수 종합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순수 지성개념을 제시한다.
Ich verstehe aber unter dieser Synthesis diejenige, welche auf einem Grunde der synthetischen Einheit a priori beruht: so ist unser Zählen (vornehmlich ist es in größeren Zahlen merklicher) eine Synthesis nach Begriffen, weil sie nach einem gemeinschaftlichen Grunde der Einheit geschieht (z.E. der Dekadik).
그러나 나는 이러한 종합을 이것으로 이해한다, 종합적 통일의 토대에 선험적으로 근거하는: 그래서 우리의 계산은 (특히 큰 수들에서 명백하다) 개념들에 따른 종합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통일의 공통된 근거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진법).
→ 그러나 나는 이러한 종합을 종합적 통일의 토대에 선험적으로 근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우리의 계산은 (특히 큰 수들에서 명백한데) 개념들에 따른 종합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통일의 공통된 근거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0진법).
Unter diesem Begriffe wird also die Einheit in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notwendig.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들 아래에서 잡다의 종합에 있어서 통일은 불가피하다.
→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들 아래에서 잡다의 종합에 있어서 통일은 불가피하다.

Analytisch werden verschiedene Vorstellungen unter einen Begriff gebracht, (ein Geschäfte, wovon die allgemeine Logik handelt).
분석적으로 상이한 표상들은 개념 아래로 옮겨진다. (일, 일반 논리학이 그에 대해 하는)
→ 상이한 표상들은 분석적으로 개념 아래로 옮겨진다. (일반 논리학이 하는 작업)
Aber nicht die Vorstellungen, sondern die reine Synthesis der Vorstellungen auf Begriffe zu bringen, lehrt die transz. Logik.
그러나 표상들이 아니라 오히려 표상들의 순수한 종합을 개념들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초월론적 논리학이 가르친다.
→ 그러나 표상들이 아니라 오히려 표상들의 순수한 종합을 개념들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초월론적 논리학이 가르친다.
Das erste, was uns zum Behuf der Erkenntnis aller Gegenstände a priori gegeben sein muß, ist das Mannigfaltige der reinen Anschauung;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ldungskraft ist das zweite, gibt aber noch keine Erkenntnis.
첫번째 것은, 우리에게 모든 대상들의 인식의 목적으로 주어져야만 하는, 순수 직관의 잡다이다; 구상력을 통한 이러한 잡다의 종합은 두번째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인식도 주지 않는다.
→ 우리에게 모든 대상들의 인식의 목적으로 주어져야만 하는 최초의 것은 순수 직관의 잡다이다; 구상력을 통한 이러한 잡다의 종합은 두번째 것이나 어떠한 인식도 주지는 않는다.
Die Begriffe, welche dieser reinen Synthesis Einheit geben, und lediglich in der Vorstellung dieser notwendigen synthetischen Einheit bestehen, tun das dritte zum Erkenntnisse eines vorkommenden Gegenstandes, und beruhen auf dem Verstande.
개념들, 이러한 순수한 종합에 통일을 주는, 그리고 다만 이러한 불가피한 종합적 통일의 표상 안에서만 존립하는, 현존하는 대상의 인식들에 대한 세번째 것을 하고, 지성에 근거한다.
→ 이러한 순수한 종합에 통일을 주는, 그리고 다만 이러한 불가피한 종합적 통일의 표상 안에서만 존립하는 개념들은 현존하는 대상의 인식들에 대한 세번째 것을 행하며, 지성에 근거한다.

Dieselbe Funktion, welche den verschiedenen Vorstellungen in einem Urteile Einheit gibt, die gibt auch der bloßen Synthesis verschiedener Vorstellungen in einer Anschauung Einheit, welche, allgemein ausgedruckt, der reine Verstandesbegriff heißt.
동일한 기능, 상이한 표상들에게 판단 안에서 통일을 주는, 또한 직관 안에서 상이한 표상들의 순전한 종합에 통일을 주는, 그러한 기능이, 일반적으로 표현되면, 순수 지성개념이라 부른다.
→ 상이한 표상들에게 판단 안에서 통일을 주는, 또한 직관 안에서 상이한 표상들의 순전한 종합에 통일을 주는 그러한 동일한 기능이, 일반적으로 표현되면, 순수 지성개념이라 부른다.

-蟲-
Ich verstehe aber unter Synthesis in der allgemeinsten Bedeutung die Handlung, verschiedene Vorstellungen zu einander hinzuzutun, und ihre Mannigfaltigkeit in einer Erkenntnis zu begreifen. Eine solche Synthesis ist rein, wenn das Mannigfaltige nicht empirisch, sondern a priori gegeben ist (wie das im Raum und der Zeit). Vor aller Analysis unserer Vorstellungen müssen diese zuvor gegeben sein, und es können keine Begriffe dem Inhalte nach analytisch entspringen. Die Synthesis eines Mannigfaltigen aber (es sei empirisch oder a priori gegeben), bringt zuerst eine Erkenntnis hervor, die zwar anfänglich noch roh und verworren sein kann, und also der Analysis bedarf; allein die Synthesis ist doch dasjenige, was eigentlich die Elemente zu Erkenntnissen sammlet, und zu einem gewissen Inhalte vereinigt; sie ist also das erste, worauf wir Acht zu geben haben, wenn wir über den ersten Ursprung unserer Erkenntnis urteilen wollen.
→ 그러나 나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합이란 말을, 상이한 표상들을 상호간에 더하는, 그리고 그 표상들의 잡다성을 인식 안에서 파악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 그 잡다가 경험적이지 않고, 오히려 선험적으로 주어질 때 (공간과 시간 안에서 그 잡다와 같이) 그러한 종합은 순수하다.→ 우리들의 표상들에 대한 모든 분석에 앞서 이러한 표상들이 먼저 제시되어야만 하고, 어떠한 개념들도 내용에서 분석에 따라 생겨날 수는 없다.→ 그러나 잡다의 종합은 (그 잡다가 경험적으로나 선험적으로 주어질), 최초로 인식을 산출하고, 그 인식은 더욱이 원래부터 여전히 조야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그러므로 분석이 필요하다; 오로지 종합만이 참으로 인식들에 대한 요소들을 모으는 것이고, 확실한 내용으로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은 우리가 우리의 인식의 최초 기원에 대해 판단하고자 할 때 그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첫번째 것이다.
Die Synthesis überhaupt ist, wie wir künftig sehen werden, die bloße Wirkung der Einbildungskraft, einer blinden, obgleich unentbehrlichen Funktion der Seele, ohne die wir überall keine Erkenntnis haben würden, der wir uns aber selten nur einmal bewußt sind. Allein, diese Synthesis auf Begriffe zu bringen, das ist eine Funktion, die dem Verstande zukommt, und wodurch er uns allererst die Erkenntnis in eigentlicher Bedeutung verschaffet.
→ 종합일반은 다음에 이야기될 것처럼 구상력의 순수한 작용이고, 맹목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불가결한, 그 기능 없이는 우리가 결코 어떠한 인식도 가지지 못할, 그러나 우리가 드물게 단지 한 번 의식할 뿐인 영혼의 기능이다.→ 오로지, 개념들에 대한 이러한 종합을 가져오는 것, 그것만이 지성에 걸맞는 기능이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지성은 우리에게 최초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인식을 마련해 준다.


Ich verstehe aber unter Synthesis in der allgemeinsten Bedeutung die Handlung, verschiedene Vorstellungen zu einander hinzuzutun, und ihre Mannigfaltigkeit in einer Erkenntnis zu begreifen.
그러나 나는 종합이란 말로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활동을 이해한다, 상이한 표상들을 상호간에 더하는, 그리고 그 표상들의 잡다성을 인식 안에서 파악하는.
→ 그러나 나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합이란 말을, 상이한 표상들을 상호간에 더하는, 그리고 그 표상들의 잡다성을 인식 안에서 파악하는 활동으로 이해한다.
Eine solche Synthesis ist rein, wenn das Mannigfaltige nicht empirisch, sondern a priori gegeben ist (wie das im Raum und der Zeit).
그러한 종합은 순수하다, 그 잡다가 경험적이지 않고, 오히려 선험적으로 주어질 때 (공간과 시간 안에서 그 잡다와 같이).
→ 그 잡다가 경험적이지 않고, 오히려 선험적으로 주어질 때 (공간과 시간 안에서 그 잡다와 같이) 그러한 종합은 순수하다.
Vor aller Analysis unserer Vorstellungen müssen diese zuvor gegeben sein, und es können keine Begriffe dem Inhalte nach analytisch entspringen.
우리들의 표상들에 대한 모든 분석에 앞서 이러한 표상들이 먼저 제시되어야만 하고, 어떠한 개념들도 내용에서 분석에 따라 생겨날 수는 없다.
→ 우리들의 표상들에 대한 모든 분석에 앞서 이러한 표상들이 먼저 제시되어야만 하고, 어떠한 개념들도 내용에서 분석에 따라 생겨날 수는 없다.
Die Synthesis eines Mannigfaltigen aber (es sei empirisch oder a priori gegeben), bringt zuerst eine Erkenntnis hervor, die zwar anfänglich noch roh und verworren sein kann, und also der Analysis bedarf; allein die Synthesis ist doch dasjenige, was eigentlich die Elemente zu Erkenntnissen sammlet, und zu einem gewissen Inhalte vereinigt; sie ist also das erste, worauf wir Acht zu geben haben, wenn wir über den ersten Ursprung unserer Erkenntnis urteilen wollen.
그러나 잡다의 종합은 (그 잡다가 경험적으로나 선험적으로 주어질), 최초로 인식을 산출하고, 그 인식은 더욱이 원래부터 여전히 조야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그러므로 분석이 필요하다; 오로지 종합만이 그것, 참으로 인식들에 대한 요소들을 모으는 것이고, 확실한 내용으로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은 첫번째 것이다,그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우리가 우리의 인식의 최초 기원에 대해 판단하고자 할 때.
→ 그러나 잡다의 종합은 (그 잡다가 경험적으로나 선험적으로 주어질), 최초로 인식을 산출하고, 그 인식은 더욱이 원래부터 여전히 조야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는데, 그러므로 분석이 필요하다; 오로지 종합만이 참으로 인식들에 대한 요소들을 모으는 것이고, 확실한 내용으로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합은 우리가 우리의 인식의 최초 기원에 대해 판단하고자 할 때 그에 대해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는 첫번째 것이다.

Die Synthesis überhaupt ist, wie wir künftig sehen werden, die bloße Wirkung der Einbildungskraft, einer blinden, obgleich unentbehrlichen Funktion der Seele, ohne die wir überall keine Erkenntnis haben würden, der wir uns aber selten nur einmal bewußt sind.
종합일반은, 우리가 다음에 볼 것처럼, 구상력의 순수한 작용이고, 맹목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불가결한 영혼의 기능이다,  기능 없이는 우리가 결코 어떠한 인식도 가지지 못할, 그러나 우리가 드물게 단지 한 번 의식할 뿐인.
→ 종합일반은 다음에 이야기될 것처럼 구상력의 순수한 작용이고, 맹목적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불가결한, 그 기능 없이는 우리가 결코 어떠한 인식도 가지지 못할, 그러나 우리가 드물게 단지 한 번 의식할 뿐인 영혼의 기능이다.
Allein, diese Synthesis auf Begriffe zu bringen, das ist eine Funktion, die dem Verstande zukommt, und wodurch er uns allererst die Erkenntnis in eigentlicher Bedeutung verschaffet.
오로지, 개념들에 대한 이러한 종합을 가져오는 것, 그것만이 기능이다, 지성에 걸맞는, 그리고 그를 통하여 지성은 우리에게 최초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인식을 마련해 준다.
→ 오로지, 개념들에 대한 이러한 종합을 가져오는 것, 그것만이 지성에 걸맞는 기능이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지성은 우리에게 최초로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인식을 마련해 준다.

-蟲-

Σωκράτης
[10a] τάχ᾽, ὠγαθέ, βέλτιον εἰσόμεθα. ἐννόησον γὰρ τὸ τοιόνδε· ἆρα τὸ ὅσιον ὅτι ὅσιόν ἐστιν φιλεῖται ὑπὸ τῶν θεῶν, ἢ ὅτι φιλεῖται ὅσιόν ἐστιν;
곧, 훌륭한 이여, 우리는 더욱 훌륭한 것을 알 것이오. 그대는 이것을 숙고해 보도록 하시오: 혹시 경건한 것이 경건한 것이어서 신들에 의해 사랑을 받는지, 아니면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지?
τάχα : perhaps. τάχυ. 곧.
ὠγαθέ : ὦ ἀγαθέ.
εἰσόμεθα : οἶδα fut. mid. pl.-1st.
ἐννόησον : ἐννοέω aor. sin.-2nd.
 
Εὐθύφρων
οὐκ οἶδ᾽ ὅτι λέγεις, ὦ Σώκρατες.
당신이 말씀하시는 것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ἀλλ᾽ ἐγὼ πειράσομαι σαφέστερον φράσαι. λέγομέν τι φερόμενον καὶ φέρον καὶ ἀγόμενον καὶ ἄγον καὶ ὁρώμενον καὶ ὁρῶν καὶ πάντα τὰ τοιαῦτα μανθάνειςὅτι ἕτερα ἀλλήλων ἐστὶ καὶ ᾗ ἕτερα;
그러나 나는 더욱 확실하게 밝히고자 애쓸 것이오.  우리가 어떤 것이 옮겨지고 옮기며 이끌리고 이끌며 보이고 보는 어떤 것을 말하면서 이러한 모든 것들을 그대는 서로간에 다른 것들이 어떤 식으로 다른 것들인지 이해하시오?
πειράσομαι : πειράω fut. mid. sin-1st. attempt. endeavour.
φράσαι : φράζω aor. inf. point out. show forth. tell.
φερόμενον : φέρω mid.&pass. part. n. sin.-acc. ; ἀγόμενον, ἄγον ; ὁρώμενον,  ὁρῶν;
μανθάνεις : μανθάνω. understand.
 
Εὐθύφρων
ἔγωγέ μοι δοκῶ μανθάνειν.
저에게는 제 자신이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Σωκράτης
οὐκοῦν καὶ φιλούμενόν τί ἐστιν καὶ τούτου ἕτερον τὸ φιλοῦν;
그러면 사랑받는 어떤 것도 이것과 다른 것인 사랑하는 것도 있지 않겠나?
 
Εὐθύφρων
πῶς γὰρ οὔ;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Σωκράτης
[10b] λέγε δή μοι, πότερον τὸ φερόμενον διότι φέρεται φερόμενόν ἐστιν, ἢ δι᾽ ἄλλοτι;
그러면 내게 말해주시오, 옮겨지는 것은 옮겨지기 때문에 옮겨지는 것이겠소,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이겠소?
 
Εὐθύφρων
οὔκ, ἀλλὰ διὰ τοῦτο.
아니, 바로 이 때문이지요.
 
Σωκράτης
καὶ τὸ ἀγόμενον δὴ διότι ἄγεται, καὶ τὸ ὁρώμενον διότι ὁρᾶται;
또한 이끌리는 것은 이제 이끌리기 때문에, 또 보이는 것은 보이기 때문에(그러한 것이겠지)?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Σωκράτης
οὐκ ἄρα διότι ὁρώμενόν γέ ἐστιν, διὰ τοῦτο ὁρᾶται, ἀλλὰ τὸ ἐναντίον διότι ὁρᾶται, διὰ τοῦτο ὁρώμενον· οὐδὲ διότι ἀγόμενόν ἐστιν, διὰ τοῦτο ἄγεται, ἀλλὰ διότι ἄγεται, διὰ τοῦτο ἀγόμενον· οὐδὲ διότι φερόμενον φέρεται, ἀλλὰ διότι φέρεται φερόμενον. ἆρα κατάδηλον, ὦ Εὐθύφρων, ὃ [10c] βούλομαι λέγειν; βούλομαι δὲ τόδε, ὅτι εἴ τι γίγνεται ἤ τι πάσχει, οὐχ ὅτι γιγνόμενόν ἐστι γίγνεται, ἀλλ᾽ ὅτι γίγνεται γιγνόμενόν ἐστιν· οὐδ᾽ ὅτι πάσχον ἐστὶ πάσχει, ἀλλ᾽ ὅτι πάσχει πάσχον ἐστίν· ἢ οὐ συγχωρεῖς οὕτω;
그렇다면 바로 그것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반대로 보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보이는 것이겠군: 이끌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이끌리지는 않고, 오히려 이끌리기 때문에, 이 때문에 이끌리는 것이고: 옮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옮겨지지는 않고, 오히려 옮겨지기 때문에 옮겨지는 것인 게로군. 밝혀지지 않았소, 에우튀프론, 내가 말하려던 것이? 그러니까 나는 이것을 원했소, 만일 어떤 것이 되거나 무엇인가를 겪는다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되지는 않고, 오히려 되기 때문에 되는 것이라는 것을: 겪는 것이기 때문에 겪지는 않고, 오히려 겪기 때문에 겪는 것임을: 아니면 그대는 그렇게 동의하지 않소?
 
Εὐθύφρων
ἔγωγε.
저로서는(동의합니다).
 
Σωκράτης
οὐκοῦν καὶ τὸ φιλούμενον ἢ γιγνόμενόν τί ἐστιν ἢ πάσχον τι ὑπό του;
그러니 사랑받는 것은 무엇이 되는 것이거나 그것에 의해 무엇을 겪는 것 아니겠소?
 
Εὐθύφρων
πάνυ γε.
물론입니다.
 
Σωκράτης
καὶ τοῦτο ἄρα οὕτως ἔχει ὥσπερ τὰ πρότερα· οὐχ ὅτι φιλούμενόν ἐστιν φιλεῖται ὑπὸ ὧν φιλεῖται, ἀλλ᾽ ὅτι φιλεῖται φιλούμενον;
그러니 이것도 그래서 앞서 것들과 같이 그러합니다: 사랑받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들이 사랑받지 않고, 사랑받음으로 해서 사랑받는 것인 게 아닌가요?
 
Εὐθύφρων
ἀνάγκη.
필연적입니다.
 
Σωκράτης
[10d] τί δὴ οὖν λέγομεν περὶ τοῦ ὁσίου, ὦ Εὐθύφρων; ἄλλο τι φιλεῖται ὑπὸ θεῶν πάντων, ὡς ὁ σὸς λόγος;
그러니 우리는 경건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고 있죠, 에우튀프론? 당신의 말처럼,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 말고 다른 어떤 것인가요?
 
Εὐθύφρων
ναί.
네.
 
Σωκράτης
ἆρα διὰ τοῦτο, ὅτι ὅσιόν ἐστιν, ἢ δι᾽ ἄλλο τι;
혹시 이런 것으로 인해, (그러니까) 경건하기 때문에(신들에게 사랑을 받나요), 아니면 다른 어떤 것으로 인해?
 
Εὐθύφρων
οὔκ, ἀλλὰ διὰ τοῦτο.
아니요, 오히려 이것 때문입니다.
 
Σωκράτης
διότι ἄρα ὅσιόν ἐστιν φιλεῖται, ἀλλ᾽ οὐχ ὅτι φιλεῖται, διὰ τοῦτο ὅσιόν ἐστιν;
그러니까 경건하기 때문에 사랑받지만, 사랑받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경건하지는 않은가요?
 
Εὐθύφρων
ἔοικεν.
그렇게 보입니다.
 
Σωκράτης
ἀλλὰ μὲν δὴ διότι γε φιλεῖται ὑπὸ θεῶν φιλούμενόν ἐστι καὶ θεοφιλές.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로 신들로부터 사랑받음으로 인해서 사랑받는 것이고 신들이 사랑하는 것이군요.
 
Εὐθύφρων
πῶς γὰρ οὔ;
 
Σωκράτης
οὐκ ἄρα τὸ θεοφιλὲς ὅσιόν ἐστιν, ὦ Εὐθύφρων, οὐδὲ τὸ ὅσιον θεοφιλές, ὡς σὺ λέγεις, ἀλλ᾽ ἕτερον τοῦτο τούτου.
그러니까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한 것도 아니고, 에우튀프론, 경건한 것도 신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그대 말대로는, 이것들의 서로 다른 것들이군요.
 
Εὐθύφρων
[10e] πῶς δή, ὦ Σώκρατες;
어째서 그렇죠, 소크라테스?

Σωκράτης
ὅτι ὁμολογοῦμεν τὸ μὲν ὅσιον διὰ τοῦτο φιλεῖσθαι, ὅτι ὅσιόν ἐστιν, ἀλλ᾽ οὐ διότι φιλεῖται ὅσιον εἶναι· ἦ γάρ;
우리가 한편으로는 경건한 것은 이 때문에 사랑받는다고 동의하였고, 경건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사랑받는다는 것으로 인해 경건하다고는 동의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요?
 
Εὐθύφρων
ναί.
네.
 
Σωκράτης
τὸ δέ γε θεοφιλὲς ὅτι φιλεῖται ὑπὸ θεῶν, αὐτῷ τούτῳ τῷ φιλεῖσθαι θεοφιλὲς εἶναι, ἀλλ᾽ οὐχ ὅτι θεοφιλές, διὰ τοῦτο φιλεῖσθαι.
그런데 다른 한 편으로 신이 사랑하는 것은 신들에 의해 사랑받기 때문이고, 이와 같은 사랑받는다는 것으로 신이 사랑하는 것일 수 있지만, 신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사랑받지는 않는다고도(우리가 동의했다).
 
Εὐθύφρων
ἀληθῆ λέγεις.
옳게 말씀하십니다.
 
Σωκράτης
ἀλλ᾽ εἴ γε ταὐτὸν ἦν, ὦ φίλε Εὐθύφρων, τὸ θεοφιλὲς καὶ τὸ ὅσιον, εἰ μὲν διὰ τὸ ὅσιον εἶναι ἐφιλεῖτο τὸ [11a] ὅσιον, καὶ διὰ τὸ θεοφιλὲς εἶναι ἐφιλεῖτο ἂν τὸ θεοφιλές, εἰ δὲ διὰ τὸ φιλεῖσθαι ὑπὸ θεῶν τὸ θεοφιλὲς θεοφιλὲς ἦν, καὶ τὸ ὅσιον ἂν διὰ τὸ φιλεῖσθαι ὅσιον ἦν· νῦν δὲ ὁρᾷς ὅτι ἐναντίως ἔχετον, ὡς παντάπασιν ἑτέρω ὄντε ἀλλήλων. τὸ μὲν γάρ, ὅτι φιλεῖται, ἐστὶν οἷον φιλεῖσθαι· τὸ δ᾽ ὅτι ἐστὶν οἷον φιλεῖσθαι, διὰ τοῦτο φιλεῖται. καὶ κινδυνεύεις, ὦ Εὐθύφρων, ἐρωτώμενος τὸ ὅσιον ὅτι ποτ᾽ ἐστίν, τὴν μὲν οὐσίαν μοι αὐτοῦ οὐ βούλεσθαι δηλῶσαι, πάθος δέ τι περὶ αὐτοῦ λέγειν, ὅτι πέπονθε τοῦτο τὸ ὅσιον, φιλεῖσθαι ὑπὸ πάντων [11b] θεῶν· ὅτι δὲ ὄν, οὔπω εἶπες. εἰ οὖν σοι φίλον, μή με ἀποκρύψῃ ἀλλὰ πάλιν εἰπὲ ἐξ ἀρχῆς τί ποτε ὂν τὸ ὅσιον εἴτε φιλεῖται ὑπὸ θεῶν εἴτε ὁτιδὴ πάσχει--οὐ γὰρ περὶ τούτου διοισόμεθα--ἀλλ᾽ εἰπὲ προθύμως τί ἐστιν τό τε ὅσιον καὶ τὸ ἀνόσιον;
그러나 만일 이러한 것이라면, 친애하는 에우튀프론, 신이 사랑하는 것과 경건한 것이, 만일 한편으로 경건한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 사랑받고 있었다면, 신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이 사랑하는 것이 사랑받고 있었을 것이고, 다른 한편 만일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다는 것 때문에 신이 사랑하는 것이 신이 사랑하는 것이라면, 또한 경건한 것은 사랑받음으로 인하여 경건할 테지요: 그런데 지금 그대는 보고 있소 그 한 쌍이 완전히 반대라는 것을, 서로 전적으로 다른 둘로서. 한편의 것은 그러니까,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인 그러한 종류의 것이죠: 다른 한편의 것은 사랑받는 그런 종류의 것이기 때문에, 이 때문에 사랑받습니다. 그리고 그대는 하고자 합니다, 에우튀프론, 경건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물으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의 고유한 것을 나에게 밝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편 이것에 대해 일어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을, 경건한 것이 이것을 겪었기 때문에,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다는 것을: 그러나 무엇인지, 그대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소. 그러니 만일 그대가 좋다면, 나를 감추지 말고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시오 그 시작에서부터 경건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든 일어나는 그 뭐든지 간에 -- 왜냐하면 이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의견이 다르지는 않으니까 -- 아니면 곧장 경건한 것도 또 불경건한 것도 무엇인지를 말하시겠소?
ἐφιλεῖτο : impf. mid&pass. sin.-3rd.
ἔχετον : ἔχω dual.-3nd.
παντάπασιν : all in all, altogether, wholly.
ἑτέρω : ἕτερος dual.-nom.
ἐρωτώμενος : ἐρωτάω mid.&pas. part. sin.-nom. ask.
δηλῶσαι : δηλόω aor. inf. make clear.
πέπονθε : πάσχω pf. sin.-3rd.
ἀποκρύψῃ : hide from, keep hidden from.
πάλιν : again, once more
 
Εὐθύφρων
ἀλλ᾽, ὦ Σώκρατες, οὐκ ἔχω ἔγωγε ὅπως σοι εἴπω ὃ νοῶ· περιέρχεται γάρ πως ἡμῖν ἀεὶ ὃ ἂν προθώμεθα καὶ οὐκ ἐθέλει μένειν ὅπου ἂν ἱδρυσώμεθα αὐτό.
그러나, 소크라테스, 저로서는 제가 아는 것을 그대에게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주위를 맴돌고 항상 우리가 그것을 내놓기만 하면 그리고 머무르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확정지으려고만 하면 어디에서나.
περιέρχεται : περιέρχομαι mid.&pas. sin.-3rd. go round and return.
πως : in any way
ἀεὶ : ever, always.
προθώμεθα : προτίθημι mid.&pas. subj. pl.-1st. set, propose.
μένειν : 머무르다.
ὅπου : in some place. somewhere. ὅπου ἂν, wherever, with subj.
ἱδρυσώμεθα : ἱδρύω aor. mid. subj. pl.-1st. establish.
 
Σωκράτης
τοῦ ἡμετέρου προγόνου, ὦ Εὐθύφρων, ἔοικεν εἶναι [11c] Δαιδάλου τὰ ὑπὸ σοῦ λεγόμενα. καὶ εἰ μὲν αὐτὰ ἐγὼ ἔλεγον καὶ ἐτιθέμην, ἴσως ἄν με ἐπέσκωπτες ὡς ἄρα καὶ ἐμοὶ κατὰ τὴν ἐκείνου συγγένειαν τὰ ἐν τοῖς λόγοις ἔργα ἀποδιδράσκει καὶ οὐκ ἐθέλει μένειν ὅπου ἄν τις αὐτὰ θῇ· νῦν δὲ σαὶ γὰρ αἱ ὑποθέσεις εἰσίν. ἄλλου δή τινος δεῖ σκώμματος· οὐ γὰρ ἐθέλουσι σοὶ μένειν, ὡς καὶ αὐτῷ σοι δοκεῖ.
에우튀프론, 우리 선조 다이달로스의 것들이라 생각합니다 그대에 의해 이야기된 것들이. 그리고 만일 한편으로 그것들을 내가 말하고 있었고 또 세우고 있었다면, 그대가 나를 비웃었을 것이오 그러니까 나에게도 저 혈통에 따라서 이야기 속에서의 것들이 달아난다고 그리고 그리고 머무르려 하지를 않는다고 누군가 그것들을 세우려고 하는 그 어디에서도: 그러나 지금은 그대의 것들인데 왜냐하면 그대가 내놓은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어떤 조롱이 필요하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대에게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으니까요, 그대에게 그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듯이.
ἡμετέρου : our
προγόνου : early-born.
ἐπέσκωπτες : ἐπισκώπτω impf. sin.-2nd. laugh at.
ἀποδιδράσκει : ἀποδιδράσκω sin.-3rd. run away, escape or flee from.
δεῖ : c. gen. there is need of.
σκώμματος : σκῶμμα. 비웃음, 조롱.
 
Εὐθύφρων
ἐμοὶ δὲ δοκεῖ σχεδόν τι τοῦ αὐτοῦ σκώμματος, ὦ Σώκρατες, δεῖσθαι τὰ λεγόμενα· τὸ γὰρ περιιέναι αὐτοῖς τοῦτο καὶ μὴ μένειν ἐν τῷ αὐτῷ οὐκ ἐγώ εἰμι ὁ ἐντιθείς, [11d] ἀλλὰ σύ μοι δοκεῖς ὁ Δαίδαλος, ἐπεὶ ἐμοῦ γε ἕνεκα ἔμενεν ἂν ταῦτα οὕτως.
그러나 제 자신에게는 거의 같은 그 조롱이, 소크라테스,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야기된 것들에 있어서: 왜냐하면 그 이야기된 것들로 맴도는 것과 그것으로 머무르지 않는 것을 제가 아니라 그대가 하도록 하는 사람이고, 그럼 그대는 나에게 다이달로스로 보입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것들이 그렇게 남아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περιιέναι : περίειμι. go round.
ἐμοῦ γε ἕνεκα : as far as depends on me.
 
Σωκράτης
κινδυνεύω ἄρα, ὦ ἑταῖρε, ἐκείνου τοῦ ἀνδρὸς δεινότερος γεγονέναι τὴν τέχνην τοσούτῳ, ὅσῳ ὁ μὲν τὰ αὑτοῦ μόνα ἐποίει οὐ μένοντα, ἐγὼ δὲ πρὸς τοῖς ἐμαυτοῦ, ὡς ἔοικε, καὶ τὰ ἀλλότρια. καὶ δῆτα τοῦτό μοι τῆς τέχνης ἐστὶ κομψότατον, ὅτι ἄκων εἰμὶ σοφός· ἐβουλόμην γὰρ ἄν μοι τοὺς λόγους μένειν καὶ ἀκινήτως ἱδρῦσθαι μᾶλλον ἢ πρὸς τῇ [11e] Δαιδάλου σοφίᾳ τὰ Ταντάλου χρήματα γενέσθαι. καὶ τούτων μὲν ἅδην· ἐπειδὴ δέ μοι δοκεῖς σὺ τρυφᾶν, αὐτός σοι συμπροθυμήσομαι [δεῖξαι] ὅπως ἄν με διδάξῃς περὶ τοῦ ὁσίου. καὶ μὴ προαποκάμῃς· ἰδὲ γὰρ εἰ οὐκ ἀναγκαῖόν σοι δοκεῖ δίκαιον εἶναι πᾶν τὸ ὅσιον.
그러니까 제가, 친구여, 저 분보다 더욱 대단하게 될 수도 있겠군요 기술에 있어서 그 크기가, 그것으로 한편으로 그는 그 자신의 것들만을 머무르지 않도록 만들었는데, 저로서는 제 자신의 것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듯이, 다른 사람의 것들에게도 (머무르지 않도록 할 만큼). 또 참으로 이러한 것이 저에게 그 기술의 미묘한 점입니다, 의도치 않게 내가 지혜롭다는 것이: 왜냐하면 나는 나에게 그 말들이 머무르고 움직임 없이 확립되기를 다이달로스의 지혜에 더하여 탄탈로스의 재물이 생겨나는 것보다 더욱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또 한편 이러한 것들은 충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제게는 그대가 머뭇거리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제 자신이 당신과 같은 바람을 가질 것입니다 경건에 대하여 그대가 나를 가르치도록. 그리고 그대는 때려 치우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보도록 하시오 혹시 그대에게는 모든 경건한 것은 정의로운 것임이 필연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지.
δῆτα : truly
κομψότατον : nice, delicate.
ἄκων : involuntary, constrained.
ἅδην : enough of, to satiety of.
ἀκινήτως : umoved, motionless.
τρυφᾶν : τρυφάω. hang back.
συμπροθυμήσομαι : συμπροθῦμέομαι. have equal desire with.
προαποκάμῃς : προαποκάμνω. give up the task.
ἀναγκαῖόν : necessary
 
Εὐθύφρων
ἔμοιγε
저에게는(그렇게 보입니다).

-蟲-
Des Leitfadens der Entdeckung aller reinen Verstandesbegriffe
Dritter Abschnitt
모든 순수 지성개념들의 발견의 실마리
제 3 장

§ 10. Von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oder Kategorien
§ 10. 순수 지성개념들 혹은 범주들에 대하여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wie mehrmalen schon gesagt word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und erwartet, daß ihr anderwärts, woher es auch sei, Vorstellungen gegeben werden, um diese zuerst in Begriffe zu verwandeln, welches analytisch zugehet. Dagegen hat die transzendentale Logik ein Mannigfaltiges der Sinnlichkeit a priori vor sich liegen, welche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ihr darbietet, um zu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einen Stoff zu geben, ohne den sie ohne allen Inhalt, mithin völlig leer sein würde. Raum und Zeit enthalten nun ein Mannigfaltiges der reinen Anschauung a priori, gehören aber gleichwohl zu den Bedingungen der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unter denen es allein Vorstellungen von Gegenständen empfangen kann, die mithin auch den Begriff derselben jederzeit affizieren müssen. Allein die Spontaneität unseres Denkens erfordert es, daß dieses Mannigfaltige zuerst auf gewisse Weise durch gegangen, aufgenommen, und verbunden werde, um daraus eine Erkenntnis zu machen. Diese Handlung nenne ich Synthesis.
→ 이미 여러 번 이야기되었듯 일반 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추상하고, 그리고 대상들이 최초로 분석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화(化)를 하기 위하여 어딘가 있을 다른 곳에서 그 논리학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반면에 초월론적 논리학은 순수 지성개념들에 그것 없이는 그 초월론적 논리학이 아무런 내용 없이, 따라서 완전히 공허하게 될 그러한 재료를 주기 위해서 초월론적 감성학 초월론적 논리학에 제시하는 감성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그 자신 앞에 놓았다.→ 공간과 시간은 이제 순수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들 아래에서 그 심정이 대상들에 대한 모든 표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따라서 또한 그 표상들은 그 표상들의 개념을 매번 촉발해야만 하는, 그러한 우리의 심정의 수용성의 조건들에 속한다.→ 오로지 우리 사유의 자발성만이 이러한 잡다를 최초로 확실한 방법으로 점검되고, 수용되고, 관련되는 것을, 그를 통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요구한다.→ 이러한 행위를 나는 종합이라 명명한다.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wie mehrmalen schon gesagt word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und erwartet, daß ihr anderwärts, woher es auch sei, Vorstellungen gegeben werden, um diese zuerst in Begriffe zu verwandeln, welches analytisch zugehet.
일반 논리학은 추상한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되었듯,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리고 기대한다, 그 논리학에게 다른 곳에서, 어디엔가 있을, 대상들이 주어지기를, 이 대상들이 최초로 개념화(化)하기 위하여, 그것이분석적으로 이루어지는.
→ 이미 여러 번 이야기되었듯 일반 논리학은 인식의 모든 내용을 추상하고, 그리고 대상들이 최초로 분석적으로 이루어지는 개념화(化)를 하기 위하여 어딘가 있을 다른 곳에서 그 논리학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기를 기대한다.
Dagegen hat die transzendentale Logik ein Mannigfaltiges der Sinnlichkeit a priori vor sich liegen, welche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ihr darbietet, um zu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einen Stoff zu geben, ohne den sie ohne allen Inhalt, mithin völlig leer sein würde.
반면에 초월론적 논리학은 감성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그 자신 앞에 놓았다, 그 잡다를 초월론적 감성학 초월론적 논리학에 제시하는, 순수 지성개념들에 재료를 주기 위해서, 그 재료 없이는 그 초월론적 논리학이 아무런 내용 없이, 따라서 완전히 공허하게 될.
→ 반면에 초월론적 논리학은 순수 지성개념들에 그것 없이는 그 초월론적 논리학이 아무런 내용 없이, 따라서 완전히 공허하게 될 그러한 재료를 주기 위해서 초월론적 감성학 초월론적 논리학에 제시하는 감성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그 자신 앞에 놓았다.
Raum und Zeit enthalten nun ein Mannigfaltiges der reinen Anschauung a priori, gehören aber gleichwohl zu den Bedingungen der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unter denen es allein Vorstellungen von Gegenständen empfangen kann, die mithin auch den Begriff derselben jederzeit affizieren müssen.
공간과 시간은 이제 순수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정의 수용성의 조건들에 속한다, 그 조건들 아래에서 잡다가(?) 대상들에 대한 모든 표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그 표상들이 따라서 또한 그 표상들의 개념을 매번 촉발해야만 하는.
→ 공간과 시간은 이제 순수 직관의 잡다를 선험적으로 포함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건들 아래에서 그 심정이 대상들에 대한 모든 표상들을 수용할 수 있는, 따라서 또한 그 표상들은 그 표상들의 개념을 매번 촉발해야만 하는, 그러한 우리의 심정의 수용성의 조건들에 속한다.
Allein die Spontaneität unseres Denkens erfordert es, daß dieses Mannigfaltige zuerst auf gewisse Weise durchgegangen, aufgenommen, und verbunden werde, um daraus eine Erkenntnis zu machen.
오로지 우리 사유의 자발성만이 요구한다, 이러한 잡다를 최초로 확실한 방법으로 점검되고, 수용되고, 관련되는 것을, 그를 통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 오로지 우리 사유의 자발성만이 이러한 잡다를 최초로 확실한 방법으로 점검되고, 수용되고, 관련되는 것을, 그를 통해 인식을 형성하기 위하여 요구한다.
Diese Handlung nenne ich Synthesis.
이러한 행위를 나는 종합이라 명명한다.
→ 이러한 행위를 나는 종합이라 명명한다.

-蟲-
So ist es ohne weiteres klar, daß die Bezeichnung >Vorsokratiker< bekundet, daß in unserem Bewußtsein in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r Griechen Sokrates einen beseonderen Platz einnimmt, wenn er gleichsam eine Art Nullpunkt werden konnte, an dem man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r und nach ihm teilt. Daß er wirklich einen solchen Drehpunkt bildet, ist nicht erst in der neueren Philosophiegeschichte gesehen worden, sondern schon in der Antike, und Zeuge dafür ist uns Cicero, Tuscul. V 4, 10, wo er die Meinung äußert, die gewiß nicht erst seine eigene ist, sondern viel älter und auf griechischer Tradition beruhend: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herabgerufen und in die Städte und Häuser eingeführt und gezwungen, von nun an Untersuchungen anzustellen über das Leben, die mores - man könnte es übersetzen: die menschlichen Dinge, Lebensformen -, und weiter über Gut und Böse. Dies Wort,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in die Menschenwelt geholt und anstelle einer Naturspekulation eine stark vom Ethischen ausgehende Betrachtung gesetzt, ist, wie immer bei solchen Aussprüchen, einerseits richtig, andererseits auch wieder falsch, aber es bezeugt jedenfalls, daß man sehr früh so etwas angesetzt hat wie eine punkt wird, wenn man die Früheren nun von Sokrates aus zusammenfaßt und als Vorsokratiker bezeichnet.
→ 그래서 그 명칭 >전 소크라테스<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거기에서 사람들이 철학의 역사를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일종의 영점이 될 수 있다면, 그가 하나의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표명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가 실제로 그러한 전환을 형성한다는 것이, 새로운 철학사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미 고대에 보이며, 그에 대한 증인은 우리에게 끼께로, 『투스쿨룸의 논쟁들』. V 4, 10이다. 거기에서 그는 의견을 펼친다. 그 의견은 확실히 처음부터 그의 고유한 견해는 아니고, 오히려 훨씬 오래되고 그리스적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늘로부터 철학을 기원하였고 도시들과 집안들에 소개하고 명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필멸자들- 사람들이 그것을 :인간적인 것들, 삶의 방식들이라고 옮길 수 있는 -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캐물음들을 행하라고.→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로부터 인간세계로 받았다는 이 말은, 언제나 그런 주장들에 있어서 그렇듯,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또한 틀리기도 한데, 그러나 그 말은 어쨌든, 사람들이 매우 일찍부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앞선 자들을 개괄하고 전 소크라테스로서 명명했을 때, 그러한 한 지점이 되는 듯한 그런 어떤 것을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Es ist auch richtig, daß all diese Vorsokratiker gegenüber dem, was von Sokrates aus beginnt und sich dann mit Platon und Aristoteles zum Hauptstrom der Philosophie entwickelt bis zu den hellenistischen Systemen, in ihrer Art des Philosophierens handgreifliche Unterschiede aufweisen. Kein Zweifel, daß diese Männer, die man meist mit Thales beginnen läßt, anders und in anderer Richtung gefragt haben als Platon und Sokrates. Man kann es vorläufig vielleicht so sagen, daß sie es zu tun hatten mit den onta, ganz allgemein ausgedrückt, den >das Seiende<, ist griechisch ein ganz gewöhnliches Wort der Umgangssprache, nicht wie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So kann man bei Aristophanes einem Sklaven befehlen, ta onta herauszubringen, womit der Hausrat gemeint ist, >die Sachen<, wie wir sagen. Schon das ist bezeichnend, daß das, was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ist, zunächst ganz gewöhnlich das um den Menschen herum Vorhandene meint. So ist der Begriff des Seins bei den Griechen tatsächlich primär mit dem Charakter der >Vorhandenheit< geprägt, wie Heidegger richtig erkannt hat. Die Älteren fragten also nach dieser realen Vorhandenheit der seienden Dinge, nach dem uns umgebenden Sein der Natur, der physis, und sie fragten zumal in bestimmterer Weise nach dem Ursprung, der genesis von allem. Darauf beziehen sich dann auch alle Aussagen im Speziellen, insofern die onta sich darstellen als physis.
→ 이러한 모든 전 소크라테스들이 그에 마주 대하여,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본류에 헬레니즘적 체계들에까지, 그 체계들 안에서 철학함의 기술이 손에 잡힐 듯한 차이를 내보인다는 것은 또한 정당하다.→ 사람들이 대부분 탈레스와 함께 시작하도록 하는 이러한 방식들이 다른 방향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어쩌면 당장은 그렇게, 그 방식들에 onta와,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표현될 때, >있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어로 온타는 일상어의 전혀 평범한 단어이고, 우리에게 있어서와 같이 철학적 개념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 곁에서, 살림살이를 가지고 우리가 말하듯이 >사물들<을 생각함으로써 노예에게 타 온타를 내놓도록 명령할 수 있다.→ 이미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적 개념인 어떤 것이, 애초에 전혀 평범하게 인간들 주위에서 수중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은 독특하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개념은, 하이데거가 올바르게 알아차렸던 것처럼 실제로 처음에 >수중에 있음<의 성격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있는 것들의 이러한 실제로 수중에 있음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 피지스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규정된 방식에 있어서 근원에 대해서, 모든 것의 제네시스(창조)에 대해서 물었다.→ 특수한 경우들에 있어서 모든 진술들은 또한 그 경우, 온타가 피지스로서 표현되는 한에서 그 점에 해당된다.


So ist es ohne weiteres klar, daß die Bezeichnung >Vorsokratiker< bekundet, daß in unserem Bewußtsein in der Geschichte der Philosophie der Griechen Sokrates einen beseonderen Platz einnimmt, wenn er gleichsam eine Art Nullpunkt werden konnte, an dem man die Geschichte der Philosophie vor und nach ihm teilt.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그 명칭 >전 소크라테스<가 표명한다는 것,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하나의 특수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그가 마치 일종의 영점이 될 수 있다면, 거기에서 사람들이 철학의 역사를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 그래서 그 명칭 >전 소크라테스<가 우리의 의식 속에서 그리스인들의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거기에서 사람들이 철학의 역사를 그의 이전과 이후로 나누는 일종의 영점이 될 수 있다면, 그가 하나의 특수한 위치를 차지하리라는 것을 표명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Daß er wirklich einen solchen Drehpunkt bildet, ist nicht erst in der neueren Philosophiegeschichte gesehen worden, sondern schon in der Antike, und Zeuge dafür ist uns Cicero, Tuscul. V 4, 10, wo er die Meinung äußert, die gewiß nicht erst seine eigene ist, sondern viel älter und auf griechischer Tradition beruhend: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herabgerufen und in die Städte und Häuser eingeführt und gezwungen, von nun an Untersuchungen anzustellen über das Leben, die mores - man könnte es übersetzen: die menschlichen Dinge, Lebensformen -, und weiter über Gut und Böse.
그가 실제로 그러한 전환을 형성한다는 것이, 새로운 철학사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미 고대에 (보이고), 그에 대한 증인은 우리에게 끼께로, 『투스쿨룸 논쟁들』. V 4, 10이다, 거기에서 그는 의견을 펼친다, 그 의견은 확실히 처음부터 그의 고유한 견해는 아니고, 오히려 훨씬 오래되고 그리스적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늘로부터 철학을 기원하였고 도시들과 집안들에 소개하고 강요했다, 이제부터 캐물음들을 행하라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필멸자들에 대해서 - 사람들이 그것을 옮길 수 있다: 인간적인 것들, 삶의 방식들이라고 -, 그리고 나아가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 그가 실제로 그러한 전환을 형성한다는 것이, 새로운 철학사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미 고대에 보이며, 그에 대한 증인은 우리에게 끼께로, 『투스쿨룸의 논쟁들』. V 4, 10이다. 거기에서 그는 의견을 펼친다. 그 의견은 확실히 처음부터 그의 고유한 견해는 아니고, 오히려 훨씬 오래되고 그리스적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늘로부터 철학을 기원하였고 도시들과 집안들에 소개하고 명했다. 이제부터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서, 필멸자들- 사람들이 그것을 :인간적인 것들, 삶의 방식들이라고 옮길 수 있는 -에 대해서, 그리고 나아가 좋음과 나쁨에 대해서 캐물음들을 행하라고.
Dies Wort, Sokrates habe die Philosophie vom Himmel in die Menschenwelt geholt und anstelle einer Naturspekulation eine stark vom Ethischen ausgehende Betrachtung gesetzt, ist, wie immer bei solchen Aussprüchen, einerseits richtig, andererseits auch wieder falsch, aber es bezeugt jedenfalls, daß man sehr früh so etwas angesetzt hat wie eine punkt wird, wenn man die Früheren nun von Sokrates aus zusammenfaßt und als Vorsokratiker bezeichnet.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로부터 인간세계로 받았고, 언제나 그런 주장들에 있어서 그렇듯,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또한 틀리기도 한데, 그러나 그 말은 어쨌든 증명한다, 사람들이 매우 일찍부터 그러한 한 지점이 되는 듯한 그런 어떤 것을 시작했다는 것,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앞선 자들을 개괄하고 전 소크라테스로서 명명했을 때.
→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로부터 인간세계로 받았다는 이 말은, 언제나 그런 주장들에 있어서 그렇듯, 한편으론 맞고, 다른 한편으론 또한 틀리기도 한데, 그러나 그 말은 어쨌든, 사람들이 매우 일찍부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보다 더 앞선 자들을 개괄하고 전 소크라테스로서 명명했을 때, 그러한 한 지점이 되는 듯한 그런 어떤 것을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Es ist auch richtig, daß all diese Vorsokratiker gegenüber dem, was von Sokrates aus beginnt und sich dann mit Platon und Aristoteles zum Hauptstrom der Philosophie entwickelt bis zu den hellenistischen Systemen, in ihrer Art des Philosophierens handgreifliche Unterschiede aufweisen.
그것은 또한 정당하다, 이러한 모든 전 소크라테스들이 그에 마주 대하여,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본류에 헬레니즘적 체계들에까지, 그 체계들 안에서 철학함의 기술이 손에 잡힐 듯한 차이를 내보인다는 것.
→ 이러한 모든 전 소크라테스들이 그에 마주 대하여,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철학의 본류에 헬레니즘적 체계들에까지, 그 체계들 안에서 철학함의 기술이 손에 잡힐 듯한 차이를 내보인다는 것은 또한 정당하다.
Kein Zweifel, daß diese Männer, die man meist mit Thales beginnen läßt, anders und in anderer Richtung gefragt haben als Platon und Sokrates.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방식들이, 사람들이 대부분 탈레스와 함께 시작하도록 하는, 다른 방향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것.
→ 사람들이 대부분 탈레스와 함께 시작하도록 하는 이러한 방식들이 다른 방향으로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Man kann es vorläufig vielleicht so sagen, daß sie es zu tun hatten mit den onta, ganz allgemein ausgedrückt, den >das Seiende<, ist griechisch ein ganz gewöhnliches Wort der Umgangssprache, nicht wie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사람들은 그것을 어쩌면 당장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 방식들에 onta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는 것,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표현될 때, >있는 것<과, 그리스어로는 일상어의 전혀 평범한 단어이고, 우리에게 있어서와 같이 철학적 개념은 아니라는.
→ 사람들은 그것을 어쩌면 당장은 그렇게, 그 방식들에 onta와, 전적으로 일반적으로 표현될 때, >있는 것<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스어로 온타는 일상어의 전혀 평범한 단어이고, 우리에게 있어서와 같이 철학적 개념은 아니다.
So kann man bei Aristophanes einem Sklaven befehlen, ta onta herauszubringen, womit der Hausrat gemeint ist, >die Sachen<, wie wir sagen.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 곁에서 노예에게 명령할 수 있다, 타 온타를 내놓도록, 살림살이를 가지고 생각함으로써, >사물들<을, 우리가 말하듯이.
→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파네스 곁에서, 살림살이를 가지고 우리가 말하듯이 >사물들<을 생각함으로써 노예에게 타 온타를 내놓도록 명령할 수 있다.
Schon das ist bezeichnend, daß das, was bei uns ein philosophischer Begriff ist, zunächst ganz gewöhnlich das um den Menschen herum Vorhandene meint.
이미 그것은 독특하다, 그것,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적 개념인 어떤 것이, 애초에 전혀 평범하게 인간들 주위에서 수중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 이미 우리에게 있어서 철학적 개념인 어떤 것이, 애초에 전혀 평범하게 인간들 주위에서 수중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것은 독특하다.
So ist der Begriff des Seins bei den Griechen tatsächlich primär mit dem Charakter der >Vorhandenheit< geprägt, wie Heidegger richtig erkannt hat.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개념은 실제로 처음에 >수중에 있음<의 성격으로 각인되었다, 하이데거가 올바르게 알아차렸던 것처럼.
→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존재의 개념은, 하이데거가 올바르게 알아차렸던 것처럼 실제로 처음에 >수중에 있음<의 성격으로 각인되었다.
Die Älteren fragten also nach dieser realen Vorhandenheit der seienden Dinge, nach dem uns umgebenden Sein der Natur, der physis, und sie fragten zumal in bestimmterer Weise nach dem Ursprung, der genesis von allem.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물었다 있는 것들의 이러한 실제로 수중에 있음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 피지스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은 물었다 특히 규정된 방식에 있어서 근원에 대해서, 모든 것의 제네시스(창조)에 대해서.
→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있는 것들의 이러한 실제로 수중에 있음에 대해서, 우리를 둘러싼 자연의 존재, 피지스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특히 규정된 방식에 있어서 근원에 대해서, 모든 것의 제네시스(창조)에 대해서 물었다.
Darauf beziehen sich dann auch alle Aussagen im Speziellen, insofern die onta sich darstellen als physis.
특수한 경우들에 있어서 모든 진술들은 또한 그 경우 그 점에 해당된다, 온타가 피지스로서 표현되는 한에서.
→ 특수한 경우들에 있어서 모든 진술들은 또한 그 경우, 온타가 피지스로서 표현되는 한에서 그 점에 해당된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