Ἐπεὶ δὲ διώρισται ποσαχῶς ἡ φύσις, μετὰ τοῦτο θεωρητέον τίνι διαφέρει ὁ μαθηματικὸς τοῦ φυσικοῦ (καὶ γὰρ ἐπίπεδα καὶ στερεὰ ἔχει τὰ φυσικὰ σώματα καὶ μήκη [Bekker page 193b, line 25] καὶ στιγμάς, περὶ ὧν σκοπεῖ ὁ μαθηματικός)· ἔτι εἰ ἡ ἀστρολογία ἑτέρα ἢ μέρος τῆς φυσικῆς· εἰ γὰρ τοῦ φυσικοῦ τὸ τί ἐστιν ἥλιος ἢ σελήνη εἰδέναι, τῶν δὲ συμβεβηκότων καθ' αὑτὰ μηδέν, ἄτοπον, ἄλλως τε καὶ ὅτι φαίνονται λέγοντες οἱ περὶ φύσεως καὶ περὶ σχήματος σελήνης καὶ ἡλίου, καὶ δὴ καὶ πότερον σφαιροειδὴς ἡ γῆ καὶ ὁ κόσμος ἢ οὔ.
자연이 여러 가지로 정의되었으니, 이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수학자가 자연학자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물체들은 평면도 입체도 선도 점도 지니는데, 수학자들은 그것들에 관하여 고찰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천문학이 자연학과 다른 것인지 혹은 그 일부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자연학자에게 태양 혹은 달이 무엇인지 아는 일이 속한다면, 그런데 이것들에 대해 부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면, 이상한 일이고, 다른 것보다도 자연에 관하여 논하는 자들이 달과 해의 형태에 관하여서도 논하고, 더욱이 대지와 우주가 구형인지 그렇지 않은지도 논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상한 일이다>.

περὶ τούτων μὲν οὖν πραγματεύεται καὶ ὁ μαθηματικός, ἀλλ' οὐχ ᾗ φυσικοῦ σώματος πέρας ἕκαστον· οὐδὲ τὰ συμβεβηκότα θεωρεῖ ᾗ τοιούτοις οὖσι συμβέβηκεν· διὸ καὶ χωρίζει· χωριστὰ γὰρ τῇ νοήσει κινήσεώς ἐστι, καὶ οὐδὲν διαφέρει, οὐδὲ γίγνεται ψεῦδος χωριζόντων. λανθάνουσι δὲ τοῦτο ποιοῦντες καὶ οἱ τὰς ἰδέας λέγοντες· τὰ γὰρ φυσικὰ χωρίζουσιν ἧττον ὄντα χωριστὰ τῶν μαθηματικῶν. γίγνοιτο δ' ἂν τοῦτο δῆλον, εἴ τις ἑκατέρων πειρῷτο λέγειν τοὺς ὅρους, καὶ αὐτῶν κα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τὸ μὲν γὰρ περιττὸν ἔσται καὶ τὸ ἄρτιον καὶ τὸ εὐθὺ καὶ τὸ καμπύλον, ἔτι δὲ ἀριθμὸς καὶ γραμμὴ καὶ σχῆμα, ἄνευ κινήσεως, σὰρξ δὲ καὶ ὀστοῦν καὶ ἄνθρωπος οὐκέτι, ἀλλὰ ταῦτα ὥσπερ ῥὶς σιμὴ ἀλλ' οὐχ ὡς τὸ καμπύλον λέγεται. δηλοῖ δὲ καὶ τὰ φυσικώτερα τῶν μαθημάτων, οἷον ὀπτικὴ καὶ ἁρμονικὴ καὶ ἀστρολογία· ἀνάπαλιν γὰρ τρόπον τιν' ἔχουσιν τῇ γεωμετρίᾳ. ἡ μὲν γὰρ [Bekker page 194a, line 10] γεωμετρία περὶ γραμμῆς φυσικῆς σκοπεῖ, ἀλλ' οὐχ ᾗ φυσική, ἡ δ' ὀπτικὴ μαθηματικὴν μὲν γραμμήν, ἀλλ' οὐχ ᾗ μαθηματικὴ ἀλλ' ᾗ φυσική.
그러므로 이런 것들에 관하여서는 수학자 또한 문제 삼지만, 자연적 물체의 한계인 한에서 각각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부수적인 것들도 이와 같은 존재하는 것들에 부수하는 한에서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분리(독립)시키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부수적인 것들> 사유상으로 운동과 분리된 것들이고,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분리된 것들 중에 거짓이 생기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데아를 논하는 자들도 남몰래 이런 일을 행한다. 왜냐하면 수학적인 것들보다 덜 분리된 자연적인 것들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의 것은 분명해질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것들에 대해서도 또한 부수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 두편 각각의 정의들을 진술하고자 시도한다면. 왜냐하면 한편은 운동 없이, 홀과 짝 그리고 곧음과 휨일 것이고, 더욱이 수와 선과 도형일 것이나, 살과 뼈와 인간은 더 이상 없을 것이지만, 이런 것들은 매부리코처럼 진술되지 휨처럼 진술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학적인 것들보다 더 자연적인 것들도, 이를 테면 광학과 화성학 그리고 천문학 같은 것들도 이 점을 분명히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역전된 기하학을 지니기 때문이다. 즉 한편으로 기하학은 자연적 선에 관하여 고찰하지만, 자연적이라는 그러한 한에서 그리하지는 않는 반면, 광학은 수학적인 선을, 그러나 수학적인 것인 한에서가 아니라 자연적인 것인 한에서 고찰한다는 것이다.

ἐπεὶ δ' ἡ φύσις διχῶς, τό τε εἶδος καὶ ἡ ὕλη, ὡς ἂν εἰ περὶ σιμότητος σκοποῖμεν τί ἐστιν, οὕτω θεωρητέον· ὥστ' οὔτ' ἄνευ ὕλης τὰ τοιαῦτα οὔτε κατὰ τὴν ὕλην. καὶ γὰρ δὴ καὶ περὶ τούτου ἀπορήσειεν ἄν τις, ἐπεὶ δύο αἱ φύσεις, περὶ ποτέρας τοῦ φυσικοῦ. ἢ περὶ τοῦ ἐξ ἀμφοῖν; ἀλλ' εἰ περὶ τοῦ ἐξ ἀμφοῖν, καὶ περὶ ἑκατέρας. πότερον οὖν τῆς αὐτῆς ἢ ἄλλης ἑκατέραν γνωρίζειν; εἰς μὲν γὰρ τοὺς ἀρχαίους ἀποβλέψαντι δόξειεν ἂν εἶναι τῆς ὕλης (ἐπὶ μικρὸν γάρ τι μέρος Ἐμπεδοκλῆς καὶ Δημόκριτος τοῦ εἴδους καὶ τοῦ τί ἦν εἶναι ἥψαντο)· εἰ δὲ ἡ τέχνη μιμεῖται τὴν φύσιν, τῆς δὲ αὐτῆς ἐπιστήμης εἰδέναι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ὴν ὕλην μέχρι του (οἷον ἰατροῦ ὑγίειαν καὶ χολὴν καὶ φλέγμα, ἐν οἷς ἡ ὑγίεια, ὁμοίως δὲ καὶ οἰκοδόμου τό τε εἶδος τῆς οἰκίας καὶ τὴν ὕλην, ὅτι πλίνθοι καὶ ξύλα· ὡσαύτως δὲ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καὶ τῆς φυσικῆς ἂν εἴη τὸ γνωρίζειν ἀμφοτέρας τὰς φύσεις. ἔτι τὸ οὗ ἕνεκα καὶ τὸ τέλος τῆς αὐτῆς, καὶ ὅσα τούτων ἕνεκα. ἡ δὲ φύσις τέλος καὶ οὗ ἕνεκα (ὧν γὰρ συνεχοῦς τῆς κινήσεως οὔσης ἔστι τι τέλος, [Bekker page 194a, line 30] τοῦτο <τὸ> ἔσχατον καὶ τὸ οὗ ἕνεκα· διὸ καὶ ὁ ποιητὴς γελοίως προήχθη εἰπεῖν “ἔχει τελευτήν, ἧσπερ οὕνεκ' ἐγένετο”· βούλεται γὰρ οὐ πᾶν εἶναι τὸ ἔσχατον τέλος, ἀλλὰ τὸ βέλτιστον)·
그런데 자연이 두 가지로, 형상도 질료도 진술되기에, 우리가 매부리꼴에 관하여 그것이 무엇인지 고찰한다면 그러할 것처럼, 그런 식으로 관찰해야만 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들을 질료 없이도 질료에 따라서도 고찰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더욱이 그 자연들이 둘이기에, 그 자연적인 것의 둘 중 어느 쪽에 관한 것인지 이에 관련하여 누군가 당혹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양자로부터 나온 것에 관하여서인가? 하지만 만일 양자로부터 나온 것에 관하여서라면, 그 둘 각각에 관하여서이기도 하다. 그럼 양편 각각을 아는 일은 같은 앎에 속하는가 아니면 다른 앎에 속하는가? 왜냐하면 한편으로 고대인들에 주목할 사람들에게는 질료에 속하는 것이라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는 형상과 '무엇인 바의 것임'에 고작해야 미미한 부분에만 닿았으니까). 그런데 만일 기술이 자연을 모방한다면, 그런데 형상을 아는 일과 질료를 아는 일이 어느 정도까지 같은 앎에 속한다면 (예를 들어 의사의 경우 건강을 알고 담즙과 열, 그것들 안에 건강이 드는 것들을 알듯, 또한 건축가의 경우 집의 형상과 또한 그 질료 또한, 즉 벽돌들과 목재들도 알듯이. 여타의 경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자연학에도 그 양편의 자연본성 모두를 아는 일이 속할 것이다. 더욱이 무엇 때문인지 하는 것과 목적도 같은 앎에 속하고, 그것들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것들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자연은 목적이자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의 지속적인 운동이 존재할 때에 거기에 모종의 목적이 있고, 그 각각의 끝이 또한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하 이유로 시인도 우스운 말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그가 그 때문에 태어났던 바, 바로 그 목적을 지닌다."라고. 왜냐하면 모든 끝이 목적인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이 목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ἐπεὶ καὶ ποιοῦσιν αἱ τέχναι τὴν ὕλην αἱ μὲν ἁπλῶς αἱ δὲ εὐεργόν, καὶ χρώμεθα ὡς ἡμῶν ἕνεκα πάντων ὑπαρχόντων (ἐσμὲν γάρ πως καὶ ἡμεῖς τέλος· διχῶς γὰρ τὸ οὗ ἕνεκα· εἴρηται δ' ἐν τοῖς περὶ φιλοσοφίας). δύο δὲ αἱ ἄρχουσαι τῆς ὕλης καὶ γνωρίζουσαι τέχναι, ἥ τε χρωμένη καὶ τῆς ποιητικῆς ἡ ἀρχιτεκτονική. διὸ καὶ ἡ χρωμένη ἀρχιτεκτονική πως, διαφέρει δὲ ᾗ ἡ μὲν τοῦ εἴδους γνωριστική, ἡ ἀρχιτεκτονική, ἡ δὲ ὡς ποιητική, τῆς ὕλης· ὁ μὲν γὰρ κυβερνήτης ποῖόν τι τὸ εἶδος τοῦ πηδαλίου γνωρίζει καὶ ἐπιτάττει, ὁ δ' ἐκ ποίου ξύλου καὶ ποίων κινήσεων ἔσται. ἐν μὲν οὖν τοῖς κατὰ τέχνην ἡμεῖς ποιοῦμεν τὴν ὕλην τοῦ ἔργου ἕνεκα, ἐν δὲ τοῖς φυσικοῖς ὑπάρχει οὖσα. ἔτι τῶν πρός τι ἡ ὕλη· ἄλλῳ γὰρ εἴδει ἄλλη ὕλη. μέχρι δὴ πόσου τὸν φυσικὸν δεῖ εἰδέναι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ὸ τί ἐστιν; ἢ ὥσπερ ἰατρὸν νεῦρον ἢ χαλκέα χαλκόν, μέχρι τοῦ τίνος [γὰρ] ἕνεκα ἕκαστον, καὶ περὶ ταῦτα ἅ ἐστι χωριστὰ μὲν εἴδει, ἐν ὕλῃ δέ; ἄνθρωπος γὰρ ἄνθρωπον γεννᾷ καὶ ἥλιος. [Bekker page 194b, line 14] πῶς δ' ἔχει τὸ χωριστὸν καὶ τί ἐστι, φιλοσοφίας ἔργον διορίσαι τῆς πρώτης.
  또한 기술들이 질료를 만드는데 어떤 기술들은 단적으로 그리하고 다른 기술들은 유용하게 만들며, 우리는 모든 현존하는 것들이 우리를 위한 것인냥 그것들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 또한 어떤 식으로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 때문인 바의 것은 두 가지이다. 이는 철학에 관한 글에서 이야기된다). 그런데 질료를 지배하는 기술들과 이를 아는 기술들은 둘로서, 사용하는 기술 그리고 제작술에 대한 규제적 기술이다. 이런 이유로 사용하는 기술 또한 어떤 식으로는 규제적 기술이지만, 한쪽, 즉 규제적 기술은 형상에 대한 인식적 기술인 반면, 다른 쪽, 질료에 속하는 쪽은 제작술로서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조타수는 조타기(키)의 형상이 어떤 무엇인지 알고 또한 그것을 부여하지만, 다른 자는 어떤 목재로부터 어떤 움직임들을 통해 그것이 성립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술에 따른 것들 내에서 우리는 기능(일, 작품)을 위해 질료를 만들고, 자연적인 것들 내에는 존재하는 질료가 현존한다. 더 나아가 질료는 어떤 것에 관련한(상대적인) 것들에 속한다. 왜냐하면 여타의 형상에는 여타의 질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자연학자는 형상과 무엇인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 의사가 힘줄을 알거나 대장장이가 청동을 아는 것처럼, 그 각각이 무엇을 위한 것들인지까지를, 그리고 형상에는 독립적이지만, 질료에는 내재하는 그러한 것들에 관하여서 알아야 하는가? 왜냐하면 인간도 태양도 인간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독립된 것이 어떤 상태이며 무엇인지, 이를 정의하는 것은 제일 철학의 일이다.


Διωρισμένων δὲ τούτων ἐπισκεπτέον περὶ τῶν αἰτίων, ποῖά τε καὶ πόσα τὸν ἀριθμόν ἐστιν. ἐπεὶ γὰρ τοῦ εἰδέναι χάριν ἡ πραγματεία, εἰδέναι δὲ οὐ πρότερον οἰόμεθα ἕκαστον πρὶν ἂν λάβωμεν τὸ διὰ τί περὶ ἕκαστον (τοῦτο δ' ἐστὶ τὸ λαβεῖν τὴν πρώτην αἰτίαν), δῆλον ὅτι καὶ ἡμῖν τοῦτο ποιητέον καὶ περὶ γενέσεως καὶ φθορᾶς καὶ πάσης τῆς φυσικῆς μεταβολῆς, ὅπως εἰδότες αὐτῶν τὰς ἀρχὰς ἀνάγειν εἰς αὐτὰς πειρώμεθα τῶν ζητουμένων ἕκαστον. ἕνα μὲν οὖν τρόπον αἴτιον λέγεται τὸ ἐξ οὗ γίγνεταί τι ἐνυπάρχοντος, οἷον ὁ χαλκὸς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καὶ ὁ ἄργυρος τῆς φιάλης καὶ τὰ τούτων γένη· ἄλλον δὲ τὸ εἶδος καὶ τὸ παράδειγμα, τοῦτο δ' ἐστὶν ὁ λόγος ὁ τοῦ τί ἦν εἶναι καὶ τὰ τούτου γένη (οἷον τοῦ διὰ πασῶν τὰ δύο πρὸς ἕν, καὶ ὅλως ὁ ἀριθμός) καὶ τὰ μέρη τὰ ἐν τῷ λόγῳ. ἔτι ὅ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ἡ πρώτη ἢ τῆς ἠρεμήσεως, οἷον ὁ βουλεύσας αἴτιος, καὶ ὁ πατὴρ τοῦ τέκνου, καὶ ὅλως τὸ ποιοῦν τοῦ ποιουμένου καὶ τὸ μεταβάλλον τοῦ μεταβαλλομένου. ἔτι ὡς τὸ τέλος· τοῦτο δ' ἐστὶν τὸ οὗ ἕνεκα, οἷον τοῦ περιπατεῖν ἡ ὑγίεια· διὰ τί γὰρ περιπατεῖ; φαμέν “ἵνα ὑγιαίνῃ”, καὶ εἰπόντες οὕτως οἰόμεθα [Bekker page 194b, line 35] ἀποδεδωκέναι τὸ αἴτιον. καὶ ὅσα δὴ κινήσαντος ἄλλου μεταξὺ γίγνεται τοῦ τέλους, οἷον τῆς ὑγιείας ἡ ἰσχνασία ἢ ἡ κάθαρσις ἢ τὰ φάρμακα ἢ τὰ ὄργανα· πάντα γὰρ ταῦτα τοῦ τέλους ἕνεκά ἐστιν, διαφέρει δὲ ἀλλήλων ὡς ὄντα τὰ μὲν ἔργα τὰ δ' ὄργανα.
이런 사항들이 정의되었기에 그 원인들에 관하여 고찰되어야만 한다, 어떤 것들이며 그 수는 얼만큼인지. 왜냐하면 문제화하는 것은 앎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각각에 관하여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원인)를 파악하기 이전에는 그보다 앞서 각각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은 일차적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 역시 이러한 일을 생성과 소멸 그리고 자연 변화 전체에 관하여 행해야만 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이런 일들의 원리들을 앎으로써 탐구되는 것들 각각을 이 원리들로 이끌고자 시도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한 가지 방식으로는 원인이 '무엇으로부터' 뭔가가 되는 그 내속하는 무엇이라 진술되는데,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청동과 쟁반에 대해 은 그리고 이런 류(類)들이다. 그런데 다른 방식으로는 그 형상(種)과 본으로 진술되며, 이것은 무엇인 바의 것임에 대한 정의와 그런 류들 (예를 들어 음계의 2:1, 또 일반적으로 수) 그리고 그 정의 내의 부분들이다. 나아가 이런 연유로 변화나 정지의 일차적 원리로도 진술되는데, 예를 들어 바라는 자가 원인이며, 또한 아버지가 출산의 원인이고, 일반적으로 작용자가 작용받은 것의 그리고 변화시킨 것이 변화되는 것의 원인이다. 나아가 목적(완성)으로서도 진술된다. 이것은 '무엇 때문에'이다, 이를 테면 산책에 대해 건강이다. 왜냐하면 무엇으로 인해 산책을 하는가? 하면 우리는 "건강하고자"라 답하고, 또한 그렇게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원인을 밝힌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타의 것이 운동하여서 그 완성의 중간이 되는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 이를 테면 건강에 대해 체중감소나 배설 또는 약품들이나 (의료)도구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것들은 그 목적 때문인 바의 것이며, 한편은 활동들인 반면 다른 편은 도구들이기에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τὰ μὲν οὖν αἴτια σχεδὸν τοσαυταχῶς λέγεται, συμβαίνει δὲ πολλαχῶς λεγομένων τῶν αἰτίων καὶ πολλὰ τοῦ αὐτοῦ αἴτια εἶναι, οὐ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ἷον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καὶ ἡ ἀνδριαντοποιικὴ καὶ ὁ χαλκός, οὐ καθ' ἕτερόν τι ἀλλ' ᾗ ἀνδριάς, ἀλλ' οὐ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ἀλλὰ τὸ μὲν ὡς ὕλη τὸ δ' ὡς ὅθεν ἡ κίνησις. ἔστιν δέ τινα καὶ ἀλλήλων αἴτια, οἷον τὸ πονεῖν τῆς εὐεξίας καὶ αὕτη τοῦ πονεῖν· ἀλλ' οὐ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ἀλλὰ τὸ μὲν ὡς τέλος τὸ δ' ὡς ἀρχὴ κινήσεως. ἔτι δὲ τὸ αὐτὸ τῶν ἐναντίων ἐστίν· ὃ γὰρ παρὸν αἴτιον τοῦδε, τοῦτο καὶ ἀπὸν αἰτιώμεθα ἐνίοτε τοῦ ἐναντίου, οἷον τὴν ἀπουσίαν τοῦ κυβερνήτου τῆς τοῦ πλοίου ἀνατροπῆς, οὗ ἦν ἡ παρουσία αἰτία τῆς σωτηρίας. 
그러므로 한편으로 원인들은 거의 이 만큼의 가짓수로 진술되지만, 그 원인들이 여러가지로 진술됨으로써 같은 일의 원인이 여럿이라 귀결되는데, 부수적으로서가 아니라,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조각술과 청동이, 다름 아닌 조각상인 바로 그 측면에 따라, 허나 똑같은 방식에서가 아니라, 한편은 질료로서 다른 한편은 그 운동이 연원하는 바로서 (여러 원인들로 진술된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상호 원인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노동함은 강건함에 대해 또 이 강건함이 노동에 대해서도 (원인이다). 허나 같은 방식에서가 아니라, 한편은 완성으로서 다른 한편은 운동(변화, 즉 나약함에서 강건함으로의 운동)
의 원리로서 그러하다. 나아가 똑같은 것이 반대되는 것들의 원인이다. 왜냐하면 여기 이것의 현존하는 원인인 바, 그것이 부재함도 우리가 종종 그 반대의 것에 대해 원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배의 전복에 대해, 그의 현존이 그 배의 무사에 대해 원인이었던, 그 조타수의 부재가 원인이다.

ἅπαντα δὲ τὰ νῦν εἰρημένα αἴτια εἰς τέτταρας πίπτει τρόπους τοὺς φανερωτάτους. τὰ μὲν γὰρ στοιχεῖα τῶν συλλαβῶν καὶ ἡ ὕλη τῶν σκευαστῶν καὶ τὸ πῦρ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τῶν σωμάτων καὶ τὰ μέρη τοῦ ὅλου καὶ αἱ ὑποθέσεις τοῦ [Bekker page 195a, line 19] συμπεράσματος ὡς τὸ ἐξ οὗ αἴτιά ἐστιν, τούτων δὲ τὰ μὲν ὡς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οἷον τὰ μέρη, τὰ δὲ ὡς τὸ τί ἦν εἶναι, τό τε ὅλον καὶ ἡ σύνθεσις καὶ τὸ εἶδος· τὸ δὲ σπέρμα καὶ ὁ ἰατρὸς καὶ ὁ βουλεύσας καὶ ὅλως τὸ ποιοῦν, πάντα ὅθεν ἡ ἀρχὴ τῆς μεταβολῆς ἢ στάσεως [ἢ κινήσεως]· τὰ δ' ὡς τὸ τέλος καὶ τἀγαθὸν τῶν ἄλλων· τὸ γὰρ οὗ ἕνεκα βέλτιστον καὶ τέλος τῶν ἄλλων ἐθέλει εἶναι· διαφερέτω δὲ μηδὲν εἰπεῖν αὐτὸ ἀγαθὸν ἢ φαινόμενον ἀγαθόν.
지금 이야기된 모든 원인들이 전부 가장 두드러진 네 가지 방식들로 분류된다. 즉 음절들의 철자들과 인공물들의 질료 그리고 신체들의 불과 이런 종류의 것들 또한 전체의 부분들과 결론의 전제들은 '출처(무엇으로부터)'로서 원인이고, 이것들 중 어떤 것들은 밑에 놓이는 것으로서, 이를 테면 부분들인 반면, 다른 것들은 무엇인 바의 것으로서, 그 전체와 결합과 형상이다. 그런데 정자와 의사와 바라는 자 그리고 일반적으로 작용자는, 모두 변화나 정지가 연원하는 기원(원리)이다. 어떤 것들은 목적(완성)과 그것들의 선(좋음)으로서 (원인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위해'는 그것들의 최선과 완성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으로 말하든 선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말하든 그 둘은 아무런 차이도 없다.

τὰ μὲν οὖν αἴτια ταῦτα καὶ τοσαῦτά ἐστι τῷ εἴδει· τρόποι δὲ τῶν αἰτίων ἀριθμῷ μὲν εἰσὶ πολλοί, κεφαλαιούμενοι δὲ καὶ οὗτοι ἐλάττους. λέγεται γὰρ αἴτια πολλαχῶς, καὶ αὐτῶν τῶν ὁμοειδῶν προτέρως καὶ ὑστέρως ἄλλο ἄλλου, οἷον ὑγιείας ἰατρὸς καὶ τεχνίτης, καὶ τοῦ διὰ πασῶν τὸ διπλάσιον καὶ ἀριθμός, καὶ ἀεὶ τὰ περιέχοντα πρὸς τὰ καθ' ἕκαστον. ἔτι δ' ὡς τὸ συμβεβηκὸς καὶ τὰ τούτων γένη, οἷον ἀνδριάντος ἄλλως Πολύκλειτος καὶ ἄλλως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ὅτι συμβέβηκε τῷ ἀνδριαντοποιῷ τὸ Πολυκλείτῳ εἶναι. καὶ τὰ περιέχοντα δὲ τὸ συμβεβηκός, οἷον εἰ ὁ ἄνθρωπος αἴτιος εἴη ἀνδριάντος ἢ ὅλως ζῷον. ἔστι δὲ κα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ἄλλα ἄλλων [Bekker page 195b, line 2] πορρώτερον καὶ ἐγγύτερον, οἷον εἰ ὁ λευκὸς καὶ ὁ μουσικὸς αἴτιος λέγοιτο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πάντα δὲ καὶ τὰ οἰκείως λεγόμενα καὶ τ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τὰ μὲν ὡς δυνάμενα λέγεται τὰ δ' ὡς ἐνεργοῦντα, οἷον τοῦ οἰκοδομεῖσθαι οἰκίαν οἰκοδόμος ἢ οἰκοδομῶν οἰκοδόμος. ὁμοίως δὲ λεχθήσεται καὶ ἐφ' ὧν αἴτια τὰ αἴτια τοῖς εἰρημένοις, οἷον τουδὶ τοῦ ἀνδριάντος ἢ ἀνδριάντος ἢ ὅλως εἰκόνος, καὶ χαλκοῦ τοῦδε ἢ χαλκοῦ ἢ ὅλως ὕλης· καὶ ἐπὶ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ὡσαύτως. ἔτι δὲ συμπλεκόμενα καὶ ταῦτα κἀκεῖνα λεχθήσεται, οἷον οὐ Πολύκλειτος οὐδὲ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ἀλλὰ Πολύκλειτος ἀνδριαντοποιός. ἀλλ' ὅμως ἅπαντα ταῦτά ἐστι τὸ μὲν πλῆθος ἕξ, λεγόμενα δὲ διχῶς· ἢ γὰρ ὡς τὸ καθ' ἕκαστον, ἢ ὡς τὸ γένος, ἢ ὡς τὸ συμβεβηκός, ἢ ὡς τὸ γένος τοῦ συμβεβηκότος, ἢ ὡς συμπλεκόμενα ταῦτα ἢ ὡς ἁπλῶς λεγόμενα· πάντα δὲ ἢ ἐνεργοῦντα ἢ κατὰ δύναμιν. διαφέρει δὲ τοσοῦτον, ὅτι τὰ μὲν ἐνεργοῦντα καὶ τὰ καθ' ἕκαστον ἅμα ἔστι καὶ οὐκ ἔστι καὶ ὧν αἴτια, οἷον ὅδ' ὁ ἰατρεύων τῷδε τῷ ὑγιαζομένῳ καὶ ὅδε ὁ οἰκοδομῶν τῷδε τῷ οἰκοδομουμένῳ, τὰ δὲ κατὰ δύναμιν οὐκ ἀεί. φθείρεται γὰρ οὐχ ἅμα ἡ οἰκία καὶ ὁ οἰκοδόμος.
그러므로 원인들은 이런 것들이고 그 형상(종)에서 그 만큼의 것들이다. 그런데 그 원인들의 방식들은 수로는 여럿이나, 요약되면 이것들도 소수이다. 왜냐하면 원인들이 여러가지로 진술되고, 똑같은 동종의 것들 중에서도 어떤 것이 다른 것에 앞서거나 뒤서는 식으로, 이를 테면 건강에 대해 의사와 전문가처럼 진술되며, 음계에 대해서도 2:1과 수가 진술되고, 개별적인 것들에 대해서 언제나 포괄적인 것들이 (원인으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들의 유들도 부수적으로,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 어떤 식으로는 폴뤼클레이토스가 다른 식으로는 조각가가 (원인으로) 진술되는데, 그 조각가에게 폴뤼클레이토스로 존재한다는 것이 부수한다는 점 때문이다. 부수하는 것을 포괄하는 것들도 (그럴 것이다), 이를 테면 만일 인간이 조각상의 원인이거나 혹은 일반적으로 동물이 그러하다면. 그런데 부수하는 것들 중에서도 어떤 것들이 어떤 것들보다 더 멀고 또 더 가까운데, 이를 테면 흰 사람과 교양있는 사람이 그 조각상의 원인으로 진술될 경우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고유한 방식으로 진술되는 것들도 부수적인 방식으로 진술되는 것들도 모두 일부는 가능적인 것들로서 진술되고 일부는 현실화디는 것들로 진술되는 바, 이를 테면 건축물이 건축되었음에 대해 건축가나 건축 중인 건축가가 진술된다. 어떤 것들에 대해 그 원인들이 원인들인 것들도 이야기된 것들로 유사하게 진술될 것이다, 이를 테면 여기 이 조각상이나 조각상 혹은 일반적으로 상(象)에 대해, 또한 여기 이 청동이나 청동 혹은 일반적으로 질료에 대해. 부수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그러하다. 나아가 바로 저 똑같은 것들도 복합적인 것들로 진술될 것이다, 이를 테면 폴뤼클레이토스도 아니고 조각가도 아니라, 조각가 폴뤼클레이토스로.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전부 그 수로는 여섯이라 하더라도, 이중으로 진술되는 것들이다. 즉 개별적인 것으로서, 또는 유로서, 혹은 부수적인 것으로서, 또는 그 부수적인 것의 유로서, 혹은 그것들이 복합된 것들로서나 단적으로 진술되는 것들로서. 그런데 모든 것들은 현살화된 것들이거나 가능적이다. 그 차이는 이하의 정도이다. 한편으로는 현실화된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이 그것들이 어떤 것들의 원인들인 바의 것들과 동시에 존재하고 또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데, 이를 테면 여기 이 건강하게 되는 중인 자에게 치료를 행하는 중인 자와 여기 이 건축되고 있는 것에게 건축을 행하고 있는 여기 이 사람이 그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언제나 그런 것이 아니라 가능적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건축물과 건축가는 동시에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δεῖ δ' ἀεὶ [Bekker page 195b, line 22] τὸ αἴτιον ἑκάστου τὸ ἀκρότατον ζητεῖν, ὥσπερ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οἷον ἅνθρωπος οἰκοδομεῖ ὅτι οἰκοδόμος, ὁ δ' οἰκοδόμος κατὰ τὴν οἰκοδομικήν· τοῦτο τοίνυν πρότερον τὸ αἴτιον, καὶ οὕτως ἐπὶ πάντων)· ἔτι τὰ μὲν γένη τῶν γενῶν, τὰ δὲ καθ' ἕκαστον τῶν καθ' ἕκαστον (οἷον ἀνδριαντοποιὸς μὲν ἀνδριάντος, ὁδὶ δὲ τουδί)· καὶ τὰς μὲν δυνάμεις τῶν δυνατῶν, τὰ δ' ἐνεργοῦντα πρὸς τὰ ἐνεργούμενα. ὅσα μὲν οὖν τὰ αἴτια καὶ ὃν τρόπον αἴτια, ἔστω ἡμῖν διωρισμένα ἱκανῶς.
그런데 항상 각각의 최고 원인이 추적되어야 한다, 여타의 주제에 관련하여서도 그러하듯 (이를 테면 인간은 건축가이기 때문에 건축하지만, 그 건축가는 건축술에 따라 그리한다. 그러니까 이것이 더 앞선 원인이며,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이다). 나아가 유들의 유(-적 원인)들,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인 것들의 개별적인 것(원인)들이 (추적되어야 한다) (이를 테면 조각상에 대해서는 조각가가, 여기 이 조각상에 대해서는 여기 이 조각가가). 또한 가능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가능적 원인들이, 반면 현실화된 것들에 대해서는 현실화된 것들이 (추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인들이 얼만큼이며 원인인 방식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충분히 정의된 것으로 하자.


-蟲-

Β.

Τῶν ὄντων τὰ μέν ἐστι φύσει, τὰ δὲ δι' ἄλλας αἰτίας, φύσει μὲν τά τε ζῷα καὶ τὰ μέρη αὐτῶν καὶ τὰ φυτὰ καὶ τὰ ἁπλᾶ τῶν σωμάτων, οἷον γῆ καὶ πῦρ καὶ ἀὴρ καὶ ὕδωρ (ταῦτα γὰρ εἶναι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φύσει φαμέν), πάντα δὲ ταῦτα φαίνεται διαφέροντα πρὸς τὰ μὴ φύσει συνεστῶτα.
존재하는 것들 중 일부는 자연에 의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여타의 원인들로 인한 것이며, 자연에 의한 것들은 동물들과 그것들의 부분들 그리고 식물들과 물체들 중 단순한 것들, 이를 테면 흙과 불과 공기와 물이고 (왜냐하면 이것들과 이러한 것들이 자연에 의한 것들이라고 우리가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자연에 의하지 않고 구성된 것들에 대해 판이한 것들로 드러난다.
τούτων μὲν γὰρ ἕκαστον ἐν ἑαυτῷ 
ἀρχὴν ἔχει κινήσεως καὶ στάσεως, τὰ μὲν κατὰ τόπον, τὰ δὲ κατ' αὔξησιν καὶ φθίσιν, τὰ δὲ κατ' ἀλλοίωσιν· [Bekker page 192b, line 16] κλίνη δὲ καὶ ἱμάτιον, καὶ εἴ τι τοιοῦτον ἄλλο γένος ἐστίν, ᾗ μὲν τετύχηκε τῆς κατηγορίας ἑκάστης καὶ καθ' ὅσον ἐστὶν ἀπὸ τέχνης, οὐδεμίαν ὁρμὴν ἔχει μεταβολῆς ἔμφυτον, ᾗ δὲ συμβέβηκεν αὐτοῖς εἶναι λιθίνοις ἢ γηΐνοις ἢ μικτοῖς ἐκ τούτων, ἔχει, καὶ κατὰ τοσοῦτον, ὡς οὔσης τῆς φύσεως ἀρχῆς τινὸς καὶ αἰτίας τοῦ κινεῖσθαι καὶ ἠρεμεῖν ἐν ᾧ ὑπάρχει πρώτως καθ' αὑτὸ καὶ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λέγω δὲ τὸ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ὅτι γένοιτ' ἂν αὐτὸς αὑτῷ τις αἴτιος ὑγιείας ὢν ἰατρός· ἀλλ' ὅμως οὐ καθὸ ὑγιάζεται τὴν ἰατρικὴν ἔχει, ἀλλὰ συμβέβηκεν τὸν αὐτὸν ἰατρὸν εἶναι καὶ ὑγιαζόμενον· διὸ καὶ χωρίζεταί ποτ' ἀπ' ἀλλήλων).
왜냐하면 이것들 각각은 자체 내에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지니고, 어떤 것들은 장소에 따라, 다른 것들은 증가와 감소에 따라, 또 다른 것들은 전환(변화?)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침구와 의복은, 또 만일 이와 같은 무언가가 여타의 부류라면 그 또한, 그것의 각 술어를 획득한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즉 기술에 의한 것인 한에서, 변화의 아무런 본래적 충동도 지니지 않는 반면, 그것들에 돌로 된 것들로 혹은 흙으로 된 것들로 또는 이것들을 통해 섞인 것들로 이루어짐이 부수한 바로 그 측면에서, 또 그 만큼에 한해서만 충동을 지니는데, 
그 안에 일차적으로(?) 그 자체로 또한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운동하고 정지함의 어떠한(특정한) 자연적 원리와 원인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 자신이 자기 스스로 의사임으로써 건강의 특정(어떤)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건강해졌다는 바로 그 점에 한하여 의술을 지니는 게 아니라, 부수적으로 같은 자가 의사이고 또 건강해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쨌든 서로로부터 독립되기도 한다).

(ὡς 해석 1. κατὰ τοσοῦτον과 독립. Charlton. 해석 2. κατὰ τοσοῦτον과 연결. Hardie와 Gaye. 후자에 따를 경우 번역은: '그 안에 일차적으로(?) 그 자체로 또한 … 원리와 원인이 있는, 그러한 만큼에 한해서만 충동을 지닌다.')

ὁμοίως δὲ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ἕκαστον τῶν ποιουμένων· οὐδὲν γὰρ αὐτῶν ἔχει τὴν ἀρχὴν ἐν ἑαυτῷ τῆς ποιήσεως, ἀλλὰ τὰ μὲν ἐν ἄλλοις καὶ ἔξωθεν, οἷον οἰκία καὶ τῶν ἄλλων τῶν χειροκμήτων ἕκαστον, τὰ δ' ἐν αὑτοῖς μὲν ἀλλ' οὐ καθ' αὑτά, ὅσα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αἴτια γένοιτ' ἂν αὑτοῖς.
그런데 제작하는(작용하는?) 여타의 것들 각각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중 어느 하나 자체 내에 제작의 원리를 지니지 않고, 오히려 어떤 것들은 여타의 것들 내에 그리고 외부에 지니니, 이를 테면 집이나 여타 인공물(수작업물) 각각이 그러하고, 또 다른 것들은 그것들 내에 지니지만 자체적으로 지니지는 않는 바, 부수적으로 그것들에게 원인이 생길 것들이 그러하다.
φύσις μὲν οὖν ἐστὶ τὸ ῥηθέν· φύσιν δὲ 
ἔχει ὅσα τοιαύτην ἔχει ἀρχήν. καὶ ἔστιν πάντα ταῦτα οὐσία· ὑποκείμενον γάρ τι, καὶ ἐν ὑποκειμένῳ ἐστὶν ἡ φύσις ἀεί. κατὰ φύσιν δὲ ταῦτά τε καὶ ὅσα τούτοις ὑπάρχει καθ' αὑτά, οἷον τῷ πυρὶ φέρεσθαι ἄνω· τοῦτο γὰρ φύσις μὲν οὐκ [Bekker page 193a, line 1] ἔστιν οὐδ' ἔχει φύσιν, φύσει δὲ καὶ κατὰ φύσιν ἐστίν. τί μὲν οὖν ἐστιν ἡ φύσις, εἴρηται, καὶ τί τὸ φύσει καὶ κατὰ φύσιν. ὡς δ' ἔστιν ἡ φύσις, πειρᾶσθαι δεικνύναι γελοῖον· φανερὸν γὰρ ὅτι τοιαῦτα τῶν ὄντων ἐστὶν πολλά.
그래서 상술된 바의 것이 자연이다. 이런 종류의 원리를 지니는 모든 것이 자연(본성)을 지닌다. 또한 이것들 모두가 실체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뭔가 존속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연이 항상 존속하는 것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도 이러한 것들에 그 자체로 현존하는 모든 것도 자연에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에 있어서 위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도 아니고 자연을 지니지도 않지만, 자연에 의해 그리고 자연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이 무엇인지는, 이야기되었고, 또한 자연에 의해서라거나 자연에 따라서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야기되었다. 반면 자연이 어떠한지는, 입증을 시도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들 중 이러한 것들은 여러가지라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τὸ δὲ δεικνύναι τὰ 
φανερὰ διὰ τῶν ἀφανῶν οὐ δυναμένου κρίνειν ἐστὶ τὸ δι' αὑτὸ καὶ μὴ δι' αὑτὸ γνώριμον (ὅτι δ' ἐνδέχεται τοῦτο πάσχειν, οὐκ ἄδηλον· συλλογίσαιτο γὰρ ἄν τις ἐκ γενετῆς ὢν τυφλὸς περὶ χρωμάτων), ὥστε ἀνάγκη τοῖς τοιούτοις περὶ τῶν ὀνομάτων εἶναι τὸν λόγον, νοεῖν δὲ μηδέν. 
그런데 불분명한 것들을 통해 분명한 것들을 입증한다는 것은 자명한 것과 자명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 자에 속하고 (그런데 이런 일을 겪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은, 불분명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누군가 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색들에 관하여 추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자들에게 논의란 자구들에 관한 것이고 이해는 전혀 없을 수밖에 없다.

δοκεῖ δ' ἡ φύσις καὶ ἡ 
οὐσία τῶν φύσει ὄντων ἐνίοις εἶναι τὸ πρῶτον ἐνυπάρχον ἑκάστῳ, ἀρρύθμιστον <ὂν> καθ' ἑαυτό, οἷον κλίνης φύσις τὸ ξύλον, ἀνδριάντος δ' ὁ χαλκός. σημεῖον δέ φησιν Ἀντιφῶν ὅτι, εἴ τις κατορύξειε κλίνην καὶ λάβοι δύναμιν ἡ σηπεδὼν ὥστε ἀνεῖναι βλαστόν, οὐκ ἂν γενέσθαι κλίνην ἀλλὰ ξύλον, ὡς τὸ μὲν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ὑπάρχον, τὴν κατὰ νόμον διάθεσιν καὶ τὴν τέχνην, τὴν δ' οὐσίαν οὖσαν ἐκείνην ἣ καὶ διαμένει ταῦτα πάσχουσα συνεχῶς.
그런데 자연과 자연상 존재하는 것들의 실체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각각에 내속하는 최초의 것이라고 여겨지며, 그 자체로 비정형적인 것이기에, 이를 테면 목재는 침대의 자연이고, 청동은 조각상의 자연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안티폰은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말한다. 만일 누군가 침대를 매장하고서 그 썩은 침대가 다시금 싹을 틔울(or 꽃을 피울) 능력을 얻는다면, 침대가 아니라 목재가 될 능력일 것이며, 부수적인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서는, 관습적인 구조와 기술인 반면, 그 실체는 저것(나무)으로서 지속적으로 이런 것들을 겪으면서 존속하기도 하는 것이다.
εἰ δὲ καὶ τούτων ἕκαστον πρὸς ἕτε
ρόν τι ταὐτὸ τοῦτο πέπονθεν (οἷον ὁ μὲν χαλκὸς καὶ ὁ χρυσὸς πρὸς ὕδωρ, τὰ δ' ὀστᾶ καὶ ξύλα πρὸς γῆν, ὁμοίως δὲ καὶ τῶν ἄλλων ὁτιοῦν), ἐκεῖνο τὴν φύσιν εἶναι καὶ τὴν οὐσίαν [Bekker page 193a, line 21] αὐτῶν. διόπερ οἱ μὲν πῦρ, οἱ δὲ γῆν, οἱ δ' ἀέρα φασίν, οἱ δὲ ὕδωρ, οἱ δ' ἔνια τούτων, οἱ δὲ πάντα ταῦτα τὴν φύσιν εἶναι τὴν τῶν ὄντων. ὃ γάρ τις αὐτῶν ὑπέλαβε τοιοῦτον, εἴτε ἓν εἴτε πλείω, τοῦτο καὶ τοσαῦτά φησιν εἶναι τὴν ἅπασαν οὐσίαν, τὰ δὲ ἄλλα πάντα πάθη τούτων καὶ ἕξεις καὶ διαθέσεις, καὶ τούτων μὲν ὁτιοῦν ἀΐδιον (οὐ γὰρ εἶναι μεταβολὴν αὐτοῖς ἐξ αὑτῶν), τὰ δ' ἄλλα γίγνεσθαι καὶ φθείρεσθαι ἀπειράκις. 
그런데 만일 이러한 것들의 각각 또한 다른 무언가에 대해서 이와 똑같은 것을 겪었다면 (예를 들어 청동과 황금은 물에 대해, 뼈와 목재는 흙에 대해, 여타의 것들 중 무엇이 되었든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들의 자연과 실체는 저쪽이라고 (안티폰이 말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어떤 이들은 불을, 또 다른 이들은 흙을, 어떤 이들은 공기를, 또 다른 사람들은 물을, 다른 자들은 이것들 중 일부를, 또 어떤 이들은 이것들 전부를 존재하는 것들의 자연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누구든 이것들 중 이러한 것으로 취한 것, 그게 하나든 여럿이든, 그것이 또 그만큼의 것들이 통틀어 실체라고 주장하며, 반면 여타의 것들은 모두 이것들의 겪음들, 상태들, 성향들이고, 또 이것들 중 무엇이든 영원한 반면 (왜냐하면 이것들에게는 이것들로부터의 변화가 없기에), 여타의 것들은 한정없이 여러 차례 생성되고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ἕνα μὲν οὖν τρόπον οὕτως ἡ φύσις λέγεται, 
ἡ πρώτη ἑκάστῳ ὑποκειμένη ὕλη τῶν ἐχόντων ἐν αὑτοῖς ἀρχὴν κινήσεως καὶ μεταβολῆς, ἄλλον δὲ τρόπον ἡ μορφὴ καὶ τὸ εἶδος τὸ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ὥσπερ γὰρ τέχνη λέγεται τὸ κατὰ τέχνην καὶ τὸ τεχνικόν, οὕτω καὶ φύσις τὸ κατὰ φύσιν [λέγεται] καὶ τὸ φυσικόν, οὔτε δὲ ἐκεῖ πω φαῖμεν ἂν ἔχειν κατὰ τὴν τέχνην οὐδέν, εἰ δυνάμει μόνον ἐστὶ κλίνη, μή πω δ' ἔχει τὸ εἶδος τῆς κλίνης, οὐδ' εἶναι τέχνην, οὔτ' ἐν τοῖς φύσει συνισταμένοις· τὸ γὰρ δυνάμει σὰρξ ἢ ὀστοῦν οὔτ' ἔχει πω τὴν ἑαυτοῦ φύσιν, πρὶν ἂν λάβῃ τὸ εἶδος τὸ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ᾧ ὁριζόμενοι λέγομεν τί ἐστι σὰρξ ἢ ὀστοῦν, οὔτε φύσει ἐστίν. ὥστε ἄλλον τρόπον ἡ φύσις ἂν εἴη τῶν ἐχόντων ἐν αὑτοῖς κινήσεως ἀρχὴν ἡ μορφὴ καὶ τὸ εἶδος, [Bekker page 193b, line 5] οὐ χωριστὸν ὂν ἀλλ' ἢ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τὸ δ' ἐκ τούτων φύσις μὲν οὐκ ἔστιν, φύσει δέ, οἷον ἄνθρωπος.)
그리하여 그렇게 한 가지 방식으로 자연이 진술되었는데, 자체 내에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지니는 것들의 그 각각에 제일의 것으로서 기저에 놓이는 질료라는 것이고, 다른 방식으로는 정의에 따른 것으로서 형태와 형상(or 형상과 종류)이다. 왜냐하면 기술에 따른 것도 기술적인 것도 기술이라 진술되듯, 그런 식으로 또한 자연에 따른 것도 자연적인 것도 자연이라고 진술되며, 저기(저 단계)에서는 아직 기술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지닌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가능적으로만 침대이고, 아직 침대의 형상을 지니지 못한다면, 기술이라고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자연에 의해 구성된 것들의 경우에서도 그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능적인 살이든 뼈든, 우리가 그로써 살이나 뼈가 무엇인지를 정의하여 진술하는 그 진술에 따른 형상을 취하기 전에는, 
아직 그 자신의 자연을 지니지도 못하고, 자연에 의한 것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타의 방식에서 자연은 그 자체 내에 운동의 원리를 지니는 것들의,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정의에 따른 그러한 형태와 형상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부터 나온 것은 자연은 아니나, 자연에 의한 것인 바, 이를 테면 사람 같은 것이다.)

καὶ μᾶλλον αὕτη φύσις τῆς ὕλης· ἕκαστον γὰρ τότε λέγεται ὅταν ἐντελεχείᾳ ᾖ, μᾶλλον ἢ ὅταν δυνάμει. ἔτι γίγνεται ἄνθρωπος ἐξ ἀνθρώπου, ἀλλ' οὐ κλίνη ἐκ κλίνης· διὸ καί φασιν οὐ τὸ σχῆμα εἶναι τὴν φύσιν ἀλλὰ τὸ ξύλον, ὅτι γένοιτ' ἄν, εἰ βλαστάνοι, οὐ κλίνη ἀλλὰ ξύλον. εἰ δ' ἄρα τοῦτο φύσις, καὶ ἡ μορφὴ φύσις· γίγνεται γὰρ ἐξ ἀνθρώπου ἄνθρωπος. ἔτι δ' ἡ φύσις ἡ λεγομένη ὡς γένεσις ὁδός ἐστιν εἰς φύσιν. οὐ γὰρ ὥσπερ ἡ ἰάτρευσις λέγεται οὐκ εἰς ἰατρικὴν ὁδὸς ἀλλ' εἰς ὑγίειαν· ἀνάγκη μὲν γὰρ ἀπὸ ἰατρικῆς οὐκ εἰς ἰατρικὴν εἶναι τὴν ἰάτρευσιν, οὐχ οὕτω δ' ἡ φύσις ἔχει πρὸς τὴν φύσιν, ἀλλὰ τὸ φυόμενον ἐκ τινὸς εἰς τὶ ἔρχεται ᾗ φύεται. τί οὖν φύεται; οὐχὶ ἐξ οὗ, ἀλλ' εἰς ὅ. ἡ ἄρα μορφὴ φύσις. ἡ δὲ μορφὴ καὶ ἡ φύσις διχῶς λέγεται· καὶ γὰρ ἡ στέρησις εἶδός πώς ἐστιν. εἰ δ' ἔστιν στέρησις καὶ ἐναντίον τι περὶ τὴν ἁπλῆν γένεσιν ἢ μὴ ἔστιν, ὕστερον ἐπισκεπτέον.
이러한 형태가 오히려 질료보다 더 자연이라 할 만하다. 왜냐하면 각각의 것은 가능적일 때보다 오히려 실현되어 있을 그 경우에 각각의 것으로 진술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은 인간으로부터 생성되지만, 침대는 침대로부터 그리 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또한 그것의 자연은 그 모습이 아니라 목재라고 말하기도 하는 바, 만일 싹을 틔울 수 있다면, 생성될 수도 있을 것은 침대가 아니라 목재이리란 점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그래서 이것이 자연이라면, 형태 또한 자연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인간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생성으로서 진술되는 그 자연은 자연을 목적으로 하는(향한) 길이다. 왜냐하면 의료가 의술적인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길이 아니라 건강을 목적으로 하는 길이라 진술되는 것처럼 그러하진 않기 때문이다. 즉 의술로부터는 의술적인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료가 성립함이 필연적인 반면, 자연은 그런 식으로 자연에 관계 맺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로부터 무언가로 자라나는 것은 그 자라난 출처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라나는가? 그로부터 자라난 출처가 아니라, 자라나는 결과 쪽이다. 그래서 형태가 본성이다. 그런데 형태와 자연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술된다. 왜냐하면 결핍도 어떤 의미에서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적인 생성과 관련하여서 특정한 결핍과 반대가 성립하는지, 그것은 이후에 고찰해야 할 일이다.

-蟲-

  Ὅτι δὲ μοναχῶς οὕτω λύεται καὶ ἡ τῶν ἀρχαίων ἀπορία, λέγωμεν μετὰ ταῦτα. ζητοῦντες γὰρ οἱ κατὰ φιλοσοφίαν πρῶτοι τὴν ἀλήθειαν καὶ τὴν φύσιν τῶν ὄντων ἐξετράπησαν οἷον ὁδόν τινα ἄλλην ἀπωσθέντες ὑπὸ ἀπειρίας, καί φασιν οὔτε γίγνεσθαι τῶν ὄντων οὐδὲν οὔτε φθείρεσθαι διὰ τὸ ἀναγκαῖον μὲν εἶναι γίγνεσθα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ἢ ἐξ ὄντος ἢ ἐκ μὴ ὄντος, ἐκ δὲ τούτων ἀμφοτέρων ἀδύνατον εἶναι· οὔτε γὰρ τὸ ὂν γίγνεσθαι (εἶναι γὰρ ἤδη) ἔκ τε μὴ ὄντος οὐδὲν ἂν γενέσθαι· ὑποκεῖσθαι γάρ τι δεῖν. καὶ οὕτω δὴ τὸ ἐφεξῆς συμβαῖνον αὔξοντες οὐδ' εἶναι πολλά φασιν ἀλλὰ μόνον αὐτὸ τὸ ὄν.
  고대인들의 난관 또한 오직 그렇게만 해소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 다음으로 논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철학의 영역에서 최초로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와 본성을 탐구하는 자들은 난관에 의해 떠밀려 이를 테면 무언가 다른 길로 돌아섰고, 생성되는 것은 존재로부터 또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됨이 필연적이지만, 둘 중 어느 쪽으로부터든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존재하는 것들 중 아무것도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존재는 (그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생성되지도 않고 비존재로부터 아무것도 생성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무언가가 아래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결론을 과장하며 다수도 아니라 오직 존재 자체뿐이라고 말한다.
ἐξετράπησαν : ἐκτρέπω aor.
ἀπωσθέντες : ἀπωθέω aor. pass.

  ἐκεῖνοι μὲν οὖν ταύτην ἔλαβον τὴν δόξαν διὰ τὰ εἰρημένα· ἡμεῖς δὲ λέγομεν ὅτι τὸ ἐξ ὄντος ἢ μὴ ὄντος γίγνεσθαι, ἢ τὸ μὴ ὂν ἢ τὸ ὂ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ὁτιοῦν τόδε γίγνεσθαι, ἕνα μὲν τρόπον οὐθὲν διαφέρει ἢ τὸ τὸν ἰατρὸ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ἐξ ἰατροῦ εἶναί τι ἢ γίγνεσθαι, ὥστ' ἐπειδὴ τοῦτο διχῶς λέγεται,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ὸ ἐξ ὄντος καὶ τὸ ὂν ἢ ποιεῖν ἢ πάσχειν. οἰκοδομεῖ μὲν οὖν ὁ ἰατρὸς οὐχ ᾗ ἰατρὸς ἀλλ' ᾗ [Bekker page 191b, line 5] οἰκοδόμος, καὶ λευκὸς γίγνεται οὐχ ᾗ ἰατρὸς ἀλλ' ᾗ μέλας· ἰατρεύει δὲ καὶ ἀνίατρος γίγνεται ᾗ ἰατρός. ἐπεὶ δὲ μάλιστα λέγομεν κυρίως τὸν ἰατρὸν ποιεῖν τι ἢ πάσχειν ἢ γίγνεσθαι ἐξ ἰατροῦ, ἐὰν ᾗ ἰατρὸς ταῦτα πάσχῃ ἢ ποιῇ ἢ γίγνηται,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ὸ ἐκ μὴ ὄντος γίγνεσθαι τοῦτο σημαίνει, τὸ ᾗ μὴ ὄν. ὅπερ ἐκεῖνοι μὲν οὐ διελόντες ἀπέστησαν, καὶ διὰ ταύτην τὴν ἄγνοιαν τοσοῦτον προσηγνόησαν, ὥστε μηθὲν οἴεσθαι γίγνεσθαι μηδ' εἶναι τῶν ἄλλων, ἀλλ' ἀνελεῖν πᾶσαν τὴν γένεσιν· ἡμεῖς δὲ καὶ αὐτοί φαμεν γίγνεσθαι μὲν μηθὲν ἁπλῶς ἐκ μὴ ὄντος, πὼς μέντοι γίγνεσθαι ἐκ μὴ ὄντος, οἷον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ἐκ γὰρ τῆς στερήσεως, ὅ ἐστι καθ' αὑτὸ μὴ ὄν, οὐκ ἐνυπάρχοντος γίγνεταί τι· θαυμάζεται δὲ τοῦτο καὶ ἀδύνατον οὕτω δοκεῖ γίγνεσθαί τι, ἐκ μὴ ὄντος)· ὡσαύτως δὲ οὐδ' ἐξ ὄντος οὐδὲ τὸ ὂν γίγνεσθαι, πλὴν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ὕτω δὲ καὶ τοῦτο γίγνεσθαι,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οἷον εἰ ἐκ ζῴου ζῷον γίγνοιτο καὶ ἐκ τινὸς ζῴου τι ζῷον· οἷον εἰ κύων <ἐκ κυνὸς ἢ ἵππος> ἐξ ἵππου γίγνοιτο. γίγνοιτο μὲν γὰρ ἂν οὐ μόνον ἐκ τινὸς ζῴου ὁ κύων, ἀλλὰ καὶ ἐκ ζῴου, ἀλλ' οὐχ ᾗ ζῷον· ὑπάρχει γὰρ ἤδη τοῦτο· εἰ δέ τι μέλλει γίγνεσθαι ζῷον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ὐκ ἐκ ζῴου ἔσται, καὶ εἴ τι ὄν, οὐκ ἐξ ὄντος· οὐδ' ἐκ μὴ ὄντος· τὸ γὰρ ἐκ μὴ ὄντος εἴρηται ἡμῖν [Bekker page 191b, line 26] τί σημαίνει, ὅτι ᾗ μὴ ὄν. ἔτι δὲ καὶ τὸ εἶναι ἅπαν ἢ μὴ εἶναι οὐκ ἀναιροῦμεν.
  그러므로 저들은 이야기된 점들 때문에 그 의견을 취했다. 그러나 우리는, '존재로부터 혹은 비존재로부터 생겨난다' 라는 것, 혹은 '비존재나 존재가 무언가를 행한다'거나 '겪는다'거나 '무엇이든 여기 이것이 된다'는 것은, 한 가지 방식에서는 '
의사가 무언가를 한다'거나 '겪는다'거나 '의사로부터 무언가가 있다'거나 '된다'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그래서 이것이 두 가지로 진술될 경우, 존재로부터의 것도 존재도 행하거나 겪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의사가 의사로서가 아니라 건축가로서 건축하고, 의사로서가 아니라 검은 자로서 희게 된다. 다른 한편 의사로서 의술을 행하고 비의료인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특히 정당하게 '의사가 무언가를 뭔가를 행한다'거나 '겪는다'거나 '의사로부터 생성된다'고 말하기에, 의사로서 이런 일들을 겪거나 행하거나 그로부터 생성될 것이라면 그러하기에,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는 것이 이것을, 비존재로서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저들은 바로 그것을 나누지 않고 빠뜨렸고, 또한 이러한 무지로 인해, 여타의 것들 중 아무것도 생성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모든 생성을 제거할 정도로 무지한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우리는 스스로도 한편으로 단적으로는 비존재로부터 아무것도 생성되지 않는다고 말하자미나, 어떤 식으로는 비존재로부터 생성된다고, 이를 테면 우연적으로 그러하다고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로는 비존재인, 그러한 결핍으로부터, 그것이 존속하지 않음에도 그로부터 무언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점은 놀라운 것이고 그런 식으로, 비존재로부터 무언가 생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우연한 경우를 제외하면, 존재로부터 존재가 생성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식(예외적)으로 그것이 생성되니, 이를 테면 동물로부터 동물이 생겨나고 또 특정 동물로부터 특정 동물이 생겨난다면 그와 같은 방식에서이다. 예를 들어 <개로부터> 개가 <혹은> 말로부터 <말이> 생성된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오직 특정 동물로부터만이 아니라, 동물로부터, 그러나 동물로서가 아니라 개가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동물로서의 동물)은 이미 존속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무언가 장차 우연적이지 않게 동물이 생성될 것이라면, 동물로부터 있을 것이 아니고, 또 만일 무언가 존재한다면(~이라면), 존재로부터가 아닐 것이다. 비존재로부터도 아니다. 왜냐하면 '비존재로부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비존재로서'라는 것을 우리가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존재나 비존재 모두 우리는 폐기하지 않았다.
διελόντες : διαιρέω aor. part.

  εἷς μὲν δὴ τρόπος οὗτος, ἄλλος δ' ὅτι ἐνδέχεται ταὐτὰ λέγειν κατὰ τὴν δύναμιν καὶ τὴν ἐνέργειαν· τοῦτο δ' ἐν ἄλλοις διώρισται δι' ἀκριβείας μᾶλλον. ὥσθ' (ὅπερ ἐλέγομεν) αἱ ἀπορίαι λύονται δι' ἃς ἀναγκαζόμενοι ἀναιροῦσι τῶν εἰρημένων ἔνια· διὰ γὰρ τοῦτο τοσοῦτον καὶ οἱ πρότερον ἐξετράπησαν τῆς ὁδοῦ τῆς ἐπὶ τὴν γένεσιν καὶ φθορὰν καὶ ὅλως μεταβολήν· αὕτη γὰρ ἂν ὀφθεῖσα ἡ φύσις ἅπασαν ἔλυσεν αὐτῶν τὴν ἄγνοιαν.
  그래서 한 가지 방식은 이러한 것이고, 다른 방식은 그러한 것들을 능력(잠재)과 발현(현실)에 따라서 논함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여타의 경우들에서 상당한 정확함을 통해 정의된다. 그래서(우리가 말했던 바로 그대로) 이야기된 것들 중 일부를 폐기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난점들이 해소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앞서의 사람들도 그 만큼이나 생성과 소멸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변화를 향한 그 길에서 이탈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것으로 관찰됨으로써 자연은 그들의 모든 무지 일반을 해소시켰다.

  Ἡμμένοι μὲν οὖν καὶ ἕτεροί τινές εἰσιν αὐτῆς, ἀλλ' οὐχ ἱκανῶς. πρῶτον μὲν γὰρ ὁμολογοῦσιν ἁπλῶς γίγνεσθαί τι ἐκ μὴ ὄντος, ᾗ Παρμενίδην ὀρθῶς λέγειν· εἶτα φαίνεται αὐτοῖς, εἴπερ ἐστὶν ἀριθμῷ μία, καὶ δυνάμει μία μόνον εἶναι. τοῦτο δὲ διαφέρει πλεῖστον. ἡμεῖς μὲν γὰρ ὕλην καὶ στέρησιν ἕτερόν φαμεν εἶναι, καὶ τούτων τὸ μὲν οὐκ ὂν εἶναι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τὴν ὕλην, τὴν δὲ στέρησιν καθ' αὑτήν, καὶ τὴν μὲν ἐγγὺς καὶ οὐσίαν πως, τὴν ὕλην, τὴν δὲ οὐδαμῶς· οἱ δὲ τὸ μὴ ὂν τὸ μέγα καὶ τὸ μικρὸν ὁμοίως, ἢ τὸ συναμφότερον ἢ τὸ χωρὶς ἑκάτερον. ὥστε παντελῶς ἕτερος ὁ τρόπος [Bekker page 192a, line 9] οὗτος τῆς τριάδος κἀκεῖνος. μέχρι μὲν γὰρ δεῦρο προῆλθον, ὅτι δεῖ τινὰ ὑποκεῖσθαι φύσιν, ταύτην μέντοι μίαν ποιοῦσιν· καὶ γὰρ εἴ τις δυάδα ποιεῖ, λέγων μέγα καὶ μικρὸν αὐτήν, οὐθὲν ἧττον ταὐτὸ ποιεῖ· τὴν γὰρ ἑτέραν παρεῖδεν. ἡ μὲν γὰρ ὑπομένουσα συναιτία τῇ μορφῇ τῶν γιγνομένων ἐστίν, ὥσπερ μήτηρ· ἡ δ' ἑτέρα μοῖρα τῆς ἐναντιώσεως πολλάκις ἂν φαντασθείη τῷ πρὸς τὸ κακοποιὸν αὐτῆς ἀτενίζοντι τὴν διάνοιαν οὐδ' εἶναι τὸ παράπαν. ὄντος γάρ τινος θείου καὶ ἀγαθοῦ καὶ ἐφετοῦ, τὸ μὲν ἐναντίον αὐτῷ φαμεν εἶναι, τὸ δὲ ὃ πέφυκεν ἐφίεσθαι καὶ ὀρέγεσθαι αὐτοῦ κατὰ τὴν αὑτοῦ φύσιν. τοῖς δὲ συμβαίνει τὸ ἐναντίον ὀρέγεσθαι τῆς αὑτοῦ φθορᾶς. καίτοι οὔτε αὐτὸ αὑτοῦ οἷόν τε ἐφίεσθαι τὸ εἶδος διὰ τὸ μὴ εἶναι ἐνδεές, οὔτε τὸ ἐναντίον (φθαρτικὰ γὰρ ἀλλήλων τὰ ἐναντία), ἀλλὰ τοῦτ' ἔστιν ἡ ὕλη, ὥσπερ ἂν εἰ θῆλυ ἄρρενος καὶ αἰσχρὸν καλοῦ· πλὴν οὐ καθ' αὑτὸ αἰσχρόν, ἀλλ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οὐδὲ θῆλυ, ἀλλὰ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그러므로 다른 어떨 이들도 그 길에 가 닿았지만, 충분치는 못했다. 왜냐하면 우선 그들은 단순히 비존재로부터 무언가 생성된다는 것을 동의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옳게 논한다는 측면에서. 다음으로 그들에게는, 만일 정녕 수적으로 하나가 존재한다면, 가능적으로도(잠재적으로도) 오직 하나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상당히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질료와 결핍이 다르다고 말하고, 이것들 중 한쪽은 우연적으로 비존재라고, 즉 질료가 그러한 반면, 결핍은 그 자체로 비존재라 말하며, 또한 어떤 식으로든 실체에 근접한 것을 질료라고, 그런데 결핍은 전혀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비존재를 큼 그리고 작음과 유사하게, 양자를 합쳐서든 그 둘 각각을 따로든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 방식은 저들의 그 셋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여기, 즉 무언가 본성이 기저에 놓여야 한다는 데에까지 이르렀지만, 이 본성을 하나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누군가 그 본성을 큼과 작음이라 말하면서 둘로 만든다 하더라도, 조금도 못지 않게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본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즉 기저에 놓인 본성은 생성되는 것들에 대해 형태와 공동원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처럼. 그런데 반대의 또 다른 몫은 그것의 악영향에 사유를 집중하는 자에게는 자주 전적으로 비존재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신적이고 선하며 바람직한 것이 존재할 때, 우리는 한쪽을 그것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본디 그 본성상 바랄 만하고 추구될 만한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반대로 그것의 소멸이 추구되는 일이 귀결한다. 그렇지만 형상 그 자체가 그 자신을 소위 바라는 일도 결핍이 결여된 것이라는 이유로 안 되고, 그 반대도 안 되며 (반대쌍은 서로 소멸시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질료가 그런 것이다. 만일 계집이 사내를 바라고 추함이 아름다움을 바란다면 그러할 것처럼. 그 자체로 추한 것을 제외하고, 우연적으로 추한 것이, 그리고 계집의 경우도, 오히려 우연적인 한에서.
Ἡμμένοι : ἅπτω pf. mp.
  φθείρεται δὲ καὶ γίγνεται ἔστι μὲν ὥς, ἔστι δ' ὡς οὔ. ὡς μὲν γὰρ τὸ ἐν ᾧ, καθ' αὑτὸ φθείρεται (τὸ γὰρ φθειρόμενον ἐν τούτῳ ἐστίν, ἡ στέρησις)· ὡς δὲ κατὰ δύναμιν, οὐ καθ' αὑτό, ἀλλ' ἄφθαρτον καὶ ἀγένητον ἀνάγκη αὐτὴν [Bekker page 192a, line 29] εἶναι. εἴτε γὰρ ἐγίγνετο, ὑποκεῖσθαί τι δεῖ πρῶτον ἐξ οὗ ἐνυπάρχοντος· τοῦτο δ' ἐστὶν αὐτὴ ἡ φύσις, ὥστ' ἔσται πρὶν γενέσθαι (λέγω γὰρ ὕλην τὸ πρῶτον ὑποκείμενον ἑκάστῳ, ἐξ οὗ γίγνεταί τι ἐνυπάρχοντος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εἴτε φθείρεται, εἰς τοῦτο ἀφίξεται ἔσχατον, ὥστε ἐφθαρμένη ἔσται πρὶν φθαρῆναι. περὶ δὲ τῆς κατὰ τὸ εἶδος ἀρχῆς, πότερον μία ἢ πολλαὶ καὶ τίς ἢ τίνες εἰσίν, δι' ἀκριβείας τῆς πρώτης φιλοσοφίας ἔργον ἐστὶν διορίσαι, ὥστ' εἰς ἐκεῖνον τὸν καιρὸν ἀποκείσθω. περὶ δὲ τῶν φυσικῶν καὶ φθαρτῶν εἰδῶν ἐν τοῖς ὕστερον δεικνυμένοις ἐροῦμεν. ὅτι μὲν οὖν εἰσὶν ἀρχαί, καὶ τίνες, καὶ πόσαι τὸν ἀριθμόν, διωρίσθω ἡμῖν οὕτως· πάλιν δ' ἄλλην ἀρχὴν ἀρξάμενοι λέγωμεν.
  그런데 <질료는> 한편으로는 소멸하고 생성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안에 포함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소멸하지만 (왜냐하면 소멸되는 것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결핍이), 가능적으로는, 그 자체로서 소멸하지 않고, 그것이 불생이자 불멸임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만일 생성된다면, 그것이 그로부터 나올 그리고 그것 안에 존속하는 무언가가 기저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본성 자체이다. 그래서 생성 이전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개물에 처음 기저에 놓이는 것, 그로부터 무언가 생성되고 그것 안에 부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존속하는 것을 질료라 말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소멸된다면, 궁극적으로 그것에 당도하고, 그래서 소멸 이전에 소멸되어 있을 것이다. 형상에 따른 원리에 관하여서는, 그것이 하나인지 여럿인지 또 무엇인지 혹은 무엇들인지 하는 문제는, 정확함을 통해(정밀하게)  정의하는 것은 제1 철학의 일이고, 그래서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자. 그런데 자연적이고 소멸하는 형상들에 관하여서는 우리가 이후의 설명에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므로 원리들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무엇들이냐는 것, 수적으로 얼만큼이냐는 것은, 그렇게 정의된 것으로 하자. 그럼 다시 여타의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논의해 보자.

-蟲-

Ὧδ' οὖν ἡμεῖς λέγωμεν πρῶτον περὶ πάσης γενέσεως ἐπελθόντες· ἔστι γὰρ κατὰ φύσιν τὰ κοινὰ πρῶτον εἰπόντας οὕτω τὰ περὶ ἕκαστον ἴδια θεωρεῖν. φαμὲν γὰρ γίγνεσθαι ἐξ ἄλλου ἄλλο καὶ ἐξ ἑτέρου ἕτερον ἢ τὰ ἁπλᾶ λέγοντες ἢ τὰ συγκείμενα. λέγω δὲ τοῦτο ὡδί. ἔστι γὰρ γίγνεσθαι ἄνθρωπον μουσικόν, ἔστι δὲ τὸ μὴ μουσικὸν γίγνεσθαι μουσικὸν ἢ τὸν μὴ μουσικὸν ἄνθρωπον ἄνθρωπον μουσικόν.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우선 생성 전체에 관하여 논의를 진행하면서 이런 식으로 진술해 보자. 왜냐하면 자연에 대해 공통된 것들을 우선 말하고 그런 식으로 각각에 관한 개별적인 것들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순한 것들을 논하면서든 혼합된 것들을 논하면서든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혹은 다른 것으로부터 또 다른 것이 (생긴다)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바로 이런 식으로 말한다. 즉 인간이 음악적이게 될 수 있는데, 음악적이지 않은 것이 음악적으로 될 수 있거나 음악적이지 않은 인간이 음악적이지 않은 인간이 음악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ἁπλοῦν μὲν οὖν λέγω τὸ γιγνόμενον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ὶ τὸ μὴ μουσικόν, καὶ ὃ γίγνεται ἁπλοῦν, τὸ μουσικόν· συγκείμενον δὲ καὶ ὃ γίγνεται καὶ τὸ γιγνόμενον, ὅταν τὸν μὴ μουσικὸν ἄνθρωπον φῶμεν γίγνεσθαι μουσικὸν ἄνθρωπον. τούτων δὲ τὸ μὲν οὐ μόνον λέγεται τόδε γίγνεσθαι ἀλλὰ καὶ ἐκ τοῦδε, οἷον ἐκ μὴ μουσικοῦ μουσικός, τὸ δ' οὐ λέγεται ἐπὶ πάντων· οὐ γὰρ ἐξ ἀνθρώπου ἐγένετο μουσικός, ἀλλ' ἅνθρωπος ἐγένετο μουσικός. 
그러니까 나는 되는 것으로서 인간과 음악적이지 않은 것을 단순한 것으로 진술하고, 또한 되어지는 결과, 음악적인 것도 단순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우리가 음악적이지 않은 인간이 음악적인 인간이 된다고 말할 때, 그 되어진 결과도 되는 것도 혼합된 것이라 진술한다. 이것들 중 한편은 여기 이것이 된다는 것만이 아니라 여기 이것으로부터 나온다고도 진술된다. 예를 들어 음악적이지 않은 것으로부터 음악적인 것으로. 반면 다른 쪽은 모든 경우들에 관하여 그렇게 진술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음악적이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음악적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τῶν δὲ γιγνομένων ὡς τὰ ἁπλᾶ λέγομεν γίγνεσθαι, τὸ μὲν ὑπομένον γίγνεται τὸ δ' οὐχ ὑπομένον· ὁ μὲν γὰρ ἄνθρωπος ὑπομένει μουσικὸς γιγνόμενος ἄνθρωπος καὶ ἔστι, τὸ δὲ μὴ μουσικὸν καὶ τὸ ἄμουσον οὔτε ἁπλῶς οὔτε συντεθειμένον [Bekker page 190a, line 13] ὑπομένει.
그런데 우리가 단순한 것들로서 된다고 말하는 되는 것들 중, 한편은 지속하는 것으로서 되는 반면 다른 쪽은 지속하지 않으면서 된다. 즉 인간은 음악적이게 되면서 인간으로 남고 또한 인간인 반면, 음악적이지 않은 것과 비음악적인 것은 단순하게도 복합적으로도 지속하지 않는다. 
διωρισμένων δὲ τούτων, ἐξ ἁπάντων τῶν γιγνομένων τοῦτο ἔστι λαβεῖν, ἐάν τις ἐπιβλέψῃ ὥσπερ λέγομεν, ὅτι δεῖ τι ἀεὶ ὑποκεῖσθα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καὶ τοῦτο εἰ καὶ ἀριθμῷ ἐστιν ἕν, ἀλλ' εἴδει γε οὐχ ἕν· τὸ γὰρ εἴδει λέγω καὶ λόγῳ ταὐτόν· οὐ γὰρ ταὐτὸν τὸ ἀνθρώπῳ καὶ τὸ ἀμούσῳ εἶναι. καὶ τὸ μὲν ὑπομένει, τὸ δ' οὐχ ὑπομένει· τὸ μὲν μὴ ἀντικείμενον ὑπομένει (ὁ γὰρ ἄνθρωπος ὑπομένει), τὸ μὴ μουσικὸν δὲ καὶ τὸ ἄμουσον οὐχ ὑπομένει, οὐδὲ τὸ ἐξ ἀμφοῖν συγκείμενον, οἷον ὁ ἄμουσος ἄνθρωπος. 
이것들이 정의될 때, 되는 것들 일체로부터 다음과 같은 점이 파악될 수 있다, 만일 누군가 우리가 말한 방식대로 주목한다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언제나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리고 만일 그 수가 하나이나, 종(형상)은 하나이지 않다면 그 경우에도. 즉 나는 종적으로라는 것을 정의상으로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논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점에서 있는 것과 비음악적이라는 점에서 있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한편은 지속하는 반면, 다른 한편은 지속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대립하지 않는 것은 지속하지만 (왜냐하면 인간이 지속하기 때문이다), 음악적이지 않은 것과 비음악적인 것은 지속하지 않고, 양자로 이루어진 복합물도, 이를 테면 비음악적인 인간도 지속하지 않는다.
τὸ δ' ἔκ τινος γίγνεσθαί τι, καὶ μὴ τόδε γίγνεσθαί τι, μᾶλλον μὲν λέγεται ἐπὶ τῶν μὴ ὑπομενόντων, οἷον ἐξ ἀμούσου μουσικὸν γίγνεσθαι, ἐξ ἀνθρώπου δὲ οὔ· οὐ μὴν ἀλλὰ καὶ ἐπὶ τῶν ὑπομενόντων ἐνίοτε λέγεται ὡσαύτως· ἐκ γὰρ χαλκοῦ ἀνδριάντα γίγνεσθαί φαμεν, οὐ τὸν χαλκὸν ἀνδριάντα. 
그런데 어떤 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어떤 것이 이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차라리 지속하지 않는 것들에 관하여서 진술된다는 것이며, 이를 테면 비음악적인 것으로부터 음악적으로 되지, 인간으로부터 그리 되지는 않는다. 
τὸ μέντοι ἐκ τοῦ ἀντικειμένου καὶ μὴ ὑπομένοντος ἀμφοτέρως λέγεται, καὶ ἐκ τοῦδε τόδε καὶ τόδε τόδε· καὶ γὰρ ἐξ ἀμούσου καὶ ὁ ἄμουσος γίγνεται μουσικός. διὸ καὶ ἐπὶ τοῦ συγκειμένου ὡσαύτως· καὶ γὰρ ἐξ ἀμούσου ἀνθρώπου καὶ ὁ ἄμουσος ἄνθρωπος γίγνεσθαι λέγεται μουσικός. 
그렇지만 대립되는 것이자 지속하지 않는 것으로부터는 양쪽 방식으로 진술된다, 이것으로부터 이것이 된다고도 이것이 이것이 된다고도. 왜냐하면 비음악적인 것으로부터도 비음악적인 자도 음악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복합적인 것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비음악적인 인간으로부터도 비음악적인 인간도 음악적이 된다고 진술되기 때문이다.
πολλαχῶς δὲ λεγομένου τοῦ γίγνεσθαι, καὶ τῶν μὲν οὐ γίγνεσθαι ἀλλὰ τόδε τι γίγνεσθαι, ἁπλῶς δὲ γίγνεσθαι [Bekker page 190a, line 33] τῶν οὐσιῶν μόνον, κατὰ μὲν τἆλλα φανερὸν ὅτι ἀνάγκη ὑποκεῖσθαί τ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καὶ γὰρ ποσὸν καὶ ποιὸν καὶ πρὸς ἕτερον [καὶ ποτὲ] καὶ ποὺ γίγνεται ὑποκειμένου τινὸς διὰ τὸ μόνην τὴν οὐσίαν μηθενὸς κατ' ἄλλου λέγεσθαι ὑποκειμένου, τὰ δ' ἄλλα πάντα κατὰ τῆς οὐσίας)· ὅτι δὲ καὶ αἱ οὐσίαι καὶ ὅσα [ἄλλα] ἁπλῶς ὄντα ἐξ ὑποκειμένου τινὸς γίγνεται, ἐπισκοποῦντι γένοιτο ἂν φανερόν. ἀεὶ γὰρ ἔστι ὃ ὑπόκειται, ἐξ οὗ τὸ γιγνόμενον, οἷον τὰ φυτὰ καὶ τὰ ζῷα ἐκ σπέρματος. 
된다는 것이 여러 가지로 진술될 때, 그것들 중 일부는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 무엇이 된다고, 반면 실체들의 경우에만 단적으로(단순하게) 된다고 진술될 때, 여타의 것들에 대해서는 되는 무언가가 지속함이 필연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왜냐하면 얼만큼이나 어떠함 그리고 다른 것에 관계함과 [언제] 어디에는, 오직 실체만이 여타의 그 어떤 지속하는 것에 대해서도 진술되지 않고,  반면 여타의 모든 것들은 실체에 대해 진술되기 때문에, 지속하는 무언가에 대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체들도 [여타의] 단순하게 ~인 것들 전부도 지속하는 무언가로부터 된다는 점은, 면밀히 고찰하는 자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지속되는 것, 그것으로부터 되는 것이 나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식물들과 동물들은 씨앗으로부터 나온다.

γίγνεται δὲ τὰ γιγνόμενα ἁπλῶς τὰ μὲν μετασχηματίσει, οἷον ἀνδριάς, τὰ δὲ προσθέσει, οἷον τὰ αὐξανόμενα, τὰ δ' ἀφαιρέσει, οἷον ἐκ τοῦ λίθου ὁ Ἑρμῆς, τὰ δὲ συνθέσει, οἷον οἰκία, τὰ δ' ἀλλοιώσει, οἷον τὰ τρεπόμενα κατὰ τὴν ὕλην. πάντα δὲ τὰ οὕτω γιγνόμενα φανερὸν ὅτι ἐξ ὑποκειμένων γίγνεται. 
그런데 단적으로 되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형태변화에서 되며, 예를 들어 조각상이 그러하고, 다른 것들은 추가에서 그리 된다, 예를 들어 증가하는 것들. 다른 것들은 분리에서 되고, 예를 들어 그 돌로부터 헤르메스가 되는 것, 다른 것들은 구성에서, 이를 테면 집들, 또 다른 것들은 변화에서, 예를 들어 질료에 따라 전환되는 것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되는 모든 것들은 지속하는 것들로부터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ὥστε δῆλον ἐκ τῶν εἰρημένων ὅτ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ἅπαν ἀεὶ συνθετόν ἐστι, καὶ ἔστι μέν τι γιγνόμενον, ἔστι δέ τι ὃ τοῦτο γίγνεται, καὶ τοῦτο διττόν· ἢ γὰρ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ἢ τὸ ἀντικείμενον. λέγω δὲ ἀντικεῖσθαι μὲν τὸ ἄμουσον, ὑποκεῖσθαι δὲ τὸν ἄνθρωπον, καὶ τὴν μὲν ἀσχημοσύνην καὶ τὴν ἀμορφίαν καὶ τὴν ἀταξίαν τὸ ἀντικείμενον, τὸν δὲ χαλκὸν ἢ τὸν λίθον ἢ τὸν χρυσὸν τὸ [Bekker page 190b, line 17] ὑποκείμενον.
그래서 이야기된 바들로부터 되는 것 일체는 언제나 결합된 것임이 분명하고, 무언가 되는 것이 있는 반면, 그것이 되어지는 무슨 결과가 있으며, 이것은 이중임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속하는 것이거나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비음악적인 것은 대립된다고, 인간은 지속한다고, 그리고 대립되는 것은 형태없음과 형상없음과 구조없음이라고, 지속하는 것은 청동이나 돌이나 황금이라고 말한다.
φανερὸν οὖν ὡς, εἴπερ εἰσὶν αἰτίαι καὶ ἀρχαὶ τῶν φύσει ὄντων, ἐξ ὧν πρώτων εἰσὶ καὶ γεγόνασι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ἀλλ' ἕκαστον ὃ λέγεται κατὰ τὴν οὐσίαν, ὅτι γίγνεται πᾶν ἔκ τε τοῦ ὑποκειμένου καὶ τῆς μορφῆς· σύγκειται γὰρ ὁ μουσικὸς ἄνθρωπος ἐξ ἀνθρώπου καὶ μουσικοῦ τρόπον τινά· διαλύσεις γὰρ [τοὺς λόγους] εἰς τοὺς λόγους τοὺς ἐκείνων. δῆλον οὖν ὡς γίγνοιτ' ἂν τὰ γιγνόμενα ἐκ τούτων. 
그러므로, 만일 자연상의 ~인 것들에 원인들과 원리들이 속한다면, 최초의 그것들로부터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실체에 대해 진술되는 것 각각이 있고 되는 것들이라면, 모든 것이 지속하는 것과 형태로부터 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음악적인 인간은 인간과 음악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복합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분할들이 저것들의 정의들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되는 것들이 이것들로부터 되리란 것이 분명하다.
ἔστι δὲ τὸ μὲν ὑποκείμενον ἀριθμῷ μὲν ἕν, εἴδει δὲ δύο (ὁ μὲν γὰρ ἄνθρωπος καὶ ὁ χρυσὸς καὶ ὅλως ἡ ὕλη ἀριθμητή· τόδε γάρ τι μᾶλλον, καὶ οὐ κατὰ συμβεβηκὸς ἐξ αὐτοῦ γίγνεται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ἡ δὲ στέρησις καὶ ἡ ἐναντίωσις συμβεβηκός)· ἓν δὲ τὸ εἶδος, οἷον ἡ τάξις ἢ ἡ μουσικὴ ἢ τῶν ἄλλων τι τῶν οὕτω κατηγορουμένων. 
그런데 지속하는 것은 수적으로 하나인 반면, 종적으로는 둘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황금과 일반적으로 질료는 가산적인데. 이것은 오히려 여기 이 무엇이고, 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우연적으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결핍과 반대는 우연적이다.) 그런데 종은 하나이다, 예를 들어 질서나 음악 혹은 그런 식으로 진술(범주화)되는 여타의 것들 중 어떤 것은.
διὸ ἔστι μὲν ὡς δύο λεκτέον εἶναι τὰς ἀρχάς, ἔστι δ' ὡς τρεῖς· καὶ ἔστι μὲν ὡς τἀναντία, οἷον εἴ τις λέγοι τὸ μουσικὸν καὶ τὸ ἄμουσον ἢ τὸ θερμὸν καὶ τὸ ψυχρὸν ἢ τὸ ἡρμοσμένον καὶ τὸ ἀνάρμοστον, ἔστι δ' ὡς οὔ· ὑπ' ἀλλήλων γὰρ πάσχειν τἀναντία ἀδύνατον. 
이런 이유로 한편으로 원리들은 둘이라고 논해져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 셋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반대라고, 예를 들어 만일 누군가 음악적인 것과 비음악적인 것 혹은 뜨거움과 차가움 또는 조화로운 것과 부조화한 것을 말한다면, 반면 그렇지 않다고 논해져야 하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원리들이 서로에 의해 반대를 겪는 일은 불가능하기 떄문이다.
λύεται δὲ καὶ τοῦτο διὰ τὸ ἄλλο εἶναι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τοῦτο γὰρ οὐκ ἐναντίον. ὥστε οὔτε πλείους τῶν ἐναντίων αἱ ἀρχαὶ τρόπον τινά, ἀλλὰ δύο ὡς εἰπεῖν τῷ ἀριθμῷ, οὔτ' αὖ παντελῶς δύο διὰ [Bekker page 191a, line 1] τὸ ἕτερον ὑπάρχειν τὸ εἶναι αὐτοῖς, ἀλλὰ τρεῖς· ἕτερον γὰρ τὸ ἀνθρώπῳ καὶ τὸ ἀμούσῳ εἶναι, καὶ τὸ ἀσχηματίστῳ καὶ χαλκῷ.
이것은 지속하는 것이 여타의 것이라는 점으로 인해 해소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반대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리들은 어떤 식으로 반대들보다 더 많지 아니하고, 오히려 말 그대로 수에 있어서 둘이며, 또한 실체는 원리들과 다른 것으로 현존한다는 점으로 인해 모든 식으로 둘은 아니고, 오히려 셋이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임과 비음악적인 것으로서 ~임이 다르고, 형태없음으로서 또한 청동으로서의 ~임도 다르기 때문이다.
πόσαι μὲν οὖν αἱ ἀρχαὶ τῶν περὶ γένεσιν φυσικῶν, καὶ πῶς ποσαί, εἴρηται· καὶ δῆλόν ἐστιν ὅτι δεῖ ὑποκεῖσθαί τι τοῖς ἐναντίοις καὶ τἀναντία δύο εἶναι. τρόπον δέ τινα ἄλλον οὐκ ἀναγκαῖον· ἱκανὸν γὰρ ἔσται τὸ ἕτερον τῶν ἐναντίων ποιεῖν τῇ ἀπουσίᾳ καὶ παρουσίᾳ τὴν μεταβολήν.
그러므로 생성에 관련한 자연적인 것들의 원리들이 얼만큼의 것들인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얼만큼의 것들인지, 이야기되었다. 또한 무언가 그 반대들 아래에 지속해야 하며 반대가 둘이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떤 다른 방식으로는 필연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반대들 중 어느 한쪽이 부재와 현존으로써 변화를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ἡ 
δὲ ὑποκειμένη φύσις ἐπιστητὴ κατ' ἀναλογίαν. ὡς γὰρ πρὸς ἀνδριάντα χαλκὸς ἢ πρὸς κλίνην ξύλον ἢ πρὸς τῶν ἄλλων τι τῶν ἐχόντων μορφὴν [ἡ ὕλη καὶ] τὸ ἄμορφον ἔχει πρὶν λαβεῖν τὴν μορφήν, οὕτως αὕτη πρὸς οὐσίαν ἔχει καὶ τὸ τόδε τι καὶ τὸ ὄν. μία μὲν οὖν ἀρχὴ αὕτη, οὐχ οὕτω μία οὖσα οὐδὲ οὕτως ὂν ὡς τὸ τόδε τι, μία δὲ ἧς ὁ λόγος, ἔτι δὲ τὸ ἐναντίον τούτῳ, ἡ στέρησις.
그런데 지속하는 본성은 유비에 따른 인식적 문제이다. 왜냐하면 조각상에 대해 청동이나 침대에 대해 목재 혹은 형태를 갖추고 있는 여타의 것들 중 무언가에 대해 [질료와] 비형태적인 것을 형태를 취하기에 앞서 지니는 식으로, 실체와 여기 이 무엇 그리고 to on에 대해 여기 이 무엇도 그러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하나의 원리는 이것이다, 여기 이 무언가가 하나이고 ~인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하나이진 않지만, 다른 한 원리는 그것에 정의가 속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것에 반대인 것, 결핍이 있다.
ταῦτα δὲ πῶς δύο καὶ πῶς 
πλείω, εἴρηται ἐν τοῖς ἄνω. πρῶτον μὲν οὖν ἐλέχθη ὅτι ἀρχαὶ τἀναντία μόνον, ὕστερον δ' ὅτι ἀνάγκη καὶ ἄλλο τι ὑποκεῖσθαι καὶ εἶναι τρία· ἐκ δὲ τῶν νῦν φανερὸν τίς ἡ διαφορὰ τῶν ἐναντίων, καὶ πῶς ἔχουσιν αἱ ἀρχαὶ πρὸς ἀλλήλας, καὶ τί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πότερον δὲ οὐσία τὸ εἶδος ἢ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οὔπω δῆλον. ἀλλ' ὅτι αἱ ἀρχαὶ τρεῖς [Bekker page 191a, line 21] καὶ πῶς τρεῖς, καὶ τίς ὁ τρόπος αὐτῶν, δῆλον. πόσαι μὲν οὖν καὶ τίνες εἰσὶν αἱ ἀρχαί, ἐκ τούτων θεωρείσθωσαν.
이것들이 어떤 식으로는 둘이고 또한 어떤 식으로는 더 많은지, 위에서 이야기되었다. 그러므로 먼저 원리들이 반대라는 것만이 진술되었고, 다음으로 여타의 무언가가 지속함이 필연적이며 그래서 셋이라는 것이 진술되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로부터 이제 반대들의 차이가 무엇인지, 또한 원리들이 상호관계에서 어떠한지, 또한 지속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분명하다. 그런데 형상이 실체인지 지속하는 것이 실체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원리들이 셋이라는 것과 어떤 식으로 셋인지, 또한 그것들의 방식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그러므로 원리들이 얼만큼의 어떠한 것들인지, 이러한 것들을 통해 관찰되었다.

-蟲-

Πάντες δὴ τἀναντία ἀρχὰς ποιοῦσιν οἵ τε λέγοντες ὅτι ἓν τὸ πᾶν καὶ μὴ κινούμενον (καὶ γὰρ Παρμενίδης θερμὸν καὶ ψυχρὸν ἀρχὰς ποιεῖ, ταῦτα δὲ προσαγορεύει πῦρ καὶ γῆν) καὶ οἱ μανὸν καὶ πυκνόν, καὶ Δημόκριτος τὸ πλῆρες καὶ κενόν, ὧν τὸ μὲν ὡς ὂν τὸ δὲ ὡς οὐκ ὂν εἶναί φησιν· ἔτι θέσει, σχήματι, τάξει.
그래서 모든 이들이 반대를 원리들로 만드는데 모든 것이 하나이며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도 (파르메니데스도 뜨거움과 차가움을 원리들로 만들고, 이것들을 불과 흙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희박함과 조밀함을 말하는 자들도 그러하며, 데모크리토스도 충족과 허공을, 그것들 중 하나는 ~인 것으로서 다른 쪽은 ~이지 않은 것으로서 ~이라고 말한다. 더욱이 그는 위치, 형태, 배열을 사용한다.
ταῦτα δὲ γένη ἐναντίων· θέσεως ἄνω κάτω, πρόσθεν ὄπισθεν, σχήματος γεγωνιωμένον ἀγώνιον, εὐθὺ περιφερές. ὅτι μὲν οὖν τἀναντία πως πάντες ποιοῦσι τὰς ἀρχάς, δῆλον. καὶ τοῦτο εὐλόγως· δεῖ γὰρ τὰς ἀρχὰς μήτε ἐξ ἀλλήλων εἶναι μήτε ἐξ ἄλλων, καὶ ἐκ τούτων πάντα· τοῖς δὲ ἐναντίοις τοῖς πρώτοις ὑπάρχει ταῦτα, διὰ μὲν τὸ πρῶτα εἶναι μὴ ἐξ ἄλλων, διὰ δὲ τὸ ἐναντία μὴ ἐξ ἀλλήλων.
그런데 이런 것들은 반대들의 유들이다. 위치에는 위와 아래, 앞과 뒤, 형태에는 각짐과 각지지 않음, 곧음과 휨이 속한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원리들을 반대들로 만든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역시 훌륭한 진술이다. 즉 원리들은 서로를 통한 것이어서도 아니되고 여타의 것들을 통한 것이어서도 아니 되며, 그 원리들로부터 모든 것들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최초의 반대되는 것들에게 가능하다, 한편으로 최초의 것은 여타의 것들을 통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점으로 인해, 다른 한편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를 통하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점으로 인해서.
γεγωνιωμένον : γωνιόομαι pf. pass. part. become angular.

ἀλλὰ δεῖ τοῦτο καὶ ἐπὶ τοῦ λόγου σκέψασθαι πῶς συμβαίνει. ληπτέον δὴ πρῶτον ὅτι πάντων τῶν ὄντων οὐθὲν οὔτε ποιεῖν πέφυκεν οὔτε πάσχειν τὸ τυχὸν ὑπὸ τοῦ τυχόντος, οὐδὲ γίγνεται ὁτιοῦν ἐξ ὁτουοῦν, ἂν μή τις λαμβάνῃ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Bekker page 188a, line 35] πῶς γὰρ ἂν γένοιτο λευκὸν ἐκ μουσικοῦ, πλὴν εἰ μὴ συμβεβηκὸς εἴη τῷ μὴ λευκῷ ἢ τῷ μέλανι τὸ μουσικόν; ἀλλὰ λευκὸν μὲν γίγνεται ἐξ οὐ λευκοῦ, καὶ τούτου οὐκ ἐκ παντὸς ἀλλ' ἐκ μέλανος ἢ τῶν μεταξύ, καὶ μουσικὸν οὐκ ἐκ μουσικοῦ, πλὴν οὐκ ἐκ παντὸς ἀλλ' ἐξ ἀμούσου ἢ εἴ τι αὐτῶν ἐστι μεταξύ.
허나 이것이 논증상으로도 어찌 귀결되는지 검토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선 모든 ~인 것들 중 아무것도 우연적인 것에 의해 우연적인 것을 본디 작용하지도 작용받지도 아니하며, 어떤 것으로부터든 어떤 것이든지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을 다루어야 한다, 누군가 부수적 속서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야 어떻게 음악적인 것으로부터 흰 것이 생길 수 있겠는가, 희지 않은 것이나 검은 것에 음악적인 것이 우연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허나 흰 것은 희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검은 것이나 그것들의 중간 것들로부터 생겨나며, 음악적인 것도 음악적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모든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음악적이지 않거나 그것들의 이를 테면 중간 것이 뭔가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πλὴν εἰ μὴ : πλὴν joined with other Particles.
οὐδὲ δὴ φθείρεται εἰς τὸ τυχὸν πρῶτον, οἷον τὸ λευκὸν οὐκ εἰς τὸ μουσικόν, πλὴν εἰ μή ποτε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ἀλλ' εἰς τὸ μὴ λευκόν, καὶ οὐκ εἰς τὸ τυχὸν ἀλλ' εἰς τὸ μέλαν ἢ τὸ μεταξύ· ὡς δ' αὔτως καὶ τὸ μουσικὸν εἰς τὸ μὴ μουσικόν, καὶ τοῦτο οὐκ εἰς τὸ τυχὸν ἀλλ' εἰς τὸ ἄμουσον ἢ εἴ τι αὐτῶν ἐστι μεταξύ.
그래서 최초의 것은 우연적인 것으로 소멸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흰 것은 음악적인 것으로 소멸되지 않는다, 어쨌든 부수적으로 그러하지 않다면, 오히려 희지 않은 것으로 소멸하며, 우연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검은 것이나 중간 것으로 소멸한다: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음악적인 것도 음악적이지 않은 것으로 소멸하고, 또한 이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비음악적인 것이나 그것들의 뭔가 중간이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으로 소멸한다.
ὁμοίως δὲ τοῦτο καὶ ἐπὶ τῶν ἄλλων, ἐπεὶ καὶ τὰ μὴ ἁπλᾶ τῶν ὄντων ἀλλὰ σύνθετα κατὰ τὸν αὐτὸν ἔχει λόγον· ἀλλὰ διὰ τὸ μὴ τὰς ἀντικειμένας διαθέσεις ὠνομάσθαι λανθάνει τοῦτο συμβαῖνον. ἀνάγκη γὰρ πᾶν τὸ ἡρμοσμένον ἐξ ἀναρμόστου γίγνεσθαι καὶ τὸ ἀνάρμοστον ἐξ ἡρμοσμένου, καὶ φθείρεσθαι τὸ ἡρμοσμένον εἰς ἀναρμοστίαν, καὶ ταύτην οὐ τὴν τυχοῦσαν ἀλλὰ τὴν ἀντικειμένην.
이것은 여타의 것들에 관하여서도 마찬가지인데, ~인 것들 중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것들도 같은 방식의 설명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주 놓인(대응되는) 상태들이 명명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인해 이러한 귀결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조화롭지 않은 것으로부터 조화를 이룬 모든 것이 생겨나고 또한 조화를 이룬 것으로부터 조화롭지 않은 것이 생겨나며, 조화를 이룬 것이 조화롭지 않은 것으로 소멸한다는 것이 필연적이며, 이러한 부조화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마주 놓인 부조화이기 때문이다.
διαφέρει δ' οὐθὲν ἐπὶ ἁρμονίας εἰπεῖν ἢ τάξεως ἢ συνθέσεως· φανερὸν γὰρ ὅτι ὁ αὐτὸς λόγος. ἀλλὰ μὴν καὶ οἰκία καὶ ἀνδριὰς καὶ ὁτιοῦν ἄλλο γίγνεται ὁμοίως· ἥ τε γὰρ οἰκία γίγνεται ἐκ τοῦ μὴ συγκεῖσθαι ἀλλὰ [Bekker page 188b, line 19] διῃρῆσθαι ταδὶ ὡδί, καὶ ὁ ἀνδριὰς καὶ τῶν ἐσχηματισμένων τι ἐξ ἀσχημοσύνης· καὶ ἕκαστον τούτων τὰ μὲν τάξις, τὰ δὲ σύνθεσίς τίς ἐστιν.
그런데 부조화에 관련하여서든 배열에 관련해서든 결합에 관하여서든 말하는 데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 왜냐하면 동일한 논변이 (성립함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허나 물론 집도 남성상도 다른 무엇이든 마찬가지로 생겨난다. 집 역시도 함께 놓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분해된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남성상도 형태를 갖춘 것들 중 무엇이든 형태 없는 것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것들 각각이 어떤 것들은 배열이고, 또 다른 것들은 결합이다.
εἰ τοίνυν τοῦτ' ἔστιν ἀληθές, ἅπαν ἂν γίγνοιτο τὸ γιγνόμενον καὶ φθείροιτο τὸ φθειρόμενον ἢ ἐξ ἐναντίων ἢ εἰς ἐναντία καὶ τὰ τούτων μεταξύ. τὰ δὲ μεταξὺ ἐκ τῶν ἐναντίων ἐστίν, οἷον χρώματα ἐκ λευκοῦ καὶ μέλανος· ὥστε πάντ' ἂν εἴη τὰ φύσει γιγνόμενα ἢ ἐναντία ἢ ἐξ ἐναντίων.
따라서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생겨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반대되는 것들을 통해 생겨나거나 반대되는 그리고 그것들의 중간인 것으로 소멸되거나 할 것이다. 그런데 중간인 것은 반대되는 것들로부터의 것이다, 이를 테면 흼과 검음으로부터 색이 있듯. 그래서 본성상(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들은 모두 반대되는 것들이거나 반대되는 것들로부터의 것들일 것이다.

μέχρι μὲν οὖν ἐπὶ τοσοῦτον σχεδὸν συνηκολουθήκασι καὶ τῶν ἄλλων οἱ πλεῖστοι, καθάπερ εἴπομεν πρότερον· πάντες γὰρ τὰ στοιχεῖα καὶ τὰς ὑπ' αὐτῶν καλουμένας ἀρχάς, καίπερ ἄνευ λόγου τιθέντες, ὅμως τἀναντία λέγουσιν, ὥσπερ ὑπ' αὐτῆς τῆς ἀληθείας ἀναγκασθέντες.
그러므로 여타의 사람들 대다수도 거의 이 만큼까지는 따라왔다, 우리가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원소들과 그들에 의해 원리들이라 불리는 것들을, 비록 설명(논증) 없이 내세우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되는 것들로 논하기 때문이다, 바로 진리에 의해 강제받은 것마냥.
διαφέρουσι δ' ἀλλήλων τῷ τοὺς μὲν πρότερα τοὺς δ' ὕστερα λαμβάνειν, καὶ τοὺς μὲν γνωριμώτερα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τοὺς δὲ κατὰ τὴν αἴσθησιν (οἱ μὲν γὰρ θερμὸν καὶ ψυχρόν, οἱ δ' ὑγρὸν καὶ ξηρόν, ἕτεροι δὲ περιττὸν καὶ ἄρτιον ἢ νεῖκος καὶ φιλίαν αἰτίας τίθενται τῆς γενέσεως· ταῦτα δ' ἀλλήλων διαφέρει κατὰ τὸν εἰρημένον τρόπον), ὥστε ταὐτὰ λέγειν πως καὶ ἕτερα ἀλλήλων, ἕτερα μὲν ὥσπερ καὶ δοκεῖ τοῖς πλείστοις, ταὐτὰ [Bekker page 189a, line 1] δὲ ᾗ ἀνάλογον· λαμβάνουσι γὰρ ἐκ τῆς αὐτῆς συστοιχίας· τὰ μὲν γὰρ περιέχει, τὰ δὲ περιέχεται τῶν ἐναντίων.
그런데 그들은 서로 다르다. 어떤 이들은 (반대들을) 더 앞선 것들로 간주하고 다른 이들은 더 나중 것들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떤 이들은 진술에 따라 더욱 잘 알려지는 것들로 그리 하고 다른 이들은 감각에 따라 그리 한다는 점에서(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온과 냉을, 또 다른 이들은 습과 건을, 다른 이들은 홀과 짝이나 불화와 친애를 생성의 원인들로 세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앞서-언급된 방식으로 서로 다르다), 그래서 같은 것들이자 서로 다른 것들로 논해지도록 한다는 점에서, 대다수에게 믿어지기도 하듯 그런 식으로 다른 것들인 반면, 유비인 한에서는 같은 것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목록표로부터 취하기 때문이다. 반대되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은 포함하고, 어떤 것들은 포함되기 때문이다.
ταύτῃ τε δὴ ὡσαύτως λέγουσι καὶ ἑτέρως, καὶ χεῖρον καὶ βέλτιον, καὶ οἱ μὲν γνωριμώτερα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ὥσπερ εἴρηται πρότερον, οἱ δὲ κατὰ τὴν αἴσθησιν (τὸ μὲν γὰρ καθόλου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γνώριμον, τὸ δὲ καθ' ἕκαστον κατὰ τὴν αἴσθησιν· ὁ μὲν γὰρ λόγος τοῦ καθόλου, ἡ δ' αἴσθησις τοῦ κατὰ μέρος), οἷον τὸ μὲν μέγα καὶ τὸ μικρὸν κατὰ τὸν λόγον, τὸ δὲ μανὸν καὶ τὸ πυκνὸν κατὰ τὴν αἴσθησιν. ὅτι μὲν οὖν ἐναντίας δεῖ τὰς ἀρχὰς εἶναι, φανερόν.
그래서 이러한 점에서 그들이 같은 식으로도 다른 식으로도 논하며, 더 못하게도 더 낫게도 논하고, 어떤 이들은 진술에 따라 더 잘 알려지는 것들로, 앞서 언급된 그대로 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감각에 따라서 그렇다고 말하는데(왜냐하면 일반적인 것은 진술에 따라 알려지는 것인 반면, 개별적인 것은 감각에 따라 그러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술은 일반적인 것에 속하고, 감각은 부분적인 것에 속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큼과 작음은 진술에 따라, 그런데 희박과 조밀은 감각에 따라 그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원리들이 반대들이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Ἐχόμενον δ' ἂν εἴη λέγειν πότερον δύο ἢ τρεῖς ἢ πλείους εἰσίν. μίαν μὲν γὰρ οὐχ οἷόν τε, ὅτι οὐχ ἓν τὰ ἐναντία, ἀπείρους δ', ὅτι οὐκ ἐπιστητὸν τὸ ὂν ἔσται, μία τε ἐναντίωσις ἐν παντὶ γένει ἑνί, ἡ δ' οὐσία ἕν τι γένος, καὶ ὅτι ἐνδέχεται ἐκ πεπερασμένων, βέλτιον δ' ἐκ πεπερασμένων, ὥσπερ Ἐμπεδοκλῆς, ἢ ἐξ ἀπείρων· πάντα γὰρ ἀποδιδόναι οἴεται ὅσαπερ Ἀναξαγόρας ἐκ τῶν ἀπείρων. ἔτι δὲ ἔστιν ἄλλα ἄλλων πρότερα ἐναντία, καὶ γίγνεται ἕτερα ἐξ ἀλλήλων, οἷον γλυκὺ καὶ πικρὸν καὶ λευκὸν καὶ μέλαν, τὰς δὲ ἀρχὰς ἀεὶ δεῖ μένειν.
다음으로 논의될 것은 둘인가 셋인가 혹은 여럿인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인데, 반대되는 것들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 무한한 것들일 수도 없는데, ~인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유 하나마다에 하나의 반대가 속하고, 본질(실체, 존재)은 무언가 하나의 유이기 때문이고, 한정된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한 바, 엠페도클레스가 말하듯 한정된 것들로부터 나온 것이 무한정한 것들로부터 나온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아낙사고라스가 무한정한 것들로부터 내놓는 그 만큼의 모든 것들을 (엠페도클레스가) 내놓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떤 반대들은 여타의 반대들보다 더 앞선 것들이고, 서로로부터 다른 것들이 생겨나는데, 예를 들어 달콤함과 씀 그리고 흼과 검음이 생겨나고, 그런데 그 원리들은 언제나 남아야 한다.

ὅτι μὲν οὖν οὔτε μία οὔτε ἄπειροι, δῆλον ἐκ τούτων· [Bekker page 189a, line 21] ἐπεὶ δὲ πεπερασμέναι, τὸ μὴ ποιεῖν δύο μόνον ἔχει τινὰ λόγον· ἀπορήσειε γὰρ ἄν τις πῶς ἢ ἡ πυκνότης τὴν μανότητα ποιεῖν τι πέφυκεν ἢ αὕτη τὴν πυκνότητα. ὁμοίως δὲ καὶ ἄλλη ὁποιαοῦν ἐναντιότης· οὐ γὰρ ἡ φιλία τὸ νεῖκος συνάγει καὶ ποιεῖ τι ἐξ αὐτοῦ, οὐδὲ τὸ νεῖκος ἐξ ἐκείνης, ἀλλ' ἄμφω ἕτερόν τι τρίτον.
그러므로 (반대들 or 원리들) 하나도 무한정한 것들도 아니라는 것은, 이상의 것들로부터 분명하다. 그런데 한정된 것들일 경우, 단지 둘만 만들지는 않는다는 어떤 논변이 있다. 왜냐하면 누군가 어떻게 조밀함이 희박함을 본성상 만드는지 혹은 그 희박함이 조밀함을 만드는지 질문 받는다면 당황할 터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되었든 여타의 반대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사랑이 갈등을 함께 이끌고 그로부터 무언가 만드는 것도 아니고, 갈등이 저 사랑으로부터 그러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와 다른 세 번째의 뭔가를 그리 한다.
ἔνιοι δὲ καὶ πλείω λαμβάνουσιν ἐξ ὧν κατασκευάζουσι τὴν τῶν ὄντων φύσιν. πρὸς δὲ τούτοις ἔτι κἂν τόδε τις ἀπορήσειεν, εἰ μή τις ἑτέραν ὑποθήσει τοῖς ἐναντίοις φύσιν· οὐθενὸς γὰρ ὁρῶμεν τῶν ὄντων οὐσίαν τἀναντία, τὴν δ' ἀρχὴν οὐ καθ' ὑποκειμένου δεῖ λέγεσθαί τινος. ἔσται γὰρ ἀρχὴ τῆς ἀρχῆς· τὸ γὰρ ὑποκείμενον ἀρχή, καὶ πρότερον δοκεῖ τοῦ κατηγορουμένου εἶναι.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로부터 ~인 것들의 본성(자연)을 만들어내는 더 많은 것들도 취한다. 이런 것들에 더하여 더욱이 누군가 이 점에 당황할 것이다, 만일 누군가 또 다른 본성을 반대들에 가정하지 않는다면. 왜냐하면 우리는 ~인 것들 중 아무것에 대해서도 본질을 반대로 보지 않고, 그런데 원리는 무언가 아래에 놓인 것에 대해 진술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원리의 원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래에 놓인 것이 원리이고, 진술되는 것보다 더 앞선 것이라고까지 여겨지기 때문이다.
ἔτι οὐκ εἶναί φαμεν οὐσίαν ἐναντίαν οὐσίᾳ· πῶς οὖν ἐκ μὴ οὐσιῶν οὐσία ἂν εἴη; ἢ πῶς ἂν πρότερον μὴ οὐσία οὐσίας εἴη; διόπερ εἴ τις τόν τε πρότερον ἀληθῆ νομίσειεν εἶναι λόγον καὶ τοῦτον, ἀναγκαῖον, εἰ μέλλει διασώσειν ἀμφοτέρους αὐτούς, ὑποτιθέναι τι τρίτον, ὥσπερ φασὶν οἱ μίαν τινὰ φύσιν εἶναι λέγοντες τὸ πᾶν, οἷον ὕδωρ ἢ πῦρ ἢ τὸ μεταξὺ τούτων.
더욱이 우리는 본질이 본질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본질 아닌 것들로부터 본질이 있겠는가? 혹은 어떻게 본질 아닌 것이 본질보다 더 앞서겠는가? 이런 이유로 만일 누군가 더 앞선 논변과 이 논변을 참이라고 생각한다면, 필연적이다, 만일 장차 그 양 논변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어떤 세 번째 것을 가정한다는 것이, 모든 것을 어떤 하나의 본성이라 논하는 자들이 말하듯, 예를 들어 물이나 불이나 이것들의 중간을 말하는 자들이 말하듯.
δοκεῖ δὲ τὸ μεταξὺ μᾶλλον· πῦρ γὰρ ἤδη καὶ γῆ καὶ ἀὴρ καὶ ὕδωρ μετ' ἐναντιοτήτων συμπεπλεγμένα ἐστίν. διὸ καὶ οὐκ ἀλόγως ποιοῦσιν οἱ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ἕτερον τούτων ποιοῦντες, τῶν δ' ἄλλων οἱ ἀέρα· [Bekker page 189b, line 7] καὶ γὰρ ὁ ἀὴρ ἥκιστα ἔχει τῶν ἄλλων διαφορὰς αἰσθητάς· ἐχόμενον δὲ τὸ ὕδωρ.
그런데 중간이라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이미 불과 흙과 공기와 물은 반대들과 함께 엮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아래에 놓이는 것을 이것들과 다른 것으로 만드는 자들은 비논리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다른 자들 중에서는 공기로 만드는 자들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공기가 다른 것들에 비해 가장 적은 감각적 차이들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물이 취해지는 것이다.
ἀλλὰ πάντες γε τὸ ἓν τοῦτο τοῖς ἐναντίοις σχηματίζουσιν, πυκνότητι καὶ μανότητι καὶ τῷ μᾶλλον καὶ ἧττον. ταῦτα δ' ἐστὶν ὅλως ὑπεροχὴ δηλονότι καὶ ἔλλειψις, ὥσπερ εἴρηται πρότερον. καὶ ἔοικε παλαιὰ εἶναι καὶ αὕτη ἡ δόξα, ὅτι τὸ ἓν καὶ ὑπεροχὴ καὶ ἔλλειψις ἀρχαὶ τῶν ὄντων εἰσί, πλὴν οὐ τὸν αὐτὸν τρόπον, ἀλλ' οἱ μὲν ἀρχαῖοι τὰ δύο μὲν ποιεῖν τὸ δὲ ἓν πάσχειν, τῶν δ' ὑστέρων τινὲς τοὐναντίον τὸ μὲν ἓν ποιεῖν τὰ δὲ δύο πάσχειν φασὶ μᾶλλον.
허나 적어도 그들 모두 이런 한 가지 것을 반대되는 것들로써 형성한다, 조밀함과 희박함 그리고 더함과 덜함으로. 그런데 이런 것들은 전반적으로 초과와 결핍임이 분명하다, 앞서 이야기되었듯이. 그리고 동일한 믿음이 고대의 것들인 것도 같다. 하나 그리고 초과와 결핍이 ~인 것들의 원리들이라는 믿음이, 같은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고. 그러나 어떤 원리들은 둘은 능동적이고 하나는 수동적인데, 후대인들 중 어떤 이들은 오히려 반대로 하나는 능동적인 반면 둘은 수동적이라고 말한다.

τὸ μὲν οὖν τρία φάσκειν τὰ στοιχεῖα εἶναι ἔκ τε τούτων καὶ ἐκ τοιούτων ἄλλων ἐπισκοποῦσι δόξειεν ἂν ἔχειν τινὰ λόγον, ὥσπερ εἴπομεν, τὸ δὲ πλείω τριῶν οὐκέτι· πρὸς μὲν γὰρ τὸ πάσχειν ἱκανὸν τὸ ἕν, εἰ δὲ τεττάρων ὄντων δύο ἔσονται ἐναντιώσεις, δεήσει χωρὶς ἑκατέρᾳ ὑπάρχειν ἑτέραν τινὰ μεταξὺ φύσιν· εἰ δ' ἐξ ἀλλήλων δύνανται γεννᾶν δύο οὖσαι, περίεργος ἂν ἡ ἑτέρα τῶν ἐναντιώσεων εἴη.
그러므로 원소들이 셋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논변들과 이와 같은 여타의 논변들을 통해 살펴본 사람들에게 무언가 논리를 갖춘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가 말했듯, 그런데 더 이상 셋 보다 더 많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수동적인 것을 위해 하나면 충분한데, 만일 넷임으로써 반대들이 둘이라면, 둘 각각과 따로 또 다른 무언가 중간 본성이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두 반대들이 서로를 통해 산출할 수 있다면, 그 반대들과 다른 본성은 부산물일 것이다.
ἅμα δὲ καὶ ἀδύνατον πλείους εἶναι ἐναντιώσεις τὰς πρώτας. ἡ γὰρ οὐσία ἕν τι γένος ἐστὶ τοῦ ὄντος, ὥστε τῷ πρότερον καὶ ὕστερον διοίσουσιν ἀλλήλων αἱ ἀρχαὶ μόνον, ἀλλ' οὐ τῷ γένει· ἀεὶ γὰρ ἐν ἑνὶ γένει μία ἐναντίωσις ἔστιν, πᾶσαί τε αἱ ἐναντιώσεις [Bekker page 189b, line 27] ἀνάγεσθαι δοκοῦσιν εἰς μίαν. ὅτι μὲν οὖν οὔτε ἓν τὸ στοιχεῖον οὔτε πλείω δυοῖν ἢ τριῶν, φανερόν· τούτων δὲ πότερον, καθάπερ εἴπομεν, ἀπορίαν ἔχει πολλήν.
동시에 최초의 반대들이 다수이기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 것의 본질은 어떤 하나의 유이고, 그래서 원리들은 서로 선후로 다를 뿐일 것이고, 유에서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의 유에 하나의 반대만이 있고, 모든 반대되는 것들 또한 하나의 반대로 수렴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소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셋보다 많은 것도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것들 중 전자가, 우리가 말했듯, 더 많은 난점을 지닌다.

-蟲-

Τόν τε δὴ τρόπον τοῦτον ἐπιοῦσιν ἀδύνατον φαίνεται τὰ ὄντα ἓν εἶναι, καὶ ἐξ ὧν ἐπιδεικνύουσι, λύειν οὐ χαλεπόν.
그래서 이와 같은 방식에서 접근하는 자들에게는 존재하는 것들이 하나이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더욱이 그들이 증명하면서 근거 삼는 것들도, 논박하기 어렵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ἀμφότεροι γὰρ ἐριστικῶς συλλογίζονται, καὶ Μέλισσος καὶ Παρμενίδης [καὶ γὰρ ψευδῆ λαμβάνουσι καὶ ἀσυλλόγιστοί εἰσιν αὐτῶν οἱ λόγοι· μᾶλλον δ' ὁ Μελίσσου φορτικὸς καὶ οὐκ ἔχων ἀπορίαν, ἀλλ' ἑνὸς ἀτόπου δοθέντος τἆλλα συμβαίνει· τοῦτο δ' οὐθὲν χαλεπόν].
왜냐하면 멜리소스도 파르메니데스도, 양자 모두 쟁론적으로 논증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논변들이 비논증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멜리소스의 논변이 훨씬 더 천박하고 난점은 지니지 않으나, 이상한 한 가지가 전제되어 다른 것들이 귀결한다. 그런데 이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ὅτι μὲν οὖν παραλογίζεται Μέλισσος, δῆλον· οἴεται γὰρ εἰληφέναι, εἰ τὸ γενόμενον ἔχει ἀρχὴν ἅπαν, ὅτι καὶ τὸ μὴ γενόμενον οὐκ ἔχει.
그러므로 멜리소스가 오류추리를 범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생성되는 모든 것이 기원을 지닌다면, 생성되지 않는 것 또한 기원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취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εἶτα καὶ τοῦτο ἄτοπον, τὸ παντὸς εἶναι ἀρχήν - τοῦ πράγματος καὶ μὴ τοῦ χρόνου, καὶ γενέσεως μὴ τῆς ἁπλῆς ἀλλὰ καὶ ἀλλοιώσεως, ὥσπερ οὐκ ἀθρόας γιγνομένης [Bekker page 186a, line 16] μεταβολῆς.
다음으로 이 점 또한, 즉 모든 것의 기원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다 - 사물의 기원이 있고 시간의 기원은 없으며, 또한 단순한 생성의 기원이 아니라 변화하는 생성(~됨)의 기원이 있다, 변화가 총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ἔπειτα διὰ τί ἀκίνητον, εἰ ἕν; ὥσπερ γὰρ καὶ τὸ μέρος ἓν ὄν, τοδὶ τὸ ὕδωρ, κινεῖται ἐν ἑαυτῷ, διὰ τί οὐ καὶ τὸ πᾶν; ἔπειτα ἀλλοίωσις διὰ τί οὐκ ἂν εἴη; ἀλλὰ μὴν οὐδὲ τῷ εἴδει οἷόν τε ἓν εἶναι, πλὴν τῷ ἐξ οὗ (οὕτως δὲ ἓν καὶ τῶν φυσικῶν τινες λέγουσιν, ἐκείνως δ' οὔ)· ἄνθρωπος γὰρ ἵππου ἕτερον τῷ εἴδει καὶ τἀναντία ἀλλήλων.
다음으로 무엇으로 인해 부동인가, 만일 하나라면? 즉 마치 여기 이 물이 그 부분 또한 하나인 채로 그 자체 안에서 움직이듯, 전체(세계)도 그렇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못한 것은 무엇으로 인해서인가)? 다음으로 질적 변화는 무엇으로 인해 없겠는가? 오히려 분명 형상(종)으로서 전혀 하나일 수 없다, 그로부터 그것이 이루어진 바의 것(질료)으로서가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자연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어떤 이들은 하나를 말하지만, 저런 식으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말과 종으로서 다르고 서로 반대이기 때문이다.
καὶ πρὸς Παρμενίδην δὲ ὁ αὐτὸς τρόπος τῶν λόγων, καὶ εἴ τινες ἄλλοι εἰσὶν ἴδιοι· καὶ ἡ λύσις τῇ μὲν ὅτι ψευδὴς τῇ δὲ ὅτι οὐ συμπεραίνεται, ψευδὴς μὲν ᾗ ἁπλῶς λαμβάνει τὸ ὂν λέγεσθαι, λεγομένου πολλαχῶς, ἀσυμπέραντος δὲ ὅτι, εἰ μόνα τὰ λευκὰ ληφθείη, σημαίνοντος ἓν τοῦ λευκοῦ, οὐθὲν ἧττον πολλὰ τὰ λευκὰ καὶ οὐχ ἕν· οὔτε γὰρ τῇ συνεχείᾳ ἓν ἔσται τὸ λευκὸν οὔτε τῷ λόγῳ.
파르메니데스에 반대하여서도 그 논변들의 방식이 같고, 만일 누군가 다른 개인들이 있더라도 그러하다. 그 반박은 한편으로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합치되어 결론나지 않는다는(삼단논법을 통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인데, 거짓이라는 건 그가 to on을 그것이 여러 가지로 진술됨에도 단순하게 진술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논리적 귀결이 안 된다는 것은, 만일 흰 것들을 단일한 것들로 취한다면, 흰 것이 하나를 의미함에도, 흰 것들이 전혀 여럿보다 적지 않고 하나이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흰 것은 연속적으로도 정의상으로도 하나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ἄλλο γὰρ ἔσται τὸ εἶναι λευκῷ καὶ τῷ δεδεγμένῳ. καὶ οὐκ ἔσται παρὰ τὸ λευκὸν οὐθὲν χωριστόν· οὐ γὰρ ᾗ χωριστὸν ἀλλὰ τῷ εἶναι ἕτερον τὸ λευκὸν καὶ ᾧ ὑπάρχει. ἀλλὰ τοῦτο Παρμενίδης οὔπω συνεώρα. ἀνάγκη δὴ λαβεῖν μὴ μόνον ἓν σημαίνειν τὸ ὄν, καθ' οὗ ἂν κατηγορηθῇ, ἀλλὰ καὶ ὅπερ ὂν καὶ ὅπερ ἕν.
왜냐하면 흰 것으로서 ~이라는 것과 그것을 받아들인 것으로서 ~인 것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흰 것 외에 아무것도 독립적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흰 것과 그것이 속하는 것이 ~임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을 파르메니데스는 결코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해 진술될 to on이 오직 단 하나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인 바로 그것도 하나인 바로 그것도 의미한다고 받아들이는 일이 필연적이다.
τὸ γὰρ συμβεβηκὸς καθ' ὑποκειμένου τινὸς λέγεται, ὥστε ᾧ συμβέβηκε τὸ ὄν, οὐκ ἔσται (ἕτερον γὰρ [Bekker page 186b, line 1] τοῦ ὄντος)· ἔσται τι ἄρα οὐκ ὄν. οὐ δὴ ἔσται ἄλλῳ ὑπάρχον τὸ ὅπερ ὄν. οὐ γὰρ ἔσται ὄν τι αὐτὸ εἶναι, εἰ μὴ πολλὰ τὸ ὂν σημαίνει οὕτως ὥστε εἶναί τι ἕκαστον. ἀλλ' ὑπόκειται τὸ ὂν σημαίνειν ἕν.
왜냐하면 밑에 놓인 어떤 것(어떤 기체)에 대해 부수적인 것이 진술되고, 그래서 to on이 어떤 것에 부수하며, 그것이 to on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것이 to on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지 않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것에 속하는 on인 바로 그것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각각이 무엇이게끔 그런 식으로 to on이 여러 가지 의미를 갖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무엇인 것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to on은 하나를 의미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εἰ οὖν τὸ ὅπερ ὂν μηδενὶ συμβέβηκεν ἀλλὰ <τὰ ἄλλα> ἐκείνῳ, τί μᾶλλον τὸ ὅπερ ὂν σημαίνει τὸ ὂν ἢ μὴ ὄν; εἰ γὰρ ἔσται τὸ ὅπερ ὂν [ταὐτὸ] καὶ λευκόν, τὸ λευκῷ δ' εἶναι μὴ ἔστιν ὅπερ ὄν (οὐδὲ γὰρ συμβεβηκέναι αὐτῷ οἷόν τε τὸ ὄν· οὐδὲν γὰρ ὂν ὃ οὐχ ὅπερ ὄν), οὐκ ἄρα ὂν τὸ λευκόν· οὐχ οὕτω δὲ ὥσπερ τι μὴ ὄν, ἀλλ' ὅλως μὴ ὄν.
그러므로 만일 on인 바로 그것은 전혀 부수하지 않고 오히려 그 외의 것들이 저것(on)에 부수한다면, on인 바로 그것이 me on보다 on을 조금이라도 더 의미하는가? 왜냐하면 만일 on인 바로 그것이 흰 것이기도 할 것이라면, 그 흰 것으로 ~임은 on인 바로 그것이지 않고(왜냐하면 to on이 그것에 부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왜냐하면 on 바로 그것인 on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흰 것은 on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이지 않은 식으로 그렇게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지 않다.
τὸ ἄρα ὅπερ ὂν οὐκ ὄν· ἀληθὲς γὰρ εἰπεῖν ὅτι λευκόν, τοῦτο δὲ οὐκ ὂν ἐσήμαινεν. ὥστε καὶ τὸ λευκὸν σημαίνει ὅπερ ὄν· πλείω ἄρα σημαίνει τὸ ὄν. οὐ τοίνυν οὐδὲ μέγεθος ἕξει τὸ ὄν, εἴπερ ὅπερ ὂν τὸ ὄν· ἑκατέρῳ γὰρ ἕτερον τὸ εἶναι τῶν μορίων. ὅτι δὲ διαιρεῖται τὸ ὅπερ ὂν εἰς ὅπερ ὄν τι ἄλλο, καὶ τῷ λόγῳ φανερόν, οἷον ὁ ἄνθρωπος εἰ ἔστιν ὅπερ ὄν τι, ἀνάγκη καὶ τὸ ζῷον ὅπερ ὄν τι εἶναι καὶ τὸ δίπουν. εἰ γὰρ μὴ ὅπερ ὄν τι, συμβεβηκότα ἔσται. ἢ οὖν τῷ ἀνθρώπῳ ἢ ἄλλῳ τινὶ ὑποκειμένῳ. ἀλλ' ἀδύνατον· συμβεβηκός τε γὰρ λέγεται τοῦτο, ἢ ὃ ἐνδέχεται ὑπάρχειν καὶ μὴ ὑπάρχειν, ἢ οὗ ἐν τῷ λόγῳ ὑπάρχει τὸ ᾧ συμβέβηκεν [ἢ ἐν ᾧ [Bekker page 186b, line 21] ὁ λόγος ὑπάρχει ᾧ συμβέβηκεν] (οἷον τὸ μὲν καθῆσθαι ὡς χωριζόμενον, ἐν δὲ τῷ σιμῷ ὑπάρχει ὁ λόγος ὁ τῆς ῥινὸς ᾗ φαμὲν συμβεβηκέναι τὸ σιμόν)· ἔτι ὅσα ἐν τῷ ὁριστικῷ λόγῳ ἔνεστιν ἢ ἐξ ὧν ἐστιν, ἐν τῷ λόγῳ τῷ τούτων οὐκ ἐνυπάρχει ὁ λόγος ὁ τοῦ ὅλου, οἷον ἐν τῷ δίποδι ὁ τοῦ ἀνθρώπου ἢ ἐν τῷ λευκῷ ὁ τοῦ λευκοῦ ἀνθρώπου.
그래서 on인 바로 그것이 on이지 않다. 왜냐하면 흰 것, 이것이 on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흰 것 또한 on인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to on은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to on은 크기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만일 정말로 to on이 on인 바로 그것이라면. 왜냐하면 그 둘 각각에게 그 부분들의 ~이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on인 바로 그것이 다른 무엇인 바의 것으로 나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의상 명백한 바, 예를 들어 인간이 만일 무엇인 바로 그것이라면, 동물도 무엇인 바로 그것이고 두 발 달린다는 것 역시 그러함이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왜냐하면 만일 무엇인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부수하는 것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든 다른 무엇인가 아래 놓인 것에게든 부수한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부수적이라 진술되기 때문이다, 속하고 또한 속하지 않는 일을 허용하는 것이든, 정의에 있어서 어떤 것에 부수하는 것이 그것에 속하는 것이든 [그것 안에 그것에 부수하는 정의가 속하는 것이든] (예를 들어 앉는다는 것은 독립적인 것으로서인 반면, 우리가 들창이 그것에 부수한다고 말하는 그 코에 대한 정의는 들창 안에 속한다). 더욱이 한정적 정의에 내재하거나 그것들로 이루어지는 것들은 그 전체에 대한 정의가 그러한 것들의 정의 내에 내적으로 속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인간의 정의는> 인간의 두 발 달림 안에 혹은 흰 사람의 그 흼 안에 속하지 않는다.
εἰ τοίνυν ταῦτα τοῦτον ἔχει τὸν τρόπον καὶ τῷ ἀνθρώπῳ συμβέβηκε τὸ δίπουν, ἀνάγκη χωριστὸν εἶναι αὐτό, ὥστε ἐνδέχοιτο ἂν μὴ δίπουν εἶναι τὸν ἄνθρωπον, ἢ ἐν τῷ λόγῳ τῷ τοῦ δίποδος ἐνέσται ὁ τοῦ ἀνθρώπου λόγος. ἀλλ' ἀδύνατον· ἐκεῖνο γὰρ ἐν τῷ ἐκείνου λόγῳ ἔνεστιν. εἰ δ' ἄλλῳ συμβέβηκε τὸ δίπουν καὶ τὸ ζῷον, καὶ μὴ ἔστιν ἑκάτερον ὅπερ ὄν τι, καὶ ὁ ἄνθρωπος ἂν εἴη τῶν συμβεβηκότων ἑτέρῳ. ἀλλὰ τὸ ὅπερ ὂν ἔστω μηδενὶ συμβεβηκός, καὶ καθ' οὗ ἄμφω [καὶ ἑκατέρον], καὶ τὸ ἐκ τούτων λεγέσθω· ἐξ ἀδιαιρέτων ἄρα τὸ πᾶν; ἔνιοι δ' ἐνέδοσαν τοῖς λόγοις ἀμφοτέροις, τῷ μὲν ὅτι πάντα ἕν, εἰ τὸ ὂν ἓν σημαίνει, ὅτι ἔστι τὸ μὴ ὄν, τῷ δὲ ἐκ τῆς διχοτομίας, ἄτομα ποιήσαντες μεγέθη.
더욱이 만일 이러한 것들이 같은 방식을 취하고 두 발 달림이 인간에게 부수적이라면, 그것이 독립적이라는 것이 필연적이고, 그래서 인간이 두 발 달리지 않음이 허용되거나, 두 발 달림의 정의 내에 인간의 정의가 내재할 것이다. 허나 이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저것<두 발 달림>은 저 <인간의> 정의 내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두 발 달림과 동물이 그 외의 것에 부수한다면, 그리고 그 둘 각각이 무엇인 바로 그것이지 않다면, 인간까지 다른 것에 부수하는 것들에 속할 것이다. 허나 ~인 바로 그것이 아무것에도 부수하지 않는 것이도록, 그리고 양자 모두 그것에 대한 것이도록, 그리고 이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진술되도록 하자. 그럼 전체가 분할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지는가? 일부 사람들은 양쪽의 논의들을 인정한다, 한편에는 만일 to on이 하나를 의미한다면 모든 것들이 하나라는 것을, to me on이라는 점에서, 다른 편에는 이분법을 통해서, 양을 불가분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φανερὸν δὲ καὶ ὅτι οὐκ ἀληθὲς ὡς, εἰ ἓν σημαίνει τὸ ὂν καὶ μὴ οἷόν τε ἅμα τὴν ἀντίφασιν, οὐκ ἔσται οὐθὲν μὴ ὄν· οὐθὲν γὰρ κωλύει, μὴ ἁπλῶς εἶναι, ἀλλὰ μὴ ὄν τι εἶναι τὸ μὴ ὄν. τὸ δὲ δὴ φάναι, [Bekker page 187a, line 7] παρ' αὐτὸ τὸ ὂν εἰ μή τι ἔσται ἄλλο, ἓν πάντα ἔσεσθαι, ἄτοπον. τίς γὰρ μανθάνει αὐτὸ τὸ ὂν εἰ μὴ τὸ ὅπερ ὄν τι εἶναι; εἰ δὲ τοῦτο, οὐδὲν ὅμως κωλύει πολλὰ εἶναι τὰ ὄντα, ὥσπερ εἴρηται. ὅτι μὲν οὖν οὕτως ἓν εἶναι τὸ ὂν ἀδύνατον, δῆλον.
그러나 참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만일 to on이 하나를 의미하고 또한 동시에 그 반박일 수 없다면, me on이 아무것도 아니지 않으리란 것은. 왜냐하면 단적으로 ~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me on이라는 것이 무엇이지 않은 것이기를 막을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로, 만일 to on 자체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라면, 모든 것이 하나이리라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므로 그런 식으로 to on이 하나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하다.

Ὡς δ' οἱ φυσικοὶ λέγουσι, δύο τρόποι εἰσίν. οἱ μὲν γὰρ ἓν ποιήσαντες τὸ [ὂν] σῶμα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ἢ τῶν τριῶν τι ἢ ἄλλο ὅ ἐστι πυρὸς μὲν πυκνότερον ἀέρος δὲ λεπτότερον, τἆλλα γεννῶσι πυκνότητι καὶ μανότητι πολλὰ ποιοῦντες (ταῦτα δ' ἐστὶν ἐναντία, καθόλου δ' ὑπεροχὴ καὶ ἔλλειψις, ὥσπερ τὸ μέγα φησὶ Πλάτων καὶ τὸ μικρόν, πλὴν ὅτι ὁ μὲν ταῦτα ποιεῖ ὕλην τὸ δὲ ἓν τὸ εἶδος, οἱ δὲ τὸ μὲν ἓν τὸ ὑποκείμενον ὕλην, τὰ δ' ἐναντία διαφορὰς καὶ εἴδη)· οἱ δ' ἐκ τοῦ ἑνὸς ἐνούσας τὰς ἐναντιότητας ἐκκρίνεσθαι, ὥσπερ Ἀναξίμανδρός φησι, καὶ ὅσοι δ' ἓν καὶ πολλά φασιν εἶναι, ὥσπερ Ἐμπεδοκλῆς καὶ Ἀναξαγόρας· ἐκ τοῦ μίγματος γὰρ καὶ οὗτοι ἐκκρίνουσι τἆλλα.
그런데 자연학자들이 논하는, 그 방식들은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한편은 아래에 놓이는 물체를 하나로, 세 가지 것들 중 무엇이든 혹은 불보다는 더 조밀하지만 공기보다는 더 희박한 다른 것이든 그것으로 만들면서, 다른 것들을 낳는 조밀함과 희박함으로 많은 것들을 만드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왜냐하면 이것들이 반대되는 것들인데, 일반적으로 과잉과 부족이며, 플라톤이 큼과 작음을 말하는 것처럼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질료로 그리고 하나는 형상으로 만드는 것을 제외하고, 반면 다른 이들은 아래에 놓이는 하나를 질료로, 반대되는 것들은 차이와 형상들로 만든다). 다른 편은,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하듯, 하나로부터 내재하는 반대들이 산출된다고, 그리고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처럼, 하나와 여럿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도 그 섞인 것으로부터 다른 것들을 산출해 내기 때문이다.
διαφέρουσι δὲ ἀλλήλων τῷ τὸν μὲν περίοδον ποιεῖν τούτων, τὸν δ' ἅπαξ, καὶ τὸν μὲν ἄπειρα, τά τε ὁμοιομερῆ καὶ τἀναντία, τὸν δὲ τὰ καλούμενα στοιχεῖα μόνον.
그런데 그들이 한편은 이런 것들의 주기를 만들지만, 다른 편은 한 차례로 만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편은 유사한 부분들을 가지는 것들이자 반대되는 것들을 무한한 것들로, 다른 편은 오직 원소들이라 불리는 것들로만 만든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ἔοικε δὲ Ἀναξαγόρας [Bekker page 187a, line 27] ἄπειρα οὕτως οἰηθῆναι διὰ τὸ ὑπολαμβάνειν τὴν κοινὴν δόξαν τῶν φυσικῶν εἶναι ἀληθῆ, ὡς οὐ γιγνομένου οὐδενὸς ἐκ τοῦ μὴ ὄντος (διὰ τοῦτο γὰρ οὕτω λέγουσιν, ἦν ὁμοῦ πάντα, καὶ τὸ γίγνεσθαι τοιόνδε καθέστηκεν ἀλλοιοῦσθαι, οἱ δὲ σύγκρισιν καὶ διάκρισιν)· ἔτι δ' ἐκ τοῦ γίγνεσθαι ἐξ ἀλλήλων τἀναντία· ἐνυπῆρχεν ἄρα· εἰ γὰρ πᾶν μὲν τὸ γιγνόμενον ἀνάγκη γίγνεσθαι ἢ ἐξ ὄντων ἢ ἐκ μὴ ὄντων, τούτων δὲ τὸ μὲν ἐκ μὴ ὄντων γίγνεσθαι ἀδύνατον (περὶ γὰρ ταύτης ὁμογνωμονοῦσι τῆς δόξης ἅπαντες οἱ περὶ φύσεως), τὸ λοιπὸν ἤδη συμβαίνειν ἐξ ἀνάγκης ἐνόμισαν, ἐξ ὄντων μὲν καὶ ἐνυπαρχόντων γίγνεσθαι, διὰ μικρότητα δὲ τῶν ὄγκων ἐξ ἀναισθήτων ἡμῖν.
그런데 아낙사고라스는 자연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 참이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그렇게 무한한 것들이라 생각한 것 같다, ~이지 않은 것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왜냐하면 이것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같은 것에 속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생성을 변화로 놓았지만, 다른 이들은 혼합과 분할로 놓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로로부터의 그 생성을 통해 반대되는 것들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영속한다. 왜냐하면 만일 생겨나는 모든 것이 ~인 것들로부터 아니면 ~이지 않은 것들로부터 생겨남이 필연적이라면, 그런데 이 ~이지 않은 것들로부터 생겨남이 불가능하다면 (왜냐하면 이러한 의견에 관하여 자연에 관련하는 모든 이들이 같은 의견이기 때문에), 이제 필연적으로 남은 쪽으로 귀결된다고 그들이 생각했고, ~인 것들이자 영속하는 것들로부터 생겨남이 필연적이라고, 그러나 그 규모의 작음으로 인해 우리에게 감각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생겨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διό φασι πᾶν ἐν παντὶ μεμῖχθαι, διότι πᾶν ἐκ παντὸς ἑώρων γιγνόμενον· φαίνεσθαι δὲ διαφέροντα καὶ προσαγορεύεσθαι ἕτερα ἀλλήλων ἐκ τοῦ μάλισθ' ὑπερέχοντος διὰ πλῆθος ἐν τῇ μίξει τῶν ἀπείρων· εἰλικρινῶς μὲν γὰρ ὅλον λευκὸν ἢ μέλαν ἢ γλυκὺ ἢ σάρκα ἢ ὀστοῦν οὐκ εἶναι, ὅτου δὲ πλεῖστον ἕκαστον ἔχει, τοῦτο δοκεῖν εἶναι τὴν φύσιν τοῦ πράγματος.
이런 이유로 그들은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섞여 있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그런데 그 무한한 것들의 섞임 속에서 수를 통해 지극히 압도하는 것을 통해 서로 다른 것들로 드러나고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섞임 없는 방식으로 전체로서 희거나 검거나 달거나 살이거나 뼈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 각각을 가장 많이 지니는 것, 그것이 그 사태의 본성이라 여겨진다고 한다.
εἰ δὴ τὸ μὲν ἄπειρον ᾗ ἄπειρον ἄγνωστον, τὸ μὲν κατὰ πλῆθος ἢ κατὰ μέγεθος ἄπειρον ἄγνωστον πόσον τι, τὸ δὲ κατ' εἶδος ἄπειρον ἄγνωστον ποῖόν τι. [Bekker page 187b, line 10] τῶν δ' ἀρχῶν ἀπείρων οὐσῶν καὶ κατὰ πλῆθος καὶ κατ' εἶδος, ἀδύνατον εἰδέναι τὰ ἐκ τούτων. οὕτω γὰρ εἰδέναι τὸ σύνθετον ὑπολαμβάνομεν, ὅταν εἰδῶμεν ἐκ τίνων καὶ πόσων ἐστίν.
그래서 만일 무한정한 것이 어떤 식으로 무한정한지 알려지지 않는다면, 수에 따라서나 크기에 따라서나 무한한 것은 얼만큼의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고, 형상에 따라서 무규정적인 것은 어떠한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원리들이 수에 따라서도 형상에 따라서도 무한정한 것들일 때, 그것들로부터 나오는 것들을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들로 그리고 얼만큼의 것들로 이루어지는지 알 때, 그런 식으로 그 합성된 것을 안다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ἔτι δ' εἰ ἀνάγκη, οὗ τὸ μόριον ἐνδέχεται ὁπηλικονοῦν εἶναι κατὰ μέγεθος καὶ μικρότητα, καὶ αὐτὸ ἐνδέχεσθαι (λέγω δὲ τῶν τοιούτων τι μορίων, εἰς ὃ ἐνυπάρχον διαιρεῖται τὸ ὅλον), εἰ δὴ ἀδύνατον ζῷον ἢ φυτὸν ὁπηλικονοῦν εἶναι κατὰ μέγεθος καὶ μικρότητα, φανερὸν ὅτι οὐδὲ τῶν μορίων ὁτιοῦν· ἔσται γὰρ καὶ τὸ ὅλον ὁμοίως.
더욱이 만일, 어떤 것의 부분이 크든 작든 어떤 크기이든 그 크기임이 허용되고, 그것이 허용됨이 필연적이라면(나는 영속하는 전체가 그 부분으로 나뉘어지는 그러한 부분들 중의 무언가를 말한다), 그래서 만일 동물이나 식물이 크든 작든 어떤 크기이든 그 크기임이 불가능하다면, 그 부분들 중 어떤 부분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 전체도 같은 방식으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σὰρξ δὲ καὶ ὀστοῦν καὶ τὰ τοιαῦτα μόρια ζῴου, καὶ οἱ καρποὶ τῶν φυτῶν. δῆλον τοίνυν ὅτι ἀδύνατον σάρκα ἢ ὀστοῦν ἢ ἄλλο τι ὁπηλικονοῦν εἶναι τὸ μέγεθος ἢ ἐπὶ τὸ μεῖζον ἢ ἐπὶ τὸ ἔλαττον.
그런데 살과 뼈와 동물의 이런 종류의 부분들, 그리고 식물들의 열매들도 그러하다. 따라서 살이나 뼈 혹은 다른 어떤 것이 그 크기에 있어서 큰 쪽으로든 작은 쪽으로든 얼만큼이든 그 만큼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이 분명하다.
ἔτι εἰ πάντα μὲν ἐνυπάρχει τὰ τοιαῦτα ἐν ἀλλήλοις, καὶ μὴ γίγνεται ἀλλ' ἐκκρίνεται ἐνόντα, λέγεται δὲ ἀπὸ τοῦ πλείονος, γίγνεται δὲ ἐξ ὁτουοῦν ὁτιοῦν (οἷον ἐκ σαρκὸς ὕδωρ ἐκκρινόμενον καὶ σὰρξ ἐξ ὕδατος), ἅπαν δὲ σῶμα πεπερασμένον ἀναιρεῖται ὑπὸ σώματος πεπερασμένου, φανερὸν ὅτι οὐκ ἐνδέχεται ἐν ἑκάστῳ ἕκαστον ὑπάρχειν. ἀφαιρεθείσης γὰρ ἐκ τοῦ ὕδατος σαρκός, καὶ πάλιν ἄλλης γενομένης ἐκ τοῦ λοιποῦ ἀποκρίσει, εἰ καὶ ἀεὶ ἐλάττων ἔσται ἡ ἐκκρινομένη, ἀλλ' ὅμως οὐχ ὑπερβαλεῖ μέγεθός τι τῇ μικρότητι.
더욱이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서로간에 내적으로 영속한다면,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내재하는 것들이 산출된다면, 그런데 더 많은 것으로 진술된다면, 그러나 어떤 것으로부터든 어떤 것이든 생겨난다면 (예를 들어 살로부터 물이 그리고 물로부터 살이 산출되는 것처럼), 그런데 일체의 모든 한정된 물체가 한정된 물체에 의해 제거된다면, 각각의 안에 각각의 것이 속함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물로부터 살이 제거될 때, 그리고 다시 그 남은 물로부터 그 분리에 의해 또 다른 살이 생길 때, 만일 또한 언제나 그 분리되는 것이 더 작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음의 측면에서 그 크기가 더 능가할 것이다.
ὥστ' [Bekker page 187b, line 31] εἰ μὲν στήσεται ἡ ἔκκρισις, οὐχ ἅπαν ἐν παντὶ ἐνέσται (ἐν γὰρ τῷ λοιπῷ ὕδατι οὐκ ἐνυπάρξει σάρξ), εἰ δὲ μὴ στήσεται ἀλλ' ἀεὶ ἕξει ἀφαίρεσιν, ἐν πεπερασμένῳ μεγέθει ἴσα πεπερασμένα ἐνέσται ἄπειρα τὸ πλῆθος· τοῦτο δ' ἀδύνατον.
그래서 만일 그 분리가 정지된다면, 모든 것 안에 모든 일체의 것이 내재하지 않을 것이고 (왜냐하면 남은 물 안에 살이 속하지 않을 것이기에), 만일 정지하지 않고 언제나 제거를 취할 것이라면, 한정된 크기 안에 그 같은 크기 만큼 한정된 무한한 크기가 내재할 것이다. 이는 불가능하다.
πρὸς δὲ τούτοις, εἰ ἅπαν μὲν σῶμα ἀφαιρεθέντος τινὸς ἔλαττον ἀνάγκη γίγνεσθαι, τῆς δὲ σαρκὸς ὥρισται τὸ ποσὸν καὶ μεγέθει καὶ μικρότητι, φανερὸν ὅτι ἐκ τῆς ἐλαχίστης σαρκὸς οὐθὲν ἐκκριθήσεται σῶμα· ἔσται γὰρ ἐλάττων τῆς ἐλαχίστης.
이러한 것들에 더하여, 만일 일체의 모든 물체가 무언가 제거될 때 더 작아진다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그런데 살의 양이 크든 작든 한정된다면, 가장 작은 살로부터 아무런 물체도 제거되지 않을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은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ἔτι δ' ἐν τοῖς ἀπείροις σώμασιν ἐνυπάρχοι ἂν ἤδη σὰρξ ἄπειρος καὶ αἷμα καὶ ἐγκέφαλος, κεχωρισμένα μέντοι ἀπ' ἀλλήλων <οὔ>, οὐθὲν δ' ἧττον ὄντα, καὶ ἄπειρον ἕκαστον· τοῦτο δ' ἄλογον.
더욱이 무한정한 몸들 속에 이제 무한한 살과 피와 뇌가 속할 것이나, 그럼에도 서로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채로 그렇 것이고, 전혀 더 적지 않은 것들로서, 각각이 무한할 것이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τὸ δὲ μηδέποτε διακριθήσεσθαι οὐκ εἰδότως μὲν λέγεται, ὀρθῶς δὲ λέγεται· τὰ γὰρ πάθη ἀχώριστα· εἰ οὖν μέμικται τὰ χρώματα καὶ αἱ ἕξεις, ἐὰν διακριθῶσιν, ἔσται τι λευκὸν καὶ ὑγιεινὸν οὐχ ἕτερόν τι ὂν οὐδὲ καθ' ὑποκειμένου.
그러나 결코 다 나뉘어지지 않으리란 것을 알지 못하면서도 논하지만, 옳게 논한다. 왜냐하면 속성들은 비독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색들과 상태들이 섞여 있다면, 만일 그것들이 나뉠 것이라면, 다른 무엇도 아니며 아래에 놓이는 것에 대한 것도 아닌 흼과 건강함이 있을 것이다.
ὥστε ἄτοπος τὰ ἀδύνατα ζητῶν ὁ νοῦς, εἴπερ βούλεται μὲν διακρῖναι, τοῦτο δὲ ποιῆσαι ἀδύνατον καὶ κατὰ τὸ ποσὸν καὶ κατὰ τὸ ποιόν, κατὰ μὲν τὸ ποσὸν ὅτι οὐκ ἔστιν ἐλάχιστον μέγεθος, κατὰ δὲ τὸ ποιὸν ὅτι ἀχώριστα τὰ πάθη.
그래서 그 불가능한 것들을 추구하는 그 정신은 이상하다, 만일 한편으로는 나뉘기를 바라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양에 따라서도 성질에 따라서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기를 바란다면, 양에 따라서는 가장 작은 크기이지 않기 때문에, 성질에 따라서는 그 속성들이 비독립적이기 때문에.
οὐκ ὀρθῶς δὲ οὐδὲ τὴν γένεσιν λαμβάνει τῶν ὁμοειδῶν. ἔστι μὲν γὰρ ὡς ὁ πηλὸς εἰς πηλοὺς διαιρεῖται, ἔστι [Bekker page 188a, line 15] δ' ὡς οὔ. καὶ οὐχ ὁ αὐτὸς τρόπος, ὡς πλίνθοι ἐξ οἰκίας καὶ οἰκία ἐκ πλίνθων, οὕτω [δὲ] καὶ ὕδωρ καὶ ἀὴρ ἐξ ἀλλήλων καὶ εἰσὶ καὶ γίγνονται. βέλτιόν τε ἐλάττω καὶ πεπερασμένα λαβεῖν, ὅπερ ποιεῖ Ἐμπεδοκλῆς.
그런데 동종의 것들의 생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어떤 것들은 진흙이 진흙들로 나뉘듯 그러하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은 식으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으로부터 나온 벽돌들과 벽돌들로부터 나온 집처럼, 그런 식으로 물과 공기가 서로로부터 이루어지고 생기는 것은, 같은 방식도 아니다. 엠페도클레스가 만드는 바로 그것처럼, 더 작고 한정된 것들을 취하는 편이 더 낫다.

-蟲-

ΦΥΣΙΚΗΣ ΑΚΡΟΑΣΕΩΣ Α


Ἐπειδὴ τὸ εἰδέναι καὶ τὸ ἐπίστασθαι συμβαίνει περὶ πάσας τὰς μεθόδους, ὧν εἰσὶν ἀρχαὶ ἢ αἴτια ἢ στοιχεῖα, ἐκ τοῦ ταῦτα γνωρίζειν (τότε γὰρ οἰόμεθα γιγνώσκειν ἕκαστον, ὅταν τὰ αἴτια γνωρίσωμεν τὰ πρῶτα καὶ τὰς ἀρχὰς τὰς πρώτας καὶ μέχρι τῶν στοιχείων), δῆλον ὅτι καὶ τῆς περὶ φύσεως ἐπιστήμης πειρατέον διορίσασθαι πρῶτον τὰ περὶ τὰς ἀρχάς.
원리들이나 원인들 혹은 원소들이 속하는, 모든 방법(체계)들에 대한 앎과 인식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 앎을 획득함으로부터 따라나오기에 (왜냐하면 우리가 최초의 원인들과 최초의 원리들을 그 원소들에 이르기까지 알게 될 때, 그 때 우리가 각각의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관한 인식에 대해서도 우선 그 원리들에 관련한 것들을 규정하는 일이 시도되어야만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πέφυκε δὲ ἐκ τῶν γνωριμωτέρων ἡμῖν ἡ ὁδὸς καὶ σαφεστέρων ἐπὶ τὰ σαφέστερα τῇ φύσει καὶ γνωριμώτερα· οὐ γὰρ ταὐτὰ ἡμῖν τε γνώριμα καὶ ἁπλῶς. διόπερ ἀνάγκη τὸν τρόπον τοῦτον προάγειν ἐκ τῶν ἀσαφεστέρων μὲν τῇ φύσει ἡμῖν δὲ σαφεστέρων ἐπὶ τὰ σαφέστερα τῇ φύσει καὶ γνωριμώτερα.
그런데 본래 우리에게 더욱 잘 알려지고 더욱 확실한 것들을 통한 방법(체계)은 자연(본성)상 더 확실하고 더 잘 알려지는 것들을 향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자연상 확실한) 것들은 우리에게 단순하게 알려지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이러한 방식은 자연상으로는 더 확실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것들로부터 자연상으로 더 확실하고 잘 알려지는 것들을 향해 진행함이 필연적이다.
ἔστι δ' ἡμῖν τὸ πρῶτον δῆλα καὶ σαφῆ τὰ συγκεχυμένα μᾶλλον· ὕστερον δ' ἐκ τούτων γίγνεται γνώριμα τὰ στοιχεῖα καὶ αἱ ἀρχαὶ διαιροῦσι ταῦτα.
그런데 우리에게 우선은 뒤섞인 것들이 오히려 분명하고 확실하다. 다음으로 이러한 것들을 통하여 이것들을 분할(분석)함으로써 (우리에게) 그 원소들과 원리들이 알려주는 것이 된다.
διὸ ἐκ τῶν καθόλου ἐπὶ τὰ καθ' ἕκαστα δεῖ προϊέναι· τὸ γὰρ ὅλον κατὰ τὴν αἴσθησιν γνωριμώτερον, τὸ δὲ καθόλου ὅλον τί ἐστι· [Bekker page 184a, line 26] πολλὰ γὰρ περιλαμβάνει ὡς μέρη τὸ καθόλου. πέπονθε δὲ ταὐτὸ τοῦτο τρόπον τινὰ καὶ τὰ ὀνόματα πρὸς τὸν λόγον· ὅλον γάρ τι καὶ ἀδιορίστως σημαίνει, οἷον ὁ κύκλος, ὁ δὲ ὁρισμὸς αὐτοῦ διαιρεῖ εἰς τὰ καθ' ἕκαστα. καὶ τὰ παιδία τὸ μὲν πρῶτον προσαγορεύει πάντας τοὺς ἄνδρας πατέρας καὶ μητέρας τὰς γυναῖκας, ὕστερον δὲ διορίζει τούτων ἑκάτερον.
이런 이유로 보편적인(전반적인) 것들로부터 개별적인(각각에 따른) 것들로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전체가 감각에 따라 더 잘 알려지는데, 보편적인 것이 무언가(일종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은 많은 것들을 부분들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것을 어떤 방식에서 진술에 대해 명사들도 겪는다. 왜냐하면 정의되지 않은 식으로 무언가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예를 들어 원 같은 것이, 그러나 그것의 정의는 개별적인 것들로 분할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처음에는 모든 남성들을 아버지로 모든 여성들을 어머니로 부르지만, 나중에는 이들의 양편을 구분한다.


Ἀνάγκη δ' ἤτοι μίαν εἶναι τὴν ἀρχὴν ἢ πλείους, καὶ εἰ μίαν, ἤτοι ἀκίνητον, ὥς φησι Παρμενίδης καὶ Μέλισσος, ἢ κινουμένην, ὥσπερ οἱ φυσικοί, οἱ μὲν ἀέρα φάσκοντες εἶναι οἱ δ' ὕδωρ τὴν πρώτην ἀρχήν· εἰ δὲ πλείους, ἢ πεπερασμένας ἢ ἀπείρους, καὶ εἰ πεπερασμένας πλείους δὲ μιᾶς, ἢ δύο ἢ τρεῖς ἢ τέτταρας ἢ ἄλλον τινὰ ἀριθμόν, καὶ εἰ ἀπείρους, ἢ οὕτως ὥσπερ Δημόκριτος, τὸ γένος ἕν, σχήματι δὲ <διαφερούσας>, ἢ εἴδει διαφερούσας ἢ καὶ ἐναντίας.
그런데 원리는 하나이거나 더 많음이 필연적이고, 만일 하나라면, 파르메니데스와 멜리소스가 말하듯 움직여지지 않거나, 자연학자들이 그러듯, 움직이는 것이 필연적이다. 최초의 원리를 자연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공기라고 다른 이들은 물이라고 한다. 반면에 만일 더 많다면, 유한하거나 무한하고, 만일 하나보다 많은 것으로 한정된 것들이라면, 둘이나 셋이나 넷이나 혹은 다른 어떤 수이고, 또 만일 무한하다면, 데모크리토스처럼 그런 식으로 그 유는 하나인데, 형태에서 차이가 나는 것들이거나, 아니면 종에서 차이가 나거나 혹은 반대되기까지 함이 필연적이다.
ὁμοίως δὲ ζητοῦσι καὶ οἱ τὰ ὄντα ζητοῦντες πόσα· ἐξ ὧν γὰρ τὰ ὄντα ἐστὶ πρώτων, ζητοῦσι ταῦτα πότερον ἓν ἢ πολλά, καὶ εἰ πολλά, πεπερασμένα ἢ ἄπειρα, ὥστε τὴν ἀρχὴν καὶ τὸ στοιχεῖον ζητοῦσι πότερον ἓν ἢ πολλά.
존재(있는/~인)들이 얼만큼인지 탐구하는 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탐구한다. 왜냐하면 있는 것들이 그것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것들, 이것들이 하나인지 혹은 여럿인지, 그리고 만일 많다면, 유한한지 무한한지 탐구하고, 그래서 그 원리와 원소가 하나인지 여럿인지 탐구하기 때문이다.
τὸ μὲν οὖν εἰ ἓν καὶ ἀκίνητον τὸ ὂν σκοπεῖν οὐ περὶ φύσεώς ἐστι σκοπεῖν· ὥσπερ γὰρ καὶ τῷ γεωμέτρῃ οὐκέτι λόγος ἔστι πρὸς τὸν ἀνελόντα τὰς ἀρχάς, ἀλλ' ἤτοι ἑτέρας ἐπιστήμης ἢ πασῶν [Bekker page 185a, line 3] κοινῆς, οὕτως οὐδὲ τῷ περὶ ἀρχῶν· οὐ γὰρ ἔτι ἀρχὴ ἔστιν, εἰ ἓν μόνον καὶ οὕτως ἓν ἔστιν. ἡ γὰρ ἀρχὴ τινὸς ἢ τινῶν.
그러므로 존재가 하나이고 부동인지 고찰함은 자연에 관한 고찰함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하학자의 경우 그 원리를 부정하는 자를 향해서는 더 이상 논변(logos)이 없고, (그 논변이) 다른 인식이나 모든 인식들에 공통된 인식에 속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원리들에 관하여 (고찰하는) 자의 경우에도 그러하다(원리를 부정하는 자를 향한 논변이 없다). 더욱이 만일 오직 하나뿐이며 그렇게 하나라면, 원리는 더 이상 없다. 원리는 무언가의 혹은 무엇들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ὅμοιον δὴ τὸ σκοπεῖν εἰ οὕτως ἓν καὶ πρὸς ἄλλην θέσιν ὁποιανοῦν διαλέγεσθαι τῶν λόγου ἕνεκα λεγομένων (οἷον τὴν Ἡρακλείτειον, ἢ εἴ τις φαίη ἄνθρωπον ἕνα τὸ ὂν εἶναι), ἢ λύειν λόγον ἐριστικόν, ὅπερ ἀμφότεροι μὲν ἔχουσιν οἱ λόγοι, καὶ ὁ Μελίσσου καὶ ὁ Παρμενίδου· καὶ γὰρ ψευδῆ λαμβάνουσι καὶ ἀσυλλόγιστοί εἰσιν· μᾶλλον δ' ὁ Μελίσσου φορτικὸς καὶ οὐκ ἔχων ἀπορίαν, ἀλλ' ἑνὸς ἀτόπου δοθέντος τὰ ἄλλα συμβαίνει· τοῦτο δὲ οὐδὲν χαλεπόν.
그래서 그런 식으로 하나인지를 고찰하는 것은 그 밖의 어떠한 입장에든 맞서서 논변을 위해 논변하는 자들의 변증하는 일과 유사하거나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입장, 혹은 만일 누군가 존재가 한 명의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입장>), 혹은 쟁론적 논변을 논박하는 일과 유사하다, 바로 그것을 양쪽 논변들이 모두 지닌다, 멜리소스의 논변도 파르메니데스의 논변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 논변들이 거짓들을 취하고 또한 일관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멜리소스의 논변이 오히려 흔하며 난점(aporia)은 없으나, 하나의 이상한 것이 주어져서 그 밖의 것들이 도출된다. 이런 일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ἡμῖν δ' ὑποκείσθω τὰ φύσει ἢ πάντα ἢ ἔνια κινούμενα εἶναι· δῆλον δ' ἐκ τῆς ἐπαγωγῆς. ἅμα δ' οὐδὲ λύειν ἅπαντα προσήκει, ἀλλ' ἢ ὅσα ἐκ τῶν ἀρχῶν τις ἐπιδεικνὺς ψεύδεται, ὅσα δὲ μή, οὔ, οἷον τὸν τετραγωνισμὸν τὸν μὲν διὰ τῶν τμημάτων γεωμετρικοῦ διαλῦσαι, τὸν δὲ Ἀντιφῶντος οὐ γεωμετρικοῦ· οὐ μὴν ἀλλ' ἐπειδὴ περὶ φύσεως μὲν οὔ, φυσικὰς δὲ ἀπορίας συμβαίνει λέγειν αὐτοῖς, ἴσως ἔχει καλῶς ἐπὶ μικρὸν διαλεχθῆναι περὶ αὐτῶν· ἔχει γὰρ φιλοσοφίαν ἡ σκέψις.
우리에게는 자연상의 모든 것들이든 일부 것들이든 움직이는 것들이라고 전제되도록 하자. 그런데 귀납으로부터 분명하다. 더불어 모든 것을 논박함은 적절치도 않고, 오히려 그 원리들로부터 누군가 거짓되게 증명하는 것들을 (논박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논박) 하지 않는 것이 (적절하다), 예를 들어 분할(segment, not lunes)들을 통한 (원의)사각화를 논박하는 일은 기하학자의 것이지만, 안티폰의 사각화를 논박하는 일은 기하학자의 일이 아니다. 자연에 관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들로서는 자연학적 문제들을 논하게끔 귀결되므로, 그들에 관하여 작은 점에 대해 훌륭하게 변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탐구가 철학(적인 지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ἀρχὴ δὲ οἰκειοτάτη πασῶν, ἐπειδὴ πολλαχῶς λέγεται τὸ ὄν, πῶς λέγουσιν οἱ λέγοντες εἶναι ἓν τὰ πάντα, πότερον [Bekker page 185a, line 23] οὐσίαν τὰ πάντα ἢ ποσὰ ἢ ποιά, καὶ πάλιν πότερον οὐσίαν μίαν τὰ πάντα, οἷον ἄνθρωπον ἕνα ἢ ἵππον ἕνα ἢ ψυχὴν μίαν, ἢ ποιὸν ἓν δὲ τοῦτο, οἷον λευκὸν ἢ θερμὸν ἢ τῶν ἄλλων τι τῶν τοιούτων. ταῦτα γὰρ πάντα διαφέρει τε πολὺ καὶ ἀδύνατα λέγειν.
모든 인식들의 가장 적절한 시작(원리)은, 존재가 여러 방식으로 논해지기에, 모든 것들이 하나이다라고 논하는 자들이 어떻게 논하는지, 모든 것들을 ousia라 하는지 양(얼만큼)이라 하는지 질(어떠함)이라 하는지, 그리고 다시 모든 것들이 하나의 ousia라고 하는지,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인간이라거나 한 마리의 말이라거나 하나의 영혼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하나의 성질이라는 것인지, 예를 들어 희다거나 따뜻하다거나 그 외에 그러한 것들 중 무언가라 하는 것인지이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것들이 상당히 상이하며 논할(설명 or 주장)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εἰ μὲν γὰρ ἔσται καὶ οὐσία καὶ ποιὸν καὶ ποσόν, καὶ ταῦτα εἴτ' ἀπολελυμένα ἀπ' ἀλλήλων εἴτε μή, πολλὰ τὰ ὄντα· εἰ δὲ πάντα ποιὸν ἢ ποσόν, εἴτ' οὔσης οὐσίας εἴτε μὴ οὔσης, ἄτοπον, εἰ δεῖ ἄτοπον λέγειν τὸ ἀδύνατον. οὐθὲν γὰρ τῶν ἄλλων χωριστόν ἐστι παρὰ τὴν οὐσίαν· πάντα γὰρ καθ' ὑποκειμένου λέγεται τῆς οὐσίας.
왜냐하면 만일 ousia도 성질도 양도 있다면, 또한 이것들이 서로로부터 분리된 것들이든 아니든, 존재들은 여럿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모든 것들이 성질이거나 양이라면, ousia가 있든 있지 않든, 이상한 일이다, 만일 불가능한 것을 이상하다 말해야 한다면. 왜냐하면 ousia를 제외하고 그 외의 것들 중 아무것도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들은 그 아래에 놓인 ousia에 따라(대해) 논해진다.
Μέλισσος δὲ τὸ ὂν ἄπειρον εἶναί φησιν. ποσὸν ἄρα τι τὸ ὄν· τὸ γὰρ ἄπειρον ἐν τῷ ποσῷ, οὐσίαν δὲ ἄπειρον εἶναι ἢ ποιότητα ἢ πάθος οὐκ ἐνδέχεται εἰ μὴ κατὰ συμβεβηκός, εἰ ἅμα καὶ ποσὰ ἄττα εἶεν· ὁ γὰρ τοῦ ἀπείρου λόγος τῷ ποσῷ προσχρῆται, ἀλλ' οὐκ οὐσίᾳ οὐδὲ τῷ ποιῷ.
그런데 멜리소스는 존재를 무한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존재는 어떤 양이다. 왜냐하면 무한은 양 안에 속하고, ousia든 성질이든 상태든 부수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그리고 동시에 얼만큼의 양이라면, 무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무한에 대한 논변은 양을 추가로 사용하지만, ousia도 성질도 사용하지 않는다.
εἰ μὲν τοίνυν καὶ οὐσία ἔστι καὶ ποσόν, δύο καὶ οὐχ ἓν τὸ ὄν· εἰ δ' οὐσία μόνον, οὐκ ἄπειρον, οὐδὲ μέγεθος ἕξει οὐδέν· ποσὸν γάρ τι ἔσται.
따라서 만일 ousia도 있고 양도 있다면, 존재는 둘이고 하나가 아니다. 그런데 만일 ousia뿐이라면, 무한하지 않고, 전혀 아무런 크기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크기는) 어떤 양일 테니까.


ἔτι ἐπεὶ καὶ αὐτὸ τὸ ἓν πολλαχῶς λέγεται ὥσπερ καὶ τὸ ὄν, σκεπτέον τίνα τρόπον λέγουσιν εἶναι ἓν τὸ πᾶν.
더욱이 하나 자체도 존재처럼 여러 방식으로 논해지기에, 어떤 방식으로 그들이 모든 것은 하나라고 논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λέγεται δ' ἓν ἢ τὸ συνεχὲς ἢ τὸ ἀδιαίρετον ἢ ὧν ὁ λόγος ὁ αὐτὸς καὶ [Bekker page 185b, line 9] εἷς ὁ τοῦ τί ἦν εἶναι, ὥσπερ μέθυ καὶ οἶνος.
그런데 연속인 것이나 분할불가능한 것이나 어떤 것의 무엇인 바인 그런 것들의 진술이 같고 하나인 것이 하나로서 이야기된다. 마치 포도주 같은 것들.
εἰ μὲν τοίνυν συνεχές, πολλὰ τὸ ἕν· εἰς ἄπειρον γὰρ διαιρετὸν τὸ συνεχές.
따라서 만일 연속적인 것이라면, 그 하나는 여럿이다. 왜냐하면 연속적인 것은 무한히 분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ἔχει δ' ἀπορίαν περὶ τοῦ μέρους καὶ τοῦ ὅλου, ἴσως δὲ οὐ πρὸς τὸν λόγον ἀλλ' αὐτὴν καθ' αὑτήν, πότερον ἓν ἢ πλείω τὸ μέρος καὶ τὸ ὅλον, καὶ πῶς ἓν ἢ πλείω, καὶ εἰ πλείω, πῶς πλείω, καὶ περὶ τῶν μερῶν τῶν μὴ συνεχῶν· καὶ εἰ τῷ ὅλῳ ἓν ἑκάτερον ὡς ἀδιαίρετον, ὅτι καὶ αὐτὰ αὑτοῖς.)
(그런데 부분과 전체에 관련하여 난점이 있다, 아마도 이 논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난점 자체에 대한 것일, 부분과 전체가 하나인지 더 많은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이거나 더 많은지, 또 만일 더 많다면, 어떻게 더 많은지, 또 연속되지 않은 부분들에 관하여서도. 그리고 만일 전체로서 그 둘 각각이 분할불가능한 것으로서 하나라면, 또한 그것들이 그것들 자신과 같은 것들이라는 점에서.)
ἀλλὰ μὴν εἰ ὡς ἀδιαίρετον, οὐθὲν ἔσται ποσὸν οὐδὲ ποιόν, οὐδὲ δὴ ἄπειρον τὸ ὄν, ὥσπερ Μέλισσός φησιν, οὐδὲ πεπερασμένον, ὥσπερ Παρμενίδης· τὸ γὰρ πέρας ἀδιαίρετον, οὐ τὸ πεπερασμένον.
하지만 만일 분할불가능한 것으로서 하나라면, 양도 질도 전혀 있을 수 없고, 멜리소스가 말한 것처럼, 존재가 무한할 수도 없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한 것처럼, 한정된 것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한계는 분할불가능한 것이고,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ἀλλὰ μὴν εἰ τῷ λόγῳ ἓν τὰ ὄντα πάντα ὡς λώπιον καὶ ἱμάτιον, τὸν Ἡρακλείτου λόγον συμβαίνει λέγειν αὐτοῖς· ταὐτὸν γὰρ ἔσται ἀγαθῷ καὶ κακῷ εἶναι, καὶ ἀγαθῷ καὶ μὴ ἀγαθῷ εἶναι - ὥστε ταὐτὸν ἔσται ἀγαθὸν καὶ οὐκ ἀγαθόν, καὶ ἄνθρωπος καὶ ἵππος, καὶ οὐ περὶ τοῦ ἓν εἶναι τὰ ὄντα ὁ λόγος ἔσται ἀλλὰ περὶ τοῦ μηδέν - καὶ τὸ τοιῳδὶ εἶναι καὶ τοσῳδὶ ταὐτόν.
허나 만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robe와 히마티온처럼 정의(logos)상으로 하나라면, 그들이 헤라클레이토스의 논변을 진술하도록 귀결된다. 왜냐하면 좋은 자로 있음과 나쁜 자로 있음이 같을 것이고, 좋은 자로 그리고 좋지 않은 자로 있음도 그럴 것이고 - 그래서 좋은 사람과 좋지 않은 사람이 같을 것이며, 인간과 말이 그럴 것이며, 있는 것들이 하나라는 것에 관한 논변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관한 논변일 것이다 - 이런 성질로 있음과 이런 양으로 있음이 같을 것이다.


ἐθορυβοῦντο δὲ καὶ οἱ ὕστεροι τῶν ἀρχαίων ὅπως μὴ ἅμα γένηται αὐτοῖς τὸ αὐτὸ ἓν καὶ πολλά.
고대인들 중 더 후대 사람들도 같은 것이 자신들에게 동시에 하나이자 여럿이 되지 않도록 논란을 벌였다.
διὸ οἱ μὲν τὸ ἐστὶν ἀφεῖλον, ὥσπερ Λυκόφρων, οἱ δὲ τὴν λέξιν μετερρύθμιζον, ὅτι [Bekker page 185b, line 29] ὁ ἄνθρωπος οὐ λευκός ἐστιν ἀλλὰ λελεύκωται, οὐδὲ βαδίζων ἐστὶν ἀλλὰ βαδίζει, ἵνα μή ποτε τὸ ἐστὶ προσάπτοντες πολλὰ εἶναι ποιῶσι τὸ ἕν, ὡς μοναχῶς λεγομένου τοῦ ἑνὸς ἢ τοῦ ὄντος.
이 때문에 어떤 이들은 뤼코프론처럼 '~이다'라는 것을 제거했고, 다른 이들은 그 용어를 형태변화시켰다, 인간이 흼이 아니라 희었고, 걸음이 아니라 걷고 있다고, '~이다'라는 것을 붙임으로써 하나를 여럿이게 만들지 않으려고, 단일한 방식으로 하나나 존재가 논해지는 것처럼 (변형시켰다).
πολλὰ δὲ τὰ ὄντα ἢ λόγῳ (οἷον ἄλλο τὸ λευκῷ εἶναι καὶ μουσικῷ, τὸ δ' αὐτὸ ἄμφω· πολλὰ ἄρα τὸ ἕν) ἢ διαιρέσει, ὥσπερ τὸ ὅλον καὶ τὰ μέρη.
그런데 있는 것들은 정의상으로나 (예를 들어 흰 것으로 있음과 음악적으로 있음이 다른 것이지만, 양자가 같은 것이듯. 그래서 하나는 여럿이다) 분할상으로나 여럿이다, 마치 전체와 부분들처럼.
ἐνταῦθα δὲ ἤδη ἠπόρουν, καὶ ὡμολόγουν τὸ ἓν πολλὰ εἶναι - ὥσπερ οὐκ ἐνδεχόμενον ταὐτὸν ἕν τε καὶ πολλὰ εἶναι, μὴ τἀντικείμενα δέ· ἔστι γὰρ τὸ ἓν καὶ δυνάμει καὶ ἐντελεχείᾳ.
이런 점들에서 이제 그들은 난관에 빠졌고, 하나가 여럿이라는 것을 동의하였다 - 마치 같은 것이 하나이면서 여럿일 수 없듯이, 그것들이 반대되는 것들이 아닐 경우. 왜냐하면 하나는 가능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있기 때문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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