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꼴들에 대한 초기 이론
서론
1)『에우튀프론』은 실패로 끝났다; 경건함의 어떤 정의(定義)도 진술되지 않고, 아무것도 함축되지 않는다. 그 대화의 참된 의미가 밝혀지도록 파헤쳐질 수 있는 아무런 '가면'도 없다; 그 대화는 그것의 의미를 그 표면에 지닌다.
2)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 대화가 아무런 명확한 철학적 내용도 지니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건 아니다. W.A.하이델은 일찍이 『에우튀프론』에 대해 '더 짧은 플라톤 대화편들 중 어느 것도 철학적 이론으로 향하는 암시들의 가치로 그 책과 비교될 수 없다'라고 언급했었고, 이것은 물론 진실이다. 그 대화편의 흥미로운 점은 그것의 변증법에 대한 산출에 놓이지 않는다, 아무런 산물도 없기 때문에; 그 흥미는 그 변증 자체에 자리한다. 그 변증은 그 변증의 작업을 규제하는 것들의 본질 또는 본성에 대한 가정들에 기초하여 나아간다; 그리고 만일 그 작업이 실패로 끝난다면, 경건에 대해 성취된 어떠한 정의도 없이, 실패의 시금석은 정확하게 그 탐구를 이끌었던 규칙들에 놓인다.
3) 그러한 규칙들, 그리고 그 규칙들이 근거하는 전제들은 형상들에 대한 이론(어떤 특정한 바로 그 이론은 아닌)을 형성한다. 그 이론은 명시적 진술보다 전제의 차원에서 훨씬 더 많이 작동하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의 요소들이 어느 정도 정밀하게 배치되는 이론이다. 『에우튀프론』에서 소크라테스의 목적은 '무엇이 경건인가?'라는 물음의 답을 얻는 것이다. 그는 그의 탐구를 이어감에 있어서 경건에 대한 하나의 ἰδέα, 혹은 εἶδος, 하나의 꼴이 있다고, 그리고 이 꼴은 보편적이고, 모든 경건한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한다(5d, 6d-e). 나아가 그는 그 꼴이 그로써 어떠한 것들이 경건하고 어떠한 것들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할 규준으로 사용될 것이라 가정한다(6e); <p67>그 꼴에 의해 또는 그 꼴의 덕(virtue) 안에서 경건한 것들이 경건하다고(6d); 그리고 그 꼴이 실질적이거나 본질적인 정의의 능력이라고 가정한다(11a, 12c-d). 이러한 전제들은 꼴들에 대한 하나의 이론을 구성한다.
4) 그 이론은 논리적이기도 하고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논리적으로, 꼴들은 변증에 있어서 규제적 규칙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그것'의 전항들로서 그것들은 소크라테스의 정의 탐색에 있어서 허용가능한 답변의 종류들을 결정하고, 더욱 중요한 것으로는, 허용될 수 없는 것들을 결정한다. 그 꼴들은 변증이 성공한 순간과 실패한 순간의 조건들을 한정한다. 형이상학적으로, 형상들은 세계의 진행에 영향을 미친다: 꼴들은 사물들의 실질적 본성들이고, 세계는 그 본성들이 그러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이다.
5) 플라톤의 이론에 대한 이런 두 가지 측면들은 실질적 정의의 관념에서 만난다. 변증은 규칙에 의해 통제되고, 사물들의 본성으로 향하게 된다. 변증의 규칙들은 그 변증의 목적에 의해 결정된다. 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 정의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질적 정의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 안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변증에 쌓아올린 조잡한 상부구조물이 아니다: 그 이론은 변증의 토대이다. 그 이론 없이, 변증은 그것이 사용하는 규칙들에 의해 수행되지 않았거나 그것이 의도했던 목표를 향해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도덕 탐구는 실재에 대한 탐구이다.
6) 그 이론의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에우튀프론』에서 가정된 꼴들에 대한 이론은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그 이론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버크는 일찍이 '아무도 밤과 낮의 경계 사이에 한 획을 그을 수 없다, 빛과 어둠이 분간할 수 있는 그 전체 위에 있기 전까지'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초기 대화편들과 중기 대화편들에서도 그렇다. 한편으로는 『에우튀프론』과 다른 한편으로는『파이돈』 그리고 『정체』 사이의 그 차이는 아마도 빛과 어둠의 차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분명하다. 중기 대화편들의 철학은 결부된 반대항들의 온상이다: 있음과 됨, 겉모습과 실재, 영속과 유전(流轉), 이성과 감각, 몸과 영혼, 육체와 정신. 이러한 반대항들은 결핍의 심연에 의해 나뉘어진 두 세계에 대한 존재론에 뿌리를 둔다. 더욱 실재적인 것이 덜 실재적인 것에 맞서고, 원형(原形)들이 그림자들과 반영물들에 맞서는 것처럼, 영원한 꼴들을 내용물들로 지닌 앎의 세계는 감각적이고 변화하는 내용물들을 지닌 사견의 세계에 맞선다. 가시적 세계는 그 세계에 속하는 결핍 안에서 알 수 없는 상(象)이고, 오로지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이해 가능한 세계의 상이다. <68p>만일 『에우튀프론』과 같은 초기 대화편들에 이러한 세계관의 씨앗들이 뿌려져 있다면, 그 씨앗들은 아직 그곳에서 수확되지 않았을 것이다.(67-69.2)
1. 변증의 규제적 원칙들로서 꼴들
1)『에우튀프론』의 중심물음인 '경건함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 자체로, 그 물음은 고유하게 다의적이다: 그 물음은 그에 답하도록 요청되는 본질에 대해 하나의 예시인지 구별되는 특징인지 또는 본질에 대한 설명인지 규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특징 자체(αὐτὸ τὸ εἶδος)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그러한 특징을 설명하도록 - 즉, τὴν ἰδέαν τίς ποτέ ἐστιν(6d-e), '이 특징인 그것'을 설명하도록 - 에우튀프론에게 요청하면서 이 물음을 더욱 명확하게 만든다.
보편개념들로서 꼴들
1) 경건의 ἰδέα 또는 꼴들을 요구하면서, 소크라테스는 모든 각각의 경건한 행위에 있어서 동일한 것(ταὐτόν, 5d)이 이야기되길 기대한다. 에우튀프론이 경건함의 의문스러운 예시들을 가지고 답할 때,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의 예시들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로 경건하니까,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바란 것은 그것들 모두가 지니는(ἔχον, 5d) 그 꼴의 본성이기 때문에.
2) 논증의 이러한 흐름은 다른 대화편들에서 발견된다. 『라케스』(191e-192b)에서, 용기가 전쟁에서의 용기에 대한 예시에 의해 정의될 때,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충분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용기는 전쟁에서만이 아니라 바다에서의 위험들 속에서도, 질병과 가난, 그리고 정치에 있어서도 또한 발견되고, 소크라테스가 이야기되길 바란 것은 이러한 것들 전부에 있어서 동일한 것(ταὐτόν)이다. 『대(大) 히피아스』(300a-b)에서, 소크라테스는 만일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이 아름답다면, 그것들은 반드시 그것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러한 어떤 동일한 것(τι τὸ αὐτό)을 가져야만 한다고, 그리고 이 공통된 것(τὸ κοινὸν τοῦτο)은 그 두 가지 것들에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초중기 대화편에서 메논이 예시들의 목록을 제시함으로써 덕(탁월함)을 정의하고자 시도할 때, 소크라테스는 유추를 가지고 그를 바로잡는다. 당신이 벌이 무엇인지 질문받았다고 가정하자. 여러 서로 다른 종류의 벌들이 있지만, 그렇게 많은 벌들이 있다는 것은 그것들을 이름짓는 데에는 아무런 득될 것이 없다; 벌들은 벌들로서 다르지 않고, 그 물음은 모든 벌들이 나누어 가지는 공통된 특징에 대한 어떤 설명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특징은 덕과 함께: '다양하고 무수한 덕들이 있겠지만,<69p> 그 덕들은 전부 그것들을 덕들이도록 만드는 하나의 특징(εἶδος)을 가지고, 그 특징은 덕이 무엇인지 말할 그 누구라도 그의 시선을 집중시켜야 할 그러한 것이다'(『메논』72c).
3) 보편개념으로서, 꼴들은 변증에 있어서 규제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 꼴들은 τί ἐστί,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에 있어서 ἐστί의 전항들이고, 그 꼴들은 그러므로 그 물음의 본성을 상술하며, 그래서 그 물음에 분별있게 제시될 답변들의 범위를 제한한다. '경건은 무엇인가?' 혹은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물음들은 단순하게 문법적 형식의 말로는, 경건이나 아름다움의 예시에 대한 요청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에우튀프론과 히피아스 모두 처음에는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의 물음을 해석한다. 중성 형용사와 관사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추상적 명사조차 이러한 의미에 대해 열려있다: 카르미데스는 사려의 예시를 듦으로써 무엇이 σωφροσύνη, 사려(중용, 절제)인지 말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의 예시들 모두에 있어서 동일한 그런 ἰδέα 또는 꼴을, 그리고 예시들 모두가 가지는 어떤 것을 찾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배제시켰다; 왜냐하면 경건과 사려와 아름다움은 보편개념들이고, 그것들이 무엇인지의 물음에 대한 대답들은 단지 그것들의 예시들을 제공하기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규준들로서의 꼴들
1) 소크라테스는 그것으로써 어떤 것들이 경건하고 어떤 것들이 경건하지 않은지 말할 규준 혹은 모형으로 사용하기 위해 경건의 본성이 이야기되기를 바랐다. 경건의 꼴은 경건한 것들이 그와 같은 종류(τοιοῦτον)의 것(6e)이라는 그 사실에 대한 추론에 의해서 이 일에 적합하게 될 것이다. 유사하게, 뤼시스에서 나이와 함께 희어진 머리카락은 흼과 같은 동일한 종류(οἷον)의 것 - 그것에 지금 있는 것과 같은 동일한 종류의 것 - 이다(217c-d).
2) τοιοῦτος (라틴어 talis, of such kind)와 οἷος (라틴어 qualis, of the kind that, such as)라는 단어들은 각기 의문사 ποῖος, '어떤 종류의?'와 상관하는 지시 대명사와 부정 대명사이다. 그 대명사들의 사용은 꼴들의 예시들과 꼴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 시사점은 그 꼴이 규준 또는 παράδειγμα로 기술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러나 이 암시는 함축이 거의 아니다. 예를 들어 『고르기아스』460b에서 οἷον의 사용은 유사점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나중에 paronymy(파생어, 동근어)라고 부를 어떤 것을 포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οἷον의 사용은 동일성이나 상호 함축을 포함한다. 그리고 『파이드로스』246a에서 그 사용은 유사성과 대비된다. 이러한 단어들의 사용이 유동적이라는 것, 그리고 오직 특정한 문맥 안에서만 한정된다는 것은 사실이다. τοιοῦτον이 『에우튀프론』6e에서 유사성을 함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플라톤이 그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유사성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어휘를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는 초기 대화편들 그 어디에서도 꼴들의 예시들을 꼴들의 μιμήματα나 εἰκόνες, 또는 ὁμοιώματα라고 부르지 않고, 그러한 예시들이 꼴들과 맺는 관계들을 이러한 명사들의 어원들로부터 파생된 동사들을 가지고 묘사하지도 않는다.
3) 꼴들의 예시들이 꼴들과 유사하다는 주장은 그러니까 『에우튀프론』이라는 글에 의해 시사되지 않는다. 더욱이, 그건 비경제적이다. 그 글이 그런 주장 없이도 이해되기 때문이다. 경건의 꼴은 경건한 것들을 경건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규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그 꼴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에 적합한 이유는 그 꼴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는 만일 경건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한 번 이해되기만 한다면 그러한 앎이 그 아는 자로 하여금 경건한 것들을 경건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있도록 한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경건은 그것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을 - 즉, 그것의 사례들인 것들을- 간파해내기 위한 규준이다.
4) 이러한 해석은 그 문맥에 적합하다. 인식론적으로, 꼴들은 그 꼴들의 사례들을 간파하기 위한 규준들이다. 이러한 기능의 존재론적 근거(토대)는 예시들이 그 꼴을 가진다는 것(5d), 그리고 그 꼴은 바로 그 꼴에 의하여 그 사례들이 그것들인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라는 것이다(6d).
5) 꼴들이 규준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전제가 그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는 전제로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그의물음 속에 직접적으로 깊숙히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동일성에 대한 실천적인 문제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촉구된다: 경건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은 어떤 종류의 행위들이 경건하고 또 어떤 행위들이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 위해 중요하다. 무엇이 우정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두 사람이 친구인지를(『뤼시스』223b), 혹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한 연설이 아름다운지를 확신할 수 없는 것처럼(『대(大)히피아스』286c-d), 무엇이 경건인지에 대한 앎이 없이는 한 주어진 행위가 경건한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6e, 9a-c, 15d-e). 그 꼴을 아는 것은 그 꼴의 사례들을 알기 위한 조건이다: 경건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경건한 것들을 경건하지 않은 것들로부터 구분할 척도에 대한 앎을 요청하는 것이다.
6) 척도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단지 추상적 이해가 아니라 삶에 대한 올바른 질서지음을 향해 정향된 소크라테스의 변증에 본질적이다; 변증의 그 목표는 그러한 질서의 원칙들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 원칙들을 구체적인 사례들에서 확인할 수단을 얻는 것이다. 『정체』(1권, 344d-e)에서는 경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는 무엇이며 탁월함(덕스러움)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되는데, 왜냐하면 삶을 꾸려나아감이 그러한 앎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카르미데스』(175e)에서 젊은 카르미데스는 가장 사려깊은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사려에 대한 앎이 없다면, 그는 그의 삶에서 그 사려의 현존- 훗날 30인 참주들 중 하나가 되는 한 남자에게 있어서의 - 으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갖지 못할 것이다. 만일 변증의 목적이 꼴을 정의하는 것이라면, 그 실천적 목표는 사물들 속에서 꼴의 식별일 것이다. '경건함 그 자체는 모든 각각의 행위들에 있어서 그 자체로 동일하지 않은가? 그리고 불경건함의 경우에는, 경건함과 전혀 반대로, 그 자체로서는 동일하지 않은가? 그리고 모든 각각의 불경할 것들은 불경건함이라는 점에서 단 하나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가?'
7) 꼴들은 숱한 상이한 사례들에 공통적인 보편적 개념들이기 때문에 , 특정한 종류의 대답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배제된다: 말하자면 예시에 의해, 즉 사례들을 인용함으로써 정의를 시도하는 그런 모든 대답들이 배제된다. 왜냐하면 꼴들은 규준들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배제된다: 경건이나 사려나 아름다움이 어떤 식으로든 불경건이나 사려깊지 못함 또는 추함을 암시할 그런 종류의 답변들은 배제되는 것이다. 꼴들은 그것들의 반대항들에 의해서 한정되지 않는다.
8) 『에우튀프론』의 경우에서 첫번째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검토는 정확히 이 점에 주목한다. 경건은 단지 정의로움이 부정의함일 수 있는 만큼만 불경건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 또한 신들에 의해 미움받고 그래서 불경하기 때문에, 경건은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일 수 없다. 『정체』에서, 그러한 행위들이 때에 따라 올바를지 모르지만, 또 이따금 올바르지 못하다는 것은, 올바름에 대해서 제안된 진실을 말하고 빚을 갚는 것으로서의 정의의 충분한 반박이다: 만일 한 친구가 당신에게 무기들을 빌려주었고 그 다음에는 정신이 나갔다면, 그러한 친구가 그 무기들을 요구할 때 그것들을 되돌려주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미친 사람에게 진실만을 말하는 것도 옳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고 빚진 것을 되돌려주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가 아니다.
9) 꼴들이 그것들의 반대항들에 의해 한정될 수 없다는 그 원칙의 응용은 『대히피아스』에 있다.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하고자 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너무 협소하다는 사실에 대해 그를 주의시킨다; 아름다운 처녀들 외에도 아름다운 암말들과 아름다운 리라들 그리고 아름다운 항아리들도 있다. 히피아스는 그 항아리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가치 없고 사소한 것은 아름다움으로 암말이나 여인에 전혀 비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도 한 항아리는 그 종류에 있어서 아름다울 것이고, 아름다운 여인조차 여신에 비한다면 추할 것이라고 답한다. 그래서 아름다움 그 자체는 무엇인가? 그 물음은 상이한 비교들 속에서 추한 것보다 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예증함으로써 답해질 수는 없다. 히피아스는 다음으로 아름다움이 황금이라고 제안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황금이나 황금의 있음이 아름답지 않은 상황들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을 반박할 때, 히피아스는 다음과 같은 점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당신이 아름다움이란 그 누구에게도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결코 추한 것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그러한 종류의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는 답변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군요.'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바로 그거에요, 히피아스. 지금 당신은 아름답게(빼어나게) 나를 이해하네요.'(291d).
10) 꼴들이 그것들의 고유한 반대항들에 의해 한정되지 않는다는 원칙은 꼴들의 자기동일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 αὐτὸ αὑτῷ, 그 자체로 동일한 것이며, 그것의 반대, 불경건도 αὑτῷ ὅμοιον, 그것 자체와 같은(동일한 것)이라고 제안함으로써『에우튀프론』에서의 변증을 시작했다(5d). 그리고 그는 그와 같은 경건의 본성을 찾고 있다. 이러한 제안은 7a에서 경건이 불경건과 동일하지 않지만 그것의 정 반대항이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그리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으로서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정의에 대한 반박은 그래서 그 정의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위배한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진술된다: 당신은 ὃ τυγχάνει ταὐτὸν ὃν ὅσιον τε καὶ ἄνοσιον, '어떤 동일한 것이 우연히 경건이면서도 또 불경건이기도 한 그러한 것'을 진술함으로써 경건이 무엇인지 말할 수는 없다(8a). 여기에서 전제는 만일 경건이 어떤 식으로든 불경이라면, 그것은 불경건의 반대항이 아닐 것이라는 것이고, 이 추론 아래에 깔린 직관적 원칙은 분명하다: 어떤 것 또는 그 어떤 것의 덕에 의해 그것들이 경건한 그러한 어떤 것은 그러한 경건이고, 그 자체로 불경건일 수 없다는 것이다. 꼴들의 자기동일성은 그 꼴들의 반대항들에 대한 단적인 배제를 함축하고, 그러한 배제는 직접적으로 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과 관련된다.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불경건인 어떤 것을 이름붙이는 것은 결코 참인 대답일 수 없다.
본질들로서의 꼴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에 의하면, 경건의 본질은 어떤 경건이 καθ᾿ αὑτό, 그러니까 그 자체 안에서 또 그 자체에 대한 것, 혹은 그러한 바의 것이어야 할 것이고,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정의여야 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플라톤의 상투어들인 'αὐτὸ τὸ…'와 '…αὐτὸ καθ᾿ αὑτό', 그러니까 '~인 것 자체'와 '오로지 그 자체로 …인 것'의 영향력이다.
2) 본질에 대한 관념의 본원들은 아낙사고라스에게 있다. 그의 체계의 중심 논제는 모든 것들 하나하나에 '큼'과 '작음' 처럼 대립항들의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고, 오로지 정신만이 그 자체로 혼합되지 않고 현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논제를 제시하는 것은 그 논제의 부정을 자극시키는 것이다. 만일 그 반대항들이 언제나 함께 뒤섞여 있다면, 무엇이 그것들에 대해 뒤섞이지 않은, ἐφ᾿ ἑαυτοῦ, 오로지 그러한 것들 자체로서 그러한 것들 자체인 것과 같은 것
일까? 이러한 종류의 물음을 묻는 것은 『에우튀프론』이 경건에 대해 묻는 그런 종류의 물음으로의 긴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강력하진 않지만 아리스토파네스에 역사적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걸음을 디뎠다는 증거가 있다. 그는 'αὐτὸ καθ᾿ αὑτό'라는 상투어를 사용했었고 그러므로 생각컨데 그 뒤에 그런 사고가 놓여 있다는 증거 말이다. 그리고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는 것을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