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Von der Anwendung der Kategorien auf Gegenstände der SInne überhaupt 감관 일반의 대상들에 대한 범주들의 적용에 대하여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beziehen sich durch den bloßen Verstand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unbestimmt ob sie die unsrige oder irgend eine andere, doch sinnliche sei, sind aber eben darum bloße Gedankenformen, wodurch noch kein bestimmter Gegenstand erkannt wird. Die Synthesis oder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nselben, bezog sich bloß auf die Einheit der Apperzeption, und war dadurch der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so fern sie auf dem Verstande beruht, und mithin nicht allein transzendental, sondern auch bloß rein intellektual. Weil in uns aber eine gewiss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zum Grunde liegt, welche auf der Rezeptivität der Vorstellungsfähigkeit (Sinnlichkeit) beruht, so kann der Verstand, als Spontaneität, den inneren Sinn durch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der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gemäß bestimmen, und so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denken, als die Bedingung, unter welcher alle Gegenstände unserer (der menschlichen) Anschauung notwendiger Weise stehen müssen, dadurch denn die Kategorien, als bloße Gedankenformen, objektive Realität, d.i. Anwendung auf Gegenstände, die uns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können, aber nur als Erscheinungen bekommen; denn nur von diesen sind wir der Anschauung a priori fähig. →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순전히 지성만을 통해서 우리의 대상들인지 어떻든 또 다른 어떤
것들인지는 규정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일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관계하고,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를 통하여
어떠한
규정된 대상도 인식되지 않는 순전한 사유형식들이다.→ 그 사유형식들 안에서 잡다의 종합이나 결합은 순전히 통각의 통일에 해당하고,
선험적 인식이 지성에 근거하는 한 그를 통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토대이며 따라서 초월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순전히 순수하게 지성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표상능력(감성)의 수용성에
근거하는 감각적 직관의 확실한 형식은 선험적으로 기초되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자발성으로서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하여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적합하게 내감을 규정할 수 있고,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잡다들에 대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그 아래에서 우리의(인간적인) 직관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존립해야만 하는 조건으로서 선험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순전한
사유형식들로서 범주들이 객관적 실재성을,
즉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에 대한 적용을, 그러나 단지 현상들로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선험적 직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Dies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die a priori möglich und notwendig ist, kann figürlich (synthesis speciosa) genannt werden, zum Unterschiede von derjenigen, welche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überhaupt in der bloßen Kategorie gedacht würde, und Verstandesverbindung (synthesis intellectualis) heißt; beide sind transzendental, nicht bloß weil sie selbst a priori vorgehen, sondern auch die Möglichkeit anderer Erkenntnis a priori gründen. → 이와 같은 감각적 직관의 잡다에 대한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종합은 구상적(형상들의 종합)이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구별하여, 순전한 범주들 안에서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하는 것으로 생각될 것은 지성결합 (지성적인 것들의 종합)이라 불린다.
양자 모두 초월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 자체가 순전히 선험적으로 선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근거도 되기
때문이다.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beziehen sich durch den bloßen Verstand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unbestimmt ob sie die unsrige
oder irgend eine andere, doch sinnliche sei, sind aber eben darum bloße
Gedankenformen, wodurch noch kein bestimmter Gegenstand erkannt wird.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순전히 지성만을 통해서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관계하고, 그 대상들이 우리의 대상들인지 어떻든 또 다른 어떤 것들인지는 규정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일,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순전한 사유형식들이다, 그를 통하여 어떠한 규정된 대상도 인식되지 않는. →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순전히 지성만을 통해서 우리의 대상들인지 어떻든 또 다른 어떤
것들인지는 규정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일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 관계하고,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러므로 그를 통하여 어떠한
규정된 대상도 인식되지 않는 순전한 사유형식들이다. Die Synthesis oder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nselben, bezog
sich bloß auf die Einheit der Apperzeption, und war dadurch der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kenntnis a priori, so fern sie auf dem Verstande
beruht, und mithin nicht allein transzendental, sondern auch bloß rein
intellektual. 그 사유형식들 안에서 잡다의 종합이나 결합은, 순전히 통각의 통일에 해당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토대이다, 그 종합이나 결합이 지성에 근거하는 한, 그리고 따라서 초월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순전히 순수하게 지성적이기도 하다. → 그 사유형식들 안에서 잡다의 종합이나 결합은 순전히 통각의 통일에 해당하고, 선험적 인식이 지성에 근거하는 한 그를 통하여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토대이며 따라서 초월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순전히 순수하게 지성적이기도 하다. Weil in uns aber eine gewiss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zum Grunde liegt, welche auf der Rezeptivität der
Vorstellungsfähigkeit (Sinnlichkeit) beruht, so kann der Verstand, als
Spontaneität, den inneren Sinn durch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der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gemäß
bestimmen, und so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 priori denken, als die
Bedingung, unter welcher alle Gegenstände unserer (der menschlichen)
Anschauung notwendiger Weise stehen müssen, dadurch denn die Kategorien,
als bloße Gedankenformen, objektive Realität, d.i. Anwendung auf
Gegenstände, die uns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können, aber nur
als Erscheinungen bekommen; denn nur von diesen sind wir der Anschauung a
priori fähig. 그러나 우리 안에서 감각적 직관의 확실한 형식은 선험적으로 기초되기 때문에, 그 형식이 표상능력(감성)의 수용성에 근거하는, 그래서 지성은 자발성으로서 내감을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하여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적합하게 규정할 수 있고,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잡다들에 대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선험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조건으로서, 그 아래에서 우리의(인간적인) 직관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존립해야만 하는,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범주들이, 순전한 사유형식들로서, 객관적 실재성을, 즉 대상들에 대한 적용을, 그 대상들이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는, 그러나 단지 현상들로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선험적 직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우리 안에서 표상능력(감성)의 수용성에
근거하는 감각적 직관의 확실한 형식은 선험적으로 기초되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자발성으로서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를 통하여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적합하게 내감을 규정할 수 있고, 그래서
감각적 직관의 잡다들에 대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그 아래에서 우리의(인간적인) 직관에
속하는 모든 대상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존립해야만 하는 조건으로서 선험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를 통하여 순전한 사유형식들로서 범주들이 객관적 실재성을,
즉 우리에게 직관에서 주어질 수 있는 대상들에 대한 적용을, 그러나 단지 현상들로서만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만 우리는 선험적 직관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Dies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die a
priori möglich und notwendig ist, kann figürlich (synthesis speciosa)
genannt werden, zum Unterschiede von derjenigen, welche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überhaupt in der bloßen Kategorie
gedacht würde, und Verstandesverbindung (synthesis intellectualis)
heißt; beide sind transzendental, nicht bloß weil sie selbst a priori
vorgehen, sondern auch die Möglichkeit anderer Erkenntnis a priori
gründen. 이와 같은 감각적 직관의 잡다에 대한 종합,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종합은, 구상적(형상들의 종합)이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구별하여, 순전한 범주들 안에서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한 것으로 생각될 것, 지성결합 (지성적인 것들의 종합)이라 불린다. 양자 모두 초월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스스로 선험적으로 선행만 하지 않고, 또한 다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근거가 된다. → 이와 같은 감각적 직관의 잡다에 대한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필연적인 종합은 구상적(형상들의 종합)이라 불릴 수 있다. 이와
구별하여, 순전한 범주들 안에서 직관 일반의 잡다와 관련하는 것으로 생각될 것은 지성결합 (지성적인 것들의 종합)이라 불린다.
양자 모두 초월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 자체가 순전히 선험적으로 선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근거도 되기 때문이다.
Nimmt man also ein Objekt einer nicht-sinnlichen Anschauung als gegeben an, so kann man es freilich durch alle die Prädikate vorstellen, die schon in der Voraussetzung liegen, daß ihm nichts zur sinnlichen Anschauung Gehöriges zukomme: also, daß es nicht ausgedehnt, oder im Raume sei, daß die Dauer desselben keine Zeit sei, daß in ihm keine Veränderung (Folge der Bestimmungen in der Zeit) angetroffen werde, usw. Allein das ist doch kein eigentliches Erkenntnis, wenn ich bloß anzeige, wie die Anschauung des Objekts nicht sei, ohne sagen zu können, was in ihr denn enthalten sei; denn alsdenn habe ich gar nicht die Möglichkeit eines Objekts zu meinem reinen Verstandesbegriff vorgestellt, weil ich keine Anschauung habe geben können, die ihm korrespondierte, sondern nur sagen konnte, daß die unsrige nicht für ihn gelte. Aber das Vornehmste ist hier, daß auf ein solches Etwas auch nicht einmal eine einzige Kategorie angewandt werden könnte: z.B. der Begriff einer Substanz, d.i. von Etwas, das als Subjekt, niemals aber als bloßes Prädikat existieren könne, wovon ich gar nicht weiß, ob es irgend ein Ding geben könne, das dieser Gedankenbestimmung korrespondierete, wenn nicht empirische Anschauung mir den Fall der Anwendung gäbe. Doch mehr hievon in der Folge. →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감성적 직관의 한 대상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상을 술어들을 통해서 자유로이
표상할 수 있다. 그 술어들은 이미, 그 대상에 감각적 직관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귀속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객체는 연장되거나 또는 공간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객체의 존속은 시간이 아닐 것이라는, 객체 안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서 시간 내에서의 규정들의 변화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등등의 그러한 전제 안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직관 안에 포함될 어떤 것을 말할 수 없이 내가 순전히 객체의 직관이 아닐 것만을 지시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참된 인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 따라 내가 객체의 가능성을 전혀 나의 순수한 지성개념에 표상하지 못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지성개념에 상응하는 어떠한 직관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단지 우리의 직관은 개념에 유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하나의 어떤 것에 대해 또 역시 단 하나의 범주도 적용될 수 없으리란 점이다.
예를
들어 실체의 범주, 즉 그 어떤 것에 대해서 주어일, 그러나 결코 순전한 술어로 현존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의 그러한 어떤 것에
대해서,
나는 경험적 직관이
나에게 적용의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이러한 사유규정에 상응하는 하나의 사물을 제시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이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뒤에 따른다.
Nimmt man also ein Objekt einer nicht-sinnlichen Anschauung als gegeben
an, so kann man es freilich durch alle die Prädikate vorstellen, die
schon in der Voraussetzung liegen, daß ihm nichts zur sinnlichen
Anschauung Gehöriges zukomme: also, daß es nicht ausgedehnt, oder im
Raume sei, daß die Dauer desselben keine Zeit sei, daß in ihm keine
Veränderung (Folge der Bestimmungen in der Zeit) angetroffen werde, usw.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감성적 직관의 한 대상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상을 술어들을 통해서 자유로이 표상할 수 있다, 그 술어들은 이미 그 전제 안에 놓여 있다, 그 대상에 감각적 직관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귀속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객체는 연장되거나 또는 공간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객체의 존속은 시간이 아닐 것이라는, 객체 안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서 시간 내에서의 규정들의 변화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등등. → 그러므로 사람들은 비-감성적 직관의 한 대상을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대상을 술어들을 통해서 자유로이
표상할 수 있다. 그 술어들은 이미, 그 대상에 감각적 직관에 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귀속하지 않는다는:
그러므로, 객체는 연장되거나 또는 공간 내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객체의 존속은 시간이 아닐 것이라는, 객체 안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따라서 시간 내에서의 규정들의 변화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등등의 그러한 전제 안에 놓여 있다. Allein das ist doch kein eigentliches Erkenntnis, wenn ich bloß
anzeige, wie die Anschauung des Objekts nicht sei, ohne sagen zu können,
was in ihr denn enthalten sei; denn alsdenn habe ich gar nicht die
Möglichkeit eines Objekts zu meinem reinen Verstandesbegriff
vorgestellt, weil ich keine Anschauung habe geben können, die ihm
korrespondierte, sondern nur sagen konnte, daß die unsrige nicht für ihn
gelte.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참된 인식도 아니다, 내가 순전히 지시한다면, 객체의 직관이 아닐 것을, 말할 수 없이, 그래서 직관 안에 포함될 어떤 것을; 왜냐하면 그에 따라 내가 객체의 가능성을 전혀 나의 순수한 지성개념에 표상하지 못 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떠한 직관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직관이 지성개념에 상응하는, 오히려 단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직관은 개념에 유효하지 않다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해서 직관 안에 포함될 어떤 것을 말할 수 없이 내가 순전히 객체의 직관이 아닐 것만을 지시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참된 인식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에 따라 내가 객체의 가능성을 전혀 나의 순수한 지성개념에 표상하지 못 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지성개념에 상응하는 어떠한 직관도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고, 오히려 단지 우리의 직관은 개념에 유효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Aber das Vornehmste ist hier, daß auf ein solches Etwas auch
nicht einmal eine einzige Kategorie angewandt werden könnte: z.B. der
Begriff einer Substanz, d.i. von Etwas, das als Subjekt, niemals aber
als bloßes Prädikat existieren könne, wovon ich gar nicht weiß, ob es
irgend ein Ding geben könne, das dieser Gedankenbestimmung
korrespondierete, wenn nicht empirische Anschauung mir den Fall der
Anwendung gäbe.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하나의 어떤 것에 대해 또 역시 단 하나의 범주도 적용될 수 없으리란 점이다: 예를 들어 실체의 개념, 즉 어떤 것에 대해서, 주어인 것으로서, 그러나 결코 순전한 술어로 현존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 그에 대해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것이 도대체 하나의 사물을 제시할 수 있을지, 그 사물이 이러한 사유규정에 상응하는, 경험적 직관이 나에게 적용의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러한 하나의 어떤 것에 대해 또 역시 단 하나의 범주도 적용될 수 없으리란 점이다. 예를
들어 실체의 범주, 즉 그 어떤 것에 대해서 주어일, 그러나 결코 순전한 술어로 현존할 수는 없는 것으로서의 그러한 어떤 것에 대해서,
나는 경험적 직관이
나에게 적용의 상황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도대체 이러한 사유규정에 상응하는 하나의 사물을 제시할 수 있을지 전혀 알지 못한다. Doch mehr hievon in der Folge. 이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뒤에 따른다. → 이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이 뒤에 따른다.
Der obige Satz ist von der größten Wichtigkeit; denn er bestimmt eben sowohl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al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bestimmte. Raum und Zeit gelten, als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wie uns Gegenstände gegeben werden können, nicht weiter, als für Gegenstände der Sinne, mithin nur der Erfahrung. Über diese Grenzen hinaus stellen sie gar nichts vor; denn sie sind nur in den Sinnen und haben außer ihnen keine Wirklichkeit.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ind von dieser Einschränkung frei, und erstrecken sich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sie mag der unsrigen ähnlich sein oder nicht, wenn sie nur sinnlich und nicht intellektuell ist. Diese weitere Ausdehnung der Begriffe über unsere sinnliche Anschauung hinaus, hilft uns aber zu nichts. Denn es sind alsdenn leere Begriffe von Objekten, von denen, ob sie nur einmal möglich sind oder nicht, wir durch jene gar nicht urteilen können, bloße Gedankenformen ohne objektive Realität, weil wir keine Anschauung zur Hand haben, auf welche di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jene allein enthalten, angewandt werden, und sie so einen Gegenstand bestimmen könnten. Unsere sinnliche und empirische Anschauung kann ihnen allein Sinn und Bedeutung verschaffen. → 위의 명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대상들과 관련하여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의 한계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우리들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계들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들로서 감관의 대상들, 따라서 오로지 경험을 넘어서서는 유효하지
않다.→ 이러한 한계들을 뛰어 넘어서서는 공간과 시간이 전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관 안에만
있으며 감관 외부에서는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상들이 감각적일 뿐 지성적이지는
않을 때, 순수 지성개념들은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우리들의 대상들과 유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까지 확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들의 감각적 직관을 뛰어 넘어서는 개념들의 더 넓은 확장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객체에 대한 공허한 개념들, 그 개념들에 대해서, 그 개념들이 단지 한 번만 가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가 저 개념들을 통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는 것, 즉 객관적 현실성이 없는 순수한 사유형식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개념들을 홀로 포함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적용되고 그렇게 개념들이 하나의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아무런
직관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직관만이 개념들에 의미와 지시체를 제공할 수 있다.
Der obige Satz ist von der größten Wichtigkeit; denn er bestimmt eben
sowohl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als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ie Grenzen
des Gebrauchs der reinen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bestimmte.
위의 명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대상들과 관련하여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의 한계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우리들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계들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 위의 명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대상들과 관련하여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을 사용함에 있어서의 한계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우리들의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계들도 규정하기 때문이다. Raum und Zeit gelten, als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wie uns
Gegenstände gegeben werden können, nicht weiter, als für Gegenstände der
Sinne, mithin nur der Erfahrung.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들로서 감관의 대상들, 따라서 오로지 경험을 넘어서서는 유효하지
않다. →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의 조건들로서 감관의 대상들, 따라서 오로지 경험을 넘어서서는 유효하지
않다. Über diese Grenzen hinaus stellen sie
gar nichts vor; denn sie sind nur in den Sinnen und haben außer ihnen
keine Wirklichkeit. 이러한 한계들을 뛰어 넘어서서는 공간과 시간이 전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관 안에만
있으며 감관 외부에서는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 이러한 한계들을 뛰어 넘어서서는 공간과 시간이 전혀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간과 시간은 단지 감관 안에만
있으며 감관 외부에서는 아무런 실재성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ind von dieser
Einschränkung frei, und erstrecken sich auf Gegenstände der Anschauung
überhaupt, sie mag der unsrigen ähnlich sein oder nicht, wenn sie nur
sinnlich und nicht intellektuell ist. 순수 지성개념들은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까지 확장한다, 그 대상들이 우리들의 대상들과 유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그 대상들이 감각적일 뿐 지성적이지는
않을 때. → 그 대상들이 감각적일 뿐 지성적이지는
않을 때, 순수 지성개념들은 이러한 제한으로부터 자유롭고, 우리들의 대상들과 유사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직관 일반의
대상들에까지 확장한다. Diese weitere Ausdehnung der
Begriffe über unsere sinnliche Anschauung hinaus, hilft uns aber zu
nichts. 우리들의 감각적 직관을 뛰어 넘어서는 이와 같은 개념들의 더 넓은 확장은 하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들의 감각적 직관을 뛰어 넘어서는 개념들의 더 넓은 확장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Denn es sind alsdenn leere Begriffe von Objekten, von denen, ob
sie nur einmal möglich sind oder nicht, wir durch jene gar nicht
urteilen können, bloße Gedankenformen ohne objektive Realität, weil wir
keine Anschauung zur Hand haben, auf welche di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jene allein enthalten, angewandt werden, und sie so
einen Gegenstand bestimmen könnten.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객체에 대한 공허한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그 개념들에 대해서, 그 개념들이 단지 한 번만 가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가 저 개념들을 통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객관적 현실성이 없는 순수한 사유형식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런 직관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직관에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그 통일만이 저 개념들을 포함하는, 적용되는, 그리고 그 개념들이 그렇게 하나의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 왜냐하면 그것은 곧 객체에 대한 공허한 개념들, 그 개념들에 대해서, 그 개념들이 단지 한 번만 가능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가 저 개념들을 통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있다는 것, 즉 객관적 현실성이 없는 순수한 사유형식들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저 개념들을 홀로 포함하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적용되고 그렇게 개념들이 하나의 대상을 규정할 수 있을 아무런
직관도 확보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Unsere sinnliche und empirische
Anschauung kann ihnen allein Sinn und Bedeutung verschaffen. 우리들의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직관만이 개념들에 의미와 지시체를 제공할 수 있다. → 우리들의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직관만이 개념들에 의미와 지시체를 제공할 수 있다.
§ 22. Die Kategorie hat keinen andern Gebrauch zum Erkenntnisse der Dinge, als ihre Anwendung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범주들은 사물들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범주들을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하는 이외에. → 범주들은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는 것 이외의는 사물들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Sich einen Gegenstand denken, und einen Gegenstand erkennen, ist also nicht einerlei. Zum Erkenntnisse gehören nämlich zwei Stücke: erstlich der Begriff, dadurch überhaupt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ie Kategorie), und zweitens die Anschauung, dadurch er gegeben wird; denn, könnte dem Begriffe eine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gar nicht gegeben werden, so wäre er ein Gedanke der Form nach, aber ohne allen Gegenstand, und durch ihn gar keine Erkenntnis von irgend einem Dinge möglich; weil es, so viel ich wüßte, nichts gäbe, noch geben könnte, worauf mein Gedanke angewandt werden könne. Nun ist alle uns mögliche Anschauung sinnlich (Ästhetik), also kann das Denken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durch einen reinen Verstandesbegriff bei uns nur Erkenntnis werden, so fern dieser auf Gegenstände der Sinne bezogen wird. Sinnliche Anschauung ist entweder reine Anschauung (Raum und Zeit) oder empirische Anschauung desjenigen, was im Raum und der Zeit unmittelbar als wirklich, durch Empfindung, vorgestellt wird. Durch Bestimmung der ersteren können wir Erkenntnisse a priori von Gegenständen (in der Mathematik) bekommen, aber nur ihrer Form nach, als Erscheinungen; ob es Dinge geben könne, die noch unausgemacht. Folglich sind alle mathematische Begriffe für sich nicht Erkenntnisse; außer, so fern man voraussetzen, daß es Dinge gibt, die sich nur der Form jener reinen sinnlichen Anschauung gemäß uns darstellen lassen. Dinge im Raum und der Zeit werden aber nur gegeben, so fern sie Wahrnehmungen (mit Empfindung begleitete Vorstellungen) sind, mithin durch empirische Vorstellung. Folglich verschaffen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elbst wenn sie auf Anschauungen a priori (wie in der Mathematik) angewandt werden, nur so fern Erkenntnis, als diese, mithin auch die Verstandesbegriffe vermittelst ihrer, auf empirische Anschauungen angewandt werden können. Folglich liefern uns die Kategorien vermittelst der Anschauung auch keine Erkenntnis von Dingen, als nur durch ihre mögliche Anwendung auf empirische Anschauung, d.i. sie dienen nur zur Möglichkeit empirischer Erkenntnis. Diese aber heißt Erfahrung. Folglich haben die Kategorien keinen anderen Gebrauch zum Erkenntnisse der Dinge, als nur so fern diese als Gegenstände möglicher Erfahrung angenommen werden. → 그러므로 범주들이 대상을 사유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같지 않다.→ 다시 말해 인식에 속하는 것은 두 가지 부문들이다.
첫째는 개념이다. 그를 통하여 대상 일반이 사유된다(범주들). 두 번째는
직관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직관이 개념에 전혀 주어질 수 없다면, 그 개념은 형식에 따른
사유일 것이나, 모든 대상과 전혀 무관한 사유일 것이며, 그 개념을 통해서 어떤 사물에 대한 것이든 전혀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유는, 내가 아는 바로는, 그에 대해 나의
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다 (감성학). 그러므로 대상 일반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개념이 감각의 대상들에
관계되는 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될 수 있을 따름이다.→ 감성적 직관은 순수 직관(공간과 시간)이거나, 공간과 시간 안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서 직접
지각을
통해서 표상되는 어떤 것에 속하는 경험적 직관이다.→ 전자의 규정을 통하여 우리는 (수학에 있어서)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들을 얻을 수 있지만, 단지 그 대상들의 형식에
따라서만,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결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수학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저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적합하게 나타날 수 있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는 인식들이
아니다.→ 그러나 사물들은, 그 사물들이 지각들(감각을 수반하는 표상들)인 한에서, 따라서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래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그 자체로 그 개념들이 선험적 직관들에 (수학에서와 같이)
적용될 때조차, 그러므로 또한
지성개념들이 그 선험적 직관들을 가지고,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오로지 이러한 한에서만 인식을 마련해 준다.→ 따라서 범주들은, 경험적 직관에 대한 그 범주들의 가능한 적용을
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즉 그 범주들이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이바지하는 것 이외에는 직관을 가지고 또한 대상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험이라 불린다.→ 따라서 범주들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이러한 사용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로서 수용되는
그러한 경우 외에는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지 않는다.
Sich einen Gegenstand denken, und einen Gegenstand erkennen, ist also
nicht einerlei. 그러므로 범주들이 대상을 사유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같지 않다. → 그러므로 범주들이 대상을 사유하는 것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은 같지 않다. Zum Erkenntnisse gehören nämlich zwei Stücke: erstlich
der Begriff, dadurch überhaupt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ie
Kategorie), und zweitens die Anschauung, dadurch er gegeben wird; denn,
könnte dem Begriffe eine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gar nicht gegeben
werden, so wäre er ein Gedanke der Form nach, aber ohne allen
Gegenstand, und durch ihn gar keine Erkenntnis von irgend einem Dinge
möglich; weil es, so viel ich wüßte, nichts gäbe, noch geben könnte,
worauf mein Gedanke angewandt werden könne. 다시 말해 인식에 속하는 것은 두 가지 부문들이다: 첫째로 개념은, 그를 통하여 대상 일반이 사유되고(범주들), 두 번째로 직관은,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직관이 개념에 전혀 주어질 수 없다면, 그 개념은 형식에 따른 사유일 것이나, 모든 대상이 전혀 없이, 그리고 그 개념을 통해 무엇이 되었든 사물에 대해서 전혀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아는 바로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나의 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 다시 말해 인식에 속하는 것은 두 가지 부문들이다. 첫째는 개념이다. 그를 통하여 대상 일반이 사유된다(범주들). 두 번째는
직관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이 주어진다. 왜냐하면, 상응하는 직관이 개념에 전혀 주어질 수 없다면, 그 개념은 형식에 따른
사유일 것이나, 모든 대상과 전혀 무관한 사유일 것이며, 그 개념을 통해서 어떤 사물에 대한 것이든 전혀 아무런 인식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유는, 내가 아는 바로는, 그에 대해 나의
사유가 적용될 수 있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제공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Nun ist alle uns mögliche
Anschauung sinnlich (Ästhetik), also kann das Denken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durch einen reinen Verstandesbegriff bei uns nur Erkenntnis
werden, so fern dieser auf Gegenstände der Sinne bezogen wird. 이제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다 (감성학), 그러므로 대상 일반에 대한 사유는 순수한 지성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개념이 감각의 대상들에 관계되는 한에서. → 이제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직관은 감성적이다 (감성학). 그러므로 대상 일반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개념이 감각의 대상들에 관계되는 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어서 인식될 수 있을 따름이다. Sinnliche
Anschauung ist entweder reine Anschauung (Raum und Zeit) oder
empirische Anschauung desjenigen, was im Raum und der Zeit unmittelbar
als wirklich, durch Empfindung, vorgestellt wird. 감성적 직관은 순수 직관(공간과 시간)이거나 다음과 같은 것의 경험적 직관이다, 공간과 시간 안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서 직접 지각을 통해서 표상되는 어떤 것의. → 감성적 직관은 순수 직관(공간과 시간)이거나, 공간과 시간 안에서 현실적인 것으로서 직접 지각을
통해서 표상되는 어떤 것에 속하는 경험적 직관이다. Durch Bestimmung der
ersteren können wir Erkenntnisse a priori von Gegenständen (in der
Mathematik) bekommen, aber nur ihrer Form nach, als Erscheinungen; ob es
Dinge geben könne, die noch unausgemacht. 전자의 규정을 통하여 우리는 (수학에 있어서)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들을 얻을 수 있지만, 단지 그 대상들의 형식에 따라서만,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결정되지 않는다. → 전자의 규정을 통하여 우리는 (수학에 있어서)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들을 얻을 수 있지만, 단지 그 대상들의 형식에 따라서만,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에 대한 인식을 얻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사물들이 있을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결정되지 않는다. Folglich sind alle
mathematische Begriffe für sich nicht Erkenntnisse; außer, so fern man
voraussetzen, daß es Dinge gibt, die sich nur der Form jener reinen
sinnlichen Anschauung gemäß uns darstellen lassen. 따라서 모든 수학적 개념들은 그 자체로는 인식들이 아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누군가 가정하는 한, 사물이 있다고, 그 사물이 저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적합하게 나타날 수 있는. → 따라서 모든 수학적 개념들은, 사람들이 저
순수한 감성적 직관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적합하게 나타날 수 있는 사물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그 자체로는 인식들이 아니다. Dinge im Raum und der
Zeit werden aber nur gegeben, so fern sie Wahrnehmungen (mit Empfindung
begleitete Vorstellungen) sind, mithin durch empirische Vorstellung.
그러나 사물들은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주어진다, 그 사물들이 지각들 (감각을 수반하는 표상들) 인 한에서, 따라서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 → 그러나 사물들은, 그 사물들이 지각들(감각을 수반하는 표상들)인 한에서, 따라서 경험적 표상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 안에서만 주어진다. Folglich verschaffen die reinen Verstandesbegriffe, selbst wenn sie auf
Anschauungen a priori (wie in der Mathematik) angewandt werden, nur so
fern Erkenntnis, als diese, mithin auch die Verstandesbegriffe
vermittelst ihrer, auf empirische Anschauungen angewandt werden können.
그래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마련해 준다, 그 자체로 그 개념들이 선험적 직관들에 (수학에서와 같이) 적용될 때조차, 인식을, 오로지 이러한 한에서, 그러므로 또한 지성개념들이 그 선험적 직관들을 가지고,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 그래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은, 그 자체로 그 개념들이 선험적 직관들에 (수학에서와 같이) 적용될 때조차, 그러므로 또한 지성개념들이 그 선험적 직관들을 가지고, 경험적 직관들에 적용될 수 있는
오로지 이러한 한에서만 인식을 마련해 준다. Folglich liefern uns die Kategorien vermittelst der Anschauung auch
keine Erkenntnis von Dingen, als nur durch ihre mögliche Anwendung auf
empirische Anschauung, d.i. sie dienen nur zur Möglichkeit empirischer
Erkenntnis. 따라서 범주들은 직관을 가지고 또한 대상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경험적 직관에 대한 그 범주들의 가능한 적용을 통해서만, 즉 그 범주들이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이바지하는 한에서만 제외하고. → 따라서 범주들은, 경험적 직관에 대한 그 범주들의 가능한 적용을
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즉 그 범주들이 경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이바지하는 것 이외에는 직관을 가지고 또한 대상들에 대해 아무런 인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Diese aber heißt Erfahrung.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험이라 불린다. → 그러나 이러한 것은 경험이라 불린다. Folglich haben die Kategorien
keinen anderen Gebrauch zum Erkenntnisse der Dinge, als nur so fern
diese als Gegenstände möglicher Erfahrung angenommen werden. 따라서 범주들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사용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로서 수용되는 그러한 한에서만 외에는. → 따라서 범주들은, 이러한 사용이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로서 수용되는 그러한 경우 외에는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다른 어떠한 용도도 가지지 않는다.
Allein von einem Stücke konnte ich im obigen Beweise doch nicht abstrahieren, nämlich davon, daß das Mannigfaltige für die Anschauung noch vor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und unabhängig von ihr, gegeben sein müsse; wie aber, bleibt hier unbestimmt. Denn, wollte ich mir einen Verstand denken, der selbst anschauet )wie etwa einen göttlichen, der nicht gegebene Gegenstände sich vorstellete, sondern durch dessen Vorstellung die Gegestände selbst zugleich gegeben, oder hervorgebracht würden), so würden die Kategorien in Ansehung eines solchen Erkenntnisse gar keine Bedeutung haben. Sie sind nur Regeln für einen Verstand, dessen ganzes Vermögen im Denken besteht, d.i. in der Handlung,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welches ihm anderweitig in der Anschauung gegeben worden,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er also für sich gar nichts erkennt, sondern nur den Stoff zum Erkenntnis, die Anschauung, die ihm durchs Objekt gegeben werden muß, verbindet und ordnet. Von der Eigentümlichkeit unsers Verstandes aber, nur vermittelst der Kategorien und nur nur gerade durch diese Art und Zahl derselben Einheit der Apperzeption a priori zu Stande zu bringen, läßt sich eben so wenig ferner ein Grund angeben, als warum wir gerade diese und keine andere Funktionen zu Urteilen haben, oder warum Zeit und Raum die einzigen Formen unserer möglichen Anschauung sind. →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가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직관하는 지성(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범주들은 단지, 그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즉,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직관에서 지성에 주어지는 그러한 잡다를 종합함을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 작용 속에 존립하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직관만을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이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그 이상의 근거를 제시토록 하진 않을 것이다.
Allein von einem Stücke konnte ich im obigen Beweise doch nicht
abstrahieren, nämlich davon, daß das Mannigfaltige für die Anschauung
noch vor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und unabhängig von ihr, gegeben
sein müsse; wie aber, bleibt hier unbestimmt.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나는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가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Denn, wollte ich mir einen
Verstand denken, der selbst anschauet (wie etwa einen göttlichen, der
nicht gegebene Gegenstände sich vorstellete, sondern durch dessen
Vorstellung die Gegestände selbst zugleich gegeben, oder hervorgebracht
würden), so würden die Kategorien in Ansehung eines solchen Erkenntnisse
gar keine Bedeutung haben. 왜냐하면, 내가 지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스스로 직관하는 (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 그러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직관하는 지성(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Sie sind nur Regeln für einen Verstand,
dessen ganzes Vermögen im Denken besteht, d.i. in der Handlung,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welches ihm anderweitig in der Anschauung
gegeben worden,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er also für
sich gar nichts erkennt, sondern nur den Stoff zum Erkenntnis, die
Anschauung, die ihm durchs Objekt gegeben werden muß, verbindet und
ordnet. 그 범주들은 단지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 지성의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존립하는, 즉 작용 속에 존립하는, 잡다의 종합을, 그 잡다가 직관에서 지성에 다른 어디에서부터 주어지는,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러므로 지성이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직관을,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 그 범주들은 단지, 그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즉,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직관에서 지성에 주어지는 그러한 잡다를 종합함을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 작용 속에 존립하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직관만을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것이다. Von der Eigentümlichkeit unsers Verstandes aber, nur vermittelst
der Kategorien und nur gerade durch diese Art und Zahl derselben
Einheit der Apperzeption a priori zu Stande zu bringen, läßt sich eben
so wenig ferner ein Grund angeben, als warum wir gerade diese und keine
andere Funktionen zu Urteilen haben, oder warum Zeit und Raum die
einzigen Formen unserer möglichen Anschauung sind.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이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그 이상의 근거를 제시토록 하진 않을 것이다.
1) I don't know how you, fellow Athenians, have been affected by my accusers, but for my part I felt myself almost transported by them, so persuasively did they speak. And yet hardly a word they have said is true. Among their many falsehoods, one especially astonished me: their warning that you must be cereful not to be taken in by me, because I am a clever speaker. It seemed to me the height of impudence on their part not to be embarrassed at being refuted straight away by the facts, once it became apparent that I was not a clever speaker at all - unless indeed they call a "clever" speaker one who speaks the truth. If that is what they mean, then I would admit to being an orator, although not on a par with them. 1) 아네테 동포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께서 저의 고발자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만, 저로서는 제 자신이 그들에 의해 거의 잊혀진 듯이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그럴싸하게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이 했던 말은 거의 진실이 아닙니다. 그들의 여러 거짓말들 중에서, 특히나 한 가지 것이 저를 경악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께서 저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하며, 그 이유는 제가 영리한 연설가이기 때문이란 그들의 경고였습니다. 제가 전혀 언변이 능란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기만 하면, 사실들로 인해 즉시 반박되리란 점에 그들로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건 제게는 더할 나위 없이 뻔뻔스러운 노릇으로 보입니다 - 덧붙여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두고 "능란한" 언변을 가진 자라 부르지 않는 한 말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저는 그들과는 급이 다른 연설가라고 시인할 것입니다.
2) As I said, then, my accusers have said little or nothing true; whereas from me you shall hear the whole truth, though not, I assure you, fellow Athenians, in language adorned with fine words and phrases or dressed up, as theirs was: you shall hear my points made spontaneously in whatever words occur to me - persuaded as I am that my case is just. None of you should expect anything to be put differently, because it would not, of course, be at all fitting at my age, gentlemen, to come before you with artificial speeches, such as might be composed by a young lad. 2)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렸듯, 저를 고발한 자들은 거의 사실을 말하지 않았거나 아무런 사실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에게서는 여러분들께서 모든 진실을 듣게 되실 겁니다. 비록, 제가 여러분들께 장담하건데, 아테네 동포 여러분, 저들의 말들이 그러했던 것 같이 훌륭한 단어들과 구절들로 장식되거나 치장된 말로는 아닐지라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는 즉흥적으로 제게 떠오르는 - 저로서는 제 경우가 옳다고 납득되는 - 그런 아무 말로나 이루어진 제 입장들을 듣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들 중 그 누구도 달리 기대하셔서는 안 될 것인데, 왜냐하면 여러분, 여러분 앞에 어린 녀석들이나 하듯이 꾸며낸 말들을 가져 오는 것은 제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One thing, moreover, I would earnestly beg of you, fellow Athenians. If you hear me defending myself with the same arguments I normally use at the banker's tables in the market-place (where many of you have heard me) and elsewhere, please do not be suprised or protest on that account. You see, here is the reason: this is the first time I have ever appeared before a court of law, although I am over 70; so I am literally a stranger to the diction of this place. And if I really were a foreigner, you would naturally excuse me, were I to speak in the dialect and style in which I had been brought up; so in the present case as well I ask you, in all fairness as I think, to disregard my manner of speaking - it may not be as good, or it may be better - but to consider and attend simply to the question whether or not my case is just; because that is the duty of a judge, as it is an orator's duty to speak the truth. 3) 더욱이 한 가지를 제가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간청드려야 하겠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께서 제가 평소에 (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께서 제게 이야기를 들으셨던) 아고라의 환전소에서 그리고 다른 어디에서든 하던 똑같은 말들을 가지고 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을 들으신다면, 부디 놀라시거나 그런 설명에 항의하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보시다시피, 여기 그 이유가 있으니 말입니다. 제가 일흔이 넘었습니다만서도, 이번이 저로서는 처음으로 법정앞에 나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자리에서의 말투에 말 그대로 문외한입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정말로 이방인이었더라면, 여러분들께서는 자연스럽게 저를 양해해 주셨을 것입니다, 제가 사투리로 제가 훈육받아왔던 그러한 식으로 말할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경우에도 여러분께 제가, 저의 말하는 방식을 - 그게 썩 좋지 못할 수도 있고, 아니면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 개의치 않고 단순히 제 주장이 올바른지 아닌지 하는 물음만을 고려하고 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제 생각에는 온당하게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판정단들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연설가의 몫이듯이 말입니다.
4) To begin with, fellow Athenians, it is fair that I should defend myself against the first set of charges then turn to the later charges and the more recent ones. You see, I have been accused before you by many people for a long time now, for many years in fact, by people who spoke not a word of truth. It is those people I fear more than Anytus and his crowd, though they too are dangerous. But those others are more so, gentlemen: they have taken hold of most of you since childhood, and made persuasive accusations against me, yet without an ounce more truth in them. They say that there is one Socrates, a "wise man," who ponders what is above the earth and investigates everything beneath it, and turns the weaker argument into the stronger. 4) 아테네 시민여러분, 우선 제가 첫 번째 고소자들의 무리에 대항해 제 자신을 변호하고 그 다음에 나중 고발자들과 더 최근의 고발자들에게 맞서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부터, 실로 여러 해에 걸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분들앞에 고소되어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진실이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저는 아니토스와 그의 무리들보다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저 다른 사람들이 더욱 위험합니다, 여러분. 그들은 여러분들 거의 모두를 어릴 적부터 사로잡아 왔고, 저에 대해 그럴 듯한 혐의들을 지어왔습니다, 그것들 중에 조금도 더한 진실은 없지만 말입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라는 한 사람이, "현명한 자"가, 땅밑에 뭐가 있을지 골몰하고 그 아래의 모든 것들을 연구하며, 더 약한 논변을 더욱 강한 것으로 바꾸는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5) Those accusers who have spread such rumour about me, fellow Athenians, are the dangerous ones, because their audience believes that people who inquire into those matters also fail to acknowledge the gods. Moreover, those accusers are numerous, and have been denouncing me for a long time now, and they also spoke to you at an age at which you would be most likely to believe them, when some of you were children or young lads; and their accusations simply went by default for lack of any defence. But the most absurd thing of all is that one cannot even get to know their names or say who they were - except perhaps one who happens to be a comic playwright. The ones who persuaded you by malicious slander, and also some who persuade others bacause they have been persuaded themselves, are all very hard to deal with: one cannot put any of them on the stand here in court, or cross-examine anybody, but one must literally engage in a sort of shadow-boxing to defend oneself, and cross-examine without anyone to answer. You too, then, should allow, as I just said, that I have two sets of accusers: one set who have accused me recently, and the other of long standing to whom I was just referring. And please grant that I need to defend myself against the latter first, since you too heard them accusing me earlier, and you heard far more from them than from these recent critics here. 5) 저에 대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그러한 고발자들은, 아테네 시민여러분, 위험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청중들은 그러한 문제들을 조사하는 사람들이 또한 신들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러한 고발자들은 수가 많고, 지금으로부터 오래 전부터 저를 비난해 오고 있으며, 그들이 또한 여러분들께서 거의 틀림없이 그들을 믿으셨을 그러한 나이대에, 여러분들 중 몇분은 아이들이셨거나 나이 어린 사내들이셨을 때에, 여러분들께 말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발들은 어떤 변론도 없었기 때문에 단순한 결석재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말도 안 되는 것은 그들의 이름들을 알거나 그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조차 없다는 점입니다. - 아마도 희극 작가일 한 사람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악질적인 중상모략으로 여러분들을 설득했던 그런 자들과 또한 그들 스스로 설득되었던 탓에 다른 이들을 설득시키는 몇몇 사람들은 모두 대하기가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도 제가 말했던 것처럼 제가 두 부류의 고발자들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한 부류는 최근에 저를 고발한 사람들이고, 아주 오래 된 다른 부류는 제가 방금 말하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제가 우선 뒤엣 사람들에 대항해 제 자신을 변호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저들에게서 저를 고발하는 것을 들으셨고, 여기에 있는 최근의 비판자들에게서보다도 그들로부터 훨씬 더 많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6) Very well, then. I must defend myself, fellow Athenians, and in so short a time must try to dispel the slander which you have had so long to absorb. That is the outcome I would wish for, should it be of any benefit to you and to me, and I should like to succeed in my defence - though I believe the task to be a difficult one, and am well aware of its nature. But let that turn out as God wills(as gods will): I have to obey the law and present my defence. 6) 그럼, 좋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변호해야만 합니다, 아테네 시민여러분,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여러분들이 아주 오랫동안 받아들여 오신 그 중상을 떨쳐 드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제가 바라는 결과이고, 여러분들께도 제게도 득이 되는 것일 터이며, 저는 저의 변호를 성공할 것 같습니다 - 비록 제가 그 일이 어려운 일에 속한다고 믿고, 그 본성을 잘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들의 뜻대로 되도록 놓아 둡시다. 저는 법에 따라 제 자신의 변호를 내놓아야 하니까요.
7) Let us examine, from the beginning, the charge that has given rise to the slander against me - which was just what Meletus relied upon when he drew up this indictment. Very well then, what were my slanderes actually saying when they slandered me? Let me read out their deposition, as if they were my legal accusers. 7) 우리는 저에 대한 중상을 생기게 하였던 그 죄목을 처음부터 검토해 보도록 합시다 - 그것은 멜레토스가 이 고발장을 작성할 적에 근거하였던 바로 그 죄목입니다. 좋습니다, 저를 중상하는 자들이 저를 중상하고 있던 때에 실제로 말하고 있던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그들의 증언문을 낭독하고자 합니다, 마치 그들이 저의 법적인 고발자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8) "Socrates is guilty of being a busybody, in that he inquires into what is beneath the earth and in the sky, turns the weaker argument into the stronger, and teaches others to do the same." 8) "소크라테스는 참견쟁이 죄인입니다. 그가 지하의 것과 하늘의 것을 탐구하고, 더 약한 논변을 더욱 강한 것으로 바꾸며, 다른 이들이 똑같은 짓을 하도록 가르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9) The charges would run something like that. Indeed, you can see them for yourselves, enacted in Aristophanes' comedy: in that play, a character called "Socrates" swings around, claims to be walking on air, and talks a lot of other nonsense on subjects of which I have no understanding, great or small. 9) 그 죄목들은 그와 같은 어떤 것들이 될 것입니다. 덧붙여서, 여러분들께서는 스스로,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에서 상연되는 그것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연극에서,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한 인물은 빙글빙글 돌고, 허공 중을 걷고 있다고주장하며, 제가 많든 적든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들에 대해 무의미한 다른 많은 것들을 말합니다.
10) Not that I mean to belittle knowledge of that sort, if anyone really is learned in such matters - no matter how many of Meletus' lawsuits I might have to defend myself against - but the fact is, fellow Athenians, those subjects are not my concern at all. I call most of you to witness yourselves, and I ask you to make that quite clear to one another, if you have ever heard me in discussion (as many of you have). Tell one another, then, whether any of you has ever heard me discussing such subjects, either briefly or at length; and as a result you will realize that the other things said about me by the public are equally baseless. 10) 제가 그런 종류의 지식들을 하찮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누구든 정말로 그런 문제들에 대해 학식이 있다면 말씀입니다 - 제가 그에 대항해 제 자신을 변호해야 할 멜레토스의 소송내용들이 얼마나 많든지 상관 없이 - 그러나 사실은, 아테네인 여러분, 그러한 주제들은 전혀 제 관심사가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 대부분을 여러분들 자신들의 증인으로 청하며, 여러분들께 저는, 만일 여러분들께서 한 번이라도 저에게서 논의하는 것을 들으신 적이 있다면(여러분들 중 많은 분들께서 그러하셨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그것을 분명히 밝혀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서로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여러분들 중 누구시든 그러한 주제들로 제가 논의하는 것을 들으신 일이 있으신지, 짧든 길든 말씀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여러분들께서는 대중들이 저에 대해 말하는 그 이외의 이야기들도 똑같이 근거없다는 것을 알아차리실 것입니다.
11) In any event, there is no truth in those charges. Moreover, if you have heard from anyone that I undertake to educate people and charge fees, there is no truth in that either - though for that matter I do think it also a fine thing if anyone is able to educate people, as Gorgias of Leontini, Prodicus of Ceos, and Hipias of Elis profess to. Each of them can visit any city, gentlemen, and persuade its young people, who may associate free of charge with any of their own citizens they wish, to leave those associations, and to join with them instead, paying fees and being grateful into the bargain. 11) 어쨌든, 그러한 죄목들 중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습니다. 더욱이, 만일 여러분들께서 누구에게서든 제가 사람들을 교육하고 값을 받으려 한다고 들으셨다면, 거기에도 어느 것 하나 진실은 없습니다 - 그 문제에 대해서 제가 누구든 사람들을, 레온티노이의 고르기아스, 케오스의 프로디코스, 그리고 엘리스의 히피아스가 공언하듯이, 그렇게 가르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말씀입니다. 그들 각자는 어느 도시든 방문할 수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그리고 그 도시의 젊은 사람들, 그들이 원하는 그들의 시민 동료들 중 누구에게는 공짜로 어울릴 그런 사람들을 그러한 연대들을 내버려 두고, 대신에 그들과 어울리라고, 값을 치르고 또한 감사하면서 그러하라고 설득할 수 있습니다.
12) On that topic, there is at present another expert here, a gentleman from Paros; I heard of his visit, because I happened to run into a man who has spent more money on sophists than everyone else put together - Callias, the son of Hipponicus. So I questioned him, since he has two sons himself. 12) 그 주제에 관해서, 당장 여기에 또 다른 전문가가 있습니다, 파로스에서 온 시민 말입니다; 저는 그가 방문하였다는 것을 들었는데, 왜냐하면 제가 마침 다른 모두를 합한 것보다도 더 많은 돈을 소피스트들에게 써온 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 그는 히포니코스의 아들 칼리아스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두 아들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13) "Callias," I said, "if your two sons had been born as colts or calves, we could find and engage a tutor who could make them both excel superbly in the required qualities - and he'd be some sort of expert in horse-rearing or agriculture. But seeing that they are actually human, whom do you intend to engage as their tutor? Who has knowledge of the required human and civic qualities? I ask, because I assume you've given thought to the matter, having sons yourself. Is there such a person," I asked, "or not?" "Certainly," he replied. "Who is he?" I said; "Where does he come from, and what does he charge for tuition?" "His name is Evenus, Socrates," he replied; "He comes from Paros, and he charges 5 minas." 13) "칼리아스," 제가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두 아들이 망아지들이나 송아지들로 태어났었다면야, 우리는 그 친구들을 모두를 필요한 소질들에 있어서 월등히 빼어나게 만들 수 있는 교사를 찾고 또 고용할 수도 있을 거에요. - 또 그는 말사육이나 농사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전문가겠지요. 하지만 그 친구들이 실제로는 사람인지라, 당신은 누구를 그들의 교사로 고용할 생각인가요? 누가 꼭 필요한 인간적이고 시민적인 소질들에 대해 지식을 가지고 있나요? 저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아이들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를 곰곰히 생각했을 거라고 짐작하기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혹은 없나요?" "확실히 있지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가 누군가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 왔고, 수업료는 얼마인가요?" "그의 이름은 에우에노스에요, 소크라테스."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는 파로스에서 왔고, 5므나를 받습니다."
14) I thought Evenus was to be congratulated, if he really did possess that skill and imparted it for such a modest charge. I, at my rate, would certainly be giving myself fine airs and graces if I possessed that knowledge. But the fact is, fellow Athenians, I do not. 14) 저는 에우에노스가 축하받을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일 그가 정말로 그런 기술을 지니고 있었고 그런 대단찮은 값으로 그걸 전해주었다면 말입니다. 저라면 제가 그런 지식을 가졌더라면 잘난 체를 하고 자랑하였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테네인 여러분, 저는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15) Now perhaps one of you will interject: "Well then, Socrates, what is the difficulty in your case? What is the source of these slanders against you? If you are not engaged in something out of the ordinary, why ever has so much rumour and talk arisen about you? It would surely never have arisen, unless you were up to something different from most people. Tell us what is it, then, so that we don't jump to conclusions about you." 15) 이제 아마도 여러분들 중 한 분께서는 말참견을 하실지도 모릅니다. "좋아요, 소크라테스, 당신의 소송에서 어려운 점이 뭡니까? 당신에 대한 이런 모략들의 원천은 뭡니까? 만일 당신이 일상적인 것들을 벗어나는 어떤 것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당신에 대해 그렇게나 많은 소문들과 말들이 있던 겁니까? 당신이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뭔가로 바쁘지 않았다면야, 그런 일은 당연히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당신에 대해 성급하게 결론내리지 않도록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6) That speaker makes a fair point, I think; and so I will try to show you just what it is that has earned me my reputation and notoriety. Please hear me out. Some of you will perhaps think I am joking, but I assure you that I shall be telling you the whole truth. 16)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제 생각에 맞는 말을 하고 계십니다. 또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바로 그것이 제게 저의 평판과 악명을 가져다 준 것임을 보여드리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중 몇몇분께서는 아마도 제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 겁니다만, 저는 여러분들께 제가 모든 진실을 말씀드리고 있을 것임을 보장합니다.
17) You see, fellow Athenians, I have gained this reputation on account of nothing but a certain sort of wisdom. And what sort of wisdom is that? It is a human kind of wisdom, perhaps, since it might just be true that I have wisdom of that sort. Maybe the people I just mentioned possess wisdom of a superhuman kind; otherwise I cannot explain it. For my part, I certainly do not possess that knowledge; and whoever says I do is lying and speaking with a view to slandering me - 17) 아시다시피, 아테네인여러분, 저는 이러한 평판을 다른 무엇도 아닌 어떤 종류의 지혜 때문에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게 어떤 종류의 지혜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적인 종류의 지혜일 터인데, 왜냐하면 제가 그러한 종류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일 테니 말씀입니다. 어쩌면 제가 방금 말씀드린 사람들은 인간을 넘어서는 종류의 지혜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외에는 제가 그걸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저로서는 확실히 그런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그 누구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고 저를 중상하려는 시선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18) Now please do not protest, fellow Athenians, even if I should sound to you rather boastful. I am not myself the source of the story I am about to tell you, but I shall refer you to a trustworthy authority. As evidence of my wisdom, if such it actually be, and of its nature, I shall call to witness before you the god at Delphi. 18) 아테네인 여러분, 이제 제발 반발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설령 제가 여러분께 되레 뽐내는 것처럼 들린다 할지라도 말씀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려는 이야기는 제 자신이 출처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믿을 만한 증언을 제시해 드릴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정말로 있다면 제 지혜에 대한 증거로서, 그리고 그 지혜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에 대한 증거로서, 저는 여러분들 앞에 델피의 신을 증인으로 청할 것입니다.
19) You remember Chaerephon, of course. He was a friend of mine from youth, and also a comrade in your party, who shared your recent exile and restoration. You recall too what sort of man Chaerephon was, how impetuous he was in any undertaking. Well, on one occasion he actually to put the following question to it - as I said, please do not make a disturbance, gentlemen - he went and asked if there was anyone wiser than myself; to which the Pythia responded that there was no one. His brother here will testify to the court about that story, since Chaerephon himself is deceased. 19) 여러분들께서는 물론 카이레폰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제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고, 또한 여러분들의 부대에서 여러분들의 추방과 귀국을 함께 하였던 한 사람의 동료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카이레폰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실 겁니다. 어떤 일을 맡든지 그는 어찌나 성급하였던지요. 자, 어떤 기회에 그는 실제로 그 지혜에 대해 다음과 같음 물음을 던졌습니다 -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시민여러분, 소란을 일으키지 말아주시길 제발 부탁드립니다 - 그는 가서 물었습니다, 혹시 저보다 지혜로운 누군가가 있는지를 말씀입니다. 그 물음에 대해 퓌티아는 아무도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의 형제가 여기에서 그 이야기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할 것입니다. 카이레폰 자신은 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0) Now keep in mind why I have been telling you this: it is because I am going to explain to you the origin of the slander against me. When I heard the story, I thought to myself: "What ever is the god saying? What can his riddle mean? Since I am all too conscious of not being wise in any matter, great or small, what ever can he mean by pronouncing me to be the wisest? Surely he cannot be lying: for him that would be out of the question." 20) 이제 어째서 제가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께 말씀드려 왔는지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제가 여러분들께 저에 대한 그 중상의 근원을 계속해서 설명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대체 그 신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이야기지? 그 분의 수수께끼는 뭘 뜻하는 걸까? 나는 대단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현명하지 않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그분께서 나를 가장 현명하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도대체 무슨 뜻을 전하실 수 있으실까? 확실히 그 분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는 없으니까. 그분에 대해 그건 물을 여지가 없지."
21) So for a long time I was perplexed about what he could possibly mean. But then, with great reluctance, I proceeded to investigate the matter somewhat as follows. I went to one of the people who had a reputation for wisdom, thinking there, if any where, to disprove the oracle's utterance and declare to it: "Here is someone wiser than I am, and yet you said that I was the wisest." 21) 그래서 오랜 동안 저는 그 분께서 뜻하셨을 수 있을 것에 대해 당혹스러워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고 나서, 정말로 마지못해서, 저는 다음과 같은 다소간의 문제를 살펴보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저는 지혜로 이름 높은 사람들 중 하나에게 찾아갔습니다. 어디에서든, 그곳에서 그 신탁의 말씀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다음과 같은 것, "여기 저보다 더욱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데, 당신께서는 제가 가장 지혜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라는 것을 분명히 할 생각으로 말입니다.
22) So I interviewed this person - I need not mention his name, but he was someone in public life; and when I examined him, my experience went something like this, fellow Athenians; in conversing with him, I formed the opinion that, although the man was thought to be wise by many other people, and especially by himself, yet in reality he was not. So I then tried to show him that he thought himself wise without being so. I thereby earned his dislike, and that of many people present; but still, as I went away, I thought to myself: "I am wiser than that fellow, anyhow. Because neither of us, I dare say, knows anything of great value; but he thinks he knows a thing when he doesn't; whereas I neither know it in fact, nor think that I do. At any rate, it appears that I am wiser than he in just this one small respect: if I do not know something, I do not think that I do." 22) 그래서 저는 이러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 제가 그의 이름을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그는 공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를 검토했을 때, 저는 이와 같은 어떤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그와 대화하면서, 저는 그 사람이 여러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현명한 사람으로 생각되었고 또 특히 그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다 할지라도, 실상 그는 현명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으로 그에게 그가 현명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신을 현명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는 그에게 미움을 샀고, 여기 많은 분들의 미움도 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제가 떠나는 동안에도,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어떻든 저 사람보다는 현명하군. 왜냐하면 우리들 중 누구도 솔직히 말해서 대단히 가치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알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는 그가 알지 못하면서도 어떤 것을 안다고 생각해. 반면에 나는 정말로 그것을 알지 못하고,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아. 어쨌든, 바로 이 작은 한 가지 면에서는 내가 그보다 현명하다는 게 드러나는군. 만일 내가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내가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23) Next, I went to someone else, among people thought to be even wiser than the previous man, and I came to the same conclusion again; and so I was disliked by that man too, as well as by many others. 23) 다음으로, 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갔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먼젓번 사람보다 훨씬 더 현명하다고 여겨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같은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저 사내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24) Well, after that I went on to visit one person after another. I realized, with dismay and alarm, that I was making enemies; but even so, I thought it my duty to attach the highest importance to the god's business; and therefore, in seeking the oracle's meaning, I had to go on to examine all those with any reputation for knowledge. And upon my word, fellow Athenians - because I am obliged to speak the truth before the court - I truly did experience something like this: as I pursued the god's inquiry, I found those held in the highest esteem were practically the most defective, whereas men who were supposed to be their inferiors were better off in respect of understanding. 24) 자, 그 이후에 저는 또 다른 다음 사람을 계속해서 찾아갔습니다. 저는 충격과 공포를 느끼면서 제가 적들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긴 하지만, 저는 신의 일에 가장 높은 가치를 두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탁의 의미를 찾으면서, 저는 앎에 있어서 어떤 명성이라도 가진 모든 사람들을 계속해서 검토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맹세컨데, 아테네 시민여러분 - 왜냐하면 제가 법정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할 책임이 있으니 말입니다 - 저는 진실로 이와 같은 어떤 일을 겪었습니다. 제가 신의 탐구를 추구하는 동안, 저는 가장 존경받는 그러한 사람들이 특히나 가장 부족한 사람들이었던 반면, 그들보다 못한 사람들로 여겨졌던 사내들이 이해심의 측면에서는 더욱 나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25) Let me, then, outline my wanderings for you, the various "labours" I kept undertaking, only to find that the oracle proved competely irrefutable. After I had done with the politicians, I turned to the poets - including tragedians, dithyrambic poets, and the rest - thinking that in their company I would be shown up the poems over which I thought they had taken the most trouble, and questioned them about their meaning, so that I might also learn something from them in the process. 25) 다음으로 저는 여러분들께 저의 방랑을 개략적으로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떠맡았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말씀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 신탁이 완전히 반박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남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정치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저는 시인들 - 비극 시인들, 주신 찬가 작가들, 그리고 나머지 시인들을 포함한 사람들 - 에게로 넘어갔습니다. 그들의 무리 속에서 저는 제 생각에 그들이 가장 공을 들였다고 여겨지는 시들을 내놓았고, 그들에게 그 시들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 또한 그들로부터 어떤 것을 배울까 해서 말씀입니다.
26) Now I'm embarrassed to tell you the truth, gentlemen, but it has to be said. Practically everyone else present could speak better than the poets themselves about their very own compositions. And so, once more, I soon realized this truth about them too: it was not from wisdom that they composed their works, but from a certain natural aptitude and inspiration, like that of seers and soothsayers - because those people too utter many fine words, yet know nothing of the matters on which they pronounce. It was obvious to me that the poets were in much the same situation; yet at the same time I realized that because of their compositions they thought themselves the wisest people in other matters as well, when they were not. So I left, believing that I was ahead of them in the same way as I was ahead of the politicians. 26) 지금 제가 여러분들께 진실을 말씀드리기가 당혹스럽습니다만, 시민여러분, 그 진실을 말해야 하겠습니다. 실제로 여기 계신 다른 모든 분들께서 그 시인들 자신들보다도 바로 그들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더욱 잘 말씀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저는 곧 그들에 대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작품들을 구성하였던 것은 지혜로부터가 아니었고, 어떤 타고난 소질과 영감, 예지자들과 예언자들의 것과 같은 그런 것들로부터라는 사실입니다. -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많은 훌륭한 말들을 하지만, 그들이 그에 대해 말하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시인들도 완전히 똑같은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그들이 그들의 작품들 때문에 그들 자신을 다른 문제들에서도 또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지혜롭지 않을 때에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정치인들보다 나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보다도 낫다고 믿으면서 떠났습니다.
27) Then, finally, I went to the craftsmen, because I was conscious of knowing almost nothing myself, but felt sure that amongst them, at least, I would find much valuable knowledge. And in that expectation I was not disappointed: they did have knowledge in fields where I had none, and in that respect they were wiser than I. And yet, fellow Athenians, those able craftsmen seemed to me to suffer from the same failing as the poets: because of their excellence at their own trade, each claimed to be a great expert also on matters of the utmost importance; and this arrogance of theirs seemed to eclipse their wisdom. So I began to ask myself, on the oracle's behalf, whether I should prefer to be as I am, neither wise as they are wise, nor ignorant as they are ignorant, or to possess both their attributes; and in reply, I told myself and the oracle that I was better off as I was. 27) 그리고 끝으로, 저는 장인들에게 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제 자신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분명 그들 가운데에서는 최소한 제가 훨씬 가치있는 앎을 발견하리라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에서 제가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제가 알지 못했던 분야들에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점에서 그들은 저보다 더욱 지혜로웠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인 여러분, 그러한 능력있는 장인들이 제게는 시인들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의 고유한 사업에 있어서 그들의 탁월함 때문에, 가장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각자가 훌륭한 전문가임을 주장하였습니다.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오만은 그들의 지혜를 바래게 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신탁을 위하여, 제가 그들이 현명한 그러한 모습으로 현명하지도, 그들이 무지한 것과 같이 그렇게 무지하지도 않고 지금 제 모습처럼 있는 것을 선호해야 할지, 아니면 그들의 속성들 모두를 지니려고 해야 할지; 그리고 저는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과 그 신탁에 대고 제가 저였던 그대로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습니다.
28) The effect of this questioning, fellow Athenians, was to earn me much hostility of a very vexing and trying sort, which has given rise to numerous slanders, including this reputation I have for being "wise" - because those present on each occasion imagine me to be wise regarding the matters on which I examine others. But in fact, gentlemen, it would appear that it is only the god who is truly wise; and that he is saying to us, through this oracle, that human wisdom is worth little or nothing. It seems that when he says "Socrates," he makes use of my name, merely taking me as an example - as if to say, "The wisest amongst you, human beings, is anyone like Socrates who has recognized that with respect to wisdom he is truly worthless." 28) 이러한 물음의 결과로, 아테네인 여러분, 저는 아주 성가시고 괴로운 종류의 많은 적대심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비방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제가 "지혜로운" 자라는 이 평판을 포함해서 말씀입니다. - 왜냐하면 제가 다른 이들을 검토하는 문제들을 고려하면서 그 때마다 참석자들이 저를 지혜로운 자라고 상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여러분, 참으로 지혜로운 것은 오직 신들뿐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탁을 통해 그 신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은 인간적 지혜는 거의 가치가 없거나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이라는 것도 드러날 것입니다. 그분께서 "소크라테스"라고 말씀하실 적에, 그분께서는 제 이름을 가지고 단지 예시로 삼으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너희 인간들 중 가장 지혜로운 자는, 누구든 소크라테스처럼 지혜에 있어서 그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은 자이다."
29) That is why, even to this day, I still go about seeking out and searching into anyone I believe to be wise, citizen or foreigner, in obedience to the god. Then, as soon as I find that someone is not wise, I assist the god by proving that he is not. Because of this occupation, I have had no time at all for any activity to speak of, either in public affairs or in my family life; indeed, because of my service to the god, I live in extreme poverty. 29) 그것이 오늘까지도 제가 여전히 계속해서 제가, 시민이든 외래인이들, 지혜롭다 생각하는 누구든 그 신께 복종하는 뜻에서 찾아내고 또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금새 저는 누군가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 차리고, 그가 현명하지 않다는 것을 밝혀냄으로써 그 신을 돕습니다. 이와 같은 일로 인해, 저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제 가정사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활동을 할 시간이 전혀 없었습니다. 더욱이, 신에 대한 저의 봉사 때문에, 저는 극도로 빈한하게 삽니다.
30) In addition, the young people who follow me around of their own accord, the ones who have plenty of leisure because their parents are wealthiest, enjoy listening to people being cross-examined. Often, too, they copy my example themselves, and so attempt to cross-examine others. And I imagine that they find a great abundance of people who suppose themselves to possess some knowledge, but really know little or nothing. Consequently, the people they question are angry with me, though not with themselves, and say that there is a nasty pestilence abroad called "Socrates," who is corrupting the young. 30) 덧붙여서, 자발적으로 저를 따라 다니는 젊은 사람들, 그들의 부모님들께서 매우 부유하신 덕분에 넘치는 여가를 지닌 친구들은 반문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를 즐깁니다. 종종, 마찬가지로 그들도 스스로 저의 일을 따라하고, 그렇게 다른 이들을 반문하고자 시도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친구들이, 자신들은 어떤 지식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는 게 없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넘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그 친구들이 심문하는 그 사람들은 그 친구들 자신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화를 냅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라는 끔찍한 역병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는 그런 질병이 있다고 말합니다.
31) Then, when asked just what he is doing or teaching, they have nothing to say, because they have no idea what he does; yet, rather than seem at a loss, they resort to the stock charges against all who pursue intellectual inquiry, trotting out "things in the sky and beneath the earth," "failing to acknowledge the gods," and "turning the weaker argument into the stronger." They would, I imagine, be loath to admit the truth, which is that their pretensions to knowledge have been exposed, and they are totally ignorant. So because these people have reputations to protect, I suppose, and are also both passionate and numerous, and have been speaking about me in a vigorous and persuasive style, they have long been filling your ears with vicious slander. It is on the strength of all this that Meletus, along with Anytos and Lycon, has proceeded against me: Meletus is aggrieved for the poets, Anytus for the craftsmen and politicians, and Lycon for the orators. And so, as I began by saying, I should be surprised if I could rid your minds of this slander in so short a time, when so much of it has accumulated. 31) 그래서, 그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나 가르치고 있는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을 적에는, 그들이 할 말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당황해 하는 듯하며, 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 밑에 있는 것들," "신들을 인정하지 않음," 그리고 "더 약한 논변을 더욱 강한 것으로 뒤바꿈"을
둘러대면서, 지성적 탐구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상투적인 죄목들에 의존합니다. 제 생각에 그들은 진실을 받아들이길 꺼려할 것 같습니다. 그 진실이란 그들의 지식에 대한 허세들이 폭로되었다는 것이고, 그들이 전부 다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평판들을 지켜내려고, 그리고 또한 그들이 열정적이기도 하고 또 엄청 많기도 하기 때문에, 격렬하고 설득력 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저에 대해 말해 오고 있었고, 그들은 여러분들의 귓가에 사나운 모략들을 채워넣어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힘입어 멜레토스가, 아뉘토스와 뤼콘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저에게 반대해온 것입니다. 멜레토스는 시인들을, 아뉘토스는 장인들과 청지가들을, 그리고 뤼콘은 예언가들을 위해서 분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만일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에서 이러한 모략을 너무도 짧은 시간 안에, 너무나 많이 쌓여 버린 시간에, 떨쳐낼 수 있다면, 저는 놀랄 것입니다.
32) There is the truth for you, fellow Athenians. I have spoken it without concealing anything from you, major or minor, and without glossing over anything. And yet I am virtually certain that it is my very candour that makes enemies for me - which goes to show that I am right: the slander against me is to that effect, and such is its explanation. And whether you look for one now or later, that is what you will find. 32) 여러분들을 위한 진실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저는 그 진실을 여러분들께 주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어느 것 하나 숨김 없이, 그리고 어떤 것에 대해서든 꾸밈 없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거의 확신합니다. 저에 대한 적들을 만든 것은 제 자신의 지나친 솔직함이라는 것을 말씀입니다. - 그 솔직함은 제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에 대한 중상은 그런 취지의 것이고, 그러한 것이 그 중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께서 그것을 지금 기대하시든 나중에 바라시든, 여러분들께서 발견하실 것이 그것입니다.
-蟲-
P.S 영역은 어감이 진짜 다 죽어 버리는구나. 이런 거 보면 박종현 선생님 번역이 얼마나 멋진지도 알겠고 기종석 선생님 말씀대로 영어보다도 한국말이 고대 그리스어에 더 가까운 면이 있다는 말도 좀 와닿는다. 일단 영어공부가 먼저이니 어쩔 수 없지만. 대학원 가면 『변론』 강독할껴+_+!!
Ein Mannigfaltiges, das in einer Anschauung, die ich die meinige nenne, enthalten ist, wird durch die Synthesis des Verstandes als zur notwendigen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gehörig vorgestellt, und dieses geschieht durch die Kategorie¹. Diese zeigt also an: daß das empirische Bewußtsein eines gegebenen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eben sowohl unter einem reinen Selbstbewußtsein a priori, wie empirische Anschauung unter einer reinen sinllichen, die gleichfalls a priori Statt hat, stehe. - Im obigen Satze ist also der Anfang ein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emacht, in welcher ich, da die Kategorien unabhängig von Sinnlichkeit bloß im Verstande entspringen, noch von der Art, wie das Mannigfaltige zu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werde, abstrahieren muß, um nur auf die Einheit, die in die Anschauung vermittelst der Kategorie durch den Verstand hinzukommt, zu sehen. In der Folge (§ 26.) wird aus der Art, wie in der Sinnlichkeit die empirische Anschauung gegeben wird, gezeigt werden, daß die Einheit derselben keine andere sei, als welche die Kategorie nach dem vorigen § 20. dem Mannigfaltigen einer gegebenen Anschauung überhaupt vorschreibt, und dadurch also, daß ihre Gültigkeit a priori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unserer Sinne erklärt wird, die Absicht der Deduktion allererst völlig erreicht werden. →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이것은 그러므로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경험적 직관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러하듯,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그러므로 앞선 명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오로지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통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 위해서,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을
도외시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그와 같은 통일이 범주들이 바로
전 § 20.에
따라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됨으로써,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¹Der Beweisgrund beruht auf der vorgestellten Einheit der Anschauung, dadurch ein Gegenstand gegeben wird, welche jederzeit ein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einer Anschauung Gegebenen in sich schließt, und schon die Beziehung dieses letzteren auf Einheit der Apperzeption enthält. →
¹그 논증은,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러한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리고
이러한 통각의 통일에 대한 주어진 잡다의 관계를 이미 포함할 것이다.
Ein Mannigfaltiges, das in einer Anschauung, die ich die meinige nenne,
enthalten ist, wird durch die Synthesis des Verstandes als zur
notwendigen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gehörig vorgestellt, und
dieses geschieht durch die Kategorie¹. 잡다는, 그 잡다가 하나의 직관 안에,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Diese zeigt also an: daß das
empirische Bewußtsein eines gegebenen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eben sowohl unter einem reinen Selbstbewußtsein a priori, wie empirische
Anschauung unter einer reinen sinllichen, die gleichfalls a priori
Statt hat, stehe. 이것은 그러므로 가리킨다: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경험적 직관이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것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존립한다는 것. → 이것은 그러므로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경험적 직관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러하듯,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Im obigen Satze ist also der Anfang ein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emacht, in welcher ich, da die Kategorien
unabhängig von Sinnlichkeit bloß im Verstande entspringen, noch von der
Art, wie das Mannigfaltige zu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werde, abstrahieren muß, um nur auf die Einheit, die in die Anschauung
vermittelst der Kategorie durch den Verstand hinzukommt, zu sehen. - 앞선 명제에서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는 되이시해야만 한다, 오로지 통일에 대해서, 그 통일이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보기 위해서. → - 그러므로 앞선 명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오로지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통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 위해서,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을 도외시해야만 한다. In
der Folge (§ 26.) wird aus der Art, wie in der Sinnlichkeit die
empirische Anschauung gegeben wird, gezeigt werden, daß die Einheit
derselben keine andere sei, als welche die Kategorie nach dem vorigen §
20. dem Mannigfaltigen einer gegebenen Anschauung überhaupt vorschreibt,
und dadurch also, daß ihre Gültigkeit a priori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unserer Sinne erklärt wird, die Absicht der Deduktion
allererst völlig erreicht werden.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지시된다, 그와 같은 통일이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 범주들이 그에 따라 바로 전 § 20.에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되는 것,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 →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그와 같은 통일이 범주들이 바로 전 § 20.에 따라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됨으로써,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¹Der Beweisgrund beruht auf der vorgestellten Einheit der Anschauung,
dadurch ein Gegenstand gegeben wird, welche jederzeit ein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einer Anschauung Gegebenen in sich schließt, und
schon die Beziehung dieses letzteren auf Einheit der Apperzeption
enthält.
¹그 논증은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관계가 이미 통각의 통일에 대해 포함할 것이다. →
¹그 논증은,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러한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리고
이러한 통각의 통일에 대한 주어진 잡다의 관계를 이미 포함할 것이다.
§ 20. Alle sinnliche Anschauungen stehen unter den Kategorien, als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as Mannigfaltige derselben in ein Bewußtsein zusammenkommen kann 모든 감각적 직관들은 범주들 아래에, 그것들 아래에서만 그 직관의 잡다가 하나의 의식 속으로 함께 들어올 수 있는 그러한 조건들로서의 범주들 아래에서 자리한다
Das mannigfaltige in einer sinnlichen Anscahuung Gegebene gehört notwendig unter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weil durch diese die Einheit der Anschauung allein möglich ist. (§ 17.) Diejenige Handlung des Verstandes aber, durch die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sie mögen Anschauungen oder Begriffe sein) unter eine Apperzeption überhaupt gebracht wird, ist die logische Funktion der Urteils. (§ 19.) Also ist alles Mannigfaltige, so fern es in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ist,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bestimmt, durch die es nämlich zu einem Bewußtsein überhaupt gebracht wird. Nun sind aber die Kategorien nichts andres, als eben diese Funktionen zu urteilen, so fern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in Ansehung ihrer bestimmt ist. (§ 13.) Also steht auch das Mannigfaltige in einer gegebenen Anschauung notwendig unter Kategorien. → 감각적 직관 안에서 잡다로서 주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아래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이 통일을 통해서만
직관의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17.)→ 그러나 지성의 저 활동, 그를 통하여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가 (그 표상들은
직관들이거나 개념들일 수 있다) 어쨌든 하나의
통각 아래에로 이끌릴 수 있는 그러한 활동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다. (§ 19.) → 그러므로 모든 잡다는, 하나 안에 감각적
직관이 주어지는 한에서, 판단을 위한 논리적 기능, 그를 통하여
잡다가 말하자면 의식 일반으로 이끌리는 그러한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이제 범주들은,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그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되는
한에서, 바로 이러한 판단하는 기능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잡다 역시 필연적으로 범주들 아래에
선다.
Das mannigfaltige in einer sinnlichen Anscahuung Gegebene gehört
notwendig unter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weil durch diese die Einheit der Anschauung allein möglich ist. (§ 17.) 감각적 직관 안에서 잡다로서 주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아래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이 통일을 통해서만 직관의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17.) → 감각적 직관 안에서 잡다로서 주어진 것은 필연적으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 아래에 속하는데, 왜냐하면 이 통일을 통해서만
직관의 통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 17.) Diejenige Handlung des Verstandes aber, durch die das Mannigfaltige
gegebener Vorstellungen (sie mögen Anschauungen oder Begriffe sein)
unter eine Apperzeption überhaupt gebracht wird, ist die logische
Funktion der Urteils. (§ 19.) 그러나 지성의 저 활동은, 그 활동을 통하여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가 (그 표상들은 직관들이거나 개념들일 수 있다) 어쨌든 하나의 통각 아래에로 이끌릴 수 있는,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다. (§ 19.) → 그러나 지성의 저 활동, 그를 통하여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가 (그 표상들은 직관들이거나 개념들일 수 있다) 어쨌든 하나의
통각 아래에로 이끌릴 수 있는 그러한 활동은 판단의 논리적 기능이다. (§ 19.) Also ist alles Mannigfaltige, so fern es
in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ist,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bestimmt, durch die es nämlich zu einem
Bewußtsein überhaupt gebracht wird. 그러므로 모든 잡다는, 하나 안에 감각적 직관이 주어지는 한에서, 판단을 위한 논리적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그 기능을 통하여 잡다가 말하자면 의식 일반으로 이끌리는. → 그러므로 모든 잡다는, 하나 안에 감각적 직관이 주어지는 한에서, 판단을 위한 논리적 기능, 그를 통하여
잡다가 말하자면 의식 일반으로 이끌리는 그러한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된다. Nun sind aber die Kategorien nichts
andres, als eben diese Funktionen zu urteilen, so fern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in Ansehung ihrer bestimmt ist.
(§ 13.) 그러나 이제 범주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바로 이러한 판단하는 기능들 이외에,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그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되는 한에서. → 그러나 이제 범주들은,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그 기능과 관련하여 규정되는
한에서, 바로 이러한 판단하는 기능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Also steht auch das Mannigfaltige in einer gegebenen Anschauung
notwendig unter Kategorien. 그러므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잡다 역시 필연적으로 범주들 아래에 선다. → 그러므로 주어진 직관 안에서 잡다 역시 필연적으로 범주들 아래에 선다.
Wenn ich aber die Beziehung gegebener Erkenntnisse in jedem Urteile genauer untersuche, und sie, als dem Verstande angehörige, von dem Verhältnisse nach Gesetzen der reproduktiven Einbildungskraft (welches nur subjektive Gültigkeit hat) unterscheide, so finde ich, daß ein Urteil nichts andres sei, als die Art, gegebene Erkenntnisse zur objektiven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arauf zielt das Verhältniswörtchen ist in denselben, um die objektive Einheit gegebener Vorstellungen von der subjektiven zu unterscheiden. Denn dieses bezeichne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und die notwendige Einheit derselben, wenn gleich das Urteil selbst empirisch, mithin zufällig ist, z.B. die Körper sind schwer. Damit ich zwar nicht sagen will, diese Vorstellungen gehören in der empirischen Anschauung notwendig zu einander, sondern sie gehören vermöge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n der Synthesis der Anschauungen zu einander, d.i. nach Prinzipien der objektiven Bestimmung aller Vorstellungen, so fern daraus Erkenntnis werden kann, welche Prinzipien alle aus dem Grundsatze der transzendentalen Einheit der Apperzeption abgeleitet sind. Dadurch allein wird aus diesem Verhältnisse ein Urteil, d.i. ein Verhältnis, das objektiv gültig ist, und sich von dem Vrhältnisse eben derselben Vorstellungen, worin bloß subjektive Gültigkeit wäre, z.B. nach Gesetzen der Assoziation, hinreichend unterscheidet. Nach der letzteren würde ich nur sagen können: Wenn ich einen Körper trage, so fühle ich einen Druck der Schwere; aber nicht: er, der Körper, ist schwer; welches so viel sagen will, als, diese beide Vorstellungen sind im Objekt, d.i. ohne Untershied des Zustandes des Subjekts, verbunden, und nicht bloß in der Wahrnehmung (so oft sie auch wiederholt sein mag) beisammen. → 그러나 내가 각각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인식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검토할 때, 그리고 그 관계를 지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단지 주관적 정당성만을 지니는)재생적 상상력의 법칙에 따른 관계로부터 구분할 때, 그래서 나는 하나의 판단은, 주어진 인식들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로 가져오는 그 방식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주어진 표상들의 객관적 통일을 주관적 통일과 구분하기 위해서 인식들에 있어서 관계사 ist는
그에 대해 지시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비록 그 판단
자체가, 예를 들어 물체는 무겁다와 같이 경험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근원적 통각과 그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대해 그
표상들 자체의 관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나는, 이러한 표상들이 경험적 직관 안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
표상들은 직관들의 종합에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따라, 즉 모든 표상들의 객관적 규정의 원칙에 따라,
그로부터 인식이 이루어지는 한에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의 근본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그런 모든 원칙들에 따라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를 통해서만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하나의 판단이, 즉 객관적으로 정당한 하나의 관계가,
그 안에서 예를 들어 연합의 법칙에 따르는 순전히 주관적 정당성만이 있을 바로 동일한 표상들의 관계와 충분하게 구분된다.→
후자에 따라 나는 단지 내가 하나의 물체를 옮길 때, 나는 무게의 압력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체, 바로
그것이 무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양자의 표상들은 대상 안에서, 즉 주체의 상태에 대한 구분
없이, 결합되고, 순전히 지각(그 지각은 또한 자주 반복될 수 있다) 안에서만 결합되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Wenn ich aber die Beziehung gegebener Erkenntnisse in jedem Urteile
genauer untersuche, und sie, als dem Verstande angehörige, von dem
Verhältnisse nach Gesetzen der reproduktiven Einbildungskraft (welches
nur subjektive Gültigkeit hat) unterscheide, so finde ich, daß ein
Urteil nichts andres sei, als die Art, gegebene Erkenntnisse zur
objektiven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그러나 내가 각각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인식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검토할 때, 그리고 그 관계를, 지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단지 주관적 정당성만을 지니는)재생적 상상력의 법칙에 따른 관계로부터 구분할 때, 나는 그래서 알게 된다, 하나의 판단은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을, 주어진 인식들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로 가져오는 그 방식 이외에. → 그러나 내가 각각의 판단에 있어서 주어진 인식들의 관계를 더욱 정확하게 검토할 때, 그리고 그 관계를 지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단지 주관적 정당성만을 지니는)재생적 상상력의 법칙에 따른 관계로부터 구분할 때, 그래서 나는 하나의 판단은, 주어진 인식들을 통각의 객관적 통일로 가져오는 그 방식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Darauf zielt das
Verhältniswörtchen ist in denselben, um die objektive Einheit gegebener
Vorstellungen von der subjektiven zu unterscheiden. 인식들에 있어서 관계사 ist는 그에 대해 지시한다, 주어진 표상들의 객관적 통일을 주관적 통일과 구분하기 위해서. → 주어진 표상들의 객관적 통일을 주관적 통일과 구분하기 위해서 인식들에 있어서 관계사 ist는 그에 대해 지시한다. Denn dieses
bezeichne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und die notwendige Einheit derselben, wenn gleich das Urteil selbst
empirisch, mithin zufällig ist, z.B. die Körper sind schwer.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근원적 통각과 그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대해 그 표상들 자체의 관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판단 자체가 경험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물체는 무겁다. → 왜냐하면 이러한 것이, 비록 그 판단
자체가, 예를 들어 물체는 무겁다와 같이 경험적이고, 따라서 우연적이라고 하더라도 근원적 통각과 그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대해 그 표상들 자체의 관계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Damit ich
zwar nicht sagen will, diese Vorstellungen gehören in der empirischen
Anschauung notwendig zu einander, sondern sie gehören vermöge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n der Synthesis der Anschauungen
zu einander, d.i. nach Prinzipien der objektiven Bestimmung aller
Vorstellungen, so fern daraus Erkenntnis werden kann, welche Prinzipien
alle aus dem Grundsatze der transzendentalen Einheit der Apperzeption
abgeleitet sind. 그와 함께 나는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표상들이 경험적 직관 안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오히려 그 표상들은 직관들의 종합에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따라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즉 모든 표상들의 객관적 규정의 원칙에 따라, 그로부터 인식이 되는 한에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의 근본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그런 모든 원칙들. → 그와 함께 나는, 이러한 표상들이 경험적 직관 안에서 필연적으로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그
표상들은 직관들의 종합에서 통각의 필연적 통일에 따라, 즉 모든 표상들의 객관적 규정의 원칙에 따라,
그로부터 인식이 이루어지는 한에서,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의 근본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그런 모든 원칙들에 따라 또 다른 표상에 속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Dadurch allein wird aus diesem Verhältnisse ein Urteil,
d.i. ein Verhältnis, das objektiv gültig ist, und sich von dem
Vrhältnisse eben derselben Vorstellungen, worin bloß subjektive
Gültigkeit wäre, z.B. nach Gesetzen der Assoziation, hinreichend
unterscheidet. 그를 통해서만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하나의 판단이, 즉 하나의 관계와, 객관적으로 정당한, 그 자체가 바로 동일한 표상들의 관계와, 그 안에서 순전히 주관적 정당성이 있을, 예를 들어 연합의 법칙에 따르는, 충분하게 구분된다. → 그를 통해서만 이러한 관계들로부터 하나의 판단이, 즉 객관적으로 정당한 하나의 관계가,
그 안에서 예를 들어 연합의 법칙에 따르는 순전히 주관적 정당성만이 있을 바로 동일한 표상들의 관계와 충분하게 구분된다. Nach der letzteren würde ich nur sagen können: Wenn ich
einen Körper trage, so fühle ich einen Druck der Schwere; aber nicht:
er, der Körper, ist schwer; welches so viel sagen will, als, diese beide
Vorstellungen sind im Objekt, d.i. ohne Untershied des Zustandes des
Subjekts, verbunden, und nicht bloß in der Wahrnehmung (so oft sie auch
wiederholt sein mag) beisammen. 후자에 따라 나는 단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하나의 물체를 옮길 때, 나는 무게의 압력을 느낀다; 그러나 물체, 바로 그것이 무겁다 라고는 아니다; 그것은 그렇게 말하고자 한다, 이 양자의 표상들은 대상 안에서, 즉 주체의 상태에 대한 구분 없이, 결합되고, 순전히 지각(그 지각은 또한 자주 반복될 수 있다) 안에서만 결합되지는 않는다. → 후자에 따라 나는 단지 내가 하나의 물체를 옮길 때, 나는 무게의 압력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체, 바로
그것이 무겁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 양자의 표상들은 대상 안에서, 즉 주체의 상태에 대한 구분
없이, 결합되고, 순전히 지각(그 지각은 또한 자주 반복될 수 있다) 안에서만 결합되지는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19. Die logische Form aller Urteile besteht in der objektiven Einheit der Apperzeption der darin enthaltenen Begriffe 모든 판단의 논리적 형식은 내부에 개념을 포함하는 통각의 객관적 통일 안에 존립한다
Ich habe mich niemals durch die Erklärung, welche die Logiker von einem Urteile überhaupt geben, befriedigen können: es ist, wie sie sagen, die Vorstellung eines Verhältnisses zwischen zwei Begriffen. Ohne nun hier über das Fehlerhafte der Erklärung, daß sie allenfalls nur auf kategorische, aber nicht hypothetische und disjunktive Urteile paßt, (als welche letztere nicht ein Verhältnis von Begriffen, sondern selbst von Urteilen enthalten,) mit ihnen zu zanken, (ohnerachtet aus diesem Versehen der Logik manche lästige Folgen erwachsen sind,)¹ merke ich nur an, daß, worin dieses Verhältnis bestehe, hier nicht bestimmt ist. → 나는 판단 일반에 대해 논리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명, 그들이 말하듯 두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그러한 해명을
통해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
이제 여기에서, 그 해명이(후자가 개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들의 관계 자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기껏해야 정언판단에만
적합할 뿐 가언판단이나 선언판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해명의 결점에 대하여 그들과 논쟁함이 없이(논리학의 이러한 오류로부터 여러
성가신 결론들이 발생됨에도 불구하고)¹, 나는 단지 무엇 안에 이러한 관계가
존립하는지는 여기에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할 따름이다.
¹Die weitläuftige Lehre von den vier syllogistischen Figuren betrifft nur die kategorischen Vernunftschlüsse, und, ob sie zwar nichts weiter ist, als eine Kunst, durch Versteckung unmittelbarer Schlüsse (consequentiae immediatae) unter die Prämissen eines reinen Vernunftschlusses, den Schein mehrerer Schlußarten, als des in der ersten Figur, zu erschleichen, so würde sie doch dadurch allein kein sonderliches Glück gemacht haben, wenn es ihr nicht gelungen wäre, die kategorischen Urteile, als die, worauf sich alle andere müssen beziehen lassen, in ausschließliches Ansehen zu bringen, welches aber nach § 9. falsch ist. → ¹네 가지 삼단논법적 형태들에 대한 광범위한 학설은 다만 정언적 이성추론과 관계될 따름이고, 비록 그 학설이, 순수한
이성추론의 전제들 아래에서 불가피한 결론의(즉각적인 결론의) 은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첫 번째 추론형태에
속하는 것 이외의 추론법들의 가상을, 사취하는 하나의 기능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학설은 그래서, 정언판단들이
다른 모든 판단들이 거기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하는
독점적인 명성을 가져오는 것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를 통해서만으로는 어떠한 대단한
행운도 이루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 9에 따라 잘못된 것이다.
Ich habe mich niemals durch die Erklärung, welche die Logiker von einem
Urteile überhaupt geben, befriedigen können: es ist, wie sie sagen, die
Vorstellung eines Verhältnisses zwischen zwei Begriffen. 나는 해명을 통해서 전혀, 판단 일반에 대해 논리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명,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것(판단)이, 그들이 말하듯, 두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 나는 판단 일반에 대해 논리학자들이 제시하는 해명, 그들이 말하듯 두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표상이라는 그러한 해명을 통해서는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Ohne nun hier
über das Fehlerhafte der Erklärung, daß sie allenfalls nur auf
kategorische, aber nicht hypothetische und disjunktive Urteile paßt,
(als welche letztere nicht ein Verhältnis von Begriffen, sondern selbst
von Urteilen enthalten,) mit ihnen zu zanken, (ohnerachtet aus diesem
Versehen der Logik manche lästige Folgen erwachsen sind,)¹ merke ich nur
an, daß, worin dieses Verhältnis bestehe, hier nicht bestimmt ist.
이제 여기에서 해명의 결점에 대하여, 그 해명이 기껏해야 정언판단에만 적합할 뿐 가언판단이나 선언판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후자가 개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들의 관계 자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들과 논쟁함이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의 이러한 오류로부터 여러 성가신 결론들이 발생된다,)¹ 나는 단지 덧붙여 말할 따름이다, 무엇 안에 이러한 관계가 존립하는지는, 여기에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
이제 여기에서, 그 해명이(후자가 개념들의 관계가 아니라 오히려 판단들의 관계 자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기껏해야 정언판단에만 적합할 뿐 가언판단이나 선언판단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해명의 결점에 대하여 그들과 논쟁함이 없이(논리학의 이러한 오류로부터 여러 성가신 결론들이 발생됨에도 불구하고)¹, 나는 단지 무엇 안에 이러한 관계가
존립하는지는 여기에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여 말할 따름이다.
¹Die weitläuftige Lehre von den vier syllogistischen Figuren betrifft
nur die kategorischen Vernunftschlüsse, und, ob sie zwar nichts weiter
ist, als eine Kunst, durch Versteckung unmittelbarer Schlüsse
(consequentiae immediatae) unter die Prämissen eines reinen
Vernunftschlusses, den Schein mehrerer Schlußarten, als des in der
ersten Figur, zu erschleichen, so würde sie doch dadurch allein kein
sonderliches Glück gemacht haben, wenn es ihr nicht gelungen wäre, die
kategorischen Urteile, als die, worauf sich alle andere müssen beziehen
lassen, in ausschließliches Ansehen zu bringen, welches aber nach § 9.
falsch ist. ¹네 가지 삼단논법적 형태들에 대한 광범위한 학설은 다만 정언적 이성추론과 관계될 따름이고, 비록 그 학설이 하나의 기능, 순수한 이성추론의 전제들 아래에서 불가피한 결론의(즉각적인 결론의) 은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추론법들의 가상을, 첫 번째 추론형태에 속하는 것 이외의, 사취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학설은 그래서 그를 통하는 것만으로는 어떠한 대단한 행운도 이루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정언판단들은, 다른 모든 판단들이 거기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하는, 독점적인 명성을 가져오는 것에 있어서, 그러나 그것은 § 9에 따라 잘못된 것이다. → ¹네 가지 삼단논법적 형태들에 대한 광범위한 학설은 다만 정언적 이성추론과 관계될 따름이고, 비록 그 학설이, 순수한
이성추론의 전제들 아래에서 불가피한 결론의(즉각적인 결론의) 은폐를 통하여, 더욱 많은, 첫 번째 추론형태에
속하는 것 이외의 추론법들의 가상을, 사취하는 하나의 기능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그 학설은 그래서, 정언판단들이 다른 모든 판단들이 거기에 적용되도록 해야만 하는
독점적인 명성을 가져오는 것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를 통해서만으로는 어떠한 대단한
행운도 이루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 9에 따라 잘못된 것이다.
§ 18. Was die objektive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sei 자기의식의 객관적 통일이란 무엇인가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diejenige, durch welche all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 in einen Bewgriff vom Objekt vereinigt wird. Sie heißt darum objektiv, und muß von der subjektiven Einheit des Bewußtseins unterschieden werden, die eine Bestimmung des inneren Sinnes ist, dadurch jene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einer solchen Verbindung empirisch gegeben wird. Ob ich mir des Mannigfaltigen als zugleich, oder nach einander, empirisch bewußt sein könne, kommt auf Umstände, oder empirische Bedingungen, an. Daher die empir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durch Assoziation der Vortstellungen, selbst eine Erscheinung betrifft, und ganz zufällig ist. Dagegen steht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in der Zeit, bloß als Anscahuung überhaupt, die ein gegebenes Mannigfaltiges enthält, unter der ursprünglichen Einheit des Bewußtseins, lediglich durch die notwendige Beziehung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zum Einen: Ich denke; also durch die reine Synthesis des Verstandes, welche a priori der empirischen zum Grunde liegt. Jene Einheit ist allein objektiv gültig; die empir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wir hier nicht erwägen, und die auch nur von der ersteren, unter gegebenen Bedingungen in concreto, abgeleitet ist, hat nur subjektive Gültigkeit. Einer verbindet die Vorstellung eines gewissen Worts mit einer Sache, der andere mit einer anderen Sache; und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m, was empirisch ist, ist in Ansehung dessen, was gegeben ist, nicht notwendig und allgemein geltend. →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은 그를 통하여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가 대상에 대한 개념 안으로 결합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 통일은
그런 이유로 객관적이라 일컬어지고, 의식의 주관적 통일, 내적 감관의 규정이며, 그를
통하여 저 직관의 잡다가 그러한 하나의 결합에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그러한 통일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내가 잡다에 속하는
나에게 경험적으로 동시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연속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상황들
또는 경험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경험적 통일은 표상들의 연관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의 현상에 관계하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그에 반해 직관의
순수 형식은 시간 안에서 순전히 직관 일반으로서 존립하고, 그러한 직관은 주어진 잡다를, 그 의식의
근원적 통일 아래에서, 오로지 직관의 잡다와 내가 생각한다는 그 하나의 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통해서; 그러므로, 경험적인 것들의
토대를 선험적으로 마련하는 지성의 순수한
종합을 통해서만 포함한다.→ 오로지 저 통일만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치 않으며 또한 그 통일이 단지 전자의
통일로부터만, 주어진 조건들 아래에서 확고하게, 파생되는 통각의 경험적 통일은 오직 주관적 정당성만을 가진다.→ 한 사람은
언어의 표상을 사태와 결합시키고, 또 다른 언어표상을 또 다른 사태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경험적인 어떤 것
내에서 의식의 통일은 주어진 어떤 것에 관계하는 것이고 필연적이거나 우세하지 않다.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diejenige, durch welche
all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 in einen Bewgriff vom
Objekt vereinigt wird.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은 그를 통하여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가 대상에 대한 개념 안으로 결합되는 그러한 것이다. →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은 그를 통하여 직관에 주어진 모든 잡다가 대상에 대한 개념 안으로 결합되는 그러한 것이다. Sie heißt darum objektiv, und muß von der
subjektiven Einheit des Bewußtseins unterschieden werden, die eine
Bestimmung des inneren Sinnes ist, dadurch jene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einer solchen Verbindung empirisch gegeben wird. 그 통일은 그런 이유로 객관적이라 일컬어지고, 의식의 주관적 통일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그러한 통일은 내적 감관의 규정이며, 그를 통하여 저 직관의 잡다가 그러한 하나의 결합에 경험적으로 주어진다. → 그 통일은 그런 이유로 객관적이라 일컬어지고, 의식의 주관적 통일, 내적 감관의 규정이며, 그를
통하여 저 직관의 잡다가 그러한 하나의 결합에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그러한 통일과 구분되어야만 한다. Ob ich
mir des Mannigfaltigen als zugleich, oder nach einander, empirisch
bewußt sein könne, kommt auf Umstände, oder empirische Bedingungen, an.
내가 잡다에 속하는 나에게 동시적으로, 아니면 연속적으로, 경험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상황들 또는 경험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 내가 잡다에 속하는 나에게 경험적으로 동시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연속적으로 의식될 수 있는지 하는 것은 상황들 또는 경험적 조건들에 의존한다. Daher die empir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durch Assoziation der
Vortstellungen, selbst eine Erscheinung betrifft, und ganz zufällig ist.
그러므로 의식의 경험적 통일은 표상들의 연관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의 현상에 관계하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 그러므로 의식의 경험적 통일은 표상들의 연관을 통하여 스스로 하나의 현상에 관계하고, 전적으로 우연적이다. Dagegen steht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in der Zeit, bloß als
Anscahuung überhaupt, die ein gegebenes Mannigfaltiges enthält, unter
der ursprünglichen Einheit des Bewußtseins, lediglich durch die
notwendige Beziehung des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zum Einen: Ich
denke; also durch die reine Synthesis des Verstandes, welche a priori
der empirischen zum Grunde liegt. 그에 반해 직관의 순수 형식은 시간 안에서 순전히 직관 일반으로서 존립하고, 그러한 직관은 주어진 잡다를 포함한다, 그 의식의 근원적 통일 아래에서, 오로지 직관의 잡다와 하나의 것, 내가 생각한다는 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통해서만; 그러므로 지성의 순수한 종합을 통해서, 경험적인 것들의 토대를 선험적으로 마련하는. → 그에 반해 직관의 순수 형식은 시간 안에서 순전히 직관 일반으로서 존립하고, 그러한 직관은 주어진 잡다를, 그 의식의
근원적 통일 아래에서, 오로지 직관의 잡다와 내가 생각한다는 그 하나의 것과의 필연적 관계를 통해서; 그러므로, 경험적인 것들의 토대를 선험적으로 마련하는 지성의 순수한
종합을 통해서만 포함한다. Jene Einheit ist allein objektiv
gültig; die empir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ie wir hier nicht
erwägen, und die auch nur von der ersteren, unter gegebenen Bedingungen
in concreto, abgeleitet ist, hat nur subjektive Gültigkeit. 오로지 저 통일만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 통각의 경험적 통일은,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치 않는, 그리고 그 통일이 또한 단지 전자의 통일로부터만, 주어진 조건들 아래에서 확고하게, 파생되는, 오직 주관적 정당성만을 가진다. → 오로지 저 통일만이 객관적으로 정당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고려치 않으며 또한 그 통일이 단지 전자의
통일로부터만, 주어진 조건들 아래에서 확고하게, 파생되는 통각의 경험적 통일은 오직 주관적 정당성만을 가진다. Einer
verbindet die Vorstellung eines gewissen Worts mit einer Sache, der
andere mit einer anderen Sache; und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m,
was empirisch ist, ist in Ansehung dessen, was gegeben ist, nicht
notwendig und allgemein geltend. 누군가는 언어의 표상을 사태와 결합시키고, 또 다른 사람은 또 다른 언어표상을 또 다른 사태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의식의 통일은 경험적인 어떤 것 내에서 주어진 어떤 것에 관계하는 것이고 필연적이거나 우세하지 않다. → 한 사람은 언어의 표상을 사태와 결합시키고, 또 다른 언어표상을 또 다른 사태와 결합시킨다; 그리고 경험적인 어떤 것
내에서 의식의 통일은 주어진 어떤 것에 관계하는 것이고 필연적이거나 우세하지 않다.
1) Most people feel on occasion that life is absurd, and some feel it vividly and continually. Yet the reasons usually offered in defense of this conviction are patently inadequate: they not really explain why life is absurd. Why then do they provide a natural expression for the sense that it is? 1)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따금 삶이 부조리하다고 느끼고, 몇몇은 그것을 선명하고도 지속적으로 느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확신에 대한 반박으로 제공되는 근거들은 명백히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어째서 삶이 부조리한지를 실제로 설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그들은 삶이 그러하다는 감각에 대해 자연스러운 표현을 내놓는가?
Ⅰ 1) Consider some examples. It is often remarked that nothing we do now will matter in a million years. But if that is true, then by the same token, nothing that will be the case in a million years matters now. In particular, it does not matter now that in a million years nothing we do now will matter. Moreover, even if what we did now were going to matter in a million years, how could that keep our present concerns from being absurd? If their mattering now is not enough to accomplish that, how would it help if they mattered a million years from now? 1) 몇 가지 예들을 생각해 보자. 종종 우리가 지금 문제시하는 그 어떤 일도 백만년 동안 문제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동전의 양면으로서, 지금 백만년 동안 문제시되는 경우일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지금 문제로 삼는 어떤 것도 백만년 동안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은 지금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 설령 우리가 지금 문제시 삼는 것이 백만년 동안 문제시될 것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그것이 부조리한 존재에 대한 우리의 작금의 우려를 지속시킬 수 있는가? 만일 그들이 지금 문제삼고 있음이 그것을 성취하기에 충분치 못하다면, 그것들이 지금으로부터 백 만년 동안 문제시될지라도 어떻게 그것이 도울 것인가?
2) Whether what we do now will matter in a million years could make the crucial difference only if its mattering in a million years depended on its mattering, period. But then to deny that whatever happens now will matter in a million years is to beg the question against its mattering, period; for in that sense one cannot know that it will not matter in a million years whether (for example) someone now is happy or miserable, without knowing that it does not matter, period. 2) 우리가 지금 문제로 삼는 일이 백만년 동안 문제시될지 아닐지는 오로지 그 문제삼음이 백만년 동안 그 문제삼음의 기간에 의존하는 경우에만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지금 일어나는 그 무엇이든지 백만년 동안 문제시되리라는 것을 부정하는 일은 그 문제삼음, 기간에 반대해 물음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간은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누구도, (예를 들어) 누군가 지금 행복하지 아니면 비참한지 그것이 백만년 동안 문제시되지 않으리라고 알 수 없기 때문이다.
3) What we say to convey the absurdity of our lives often has to do with space or time: we are tiny specks in the infinite vastness of the universe; our lives are mere instants even on a geological time scale, let alone a cosmic one; we will all be dead any minute. But of course none of these evident facts can be what makes life absurd, if it is absurd. For suppose we lived forever; would not a life that is absurd if it lasts seventy years be infinitely absurd if it lasted through eternity? And if our lives are absurd given our present size, why would they be any less absurd if we filled the universe (either because we were larger or because the universe was smaller)? Reflection on our minuteness and brevity appears to be intimately connected with the sense that life is meaningless; but it is not clear what the connection is. 3) 우리가 우리의 삶들에 대해 부조리함으로 전하고자 말하는 것은 종종 공간이나 시간을 가지고 해야한다. 우리는 우주의 무한한 광막함 속에서 미세한 얼룩들이다; 우리의 삶들은 우주적인 것이기는 고사하고 지질학적 시간 규모에조차 단지 순간적일 따름이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엔가 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명백한 사실들 중 어느 것 하나 삶을 부조리하게 만드는 것일 수 없다. 그것이 만일 부조리하다면 말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살았다고 가정해 보자; 부조리한 삶은 만일 그것이 7년 동안 계속된다면 설령 그 삶이 영원을 통해 계속될지라도 한없이 부조리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일 우리에게 현재 주어진 크기만큼의 우리의 삶들이 부조리하다면, 어째서 그 삶들은 우리가 우주를 채워넣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덜 부조리하지 않은가 (우리가 더 크든 혹은 우주가 더 작든 간에)? 우리의 순간적인 덧없음에 대한 반성은 삶이 무의미하다는 감각과 내밀하게 결속되어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연결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4) Another inadequate argument is that because we are going to die, all chains of justification must leave off in mid-air: one studies and works to earn money to pay for clothing, housing, entertainment, food, to sustain oneself from year to year, perhaps to support a family and pursue a career - but to what final end? All of it is an elaborate journey leading nowhere. (One will also have some effect on other people's lives, but that simply reproduces the problem, for they will die too.) 4) 또 다른 불충분한 논증은 우리가 죽을 것이기 때문에, 타당화의 모든 연쇄는 공중에서 중단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옷을 사고 집을 사고 여가를 즐기고 음식을 사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 해마다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 어쩌면 가족을 부양하고 경력을 쌓기 위해 공부하고 일한다 - 하지만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위한 것인가? 고작해야 그것은 아무데로도 이끌지 않는 정교한 여행이다. (또한 누군가는 다른 사람들의 삶들에 영향을 끼칠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문제를 재생산하는 것일 따름인데, 왜냐하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5) There are several replies to this argument. First, life does not consist of a sequence of activities each of which has as its purpose some later member of the sequence. Chains of justification come repeatedly to an end within life, and whether the process as a whole can be justified has no bearing on the finality of these end-points. No further justification is needed to make it reasonable to take aspirin for a headache, attend an exhibition of the work of a painter one admires, or stop a child from putting his hand on a hot stove. No larger context or further purpose is needed to prevent these acts from being pointless. 5) 이 논증에 대한 다양한 응답들이 있다. 첫째로, 삶은 행위들의 연속된 사건, 그 연속된 사건의 어떤 다음 구성요소를 목표로 지니는 각각의 행위들의 연속된 사건으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당화의 연쇄들은 반복적으로 삶 속에서 결말에 이르고, 그 전체로서의 경과가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이러한 종점들의 최종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두통 때문에 아스피린을 먹는 것, 누군가가 존경하는 화가의 작품 전시회에 참여하는 것, 또는 아이가 뜨거운 난로 위에 손을 대는 일을 멈추도록 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아무런 더 나아간 정당화도 필요치 않다. 이러한 행동들이 맹목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런 더 큰 문맥이나 더 나아간 의도도 필요치 않다.
6) Even if someone wished to supply a further justification for pursuing all the things in life that are commonly regarded as self-justifying, that justification would have to end somewhere too. If nothing can justify unless it is justified in terms of something outside itself, which is also justified, then an infinite regress results, and no chain of justification can be complete. Moreover, if a finite chain of reasons can not justify anything, what could be accomplished by an infinite chain, each link of which must be justified by something outside itself? 6) 설령 누군가가 삶 속에서 보통 자기 정당화로 간주되는 삶의 모든 것들을 추구함에 대한 더 나아간 정당화를 내놓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그 정당화도 마찬가지로 어딘가에서 끝나야 할 것이다. 만일 그 어떤 것도 그것 자체로부터 외부의, 또한 정당화된 그러한 어떤 것으로 정당화되지 않는 한 정당화할 수 없다면, 무한후퇴가 귀결될 것이고, 그 어떠한 정당화의 연쇄도 완결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만일 하나의 유한한 이유들의 연쇄가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없다면, 무한한 연쇄, 그 각각의 연결이 그 자체 바깥의 어떤 것에 의해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그 연쇄로써 무엇이 성취될 수 있을 것인가?
7) Since justifications must come to an end somewhere, nothing is gained by denying that they end where they appear to, within life - or by trying to subsume the multiple, often trivial ordinary justifications of action under a single, controlling life scheme. We can be satisfied more easily than that. In fact, through its misrepresentation of the process of justification, the argument makes a vacuous demand. It insists that the reasons available within life are incomplete, but suggests thereby that all reasons that come to an end are incomplete. This makes it impossible to supply any reasons at all. 7) 정당화들은 반드시 어디에선가 끝나야만 하기 때문에, 그 정당화들이 삶 속에서 나타난 곳에서 끝난다는 것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 혹은, 다양하고 종종 사소하고 일상적인 행위의
정당화들을 단일하고 제어하는 삶의 도식 아래로 포괄하려는 시도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획득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보다 더 쉽사리 만족할 수 있다. 사실상, 정당화의 과정에 대한 와전을 통하여, 그 논증은 얼빠진 요구를 한다. 그 논증은 삶 속에서 가용한 근거들이 불완전하다고 주장하지만, 그로써 끝으로 치닫는 이유들 모두가 불완전하다고 추측한다. 이것은 그 어떤 이유들이라도 제공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8) The standard arguments for absurdity appear therfore to fail as arguments. Yet I believe they attempt to express something that is difficult to state, but fundamentally correct. 8) 부조리성에 대한 표준적인 논증들은 그러므로 논증들로서는 실패한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나는 그 논증들이 진술하기 어려운, 하지만 근본적으로 정확한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시도한다고 믿는다.
Ⅱ 1) In ordinary life a situation is absurd when it includes a conspicuous discrepancy between pretension or aspiration and reality: someone gives a complicated speech in support of a motion that has already been passed; a notorious criminal is made president of a major philanthropic foundation; you declare your love over the telephone to a recorded announcement; as you are being knighted, your pants fall down. 1) 일상생활에서 하나의 상황은 그 상황이 요구나 염원과 실재 사이에서 뚜렷한 불일치를 포함할 때 부조리하다. 누군가 이미 지나가 버린 행위를 지지하느라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악명 높은 범죄자가 주요한 박애주의적 재단의 의장이 된다; 당신은 당신의 사랑을 수화기 너머 녹음된 소식으로 선언한다; 당신이 기사 작위를 받고 있을 때, 당신의 바지가 흘러 내린다.
2) When a person finds himself in an absurd situation, he will usually attempt to change it, by modifying his aspirations, or by trying to bring reality into better accord with them, or by removing himself from the situation entirely. We are not always willing or able to extricate ourselves from a position whose absurdity has become clear to us. Nevertheless, it is usually possible to imagine some change that would remove the absurdity - whether or not we can or will implement it. The sense that life as a whole is absurd arises when we perceive, perhaps dimly, an inflated pretension or aspiration which is inseparable from the continuation of human life and which makes its absurdity inescapable, short of escape from life itself. 2) 한 개인이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자신을 알아차릴 때, 그는 보통, 그의 바람들을 수정하거나, 또는 현실을 그 바람들에 더 잘 어우러지도록 이끌거나, 혹은 스스로 완전히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그 상황을 바꾸고자 시도할 것이다. 우리가 항상 우리에게 그 부조리가 선명하게 된 입장에서 해방되려고 하거나 해방될 수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조리를 제거할 어떤 변화를 상상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능하다 - 우리가 그 변화를 시행할 수 있거나 시행하려고 하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전체로서의 삶이 부조리하다는 감각은 우리가 아마도 어렴풋하게, 인간 삶의 지속과 불가분하고 그 삶의 부조리를 삶 자체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한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과장된 요구나 바람을 인지할 때 일어난다.
3) Many people's lives are absurd, temporarily or permanently, for conventional reasons having to do with their particular ambitions, circumstances, and personal relations. If there is a philosophical sense of absurdity, however, it must arise from the perception of something universal - some respect in which pretension and reality inevitably clash for us all. This condition is supplied, I shall argue, by the collision between the seriousness with which we take our lives and the perpetual possibility of regarding everything about which we are serious as arbitrary, or open to doubt. 3) 많은 사람들의 삶들은 주기적으로든 영속적으로든 부조리한데, 특정한 야망들, 사정들, 인간관계들과 관련한 관습적인 이유들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보편적인 어떤 것 - 요구와 실재가 우리 모두에게 불가피하게 충돌하는 어떤 측면에서 - 으로부터 일어난다.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우리가 우리들의 삶들을 대하는 진지함과 우리가 심각하게 대하는 모든 것들을 임의적인 것으로, 또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할 지속적인 가능성 사이의 충돌에 의해 충족된다.
4) We cannot live human lives without energy and attention, nor without making choices which show that we take some things more seriously than others. Yet we have always available a point of view outside the particular form of our lives, from which the seriousness appears gratuitous. These two inescapable viewpoints collide in us, and that is what makes life absurd. It is absurd because we ignore the doubts that we know cannot be settled, continuing to live with nearly undiminished seriousness in spite of them. 4) 우리는 활력과 흥미 없이도, 우리가 어떤 것들을 다른 것들보다 더욱 진지하게 고려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한 선택들 없이도 인간적인 삶들을 살아낼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삶들의 특수한 형식, 그로부터 그 심각함이 까닭없는 것으로 드러나는 그러한 형식 외부의 가용한 관점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관점들은 우리 안에서 충돌하고, 그것이 바로 삶을 부조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부조리한데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심들이 정착될 수 없다는 것을, 그 의심들 대신 거의 줄어들지 않는 진지함을 가지고 삶을 계속 살아 나가면서, 무시하기 때문이다.
5) This analysis requires defense in two respects: first as regards the unavoidability of seriousness; second as regards the inescapability of doubt. 5) 이러한 분석은 첫 번째는 진지함의 불가피성을 고려하는 것으로서, 두 번째는 의심의 피할 수 없음을 고려하는 것으로서, 두 가지 측면에서 옹호를 요한다.
6) We take ourselves seriously whether we lead serious lives or not and whether we are concerned primarily with fame, pleasure, virtues, luxury, triumph, beauty, justice, knowledge, salvation, or mere survival. If we take other people seriously and devote ourselves to them, that only multiplies the problem. Human life is full of effort, plans, calculation, success and failure: we pursue our lives, with varying degrees of sloth and energy. 6) 우리는 우리가 진지한 삶들을 이끌어 나가는지 아닌지 그리고 우리가 우선적으로 명성, 기쁨, 덕성, 화려함, 영광, 아름다움, 정의로움, 앎, 희생, 또는 순전히 생존에 관심을 두는지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고려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그들에게 우리 자신들을 헌신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문제를 증대시킬 뿐이다. 인간 삶은 노력, 계획들, 추정, 성광과 실패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다양한 정도의 나태와 활력으로 우리들의 삶들을 추구한다.
7) It would be different if we could not step back and reflect on the process, but were merely led from impulse to impulse without self-consciousness. But human beings do not act solely on impulse. They are prudent, they reflect, they weigh consequences, they ask whether what they are doing is worthwhile. Not only are their lives full of particular choices that hang together in larger activities with temporal structure: they also decide in the broadest terms what to pursue and what to avoid, what the priorities among their various aims should be, and what kind of people they want to be or become. Some men are faced with such choices by the large decisions they make from time to time; some merely by reflection on the course their lives are taking as the product of countless small decisions. They decide whom to marry, what profession to follow, whether to join the Country Club, or the Resistance; or they may just wonder why they go on being salesmen or academics or taxi drivers, and then stop thinking about it after a certain period of inconclusive reflection. 7) 만일 우리가 한 걸음 물러나 그 과정을 반성할 수 없다면, 허나 순전히 충동에서 충동으로 자의식 없이 이끌리는 것이었더라면 그것은 달랐을 터이다. 그러나 인간 존재들은 오로지 충동으로만 행위하진 않는다. 그들은 신중하고, 반성하며, 결과들의 경중을 따지고,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가치있는 일인지 따져 묻는다. 그들의 삶들은 더 큰 활동들 속에서 세속적 구조와 함께 묶인 특수한 선택들로 가득 차 있을 뿐만이 아니다. 그 삶들은 또한 가장 넓은 표현으로 추구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할 것, 그들의 다양한 목적들 중에서 우선시되어야 할 것들, 그들이 그러하길 바라거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종류의 사람들을 결정한다.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때때로 행하는 결정들에 의해 그러한 선택들에 직면하게 된다; 일부는 단순히 무수한 작은 결정들의 산물로서 그들의 삶들이 취하고 있는 경로에 대한 반성으로써 그렇게 된다. 그들은 누구와 결혼할지, 어떤 직업을 택할지, 컨트리 클럽, 또는 저항 운동에 참여할지 말지를 결정한다; 또는 그들은 어째서 그들이 세일즈맨이나 학자나 택시 운전수인 채로인지 단순히 궁금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결론이 나지 않는 약간의 반성의 시간 뒤에 그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다.
8) Although they may be motivated from act to act by those immediate needs with which life presents them, they allow the process to continue by adhering to the general system of habits and the form of life in which such motives have their place - or perhaps only by clinging to life itself. They spend enormous quantities of energy, risk, and calculation on the details. Think of how an ordinary individual sweats over his appearance, his health, his sex life, his emotional honesty, his social utility, his self-knowledge, the quality of his ties with family, colleagues, and friends, how well he does his job, whether he understands the world and what is going on in it. Leading a human life is a full-time occupation, to which everyone devotes decades of intense concern. 8) 비록 그들이 삶이 그들에게 제시하는 그들의 즉각적인 필요들에 의해 행위에서 행위로 동기부여를 받을지는 몰라도, 그들은 일반적인 습관체계와 그러한 동기들이 자리하는 삶의 형식에 들러붙음으로써 - 또는 아마도 오로지 삶 자체에 매닮으로써 - 그 과정이 지속되는 것을 허용한다. 그들은 막대한 양의 활력, 위험, 세부사항들에 대한 추산을 감수한다. 일상적인 개인이 그의 외모, 건강, 성생활, 감정적 진솔함, 사회적 효용, 자각, 가족, 동료들, 친구들과 엮인 그의 능력, 그의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 그가 세계와 그 안에서 굴러가는 사정을 이해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얼마나 땀 흘리며 애쓰는지 생각해 보라. 인간적 삶을 이끄는 것은 직업이고, 직업에 대해 누구나 수십년의 강한 관심을 쏟아 붓는다.
9) This fact is so obvious that it is hard to find it extraordinary and important. Each of us lives his own life - lives with himself twenty-four hours a day. What else is he supposed to do - live someone else's life? Yet humans have the special capacity to step back and survey themselves, and the lives to which they are committed, with that detached amazement which comes from watching an ant struggle up a heap of sand. Without developing the illusion that they are able to escape from their highly specific and idiosyncratic position, they can view it sub specie aeternitatis - and the view is at once sobering and comical. 9) 그것이 비범하고 중요하다고 알아차리기가 어렵다는 바로 그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우리들 각자는 그 고유한 삶을 살아간다 - 그의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 그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밖에 것은 무엇인가 - 다른 누군가의 삶을 사는 것인가? 하지만 인간들은 물러서서 그들 자신을, 그들이 전념하는 삶들을, 한 마리 개미가 모래 더미를 헤치고 나아가려 분투하는 것을 보면서 일어나는 그 사심없는 경탄과 함께 탐구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그들의 상당히 구체적이고 유별난 위치로부터 달아날 수 있다는 환상을 전개시키지 않고서, 그들은 영원한 상 아래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 그리고 그 관점은 퍼뜩 정신이 들도록 하고 재미있다.
10) The crucial backward step is not taken by asking for still another justification in the chain, and failing to get it. The objections to that line of attack have already been stated; justifications come to an end. But this is precisely what provides universal doubt with its object. We step back to find that the whole system of justification and criticism, which controls our choices and supports our claims to rationality, rests on responses and habits that we never question, that we should not know how to defend without circularity, and to which we shall continue to adhere even after they are called into question. 10) 결정적인 물러섬은 연쇄에 있어서 여전히 또 다른 정당화를 요구함으로써, 그리고 그 정당화를 획득하는 데에 실패함으로써는 얻어지지 않는다. 그러한 공격노선에 대한 반박들은 이미 진술되어왔다; 정당화들은 끝나고야 만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그 반대와 더불어 보편적 의심을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을 통제하고 우리의 합리성에 대한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정당화와 비평의 전체 체계를 알아내기 위해 물러선다. 그 체계는 우리가 단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은, 우리가 순환 없이 어떻게 옹호할지 알지 못해야 하는 응답들과 습관들, 그리고 그것들이 의문시된 이후에조차 그것들을 신봉하기를 지속해야 할 그러한 응답들과 습관들에 달려 있다.
11) The things we do or want without reasons, and without requiring reasons - the things that define what is a reason for us and what is not - are the starting points of our skepticism. We see ourselves from outside, and all the contingency and specificity of our aims and pursuits become clear. Yet when we take this view and recognize what we do as arbitrary, it does not disengage us from life, and there lies our absurdity: not in the fact that such an external view can be taken of us, but in the fact that we ourselves can take it, without ceasing to be the persons whose ultimate concerns are so coolly regarded. 11) 우리가 이유없이, 이유를 따지지 않고 행하거나 바라는 것들 - 우리에게 무엇이 이유이고 무엇이 이유가 아닌지 규정하는 것들 - 그것들은 우리의 회의에 있어서 출발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외부로부터 바라보고, 우리의 목적들의 모든 우발성과 특수성 그리고 추구들은 명백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취하고 우리가 하는 일이 임의적임을 인지할 때,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부터 풀어주지 않고, 거기, 그러한 하나의 항구적 관점이 우리에게 취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가 아니라, 그의 궁극적 관심들이 매우 차분하게 고려되는 그러한
개인들로 있기를 중단함이 없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떠맡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의 부조리가 자리한다.
Ⅲ 1) one may try to escape the position by seeking broader ultimate concerns, from which it is impossible to step back - the idea being that absurdity results because what we take seriously is something small and insignificant and individual. Those seeking to supply their lives with meaning usually envision a role or function in something larger than themselves. They therefore seek fulfillment in service to society, the state, the revolution, the progress of history, the advance of science, or religion and the glory of God. 1) 누군가는 더욱 광범위한 궁극적 관심들, 그로부터 소급이 불가능한 관심들을 추구함으로써 그 위치에서 도피하고자 애쓸지도 모른다 - 우리가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작고 사소하며 사적인 어떤 것이기 때문에 부조리가 생긴다는 발상 때문에. 그들의 삶들을 의미로 채우기를 추구하는 그러한 자들은 보통 그들 자신들보다 더욱 거대한 어떤 것에서 하나의 역할이나 기능을 마음 속에 그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 국가, 혁명, 역사의 진보, 학문의 진전, 또는 종교와 신의 영광에서 성취를 추구한다.
2) But a role in some larger enterprise cannot confer significance unless that enterprise is itself significant. And its significance must come back to what we can understand, or it will not even appear to give us what we are seeking. If we learned that we were being raised to provide food for other creatures fond of human flesh, who planned to turn us into cutlets before we got too stringy - even if we learned that the human race had been developed by animal breeders precisely for this purpose - that would still not give our lives meaning, for two reasons. First, we would still be in the dark as to the significance of the lives of those other beings; second, although we might acknowledge that this culinary role would make our lives meaningful to them, it is not clear how it would make them meaningful to us. 2) 하지만 어떤 더 거대한 사업에서의 역할은 그 사업 자체가 의미있지 않는 한 의미부여를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사업의 의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되돌아와야만 하거나, 우리에게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주는 것으로 보이지조차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육을 좋아하는 다른 생명체들을 위해, 우리가 (힘줄로) 너무 질겨지기 전에 얇게 져민 고기로 만들 계획을 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음식으로 제공되도록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 설령 우리가 인간종은 바로 이러한 의도로 동물 사육자들에 의해 진화되어 왔다는 것을 안다고 할지라도 -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삶들에 의미를 부여하진 않을 것인데, 두 가지 이유들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다른 존재자들의 삶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암흑 속에 자리할 것이다. 둘째로 비록 우리가 이러한 식용으로의 역할이 우리의 삶들을 그들에게 의미있도록 만들 것임을 인정한다 칠지라도, 어떻게 그것이 그들을 우리에게 의미있도록 만들지는 분명하지 않다.
3) Admittedly, the usual form of service to a higher being is different from this. One is supposed to behold and partake of the glory of God, for example, in a way in which chickens do not share in the glory of coq au vin. The same is true of service to a state, a movement, or a revolution. People can come to feel, when they are part of something bigger, that it is part of them too. They worry less about what is peculiar to themselves, but identify enough with the larger enterprise to find their role in it fulfilling. 3) 확실히, 더 고차원의 존재에 대한 봉사의 통상적인 형태는 이와 다르긴 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신의 영광에 대해 닭들이 코코뱅(적포도주 닭국, 탕?)의 영광에 몫을 가지지는 않는(그와는 다른)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고 참여하게 되어 있다. 국가, 운동, 또는 혁명에 봉사함에 있어서도 같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더욱 커다란 것의 일부일 때, 그 어떤 것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일부라는 것을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에게 특유한 것에 대해서는 덜 염려하지만, 그 안에서 성취감을 주는 그들의 역할을 발견하도록 하는 더욱 거대한 사업은 충분히 알아본다.
4) However, any such larger purpose can be put in doubt in the same way that the aims of an individual life can be, and for the same reasons. It is as legitimate to find ultimate justification there as to find it earlier, among the details of individual life. But this does not alter the fact that justifications come to an end when we are content to have them end - when we do not find it necessary to look any further. If we can step back from the purposes of individual life and doubt their point, we can step back also from the progress of human history, or of science, or the success of a society, or the kingdom, power, and glory of God, and put all these things into question in the same way. What seems to us to confer meaning, justification, significance, does so in virtue of the fact that we need no more reasons after a certain point. 4) 그렇지만, 그런 어떤 더욱 거대한 의도든 개별적 삶의 목적들이 의심에 놓일 수 있는 동일한 방식으로, 그리고 똑같은 이유들로 인하여 의심을 받을 수 있다. 그곳에서 궁극적인 정당화를 발견하는 것이 정당한 만큼 더 앞서서, 개별적인 삶의 구체적인 것들 사이에서 그 의심을 찾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기꺼이 그것들을 끝으로 가질 때 - 우리가 그것을 더 이상 살펴볼 필요를 찾지 못할 때 - 정당화들이 끝난다는 사실을 대체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개별적 삶의 의도들로부터 물러나 그러한 것들의 관점을 의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인간사 또는 학문의 진보, 사회나 왕국의 성공, 신의 권능과 영광으로부터도 물러날 수 있고, 이러한 모든 것들을 같은 방식으로 의문시할 수 있다. 우리에게 의미, 정당성,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지점 이후로는 그 이상의 아무런 이유들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 덕분에 그렇게 의미부여하는 것이다.
5) What makes doubt inescapable with regard to the limited aims of individual life also makes it inescapable with regard to any larger purpose that encourage the sense that life is meaningful. Once the fundamental doubt has begun, it cannot be laid to rest. 5) 개인적 삶의 제한된 목적들과 관련하여 의심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것은 또한 그 어떤 더욱 거대한 의도, 삶이 의미롭다고 느끼도록 추동하는 그러한 의도와 관련해서도 의심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든다. 근본적인 회의가 시작되어 버리고 나면, 그것은 파묻힐 수가 없다.
6) Camus maintains in The Myth of Sisyphus that the absurd arises because the world fails to meet our demands for meaning. This suggests that the world might satisfy those demands if it were different. But now we can see that this is not the case. There does not appear to be any conceivable world (containing us) about which unsettlable doubts could not arise. Consequently the absurdity of our situation derives not from a collision between our expectations and the world, but from a collision within ourselves. 6) 『시쉬포스 신화』에서 카뮈는 세계가 우리의 의미에 대한 요구들과 만나는 데에 실패하기 때문에 부조리가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세계가 달랐더라면 그러한 요구들을 충족시켰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볼 수 있다. 그 세계에 대해 진정되지 않는 의심들이 일어날 수 없을 (우리를 포함하는)어떠한 상상 가능한 세계도 있을 성싶지 않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처지에 대한 부조리는 우리의 기대들과 세계 사이의 충돌로부터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들 안에서의 충돌로부터 유래한다.
Ⅳ 1) It may be objected that the standpoint from which these doubts are supposed to be felt does not exist - that if we take the recommended backward step we will land on thin air, without any basis for judgment about the natural responses we are supposed to be surveying. If we retain our usual standards of what is important, then questions about the significance of what we are doing with our lives will be answerable in the usual way. But if we do not, then those questions can mean nothing to us, since there is no longer any content to the idea of what matters, and hence no content to the idea that nothing does. 1) 이러한 의심들이 현존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지게끔 되어 있는 그러한 관점은 반박될지도 모른다 - 만일 우리가 권장된 물러섬을 취한다면 우리는 허공중에 내려앉을 것이라는 관점은, 우리가 조사하고 있어야 할 자연스러운 반응들에 대한 판단을 위한 어떤 배경도 없이. 만일 우리가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표준들을 유지한다면, 우리의 삶들과 더불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물음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대답 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물음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의미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더 이상 문제가 되는 것에 대한 생각에 어떠한 내용도 없고, 따라서 아무것도 문제삼지 않는 생각에는 아무런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2) But this objection misconceives the nature of the backward step. It is not supposed to give us an understanding of what is really important, so that we see by contrast that our lives are insignificant. We never, in the course of these reflections, abandon the ordinary standards that guide our lives. We merely observe them in operation, and recognize that if they are called into question we can justify them only by reference to themselves, uselessly. We adhere to them because of the way we are put together; what seems to us important or serious or valuable would not seem so if we were differently constituted. 2) 그러나 이러한 반박은 물러섬의 본성에 대한 오해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지 않고, 그래서 우리가 그와 반대로 우리의 삶들이 사소하다는 것을 보도록 한다. 우리는 절대로 이러한 반성들의 경로 안에서 우리의 삶들을 인도하는 일상적 표준들을 폐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사용 중에 그것들을 관찰하고, 만일 그것들이 의문시된다면 우리가 오직 그것들 자체를 지시하는 언급하는 것만으로 그것들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을 헛되이 인정한다. 우리는 그 표준들을 고집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결합되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하거나 심각하거나 가치있어 보이는 것은 우리가 다르게 된다면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3) In ordinary life, to be sure, we do not judge a situation absurd unless we have in mind some standards of seriousness, significance, or harmony with which the absurd can be contrasted. This contrast is not implied by the philosophical judgment of absurdity, and that might be thought to make the concept unsuitable for the expression of such judgments. This is not so, however, for the philosophical judgment depends on another contrast which makes it a natural extension from more ordinary cases. It departs from them only in contrasting the pretensions of life with a larger context in which no standards can be discovered, rather than with a context from which alternative, overriding standards may be applied. 3) 일상적인 삶에서, 틀림없이, 우리는 우리가 심각성, 중요성, 부조리가 대조될 수 있는 그러한 조화에 대한 어떤 표준들을 마음에 품지 않는 한 한 상황을 부조리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이 대조는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판단에 의해 시사되지 않되, 아마도 그러한 판단들의 표현으로 적합한 개념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렇지도 않은데, 철학적 판단이 그 판단을 더욱 일상적인 경우들로부터 자연스러운 확장을 하도록 만드는 또 다른 대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판단은, 대안적이고 우선적인 규준들이 그로부터 수반될지 모르는 문맥을 가지고 보다는, 오로지 삶의 요구들을 아무런 규준들도 발견될 수 없는 더 큰 문맥을 가지고 대조함에 있어서만, 일상적 경우들로부터 벗어난다.
Ⅴ 1) In this respect, as in others, philosophical perception of the absurd resembles epistemological skepticism. In both cases the final, philosophical doubt is not contrasted with any unchallenged certainties, though it is arrived at by extrapolation from examples of doubt within the system of evidence or justification, where a contrast with other certainties is implied. In both cases our limitedness joins with a capacity to transcend those limitations in thought(thus seeing them as limitations, and as inescapable). 1) 다른 측면들에서 처럼, 이러한 측면에서 부조리에 대한 철학적 지각은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유사하다. 두 경우 모두 궁극적인 철학적 의심은 어떠한 불가침한 확실성들과도 대조되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외삽법에 의해 증거들 또는 정당화의 체계 안에서의 의심의 예시들로부터, 다른 확실성들과의 대조가 시사되는 곳에 도달하게 된다 할지라도 말이다. 두 경우들 모두 우리의 제한성이 사유 속에서(따라서 그 제한들을 제한들로서, 그리고 불기피한 것으로서 보면서) 그러한 제한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다.
2) Skepticism begins when we claim knowledge. We notice that certain types of evidence convince us, that we are content to allow justifications of belief to come to an end at certain points, that we feel we know many things even without knowing or having grounds for believing the denial of others which, if true, would make what we claim to know false. 2) 회의주의는 우리가 앎을 주장할 때에 시작된다. 우리는 특정한 유형의 증거들이 우리를 납득시킨다는 것, 우리가 믿음에 대한 정당화들이 특정한 지점들에서 끝나도록 허용하게 되어 있다는 것, 우리는 만일 참이라면 우리가 안다고 주장하는 것을 틀린 것으로 만들 그러한 다른 것들에 대한 부정을 믿기 위한 근거들을 알거나 가지지 않고서조차도 우리가 많은 것들을 안다고 느낀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3) For example, I know that I am looking at a piece of paper, although I have no adequate grounds for claiming I know that I am not dreaming; and if I am dreaming then I am not looking at a piece of paper. Here an ordinary conception of how appearance may diverge from reality is employed to show that we take our world largely for granted; the certainty that we are not dreaming cannot be justified except circularly, in terms of those very appearances which are being put in doubt. It is somewhat farfetched to suggest I may be dreaming; but the possibility is only illustrative. It reveals that our claims to knowledge depend on our not feeling it necessary to exclude certain incompatible alternatives, and the dreaming possibility or the total-hallucination possibility are just representatives for limitless possibilities most of which we cannot even conceive. 3) 예를 들어 나는 내가 종이 한 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비록 내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주장하기 위한 타당한 근거들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그리고 만일 내가 꿈을 꾸고 있다면 나는 한 장의 종이를 보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겉보임이 어떻게 현실과 나뉠는지에 대한 일상적 이해는 우리가 우리의 세계를 굉장히 당연시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확실성은 순환적으로, 의심받는 바로 그러한 겉보임으로 정당화되는 것 이외에는 정당화될 수 없다. 그것은 어느 정도 에둘러서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오로지 예증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은 앎에 대한 우리의 주장들이 양립 불가능한 특정한 대안들을 배제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밝히고, 꿈을 꾸고 있을 가능성이나 총체적-환각의 가능성이, 그 대부분을 우리가 지각조차 할 수 없는 그러한 무제한한 가능성들에 대해 대표적인 것들이다.
4) Once we have taken the backward step to an abstract view of our whole system of beliefs, evidence, and justification, and seen that it works only, despite its pretensions, by taking the world largely for granted, we are not in a position to contrast all these appearances with an alternative reality. We cannot shed our ordinary responses, and if we could it would leave us with no means of conceiving a reality of any kind. 4) 우리가 우리의 믿음들, 증거, 그리고 정당화의 전 체계에 대한 추상적 관점으로 물러섬을 취하고 나면, 그리고 그것이 그것의 요구들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대체로 당연시함으로써만 유효하다는 것을 보고 나면, 우리는 이러한 모든 겉모습들을 대안적 실재성과 대조시키는 입장에 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반응들을 없앨 수 없고, 만일 우리가 없앨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실재성이든 지각할 방법도 없이 우리를 남겨둘 것이다.
5) It is the same in the practical domain. We do not step outside our lives to a new vantage point from which we see what is really, objectively significant. We continue to take life largely for granted while seeing that all our decisions and certainties are possible only because there is a great deal we do not bother to rule out. 5) 실천적 영역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들 바깥 우리가 무엇이 실재인지, 객관적으로 중요한지 그로부터 보는 그러한 새로운 유리한 위치로 나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결정들과 확실성들이 오로지 우리가 제외시킬 것을 신경쓰지 않는 많은 것 때문에 가능한데 반해 삶을 대체로 당연시하기를 계속한다.
6) Both epistemological skepticism and a sense of the absurd can be reached via initial doubts posed within systems of evidence and justification that we accept, and can be stated without violence to our ordinary concepts. We can ask not only why we should believe there is a floor under us, but also why we should believe the evidence of our senses at all - and at some point the framable questions will have outlasted the answers. Similarly, we can ask not only why we should take aspirin, but why we should take trouble over our own comfort at all. The fact that we shall take the aspirin without waiting for an answer to this last question does not show that it is an unreal question. We shall also continue to believe there is a floor under us without waiting for an answer to the other question. In both cases it is this unsupported natural confidence that generates skeptical doubts; so it cannot be used to settle them. 6)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부조리에 대한 감각 모두 우리가 허용하는 증거와 정당화의 체계들에서 제기된 초기의 의심들을 통해 도달될 수 있고, 우리의 일상적 이해들과 충돌함이 없이 진술될 수 있다. 우리는 어째서 우리가 우리 아래에 바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지 물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째서 우리가 좌우간 우리의 감각들의 증거를 믿어야 하는지도 물을 수 있다 -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고안해 낼 수 있는 물음들이 답변들보다 오래 갈 것이다. 유사하게, 우리는 우리가 왜 아스피린을 먹어야 하는지만 물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도대체 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안정을 위해 애써야 하는지도 물을 수 있다. 우리가 이 후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지체없이 아스피린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비현실적인 물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우리는 또한 나머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지체없이 우리 아래에 바닥이 있다고 계속해서 믿어야 한다. 두 경우들 모두에서 이 뒷받침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믿음은 회의주의적 의심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 물음들을 가라앉히기 우해 사용될 수 없다.
7) Philosophical skepticism does not cause us to abandon our ordinary beliefs, but it lends them a peculiar flavor. After acknowledging that their truth is incompatible with possibilities that we have no grounds for believing do not obtain - apart from grounds in those very beliefs which we have called into question - we return to our familiar convictions with a certain irony and resignation. Unable to abandon the natural responses on which they depend, we take them back, like a spouse who has run off with someone else and then decided to return; but we regard them differently (not that the new attitude is necessarily inferior to the old, in either case). 7) 철학적 회의주의는 우리에게 우리의 일상적 믿음들을 버리는 일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지만, 그 믿음들을 특유한 풍미를 더한다. 그 믿음들의 참이 우리가 - 우리가 의문시한 바로 그러한 믿음들을 근거로 삼는 것 이외에은 - 믿기 위한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않는 가능성들과 양립불가능하다고 인정한 이후 우리는 어떤 반어와 체념을 가지고 우리의 친숙한 이해들로 되돌아온다. 그 믿음들이 의존하는 자연스러운 반응들을 폐기할 수 없고, 우리는 그 믿음들을 되가져온다. 다른 누군가와 떠났다가 되돌아오기로 결심하는 배우자처럼. 하지만 우리는 그 믿음들을 다르게 본다 (어느 경우든 그 새로운 태도가 필연적으로 옛 사람들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아니다.)
8) The same situation obtains after we have put in question the seriousness with which we take our lives and human life in general and have looked at ourselves without presuppositions. We then return to our lives, as we must, but our seriousness is laced with irony. Not that irony enables us to escape the absurd. It is useless to mutter: "Life is meaningless; life is meaningless…" as an accompaniment to everything we do. In continuing to live and work and strive, we take ourselves seriously in action no matter what we say. 8) 우리가 우리의 삶들과 일반적인 인간적 삶을 대하는 그러한 진지함을 의문시 하고 추정들 없이 우리 자신을 본 뒤에 똑같은 상황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하듯 우리의 삶들로 돌아오지만 우리의 심각함은 역설과 엮인다. 역설이 우리가 부조리를 피하도록 해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삶은 무의미하다; 삶은 무의미해…"라고 투덜거리는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조미료로서 무용하지는 않다. 계속해서 살아가고 일하고 분투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뭐라 하든 관계 없이 실천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대한다.
9) What sustains us, in belief as in action, is not reason for justification, but something more basic than these - for we go on in the same way even after we are convinced that the reasons have given out. If we tried to rely entirely on reason, and pressed it hard, our lives and beliefs would collapse - a form of madness that may actually occur if the inertial force of taking the world and life for granted is somehow lost. If we lose our grip on that, reason will not give it back to us. 9) 실천에서처럼 믿음에 있어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은 정당화가 그 까닭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보다 더 기본적인 어떤 것이다 - 우리가 그 이유들이 끝나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조차 같은 방식으로 계속 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적으로 근거에만 매달리려 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강력하게 밀어 붙였다면, 우리의 삶들과 믿음들은 충돌하였을 것이다 - 만일 세계와 삶을 당연시함의 관성이 어떻게든 상실된다면 실제로 일어날지 모르는 광기의 형태. 우리가 그러한 능력을 잃어 버린다면, 이유가 우리에게 그걸 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Ⅵ 1) In viewing ourselves from a perspective broader than we can occupy in the flesh, we become spectators of our own lives. We cannot do very much as pure spectators of our own lives, so we continue to lead them, and devote ourselves to what we are able at the same time to view as no more than a curiosity, like the ritual of an alien religion. 1) 우리가 몸으로 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봄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들에 대한 관중들이 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들에 대한 순수한 관중들로서 아주 그렇게 굴 수는 없고, 그래서 우리는 그 삶들을 끌어 나아가기를 계속하고, 동시에 우리 자신을 우리가 호기심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에 헌신한다. 낯선 종교의 의식처럼.
2) This explains why the sense of absurdity finds its natural expression in those bad arguments with which the discussion began. References to our small size and short lifespan and to the fact that all of mankind will eventually vanish without a trace are metaphors for the backward step which permits us to regard ourselves from without and to find the particular form of our lives curious and slightly surprising. By feigning a nebula's-eye view, we illustrate the capacity to see ourselves without presuppositions, as arbitrary, idiosyncratic, highly specific occupants of the world, one of countless possible forms of life. 2) 이것은 왜 부조리에 대한 감각이 논의를 시작했던 그러한 좋지 못한 논증들에서 그 자연스러운 표현을 발견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의 작고도 짧은 생애와 모든 인류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언급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외부에서 고려하고 우리의 삶들의 특유한 형태를 신기하고 약간은 놀라운 것으로 여기도록 해주는 물러섬에 대한 은유들이다. 우주적 관점을 가장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추정들 없이, 세계의 제멋대로이고 기이하며 고도로 특수한 입주자들로, 무수한 가능한 삶의 형태들 중의 하나로 보는 능력을 보여준다.
3) Before turning to the question whether the absurdity of our lives is something to be regretted and if possible escaped, let me consider what would have to be given up in order to avoid it. 3) 우리들 삶들의 부조리가 거부되어야 할,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회피되어야 할 어떤 것인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나는 그 부조리를 피하기 위해 포기되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려해 보고자 한다.
4) Why is the life of a mouse not absurd? The orbit of the moon is not absurd either, but that involves no strivings or aims at all. A mouse, however, has to work to stay alive. Yet he is not absurd, because he lacks the capacities for self-consciousness and self-trascendence that would enable him to see that he is only a mouse. If that did happen, his life would become absurd, since self-awareness would not make him cease to be a mouse and would not enable him to rise above his mousely strivings. Bringing his new-found self-consciousness with him, he would have to return to his meager yet frantic life, full of doubts that he was unable to answer, but also full of purposes that he was unable to abandon. 4) 어째서 생쥐의 삶은 부조리하지 않은가? 달의 궤도도 부조리하진 않지만, 그것은 전혀 아무런 노력들도 목적들도 수반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쥐는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한다. 하지만 그 쥐는 부조리하지 않은데, 그 쥐가 그저 한 마리 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줄 자기의식과 자기초월을 위한 능력들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 쥐의 생은 부조리해질 것인데, 왜냐하면 자각은 그를 한 마리 쥐인 채로 머무르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그의 쥐스러운(?) 노력들에 초연할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발견된 그의 자기의식을 가지고, 그 쥐는 메마르고 아직도 정신없이 바쁜 그의 생, 그가 답할 수 있었던 의심들로 가득 찬, 뿐만 아니라 그가 버릴 수 있었던 의도들로 가득 찬 삶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5) Given that the transcendental step is natural to us human, can we avoid absurdity by refusing to take that step and remaining entirely within our sublunar lives? Well, we cannot refuse consciously, for to do that we would have to be aware of the viewpoint we were refusing to adopt. The only way to avoid the relevant self-consciousness would be either never to attain it or to forget it - neither of which can be achieved by the will. 5) 초월적 걸음이 우리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고려하면, 우리는 그 걸음을 떼기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우리의 지상의 삶들 속에 머무름으로써 부조리를 피할 수 있을까? 자, 우리는 의식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택하기를 거부하고 있던 관점을 알아차려야 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 상대적인 자기의식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그 자기의식을 절대로 얻지 않거나 그것을 잊어 버리는 것일 터이다 - 둘 중 어느 것도 의지로 성취될 수는 없다.
6) On the ohter hand, it is possible to expend effort on an attempt to destroy the other component of the absurd - abandoning one's earthly, individual, human life in order to identify as completely as possible with that universal viewpoint from which human life seems arbitrary and trivial. (This appears to be the ideal of certain Oriental religions.) If one succeds, then one will not have to drag the superior awareness through a strenuous mundane life, and absurdity will be diminished. 6) 다른 한편으로, 부조리의 다른 요소들을 파괴하고자 시도하는 데에 노력을 들일 수는 있다 - 세속적이고,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삶을 가능한한 완전히, 인간적 삶이 그로부터 임의적이고 제멋대로인 것으로 보이는 보편적 관점과 동일시하기 위해서 폐기하기 위해서. (이것은 특정한 동양 종교들의 이상으로 드러난다.) 만일 누군가 성공한다면, 그는 고되고 지루한 삶을 통해 우월한 깨달음을 이끌어내지 않아도 될 것이고, 부조리는 감소될 것이다.
7) However, insofar as this self-etiolation is the result of effort, will-power, aceticism(a's'ceticism?), and so forth, it requires that one take oneself seriously as an individual - that one be willing to take considerable trouble to avoid being creaturely and absurd. Thus one may undermine the aim of unworldliness by pursuing it too vigorously. Still, if someone simply allowed his individual, animal nature to drift and respond to impulse, without making the pursuit of its needs a central conscious aim, then he might, at considerable dissociative cost, achieve a life that was less absurd than most. It would not be a meaningful life either, of course; but it would not involve the engagement of a transcendent awareness in the assiduous pursuit of mundane goals. And that is the main condition of absurdity - the dragooning of an unconvinced transcendent consciousness into the service of an immanent, limited enterprise like a human life. 7) 그렇지만, 이러한 자기-황화가 노력, 의지력, 고행 같은 것들의 결과인 한, 그것은 자신을 한 개인으로서 진지하게 대하는 것을 - 만들어진 부조리한 존재를 벗어나는 일을 중요한 문제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비세속적 목적을 그것이 지나치게 격하게 추구함으로써 약화시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만일 누군가 단순히 그의 개인적이고 동물적인 본성으로 하여금 충동에 흘러가고 반응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가장 중요한 의식적 목표에 대한 그 충동의 요구들에 대한 추구를 이룸이 없이, 그는 아마도, 중대한 해리적 값을 지불하고,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덜 부조리했던 삶을 이룩할지 모른다. 물론 그것은 의미있는 삶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일상적인 목적들에 대한 근면한 추구에 있어서 초월적 깨달음에 대한 약속을 수반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조리의 주된 상태이다 - 인간적 삶과 같이 인지되지 않은 초월적 의식에 대한 내재적이고 엄격한 사업에 봉사하도록 강요하는 것.
8) The final escape is suicide; but before adopting any hasty solutions, it would be wise to consider carefully whether the absurdity of our existence truly presents us with a problem, to which some solution must be found - a way of dealing with prima facie disaster. That is certainly the attitude with which Camus approaches the issue, and it gains support from the fact that we are all eager to escape from absurd situations on a smaller scale. 8) 마지막 도피는 자살이다; 그러나 어떤 성급한 해결책들을 택하기에 앞서, 우리의 현존에 대한 부조리가 실로 우리에게 - 언뜻 재난인 듯한 것을 다루는 방법 - 어떤 해결책이 반드시 발견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문제를 제기하는지 주의깊게 고려해 보는 것은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카뮈가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이고, 그 태도는 우리 모두가 부조리한 상황들로부터 더 작은 규모로 달아나기를 열망한다는 사실로부터 지지를 얻는다.
9) Camus - not on uniformly good grounds - rejects suicide and the other solutions he regards as escapist. What he recommends is defiance or scorn. We can salvage our dignity, he appears to believe, by shaking a fist at the world which is deaf to our pleas, and continuing to live in spite of it. This will not make our lives un-absurd, but it will lend them a certain nobility. 9) 카뮈는 - 일관되게 좋은 근거들로는 아니지만 - 자살을 거부하고 그가 현실도피로 간주한 다른 해결책들도 거부한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저항이나 경멸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존엄을 구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의 간청에 귀를 막아 버린 세계에 주먹질을 해댐으로써,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냄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을 부조리하지 않도록 만들지는 못할 것이지만, 그 삶들에 어떤 고결함을 부여할 것이다.
10) This seems to me romantic and slightly self-pitying. Our absurdity warrants neither that much distress nor that much defiance. At the risk of falling into romanticism by a different route, I would argue that absurdity is one of the most human things about us: a manifestation of our most advanced and interesting characteristics. Like skepticism in epistemology, it is possible only because we possess a certain kind of insight - the capacity to transcend ourselves in thought. 10) 이것이 나에게 낭만적이고 약간은 자기동정적으로 보인다. 우리의 부조리는 많은 고통도 많은 저항도 타당하게 하지 않는다. 다른 경로를 통해 낭만주의에 빠질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부조리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인간적인 것들 중 하나라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의 가장 진보되고 흥미로운 특징들의 징후로서 말이다. 인식론에서 회의주의와 같이,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어떤 종류의 통찰을 지니는 것 때문으로만 가능하다 - 사유 속에서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능력 말이다.
11) If a sense of the absurd is a way of perceiving our true situation (even though the situation is not absurd until the perception arises), then what reason can we have to resent or escape it? Like the capacity for epistemological skepticism, it results from the ability of understand our human limitations. It need not be a matter for agony unless we make it so. Nor need it evoke a defiant contempt of fate that allows us to feel brave or proud. Such dramatics, even if carried on in private, betray a failure to appreciate the cosmic unimportance of the situation. If sub specie aeternitatis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anything matters, then that does not matter either, and we can approach our absurd lives with irony instead of heroism or despair. 11) 만일 부조리에 대한 감각이 우리의 참된 상황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면 (설령 그 상황이 그 지각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부조리하지 않더라 할지라도),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분개하거나 피해야 하는 무슨 이유를 가질 수 있는가?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위한 능력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우리의 인간적 제한들을 이해하는 능력으로부터 귀결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만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극심하게 고통스러울 일일 필요가 없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용기나 자긍심을 느끼도록 허락하는 숙명에 대한 저항적 경멸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극적인 것은, 사적으로 다루어진다 하더라도, 그 상황의 우주적 하찮음을 평가하는 데에 실패하였음을 드러낸다. 만일 영원한 상 아래에서 어떤 것이든 문제시된다고 믿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면, 그것도 문제될 게 없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의 부조리한 삶을 영웅주의나 체념 대신에 반어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1) No one answer can be given to the question "What is philosophy?" since the words "philosophy" and "philosopher" have been used in many ways. Some people, for example, think of philosophy as offering the consolation of a religion, and of the philosopher as a man who receives with equanimity the bufferings of life. This has very little to do with the way in which academic people, including myself, use the word "philosophy." I do not feel particularly unqualified to be an academic philosopher because I am not "philosophical" when I am bowled out first ball at cricket. As I propose to use the word "philosophy" it will stand primarily for an attempt to think clearly and comprehensively about: (a) the nature of the universe, and (b) the principles of conduct. In short, philosophy is primarily concerned with what there is in the world and with what we ought to do about it. Notice that I have said both "to think clearly" and "to think comprehensively." The former expression ties up with the prevailing conception of philosophy as linguistic or conceptual analysis, and the latter ties up with another common conception of philosophy as the rational reconstruction of language so as to provide a medium for the expression of total science. 1)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그 누구도 대답을 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철학"과 "철학자"라는 말이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몇몇 사람들은 철학이 종교적 위안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철학자는 삶의 격동과 파란을 평정을 가지고 맞아들이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나를 포함한 학계 사람들이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방식과 아주 약간 관계가 있다. 나는 딱히 강단 철학자가 되기에 완전무결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데 왜냐하면 내가 크리켓 경기에서 첫타를 실패했을 때 나는 "철학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내가 "철학"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할 때 그 말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분명하고 포괄적으로 생각하려는 시도를 나타낼 것이다. (a) 우주의 본성, 그리고 (b) 실천의 원칙들. 간단히 말해서 철학은 주로 세계 내에 있는 것과 우리가 그에 대해 해야 할 일에 관련된다. 내가 "분명하게 생각하는 것"과 "포괄적으로 생각하는 것" 모두를 이야기 했다는 점을 주의하라. 앞서의 표현은 언어적이거나 개념적인 분석으로 유행하는 철학의 개념과 얽혀 있고, 후자의 표현은 언어의 합리적 재구성으로서 그래서 학문 총체에 대한 표현을 위한 도구를 제공하는 것으로서 철학의 또 다른 일반적인 이해와 묶여 있다.
2) Thus, a man might analyze biology in a certain way. He might argue, as I shall do, that living organisms, including human beings, are simply very complicated physico-chemical mechanisms. This man might also analyse physics as the ordering and predicting of sense experiences. For the sake of argument let us concede that such a man might be thinking clearly, he would not be thinking comprehensively. As biologist he would be thinking of man as a mechanism, as very much a part of nature, a macroscopic object interacting with its environment. As physicist, however, he would be thinking of this great world of nature as just a matter of the actual and possible experiences of sentient beings, and so, in a sense, he would be putting nature inside man. To think comprehensively he would have to discover a way of thought which enabled him to think both as biologist and as a physicist. Presumably a comprehensive way of thought would be one which brought all intellectual disciplines into a harmonious relationship with one another. It may turn out that there are some realms of discourse, such as theology, which cannot be brought into a harmonious relationship with the various sciences. Any attempt to do so may result in violence to logic or to scientific facts, or may involve arbitrariness and implausibility. (Consider, for example, the implausibility of a theory which asserts that the mechanistic account of evolution by natural selection and mutation is broadly true but the there is a special discontinuity in the case of man, to whom was super-added an immortal soul.) If this is so, such anomalous branches of discourse will have to be rejected and will not form part of the reconstruction of our total conceptual scheme. 2) 그래서, 한 사람은 아마도 특정한 방식으로 생명 활동을 분석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내가 하려는 것처럼 인간을 포함한 생명 또는 유기체들이 단순히 매우 복잡한 물리-화학적 기계장치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사람은 또한 아마도 물리학을 감각 경험들에 대한 정리와 예측으로 해석할 것이다. 논증을 위해 그러한 사람이 아마도 분명하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그가 포괄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치자. 생물학자로서 그는 인간을 기계장치로, 상당수 자연의 일부로, 주위환경에 관심을 기울이는 거시적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물리학자로서 그는 자연의 이 광대한 세계를 바로 지각을 지닌 존재자들의 실제적이고 가능한 경험들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그가 사람 내부에 자연을 놓고 있을 것이다. 포괄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그는 그가 생물학자로서도 또 물리학자로서도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사유의 한 방법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짐작컨데 사유의 포괄적 방법은 모든 지적 분야들을 상호 조화로운 관계로 가져다 놓을 한 가지의 것일 터이다. 그 방법은 신학과 같은 어떤 담론의 영역들, 다양한 학문들과 조화로운 관계로 이끌릴 수 없는 몇몇 영역들이 있다는 데에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든 논리 혹은 과학적 사실들에 폭력을 낳거나, 또는 천단(擅斷)을 수반하게 될지 모른다. (예를 들어 자연선택과 돌연변이에 의한 진화에 대한 기계적 설명은 폭넓게 진실이지만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는 불멸하는 영혼이 부가되었다는 특별한 단절이 있다고 주장하는 믿기 어려운 이론을 생각해 보라.) 만일 이것이 그렇다면, 담론의 그러한 변칙적인 곁가지들은 거부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의 총체적 개념적 기획(도식)의 부분을 구성하지 않을 것이다.
3) So much, for the moment, about the "nature of the universe" or "world view" part of philosophy. Let us now briefly consider the second part of philosophy, which is concerned with the principles of conduct … as has been generally recognised in modern philosophy, it is not possible to deduce propositions about what ought to be done purely from propositions about what is the case. It follows that the principles of conduct are by no means unambiguously determined by our general philosophy. Nevertheless, in their laudable objection to those who would deduce ethics from the nature of the world (and in particular to some of those biologists who would base ethics on the theory of evolution and the like) philosophers have tended to obscure the fact that our general philosophical and scientific beliefs may stongly influence our ethical principles. For example, if one of our principles of conduct were that we should do what is commanded by a personal God and if our world view were one which left no place for such a God, then this principle of conduct would have to be given up, or at least we should have to find some other reason for adhering to it. In this [selection], which will be naturalistic in temper, I do not wish to concern myself with the general question of the legitimacy or illegitimacy of theology. The example of theology was brought up simply to show in a vivid way that metaphysics can be relevant to ethics. We must certainly not jump from the impossibility of deducing "ought" solely from "is" to the untenable position that our general philosophical and scientific views have no bearing on our ethical ones. 3) 우선은 "우주의 본성"이나 "세계관" 철학의 부분은 그 정도로 하도록 하자. 이제 간략하게 철학의 둘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부분은 행위의 원칙들과 관련된다. 일반적으로 근대 철학에서 인정되어 왔듯이, 순수하게 그 상황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제들로부터 행해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제들이 연역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일반적인 철학으로는 행위의 원칙들이 모호하지 않게 결정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본성으로부터 윤리학을 연역하려는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특히 윤리학을 진화론과 그 유사한 것에 기초지으려는 그러한 생물학자들의 일부에 대한) 그 원칙들의 칭찬할 만한 반박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믿음들이 우리의 윤리적 원칙들에 강력하게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의 행위원칙들 중 하나가 인격신에 의해 명령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우리의 세계관이 그러한 신을 위한 아무런 자리도 남겨두지 않는 그러한 한 가지의 것이라면, 이 행위원칙은 포기되어야 할 것이거나, 혹은 최소한 우리는 그 원칙에 덧붙일 다른 어떤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연주의적 성향이 될 선택지에 있어서 나는 신학의 적법성과 위법성에 대한 일반적인 물음에 전념하고 싶지는 않다. 신학의 예는 단순히 형이상학이 윤리학에 관계될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제기되었다. 확실히 우리는 단지 "is"만으로는 그로부터 "ought"를 연역함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일반적인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관점들이 우리의 윤리적 관점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옹호될 수 없는 입장으로 비약하지 말아야만 한다.
철학과 무의미의 배제
1) I have been suggesting a conception of philosophy as the attempt to acquire a synoptic view of the world. On this account of philosophy it shares the tentaive character of the sciences. We must never think that we have acquired, even in outline, the final truth, for science inevitably provides wurprises for us, and we may have to make important revisions of even our most general notions. We may hope, however, that our synoptic account will be nearer to the final truth than is that of common sense. Now in recent years it has been argued in some quarters that in philosophy we are not concerned as scientists are, with the distinction between truth and falsity, but with that between sense and nonsense. As philosophers, according to this conception, it is not our business to say what the owrld is in fact like: we must leave this to scientists and historians. What we can do, and what we are by our training peculiarly fitted to do, is to help to ensure that we, together with scientists and historians, at least utter falshoods: that we and they do not fall into nonsense which has not even achieved the distinction of an intelligible falshood. Let me illustrate the notion of nonsense by means of example based on Alice in Wonderland.Suppose that a man came and said that he had seen a miaowing and blinking cat's head which was unattached to a body. I should be disposed in this case to disbelieve the man, and to say that what he told me was false. I should feel that I understood him: that I knew what it would be like for such an event as he reported to occur, but that I did not believe that any such event ever had or would occur. His report would contradict various secure beliefs that I possessed, particularly in the field of animal physiology. Now let us suppose that the man had reported not that he had seen a cat's head by itself but that he had seen simply a grin by itself. Not even a grinning mouth unattached to a head, but simply a grin all on its own. In this case I should not know what was meant at all. I should not be disposed to say that I understood what the man said, even though I disbelieved in the truth of his report. I should say, rather that what he said was nonsense, neither true nor false, and so I could not even disbelieve him. 1) 나는 세계에 대한 개괄적 관점을 획득하기 위한 시도로서 철학의 이해를 제안하고 있었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설명에 대해서 그것은 학문들의 잠정적 성격을 공유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개략적으로라도 궁극적인 진리를 획득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데, 과학은 불가피하게 우리에게 뜻밖의 일들을 제공하기 때문이고, 우리는 우리의 가장 일반적인 관념들에 대해서조차 중대한 수정을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마도 우리의 개괄적 설명이 일반 상식의 설명이 있는 것보다는 궁극적 진리에 더 가까이 있을 것이라 희망할지 모른다. 이제 최근 몇 년 동안 일부 사람들에게서 철학에 있어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그러하듯 진리와 오류 사이에 대조와 관련하지 않고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대조에 관계한다는 주장이 있어 왔다. 철학자들로서,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세계가 실제로 무엇과 같은 것인지 말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일을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에게 넘겨야만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우리가 우리의 훈련을 통해 특유하게 할 수 있도록 맞추어진 일은 과학자들과 역사학자들과 더불어 우리가 최소한 우리와 그들이 지성적인 거짓과 명확한 차이조차 이루지 않은 무의미에 빠져든다는 거짓말들을 한다는 것을 보장하도록 돕는 것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기초한 한 가지 예시로써 그 무의미의 관념을 묘사해 보고자 한다. 한 사람이 와서 그가 몸뚱이에 붙어있지 않은 야옹거리고 깜빡거리는 고양이의 머리를 봤다고 말했다고 치자. 나는 이 경우 그 사람을 불신할 것 같고, 그가 나에게 말했던 것이 거짓이었다고 말할 듯하다. 나는 내가 그를 이해했다고 느낄 것이다. 즉 나는 그가 일어났다고 전하는 그러한 한 사건과 같을 그러한 어떤 것을 알고 있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어떤 사건이라도 결코 일어났거나 일어나리라고 믿지 않았다고 느낄 것이다. 그의 말은 내가 지니고 있던 여러 안정적인 믿음들에 모순될 것이고, 특히 동물 생리학의 영역에서 그러할 것이다. 이제 그가 그 자체로 고양이 머리를 봤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웃음 그 자체를 봤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머리에 붙어있는 웃는 입이 아니라, 단순히 웃음이 그 자체로 전부인 것을. 이 경우 나는 도대체 무슨 의미였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가 그가 말했던 것을 이해했다고 말할 것 같지 않다. 설령 내가 그의 말을 참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가 말했던 것이 무의미하다고 말하지 참이거나 거짓이라 말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를 믿지 않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2) Now it is indubitable that there are sentences which have appeared to be meaningful and which nevertheless have turned out to be nonsense. I shall mention one such sentence in a moment. And so even though the remarks of traditional philosophers (say, about the famous trio of topics, God, Freedom, and Immortality) may not be obvious nonsense, like the report of the catless grin, they may be nonsense all the same. 2) 이제 의미있는 것으로 보이는 문장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 없는 것으로 밝혀진 문장들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는 곧 그러한 문장 하나를 언급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전통적인 철학자들의 언급들이 (말하자면, 유명한 세 가지 주제들, 신, 자유, 불멸에 대하여) 고양이 없는 웃음에 대한 말처럼 명백하게 무의미하지 않을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래도 마찬가지로 무의미할 것이다.
3) Here is a sentence, couched entirely in the respectable terminology of pure mathematics, which at first sight may appear to some readers (assuming that they have not encountered it before) to be perfectly meaningful, though perhaps rather dry and abstract. It was first concocted by Bertrand Russell. (Russell's paradox.) The sentence is: "The class of all classes not members of themselves is a member of itself." There appear to be plenty of classes of objects which are not members of themselves. The class of criminals is not a criminal (the police do not have to seek the class of criminals after they have arrested all criminals), and the class of football teams in the league is not a further football team. Most classes therefore appear not to be members of themselves. But some classes do appear to be members of themselves: certainly the class of classes does. For is not the class of classes a class? It would therefore seem to be perfectly intelligible to pose the question of whether the class of all classes not members of themselves is or is not one of those classes which are members of themselves. Unfortunately, this question admits neither the answer "yes" nor the answer "no." For if the class of all classes not members of themselves is a member of itself, then it follows that it is one of those classes which are not members of themselves. And if it is not a member of itself, then it is a member of itself. Either way we get a contradiction. It follows that we can neither say that the sentence "the class of all classes not members of themselves is a member of itself" express a truth, nor can we say that it expresses a falsehood. We are forced to conclude that it is meaningless. 3) 여기 한 문장이 있다. 그 문장은 순수 수학의 훌륭한 용어들에 전적으로 자리매김되어 있고, 척 보기에 아마 몇몇 독자들에게 (그들이 일전에 그것을 마주했던 적이 없다고 가정하면) 완벽하게 의미있는 것으로 보일 그러한 문장이다. 아마 건조하고 추상적일 터라도 말이다. 그 문장은 버트란드 러셀에 의해 처음으로 고안되었다. (러셀의 역설이다.) 그 문장은 "그 자신들의 원소들이 아닌 집합들 모두의 집합은 그 자신의 원소이다."라는 문장이다. 그들 자신들의 원소들이 아닌 대상들의 집합들은 충분할 만큼 많아 보인다. 범죄자들의 집합은 한 사람의 범죄자가 아니고 (경찰들은 그들이 모든 범죄자들을 체포한 뒤에 범죄자들의 집합을 좇을 필요가 없다), 리그에서 풋볼 팀들의 집합은 도 하나의 풋볼 팀이 아니다. 대부분의 지합들은 그러므로 그것들 자신들의 원소들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집합들은 그것들 자신들의 원소들로 보인다. 특히 집합들의 집합이 그러하다. 집합들의 집합은 하나의 집합이 아니기 때문인가? 그러므로 그것들 자신들의 원소들이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그것들 자신들의 원소들인 그러한 집합들 중의 하나인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불행하게도, 이 물음은 '네'라는 대답도 '아니오'라는 대답도 허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그 자신들의 원소들이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그 자신의 원소라면, 따라서 그 집합은 그것들 자신들의 원소들이 아닌 그러한 집합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 두따를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 집합이 그 자신의 원소가 아니라면, 그 집합은 그 자신의 원소일 것이다. 어떤 식으로도 우리는 모순을 취하게 된다. 우리가 "그것들 자신들의 원소들이 아닌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그 자신의 원소이다"라는 문장이 참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가 그 문장이 거짓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 뒤따른다. 우리는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다.
4) The above paradox is particularly important and instructive, because it shows how unsuspected possibilities of nonsense can break out even in the rigorous and austere terminology of mathematics. For those readers who may not find abstractions about classes to their taste I shall mention a similar, though less important paradox, which may be even more succinctly stated. Consider the sentence "This sentence is false." The sentence is about itself. Is it true or false? It can be neither, because if it is true it is false and if it is false it is true. It is important to note that the above paradoxical sentences are not mere contradictions. You can assert the negation of a contradiction. That is, a contradiction is just plain false. "2+2=5" is a contradiction, and so "2+2≠5" is a truth. Contradictions have their uses, for they occur in proofs by reductio ad absurdum. If you can deduce "2+2=5" you can normally deduce that the negation of one or other of the premisses is true. I have said "normally" here, because it is important to use reductio ad absurdum methods only when you are reasonably sure of the meaningfulness of the sentence you are trying to prove. If the sentence you are trying to prove is meaningless it may be like one of the paradoxical sentences above and you may be able to deduce a contradiction both from it and from its negation. In which case the deduction of a contradiction from its negation does not ensure its truth. This consideration may be of interest to some readers, in that it may throw light on the fact that certain mathematicians, the so-called "intuitionists," Brouwer and his school, reject proof by reductio ad absurdum in circumstances in which classical mathematicians do not. It is, of course, the case that there are sentences which classical mathematicians regard as meaningful and which the intuitionists hold to be meaningless. 4) 위의 역설은 특히 중요하고도 유익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떻게 무의미의 예상치 못한 가능성들이 엄격하고 근엄한 수학용어들에서조차 튀어나올 수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의 경험에 대해서 집합들에 대한 추상들을 발견하지 못할 그러한 독자들을 위해 나는 좀 덜 중요한 역설일지라도 아마 더욱 간결하게 진술되었을 유사한 역설을 하나 언급할 것이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문장을 고려해 보자. 그 문장은 그 문장 자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참인가 거짓인가? 그것은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는데,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은 거짓일 터이고 그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참일 터이기 때문이다. 위의 역설적 문장들이 단순한 모순들이 아님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모순에 대한 부정을 주장할 수 있다. 즉, 하나의 모순은 단지 분명한 거짓이다. "2+2=5"는 모순이고, 그래서 "2+2≠5"는 참이다. 모순들은 그것들의 용도들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귀류법(모순으로 되돌림)에 의한 증명들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2+2=5"를 연역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일반적으로 그 전제들 중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전제들의 부정이 참임을 연역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일반적으로"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귀류법의 방식들을 오로지 당신이 합리적으로 당신이 증명하고자 하는 문장의 의미있음에 대해 확신할 때에만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증명하려는 문장이 의미없다면 그것은 위의 역설적 문장들 중의 하나와 같은 것일 터이고 당신은 그 문장으로부터도 그 문장의 부정으로부터도 모순을 연역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의 부정으로부터 모순에 대한 연역이 그것의 참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고려사항은 아마도 일부 독자들에게 흥미로울 것인데, 그것이 특정한 수학자들, 소위 "직관론자들", 브로우베르와 그의 학파가 고전적 수학자들이 증명하지 않은 상황들에서의 귀류법에 의한 증명을 거부한다는 사실에 대해 실마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물론 그것은 고전적 수학자들이 의미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직관론자들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문장들이 있는 경우이다.
5) The sort of possibility of nonsense to which I have been drawing attention in the last few paragraphs is a subtle and insidious one. Nonsense of a sort has always been recognised: consider "I married a prime number" and "Virtue is triangular." It is an insight of the last fifty years (though foreshadowed by the philosophyically subtle humour of Lewis Carroll) that there can be important and nonobvious possibilities of nonsesne. This insight was generalised by Wittgenstein and by those much influenced by him into a complete philosophy of philosophy. 5) 내가 마지막 적은 문단들에서 주의를 이끌었던 무의미의 그런 종류의 가능성은 교묘하고 은밀한 것이다. 일종의 무의미는 언제나 고려되어 왔다: "나는 소수와 결혼했다"와 "덕은 삼각이다"를 고려해 보라. 무의미의 중요하고 불확신한 가능성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지난 50년 동안의 통찰이다 (설령 루이스 캐롤의 철학적이고 미묘한 농담에 의해 전조되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통찰은 비트겐슈타인과 그에게 영향을 받은 많은 이들에 의해 철학에 대한 완결된 철학으로 일반회되었다.
6) It is clear that technique for recognising non-obvious nonsense is highly desirable, and I should agree that the development and application of such a technique is at least part of the task of philosophy. How does this connect up with my conception of philosophy as the development of a synoptic outlook? Can the elimination of nonsense change our world view? At first sight the answer to this is in the negative. If the nonsense really is nonsense it cannot form part of a world view, even a false one. So it looks as though elimination of nonsense removes dead wood but does not affect the living branches of our knowledge. This answer is, however, too hasty. It may well be that by using nonsensical premisses, in addition to a set A of meaningful ones, we may be able to deduce a set B of meaningful sentences which are not deducible from A alone. I shall show how to deduce the false but meaningful sentence.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 from the nonsensical sentence "This sentence is false." Let us represent the sentence "This sentence is false" by the symbol "S" for short. 6) 불확실한 무의미를 알아보기 위한 기술이 상당히 가치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나는 그러한 기술의 발전과 적용이 최소한 철학적 과업의 일부임을 동의할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대략적인 개괄의 발전으로서 철학에 대한 나의 관점과 연결되는가? 무의미의 제거는 우리의 세계관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얼핏 봐서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만일 무의미가 정말로 무의미하다면 그것은 세계관의 일부를 구성할 수 없고, 틀린(거짓) 세계관의 일부조차 구성할 수 없다. 그래서 비록 무의미의 제거가 죽은 나무를 제거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지식에 있어서 살아있는 가지들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대답은 성급하다. 의미있는 것들의 집합 A에 추가함에 있어서 무의미한 전제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A만으로부터는 연역될 수 없는 의미있는 문장들의 집합 B를 연역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는 것은 아마도 좋은 것일 터이다. 나는 어떻게 거짓이지만 의미있는 문장을 연역할 수 있는지 보이고자 한다. 무의미한 문장 "이 문장은 거짓이다"로부터 "달은 녹색 치즈로 만들어진다"를 연역한다. "이 문장은 거짓이다"를 기호 "S"로 간략하게 표현하도록 하자.
7) From "This sentence is false" we can deduce "This sentence is not false." That is, from S we can deduce not-S. However, from S we can deduce "S or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 But not-S (which we have already deduced) together with "S or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 enables us to deduce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 7) "이 문장은 거짓이다"로부터 우리는 "이 문장은 거짓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연역할 수 있다. 즉, S로부터 우리는 not-S를 연역할 수 있다. 그렇지만, S로부터 우리는 "S이거나 달은 푸른 치즈로 만들어진다"를 연역할 수 있다. 하지만 not-S(우리가 이미 연역하였던)는 "S이거나 달은 푸른 치즈로 만들어진다"와 더불어 우리가 "달은 푸른 치즈로 만들어진다"를 연역할 수 있도록 한다.
8) Thus given the nonsense "This sentence is false" we can deduce that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 We have been able to do this because the nonsense in question issues in a contradiction, and from a contradiction we can, by the method of the last paragraph, deduce any sentence whatever. It is not obvious, however, that all nonsensical sentences issue in a contradiction. Some seem so far off the rails of meaningful discourse that it is not even possible to use them to demonstrate their own senselessness. Thus, it is not obvious that "I married a prime number" or "A bodiless grin appeared in the room" issue explicitly in contradiction. Nevertheless, my derivation of the proposition that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 should make it plausible that a philosopher should be able to deduce false conclusions from true premisses if he makes his deduction through unrecognised nonsense. The deduction would, of course, be an incorrect one, but it would be incorrect in a very unobvious and subtle way. The detection of its incorrectness would depend on the detection of hidden nonsense. A good example of this sort of thing,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suggested to me by D. M. Armstrong, is perhaps Aristotle's deduction of the false, though meaningful, proposition that the heavenly bodies are of a different is by way of the nonsense that the heavenly bodies obey laws of the same nature as the laws of logic, i.e., laws of a sort of logical hardness. 8) 그래서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무의미가 주어지면 우리는 달이 푸른 치즈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연역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있었는데 모순에 있어서의 현안문제들에 있어서 그 무의미가, 그리고 하나의 모순으로부터 우리가 마지막 문단의 방법을 통해 어떤 무엇이든 문장을 연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든 무의미한 문장들이 모순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일부는 그것들을 그것들의 고유한 무의미성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있는 논의의 경로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소수와 결혼했다"나 "몸뚱이 없는 미소가 방안에 나타났다"가 분명하게 모순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은 푸른 치즈로 만들어진다라는 명제에 대한 나의 유도는 철학자가 거짓 결론들을 참된 전제들로부터 만일 그가 그의 연역을 자각되지 않은 무의미를 통해 이룬다면 연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타당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 연역은 물론 부정확한 한 가지의 것일 터이지만, 그것은 매우 불확실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부정확한 것일 터이다. 그것의 부정확성에 대한 연역은 숨은 무의미의 연역에 의존할 것이다. 철학사에 있어서 이러한 종류의 것에 대한 좋은 예시는 D. M. 암스트롱에 의해 나에게 제시된 것으로, 아마도 설령 유의미할지라도 거짓인 '천체들은 지구의 실체와는 다른 실체에 속한다'라는 명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일 것이다. 그의 연역은 천체들이 논리법칙들로서, 즉 일종의 논리적 견고성의 법칙들로서 동일한 자연법칙들을 따른다는 무의미에 속하는 방식에 의한 것이다.
9) It may be thought that my example of a deduction that the moon is made of green cheese proves too much. For if it proves anything it proves that from "This sentence is false" (or from a simple nonparadoxical contradiction such as "2+2=5") we could deduce anything whatever. But philosophers, however metaphysical they may be, are not satisfied to assert any proposition whatever. There are some propositions which they wish to assert and there are other propositions which they wish to deny. A system of thought which harboured a contradiction would, on the contrary, degenerate into the happy assertion of anything whatever. To this objection we must reply that in practice a system will degenerate in this way only if the contradiction is detected. If the contradiction is not detected it cannot in practice provide a route for the deduction of any proposition whatever. It is like a way out of prison which is quite unkown to the prisoners: as far as they are concerned it might as well not exist, and the bolts and bars do not lose any of their effectiveness. 9) 달은 푸른 치즈로 만들어진다는 연역에 대한 나의 예시가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어떤 것이든 증명한다면 그것은 "이 문장은 거짓이다"로부터 (혹은 "2+2=5"와 같은 단순한 비역설적 모순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무엇이든 연역할 수 있으리란 것을 증명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들, 하지만 형이상학적일 그들은 어떤 무슨 명제든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길 바라는 일부 명제들이 있고 그들이 거부하고자 하는 다른 명제들이 있다. 하나의 모순을 품었던 사유의 체계는 반대로 어떤 아무것에 대한 행복한 단언으로 퇴락할 것이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우리는 실질적으로 하나의 체계는 만일 모순이 발견된다면 오로지 그러한 경우에만 이러한 방식으로 퇴락할 것이라고 응답해야만 한다. 그것은 감옥의 수감자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탈출구와 같은 것이다. 그들이 그것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리라 우려하는 한, 그리고 빗장들과 쇠창살들이 그 힘의 어느 것 하나 잃지 않는 한.
10) I conclude therefore that it must not be supposed that the view that philosophy consists only in the elimination of nonsense implies the proposition that philosophy has no effect on our world view. It may cause us to shed some of our beliefs about the world because it may enable us to see that we have accepted these beliefs only on the strength of a fallacious deduction through a nonsensical part of language. This conclusion is far stronger than another one, which is conceded by most philosophers, that the elimination of nonsense leads to clarity of thought and so helps the progress of the sciences. 10) 나는 그러므로 철학이 오로지 무의미의 제거로만 이루어진다는 관점이 철학은 우리의 세계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명제를 함축한다고 가정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결론내린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믿음들 중 일부를 없앨 터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아마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러한 믿음들을 오로지 잘못된 연역의 힘에서 언어의 무의미한 부분을 통해서만 받아들였음을 볼 수 있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은 대부분의 철학자들에 의해 인정되는 다른 결론, 무의미의 제거가 사유의 분명함으로 이끌고 그래서 학문들의 진보를 돕는다는 결론보다 너무 강하다.
Philosophy as More Than the Elimination of Nonsense 무의미의 제거 그 이상의 것으로서 철학
1) That philosophy is at least the elimination of nonsense and the clarification of thought is something of which I have not the least doubt. However, I should also wish to argue that philosophy is more than this, and that it is the business of the philosopher to decide between various synoptic hypotheses on grounds of plausibility. Of course, scientists have to decide between hypotheses, and with a slight over-simplification we may say that they do so by means of observation and experiment. It may be, however, that no available method of experiment and observation will decide between two hypotheses. The philosopher may legitimately, I think, feel it within his province to speculate on the relative palusibilities of the two hypotheses if they are of such generality and importance as to affect our overall world view. For example, in the sequel I shall be concerned to argue for the palusibility of the view that the human brain is no more than a physical mechanism, that no vitalistic or purely psychical entities or laws are needed to account for its operations. This type of philosophical thinking links up closely with the purely clarificatory sort of philosophy, since part of my strategy will be to try to expose confusions in a priori philosophical arguments for the opposite hypothesis. Of course, those who produce such a priori arguments will probably deny that what they are arguing for is a "hypothesis": they will hold that their view is true as a matter of logic, just as a mathematical proposition perhaps is. I shall, however, indicate why I think that such philosophers are too sanguine in regarding philosophy as pure logic. 1) 철학이 최소한 무의미의 제거이며 사고의 명증화라는 것은 내가 작은 의심도 품지 않는 어떤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또한 철학이 이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며, 타당성에 근거하는 다양한 개략적인 가정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는 일이 철학의 과업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물론 과학자들은 가설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우리는 약간 과도한-단순화로써 그들이 관찰과 실험의 방법으로 그러한 일을 한다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실험과 관찰의 그 어떠한 가용한 방법도 두 가설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철학자는 만일 그 가설들이 우리의 전반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서 그러한 일반성과 중요성을 가진다면 내가 생각하기에는 정당하게 두 가설들의 상대적인 타당성들에 대해 추정하는 그의 분야에 있어서 그것(실험과 관찰이 결정내리지 못한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어지는 곳에서 나는 인간 뇌가 물리적 기계장치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기를 바랄 것이고, 어떠한 활력론적이거나 순수하게 심리학적인 실체들 또는 법칙들이 그 두뇌의 활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를 바랄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철학적 생각은 순수하게 명확화하는 종류의 철학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데, 왜냐하면 나의 전략 중 일부가 반대가설들을 위한 선험적인 철학적 논증들에서의 혼동들을 노출시키고자 시도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선험적 논증들을 산출해내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이 그를 위해 논증하고 있는 어떤 것이 "가설"이라는 점을 부정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관점이 논리적 문제로서 참이라고 주장할 것인데, 바로 수학적 명제들이 아마도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나는 어째서 내가 그러한 철학자들은 철학을 순수 논리학으로 간주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밝힐 것이다.
2) A philosopher might have to decide betweeen two hypotheses for which there not only is no available empirical test but for which there could be no possible empirical test. I shall illustrate this point by reference to the hypothesis that the universe began to exist ten minutes before I began writing this sentence, but with everything just as it was ten minutes ago. (Fossils in the rocks, photographs in the pocket, memory traces in the brain, light rays in interstellar space, and so on.) Of course this is not a hypothesis which any philosopher is likely to hold, though the English naturalist and biblical theologian Philip Gosse produced a very similar theory in order to reconcile geology and the book of Genesis. Gosse held that the world was created only a few thousand years ago, exactly as stated in the book of Genesis, but that God had also created the various eroded canyons, fossils as if of prehistoric animals and plants, and so on. In short, he held that the world was created a few thousand years ago just as in fact it was (on the usual geological and evolutionary account) at that time. Clearly Gosse's theory was immune to empirical refutation, and he was extremely pained when both the scientific world and the theological world spurned his ingenious reconciliation. Nevertheless, though it is not a live philosophical theory, the hypothesis that the world began ten minutes ago, just as it was ten minutes ago, will serve to illustrate my methodological point. It is clear that no experiment or observation could upset the hypothesis that the world began ten minutes ago just as it was ten minutes ago. If I mention our memories of last week's football match the reply will be that these are not true memories: the football match never happened, but we came into existence ten minutes ago complete with pseudo-memories of the non-existent game. If I point to newspaper photographs of the football match the reply will be that the newspaper, complete with photographs, itself began to exist ten minutes ago. And so on. 2) 어떤 철학자는 그를 위한 아무런 가용한 경험적 시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한 아무런 가능한 경험적 시험도 있을 수 없는 그러한 두 가설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모른다. 나는 우주가 이 문장을 쓰기 시작하기 10분 전에, 하지만 그 우주가 10분 전에 그러하였을 것이었던 것과 똑같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가설을 언급함으로써 이 점을 묘사하고자 한다. (암석들 속의 화석들, 주머니 속 사진들, 뇌 속 기억의 흔적들, 행성간 공간에 광선들 등.) 물론 이것은 어떤 철학자도 주장할 것 같지 않은 가설이다. 설령 잉글랜드 박물학자이자 성서신학자인 필립 고쓰가 매우 유사한 이론을 지질학과 창세기를 조화시키기 위해 내놓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고쓰는 세계가 단지 몇 천 년 전에, 정확하게 창세기에 쓰여졌듯이 창조되었을 뿐이며, 그러나 신은 또한 풍화침식된 다양한 협곡들, 선사시대 동식물들의 것과 같은 화석들 따위의 것들도 창조했다고 주장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세계가 몇 천 년 전 (통상의 지질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설명에 기초해) 실제로 그 당시에 그러하였을 것과 똑같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명백하게 고쓰의 이론은 경험적 반박으로부터 면제되었고, 그는 과학적 세계와 신학적 세계 모두가 그의 기발한 조화를 일축시켰을 때 극심하게 고통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것이 살아있는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세계가 10분 전에 그러하였을 바로 그 세계와 똑같이 10분 전에 시작했다는 그 가설은 나의 방법론적 핵심을 묘사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어떠한 실험이나 관찰도 세계가 10분 전에 그것이 그러하였을 바로 그 모습으로 10분 전에 시작하였다는 그 가설을 뒤엎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만일 내가 우리의 지난 주 풋볼 경기에 대한 기억들을 언급한다면 그 응답은 이러한 기억들이 참된 기억들이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그 풋볼 경기는 결코 일어났던 적이 없고, 그러나 우리는 비-실재인 경기에 대한 가상-기억들을 완비한 채 10분 전에 현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만일 내가 그 풋볼 경기에 대한 신문 사진들을 지적한다면 그 대답은 그 신문이 사진들을 갖춘 채 그 자체로 10분 전에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일 터이다. 뭐 그 따위 응답들이 돌아올 것이다.
3) Some philosophers would say that since there could be no experimental or observational way of deciding the question whether or not the world came into existence ten minutes ago just as it was ten minutes ago, the assertion or denial that the world began ten minutes ago is without sense. This seems to me to be unplausible. There seems to be nothing contradictory in the notion of a world suddenly springing into existence in this way. Moreover, suppose that I am suffering from an intense toothache. I should not take kindly to the view that in a year's time there would be no meaningful difference between the hypothesis that the world exists now, complete with my toothache, and the hypothesis that the world will spring into existence next year, just as it will be next year, with pseudo-traces, such as memories and empty gums, as if of my present toothache. 3) 일부 철학자들은 세계가 10분 전에 그러할 바로 그와 같이 10분 전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결론내리기 위한 어떠한 실험이나 관찰의 방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세계가 10분 전에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은 의미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부당하다. 세계가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뿅하고 존재하게 되었다는 관념에 있어서 아무런 모순도 없는 듯이 보인다. 더 나아가서, 내가 극심한 치통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가정하자. 한 해 동안 나는 세계가 나의 치통을 갖춘 채로 지금 현존한다는 가설과 세계가 그것이 다음 해에 그러한 바로 그 모습으로 기억들과 빈 잇몸들, 마치 지금의 내 치통처럼 가상-흔적들을 가지고 다음 해에 갑자기 튀어나와 존재할 것이라는 가설 사이에 아무런 유의미한 차이도 없으리라는 관점에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다.
4) It is hard, however, without losing all sense of reality, to deny that the hypothesis that the world began ten minutes ago just as it was ten minutes ago is a meaningful one. (Though an unbelievable one.) Indeed, though there are no possible observations or experiments which could distinguish between this hypothesis and the more usual one, there are considerations, hard though they may be to formulate, of simplicity and palusibility, which should determine us to reject the "ten minutes ago" hypothesis. For this hypothesis presents us with a cosmology depending on a highly complex and arbitrary set of initial conditions. If the "ten minutes ago" hypothesis is accepted, then we have to take as a brute fact, for which no explanation could possibly be given, that ten minutes ago there were certain footprints on the beach at Glenelg, South Australia, that there were certain light waves in the depths of intergalactic space, that there were certain definite "photographs" in my breast pocket, that there were certain types of pseudo-prehistoric bones in the rock strata. All these facts would have to be taken as just "flat" and in principle inexplicable. Now it is true that on any hypothesis there is an element of arbitrariness in nature. Why have we five fingers rather than four or six? Nevertheless this arbitrariness can be understood as due to the element of sheer accident involved in the large-scale non-accident of evolution by natural selection. This arbitrariness, and other sorts of arbitrariness, such as the occurrence of hard rocks here and soft rocks there, of blue stars here and red stars there, is, on the normal hypothesis that the world has existed for a very long time, much what we should expect. It would be surprising rather if everything were neat and orderly. But this sort of arbitrariness is not like the extraordinary and universal arbitrariness of the initial conditions which we find in the "ten minutes ago" hypothesis. 4) 그렇지만 모든 현실감을 잃지 않고 세계가 10분 전에 그것이 그러했을 바로 그 모습으로 10분 전에 시작되었다는 가설이 의미있는 것임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설령 믿을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더욱이, 이 가설과 좀 더 일반적인 것 사이를 구별할 수 있을 가능한 관찰들이나 실험들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고려들이 있는데, 비록 그 고려들이 정식화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로 하여금 "10분 전" 가설을 거부하도록 결정지을 단순성과 타당성에 대한 그러한 고려들이 있다. 이러한 가설은 우리에게 고도로 복잡하고 임의적인 일련의 초기조건들에 의존하는 우주론을 보여준다. 만일 "10분 전" 가설이 허용된다면, 우리는 그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가능하게 제시될 수 없는 맹목적 진실로서 10분 전에 남부 오스트레일리아 글레넬그 해변에 특정한 발자국들이 있었다는 것을, 은하간 공간의 한 가운데 특정한 광선들이 있었다는 것을, 내 가슴팍 주머니에 어떤 확실한 "사진들"이 있었다는 것을, 특정한 종류의 가상-선사 뼈들이 암석 지층들 속에 있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은 마치 '단호한' 것처럼 그리고 원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취해져야 할 것이다. 이제 어떤 가설에 대해서든 본성적으로 임의적인 요소가 있음은 사실이다. 왜 우리는 넷이나 여섯이 아니라 다섯 손가락을 가지는가? 글머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임의성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대규모 비-우연에 있어서 수반되는 순전한 우연의 요소 때문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임의성, 그리고 여기에는 단단한 암석들이 있고 저기에는 부드러운 암석들이 있는 것과 같이, 여기에는 푸른 별들이 있고 저기에는 붉은 별들이 있다는 것처럼 다른 종류의 임의성은 세계가 매우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해 왔다는 평범한 가설에 대해서, 우리가 예상할 어떤 것 그 이상의 것들이다. 만일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다면 그것이 오히려 놀라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임의성은 우리가 "10분 전" 가설에서 발견하는 초기조건들의 비범하고 보편적인 임의성과 같은 그런 것은 아니다.
5) The example of the hypothesis that the universe began to exist ten minutes ago seems to show that it is possible to choose, on grounds of plausibility, between two hypotheses between which there can be no empirical test. I shall myself consider one important case of this sort [in Philosophy and scientific Realism] when I shall argue for the view that our conscious experiences are not identical with brain processes but that they are correlated with brain processes. Here once more we have, as we shall see, two hypotheses between which no empirical test could decide. I shall argue on plausible grounds for the former (materialistic) hypothesis against the later (dualistic) hypothesis. Before I can do this I shall, of course, have to argue that certain a priori philosophical arguments against materialism are not as cogent as they seem at first sight to be. The plausible arguments I shall use are of various sorts, but one of these is worthy of specific mention. This is Occam's razor. It depends on the precept "Do not multiply entities beyond necessity." This is a familiar maxim not only of philosophical method but also of scientific method. For example, if biochemical reactions will explain a certain phenomenon of cell growth, then there is no need to postulate, in addition to the biochemical reactions which we know to occur anyway, a life force or some irreducibly biological law of nature. (Occam himself is popularly supposed to have applied his razor to the metaphysical problem of universals, though I gather that there is a good deal of doubt the historical accuracy of this.) It might turn out that in cases where we need to talk of universals, such as justice and whiteness, we could manage equally well by talking of the words "just" and "white." If we can think of words as marks on paper and the like (the trouble, of course, is that words, unlike particular inscriptions, themselves turn out to be universals), then we can effect an economy. For we know that ink marks on paper and the like occur anyway, and if they will do all the explanatory tasks that are needed we need not bring in the airy fairy and altogether dubious entities justice and whiteness. 5) 우주가 10분 전에 시작되었다는 가설의 예는 타당성에 기초하여 어떠한 경험적 시험도 가능하지 않은 두 가설들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스스로 이러한 종류의 한 가지 중요한 경우를 내가 우리의 의식 경험들이 뇌의 진행과 동일시되지 않지만 그 경험들은 뇌의 진행과정들과 관련된다고 주장하고자 할 때 고려할 것이다 [『철학과 과학적 사실주의』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한 번 더 어떠한 경험적 시험도 그 사이에서 결정할 수 없는 그러한 두 가지 가설들을 가진다. 나는 후자 (이원론적) 가설에 대해 전자 (유물론적) 가설을 위해 타당한 근거들에 대해서 주장할 것이다. 내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기에 앞서서 나는 물론 특정한 선험적 철학논증들이 유물론에 반대해 그것들이 첫눈에 그렇게 보이는 만큼 그렇게 설득력있지는 않다는 것을 주장해야 할 것이다. 내가 사용할 그 타당한 논증들은 다양한 종류의 것들이지만, 이것들 중 하나는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이것은 오캄의 면도날이다. 그 면도날은 "필연성을 넘어서서 실체들을 증대시키지 말라"라는 수칙에 의존한다. 이것은 철학적 방법에 대해서만 친숙한 격언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에 대해서도 그러한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생물화학적 반응들이 세포 성장의 특정한 현상을 설명할 것이라면, 우리가 어쨌든 발생할 것을 알고 있는 생물화학적 반응들에 더하여 생명력이나 어떤 환원불가능한 생물학적 자연법칙을 상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캄 자신은 일반적으로 그의 면도날을 보편자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적용시켰던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내가 이에 대한 역사적 정확성을 의심할 그럴싸한 이유가 있음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올바름과 흼과 같은 보편자들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경우들에 우리가 "올바름"과 "흼"이라는 단어들을 취함으로써 똑같이 잘 다룰 수 있으리라는 것은 아마도 드러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종이에 적힌 그리고 그와 같은 것으로서 단어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면(물론 특별히 적힌 글자들과 달리 단어들 그 자체는 보편적인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문제이다), 우리는 경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종이 위의 잉크 표시들과 어떻게든 일어나는 그와 같은 것들을 알고, 만일 그것들이 필요한 모든 설명작업들을 해낼 것이라면 우리는 애매하고(비현실적이고) 죄다 미심쩍은 실체들에서 올바름과 흼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
6) I suspect that considerations of plausibility, turning on the notions of simplicity and arbitrariness, of Occam's razor and the like, have an important and indeed indispensable place in philosophical argument. This is partly because philosophy is carried out in a natural language, not in some artificial language, with rigid formation and transformation rules explicitly laid down as in a formal logical or mathematical system. Hence, though it is often possible to persuade another philosopher that he has landed himself in inconsistency or in nonsense, and that he must therefore give up certain of his tenets, it is never possible to prove this to him. He can always patch up the inconsistencies and nonsenses in his language by means of supplementary rules and hypotheses. We shall have to present an alternative in chapter 6 [of Philosophy and Scientific Realism] to the so-called libertarian theory of free-will. At first sight this theory is easy to refute, for the libertarian seems to hold that acting freely is something intermediate between being determined and acting by pure chance. Logic would seem to leave no room for such an intermediate possibility. The libertarian will reply that if I define "pure chance" as "not being determined," then his "acting freely" is a sub-species of what I call "pure chance." This sub-species is not properly pure chance, but consists in acting from reasons, not from causes. I then reply to the libertarian with the stock philosophical arguments showing that reasons are not a sort of para-cause and that acting from reasons is not incompatible with acting from causes. The obdurate libertarian is sure to prepare yet another line of defence and get round this objection in some way. (As I well know from inconclusive phiosophical discussions on this topic.) 6) 나는 타당성에 대한 고려들이 오캄의 면도날과 혹은 그와 같은 것들의 단순성과 임의성의 관념들을 중심으로 철학적 논증에 있어서 중요하고 더욱이 불가결한 자리를 차지하리라 짐작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철학이 형식논리 또는 수학적 체계에서와 같이 분명하게 놓인 엄격한 구조와 전환규칙들을 가지고 어떤 인공언어에서 수행되지 않고 자연언어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다른 철학자에게 그가 모순이나 무의미에 빠졌다고, 그리고 그는 그러므로 그의 근본원리들 중 특정한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고 설득하는 일이 종종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그에게 증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는 언제나 그의 언어에 있어서 모순들과 무의미들을 보조규칙들과 가설들을 수단으로 삼아 대충 기워낼 수 있다. 우리는 [『철학과 과학적 사실주의』의] 6장에서 소위 자유의지에 대한 자유의지론이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표명해야 할 것이다. 딱 봐서 이것은 반박하기 쉬운 이론인데, 왜냐하면 자유의지론자는 자유롭게 행위하는 것이 결정된 것과 순전히 우연한 행동 사이의 어떤 중간인 것이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논리학은 그러한 중간적 가능성을 위한 아무런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자유의지론자는 만일 내가 "순전한 우연"을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정의한다면 그의 "자유롭게 행위함"은 내가 "순전한 우연"이라 부르는 것의 아종(변종)일 것이라고 응답할 것이다. 이 아종은 온전히 순전한 우연은 아니지만, 이유들로부터의 행위로 이루어지고 원인들로부터의 행위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그러면 나는 그 자유의지론자에게 이유들이 일종의 준-원인들이 아니며 그 이유들로부터의 행위는 원인들로부터의 행위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상투적인 철학적 논증들을 가지고 답한다. 완고한 자유의지론자는 아직 방어의 다른 노선이 예비되어 있고 이 반대를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음에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한 결정적이지 못한 철학적 논의들로부터 잘 알고 있듯이 말이다.)
7) This characteristic inconclusiveness of philosophical argument is a fact familiar to all philosophers. If they were to take it seriously more of them would be favourably disposed to my conception of philosophy as in part depending on merely plausible considerations. If a philosopher keeps on patching up his theory we may try to persuade him that his way of talking is becoming more and more baroque and is ill-fitting to our scientific knowledge. The libertarian philosopher of free-will may, if he is ingenious enough, render himself immune to our logical arguments, but only at the cost of great artificiality in his theory, and at the price of bringing in a great discontinuity in the story of animal evolution. Just where in the line of evolution, the primates, or sub-men, or early men, does this "soul," or power of free choice in the libertarian sense, become superadded to man as he appears in the usual biological story? It would, moreover, have to be very special creation: it is impossible that the evolution of such a metaphysical entity could be explained in the usual mechanistic terms, natural selection acting on gene pools (a gene being a complex nucleic acid). Of course, if the philosopher is happy with the broque quality of his theory and with its artificiality of fit with total science, then there is no more to be done. In many cases, however, plausible considerations of the sort I have
suggested may have a persuasive force that purely abstract
considerations of consistency and the like may not have. With ingenuity these last can be got round, but if the methods of getting round them have to be supplemented every century, or every decade, in order to take account of advances in science, then it will be a very romantically minded philosopher who will not begin to feel uneasy. 7) 철학적 논증에 대한 이러한 특징적인 결정적이지 못함은 모든 철학자들에게 친숙한 하나의 사실이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보다 더 진지하게 취할 것이라면 그들은 단지 타당한 고려들에 의존하는 부분으로서 철학에 대한 나의 이해에 호의적으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만일 한 철학자가 그의 이론을 기워내기를 고수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그의 화법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우리의 과학적 지식에 안 맞는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 자유의지에 대한 자유의지론 철학자는 아마도, 만일 그가 충분히 기발하다면, 우리의 논리적 논증들로부터 면제되도록 만들 것인데, 그의 이론에 있어서 그 대단한 작위성의 대가뿐만 아니라 동물 진화론에 있어서의 엄청난 단절의 값까지 치르면서 그러할 것이다. 진화의 선상에서 대체 어디에서 영장류들, 혹은 하등-인간, 또는 초기 인간이 이러한 "영혼" 또는 자유의지론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통상적 생물학적 논의에 있어서 그가 그렇게 드러나듯 인간에 덧붙이기 시작했는가? 더욱이 그것은 매우 특별한 창조여야 한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실체의 진화가 통상의 기계론적 용어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풀들(복잡한 핵산인 하나의 유전자 존재)에 대한 자연 선택의 작용 같은 용어 말이다. 물론 만일 그 철학자가 그의 이론의 복잡성과 총체적 과학과의 적합도에 대한 작위성으로 만족한다면, 더 이상 할 일은 없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그렇지만 내가 제안했던 그러한 종류의 타당한 고려들은 아마도 일관성에 대한 순수하게 추상적인 고려들을 설득하는 힘을 가질 것이고 그 유사한 것들은 가지지 않을 것이다. 기발함을 가지고 이러한 문제들이 끝내 해결될 수 있지만, 만일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들이 매 세기, 혹은 매 세대 과학에서의 진보에 대한 설명을 취하기 위해 보충되어야만 한다면, 그것은 매우 낭만적인 정신을 가진,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지 않을 철학자일 것이다.
Synoptic Philosophy and Man's Place in Nature 종관 철학과 자연에서 인간의 자리
1)
If philosophy is concerned, in the manner suggested above, with the
rational reconstruction of our conceptual scheme, then it quite
obviously covers a very wide field. There will therefore be some
important issues which, for the purposes of this [selection], I shall be
content to leave to one side. For example, I shall not be concerned
with the much-vexed question of Platonism versus nominalism, that is,
whether in addition to the concrete objects or events which exist in
space and time we must postulate abstract objects as well. For example,
do mathematicians assert the reality of numbers and classes?
The two parts of the previous question can indeed be amalgamated if we
accept Frege's and Russell's analysis of numbers as classes of classes
of objects. In any case, in higher mathematics it is essential to
introduce infinite classes, i.e., classes of numbers. That a class is an
abstract object can most easily be seen if we consider the null class,
which can be described e.g., as the class of twentieth-century
terrestrial unicorns. The null class is a perfectly good class, and
because it has no mambers there is no temptation to confuse it with the
"heap" of its members. A class, unlike a heap, has a number. Consider
the class of students who are in this room at a certain moment. It has,
say, ten members. Contrast the spatially scattered "heap" of human
protoplasm in this room. This has no number. It is made up of ten
persons and 1015 livings cells and goodness knows
how many molecules or atoms. Now science, since it includes mathematics,
apparently has to mention classes. Does this mean that we must accept
classes as real things postulated by science, on a par, perhaps, with
electrons or the far side of the moon? The reason why I shall not
discuss this issue of Platonism versus nominalism, or of the reality of
abstract entities, is that it has little relevance to the question of
man's place in the universe. The connecting theme of this book will be
the attack on anthropocentric or near-anthropocentric strains of thought
in philosophy. I shall attack phenomenalist and subjectivist theories
of mind and matter, space and time. The question of whether the universe
contains Platonic entities is neutral to these issues. 1) 만일 철학이 위에서
제안된 방식으로 우리의 개념적 도식에 대한 이성적 재구축에 관계한다면, 철학은 상당히 분명하게 매우 넓은 영역을 포괄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선택]를 위하여 내가 기꺼이 한 측면을 남겨둘 다소 중요한 화두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플라톤주의대(對)
유명론의 매우 골치아픈 물음, 즉 시간과 공간에 현존하는 구체적인 대상들이나 사건들에 덧붙여서 우리가 추상적인 대상들 또한
상정해야만 하는지의 물음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수학자들은 수들과 집합들의 실재성을 확언하는가? 앞선 물음의 두
부분들은 만일 우리가 대상들의 집합들의 집합들로서 수들에 대한 프레게와 러셀의 분석을 받아들인다면 실로 병합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고등 수학에서 유한 집합들, 즉 수들의 집합들을 도입하는 것은 본질적이다. 하나의 집합이 하나의 추상적 대상이라는 것은
만일 우리가 공집합을 고려한다면 가장 쉽게 보여질 수 있다. 공집합은 예를 들어 20세기 지상의 일각수들의 집합과 같은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 공집합은 완벽하게 훌륭한 집합이고, 그것이 아무런 원소들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과 그것의 원소들의
"더미"를 혼동하도록 하는 아무런 유혹거리도 없다. 더미와 달리 하나의 집합은 하나의 수를 가진다. 특정한 순간 이 방에 있는
학생들의 집합을 고려해 보라. 그 집합은 말하자면 10개의 원소들을 지닌다. 반면에 공간에 산재된 이 방 안의 인간 원형질
"더미"를 고려해 보라. 이 더미는 아무런 수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은 열 명의 사람들과 10의 15제곱에 달하는 살아있는
세포들과 가히 많은 분자들이나 원자들인 영양분으로 이루어진다. 이제 과학은 수학을 포함하기 때문에 외관상 집합들을 언급해야 할
듯하다. 이것은 우리가 집합들을 과학에 의해 상정된 실재적인 것들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마도 전자들과 동등하게
혹은 달의 이면과 같이? 내가 플라톤주의와 유명론 사이의, 또는 추상적 실체들의 실재성에 대한 이 문제를 논의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 논의가 우주에서 인간의 자리에 대한 물음에 거의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연속적인 주제는 철학에 있어서 사유의
인간중심주의적인 또는 그에 가까운 압력들에 대한 공격이 될 것이다. 나는 정신과 물질, 공간과 시간에 대한 현상론적이고
주관주의적인 이론들을 공격할 것이다. 우주가 플라톤적 실체들을 포함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중립적이다.
2)
Of course, the days when man was thought to be physically at the centre
of the universe are long over, but as I shall try to show, a disguised
anthropocentricity still prevails in many fields of philosophy. For
example, traditional phenomenalism in a sense puts this great world of
nature "inside sentience": indeed, as we shall see, phenomenalism has
appealed to no less a man than F. P. Ramsey on account of its apparent
power to tame the vast astronomical spaces that threatened to overawe
him. Moreover, I shall be concerned to refute the more recent
phenomenalism, not of tables and chairs but of electrons and protons,
which has attempted to deny the full-blooded reality of the
sub-microscopic world, i.e., of objects of an order of magnitude very
much smaller than those of macroscopic or roughly man-sized objects. In
later chapters I shall attack anthropocentricity in prevailing theories
of the secondary qualities and of consciousness, and I shall be
concerned to put man in his place by defending the view that he is
nothing more than a complicated physical mechanism. The ground for this
part of the book is prepared by a chapter on the relations between
physics and biology. The chapter on space and time might be thought to
be outside the scope of the book, but the reader will, if he preseveres,
discover that even in such notions as of past, present, and future
there is a concealed anthropocentricity. In the final chapter there is a
discussion of the relevance and lack of relevance of a materialistic
metaphysics for ethics. 2) 물론 인간이 물리적으로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 시기는
오래되었지만,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과 같이 가장된 인간중심성은 여전히 철학의 여러 영역들에 만연해 있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현상론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의 이 광대한 세계를 "지각의 내부에" 놓는다. 더구나 우리가 볼 것과 같이 현상주의는 프랑크 P.
램지 보다 조금더 덜하지 않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는데 그를 위압하도록 위협하는 막대한 천문학적 공간들을 다스리는 현상주의의 분명한
능력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나는 더욱 최근의, 책걸상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자들과 양자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준-미시세계, 즉
거시적이거나 또는 거칠게 말해서 인간적-규모의
대상들의 규모보다 훨씬 더 작은 자릿수의 대상들의 완전한 실재성을 부정하고자 시도한 현상주의를 반박하는 데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이후의 장에서 나는 부차적 성질들에 대한 이론들과 의식에 대한 이론들의 팽배에 있어서 인간중심주의를 공격할 것이고,
인간을 그가 복잡화된 물리적 기계장치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관점을 옹호함으로써 그의 자리에 정위하는 데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 책의 이러한 부분의 근거는 물리학과 생물학의 관계들에 대한 장으로써 준비된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장은 아마도 그
책의 범위 바깥에 있는 것으로 생각될 테지만, 독자는 만일 그가 잊지 않는다면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그러한 것들에 대한 그런
관념들에서조차 감추어진 인간중심성이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마지막 장에는 윤리학을 위한 유물론적 형이상학의 타당성과 타당성의
결핍에 대한 논의가 있다.
Dieser letzte Satz ist, wie gesagt, selbst analytisch, ob er zwar die synthetische Einheit zur Bedingung alles Denkens macht; denn er sag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meine Vorstellungen in irgend einer gegebenen Anschauung unter der Bedingung stehen müssen, unter der ich sie allein als meine Vorstellungen zu dem identischen Selbst rechnen, und also, als in einer Apperzeption synthetisch verbunden, durch den allgemeinen Ausdruck Ich denke zusammenfassen kann. →
이러한 후자의 명제는 이야기되었듯 그 자체로는 분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합적 통일을 모든 사유의 조건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나의 모든 표상들이 어쨌든 하나의 주어진 직관 안에서 그 조건 아래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 아래에서 나는 그 표상들을 오로지 나의 표상들로서만 동일한 자아에 고려해 넣고,
그러므로 하나의 통각 안에서 종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보편적 언명을 통하여 나는 총괄하여 생각할 수 있다. Aber dieser Grundsatz ist doch nicht ein Prinzip für jeden überhaupt möglichen Verstand, sondern nur für den, durch dessen reine Apperzeption in der Vorstellung: Ich bin, noch gar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st. Derjenige Verstand, durch dessen Selbstbewußtsein zugleich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gegeben würde, ein Verstand, durch dessen Vorstellung zugleich die Objekte dieser Vorstellung existierten, würde einen besondern Actus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der Einheit des Bewußtseins nicht bedürfen, deren der menschliche Verstand, der bloß denkt, nicht anschaut, bedarf. Aber für den menschlichen Verstand ist er doch unvermeidlich der erste Grundsatz, so, daß er sich sogar von einem anderen möglichen Verstande, entweder einem solchen, der selbst anschauete, oder, wenn gleich eine sinnliche Anschauung, aber doch von anderer Art, als die im Raume und der Zeit, zum Grunde liegend besäße, sich nicht den mindesten Begriff machen kann. → 그러나 이러한 근본명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지성 전반 각각에 대한 하나의 원칙은 아니며, 오히려 단지 "내가
있다"라는
표상 안에서 지성의 순수한 통각을 통해 그 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잡다도 전혀 주어지지 않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원칙이다.→ 저
지성, 그 지성의 자기의식을 통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그러한 지성,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 동시에
이러한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 하나의 지성은 의식의 통일성에 대한 잡다의 종합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활동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며,
순전히 사유할 뿐 직관하지는 않는 인간적
지성은 이를 요청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지성에 대해 불가피하게 첫 번째 근본명제이다, 그러니까, 그 지성은,
그 자체로 직관하는 그러한 지성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이라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러한 직관간을 기초에 놓는 그러한 지성이든 또 다른 가능한 지성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개념조차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Dieser letzte Satz ist, wie gesagt, selbst analytisch, ob er zwar die
synthetische Einheit zur Bedingung alles Denkens macht; denn er sag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meine Vorstellungen in irgend einer
gegebenen Anschauung unter der Bedingung stehen müssen, unter der ich
sie allein als meine Vorstellungen zu dem identischen Selbst rechnen,
und also, als in einer Apperzeption synthetisch verbunden, durch den
allgemeinen Ausdruck Ich denke zusammenfassen kann.
이러한 후자의 명제는 이야기되었듯 그 자체로는 분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합적 통일을 모든 사유의 조건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나의 모든 표상들이 어쨌든 하나의 주어진 직관 안에서 그 조건 아래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 아래에서 나는 그 표상들을 오로지 나의 표상들로서만 동일한 자아에 고려해 넣고, 그러므로 하나의 통각 안에서 종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보편적 언명을 통하여 나는 총괄하여 생각할 수 있다. →
이러한 후자의 명제는 이야기되었듯 그 자체로는 분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합적 통일을 모든 사유의 조건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나의 모든 표상들이 어쨌든 하나의 주어진 직관 안에서 그 조건 아래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조건 아래에서 나는 그 표상들을 오로지 나의 표상들로서만 동일한 자아에 고려해 넣고,
그러므로 하나의 통각 안에서 종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 보편적 언명을 통하여 나는 총괄하여 생각할 수 있다.
Aber dieser Grundsatz ist doch nicht ein Prinzip für jeden überhaupt
möglichen Verstand, sondern nur für den, durch dessen reine Apperzeption
in der Vorstellung: Ich bin, noch gar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st. 그러나 이러한 근본명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지성 전반 각각에 대한 하나의 원칙은 아니며, 오히려 단지 "내가 있다"라는 표상 안에서 지성의 순수한 통각을 통해 그 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잡다도 전혀 주어지지 않는. → 그러나 이러한 근본명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지성 전반 각각에 대한 하나의 원칙은 아니며, 오히려 단지 "내가 있다"라는
표상 안에서 지성의 순수한 통각을 통해 그 지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잡다도 전혀 주어지지 않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원칙이다. Derjenige Verstand, durch dessen Selbstbewußtsein zugleich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gegeben würde, ein Verstand, durch dessen
Vorstellung zugleich die Objekte dieser Vorstellung existierten, würde
einen besondern Actus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der Einheit
des Bewußtseins nicht bedürfen, deren der menschliche Verstand, der bloß
denkt, nicht anschaut, bedarf. 저 지성, 그 지성의 자기의식을 통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그러한 지성은, 하나의 지성,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 동시에 이러한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 의식의 통일성에 대한 잡다의 종합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활동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적 지성은 그것이 순전히 사유하고 직관하지는 않는 요청한다. → 저 지성, 그 지성의 자기의식을 통해 동시에 직관의 잡다가 주어질 그러한 지성,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 동시에
이러한 표상의 대상이 현존하는 하나의 지성은 의식의 통일성에 대한 잡다의 종합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활동을 요청하지 않을 것이며, 순전히 사유할 뿐 직관하지는 않는 인간적
지성은 이를 요청한다. Aber für den menschlichen Verstand ist
er doch unvermeidlich der erste Grundsatz, so, daß er sich sogar von
einem anderen möglichen Verstande, entweder einem solchen, der selbst
anschauete, oder, wenn gleich eine sinnliche Anschauung, aber doch von
anderer Art, als die im Raume und der Zeit, zum Grunde liegend besäße,
sich nicht den mindesten Begriff machen kann. 그러나 인간 지성에 대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첫 번째 근본명제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또 다른 가능한 지성에 대해서, 그 자체로 직관하는 그러한 것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부터, 기초에 놓는 고유할 것인, 최소한의 개념조차 형성할 수 없을.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지성에 대해 불가피하게 첫 번째 근본명제이다, 그러니까, 그 지성은,
그 자체로 직관하는 그러한 지성이든 아니면 감각적 직관이라 하더라도 공간과 시간 안에서의 방식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그러한 직관간을 기초에 놓는 그러한 지성이든 또 다른 가능한 지성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개념조차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Verstand ist, allgemein zu reden, das Vermögen der Erkenntnisse. Diese bestehen in der bestimmten Beziehung gegebener Vorstellungen auf ein Objekt. Objekt aber ist das, in dessen Begriff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vereinigt ist. Nun erfodert aber alle Vereinigung der Vorstellungen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r Synthesis derselben. Folglich ist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dasjenige, was allein die Beziehung der Vorstellungen auf einen Gegenstand, mithin ihre objektive Gültigkeit, folglich, daß sie Erkenntnisse werden, ausmacht, und worauf folglich selbst die Möglichkeit des Verstandes beruht. →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성은 인식들의 능력이다.→ 이러한 인식들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주어진 표상들의 규정된 관계 안에
존립한다.→ 그러나 대상는 개념에서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결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표상들의 모든 결합은 종합에 있어서 의식의
통일성을 요청한다.→
그래서 의식의 통일성은 바로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련, 그것이다. 따라서 그 연관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래서 그
표상들이 인식들로 되는 것을 결정하고, 그래서 지성의 가능성 자체가 거기에 근거한다.
Das erste reine Verstandeserkenntnis also, worauf sein ganzer übriger Gebrauch sich gründet, welches auch zugleich von all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ganz unabhängig ist, ist nun der Grundsatz der ursprünglichen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So ist die bloße Form der äußeren sinnlichen Anschauung, der Raum, noch gar keine Erkenntnis; er gibt nur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a priori zu einem möglichen Erkenntnis. Um aber irgend etwas im Raume zu erkennen, z.B. eine Linie, muß ich sie ziehen, und also eine bestimmte Verbindung des gegebenen Einheit dieser Handlung zugle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m Begriffe einer Linie) ist, und dadurch allererst ein Objekt (ein bestimmter Raum) erkannt wird. Die synthe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ist also eine objektive Bedingung aller Erkenntnis, nicht deren ich bloß selbst bedarf, um ein Objekt zu erkennen, sondern unter der jede Anschauung stehen muß, um für mich Objekt zu werden, weil auf andere Art, und ohne diese Synthesis, das Mannigfaltige sich nicht in einem Bewußtsein vereinigen würde. → 그러므로 여타 모든 사용이 거기에 근거하며 또한 동시에 감각적 직관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인 최초의 순수한 지성인식은 이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성의 원칙이다.→ 그래서 외적 감각적 직관의 순수 형식은 공간이고
여전히 전혀 인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간은 선험적으로 가능한 하나의 인식에
직관의
잡다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우간 공간 내에서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 나는
그 선을 그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의 주어진 통일성의 규정된 결합은 동시에 의식의 통일성(하나의 선에 대한 개념 안에서)이며, 그를
통하여 최초로 하나의 대상(하나의 규정된 공간)이 인식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모든 인식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조건이고,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순전히 나 혼자서 그
조건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나에 대한 대상이 되려면 그 조건 아래에 각각의 직관을
세워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는, 그리고 이러한 종합 없이는, 잡다가 하나의 의식
안에서 결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Verstand ist, allgemein zu reden, das Vermögen der Erkenntnisse. 지성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인식들의 능력이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성은 인식들의 능력이다. Diese
bestehen in der bestimmten Beziehung gegebener Vorstellungen auf ein
Objekt. 이러한 인식들은 주어진 표상들의 객체에 대한 규정된 관계 안에 존립한다. → 이러한 인식들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주어진 표상들의 규정된 관계 안에 존립한다. Objekt aber ist das, in dessen Begriff das Mannigfaltige einer
gegebenen Anschauung vereinigt ist. 그러나 대상은 그것이다, 그 대상의 개념에서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결합되는. → 그러나 대상는 개념에서 주어진 직관의 잡다가 결합되는 것이다. Nun erfodert aber alle Vereinigung
der Vorstellungen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r Synthesis derselben.
그러나 이제 표상들의 모든 결합은 그 표상들의 종합에 있어서 의식의 통일성을 요청한다. → 그러나 이제 표상들의 모든 결합은 종합에 있어서 의식의 통일성을 요청한다. Folglich ist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dasjenige, was allein die
Beziehung der Vorstellungen auf einen Gegenstand, mithin ihre objektive
Gültigkeit, folglich, daß sie Erkenntnisse werden, ausmacht, und worauf
folglich selbst die Möglichkeit des Verstandes beruht.
그래서 의식의 통일성은 바로 그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련, 따라서 그 표상들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래서, 그 표상들이 인식들로 되는 것을 결정하고, 그래서 지성의 가능성 자체가 거기에 근거한다. →
그래서 의식의 통일성은 바로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련, 그것이다. 따라서 그 연관의 객관적 실재성은 그래서 그
표상들이 인식들로 되는 것을 결정하고, 그래서 지성의 가능성 자체가 거기에 근거한다.
Das erste reine Verstandeserkenntnis also, worauf sein ganzer übriger
Gebrauch sich gründet, welches auch zugleich von all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ganz unabhängig ist, ist nun der Grundsatz der
ursprünglichen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그러므로 최초의 순수한 지성인식은, 거기에 여타 모든 사용이 근거하는, 또한 동시에 감각적 직관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인, 이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성의 원칙이다. → 그러므로 여타 모든 사용이 거기에 근거하며 또한 동시에 감각적 직관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전적으로
독립적인 최초의 순수한 지성인식은 이제 통각의 근원적 종합적 통일성의 원칙이다. So ist die bloße
Form der äußeren sinnlichen Anschauung, der Raum, noch gar keine
Erkenntnis; er gibt nur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a priori zu
einem möglichen Erkenntnis. 그래서 외적 감각적 직관의 순수 형식은, 공간이고, 여전히 전혀 인식은 아니다; 공간은 가능한 하나의 인식에 선험적으로 직관의 잡다만을 제공한다. → 그래서 외적 감각적 직관의 순수 형식은 공간이고 여전히 전혀 인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간은 선험적으로 가능한 하나의 인식에 직관의
잡다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Um aber irgend etwas im Raume zu erkennen,
z.B. eine Linie, muß ich sie ziehen, und also eine bestimmte Verbindung
des gegebenen Einheit dieser Handlung zugle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im Begriffe einer Linie) ist, und dadurch allererst ein
Objekt (ein bestimmter Raum) erkannt wird. 그러나 좌우간 공간 내에서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 나는 그 선을 그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의 주어진 통일성의 규정된 결합은 동시에 의식의 통일성(하나의 선에 대한 개념 안에서)이며, 그를 통하여 최초로 하나의 대상(하나의 규정된 공간)이 인식된다. → 그러나 좌우간 공간 내에서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선을 인식하기 위해서, 나는 그 선을 그어야만
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활동의 주어진 통일성의 규정된 결합은 동시에 의식의 통일성(하나의 선에 대한 개념 안에서)이며, 그를
통하여 최초로 하나의 대상(하나의 규정된 공간)이 인식된다. Die synthetische Einheit des
Bewußtseins ist also eine objektive Bedingung aller Erkenntnis, nicht
deren ich bloß selbst bedarf, um ein Objekt zu erkennen, sondern unter
der jede Anschauung stehen muß, um für mich Objekt zu werden, weil auf
andere Art, und ohne diese Synthesis, das Mannigfaltige sich nicht in
einem Bewußtsein vereinigen würde. 그러므로 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모든 인식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조건이고, 내가 순전히 스스로 그 조건을 요청하지 않는다,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오히려 그 조건 아래에 각각의 직관을 세워야만 하는데, 나에 대한 대상이 되기 위해서,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는, 그리고 이러한 종합 없이는, 잡다가 하나의 의식 안에서 결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의식의 종합적 통일은 모든 인식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조건이고, 하나의 대상을 인식하기 위해서 순전히 나 혼자서 그 조건을 요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나에 대한 대상이 되려면 그 조건 아래에 각각의 직관을
세워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방식으로는, 그리고 이러한 종합 없이는, 잡다가 하나의 의식
안에서 결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17. Der Grundsatz der 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das oberste Prinzip alles Verstandesgebrauchs § 17.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 대한 원칙은 모든 지성사용에 대해 최상의 원칙이다.
Der oberste Gundsatz der Möglichkeit aller Anschauung in Beziehung auf die Sinnlichkeit war laut der transz. Ästhetik: daß alles Mannigfaltige derselben unter den formalen Bedingungen des Raums und der Zeit stehe. Der oberste Gundsatz eben derselben in Beziehung auf den Verstand ist: daß alles Mannifgaltige der Anschauung unter Bedingungen der ursprünglich-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stehe¹. Unter dem ersteren stehen alle mannifgaltige Vorstellungen der Anschauung, so fern sie uns gegeben werden, unter dem zweiten so fern sie in einem Bewußtsein müssen verbunden werden können; denn ohne das kann nichts dadurch gedacht oder erkannt werden, weil die gegebene Vorstellungen den Actus der Apperzeption, Ich denke, nicht gemein haben, und dadurch nicht in einem Selbstbewußtsein zusammengefaßt sein würden. → 감성에 관련하여 모든 직관의 가능성에 대한 최상의 원칙은 초월적 감성학에 의하면 그 직관의 모든 잡다는 공간과 시간의 형식적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었다.¹→ 마찬가지로 지성과 관련하여 동일한 최상의 원칙은 직관의 모든 잡다가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의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직관의 모든 잡다한 표상들은 그 표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전자 아래에 서고, 후자 아래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의식 내에서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그를 통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활동을 주어진 표상들이 공통으로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취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¹ Der Raum und die Zeit und alle Teile derselben sind Anschauungen, mithin einzelne Vorstellungen mit dem Mannigfaltigen, das sie in sich enthalten (siehe die transz. Ästhetik), mithin nicht bloße Begriffe, durch die eben dasselbe Bewußtsein, als in vielen Vorstellungen, sondern viel Vorstellungen als in einer, und deren Bewußtsein, enthalten, mithin als zusammengesetzt, folgl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als synthetisch, aber doch ursprünglich angetroffen wird. Diese Einzelnheit derselben ist wichtig in der Anwendung (siehe § 25.). → ¹공간과 시간과 그것들의 모든 부분들은 직관들이며, 따라서 자체 내에 포함하는 잡다를 가지는 개별적인 표상들이고(초월론적
감성학을 보라), 따라서 그 개념들을 통해 마찬가지로 여러 표상들 내에 있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식을 포함하는 그러한 순전한
개념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이자 그것들에 대한 것인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많은 표상들을 포함하고, 따라서 공존하는 것으로서 포함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의식의 통일은 종합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와 같은 표상들의 이러한
개별성은 적용에 있어서 중요하다 (§ 25.를 보라).
Der oberste Gundsatz der Möglichkeit aller Anschauung in Beziehung auf
die Sinnlichkeit war laut der transz. Ästhetik: daß alles Mannigfaltige
derselben unter den formalen Bedingungen des Raums und der Zeit stehe.¹
감성에 관련하여 모든 직관의 가능성에 대한 최상의 원칙은 초월적 감성학에 의하면 그 직관의 모든 잡다는 공간과 시간의 형식적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었다.¹ → 감성에 관련하여 모든 직관의 가능성에 대한 최상의 원칙은 초월적 감성학에 의하면 그 직관의 모든 잡다는 공간과 시간의 형식적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었다.¹ Der oberste Gundsatz eben derselben in Beziehung auf den Verstand ist:
daß alles Mannifgaltige der Anschauung unter Bedingungen der
ursprünglich-synthetischen Einheit der Apperzeption stehe¹. 마찬가지로 지성과 관련하여 동일한 최상의 원칙은 직관의 모든 잡다가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의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지성과 관련하여 동일한 최상의 원칙은 직관의 모든 잡다가 통각의 근원적-종합적 통일의 조건들 아래에 존립한다는 것이다. Unter dem
ersteren stehen alle mannifgaltige Vorstellungen der Anschauung, so fern
sie uns gegeben werden, unter dem zweiten so fern sie in einem
Bewußtsein müssen verbunden werden können; denn ohne das kann nichts
dadurch gedacht oder erkannt werden, weil die gegebene Vorstellungen den
Actus der Apperzeption, Ich denke, nicht gemein haben, und dadurch
nicht in einem Selbstbewußtsein zusammengefaßt sein würden. 전자 아래에서 직관의 모든 잡다한 표상들은 서는데, 그 표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그러하고, 후자 아래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의식 내에서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그를 통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며,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활동을 주어진 표상들이 공통으로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취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 직관의 모든 잡다한 표상들은 그 표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전자 아래에 서고, 후자 아래에서는 그것들이
하나의 의식 내에서 결합될 수 있어야만 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그를 통해 사유되거나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통각의 활동을 주어진 표상들이 공통으로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를 통하여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취합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¹Der Raum und die Zeit und alle Teile derselben sind Anschauungen,
mithin einzelne Vorstellungen mit dem Mannigfaltigen, das sie in sich
enthalten (siehe die transz. Ästhetik), mithin nicht bloße Begriffe,
durch die eben dasselbe Bewußtsein, als in vielen Vorstellungen, sondern
viel Vorstellungen als in einer, und deren Bewußtsein, enthalten,
mithin als zusammengesetzt, folglich die Einheit des Bewußtseins, als
synthetisch, aber doch ursprünglich angetroffen wird. ¹공간과 시간과 그것들의 모든 부분들은 직관들이며, 따라서 자체 내에 포함하는 잡다를 가지는 개별적인 표상들이고(초월론적 감성학을 보라), 따라서 순전한 개념들이 아니다, 그 개념들을 통해 마찬가지로 여러 표상들 내에 있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이자 그것들에 대한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많은 표상들을 포함하고, 따라서 공존하는 것으로서 포함하고, 그래서 의식의 의식의 통일은 종합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 ¹공간과 시간과 그것들의 모든 부분들은 직관들이며, 따라서 자체 내에 포함하는 잡다를 가지는 개별적인 표상들이고(초월론적
감성학을 보라), 따라서 그 개념들을 통해 마찬가지로 여러 표상들 내에 있는 것으로서 동일한 의식을 포함하는 그러한 순전한 개념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이자 그것들에 대한 것인 의식에 속하는 것으로서 많은 표상들을 포함하고, 따라서 공존하는 것으로서 포함하는 것들이다. 그래서 의식의 통일은 종합적인 것으로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Diese Einzelnheit
derselben ist wichtig in der Anwendung (siehe § 25.). 그와 같은 표상들의 이러한 개별성은 적용에 있어서 중요하다 (§ 25.를 보라). → 그와 같은 표상들의 이러한 개별성은 적용에 있어서 중요하다 (§ 25.를 보라).
1) Having now come to the end of our brief and very incomplete review of the problems of philosophy, it will be well to consider, in conclusion, what is the value of philosophy and why it ought to be studied. It is the more necessary to consider this question, in view of the fact that many men, under the influence of science or of practical affairs, are inclined to doubt whether philosophy is anything better than innocent but useless trifling, hair-splitting distinctions, and controversies on matters concerning which knowledge is impossible. 지금 철학의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간단하고 매우 불완전한 검토의 막바지에 이르러서, 다음과 같은 것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철학의 가치는 무엇이며 어째서 철학이 연구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과학이나 실천적 문제들의 영향 아래에서, 지식일 수 없는 어떤 것과 관련하는 문제들에 대한 악의는 없지만 쓸데없이 자질구레하고, 골치아픈 구별들, 그리고 논란들 이외에 하등 나을 것 없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물음을 고려하는 것은 더욱이 필연적이다.
2) This view of philosophy appears to result, partly from a wrong conception of the ends of life, partly from a wrong conception of the kind of goods which philosophy strives to achieve. Physical science, through the medium of inventions, is useful to innumerable people who are wholly ignorant of it; thus the study of physical science is to be recommended, not only, or primarily, because of the effect on the student, but rather because of the effect on mankind in general. This utility does not belong to philosophy. If the sutdy of philosophy has any value at all for others than students of phiosophy, it must be only indirectly, through its effects upon the lives of those who study it. It is in these effects, therefore, if anywhere, that the value of philosophy must be primarily sought. 철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부분적으로는 삶의 목적들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일부는 철학이 성취하고자 분투하는 종류의 가치들에 대한 오해로부터 귀결된다. 물리과학은, 발명들의 매개를 통하여, 그 과학에 전적으로 무지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그래서 물리 과학에 대한 연구가 권장되어야 하는 것인데 오로지 그 학생들에 대한 영향 때문만이 아니라, 혹은 그것이 주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으로 인류에 대한 영향 때문이다. 이러한 유용성은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 만일 철학에 대한 연구가 철학도들보다도 다른 이들에게 도대체 어떤 가치라도 가진다면, 그것은 분명 오로지 간접적일 것임에 틀림없는데, 그 철학을 연구하는 이들의 삶들에 대한 그 연구의 영향들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기껏해야 철학의 가치가 우선적으로 추구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이러한 영향들에 있어서이다.
3) But further, if we are not to fail in our endeavour to determine the value of philosophy, we must first free our minds from the prejudices of what are wrongly called "practical" men. The "practical" man, as this word is often used, is one who recognizes only material needs, who realizes that men must have food for the body, but is oblivious of the necessity of providing food for the mind. If all men were well off, if poverty and disease had been reduced to their lowest possible point, there would still remain much to be done to produce a valuable society; and even in the existing world the goods of the mind are at least as important as the goods of the body. It is exclusively among the goods of the mind that the value of philosophy is to be found; and only those who are not indifferent to these goods can be persuaded that the study of philosophy is not a waste of time. 그러나 더 나아가서, 만일 우리가 철학의 가치를 결정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있어서 실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분명 처음으로 우리의 정신들을 "현실적" 사람들이라고 잘못 불리는 것에 대한 편견들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 "현실적인" 사람이란, 이 말이 종종 그렇게 쓰이듯이, 오로지 물질적 필요만을 인식하는 사람, 사람들이 반드시 몸을 위한 음식을 취해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러나 마음의 양식을 제공해야 할 필요성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잘 산다면, 그리고 가난과 질병이 그 최저치로 경감된다면, 가치있는 사회를 산출하기 위해 행해져야 할 많은 남은 일들이 여전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세계에서조차 정신에 좋은 것들은 최소한 몸에 좋은 것들 만큼은 중요하다. 철학의 가치가 발견되어야 하는 것임은 정신에 좋은 것들 중에서 독보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좋음들에 무관심하지 않은 그러한 이들만이 철학에 대한 연구가 시간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납득할 수 있다.
4) Philosophy, like all other studies, aims primarily at knowledge. The knowledge it aims at is the kind of knowledge which gives unity and system to the body of the sciences, and the kind which results from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grounds of our convictions, prejudices, and beliefs. But it cannot be maintained that philosophy has had any very great measure of success in its attempts to provide definite answers to its questions. If you ask a mathematician, a mineralogist, a historian, or any other man of learning, what definite body of truths has been ascertained by his science, his answer will last as long as you are willing to listen. But if you put the same question to a philosopher, he will, if he is candid, have to confess that his study has not achieved positive results such as have been achieved by other sciences. It is true that this is partly accounted for by the fact that, as soon as definite knowledge concerning any subject becomes possible, this subject ceases to be called philosophy, and becomes a separate science. The whole study of the heavens, which now belongs to astronomy, was once included in philosophy; Newton's great work was called "the 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 Similarly, the study of the human mind, which was a part of philosophy, has now been separated from philosophy and has become the science of psychology. Thus, to a great extent, the uncertainty questions which are already capable of definite answers are placed in the sciences, while those only to which, at present, no definite answer can be given, remain to form the residue which is called philosophy. 철학은 다른 모든 연구들과 같이 무엇보다도 앎에 목표를 둔다. 철학이 목표로 하는 그 앎이란 학문들의 몸체에 통일성과 체계를 부여하는 종류의 앎이고, 우리의 의견들, 선입견들, 믿음들의 근거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부터 귀결하는 종류의 앎이다. 그러나 철학이 철학의 물음들에 확고한 답변들을 내놓고자 하는 시도들에 있어서 어떤 매우 훌륭한 성공의 척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될 수는 없다. 만일 당신이 수학자나 광물학자 또는 역사학자나 어떤 다른 학자에게든 그의 학문으로써 확인된 진리들의 어떤 명확한 핵심을 묻는다면, 그의 대답은 당신이 듣고자 하는 그만큼 길게 늘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동일한 질문을 철학자에게 한다면, 그는 만일 그가 솔직하다면 그의 연구가 다른 학문들에 의해 성취된 그런 긍정적인 결과들을 성취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의해, 그러니까 어떤 주제에 관련한 확실한 앎이 가능해지면 가능해질 수록, 이 주제가 철학이라 불리우길 그치고, 분리된 하나의 학문이 된다는 사실로 설명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이제는 천문학에 속하는 천체에 대한 전체 연구는 일찍이 철학에 포함됐었다. 뉴턴의 위대한 저작은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들"이라고 불렸다. 비슷하게, 철학의 일부였던 인간 정신에 대한 연구는 이제 철학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심리과학이 되었다. 그래서 크게 보자면 이미 확실한 답변들이 가능한 불확실한 물음들은 학문들(과학들) 안에 놓이고, 반면에 현재 어떠한 확실한 답변도 주어질 수 없는 그러한 물음들만이 철학이라 불리우는 잔여 유산의 꼴로 남는다.
5) This is, however, only a part of the truth concerning the uncertainty of philosophy. There are many questions - and among them those that are of the profoundest interest to our spiritual life - which, so far as we can see, must remain insoluble to the human intellect unless its powers become of quite a different order from what they are now. Has the universe any unity of plan or purpose, or is it a fortuitous concourse of atoms? Is consiousness a permanent part of the universe, giving hope of indefinite growth in wisdom, or is it a transitory accident on a small planet on which life must ultimately become impossible? Are good and evil of importance to the universe or only to man? Such questions are asked by philosophy, and variously answered by various philosophers. But it would seem that, whether answers be otherwise discoverable or not, the answers suggested by philosophy are none of them demonstrably true. Yet, however slight may be the hope of discovering an answer, it is part of the business of philosophy to continue the consideration of such questions, to make us aware of their importance, to examine all the approaches to them, and to keep alive that speculative interest in the universe which is apt to be killed by confining ourselves to definitely ascertainable knowledge. 그렇지만 이것은 철학의 불확실성에 관련한 단편적인 진실일 따름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 인간 지성의 능력들이 지금 그러한 것으로부터 상당히 다른 질서가 되지 않는 한 그러한 지성에게는 풀 수 없는 것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많은 물음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는 우리의 정신적 삶에 대해 가장 심오한 관심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우주는 어떤 단일한 계획이나 의도를 지니는가, 아니면 원자들의 우연한 마당인가? 의식은 지혜에 있어서 무한한 성장의 희망을 주는 우주의 영속적인 일부인가, 아니면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생명이 불가능하게 될 수밖에 없는 작은 행성 위에서의 무상한 하나의 사건인가? 선과 악은 우주에 대해 중요한가 인간에게만 중요한가? 그런 물음들은 철학에 의해 던져지고, 다양한 철학자들에 의해 여러가지로 답변된다. 그러나 답변들이 다른 방식으로 발견될 수 있는지 없는지, 철학에 의해 제시된 그 답변들은 그것들 중에 어떤 것도 증명 가능한 참이 아닌 것처럼 보일 듯하다. 하지만, 그렇지만 조금이나마 하나의 답변을 발견할 희망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숙고를 계속하는 것, 우리가 그러한 물음들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만드는 것, 그 물음들에 대한 모든 접근들을 검토하는 것,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명확하게 확인 가능한 지식에 제한함으로써 사멸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세계에 대한 그러한 사변적 흥미를 살아있도록 유지하는 것은 철학적 과업의 일부이다.
6) Many philosophers, it is true, have held that philosophy could establish the truth of certain answers to such fundamental questions. They have supposed that what is of most importance in religious beliefs could be proved by strict demonstration to be true. In order to judge of such attempts, it is necessary to take a survey of human knowledge, and to form an opinion as to its methods and its limitations. On such a subject it would be unwise to pronounce dogmatically; but if the investigations of our previous chapters have not led us astray, we shall be compelled to renounce the hope of finding philosophy any definite set of answers to such questions. Hence, once more, the value of philosophy must not depend upon any supposed body of definitely ascertainable knowledge to be acquired by those who study it. 여러 철학자들은 정말로 철학이 그러한 근본적 물음들에 대한 특정한 답변들의 진리를 확립시킬 수 있으리라 주장해 왔다. 그들은 종교적 믿음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어떤 것이 엄격한 증명에 의해 참인 것으로 증명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한 시도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인간적 지식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고, 그 방법들과 제한들에 관해서 하나의 견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 독단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앞선 장들에 속하는 연구들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지 않았다면, 우리는 철학을 그러한 물음들에 대한 어떤 한정된 일련의 답변들로 발견할 희망을 포기하도록 강제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철학의 가치는 분명 철학을 연구한 이들에 의해 획득될 확실하게 확인될 수 있는 지식의 어떠한 가정된 몸체에도 의존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7) The value of philosophy is, in fact, to be sought largely in its very uncertainty. The man who has no tincture of philosophy goes through life imprisoned in the prejudices derived from common sense, from the habitual beliefs of his age or his nation, and from convictions which have grown up in his mind without the co-operation or consent of his deliberate reason. To such a man the world tends to become definite, finite, obvious; common objects rouse no questions, and unfamiliar possibilities are contemptuously rejected. As soon as we begin to philosophize, on the contrary, we find, as we saw in our opening chapters, that even the most everyday things lead to problems to which only very incomplete answers can be given. Philosophy, though unable to tell us with certainty what is the true answer to the doubts which it raises, is able to suggest many possibilities which enlarge our thoughts and free them from the tyranny of custom. Thus, while diminishing our feeling of certainty as to what things are, it greatly increases our knowledge as to what they may be; it removes the somewhat arrogant dogmatism of those who have never travelled into the region of liberating doubt, and it keeps alive our sense of wonder by showing familiar things in an unfamiliar aspect. 사실상 철학의 가치란 것은 주로 그것의 바로 그 불확실성에서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에 대해 맛조차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일반 상식, 그의 나이가 혹은 그의 국가에 속하는 습관적 믿음들, 그리고 그의 신중한 이성의 협력이나 인가 없이 그의 마음 안에서 자라난 사견들로부터 유래한 편견들에 갇힌 삶을 살아간다. 그러한 사람에게 세계는 분명하고, 유한하며, 명백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공통의 대상들은 아무런 의문점들도 일으키지 않고, 낯선 가능성들은 경멸적으로 거부당한다. 반대로 우리가 철학화하기 시작할 수록 우리는 우리가 여는 장들에서 보았던 것처럼 가장 일상적인 것들조차 오직 극히 불완전한 답변들만 주어질 수 있는 문제들로 이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철학은 철학이 일으키는 그러한 의심들에 대해 무엇이 참된 답인지 우리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도록 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생각들을 확장시키고 그러한 생각들을 관습의 독재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여러 가능성들을 제시할 수 있다. 그래서, 사물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확실성에 대한 우리의 느낌을 약화시키는 동안, 그것은 그것들이 무엇일지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엄청나게 증대시킨다. 그것은 자유로운 의심의 영역으로 탐험해 본 적이 없는 그러한 이들의 어떤 오만한 독단주의를 제거시키고, 친숙한 것들을 낯선 면모에서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호기심 살아있도록 한다.
8) Apart from its utility in showing unsuspected possibilities, philosophy has a value - perhaps its chief value - through the greatness of the objects which it contemplates, and the freedom from narrow and personal aims resulting from this contemplation. The life of the instinctive man is shut up within the circle of his private interests: family and friends may be included, but the outer world is not regarded except as it may help or hinder what comes within the circle of instinctive wishes. In such a life there is something feverish and confined, in comparison with which the philosophic life is calm and free. The private world of instinctive interests is a small one, set in the midst of a great and powerful world which must, sooner or later, lay our private world in ruins. Unless we can so enlarge our interests as to include the whole outer world, we remain like a garrison in a beleaguered fortress, knowing that the enemy prevents escape and that ultimate surrender is inevitable. In such a life there is no peace, but a constant strife between the insistence of desire and the powerlessness of will. In one way or another, if our life is to be great and free, we must escape this prison and this strife. 예측하지 못한 가능성들을 보여줌에 있어서의 그 유용성과 별개로, 철학은 - 아마도 철학의 최고의 가치인 - 철학이 숙고하는 대상들의 중요성을 통해서, 그리고 이러한 심사숙고로부터 기인하는 협소하며
사적인 목적들로부터의 자유를 통해서, 하나의 가치를 지닌다. 본능적인 인간의 삶은 아마도 가족과 친구들이 포함될 그의 사적인 관심사들의 원환 안에 닫힌 채이다. 그러나 그 바깥의 세계는 본능적 소망들의 원환에 딸려 있는 것을 돕거나 방해할지 모르는 그러한 것을 제외하고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러한 삶에는, 철학적 삶이 안정되고 자유로운 것에 비하자면 과열되고 꽉 막힌 어떤 것이 있다. 본능적 관심사들의 사적인 세계는, 조만간 우리의 사적인 세계를 파괴시킬 것임에 틀림없는 위대하고 강력한 세계의 한가운데에 놓인 자그마한 하나의 세계이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흥미들을 외부 세계 전체를 포함하는 것과 관련하여 확장시킬 수 없는 한, 우리는, 적들이 퇴로를 막고 있으며 궁극적인 투항이 불가피함을 알면서 포위된 요새의 군사들과 같이 남는다. 그러한 삶에는 아무런 평화도 없이 욕망의 주장과 의지의 무력함 사이의 끝없는 다툼만이 있다. 어떤 식으로든, 만일 우리의 삶이 훌륭하고 자유로운 것이려면,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감옥과 이 다툼으로부터 달아나야만 한다.
9) One way of escape is by philosophic contemplation. Philosophic contemplation does not, in its wides survey, divide the universe into two hostile camps - friends and foes, helpful and hostile, good and bad - it views the whole impartially. Philosophic contemplation, when it is unalloyed, does not aim at proving that the rest of the universe is akin to man. All acquisition of knowledge is an enlargement of the Self, but this enlargement is best attained when it is not directly sought. It is obtained when the desire for knowledge is alone operative, by a study which does not wish in advance that its objects should have this or that character, but adapts the Self to the characters which it finds in its objects. This enlargement of Self is not obtained when, taking the Self as it is, we try to show that the world is so similar to this Self that knowledge of it is possible without any admission of what seems alien. The desire to prove this is a form of self-assertion and, like all self-assertion, it is an obstacle to the growth of Self which it desires, and of which the Self knows that it is capable. Self-assertion, in philosophic speculation as elsewhere, views the world as a means to its own ends; thus it makes the world of less account than Self, and the Self bounds to the greatness of its goods. In contemplation, on the contrary, we start from the not-Self, and through its greatness the boundaries of Self are enlarged; through the infinity of the universe the mind which contemplates it achieves some share in infinity. 도피의 한 가지 방법은 철학적 숙의에 의한 것이다. 철학적 숙의는 넓은 조망에서 우주를 두 가지 적대적 진영들로 - 친구들과 적들, 도움이 되는 쪽과 적대적인 쪽, 좋음과 나쁨 - 가르지 않는다. 그것은 전체를 치우침 없이 바라본다. 철학적 숙의는, 그것이 다른 것과 뒤섞이지 않을 때, 우주의 나머지가 인간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모든 지식의 습득은 자아의 확대이고,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직접적으로 추구되지 않을 때에 가장 잘 획득된다. 그것은, 미리 그 대상들이 이러저러한 성격을 가져야 하리라 바라지 않고, 자아를 그것이 그것의 대상들에게서 발견하는 성격들에 맞추는
그러한 연구에 의해서, 지식욕만이 홀로 작동할 때 얻어진다. 자아를 있는 그대로 취하면서 세계가 어떤 이질적인 그런 것의 어떤 승인도 없이 그 세계에 대한 지식이 가능한 이 자아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우리가 보여주고자 노력할 때 이러한 자아의 확장은 획득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증명하려는 욕망은 자기주장의 한 형태이고, 모든 자기주장이 그러하듯, 그것은 자아가 욕망하는, 그리고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성장에 걸림돌이다. 자기주장은 여느 곳에서나 마찬가지로 철학적 사변에 있어서도 세계를 그 자신의 고유한 목적들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세계를 자아보다 덜 중요하게 여기며, 자아를 그 세계의 이익들의 훌륭함에 묶는다. 반대로 숙의에 있어서 우리는 비아(非我)로부터 출발하고, 그 비아의 거대함을 통하여 자아의 경계들이 확장된다; 우주의 무한성을 통해서 우주를 숙고하는 정신은 무한성의 어떤 참여를 성취한다.
10) For this reason greatness of soul is not fostered by those philosophies which assimilate the universe to Man. Knowledge is a form of union of Self and not-Self; like all union, it is impaired by dominion, and therefore by any attempt to force the universe into conformity with what we find in ourselves. There is a widespread philosophical tendency towards the view which tells us that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that truth is man-made, that space and time and the world of universals are properties of the mind, and that, if there be anything not created by the mind, it is unkowable and of no account for us. This view, if our prvious discussions were correct, is untrue; but in addition to being untrue, it has the effect of robbing philosophic contemplation of all that gives it value, since it fetters contemplation to Self. What it calls knowledge is not a union with the not-Self, but a set of prejudices, habits, and desires, making an impenetrable veil between us and the world beyond. The man who finds pleasure in such a theory of knowledge is like the man who never leaves the domestic circle for fear his word might not be law. 이러한 이유로 영혼의 위대함은 우주를 인간에 동화시키는 그러한 철학들을 통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지식은 자아와 비아의 통일의 한 형태이다; 모든 통일체와 마찬가지로, 지식은 권역에 의해 손상되며, 그러므로 우주를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서 발견한 것에 순응하도록 강제하고자 하는 그 어떠한 시도에 의해서든 손상된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며, 진리는 인공의 것이고, 공간과 시간과 보편자들의 세계는 정신의 특징들이라고, 또 만일 그 어떤 것이든 정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없다면, 그것은 불가지한 것이며 우리에게 고려되지 않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관점을 향하는 철학적 경향이 만연해 있다. 이러한 관점은 만일 우리의 아선 논의들이 정확했다면, 틀렸다. 그러나 틀린 것에 덧붙여서, 그 관점은 철학적 숙의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결과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숙고를 자아에 속박시키기 때문이다. 그 관점이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비아와의 통일체가 아니라, 우리와 세계 사이 저편에 헤쳐낼 수 없는 장막을 드리우는 일련의 편견들, 습관들, 욕망들이다. 지식에 대한 그러한 이론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 그런 사람은 그의 말이 법칙이 아닐 것이 두려워 가족의 울타리를 결코 떠나본 적 없는 사람과 같다.
11) The true philosophic contemplation, on the contrary, finds its satisfaction in every enlargement of the not-Self, in everything that magnifies the objects contemplated, and thereby the subject contemplating. Everything, in contemplation, that is personal or private, everything that depends upon habit, self-interest, or desire, distorts the object, and hence impairs the union which the intellect seeks. By thus making a barrier between subject and object, such personal and private things become a prison to the intellect. The free intellect will see as God might see, without a here and now, without hopes and fears, without the trammels of customary beliefs and traditional prejudices, calmly, dispassionately, in the sole and exclusive desire of knowledge - knowledge as impersonal, as purely contemplative, as it is possible for man to attain. Hence also the free intellect will value more the abstract and universal knowledge into which the accidents of private history do not enter, than the knowledge brought by the senses, and dependent, as such knowledge must be, upon an exclusive and personal point of view and a body whose sense-organs distort as much as they reveal. 반대로 참된 철학적 숙고는 비아의 모든 확장에서, 숙고된 대상들을 확대시키는 모든 것들에서, 그리고 그로써 주체가 숙고하는 것 전부에서 만족을 얻는다. 숙고에 있어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모든 것, 습관, 사익, 또는 욕망에 의존하는 모든 것은 그 대상을 왜곡시키고, 그러므로 지성이 추구하는 통일체를 손상시킨다. 그리하여 주체와 객체 사이에 장벽을 만듦으로써, 그러한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들은 지성의 감옥에게 감옥이 된다. 자유로운 지성은, '여기'와 '지금' 없이, 희망들과 두려움들 없이, 관습적 믿음들과 전통적 편견들의 구속들 없이, 평온하고, 평정하게, 오로지
전적으로 지식 - 비개인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순수하게 사색적인 것으로서,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서 - 에 대한 욕구 안에서 신이 볼 그러한 것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자유로운 지성은 개인사의 사건들이 침범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을 감각에 의해 제공되고, 그러한 지식이 틀림없이 그러하듯 배타적이며 개인적인 관점과 밝혀내는 만큼 왜곡시키기도 하는 감각기관들을 지닌 육체에 의존하는 그러한 지식보다 더욱 가치있게 여길 것이다.
12) The mind which has become accustomed to the freedom and impartiality of philosophic contemplation will preserve something of the same freedom and impartiality in the world of action and emotion. It will view its purposes and desires as parts of the whole, with the absence of insistence that results from seeing them as infinitesimal fragments in a world of which all the rest is unaffected by any one man's deeds. The impartiality which, in contemplation, is the unalloyed desire for truth, is the very same quality of mind which, in action, is justice, and in emotion is that universal love which can be given to all, and not only to those who are judged useful or admirable. Thus contemplation enlarges not only the objects of our thoughts, but also the objects of our actions and our affections: it makes us citizens of the universe, not only of one walled city at war with all the rest. In this citizenship of the universe consists man's true freedom, and his liberation from the thraldom of narrow hopes and fears. 철학적 숙의의 자유와 평등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정신은 행위와 감정의 세계에서 동일한 자유와 평등에 속하는 어떤 것을 지켜낼 것이다. 그 정신은 전체의 부분들로서 그 정신의 의도들과 욕망들을 그 나머지 전부가 그 어떤 한 사람의 행위들로도 영향받지 않는 세계의 미미한 파편들로서 그것들을 바라봄으로써 귀결되는 저항의 부재와 함께 보여줄 것이다. 숙고에 있어서 진리를 향한 뒤섞이지 않은 욕망인 그 공평성은 행위에 있어서 정의로운 정신, 그리고 감정에 있어서 모두에게 주어질 수 있는 보편적 사랑인 정신과 매우 동일한 질이고 유익하거나 존경스럽다고 판단된 이들에게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숙고는 우리 사유의 대상들만이 아니라 또한 우리 행위들과 우리의 감성들의 대상들도 확장시킨다. 그것은 우리를 세계시민으로 만들며, 그저 다른 모든 세계와 맞서는 고립된 도시의 시민에 그치도록 하지 않는다. 이러한 세계시민성 안에는 인간의 참된 자유, 그리고 그의 협소한 희망들과 두려움들의 예속상태로부터의 해방이 자리한다.
13) Thus, to sum up our discussion of the value of philosophy; Philosophty is to be studied, not for the sake of any definite answers to its questions, since no definite answers can, as a rule, be known to be true, but rather for the sake of the questions themselves; because these questions enlarge our conception of what is possible, enrich our intellectual imagination and diminish the dogmatic assurance which closes the mind against speculation; but above all because, through the greatness of the universe which philosophy contemplates, the mind also is rendered great, and becomes capable of that union with the universe which constitutes its highest good. 그래서 철학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철학은 연구되어야 할 것이며, 하나의 법칙처럼 어떠한 한정된 대답들도 참인 것으로 알려질 수 없기 때문에 철학의 물음들에 대한 어떤 한정된 대답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물음들 그 자체들 때문에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물음들은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키고, 우리의 지적 상상력을 풍요롭게 하며 사색으로부터 정신을 폐쇄시키는 독단적 확언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학이 숙의하는 우주의 광대함을 통하여 정신도 또한 위대해지며, 그 세계의 최상의 선으로 여겨지는 세계와의 통일체가 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Dieser Grundsatz,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nun zwar
selbst identisch, mithin ein analytischer Satz, erklärt aber doch eine
Synthesis d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n als notwendig,
ohne welche jene durchgängige Identität des Selbstbewußtseins nicht
gedacht werden kann. Denn durch das Ich, als einfache Vorstellung, ist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n der Anschauung, die davon
unterschieden ist, kann es nur gegeben und durch Verbindung in einem
Bewußtsein gedacht werden. Ein Verstand, in welchem durch das
Selbstbewußtsein zugleich alles Mannigfaltige gegeben würde, würde
anschauen; der unsere kann nur denken und muß in den Sinnen die
Anschauung gegebenen Vorstellungen, weil ich sie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nenne, die eine ausmachen. Das ist aber so viel, als, daß
ich mir einer notwendigen Synthesis derselben a priori bewußt bin,
welche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heißt,
unter der alle mir gegebene Vorstellungen stehen, aber unter die sie
auch durch eine Synthesis gebracht werden müssen. → 통각의 필연적 통일이라는 이러한 원칙은 이제 더욱이 자기동일적이고, 따라서 분석적 명제이지만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들의
종합을, 그것 없이는 자기의식의 저 보편적 동일성이 생각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해명한다.→ 왜냐하면 단일한 표상으로서 나라는
것을 통하여 아무런 잡다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는 상이한 직관 안에서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 오로지 결합을 통해서만 잡다는 주어지고 생각될 수 있다.→ 그 안에서 자기의식을 통하여 동시에 모든 잡다들이 주어질 어떤
지성은 직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성은 단지 감각 안에
직관으로 주어진 표상들을 사유할 수 있을 뿐이며 감각 안에서 그 직관을 찾아야만 한다. →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동일한 나로
의식된다, 직관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와 관련해서, 왜냐하면 나는 그 표상들을
모두
하나의 표상을 형성하는 나의 표상들이라고 명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이라 불리우는
그러한 하나의 필연적인 종합을 선험적으로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표상들이 그 종합 아래에 존립하지만, 그 표상들은 또한 하나의 종합을 통해 그 아래에 놓여야만 한다.
Dieser Grundsatz,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ist nun zwar
selbst identisch, mithin ein analytischer Satz, erklärt aber doch eine
Synthesis des in einer Anschauung gegebene Mannigfaltigen als notwendig,
ohne welche jene durchgängige Identität des Selbstbewußtseins nicht
gedacht werden kann. 통각의 필연적 통일이라는 이러한 원칙은 이제 더욱이 자기동일적이고, 그러므로 분석적 명제이다, 그러나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들의 종합을 필연적인 것으로 해명한다, 그것 없이는 자기의식의 저 보편적 동일성이 생각될 수 없는. → 통각의 필연적 통일이라는 이러한 원칙은 이제 더욱이 자기동일적이고, 따라서 분석적 명제이지만 직관 안에 주어진 잡다들의
종합을, 그것 없이는 자기의식의 저 보편적 동일성이 생각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해명한다. Denn durch das Ich, als einfache Vorstellung, ist
nichts Mannigfaltiges gegeben; in der Anschauung, die davon
unterschieden ist, kann es nur gegeben und durch Verbindung in einem
Bewußtsein gedacht werden. 왜냐하면 단일한 표상으로서 나라는 것을 통하여 아무런 잡다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상이한 직관 안에서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결합을 통해서만 오로지 주어지고 생각될 수 있다. → 왜냐하면 단일한 표상으로서 나라는 것을 통하여 아무런 잡다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는 상이한 직관 안에서 하나의 자기의식
안에 오로지 결합을 통해서만 잡다는 주어지고 생각될 수 있다. Ein Verstand, in welchem durch das
Selbstbewußtsein zugleich alles Mannigfaltige gegeben würde, würde
anschauen; der unsere kann nur denken und muß in den Sinnen die
Anschauung suchen. 한 지성은, 그 안에서 자기의식을 통하여 동시에 모든 잡다들이 주어질, 직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성은 단지 감각 안에 직관으로 주어진 표상들을 사유할 수 있을 뿐이며 감각 안에서 그 직관을 찾아야만 한다. → 그 안에서 자기의식을 통하여 동시에 모든 잡다들이 주어질 어떤 지성은 직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성은 단지 감각 안에
직관으로 주어진 표상들을 사유할 수 있을 뿐이며 감각 안에서 그 직관을 찾아야만 한다. Ich bin mir also des identischen Selbst bewußt,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der mir in einer Anschauung gegebenen Vorstellungen, weil
ich sie insgesamt meine
Vorstellungen nenne, die eine ausmachen.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동일한 나로 의식된다, 직관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와 관련해서, 왜냐하면 나는 그 표상들을 모두 하나의 표상을 형성하는 나의 표상들이라고 명명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 동일한 나로 의식된다, 직관 안에서 나에게 주어진 표상들의 잡다와 관련해서, 왜냐하면 나는 그 표상들을 모두
하나의 표상을 형성하는 나의 표상들이라고 명명하기 때문이다. Das ist aber so viel, als, daß
ich mir einer notwendigen Synthesis derselben a priori bewußt bin,
welche die ursprüngliche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heißt,
unter der alle mir gegebene Vorstellungen stehen, aber unter die sie
auch durch eine Synthesis gebracht werden müssen.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이다, 내가 나에게 하나의 필연적인 종합으로 선험적으로 의식된다는 것,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이라 불리우는, 그 아래에서 나에게 주어진 모든 표상들이 존립하는, 그러나 그 아래로 그 표상들이 또한 하나의 종합을 통해 놓여야만 하는. → 그러나 그것은 내가 통각의 근원적인 종합적 통일이라 불리우는 그러한 하나의 필연적인 종합을 선험적으로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모든 표상들이 그 종합 아래에 존립하지만, 그 표상들은 또한 하나의 종합을 통해 그 아래에 놓여야만 한다.
1) 플라톤 『에우튀프론』의 독자들은 전형적으로 에우튀프론의 경건(εὐσέβεια)에 대한 다섯 가지 정의 시도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적 검토에 주의를 집중한다 (1) 경건은 누구든지 부정의를 저지른 자에 맞서 소송을 거는 일이다(5d-6e), (2) 경건은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다(6e-9d), (3) 경건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다(9e-11b), (4) 경건은 신들이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산물을 산출하도록 봉사하는 올바름의 부분이다(11e-14b), (5) 경건은 기원과 제사의 기술이다(14b-15c). 그러나 이러한 논증적 사건들이 그 대화의 명백한 철학적 실체를 아주 잘 구성한다 할지라도 , 만일 우리가 그것들과 더불어 그 대화의 전반적인 의미까지 모두 충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대화의 참가자들을 몰아가는 그 복잡한 동기들을 또한 신중하게 철저히 검토 해 마땅하다. 플라톤 자신이 이런 종류의 검토를 유발시키길 바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상하게 복잡하고 긴 극적 도입부를, 거칠게 말해서 그 대화편 길이의 3분의 1에 달하는 그런 도입부(그 주제들이 연이은 경건으로의 탐구를 끊임없이 알리는)를 내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 도입부의 가장 혼란스럽고 아직 논의가 덜 된 요소들 중 하나를 꽤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에우튀프론의, 그가 그의 아버지를 그의 아버지가 저질렀다고 그가 상상하는 그런 종류의 살인들에 수반되는 μίασμα - 더러움 - 때문에, 그리고 공정한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고소함에 있어서 정당화된다는, 그 단언이다(4b7-c3). 이 논문에서 나는 이러한 호소에 대한, 에우튀프론이 생각되어 왔던 것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진보적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나 또한 『에우튀프론』이 간접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법률적 변호의 역할을 하는 방식을 새로이 조명하는 한 가지 새로운 설명을 주장하고자 한다.
2) 『에우튀프론』의 도입부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첫번째 부분은 곧 있을 소크라테스의 공판을 소개하는 것이고 두번째 부분은 에우튀프론 자신의 송사를 상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 의도에 맞추어 나는 다음과 같이 가정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한다. 이 첫번째 부분와 뒤따르는 부분에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동기들을 에우튀프론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완전히 고결하며, 『변론』의 소크라테스에 의해 공언된 동기들(예를 들어 『변론』 22e-23b, 29c-31c)과 동일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그것,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의 탐구(15c-16a)가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이 사업이 그 자체로 즐겁고 (주장컨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복'; 『변론』 41c3-4) 경건할 뿐만 아니라, 경건이 '남은 삶을 더욱 나은 삶이도록' 허용하리라는 것을(15e7-16a4), 특히 그것의 지속이 불경의 습격에 의해 위협받을 것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b-d, 5a-c, 12e, 15e-16a).
3) 자연스럽게, 일부 주석가들은 철면피스러운 위선과 뒤엉킬 그러한 표현들을 발견했다. 존 베버스루이스에 따르자면 예를 들어 허세가 심하고 답답하며 패륜아에 '나치청년단에서도 꽤나 잘 나갔을' 광신교도로서 에우튀프론의 전형적인 성격은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검토가 실제로 얼마나 모욕적이고 모자란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주목으로부터 주의를 떼어 놓았다. 우리가 이야기하게 되는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적합한 정의에 대한 그의 기이한 원리를 가지고 에우튀프론을 압도하고(5c-d, 6d-e) 다음으로 이해가 아닌 단지 문자적 동의에 불과한 것을 바탕으로 궤변적으로 그를 두들긴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은 즐거울지는 모르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러므로 에우튀프론의 영혼을 불경하고 부정의하며 위선적으로 외면한 죄가 있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베버스루이스, 184). 오히려, 베버스루이스께는 죄송하게도 (176, 184), 그것은 대화편 말미에서 법정 소환 전에 에우튀프론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고, 그래서 그로써 그가 그의 잘못 세워진 소송을 몰수당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플라톤이 일조하는 데에 가장 극적으로 효과적으로 보인다(후기 전통이 그러하듯이; D.L.2.29).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전략은 에우튀프론이 잠재적으로 행위방식을 훼손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만류함으로써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친족들에게 유익하다. 이 모든 것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지금 초점을 맞추려는 에우튀프론이다.
4)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소크라테스와 에우튀프론의 우연한 만남보다 5년 앞서 에우튀프론의 소작인 중 하나(ὁ πελάτης)가 그의 가문 노예들 중 하나(ὁ οἰκέτης)를 술에 취해 홧김에 죽였다. 에우튀프론의 아버지는 그 살인자를 묶었고 구덩이에 내던졌다. 그리고 - 그 일꾼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 아테네 종교적 조언가들(ἐξηγηταί) 중 하나로부터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조언을 기다리는 동안 그 살인자를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 일꾼은 배고픔과 추위로 죽었다. 이에 대하여 에우튀프론이 이제 아르콘 바실레우스 앞에 에우튀프론의 아버지에 대하여 살인죄로 소송을(δίκη φόνου) 가져오는데, 그의 아버지와 그 자신(그리고 짐작컨데 그의 친족들) 모두를 그가 이런 종류의 부정의한 죽임을 곁에 있으면서 본 μίασμα에 대해서 정화하기 위해서이다(4b-e).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이 이야기에 놀란다. 그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음으로써 에우튀프론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데(μαίνεσθαι, 4a1), 왜냐하면 남을 위해 가족을 고소한다는 것은(만일 실제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아래를라) 가장 드문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1)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그것들의 예시들에 우선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있다는 주장에 반대하여 영향을 미친다. 로스 교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의 발전에 있어서 '내재로부터 떠나 초월로 향하는 일반적 변동이 있다. 초기에 거의 모든 것들이 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해 왔다. 그는 후기 대화편들에서 특수자들은 결코 충분하게 그것들의 꼴들을 예시하거나 예증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주장한다; 특수자들은 오로지 그 꼴들을 흉내낼 따름이다. 그러나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은 '특수자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꼴은 그것들 안에 "현존한다"; 그것은 장인에 의해 "그것들 안에" 정위된다; 꼴은 그 예시들에게 '공통적'이다; 특수자의 경우에는 꼴을 "지니거나" 그 꼴에 "관여한다".
2) 이 주장의 힘은 '내재'의 의미에 달려 있다. 로스 교수가 인용하는 모든 표현들은 그리스어에서 추상명사들과 함께 정말로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한 행위에 올바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한 행위가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의 단순히 또 다른 방식, 그리고 이상적 방식일 따름이다. 꼴들은 추상 명사들의 의미들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들의 사용은 형이상학적으로 자연스럽다: 만일 꼴들이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는 주장이 언어적 용법의 사실들을 요약할 따름이라면, 그 주장은 참이지만,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가 관련되는 한에서는 무의미한 주장이다.
3) 다른 한편, 만일 '내재'라는 것이 언어의 특정 용례를 포괄하는 말일 따름이라기 보다는, 꼴들의 존재론적 지위에 속한 것으로 취해진다면, 초기 대화편들의 언어에 대한 로스 교수의 호소는 꼴들이 내재적이라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못할 것이다. 내재의 이 비일상적 의미를 그것의 추정적 반대로, 초월성이란 말로 한정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꼴들이 어떤 전문적 의미에서 사물들 '안에' 있다는 주장은 그것들이 '떨어져' 있다거나 '따로' 있다는 것에 대한 부정으로 대체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로스 교수는 내재와 초월을 모순으로서 다루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플라톤이 '안에'라는 것을 장소로 사용하고 그것의 동종적인 것들을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에서, 바로 그가 초기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로스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유일하게 가능한 결론은, 그[플라톤]가 그 중 어느 표현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반면, 그는 그 둘 모두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진리에 접근할 아무런 방법도 보지 못했다는 것일 듯하다. 그 하나는 보편개념과 그것의 특수자들 사이의 관계의 친밀성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모든 특수자들 각각이 어떤 보편자에 대해서도 완벽한 예증이 되는 데에 실패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그 관계가 완전히 특유하고 정의하기 어렵다는 것조차 눈치챘었을 것이다. '분유'와 '모사' 모두 그에 대한 은유들이고, 그 두 가지 상호보완적인 은유들의 사용은 그 둘 중 하나만의 사용보다는 더 낫다.
그 결론은 따르기 어렵다. 만일 예증이 그 자체의 유에 속하는(특유한) 관계라면, 어떠한 분석도 불가능하고 어떠한 분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모사'와 '분유'는 그에 대한 유용한 은유이기 어렵다; 은유는 어떤 종류의 유비적 관계성을 수반하고, 여기에는 유추를 위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분유'는 '모사'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정확히 일상적으로 추상명사들과 함께 사용되기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전혀 은유가 아니라는 것이 덧붙여질 것이다. 그러나 내재가 초월의 부정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고 로스 교수는 어디에서도 그 용어에 그 자체의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한다.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은 그것들을 모사하는 예시들에 의해 오로지 불충분하게만 예증된다는 것은 참이면서 중요하기도 하다; 그리고 어째서 그 문제들에 대한 그 진술이 만일 누군가 선택한다면 '초월'이라 불리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러나 어떠한 독립적 의미도 '내재'에 할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그 주장이 그 꼴들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설명을 의미한다면 참도 거짓도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는 로스 교수의 주장에 덧붙지 않는다.
4) 그 문제의 참은 꼴들이 강한 의미에서 후기에서 만큼이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그것들의 예시들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들은 '따로' 존재한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의 꼴들에 대한 이론과 후행했던 이론들 사이의 차이점은 분리에 대한 사실로 구성되지 않고, 분리가 생각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중기 대화편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변경된 추정, 꼴들이 있는 방식에 대한 이론으로 전환된 추정을 제시한다.
『파이돈』에서의 분리
1) 분리의 주제는 『파이돈』에서 처음으로 감각과 반성 사이의 대조를 통해 소개된다. 소크라테스는 올바름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이 오로지 그 자체로 있고 또한 아름다움과 좋음도 그러하다는 시미아스의 논증을 유도해 냄으로써 시작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런 것들이 시각이나 여타의 감각들에 의해 파악될 수 없고 오로지 순수한 사유 그 자체만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감각은 앎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반성보다 하위에 놓인다(『파이돈』65d-e).
2) 자연스러운 확장에 의해 이 설명은 하나의 추론을 불러일으킨다: 감각의 대상들은 반성의 대상들보다 하위에 놓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파이돈』에서 상기에 대한 두번째 논증의 핵심이다. 그 논증의 첫번째 가정은 같음의 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74a-b):
내 생각에 우리는 어떤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군 - 난 막대기가 막대기와 같다거나 돌이 돌과 같다거나 그런 종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을 넘어서서 저편에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네만 - 같음 그 자체 말일세.
그리고 나서 그 같음과 감각적인 같음이 ἕτερα ὄντα, 상이한 종류의 것들임이 드러난다; 왜냐하면 감각적인 같음들은 하나에 대해서만 같음을 입증할 뿐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고, 사실 정말로 같은 것들은 같지 않을 수도 없을 뿐더러 같음은 같지 않음일 수 없기 때문이다(74b-c). 그래서 같음은 그 같음이 같지 않음에 의해 같아질 수 없다는 점에서 같은 것들과는 다르고, 그러나 실상 감각적 같음들은 또한 같지 않을 것이다.
3) 같음이 그것의 감각적 사례들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님을 보였을 때, 『파이돈』은 다음으로 계속해서 그것들의 관계를 특징지운다. 감각적 같음들이 같음이 같은 것처럼 같지는 않고, 그것이 그러한 것인 그런 종류의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동의된다; 그것들은 또 다른 종류의 것으로서 그러한 종류의 것인 것이기를 바라지만, 그것에 대해 하위에 자리한다; 그것들은 그 같음과 유사하지만, 그것에 대한 측면에서는 부족하다(74d-e). 그러나, 우리가 이 결핍을 재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자체 안에서 그 자체에 대해 같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가졌다는 것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75b):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여타의 어떤 감각들을 사용하기 시작함에 앞서서, 우리는 반드시 같음 그 자체는 무엇인지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었어야만 하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 같음들을 그 대상들에 귀속시킬 수 있다면 말이지. 그러한 모든 것들이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이기를 애쓰고 있으나 그것에 대해 하위에 있다는 근거에서 말일세.
그래서 말하자면 우리는 같음에 대한 우리의 앎을 감각적 같음들로부터 추상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의 결핍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반드시 감각적 같음들이 같음들임을 재인하기 위해 그러한 앎을 가져야만 한다. 동일한 설명이 75c-d에 대해 유효하다:
더 크거나 더 적은 그런 종류의 모든 것들은, 우리의 논증이 같음에 대해 아름다움 그 자체, 좋음 자체, 올바름, 경건에 대해서, 그리고 한 마디로 우리의 변증에 있어서 우리가 실재의 보증을 재가하는 그러한 모든 것들에 대해보다 조금도 덜 적용되지 않기 때문일세.
반성에 대한 감각의 하위성은 지성적 꼴들에 대한 감각적 예시들의 하위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4) 여기에서 분리는 명백하게 비동일성, 독립성, 또는 우선성 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을 필요로한다. 그것은 꼴들에 대한 예시들이 꼴들에 대한 불완전한 모사들 또는 유사물들이라는 주장을 필요로 한다. 블라스토스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모사 이론을 필요로 한다. 그 이론에 자연스러운 귀결로 감각적인 것들과 꼴들은 그것들의 실재성의 정도에 있어서 다르다는,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보다 더욱 실재적이라는 이론이 나중에 결합되었다.
두 세계
1) 『파이돈』은 계속해서 감각적 대상들과 지적 대상들을 두 세계, 가시계와 비가시계에 대한 원칙으로 전개시켜 나아간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것을 알고, 지성적 영혼은 그 영혼의 앎의 대상들, 영원한 것들에 가깝다. 가시계의 대상들, '그것이 실재인 뒤에 이름지어지는 그러한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필멸의 영역에 있고, 서로에 대한 면으로나 그 자체들에 대한 면으로나 결코 동일하지 않다. 반대로, 그것의 현존에 대한 실재성을 우리가 묻고 답하는 속에서 설명해 내는 꼴들은 언제나 동일한 것들에 대한 측면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본성에 있어서 단일하며 오로지 그것들 자체만으로 현존하고 변화를 허용하는 그 어떠한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도 결코 속하지 않는다(78d-79b).
2) 『국가』에서 두 세계는 앎의 세계와 사견의 세계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거기에서 철학자, 지혜의 구애자를 정의하는 일을 떠맡고, 그를 그와 표면적으로만 유사한, 아름다운 볼 것들과 들을 것들의 구애자와 구별하는 일에 착수한다. 그 논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을 전제함으로써 시작한다(Ⅴ, 475e-476a):
나는 자네가 나와 이 점에 있어서,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추함에 반대이고, 그것들은 두 가지의 것들이라는 점에 동의하리라 믿는다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들의 각각은 하나라는 것도 말일세. 같은 것들은 올바름과 그릇됨, 좋음과 나쁨, 그리고 모든 특성들에 대해 참일세. 각각의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지만, 행위들과 신체들과 각기 다른 것을 가지고 교류를 통하여, 각각은 많은 곳들에서 나타남으로써 많은 것들로 드러나지.
그것은 시각적인 것들과 청각적인 것들의 구애자들로부터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을 구분하는 아름다움의 꼴에 대한 인식이다.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꿈으 꾼다는 것은 어떤 것 같은 것을 단순히 그런 것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닮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철학자는, 그가 아름다움과 그것에 참여하는 사물들 사이의 구별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깨어 있고 또 꿈꾸고 있지 않으며, 단지 사견이 아니라 앎을 가진다(476c-d).
3) 이 닮음은 실재성의 정도들을 시사한다. 완전히 알 수 있는 어떤 것은 완전히 실재적이다(476e-477a). 그래서 만일 있으면서도 있지 않은 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실재와 전적인 비실재 사이에 놓일 것이다. 앎은 실재하는 것에 상응하기 때문에, 그리고 무지는 비실재에 상응하므로, 우리는 만일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중간인 어떤 것이 있다면 앎과 무지 사이의 중간인 어떤 것이 있다고 기대해야만 한다. 이것은 사견이거나 믿음이다; 왜냐하면 사견은 무지보다 더욱 선명하고 앎보다는 더 흐릿하기 때문이다 (477a-b). 앎과 사견은, 그것들이 산출하는 정신의 상태에 의해서도 그것들의 대상들에 의해서도 구별되는, 서로 다른 힘들이나 능력들이다 (477c-d). 앎에 의해 산출되는 정신의 상태는 틀릴 수 없는 것이고, 사견에 의해 산출되는 것은 틀릴 수 있는 것이다. 앎의 대상은 실재적인 것이고, 그것의 능력은 실재를 그것이 그것인 바로서 알 수 있는 능력이다; 사견의 대상은 비실재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 비실재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래서 실재와 비실재 사이의 어떤 중간적인 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478a-d).
4) 그 대상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의 현존을 재인하는 이들에게, 그러나, 동일한 것들에 대한 측면에서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 현존하는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부정하는 그러한 이들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어야만 한다 (479a-b):
많은 아름다운 것들 중 어느 것이 또한 추함일 것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인가? 혹은 올바른 것들은 어떤 것이 그릇되지 않은 것인가? 또는 경건한 것들은 어느 것이 불경건하지 않은 것인가? 여러 짝들이 짝들인 만큼이나 양분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큰 사물들은 작다; 가벼운 사물들은 무겁고, 더 이상 반대인 것보다 하나인 것이지 않다. 있다고 이야기되는 이러한 많은 것들 중 각각의 무엇이든, 그것들은 있다고 이야기되지 않는 바로 그만큼일 것이다. …그것들은 모호하고, 그것들에 대해 있는 것으로서든 없는 것으로서든 그 양쪽 모두로서든 둘 다 아닌 것으로서든 고정된 개념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견의 대상들은 감각적이고, 그것들은 완전히 실재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예 없지도 않다.
5) 두 세계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일련의 비율들에 의거한다: 꿈꾸고 있음이 깨어 있음에 맞서듯, 그렇게 사견은 앎에 맞서고, 더 흐릿한 것이 더 분명한 것에, 덜 실재적인 것이 실재적인 것에, 꼴들의 예시들이 꼴들에 맞선다. 『정체』Ⅹ,597a에서 목수는 침대의 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 꼴의 유사물들인 어떤 것을 만드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의 생산품을 완전히 실재적인 것으로 부르는 것은 오류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와 참에 대한 관점에서 흐릿하고, 또렷하지 않고, 미미하기 때문이다.
6) 두 세계는 후기 대화편 『티마이오스』에서 반복된다:
무엇이 언제나 실재이고 아무런 생성도 지니지 않는 그러한 것이고, 또 무엇이 언제나 생성 중이면서 절대로 실재이지 않은 그러한 것인가? 합리적 설명과 함께 사유로써 이해가능한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실재하는 것이다; 반면에 비지성적 감각과 더불어 믿음의 대상인 것은 생겨나고 사라지지만 결코 실재로 있음을 지니지는 못하는 그러한 것이다.
있음은 지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에 맞서듯 생성에 맞선다.
7) 이것은 고도의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중요하게도, 우주에서 가장 높은 것과 인간 영혼에서 가장 깊은 것 사이의 유대를 강조하는 도덕적 종교적 원칙이다. 『향연』에서 구애자는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탐구에 있어서 또 다른 세계로 상승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의 본성과 본질을 묘사함에 있어서 플라톤의 산문이 갑작스럽게 합창 시의 형식으로 주신 찬가들을 터뜨리는 곳에서 알아차렸다(211a-b):
첫째로, 그것은 언제나 있으며 생겨나거나 있게 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라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다.
다시, 그것은 한 측면에서 아름답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아름답지 않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한 순간 아름답고 다른 순간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한 관계에서 아름답고 다른 관계에서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것으로서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아름답고 저기에서는 추한 그러한 것도 아니다.
또 다시 그것은 얼굴과 두 손과 육신의 부분들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드러날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앎으로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논증으로서도 그러하지 않다;
아름다움은 한 마리 짐승 안에서, 또는 지상에서, 혹은 천상에서, 다른 어떤 것 안에서든 그와 같이
어딘가에서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으로서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그 자체인 어떤 것이고,
본성에 있어서 영원히 하나이다.
모든 다른 아름다운 것들은,
그것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그러한 방식으로 그 아름다움을 나누어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더 늘지도 줄지도 않고,
그것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찬가이면서도 형이상학적 서술이다. 플라톤의 문체는 특정한 생각들의 자극 아래에서 빨라진다; 그의 운율들에 대한 두드려대는 박자, 춤추는 박자를 번역상에서 보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 이러한 시야의 높이에 도달한 구애자의 영혼은 완전히 뒤바뀐다 (『향연』212a):
산출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을 통해서만 그 아름다움이 보일 수 있는 그 아름다움을 보는 중에만 그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가 상을 접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탁월함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참된 탁월함을 산출함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양육함에 있어서, 그는 신께 사랑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불멸한다.
출산의 은유는 자연스럽게 『정체』에서 사용된 성교와 결혼의 은유들과 연관을 맺는다:
앎에 대한 참된 구애자는 실재에 전력하도록 타고난 자이고, 사람들이 실재일 것이라 믿는 잡다한 것들 사이에서 머무를 수가 없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인내를 가지고 그가 각각의 것의 본질적 본성을 실재와의 관련으로 인하여 실재를 파악할 수 있는 그의 영혼의 일부를 가지고 발견하기 전까지 희미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그의 길을 고수한다; 그리고 그가 그로써 실재하는 것에 도달하고 그것과의 통일에 들어갔을 때, 이 혼인의 자손은 지성과 진리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앎과 참된 삶과 양식을 발견했을 때, 그는 그의 여정으로부터 휴식하게 된다.
『향연』과 『정체』에서 시야와 부활에 대한 플라톤의 강조는 엘레우시스 제전의 제례에 대한 어떤 유비이다. 그 제례는 풍요와 정화를 기원했고, 마지막 통과의례에서 끝났다. 그곳에서 제물들은 갑작스럽게 작열하는 빛 속에서 숭배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에 드러났고, 숭배자들은 신에 대한 그들의 유대와 그들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9) 두 세계의 원리는 또한 아이스퀼로스의 종교적 시야에 대한 유비를 지닌다:
9-1) 아이스퀼로스의 가장 마지막 작품들에 있어서 관찰가능한 단계에서, 합창의 부분은 여전히 극적이고, 대사와 동등한 중요성에 속한다. 그 두 요소들은 균등하게 균형잡힌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상이한 세계들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로부터 다른 하나로의 이행을 느낄 수 있다. 그 결과는 이제 두 측면들을 지니는 극의 흥미로운 이중성이다. 그 하나는 보편과 영원이고, 다른 하나는 특수와 시간에 제약됨이다.
9-2) 이 현상의 본성은 우리가 희망하기로는 선명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가멤논』을 하나의 삽화로 취한다면 말이다. 이 극에서, 보이는 표현은 어떻게 트로이의 정복자가 귀국하였고 여왕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앞으로 계속되는 단계에서 그 사건들은 특수한 사건들, 설화적 시간과 현실적 공간에 정위된 사건들이다. 그 인물들은 특정 개인들, 신화적이거나 역사적인 인물들이다 - 아이스퀼로스에게는 이에 대해 아무런 차이도 없다 - 그들은 그 순간 살았던 그리고 지상의 그 지점을 디뎠던 이들이다. 그러나 합창곡들에서 그 행위는 시간과 공간 바깥 우주의 계획으로 들어 내어진다. 그래서, 그 무대가 선명할 때 가시적 표현은 시간에 대해 유보되고, 적잖은 고통받는 사로잡힌 필멸자들의 그 일시적 광경을 뛰어 넘어서서, 바로 그 곳에서 그 때, 죄악의 그물 속에서, 장엄한 거리와 무시무시한 윤곽 속에서, 산들보다도 더욱 불변하게, 제우스의 영원한 권고 속에서, 확립된 진실들이 닥쳐 온다. 순간적 격정의 그 맥박은 차츰 잦아든다; 바로 지금 우리를 숨막히는 집중 속에 붙잡아둔 그 인간적 의지들의 충돌과 갈등은 인형극의 규모로 침잠하고 사그라든다; 지속되는 운명의 노래가 피에 사로잡힌 오만, 숙명의 고통으로의 끈질긴 유혹에 이끌린 오만의 주제를 펼친다 하더라도. 마치 합창부에서 불확실한 더 높은 무대 위에서, 배우들의 또 다른 무리가 동시에 더욱 장엄하고 상징적인 극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이 비가시적 장면에서 네메시스와 아테의 격정과 감정(휘브리스와 페이쏘)이 걷는다 - 후기 풍자의 핏기없는 추상들이 아니라, 여전히 초자연적 실재성의 극찬하는 특징들에 덮인. 무시간적 순간에 인간적 삶의 광경에서 제우스의 전능한 두 눈에 알려진 측면에서 장막이 걷힌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떨어질 때, 우리는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 일깨워지고, 정화되고, 고양되며, 평안한 그들의 필멸의 비극으로 되돌아온다.
플라톤과 아이스퀼로스 모두 도덕적 질서, 공통된 세계의 운행들을 관장하는 그 질서의 현존을 단언하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질서를 어떤 의미에서 '분리된' 것으로, 그 자체의 고유한 실재성을 가진 것으로 다룬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그 질서의 요소들은 주로 기하학과 도덕적 탁월함에서 발견되었다;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그 능력들은 동일성과 지혜, 좋음과 아름다움이고 만용과 복수가 아니다. 아이스퀼로스의 사유는 발상들의 동종의 그러나 더 오래된 방식의 계획, 그 뿌리들을 철학보다 오래된, 그리고 아마도 그리스보다도 더 오래된 신화들 속에 지니고 있던 계획 내에서 움직인다.
플라톤 사유의 통일성
1)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은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분리되고, 그 점에서 그 꼴들은 그 예시들과 동일하지 않으며 존재론적으로 그 예시들에 우선한다. 이것은 후기에까지 참인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중기 대화편들은 이 분리를, 결핍과 비실재의 심연으로 갈린 두 세계에 대한 원리를 수반하는 우주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확장시킨다. 이 원리와 결부된 것은 초기 대화편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것과도 다른 종교적 태도이다; 초기 대화편들 어디에서도 꼴 - 어떤 꼴이든 - 이 경배의 적합한 대상이리라 시사되거나 함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와 중기의 대화편들 사이에 꼴들에 대한 이론에 있어서 변화 - 혹은 더 정확하게, 발전 - 가 있다.
2) 이러한 주장은 이 세기의 특히나 두드러지는 플라톤주의자들 중 일부가 주장해 왔던 것처럼, 플라톤의 사유는 통일체라고, 그리고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대화편들에서의 꼴들에 대한 이론은 『파이돈』과 『정체』에서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거부될 것이다. 『에우튀프론』, 『라케스』, 『뤼시스』로부터 도출된 세 가지 주요 문헌들은 이 관점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3) 『에우튀프론』은 꼴들이 기준들로서 사용되리라 전제하고, 기준으로서의 꼴에 대한 정의가 그 꼴의 반대항에 의해 그 꼴이 한정된다는 것을 시사할 수 없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것들은 『파이돈』의 모사이론에 있어서본질적 요소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일론 명제를 확립시켜주지 않는다. 꼴이 기준으로 사용되리라고 말하는 것이 한 가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꼴에 대한 그 꼴의 예증들이 결핍된 사례들인 그러한 꼴이 모범이기 때문에 꼴이 그렇게 사용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모든 예증이 각기 반드시 어떻게든 결핍된 경건이어야만 한다는 아무런 실마리도 없다;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꼴이 그 고유의 반대항에 의해 한정될 수 없다는 주장이고, 꼴의 모든 각각의 예증이 그것과 그것의 반대항 모두에 의해 한정되리라는 주장은 또 다른 것이다. 후자의 주장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유사물의 결핍에 대한 본질적인 것이다.
4) 『라케스』는 앎을, 과거, 현재, 미래에 독립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무시간적으로 만드는 앎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다(198d-199e). 앎의 무시간성은 그 앎의 대상들의 영원성을 수반한다는 것, 그리고 영원성은, 생겨나고 사라지는 사물들의 감소하는 실재성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완전한 실재성을 수반한다는 것이 주장되어 왔다. 이러한 언급은, 만일 건전하다면, 단일론 명제를 뒷받침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앎이 과거, 현재, 미래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무시간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그러므로 반드시 영원한 대상들을 지녀야만 한다는 것과 또 다른 것이다; 플라톤이 이러한 주장들을 초기 대화편들 안에서 연계시켰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
5) 다시, 『뤼시스』가 있다. 거기에서 모든 가치있는 것들은 제일 가치있는 것의 상들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결핍을 시사하는 것으로서 묘사된다. 『파이돈』이 꼴의 각각이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을 나눠 갖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고 주장하듯, 그렇게 『뤼시스』는 '사물들에 대해 가치 있는 어떤 것은 가치 있는 다른 어떤 것 때문이라고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순한 말 바꾸기를 내놓고 있는 듯이 보인다; 정말로 가치있는 것은 그 안에 소위 가치있다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당도하는 그러한 것 자체이다'(『뤼시스』 220a-b)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될 듯이 보이는 것은 이름들 또는 어원의 제일 명칭과 파생 명칭이고, 이것은 두 세계의 원리에 속하는 중요한 언어적 귀결이다. 그러나 『뤼시스』에서 가치 있는 사물들의 제일 가치있는 것에 대한 관계는 꼴들의 예증들의 꼴들에 대한 관계가 아닌데, 왜냐하면 앞선 관계는 후자는 그렇지 않지만 목적들에 대한 수단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지만 그것들은 『뤼시스』에서 치료가 건강을 위해 가치있는 것처럼 경건함을 위해서 경건하지는 않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윤리와 선택의 목표들에 관심을 두지 형이상학에 관심을 갖지는 않는다. 그래서 『뤼시스』는 나중에 『파이돈』에서 꼴들에 적용되었던 이름의 이론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 작품은 『파이돈』의 꼴들에 대한 이론을 전제하지는 않으며, 수단들의 목적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수단들에 귀착되는 그 결핍은 특수자들의 결핍이 아니다. 『고르기아스』(467d)는 『뤼시스』의 요점을 또 다른 방식으로 놓는다: '만일 한 사람이 목적을 위해 어떤 것을 한다면, 그는 그가 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그가 그것을 해서 이루려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6) 일반적으로 꼴들에 대한 이론의 단일론적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에 인용되는 그 세 구절들은 그 설명이 참임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되어야 할 또 다른 논증이 있다. 그것은 플라톤이 설령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중기 이론을 진술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가 그러므로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침묵으로부터 언급으로의 논증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그가 쓸 때마다 매번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다.
7) 이 논증은 만일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이론이 꼴들의 예증들의 결핍과 감소되는 실재성을 시사한다는 것이 보일 수 있다면 더 많은 영향력을 지닐 것이다; 플라톤은 짐작컨데 최소한 우리만큼은 그런 함축들을 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함축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결핍과 감소되는 실재성은 중기 대화편들에서 앎의 문제들과 연관되고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논의되지 않으며, 초기에 견지되는 주장들과 모순되는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들과 연관된다.
8) 그래서 예를 들어 감소되는 실재성에 대한 주장은 『정체』에서 앎의 대상들을 의견의 대상들로부터 구별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바로 그 앎과 의견의 구별은 『메논』(97a-98b)보다 더 앞에 놓이지 않는다; 그리고 앎과 의견이 상이한 대상들을 가진다는 주장은 『메논』에 부재할 뿐만 아니라, 의견은 거기에서 '근거에 대한 숙고'에 의해 앎으로 전환되기 때문에(98a; 85c 참조) 『메논』에 의해 암시적으로 반박된다.
9) 또 다시, 『파이돈』은 꼴들이 현존한다는 주장과 우리의 영혼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주장이 동등하다(76d-e)고 견지하고, 이것의 배경이, 결국 꼴들에 대한 꼴들의 예시들의 결핍에 의존하는 상기의 원리이다. 그러나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서 이루어진 불멸성에 대한 주장들을 받아들이는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 만일 상기론과 결핍의 원리가 참이라면 거의 무시될 수 없는 주장들 - 불가지론자이다. 『변론』(20c-21d)에 있어서, 그의 무죄 선고에 표를 던졌던, 그리고 그의 개인적 관점들을 왜곡시킬 아무런 동기도 가지고 있지 않은 친구들과 동지들에게 말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대해 오로지 다음과 같은 것만을 주장하고자 하고 있다. 죽음을 좋은 것으로 생각할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없음과 의식 없음, 깊고도 꿈조차 없는 잠과 같은 상태이거나 아니면 이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의 이행, 호머의 유행 이후 생각된 그러한 이행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파이돈』에서의 영혼이 불멸하며 죽음 이후에도 '오로지 그 자체로' 존재하리라는 뜨거운 신념으로 빛나는 사람의 말이 아니다.
10) 물론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금자탑의 단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성장과 발전의 단일성, 생명의 단일성이다.
변화를 위한 동기들
1) 만일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이 꼴들의 지위들에 대한 그 대화편들의 평가에 있어서 다르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차이가 설명될 것인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철학적 계기들이 그것을 촉진시켰는가?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 양쪽에서 꼴들은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분리'는, 대화편들의 그러한 집단들 사이에서와 같이 상이한 의미들을 지닌다. 꼴들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예증들로부터 구별되고 그보다 우선하는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그것들은 완전한 실재적 모범들, 그것들에 대해 그것들의 예증들이 결핍되어 있고 덜 실재적 예시들인 그러한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다. 중기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이 답하고자 했던 존재론적 지위들에 대한 물음들이 초기에 물었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 뒤따라야 하고, 이것은 사실 참이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의 설명은 초기대화편들이 직면하지 않았던 인식론의 문제들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그러한 문제들은 회의주의와 선험적 지식을 두고 발생하였다. 그것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에서가 아니라 그러한 변증에 대해서 일어났다; 특히, 그 문제들은 플라톤이 어떻게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꼴들이나 본질들에 대한 탐구로서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을 다루는 데에로 돌아섰을 때 일어났다.
회의주의와 존재론적 지위
1) 솔직한 사람은, 경건함'은 어떤 것이다' 또는 '실재하는 것이다'라고, 또는 그가 그의 행위들의 적절성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그것을 고려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게 됨에 있어서, 확실히 '좋아. 그게 어디 있는데?'라고 말할 것이라 기대된다. 그리고 그 자체로는 충분히 소박한 요구인 위치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진짜 물음을 감추고 있다: 만일 경건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실재성을 지녔는가? 만일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으 어떻게 존재하는가?
2) 이러한 것들은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물음이고, 그러나 그것들은 관계들로서 비동일성이나 우선성을 듦으로써 답변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꼴들, 그것들이 그러한 관계들 안에 존립할 것이라 추정되는 그러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엄밀히 말해서 주어진 어떤 꼴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꼴이어야 할 어떤 것에 대한 물음들이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중기 대화편들의 가장 대단한 단 하나의 혁신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소크라테스가 그가 이전에 행했던 것처럼 특수한 '본질들' 또는 '꼴들'에 대해 어떠한지 묻는 대신에 이제는 '꼴들'의 전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그가 어떤 특수한 '꼴'에 대해서든 그러한 만큼 일반적 '꼴'의 본성에 대해 고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기 대화편들은 일반성의 새로운 단계로 상승한다: 그것들은 그것이 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묻고, 그 물음에 두 세계의 원리를 가지고 답한다.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그 물음은 대답되기는커녕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남는다.
3) 그것은 일어나지 않은 채로 남겨지는데 왜냐하면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비록 전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론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일반 상식과 관련되기 때문이고,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 새로움을 감추는 자연스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예를 들어 정확함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이 있다고 믿고, 그 정확함이 하나의 탁월함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쉽사리 물음에 의해 탁월함인 그러한 어떤 것을 말하고자 시도하는 데에로 이끌릴 것이다. 소크라테스식 취급에 있어서, 이것은 고도로 복잡한 현존 전제, 정확함의 꼴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보편개념이며, 기준이고, 본질이라는 전제의 사용을 수반할 것이다; 만일 이 전제가 충분하다고 생각된다면, 정확함은 정확함의 예증들에 대해 우선할 것으로 그리고 그것들과 동일하지 않을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전히, 그 전체 탐구는 무엇이 정확함인지를 결정하는 데에로 정향될 것이고, 그것이 있는지 아닌지로 향하지 않을 것이다. 논의의 진행은 모호함과 혼동으로부터 선명함으로의 이행으로 드러날 것이고, 보편에 속하는 정확함에 대한 숙고로서 드러나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탐구가 회의적 의심들에 의해 문제시되지 않은 채로 남는 한, 정확함과 같은 그러한 어떤 것이 있다는 상식적인 믿음은, 일반 상식이 소크라테스적 탐구에 의해 본질에 대한 숙고로 향해졌을 때조차,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4) 그 이유는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이, 그것이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때, 지적인 불만족의 표시라는 것이다. 정확함의 위치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 무의미하다는 것은, 즉, 논박되는 그런 것이 있다는 무비판적 전제일 때까지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멈추도록 강제되고 설명을 내놓는다. 일반 상식은 그 설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정확함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 정확한 모든 사람들을 보라. 소크라테스적 탐구가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 변증의 목표는 경건함의 꼴이 현존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또는 그것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목표는 오로지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다 -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다.
5)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꼴들의 현존이 전제되기 보다는 의심받을 바로 때에만, 오직 실재적 정의의 가능성, 그와 함께 변증의 추구가 당연시되기 보다는 도전받을 때 요청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음은 『메논』에서 상기의 원리에 의해 제기된 선험적 앎의 문제에 의해 처음으로 플라톤의 정신에 강제되었다.
회의주의와 선험적 지식
1) 『메논』을 초중기 대화편으로 분류하는 것은 관습적이고 이것이 부당하지도 않다. 그 산문체 형식은 초기의 것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저술의 상기와 영혼불멸에 대한 관심, 그것의 기하학으로부터 빌려온 가설적 방법론의 사용, 그리고 그것의 앎과 의견 사이의 구별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나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주제들에 대한 초기 진술들이다. 이것이 그러하기 때문에, 종종 『메논』이 기원전 387년 플라톤이 첫번째 이탈리아와 시칠리 여행으로부터 아테네로 돌아온 이후에 쓰여졌다고 생각되어 왔다;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그는 타렌툼의 아르퀴타스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피타고라스학파를 이끄는 당대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그러므로 『메논』이, 『파이돈』의 완성된 종합으로는 아직 소화되지 않은 새로운 물음들과 생각들에 대한 자극제를 시사하는 경계적 대화편이라 추측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2) 『메논』은 여러 초기 대화편들이 시작한 것처럼 그렇게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메논은, 그것의 예시들을 구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우튀프론』에서와 같이, 어떤 특성들이 그것과 관련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 특히,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 또는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지 아닌지, 또는 본성에 의해 갖추어져 있는지 아닌지 결정하기 위해서, 탁월함이 무엇인지 말하도록 요청받는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같이, 소크라테스는 재빨리 그의 응답을 당혹스러운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그 논의는 초기에 그러하였듯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 실패한 메논에게, 거기에는 그것을 물음에 있어서 아무런 요점도 없으리라 제안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논증을 요약한다 (80e):
한 사람에게 그가 아는 것에 대해서나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탐구해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그가 아는 것으로 탐구해 들어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알기 때문이고, 탐구의 필요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탐구해 들어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가 탐구해 들어갈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역설은 『에우튀데모스』에서 도입되었던 배움에 대한 바보같은 역설들과 일부 유사성을 지니고,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논쟁술의 일부라고 분류한다(80e). 그러나 그 역설을 소피스트주의라고 일축해 버리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그 역설을 해소하기 위해 『에우튀데모스』에서 하듯 그것의 논리를 교정하고자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상기의 원리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진지한 대답은 진지한 물음들을 시사한다.
3) 어째서 소크라테스가 그 역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그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다. F. H. 브레들리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대상에 대한 결핍, 그리고 더욱이 대상에 대한 추구는 특정한 의미에서 그 대상에 대한 앎을 시사한다. 만일 한 사람이 언제 소유물이 획득되거나 획득되지 않는지 그가 절대로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면 그는 당연히 절대로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추구 속에서 그리고 그 추구에 의해 그는 그 자신을 그 반대되는 가정에 맡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어느 정도 어떤 의미에서 있는 소유물에 달려 있다. 자연스럽게, 나는 처음부터 철학자가 그가 앞서 내놓는 명제들을 지닌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행위가 그가 가정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혹은 만일 요청받는다면 전제할 것이라고, 그가 명제들을 가졌을 때, 그는 그것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들이 그에게 실재성의 이상적 소유물에 두는지 아닌지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철학에서 오로지 회의주의만이 진리가 지금까지 그리고 실제로 도달되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데에 스스로 자신을 가둬두어야만 한다.
메논의 역설은 마라톤 전투의 정확한 일자, 또는 어제 아침식사의 식단에 대한 조사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적 변증에서 관련되는 그런 종류의 탐구에는 관련이 많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정의에 대한 탐구를 고려해 보자. 에우튀프론은 무엇이 경건인지 알았는가? 그러면 그 탐구는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만일 그가 안다면 그는 말할 수 있고, 변증은 시작되기도 전에 성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지하다. 그러나 어째서 그러면 그에게 그것을 정의하는 것을 요청하는가? 무지하기 때문에, 그는 소크라테스적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다른 대답보다 더 적절하다는 결정을 내리기 위한 아무런 근거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그가 언제 옳은 대답에 닿았는지 혹은 잘못된 것을 내놓았는지 말할 아무런 기준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변증은 그것이 진실 이후 응답자들의 고유한 노력들에 의존하기 때문에, 단지 어둠 속을 더듬거리게 되고, 탐구의 긴장은 끊겨 버린다.
4) 메논 역설의 압박은 꼴들이 기준들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 의해 경감되기 보다는 오히려 증대된다. 경건한 것들을 점검함으로써는 경건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경건에 대한 앎이 없이는 어떤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은 그러므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위해 그의 일상 세계를 고려해 볼 수 없다. 용이한 지적 직관에 어떤 쉬운 호소가 있지도 않은데, 그것은 탐구를 수반하고 그 역설은 어떻게 그 탐구가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을 요하기 때문이다.
5) 소크라테스는 그 역설을 두 뿔 사이로 빠져나감으로써 해결한다. 그 역설은 명백한 앎과 절대적 무지 사이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배움과 탐구가 상기라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것이 그렇다면, 탐구하는 것은 이미 함축적으로 알려진 어떤 것을 명확한 의식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6) 그것은 이 설명이 변증의 평범한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탁월함이 무엇인지 말하고자하는 시도로서, 그러나 어떻게 변증이 가능한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 즉, 어떻게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합리적으로 물어지고 대답될 것인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내놓아진다는 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 역설은 이 가능성을 시험함으로써 분명한 형이상학적 화두를 던진다. 변증은 실재적 정의를 목표로 한다; 그것은 꼴들의 현존을 전제한다. 만일 변증이 탐구의 한 형식으로서 불가능하다면, 그것들에 대한 아무런 앎도 없기 때문에, 그 변증의 탐구 대상들이 현존한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어떠한 훌륭한 근거도 없다.
7) 상기에 대해 주어진 그 정당화는 잠정적으로는 충분하다. 기하학에 무지한 한 노예가 그의 발 밑 모래에 새겨진 도형들과 지적 질의의 원조 이외에 다른 아무런 도움도 없이 상당히 어려운 정리의 진리를 상기해 내도록 만들어진다. 이것은 상기의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문제에 있어서 망설인다: 그는 상기의 원리가 참이라고 확신하지 않고, '만일 우리가 우리가 그에 대해 무지한 바로 그것에 대해 탐구하는 것을 우리의 의무라 믿는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메논』86b)라는 것만을 확신할 따름이다. 이 망설임의 이유는 찾기 어렵지 않다. 『메논』에는 어떻게 우리가 상기된 앎을 얻는지에 대해서도, 그 상기된 앎의 대상들의 지위는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분명한 설명이 없다. 대중적 신화의 차원에서를 제외하면 꼴들에 대해서든 선재하는 영혼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던져진 '그것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없다. 하지만 그 물음은 만일 상기설이 참이라면 피할 수 없다. 『메논』에서의 상기설은 변증이 진행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한 목적만을 제공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임시적으로(ad hoc) 불충분하다.
상기와 결핍
1) 『파이돈』에서, 하나의 다른 정신, 사물들이 종결된다고 생각한 사람의 정신이 일어나고 있다. 거기에서 상기에 대한 논의는 『메논』의 논증에 대한 요약과 함께 시작하지만(『파이돈』73a), 우리가 보았듯 꼴들에 관련된 측면에서 감각적인 것들의 결핍에 기초한 새로운 설명으로 진행한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적 변증을 정당화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촉발된 상기의 원리는 두 세계 사이의 심연이 다리놓아지는 수단이 되었다.
2) 이 새로운 존재론은 회의주의적 의심들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이다. 그것은 아마도 확실히 기하학에 의해 플라톤의 정신에 제시되었을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아마도 그의 소실된 작품 『수학에 대하여』에서 기하학은 물리적 세계에 적용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연 속에는 유사물들이 있지만, 기하학자의 넓이 없는 선과 길이 없는 점들에 대해 어떠한 물리적 등가물들도 없다. 프로타고라스는 이로부터 '기하학은 그렇게나 나쁘다'라고 추론하였다. 플라톤은 다른 결론을 이끌어 냈다. 기하학은 앎이며, 선명하고 확실하다. 만일 물리적 세계가 기하학의 조건들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면, 그만큼 물리적 세계가 나쁜 것이다. 직선자와 콤파스를 가지고 작업하는 기하학자는 모래 위에 구조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의 도구들이 물리적일지라도, 그리고 그의 언어 - 플라톤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 가 물리적 활동들의 언어일지라도, 그가 획득하는 진리는 물리적 대상들에 대한 진리가 아니다; 그의 구조물들은 오히려 그의 사유가 그것을 향해 정향된 그러한 것들의 상들, 부정확한 유사물들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하학적 선은 기하학적 원에 대해 하나의 점에서 그리고 오로지 그 한 점에서만 접선이다. 그러나 물리적 선은 물리적 원을 한 점에서가 아니라 직선의 부분과 호를 통해 건드린다. 곡선과 직선은 거리에 있어서 일치한다 - 기하학적 부조리이자 물리적 사실이다. 그래서 기하학의 정리들은 그것들이 그에 의해간접적으로 증명되는 그러한 모래 위의 구조물들에 대해서만 단발적으로 맞다. 이것은 그렇게, 기하학자의 도구들이 너무 무디기 때문이라거나 그의 작업들이 너무 어설프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리들이 견지되는 조건들이 그 자체로 물리적으로라기 보다는 기하학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물리적 대상들, 기하학적 서술들에 의해 그것들인 것으로 한정되는 그 대상들은 그러한 서술들에 의해 시사되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데에 실패한다. 감각적 도해들은 기하학적 관계들의 닮음꼴들이다 - 그 닮음꼴들이 우리에게 그 관계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것들은 훌륭한 닮음꼴들인데, 다른 식으로는 그것들이 정리들을 발견함에 있어서나 증명들을 구성함에 있어서 유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결핍된 닮음꼴들이다. 그것들의 결핍은 정도의 일종이 아니라 종류의 하나이다; 물리적 도형들은 원칙적으로 기하학적 도형들의 대응물이 될 수 없는 유사물들이다.
3) 꼴들의 이론에 대한 이것의 관련성은 직접적이다. 『파이돈』에서 플라톤은 동등성의 감각적 예증들, 또한 비동등성의 예증들이기도 한 그 예증들은 그러므로 결핍되게 동등성과 유사하다고 전제하고, 이 판단이 비교에 의존하기 때문에, 우리는 동등성 그 자체에서 그 자체에 대한 우선적인 앎을 가졌어야만 한다고 전제한다. 이 논증이 의존하는 토대가, 기하학에 있어서 물리적 도형들의 유사한 결핍성에 의해,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제시되었어야만 한다.
4) 유비는 등가가 아니다. 물리적 원들과 기하학적 원들의 관계는 어떤 종류의 원들과 원형성의 관계와는 다르다. 그러나 기하학이 플라톤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을 해명해 주었고, 상기에 의해 제기된 존재론적 지위의 문제들에 대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답을 제시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5. 결론
1) 1663년 하버드 대학에서 학위 수여식 직전에 학위 논문 한 편이 유포되었다. 오래 전 행복했던 때에 미친듯이 먹고 마시던 하버드 학위 수여식은 공식적 토론들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 그 논문은 화제들을 제공했다. 그것은 논쟁을 위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공했다. Ethica est vitiorum Emplastrum corrosivum. 거칠게 옮기자면 그것은 도덕 철학에 대한 연구가 악덕을 위한 허술한 고약이란 뜻이다. 중세 삼학(trivium; 문법, 논리학, 수사학)과 4과(quadrivium; 산술, 음악, 기하, 천문)의 윤곽들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던 교육과정의 대학에 걸맞게, 문법 과학은 어느 하나 잊혀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Ha Ha He vox est bilaris bene Nota, 그러니까 Ha Ha He가 잘 알려진 웃음소리를 지시하는 표현인지 아닌지를 토론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학의 중심은 논리학이었고, 논리학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고대의 고결한 문제들과 관련이 있는 한 명제 속에 기억되었다: Universalia sunt in se ἀειφανεῖς in re ἀφανεῖς Asterismi - '보편개념들은, 그 자체 내에서는 언제나 빛나는, 그러나 사물들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작은 별들이다.'
2) 물론 그 학위 논문은 가짜 학위 수여식을 벌이려고 작정을 한 학부 3학년 무리에 의해 퍼뜨려진 풍자물이었다. 그 날조차 학부생들은 시간 낭비에 기발한 재능을 가지고 학구적 예절에 대한 어떤 불경을 위해 합심하였다. 의심할 것 없이 그 모든 것은 그들의 학부에 중요한 원천이었다 - 그들의 학부의 여섯 전부는 그들의 우두머리인 찰스 촌시 총장과 함께였다.
3) 1663년 학부 3학년생들은 어디에서나 천체의 음악과 함께 언제나 빛나고 보이지 않는 그들의 별들의 빛을 연관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알았을 것이다, 로렌조가 그들보다 먼저 알았고 제시카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대에게 보이는 가장 작은 별조차 그 궤적 안에서 천사와 같이 노래하지 않는 별이 없소, 어린 눈을 한 천사들에 따라 합창 하는 동안은.(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4막 1장).' 그리고 그들은 소리를 가지고 있듯 바로 그렇게 빛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하기 쉽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작은 별들의 그 빛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별들의 운행의 음악이 들을 수 없듯이, 왜냐하면, '이 스러져 버릴 질척이는 육신이 그 빛을 지독하게 뒤덮어 가둔 동안은'(출처 상동),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4) 꽤 괜찮은 생각이다. 그러나 가짜 학위수여식에서의 그 무리는 까불거림을 증명한 듯하고, 당연히 일부 순전한 영혼에게는, 훌륭한 시를 훼손시켜가면서, 그 작은 별들의 빛은 사실 구경꾼의 영혼의 눈이 깜빡이는 것이었다고 주장하게 되는 일이 생긴다. 유명론자들은 거지 같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5) 이러한 회의주의는 물음의 특정한 분할을 제안한다. 물론 별들에 대한 물음이 있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이 여전히 토론하고 있는 것이거나, 최소한 어째서 그들이 그것을 토론하지 않아야 하는지 토론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깜빡임에 대한 다양한 물음들도 있다 - 그것을 누가 가졌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째서 그가 그것을 가졌는지에 대해, 언제 그러한지에 대해. 내가 이 책에서 논의했던 것이 그러한 한 가지 물음일 것이다.
6) 나는 주장했다. - 아마 이 점에 대해서는 되풀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은, 그리고 특히나 『에우튀프론』은 꼴들에 대한 이론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이론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발견되는 그 꼴들에 대한 이론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그 꼴들의 탐구에 속하는 대상들로서 존재들의 구분되는 계층이 현존한다고 전제하는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토대이다. 그렇지만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은 초기 대화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과도 달리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산출하기 위해 제공된다; 그 설명이 답변으로 여겨지는 그러한 물음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 안에서 일어나는 물음들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해서 던져지는 물음들이다 - 특히, 실재적 정의들에 대한 탐구와 같은 그 변증의 가능성에 대해서. 이러한 물음들은 탐구의 역설에 의해 『메논』에서 처음으로 발생하고 상기의 원리에 의해 해소된다; 그래서 변증의 수행은 처음으로 선험적 지식의 소유를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메논』에서 임시적으로 제공된 이러한 주장은 『파이돈』과 『정체』에서 결핍과 실재성의 정도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존재론에 기초된다.
7) 중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꼴들에 대한 이론은 그래서 초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되는 이론과 동일한 것도 아니고, 별개의 한 가지 것도 아니다.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기 이론을 일부로서 탐고 있기 때문이다. 같지 않다.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이 유발시키지 않은 화두들로 정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에우튀프론』에서 플라톤의 깜빡임의 가득한 광채를 발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알 수 있는 플라톤적 반짝임을 확실히 찾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1)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또는 그것들의 존재론적 지위는 무엇인지 묻는 것은 합당하다. 중기 대화편들에서, 특히 『파이돈』과 『정체』에서, 꼴들과 그것들의 사례들 사이의 관계는 근본적 의존과 근본적 분리에 속하는 하나로 해석된다: 그 내용물들이 시간에 휩쓸리지 않는 새로운 세계가 발견되었고, 그 세계는, 감각적 현상계에 대해 덜한 실재에 대해 더한 실재가 서듯, 실체들이 그림자들과 반영물들에 마주서듯 그렇게 마주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체르니스 교수는 중기 대화편들의 존재론을 경탄스럽게 간추려 낸다:
현상적 세계, 전체로서도 그 부분들 모두에 있어서도 지속적으로 과정 속에 있는 그 세계는 앎의 대상인 실재일 수 없다. 인간 행위, 정신적 활동, 물리적 작용의 판이하게 다른 현상들은 각기 그리고 모두 오로지 현상적 과정 외부에 행위의 표준들, 과정의 경계들, 앎의 객관적 상관물들인 실재적 실체들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실체들은 idea들이다….
이 설명은 체르니스 교수가 다른 어떤 곳에서 이데아들에 대한 이론의 철학적 경제성이라 불렀던 것을 기술한다; 그 이론이 많은 문들에 대한 하나의 열쇠이고, 동시에 윤리에 속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며, 형이상학이고, 인식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2) 중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 이론의 존재는 그 뒤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에 대한 이론을 찾은 학생들을 이 이론을 그 곳에서 찾도록 이끌었다.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이 이론을 찾는 데 실패한 학생들을 그 곳에 어떠한 이론이라도 있다는 걸 부정하도록 이끌었다.
3) 세 가지 주된 관점들이 주장되어 왔다. 하나는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이 여기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서, 꼴들은 존재하고 그것들을 지닌 사물들과 분리되어 있다; 『에우튀프론』에는 꼴들에 대한 이론이 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파이돈』과 『정체』에서 제기되고 후기에 『파르메니데스』에서 비판받은 동일한 이론이다. 두번째 관점은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사물들 '안에' 있고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관점이다. 세번째 관점은 꼴들에 대한 언어가 초기 대화편들에서 발견된다 할지라도, 꼴들 그 자체는 없다는 것이다: 『파이돈』과 『정체』에서 제기되고 후기에 『파르메니데스』에서 비판받은 그 이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고, 플라톤은 『에우튀프론』을 썼을 당시 그것의 - 그 어휘를 제외하고는 - 어떤 부분도 고안하지 않았었다.
4) 또한 네번째 관점이 있다. 그 관점은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 세번째 관점의 변형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그 관점은, 초기와 중기 대화편들 양쪽 모두에서, 꼴들이라고 불려왔던 것들이 단순히 언어적 술어들이고, 독립적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 아니며, 그래서 『에우튀프론』은 그것이 제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측면에서 『파이돈』과 『정체』에 동의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가 비판하지 않은 무엇이 현존하는지는 진술되지 않고 남는다.
5)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의 현존에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주장은 잘못이고, 더 진전된 논의 없이는 일축될 것이다. 초기 대화편들에서의 꼴들이 사물들 '안에' 있는지 그것들로부터 '떨어져' 있는지, '내재적'인지 '초월적인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이 물음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종종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비록 검토를 통해 그것이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보여질 테지만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분리에 대하여
1)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의 사유를 소크라테스의 사유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분한다:
소크라테스는… 윤리적 문제들에 전념하고 있었으며 전체로서의 본성의 세계를 도외시하고 있었지만, 이러한 윤리적 문제들에서 보편개념을 탐색하고 있었고, 정의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플라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감각적인 사물들이 아니라 또 다른 종류의 실체들에 적용된 문제들을 주장했다 - 이러한 이유로, 공통 정의는 어떠한 감각적인 사물에 대해서도 그에 대한 정의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제나 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다른 종류의 사물들을 그래서 그는 이데아들이라 불렀고 감각적인 것들을 그는 이 이데아들 이후에, 이 이데아들에 대한 관계 때문에 명명되는 모든 것들이라 말했다; 다(多)는 그것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데아들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했기 때문이다.
요점은 뒤에 다른 방식으로 놓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인격의 탁월함들에 몰두하고 있었을 때, 그리고 그것들과 관련하여 처음으로 보편적 정의의 문제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 [그는] 보편개념들이나 정의들을 따로 떨어져 존재하도록 만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플라톤주의자들]은 그것들에 분리된 현존을 부여하였고, 이것이 그들이 이데아들이라 부른 종류의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그들[플라톤주의자들]은 감각세계에서 특수들이 유동상태에 있으며 그것들 중 그 어느 것도 유지되지 않는다고, 그러나 보편개념들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고 그것들과 상이한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우리의 앞선 논의에서 이야기했듯이, 그의 정의들에 대한 논거로써 이 이론에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그러나 그는 개별자들로부터 보편개념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것들을 분리시키지 않음에 있어서 그는 옳게 생각했다. 이것은 그 결론들로부터 명백하다; 보편개념 없이 앎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 분리는 이데아들에 대해 고려함과 함께 일어나는 반대들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일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실체들 이외에 어떤 실체들일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이 분리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다루는 그의 후계자들은, 다른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나, 이러한 보편적으로 서술되는 실체들에 분리된 현존을 부여했고, 그래서 보편개념들과 개별자들은 거의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것이 뒤따랐다.
이데아들이 χωριστά, '분리되어 있는 것들이었다'라고 말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그것들의 예시들과 수적으로 구분되는 것으로서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 즉, 그 자체로 개별적이고 수에 있어서 하나인 것으로서 말이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동시에 이데아들을 보편개념으로 만들면서 다시 그것들을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개별자들로서 다룬다'. 이것은 꼴들의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에서 중요한 전제인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개념은 개별자일 수 없다고, 다자에 대해 서술되는 것은 그 자체로는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인 것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개별적이며 수적으로 하나인 사물들은 예외 없이 어떤 주어에 대해서도 이야기될 수 없다.'
2) 그렇지만 수적 구별은 분리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범주론』1a 24-25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어에 있어서'라는 말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것 안에 있는, 그러나 일부분으로서 있지는 않은, 그리고 그것이 안에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χωρίς)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언급한다. 이 문서는, '아무것도 [개별적이며 수에 있어서 하나인 것을] 주어에 속해 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제한하지 않는다'(1b 7-8)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후 언급과 마찬가지로, 분리는 수적 구별만큼이나 현존적 독립성 또한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독립성은 배분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하고, 집합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주어 안에서'라는 말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어떤 주어와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이 아니라 '그것이 속한 특정 주어로부터 떨어져 존재할 수 없는'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데아들이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이 개별자들이라고, 그리고 그것들이 어떤 주어진 사례들에 대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데아의 현존은 그것의 사례들의 현존조건이고, 그렇게 정의된 분리는 비대칭적 관계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존재론적 우선성이다:
어떤 것들은 우선적이라고 불리고 후부적이라고 불리는데 본성과 실체의 측면에서 그러하다. 즉 다른 것들 없이 있을 수 있는 것들과, 반면에 그것들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그 외의 다른 것들 - 플라톤이 처음 사용했던 구별이다.
플라톤이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들이 수적으로 그것들의 예시들과 구분되고,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것들의 예시들에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τὸ εἶδος τὸ ἔνον에 대한 그 자신의 이론을 반대했다. 그 이론은 물질적 실체의 꼴은 그것이 꼴인 것의 꼴과 수적으로 구분되지도 독립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분리
1) 플라톤이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옳았다. 그러나 그는 소크라테스가 그것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함으로써 무엇을 생각하였는가? 이것은 틀림없이 소크라테스가 그것들을 그것들의 예시들과 구별하지 않았다거나, 그가 그것들을 그것들의 예시들에 독립적이거나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것이 참인지 아닌지는 여기에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뜻대로 그 증거를 가지고, 그 문제는 결정할 수 있기가 어렵다. 그러나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식은 아마도 주로 초기 대화편들에서의 플라톤의 묘사로부터 도출되었고, 그러한 이유로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종종 초기 대화편들에 대한 해석으로 다루어져 왔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역사적 소크라테스를 초기 플라톤적 소크라테스와 동일시하는 것이 용인된다면, 그 물음은 초기 대화편들에 대한 이 해석이 정확한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과 전혀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훌륭한 이유가 있다. 『형이상학』에서 소크라테스의 정의들에 대한 탐색을 언급하고 나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계속해서 '플라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지만, 그 문제는 감각적 사물들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실체들에 적용되었고 - 이런 이유로, 보편적 정의는 항상 변화하고 있을 그 어떤 감각적 사물에 대한 정의일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고 첨언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정의의 대상들을 감각적인 것들과 동일시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그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과 구별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4)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초기 대화편들에서 감각적인 것들을 정의하고 있지 않다: 도덕적 꼴들은 어떠한 감각적 예시들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완전히 별개로, 꼴들과 그것들의 예시들의 비동일성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초기 대화편들 각각의 변증에 의해 전제되는데, 왜냐하면 정의는 우리가 보았듯 대상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고, 그 대상은 보편개념이기 때문이다. 비동일성은 또한 꼴들이 본질들이며 원인들,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것들인 바의 것들인 그 본질들과 원인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그리고 꼴들은 그 꼴들을 지니는 사물들과 지니지 않는 사물들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위한 기준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시사된다. 비동일성이 암묵적 전제일 따름인 것만은 아니다: 『에우튀데모스』300e-301a에서, 그것은 하나의 사실로 진술된다. 디오뉘소도루스가 그 곳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과 같은지 혹은 다른지 물을 때, 소크라테스는 비록 그것들에 어떤 아름다움이 현전한다 하더라도, 그것드은 아름다움 그 자체와 다르다고 답한다.
5) 아마도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구별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것을 허용하고 그것들의 구별이 수적이었다는 것을, 꼴들이 그것들의 고유한 지위에 있으리란 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었다는 아무런 문헌 증거도 없고, 그가 그것을 주장했으리라 추정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자신의 것이라 알았던 비동일화된 꼴의 관념: 꼴은 있는 것이지만 개별자도 아니고 수적으로 하나도 아닌 것이라는 관념에 소크라테스가 도달했었음을 시사한다. 물론 한 사물이 수에 있어서 하나일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설이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그가 오로지 아카데메이아의 일원이었던 동안 일어난 술어와 관여의 문제, 특히, 생각하기로, 『파르메니데스』(131a-c)와 『필레보스』(15a-c)에서 플라톤에 의해 진술된 관여의 딜레마의 문제에 대해 오랜 숙고의 결론으로 그 역설을 받아들이도록 이끌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꼴들이 개별적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것을 증명하는 문헌들이 나타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에게 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관념들의 결여에 대해 증명하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꼴들의 현존을 전제하는 초기 대화편들의 구절들은 또한 습관적으로 그것들의 수적 하나임을 전제한다; 다른 대화편들을 볼 것도 없이 『프로타고라스』를 보면, 올바름은 거기에서 어떤 것이고(πρᾶγμα τι, 330c; 330d, 352d를 참조하라), 탁월함은 하나인 것이며(ἓν τι, 329c), 만일 탁월함들이 서로 구별된다면, 각각은 그것 자체의 특유한 본성과 실재성을 가질 것이다(τις ἴδιος οὐσία, 349b). 초기 대화편들에서 꼴들의 현존에 대한 언급은 그것들의 개별성에 대한 언급을 필요로 한다.
6)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예시들로부터 구별했다는 의미하진 않았지만, 그가 그것들을 그것들의 예시들에 독립적인 것으로나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인지 아닌지 고려하는 것이 남는다. 다시 한 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아무런 문헌적 증거도 없다; 그의 현대 주석가들과 달리, 그는 소크라테스적 꼴이 그 예시들 안에 '내재적'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그는, 적어도 초기 대화편들에 관한 한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꼴들과 그것들의 예시들의 비동일성은 거기에서 꼴들의 그것들의 예시들에 대한 우선성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인식론적으로, 꼴들에 대한 앎은 그 꼴들을 가진 어떤 것들에 대한 앎에 우선하고, 또한 우연히 그것들과 관계된 어떤 특성들에 대한 앎에 우선한다. 존재론적으로, 꼴들의 우선성은 그것들이 어떤 것들이 그것들인 바의 것들이도록 하는 본질들이고 원인들이라는 사실에 의해 시사된다; 그것들의 현존은 그것들의 예시들의 현존조건이다. 그 우선성은 현존적 독립성을 시사한다. 만일 아버지를 고발하는 에우튀프론의 행위가 경건하다면, 경건으로서 그 행위의 현존은 경건함의 꼴, 그에 의해 그 행위가 경건한 바로 그 꼴의 현존에 의존한다; 경건함의 그 꼴이 그것의 예시를 위해 아버지를 고소하는 에우튀프론의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저 기괴한 생각일 따름일 것이다.
7) 요약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켰다는 것을 부정함에 있어서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그것들의 감각적 예시들로부터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가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구별했지만 그것들을 개별자들로 구별하지는 않았다거나, 소크라테스가 꼴들을 구별했지만 그것들의 예시들에 독립적이고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이든,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된 그의 선언은 착오이다. 그가 제안하는 분리의 모든 기준들에 의해 - 비동일성, 개별성, 독립성과 우선성 - 꼴들은 후기 대화편들에서처럼 초기 대화편들에서 '분리된 것'으로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
1) 이 결론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가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에 대단한 신뢰를 두는데 익숙하게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 - 그들은 많기도 하고 - 에 의해 의문을 제기받을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Mr J. E. 레이븐은 『에우튀프론』6d-e가 두드러지게 꼴들의 이론에 대한 진술처럼 생각된다고 주장한 뒤, '이 물음에 대한 우리의 고대 증거의 모든 단편들 중 가장 중요하고 권위있는 것'에 기초하여 이러한 관념을 기각한다:
『형이상학』Μ, 1078b, 30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주 많은 말을 적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그의 보편개념들을 분리될 수 있는 것으로도 간주하지 않고 그의 정의들도 그렇게 간주하지 않는 데에 반하여, 그들(즉 플라톤과 그의 추종자들)은 분리된 현존을 그것들에 귀착시켰고 이런 층위의 실재들에 이데아들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내가 앞서 철학의 역사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두 가지 기여는 귀납적 추리와 보편적 정의였다는 취지로 인용했던 구절에 거의 즉각적으로 뒤따르는 이 구절은 더 앞선 문장과 마찬가지로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다. 그러므로 이 예시에서 우리가 타당하게 여러 다른 문맥들에서 주장할 수 있듯이 그의 후계자들의 관점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이 그 자신의 원칙들에 대해 앞선 사상가들에게서 그가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예견들을 봄에 대한 그의 공언된 반대에 의해 무효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이, 편견에 사로잡힌 비판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노골적인 진술을 가진다. 더욱이 그것은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가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20여년이라는 최고조의 시기 동안 그는 아카데메이아에서 플라톤의 문하에 있었다. 그 시간 동안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관계가 논의되지 않았다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간략하지만 중대한 문장들을 썼을 때 실수를 저질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것을 『에우튀프론』6d-e의 해석에 적용함에 있어서 Mr. 레이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대한 설명이 또한 초기 대화편들의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도 지속된다고 전제한ㄷ; 그리고 만일 그러한 대화편들이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보에 있어서 주요 원천이었다면, 이것은 불합리하다. 아직 그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들이 참이라는 것은 뒤따르기 어렵고, 만일 그것들이 실수라면, 그것들이 실수라는 건 아마도 생각해 볼 만할 것이다.
2) 플라톤의 문하에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오해했을 수 없다는 논증은 무엇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체르니스 교수에 의해 그 영향력이 유력하게 평가받아온 하나의 오래된 논증이다.
확실히 20여년 동안 플라톤의 학생이었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오해했을 수 없다는 그 논증에는 아무런 타당성도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물음들에 대해서 플라톤의 직계 제자들이 그의 의견들의 본성과 취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고 그래서 우리는 한 직계 제자의 해석이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멈추게 된다는 암시들을 가지기 때문이다.
크세노크라테스와, 그럴 듯이 보이듯, 헤르모도로스는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들을 가지고 변화에 대한 관점들에 설명들을 제시했다. 놀랄 일도 아니다. 철학자들의 문하생들이 그들의 선생들에게 이해를 의지했으리라 주장하기 위해, 누군가는, 경험에 더 잘 기초된 주먹구구식과 같이, 그 문하생이 철학자로서 혼자 힘으로 더욱 독창적일 수록, 그에 대한 선생의 초기 영향력은 더욱 지배적이고, 결국 오해될 것이기 더욱 쉽다는 주장을 반대할 것이다: 새로운 상황들, 특히 어렵게 획득된 시점은 새롭고 가끔은 왜곡된 관점을 산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할 필요도 없이 가장 독창적인 제자였다; 플라톤은 말할 것도 없이 그의 사유에 대한 지배적 영향력이었다.
3) 그래서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대해 그가 편향된 비판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으로서 '단순히 사실에 대한 진술'을 형성하고 있을 때 실수했다는 것만이 생각됨직한 것이다. 이 구분은 새로운 것도 아니고 그것의 반박도 그렇다:
반드시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들은 그의 해석들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의심할 여지 없는 증언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가? 그런 것은 A. E. 테일러와 그에 앞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에게 플라톤이 특정한 어떤 것을 말했다고 할 때에는 그를 믿어야만 하지만 플라톤이 의미했던 어떤 것이나 한 원칙의 역사적 기원이었던 어떤 것을 우리에게 말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 존 버넷에 의해 채용된 타당한 구별이다. 이러한 말끔한 구별의 타당성은, 그렇지만 가장 좋은 의도들에도 불구하고 증인의 증언이 사실에 대한 것으로서 사실에 대한 그의 고유한 무의식적 해석에 깊이 영향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는일반적인 경험에 의해 상당히 손상된다. 구별의 적용가능성은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서 손상된다. 그는, 플라톤에 대한 설명을 의존했던 폰 슈타인공조차 그의 보고들과 그의 비판은 서로에 의해 편견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했던 보고, 해석, 그리고 비판을 그렇게 뒤얽히게 만들었다. …더욱이, 다른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해석한 그 철학자의 원칙의 필연적 함축이라고 간주한 것을 드물지 않게 철학자의 입에 집어 넣는다고, 그리고 그는 우리의 의도에 종사하는 플라톤적 대화편들의 단지 해석들만이 아니라 잘못된 보고들을 제시한다고 주장해 왔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이데아들을 분리시키지 않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진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의 다른 동료들로부터의 인용문이란 것인가? 이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것이 초기 대화편들이나 아카데메이아적 전통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는 것인가? 이러한 것들 중 어느 것에도 아무런 증거도 없다. 그리고 그런 증거를 찾는다는 것은 사실을 아직 뒷받침되어야 하는 해석으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한 근거를 요구할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실에 대한 순전한 진술'이란 표현에 대해 할당될 의미가, 순전함에 대한 고려와 별개로, 단지 그 진술이 참이라는 것인 듯이 보일 것이다. 그것이 Mr. 레이븐이 확립시키고자 시도하고 있는 점이기 때문에, 그의 논증은 하나의 요청(라틴어 petitio)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의심할 것도 없이 플라톤의 문하생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공하는 플라톤에 대한 증언의 질을 고려해 보자. 이것은 아마도 『형이상학』(Ⅰ, ⅵ장)에서 플라톤의 원칙들에 대한 그의 첫번째 조사에 의해 견본의 목적들에 대해 묘사될 것이다.
5)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장에서 네 가지 구별되는 종류의 증거들을 제공한다: (1) 그는 플라톤이 변화하는 감각적 대상들을 그것들이 그 안에 참여하는 불변하는 꼴들로부터 '분리시켰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플라톤의 다른 직계제자들의 증언만큼이나 대화편들이 그의 주장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2) 그는 플라톤이 꼴들과 감각적인 것들 사이에 수학의 대상들인 '중간자들'의 계층을 상정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대화편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그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석되었던 산재된 구절들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3) 그는 '하나'와 '큼과 작음' 또는 '둘'로부터 파생된 이데아적 수들의 현존에 대해 증명하고 이것이 대화편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긍정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4) 마지막으로, 그는 플라톤이 설명에 있어서 형상인과 질료인만을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함축적으로 그의 사유에서 운동인과 목적인이 어떤 역할을 가진다는 것을 부정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이드로스』와 『법률』에서 영혼을 자기운동으로 정의했고, 그것이 우주의 모든 다른 움직임의 원천일 것이라 주장했던 그 사람은 그의 철학 안에서 운동인을 위한 어떠한 자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파이돈』에서 감각적 대상들이 꼴들과 닮고자 애쓴다고 말했던, 그리고 『정체』에서 좋음을 현존과 가지성의 제 1 원리로 정의했던, 그리고 『티마이오스』에서 세계는 이성적 설계자의 작품이라고 단언했던 그 사람은 그의 철학에서 목적인을 위한 그 어떤 자리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증언은 기본적인 결함을 겪는다: 그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6) 믿을 수 없을 만치 먹음직스러운 것을 만드는 방법들이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플라톤의 그 글을 버릴 것이다. 아마도 '대중적인' 플라톤은 많든 적든 그의 참된 견해들인 듯이 호도하는 대화편들을 다중(틀림없이 『파르메니데스』를 즐겼던)을 위해 펴냈을 것이고, 반면에 '비전적인' 플라톤은 그의 더 내밀하고 진전된 이론들, '기록되지 않은 원리들'을 아카데메이아의 그의 제자들을 위해 따로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대서 비전적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성스런 장인을 선언하는데, 왜냐하면 비전적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그 무리들에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7) 이러한 접근은 최소한 한 가지 훌륭한 장점을 가진다: 일관되게 적용된다면, 플라톤 문헌에 대한 어떠한 호소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다. 이 사실의 잇점을 알아차린 그런 사람들은, 플라톤의 대화편들이 세계를 움직인 사유의 요체를 담고 있지만, 아리스토테레스의 증언으로부터 그의 믿음들의 재현은, 철학적으로 능란한 손들에 의해 떠맡아질 때조차, 일반적으로 어떤 횡설수설한 모습을 가진다는 더 나아간 사실에 의해 단념시켜질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극단적으로 부정확하다고, 프라톤 사유의 가장 근본적인 측면들에 대해서 부정확하다고 전제하는 것은 선호할만 하다. 그의 증언이 독립적 통제에 대항해 측정될 수 없을 때, 그것은 플라톤의 관점들에 대해 불충분한 근거이다.
8) 이로부터 만일 플라톤이 '기록되지 않은 원칙들'을 아카데메이아에서 선언했다면, 우리는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에 기초해 그러한 원칙들이 무엇이었는지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뒤따를 것이다. 이것은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대해 대화편들로부터 입증될 수 없다고 말한 모든 것이 순수한 오해이거나 와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대해 대화편들로부터 입증될 수 없다고 말한 모든 것이 순수한 오해나 와전이 아닐 것이라 알려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근거가 있다.
9)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고의적으로 또는 의식적으로 플라톤을 와전시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관점은 터무니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로서, 헤겔과 같이, 앞선 철학자들의 작업을 변증적으로, 그의 고유한 관점들의 바런을 위한 디딤돌들로 사용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헤겔처럼, 그는 그의 선구자들의 작업을 단지 그가 이제 단언함을 통해서 획득해 냈던 진리에 대한 예측으로만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정당하고 적절하다. 철학자들은 언제나 그들의 주제에 속한 역사를 그 주제의 발전을 위한 매개물로 사용해 왔고, 그들의 선구자들을 그들의 논증에 대한 당파로 만들어 왔다. 이러한 전략이 가치있는 철학을 산출해 낼 때 -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확실히 그러하였듯이 - 그 전락은 추구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피하게 역사적으로 건전하지 못한, 가끔 말도 안 되는 해석들로 이끄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의 더 앞선 기획들이 생경한 물음들과 전제들의 배경에 맞서 보여지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그렇게 자주 그것이 지니는 그러한 특성을 지니는지의 이유이다; 그것이 다른 식이었더라면 그가 독창적인 철학자는 아니었을 것이라 추정할지도 모른다.
10) 어째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 플라톤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그렇게나 자주 과도한 무게를 부여받아 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 하나는 다방면에서 고전적 전통의 내구력이다. 플라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 해석을 허용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으로 그들의 관점들에 대한 증거로 가치있게 여길 것인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눈을 통해 읽힌 플라톤은 그 안에 플로티누스에 속한 많은 것을 지니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영어권 학자들 사이에서 널리 지지받지 않았다. 그들은 그 해석의 암시된 신비주의를 불신했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학문적 전통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주장이다. 중세와 르네상스 동안, 그것이 '플라톤주의'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었고, 부분적으로는, 의심할 것도 없이 헤겔과 독일 낭만주의의 유입으로 인하여, 그것은 유럽 학문의 상당부분에 있어서 주된 주제로 남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에 대한 그것의 취급은 그 자체를 수 세대에 걸쳐 확립시켰고, 외관상으로는, 그것 자체의 독립적 생명력을 전개시켰다.
11) 두번째 이유는 특권화된 접근방식의 원칙이다: 플라톤이 아카데메이아에서 강의하였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서 들었다는 것,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은 그가 들었던 것에 대해, 그것의 모든 결점들과 더불어, 우리가 가진 전부라는 것이 전제된다. 이것이 의존하는 증거는 아리스토크세노스의 단 하나의 구절이다. 그 구절은 플라톤의 좋음에 대한 강의를 들으러 왔던 청중을 묘사한다:
그들 모두는 세상이 좋음이라 부르는 것들 부와 건강 또는 힘의 일부 또는 다른 것을 그 강의로부터 얻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왔다; - 결국, 일부 비범한 운명의 선물. 그러나 그들이 플라톤의 추론이 수학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 - 수들, 기하학, 천문학 -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의 좋음이 있다는 결과에 대해 그들의 환멸이 완전했다고 생각된다. 그 결과는 다른 이들이 그것을 비방하는 동안 그것을 조소하였던 것이다.
그 강의는 공적으로 언급되었다: 아카데메이아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얻을 것에 대해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기이는 반응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만일 플라톤이 그것들 중 다수를 제공했을지라도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반어적인 것이 있다. 그들의 건강을 증진시키고 그들의 근육들을 강하게 하며 빨리 부를 이루기 위해 온 청중에게 수학과 형이상학에 대해 강연하는 플라톤의 모습에서, 그 고유한 재미를 지니는 그런 반어법 말이다.
12) 종종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데아 수들의 이론에 대한 플라톤의 지식을 획득했다고 주장되어 오곤 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은 물론 만일 그가 그러한 사유들을 후기 대화편들에 밝히지 않았다면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가장 심오한 사유들을 수학과 변증에 훈련되어 있지 않았던 대중적 청중들에게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 대화편들은 일반 일반적인 출판물로서는 지나치게 전문적이고 어렵게, 그 자신의 아카데메이아 구성원들을 고려하여 쓰였다. 이 강연으로 소급하는 '기록되지 않은 원칙들'은 어떤 상식적인 인간이 무지한 대중에게 알릴 종류의 것이 아니다 - 만일 그들이 한 상식적인 사람이 좌우간 그들에게 퍼뜨릴 수 있을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플라톤이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관점들을 강연들을 통해 설명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크세노스는 오로지 우리가 지니는 강연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만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플라톤의 사유에 대한 제일의 목격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사용함에 있어서 또 다른 더욱 파급력 있는 작업요소가 있다. 이것은 외관상 근절할 수 없는 심리주의이다. 그것은 철학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전염시킨다. 플라톤의 그 제자는 플라톤의 사유들에 대한 발견을 그의 반대로서 지닌다 - 즉, 그의 품어진 신념들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썼던 것과 독립적인 증거의 또 다른 원천이 있다 -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이다. 플라톤이 기록하였던 것이 이따금 그가 믿었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과 부딪치기 때문에, 어떻게든 그 분란을 판단하는 것은 역사가의 작업이다. 이러한 부분적으로 모순되는 증거의 두 분류들에 무게를 두는 것은 균형을 깨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 즉 플라톤이 실제로 믿었던 어떤 것을 표현하는 그 균형. 우리는 그래서, 그것의 재건이 많은 즐거움과 재미를 제공할 그런 비전적 원리들을 믿는 우리의 길에 이어서 진척되어 있다.
14) 그러나 무엇보다도 처리의 또 다른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 플라톤의 문헌을 어떤 다른 것에 대한 증거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역사적 이해의 제 1 대상으로서 다루는 것이 가능하다. 탐구의 목적은 그래서 일련의 문헌자료들을 해석하는 것이고, 그것들의 권위에 대해 간직된 신념들을 헤아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 문헌들이 그러한 신념들에 대한 의존할 만한 색인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관련이 우연적이고, 해석이 관련된 한에서 중요치 않다. 만일 플라톤이 속으로는 유명론자, 무신론자, 불멸에 대한 회의주의자, 그리고 쾌락주의자였다면, 또 이제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알 수 없는 동기로 썼던 대화편들을 아직 쓰고 있던 중이었다면, 이것은 그가 썼고 개인적으로 아주 조금도 믿지 않았던 어떤 것에 대한 적절한 해석으로 바뀔 것이다: 한 사람이 그가 믿지 않는 것을 말할 때, 우리는 여전히 완전하게 그가 말한 그러한 것을 잘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이 그가 표현하지 않았던 신념들, 또는 그가 표현한 것에 반대되는 신념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은 예언의 예술에 속하는 기술을 가진 이들에게 남겨질 것이다; 그 역사가는 더욱 합리적으로 자기 자신을 문헌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해석연구로 제한할 것이다. 만일 탐구가 이런 식으로 해석된다면, 그것은플라톤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언을 플라톤 문헌의 증거보다 선호하는 자기-언급적 모순이다.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이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1)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이 현존한다고 주장되거나 암시되는 단언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언들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가 아직 그 결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에게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더 밀고 나가 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2) 누군가는 이런 논증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그 저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꼴들이 현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 저술은 그런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추정되는 존재론적 관련이 사실 암암리에 어쨌든 언어적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있다. 플라톤은 - 누군가는 그 논증이 연이어지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 실제로 언어에 대한 사실들인 항목들을 세계에 대한 사실들로 표현하기 위해, 담화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의심할 것 없는 불가피한 편애라고 할지라도, 운이 나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분석으로서 제공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담화방식이다.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거나 시사하는 진술들은 논리적 여항 없이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지 않는 진술들로 환원가능하거나 분석가능하다. 본질에 대한 물음들은, 플라톤 자신조차 동의했을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고, 의미에 대한 물음들은 당연히 언어적이다. 적절하게 이해된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 그리고 플라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적절하게 그것을 이해하지 않았는데 - 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라 말들의 의미를 향해 정향된다. 결국, 꼴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짐작컨데 단어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이한 문맥들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단어들이 우리가 나타내는 것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표준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서술이 해당하는 상황들을 동일화할 수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본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각각의 설명이 그 의미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요약하자면 '"경건"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초기 대화편들에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언질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중적이고, 이중의 대답을 허용한다. 만일 그 물음이 그러한 대화편들의 본문이 꼴들의 현존을 긍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긍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물음이 플라톤이 상술하고 있는 위치의 논리가 꼴들의 현존을 요청하느냐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대체가 순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4) 몇몇 상황들 아래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은 사전적일 것이고, 프로디쿠스나 아니면 사전에 의해 대답될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문자상의 동의어들에 대한 탐구에 종사하지 않는다. 에우튀프론조차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신성함이라는 답으로 만족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5) 다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물 지시적 정의', 예시에 호소하는 정의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 그러나 예시가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협소하게 구성되는지, 아니면 요청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일반적 경우로서 더 넓게 구성되는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런 종류의 답변은 초기 대화편에서 그러한 답변이 나타나는 어디에서고 거부된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6) 다시금,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경건의 구별적 특징들을 제공함으로써, '경건'이라는 단어의 적용의 기준들 혹은 사용의 규칙들을 제공함으로써 답변될 것이다. 그러나 구별적 특징의 관념이 가장 강한 의미에서 - 전체이자 유일하며 항상된 것(id quod omni et soli et semper), 그 용어를 적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 이 물음은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에 등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구별적 특징이나 대체 가능한 기준의 제공은 후자의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것이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이 경건을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 특징이 경건한 모든 것들이자 유일하게 경건한 것들을 구별하는 데에 시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떠맡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그것의 가능성을 용인한다. 그는 그가 쉽사리 했었을 것 처럼, 그러한 특징이 경건의 예증들을 동일화함에 있어서 어떤 실질적 사용에 속한 것일지 아닐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에우티프론이 우연히 경건의 πάθος를, 경건한 것들에 대해 우연히 참인 어떤 것을 발견했을지라도, 그가 경건의 οὐσία를, 경건의 본성과 실재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별적 특징의 제공은 그래서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7) 그러나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있다. 그것은 불분명한 답변이지만, 당장의 목적들을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 답변이다. 그것은 '경건'의 의미가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이란 것은 무엇인가 기원하는 것인가?
정확히 그렇다.
8)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은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로 환원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첫번째 물음은 꼴들에 대한 물음들로 바뀌기 때문이다. 만일 비환원성이 존재론적 관련의 기준일 것이라면, 초기 대화편들에는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관련이 있다.
9) 이러한 관련을 제공하는 의미이론은 더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전히 끈질긴 의심을 계속 지닐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일찍이 가상적 불길이 (당신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회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장작개비들을 태우지 않을 그런 종류의 불길이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소피스트』(247e)에서 존재론적 관련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기준, 그가 신들과 거인들에 의해 비슷하게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준을 반영한다: 그것은 존재의 표징이 능력이라는 것이고, 작용하거나 작용받을 그러한 능력이라는 것이다(πάθημα ἢ ποίημα ἐκ δυνάμεώς τινος, 248b). 차이는, 차이이려면,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이, 말하자면 단지 거기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작용할 것,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러한 것을 수행한다; 우리는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이 원인들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지시
1) 만일 '경건'이란 단어의 의미가 경건이라면, 그리고 경건이 꼴이나 본질이라면, 그 단어와 그 어떤 것 사이에 자리하는 관계가 명칭이나 이름 붙임에 속하는 하나의 관계라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방금 이름붙인(ὠνομάσατε) 어떤 것(πρᾶγμα)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묻는다(330c); 나중에, 탁월함이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에 대한 물음은 '지혜', '올바름', '사려', '용기', 그리고 '경건'이 상이한 것들을 위한 이름들(ὀνόματα)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을 위한 이름들인지 탐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한다: 그 대화편들은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이름들임을 전제한다.
2) 콰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미는 그것이 지시대상과 분리되고 그 단어와 결합될 때 본질이 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본질은 그것이 단어와 분리되고 대상과 결합될 때 의미가 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의미되는 어떤 것은, 최소한 때때로라도, 단순히 표현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다소간 세계의 질서에 알맞는 내용의 일부라는 면에서, 그러나 그 자체로 그 본성이 발견에 있는 그러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항목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불완전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말들의 의미를, 혹은 그 중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써 의미하는 어떤 것, 그것의 공공연하거나 또는 명백한 내용과 우리가 만일 그 표현이 지시하는 본질을 이해했다면 의미해야 할 그러한 어떤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우튀프론은 분명 그가 일상적으로 경건을 통해 의미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숙고를 거쳐서, 그는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더욱 숙고한 끝에,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아무것도 경건의 본질을 진술하지 않는다.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도 사이에, 그가 경건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설명과 그가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만일 이따금 의미한다는 것이 이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름지어지는 것이 본질이라면, 의미되는 것은 종종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일 것이다.
3) 만일 때때로 의미함이 본질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본질에 대한 앎이 종종 불완전하다면, '제각기 모든 것이 그것인 것으로 질서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상 언어에 대해 참이 아닐 것인데, 왜냐하면 단어들을 지배하는 사용규칙들이 필연적으로 그 단어들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규칙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해결책은 본질들을 부정하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거듭해서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윤곽을 추적하고 있다고,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그를 통해 본성을 바라보는 그 틀의 주변을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면이 우리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와 우리에게 변치 않고 그것을 반복하는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단어를 사용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단어가 도대체 실제로 그것의 본래 집인 언어 게임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 우리가 행하는 것은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사용으로 되돌려 가져오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반대하고 있던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만일 이 관점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기대고 있는 그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래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주장들도 거짓이다: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 경건이 올바름이라는 주장. 그 말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 현대 영어에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은 지혜롭지 않고도 용맹할 수 있으리라 주장함에 있어서, 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언어적으로 독특한 사물들의 결합은, 그것이 만약 언어에 대한 단순한 전제적 입법일 것이 아니라면, 본질의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과 일상언어
1)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단어들의 일상적 사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사용이 근거하는 것들에 있어서 특징들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한 단어의 사용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 단어를 지시하는 특징과 연관된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면, 그로써 우리가 완전한 암흑 속에 있다는 것이 두따르진 않는다. 그러나 본질과 사용 사이의 관련은 경험적이다: '기준'이라는 용어의 제한적 의미에서, 단어가 지시하는 본질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한 기준이고, 유일하게 신뢰 가능한 기준이다.
2) 이러한 관점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품에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그 언어의 다른 발화자들이 확실하게 동의할 명백한 경우들이 그 용어들의 예시들임을 예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물론 그 용어의 사용을 위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 사용을 관찰함으로써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어진 한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을 '경건'이란 단어에 제공할 기준을 제시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잘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종종 기준보다는 사례가 제시됨을 통해서 어떤 것이 그것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더 잘 배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그러므로 오해된다. 의미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사례에 호소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반대한다는 데에 이어서 그것은 실수이다; 같은 식으로 의미는 사례들이 결정될 수 있기에 앞서 반드시 고정되어야만 한다고 전제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실수이다. 이러한 실수들 때문에,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의미에 대한 충분한 기준이 발견됐을 때 결정에 대한 아무런 건전한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째서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이 그렇게나 일관되게 실패로 끝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잘 받아들여질 것이다. 게임의 규칙들은 아무도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게끔 그렇게 정해져 있다.
3) 확실히 이러한 반대에 핵심이 있다. 에우튀프론은 사례에 호소해서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발화자들이 이상적으로 그 용어를 가지고 이해했던 어떤 것에 호소해서도 경건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앎에 대한 분명한 문제가 하나 있다. 때마침, 『메논』에서 플라톤이 탐구의 역설로 진술하였던,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상기의 원칙으로 해결했던 한 문제가 있다.
4) 그러나 만일 앎의 문제가 분명하다면, 또한 그것은 분명 실재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의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정의될 수는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는 그저 옳을 뿐인게 아니라 확실하게 옳기 때문이다. 만일 a가 F의 한 예라면, 그리고 만일 그에 대해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a가 정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라면, 그리고 만일 b가 F의 한 예라면, b일 것은 a일 것이다; 그리고 a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정의하므로, F일 것은 a일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번갈아서 a는 F의 예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F일 그러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F는 그 자신의 예시이자 유일한 예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F'를 대체하고, 그에 따라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이라는 형요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면, 그 특이함의 원천은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무엇이 이러저러한 용어로 경건한 것을 경건으로 정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5) 동일한 고려들이 경건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주어진 어떤 것이든 그것이 경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대신한다. '나는 a가 F임을 안다'는 명제와 '나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는 명제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내가 a는 F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a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의 일례라는 것을 안다; 만일 내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그것의 한 예시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르고, 만일 내가 a가 그것의 일례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F의 한 예시라는 것을 모르며, 그러므로 a가 F라는 것을 모른다. F일 그러한 어떤 것이 a가 F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것이 뒤따르는데, 오로지 a가 그 특징에 대한 하나의 예시인 그 특징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a가 그 특징의 일례라고 누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주어진 어떤 것이 경건하다는 앎에 선행한다.
6)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한 이러한 방어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주사위를 조작하다) 주장할지 모른다. 그 주장은 어떤 것이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과 아는 것에 관련된 관념들 - 그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적 실수인 - 에 달려 있다. 철학적 탐구의 고유한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사용의 분석이다. 『에우티프론』에서 세워진 그런 종류의 탐구는 그런 분석이 아니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부 제한적 의미에서 (의심할 바 없이 신실하게) 기만이다.
7) 그러나 기만에 대한 그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우튀프론』의 변증이 특별히 다루고자 시도하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분쟁의 해결. 우리는 사례에 호소함으로써 도덕적 용어들의 사용을 위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제안된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로서, 기준의 결여는 사례들이 빗나갈 때 정확하게 감지된다. 사례들의 비일관성은 기준의 비일관성에 대한 조짐이다: 만일 당신의 기준이 나의 사례를 예외로 한다면, 나는 나의 사례를 거부할 것이나, 나는 마찬가지로 당신의 기준도 거부할 것이다. - 많은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구의 소가 뿔에 받혔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모순 여부). 만일 도덕전 논증에서의 호소만이 사례들로부터 추출된 사용기준일 것이라면,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는 각자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다. 도덕적 분쟁을 해소할 궁극적 방법이란 크롬웰 류의 담론에 의지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 - 우리들의 원칙을 교황의 입김과 두드림들로 정통이라 증명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전망은 지나치게 암울한 것이다. 도덕적 의견 불일치, 그것이 아마도 주장될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경계 경우들에서만 발생하고, 분명한 사례들에 호소함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F들이 깔끔하게 그 안에 자리잡히고 모든 비(非)F들이 정확하게 묘사된 원 없이 위치되는, 일종의 객체화된 벤다이어그램으로 상상하면서, 태평스럽게 F인 것들의 계층에 대해 말한다. 진실은 수학적 언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일상 언어에서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그것들을 그 안에서는 그것들의 적용 조건들이 불분명한 반영(半影)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례는 분명히 F인 것과 분명히 F 아닌 것 사이에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범위, 준연속체가 있다는 그런 방식에서 사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컵이다, 그리고 저것은 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저러하게 부르거나 아무것으로도 부르지 않거나 그 둘 모두로 부를 어떤 것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의심스러운 경우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경우들을 분명하게 하기를 기대할 것이고, 경우들을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누구라도 그가 그것들을 논의하고 있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지금 그로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것이 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컵'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어떤 것을 모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도덕적 용어들도 동일하다.
9) 이것이 참이라면 그건 즐거울 일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도덕적 용어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지적하였듯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만드는 어떠한 상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용어들과 함께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들, 한 사람의 분명한 경우가 두번째 사람에게 반영을 드리울 수 있고 세번째 사람을 덮으며, 이것이 단순히 주변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추론이 그것을 가지고 다루어야만 할 가장 핵심적 문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특이점을 가진다. 이러한 점을 사례들을 들어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필요할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 비참하고 소란한 세기(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되었다)에, 독자는 그 스스로 감당하도록 남겨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마도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이 역설이리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악이 실어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지적하는 모험을 할지도 모른다. 만일 선과 악에 대한 물음들이 사람들이 언어로 하는 게임들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또는 태도나 관습 혹은 취향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도덕적 앎과 같은 어떤 것이 있다거나 혹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앎이 본질에 대한 식별에 존립한다는 『에우튀프론』의 주장은,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확실히 기만은 아니다.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함이 없이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 이름지어지는 단 하나의 것(Unum Nomen Unum Nominatum)
1) 지시적 의미 이론들은 종종 특유한 필연적 귀결, unum nomen unum nominatum(the sole name the sole named)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다양한 비판자들은 그들이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러한 전제를 감지했다고 생각해 왔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X는 무엇인가?)이 답변을 허용하는 정당한 물음이라면 … 우리는 반드시 X라는 단어가 단일한 뜻을 가진다고 전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로스 교수 또한 소크라테스적 물음에서 이러한 함축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플라톤은 이름의 의미에서 모호함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기로는 그가 이것을 다소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했고, 겉보기에 가장 순전한 이름이 가질 의미조차도 변화하는 그 의미의 음영을 완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추론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묻고 답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는 더 나아가 경건이 하나의 꼴이나 본질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은 '경건'이나 '경건함'과 같은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로 사용된다거나 사용될 수 있다거나 하는 물음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 잘못된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상이한 것들을 부르는 것과 그렇게 불리는 것들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설명하기 위해 경건이 본질이라고 전제한다는 흐릿한 참을 가장한다. 이것은, 만일 그것이 일상언어에 대한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각 단어에 대해 하나의 유일하게 정확한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모호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umun nomen unum nominatum을 수반할 수가 없다.
2) 그것은 로스 교수와 Mr 로빈슨이 추정하는 것처럼 절대의미와 모호의미 사이에 엄격한 괴리를 시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의미에서의 같음과 의미에서의 다름이 배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양자택일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만일 의미가 지시라면, 그 결론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이론이다. 그 이론에서 각각의 중요한 단어는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보편개념을 도입하거나, 서로 다른 보편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중심 주위로 우위성과 후위성의 질서에서 조직화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올바르고 행위들이 올바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체』(Ⅳ, 443e-444a)에서 올바른 행위들은 사람들 안에 영혼의 조건으로서 올바름을 산출하도록 지키거나 돕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이란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사람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정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 형용사는 우선 사람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파생적 의미에서 행위에 대해 사용되며, 이것은 절대의미도 모호의미도 아니며, 어원유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꼴, 기본 사용과 파생 사용 양자에서 도입되는 동일한 꼴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어원유래에 대한 사실을 인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것이 그렇다는 강력한 암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꼴들에 대한 이론과 용어들의 어원유래적 사용 사이에 어떠한 양립불가능성도 없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 그 자체는 특정 종류의 어원들에 속하는 우선 지시되는 것들이 된다.
3) 만일 umun nomen unum nominatum이라는 꼬리표가 좌우간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상 언어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어원을 제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언어의 개선을 위한 이상, 어휘의 조화가 세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요구로서 가장 잘 받아들여진다. 『크라튈로스』에서 하나의 이름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도구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날실과 씨실을 가르면서 북으로 베를 짠다; 바로 그렇게,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에 따라 나누면서 이름을 가지고 가르친다(388b-c). 그리고 보통의 아무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부숴질 수 있는 어떤 모형이 아니라 북 그 자체의 꼴을 보는 목수에 의해서 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름들은 아무개가 아니라 작명가에 의해, '모든 공예가들 중 가장 드문' 그 기술자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389a); 작명가는 각각의 이름을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맞추면서,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이름 그 자체의 꼴을 볼 것이다(389d). 그리고 목수의 작품의 가치를 직조공이 판단할 것과 같이, 그렇게 변증가는 이름들의 부여자에 의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것이다(390c). 플라톤주의는, 일상언어에 대한 그 태도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수정주의적이다.
4) 이름들을 부여하는 이러한 사업은 umun nomen unum nominatum에 관련되는데, 그렇지만, 이제껏 제시된 어떤 것과도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메논』(71e 이후로)에서, 메논이 탁월함을 정의하도록 요구받을 때, 그는 그 각각이 고유한 정의를 지닌 탁월함들의 목록으로 응답한다: 사내의 탁월함은 폴리스를 돌보는 것이고, 친구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며, 적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여성의 탁월함은 그녀의 남편에게 명령하고 또 그 남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노예들, 노인들에 대한 다른 탁월함들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답변을 거부한다: 메논은 그에게 한 무리의 탁월함들을 주었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의 것, 하나의 탁월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은 물론 단 하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더욱이 'x의 탁월함'과 'y의 탁월함' 등에 대해 다양한 '~의 탁월함들'에 공통된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탁월함'은 총괄적 단어도 아니고, 불완전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의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내들의 탁월함과 여성들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때, 어째서 우리가 어원들도 단순히 얼버무리는 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메논』과 『테아이테투스』 모두에서 그것은 오히려 보편성의 더 높고 더욱 흥미로운 단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취해진다. 자신의 일을 알고 있는 작명가는 짐작컨데 그것을 마음 속에 품을 것이다.
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이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2) 그러나 이러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은 초기 대화편들을 뛰어 넘었다는 것이다.
3. 꼴들의 현존
1)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의 꼴을 존재하는 것으로 다루고, 그와 에우튀프론은 그 꼴의 본성을 발견해 보기로 했다. 현존에 대한 이러한 존재는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발견된다. 예를 들어『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 어떠한 것인지 혹은 그게 아무것도 아닌지(πρᾶγμα τι ἢ οὐδὲν πρᾶγμα) 묻고, 프로타고라스가 그것이 분명 어떠한 것이라고 그에게 동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이란 게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탐구를 계속한다. 더 나아가 경건이 올바름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의 차이는 있다 할지라도, 경건이 어떠한 것임은 동의된다. 프로타고라스는 더 먼저 소크라테스에 의해 탁월함이 단일한 것이라고 말하도록 이끌렸다; 그는 나중에 각각의 탁월함은 그것의 고유하게 특유한 본성과 실재성을 가진다고 말할 것이다. 사실, 『프로타고라스』의 변증은 정확히 현존의 문제로 돌아선다(349b-c):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지혜', '사려', '용기', '올바름', '경건'이 동일한 어떤 것에 대한 다섯 가지 서로 다른 이름들인지 아닌지, 또는 그러한 이름들의 각각에 대해 그에 특유한 특정한 본성과 실재성(οὐσία)을, 각 경우에, 다른 어떤 그런 종류에도 속하지 않는, 그것의 고유한 기능을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을, 거기에서 답하는지 아닌지. 이제, 프로타고라스, 당신은 그러한 이름들의 각각이 그것에 특유한 뭔가에 대해 답한다고 말했다. 설명 그것들 모두가 탁월함의 부분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여기에서 그 물음은, 어떤 탁월함들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물음은 여러 탁월함들이 있는지 아니면 오직 하나의 탁월함만이 있는지 하는 것이다. 『에우튀프론』에서와 비슷하게, 수학, 기하학, 천문학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에 중요한 구절로서, 그리고 수학자들이 찾아다닐 사람들로 이야기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도해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τὰ ὄντα, 실재성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탐색자들로서, 그들은 그들이 잡은 것을 사용하지 않지만, 그들의 사냥감을 적절히 사용하기 위해 변증론자들에게로 돌려야만 한다 (290b-c). 다시, 소크라테스의 비유들 대다수는 존재론적 가정 없이는 무의미해질 것이다 - 예를 들어, 탁월함과 『라케스』에서 도출되는 시야 사이의 유비와 같은 것들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부가하는 것으로 그것이 부가된 것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그에 대해 안다면, 그리고 나아가서, 만일 우리가 그것을 덧붙일 수 있다면,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가장 좋게 그리고 가장 쉽게 그것을 얻을지에 대해서 상담자들이 될 그러한 것 자체인 것을 알아야만 한다. 혹시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가? 이런 식으로 보자. 만일 우리가 두 눈에 덧붙여진 시야는 그것이 덧붙여진 그것을 더욱 좋게 만든다는 것을 안다면, 그리고 나아가, 만일 우리가 그 눈에 그것을 더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시야의 본질적 본성을 알고, 그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그리고 가장 쉽게 취해지는지에 대한 조언자들이 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시각이나 청각의 본질적 본성인 그러한 것 자체를 알지 못한다면, 상담자나 의사로서 눈과 귀의 문제에 있어서 적임자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처럼, 라케스, 여기 우리의 두 친구들이 이제 어떻게 탁월함이 그들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영혼들에 덧붙여질지에 대해 상담하기 위해 우리를 초대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필요한 것은 탁월함의 본질적 본성을 아는 것이다. 확실히, 만일 우리가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가장 훌륭하게 그것을 획득할지에 대해 조언자들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시각은 눈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청각은 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탁월함은 영혼에 대한 것이다. 시각과 청각은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탁월함은 있는 것이다.
2) 이런 현존에 대한 가정은 변증에 있어서 하나의 역할을 담당한다; 더욱 정확하게, 그것은 그 핵심을 설명한다. 변증의 목표는 실재적 정의이다; 현존적 전제는 정확하게 실재적 정의가 발견되리라는 전제이다. 경건에 대한 참된 설명은 임의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에우튀프론이나 혹은 다른 누구라도 우연히 그의 마음에 떠오른 것으로서, 또는 그러한 방식에서 그가 사용하는 말들로서 그러한 내용에 기초하지 않는다: 참된 설명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설명이다.
언어와 현존
1) 이러한 해석은 초기 대화편들 속에 꼴들의 현존에 대한 그 어떤 형이상학적 관련도 없다는, 그리고 꼴들에 대해 '단순하게 언어적인 문제'가 있을 따름이라고 말하는 공통되게 주장되는 관점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한 관점은 언어와 언어를 사용해 주장하는 어떤 것 사이의 혼동인 듯하다. 무사이 여신들은 그들의 현전에 의해 도취된 시인에게, 비프스테이크의 붉음에 드문 일몰의 붉음을 비교하도록 영감을 줄 것이다; 그 여신들은 그 시인이 그의 존재론에 따라 일몰들과 비프스테이크들에 붉음을 더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영감을 주거나 그로써 영감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만일 같은 시인이, 더 도취되지 않은 분위기에서, 일몰들과 비프스테이크들뿐만 아니라 곳간들, 소방차들, 러시아인들, 그런 비슷한 모든 것들에 공통된 특징의 본성을 이야기하게 되길 바란다고 설명하면서, 붉음이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다면; 만일 그가 계속해서, 그가 그것인 어떤 것을 배웠을 때 그가 그것을 실제로 붉은 어떤 것을 그렇지 않은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해내기 위한 표준으로서 그것을 사용할 것을 기대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그것의 αὐσία, 본성과 실재성을 진술할 그것에 대한 적절한, 그리고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표현되는 설명을 기대했다는 것을 더했다면 - 요약해서, 만일 그가 실재적 정의에 대한 규칙을 마련하고 그의 탐구에 있어서 그 규칙들을 따랐더라면, 무사이 여신들이 그에게 내렸던 그 영감이 시적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적이었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가 이제 세계가 있는 방식과 그 방식이 담고 있는, 일상언어나 일반적 상식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훨씬 넘어선 어떤 것에 대한 관점을 지니지는 않는지 의심하기 시작해야 한다.
2) 이에 대한 남은 반대는,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들이 사실은 꼴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전제를 필요로 했다면, 그의 응답자들은 그것들에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에우튀프론과 같은, 그 밖에 다른 누구든, 변증론자가 아닌 사람은 경건의 ἰδέα가 있다는 전제를 이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고 또 주장될 것이다. 확실히 플라톤 자신이 도덕에 있어서 인습주의자로 그려냈던 프로타고라스는 주저 없이 올바름'은 어떠한 것이다'라는 것에 동의하게끔 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프로타고라스가 그로써 추상적 대상들의 존재론을 수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동의는 오히려 언어의 일상적 사용들에 의해 유도되었을 성싶다. 냉소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로 부족한 우리 모두는 무엇보다도 올바름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3) 그 반대는 추상물들을 인격화하는 고대 그리스의 경향을 지적함으로써 강화될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 산문작가들에게서 추상적 명사들은 드물게 동사들의 주어가 된다; 평범한 행위자들은 인간존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예외들이 있다. …추상적 주어의 사용이 의인화의 발상을 - 상이한 경우들에 있어서 - 얼마나 수반하는지 말하는 것은 때로 어렵다. 아마도 고대 그리스인은 대답에 대해 당황했을 것이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의인화가 나타나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의인화가 종교적이거나 극적인 암시들을 일으키는지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추상적 주어는 그리스에서 언제나, 또는 거의 언제나 최소한 의인화의 어떤 색조를 띤다. 우리는, 얼마나 완전하게 우리 고유의 언어에서 추상적 주어가 의인화하는 능력을 상실했는지 보기 위해 오직 크세노폰의 ἀναγκάζει με καὶ ταῦτα ὁμολογεῖν ἡ ἐμὴ φαυλότης,라는 경구(『메모라빌리아』, Ⅳ, ii, 39)를 영어 'candour compels me to admit(정직이 나에게 인정하도록 강제한다)'라는 말과 비교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구절들을 영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첫 대문자들의 18세기 사용을 되살림으로써 마주칠 심각한 어려움이 일어난다.
그러나 의인화는 형이상학을 수반하기 어렵다 - candour가 Candour라고 할지라도.
4) 데니스톤이 여기에서 고찰하고 있는 추상 개념들은 잠(Sleep), 밤(Night), 그리고 탈선(Digression) 같은 명사들이다. 의인화가 형용사적 추상어들에서 'the holy' 또는 'holiness'처럼 관사나 접미사와 관련되는지 보는 일은, 비록 그것이 그렇다 할지라도 덜 쉽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여전히 초기대화편들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그런 보편개념들의 실체화는 진정한 존재론적 관련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장될 것이다. 우리는 유니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유니콘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물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경건이 존재한다고 추정함이 없이 경건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 물을 것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 신이 있다고 추정하지 않고 몇몇 그리스 신들은 간통을 했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어떤 탁월함들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여러 탁월함들이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일상적 언어에서 - 일상적인 근대 영어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고대 그리스어에서도 - 어떤 의미에서 어떤 것이 '있다(이다)'고 말할 것이다 - εἶναι πως; 그러나 그래서 εἶναι πως는 εἶναι와 상당히 거리가 멀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한 가지 것일 것이다; 그것은 실제 세계에서 하나의 요소일 또 다른 것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올바름의 현존에 대한 일상적 언어나 공통 감각의 관련이 Mr Pickwick에 대한 그것의 관련과 훨씬 더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지 않다. 물론 Mr Pickwick와 같은 그런 사람이 있다. - 그는 일찍이 Sam Weller와 함께 선거들을 위해 Eatanswill로 여행했다. 그러나 Pickwick적인 여행들은 Pcikwick적인 올바름과 같다. 비록 각각이 그것들의 고유한 방식에서 흥미로 가득 찬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존재론적으로 불분명하다. 어째서 이것은 또한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참이 아니어야 하는가?
5) 그 물음은 쉽사리 답해진다. 일상적인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실체들'에 대한 관련 또는 용인에 의해 꼴들의 현존에 대한 초기 대화편들의 관련이 측정되리라고 추정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보편개념, 표준, 본질로 다루어진다. 이러한 취급은 전문적이며 공식적이다; 일상적 언어는 이런 식으로 생각되는 추상들의 현존에 관련되지 않는다. 프로타고라스가 정의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에 그로써 그것을 꼴로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래서 그는 올바름이 무엇인지 몰랐다. 에우튀프론이 초반에 경건이 하나의 ἰδέα임을 수용했다는 것은 참이다; 그가 그것을 얼마나 조금 이해하는지는 대화의 남음 부분에서의 변증이 보여준다.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그 관련은 '단순히 언어에 속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에 속하는 문제이다 - 본질의 형이상학 말이다.
6) 그러나 만일 소크라테스가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이론을 갖춘다면, 어떻게 그가 그것을 일상인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적용하는 것 - 더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 이 가능하다는 것인가? 그 대답은, 비록 꼴들에 대한 이론이 나아가 형이상학적 이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또한 본질적으로, 진부한 단어의 한 의미로, 의미에 대한 이론임으로써, 공통 감각(상식)과 연관되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사려라고 말하는가?' 소크라테스가 카르미데스에게 묻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리스어를 할 줄 아니까, 당신은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이 당신에게 어떠한 것으로 보이는지 말할 수 있다.' 크리티아스가 오로지 그를 논박하기만을 위해서 논증할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떠넘길 때, 소크라테스는 대답한다:
만일 내가 당신을 논박하는 데에 나의 최선을 다 한다면,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지점에서 내 주의를 빠져나간다면 그러지 못하도록 그렇게 나 자신의 말들이 뜻하는 어떤 것을 검토하는 것보다, 내가 다른 어떤 동기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믿는가?
평범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그들에게 그들이 뜻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묻기 시작한 오래 전부터경건에 대해 말해 왔다. 그의 탐구는 경건에 대한 정밀함에 의해 구별되었다. 그는 경건의 동의어들, 혹은 경건의 사례들, 또는 경건의 구별되는 특징들을 원한 것이 아니라, 경건의 본질에 대한 분석을 원했다. 그의 물음은 공통 감각(상식)이 그 자신의 고유한 방책들에 기대어 물을 그러한 것이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상식이 확실히 이끌릴 물음이고, 『에우튀프론』의 변증은, 소크라테스가 에우튀프론으로 하여금 그의 물음의 실질적 본성을 보도록 만드는 내내 노력한 것과 같이, 사실상 그러한 인도의 기록이다. 변증의 진행은 '경건 같은 그러한 것이 이다'라는 응답자의 순진한 현존 전제에서, 만일 변증이 성공적이라면, 경건의 본질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이 정의될 수 있다는 고도로 정교화된 현존 전제에 대한 그 응답자의 수락으로 이행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만일 후자의 주장이 참이라면, 그 이행은 연속적이다: 본질에 대한 관련은 우리의 일상적 단어 사용에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경건의 본질은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그것이다; 우리가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다.
환원성
1)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이 현존한다고 주장되거나 암시되는 단언들로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단언들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로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증거가 아직 그 결론을 반대하는 학자들에게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기 때문에, 그 문제를 더 밀고 나가 보는 것이 좋을 지도 모르겠다.
2) 누군가는 이런 논증을 그려볼 수도 있겠다. 그 저술은 의심의 여지 없이 꼴들이 현존한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 저술은 그런 주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추정되는 존재론적 관련이 사실 암암리에 어쨌든 언어적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피할 수 있다. 플라톤은 - 누군가는 그 논증이 연이어지는 것을 상상할 것이다 - 실제로 언어에 대한 사실들인 항목들을 세계에 대한 사실들로 표현하기 위해, 담화의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의심할 것 없는 불가피한 편애라고 할지라도, 운이 나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분석으로서 제공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피할 수 있는 담화방식이다.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거나 시사하는 진술들은 논리적 여항 없이 꼴들의 현존을 주장하지 않는 진술들로 환원가능하거나 분석가능하다. 본질에 대한 물음들은, 플라톤 자신조차 동의했을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에 대한 물음들이고, 의미에 대한 물음들은 당연히 언어적이다. 적절하게 이해된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 그리고 플라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적절하게 그것을 이해하지 않았는데 - 세계를 향해서가 아니라 말들의 의미를 향해 정향된다. 결국, 꼴들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짐작컨데 단어들이 의미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탐구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의미를 분명하게 만들 것이라 기대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보편개념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이한 문맥들에서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단어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고, 그 단어들이 우리가 나타내는 것들을 묘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표준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 서술이 해당하는 상황들을 동일화할 수단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꼴들이 본질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 서술의 의미에 대한 모든 각각의 설명이 그 의미인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은 요약하자면 '"경건"이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초기 대화편들에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언질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이중적이고, 이중의 대답을 허용한다. 만일 그 물음이 그러한 대화편들의 본문이 꼴들의 현존을 긍정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라면, 그 대답은 긍정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 물음이 플라톤이 상술하고 있는 위치의 논리가 꼴들의 현존을 요청하느냐는 것이라면, 그 대답은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 그래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물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이러한 대체가 순환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4) 몇몇 상황들 아래에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은 사전적일 것이고, 프로디쿠스나 아니면 사전에 의해 대답될 물음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하게, '경건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문자상의 동의어들에 대한 탐구에 종사하지 않는다. 에우튀프론조차 소크라테스가 경건이 신성함이라는 답으로 만족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5) 다시,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실물 지시적 정의', 예시에 호소하는 정의에 의해 대답될 것이다. 그러나 예시가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협소하게 구성되는지, 아니면 요청되는 특징을 드러내 보이는 일반적 경우로서 더 넓게 구성되는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이런 종류의 답변은 초기 대화편에서 그러한 답변이 나타나는 어디에서고 거부된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또는 더욱 일반적으로,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없다.
6) 다시금,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아마도 경건의 구별적 특징들을 제공함으로써, '경건'이라는 단어의 적용의 기준들 혹은 사용의 규칙들을 제공함으로써 답변될 것이다. 그러나 구별적 특징의 관념이 가장 강한 의미에서 - 전체이자 유일하며 항상된 것(id quod omni et soli et semper), 그 용어를 적용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 - 이 물음은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그 물음에 등가가 아닌데, 왜냐하면 구별적 특징이나 대체 가능한 기준의 제공은 후자의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둘 것이기 때문이다. 에우튀프론이 경건을 모든 신들이 사랑하는 것으로 정의할 때, 소크라테스는 이 특징이 경건한 모든 것들이자 유일하게 경건한 것들을 구별하는 데에 시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을 떠맡지 않는다; 그는 맹목적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거나, 최소한 그것의 가능성을 용인한다. 그는 그가 쉽사리 했었을 것 처럼, 그러한 특징이 경건의 예증들을 동일화함에 있어서 어떤 실질적 사용에 속한 것일지 아닐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에우티프론이 우연히 경건의 πάθος를, 경건한 것들에 대해 우연히 참인 어떤 것을 발견했을지라도, 그가 경건의 οὐσία를, 경건의 본성과 실재성을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별적 특징의 제공은 그래서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7) 그러나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또 다른 종류의 답변이 있다. 그것은 불분명한 답변이지만, 당장의 목적들을 위해서 중요한 한 가지 답변이다. 그것은 '경건'의 의미가 경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이란 것은 무엇인가 기원하는 것인가?
정확히 그렇다.
8)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에 대한 물음들은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물음들로 환원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단어들의 의미에 대한 첫번째 물음은 꼴들에 대한 물음들로 바뀌기 때문이다. 만일 비환원성이 존재론적 관련의 기준일 것이라면, 초기 대화편들에는 꼴들에 대한 존재론적 관련이 있다.
9) 이러한 관련을 제공하는 의미이론은 더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독자는 여전히 끈질긴 의심을 계속 지닐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일찍이 가상적 불길이 (당신이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회피 가능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장작개비들을 태우지 않을 그런 종류의 불길이라고 언급했었다. 이것은 『소피스트』(247e)에서 존재론적 관련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기준, 그가 신들과 거인들에 의해 비슷하게 공유되었다고 생각했던 기준을 반영한다: 그것은 존재의 표징이 능력이라는 것이고, 작용하거나 작용받을 그러한 능력이라는 것이다(πάθημα ἢ ποίημα ἐκ δυνάμεώς τινος, 248b). 차이는, 차이이려면,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만일 꼴들이 존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이, 말하자면 단지 거기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작용할 것,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그것들은 이러한 것을 수행한다; 우리는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이 원인들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본질과 지시
1) 만일 '경건'이란 단어의 의미가 경건이라면, 그리고 경건이 꼴이나 본질이라면, 그 단어와 그 어떤 것 사이에 자리하는 관계가 명칭이나 이름 붙임에 속하는 하나의 관계라고 추정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이러한 관점을 뒷받침한다. 『프로타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방금 이름붙인(ὠνομάσατε) 어떤 것(πρᾶγμα)이 정의로운지 정의롭지 않은지 묻는다(330c); 나중에, 탁월함이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에 대한 물음은 '지혜', '올바름', '사려', '용기', 그리고 '경건'이 상이한 것들을 위한 이름들(ὀνόματα)인지 아니면 동일한 것을 위한 이름들인지 탐구하는 형식을 취한다.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한다: 그 대화편들은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이름들임을 전제한다.
2) 콰인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미는 그것이 지시대상과 분리되고 그 단어와 결합될 때 본질이 되는 어떤 것이다.' 반대로, 본질은 그것이 단어와 분리되고 대상과 결합될 때 의미가 되는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의미되는 어떤 것은, 최소한 때때로라도, 단순히 표현이라는 면에서가 아니라, 다소간 세계의 질서에 알맞는 내용의 일부라는 면에서, 그러나 그 자체로 그 본성이 발견에 있는 그러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항목이 된다. 우리는 세계를 불완전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말들의 의미를, 혹은 그 중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이해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보자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나의 표현으로써 의미하는 어떤 것, 그것의 공공연하거나 또는 명백한 내용과 우리가 만일 그 표현이 지시하는 본질을 이해했다면 의미해야 할 그러한 어떤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에우튀프론은 분명 그가 일상적으로 경건을 통해 의미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살인자들과 성물 절도범들을 고소하는 것을 말한다; 숙고를 거쳐서, 그는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더욱 숙고한 끝에,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 중 아무것도 경건의 본질을 진술하지 않는다. 그의 이해력과 그의 의도 사이에, 그가 경건에 대해 제시할 수 있는 설명과 그가 설명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본질 사이에 차이가 있다. 만일 이따금 의미한다는 것이 이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름지어지는 것이 본질이라면, 의미되는 것은 종종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목표일 것이다.
3) 만일 때때로 의미함이 본질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본질에 대한 앎이 종종 불완전하다면, '제각기 모든 것이 그것인 것으로 질서지어져 있다'는 것은 이상 언어에 대해 참이 아닐 것인데, 왜냐하면 단어들을 지배하는 사용규칙들이 필연적으로 그 단어들이 그에 의해 통제되어야 하는 규칙들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해결책은 본질들을 부정하는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거듭해서 사물의 본성에 속하는 윤곽을 추적하고 있다고, 그리고 단순히 우리가 그를 통해 본성을 바라보는 그 틀의 주변을 추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장면이 우리를 달아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언어와 우리에게 변치 않고 그것을 반복하는 듯이 보이는 언어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이 단어를 사용하고 그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누군가는 반드시 그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 단어가 도대체 실제로 그것의 본래 집인 언어 게임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는가? - 우리가 행하는 것은 단어들을 그 형이상학적 사용으로부터 우리 일상의 사용으로 되돌려 가져오는 것인가?
비트겐슈타인은, 그가 반대하고 있던 것을 아주 잘 알았다. 만일 이 관점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적 변증이 기대고 있는 그 전제들은 거짓이다. 그래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적 주장들도 거짓이다: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 용기가 지혜라는 주장, 경건이 올바름이라는 주장. 그 말들은 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 현대 영어에서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고대 그리스어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사람은 지혜롭지 않고도 용맹할 수 있으리라 주장함에 있어서, 그의 언어 사용 규칙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크라테스의 언어적으로 독특한 사물들의 결합은, 그것이 만약 언어에 대한 단순한 전제적 입법일 것이 아니라면, 본질의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본질과 일상언어
1)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단어들의 일상적 사용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들의 사용이 근거하는 것들에 있어서 특징들을 탐구해 들어가는 것이다. 한 단어의 사용은 의심할 나위 없이 그 단어를 지시하는 특징과 연관된다; 만일 우리가 언제나 사물들의 본성에 대해 명확하지 않다면, 그로써 우리가 완전한 암흑 속에 있다는 것이 두따르진 않는다. 그러나 본질과 사용 사이의 관련은 경험적이다: '기준'이라는 용어의 제한적 의미에서, 단어가 지시하는 본질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한 기준이고, 유일하게 신뢰 가능한 기준이다.
2) 이러한 관점에 대한 하나의 반박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어머니 품에서 말하는 것을 배웠고, 말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일반적인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 용어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아는 것은 그 언어의 다른 발화자들이 확실하게 동의할 명백한 경우들이 그 용어들의 예시들임을 예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 용어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물론 그 용어의 사용을 위한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 사용을 관찰함으로써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어진 한 행위가 경건하다는 것을 '경건'이란 단어에 제공할 기준을 제시할 수 없어도 완벽하게 잘 알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종종 기준보다는 사례가 제시됨을 통해서 어떤 것이 그것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을 더 잘 배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그러므로 오해된다. 의미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사례에 호소하는 것을 허용하기를 반대한다는 데에 이어서 그것은 실수이다; 같은 식으로 의미는 사례들이 결정될 수 있기에 앞서 반드시 고정되어야만 한다고 전제함에 있어서도 그것은 실수이다. 이러한 실수들 때문에, 소크라테스적 변증은, 의미에 대한 충분한 기준이 발견됐을 때 결정에 대한 아무런 건전한 수단도 가지지 못하고 부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째서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이 그렇게나 일관되게 실패로 끝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잘 받아들여질 것이다. 게임의 규칙들은 아무도 그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게끔 그렇게 정해져 있다.
3) 확실히 이러한 반대에 핵심이 있다. 에우튀프론은 사례에 호소해서도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발화자들이 이상적으로 그 용어를 가지고 이해했던 어떤 것에 호소해서도 경건을 정의할 수 없다. 그러면 그는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여기에는 앎에 대한 분명한 문제가 하나 있다. 때마침, 『메논』에서 플라톤이 탐구의 역설로 진술하였던,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상기의 원칙으로 해결했던 한 문제가 있다.
4) 그러나 만일 앎의 문제가 분명하다면, 또한 그것은 분명 실재의 문제인데, 왜냐하면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의 사례들을 제시함으로써 정의될 수는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는 그저 옳을 뿐인게 아니라 확실하게 옳기 때문이다. 만일 a가 F의 한 예라면, 그리고 만일 그에 대해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a가 정의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라면, 그리고 만일 b가 F의 한 예라면, b일 것은 a일 것이다; 그리고 a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정의하므로, F일 것은 a일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번갈아서 a는 F의 예시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F일 그러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거나, F는 그 자신의 예시이자 유일한 예시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F'를 대체하고, 그에 따라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경건'이라는 형요사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경건'이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한다는 것은 분명해 진다면, 그 특이함의 원천은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무엇이 이러저러한 용어로 경건한 것을 경건으로 정의하는 것을 의미할 것인가?
5) 동일한 고려들이 경건의 본성을 알지 못하고서는 주어진 어떤 것이든 그것이 경건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대신한다. '나는 a가 F임을 안다'는 명제와 '나는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는 명제는 양립할 수 없다. 만일 내가 a는 F라는 것을 안다면, 나는 a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의 일례라는 것을 안다; 만일 내가 F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그것의 한 예시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르고, 만일 내가 a가 그것의 일례일 그러한 어떤 것을 모른다면, 나는 a가 F의 한 예시라는 것을 모르며, 그러므로 a가 F라는 것을 모른다. F일 그러한 어떤 것이 a가 F인지 아닌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이라는 것이 뒤따르는데, 오로지 a가 그 특징에 대한 하나의 예시인 그 특징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a가 그 특징의 일례라고 누군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건일 그러한 어떤 것은 주어진 어떤 것이 경건하다는 앎에 선행한다.
6)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한 이러한 방어가 수작을 부린 것이라고(주사위를 조작하다) 주장할지 모른다. 그 주장은 어떤 것이 무엇임을 정의하는 것과 아는 것에 관련된 관념들 - 그것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적 실수인 - 에 달려 있다. 철학적 탐구의 고유한 목적은 정의가 아니라 사용의 분석이다. 『에우티프론』에서 세워진 그런 종류의 탐구는 그런 분석이 아니고, 이것이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일부 제한적 의미에서 (의심할 바 없이 신실하게) 기만이다.
7) 그러나 기만에 대한 그 주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에우튀프론』의 변증이 특별히 다루고자 시도하는 문제를 고려해 보자: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 분쟁의 해결. 우리는 사례에 호소함으로써 도덕적 용어들의 사용을 위한 기준에 도달해야 한다고 제안된다. 하지만 실천적인 문제로서, 기준의 결여는 사례들이 빗나갈 때 정확하게 감지된다. 사례들의 비일관성은 기준의 비일관성에 대한 조짐이다: 만일 당신의 기준이 나의 사례를 예외로 한다면, 나는 나의 사례를 거부할 것이나, 나는 마찬가지로 당신의 기준도 거부할 것이다. - 많은 것이 의심의 여지 없이 누구의 소가 뿔에 받혔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모순 여부). 만일 도덕전 논증에서의 호소만이 사례들로부터 추출된 사용기준일 것이라면,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는 각자 논리적으로 난공불락의 위치에 있다. 도덕적 분쟁을 해소할 궁극적 방법이란 크롬웰 류의 담론에 의지하는 외에 아무것도 없다 - 우리들의 원칙을 교황의 입김과 두드림들로 정통이라 증명하는 것이다.
8) 그러나 아마도 이러한 전망은 지나치게 암울한 것이다. 도덕적 의견 불일치, 그것이 아마도 주장될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경계 경우들에서만 발생하고, 분명한 사례들에 호소함으로써 해소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F들이 깔끔하게 그 안에 자리잡히고 모든 비(非)F들이 정확하게 묘사된 원 없이 위치되는, 일종의 객체화된 벤다이어그램으로 상상하면서, 태평스럽게 F인 것들의 계층에 대해 말한다. 진실은 수학적 언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일상 언어에서 가장 일반적인 용어가 그것들을 그 안에서는 그것들의 적용 조건들이 불분명한 반영(半影)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사례는 분명히 F인 것과 분명히 F 아닌 것 사이에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범위, 준연속체가 있다는 그런 방식에서 사례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것은 컵이다, 그리고 저것은 그릇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러저러하게 부르거나 아무것으로도 부르지 않거나 그 둘 모두로 부를 어떤 것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의심스러운 경우들을 판단하기 위해서 경우들을 분명하게 하기를 기대할 것이고, 경우들을 그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누구라도 그가 그것들을 논의하고 있는 그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만일 당신이 내가 지금 그로부터 커피를 마시고 있는 이것이 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컵'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어떤 것을 모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도덕적 용어들도 동일하다.
9) 이것이 참이라면 그건 즐거울 일일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렇지는 않다. 도덕적 용어들은 일찍이 플라톤이 지적하였듯 '사람들에게 눈에 띄게 만드는 어떠한 상도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마도 경험적 용어들과 함께일 것이다, 선악의 문제, 옳고 그름의 문제들, 한 사람의 분명한 경우가 두번째 사람에게 반영을 드리울 수 있고 세번째 사람을 덮으며, 이것이 단순히 주변부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 추론이 그것을 가지고 다루어야만 할 가장 핵심적 문제들에 관한 것이라는 특이점을 가진다. 이러한 점을 사례들을 들어 주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필요할 것이다 - 다행스럽게도 -; 비참하고 소란한 세기(이 책은 1970년대에 출판되었다)에, 독자는 그 스스로 감당하도록 남겨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마도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이 역설이리라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리라고 할지라도, 악이 실어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지적하는 모험을 할지도 모른다. 만일 선과 악에 대한 물음들이 사람들이 언어로 하는 게임들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또는 태도나 관습 혹은 취향에 대한 물음들이 아니라면, 도덕적 앎과 같은 어떤 것이 있다거나 혹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면, 앎이 본질에 대한 식별에 존립한다는 『에우튀프론』의 주장은, 그것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할지라도, 확실히 기만은 아니다. 다루어져야 할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함이 없이 거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단 하나의 이름 이름지어지는 단 하나의 것(Unum Nomen Unum Nominatum)
1) 지시적 의미 이론들은 종종 특유한 필연적 귀결, unum nomen unum nominatum(the sole name the sole named)을 가져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다양한 비판자들은 그들이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이러한 전제를 감지했다고 생각해 왔다. Mr 리차드 로빈슨은 '만일 소크라테스의 물음(X는 무엇인가?)이 답변을 허용하는 정당한 물음이라면 … 우리는 반드시 X라는 단어가 단일한 뜻을 가진다고 전제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로스 교수 또한 소크라테스적 물음에서 이러한 함축을 발견하고,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플라톤은 이름의 의미에서 모호함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기로는 그가 이것을 다소 드물게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했고, 겉보기에 가장 순전한 이름이 가질 의미조차도 변화하는 그 의미의 음영을 완전히 알아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추론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는 '경건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을 묻고 답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는 더 나아가 경건이 하나의 꼴이나 본질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은 '경건'이나 '경건함'과 같은 단어들이 상이한 의미로 사용된다거나 사용될 수 있다거나 하는 물음에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 잘못된 추론은 소크라테스는 다른 것들 중에서 우리가 같은 이름으로 상이한 것들을 부르는 것과 그렇게 불리는 것들로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설명하기 위해 경건이 본질이라고 전제한다는 흐릿한 참을 가장한다. 이것은, 만일 그것이 일상언어에 대한 주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각 단어에 대해 하나의 유일하게 정확한 의미가 있다고, 그리고 모호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생각된다면, umun nomen unum nominatum을 수반할 수가 없다.
2) 그것은 로스 교수와 Mr 로빈슨이 추정하는 것처럼 절대의미와 모호의미 사이에 엄격한 괴리를 시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의미에서의 같음과 의미에서의 다름이 배타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양자택일적이라 생각하기 쉽다. 만일 의미가 지시라면, 그 결론은 보편개념들에 대한 날카로운 이론이다. 그 이론에서 각각의 중요한 단어는정확하게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보편개념을 도입하거나, 서로 다른 보편개념을 도입한다. 그러나 이것은 의미들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중심 주위로 우위성과 후위성의 질서에서 조직화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사람들이 올바르고 행위들이 올바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체』(Ⅳ, 443e-444a)에서 올바른 행위들은 사람들 안에 영혼의 조건으로서 올바름을 산출하도록 지키거나 돕는 그러한 것들이라고 주장한다; 행위에 적용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이란 단어의 의미는 반드시 사람에게 적용되는 의미로 정의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 형용사는 우선 사람에 대한 의미로 사용되고, 파생적 의미에서 행위에 대해 사용되며, 이것은 절대의미도 모호의미도 아니며, 어원유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꼴, 기본 사용과 파생 사용 양자에서 도입되는 동일한 꼴이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초기 대화편들에서 어원유래에 대한 사실을 인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이것이 그렇다는 강력한 암시가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꼴들에 대한 이론과 용어들의 어원유래적 사용 사이에 어떠한 양립불가능성도 없다고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게 될 것처럼, 중기 대화편들에서 꼴들 그 자체는 특정 종류의 어원들에 속하는 우선 지시되는 것들이 된다.
3) 만일 umun nomen unum nominatum이라는 꼬리표가 좌우간 초기 대화편들에 적용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일상 언어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어원을 제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언어의 개선을 위한 이상, 어휘의 조화가 세계의 질서에 부합한다는 요구로서 가장 잘 받아들여진다. 『크라튈로스』에서 하나의 이름은 베틀의 북과 유사한 도구인 것으로 이야기된다. 날실과 씨실을 가르면서 북으로 베를 짠다; 바로 그렇게, 사물들을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에 따라 나누면서 이름을 가지고 가르친다(388b-c). 그리고 보통의 아무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부숴질 수 있는 어떤 모형이 아니라 북 그 자체의 꼴을 보는 목수에 의해서 북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이름들은 아무개가 아니라 작명가에 의해, '모든 공예가들 중 가장 드문' 그 기술자에 의해 주어져야 한다(389a); 작명가는 각각의 이름을 그것의 적절한 사용에 맞추면서, 주어진 이름들 속에서 이름 그 자체의 꼴을 볼 것이다(389d). 그리고 목수의 작품의 가치를 직조공이 판단할 것과 같이, 그렇게 변증가는 이름들의 부여자에 의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할 것이다(390c). 플라톤주의는, 일상언어에 대한 그 태도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수정주의적이다.
4) 이름들을 부여하는 이러한 사업은 umun nomen unum nominatum에 관련되는데, 그렇지만, 이제껏 제시된 어떤 것과도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메논』(71e 이후로)에서, 메논이 탁월함을 정의하도록 요구받을 때, 그는 그 각각이 고유한 정의를 지닌 탁월함들의 목록으로 응답한다: 사내의 탁월함은 폴리스를 돌보는 것이고, 친구들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며, 적들에게 해를 주는 것이다; 여성의 탁월함은 그녀의 남편에게 명령하고 또 그 남편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 노예들, 노인들에 대한 다른 탁월함들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답변을 거부한다: 메논은 그에게 한 무리의 탁월함들을 주었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그 모든 것들에 있어서 동일한 하나의 것, 하나의 탁월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이것은 물론 단 하나의 것이 있다는 것을, 더욱이 'x의 탁월함'과 'y의 탁월함' 등에 대해 다양한 '~의 탁월함들'에 공통된 '탁월함'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다른 식으로 보자면, '탁월함'은 총괄적 단어도 아니고, 불완전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본질의 이름이다. 이것은 우리가 사내들의 탁월함과 여성들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때, 어째서 우리가 어원들도 단순히 얼버무리는 것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취해질 수 있다; 그러나 『메논』과 『테아이테투스』 모두에서 그것은 오히려 보편성의 더 높고 더욱 흥미로운 단계를 지시하는 것으로 취해진다. 자신의 일을 알고 있는 작명가는 짐작컨데 그것을 마음 속에 품을 것이다.
본질인과성
1) 꼴들은, 로크의 말을 빌리자면, 실재적 본질이며 명사적 본질이 아니다. 꼴들은 실재적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명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명칭들이나 단어들의 일상적 의미들에 대한 탐구는 그 탐구가 꼴들에 대한 탐구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꼴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또한 그것들이 실제 사물들인 바의 그러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본다:
본질은 그것이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인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의 존재에 대해 취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실재는 내재적이며,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사물들의 발견 가능한 특질들이 의존하는 사물들의 구조는 그 사물들의 본질로 불릴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형성으로부터 명백하듯이, 그 단어의 적절한 의미이다; 그 기본 표기법에 있어서 적합하게 존재함을 의미하는 esentia.
로크의 설명에 의해, 본질은 '어떤 것의, 그로써 어떤 것이 그것인 바의 것인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개별자의 실체적 꼴을 그 개별자의 실체와 동일시하면서, 본질을 본질을 가진 것의 존재와 동일시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는 로크가 물려받았던 그 전통을 기초하였다.
2) 그러나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 있어서 꼴들은 그 있음에 대해 그 꼴들이 꼴들인 것의 있음이 아니다. 하나의 있음인 보편개념은 다수성의 있음이 될 수 없다 - 정확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보편개념들로부터 실체적 꼴을 구별하는 데에로 이끌렸는지의 이유이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어떤 주어진 경건한 사물이나 경건해 보이는 행위의 있음이라고 시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경건이 그에 의해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그러한 것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그것은 또 다른 아리스토텔레스적 어휘를 조금 빌리자면, 경건이 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3) 『대히피아스』에는 이 전제를 명백하게 만드는 논증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히피아스가 올바름이 어떤 것이다(ἔστι τι τοῦτο)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 지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참이라는 것에 동의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올바른 것과 지혜로운 것 등등의 그러한 것들은 만일 그것들이 어떠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에 의한 그러한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기 때문에, 히피아스는 아름다움도 어떠한 것이며, 그것들이 다른 말들이나 생각들 또는 개념들에 의해 아름다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4) 이 논증은 분명히 『대히피아스』에만 놓이지만, 그것은 정의를 목표로 하는 모든 각각의 초기 대화편들에 의해 가정되는데, 왜냐하면 꼴들이 본질들이라는 그 전제는 변증에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꼴들은 정확히 보편개념들이고 표준들인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바의 것들인 것이기 때문이다.
5) 플라톤이 매우 자주 꼴들과 그 꼴들을 지닌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특징화하기 위해 인과적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꼴들이 본질들이기 때문이다. 『뤼시스』(221c)에서 소크라테스는 '원인이 파괴될 때, 그 원인이 그에 대한 존재를 지속시키는 원인인 그러한 것은 물론 있을 수가 없다'고 지적한다. 경건은 이러한 의미에서 원인이다: 경건의 현존은 경건한 것들이 경건한 것들인 한에서 그것들의 현존에 필수적이다.
6) 초기 대화편들은 꼴들과 그 꼴들의 예시들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기 위한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한다. 꼴들은 그 예시들 '안에' 있어야 할 것으로, 또는 그 예시들'에 현전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들에 '덧붙여져'야 할 것으로, 아니면 그것들'에' 있어야 할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 예시들은 다른 한편으로 꼴들을 '가지거나' '허용하거나' '취하거나' '나누어 가진다'. 이러한 은유들 전부 일상언어에 기초된다. 그것들은 정말로 평범하게 그리스어에서 추상적 명사들과 함께 사용될 것이다. 영어에서 한 행위에 용기가 있다(there is courage in an action)고, 또는 올바름의 현전이 상황을 개선시킬 것이라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한 인내의 도량을 지닌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말이다.
7) 은유들로서, 그리고 친숙한 그리스어로서, 이러한 용어들은 소피스트적 논쟁들의 재료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에우튀데모스』에서는 디오니소도루스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움과 다른 것인지 어떤지를 묻는다. 소크라테스가 잠시 망설인 후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όν)와 다른 것들이고, 그러나 그 아름다운 것들 각각은 그 안에 현전하는 어떤 아름다움(κάλλος τι)을 지닌다고 말할 때, 디오니소도루스는 재빨리 주도권을 잡아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면 소 한 마리가 당신 곁에 있다면, 당신은 소로군요. 그리고 내가 당신 곁에 있으니, 당신은 디오니소도루스고요'(301a). 소크라테스는 '맙소사'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그 물음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현전'은 은유 - 혹은 최소한 많은 용례들을 지닌 단어 - 이고 잘 다룰 방법은 그것의 의미에 달려 있다.
8) 문제가 되고 있는 '현전'은 특수한 종류의 것이다. 『뤼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나쁨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어떤 것에 현전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을 떠맡고, 그가 의미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려는 그의 논의를 갑작스럽게 중단한다. '일부 사물들은 그 사물들에 현전하는 그러한 것 그 자체일 그런 것들이다;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만일, 예를 들어 금발이 하얗게 칠해진다면, 흼은 그 머리카락에 현전할 것이지만, 그 머리카락은 그 자체로 흰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흴 적에, 흼은, 그 머리카락이 그래서 하얗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의미에서 머리칼에 현전할 것이다. 앞서의 경우, 흼은 머리카락에 현전한다. 뒤의 경우, 머리카락은 '흼의 현전에 의해 하얗다'.
9) 어떤 것이 흴 때 그 의미에서 흼이 그것에 현전하는 그러한 특별한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도구적 여격에 의존한다. 이러한 장치는 초기 대화편들에서 빈번하게 나타난다. 경건한 것들은 경건함에 의해 경건하고, 사려있는 자들은 사려에 의해 사려있으며,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움에 의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대히피아스』(300a)에 따르자면 아름다움 것들을 아름답도록 만든다(ποιεῖν). 이러한 표현들은 일상어법과 결부된다. 이온은 그가 호메로스를 기릴 수 있음이 앎에 의한(도구적 여격)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온』541e).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건강에 의해(ὑπό와 동작주의 속격) 유익해진다고 생각한다(『크리톤』280a). 사려는 만일 그 사려가 그들에게 현전하는 그러한 자들에게 좋다면 좋은 것이고, 아니라면 나쁜 것이다(『카르미데스』161a).
10) 그러나 비록 이러한 표현들이 일상언어에 결부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종종 소크라테스에 의해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Ποιεῖν은 πάσχειν에 속하는 규칙동사이고, πάσχειν은 규칙적으로 '자격지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ποιεῖν은 '자격을 둠'의 의미로 규칙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지혜가 사람들을 복되게 만든다고 말하는 것과 지혜가 사람들을 지혜롭게 만든다고, 또는 지혜가 그에 의해 사람들이 지혜로워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논리적 차이가 있다.
11) 이러한 표현들은 인과적이다 - 흔히 당구공들의 부딪침과 연관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상적 원인에 대해 말하는 의미와 유사한 의미에서 -. 아름다움은 정확히 이런 의미에서 아름다운 것들의 원인이다: 아름다움의 현존은 다른 것들의, 그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인 한에서 현존의 필연적 조건이다. 『대히피아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물들은 오로지 아름다움 자체가 현존해야만 아름다우며, 히피아스가 아름다움을 아름다운 처녀로 정의했을 때, 그 이유로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다운 그러한 어떤 것(δι᾿ ὅ)이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12) 그것들이 그에 의해 어떤 것들이 바로 그러한 것들인 바의 그러한 본질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꼴들은 원인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파이돈』(100c)에서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들이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것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주장하며, 케베스에게 그가 이러한 종류의 원인(αἰτία)을 허용하는지 묻는다. F. M. 콘포드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라는 구절은 … 모호하다. '이유'는 '설명'(αἰτία의 관습적 용법)을 의미할 것이다. 그 전제는 그래서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명제가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진술과 동등하다고 단언할 것이다: 나는 말들의 그 형식을 바꾸어 말함으로써 대체하고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명제의 분석이 아니라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론은 그래서 이 사실이 (1)특정한 가시적인 것, 이 장미, (2)아름다움(Beautiful or Beauty), 그리고 (3)우리가 '~에 참여한다'를 대체할 수 있는, '~는 ~이다'로 표현되는 그 둘 사이의 관계라고 불러야 할 어떤 것으로 구성된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우리는, 지금까지, 오로지 하나의 설명만을 가진다: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이 장미가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존립하게 할 어떤 원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느 관점에서든 우리는 한 명제에 대한 분석이나 하나의 사실에 대한 분석만을 가질 따름이고, 참인 진술의 이유나 그 사실의 현존에 대한 원인을 가지지는 않는다.
첫번째 주장은 제외될 것이다. 당신은 말을 바꿈으로써 오로지 본래의 단어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해 무지한 누군가에게 하나의 명제를 설명할 수 있을 뿐이고, '이 장미는 아름답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 그 누구도 그 표현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고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데에 대해서 분명하게 해줄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αἰτία가 말 바꿈에 대해 사용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고대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바로 그 이유'가 말 바꾸기를 시사하리라는 주장은 그래서 불충분하다.
13) 콘포드가 '일치하는 사실에 대한 분석'이라고 부른 것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는 사실이 이 장미는 아름다움에 참여한다는 사실과 똑같은 사실이라면, 그가 인정하듯, 어떤 식으로 분석이 말 바꾸기와 다른지는 불분명하다. 어떤 경우든, 이것은 플라톤의 핵심을 놓친다. '이 장미는 아름답다'와 '이 장미는 아름다움의 꼴에 참여한다'는 실로 등가의 진술들이다 -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정확히 사실들의 구조에 있어서 존재론적 우선성에 대한 이론이지, 명제 등가들에 대한 이론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꼴의 현존은 이 장미를 아름답다고 부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 사물에 세례를 내리는데 그것에 있어서 그 특징 때문이고,(그 특징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세례의 정당함을 보장하는 그 특징의 현존 때문이다. 꼴 자체는 그렇지만 오로지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필요조건일 따름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만일 그것이 현존하지 않는다면 장미가 아름다운 것으로서 현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그 꼴은, 꼴의 현존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 꼴은그 장미에 있어서 그 장미의 아름다움의 고유한 현존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현존뿐만 아니라 토양의 조건, 그리고 기후, 정원사의 기술에도 의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충분조건은 본질인과만이 아니라 작용인 또한 필요로 한다.
14) 그래서 꼴들은 그것들이 그것들에 의해 사물들이 그러한 것들인 바의 것들이라는 의미에서 원인들이다. 그것들은 그러므로 세계의 운행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세계가 그 세계인 어떤 것이 아니었으리란 의미에서 말이다.
지시의 재고
1) 초기 대화편들은 의미에 대한 지시적 이론을 전제하는데, 추상적 명사들 또는 그것들 중 일부가 대상들을 명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로부터 초기 대화편들이 이제는 이전보다 덜 널리 주장되는 그 명제, 어떤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서술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명제를 전제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이 마지막 명제는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명제와 관련되어 왔다: 잘 구성된(혹은 잘 분석된) 문장들의 구조는 반드시 문장이 표현하는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일대일 혹은 2방향 유일 상응에 존립해야만 한다는 명제이다. 잘 구성된 문장들은 술어들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 문장들이 표현하는 사실들은 반드시 유사-술어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한 유사 술어들이 보편개념들이나 본질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더 나아간 단계이고, 그러한 술어들은 그것들을 명명한다.
2) 이것은 플라톤이 주장하지 않은 명제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더욱이 그것과 관련된다고 거의 이야기될 수가 없다; 그 대화편들은 특정한 어떤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과 관련되지, 어떻게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물들이 사물들에 대해 이야기될 것인지에 대한 물음과는 관련이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파이돈』을 본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기술하는 일이 하나의 기술을 이름하는 것이 아니라 서술된 그것을 명명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꼴들의 각각은 현존하고, 다른 것들은, 그것들이 그 꼴들의 제 몫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그것들 이후에 이름지어진다'라는 것 때문이다. 이것은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기술하는 것은 그에게 올바르다고 명명하는 것이고, 좌우간 올바름을 명명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 이름이 비록, 올바르게 적용된다면, 소크라테스가 올바름에 참여하기 때문에 적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3) '올바른'과 '올바름' 사이의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메이아적 구별이었을 것을 사용하면서, 동근어라고 불렀던 것의 한 예시이다: '사물들이 상이한 어미들로 어떤 것으로부터 그것들의 이름을 획득할 때, 그것들은 동근어들이라 불린다. 그래서, 예를 들어 문법학자(grammarian)는 그의 이름을 문법(grammar)로부터 획득하고, 용감한 자들은 그들의 것을 용감으로부터 취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를 올바르다고 명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를 동원어적으로 명명한다: 그는 그의 이름을 올바름으로부터 얻는데, 어미상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참여하고 있는 꼴의 이름은 소크라테스가 그 꼴로부터 얻은 이름과 문법적 어미에 있어서 다를 필요가 없고, 플라톤의 고유한 사용에 따르고 소크라테스가 어원적으로 명명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만일 꼴들에 대한 이론이 참이라면,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올바르다'와 '소크라테스는 올바름에 참여한다'는 등가 명제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수반한다. 그러나 첫번째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한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는데, 하나는 어원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두 가지 것들에 대해 두 가지 이름들을 포함하고, 그 중 어느 것도 어원이 아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의미는 지시를 필요로 한다; 지시 대상들은 그렇지만 어원이 그것들의 관련에 근거한다 하더라도 구별된다.
4) 종과 유들은 근원적인 반면에 어원적으로 그것들을 도입하는 서술들은 파생적이라는 것이 이 관점의 결론이다: 용감한 자들은 용감으로부터 이름지어지지만, 그 역도 성립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왜 이것이 그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종과 유들을 논리적(혹은 어쩌면 비논리적) 구조로, 기술들 그 자체인 의미의 근원적 매개물로 간주하지 말아야 하는가?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에 대한 플라톤의 주된 답변은 일대다(一對多) 논증이어 왔다. 그 논증에 대한 전제들은 현대적인 차림으로 존 오스틴에 의해 경탄스럽게 진술되어왔다 - 그는 물론 그 논증의 결론에 동의하진 않았다:
만일 우리가 좌우간 언어를 통해 성취하는 그런 종류의 소통일 것이 있다면, 의사전달자('화자')가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피(彼)의사전달자('청자')가 관찰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징들의 축적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말'이라 불릴 것인데, 물론 비록 그것들이 우리가 보통 말이라 불러야 하는 것과 같은 어떤 것일 필요는 없다 할지라도 그렇다 - 그것들은 신호기(信號旗) 따위의 것일 터이다. 또한 말과는 다른 어떤 것, 말이 그에 대한 소통을 위해 사용될 것인 어떤 것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세계'라 불릴 것이다. 어째서 세계가 말을 포함하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진술 그 자체, 그에 대해 어떤 특수한 경우이든 세계에 대하여 이루어지는 것인 진술 자체의 면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 아무런 이유도 없다. 더욱이, 세계는 유사성들과 부동성들(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도 있을 수 없는)을 내보여야만 한다(우리는 관찰해야만 하고): 만일 모든 것들이 절대적으로 다른 어떤 것과도 구별될 수 없거나 완전히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다면, 말할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작금의 목적들을 위해서 - 물론, 마찬가지로 만족될 다른 조건들도 있다) 두 가지 관습적 방식들이 있어야만 한다: 세계에서 발견되는 상황, 사물, 사건 등의 유형들을 가지고 말과 관계하는 기술적인 관습적 방식들(= 문장들). 세계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상황들 따위를 가지고 말과 관련하는 지시적인 관습적 방식들(= 명제들).
오스틴은 보통 일상언어철학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는 어떤 표어들 아래에서도 행진하지 않았고 어떤 장단에도 맞추지 않았으며, 만일 언어가 그 세계에 대한 것일 터라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 기술하는 위의 문단은, 만일 내가 실수하는 게 아니라면, 가장 투명한 형이상학의 단편이다. 오스틴은 주석에서 계속해서 첨언한다:
'~를 가진 일종의 ~이다'라는 것은 '~을 가진 그런 표준적 사태들과 충분히 유사한 ~이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참된 하나의 사태일 하나의 진술은 자연적 관계인 특정한 다른 것들과 유사해야만 하고, 그러나 또한, 더 이상 순수하게 자연적 관계는 아닌 동일한 '서술' 가치에 대해 충분히 유사해야만 한다. '이것은 붉다'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그런 것들과 닮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고, '이것은 붉다고 불리는 그런 것들과 닮았다'라고 말하는 것조차 똑같은 것이 아니다. 사물들이 유사하다거나 또는 심지어 '정확하게' 유사하다는 것조차 나는 문자 그대로 이해할 터이지만, 그것들이 같다는 것을 나는 문자 그대로 알 수 없다 - 그것들을 똑같은 색이라 부름에 있어서 관습은 그것들이 그렇다고 이야기되는 색에 주어질 이름에 대한 관습적 선택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유사성과 부동성은 상이한 측면들에서 획득하는 관계들이다. 크리켓 공과 야구공은 형태에 있어서 유사하고 색에 있어서 부동하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이 이것이 그러하다는 측면들을 구별함이 없이 유사하고도 부동하다고 진술할 수는 없다. 만일 그래서 우리가, 세계 속의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과 우리가 좌우간 이야기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 독립적으로 획득하는 유사성과 부동성이 자연적 관계들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관계들이 그 덕분에 획득하는 그러한 특징들 - 형태적 특징들, 색채적 특징들 등 - 이 언어적 관습의 문제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거의 이치에 맞기 어려워 보인다. 만일 그 관계들이 '자연적'이라면, 그것은 그 덕분에 그것들이 유지하는 그러한 특징들도 동일하게 그렇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주의해야 할 그러한 특징들은 기술들이 아니다: 우리는 크리켓 공과 야구공이 모두 구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들이 서로 구체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하지 않고, 구체 혹은 구형일 것임의 측면에서 유사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기술은 기술되는 그 사물의 특징 덕분에 유지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용감한 자들이 용기로부터 이름지어지고 그 역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5)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유사성들과 부동성들의 세계를 발견하고 특징들의 현존을 추론해내는 사람들과 동일한 세계를 발견하고 추론을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 문제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언급들은 아마도 최소한 플라톤의 경우 그 추론이 의지하는 그러한 근거들을 보여주는 어떤 것을 한다. 그렇지만 초기든 중기든 대화편들에서 유사성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도출된 꼴들에 대한 우리의 앎은 없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사실상 유사성이 획득한다고 확신할 표준으로서의 꼴의 사용을 통해서만 있기 때문이다.
1) 만일 종의 유에 대한 관계가 꼴들의 구조에 기초된다면, 그 구조는 반드시 계층적이어야만 한다.
2)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관점은 반대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체르니스 교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체에 대한 구성부분으로서 또는 종에 대한 유로서 어떠한 이데아도 없다. …플라톤은 어디에서도 이데아들 사이에 유와 종의 구별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라고 부른 것, 종차라고 부른 것, 그리고 종이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모든 별개의 관념적 단일체들이다, 각기 다른 것들의 현존을 수반하거나 다른 것들과 양립 가능한 측면들을 지닌 다른 것들 보다는 가기 다른 것들, 그러나 남김없이 다른 것들로 분석될 수는 없는 독립적 본성인. 플라톤은 그래서 분절을 사용하여 이데아들의 세계에서의 존재론적 계층을 산출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소피스트』와 『정치가』, 분절에 대한 안내서로 여겨지게 된 그 두 저술들은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오히려 발견적 학습법을 의미했고, 한정된 이데아를 탐색함이 용이하도록 하는 수단을, 다른 이데아들로부터 그 이데아를 구별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의 함축들과 동일성을 의미했다는 것과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이데아, 이데아의 기원, 혹은 그것의 구성 요소들의 '구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르니스 교수는 일부 꼴들이 어떠한 부분들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서 단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다는 것을 또한 주장한다. 그의 의견들은 후기 대화편들을 겨냥하고 있고, 명확하게 『소피스트』에서와 같은 종류의 집단에 속하는 원칙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초기 대화편들의 해석으로서도 잘 맞는다.
2) 이러한 관점에 반대되는 그 저술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유나 혹은 그에 대해 꼴이 검토 아래에서 일부인 그러한 전체를 명시할 것임을, 또는 그 꼴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임을 진술하거나 시사하는 모든 저술들이다. 그러한 저술들은 : 『에우튀프론』 11e-12a, 『프로타고라스』 329c와 그 이후, 『메논』 74-6, 『라케스』 190c-d, 199e이다. 이러한 구절들 모두 유 아래에 종을 포함하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그래서 꼴들의 계층적 배열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지 않고 단층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3)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저술들, 그리고 후기 대화편들의 다른 저술들이 그 저술들의 의도가 발견적이라는 점을 제쳐두고 세워진다고 제안한다: 그 저술들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으로 전제를 반성한다. 그러나 탐구의 방법은 그 탐구의 핵심-문제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거나 적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꼴들이 상호에 대해 종과 유처럼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발견의 의도에 유용하다면, 어째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의 가능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 확실한 대답은 그 전제가 꼴들의 실재적 구조에 답한다는 것이다.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대답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부는 방법론과 설명을 요하는 반대 사이의 동일척도불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상 아무런 유들도 그리고 어떠한 계층도 없을 때, 어떻게 꼴들이 유들 아래에서 포함가능한 것들이고 발견적 기능을 제공하도록 계층적으로 배열된다는 전제가 가능한가?
4) 더 큰 어려움도 있다.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ποῖόν τι의 물음보다 τί의 물음이 우선한다거나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체르니스 교수가 제안하듯 오로지 꼴들 사이에서의 관계들만이 차이, 포함, 양립의 관계들이라면, 이러한 구별은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만일 꼴 F가 그것의 함축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면, 'F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F는 오로지 함축들과 양립들의 관계들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질 수 있고, 그러한 관계들 중 특정한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본질적인 것임을 뒷받침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οὐσία를 πάθος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F가 그것의 포함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시된다면, 후자는 그것이 F일 그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중의 어떠한 것들이든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보다 결핍하고 있거나 다른 것이라면, F는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즉, 동일성은 '내적 관계들'로 이끈다. 그리고 양립가능성과 함축이 모든 각각의 꼴을 다른 모든 각각의 꼴들에 관련시키기 때문에, F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각각의 꼴과 관련될 것이다: 진리는 전체일 것이다. 스페우시푸스는 나중에 이러한 단계에 매우 근접하게 나아갔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플라톤은, 최소한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그렇지지 않은데, 왜냐하면 πάθος와 οὐσία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그 단계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5)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소크라테스가 물었고 또 그것이 대답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던 것처럼 물어지고 또 대답될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ποῖόν τι의 물음들로부터 구별이 유지될 것이라면, 꼴들 사이에서 포함들과 양립가능성 그리고 그것들의 부정들의 관계들 보다 더 나아간 어떤 관련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한 관련의 본성은 『메논』에서 올바름은 탁월함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주장에 의해, 『라케스』에서 용기는 전체로서의 탁월함에 속하는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올바름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제시된다. 그 관련은 종과 유 사이의 관련이다: 한 부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부분의 위치를 그것을 한 부분으로 하는 전체 속에서 정립해야만 한다.
탁월함의 단일성
1) 탁월함들이 유 속에 그것들을 정립시킴으로써 한정가능하다는 관점은 또 다른 초기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와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는 플라톤의 생애 마지막에 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이었고, 그것은 종종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교훈은 모든 탁월함들은 그것들이 앎이나 지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은 탁월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로 고수되어 왔다. 솔직히, 그것은, 종과 유의 비동일성을 시사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가 아니다.
2) 『프로타고라스』에서 앎의 우선성은 단호하게 내세워진다(352b-c):
대부분의 사람들은 앎이 명령의 힘도 권위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앎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앎은 제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분노에 의해, 그리고 기쁨과 고통에 의해, 가끔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자주 두려움에 의해서 - 비록 앎이 어떤 가난한 노예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격정들에 의해 제멋대로 끌려다닐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당신의 관점 아닌가, 프로타고라스? 아니면 당신은 오히려 앎이 아름다움과 능력, 그리고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것에 속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텐가; 나쁨으로부터 좋음을 구별해 내기만 하면, 지상의 그 무엇도 그러한 앎을 가진 자를 그 앎 - 그의 조력자로 충분한 지혜 - 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이 구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 그 자신의 믿음을 대변한다: 탁월함은 앎이다. 그 누구도 제 뜻으로 또는 알면서도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3) 만일 앎이 탁월함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탁월함이 앎을 수반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탁월함과 앎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점이 따르지는 않는다. 동치는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치는 더 넓은 논증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 논증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한 것에 대한 모든 이름들이라는, '용기',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탁월함'은 동의어들이라는(349b-c) 점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앎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 하지만 아직 이러한 방식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우선, 그 설명이 탁월함과 앎을 동일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능력의 동일성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만일 그 탁월함들의 명칭들이 동의어들이라면, 그 탁월함들이 지혜로 화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떤지, 지혜를 포함한 그 탁월함들이 경건이나 올바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임의적이다. 물론, 탁월함은 앎이나 지혜이다; 그러나 그래서, 탁월함은 용기나 경건, 또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동의어에 대해 대칭적인 관계이다.
5) 그 동일화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들이 구별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네 가지 논증들을 내놓는다. 첫번째(330b-331b)는 올바름과 경건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두번째(332a-333b)는 사려와 지혜의 단일성을; 세번째(333d-334a)는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중단되는데, 어쨌든 올바름과 사려의 단일성을 주장할 것이었다. 거기에서 남은 대화편을 통해 중단 없이 추적되는 그 물음이 다시 말해진 다음(439b-d) 긴 중간극이 따른다. 마지막 논증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지혜의 단일성을 증명할 것을 자임한다(349d-360e). 만일 탁월함들의 단일성이 탁월함들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러한 논증들 각각은 논리적 오류이고, 그것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그리고 창피스럽도록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문답의 고비를 넘긴다. 프로타고라스는 지적인 사람으로서 도처에서 묘사되고, 말들을 다루는 방식들에 있어서 지혜롭지만,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의 실패는 물론 말의 단련에 있어서 기술 부족 탓이 아니다; 그것은 소피스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비록 그가 탁월함을 가르치리라 주장할지라도,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그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은, 만일 그 논증들이 공허한 오류들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결론을 가리키는 쪽으로 그 논증들이 행한다고 의미되는 것으로서 이바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6)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타고라스』도 실패로 끝나고, 그것은 익숙한 이유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먼저 탁월함이 무엇인지 결정함이 없이는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은 추론할 것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답의 변증에 대한 명쾌한 요약정리를 되보여준다 (360e-361c):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탁월함에 관련한 것들을 가지고 바로 그것인지, 탁월함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바람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묻는다. 왜냐하면 나는 만일 그것이 한 번만 보여진다면 당신과 내가 논의한 물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가 말끔하게 정리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논증의 결과는 그것이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혀를 가졌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 둘 다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분명히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당신은 지금 바로 그 반대의 것을 설득하려 들고 있다, 모든 것 - 올바름도 사려도 그리고 용기도 - 은 앎임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 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을 말이다. 만일 그것이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려 애쓰는 것처럼 앎과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것이 당신 주장처럼 전적으로 앎일 것이라 증명하는 것이 된다면, 소크라테스, 만일 그것이 가르쳐질 수 없다면 더욱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조금 전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고 전제했는데 지금은, 다름 아닌 앎을 피함으로써, 그것이 무엇보다도 최소한 가르쳐질 수만은 없을 것이도록 그렇게,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 프로타고라스, 내가 주장된 이 모든 것을 앞뒤로 볼 때, 나의 바람은 그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오: 나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향해 진격해야 할 것 같고 또 공격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물어야 할 듯 싶소.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모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들을 뒤집어 버렸다. 이러한 뒤얽힘은 변증적 반어법의 단편이다. 그 목적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의 필연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7) 『프로타고라스』는 『메논』에서 그 짝이 되는 조각을 가진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정착시킬 것을 최종적으로 떠맡는다. 그는 만일 탁월함이 앎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다(87a-c)고 가정한고; 그것이 앎이라고 주장한다(87c-89a); 그리고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선생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9c-96c); 그리고 그것이 '다이몬적인 분배에 의해, 이해 없이'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고 결론내린다(100a). 즉, 소크라테스는 함축을 전제하고, 그 함축의 선행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의 결론을 부정하며, 회의주의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조는 플라톤이 그의 독자들을 그의 전제들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할 작정이었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나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내지 않고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아포리아(당황)로 끝을 맺었고, 심지어 기하학자들로부터 빌려온 새로운 가정의 방법조차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86e-87a). 그러나 또, 기하학자들은 그들의 용어들을 정의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래서, 그들의 실패의 교훈이다. 정의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중인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익숙한 소크라테스적 교훈이다. 그래서 『메논』은 또한 변증적 역설의 한 조각이다: 그 극적인 구조는 정의가 필수적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과 같은 그런 도덕적 결론들을 권고하는 것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그러한 결론들만이 달성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을 지시하는 데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다.
8) 만일 이것이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탁월함과 앎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둘 중 어떤 대화편도 이러한 문제에 헌신하지 않고, 두 대화편 모두 그 대화편들의 변증적 중심점으로서,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의 필수불가결함 - 즉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필연성 - 을 강조하며 결론에서는 그 물음이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9)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 그 방식에서 탁월함이 하나일 그러한 대안적 방식들을 예상한다는 것은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에 동의하도록 이끌린다 (329c-330b): 탁월함은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용기라는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구별되고, 같은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아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오로지 크기에서만 차이가 나는 황금의 일부 같은 부분들이 아니고, 두 눈과 두 귀 처럼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가 아니라(οὔτε αὐτὸ οὔτε ἡ δύναμις αὐτοῦ, 330b) 서로 그러한 종류의 것(οἷον)에 속하는 것들이다; 탁월함의 그 부분들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용기 있으나 올바르지 못하거나 올바르되 지혜롭지 못할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사람은 탁월함 전부를 가지지 못하고서도 탁월함들의 일부를 가질 것이라는 점에서, 분리될 수도 있다.
10) 다음으로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하는 하나의 전체임을 긍정함에 있어서, 복합된 반박을 내놓고 있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한 부분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동일한 것들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부분들이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탁월함들이 하나일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11) 탁월함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상이한 정의들을 가진다고 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탁월함이 기능에 있어서 다르거나 같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탁월함의 기능은 무엇인가?
12) 그런 물음은 『프로타고라스』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탁월함의 기능은 탁월함 그 자체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얼굴에 대한 예시를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두 눈과 두 귀는 그것들의 기능들인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차이가 난다. 다시, 두 가지 덕들은 그것들이 동일하다거나(ταὐτόν) 아주 유사하다(ὁμοιότατον)는 것조차 긍정할 것도 없이 서로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οἷον)에 속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단어의 '기능'이 그 단어의 의미 또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올바름이 '올바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올바름의 기능은, '올바름'의 기능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은 아니다.
13) 만일 탁월함의 기능에 대한 관념이 이해될 것이라면, 우리는 그 표현이 그 안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논증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기능으로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정(330b)하는 근거, 그리고 나중에 그 탁월함들이 서로 간에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을 부정(330e-331c)하는 근거는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다(329e; 349d참조). 그리고 이것은 탁월함들이 서로 만나도록 한다는 것, 경건의 현존이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 또는 용기의 현존이 지혜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추론은 명확해 보인다: 탁월함의 기능은 그 기능을 도입하는 어떤 것 속에 놓인다; 만일 탁월함들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면, 그것들은 분리가능하다;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
14) 이것은 그 논증의 양식에 걸맞는다.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명제는 만일 그 명제가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그것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면 틀린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만일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라면, 그것들은 기능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기능에 있어서 하나라면 정의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이 뒤따를 방법은 없다. 사람이 올바름 없이 경건할 수 없다거나 경건함 없이 올바를 수 없다고, 또는 경건과 올바름이 서로를 도입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와 경건의 정의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탁월함들은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구별가능하다; 만일 탁월함들이 구별가능하다면, 그것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만일 탁월함의 부분들이 황금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면, 그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상이한,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라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즉, 탁월함의 특수한 경우에, 황금과 얼굴에 대한 그 예시들은 부적당하다는 것일 수 있고, 황금도 얼굴도 밝혀내지 못하는 정의에 있어서 차이와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일 수 있다.
15) 그 논증에 대해서는 이 만큼이면 됐다. 그러나 그 변증적 상황은 여전히 더욱 복잡하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고 추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올바름 없이 단지 지혜롭거나 용감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탁월함들이 그 자체에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그 주장을 반박할 것이고, 탁월함들이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탁월함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것들이 서로 도입하고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라는 것인지 말이다.
16) 『프로타고라스』는 이 물음에 대해 세심하게 고안된 모호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대안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고, 프로타고라스 그 자신은 그 논증에 대한 그 대안들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놀랄 것도 없다. 탁월함들이 정의에서 하나인지 기능에서 하나인지 혹은 양자에 있어서 하나인지 묻는 것은 탁월함이 무엇인지를 암시함으로써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은 오로지 대화의 중국에서야 명확하게 된다(361b-c).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고려하는 중에 내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그가 탁월함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했고(318a-319a), 그리고 탁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자로서, 소크라테스적 엘렝코스(논박술)가 바로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계획된 그러한 그 자신의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탁월함의 본성으로 파고드는 탐구에 유익하게 착수할 수 없었다.
17) 요약하면: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하나일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예상한다 -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나 같음,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의 상호 함축 또는 같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주제에 대한 다른 대화편들의 논증 양식에 부합한다. 그에 대해 『메논』은 탁월한 예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단언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은 영혼에 의존하지만, 영혼에 속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좋음을 지혜에 의존한다고; 이러한 설명으로, 유익한 것은 지혜이고, 우리는 탁월함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함이 지혜이고, 전체로서나 부분에 있어서나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지혜와 탁월함이 동일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탁월함들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혜가 탁월함에 대해 필연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한 것이며, 조건이며, 다른 탁월함들을 수반하고 또 그것들에 의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 이후 『정체』에서 플라톤은 영혼에 대한 분석에 기초된 탁월함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 설명은 탁월함들의 단일성을 상호 함축을 통해 긍정한다. 영혼은 그 부분들 각각이 적합한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올바를 수 있다; 절제는, 각 부분이 지배해야 하고 따를 것에 동의할 때; 지혜는 이성적 부분이 그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지배할 때, 용기는, 기백의 부분이 그 지배자의 명령에 있어서 훈련될 때 생긴다(『정체』Ⅳ, 442b-d). 그 탁월함들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정의상으로 다르다; 그만큼 명백하게, 탁월함들은 기능에 있어서 하나이다 - 그것들은 서로를 도입하고, 서로로부터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용기는 지혜를 수반하고 그것에 의해 수반된다; 지혜는 올바름을 수반하고 또 그에 의해 수반된다; 올바름은 절제를 수반하고 그에 의해 수반된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논증에 있어서 이 높이에 올랐으니, 내가 보기에, 산 정상으로부터 보는 것처럼, 탁월함의 단일한 꼴 하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원칙은 그래서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라는 주장과, 그리고 탁월함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과도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분들과 부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동시함축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1)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 속에서 확정적이고 기술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꼴을 명시해야 한다 - 즉, 보편개념이고 표준이며 본질이다. 『에우튀프론』은 그 설명이 반드시 그 꼴이 부분인 어떤 전체를, 그리고 그 전체의 어떤 부분이 그 꼴인지 진술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은 최근류와 종차로써 경건을 정의하는 것이다.
2) 이 관점에서 그런 종류의 정의는 물론 실재적 정의이며 명사적 정의가 아니다; 그 정의는 어떤 것들의 진리치인 말들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에 대한 말들이 참인 그러한 것들의 본성에 대한 정의이다. 실재적 정의는 말들이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조건들이나 어떻게 그 말들이 실제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보고가 아니라 본질에 대한 분석이다. 그것이 본질분석이기 때문에, 실재적 정의는 조건들로서가 아니라 참 또는 거짓이다. 예를 들어 올바름이 탁월함이라는 것은 참이고, 그것이 양이라는 것은 거짓이며, 만일 'is'가 종들과 유들에 관련하는 개념정의적 'is'로서 해석된다면 계속 그러할 것이다.
3) 실재적 정의에 대한 공통된 관념은 그러한 정의가 단순하게 명사적 정의에 현존 주장을 더한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삼각형의 실재적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삼각형은 "분명한 세 각을 가진 도형"이고, 삼각형들이 있다'. 밀은 지난 세기(19세기)에 이것을 주장했고, 일부 해석자들에 따르자면, 그것은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었기도 하다. 그래서 토마스 히쓰 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고자 더욱 고심한 정의들과 정의된 사물의 현존이나 현존하지 않음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정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는 '어떤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고, 그 어떤 것이 그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의된 다양한 것들의 현존은 각 학문에서 기본적인 몇몇 것들, 그것들의 현존이 증명될 수 없고 각 학문의 제 1 원리들 중에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입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 점들과 선들은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야만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의 현존은 입증되어야만 한다.
히쓰 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계속해서 연결한다. 그 이론은 아마도 구조가 현존의 증명으로 기능하는 유클리드 『원론』에서 유클리드의 실행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당대의 수학에 더욱 밀접하게 관련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유클리드의 정의들과 그 정의들에 대한 그의 사용은 정의들 그 자체는 정의된 것들의 현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하지만 그것들 각각의 현존은 입증되거나 ('원칙들'의 경우에는)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과 일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하학에서 점들과 선들의 현존만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고, 나머지 것들의 현존은 증명되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유클리드의 첫번째 세 가지 가정들은 직선들과 원들을 작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명한다(『원론』에서 사용된 직선들을 제외한 '선들'만). 다른 것들은 정의되고 그 후에 작도되며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예를 들어 1권 정의 20에서 등변 삼각형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된다; 그리고 (1권 1) 그 등변 삼각형을 작도할 것이 제안되고, 작도되었을 때, 그것은 정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증명된다. 사각형이 정의될 때(1권 정의 22) 그러한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어떤지 하는 물음은 1권 46에서 정의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증명되기 전까지 열려 있다. 직각(1권 정의 10, 1권 11)과 평행(1권 정의 23, 1권 27-9)을 가지고도 비슷하다. 단순한 추정과 상상을 배제시키는데에 굉장한 주의를 요한다. 이름들에 대한 주관적 정의로부터 사물들에 대한 객관적 정의로의 이행은 기하학에서 구조들(가정된 제 1원리들)을 수단으로, 다른 학문들에 있어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지듯이 그렇게 이루어진다.
정의와 현존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의심할 것도 없이 아카데미아에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거기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 뿌리들은, 특정한 본성의 어떤 것에 대한 현존을 전제하도록 허용되고, 그 가정을 지지하거나 거부하도록 허용되는, 플라톤의 가설들에 의한 연구방법에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일한 것과 단일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른 것이다'라고 주장한 첫번째 사람이 아니었다.
4) 실재적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또한 현존과 근대 논리학에서 자주 제시되는 분석성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밀접하게 부합한다. 정의들, 혹은 더욱 정확하게 말해서 그 참값이 유일하게 정의들에만 기대는 명제들은 분석적이고, 그들의 용어들로 의미하는 바에 의해 참이며, 그것의 반박들은 자기모순적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암여우(vixen)들은 암컷인 여우들이다'라는 것은 정확하게 참인데 왜냐하면 '암여우'라는 표현은 '암컷 여우'라는 표현과 같은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어를 본다. 그러나 어떠한 분석적 명제도 분석적인 것으로서 현존 주장을 시사하지 않는다: 이것을 가정하는 것은 현존이 술어적 표현의 의미에 대해 부분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현존이 술어라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 될 것인데, 반면 사실 그것은 술어들에 대한 적용을 명시하는 양화사이다. 그래서 '암여우'가 의미하는 것은 암여우들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지 않고 시사할 수도 없다: 그러한 정보의 단편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세계를 보아야만 한다.
5) 실재적 정의가 단순하게 명사적 정의에 현존 주장을 더한 것이라는 관점은 그 이면에 수세기에 걸친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전통의 부담과 동시대 논리학의 부담 모두를 가진다. 그 관점은 그 관점이 『에우튀프론』과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전제된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보기 위한 지적 상상력의 활동을 요구한다.
6) 그리고 분명히 그건 아니다. 『에우튀프론』의 변증 절차는 '경건'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로 대변될 수는 없다. 추가적으로 '경건'이 어떤 것에든 해당되는지 아닌지를 밝혀내기 위한 시도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선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답하기 위한 필요조건들은 명사적 정의의 필요조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사적 정의들은 말들에 대한 정의들이지 표준들 또는 본질들에 대한 정의들이 아니고, 어째서 그것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것이기를 요구받아야 하는지 아무런 훌륭한 이유도 없다. 그리고 둘째로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존재적 의미는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된다: 소크라테스와 에우튀프론은 경건한 것들이 있다고 전제하고, 오로지 무엇이 그것들의 본성인지만을 묻는다; 그리고 현존에 대한 이러한전제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최초에 사례들 - 그 물음이 제기된 모든 초기 대화편들 각가에서 이야기하는 것 - 에 호소함으로써 대답되는 모든 초기대화편들에서 이루어진다.
7) 이건 다른 식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꼴은 '실체시된 의미'가 아닌데, 예를 들어 '염소사슴'과 '직각원' 같이 의미하는 바는 있지만 어떠한 적용도 가지지 않는 표현들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꼴은 '가능성', 또는 화이트헤드주의의 영원적 객체가 아닌데, 예컨데 유니콘들처럼 아무것도 만족시킬 수 없는 가능성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꼴은 오히려 무엇인 어떤 것의 본성이고, 그러므로 존재적 의미는 그 어떤 것의 바로 그 관념 안에 세워진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꼴들이 있는지에 대한 물음은 혼동에 기초하는 것이다.
8) 소크라테스적 변증에 대해서 현존이란 말하자면 주어진 것이다: 그 목적은 변증의 본성을 관통하는 것이고, 그러한 관통은 정의 속에서 표현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관점이 일반화되고, 윤리학에 대한 물음들로부터 옮겨져서 전체 세계에 대한 물음들로 활동한다면, 정의는 어떤 것에 대한 모든 앎의 토대가 될 것이다.
9)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실재적 정의는 대상 - 탐구의 목표 역할을 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만일 그러한 정의가 단어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면, '개념'에 대한 정의 또한 아닐 것이라는 것은 아마도살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에우튀프론의 경건에 대한 개념 또는 일상적인 아테나인들이 '경건'이란 단어를 가지고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어떤 것은 경건의 본성과 본질에 대해 불충분하다; 이것은 엘렝코스, 변증적 반박술에 이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의 꼴에 대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목적론적이다: 경건의 꼴은 짐작컨데 에우튀프론이 만일 그의 말들이 의미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했더라면 그 '경건'이란 말을 가지고 이해했을 어떤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가능성으로서 그가 '경건'이란 단어를 가지고 그가 '올바름'이나 '용기', '사려', '지혜' 그리고 '탁월함'이라는 다른 단어들로 의미하는 것과 정확하게 똑같은 것을 의미했을 것임을 알아차릴 거라고 말한다. 비록 이러한 단어들의 이상적 사용에 있어서 이 단어들의 검토가 오직 이것이 역설이었다는 것만을 말할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한 단어를 가지고 이해하는 어떤 것은 우리가 그걸 가지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이해해야만 하는 어떤 것은 아니고, 꼴들과 우리의 일상적 개념들 사이의 그 구분은 실재적 정의의 결핍과 어려움 모두를 설명한다. 사물들의 본성과 사물들의 본성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들을 무분별하게 동일시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과 많은 숙고가 요구된다.
최근류와 종차
1) 전통적인 논리학 교과서들에 따르면 정의는 많은 종들에 공통된 하나의 유를 언급함으로써 수행되고,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검토 하에 그 종들을 구별해 내는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그러하고 로스 교수는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도 또한 그렇다고 주장했다:
['용기란 무엇인가?'와 같은 그런 물음들에 의해서] 용기는 요소들로 나뉘어질 수 있는 복합적인 것임이 암시된다; 만일 용기가 그러하지 않다면, 그 물음은 … 오직 용기는 용기라는 것만이 참인 응답일 바보같은 물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소크라테스]가 제시하는 이러한 형식의 물음들에 대한 응답들은 원칙적으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명시적으로 수행해 나아가던 것과 같이 정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분석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의가 유들과 종차를 통해 진행하는 것이라는 그 주장은 『에우튀프론』에 의해 확인된다. 소크라테스의 그 문제에 대한 논의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들어간다. 첫번째 부분은 정의가 유를 제공해야만 한다고 제안한다: 그 부분은 경건이 올바름의 한 부분인지, 그리고 올바름은 경건의 한 부분이 아닌지 어떤지를 묻는다. 그것은 스타시누스(고대 그리스의 신화적 인물, 시인)가 주장하게 된 것처럼 삼가는 마음은 두려움의 한 부분인 반면에 두려움은 삼가하는 마음의 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다음으로 그것을 뭐라 이름붙이지 않고서 종차의 관념을 도입하는 데에로 나아간다; 그 논증에서의 이 새로운 단계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점을 숙고하라'는 그의 요구에 의해 표시된다(12d, 5): 만일 경건이 올바름의 부분이라면, 그 다음으로 밝혀지는 것은, 짝수가 수에 있어서 서로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측면들이 아니라 똑같이 나뉘어 떨어지는 두 측면들을 지닌 그러한 부분인 것처럼, 그것이 어떤 부분인가 하는 것이다.
2) 초기 대화편들의 정의에 대한 모든 사례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라케스』(192b)에서는 재빠름이 '짧은 시간에 꽤나 많은 것을 해내는 능력'으로 정의되고, 『메논』(75b)에서는 처음에 도형이 '언제나 빛깔을 뒤따르는 것'으로 정의된다. 어느 정의도 『에우튀프론』의 요구들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메논』은 그 도형을 '한 입체의 경계'로 한정함으로써 도형에 대한 정의를 개선시켜 나아간다. 그것은 최근류와 종차를 제공한다; 그래서 아마도 고르기아스의 방식으로 제공되는, '시각에 맞추어질 수 있는 형태의 발산'으로서 색을 정의하는(76d) 그럴싸한 가짜 정의도 제공한다.
3) 『에우튀프론』에서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그 문제에 대한 그의 최종적인 설명인지 아닌지, 또는 그의 의견들이, 에우튀프론을 이끌어 가는 수단으로서 부분적으로는 변증적인 것으로 의미되는지는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후자의 관점에 대한 증거가 있다. 만일 삼가는 마음이 두려움의 부분인 것처럼 경건이 올바름의 부분이라면, 그래서, 에우튀프론의 설명에 의해, 두려움이 삼가는 마음보다 넓은 것처럼 올바름은 경건보다 넓다; 즉, 경건은 올바름을 수반하는 반면, 올바름은 경건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프로타고라스』에서 주장되고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 암시적인, 탁월함은 정의에 있어서 모든 탁월함들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나, 그 탁월함들이 상호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의미에서나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저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명제와 상충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마도 최소한 특히 탁월함의 경우에는, 『에우튀프론』에 있어서 정의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명이 자격을 부여함 없이, 그리고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것은 아니라는 것일 터이다: a가 b의 부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b가 a보다 더 넓은 영역들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언제나 수반할 필요는 없다.
4) 이것이 『에우튀프론』이 정의를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것으로 그린다는 사실을 대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우튀프론』은 정의될 것이 반드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로스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지도 않는다. 이 제안은 그것이, 예를 들어 경건이 요소들로 구성되지만, 그 요소들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 정의가 독립적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단순한 그런 일련의 항목들에 있어서 반드시 한정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제안이 암시한다거나, 또는 정의가 불가능하고 그에 있어서 그 어떤 것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 종결할 수 없는 무한퇴행을 암시한다는, 그런 일반적 반대에 대해 책임이 있다. 로스 교수의 해석에 대한 원문의 뒷받침도 없다; 소크라테스의 공간적 은유들은 공간들의 가분성을 제안하는 어떤 방식과도 중첩하지 않는다; 삼가는 마음이 있는 그 어디에서나 두려움이 있지만 두려움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삼가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된 그 추론은, 두려움이 삼가는 마음의 부분이 아니지만 삼가는 마음은 두려움의 일부라는 것이 아니다; 삼가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것을 나누지 않지만, 삼가는 마음을 검토함에 있어서 그것이 두려움을 수반한다는 것은 안다. 최근류를 가지고 그러하듯 종차를 가지고서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종차의 사례는 짝수가 '나뉘어 떨어지지 않는 두 쪽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나뉘어 떨어지는 두 쪽을 갖는 수'라는 것이다. 즉, 자체적으로 둘로 나뉠 수 있는 수라는 것이다. 2는 그 자체로 짝수이기 때문인데, 그렇지만, 이 차이는 짝수의 현존에 속하는 필연적 귀결을 표현하는 것이지, 짝수의 구조 속에서 하나의 요소를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정의될 것이 반드시 '요소들로 분석될 수 있는 복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가정은 『에우튀프론』이라는 글 위에 정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의 설명을 투영하였음을 표현한다. 이러한 투사는 실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유(類)들
1) '유'와 '종'의 일상적 함의는 아리스토텔레스적 함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였던, 그의 가정들로부터 유래된 논리학적 전통의 침전물은, 유들은 내용에 있어서 종들보다 빈약하고, 그 추상적 계층에서 위로 향하는 이행은 공허를 향하는 이행이라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계통수에서 각각의 종은 최근, 하위, 그리고 최상위[summum] 유들을 수반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이 그것의 정의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유도 그 유 아래에 들어가는 종을 수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은 동물을 수반하지만, 동물은 사람을 수반하지 않는다; 동물의 경우 생물을 수반하지만 그에 의해 수반되지는 않는다. 유는 종보다 더 적은 표지(標識, merkmal. de. pl.-e)들, 더 적은 특징들을 가진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더욱 빈약하다.
2) 상승은 공허를 향하고, 하강은 충족을 향한다. 유에 대한 종의 관계에 대한 이런 설명은 종종 논리학의 중립적 문제로 다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식으로도 중립적일 수 없는 절차인데 그것이 다름 아니라 형이상학을 포함하는 것으로 나타나게끔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3) 종종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느 날 그가 사는 세상을 바라 보았고 개별자들을 발견했다고 가정된다 - '실재에 대한 강렬한 감각'이라 불린 어떤 것을 지니고 있는 철학자들의 웅장한 노선에서 첫번째로 말이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오히려 자연적 종류들을 -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짐말이 아니라 말에 대한 우선함을 - 찾고 있었고 발견했다는, 그리고 그가 그러한 종류들에 속하는 것들인 소크라테스와 짐말과 같은 그런 개별자들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지지하도록 이끌렸던 것은 자연적 종류들에 대한 이러한 발견을 통해서라는 증거가 있다. 이러한 발견을 향한 도정은 플라톤만이 아니라 스페우시푸스도 포함한 아카데메이아에서 정의를 둘러싼 논란의 가시덤불을 통과했다. 그것은 제 2 실체의 구별적 표시 - 즉, 실체의 범주에 있어서 술부들 - 는 이름과 정의에 있어서 서술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범주들』의 원칙이 되었다. 이러한 규칙, 기초적 실재들의 본성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골라낼 수 있도록 하게 되어있는 그 규칙은 존재론에 묶인다.
제 2 실체에 속하는 종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인데, 왜냐하면 종은 제 1 실체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다. 만일 제 1 시체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많은 정보를 주고 유보다 종을 부여하는 경향이 더 많은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개별적인 사람에 대해 그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는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왜냐하면 하나는 개별적 사람에 대해 더욱 특징적인 반면, 다른 하나는 더욱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별적 나무에 대해 그것이 나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 식물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정보를 줄 것이다. 나아가, 제 1 실체들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것이고 모든 다른 것들은 그 제 1실체들에 대해 술부일 수 있거나 그 제 1 실체들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제 1실체들은 무엇보다도 실체들로 불리는 것이다. 그러나 제 1 실체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자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종도 유에 대해 자리한다: 종은 유에 대한 것이다(유들은 종에 대해 서술되지만, 종은 유들에 대해 상호적으로 서술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러한 이유로 마찬가지로 종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이다.
이러한 이행은, 철학사에서 처음으로, 일반화적 공허의 원칙으로 향한다. 그것은 또한 그것의 토대를 해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를 술어적인 것으로, 그리고 술부를 비대칭적으로 이해한다: 유는 그것의 종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만, 종도 종차도 유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 않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은 사람도 아니고 이족보행동물도 아니다. 유들이 종에 대해서 종이 개별자들에 대해 서는 것처럼 서기 때문이고, 개별자들은 종들보다 더욱 실체적이고, 종들은 유보다 더욱 실체적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나 코리스쿠스처럼 그것들도 그에 대해 서술가능한 제 1 실체에 대해 대조적으로, 설령 종들과 유들이 둘 다 제 2 실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면, 유들의 결핍이 즉각적으로 따른다: 상대적으로 덜 실체적인 유들은 상대적으로 더 실체적인 종들을 거의 포함할 수 없다시피 하다. 논리적으로 놓고 봤을 때, 유들은 종들을 수반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종차들이 그 종들의 유들에 대해 비본질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이고, 그 점에서 그 종들은 그것들의 유들에 대해 서술 가능하지 않다: 그 유는 그것의 종을 수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 종의 분석에 있어서 오로지 한 요소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유의 종에 대한 관계에서 술어의 비대칭성은 수반의 비대칭성을 수반한다.
4) 『범주론』은 초기작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어휘는 그의 정신이 성장에 따라 변화했다. 제 1 실체와 제 2 실체 사이의 대립은 후기에 폐기되었다; 제 1 실체는 질료, 꼴, 그리고 그것들의 합성으로 분해되어 들어갔다; 제 2 실체는 실체적 꼴과 보편적 꼴로 분해되었다. 그러나 유들이 종들보다 더욱 결핍되어 있다는 전제는 남았다. 『형이상학』에서, 은유로써, 유들은 종들에 대한 질료로서, 나아가 종차들이 상대적으로 꼴로서 서는 한정에 대한 잠재력이 된다.
5) 이러한 주장 또는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은 가장 나중의 생각을 보편개념들에 채색하였다. 그것은 논리적 주어들로서, 이야기되는 것들에 속하는 우선성이고 어떤 것에 대해서도 그 자체로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의 우선성인, 개별자들의 우선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술부들의 파생물,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되는 것들을 전제한다. 이러한 것들은 플라톤적인 전제들이 아니다.
플라톤적 유들
1)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들에 대한 설명은 초기 대화편들에 맞지 않는다. 우선, 그 설명이 비록 소크라테스의 어휘를 유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설명은 소크라테스의 은유를 뒤집는다. 소크라테스는 종이 유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그 유는 전체이다. - 이 종 부분에 다른 부분들을 더하여 포함하는 그러한 전체이다. 그러나 만일 유들이 종들보다 더 결핍된 것이라면, 그 종은 전체인 종일 것이고, 그 종에 대한 유와 종차는 각각의 부분들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메이아에서의 정의에 대한 이론들에 내재하는 문제들에 대한 숙고로써 은유의 이러한 역전을 지지하는 데에로 이끌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처음으로 부분과 전체의 은유를 도입했던 그가 그것을 뒤집힌 것으로 도입했을 성 싶지는 않다.
2) 결핍된 유들과 초기 및 중기 대화편들을 조화시키는 그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은 그 유들이 소크라테스가 그 곳에서 처음으로 고려한 용어의 종류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르피리우스의 계통수는 위로 갈수록 좁아진다. 사람의 동물에 대한 관계나 동물의 생물에 대한 관계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짝수의 수에 대한 관계나 도형에 대한 원의 관계, 또는 탁월함에 대한 올바름의 관계에는 충분치 못하다. 왜냐하면 수의 현존이 짝수의 현존을 수반한다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고, 도형의 현존이 원형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도 타당하며, 탁월함의 현존이 하나의 탁월함으로서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도 타당하기 때문이다. 일반화적 공허의 원칙은, 만일 그것이 어떤 것에든 어울리고, 말이나 개와 같은 자연적인 종류들에 어울린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원칙을 지지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그 원칙은 수학적 용어들, 또는 도덕적 용어들에 어울리지 않고, 그러므로 그것은 초기 대화편들의 변증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의에 대한 관념에 대해 전형적인 그 원칙을 상정하는 것은 개념들의 실제 구조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들에 대한 그러한 관점이 그렇게나 오래, 또 그렇게나 널리 받아들여졌어야 하다는 것은 인간 정신에 대한 잘못된 추상의 능력을 위한 서글픈 증거이다.
3) 대신에 유들이 충족되거나 결핍되는 만큼 정의에 있어서 종차의 역할은 변화할 것이다. 만일 후자라면, 종차는 종에 대한 궁극적 한정이 될 것이다: '마지막 차이는 사물과 그 정의에 대한 실체일 것이다.' 종은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를 포함할 것이고, 그것들이 바로 그것인 어떠한 것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 정의상으로 그 부분들과 동일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유들이 그 유들의 종들을 부분들로서 포함하는 전체들로 간주된다면, 종차는 종차는 상이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전체는 그 자체 그것의 부분들로 구성되기 때문에, 전체에 덧붙혀져 부분을 이룰 어떠한 한정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놓고 보자면, 종차는 그것을 수단으로 삼아 한 종이 동일한 유 속에서 다른 종들과 구별될 그러한 특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특징은 그 종차의 구성요소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구별의 귀결일 것이다; 그것은 인식근거(ratio cognoscendi)일 것이고, 존재근거(ratio dssendi)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둘로 나뉠 수 있음은 홀수와 짝수 사이의 본질적 차이이다; 그렇지만 그 차이는 홀수와 짝수 사이의 구별을 구성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러한 구별의 필연적 귀결이다.
한정가능성과 단순성
1) 어느 초기 대화편에도 탁월함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의는 아무것도 없다. 이로부터 종종 암시되어 온 것은 실재적 정의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그건 말할 것도 없고, 그 정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꼴들은 정의될 수 없다.
2) 만족스러운 정의들이 결론에 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그 정의들이 달성될 수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만일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꼴들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었다면, 어째서 그들이 꼴들이 있다고 전제되는 변증적 탐구 방법을 지지해야 했는지 그 이유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꼴들이 정의될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원칙적으로 대답될 수 없다. 즉,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물음이다. 하지만 그러면 어째서 그것이 물어져야 했는가? 어째서 소크라테스는 『에우튀프론』14c에서 그것이 답해질 수 있다고 암시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그는 그 물음이 대답되기 전까지는 예를 들어 ποῖόν τι에 속하는 물음들과 같은 다른 여러 물음들에 대한 대답들이 알려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야 하는가? - '탁월함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탁월함은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앞선다는 것이다. 초기 대화편의 몇 안 되는 주장들은 꼴들이 정의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서 아주 좋지 못하게 놓인다.
3) 그러나 만일 꼴들이 정의될 수 있다면, 꼴들의 정의가능성을 그것들의 단순성과 조화시키는 일에 대한 문제가 남는다.
4) 아리스토텔레스를 괴롭혔던 정의의 통일성에 대한 문제를 고려해 보자. S라는 종이 있다. 그 종은 G라는 유와 D라는 종차로 정의될 것이다. 즉, S는 G와 D이고, '~는~이다'는 한정적 동일성에 속하는 '~는 ~이다'인데, GD는 S인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을 낳는다: 정의될 것에서는 언급된 하나가 있고, 정의함에 있어서는 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가 둘과 동일할 수 있는가? 어떻게 S는 B와 D일 수 있는가?
5) 만일 정의를 고려함에 있어서 단지 명사적일 따름이라면, 이 문제는 흥미로울 것도 없을 것이다. 그 '~는 ~이다'는 동의어에 대한 '~는 ~이다'일 것이고, 한 복잡한 표현이 그 표현에 대해 상대적으로, 언어적으로 더 단순한 또 다른 표현과 동의적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고려 중인 정의는 명사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고, 그 정의가 산출한 역설도 또한 실재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그 역설을 존재하는 것은 가능성과 현실성 사이에서 이중적이라는 그의 원칙으로써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종과 유 그리고 종차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다; 그렇지만 유는 그 자체로 오로지 한 종류의 질료나 가능성, 그에 대해 종차가 상대적으로 현실성으로서 그리고 꼴로서 마주서는 그러한 것이다.
6) 이런 해법의 이점이 뭐든지 간에, 그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는 부적절하다. 하나의 것인 꼴은 그것과 구별되는 다른 어떤 꼴과도 또는 일련의 꼴들과도 동일시될 수 없고, 그러므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도한 그런 종류의 동일성으로 표현할 수도 없다. 소크라테스는 한 탁월함에 대해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일이 그 탁월함의 내적 존재가 복잡하고, 탁월함의 유를 포함하며, 그리고 그 복잡성 안에서 요소들로서 차이를 포함한다는 것을 수반한다고 일관성 있게 생각할 수 없었다. 정의에 대한 관계물, 종들은 단순한 단일체들이고,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것처럼은 일어나지 않는다.
7)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지는 물어볼 만한 일일 것이다. 만일 종들이 단순한 단일체들이라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들은 정의될 수 있는가? 이러한 어려움은, 비록 널리 논의되어 왔다 할지라도, 현실보다 더욱 분명하다. 단순성과 복잡성은 상대적 용어들이다.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단순하거나 완전하게 복잡하지는 않다; 그것은 주어진 국면들에서 단순하거나 복잡하고, 다른 측면들에서는 다른 식일 것이다. 만일 탁월함이 경건을 부분으로 하는 하나의 전체라면, 그리고 경건이 경건에 마주서는 탁월함으로서 그 어떠한 더 하위의 꼴에도 마주서지 않는다면, 부분들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탁월함은 복잡하고 경건은 단순하다. 그러나 만일 종들의 꼴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단순하다면, 그 꼴들이 모든 측면에서 단순하다는 것은 따라나오기 어렵다; 꼴들의 단순성을 확립시키는 바로 그 논증은 그 꼴들이 다른 꼴들과 부분과 전체, 종차, 수반, 양립가능성의 관계 속에 정립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꼴들은 창 없는 단자들이 아니고, 그것들에 대해 설명이 제시될 수 있다. 그 꼴들은 그것들을 포함하는 더 넓은 꼴들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를 추적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유들인 그러한 더 넓은 꼴들은 부분들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복잡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유들이 이러한 측면에서 복잡하다는 사실로부터 그것들이 모든 측면에 있어서 복잡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유들이, 더 상위의 유들에 의한 그것들의 포함이라는 측면에서, 전체들이 그것들의 부분들의 합산보다 더 큰 그러한 전체들로서, 단순하다는 것일 터이다.
꼴들의 영역의 구조
1) 만일 종의 유에 대한 관계가 꼴들의 구조에 기초된다면, 그 구조는 반드시 계층적이어야만 한다.
2) 이것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점이다; 그러나 그 관점은 반대에 부딪쳤다. 예를 들어 체르니스 교수는 그것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전체에 대한 구성부분으로서 또는 종에 대한 유로서 어떠한 이데아도 없다. …플라톤은 어디에서도 이데아들 사이에 유와 종의 구별을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라고 부른 것, 종차라고 부른 것, 그리고 종이라고 부른 것은 그에게 모든 별개의 관념적 단일체들이다, 각기 다른 것들의 현존을 수반하거나 다른 것들과 양립 가능한 측면들을 지닌 다른 것들 보다는 가기 다른 것들, 그러나 남김없이 다른 것들로 분석될 수는 없는 독립적 본성인. 플라톤은 그래서 분절을 사용하여 이데아들의 세계에서의 존재론적 계층을 산출할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소피스트』와 『정치가』, 분절에 대한 안내서로 여겨지게 된 그 두 저술들은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오히려 발견적 학습법을 의미했고, 한정된 이데아를 탐색함이 용이하도록 하는 수단을, 다른 이데아들로부터 그 이데아를 구별하는 것을, 그리고 그것의 함축들과 동일성을 의미했다는 것과 그가 그 분절을 가지고 이데아, 이데아의 기원, 혹은 그것의 구성 요소들의 '구조'를 묘사하는 것으로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체르니스 교수는 일부 꼴들이 어떠한 부분들도 가지지 않는 것으로서 단순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모든 꼴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단순하다는 것을, 그리고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다는 것을 또한 주장한다. 그의 의견들은 후기 대화편들을 겨냥하고 있고, 명확하게 『소피스트』에서와 같은 종류의 집단에 속하는 원칙을 겨냥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초기 대화편들의 해석으로서도 잘 맞는다.
2) 이러한 관점에 반대되는 그 저술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유나 혹은 그에 대해 꼴이 검토 아래에서 일부인 그러한 전체를 명시할 것임을, 또는 그 꼴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임을 진술하거나 시사하는 모든 저술들이다. 그러한 저술들은 : 『에우튀프론』 11e-12a, 『프로타고라스』 329c와 그 이후, 『메논』 74-6, 『라케스』 190c-d, 199e이다. 이러한 구절들 모두 유 아래에 종을 포함하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그래서 꼴들의 계층적 배열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꼴들의 영역이 균일하지 않고 단층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3)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저술들, 그리고 후기 대화편들의 다른 저술들이 그 저술들의 의도가 발견적이라는 점을 제쳐두고 세워진다고 제안한다: 그 저술들은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는 방법론적으로 전제를 반성한다. 그러나 탐구의 방법은 그 탐구의 핵심-문제의 본성에 적합한 것이거나 적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꼴들이 상호에 대해 종과 유처럼 자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 발견의 의도에 유용하다면, 어째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한 설명의 가능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 확실한 대답은 그 전제가 꼴들의 실재적 구조에 답한다는 것이다. 체르니스 교수는, 이러한 대답에 반대하면서, 그 대신에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부는 방법론과 설명을 요하는 반대 사이의 동일척도불가능성을 시사한다: 사실상 아무런 유들도 그리고 어떠한 계층도 없을 때, 어떻게 꼴들이 유들 아래에서 포함가능한 것들이고 발견적 기능을 제공하도록 계층적으로 배열된다는 전제가 가능한가?
4) 더 큰 어려움도 있다.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ποῖόν τι의 물음보다 τί의 물음이 우선한다거나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일 체르니스 교수가 제안하듯 오로지 꼴들 사이에서의 관계들만이 차이, 포함, 양립의 관계들이라면, 이러한 구별은 도출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래서 만일 꼴 F가 그것의 함축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하지 않다면, 'F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F는 오로지 함축들과 양립들의 관계들에 의해서만 특징지어질 수 있고, 그러한 관계들 중 특정한 것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본질적인 것임을 뒷받침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므로 οὐσία를 πάθος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어떠한 근거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F가 그것의 포함들과 양립들에 대해 동일시된다면, 후자는 그것이 F일 그러한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것들 중의 어떠한 것들이든 그것들이 그것들인 것보다 결핍하고 있거나 다른 것이라면, F는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러나 그것이 그러한 것인 바의 것과는 다른 것일 것이다. 즉, 동일성은 '내적 관계들'로 이끈다. 그리고 양립가능성과 함축이 모든 각각의 꼴을 다른 모든 각각의 꼴들에 관련시키기 때문에, F는 본질적으로 다른 모든 각각의 꼴과 관련될 것이다: 진리는 전체일 것이다. 스페우시푸스는 나중에 이러한 단계에 매우 근접하게 나아갔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플라톤은, 최소한 초기 대화편들에서는, 그렇지지 않은데, 왜냐하면 πάθος와 οὐσία 사이에 구별이 있다는 것을 그 단계는 부정하기 때문이다.
5)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소크라테스가 물었고 또 그것이 대답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던 것처럼 물어지고 또 대답될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ποῖόν τι의 물음들로부터 구별이 유지될 것이라면, 꼴들 사이에서 포함들과 양립가능성 그리고 그것들의 부정들의 관계들 보다 더 나아간 어떤 관련이 요구될 것이다. 그러한 관련의 본성은 『메논』에서 올바름은 탁월함 자체가 아니지만 하나의 탁월함이라는 주장에 의해, 『라케스』에서 용기는 전체로서의 탁월함에 속하는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에우튀프론』에서 경건은 올바름의 한 부분이라는 주장에 의해 제시된다. 그 관련은 종과 유 사이의 관련이다: 한 부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그 부분의 위치를 그것을 한 부분으로 하는 전체 속에서 정립해야만 한다.
탁월함의 단일성
1) 탁월함들이 유 속에 그것들을 정립시킴으로써 한정가능하다는 관점은 또 다른 초기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와 충돌하는 듯 보인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탁월함이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 명제는 플라톤의 생애 마지막에 그의 생각을 차지한 것이었고, 그것은 종종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교훈은 모든 탁월함들은 그것들이 앎이나 지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리고 탁월함이 앎이라는 주장은 탁월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정의로 고수되어 왔다. 솔직히, 그것은, 종과 유의 비동일성을 시사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가 아니다.
2) 『프로타고라스』에서 앎의 우선성은 단호하게 내세워진다(352b-c):
대부분의 사람들은 앎이 명령의 힘도 권위도 능력도 없다고 생각한다; 앎을 가질지는 모르지만 그 앎은 제압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분노에 의해, 그리고 기쁨과 고통에 의해, 가끔은 사랑에 의해, 그리고 자주 두려움에 의해서 - 비록 앎이 어떤 가난한 노예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격정들에 의해 제멋대로 끌려다닐 것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당신의 관점 아닌가, 프로타고라스? 아니면 당신은 오히려 앎이 아름다움과 능력, 그리고 그 무엇도 꺾을 수 없는 것에 속하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 동의할 텐가; 나쁨으로부터 좋음을 구별해 내기만 하면, 지상의 그 무엇도 그러한 앎을 가진 자를 그 앎 - 그의 조력자로 충분한 지혜 - 과 반대로 행동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하겠는가?
이 구절은 의심할 나위 없이 소크라테스 그 자신의 믿음을 대변한다: 탁월함은 앎이다. 그 누구도 제 뜻으로 또는 알면서도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3) 만일 앎이 탁월함을 수반한다면, 그리고 탁월함이 앎을 수반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탁월함과 앎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는 점이 따르지는 않는다. 동치는 동일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동치는 더 넓은 논증의 부분으로 나타난다. 그 논증에서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한 것에 대한 모든 이름들이라는, '용기',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탁월함'은 동의어들이라는(349b-c) 점을 받아들이도록 이끌고자 시도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앎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4) 하지만 아직 이러한 방식에는 어려움들이 있다. 우선, 그 설명이 탁월함과 앎을 동일시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능력의 동일성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이다. 만일 그 탁월함들의 명칭들이 동의어들이라면, 그 탁월함들이 지혜로 화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어떤지, 지혜를 포함한 그 탁월함들이 경건이나 올바름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지 아닌지, 그것은 임의적이다. 물론, 탁월함은 앎이나 지혜이다; 그러나 그래서, 탁월함은 용기나 경건, 또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동의어에 대해 대칭적인 관계이다.
5) 그 동일화 방식에는 두번째 어려움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들이 구별된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반대하여 네 가지 논증들을 내놓는다. 첫번째(330b-331b)는 올바름과 경건의 단일성을 주장한다; 두번째(332a-333b)는 사려와 지혜의 단일성을; 세번째(333d-334a)는 그 결론에 도달하지 않고 중단되는데, 어쨌든 올바름과 사려의 단일성을 주장할 것이었다. 거기에서 남은 대화편을 통해 중단 없이 추적되는 그 물음이 다시 말해진 다음(439b-d) 긴 중간극이 따른다. 마지막 논증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용기와 지혜의 단일성을 증명할 것을 자임한다(349d-360e). 만일 탁월함들의 단일성이 탁월함들의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러한 논증들 각각은 논리적 오류이고, 그것들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그리고 창피스럽도록 오류를 범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문답의 고비를 넘긴다. 프로타고라스는 지적인 사람으로서 도처에서 묘사되고, 말들을 다루는 방식들에 있어서 지혜롭지만,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을 다룰 줄 모른다. 그의 실패는 물론 말의 단련에 있어서 기술 부족 탓이 아니다; 그것은 소피스트에게서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비록 그가 탁월함을 가르치리라 주장할지라도, 탁월함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그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증들은, 만일 그 논증들이 공허한 오류들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결론을 가리키는 쪽으로 그 논증들이 행한다고 의미되는 것으로서 이바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6) 다른 초기 대화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타고라스』도 실패로 끝나고, 그것은 익숙한 이유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는 먼저 탁월함이 무엇인지 결정함이 없이는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은 추론할 것으로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 문답의 변증에 대한 명쾌한 요약정리를 되보여준다 (360e-361c):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다른 어떤 이유도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탁월함에 관련한 것들을 가지고 바로 그것인지, 탁월함이 그 자체로 무엇인지 밝혀내려는 바람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묻는다. 왜냐하면 나는 만일 그것이 한 번만 보여진다면 당신과 내가 논의한 물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가 말끔하게 정리되리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논증의 결과는 그것이 사람이었던 것처럼 우리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것이 혀를 가졌다면, 아마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들 둘 다 뭐 이런 바보들이 있나,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분명히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당신은 지금 바로 그 반대의 것을 설득하려 들고 있다, 모든 것 - 올바름도 사려도 그리고 용기도 - 은 앎임을 보여주려고 애쓰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 는 것이 따라나오는 것을 말이다. 만일 그것이 프로타고라스가 주장하려 애쓰는 것처럼 앎과 다른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것이 당신 주장처럼 전적으로 앎일 것이라 증명하는 것이 된다면, 소크라테스, 만일 그것이 가르쳐질 수 없다면 더욱이 이상한 일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서 프로타고라스가 조금 전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다고 전제했는데 지금은, 다름 아닌 앎을 피함으로써, 그것이 무엇보다도 최소한 가르쳐질 수만은 없을 것이도록 그렇게,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 프로타고라스, 내가 주장된 이 모든 것을 앞뒤로 볼 때, 나의 바람은 그것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것이오: 나는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향해 진격해야 할 것 같고 또 공격해야 할 것 같소. 그리고 나서 다시 되돌아와 그것이 가르쳐질 수 있을지 없을지를 물어야 할 듯 싶소.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에서,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 모두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자신들의 입장들을 뒤집어 버렸다. 이러한 뒤얽힘은 변증적 반어법의 단편이다. 그 목적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밝혀내는 일의 필연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7) 『프로타고라스』는 『메논』에서 그 짝이 되는 조각을 가진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그는 전제를 가지고 그 문제를 정착시킬 것을 최종적으로 떠맡는다. 그는 만일 탁월함이 앎이라면 그것은 가르쳐질 수 있다(87a-c)고 가정한고; 그것이 앎이라고 주장한다(87c-89a); 그리고 그것은 가르쳐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에 대한 선생들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89c-96c); 그리고 그것이 '다이몬적인 분배에 의해, 이해 없이' 사람들 속에 현존한다고 결론내린다(100a). 즉, 소크라테스는 함축을 전제하고, 그 함축의 선행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의 결론을 부정하며, 회의주의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구조는 플라톤이 그의 독자들을 그의 전제들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할 작정이었다면 무의미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나 놓여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탁월함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내지 않고 탁월함이 가르쳐질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하고자 시도했다. 그들은 아포리아(당황)로 끝을 맺었고, 심지어 기하학자들로부터 빌려온 새로운 가정의 방법조차 그들을 구해내지 못한다(86e-87a). 그러나 또, 기하학자들은 그들의 용어들을 정의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메논은 할 수 없다. 이것은, 그래서, 그들의 실패의 교훈이다. 정의는 필수적이라는,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중인 그 어떤 것을 아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익숙한 소크라테스적 교훈이다. 그래서 『메논』은 또한 변증적 역설의 한 조각이다: 그 극적인 구조는 정의가 필수적임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 보이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것은 탁월함이 앎이라는 것과 같은 그런 도덕적 결론들을 권고하는 것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그러한 결론들만이 달성될 수 있는 그러한 조건을 지시하는 데에 관심이 두어지는 것이다.
8) 만일 이것이 『프로타고라스』와 『메논』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탁월함과 앎의 단일성이라는 관점에 반대하여 강력하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다. 그 둘 중 어떤 대화편도 이러한 문제에 헌신하지 않고, 두 대화편 모두 그 대화편들의 변증적 중심점으로서, '탁월함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일의 필수불가결함 - 즉 그것을 정의하는 일의 필연성 - 을 강조하며 결론에서는 그 물음이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는 것을 주장한다.
9) 『프로타고라스』에서 탁월함의 단일성에 관한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 그 방식에서 탁월함이 하나일 그러한 대안적 방식들을 예상한다는 것은 보여주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프로타고라스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에 동의하도록 이끌린다 (329c-330b): 탁월함은 올바름, 사려, 경건, 지혜, 용기라는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이다; 이러한 부분들은 구별되고, 같은 것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 아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오로지 크기에서만 차이가 나는 황금의 일부 같은 부분들이 아니고, 두 눈과 두 귀 처럼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가 아니라(οὔτε αὐτὸ οὔτε ἡ δύναμις αὐτοῦ, 330b) 서로 그러한 종류의 것(οἷον)에 속하는 것들이다; 탁월함의 그 부분들은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람이 용기 있으나 올바르지 못하거나 올바르되 지혜롭지 못할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사람은 탁월함 전부를 가지지 못하고서도 탁월함들의 일부를 가질 것이라는 점에서, 분리될 수도 있다.
10) 다음으로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하는 하나의 전체임을 긍정함에 있어서, 복합된 반박을 내놓고 있다: 그는 탁월함의 상이한 부분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동일한 것들임을 부정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 부분들이 능력이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도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탁월함들이 하나일 두 가지 방법들이 있다.
11) 탁월함들이 그것들 각각의 그 자체에 있어서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그것들이 상이한 정의들을 가진다고 마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탁월함이 기능에 있어서 다르거나 같다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탁월함의 기능은 무엇인가?
12) 그런 물음은 『프로타고라스』 어디에서도 직접적으로 대답되지 않는다. 탁월함의 기능은 탁월함 그 자체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얼굴에 대한 예시를 무관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두 눈과 두 귀는 그것들의 기능들인 보는 것과 듣는 것으로 차이가 난다. 다시, 두 가지 덕들은 그것들이 동일하다거나(ταὐτόν) 아주 유사하다(ὁμοιότατον)는 것조차 긍정할 것도 없이 서로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οἷον)에 속한다는 것을 긍정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단어의 '기능'이 그 단어의 의미 또는 능력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올바름이 '올바름'의 의미라 할지라도, 올바름의 기능은, '올바름'의 기능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으로서, 올바름은 아니다.
13) 만일 탁월함의 기능에 대한 관념이 이해될 것이라면, 우리는 그 표현이 그 안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논증으로 시선을 돌려야만 한다.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그 자체로서나 그것들의 기능으로서나 동일하다는 것을 부정(330b)하는 근거, 그리고 나중에 그 탁월함들이 서로 간에 그와 같은 그러한 종류의 것들이라는 것을 부정(330e-331c)하는 근거는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다(329e; 349d참조). 그리고 이것은 탁월함들이 서로 만나도록 한다는 것, 경건의 현존이 올바름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 또는 용기의 현존이 지혜의 현존을 수반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 추론은 명확해 보인다: 탁월함의 기능은 그 기능을 도입하는 어떤 것 속에 놓인다; 만일 탁월함들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면, 그것들은 분리가능하다;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기능에 있어서 상이하다.
14) 이것은 그 논증의 양식에 걸맞는다.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 명제는 만일 그 명제가 탁월함들이 그것들 자체에 있어서나 또는 그것의 기능에 있어서 동일하다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면 틀린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만일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라면, 그것들은 기능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기능에 있어서 하나라면 정의에 있어서도 하나라는 것이 뒤따를 방법은 없다. 사람이 올바름 없이 경건할 수 없다거나 경건함 없이 올바를 수 없다고, 또는 경건과 올바름이 서로를 도입한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름의 정의와 경건의 정의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탁월함들은 만일 분리가능하다면 구별가능하다; 만일 탁월함들이 구별가능하다면, 그것들이 분리가능하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만일 탁월함의 부분들이 황금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 아니라면, 그 자체에 있어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모두 상이한, 얼굴의 부분들과 같은 그런 부분들이라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 즉, 탁월함의 특수한 경우에, 황금과 얼굴에 대한 그 예시들은 부적당하다는 것일 수 있고, 황금도 얼굴도 밝혀내지 못하는 정의에 있어서 차이와 기능에 있어서의 동일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일 수 있다.
15) 그 논증에 대해서는 이 만큼이면 됐다. 그러나 그 변증적 상황은 여전히 더욱 복잡하다. 만일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가 탁월함들이 분리가능하다고 추정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올바름 없이 단지 지혜롭거나 용감할 수 있다고 주장함에 있어서 틀렸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탁월함들이 그 자체에서도 그것들의 기능에 있어서도 다르다는 그 주장을 반박할 것이고, 탁월함들이 동일한 의미에서 하나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탁월함들이 어떤 면에서 하나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탁월함들이 정의에 있어서 하나인지, 아니면 오로지 그것들이 서로 도입하고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라는 것인지 말이다.
16) 『프로타고라스』는 이 물음에 대해 세심하게 고안된 모호함을 유지한다. 그것은 대안들 사이에서의 선택이 아니고, 프로타고라스 그 자신은 그 논증에 대한 그 대안들의 관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이것은 놀랄 것도 없다. 탁월함들이 정의에서 하나인지 기능에서 하나인지 혹은 양자에 있어서 하나인지 묻는 것은 탁월함이 무엇인지를 암시함으로써 묻는 것이다. 그 물음은 오로지 대화의 중국에서야 명확하게 된다(361b-c).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고려하는 중에 내내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그가 탁월함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주장했고(318a-319a), 그리고 탁월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자로서, 소크라테스적 엘렝코스(논박술)가 바로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 계획된 그러한 그 자신의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갖기 전까지는, 탁월함의 본성으로 파고드는 탐구에 유익하게 착수할 수 없었다.
17) 요약하면: 『프로타고라스』는 탁월함들이 하나일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예상한다 - 말하자면, 정의에 있어서의 동일성이나 같음, 그리고 기능에 있어서의 상호 함축 또는 같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그 주제에 대한 다른 대화편들의 논증 양식에 부합한다. 그에 대해 『메논』은 탁월한 예시를 제공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단언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다른 모든 것들은 영혼에 의존하지만, 영혼에 속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좋음을 지혜에 의존한다고; 이러한 설명으로, 유익한 것은 지혜이고, 우리는 탁월함이 유익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탁월함이 지혜이고, 전체로서나 부분에 있어서나 그러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지혜와 탁월함이 동일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상 탁월함들이 구분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것은 오히려 지혜가 탁월함에 대해 필연적인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한 것이며, 조건이며, 다른 탁월함들을 수반하고 또 그것들에 의해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8) 이후 『정체』에서 플라톤은 영혼에 대한 분석에 기초된 탁월함들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 설명은 탁월함들의 단일성을 상호 함축을 통해 긍정한다. 영혼은 그 부분들 각각이 적합한 기능을 수행할 때 비로소 올바를 수 있다; 절제는, 각 부분이 지배해야 하고 따를 것에 동의할 때; 지혜는 이성적 부분이 그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지배할 때, 용기는, 기백의 부분이 그 지배자의 명령에 있어서 훈련될 때 생긴다(『정체』Ⅳ, 442b-d). 그 탁월함들은 여기에서 명백하게 정의상으로 다르다; 그만큼 명백하게, 탁월함들은 기능에 있어서 하나이다 - 그것들은 서로를 도입하고, 서로로부터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 용기는 지혜를 수반하고 그것에 의해 수반된다; 지혜는 올바름을 수반하고 또 그에 의해 수반된다; 올바름은 절제를 수반하고 그에 의해 수반된다. 소크라테스가 결론에 있어서 '우리가 지금 논증에 있어서 이 높이에 올랐으니, 내가 보기에, 산 정상으로부터 보는 것처럼, 탁월함의 단일한 꼴 하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언급해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 탁월함의 단일성에 대한 소크라테스적 원칙은 그래서 탁월함이 여러 부분들과 함께 하나의 전체라는 주장과, 그리고 탁월함들이 최근류와 종차를 통해 정의될 수 있다는 주장과도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부분들과 부분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분들과 전체 사이의 관계가 동시함축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로고스와 우시아
1) 만일 앞서 말한 설명이 건전하다면, 초기 대화편들 내에서 그런 종류의 논증은 고려함에 있어서 실재적이고 명사적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지 한 단어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2) 그 대상이 적어도 그것이 유와의 관계에서 존립하는 종일 때에는 단순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될 것과 정의함 사이에서 통용된다는 것을 고수하였던 그러한 관련은 획득하지 않는다: 그 종은 결합된 부분들로서 그것의 유와 종차와 함께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같음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같음도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에우튀프론』10d, 13에서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은 경건에 대한 정의로서는 거부되는데 왜냐하면 그 둘이 다르기 때문이고(ἕτερον; 10e, 9에서 ταὐτόν이라는실에 견주어 반대로), 이러한 거부는 15c, 2에서 반복된다(οὐ ταὐτόν … ἀλλ᾿ ἕτερα ἀλλήλων).
3) 여기에는 어떤 종류의 같음이 필요한가? 그것은 외연의 동일성, 또는 진리치 보존(salve veritate) 대체성이 아닌데, 설령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그러한 것들 모두가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것들만이 경건하거나 경건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단순히 πάθος를 진술할 뿐 οὐσία를 진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개념적 동일성인 것도 아니다: 에우튀프론은, 경건을 생각함에 있어서, 그렇게 함으로써 경건의 정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의어의 같음도 아니다.
4) 정의는 대상에 대한 설명이다. 그래서 아마도 정의에 있어서 필요한 같음은 이를테면 서술적 동일성, 말하자면 샛별과 태백성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하거나, 또는 - 그 예시에서 필요한 경험적 우연성을 피하기 위해 - 일곱번째 정수와 네번째 소수의 동일성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동일성은 두 가지 한정적 서술들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반면에, 실재적 정의에 있어서 정의될 것은 대상에 대한 서술이 아니고, 대상 그 자체이다. 그 비유는 만일 서술적 구절이 명사에 의해 대체된다면 더욱 근접하다: '금성은 샛별이다' 또는 '7은 네번째 소수이다'; 무엇보다도 유일한 서술로 정의를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이것도 오독이다. 지혜는, 의심의 여지 없이, 탁월함이다; 그러나 '…는 탁월하다'라는 말이 소크라테스를 서술하는과 같은 의미에서 '…은(는) 탁월함이다'라는 말이 지혜를 서술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인데, 왜냐하면 첫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유에 대한 종의 관계이고, 두번째 구절에서 그 관계는 한 특성에 대한 한 특성의 예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정적 서술에 있어서 필요한 후자의 관계이다.
5) 아마도 정의에서 필요한 종류의 동일성은 그것 자체의 유(sui generis)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간단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을 포함하는 유와 그것을 그 유 속에서 다른 종들로부터 지적해 내는 종차를 진술함으로써 그 종인 어떤 것을 말할 때 필요한 그런 동일성이다. 종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종차는 종들에 대한 구별의 구성요소는 아니지만, 그 구별의 결과이다; 정의에 있어서 종차는 사유근거이고, 존재근거가 아니며, 그러므로 정의에서 필요한 동일성은 대상들의 동일성이 아니다. 정의의 단일성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도 정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위한 최선의 - 그리고 ὁρίζειν과 ὅρος의 대다수 함축에 부합하는 하나의 - 비유는 사상(寫像)의 비유이다: 정의한다는 것은 한 종의 위치를 그 종을 포함한 유 속에서 정하는 것이다. 만일 종이 농장이라면, 유를 규정함의 목표는 그 농장이 위치하는 마을을 지시하는 것일 터이다; 차이를 규정함의 목표는 농장의 경계들을 측량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전 조사된 경계선들의 현존을 밝혀내는 것일 것이다. 정의에서 필요한 같음은 말하자면, 유일한 위치의 같음이다: 정의될 것은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 안에서 사상된 그 위치를 점유한다.
6) 이러한 방식에서 생각되는 최근류와 종차를 통한 정의는 형이상학에서의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것은 꼴들이, 서로에 대해 포함하는 것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포함되는 것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존립하면서, 계층적으로 정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내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나거나, 상호 구성적이어야 할 것으로 드러난다: 종들은 그것들이 만일 그것들을 포함하는 어떤 것에 의해 포함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것들이 아니었리라는 점에서 그것들의 특성을 그것들의 유들에 의존한다; 올바름은, 만일 그것이 탁월함이 아니었다면, 올바름이 아니었을 것이다. 반대로, 탁월함은, 그것의 한 종이 올바름이 아니었더라면, 탁월함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는 그것의 현존과 특징을 그것의 종에 의존한다. 전체는 그것의 부분들에 의존하여 전체인 그것일 것이다. 플라톤은 그 점에 대해 조금 덜 명확하지만, 아마도 유들에 대한 정의는, 종들에 대한 정의와 달리, 구성 요소들로의 분석을 필요로 할 것이다.
7) 이것은 플라톤적 유들에 대한 함축의 풍부함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에 있어서, 유들은 종들로부터의 추상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사람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사람과 말은 동물이라는 것에 속하는 공통된 특징을 가진다. 그 유는 여기에서 단지 다양성에 대한 공통된 요소일 따름이고, 그것의 종들보다 더 '추상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만일 정의가 사상에 대해 동종적이라면, 만일 유들이 부분들을 포함하는 전체들이라면, 유는 공통된 특징이 아니라, 마치 그것의 현존이 그것의 요소들 혹은 부분들의 현존에 의해 전제하기도 하고 전제되기도 하는 하나의 체계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래서 유는, 함축의 상대적으로 결여되었음보다는 오히려 함축을 잔뜩 실은 것으로서, 결핍되었다기 보다는 풍부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8) 하나의 체계로서, 유는 한 종류의 폐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하고, 그 체계를 다른 체계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류의 제한들로부터 갈라놓는 단일성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οὐσία와 πάθος 사이의 구별은 한 사물에 본질적인 것과 그 사물이 단지 가지게 되었을 뿐인 특징 사이의 구별을 수반한다. 올바름 또는 탁월함에 대한 경건의 관계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에 대한 경건의 관계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일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본질적 정의에 있어서 내적 성질을 시사한다면, 그러므로 그것은 꼴에 대한 모든 설명들이 본질을 진술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즉 그 관계의 내적 성질만큼이나 외적 성질도 시사한다.
9) 유들은 체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종들은 그 유들의 요소들이기 때문에, 종들에 대한 정의들은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일상적 진술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사상들이다. 그러한 사상을 구축하기 위해, 또는 사용하기 위해서, 일반적 언어에도 개별적 사물들과 행위들에도 호소할 수 없다: 꼴들에 대한 지식은 지적 직관을, 존재하는 사물들의 본성을 꿰뚫는 직접적 통찰을 요청할 것이다. 실재적 정의의 진리는 오직 그에 대한 정의가 설명인 그러한 진리를 파악함으로써만 파악될 수 있다.
10) 만일 이러하다면, 정의와 직관은 상보적일 것이다. 지적 직관은 실례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알고 있음에 의한 앎'에 속하는 난해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종류의 설명도 제공함이 없이 푸른 하늘의 한 조각을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감각은 지적으로 노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꼴들에 대한 직관은 반대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변증은 단순히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하는 것, 이전에 불충분한 설명 속에서 흐릿하게 보였던 어떤 것을 충분한 설명 속에서 명확하게 보려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시야는 진술들에 대한 검토에 의해 확보된다. 미리 앎에 의한 앎에 대한 지적 직관의 비교는 지적 직관의 대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라는 사실을 도외시한다.
11) 일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적 변증의 이 지점에서 압박을, 직관과 논리 사이의 긴장을 발견할 것을 주장해 왔다. R. G. 콜링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지만 상당히 높게 플라톤의 철학적 성취들은 평가받고, 최고에 못 미치는 어떤 가치에 있어서 그것들을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그의 방법론에 대한 이론이 그 자신에 의해 철학과 수학 사이에서 확립되는 충분히 깊은 구별로 이끄는 것에 대한 실패를 통하여 결함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만하는, 철학자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의 방법론이 철학을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하나는 재기 발랄한 억지 이론의 식상한 낭비이고, 다른 하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관적 시야이다. 이러한 첫번째 것이 두번째 것으로의 경로라는 것은 여러 세대들에 속하는 경험에 의해 플라톤이 그들의 길잡이로 취해졌다는 것에 대한 보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사실들에 권위에서 받아들여질 사실들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그 조명 속에서 사살들이 이해될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탐구 속에서, 철학적 탐구에 매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플라톤이 우리에게 주진 않았다.
이러한 비판은 감각 지각의 틀을 관통하는 지적 직관을 강요함으로부터, 지적인 것으로서, 그 직관이 판단을 통해 지속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에 실패함으로부터 귀결한다.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한 행위는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진술 속에서 표현 가능한 하나의 내용을 필요로하고, 그로써 비평에 적합하다. 한 진술은 지적 통찰에 속하는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은 그를 통해 통찰이 표현되는 그러한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해서조차. 안다는 것은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다.
이 동사는 현재의 의미에 대해 실제로는 완료이다. ὁράω의 제 2 부정과거 εἶδον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3. 많은 동사들은 제 1 부정과거 수동태의 동사 어간에 부가되는 접미사 -τέος로써 형용사들을 형성한다. 라틴어의 gerundive(동형사) 이러한 형용사들은 수동의 의미를 지니고 필연성을 의미하는 to be 동사와 유사하게 사용된다. 바꿔 말하자면 -τέος = must be. 예를 들어 διαβατέος, 건너져야만 한다. 그 행위의 행위자는 여격의 명사나 대명사로 표현된다. 이것은 행위자의 여격이라 불린다. 이런 형용사들은 인칭적으로나 비인칭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문보다는 비인칭 동사들인 δεῖ와 χρή가 더욱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ὁ ποταμὸς ἡμῖν διαβατέος ἐστί. 그 강은 우리에 의해 건너져야야만 한다.(우리는 그 강을 건너야만 한다.)
ἡμῖν πειστέον ἐστί. 우리에 의해 믿어져야만 한다.(우리를 믿어야만 한다.)
4. 노력, 주의, 분투를 의미하는 동사들에는 ὅπως(드물게 ὡς)와 미래 직설법이, 2차 시제 뒤에서까지도, 뒤따를 것이다. 그 부정은 μή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사들은 또한 ἵνα, ὡς, ὅπως와 가정법 또는 기원법의 일반적인 목적구문을 허용한다:
διεπράξατο ὅπως τοὺς ἵππους Κύρῳ πέμψουσιν. 그는 그들이 그 말들을 퀴로스에게 보내도록 이끌었다(만들었다, 초래했다 등. bring abo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