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Lecture Ⅲ: January 29, 1970
뭐라도 성취된 바가 있다면 지금까지 성취된 건 무엇인가? 첫 번째로, 나는 어떻게 이름이 그 지칭을 얻는지에 관한 대중적 관점이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름의 지칭이 일부 고유하게 정체화하는 표식들에 의해, 지칭물에 의해 충족되고 화자에 의해 해당 지칭물에 대해 참이라고 알려지거나 믿어지는 일부 고유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첫째로, 화자에 의해 믿어지는 속성들은 고유한 방식으로 규정해주는 것일 필요가 없다. 둘째로, 그 속성들이 그러한 경우에서조차, 그것들은 화자의 용법에 대한 실제 지칭물에 대해 고유하게 참이 아니라 어떤 다른 것에 대해서도 참이거나 혹은 아무것에 대해서도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는 화자가 어떤 개인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을 가지는 경우이다. 그는 다른 개인에 관한 옳은 믿음들을 가지는 게 아니라, 특정 개인에 관한 잘못된 믿음들을 가진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그 지칭은 실제로 화자가 해당 이름을 사용하는 화자들의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름은 연결에서 연결로 구전되어 그에게 이행되었다.
두 번째로, 나는 일부 특수한 경우들, 특히 최초 세례식의 일부 경우들에서, 지칭물이 기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해당 속성이 여러 지시의 경우들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은 동의어를 제시하는 것, 이름이 그에 대해 축약인 어떤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 기술(혹은 속성)은 차라리 지칭을 고정시키고 있다. 그것은 해당 대상에 대한 일부 우연적 표식들로써 그 지칭을 고정시킨다. 그 대상을 나타내는 이름은 [107] 그래서 해당 대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그 대상이 문제의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반사실적 상황들을 지칭하는 경우에서조차 그렇게 사용된다. 1m 사례가 그 예시였다.
끝으로, 지난 강연의 말미에 우리는 동일성 진술들에 관해 논했다. 동일성 진술들은 아주 단순해 보일 테지만 철학자들에게는 어쩐지 아주 혼란스럽다. 나는 내 자신의 경우에서 이 관계에 의해 산출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혼동들을 바로잡을 수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일부 철학자들은 그 관계가 변경시켜야 할 만큼 혼란스러운 것임을 알아냈다. 예를 들어 만일 당신이 '키케로'와 '툴리' 같은 두 이름을 가지고 키케로가 툴리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키케로와 툴리 둘 모두인 대상에 대해 그것이 그 자체와 동일하다고 실제로 말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반대로, '키케로는 툴리이다'가, 내가 앞서 언급했듯, 경험적 발견을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일부 철학자들은, 프레게조차 그의 저술 초기 한 단계에서, 동일성은 이름들 사이의 관계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들이 말하기로 동일성은 대상과 대상 자체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이름들이 같은 대상을 지시할 때 두 이름 사이에 견지되는 관계이다.
이런 일은 더욱 최근 연구에서조차 나타난다. 내가 가지고 오진 않았지만, 특출난 논리학자 J. B. Rosser는 그의 책 Logic for Mathematicians에서1 우리가 오직 'x'와 'y'가 같은 대상에 대한 이름이라면 오직 그 경우에만 x=y라고 말한다고 썼다. 그는 대상 자체에 관한 합치진술(corresponding statement), 그 자체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진술이 물론 사소하다고, 또한 그렇기에, 추정컨데, 그 진술은 우리가 뜻하는 바의 것일 수 없다고 언급한다. 이는 동일성 관계여야 할 바의 것에 대한 유난히 특이한 전형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지극히 드물게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무장 흑인 민족주의 운동 외부에서는 아무도 'x'라고 명명된 적이 없다. 물론 진지하게 말해서 열린 문장 'x=y' 내의 'x'와 'y'는 전혀 이름이 아니고, 변항들이다. 또한 이것들은 닫힌 문장 내에서 종속 변수들로서 동일성을 갖고 출현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모든 x와 y에 대해, 만일 x=y라면 [108] y=x라고, 혹은 그와 같은 어떤 것을 말한다면, 해당 진술에서 아무런 이름도 출현하지 않고, 이름들에 관해 어떤 것이든 말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진술은 설령 인류가 존재한 적이 없었거나, 존재했더라도 이름에 대한 현상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참일 것이다.
만일 누구든 동일성에 대한 이 특수한 설명에 끌린다면, 그에게 그런 설명을 우리가 허락해줬다고 가정해 보자. 동일성이 영어에서 이름들 사이의 관계였다고 가정하자. 나는 내가 지금 대상과 그 대상 자체 사이에서만 성립하는 것으로 규정한 'schmidentity' (영단어가 아니다) 라고 불리는 인위적 관계를 도입할 것이다.2 그럼 이제 키케로와 툴리와 schmidentical한지 여부가 질문될 수 있고, 만일 그 질문이 제기된다면, 이것이 이름들 사이의 관계였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본래의 동일성 진술 경우에서 생각되었던 것과 같은 문제들이 이 진술에 대해서도 성립할 것이다. 만일 누구든 이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가 그리하여 동일성에 대한 그의 본래 설명이 본래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들에 대해 아마 필연적이지 않았겠다는 것을, 그리고 아마 가능하지 않았겠다는 것을, 또한 그러므로 그의 설명이 폐기되어야 할 것이며, 동일성은 사물과 그 사물 자체 사이의 관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리란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장치는 상당수의 철학적 문제들에 사용될 수 있다.
우리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이 어쨌든 참일 때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설령 그것을 선험적으로 알지 못할지 모른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가 개밥바라기별을 저녁에 [109] 보인 특정 별로 그리고 샛별을 아침에 보인 특정 별이나 특정 천체로 정체화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저녁과 아침에 바로 그 위치들에서 상이한 두 행성들이 보였을 가능세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최소한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모두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그럼 그 경우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저녁에 이 위치에서 보인 행성이 아침에 이 위치에서 보인 행성이 아니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은 아니다. 그건 또한 어쩌면, 만일 사람들이 이 행성들에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란 이름을 부여했더라면, 개밥바라기별과는 다른 어떤 행성이 '개밥바라기별'이라 불리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경우조차, 그것은 개밥바라기별 자체가 샛별이 아니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다.3
내가 언급했듯 이러한 상황들에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의 일부는 정체(동일)화로부터 유래하거나, 내가 제시할 것처럼, 우리가 미리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과 필연적인 것 사이의 혼동에서 유래한다. 특정 진술들―그리고 동일성 진술이 내 관점에서 보자면 그런 진술의 표준인데―만일 어찌됐든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이어야만 한다. 만일 그런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면 그 진술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선험적으로, 철학적 분석에 의해 안다.
한 가지 조건: 내가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는 필연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때 , 나는 물론 금성이란 그런 행성이 아예 없고, 그래서 개밥바라기별도 샛별도 전혀 없는 상황들이 성립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경우,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동일성 진술이 참일지, 거짓일지, 혹은 참도 아니고 [110] 거짓도 아닐지 여부가 문제이다.4 그리고 만일 우리가 마지막 선택지를 고른다면, '개밥바라기별 = 샛별'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필연적인가? 혹은 우리는 필연적 참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기를 요구해야 할까? 나는 그런 문제 일체를 내 고려사항 밖에 남겨두고 있다. 만일 우리가 좀 더 신중하길 바란다면,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그 진술을 조건문으로, '만일 개밥바라기별이 존재한다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고 대체할 수 있을 것이고, 주의깊게 오직 후자만이 필연적인 것으로 취하며 그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불행히도 이 조건문은 우리를 내가 여기서 논할 수 없는 문제, 존재의 단일 귀속 문제에 연루시킨다. 특히, 명명에 대한 기술구 이론에 호의적인 철학자들은 종종 대상에 대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하곤 한다. 대상의 현존에 관한 것으로 간주되는 진술은 실제로는, 주장된 바에 따르자면, 특정 기술 혹은 속성이 충족되는지 여부에 관한 진술이다. 내가 이미 언급했듯,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존재 문제들에 개입할 수 없다.
나는 이 지점에서 de re 양상에 관한, 본질 속성을 지니는 대상에 관한 여타의 고찰들이, 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선험성과 필연성 사이의 구분을 인지할 경우에만 제대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누군가는 본질을 경험적으로 아주 잘 발견해낼지도 모른다.
Timothy Sprigge의 논문에 본질 속성으로 상정되는 것들의 일부 사례들이 있다.
내재주의자는 [일부 본질 속성이 있다고 믿는 자를 의미한다] 여왕이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났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가 뜻하는 바는 이 개인이 왕가의 혈통으로 태어났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본질주의자는 그 여왕이 사실은 그녀의 부모로 여겨진 자들의 자식이 아니었고, 그들에게 비밀리에 입양되었다는 것이 확정되었다고 전하는 뉴스 보도에 아무런 모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라는 명제는 종합 명제이다. . .
[111] 꽤 오랜 시간 [반-본질주의자]가 승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약간 지나치게 억지스러워 보이는 시점이 온다. 내재주의자는 우리가 여왕이라 부르는 개별자가 그녀의 현존 중 어떤 단계에서도 인간이라는 속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추정한다. 만일 반-내재주의자가 이를 인정한다면, 그 여왕이 말하자면 언제나 백조로 있다는 속성을 가졌으리란 것이 논리적으로 구상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럼 그는 그녀가 최소한 하나의 내재적 속성을 지닌다는 점을 인정한다. 만일 다른 한편으로 그가 여왕이 인간이었던 것은 우연적 사실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수용하기 곤란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인간이 결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구상 가능한 것으로 정말로 고려할 수 있는가?5
'그녀의 현존 중 어떤 단계에서도'와 '언제나'는 그녀가 지금 당장 백조로 변할, 생각해 보자면 사악한 마녀나 상냥한 마녀에 의해 그렇게 될 가능성들을 허용하기 위해 도입하는 정당화 요소들로 추정된다.
이 논의 속에서 내가 발견한 한 가지 혼동은 첫 번째 사례에서 스프리지가 우리가 그 여왕이 실제 그녀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발표를 가졌다고 가정함에 있어서 어떤 모순이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해 논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경우 아무런모순도 없다. 그렇더라도, 유사하게, 우리가 이것을 여성인 것으로 생각한 그 여왕이 사실은 인간 모습을 한 천사였거나, 서출에게 승계가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 왕가에 의해 영리하게 설계된 자동기계였거나 혹은 그런 어떤 것이었다고 하는 발표에도 아무런 모순은 없다. 이 발표들 중 어느 쪽도 우리가 가능적으로 발견하지 못할 것들을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여인에 관련하여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었을지 혹은 인간이었을지 물을 때 묻고 있는 그 질문은 무엇인가? 왕가의 혈통이란 것은 조금 복잡한데, 왜냐하면 그녀가 왕가의 혈통이었다는 것이 필연적이기 위해서는 이 특정 가계가 어떤 시점에 왕권을 획득하였다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의 사실은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112] 그러므로 나는 그녀의 혈통이 왕족이었으리란 것이 우연적이라고 추정한다.
그 질문을 좀 더 다듬어 보자. 그 질문은 실제로 이런 것이어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여왕, 바로 이 여인 자신이, 실제로 그녀의 부모와는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을 수 있었는가? 말하자면, 그녀는 그 대신 트루먼 부부의 딸이었을 수 있었는가? 물론 (희망하건데 이 일이 나이 때문에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길 바란다) 허황되게 들리지만 그녀가 트루먼 부부의 딸이었다는 발표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을 것이다. 나는 심지어, 어느 쪽 가설에서든 그녀에게 마가렛이라 불리는 자매가 있다는 것이 어쨌든 매우 의심스러워 보인다지만, 이 두 마가렛이 교묘한 방법으로 날아다닌 동일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에도 아무런 모순이 없을지도 모를 것이라 추정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알게되는 일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발견이 실제로 사실은 아니라고 가정하기로 하자. 여왕이 실제로 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부모란 무엇인지에 관해 너무 복잡하게 따지지는 말고, 부모란 그들의 신체 조직이 생물학적으로 정자와 난자의 기원인 사람들이라 하도록 하자. 그럼 당신은 아버지의 정자나 어머니의 난자를 다른 신체에 이식했다거나 해서 한 가지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부모였을지 몰랐다는 작위적인 가능성들을 제거하게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또 다른 의미에서 그녀의 부모는 여전히 본래의 왕과 왕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 바로 이 여성이 트루먼 부부로부터 유래하는 일이 일어났을 그러한 상황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가? 그 부부는 어쩌면 그녀와 여러 속성들이 유사한 아이를 지녔을지도 몰랐다. 아마 어떤 가능세계에서 트루먼 부부는 실제로 영국 여왕이 된 그리고 다른 부모의 자식으로 위장된 아이를 가지기까지 했을 것이다. 이 상황은 여전히 우리가 '엘리자베스 2세'라고 부르는 바로 이 여성이 트루먼 부부의 자식이었던 상황은 아닐 것이거나, 내게 아닌 것으로 보인다. [113] 그것은 실제로 엘리자베스에 대해 참인 속성들 상당수를 지닌 어떤 다른 여성이 있었던 상황일 것이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은, 이 가능세계에서, 엘리자베스 그녀 자신은 태어난 적이 있기는 한가? 그녀가 태어난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 상황은, 트루먼 부부가 엘리자베스의 속성들 상당수를 갖춘 자식을 가지더라도, 엘리자베스 그녀 자신은 아예 존재한 적조차 없는 상황일 것이다. 당신이 이 상황을 기술하는 방식을 숙고함으로써만 이에 대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내가 추정하기로, 많은 경우 당신은 이에 대해 납득하지 못할 것이고, 최소한 즉각 납득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납득한 점이다.)
어떻게 다른 부모에게서, 총체적으로 다른 정자와 난자로부터 기인한 개인이 바로 이 여성일 수 있겠는가? 누군가는 만일 그 여성이 가정된다면, 그녀의 삶에서 다양한 것들이 변할 수 있었을 것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녀가 빈민이 되었으리라거나, 그녀의 왕가 혈통이 알려지지 않았으리라거나, 기타 등등. 누군가에게 그 세계의 선행하는 역사가 특정 시점까지 주어진다고, 그리고 그 시점으로부터 그 역사가 실제 경로로부터 유의하게 분기한다고 해 보자. 이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령 그녀가 이 부모들로부터 태어났다 할지라도 그녀가 결코 여왕이 되지 않은 것도 그렇게 가능하다. 심지어 이 부모로부터 그녀가 태어났었더라도, 마크 트웨인의 소설 등장인물처럼6 그녀가 또 다른 소녀와 뒤바뀌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그녀가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내게는 다른 기원으로부터 유래하는 어떤 것도 이 대상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상의 경우,7 우리는 이 책상이 어떤 나무토막으로부터 유래했는지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이 책상이 완전히 다른 나무토막으로부터 제작되었거나, 교묘하게 얼음으로 경화된 물로, 템즈 강에서 가져온 물로 제작되었을 수 있었는가? 우리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달리, 이 책상이 그 강에서 유래한 얼음으로 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114]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우리가 다른 나무토막으로 혹은 심지어, 이 책상과 외견상 동일한, 얼음으로 책상을 만드는 것을 상상할 수 있더라도, 또 우리가 그 책상을 이 방 안의 바로 이 위치에 둘 수 있었을지라도, 내가 보기에 이건 이 책상을 다른 나무나 얼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또 다른 책상, 모든 외적 세부사항들에서 이 책상과 유사한, 또 다른 나무토막 혹은 심지어 얼음으로 제작된 그런 다른 책상을 상상하는 것이다.89
[115] 이 사례들은 오직 본질 속성들에 대한 사례일 뿐이다.10 나는 [116] 내가 지난 강연에서 언급했던 바, 실체들과 실체의 속성들 그리고 자연 종의 속성들에 대한 용어들 사이의 일부 동일성에 대한 더 일반적인 경우를 다루고자 하기에 더 이상 그 문제들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했듯 철학자들은 이론적 동일성을 표현하는 진술들에 매우 큰 흥미를 보였다. 그러한 진술들 중에는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거나, 물은 H2O라거나, 번개는 방전이라거나, 금은 원자번호 79번 원소라는 진술 등이 있다.
이러한 진술들의 상태에 관하여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금과 같은 그런 실체들의 상태에 관한 일부 사유들을 고려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금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철학자들에게 흥미를 유발해온 사례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금에 대한 재계의 흥미는 통화 안정성 증가로 인해 감소하고 있다.11 그렇지만 금은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를 유발해 왔다. [117] 다음은 임마누엘 칸트가 금에 관해 말한 바이다. (그는 그의 재산을 침대 밑에 둔 부유한 투기꾼이었다.)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사이의 구별을 도입하면서 말한다. '모든 분석 판단은 전적으로 모순율에 의존하고, 그 본성상 선험적 인지로서, 그 판단에 재료를 제공하는 개념이 경험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러하다. 왜냐하면 긍정 분석 판단의 술어는 이미 주어의 개념 내에, 그 술어가 해당 주어에 대해 모순 없이 부정될 수 없는 그러한 주어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 바로 이러한 이유로 모든 분석 판단은 선험적인데, 개념이 경험적인 때조차 그러하니, 예를 들어, "금은 황색 금속이다"와 같은 것이다. 이를 알기 위해 나는 황색 금속이라는 금에 대한 나의 개념을 넘어서는 아무런 경험도 요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바로 그 개념이고, 나는 그 개념을 그 개념 넘어서 살펴보는 일 없이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12 나는 독어판을 살펴봐야 했다. '사실 그것이 바로 그 개념이다(It is in fact the very concept)'라는 것은 마치 칸트가 여기서 '금'은 단지 '황색 금속'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만일 그가 그리 말하고 있다면, 그건 특히나 이상하고, 그럼 저것이 그가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니라고 가정해 보도록 하자. 적어도 칸트는 금이 황색 금속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는 우리가 이 점을 선험적으로 안다고, 그리고 우리는 이 일이 경험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을 가능적으로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관해 칸트는 옳은가? 첫째로, 내가 하고자 했을 일은 금속으로 있는 금에 관한 부분을 논의하는 것이었을 터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복잡한 일인데, 왜냐하면 우선, 내가 화학을 그다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딱 한 쌍의 문헌을 들여다 보다가, 나는 금속에 대한 좀 더 현상학적인 설명 속에서 금속이란 무엇인지 말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하는 진술을 발견했다. (가단성, 연성, 그런 것들에 관해 논하지만, 그 중 어느 것 하나 정확히 들어맞진 않는다.) 다른 한편, 주기율표에 관한 어떤 것이 금속으로서의 원소에 대한 [118] 기술을 원자가 속성들을 통해 제공했다. 이 기술은 어쩌면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여기에서 역할을 하는 금속 개념이 실제로 두 개 있다고, 현상학적 개념과 그것을 대체하는 과학적인 개념이 있다고 곧장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기술을 거부하지만, 그런 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매혹적일 것이고, 오직 내가 내 고유한 관점을 전개시킨 이후에만 반박될 수 있을 것이기에, '금은 금속이다'라는 것을 이러한 관점들을 도입시키는 사례로서 사용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더 쉬운 어떤 것을 고려해 보자. 금의 노랑(yellowness)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금이 사실은 노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시각적 환각이 횡행했었다고, 남아프리카와 러시아 그리고 금광이 흔한 다른 지역들에서 대기의 기이한 속성들로 말미암아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해당 실체를 노란 것으로 보이도록 만든 시각적 환각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하지만, 사실, 일단 그 대기의 기이한 속성들이 제거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푸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악마가 금광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들의 시각을 변질시켜서 (분명 그들의 영혼은 이미 변질되었다), 그 실체가 노랗지 않더라도, 그 실체가 노랗다고 믿도록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문에 이런 발표가 있었을까? '아무런 금도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금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사실 금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 하에 전세계 금융 위기를 상상해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통화 제도 내 불안정성의 꿈에도 생각 못한 원천을 가진다.
그런 발표는 전혀 있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발표되었을 내용은 금이 노랗다고 보였다 하더라도, 사실 금은 노란 것이 아니라, 푸른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었으리라. 내 생각에 그 이유는 우리가 '금'을 특정 종류의 사물에 대한 용어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종류의 사물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에 대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화자 공동체의 일부로서 우리 자신들 사이의 특정 연관을 지니고 특정한 종류의 사물을 지닌다. 그러한 종류의 사물은 특정한 정체화 표시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이 표식들 중 일부는 실제로 금에 대해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119] 그 표식들에 대해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우리가 통상 금에 귀속시켰고 처음에 그것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했던 모든 정체화 표식을 지니는, 하지만 같은 종류의 사물이 아니고 같은 실체가 아닌 그런 실체가 있을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런 사물에 대해 설령 그것이 우리가 애초에 금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한 모습들을 모두 지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금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었다. 그런 사물은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알듯 황철광 또는 바보의 금이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금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금으로서 발견하고 그렇게 부른 실체처럼 문외한에게 보이는 완전히 다른 사물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우리가 금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변경하고 철광석과 금을 구별한 어떤 다른 기준을 얹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내게는 그것이 거짓이라고 보인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그로써 금을 정체화한 초기 정체화 표식들에 더하여 특정 속성들이 금에 대해 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금의 특징이자 철광석에 대해서는 참이 아닌 이러한 속성들은 바보의 금이 사실 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이 점을 또 다른 사례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사례는 이런 것이다.13 '나는 "'tiger'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의미를 지닌다"라고 말한다. . . . 만일 내가 "tiger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tiger는 대형 육식의 네 발 달린 고양잇과 동물로, 색은 황갈색에 검은 가로 줄무늬에 하얀 배"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Shorter Oxford English Dictionary "tiger" 항목에서 발췌.)' 그리고 이제 누군가가 '당신은 "tiger"가 영어에서 의미하는 바를 말했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지프가 묻는다. '그런가?' 그는 적절하게 말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시는 이것이다. '정글의 공터에서 누군가가 "봐, 세 발 달린 호랑이야!"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라. 누군가가 혼동해야만 하나? "세 발 달린 호랑이"라는 구는 형용모순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tiger"가 영어에서 다른 것들 중에서도 네발동물 혹은 네발달림을 의미했더라면, "세 발 달린 호랑이"는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20] 그래서, 그의 예시는 만일 호랑이가 네 다리를 가진다는 것이 호랑이의 개념의 부분이라면, 세 다리 호랑이는 있을 수 없었으리란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많은 철학자들이 '군집 개념(cluster concept)'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는 종류의 사례이다. 우리가 호랑이는 절대로 네 다리를 가지지 않는다고 알게 되리라고 가정하는 일은 모순되기까지 하는가? 이러한 속성들을 호랑이들에게 귀속시킨 탐험가들이 시각적 환각에 의해 기만당했다고, 그리고 그들이 봤던 동물들이 세 발 달린 종들로부터 유래했다고 가정해 보면, 우리는 도대체 아무런 호랑이도 전혀 있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하게 될까? 나는 우리가 탐험가들을 기만한 그 시각적 환각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들은 사실 세 다리를 가진다고 말할 것이라 생각한다.
더욱이, 이러한 사전적 기술을 충족시키는 어떤 것이든 필연적으로 호랑이라는 것은 참인가? 내게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여기에서 기술된 호랑이의 외재적 모습들을 모두 가지면서도, 호랑이의 내적 구조와는 완전히 다른 내재적 구조를 지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로 '고양잇과(feline)'이라는 단어가 여기 들어가 있어서, 그것이 전적으로 공정하지는 않다. 이 사례를 위해 그 단어는 빠졌다고 가정해 보자. 호랑이가 어쨌든 특정한 생물학적 가계에 속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게되었던 어떤 것이다. 만일 '고양잇과'라는 것이 고양이의 외견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면, 호랑이가 큰 고양이의 외견을 지닌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어쩌면 호랑이처럼 보일지라도, 조사결과 포유류조차 아닌 것으로 밝혀진 동물들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 동물들이 사실은 매우 특이하게 생긴 파충류들이었다고 말해 보자. 그럼 우리는 이 기술에 기반하여 일부 호랑이들은 파충류라고 결론내리는가? 우리는 그리 하지 않는다. 우리는 차라리 이 동물들이, 우리가 그로써 본래 호랑이를 정체화했던 외적 표지들을 가진다 하더라도, 사실은 호랑이가 아니라고, 왜냐하면 그 동물들이 우리가 '호랑이의 종'이라 부른 그 종과 같은 종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릴 것이다. 이제 내 생각에 이렇게 되는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말할 것처럼 호랑이의 구 개념이 새로운 과학적 정의에 의해 교체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호랑이의 내적 구조가 연구되기 전부터 호랑이라는 개념에 대해 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우리가 호랑이의 내적 구조를 [121]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호랑이들이 특정 종 혹은 자연 종을 형성한다고 추정한다. 우리가 옳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럼 우리는 호랑이의 모든 외적 모습을 지니더라도, 그것이 같은 종류의 사물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만큼 충분히 내적으로 호랑이와는 다른 피조물이 있을 것이라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내적 구조에 관하여 어떤 것도, 이 내적 구조가 무엇인지 알지 않고도 그 피조물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는 나아가 우리가 '호랑이'라는 용어를 한 종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그리고 이 종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이든, 설령 그것이 호랑이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호랑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 그로써 우리가 본래 호랑이를 정체화한 그 모든 속성을 지닐지도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또한 호랑이가 본래 우리가 그로써 호랑이를 정체화한 그 속성들 중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고 알게 될지도 몰랐다. 아마 아무것도 네발달리지 않고, 아무것도 황갈색이지 않고, 아무것도 육식이지 않고, 기타 등등인 그런 식일 것이다. 이러한 모든 속성들이 시각적 환각이나 여타 오류에 기반한 것으로, 앞서 금의 경우처럼, 그렇게 밝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호랑이'라는 용어는, '금'이라는 용어처럼, 그 안에서 해당 종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속성들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 대부분이 충족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군집 개념'를 표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러한 속성 대부분의 소유는 해당 종의 구성원이기 위한 필요조건일 필요도 충분조건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의심했던대로 호랑이들이 단일종을 형성한다는 점을 알아냈기에, 이 종에 속하지 않는 어떤 것은 호랑이가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종이 있다고 가정하면서 실수했을지도 모른다. 선제적으로, 우리는 호랑이들이 아마 종을 형성하리라고 가정한다. 과거의 경험은 이와 같은 것들이 통상적으로 함께 살고 비슷하게 보이며 같이 짝짓기하면서 종을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만일 우리가 생각한 만큼은 아니라도 서로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두 종류의 호랑이들이 있다면, 어쩌면 그 호랑이들은 더욱 큰 생물학적 가계를 형성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들이 서로 완전히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실제로 두 종류의 호랑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건 모두 역사에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발견해낸 바에 의존한다.
[122] 이런 종류의 고찰을 가장 크게 인지하는 것으로 내가 찾은 철학자는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우리의 사유는 별도로 전개되었다) 퍼트남이다. 'It Ain't Necessarily So'라는 논문에서,14 그는 종에 관한 진술에 대해, 그 진술이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진술보다 '덜 필연적' (그가 신중하게 말하는 것처럼) 이라고 말한다. 그가 제시하는 사례는 '고양이는 동물이다'이다. 어쩌면 고양이가 자동기계인 것으로, 혹은 마술사가 심어둔 이상한 악마로 (그의 사례는 아니지만) 밝혀질지도 몰랐다. 고양이가 악마종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의 관점에서, 그건 내 관점이라고도 생각하는데, 우리의 경향성은 아무런 고양이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하는 쪽이 아니라, 고양이가 우리가 본래 가정했던 것처럼 동물이지는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하는 쪽으로 기운다. 본래의 고양이라는 개념은 이것이다. 그 종류의 것, 해당 종류가 표준적인 예화들로 정체화될 수 있는 경우의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질적인 사전적 정의에 의해서 뽑힌 어떤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퍼트남의 결론은 '고양이는 동물이다' 같은 진술이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진술보다 '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나는 그 논증이 그런 진술들은 선험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그러므로 분석적이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데에 동의한다.15 제시된 종이 동물 종인지 여부는 [123] 경험적 탐구의 문제이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론적 뜻이 퍼트남이 '필연'으로 의도한 바일 것이다. 그런 진술들이 이 강연에서 지지하는 그런 비-인식론적인 뜻에서 필연적인지 여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그래서 다음으로 탐구해 볼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그에 관해 논했던 그 필연성 개념을 사용해서): '고양이들은 동물들이다' 같은 진술들, 혹은 '금은 황색 금속이다' 같은 진술들은 필연적인가?
여기까지 나는 오직 우리가 발견해낼 수 있을 것에 관해서만 논해왔다. 나는 우리가 금이 사실은 ,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반대로, 황색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라 말해왔다. 만일 누군가가 금속 개념에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어간다면, 원자가 속성으로 말해서, 누군가는 금이 금속이라 간주했을지라도, 금이 사실 금속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발견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금이 금속이라는 것은 필연적인가 아니면 우연적인가? 나는 금속이라는 개념에 관해 더 자세히 파고들고 싶지는 않다. 내가 말했듯, 나는 그에 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금은 명백히 원자번호 79를 가진다. 금이 원자번호 79를 가진다는 것은 금의 필연적 속성인가 아니면 우연적 속성인가? 확실히 우리는 우리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양성자에 관한, 원자 번호에 관한 전체 이론, 분자 구조와 원자 구조에 관한 전체 이론, 그런 관점들에 토대가 되는 이론들이 모두거짓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선사시대부터 그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금은 원자 번호 79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금이 원자 번호 79를 가진다고 가정하면, 원자 번호 79를 가지지 않고 어떤 것이 금일 수 있는가? [124] 과학자들이 금의 본성을 조사했고, 말하자면, 금이 원자 번호 79를 가진다는 것이 이 물체의 바로 그 본성의 일부임을 알아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제 어떤 또 다른 황색 금속 혹은 어떤 다른 황색 물체, 원래 우리가 금을 정체화할 때 사용하던 모든 속성들과 우리가 이후에 발견한 추가적인 속성들을 다수 지닌 그런 것을 발견한다고 가정해 보자. 기초적 속성들 다수를 지닌 것의 사례로는 황철광, '바보의 금'이 있다. 내가 언급했듯, 우리는 이 물체가 금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우리는 실제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제 가능세계를 고려해 보자. 바보의 금 혹은 황철광이 미국의 여러 산에서, 혹은 남아프리카와 소련의 지역들에서 실제로 발견되었던 반사실적 상황을 고려해 보자. 실제로 지금 금을 품고 있는 모든 지역들이 그 대신 황철이나 혹은 금의 피상적 속성들을 모조했지만 금의 원자 구조는 결여한 어떤 다른 물체를 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16 우리는 이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그 상황에서 금이 원소조차 아니었다고 (황철광이 원소가 아니기 때문에) 말하겠나? 내겐 우리가 그리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우리는 이를 한 실체, 말하자면 금이 아닌 황광철이 실제로 금을 포함한 바로 그 산에서 발견되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그로써 금을 정체화하는 바로 그 속성들을 지녔을 것인 상황으로 기술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금이 아닐 것이고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그것이 이 가능세계에서 여전히 금일 것이라고, 설령 금이 원자번호 79를 결여할지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다른 물질, 다른 실체일 것이다.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반사실적으로 그것을 '금'이라고 불렀을 것인지 여부는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금으로서 기술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게 보이기로는 그렇게 이것은 가능적으로 금이 원소가 아니었을지도 모를 상황도 아닐 것이고, [125] 그런 사례가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가능'의 인식론적 의미로 보는 경우를 제외하고). 금이 이 원소라는 것을 가정하면, 어떤 다른 실체도, 설령 그것이 금처럼 보이고 우리가 실제로 금을 발견하는 바로 그 장소들에서 발견된다 하더라도, 금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금에 대한 모조품이었던 어떤 다른 실체일 것이다. 똑같은 지리적 영역들이 그런 실체로 채워졌던 어떤 반사실적 상황에서도, 그 영역들은 금으로 채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 영역들은 다른 어떤 것으로 채워졌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이러한 고찰이 옳다면, 그 고찰은 이 물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그러한 진술들이 우연적 참이 아니라 가장 엄밀한 가능의 의미에서 필연적 참임을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단지 그것이 과학 법칙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당연히 그것이 거짓일 수 있었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들이 그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거를 형성한다는 전제 하에서,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 실체를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세계든 우리가 금이 아닌 실체를 상상하는 세계이다. 그래서 특히 현대 과학 이론은 우리가 금을 원자번호 79를 가진 우너소로 간주하는 금의 그 본성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금이 원자번호 79 원소라는 것은 필연적이지 우영넞ㄱ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아마 같은 식으로 우리가 금이 무엇인지 알아낸 바로부터 어떻게 색과 금속적 성질들이 도출되는지 추가로 조사할 것이다. 그러한 속성들이 금의 원자 구조로부터 도출되는 한, 그 속성들은 금에 대해 필연적 속성들인데, 설령 그 속성들이 의심할 여지 없이 '금'의 의미의 일부가 아니고 선험적 확실성을 동반하여 알려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퍼트남의 '고양이들은 동물이다'라는 예가 같은 표제 아래에 놓인다. 우리는 사실 이 사례에서 매우 놀라운 발견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믿음에 반하는 아무런 것도 찾지 못했다. 고양이들은 실제로 동물이다! 그래서 이 참은 필연적 참인가 아니면 우연적 참인가? 내게 보이기로는 그것은 필연적이다. [126] 이러한 피조물들―이러한 동물들―의 자리에서 우리가 실은 불운을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는 작은 악마들을 발견하는 반사실적 상황을 고려해 보라. 우리는 이 상황을 고양이들이 악마인 상황으로 기술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 이 악마들은 고양이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유사-고양이 형태의 악마일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양이들이 악마들이라는 것을 발견했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그 고양이들이 악마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우리가 그런 악마들이 주위에 있었던 반사실적 세계를 기술할 때, 우리가 그 악마들은 고양이들이 아닐 것이라고 말해야만 한다는 점은 그 고양이들의 바로 그 본성의 일부인 것이다. 그 가능세계는 고양이를 가장하는 악마들을 포함하는 세계일 것이다. 우리가 고양이들이 어쩌면, 특정한 종에 속한, 악마들인 것으로 드러났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고양이들이 실제로 동물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동물이 아닌 그 어떤 유사-고양이 존재든, 실제 세계에서든 반사실적 세계에서든, 고양이가 아니다. 같은 논리가 고양이의 외견을 지니지만 파충류의 내적 구조를 지닌 동물들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그런 것들이 존재할지라도, 고양이는 아닐 것이고, '바보들의 고양이'일 것이다.
이는 개별 대상의 본질에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 이를 테면, 분자 이론은 여기 이 대상이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이는 확실히 중요한 경험적 발견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알지 못했던 어떤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에게 알려지기로 어떤 에테르적 활력으로 구성되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여기 바로 이 위치를 점유하는 대상이 에테르적 활력이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은 여기 바로 이 대상이었을까? 그것은 이 대상의 모든 외견을 지녔을지도 모르지만, 내게 보이기로는 그것은 결코 이 사물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물의 우여곡절은 그것의 실제 역사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것은 크레믈린으로 운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미 산산조각으로 썰려나가 현재 시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것에 다양한 일이 일어났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일어난 일과 달리 그것에 반사실적으로 일어났을 것으로 무엇을 상상하든지 간에, 우리가 이 사물에 일어나는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한 가지 것은,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된다는 점이 전제될 때, 그것이 [127] 여전히 존재했었을 것이었으면서도 분자로 구성되지는 않았던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이 분자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던 상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가 이것이 분자로 구성된 사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이것이 그것을 이루는 구성요소인 실체의 바로 그 본성이다―그럼 우리는 최소한 만일 내가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이 옳다면 이 사물이 분자로 구성되는 일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수 없다.
내가 지지하는 관점에 따르면, 그래서, 자연종들은 일상적으로 추정되는 것보다 훨씬 더 고유명사들에 근접하다. '보통 명사'라는 구식 용어는 그래서 '소'나 '호랑이' 같은 종들이나 자연종들을 짚어내는 술어들에 상당히 적절하다. 그렇지만 나의 고찰은 또한 '금,' '물' 같은 그런 자연종들에 대한 특정 물질 명사들에도 적용된다. 나의 관점을 밀의 관점과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밀은 '소' 같은 한정 기술구들과 이름들로서의 고유명사들 모두를 고려한다. 그는 '고유' 명사들에 대해 그것들이 만일 한정기술구들이라면 함축적이지만 고유명사들이라면 비-함축적이라고 말한다. 다른 한편, 밀은 모든 '일반' 명사들은 함축적이라고 말한다. '인간 존재' 같은 그런 술어는 인간성의 필요충분조건들을 부여하는 특정 속성들―합리성, 동물성, 특정 물리적 특징들의 연언으로 정의된다.17 프레게와 러셀로 대표되는 현대 논리학적 전통은 밀이 단칭명사에 대해서는 틀렸지만 보통명사들에 대해서는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 최근의 철학도, 고유명사와 자연종 두 경우 모두에서 그것이 종종 정의적 속성들이라는 개념을 속성 다발이란 개념으로, 그 중 오직 일부만이 각 개별 사례에서 충족될 필요가 있는 그런 것으로 교체한다는 점을 제외하고, 전례를 따랐다. 반면에 나 자신의 관점은 밀이 '단칭' 명사에 관해서는 다소 옳지만, '보통' 명사에 관해서는 틀렸다고 간주한다. 아마도 일부 '보통' 명사들은 ('foolish', 'fat', 'yellow') [128] 속성들을 표현한다. 18 중요한 의미에서, '소'와 '호랑이' 같은 보통 명사는 속성을 표현하지 않는데, 소로 있음이 평범하게 속성으로 간주되지 않는 한 그러하다. 확실히 '소'와 '호랑이'는, 밀이 생각했던 것처럼, 사전이 정의를 위해 취할 속성들의 연언에 대한 축약이 아니다. 과학이 경험적으로 특정 속성들이 소에 대해, 혹은 호랑이에 대해, 필연적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지 여부는 내가 긍정적으로 답하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것이 어떻게 내가 앞서 논한 과학적 발견들을 표현하는 유형의 동일성 진술들에 적용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말하자면, 물은 H2O라는 진술 말이다. 그것은 확실히 물이 H2O라는 발견을 표현한다. 우리는 원래 물을 그 특징적인 느낌, 외양 그리고 아마도 맛으로 정체화했다 (그 맛이 보통 불순물들 탓일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만일 심지어 실제로 물과는 완전히 다른 원자 구조를 가졌지만, 이러한 측면들에서 유사한 물질이 있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물은 H2O가 아니었다고 말했을까? 내 생각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 대신 바보의 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보의 물이 있을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가 원래 물을 정체화했던 속성들을 가지더라도, 실제로 물은 아니었을 물질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생각에 실제 세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들에 대해 말할 때에조차 적용된다. 만일 바보의 물인 그런 물질이 있었더라면, 그것은 바보의 물이지 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이 물질이 또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다면― [129] 소비에트 연방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되는 중합수는 우리가 오늘날 물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매우 다른 정체화 표지들을 지닌다―그것은 물의 한 형태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설령 우리가 원래 물을 정체화했던 그 외양들을 지니지 않을지라도 같은 물질이기 때문이다.
'빛은 광자의 흐름이다' 또는 '열은 분자의 운동이다'라는 진술을 고려해 보자. 빛을 지칭함으로써, 물론, 나는 그 일부를 우리가 이 방 안에 가직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열을 지칭할 때, 나는 누군가가 가질지도 모르는 내재적 감각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외재적 현상을 지칭한다. 그것은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특징적 감각을 산출한다.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다. 우리는 또한 열을 증가시키는 것이 분자들의 운동을 증가시킨다는 것에 상응한다는 것, 엄밀히 말해서, 분자들의 평균적 운동 에너지를 증가시키는 것에 상응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온도는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와 동일시된다. 그렇지만 나는 온도에 관해 말하지 않을 것인데, 어떻게 실제 척도를 정할 것인지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균 분자 운동 에너지를 통해 정해질지도 모른다.19 하지만 흥미로운 현상학적 발견을 표현하는 것은 더 뜨거워질 때 분자들이 더욱 빨리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빛에 관해서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또한 발견하였다. 본래 우리는 빛을 빛이 우리에게 산출해 넣을 수 있는 특징적인 내재적 시각 인상,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을 통해 정체화했다. 다른 한편, 열은 본래 우리의 신경 말단들 중 한 측면이나 우리의 촉각에 미치는 특징적 영향을 통해 정체화하였다.
인간 존재들이 맹목이었고 눈이 작동하지 않았던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들은 빛에 영향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빛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을까? [130]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빛을 감지하지 못할 상황이었을 것이다. 어떤 피조물들은 빛을 감지하지 못하는 눈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런 피조물들 중에 불행히도 물론 일부 사람들이 속한다. 그들은 '맹인'이라 불린다. 설령 모든 인간이 흉측한 흔적기관을 지녔고 사물을 볼 수 없었을지라도, 빛은 주위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눈에 적합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그런 상황이 빛은 있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볼 수는 없던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빛을 그것이 우리 안에 산출해 넣는 특징적인 시각적 인상으로써 정체화할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이는 지칭 고정의 좋은 사례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빛이 무엇인지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외부 세계에서 우리의 눈에 특정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사실로써 고정한다. 하지만 이제, 말하자면 사람들이 맹인이었을 반사실적 상황들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아무것도 그들의 눈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에, 빛이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빛이―실제로는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으로 정체화시켰던 것― 존재했지만 우리의 어떤 결함으로 인해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할 방법이 없었던 상황일 것이라 말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어떤 기적에 의해 음파가 어떤 식으론가 일부 피조물들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상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말은, 음파가 우리가 가지는 것과 같은 시각적 인상을, 어쩌면 정확히 똑같은 색 감각을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똑같은 피조물이 빛(광자)에 완전히 무감각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꿈에도 생각 못한 절묘한 가능성들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그런 가능세계에서 빛이었던 것은 소리였다고 말할까, 이러한 대기 중의 파형 운동들이 빛이었다고 말할까? 빛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전제하면, 우리는 그 상황을 달리 기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특정 피조물들, 어쩌면 '사람들'로 불렸을 그리고 이 행성에 거주하였을 그런 것들이, 빛을 감지하지는 못하지만 음파는 감지할 수 있었던, 그런데 우리가 빛을 감지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음파를 감지할 수 있는 상황일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일단 우리가 빛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131] 우리가 다른 가능세계들에 관해 말할 때 그 세계 내의 이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고, '빛'을 '무엇이든 우리에게 시각적 인상을 주는 것―무엇이든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라는 말과 동음이의어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은 있었을 테지만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른 어떤 것이 우리를 볼 수 있게 해줬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빛을 정체화한 방식은 지칭을 고정시켰다.
'열' 같은 또 다른 그런 표현들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여기에서 열은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특정 감각을 제공한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정체화한 (그리고 그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킨) 어떤 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이 감각에 대해 열감 외에 특별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언어가 이런 방식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반면에 당신은 내가 말한 바를 통해 그것이 다른 방식을 가졌을 것으로 가정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우리는 열이 우리 안에 열감을 산출해 넣는다는 사실로써 열을 정체화하고 그것을 감각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만일 다른 누군가가 모종의 도구로써 열을 탐지해내지만, 그것을 느끼지는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바란다면, 설령 열의 지칭이 같다 할지라도 열이라는 개념은 같지 않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 지칭이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개념에 매우 중요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이라는 용어는 '무엇이 되었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감각들을 제공하는 바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첫째로, 사람들은 열에 대한 감각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열은 여전히 외부 세계에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어떤 식으론가 광선들이, 그들의 신경 말단 내 모종의 차이들로 인하여, 그들에게 이러한 감각들을 제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것은 열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우리가 열감이라 부르는 감각을 제공한 빛일 것이다.
그럼 우리는 열이 분자 운동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가? 물론 우리는 그런 가능세계를 발견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작성중-
- New York, McGraw-Hill (1953), see Chapter VII, 'Equality'. [본문으로]
- 물론, 그 장치는 그 가정된 유형의 인공 언어나 개념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자 하는 철학자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실패할 것이다. 지금의 경우, 일부 철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이항인 관계가 사물과 그 사물 자체 사이에서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입장은 노골적으로 부조리하다. 누군가는 그 자신의 최악의 적일 수 있고, 그 자신의 가장 가혹한 비평가일 수 있으며 그와 같은 것들일 수 있다. '전혀 더 부유하지 않은' 같은 어떤 관계들은 재귀적이다. 동일성 혹은 schmidentity는 그저 최소한의 재귀적 관계에 다름 아니다.
나는 별도의 가설적 언어를 상상하는 이러한 장치의 유용성을 상술하기를 바란다. [본문으로]
- 우리가 해당 상황을 우리의 언어로 기술하며 해당 상황 내부의 사람들이 사용하였을 언어로 기술하지 않는다는 점을 상기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란 용어를 현실 세계에서와 똑같은 지시를 가지고 사용해야만 한다. 해당 상황 속 사람들이 이 이름들을 상이한 행성들에 대해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았거나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상관이 없다. 그들이 우리가 그 이름들의 지시들을 고정시키고자 했던 것과 똑같은 기술들을 사용하여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으로]
- '개밥바라기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에 대해서도 세 가지 같은 선택지가 존재하고, 그 답은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의 경우와 같은 것이어야만 한다. [본문으로]
- 'Internal and External Properties', Mind 71 (April, 1962), pp. 202-03. [본문으로]
- The Prince and The Pauper. [본문으로]
- 물론 나는 그 방 안의 목재 책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본문으로]
- 이 예시들을 통해 시사되는 원칙: 만일 물질적 대상이 특정 물질 덩어리에 그 기원을 가진다면, 그 대상은 다른 어떤 물질에도 그 기원을 두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부 질적 규정들이 진술되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물질 덩어리라는 개념의 모호성은 일부 문제를 유발한다), 대체적인 경우 그 원칙은 아마 일종의 증명 같이, 개별자들에 대해 동일성의 필연성이라는 원칙을 사용함으로써, 수용가능할 것이다. 'B'가 한 책상의 이름(고정 지시자), 'A'가 그 책상이 실제로 유래한 나무 조각의 이름이라 해 보자. 'C'는 또 다른 나무 조각의 이름이라 하자. 다음으로, 실제 세계에서처럼, B가 A로부터 제작되었다고, 그런데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책상 D도 C로부터 제작되었다고 해 보자. (우리는 A와 C 사이에 한쪽으로부터 책상을 만드는 가능성이 다른 쪽으로부터 책상을 만드는 가능성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가정한다.) 이제 이 상황에서 B ≠ D이다. 따라서, 설령 D가 저절로 제작되었다 할지라도, 그리고 A로부터 아무런 책상도 제작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D는 B이지 않을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그 '증명'은 동일성의 필연성이 아니라 차별성의 필연성을 사용한다. 그렇지만, 후자를 확립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는 고찰들과 같은 유형의 고찰들이 전자를 확립시키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X ≠ Y라고 가정하라. 만일 X와 Y가 둘 모두 어떤 대상 Z와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동일했다면, X = Z, Y = Z, 따라서 X = Y이다.) 대안적으로, 그 원칙은 동일성의 필연성에 더하여 '브라우어식' 공리로부터, 혹은 그와 등가로, 가능세계들 사이의 대칭적인 접근가능성 관계로부터 도출된다. 어떤 사건에서든, 그 논증은 오직 C로부터 D의 제작이 A로부터 B의 제작 가능성에 영향을 주지 않고, 그 역 또한 성립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적용된다. [본문으로]
- 대상의 기원이 그 대상에 본질적이라는 원칙에 추가로, 또 다른 시사되는 원칙은 그 대상이 그것으로 제작되는 실체(substance)가 본질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몇몇 복잡한 문제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한 대상이 존재하기를 중단하지 않는 한 견지해야만 하는 속성들은 무엇이고, 그 대상이 그 대상으로 존속하는 동안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대상의 속성들은 무엇인가?'라는, 시간상의 질문인 그러한 질문에 포함된 유형의 본질을, '(비시간적으로)대상이 지니지 못했을 수 없었을 속성들은 무엇이고, 여전히 (비시간적으로) 존재하면서도 결여했었을 수 있었을 속성들은 무엇인가?'라는, 시간이 아니라 필연성에 관련된 그리고 이 강의에서 우리의 논의 대상인 질문에 포함되는 유형의 본질과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책상이 얼음으로 변화했을 수 있었을지 여부에 대한 질문은 여기에서 부적절하다. [115] 그 책상이 본래 목재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든 제작되었을 수 있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이 적절하다. 명백히 이 질문은 전제된 나무 토막으로부터 나온 그 책상의 기원의 필연성에 그리고 그 토막이 본질적으로 목재인지 여부에도 관련된다 (특정 종류의 나무인지까지도). 그래서 그 책상이 실제로 그로부터 제작된 것과는 다른 그 어떤 실체로부터든 제작되었다고 상상하는 일은 우주의 역사 전체를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아연실색할 만한 수작 없이는 통상 상상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책상이 본래부터 목재로 제작되지 않았을 다른 가능성들로 내게 제안되어 왔던 것들은, Slote의 기발한 제안을 포함하여, 그 중 어느 것도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 제안들을 여기서 논의할 수는 없다.) 개별자 본질 속성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는 여기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다른 지점들 몇 가지는 언급하고자 한다. (1) 통상 우리가 직관적으로 어떤 일이 주어진 대상에게 발생했을지 여부를 물을 때, 우리는 우주가 특정 시점까지 진행되었던 그대로 진행되었을 수 있었는지, 하지만 그 역사 내에서 해당 시점부터 이후로 분기하여 해당 시점부터 이후로 그 대상의 우여곡절이 달랐을 것이었을지 여부를 묻는다. 아마도 이러한 특징은 본질에 관한 일반 원칙 내에 정립되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실제 역사로부터의 분기가 발생하는 시점은 때로 그 대상 자체가 창조되기 이전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주의하라. 예를 들어, 나는 만일 내가 그로부터 기원한 그 수정된 난자가 특정 방식들로 손상되었더라면, 그 손상 시점에 추정컨데 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지라도, 기형이었을지도 몰랐다. (2) 나는 오직 기원과 실체적 구성만이 본질적이라고 시사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만일 그 책상이 그로부터 제작되었던 바로 그 나무 토막이 그 대신 꽃병으로 제작되었다면, 그 책상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거칠게 말하자면) 책상으로 있음은 그 책상의 본질 속성인 것으로 보인다. (3) 한 대상이 실제로 특정 속성을(예를 들어 대머리)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이 모호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 대상이 특정 속성을 본질적으로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 대상이 해당 속성을 실제로 지니는지 여부가 결정된 경우조차, 모호할 수 있다. (4) 기원 원칙에 대한 특정 반례들이 일상어법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나는 그 반례들이 진정한 반례들은 아니지만, 그것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에 대해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본문으로]
- Peter Geach는 (Mental Acts, Routledge and Kegan Paul, London, 1957, Section 16,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여기에서 고려되는 본질 속성 유형과는 다른 '명목적 본질' 개념을 지지해 왔다. 기치에 따르면 가리키는 그 어떤 행위든 애매하기에, 한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명명하는 누군가는 그의 지칭에 대해 애매성을 해소하고 통시간적 동일성의 정확한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종류 속성을 적용시켜야만 한다. 예를 들어, '닉슨'에 대해 그를 가리킴으로써 지칭을 할당하는 사람은 '나는 "닉슨"을 저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한다'라고 말해야만 하고, 그래서 그의 청자들로 하여금 그가 코나 혹은 시간-단편을 가리키고 있다고 간주하려는 유혹을 제거하면서 그리 해야만 한다. 그래서 종류는 어떤 의미로는 이름의 의미의 일부이다. 이름은 무엇보다도, 설령 그 지칭을 결정하기에 충분할 만큼 완전하지 못할지라도, [116] 기술구 이론과 기술다발 이론에서 그러하듯, (부분적) 의미를 지닌다. 내가 기치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그의 명목적 본질은 필연성이 아니라 선험성을 통해 이해되어야 할 것이고, 그래서 여기에서 옹호되고 있는 종류의 본질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실질' 본질이 아니라 '명목' 본질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할 때 그가 의미하는 바의 일부일 것이다). 그래서 '닉슨은 사람이다', '도빈은 말이다' 같은 것들은 선험적 참일 것이다.
이 관점에 관해 내가 여기서 입장을 정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나는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언급해둘 것이다. (1) 설령 지시적 지칭의 애매성을 해소하기 위해 종류가 사용된다 하더라도, 물론 그것은 지시되는 대상에 대해 선험적으로 참이라 주장될 필요가 없다. 도빈이 말 이외의 종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 없거나(외견상으로 말처럼 보였더라도), 개밥바라기별이 별이 아니라 행성이라 드러날 수 없거나, 롯의 손님들이, 설령 그가 그들에게 이름을 지어준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아니라 천사들이라고 드러날 수 없었는가? 아마도 기치는 종류들을 좀 더 신중하게 고집해야 했을 것이다. (2) (1)에 대한 반론을 포기하면, 물론 전제와 결론 사이에 실질적인 간극이 있다. 소수의 화자들만 실제로 지시적 정의에 의해 주어진 이름의 지칭을 배운다. 그리고, 설령 그들이 지시적 정의로 소급시켜주는 의사소통 연쇄를 통해 그 이름을 획득했다 하더라도, 왜 그 지시적 정의에 사용된 것으로 간주되는 종류가 어떤 의미로든 그들에게 그 이름의 '의미'의 일부여야 하는가? 여기에서는 아무런 논증도 제공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경우: 한 수학자의 아내가 그녀의 남편이 '낸시'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는 것을 우연히 듣는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지칭한 것인 낸시가 여인인지 아니면 리의 군인지 여부를 궁금해한다. 왜 그녀의 '낸시' 사용은 명명의 사례가 아닌가? 만일 그것이 명명 사례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그녀의 지칭의 부정성은 아니다.) [본문으로]
- 내가 너무 일찍 말했던지도 모르겠다. 1970년 1월 이 강연이 이루어졌을 때 일부 경제면에서 말했던 내용이다. [본문으로]
-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 Preamble Section 2.b. (Prussian Academy edition, p. 267). 나는 여기에서 실질적인 역량을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후 독어판을 대충 살펴본 이후로도 해당 구절에 대한 내 인상은 바뀌지 않았다. [본문으로]
- Paul Ziff, Semantic Analysis,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60, pp. 184-85. [본문으로]
- Journal of Philosophy, 59, No. 22 (October 25, 1962), pp. 658-71. 내가 이 글을 저술하고 있을 때는 볼 기회를 갖지 못했던, 자연종과 물리학적 속성에 관한 후속작업에서, 퍼트남은 (내가 추정하기로) 여기에서 표현된 관점과 많은 접점을 가지는 추가작업을 하였다. 내가 이 글에서 언급했듯, 퍼트남과 나의 접근법 사이에는 일부 분기점들이 있다. 퍼트남은 그의 고찰을 내가 언급하고 있는 필연적 진리 대(對) 선험적 진리라는 장치에 기반하지 않는다. 그의 이전 논문, 'The Analytic and the Synthetic', Minnesota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 III, pp. 358-97에서, 그는 일부 측면에서 '군집 개념' 이론에 더욱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그 개념이 고유명사에 적용된다는 점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그렇게 보인다.
나는 다시금 내가 해당 사례에 기반하여 전개시킨 이론들을 아마도 수용하지 않을 테지만, 그 사례가 이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나의 주의를 환기시킨 로저스 올브리튼의 예시였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본문으로]
- 나는 분석적 진리가 엄밀한 뜻(sense)에서 의미(meanings)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선험적인 만큼이나 필연적이라고 상정하고 있다. 만일 진술의 선험적 진리가 지칭의 고정을 통해 알려지는 진술이 분석 진술로 셈해진다면, 일부 분석적 진리는 우연적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여기서 채택된 분석성 개념에서는 배제된다. 분석성 개념에서의 [123] 애매성은 물론 '정의(definition)'와 '뜻' 같은 용어의 일상적 용법들에서의 애매성으로부터 야기된다. 나는 이 강연에서 분석성을 취급하는 그 미묘한 문제를 다루려고 시도하지 않았지만, 종종 분석-종합 구분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으로 제시되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사례들, 특히 자연현상과 자연종을 포함하는 사례들은 여기에서 언급된 지칭 고정 장치를 통해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이다. 칸트의 예시, '금은 황색 금속이다'는 선험적이지조차 않고, 그 예시가 지니는 필연성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은 과학적 탐구에 의해 확립된다는 점에 주의하라. 그래서 그건 어떤 뜻에서든 분석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본문으로]
- 더 좋은 닮은꼴 짝들도 있는데, 예를 들어, 주기율표에서 단일열의 원소들의 일부 쌍들은 서로 긴밀하게 유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원소들이다. [본문으로]
- Mill, op. cit. [본문으로]
- 나는 내가 '순수 속성' 혹은 프레게적 의도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심의 여지 없는 예시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노랑은 확실히, 앞서 금에 대한 논의와 관련해서, 한 대상의 분명하게 물리적인 속성을 표현하고, 요청되는 그 의미에서 속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것에 고유한 바의 특정한 지칭적 요소가 없지 않은데, 현재의 관점에서 노랑이 특정되고 고정적으로 우리가 노랑의 시각적 인상을 통해 감각하는 대상의 저 외재적인 물리적 속성으로 지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측면에서 자연종 용어들과 유사하다. 반면 감각 그 자체의 현상학적 성질은 모종의 순수한 의미에서 특질(quale)로서 간주될 수 있다. 어쩌면 나는 오히려 이러한 문제들에 관련하여 모호할 수도 있지만, 추가적인 정확성은 여기에서 불필요해 보인다. [본문으로]
- 물론, 통계 역학적인 온도 개념과, 예를 들어, 열역학적 개념의 관계 문제가 있다. 이 논의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치워두고자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