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 ist auch nicht nötig, daß wir die Anschauungsart in Raum und Zeit auf die Sinnlichkeit des Menschen einschränken; es mag sein, daß alles endliche denkende Wesen hierin mit dem Menschen notwendig übereinkommen müsse, (wiewohl wir dieses nicht entscheiden können,) so hört sie um dieser Allgemeingültigkeit willen doch nicht auf Sinnlichkeit zu sein, eben darum, weil sie abgeleitet (intuitus derivativus), nicht ursprünglich (intuitus originarius), mithin nicht intellektuelle Anschauung ist, als welche aus dem eben angeführten Grunde allein dem Urwesen, niemals aber einem, seinem Dasein sowohl als seiner Anschauung nach (die sein Dasein in Beziehung auf gegebene Objekte bestimmt), abhängigen Wesen zuzukommen scheint; wiewohl die letztere Bemerkung zu unserer ästhetischen Theorie nur als Erläuterung, nicht als Beweisgrund gezählt werden muß.

→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들이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파생되었기 (파생적 직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근원존재에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Beschluß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초월론적 감성학의 맺음말

 

Hier haben wir nun eines von den erforderlichen Stücken zur Auflösung der allgemeinen Aufgabe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wie sind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nämlich reine Anschauungen a priori, Raum und Zeit, in welchen wir, wenn wir im Urteile a pirori über den gegebenen Begriff hinausgehen wollen, dasjenige antreffen, was nicht im Begriffe, wohl aber in der Anschauung, die ihm entspricht, a priori entdeckt werden und mit jenem synthetisch verbunden werden kann, welche Urteile aber aus diesem Grunde nie weiter, als auf Gegenstände der Sinne reichen, und nur für Objekte möglicher Erfahrung gelten können.

→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인 공간과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어떤 것과 마주치지만,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Es ist auch nicht nötig, daß wir die Anschauungsart in Raum und Zeit auf die Sinnlichkeit des Menschen einschränken;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하는 것;

es mag sein, daß alles endliche denkende Wesen hierin mit dem Menschen notwendig übereinkommen müsse, (wiewohl wir dieses nicht entscheiden können,) so hört sie um dieser Allgemeingültigkeit willen doch nicht auf Sinnlichkeit zu sein, eben darum, weil sie abgeleitet (intuitus derivativus), nicht ursprünglich (intuitus originarius), mithin nicht intellektuelle Anschauung ist, als welche aus dem eben angeführten Grunde allein dem Urwesen, niemals aber einem, seinem Dasein sowohl als seiner Anschauung nach (die sein Dasein in Beziehung auf gegebene Objekte bestimmt), abhängigen Wesen zuzukommen scheint;

그것은 있을지 모른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한다는 것,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파생적 직관),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그러므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근원존재에,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으로서;

wiewohl die letztere Bemerkung zu unserer ästhetischen Theorie nur als Erläuterung, nicht als Beweisgrund gezählt werden muß.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들이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파생되었기 (파생적 직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근원존재에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Beschluß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초월론적 감성학의 맺음말

 

Hier haben wir nun eines von den erforderlichen Stücken zur Auflösung der allgemeinen Aufgabe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wie sind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nämlich reine Anschauungen a priori(, Raum und Zeit, in welchen wir, wenn wir im Urteile a pirori über den gegebenen Begriff hinausgehen wollen, dasjenige antreffen, was nicht im Begriffe, wohl aber in der Anschauung, die ihm entspricht, a priori entdeckt werden und mit jenem synthetisch verbunden werden kann, welche Urteile aber aus diesem Grunde nie weiter, als auf Gegenstände der Sinne reichen, und nur für Objekte möglicher Erfahrung gelten können.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 공간과 시간이, 그 안에서 우리가,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그것을 마주치는,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직관 안에서, 그 직관이 그것에 상응하는,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그리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인 공간과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어떤 것과 마주치지만,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蟲-

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사람들은 면밀하게 그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그것의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을.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그러나 그런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에 앞서 형성하였다면,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에, 그것들이,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는,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그 형식들이 그를 통해 감각적이라고 불리는,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다.

→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蟲-

Dieser geschieht aber nicht nach unserem Prinzip der Idealität aller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en; vielmehr, wenn man jenen Vorstellungsformen objektive Realität beilegt, so kann man nicht vermeiden, daß nicht alles dadurch in bloßen Schein verwandelt werde. Denn, wenn man den Raum und die Zeit als Beschaffenheiten ansieht, die ihrer Möglichkeit nach in Sachen an sich angetroffen werden müßten, und überdenkt die Ungereimtheiten, in die man sich alsdenn verwickelt, indem zwei unendliche Dinge, die nicht Substanzen, auch nicht etwas wirklich den Substanzen Inhärierendes, dennoch aber Existierendes, ja die notwendige Bedingung der Existenz aller Dinge sein müssen, auch übrig bleiben, wenn gleich alle existierende Dinge aufgehoben werden; so kann man es dem guten Berkeley wohl nicht verdenken, wenn er die Körper zu bloßem Schein herabsetzte, ja es müßte so gar unsere eigene Existenz, die auf solche Art von der für sich bestehenden Realität eines Undinges, wie die Zeit, abhängig gemacht wäre, mit dieser in lauter Schein verwandelt werden; eine Ungereimtheit, die sich bisher noch niemand hat zu Schulden kommen lassen.

→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동시에,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또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에게서 그가 물체를,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이 시간처럼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이러한 물체와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Dieser geschieht aber nicht nach unserem Prinzip der Idealität aller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en;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vielmehr, wenn man jenen Vorstellungsformen objektive Realität beilegt, so kann man nicht vermeiden, daß nicht alles dadurch in bloßen Schein verwandelt werde.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nicht가 중복된 듯)는 것을.

→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Denn, wenn man den Raum und die Zeit als Beschaffenheiten ansieht, die ihrer Möglichkeit nach in Sachen an sich angetroffen werden müßten, und überdenkt die Ungereimtheiten, in die man sich alsdenn verwickelt, indem zwei unendliche Dinge, die nicht Substanzen, auch nicht etwas wirklich den Substanzen Inhärierendes, dennoch aber Existierendes, ja die notwendige Bedingung der Existenz aller Dinge sein müssen, auch übrig bleiben, wenn gleich alle existierende Dinge aufgehoben werden;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그리고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동시에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또한 남는다,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so kann man es dem guten Berkeley wohl nicht verdenken, wenn er die Körper zu bloßem Schein herabsetzte, ja es müßte so gar unsere eigene Existenz, die auf solche Art von der für sich bestehenden Realität eines Undinges, wie die Zeit, abhängig gemacht wäre, mit dieser in lauter Schein verwandelt werden;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의 그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가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그것이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시간과 같이,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이것과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

eine Ungereimtheit, die sich bisher noch niemand hat zu Schulden kommen lassen.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동시에,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또한 남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에게서 그가 물체를,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이 시간처럼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이러한 물체와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蟲-

Ⅲ. Wenn ich sage: im Raum und der Zeit stellt die Anschauung, so wohl der äußeren Objekte, als auch die Selbstanschauung des Gemüts, beides vor, so wie es unsere Sinne affiziert, d.i. wie es erscheint; so will das nicht sagen, daß diese Gegenstände ein bloßer Schein wären. Denn in der Erscheinung werden jederzeit die Objekte, ja selbst die Beschaffenheiten, die wir ihnen beilegen, als etwas wirklich Gegebenes angesehen, nur daß, so fern diese Beschaffenheit nur von der Anschauungsart des Subjekts in der Relation des gegebenen Gegenstandes zu ihm abhöngt, dieser Gegenstand als Erscheinung von ihm selber als Objekt an sich unterschieden wird. So sage ich nicht, die Körper scheinen bloß außer mir zu sein, oder meine Seele scheint nur in meinem Selbstbewußtsein gegeben zu sein, wenn ich behaupte, daß die Qualität des Raums und der Zeit, welcher, als Bedingung ihres Daseins, gemäß ich beide setze, in meiner Anschauungsart und nicht in diesen Objekten an sich liege. Es wäre meine eigene Schuld, wenn ich aus dem, was ich zur Erscheinung zählen sollte, bloßen Schein machte¹.

→ Ⅲ. 내가 :공간과 시간 안에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직관을,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는 것처럼, 곧 그것이 현상하는 것처럼, 표상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주장할 때,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¹.

 

¹Die Prädikate der Erscheinung können dem Objekte selbst beigelegt werden, in Verhältnis auf unseren Sinn, z.B. der Rose die rote Farbe, oder der Geruch; aber der Schein kann niemals als Prädikat dem Gegenstande beigelegt werden, eben darum, weil er, was diesem nur in Verhältnis auf die Sinne, oder überhaupt aufs Subjekt zukommt, dem Objekt für sich beilegt, z.B. die zwei Henkel, die man anfänglich dem Saturn beilegte. Was gar nicht am Objekte an sich selbst, jederzeit aber im Verhältnisse desselben zum Subjekt anzutreffen und von der Vorstellung des ersteren unzertrennlich ist, ist Erscheinung, und so werden die Prädikate des Raumes und der Zeit mit Recht den Gegenständen der Sinne, als solchen, beigelegt, und hierin ist kein Schein. Dagegen, wenn ich der Rose an sich die Röte, dem Saturn die Henkel, oder allen äußeren Gegenständen die Ausdehnung an sich beilege, ohne auf ein bestimmtes Verhältnis dieser Gegenstände zum Subjekt zu sehen und mein Urteil darauf einzuschränken; alsdenn allererst entspringt der Schein.

→ ¹현상의 술어(빈사)는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을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두 고리.→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반면에,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Ⅲ. Wenn ich sage: im Raum und der Zeit stellt die Anschauung, so wohl der äußeren Objekte, als auch die Selbstanschauung des Gemüts, beides vor, so wie es unsere Sinne affiziert, d.i. wie es erscheint;

Ⅲ. 내가 말한다면: 공간과 시간 안에 직관을 표상한다고,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그렇게 우리의 감관을 촉발한다, 곧 그것은 현상한다고;

so will das nicht sagen, daß diese Gegenstände ein bloßer Schein wären.

그것은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 Ⅲ. 내가 :공간과 시간 안에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직관을,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는 것처럼, 곧 그것이 현상하는 것처럼, 표상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Denn in der Erscheinung werden jederzeit die Objekte, ja selbst die Beschaffenheiten, die wir ihnen beilegen, als etwas wirklich Gegebenes angesehen, nur daß, so fern diese Beschaffenheit nur von der Anschauungsart des Subjekts in der Relation des gegebenen Gegenstandes zu ihm abhöngt, dieser Gegenstand als Erscheinung von ihm selber als Objekt an sich unterschieden wird.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So sage ich nicht, die Körper scheinen bloß außer mir zu sein, oder meine Seele scheint nur in meinem Selbstbewußtsein gegeben zu sein, wenn ich behaupte, daß die Qualität des Raums und der Zeit, welcher, als Bedingung ihres Daseins, gemäß ich beide setze, in meiner Anschauungsart und nicht in diesen Objekten an sich liege.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내가 주장할 때,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그러한 것,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 그래서 나는 내가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주장할 때,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Es wäre meine eigene Schuld, wenn ich aus dem, was ich zur Erscheinung zählen sollte, bloßen Schein machte¹.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 만일 내가 그로부터,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¹.

→ 만일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¹.

 

¹Die Prädikate der Erscheinung können dem Objekte selbst beigelegt werden, in Verhältnis auf unseren Sinn, z.B. der Rose die rote Farbe, oder der Geruch;

¹현상의 술어(빈사)는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aber der Schein kann niemals als Prädikat dem Gegenstande beigelegt werden, eben darum, weil er, was diesem nur in Verhältnis auf die Sinne, oder überhaupt aufs Subjekt zukommt, dem Objekt für sich beilegt, z.B. die zwei Henkel, die man anfänglich dem Saturn beilegte.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에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고리,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 ¹현상의 술어(빈사)는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을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두 고리.

Was gar nicht am Objekte an sich selbst, jederzeit aber im Verhältnisse desselben zum Subjekt anzutreffen und von der Vorstellung des ersteren unzertrennlich ist, ist Erscheinung, und so werden die Prädikate des Raumes und der Zeit mit Recht den Gegenständen der Sinne, als solchen, beigelegt, und hierin ist kein Schein.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Dagegen, wenn ich der Rose an sich die Röte, dem Saturn die Henkel, oder allen äußeren Gegenständen die Ausdehnung an sich beilege, ohne auf ein bestimmtes Verhältnis dieser Gegenstände zum Subjekt zu sehen und mein Urteil darauf einzuschränken; alsdenn allererst entspringt der Schein.

반면에,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 반면에,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蟲-

Alles, was durch einen Sinn vorgestellt wird, ist so fern jederzeit Erscheinung, und ein innerer Sinn würde also entweder gar nicht eingeräumt werden müssen, oder das Subjekt, welches der Gegenstand desselben ist, würde durch denselben nur als Erscheinung vorgestellt werden können, nicht wie es von sich selbst urteilen würde, wenn seine Anschauung bloße Selbsttätigkeit, d.i. intellektuell, wäre. Hiebei beruht alle Schwierigkeit nur darauf, wie ein Subjekt sich selbst innerlich anschauen könne; allein diese Schwierigkeit ist jeder Theorie gemein. Das bewußtsein seiner selbst (Apperzeption) ist die einfache Vorstellung des Ich, und, wenn dadurch allein alles Mannigfaltige im Subjekt selbsttätig gegeben wäre, so würde die innere Anschauung intellektuell sein. Im Menschen erfodert dieses Bewußtsein innere Wahrnehmung von dem Mannigfaltigen, was im Subjekte vorher gegeben wird, und die Art, wie dieses ohne Spontaneität im Gemüte gegeben wird, muß, um dieses Unterschiedes willen, Sinnlichkeit heißen. Wenn das Vermögen sich bewüßt zu werden, das, was im Gemüte liegt, aufsuchen (apprehendieren) soll, so muß es dasselbe affizieren, und kann allein auf solche Art eine Anschauung seiner selbst hervorbringen, deren Form aber, die vorher im Gemüte zum Grunde liegt, die Art, wie das Mannigfaltige im Gemüte beisammen ist, in der Vorstellung der Zeit bestimmt; da es denn sich selbst anschauet, nicht wie es sich unmittelbar selbsttäitg vorstellen würde, sondern nach der Art, wie es von innen affiziert wird, folglich wie es sich erscheint. nicht wie es ist.

→ 언제나 현상인 한에서 감관을 통해 표상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 달리, 그것의 직관이 순전히 자발성, 즉 지성적이라면, 전혀 정리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거나, 아니면 대상인 주관을 통하여 단지 현상으로서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모든 모든 어려움은 단지, 어떻게 주관 자체가 내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가, 그것에 기인한다; 오직 이러한 어려움만이 각 이론에 보편적이다.→ 그것 자체의 의식존재(통각)는 나에 속하는 단일한 표상이다. 그리고 만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모든 잡다들이 주관 안에 자발적으로 주어진다면 내적 직관은 지성적일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이러한 의식은 잡다들에 대한 주관 안에서 앞서서 주어지는 내적 지각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자발성 없이 심성 안에 주어지는 그 방식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성이라 불러야 한다.→ 능력 자체가 의식될 때, 그것은, 심성 안에 놓인 것으로, 찾아내야(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능력은 심성을 자극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방식에서만 그것 자체의 직관이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서 심성 안에 기초로 놓이는 직관의 형식은 잡다가 심성 안에 함께하는 방식을 시간의 표상 안에서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곧장 자발적으로 표상되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것과 같은, 그러므로 그것이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그것이 현상하는 것과 같은, 그 방식에 따라서 직관하기 때문이다.

 

 

Alles, was durch einen Sinn vorgestellt wird, ist so fern jederzeit Erscheinung, und ein innerer Sinn würde also entweder gar nicht eingeräumt werden müssen, oder das Subjekt, welches der Gegenstand desselben ist, würde durch denselben nur als Erscheinung vorgestellt werden können, nicht wie es von sich selbst urteilen würde, wenn seine Anschauung bloße Selbsttätigkeit, d.i. intellektuell, wäre.

모든 것은, 감관을 통해 표상되는, 언제나 현상인 한에서, 전혀 정리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거나, 아니면 주관, 그것의 대상인, 그것을 통하여 단지 현상으로서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할 것과 달리, 그것의 직관이 순전히 자발성, 즉 지성적이라면.

→ 언제나 현상인 한에서 감관을 통해 표상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 달리, 그것의 직관이 순전히 자발성, 즉 지성적이라면, 전혀 정리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거나, 아니면 대상인 주관을 통하여 단지 현상으로서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Hiebei beruht alle Schwierigkeit nur darauf, wie ein Subjekt sich selbst innerlich anschauen könne;

이와 관련하여 모든 모든 어려움은 단지 그에 기인한다, 어떻게 주관 자체가 내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가;

allein diese Schwierigkeit ist jeder Theorie gemein.

오직 이러한 어려움만이 각 이론에 보편적이다.

→ 이와 관련하여 모든 모든 어려움은 단지, 어떻게 주관 자체가 내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가, 그것에 기인한다; 오직 이러한 어려움만이 각 이론에 보편적이다.

Das Bewußtsein seiner selbst (Apperzeption) ist die einfache Vorstellung des Ich, und, wenn dadurch allein alles Mannigfaltige im Subjekt selbsttätig gegeben wäre, so würde die innere Anschauung intellektuell sein.

그것 자체의 의식존재(통각)는 나에 속하는 단일한 표상이다, 그리고, 만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모든 잡다들이 주관 안에 자발적으로 주어진다면, 내적 직관은 지성적일 것이다.

→ 그것 자체의 의식존재(통각)는 나에 속하는 단일한 표상이다. 그리고 만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모든 잡다들이 주관 안에 자발적으로 주어진다면 내적 직관은 지성적일 것이다.

Im Menschen erfodert dieses Bewußtsein innere Wahrnehmung von dem Mannigfaltigen, was im Subjekte vorher gegeben wird, und die Art, wie dieses ohne Spontaneität im Gemüte gegeben wird, muß, um dieses Unterschiedes willen, Sinnlichkeit heißen.

인간에 있어서 이러한 의식은 잡다들에 대한 내적 지각을 요구한다, 주관 안에서 앞서서 주어지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을, 어떻게 이러한 것이 자발성 없이 심성 안에 주어지는지, 이러한 구분을 하기 위해서, 감성이라 불러야 한다.

→ 인간에 있어서 이러한 의식은 잡다들에 대한 주관 안에서 앞서서 주어지는 내적 지각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자발성 없이 심성 안에 주어지는 그 방식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성이라 불러야 한다.

Wenn das Vermögen sich bewüßt zu werden, das, was im Gemüte liegt, aufsuchen (apprehendieren) soll, so muß es dasselbe affizieren, und kann allein auf solche Art eine Anschauung seiner selbst hervorbringen, deren Form aber, die vorher im Gemüte zum Grunde liegt, die Art, wie das Mannigfaltige im Gemüte beisammen ist, in der Vorstellung der Zeit bestimmt;

능력 자체가 의식될 때, 그것은, 심성 안에 놓인, 찾아내야(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그것을 자극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방식에서만 그것 자체의 직관이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형식은, 그것이 앞서서 심성 안에 기초로 놓이는, 방식을, 어떻게 잡다가 심성 안에 함께하는지, 시간의 표상 안에서 규정한다.

da es denn sich selbst anschauet, nicht wie es sich unmittelbar selbsttäitg vorstellen würde, sondern nach der Art, wie es von innen affiziert wird, folglich wie es sich erscheint. nicht wie es ist.

왜냐하면 그 자체가 직관하기 때문이다, 곧장 자발적으로 표상되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방식에 따라서,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것과 같은, 그러므로 그것이 현상하는 것과 같은. 그것이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 능력 자체가 의식될 때, 그것은, 심성 안에 놓인 것으로, 찾아내야(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능력은 심성을 자극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방식에서만 그것 자체의 직관이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서 심성 안에 기초로 놓이는 직관의 형식은 잡다가 심성 안에 함께하는 방식을 시간의 표상 안에서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곧장 자발적으로 표상되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것과 같은, 그러므로 그것이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그것이 현상하는 것과 같은, 그 방식에 따라서 직관하기 때문이다.

 

-蟲-

Ⅱ. Zur Bestätigung dieser Theorie von der Idealität des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Sinnes, mithin aller Objekte der Sinne, als bloßer Erscheinungen, kann vorzüglich die Bemerkung dienen: daß alles, was in unserem Erkenntnis zur Anschauung gehört, (also Gefühl der Lust und Unlust, und den Willen, die gar nicht Erkenntnisse sind, ausgenomme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se enthalte, der Örter in einer Anschauung (Ausdehnung), Veränderung der Örter (Bewegung), und Gesetze, nach denen diese Veränderung bestimmt wird (bewegende Kräfte). Was aber in dem Orte gegenwärtig sei, oder was es außer der Ortveränderung in den Dingen selbst wirke, wird dadurch nicht gegeben. Nun wird durch bloße Verhältnisse doch nicht eine Sache an sich erkannt: also ist wohl zu urteilen, daß, da uns durch den äußeren Sin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vorstellungen gegeben werden, dieser auch nur das Verhältnis eines Gegenstandes auf das Subjekt in seiner Vorstellung enthalten könne, und nicht das Innere, was Objekte an sich zukommt. Mit der inneren Anschauung ist es eben so bewandt. Nicht allein, daß darin die Vorstellungen äußerer Sinne den eigentlichen Stoff ausmachen, womit wir unser Gemüt besetzen, sondern die Zeit, in die wir diese Vorstellungen setzen, die selbst dem Bewußtsein derselben in der Erfahrung vorhergeht, und als formale Bedingung der Art, wie wir sie im Gemüte setzen, zum Grunde liegt, enthält schon Verhältnisse des Nacheinander-, des Zugleichseins, und dessen, was mit dem Nacheinandersein zugleich ist (des Beharrlichen). Nun ist das, was, als Vorstellung, vor aller Handlung irgend etwas zu denken, vorhergehen kann, die Anschauung, und, wenn sie nichts als Verhältnisse enthäl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nämlich dieses Setzen seiner Vorstellung, mithin durch sich selbst affiziert wird, d.i. ein innerer Sinn seiner Form nach.

→ Ⅱ. 외감과 마찬가지로 내감의 이념성에 대한 이러한 이론의 증명으로, 따라서 감관의 모든 객체는, 순전한 현상들로서, 다음과 같은 관찰을 주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 안에서 직관에 속하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인식들은 아닌 쾌와 불쾌의 감정, 그리고 의지를 제외하고,) 직관 안에서 장소 (넓이), 장소의 변화 (운동), 그리고, 그것들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규정되는 (움직이는 힘) 법칙들의 순전한 관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소 안에서 그 자리에 있을 어떤 것, 또는 장소변화의 외부에서 사물들 자체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은,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 순전한 관계들을 통하여 또한 사태 자체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외감을 통하여 순전한 관계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또한 단지 주관에 대한 대상의 관계만을 그것의 표상 안에 포함할 수 있다고, 그리고 객관 자체에 부합하는 내적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내적 직관도 바로 그러하다.→ 그 안에서 외감의 표상들이, 우리가 우리의 심성을 채우는 고유한 질료를 형성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우리가 이러한 표상들을 놓는, 그 자체가 그 표상들의 의식존재에 경험 안에서 선행하는, 그러한 시간이, 우리가 그것들을 심성 안에 놓는 방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기초에 놓인다. 시간은 이미 계기존재, 동시존재, 그리고 계기존재를 가지고 동시에 있는 것(지속하는 것의)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 이제 표상으로서 그것은 좌우간 사유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행위에 앞서, 직관은 선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직관의 형식은, 그것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심성 안에 놓이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심성이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즉 그것의 표상의 놓음을 통하여, 그에 따라 그 자체를 통하여 촉발되는,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의 내감에 따르는 그 방식 외에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없을 것이다.

 

 

Ⅱ. Zur Bestätigung dieser Theorie von der Idealität des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Sinnes, mithin aller Objekte der Sinne, als bloßer Erscheinungen, kann vorzüglich die Bemerkung dienen:

Ⅱ. 외감과 마찬가지로 내감의 이념성에 대한 이러한 이론의 증명으로, 따라서 감관의 모든 객체는, 순전한 현상들로서, 관찰을 주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daß alles, was in unserem Erkenntnis zur Anschauung gehört, (also Gefühl der Lust und Unlust, und den Willen, die gar nicht Erkenntnisse sind, ausgenomme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se enthalte, der Örter in einer Anschauung (Ausdehnung), Veränderung der Örter (Bewegung), und Gesetze, nach denen diese Veränderung bestimmt wird (bewegende Kräfte).

모든 것은, 우리의 인식 안에서 직관에 속하는, (그러므로 쾌와 불쾌의 감정, 그리고 의지를, 그것들이 인식들은 전혀 아닌, 제외하고,) 순전한 관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직관 안에서 장소 (넓이), 장소의 변화 (운동), 그리고 법칙들, 그것들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규정되는 (움직이는 힘).

→ Ⅱ. 외감과 마찬가지로 내감의 이념성에 대한 이러한 이론의 증명으로, 따라서 감관의 모든 객체는, 순전한 현상들로서, 다음과 같은 관찰을 주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 안에서 직관에 속하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인식들은 아닌 쾌와 불쾌의 감정, 그리고 의지를 제외하고,) 직관 안에서 장소 (넓이), 장소의 변화 (운동), 그리고, 그것들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규정되는 (움직이는 힘) 법칙들의 순전한 관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Was aber in dem Orte gegenwärtig sei, oder was es außer der Ortveränderung in den Dingen selbst wirke, wird dadurch nicht gegeben.

그러나 장소 안에서 그 자리에 있을 어떤 것, 또는 장소변화의 외부에서 사물들 자체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은,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 그러나 장소 안에서 그 자리에 있을 어떤 것, 또는 장소변화의 외부에서 사물들 자체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은,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Nun wird durch bloße Verhältnisse doch nicht eine Sache an sich erkannt:

이제 순전한 관계들을 통하여 또한 사태 자체도 인식되지 않는다:

also ist wohl zu urteilen, daß, da uns durch den äußeren Sin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vorstellungen gegeben werden, dieser auch nur das Verhältnis eines Gegenstandes auf das Subjekt in seiner Vorstellung enthalten könne, und nicht das Innere, was Objekte an sich zukommt.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외감을 통하여 순전한 관계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또한 단지 주관에 대한 대상의 관계만을 그것의 표상 안에 포함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내적인 것은, 객관 자체에 부합하는, 아니라고.

→ 이제 순전한 관계들을 통하여 또한 사태 자체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외감을 통하여 순전한 관계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또한 단지 주관에 대한 대상의 관계만을 그것의 표상 안에 포함할 수 있다고, 그리고 객관 자체에 부합하는 내적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Mit der inneren Anschauung ist es eben so bewandt.

내적 직관도 바로 그러하다.

→ 내적 직관도 바로 그러하다.

Nicht allein, daß darin die Vorstellungen äußerer Sinne den eigentlichen Stoff ausmachen, womit wir unser Gemüt besetzen, sondern die Zeit, in die wir diese Vorstellungen setzen, die selbst dem Bewußtsein derselben in der Erfahrung vorhergeht, und als formale Bedingung der Art, wie wir sie im Gemüte setzen, zum Grunde liegt, enthält schon Verhältnisse des Nacheinander-, des Zugleichseins, und dessen, was mit dem Nacheinandersein zugleich ist (des Beharrlichen).

그 안에서 외감의 표상들이 고유한 질료를 형성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심성을 채우는, 오히려 시간이, 그 안에 우리가 이러한 표상들을 놓는, 그 자체가 그 표상들의 의식존재에 경험 안에서 선행하는, 그리고 방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우리가 그것들을 심성 안에 놓는, 기초에 놓인다, 이미 계기존재, 동시존재, 그리고 그것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계기존재를 가지고 동시에 있는 것의 (지속하는 것의).

→ 그 안에서 외감의 표상들이, 우리가 우리의 심성을 채우는 고유한 질료를 형성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우리가 이러한 표상들을 놓는, 그 자체가 그 표상들의 의식존재에 경험 안에서 선행하는, 그러한 시간이, 우리가 그것들을 심성 안에 놓는 방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기초에 놓인다. 시간은 이미 계기존재, 동시존재, 그리고 계기존재를 가지고 동시에 있는 것(지속하는 것의)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Nun ist das, was, als Vorstellung, vor aller Handlung irgend etwas zu denken, vorhergehen kann, die Anschauung, und, wenn sie nichts als Verhältnisse enthäl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nämlich dieses Setzen seiner Vorstellung, mithin durch sich selbst affiziert wird, d.i. ein innerer Sinn seiner Form nach.

이제 그것은, 표상으로서, 좌우간 사유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행위에 앞서, 선행할 수 있다, 직관은, 그리고, 그것이 관계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직관의 형식은, 그것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심성 안에 놓이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방식 외에, 심성이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즉 그것의 표상의 놓음을 통하여, 그에 따라 그 자체를 통하여 촉발된다,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의 내감에 따라.

→ 이제 표상으로서 그것은 좌우간 사유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행위에 앞서, 직관은 선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직관의 형식은, 그것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심성 안에 놓이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심성이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즉 그것의 표상의 놓음을 통하여, 그에 따라 그 자체를 통하여 촉발되는,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의 내감에 따르는 그 방식 외에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없을 것이다.

 

-蟲-

Wäre das letzte, so könnte niemals ein allgemein gültiger, noch weniger ein apodiktischer Satz daraus werden: denn Erfahrung kann dergleichen niemals liefern. Ihr müßt also euren Gegenstand a priori in der Anschauung geben, und auf diesen euren synthetischen Satz gründen. Läge nun in euch nicht ein Vermögen, a priori anzuschauen; wäre diese subjektive Bedingung der Form nach nicht zugleich die allgemeine Bedingung a priori, unter der allein das Objekt dieser (äußeren) Anschauung selbst möglich ist; wäre der Gegenstand (der Triangel) etwas an sich selbst ohne Beziehung auf euer Subjekt: wie könntet ihr sagen, daß, was in euren subjektiven Bedingungen einen Triangel zu konstruieren notwendig liegt, auch dem Triangel an sich selbst notwendig zukommen müsse? denn ihr könntet doch zu euren Begriffen (von drei Linien) nichts Neues (die Figur) hinzufügen, welches darum notwendig an dem Gegenstande angetroffen werden müßte, da dieser vor eurer Erkenntnis und nicht durch dieselbe gegeben ist. Wäre also nicht der Raum (und so auch die Zeit) eine bloße Form eurer Anschauung, welche Bedingungen a priori enthält, unter denen allein Dinge für euch äußere Gegenstände sein können, die ohne diese subjektive Bedingungen an sich nichts sind; so könntet ihr a priori ganz und gar nichts über äußere Objekte synthetisch ausmachen. Es ist also ungezweifelt gewiß, und nicht bloß möglich, oder auch wahrscheinlich, daß Raum und Zeit, als die notwendigen Bedingungen aller (äußern und innern) Erfahrung, bloß subjektive Bedingungen aller unsrer Anschauung sind, im Verhältnis auf welche daher alle Gegenstände bloße Erscheinungen und nicht für sich in dieser Art gegebene Dinge sind, von denen sich auch um deswillen, was die Form derselben betrifft, vieles a priori sagen läßt, niemals aber das Mindeste von dem Dinge an sich selbst, das dies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en mag.

→ 만약 후자라면, 그로부터 그 어떤 보편적으로 정당한, 더욱이 명증적인 명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전혀 이끌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 안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고, 이것에 당신들의 종합적 명제들이 근거할 것이다.→ 이제 당신들 안에 선험적으로 직관하는 능력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주관적 조건은 동시에 그 아래에서 이러한 (외적) 직관 자체의 객체만이 가능한 보편적 선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대상(삼각형)은 당신들의 주관과 관련함이 없이 어떤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당신들은 어떻게, 당신들의 주관적 조건 안에 삼각형을 작도함이 필연적으로 놓인다는 것, 또한 삼각형 자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당신들은 또한 당신들의 개념(세 직선에 대한)에 대해, 그것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대상에 관련되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형)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들의 인식 이전에 그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간(그리고 또 역시 시간)이 당신들의 직관의, 그것들 아래에서 사물만이 당신들에게 이러한 주관적 조건들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외적 대상들일 수 있는 선험적 조건들을 포함하는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면; 당신들은 전적으로 선험적으로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외적 객체에 대해 종합적으로 형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이 모든 (외적 그리고 내적) 경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우리의 모든 직관의 순전히 주관적인 조건들이라는 것은 순전히 가능한 것만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혹은 개연적이지도 않고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관계 속에서 그런 이유로 모든 대상들은 순전한 형상들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 자체에 주어진 사물들은 아니다. 그 사물들에 대해 그것이 또한 그 때문에, 그것의 형식에 관한 것은,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말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현상들에 기초로 놓일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것조차 전혀 말하도록 하지 않는다.

 

 

Wäre das letzte, so könnte niemals ein allgemein gültiger, noch weniger ein apodiktischer Satz daraus werden:

만약 후자라면, 그로부터 그 어떤 보편적으로 정당한, 더욱이 명증적인 명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

denn Erfahrung kann dergleichen niemals liefern.

왜냐하면 경험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전혀 이끌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 만약 후자라면, 그로부터 그 어떤 보편적으로 정당한, 더욱이 명증적인 명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전혀 이끌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Ihr müßt also euren Gegenstand a priori in der Anschauung geben, und auf diesen euren synthetischen Satz gründen.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 안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고, 이것에 당신들의 종합적 명제들이 근거할 것이다.

→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 안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고, 이것에 당신들의 종합적 명제들이 근거할 것이다.

Läge nun in euch nicht ein Vermögen, a priori anzuschauen;

이제 당신들 안에 능력은 없을 것이다, 선험적으로 직관하는;

wäre diese subjektive Bedingung der Form nach nicht zugleich die allgemeine Bedingung a priori, unter der allein das Objekt dieser (äußeren) Anschauung selbst möglich ist;

이러한 형식의 주관적 조건은 동시에 보편적 선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 아래에서 이러한 (외적) 직관 자체의 객체만이 가능한;

wäre der Gegenstand (der Triangel) etwas an sich selbst ohne Beziehung auf euer Subjekt:

대상(삼각형)은 당신들의 주관과 관련함이 없이 어떤 것 그 자체일 것이다:

wie könntet ihr sagen, daß, was in euren subjektiven Bedingungen einen Triangel zu konstruieren notwendig liegt, auch dem Triangel an sich selbst notwendig zukommen müsse?

당신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들의 주관적 조건 안에 삼각형을 작도함이 필연적으로 놓인다는 것, 또한 삼각형 자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 이제 당신들 안에 선험적으로 직관하는 능력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주관적 조건은 동시에 그 아래에서 이러한 (외적) 직관 자체의 객체만이 가능한 보편적 선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대상(삼각형)은 당신들의 주관과 관련함이 없이 어떤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당신들은 어떻게, 당신들의 주관적 조건 안에 삼각형을 작도함이 필연적으로 놓인다는 것, 또한 삼각형 자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denn ihr könntet doch zu euren Begriffen (von drei Linien) nichts Neues (die Figur) hinzufügen, welches darum notwendig an dem Gegenstande angetroffen werden müßte, da dieser vor eurer Erkenntnis und nicht durch dieselbe gegeben ist.

왜냐하면 당신들은 또한 당신들의 개념(세 직선에 대한)에 대해 그 어떤 새로운 것(도형)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대상에 관련되어야만 하는, 이것은 당신들의 인식 이전에 그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당신들은 또한 당신들의 개념(세 직선에 대한)에 대해, 그것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대상에 관련되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형)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들의 인식 이전에 그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Wäre also nicht der Raum (und so auch die Zeit) eine bloße Form eurer Anschauung, welche Bedingungen a priori enthält, unter denen allein Dinge für euch äußere Gegenstände sein können, die ohne diese subjektive Bedingungen an sich nichts sind;

그러므로 공간(그리고 또 역시 시간)이 당신들의 직관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면, 선험적 조건들을 포함하는, 그것들 아래에서 사물만이 당신들에게 외적 대상들일 수 있는, 그 대상들이 이러한 주관적 조건들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so könntet ihr a priori ganz und gar nichts über äußere Objekte synthetisch ausmachen.

그래서 당신들은 전적으로 선험적으로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외적 객체에 대해 종합적으로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공간(그리고 또 역시 시간)이 당신들의 직관의, 그것들 아래에서 사물만이 당신들에게 이러한 주관적 조건들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외적 대상들일 수 있는 선험적 조건들을 포함하는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면; 당신들은 전적으로 선험적으로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외적 객체에 대해 종합적으로 형성할 수 없다.

Es ist also ungezweifelt gewiß, und nicht bloß möglich, oder auch wahrscheinlich, daß Raum und Zeit, als die notwendigen Bedingungen aller (äußern und innern) Erfahrung, bloß subjektive Bedingungen aller unsrer Anschauung sind, im Verhältnis auf welche daher alle Gegenstände bloße Erscheinungen und nicht für sich in dieser Art gegebene Dinge sind, von denen sich auch um deswillen, was die Form derselben betrifft, vieles a priori sagen läßt, niemals aber das Mindeste von dem Dinge an sich selbst, das dies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en mag.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그리고 순전히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은 개연적이지도 않다, 공간과 시간이, 모든 (외적 그리고 내적) 경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우리의 모든 직관의 순전히 주관적인 조건들이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 그런 이유로 모든 대상들은 순전한 형상들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 자체에 주어진 사물들은 아니다, 그 사물들에 대해 그것이 또한 그 때문에, 그것의 형식에 관한 것은,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말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것조차 전혀, 그것이 이러한 현상들에 기초로 놓일.

→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이 모든 (외적 그리고 내적) 경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우리의 모든 직관의 순전히 주관적인 조건들이라는 것은 순전히 가능한 것만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혹은 개연적이지도 않고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관계 속에서 그런 이유로 모든 대상들은 순전한 형상들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 자체에 주어진 사물들은 아니다. 그 사물들에 대해 그것이 또한 그 때문에, 그것의 형식에 관한 것은,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말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현상들에 기초로 놓일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것조차 전혀 말하도록 하지 않는다.

 

-蟲-

Es ist kein anderer Weg, als durch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beide aber, als solche, die entweder a priori oder a posteriori gegeben sind. Die letztern, nämlich empirische Begriffe, imgleichen das, worauf sie sich gründen, die empirische Anschauung, können keinen synthetischen Satz geben, als nur einen solchen, der auch bloß empirisch d.i. ein Erfahrungssatz ist, mithin niemals Notwendigkeit und absolute Allgemeinheit enthalten kann, dergleichen doch das Charakteristische aller Sätze der Geometrie ist. Was aber das erstere und einzige Mittel sein würde, nämlich durch bloße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a priori, zu dergleichen Erkenntnissen zu gelangen, so ist klar, daß aus bloßen Begriffen gar keine synthetische Erkenntnis, sondern lediglich analytische erlangt werden kann. Nehmet nur den Satz: daß durch zwei gerade Linien sich gar kein Raum einschließen lasse, mithin k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ihn aus dem Begriff von geraden Linien und der Zahl zwei abzuleiten; oder auch, daß aus dreien geraden Linien 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es eben so bloß aus diesen Begriffen. Alle eure Bemühung ist vergeblich, und ihr seht euch genötiget, zur Anschauung eure Zuflucht zu nehmen, wie es die Geometrie auch jederzeit tut. Ihr gebt euch also ein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von welcher Art aber ist diese, ist es eine reine Anschauung a priori oder eine empirishce?

→ 그것은 개념들을 통해서나 또는 직관들을 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런 방식도 아니다; 그러나 둘 모두 선험적으로나 혹은 후험적으로 둘 중 하나인 그러한 것으로서만 주어진다.→ 후자, 즉 경험적 개념들은 그 개념들이 근거하는 경험적 직관들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의 모든 명제들의 성격이 또한 그러한 것과 같은 필연성이나 절대적 보편성을 전혀 포함할 수 없는 그러한 오로지 순전히 감각적인, 즉 경험명제 외에는 어떠한 경험명제도 줄 수 없다.→ 그러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 될 것, 즉 순전한 개념들을 통해서나 선험적인 직관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인식들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순전히 개념들만으로부터는 전혀 아무런 종합적 인식들도 획득될 수 없고, 오히려 다만 분석적인 명제들만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저: 두 직선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공간도 둘러싸도록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어떠한 형태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명제를 취하자. 그리고 직선과 2라는 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하고자 시도해 보자; 아니면, 세 직선으로부터 하나의 형태가 가능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찬가지로 순전히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시도해 보자.→ 당신들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당신들은 기하학이 또한 매번 그러한 것처럼 그대들의 도피처로 직관을 취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당신들은 그러므로 직관 안에서 대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에 대하여 이러한 것이, 그것이 순수한 선험적 직관이거나 경험적 직관인가?

 

 

Es ist kein anderer Weg, als durch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그것은 다른 아무런 방식도 아니다, 개념들을 통해서나 또는 직관들을 통하는 것 이외의;

beide aber, als solche, die entweder a priori oder a posteriori gegeben sind.

그러나 둘 모두, 그러한 것으로서, 선험적으로나 혹은 후험적으로 둘 중 하나로만 주어진다.

→ 그것은 개념들을 통해서나 또는 직관들을 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런 방식도 아니다; 그러나 둘 모두 선험적으로나 혹은 후험적으로 둘 중 하나인 그러한 것으로서만 주어진다.

Die letztern, nämlich empirische Begriffe, ingleichen das, worauf sie sich gründen, die empirische Anschauung, können keinen synthetischen Satz geben, als nur einen solchen, der auch bloß empirisch d.i. ein Erfahrungssatz ist, mithin niemals Notwendigkeit und absolute Allgemeinheit enthalten kann, dergleichen doch das Charakteristische aller Sätze der Geometrie ist.

후자, 즉 경험적 개념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 개념들이 근거하는, 경험적 직관들, 어떠한 경험적 명제도 줄 수 없다, 오로지 그러한 것 외에는, 또한 순전히 감각적, 즉 경험명제이고, 그에 따라 전혀 필연성이나 절대적 보편성을 포함할 수 없다, 기하학의 모든 명제들의 성격이 또한 그러하듯이.

→ 후자, 즉 경험적 개념들은 그 개념들이 근거하는 경험적 직관들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의 모든 명제들의 성격이 또한 그러한 것과 같은 필연성이나 절대적 보편성을 전혀 포함할 수 없는 그러한 오로지 순전히 감각적인, 즉 경험명제 외에는 어떠한 경험명제도 줄 수 없다.

Was aber das erstere und einzige Mittel sein würde, nämlich durch bloße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a priori, zu dergleichen Erkenntnissen zu gelangen, so ist klar, daß aus bloßen Begriffen gar keine synthetische Erkenntnis, sondern lediglich analytische erlangt werden kann.

그러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 될 것, 즉 순전한 개념들을 통해서나 선험적인 직관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인식들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분명하다, 순전히 개념들만으로부터는 전혀 아무런 종합적 인식들도 획득될 수 없고, 오히려 다만 분석적인 명제들만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은.

→ 그러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 될 것, 즉 순전한 개념들을 통해서나 선험적인 직관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인식들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순전히 개념들만으로부터는 전혀 아무런 종합적 인식들도 획득될 수 없고, 오히려 다만 분석적인 명제들만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Nehmet nur den Satz: daß durch zwei gerade Linien sich gar kein Raum einschließen lasse, mithin k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ihn aus dem Begriff von geraden Linien und der Zahl zwei abzuleiten;

그저 명제를 취하자: 두 직선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공간도 둘러싸도록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어떠한 형태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리고 직선과 2라는 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하고자 시도해 보자;

oder auch, daß aus dreien geraden Linien 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es eben so bloß aus diesen Begriffen.

아니면, 세 직선으로부터 하나의 형태가 가능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찬가지로 순전히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시도해 보자.

→ 그저: 두 직선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공간도 둘러싸도록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어떠한 형태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명제를 취하자. 그리고 직선과 2라는 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하고자 시도해 보자; 아니면, 세 직선으로부터 하나의 형태가 가능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찬가지로 순전히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시도해 보자.

Alle eure Bemühung ist vergeblich, und ihr seht euch genötiget, zur Anschauung eure Zuflucht zu nehmen, wie es die Geometrie auch jederzeit tut.

당신들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당신들은 그대들의 도피처로 직관을 취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기하학이 또한 매번 그러한 것처럼.

→ 당신들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당신들은 기하학이 또한 매번 그러한 것처럼 그대들의 도피처로 직관을 취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Ihr gebt euch also ein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당신들은 그러므로 직관 안에서 대상을 갖는다;

von welcher Art aber ist diese, ist es eine reine Anschauung a priori oder eine empirishce?

그러나 그러한 방식에 대하여 이러한 것이, 그것이 순수한 선험적 직관이거나 경험적 직관인가?

→ 당신들은 그러므로 직관 안에서 대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에 대하여 이러한 것이, 그것이 순수한 선험적 직관이거나 경험적 직관인가?

 

-蟲-

Nehmen wir aber dieses Empirische überhaupt, und fragen, ohne uns an die Einstimmung desselben mit jedem Menschensinne zu kehren, ob auch dieses einen Gegenstand an sich selbst (nicht in Regentropfen, denn die sind denn schon, als Erscheinungen, empirische Objekte,) vorstelle, so ist die Frage von der Beziehung der Vorstellung auf den Gegenstand transzendental, und nicht allein diese Tropfen sind bloße Erscheinungen, sondern selbst ihre runde Gestalt, ja so gar der Raum, in welchen sie fallen, sind nichts an sich selbst, sondern bloße Modifikationen, oder Grundlagen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das transzendentale Objekt aber bleibt uns unbekannt.

→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인 것 전반을 취하고, 우리에게 각각의 인간들의 감관과 그것의 일치를 돌아봄 없이, 비록 이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를 (빗방울들 속에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로 이미, 현상들로서, 감각적 객체들이기 때문에,) 표상할지 묻는다면,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초월적이고, 이러한 물방울들만이 순전한 현상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둥근 모양 자체도, 그렇게 더욱이 그 안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공간도, 그 자체인 어떤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저 변화들, 혹은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원료이고, 그러나 그 초월적 객체는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Die zweite wichtige Angelegenheit unser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ist, daß sie nicht bloß als scheinbare Hypothese einige Gunst erwerbe, sondern so gewiß und ungezweifelt sei, als jemals von einer Theorie gefordert werden kann, die zum Organon dienen soll. Um diese Gewißheit völlig einleuchtend zu machen, wollen wir irgend einen Fall wählen, woran dessen Gültigkeit augenscheinlich werden und zu mehrer Klarheit dessen, was § 3. angeführt worden, dienen kann.

→ 우리의 초월론적 감성학의 두번째 중대한 관심사는, 그것이 순전히 가상의 가정으로서 일치된 허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이론에 대하여 요구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하는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확실성을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한 상황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 상황에서 그것의 정당성이 명백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의 더 많은 명확함을 위해 § 3.에서 제시된 것을 사용할 수 있다.

 

Setzet demnach, Raum und Zeit seien an sich selbst objektiv und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Dinge an sich selbst, so zeigt sich erstlich: daß von beiden a priori apodiktische und synthetische Sätze in großer Zahl vornehmlich vom Raum vorkommen, welchen wir darum vorzüglich hier zum Beispiel untersuchen wollen. Da die Sätze der Geometrie synthetisch a priori und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erkannt werden, so frage ich: woher nehmt ihr dergleichen Sätze, und worauf stützt sich unser Verstand, um zu dergleichen schlechthin notwendigen und allgemein gültigen Wahrheiten zu gelangen?

→ 그런 이유에서, 공간과 시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사물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리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최초로 드러난다: 그 양자로부터, 우리가 그에 대해 특히 여기에서 예시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선험적으로 자명하고 종합적인 명제들이 엄청난 수에서 특히 공간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에서 기하학의 명제들은 선험적으로 종합적이며 자명한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당신들은, 그와 같은 전적으로 필연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실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디에서 그와 같은 명제들을 취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성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Nehmen wir aber dieses Empirische überhaupt, und fragen, ohne uns an die Einstimmung desselben mit jedem Menschensinne zu kehren, ob auch dieses einen Gegenstand an sich selbst (nicht in Regentropfen, denn die sind denn schon, als Erscheinungen, empirische Objekte,) vorstelle, so ist die Frage von der Beziehung der Vorstellung auf den Gegenstand transzendental, und nicht allein diese Tropfen sind bloße Erscheinungen, sondern selbst ihre runde Gestalt, ja so gar der Raum, in welchen sie fallen, sind nichts an sich selbst, sondern bloße Modifikationen, oder Grundlagen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das transzendentale Objekt aber bleibt uns unbekannt.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인 것 전반을 취하고, 묻는다면, 우리에게 각각의 인간들의 감관과 그것의 일치를 돌아봄 없이, 비록 이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를 (빗방울들 속에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로 이미, 현상들로서, 감각적 객체들이기 때문에,) 표상할지라도,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초월적이고, 이러한 물방울들만이 순전한 현상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둥근 모양 자체도, 그렇게 더욱이 공간도, 그 안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그 자체인 어떤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저 변화들, 혹은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원료이고, 그러나 그 초월적 객체는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인 것 전반을 취하고, 우리에게 각각의 인간들의 감관과 그것의 일치를 돌아봄 없이, 비록 이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를 (빗방울들 속에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로 이미, 현상들로서, 감각적 객체들이기 때문에,) 표상할지 묻는다면,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초월적이고, 이러한 물방울들만이 순전한 현상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둥근 모양 자체도, 그렇게 더욱이 그 안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공간도, 그 자체인 어떤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저 변화들, 혹은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원료이고, 그러나 그 초월적 객체는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Die zweite wichtige Angelegenheit unser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ist, daß sie nicht bloß als scheinbare Hypothese einige Gunst erwerbe, sondern so gewiß und ungezweifelt sei, als jemals von einer Theorie gefordert werden kann, die zum Organon dienen soll.

우리의 초월론적 감성학의 두번째 중대한 관심사는, 그것이 순전히 가상의 가정으로서 일치된 허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리라는 것, 일찍이 이론에 대하여 요구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하는.

→ 우리의 초월론적 감성학의 두번째 중대한 관심사는, 그것이 순전히 가상의 가정으로서 일치된 허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이론에 대하여 요구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하는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리라는 것이다.

Um diese Gewißheit völlig einleuchtend zu machen, wollen wir irgend einen Fall wählen, woran dessen Gültigkeit augenscheinlich werden und zu mehrer Klarheit dessen, was § 3. angeführt worden, dienen kann.

이러한 확실성을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한 상황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 상황에서 그것의 정당성이 명백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의 더 많은 명확함을 위해, § 3.에서 제시된 것을, 사용할 수 있다.

→ 이러한 확실성을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한 상황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 상황에서 그것의 정당성이 명백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의 더 많은 명확함을 위해 § 3.에서 제시된 것을 사용할 수 있다.

 

Setzet demnach, Raum und Zeit seien an sich selbst objektiv und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Dinge an sich selbst, so zeigt sich erstlich:

그런 이유에서 가정해 보자, 공간과 시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사물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리라고, 그렇게 최초로 드러난다:

daß von beiden a priori apodiktische und synthetische Sätze in großer Zahl vornehmlich vom Raum vorkommen, welchen wir darum vorzüglich hier zum Beispiel untersuchen wollen.

그 양자로부터 선험적으로 자명하고 종합적인 명제들이 엄청난 수에서 특히 공간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에 대해 특히 여기에서 예시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 그런 이유에서, 공간과 시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사물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리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최초로 드러난다: 그 양자로부터, 우리가 그에 대해 특히 여기에서 예시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선험적으로 자명하고 종합적인 명제들이 엄청난 수에서 특히 공간으로부터 나온다.

Da die Sätze der Geometrie synthetisch a priori und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erkannt werden, so frage ich:

여기에서 기하학의 명제들은 선험적으로 종합적이며 자명한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묻는다:

woher nehmt ihr dergleichen Sätze, und worauf stützt sich unser Verstand, um zu dergleichen schlechthin notwendigen und allgemein gültigen Wahrheiten zu gelangen?

당신들은 어디에서 그와 같은 명제들을 취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성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그와 같은 전적으로 필연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실들에 도달하기 위해.

→ 여기에서 기하학의 명제들은 선험적으로 종합적이며 자명한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당신들은, 그와 같은 전적으로 필연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실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디에서 그와 같은 명제들을 취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성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蟲-

WIr unterscheiden sonst wohl unter Erscheinungen, das, was der Anschauung derselben wesentlich anhängt, und für jeden menschlichen Sinn überhaupt gilt, von demjenigen, was derselben nur zufälliger Weise zukommt, indem es nicht auf die Beziehung der Sinnlichkeit überhaupt, sondern nur auf eine besondre Stellung oder Organisation dieses oder jenes Sinnes gültig ist. Und da nennt man die erstere Erekenntnis eine solche, die den Gegenstand an sich selbst vorstellt, die zweite aber nur die Erscheinung desselben. Dieser Unterschied ist aber nur empirisch. Bleibt man dabei stehen, (wie es gemeiniglich geschieht,) und sieht jene empirische Anschauung nicht wiederum (wie es geschehen sollte) als bloße Erscheinung an, so daß darin gar nichts, was irgend eine Sache an sich selbst anginge, anzutreffen ist, so ist unser transzendentaler Unterschied verloren, und wir glauben alsdenn doch, DInge an sich zu erkennen, ob wir es gleich überall (in der Sinnenwelt) selbst bis zu der tiefsten Erforschung ihrer Gegenstände mit nichts, als Erscheinungen, zu tun haben. So werden wir zwar den Regenbogen eine bloße Erscheinung bei einem Sonnregen nennen, diesen Regen aber die Sache an sich selbst, welches auch richtig ist, so fern wir den letztern Begriff nur physisch verstehen, als das, was in der allgemeinen Erfahrung, unter allen verschiedenen Lagen zu den Sinnen, doch in der Anschauung so und nicht anders bestimmt ist.

→ 우리는 보통 현상들 아래에서, 그 현상들의 직관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것을, 그리고 각각의 인간 감각 전반에 대해 유효한 것을, 그 안에서 그것이 감성 전반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이러저러한 감각의 특수한 상태 또는 구성에 대해서만 정당한 그 현상들에 단지 우연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것으로부터, 잘 구분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은 전자의 인식을, 대상 그 자체를 표상하는 그러한 것으로, 그러나 후자는 단지 그 대상의 현상만을 표상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단지 감각적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기에 멈추어 서고, 저런 감각적 직관을 다른 한편 순전한 직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듯이), 그래서 그 안에서, 사태 자체에 관계된 무엇이든 전혀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는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초월론적 구분은 상실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하여 또한,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도 (경험세계 내에서) 그것의 대상들에 대한 가장 깊은 연구에까지 현상 외의 다른 무엇과도 관련하지 않을지라도,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지개를 여우비가 내릴 때의 단순한 현상이라 말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비를 사태 그 자체로도 말한다. 그러한 것이, 우리가 후자의 개념을 오로지 물리적으로만 이해하는 한에서, 보편적 경험 내에서, 모든 상이한 상황들 아래에서 감각들에,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다른 식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는 한에서, 또한 옳다.

 

 

WIr unterscheiden sonst wohl unter Erscheinungen, das, was der Anschauung derselben wesentlich anhängt, und für jeden menschlichen Sinn überhaupt gilt, von demjenigen, was derselben nur zufälliger Weise zukommt, indem es nicht auf die Beziehung der Sinnlichkeit überhaupt, sondern nur auf eine besondre Stellung oder Organisation dieses oder jenes Sinnes gültig ist.

우리는 보통 현상들 아래에서 잘 구분한다, 그것을, 그 현상들의 직관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것을, 그리고 각각의 인간 감각 전반에 대해 유효한 것을, 그것으로부터, 그 현상들에 단지 우연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것으로부터, 그 안에서 그것이 감성 전반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이러저러한 감각의 특수한 상태 또는 구성에 대해서만 정당한.

→ 우리는 보통 현상들 아래에서, 그 현상들의 직관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것을, 그리고 각각의 인간 감각 전반에 대해 유효한 것을, 그 안에서 그것이 감성 전반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이러저러한 감각의 특수한 상태 또는 구성에 대해서만 정당한 그 현상들에 단지 우연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것으로부터, 잘 구분한다.

Und da nennt man die erstere Erekenntnis eine solche, die den Gegenstand an sich selbst vorstellt, die zweite aber nur die Erscheinung desselben.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은 전자의 인식을 그러한 것으로 말한다, 대상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것으로, 그러나 후자는 단지 그 대상의 현상만을 표상하는 것으로.

→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은 전자의 인식을, 대상 그 자체를 표상하는 그러한 것으로, 그러나 후자는 단지 그 대상의 현상만을 표상하는 것으로 말한다.

Dieser Unterschied ist aber nur empirisch.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단지 감각적일 뿐이다.

→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단지 감각적일 뿐이다.

Bleibt man dabei stehen, (wie es gemeiniglich geschieht,) und sieht jene empirische Anschauung nicht wiederum (wie es geschehen sollte) als bloße Erscheinung an, so daß darin gar nichts, was irgend eine Sache an sich selbst anginge, anzutreffen ist, so ist unser transzendentaler Unterschied verloren, und wir glauben alsdenn doch, DInge an sich zu erkennen, ob wir es gleich überall (in der Sinnenwelt) selbst bis zu der tiefsten Erforschung ihrer Gegenstände mit nichts, als Erscheinungen, zu tun haben.

사람들은 거기에 멈추어 선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저런 감각적 직관을 다른 한편 순전한 직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듯이), 그래서 그 안에서 전혀 아무것도, 사태 자체에 관계된 무엇이든, 마주치지 않는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초월론적 구분은 상실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하여 또한,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을 믿는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도 (경험세계 내에서) 그것의 대상들에 대한 가장 깊은 연구에까지 현상 외의 다른 무엇과도 관련하지 않을지라도.

→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기에 멈추어 서고, 저런 감각적 직관을 다른 한편 순전한 직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듯이), 그래서 그 안에서, 사태 자체에 관계된 무엇이든 전혀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는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초월론적 구분은 상실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하여 또한,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도 (경험세계 내에서) 그것의 대상들에 대한 가장 깊은 연구에까지 현상 외의 다른 무엇과도 관련하지 않을지라도,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을 믿는다.

So werden wir zwar den Regenbogen eine bloße Erscheinung bei einem Sonnregen nennen, diesen Regen aber die Sache an sich selbst, welches auch richtig ist, so fern wir den letztern Begriff nur physisch verstehen, als das, was in der allgemeinen Erfahrung, unter allen verschiedenen Lagen zu den Sinnen, doch in der Anschauung so und nicht anders bestimmt ist.

그리하여 우리가 무지개를 여우비가 내릴 때의 단순한 현상이라 말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비를 사태 그 자체로도 말한다, 그러한 것이 또한 옳다, 우리가 후자의 개념을 오로지 물리적으로만 이해하는 한에서, 보편적 경험 내에서, 모든 상이한 상황들 아래에서 감각들에,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다른 식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는 한에서.

→ 그리하여 우리가 무지개를 여우비가 내릴 때의 단순한 현상이라 말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비를 사태 그 자체로도 말한다. 그러한 것이, 우리가 후자의 개념을 오로지 물리적으로만 이해하는 한에서, 보편적 경험 내에서, 모든 상이한 상황들 아래에서 감각들에,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다른 식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는 한에서, 또한 옳다.

 

-蟲-

Dagegen enthält die Vorstellung eines Körpers in der Anschauung gar nichts, was ein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zukommen könnte, sondern bloß die Erscheinung von etwas, und die Art, wie wir dadurch affiziert werden, und diese Rezeptivität unserer Erkenntnisfähigkeit heißt Sinnlichkeit, und bleibt von der Erkenntnis des Gegenstandes an sich selbst, ob man jene (die Erscheinung) gleich bis auf den Grund durchschauen möchte, dennoch himmelweit unterschieden.

그에 반해 물체의 표상은 직관 안에서 아무런 것도 전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대상 그 자체에 수반할 수 있을,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한 순전한 현상만을, 그리고 그 방식을, 우리가 그를 통하여 자극되는,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능력의 이러한 수용성이 감성이라 불리우며, 대상 그 자체의 인식에 대하여 남는다, 사람들이 저것(현상)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이.

→ 그에 반해 물체의 표상은 직관 안에서, 대상 그 자체에 수반할 수 있을 아무런 것도 전혀 포함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한 순전한 현상만을, 그리고 우리가 그를 통하여 자극되는 그 방식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능력의 이러한 수용성이 감성이라 불리우며, 사람들이 저것(현상)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이 대상 그 자체의 인식에 대하여 남는다.

 

Die Leibniz-Wolffische Philosophie hat daher allen Untersuchungen über die Natur und den Ursprung unserer Ereknntnisse einen ganz unrechten Gesichtspunkt angewissen, indem sie den Unterschied der SInnlichkeit vom Intellektuellen bloß als logisch betrachtete, da er offenbar transzendental ist, und nicht bloß die Form der Deutlichkeit oder Undeutlichkeit, sondern den Ursprung und den Inhalt derselben betrifft, so daß wir durch die erstere die Beschaffenheit der Dinge an sich selbst nicht bloß undeutlich, sondern gar nicht erkennen, und, so bald wir unsre subjektive Beschaffenheit wegnehmen, das vorgestellte Objekt mit den Eigenschaften, die ihm die sinnliche Anschauung beilegte, überall nirgend anzutreffen ist, noch angetroffen werden kann, indem eben diese subjektive Beschaffenheit die Form desselben, als Erscheinung, bestimmt.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그에 따라 우리 인식들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전적으로 부당한 관점을 지닌다, 그 안에서 그 철학이 지성적인 것에 대한 감성의 차이를 순전히 논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 차이가 명백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명료함이나 불분명함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과 내용에 관계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자를 통하여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을 그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특성을 제거하자마자, 표상된 객관이 본성들과, 그 본성들이 그 객관에게 감각적 직관을 부가하는, 어디에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고, 마주쳐질 수조차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주관적 특성은 객관의 형식을, 현상으로서, 규정한다.

→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그에 따라 우리 인식들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그 안에서 그 철학이 지성적인 것에 대한 감성의 차이를 순전히 논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전적으로 부당한 관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차이가 명백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명료함이나 불분명함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과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자를 통하여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을 그저 불분명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특성을 제거하자마자, 표상된 객관이 그 객관에게 감각적 직관을 부가하는 본성들과 어디에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고, 마주쳐질 수조차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주관적 특성은 객관의 형식을 현상으로서 규정한다.

 

-蟲-

Wenn wir diese unsre Anschauung auch zum höchsten Grade der Deutlichkeit bringen könnten, wo würden wir dadurch der Beschaffeneit der Gegenstände an sich selbst nicht näher kommen. Denn wir würden auf allen Fall doch nur unsre Art der Anschauung d.i. unsere Sinnlichkeit vollständig erkennen, und diese immer nur unter den dem Subjekt ursprünglich anhängenden Bedingungen, von Raum und Zeit; was die Gegenstände an sich selbst sein mögen, würde uns durch die aufgeklärteste Erkenntnis der Erscheinung derselben, die uns allein gegeben ist, doch niemals bekannt werden.

→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인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서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aß daher unsere ganze Sinnlichkeit nichts als die versorrene Vorstellung der Dinge sei, welche lediglich das enthält, was ihnen an sich selbst zukömmt, aber nur unter einer Zusammenhäufung von Merkmalen und Teilvorstellungen, die wir nicht mit Bewußtsein auseinander setzen, ist eine Verfälschung des Begriffs von Sinnlichkeit und von Erscheinung, welche die ganze Lehre derselben unnütz und leer macht. Der Unterschied einer undeutlichen von der deutlichen Vorstellung ist bloß logisch, und betrifft nicht den Inhalt. Ohne Zweifel enthält der Begriff von Recht, dessen sich der gesunde Verstand bedient, eben dasselbe, was die subtileste Spekulation aus ihm entwickeln kann, nur daß im gemeinen und praktischen Gebrauche man sich dieser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in diesem Gedanken, nicht bewußt ist. Darum kann man nicht sagen, daß der gemeine Begriff sinnlich sei, und eine bloße Erscheinung enthalte, denn das Recht kann gar nicht erscheinen, sondern sein Begriff liegt im Verstande, und stellet eine Beschaffenheit (die moralische) der Handlungen vor, die ihnen an sich selbst zukommt.

→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분석하지 않는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포함할 것이라는 것은, 감성과 현상에 대한,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개념의 날조이다.→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법의 개념은 의심할 바 없이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을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에 대해 사람들은,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Wenn wir diese unsre Anschauung auch zum höchsten Grade der Deutlichkeit bringen könnten, wo würden wir dadurch der Beschaffenheit der Gegenstände an sich selbst nicht näher kommen.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Denn wir würden auf allen Fall doch nur unsre Art der Anschauung d.i. unsere Sinnlichkeit vollständig erkennen, und diese immer nur unter den dem Subjekt ursprünglich anhängenden Bedingungen, von Raum und Zeit; was die Gegenstände an sich selbst sein mögen, würde uns durch die aufgeklärteste Erkenntnis der Erscheinung derselben, die uns allein gegeben ist, doch niemals bekannt werden.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이러한 감성이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 그 현상이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인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서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aß daher unsere ganze Sinnlichkeit nichts als die verworrene Vorstellung der Dinge sei, welche lediglich das enthält, was ihnen an sich selbst zukömmt, aber nur unter einer Zusammenhäufung von Merkmalen und Teilvorstellungen, die wir nicht mit Bewußtsein auseinander setzen, ist eine Verfälschung des Begriffs von Sinnlichkeit und von Erscheinung, welche die ganze Lehre derselben unnütz und leer macht.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포함할 것이다,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과 나누어 놓지 않는, 감성과 현상에 대한 개념의 날조이다,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분석하지 않는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포함할 것이라는 것은, 감성과 현상에 대한,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개념의 날조이다.

Der Unterschied einer undeutlichen von der deutlichen Vorstellung ist bloß logisch, und betrifft nicht den Inhalt.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Ohne Zweifel enthält der Begriff von Recht, dessen sich der gesunde Verstand bedient, eben dasselbe, was die subtileste Spekulation aus ihm entwickeln kann, nur daß im gemeinen und praktischen Gebrauche man sich dieser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in diesem Gedanken, nicht bewußt ist.

법의 개념은,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의심할 바 없이 동일한 것을,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법의 개념은 의심할 바 없이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을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Darum kann man nicht sagen, daß der gemeine Begriff sinnlich sei, und eine bloße Erscheinung enthalte, denn das Recht kann gar nicht erscheinen, sondern sein Begriff liegt im Verstande, und stellet eine Beschaffenheit (die moralische) der Handlungen vor, die ihnen an sich selbst zukommt.

그에 대해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 그에 대해 사람들은,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蟲-

Wir haben also sagen wollen: daß alle unsre Anschauung nichts als die Vorstellung von Erscheinung sei: daß die Dinge, die wir anschauen, nicht das an sich selbst sind, wofür wir sie anschauen, noch ihre Verhältnisse so an sich selbst beschaffen sind, als sie uns erscheinen, und daß, wenn wir unser Subjekt oder auch nur die subjektive Beschaffenheit der Sinne überhaupt aufheben, alle die Beschaffenheit, alle Verhältnisse der Objekte im Raum und Zeit, ja selbst Raum und Zeit verschwinden würden, und als Erscheinungen nicht an sich selbst, sondern nur in uns existieren können. Was es für eine Bewandtnis mit den Gegenständen an sich und abgesondert von aller dieser Rezeptivität unserer Sinnlichkeit haben möge, bleibt uns gänzlich unbekannt. Wir kennen nichts, als unsere Art, sie wahrzunehmen, die uns eigentümlich ist, die auch nicht notwendig jedem Wesen, obzwar jedem Menschen, zukommen muß. Mit dieser haben wir es lediglich zu tun. Raum und Zeit sind die reinen Formen derselben, Empfindung überhaupt die Materie. Jene können wir allein a priori d.i. vor aller wirklichen Wahrnehmung erkennen, und sie heißet darum reine Anschauung; diese aber ist das in unserm Erkenntnis, was da macht, daß sie Erkenntnis a posteriori d.i. empirische Anschauung heißt. Jene hängen unsrer Sinnlichkeit schlechthin notwendig an, welcher Art auch unsere Empfindungen sein mögen; diese können sehr verschieden sein.

→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였다.→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방식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고,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전자를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그러나 후자는 여기에서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것,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Wir haben also sagen wollen:

우리는 그러므로 말하고자 하였다:

daß alle unsre Anschauung nichts als die Vorstellung von Erscheinung sei: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daß die Dinge, die wir anschauen, nicht das an sich selbst sind, wofür wir sie anschauen, noch ihre Verhältnisse so an sich selbst beschaffen sind, als sie uns erscheinen, und daß, wenn wir unser Subjekt oder auch nur die subjektive Beschaffenheit der Sinne überhaupt aufheben, alle die Beschaffenheit, alle Verhältnisse der Objekte im Raum und Zeit, ja selbst Raum und Zeit verschwinden würden, und als Erscheinungen nicht an sich selbst, sondern nur in uns existieren können.

사물들은, 그것들을 우리가 직관하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

→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였다.

Was es für eine Bewandtnis mit den Gegenständen an sich und abgesondert von aller dieser Rezeptivität unserer Sinnlichkeit haben möge, bleibt uns gänzlich unbekannt.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Wir kennen nichts, als unsere Art, sie wahrzunehmen, die uns eigentümlich ist, die auch nicht notwendig jedem Wesen, obzwar jedem Menschen, zukommen muß.

우리는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지각하는, 그 방식은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Mit dieser haben wir es lediglich zu tun.

우리는 단지 이러한 것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 우리는 단지 이러한 방식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Raum und Zeit sind die reinen Formen derselben, Empfindung überhaupt die Materie.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다,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고,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Jene können wir allein a priori d.i. vor aller wirklichen Wahrnehmung erkennen, und sie heißet darum reine Anschauung;

이것들을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diese aber ist das in unserm Erkenntnis, was da macht, daß sie Erkenntnis a posteriori d.i. empirische Anschauung heißt.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성하는 것, 그것들이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

→ 전자를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그러나 후자는 여기에서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것,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Jene hängen unsrer Sinnlichkeit schlechthin notwendig an, welcher Art auch unsere Empfindungen sein mögen;

전자는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diese können sehr verschieden sein.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 전자는,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蟲-

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더 이상,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운동의 개념 자체, 두 부분들을 결합한,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공간 안에서, 그 자체로 숙고된,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에 대하여, 그리고 지각의 규정의 승계에 대하여, 따라서 경험에 대하여 요구된다.

→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 8. 초월론적 감성학에 대한 일반적 주해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Ⅰ. 무엇보다도 그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밝히는 것,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그것의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蟲-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ut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적용된다면,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tu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이,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단지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의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것들의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상상이 어떤 것을 형성한,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그러나 제한 없이,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발견할 수 없다.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첫번째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그에 반해 그들은 매우 당황한다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를 고려하여, 즉,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蟲-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o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e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시인한다.

→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동일한 규정들이, 그 규정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인식을 줄 것이다, 그 인식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e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그것들을 직관하는.

→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미할 따름이다,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그러나 그 원인들은,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리고 더욱이 그 원인들에 대해서, 그것(원인)들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것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다.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 안에서, 그 주관에 그 대상이 현상하는, 찾아져야만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현상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오로지 저것만이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s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蟲-

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Er al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그러한 특성들은, 그것들이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i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그것의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전제하기 때문에, 시간이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그 실재성이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그 실재성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7. 해명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시간에 대한 그 이론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반론을 아주 한 목소리로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추정한다,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독자에게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Er la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蟲-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모든 사물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경험 안으로 생길 수 있는,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들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은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한다.

→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그것은 이야기된다: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

→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가르쳐 준다, 즉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그 대상들이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하나의 대상이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 대상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蟲-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고,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며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만일 내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다: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우리가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래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그것(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고유한,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蟲-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그러나 두번째 것과 관련하여서,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으로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반면에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B) 시간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내감의 형식 외의,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부재를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그 안에서 잡다가 순차를 형성하는, 그 순차는 단지 일차원이고,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이다,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을 그러나 언제나 연속하는.

→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蟲-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그 표상은,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러나 직관이다.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또한 그 명제는,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5) 시간의 무한성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다.

→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나는 그 때문에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 나는 그 때문에,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여기에서 나는 또한 덧붙인다,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보편적 운동학이, 조금도 헛되지 않은, 설명하는 것보다.

→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a) 시간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따라서 남는다,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그것들은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蟲-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2) 시간은 필연적 표상이다, 그 표상이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사람들은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우리는 단지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그러나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

→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규칙들로서 타당하다,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그리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蟲-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론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비판적 주의이다, 전적으로 아무것도,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것은,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것, 또한 공간은 사물들의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것, 그 형식이 그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 고유하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 표상들의 형식이 공간인, 그러나 그것의 참된 상관물은,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질 수 있는, 그러나 역시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 없는.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시간은 1)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왜냐하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표상할 수 있다: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

→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蟲-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Geschmack und Farben sind gar nicht notwendige Bedingungen, unter welchen die Gegenstände allein vor uns Objekte der Sinne werden können. Sie sind nur als zufällig beigefügte Wirkungen der besondern Organisation mit der Erscheinung verbunden. Daher sind sie auch keine Vorstellungen a priori, sondern auf Empfindung, der Wohlgeschmack aber so gar auf Gefühl (der Lust und Unlust) als einer Würkung der Empfindung gegründet. Auch kann niemand a priori weder eine Vorstellung einer Farbe, noch irgend eines Geschmacks haben: der Raum aber betrifft nur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schließt also gar keine Empfindung (nichts Empirisches) in sich, und alle Arten und Bestimmungen des Raumes können und müssen so gar a priori vorgestellt werden können, wenn Begriffe der Gestalten so wohl, als Verhältnisse entstehen sollen. Durch denselben ist es allein möglich, daß Dinge vor uns äußere Gegenstände sein. [A; sind Ak: seien Ke].

→ 맛과 색들은 전혀,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Die Absicht dieser Anmerkung geht nur dahin: zu verhüten, daß man die behauptete Idealität des Raumes nicht durch bei weitem unzulängliche Beispiele zu erläutern sich einfallen lasse, da nämlich etwa Farben, Geschmack etc. mit Recht nicht als Beschaffenheiten der Dinge, sondern bloß als Veränderungen unseres Subjekts, die so gar bei verschiedenen Menschen verschieden sein können, betrachtet werden. Denn in diesem Falle gilt das, was ursprünglich selbst nur Erscheinung ist, z.B. eine Rose, im empirischen Verstande für ein Ding an sich selbst, welches doch jedem Auge in Ansehung der Farbe anders erscheinen kann.

→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이다.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변양들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인 것은,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는,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타당하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Geschmack und Farben sind gar nicht notwendige Bedingungen, unter welchen die Gegenstände allein vor uns Objekte der Sinne werden können.

맛과 색들은 전혀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 맛과 색들은 전혀,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Sie sind nur als zufällig beigefügte Wirkungen der besondern Organisation mit der Erscheinung verbunden.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Daher sind sie auch keine Vorstellungen a priori, sondern auf Empfindung, der Wohlgeschmack aber so gar auf Gefühl (der Lust und Unlust) als einer Würkung der Empfindung gegründet.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Auch kann niemand a priori weder eine Vorstellung einer Farbe, noch irgend eines Geschmacks haben: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der Raum aber betrifft nur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schließt also gar keine Empfindung (nichts Empirisches) in sich, und alle Arten und Bestimmungen des Raumes können und müssen so gar a priori vorgestellt werden können, wenn Begriffe der Gestalten so wohl, als Verhältnisse entstehen sollen.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한다, 그러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Durch denselben ist es allein möglich, daß Dinge vor uns äußere Gegenstände sein.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그것이 가능하다,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A; sind Ak: seien Ke].

 

 

Die Absicht dieser Anmerkung geht nur dahin: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이러한 의도이다:

zu verhüten, daß man die behauptete Idealität des Raumes nicht durch bei weitem unzulängliche Beispiele zu erläutern sich einfallen lasse, da nämlich etwa Farben, Geschmack etc. mit Recht nicht als Beschaffenheiten der Dinge, sondern bloß als Veränderungen unseres Subjekts, die so gar bei verschiedenen Menschen verschieden sein können, betrachtet werden.

방지하는 것,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그것들이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여겨지기 때문이다.

→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이다.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변양들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Denn in diesem Falle gilt das, was ursprünglich selbst nur Erscheinung ist, z.B. eine Rose, im empirischen Verstande für ein Ding an sich selbst, welches doch jedem Auge in Ansehung der Farbe anders erscheinen kann.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것은 유효하다,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인 것은,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는,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타당하다.

 

-蟲-

  Unsere Erörterungen lehren demnach die Realität (d.i. die objektive Gültigkeit) des Raumes in Ansehung alles dessen, was äußerlich als Gegenstand uns vorkommen kann, aber zugleich die Idealität des Raums in Ansehung der Dinge, wenn sie durch die Vernunft an sich selbst erwogen werden, d.i. ohne Rücksicht auf die Beschaffenheit unserer Sinnlichkeit zu nehmen. Wir behaupten also die empirische Realität des Raumes (in Ansehung aller möglichen äußeren Erfahrung), ob zwar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sselben, d.i. daß er Nichts sei, so bald wir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weglassen, und ihn als etwas, was den Dingen an sich selbst zum Grunde liegt, annehmen.

→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외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하지만,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즉 그것이 무(無)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어떤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Es gibt aber auch außer dem Raum keine andere subjektive und auf etwas Äußeres bezogene Vorstellung, die a priori objektiv heißen könnte. Denn man kann von keiner derselben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wie von der Anschauung im Raume, herleiten § 3. Daher ihnen, genau zu reden, gar keine Idealität zukommt, ob sie gleich darin mit der Vorstellung des Raumes übereinkommen, daß sie bloß zur subjektiven Beschaffenheit der Sinnesart gehören, z.B. des Gesichts, Gehörs, Gefühls, durch die Empfindungen der Farben, Töne und Wärme, die aber, weil sie bloß Empfindungen und nicht Anschauungen sind, an sich kein Objekt, am wenigsten a priori, erkennen lassen.

→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3.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에 속하는 것,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 같은 아무런 관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Daher diese subjektive Bedingung aller äußeren Erscheinungen mit keiner andern kann verglichen werden. Der Wohlgeschmack eines Weines gehört nicht zu den objektiven Bestimmungen des Weines, mithin eines Objekts so gar als Erscheinung betrachtet, sondern zu der besondern Beschaffenheit des Sinnes an dem Subjekte, was ihn genießt. Die Farben sind nicht Beschaffenheiten der Körper, deren Anschauung sie anhängen, sondern auch nur Modifikationen des Sinnes des Gesichts, welches vom Lichte auf gewisse Weise affiziert wird. Dagegen gehört der Raum, als Bedingung äußerer Objekte, notwendiger Weise zur Erscheinung oder Anschauung derselben.

이 부분에 있어서 A에 따르면: →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그것을 먹는다는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색들은,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고, 오히려 단지, 빛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그에 반해 공간은,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속한다.

 

 

 

  Unsere Erörterungen lehren demnach die Realität (d.i. die objektive Gültigkeit) des Raumes in Ansehung alles dessen, was äußerlich als Gegenstand uns vorkommen kann, aber zugleich die Idealität des Raums in Ansehung der Dinge, wenn sie durch die Vernunft an sich selbst erwogen werden, d.i. ohne Rücksicht auf die Beschaffenheit unserer Sinnlichkeit zu nehmen.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한다, 그 모든 것이 외적으로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그러나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외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하지만,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Wir behaupten also die empirische Realität des Raumes (in Ansehung aller möglichen äußeren Erfahrung), ob zwar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sselben, d.i. daß er Nichts sei, so bald wir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weglassen, und ihn als etwas, was den Dingen an sich selbst zum Grunde liegt, annehmen.

그러므로 우리는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불구하고, 즉 그것이 무(無)라는,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어떤 것으로, 그것이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취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즉 그것이 무(無)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어떤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Es gibt aber auch außer dem Raum keine andere subjektive und auf etwas Äußeres bezogene Vorstellung, die a priori objektiv heißen könnte.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Denn man kann von keiner derselben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wie von der Anschauung im Raume, herleiten § 3.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3

Daher ihnen, genau zu reden, gar keine Idealität zukommt, ob sie gleich darin mit der Vorstellung des Raumes übereinkommen, daß sie bloß zur subjektiven Beschaffenheit der Sinnesart gehören, z.B. des Gesichts, Gehörs, Gefühls, durch die Empfindungen der Farben, Töne und Wärme, die aber, weil sie bloß Empfindungen und nicht Anschauungen sind, an sich kein Objekt, am wenigsten a priori, erkennen lassen.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전혀 아무런 관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그 표상이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에 속하는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에 속하는 것,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 같은 아무런 관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이 부분에 있어서 A에 따르면:

 

Daher diese subjektive Bedingung aller äußeren Erscheinungen mit keiner andern kann verglichen werden.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Der Wohlgeschmack eines Weines gehört nicht zu den objektiven Bestimmungen des Weines, mithin eines Objekts so gar als Erscheinung betrachtet, sondern zu der besondern Beschaffenheit des Sinnes an dem Subjekte, was ihn genießt.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그것을 먹는다는 것.

→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그것을 먹는다는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Die Farben sind nicht Beschaffenheiten der Körper, deren Anschauung sie anhängen, sondern auch nur Modifikationen des Sinnes des Gesichts, welches vom Lichte auf gewisse Weise affiziert wird.

색들은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다, 성질들이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오히려 단지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그러한 감관이 빛에 대해 확실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 색들은,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고, 오히려 단지, 빛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Dagegen gehört der Raum, als Bedingung äußerer Objekte, notwendiger Weise zur Erscheinung oder Anschauung derselben.

그에 반해 공간은 속한다,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 그에 반해 공간은,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속한다.

 

-蟲-

Dieses Prädikat wird den Dingen nur in so fern beigelegt, als sie uns erscheinen, d.i. Gegenstände der Sinnlichkeit sind. Die beständige Form dieser Rezeptivität, welche wir Sinnlichkeit nennen, ist eine notwendige Bedingung aller Verhältnisse, darinnen Gegenstände als außer uns angeschauet werden, und, wenn man von diesen Gegenstände abstrahiert, eine reine Anschauung, welche den Namen Raum führet. Weil wir die besonder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nicht zu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Sachen, sondern nur ihrer Erscheinungen machen können, so können wir wohl sagen, daß der Raum alle Dinge befasse, die uns äußerlich erscheinen mögen, aber nicht alle Dinge an sich selbst, sie mögen nun angeschaut werden oder nicht, oder auch von welchem Subjekt man wolle. Denn wir können von den Anschauungen anderer denkenden Wesen gar nicht urteilen, ob sie an die nämlichen Bedingungen gebunden sein, welche unsere Anschauung einschränken und für uns allgemein gültig sind. Wenn wir die Einschränkung eines Urteils zum Begriff des Subjekts hinzufügen, so gilt das Urteil alsdenn unbedingt. Der Satz: Alle Dinge sind neben einander im Raum, gilt unter der Einschränkung, wenn diese Dinge als Gegenstände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genommen werden. Füge ich hier die Bedingung zum Begriffe, und sage: Alle Dinge, als äußere Erscheinungen, sind neben einander im Raum, so gilt diese Regel allgemein und ohne Einschränkung.

→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이러한,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그 형식은)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공간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잘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제한 하에서 유효하다.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하고,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Dieses Prädikat wird den Dingen nur in so fern beigelegt, als sie uns erscheinen, d.i. Gegenstände der Sinnlichkeit sind.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Die beständige Form dieser Rezeptivität, welche wir Sinnlichkeit nennen, ist eine notwendige Bedingung aller Verhältnisse, darinnen Gegenstände als außer uns angeschauet werden, und, wenn man von diesen Gegenstände abstrahiert, eine reine Anschauung, welche den Namen Raum führet.

이러한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러한 형식을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순수한 직관이다, 그러한 직관이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 이러한,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그 형식은)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순수한 직관이다.

Weil wir die besonder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nicht zu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Sachen, sondern nur ihrer Erscheinungen machen können, so können wir wohl sagen, daß der Raum alle Dinge befasse, die uns äußerlich erscheinen mögen, aber nicht alle Dinge an sich selbst, sie mögen nun angeschaut werden oder nicht, oder auch von welchem Subjekt man wolle.

왜냐하면 우리가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잘 말할 수 있다, 공간은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 왜냐하면 우리는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공간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잘 말할 수 있다.

Denn wir können von den Anschauungen anderer denkenden Wesen gar nicht urteilen, ob sie an die nämlichen Bedingungen gebunden sein, welche unsere Anschauung einschränken und für uns allgemein gültig sind.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Wenn wir die Einschränkung eines Urteils zum Begriff des Subjekts hinzufügen, so gilt das Urteil alsdenn unbedingt.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Der Satz: Alle Dinge sind neben einander im Raum, gilt unter der Einschränkung, wenn diese Dinge als Gegenstände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genommen werden.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제한 아래에서 유효하다,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제한 하에서 유효하다.

Füge ich hier die Bedingung zum Begriffe, und sage: Alle Dinge, als äußere Erscheinungen, sind neben einander im Raum, so gilt diese Regel allgemein und ohne Einschränkung.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하고,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蟲-

Schlüsse aus obigen Begriffen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a) Der Raum stellet gar keine Eigenschaft irgend einiger Dinge an sich, oder sie in ihrem Verhältnis auf einander vor, d.i. keine Bestimmung derselben, die an Gegenständen selbst haftete, und welche bliebe, wenn man auch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abstrahierte. Denn weder absolute, noch relative Bestimmungen können vor dem Dasein der Dinge, welchen sie zukommen, mithin nicht a priori angeschaut werden.

→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그러한 것은 남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b) Der Raum ist nichts anders, als nur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d.i.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Sinnlichkeit, unter der allein uns äußere Anschauung möglich ist. Weil nun die Rezeptivität des Subjekts, von Gegenständen affiziert zu werden, notwendiger Weise vor allen Anschauungen dieser Objekte vorhergeht, so läßt sich verstehen, wie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vor allen wirklichen Wahrnehmungen, mithin a priori im Gemüte gegeben sein könne, und wie sie als eine reine Anschauung, in der alle Gegenstände bestimmt werden müssen, Prinzipien der Verhältnisse derselben vor aller Erfahrung enthalten könne.

→ b) 공간은,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주체의 수용성은,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선험적 직관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Wir können demnach nur aus dem Standpunkte eines Menschen, vom Raum, von ausgedehnten Wesen etc. reden. Gehen wir von der subjektiven Bedingung ab, unter welcher wir allein äußere Anschauung bekommen können, so wie wir nämlich von de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mögen, so bedeutet die Vorstellung vom Raume gar nichts.

→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Schlüsse aus obigen Begriffen

상술한 개념들로부터 결론

→ 상술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er Raum stellet gar keine Eigenschaft irgend einiger Dinge an sich, oder sie in ihrem Verhältnis auf einander vor, d.i. keine Bestimmung derselben, die an Gegenständen selbst haftete, und welche bliebe, wenn man auch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abstrahierte.

a)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는다, 그것이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그리고 그러한 것은 남는다,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그러한 것은 남는다.

Denn weder absolute, noch relative Bestimmungen können vor dem Dasein der Dinge, welchen sie zukommen, mithin nicht a priori angeschaut werden.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러한 규정이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b) Der Raum ist nichts anders, als nur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d.i.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Sinnlichkeit, unter der allein uns äußere Anschauung möglich ist.

b) 공간은 다른 무엇도 아니다,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감성의 주관적 조건,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 b) 공간은,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Weil nun die Rezeptivität des Subjekts, von Gegenständen affiziert zu werden, notwendiger Weise vor allen Anschauungen dieser Objekte vorhergeht, so läßt sich verstehen, wie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vor allen wirklichen Wahrnehmungen, mithin a priori im Gemüte gegeben sein könne, und wie sie als eine reine Anschauung, in der alle Gegenstände bestimmt werden müssen, Prinzipien der Verhältnisse derselben vor aller Erfahrung enthalten könne.

왜냐하면 주체의 수용성은,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도록 한다,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선험적 직관으로서,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주체의 수용성은,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선험적 직관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Wir können demnach nur aus dem Standpunkte eines Menschen, vom Raum, von ausgedehnten Wesen etc. reden.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Gehen wir von der subjektiven Bedingung ab, unter welcher wir allein äußere Anschauung bekommen können, so wie wir nämlich von de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mögen, so bedeutet die Vorstellung vom Raume gar nichts.

우리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 그러한 것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그러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 우리가, 그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蟲-

3) Der Raum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sagt, allgemeiner Begriff von Verhältnissen der Dinge überhaupt, sondern eine reine Anschauung. Denn erstlich kann man sich nur einen einigen Raum vorstellen, und wenn man von vielen Räumen redet, so verstehet man darunter nur Teile eines und desselben alleinigen Raumes. Diese Teile können auch nicht vor dem einigen allbefassenden Raume gleichsam als dessen Bestandteile (daraus eine Zusammensetzung möglich sei) vorhergehen, sondern nur in ihm gedacht werden. Er ist wesentlich einig, das Mannigfaltige in ihm, mithin auch der allgemeine Begriff von Räumen überhaupt, beruht lediglich auf Einschränkungen. Hieraus folgt, daß in Ansehung seiner eine Anschauung a priori (die nicht empirisch ist) allen Begriffen von demselben zum Grunde liegt. So werden auch alle geometrische Grundsätze, z.E. daß in einem Triangel zwei Seiten zusammen größer sein, als die dritte, niemals aus allgemeinen Begriffen von Linie und Triangel, sondern aus der Anschauung und zwar a priori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abgeleitet.

→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고유하고, 다양한 것들은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의 합은 그 세번째 변보다 더욱 크다는 것과 같은 근본명제들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4)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egebene Größe vorgestellt.

→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3) Der Raum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sagt, allgemeiner Begriff von Verhältnissen der Dinge überhaupt, sondern eine reine Anschauung.

3)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Denn erstlich kann man sich nur einen einigen Raum vorstellen, und wenn man von vielen Räumen redet, so verstehet man darunter nur Teile eines und desselben alleinigen Raumes.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Diese Teile können auch nicht vor dem einigen allbefassenden Raume gleichsam als dessen Bestandteile (daraus eine Zusammensetzung möglich sei) vorhergehen, sondern nur in ihm gedacht werden.

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Er ist wesentlich einig, das Mannigfaltige in ihm, mithin auch der allgemeine Begriff von Räumen überhaupt, beruht lediglich auf Einschränkungen.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유하다, 다양한 것들이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고유하고, 다양한 것들은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Hieraus folgt, daß in Ansehung seiner eine Anschauung a priori (die nicht empirisch ist) allen Begriffen von demselben zum Grunde liegt.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So werden auch alle geometrische Grundsätze, z.E. daß in einem Triangel zwei Seiten zusammen größer sein, als die dritte, niemals aus allgemeinen Begriffen von Linie und Triangel, sondern aus der Anschauung und zwar a priori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abgeleitet.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은 함께 더욱 크다, 그 세번째 변보다, 같은 것은 전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의 합은 그 세번째 변보다 더욱 크다는 것과 같은 근본명제들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4)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egebene Größe vorgestellt.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蟲-

Er wird also als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Erscheinungen, und nicht als eine von ihnen abhängende Bestimmung angesehen, und ist eine Vorstellung a priori, die notwendiger Weise äußer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t.

→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이 아닌 것으로서 고려되고,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선험적인 표상이다.

 

In A folgt : 3) Auf di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die apodiktische Gewißheit aller geometrischen Grundsätze, und die Möglichkeit ihrer Konstruktion a priori. Wäre nämlich diese Vorstellung des Raums ein a posteriori erworbener Begriff, der aus der allgemeinen äußeren Erfahrung geschöpft wäre, so würden die ersten Grundsätze der mathematischen Bestimmung nichts als Wahrnehmungen sein. Sie hätten also alle Zufälligkeit der Wahrnehmung, und es wäre eben nicht notwendig, daß zwischen zween Punkten nur eine gerade Linie sei, sondern die Erfahrung würde es so jederzeit lehren. Was von der Erfahrung entlehnt ist, hat auch nur komparative Allgemeinheit, nämlich durch Induktion. Man würde also nur sagen können, so viel zur Zeit noch bemerkt worden, ist kein Raum gefunden worden, der mehr als drei Abmessungen hätte.

→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매번) 배울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 즉 귀납을 통한 (보편성)을 가진다.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3차원 이상을 가지는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r wird also als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Erscheinungen, und nicht als eine von ihnen abhängende Bestimmung angesehen, und ist eine Vorstellung a priori, die notwendiger Weise äußer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t.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으로서 고려되고, 선험적인 표상이다,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이 아닌 것으로서 고려되고,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선험적인 표상이다.

 

In A folgt : 3) Auf di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die apodiktische Gewißheit aller geometrischen Grundsätze, und die Möglichkeit ihrer Konstruktion a priori.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Wäre nämlich diese Vorstellung des Raums ein a posteriori erworbener Begriff, der aus der allgemeinen äußeren Erfahrung geschöpft wäre, so würden die ersten Grundsätze der mathematischen Bestimmung nichts als Wahrnehmungen sein.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Sie hätten also alle Zufälligkeit der Wahrnehmung, und es wäre eben nicht notwendig, daß zwischen zween Punkten nur eine gerade Linie sei, sondern die Erfahrung würde es so jederzeit lehren.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다,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 배울 것이다.

→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매번) 배울 것이다.

Was von der Erfahrung entlehnt ist, hat auch nur komparative Allgemeinheit, nämlich durch Induktion.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을 가진다, 즉 귀납을 통한.

→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 즉 귀납을 통한 (보편성)을 가진다.

Man würde also nur sagen können, so viel zur Zeit noch bemerkt worden, ist kein Raum gefunden worden, der mehr als drei Abmessungen hätte.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공간이 세 측정들(차원들) 이상을 가진.

→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3차원 이상을 가진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蟲-

Um uns hierüber zu belehren, wollen wir zuerst den Begriff des Raumes erörtern. Ich verstehe aber unter Erörterung (expositio) die deutliche (wenn gleich nicht ausführliche) Vorstellung dessen, was zu einem Begriffe gehört; metaphysisch aber ist die Erörterung, wenn sie dasjenige enthält, was den Begriff, als a priori gegeben, darstellt.

→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개념에 속하는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상론은, 그 상론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개념을 그것을 포함한다면. 형이상학적이다.

1) Der Raum ist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von äußeren Erfahrungen abgezogen worden. Denn damit gewisse Empfindungen auf etwas außer mir bezogen werden, (d.i. auf etwas in einem andern Orte des Raumes, als darinnen ich mich befinde,) imgleichen damit ich sie als außer und neben einander, mithin nicht bloß verschieden, sondern als in verschiedenen Orten vorstellen könne, dazu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schon zum Grunde liegen. Demnach kann die Vorstellung des Raumes nicht aus den Verhältnissen der äußern Erscheinung durch Erfahrung erborgt sein, sondern diese äußere Erfahrung ist selbst nur durch gedachte Vorstellung allererst möglich.

→ 1) 공간은,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위해서,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자체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2) Der Raum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a priori, die allen äußer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Man kann sich niemals eine Vorstellung davon machen, daß kein Raum sei, ob man sich gleich ganz wohl denken kann, daß keine Gegenstände darin angetroffen werden.

→ 2) 공간은,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선험적인 필연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결코, 공간이 없다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Um uns hierüber zu belehren, wollen wir zuerst den Begriff des Raumes erörtern.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Ich verstehe aber unter Erörterung (expositio) die deutliche (wenn gleich nicht ausführliche) Vorstellung dessen, was zu einem Begriffe gehört;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개념에 속하는;

metaphysisch aber ist die Erörterung, wenn sie dasjenige enthält, was den Begriff, als a priori gegeben, darstellt.

그러나 그 상론은 형이상학적이다, 그 상론이 그것을 포함한다면, 그것이 개념을,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개념에 속하는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상론은, 그 상론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개념을 그것을 포함한다면. 형이상학적이다.

 

1) Der Raum ist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von äußeren Erfahrungen abgezogen worden.

1) 공간은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 1) 공간은,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Denn damit gewisse Empfindungen auf etwas außer mir bezogen werden, (d.i. auf etwas in einem andern Orte des Raumes, als darinnen ich mich befinde,) imgleichen damit ich sie als außer und neben einander, mithin nicht bloß verschieden, sondern als in verschiedenen Orten vorstellen könne, dazu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schon zum Grunde liegen.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순전히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는,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위해서,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자체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Demnach kann die Vorstellung des Raumes nicht aus den Verhältnissen der äußern Erscheinung durch Erfahrung erborgt sein, sondern diese äußere Erfahrung ist selbst nur durch gedachte Vorstellung allererst möglich.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2) Der Raum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a priori, die allen äußer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2) 공간은 필연적 표상이다, 선험적인,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 2) 공간은,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선험적인 필연적 표상이다.

Man kann sich niemals eine Vorstellung davon machen, daß kein Raum sei, ob man sich gleich ganz wohl denken kann, daß keine Gegenstände darin angetroffen werden.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공간이 없다는, 비록 사람들이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결코, 공간이 없다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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