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Lecture II: January 22, 1970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여기 열거된 여러 논제들로 제시된 이름에 대한 이론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였다.

(1) 모든 이름 혹은 지시 표현 'X'에 대해, 속성다발, 즉 A가 'φX'라고 믿는 그러한 속성군 φ가 상응한다.

(2) 그 속성들 중 하나 혹은 일부 결합은 어떤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으로 A에게 믿어진다.

(3) 만일 대부분 혹은 편중된 대부분의 φ들이 하나의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충족된다면, y는 'X'의 지칭물이다.

(4) 만일 투표가 어떠한 고유한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하지 않는다.

(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들의 대부분을 지닌다'라는 진술은 화자에 의해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6)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들의 대부분을 지닌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그 화자의 개인언어에서).

(C) 어떤 성공적 이론에 대해서든, 설명은 순환적이지 않아야만 한다. 투표에 사용되는 속성들은 그것들 자체가 궁극적으로 제거 불가능한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한다.

 

(C) 는 논제가 아니라 다른 논제들의 충족에 관한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논제 (1)-(6)은 순환으로 이끄는 방식으로, 독립적인 지칭 결정으로 이끌지 않는 방식으로 충족될 수 없다. [72] 내가 지난 시간에 제시한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노골적인 순환 시도의 사례는 윌리엄 닐에 의해 언급된 이름에 대한 이론이었다. 나는 내가 복사해둔 그 이론의 해당 진술을 읽다가 조금 놀라서 다시 살펴봤다. 닐은 과거시제를 사용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였다고 말하는 것이 사소하지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하는 것은 사소한 일이라 말했다. 그는 결론내리길,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은 단순히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개별자'를 의미해야만 한다. 내가 말했던 것처럼, 러셀은 몇몇 곳에서 유사한 분석을 내놓는다. 어쨌든, 과거시제를 써가며 진술했던대로, 그 조건은 순환적이지 않을 것인데, 누군가 확실히 '소크라테스'라는 용어를 누가 되었든 그리스인들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던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기로 결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종의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아마 우리는 우리가 그를 '소크라테스'라 부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이 그랬다는 것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물론, 사실 그들은 그 이름을 달리 발음했었을 것이다. 이 특정한 이름의 경우, 그것은 어쩌면 그리스어로부터의 번역이 훌륭해서 영어로도 그리스어와 아주 다르지는 않게 발음되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사야가 '이사야'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지 않다. 사실, 이사야가 '이사야'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거짓이다. 그 예언가는 이 이름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리스인들은 그들의 나라를 '그리스' 같은 어떤 것으로 부르지 않았다. 우리가 그 명제를 수정해서 읽었다고 가정해 보자: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우리에 의해, 최소한 나, 화자에 의해 불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은 사소하다. 그럼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꽤나 사소하다. 나는 그것이 필연적이라거나 분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같은 식으로, 말들이 '말들'이라고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은, 이것이 '말'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말"이라고 불리는 동물'을 의미한다는 결론으로 이끌지 않고서는 사소한 일이다.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 그것은 즉각적으로 [73] 악성 순환으로 이끌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Glunk' 같은 이름의 지칭물을 스스로 확정하고 이하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면, '나는 "Glunk"라는 용어를 내가 "Glunk"라고 부르는 그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라고 그리 했다면, 그것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Glunk'의 그 지칭물에 대해 어떤 독립적인 결정을 가지는 편이 낫다. 이것은 노골적인 순환적 확정의 좋은 예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 같은 문장들은 매우 흥미롭고 이상해 보이는 만큼 그 분석에 관해 말하는 데에 시간을 쏟을 수 있다. 나는 실제로 한 번 그랬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리 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의 바다가 얼마나 높이 오를 수 있는지 보라. 그리고 가장 낮은 지점들에서도 보라.) 어쨌든 이것은 비순환 조건 위반의 유용한 사례이다. 그 이론은 그 진술들 모두를 아마 만족시킬 테지만, 그건 오직 지칭을 특정 조건,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그 사람임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확정짓는 독립적인 어떤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지난 강연에서 명제 (6)에 관해 말했다. 명제 (5)와 (6)은 전환된다. 명제 (5)에 대해 말했던 것은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들의 대부분을 가진다는 진술이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참이라는 것이다. 이 진술의 특정한 전환이 그 역시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참을 견지한다는 것 또한 주어진 이론 하에서 참일 것이다. 즉: 만일 어떤 고유한 것이 적절하게 가중치가 매겨진 의미에서 속성들 φ의 대부분을 가진다면, 그것은 X이다, 라는 전환 말이다. 유사하게 특정한 전환은 이에 대해 필연적으로 참일 것이다. 즉: 만일 어떤 것이든 적절히 경중이 매겨진 의미에서 φ 속성들 대부분을 가진다면, 그것은 X이다. 그래서 실제로 누군가는 어떤 것이 X인 것은 만일 그것이 고유하게 속성들 φ의 대부분을 가진다면 오직 그 경우에만 그러하다는 것은 선험적이기도 하고 또한 필연적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실제로 이전의 명제들 (1)-(4)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간주한다. (5)와 (6)은 실제로 그저 충분히 숙고적인 화자는 이 고유명사 이론을 파악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앎으로써, 그는 그러므로 (5)와 (6)이 참이라는 것을 알아본다. (5)와 (6)에 대한 반박들은 일부 화자가 이 이론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 것이다. 

  [74] 내가 지난 강연에서 그에 관해 말했던 바는 명제 (6)이다. 그것은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관찰되었던 바이다. 만일 고유명사와 결부된 속성 다발이 아주 좁은 의미에서 취해져서, 어떤 가중치에서든 오직 단 하나의 속성만이 제시된다면, 하나의 한정기술구가 지칭물을 적시해내는 것이라고 말하도록 하자.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철학자였다. 그럼 필연적 참이 아닌 특정한 것들이 필연적 참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 경우,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설이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종사한 적이 있다는 것은 필연적인 참이 아니라 우연적인 참이다. 그러므로, 그는 단일 기술이라는 본래 전형을 폐기하고 기술 다발이라는 전형으로 전향해야만 한다고 결론내린다. 

  내가 지난 시간에 논증했던 일부 것들을 요약하자면, 이것은 필연성에 관한 이 문제에 정확한 답(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이 아니다. 왜냐하면 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폐기하고 말하자면 '알렉산더의 스승'을 사용하기로 동의했다고 가정하면, 지칭되는 사람은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이 필연적 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종사한 적 있다는 것은 우연적 사실이고, 설령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의 논리적 합, 포괄적 선언지를 가진다는 것이 필연적 참이라 제안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다...[foonote]Searle, 'Proper Names', in Caton, op. cit., p. 160.[/footnote]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필연의 어떤 직관적 의미에서든,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을 가졌다는 것은 필연적 참이 아니다. 역사 철학의 일부 관점에서 어쩌면 유명한 특정 이론이 있는데, 결정론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역사 속 개별자에게 대단한 역할을 할당할지도 모르는 그런 이론이 있다. 아마도 칼라일은 위대한 사람의 그 이름의 의미를 그의 성취들과 결부시킬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 따르면, 일단 특정 개별자가 태어나고 나면, 그가 다양한 위대한 업적들을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져서 [75] 그가 서구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발상들을 산출해냈을 것이란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바로 그 본성에 일부일 것임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의 이점들이 역사나 위대한 인물들의 본성에 대한 관점으로서 무엇이든지, 고유명사 이론에 근거하여 그것이 사소하게 참일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것들 중 어떤 것, 우리가 그렇게나 감탄하는 그 위대한 성취들 중 어떤 것을 행했던 적이 있다는 것은 우연적 사실로 보일 것이다. 설의 이러한 느낌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나는 말해야만 한다. 내가 '히틀러'라는 이름을 들을 때, 나는 그가 악이었다는 것이 일종의 분석적인 것이라는 가상적 '직감'을 갖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히틀러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린츠에서 잠자코 보냈었을 지도 모른다. 그 경우 우리는 이 사람이 히틀러가 아니었으리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리가 '히틀러'라는 이름을, 다른 가능세계들을 기술하면서조차, 저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앞선 강연에서 내가 고정 지시자라고 불렀던 그 개념이다.) 우리가 '히틀러'의 지칭을 역사상 유태인을 학살한 다른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성공했던 사람을 지적해내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이 그 이름의 지칭을 우리가 지적해내는 방식이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이 불명예를 획득했을 또 다른 반사실적 상황에서, 우리는 그 경우에 다른 사람이 히틀러였을 것이리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히틀러가 권력을 아예 얻은 적이 없었더라면, 히틀러는 우리가 그의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한다고 내가 시사하고 있는 그 속성을 지닌 적이 없었을 것이다. 유사하게, 설령 우리가 1m가 무엇인지를 표준 meter 막대에 대한 지칭에 의해 정의한다 하더라도, 그 특정 막대가 1m 길이라는 것은 우연적 참이고 필연적 참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 막대가 연장되었다면, 그 막대는 1m보다 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1m'라는 용어를 특정 길이를 지시하는 데에 고정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가 저 길이라는 우연적 속성으로 지시하고 있는 길이가 무엇인지 고정시키더라도, 우리가 저 사람의 이름의 경우에서 저 사람의 우연적 속성으로 저 사람을 지적해낼 것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우리는 그 이름을 [76] 저 사람이나 저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지시하는 데에 사용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속성은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이라고 혹은 본질적이라고 간주되는 속성일 필요는 없다. 야드의 경우, 이 길이가 지적되어 나온 본래의 방식은, 내 생각에는, 잉글랜드의 왕 헨리 1세가 팔을 뻗었을 때 그의 손끝에서 그의 코까지의 거리였다. 만일 이것이 1야드의 길이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손끝과 코 사이의 거리가 1야드일 것이라는 점은 필연적 참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그의 팔이 짧아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필연적 참이 아닌 이유는 yardhood라는 '개념 다발' 내에 다른 기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헨리 왕의 팔을 엄격하게 그의 길이 표준 단위로 사용하는 사람조차, 반사실적으로, 만일 특정한 것들이 그 왕에게 발생했더라면, 그의 손끝과 코 사이의 정확한 거리는 정확히 1야드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모든 가능세계에서 해당 길이임에 대한 특정 고정된 지칭을 지적해내는 데에 '야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한 다발 역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언급들은 내 생각에 '통세계 정체화'와 '대응쌍 이론'에 관한 훌륭한 학술적 처리의 직관적인 기이함을 보여준다. 이런 종류의 여러 이론가들은 그들이 하는 그대로 '가능세계'가 우리에게 오직 질적으로만 주어진다고 믿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정체화'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거나, 대안적으로 그의 대응쌍들이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근접하게 모방하는 그러한 것들과 정체화되는 것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루이스는 말한다: '당신의 대응쌍들은 ... 당신을 모방하는데 ... 중요한 측면들에서 ... 다른 것들이 그것들의 세계들에서 하는 것보다 더욱 근접하게 게 그리하고 ... 다양한 측면의 중요성과 유사성의 정도에 의해 가중치가 매겨진다.'[각주:1]) 몇몇은 그 중요한 속성들이란 것을 [77] 해당 대상을 실제 세계에서 정체화해주는 데에 사용되는 그런 속성들과 동일시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러한 개념들은 틀렸다. 내게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장 중요한 속성들은 그의 철학적 저작으로 구성되고, 히틀러의 경우에는 그의 살인자로서의 정치적 역할로 구성된다. 두 사람 모두, 내가 말했듯, 저런 속성들을 모두 다 결여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가 그들에게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속성들을 그들이 소유했었어야 한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든 불가피하게 만든, 아리스토텔레스든 히틀러든 그들을 속박하는 아무런 논리적 숙명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실제 경력과 완전히 다른 경력을 가졌을 수도 있었다. 대상의 중요한 속성들은 '중요함'이 본질과 동의어로 사용되지 않는 한 본질적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대상은 그 대상의 가장 두드러지는 실제 속성들과 매우 다른, 혹은 우리가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하는 속성들과 아주 다른 속성들을 가질 수도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내게 물었던 바 하나를 분명히 하고 가자. 내가 지시자가 고정적이라고 말할 때, 그리고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지시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언어에서 사용되듯, 그것은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들에 관하여 말할 때 그 사물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사람들이 실제로 다른 언어를 발화하는 반사실적 상황이 있을지도 몰랐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누군가가 '2 + 2 = 4'를 사람들이 7이 짝수라는 의미로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우연한 것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해당 반사실적 상황에서 모두 다 독일어로 말하고 있는 그런 반사실적 상황에 대한 기술의 일부일지라도, 그것에 관해 영어로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모두 독일어로 말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라거나 '우리가 비표준적 방식으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라고 말한다. 그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이 우리가 말하는 방식과 다른 특정 방식으로 말한 가능세계 또는 반사실적 상황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세계를 기술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의미와 우리의 지칭으로 영어를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정 지시자에 대해 [78]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지칭을 가지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지칭되는 사물이 모든 가능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름이 그 사물을 고정적으로 지칭한다는 뜻으로 말한다. 만일 당신이 '히틀러가 아예 태어난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라'고 말한다면 '히틀러'는 여기에서, 여전히 고정적으로, 해당 기술된 반사실적 상황에서 존재하지 않았을 어떤 것을 지칭한다. 

  이러한 언급들을 가정하면, 이는 우리가 (6)을 잘못된 것으로 삭제해야만 한다는 뜻이 된다. 다른 명제들은 필연성과 관련이 없고 살아남을 수 있다. 특히 명제 (5)는 필연성과 관련이 없고 살아남을 수 있다. 만일 내가 '개밥바라기별'이라는 이름을 저녁에 특정한 천문학적 위치에서 보이는 특정 천체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보인다는 것이 필연적 참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태는 그 별을 목격하도록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그러한 사물들에 관한 다양한 우연적 사실들에 달려있다. 그래서 설령 내가 나 자신에게 '개밥바라기별'을 저녁에 하늘의 저 위치에서 보는 천체를 명명하기 위해 사용하리라고 말할지라도,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보였다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그 지칭물을 결정했던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선험적일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개밥바라기별은 내가 저녁에 그 자리에서 봤던 그 사물이라고 결정했다면, 나는 그 지칭 결정을 성립시킴으로부터, 만일 어쨌든 개밥바라기별이 도대체 있다면 그것은 저녁에 내가 봤던 그 사물이라는 점을 알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해온 논증들이 살아남는 데까지는 살아남는다. 

  명제 (6)이 제거되는 경우의 이론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명제 (2), (3), (4)는 대규모의 반례 집합을 가지는 것으로 드러난다. (2)-(4) 명제들이 참인 경우조차, 명제 (5)는 통상 거짓이다. 명제 (3)과 (4)의 진리치는 경험적 '우연'이고, 화자가 선험적으로 거의 알 리가 없는 사건이다. 즉 말하자면, 다른 원칙들은 실제로 화자의 지칭을 결정하고, 해당 지칭물이 (2)-(4)에 의해 결정된 지칭물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연적'인 것, 우리가 선험적으로 아는 그 어떤 위치에도 있지 않을 그런 사건이다. 오직 희소한 종류의 경우에서만, 보통 최초 세례(명명)에서만, (2)-(5) 모두 참이다.

   [79] 이 명제들((1)-(5))이 당신에게 어떤 명명의 그림을 제시하는가? 그 그림은 이런 것이다. 내가 한 대상을 이름짓고자 한다. 나는 그 대상을 고유하게 기술할 모종의 방법을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적 세례(명명)식을 진행한다. '키케로'로 나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키케로'의 지칭일 바의 것이리라. 나는 '키케로'를 (실제로) 카틸리나를 고발한 사내를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고, 그래서 나는 그가 그리하지 않았던 가능세계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의사는 우선 한 대상을 고유하게 확정해주는일부 조건들을 제시함으로써, 다음으로 특정 단어를 이 조건에 의해 확정되는 그 대상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함으로써 제시된다. 이제 우리가 실제로 이 일을 수행하는 몇몇 상황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일 당신이 억지로 그러고자 한다면, 당신이 '나는 저기 저 천체를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을 기술이라 부를 수도 있다.[각주:2] 그것은 이러한 진술들이 단지 참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그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한 올바른 그림을 제시하기까지 하는 사례이다. 또 다른 사례는, 만일 당신이 이것을 이름이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런던 경찰이 '잭' 혹은 '잭 더 리퍼'를, 그가 누가 되었든 일련의 살인 혹은 그 대다수를 저지른 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하는 그 경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 그들은 그 이름의 지칭을 [80] 기술로써 제시하고 있다.[각주:3] 하지만 많은 혹은 대부분의 경우, 나는 그 명제들이 거짓이라 생각한다. 그럼 그 명제들을 살펴보자.[각주:4] 

  명제 (1)는 내가 말하듯 정의이다. 명제 (2)는 대상에 대해 A가 믿는 속성들 중 하나 혹은 일부 결합이 일부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이라 믿어진다.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일종의 사례는 내가 말했던 그것이다. 나는 '키케로'라는 용어를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자를 나타내는 데에 쓸 것이다 (혹은 그를 공개적으로 처음 고발했던 자라고, 그 용어를 고유하게 만들기 위해서). 이는 이 특수한 지칭에서 대상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Semantic Analysis에서 지프 같은 일부 작가들, 이름이 어떤 의미에서도 뜻을 지닌다고 믿지 않는 작가들은 이것이 지칭이 결정될 수 있는 방식에 대한 훌륭한 그림이라 생각한다.

  명제 (2)가 참인지 봐 보도록 하자. 어떤 선험적인 방식에서 그것은 참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당신이 염두에 둔 속성들이 누구든 고유하게 지적해낸다고 당신이 생각하지 않는다면―그 속성들이 모두 두 사람에 의해 충족된다고 말해 보자―어떻게 당신은 그들 중 어느쪽 사람이 당신이 그에 관해 말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한쪽보다는 다른 한쪽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말할 아무런 근거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통상 문제의 속성들은 문제의 그 사람의 일부 유명한 행위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키케로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였다. 평균적인 개인은 이에 따르면 그가 키케로를 지칭할 때 [81] 그는 '카틸리나를 고발했던 사내' 같은 어떤 것을 말하고 있고 그래서 특정 사람을 고유하게 지적해냈다. 철학자들이 이 명제를 그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견지해온 것은 철학자들의 교육의 공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키케로에 대해 생각할 때, 유명한 로마 연설가에 대해 생각하며, 오직 단 한 사람의 유명한 로마 연설가만 있었다든지 그 이름이 지칭물을 가지려면 키케로에 관해 다른 어떤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든지 하고 생각하려는 의도 없이 그리 생각한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지칭할 수 있는 사람인 리처드 파인만을 고려해 보자. 그는 선도적인 현대 이론 물리학자이다. 여기 있는 모두(나 역시 물론) 파인만을 겔만과 차별화해주기 위해 그의 이론들 중 하나의 내용을 진술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길에 다니는 사람,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여전히 '파인만'이라는 그 이름을 사용할 것이다. 그에게 질문을 하면 그는 말할 것이다. 그는 물리학자 뭐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이것이 누구든 고유하게 지넉해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가 '파인만'이라는 이름을 파인만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낼 기술을 지니는 경우들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예를 들어 우리가 키케로는 처음으로 카틸리나를 고발한 사내였다는 것을 안다고 말해 보자. 뭐 그건 좋다. 그것은 실제로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는데, 이 기술이 또 다른 이름, 즉 '카틸리나'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비순환조건을 위반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그 조건들을 충족시킨다는 점을 확보해야만 한다. 특히, 우리는 카틸리나가 키케로에 의해 고발당한 사내였다고 말하지 않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어떤 것도 고유하게 지적해내고 있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단순히 한쌍의 대상들 A와 B를, A가 B를 고발한 그런 한쌍을 지적해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이 고발이 발생했던 유일한 쌍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고유성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조건들을 추가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누군가는 [82] 내가 말했듯 여기 모두가 이 이론에 대한 간략하고 독립적인 진술을 구성할 수 있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는 점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이 문제에 관해 충분하게 알지 못하고, 그래서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을 경우, 그들은 말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고, 그리고 그럼 가장 직접적인 종류의 악순환에 끌려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명제 (2)가 충족되는 일은 직설적인 방식으로 실패하는데, 우리가 파인만이 유명한 물리학자라고, 다른 어떤 것도 파인만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말할 경우 그러하다. 또 다른 방식으로 그것은 충족되는 경우에조차 적절한 방식으로 충족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누군가를 고유하게 지적해낸다. 하지만 그것은 비순환 조건을 충족시킬 그런 방식으로 그를 지적해내지는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상대성 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으로 지적되어 나오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제 (2)는 거짓으로 보인다. 

  철학자들에 의해 통상 이름들과 결부되는 조건들 φ로부터 그 조건들을 변경함으로써, 누군가는 해당 이론을 개선하고자 시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들어 본 다양한 방식들이 있었다. 어쩌면 이후에 그것들을 논의할지도 모른다. 흔히 그들은 이름난 사람의 유명한 성취들에 대해 생각한다. 확실히 유명한 성취들의 경우 그 이론은 작동하지 않는다. 내 학생들 일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론의 세부사항을 제공할 백과사전을 지칭함으로써  '상대성 이론'의 지칭을 독립적으로 확정했다. (이것은 백과사전의 존재에 대한 초월적 연역이라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설령 누군가가 백과사전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이 이론이 어떤 백과사전에서인가 상세하게 제시되는지 여부를 알아야 하리란 것은 그의 지칭에 실제로 본질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지칭은 아무런 백과사전도 전혀 없었을지라도 작동했을 것이다.

  명제 (3)을 살펴보자. 만일 적절히 가중치가 매겨진 φ의 대부분이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충족된다면, y는 화자에게 그 이름의 지칭물이다. 이제, 우리가 이미 명제 (2)가 거짓이라고 확증한 마당에, [83] 왜 나머지 무엇인가가 작동해야 하겠는가? 그 이론 전체는 충족된 고유 조건들을 항상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 있음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다른 명제들을 고찰할 수 있다. 해당 이론과 결부된 그림은 오직 어떤 고유한 속성들을 제시함으로써만 당신이 어떤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고 그래서 당신이 사용하는 이름의 지칭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 나는 누군가가 누구인지 아는 일의 문제로 파고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주 혼란스러운 문제이다. 나는 당신이 키케로가 유명한 로마 연설가라고 답할 수 있다면 키케로를 앎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충분히 이상하게도, 만일 당신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고 그 이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면, 당신은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도, 즉 상대성이론의 발견자라는 것도, 누가 상대성이론을 발견했는지, 즉 아인슈타인이라는 것도, 둘 다 이 지식에 근거하여 알 수 있다. 이는 일종의 비순환조건에 대한 노골적인 위반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이 조건을 시사하는 그림은 틀린 그림이어야만 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

  대부분의 φ가 실제로 고유한 대상에 의해 충족된다고 가정해 보자. 그 대상은 필연적으로 A에 대해 'X'의 지칭물인가? 누군가가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라고, 그리고 이 사람이 적절하게 잘 교육받았으며 그 불완전성 정리에 대한 독립적인 설명을 제시할 능력까지 있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단지 '자, 그것이 괴델의 정리이다' 라거나 혹은 무엇이 되었든 단지 그걸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특정 정리, 괴델을 발견자로 하여 그에게 귀속시키는 정리를 진술한다.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φ의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가 A에 대해 'X'라는 이름의 지칭물이라는 것은 그래서 사실인가? 간단한 경우를 취해 보자. 괴델의 경우 실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 관해 들어본 유일한 것이 그것이다. 그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했다는 것 말이다. 누가 되었든지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은 '괴델'의 지칭물이라는 점이 귀결되는가?

  대놓고 허구적인 다음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괴델 교수께서 참석하고 계시지 않길 희망한다.) 괴델이 사실 이 정리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가정해 보자. [84] '슈미트'란 이름이 붙은, 그의 시체가 수년 전 기이한 상황 하에 비엔나에서 발견되었던 한 사람이 실제로 문제의 그 작업을 했다. 그의 친구 괴델은 어떤 식으론가 그 필사본을 손에 넣었고 그래서 그 필사본이 괴델의 공이 되었다. 그럼 문제의 그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인이 '괴델'이란 그 이름을 사용할 때, 그는 실제로 슈미트를 지칭하려는 의도인데, 왜냐하면 슈미트가 해당 기술,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을 만족시키는 고유한 개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신은 그 기술을 '산술의 불완전성에 대한 발견을 출판한 사람'으로 변경하고자 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조금 더 변경하여 누군가는 이 정식화까지 거짓으로 만들 수도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출판되었는지 아니면 구전되어 떠돌았는지 여부조차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계속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을 다뤄보자. 그럼,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사람은 사실 슈미트이기에, 우리는, 우리가 '괴델'에 관해 말할 때, 사실은 항상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우리가 그러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단순히 그러고 있지 않다. 내가 나중에 논의할 한 가지 답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 대신 '산술 불완전성 정리가 통상 그에게 귀속되는 사람'이라거나 그 비슷한 것을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 가지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이후에 살펴 보도록 하자.

  하지만 여러분들 중 상당수에게는 이것이 매우 이상한 예시로 보이거나, 그런 상황이 드물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는 또한 철학자들의 교육의 공이다. 매우 자주 우리는 주목할 만한 잘못된 정보에 근거하여 이름을 사용한다. 가상적 예시에서 사용된 수학의 경우가 핵심을 짚기에 좋은 사례이다. 우리는 페아노에 관해 무엇을 아는가? 이곳의 많은 사람들이 페아노에 관해 '알'지도 모르는 바는 그가 소위 '페아노 공리'라는 자연수의 수열을 특징지어주는 특정 공리의 발견자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그 공리들을 진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공리들이 페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데데킨트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고 말해왔다. 페아노는 물론 부정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주석이 [85] 데데킨트의 면을 세워주는 일을 포함한다고 말한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 주석은 간과되어 왔다. 그래서 문제의 그 이론에 관하여 '페아노'라는 용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그대로, 실제로 데데킨트를 지칭한다. 이제 당신이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당신은 실제로 내내 데데킨트에 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리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사례는 한정없이 증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비전문가에게는 물론 더 끔찍한 오해까지도 발생한다. 앞선 예시에서 나는 사람들이 아인슈타인을 그의 상대성에 관한 작업에 대한 지칭으로써 정체화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나는 종종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이 원자 폭탄의 발명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인슈타인을 지칭할 때, 우리는 원자 폭탄 발명가를 지칭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는 않다.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서반구에 상륙한 첫 번째 유럽인이었다. 아마도 이런 것들 중 아무것도 참이 아닐 것이고, 그러므로, 사람들이 '콜럼버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들이 만일 지구의 둥금을 사용한다면 실제로는 어떤 그리스인들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그들이 '아메리카의 발견'을 사용한다면 아마도 일부 고대 스칸다나비아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러고 있진 않다. 그래서 만일 고유한 대상 y에 의해 φ의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가 그 이름의 지칭물이라고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단순히 거짓인 것으로 보인다.[각주:5]

  [86] 명제 (4): 만일 투표가 아무런 고유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이름은 지칭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경우는 앞서 다루어졌고, 앞선 사례들에서 다루어졌다. 첫째 사례는, 키케로나 파인만의 경우에서처럼 투표가 고유한 대상을 내세우지 않을 수 있다. 두 번째로, 그 투표가 아무런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아무것도 φ의 대부분 혹은 심지어 어떤 상당수조차 충족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해당 이름이 지칭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한 사람에 관하여 실제로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참일 수 있는 거짓 믿음들을 가질 똑같은 방식으로, 그렇게 당신은 완전히 아무에게도 전혀 참이 아닌 거짓 믿음들을 가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믿음들이 당신의 믿음들의 총체성을 구성할지도 모른다. 괴델에 관한 예시를 변화시켜서, 아무도 산술의 불완전성을 발견한 적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그 증명은 단순히 종이 한 장에 원자들이 임의로 흩뿌려져 물질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괴델이란 사람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현장에 있을 만큼 운 좋은 사람이라고 가정해 보자. 추가로, 산술이 실제로는 완전하다고 가정해 보자. 누군가는 실제로 원자들이 임의로 흩뿌려져 정확한 증명을 산출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수십년간 알려지지 않은 교묘한 오류가 여전히 들키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 어쩌면 실제로 들키지 않은 건 아니고, 괴델의 친구들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 그렇게 설령 고유한 대상에 의해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을지라도 [87] 그 이름이 여전히 지칭을 수행할지도 모른다. 지난 강연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요나의 사례를 제시한 바 있다. 성서학자들은 내가 말했듯 요나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들이 누군가가 거대한 물고기에 의해 삼켜진 적이 있다거나 니네베에 설교하러 간 적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조건들은 그 누구인들 아무에게도 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요나'라는 이름은 실제로 지칭물을 가진다. 위에서 아인슈타인의 폭탄 발명 사례에서, 실제로는 아무도 그 장치의 '발명자'라 불릴 자격이 없을 경우도 가능하다.

  명제 (5)는 'X가 존재한다면, X는 φ의 대다수를 가진다는 것은, A에게 선험적으로 참이다'라는 진술을 말한다. 명제 (3)과 (4)가 마침 참인 경우에서조차, 전형적인 화자는 그 명제들이 해당 이론에 의해 요청되는 방식대로의 것들이라는 점을 선험적으로 알 리가 거의 없다. 나는 괴델에 관한 나의 믿음이 실제로 옳은 것이라고 그리고 '슈미트' 이야기가 단지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믿음이 선험적 지식을 구성할 리는 거의 없다. 

  여기에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해당 이론을 구조해낼 수 있는가?[각주:6] 첫째로, 누군가는 이러한 기술들을 변경시켜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유명한 업적들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우리의 기술로서 사용해 볼 수 있다. 어쩌면 충분히 만지작거려 누군가는 결국 이로부터 뭔가 얻어낼지도 [88] 모른다.[각주:7] 그렇지만, 누군가가 시도하는 그 시도 대부분이 반례들이나 또 다른 반박들에 노출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괴델의 사례에서 누군가는 '자,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보자, 우리 모두가 실제로 알고 있는 바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라는 것, 괴델이 흔히 산술의 불완전성이 그에게 귀속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괴델'이란 이름의 지칭물을 결정할 때, 나는 나 자신에게 '"괴델"로 내가 의미하려는 바는 "그가 그 누구든지 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저 사람은 슈미트나 포스트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의미하고자 할 것이다.

  이게 맞나? 우선, 내게는, 내가 앞서 제시했던 것과 같은 유형의, 더 세련되었을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런 반례들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언급한 페아노의 경우에서, 화자 몰래,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지금부터는) 수-론 공리들이 그에게 귀속되지 않아야 하리란 걸 철저하게 인지한다고 가정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공리들을 페아노의 공으로 돌리지 않고 이제 제대로 데데킨트에게 돌린다. 그럼 그렇게 이러한 것이 흔히 귀속되는 사람은 데데킨트일 것이고 페아노가 아닐 것이다. 여전히, 그 화자는, 그 오래된 구식의 믿음을 받아들인 채, [89] 여전히 페아노를 지칭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페아노에 관한 거짓 믿음을 견지한 채로, 데데킨트에 관한 참인 믿음은 견지하고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로, 그리고 아마도 더욱 중요하게도, 그러한 기준은 비순환 조건을 위배한다. 어쩌다 이리 되는가? 우리들 대다수가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참이다. 이것은 왜 그러한가? 우리는 확실히 그리고 신실하게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우리가 믿는다는 것, 우리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이 사람에게 귀속시킨다는 것이 도출되는가? 아니다. 그저 그것으로부터만은 아니다. 우리는 '괴델이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말할 때 괴델을 지칭하고 있어야 한다. 만일, 실제로, 우리가 항상 슈미트를 지칭하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산술의 불완전성을 괴델이 아니라 슈미트에게 귀속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괴델'이란 발음을 내가 '슈미트'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했었더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실 괴델을 지칭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일을 수행하는가? 자,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괴델"로 나는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귀속되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일을 했었더라면 우리는 순환에 빠졌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두 이 방 안에 있다. 실제로 이 학교 안에서[각주:8] 몇몇 사람들은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지만, 여러 학교들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공동체 내에서 우리 모두는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그에게 귀속되는 그 사람일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지칭을 결정짓고자 하고 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산술의 불완전성이 흔히 그에게 귀속되는 그 사람' 외에 그 이름의 지칭에 대한 어떤 독립적인 규준이 있지 않는 한 어떤 속성을 가지고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 모두는 '우리는 이 업적을 우리가 그 업적을 그에게 귀속시키는 그 사람에게 귀속시킨다'라고 말하고 있을 것인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고, 그 지칭의 어떤 독립적 기준도 제공하지 않고 그리 말하고 있을 것이며, 그렇게 해당 결정은 순환적일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내가 'C'로 표기한 조건에 대한 위반이고, [90] 어떤 지칭 이론에서든 사용될 수 없다.

  물론 당신은 책임전가로 순환성을 회피하고자 해 볼지도 모른다. 이는 스트로슨에 의해 언급되는데, 그는 이 문제에 관한 그의 주석에서 한 사람의 지칭은 다른 사람의 지칭으로부터 파생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정체화 기술은, 문제가 되는 개별자에 대한 화자의 고유한 지칭에 대한 지칭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함에도, 그 개별자에 대한 또 다른 사람의 지칭에 대한 지칭을 포함할지도 모른다. 만일 추정상 정체화하는 기술이 이런 후자의 종류에 속하는 것이라면, 더욱이  그것이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기술인지 여부의 문제는 그 기술이 지칭하는 그 지칭 자체가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지칭인지 여부의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한 지칭은 진정으로 정체화하는 지칭이라는 그 자격을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빌려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소급은 무한하지 않다.[각주:9]

 

  그럼 나는 말할 것이다. '봐라, "괴델"을 가지고 나는 조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자를 의미할 것이다.' 조는 그럼 그 안건을 해리에게 떠넘길 것이다. 이 일이 순환에 빠지지 않게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실제로 확신하는가? 만일 당신이 그런 연쇄를 안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연쇄 속 다른 모두가 적절한 조건들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연쇄에서 빠져나가지 않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칭들을 순차로 빌려오는 방식으로 그런 연쇄를 지시함으로써 해당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연쇄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존재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그 연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이 무슨 기술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 일이 순환에 빠지지 않게 될 것인지, 혹은 조에게 호소하면 당신이 어쨌든 제대로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 못할 것인지 여부를 확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이것을 당신의 정체화 기술로 무슨 확신을 가지고 사용할 수 없다. 당신은 괴델에 관해 누구로부터 들었는지 기억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진행되고 있는 일의 참된 그림은 무엇인가? 아마도 지칭이 실제로는 아예 일워지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실제로 [91] 우리가 그 사람을 정체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속성들 중 어떤 것이든 옳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 속성들이 고유 대상을 지적해낸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무엇이 내가 사용하는 '키케로'를 의 이름으로 만드는 일을 수행하는가? 기술다발이론으로 이끄는 그림이 이런 어떤 것이다. 한 사람이 방 안에 고립되어 있다. 다른 화자들 그리고 여타의 모든 것들의 공동체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스스로 지칭을 확정한다. '"괴델"로 나는 그게 누구든 간에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이제 당신은 원한다면 이 일을 행할 수 있다. 그걸 실제로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저 결정을 고수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하는 일이 저것이라면, 산술의 불완전성을 슈미트가 발견했을 경우 당신은 '괴델이 그러저러한 일을 했다'라고 말할 때 슈미트를 지칭하는 일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 대다수가 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아기가 태어났다고 해보자. 그의 부모는 그를 특정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은 그 아이에 관해 그들의 친구들에게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 아이를 만난다. 다양한 종류의 발화를 거쳐 그 이름이 마치 사슬로 연결되듯 연결의 연결을 거쳐 확산된다. 이 연쇄의 먼 극단에 있는 한 화자, 시장이나 어디 다른 곳에서 이를 테면 리처드 파인만에 관해 들어본 적 있는 화자는 설령 그가 누구에게서 처음 파인만에 관해 들었는지 혹은 하여간 누구한테서 그가 파인만에 대해 들었던 건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리처드 파인만을 지칭하고 있을 수 있다. 그는 파인만이 유명한 물리학자라는 것을 안다. 궁극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도달하는 의사소통의 특정 경로가 화자에게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파인만을 고유하게 정체화하지 못하더라도 파인만을 지칭하고 있다. 그는 파인만 다이어그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파인만 생성-소멸 쌍이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겔-만과 파인만을 분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다. 그래서 그가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하는 게 아니라, 그 대신, 파인만 그 자신에게로 소급되는 의사소통 연쇄가 확립된 것인데, 연결에 연결을 거쳐 그 이름이 전래된 공동체에 그가 구성원인 덕분으로 그렇게 된 것이고, 서재에 틀어박혀 사적으로 그가 행한 세례식에 의한 것은 아니다. '"파인만"으로 나는 [92] 그러저러한 짓을 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라는 그런 세례식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앞서 언급된 스트로슨의 제안, 하나의 정체화하는 지칭이 또 다른 지칭으로부터 자격을 빌려오리란 것과 어떻게 다른가? 확실히 스트로슨은 인용된 구절에서 훌륭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 그는 확실히 최소한 내가 지지하는 그림과는 강조점에서 차이를 보여주는데, 해당 언급을 주석에 국한시키기에 그러하다. 본문은 기술다발이론을 지지한다. 그저 스트로슨이 그의 언급을 기술 이론의 맥락에서 구성하기 때문에, 그의 관점은 그리하여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나의 관점과 다르다. 스트로슨은 명백히 화자가 그의 지칭을 누구로부터 얻었는지 알아야만 한다고, 그래서 그가 '"괴델"로 나는 이 "괴델"이라 부르는 그 사람을 의미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만일 그가 어떻게 그 지칭을 집어냈는지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그런 기술을 제시하지 못한다. 현재의 이론은 그런 어떤 요구사항도 설정하지 않는다. 내가 말했듯, 나는 내가 누구에게서 괴델에 대해 들었는지 그닥 잘 기억하지 못할 수 있고, 내가 그 이름을 어떤 사람들에게서 들었는지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고찰들은 여기에서 지지되는 관점이 실질적으로 스트로슨의 주석의 귀결들로부터 분기된 귀결들로 이끌 수 있다. 화자가 '키케로'라는 이름을 스미스와 여타 사람들, 그 이름을 유명한 로마 연설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적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지만 이후에 그가 생각하길, 그는 그 이름을 존에게서 취했고, 존은 (화자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키케로'를 악명 높은 독일 간첩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고대 세계의 어떤 연설가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 없는 자이다. 그럼, 스트로슨의 전형에 따르면, 화자는 그의 지칭을 '나는 "키케로"를 존이 그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것이다'라는 결심을 통해 결정해야만 하는 반면, 현재의 관점에서, 그 지칭물은 화자가 그 이름을 어디에서 집어냈는지에 관한 그의 거짓 인상에도 불구하고 해당 연설가일 것이다. 핵심은 스트로슨이 의사소통 연쇄 관점을 기술 이론에 맞추려 시도하면서, 화자가 그의 지칭 원천이었다고 생각하는 바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만일 화자가 [93] 그의 원천을 잊어버렸다면, 스트로슨이 사용하는 기술은 그에게 가용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그가 그것을 잘못 기억한다면, 스트로슨의 전형은 잘못된 결과들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의 관점에서, 그 원천은 화자가 지칭을 어떻게 얻었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상관된 실제 의사소통 연쇄이다. 나는 다른 기회에 철학적 이론들이 거짓일 위험에 처해 있다고 말했고, 그래서 대안적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저 그렇게 했었나? 어떤 식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나의 규정은 실제로 지칭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만한 일련의 것들에 비해 훨씬 덜 구체적이었다. 명백히 이름은 연결에서 연결로 이행된다. 하지만 물론 나로부터 특정 사람에게 도달하는 모든 종류의 인과적 연쇄가 나로 하여금 지칭을 형성하도록 해주진 않을 것이다. 우리의 '산타클로스'라는 용어 사용으로부터 특정한 역사적 성인에 이르는 인과 연쇄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아이들이 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는 이 때까지 아마도 저 성인을 지칭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를 정말로 엄격한 지칭 이론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내가 이 작업을 하게 될지는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우선 나는 지금 너무 게으르고, 다음으로, 지칭 같은 용어에 대해 작동할 일련의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기 보다는, 수용되어 온 관점들에 의해 제안된 그림보다 더 나은 그림을 제안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기술 이론에 지나치게 불공평하게 굴었나? 이 자리에서 나는 그 이론의 어떤 지지자에 의해 진술되었던 것보다도 아마 더 정확하게, 아주 정확히 그 이론을 진술했다. 그래서 그건 반박하기 쉬운 일이다. 어쩌면 만일 내가 나의 이론을 충분히 정밀하게 예닐곱 개 명제들의 형태로 진술하려 했었더라면, 당신이 그 명제들을 하나씩 시험할 때, 그 명제들 모두 거짓이라고도 드러났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그 차이는 이런 것이다. 내가 제시한 예시들이 보여준다고 내가 생각하는 바는 단순히 이곳저곳에 이러저러한 기술적 오류나 실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해 이 이론에 의해서 제기된 전체 그림이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94] 어떤 식으론가 질적으로 고유하게 대상을 지적해내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지칭을 결정하는 어떤 속성들을 우리 스스로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은 더 나은 그림, 만일 더 많은 세부사항이 채워지게 된다면, 지칭이 발생하기 위한 더 정확한 조건들을 제공하는 일과 관련하여 더 개선될 수도 있을 그림을 제시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련의 필충조건에 전혀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버틀러 주교의 '모든 것은 각기 그것인 바의 것이며 여타의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언제나 공감해 왔다. 지칭 같은 일부 개념에 대해 지칭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 완전히 다른 용어를 통한  철학적 분석들은 무척이나 실패하기 쉽다는, 사소하지 않은 의미에서 말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어떤 분석이 제시되는 어떤 특정한 경우에서든 그 분석을 살펴보고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을 그저 스스로 공리로 인용하고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한층 더 신중하게, 나는 지칭을 위한 일련의 필충조건을 제공하지 않고서 더 나은 그림을 제시하고 싶다. 그런 조건들은 매우 복잡할 테지만, 진실은 우리가 특정인을 지칭한다는 것이 공동체 내에서 지칭되는 사람 그 자신에게도 소급되는 우리와 다른 화자들 사이의 연결 덕분이라는 점이다.

  기술 그림이 참인 어떤 경우들, 어떤 사람들이 실제로 혼자 자기방에 들어가 해당 지칭물이 특정한 정체화 속성들을 가진 고유한 사물이라고 말함으로써 실제로 이름을 부여할 그런 경우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잭 더 리퍼'가 내가 제시했던 가능한 사례였다. 또 다른 사례는 '샛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에 욱여넣어질 수 있는 또 다른 사례는 어떤 사람을 만나 그의 이름이 이야기되고 있는 경우이다. 다른 사례들에서 기술 이론의 중요성에 대한 믿음을 제외하면, 아마 '내가 지금 막 만나고 있는 그 사내'라는 기술을 스스로 제공하고 있는 사례였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바란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다른 어떤 식으로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더라면 그런 말로 표현할 수도 있다. 물론, 만일 당신이 한 사람을 소개받고 [95] '저 사람이 아인슈타인이다'라고 말하는 걸 듣는다면, 당신은 그에 대해 이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이고, 그것은 틀렸을지도 모르며, 기타 등등의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일부 경우들에서는 그런 전형이 작동할지도 모른다. 특히 처음으로 누군가 혹은 어떤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사람의 경우 그렇다. 혹은 그가 한 별을 가리키고 '저것은 켄타우로스좌의 알파별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스스로 이러한 세례식을 거행할 수 있다. '"켄타우로스좌의 알파별"로써 나는 이러저러한 좌표 상의 바로 저기 그 별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 그림은 실패한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지칭은 단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바에 의존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 이름이 누군가에 당도하였는지의 역사에, 또 그와 같은 사항들에 의존한다. 누군가가 해당 지칭을 획득하는 것은 그러한 역사에 뒤따름으로써 성립한다. 

  더욱 정확한 조건들은 제시하기에 너무 복잡한 것이다. 그 조건들은 유명한 사람의 경우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서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 다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한 교사가 그의 학생들에게 뉴턴이 사물들을 지구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 첫 번째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말한다. 나는 어린 친구들이 뉴턴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었다고 생각하는 바가 저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그런 업적의 이점들이 무엇일지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것이 뉴턴 발견의 유일한 내용으로 말해지는 것은 뉴턴에 대한 거짓 믿음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령 학생들이 이전에 뉴턴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가정할 것이다. 만일, 다른 한편으로,[각주:10] 해당 교사가 'George Smith'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면―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사실 그의 옆집 이웃이다―그리고 조지 스미스가 최초로 원의 사각화를 했다고 말한다면, 이로부터 그 학생들이 해당 교사의 이웃에 관한 거짓 믿음을 가진다는 점이 도출되는가? 그 교사는 학생들에게 스미스가 그의 이웃이라고 말하지 않고, 스미스가 처음으로 원을 사각화하였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는 딱히 그 이웃에 관한 어떤 믿음이든 학생들의 머릿속에 집어 넣으려 애쓰고 있지 않다. 그는 원을 사각화한 사람이 있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 애쓰고 있지만, 어떤 특정 사람에 관한 믿음을 심어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그에게 처음 보인 이름을 뽑아 들었고, 마침 그가 그의 이웃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경우에서 [96] 학생들이 그 이웃에 관한 거짓 믿음을 가지는지는, 설령 그 이웃에게로 소급되는 인과 연쇄가 있을지라도, 명백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에 관해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이것이 일련의 필충조건이 되도록 하려면 더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이론은 아니지만, 실제로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더 나은 그림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론에 대한 투박한 진술은 다음과 같을 수 있을 것이다. 최초의 '세례식'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대상은 명시적 규정에 의해 명명될지도 모르고, 혹은 기술에 의해 해당 이름의 지칭이 고정될지도 모른다.[각주:11] 이름이 '연결에서 연결로 이행'될 때, 이름의 수신자는 내 생각에 그가 그 이름을 배울 때 그가 그 이름을 들은 사람과 같은 지칭을 가지고 그 이름을 사용하려는 의도를 가져야만 한다. 만일 내가 '나폴레옹'이란 이름을 듣고 내 애완 땅돼지의 이름으로 어울린다고 결정한다면, 나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지 않는다.[각주:12] (아마도 그런 어떤 고정된 지칭의 유지 실패가 [97] '산타클로스'의 본래 용법으로 추정되는 것과 오늘날의 용법들의 차이에 대해 설명해주는 것이다.)

  앞선 개괄이 지칭 개념을 거의 배제시키지 못한다는 점에 주의하라. 반대로, 그것은 주어진 것과 같은 지칭을 사용하고자 하는 의도 개념을 취한다. 기술에 의한 지칭 고정이나 명시적 규정으로 설명되는 최초 세례식에 대한 호소도 있다 (만일 명시적 규정이 다른 범주 아래에 포괄되는 것이 아니라면).[각주:13] (어쩌면 최초 세례식들에 대한 다른 가능성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조지 스미스 사례는 그 조건들의 충분성에 관련해 일부 의심을 드리운다. 설령 그 교사가 그의 이웃을 지칭한다 할지라도, 그가 그의 지칭을 학생들에게 이행시켰다는 점이 분명한가? 왜 그들의 믿음이 '조지 스미스'라고 명명된 다른 어떤 사람에 관한 것이 아니어야 하겠나? 만일 그가 뉴턴은 사과에 맞았다고 말한다면, 어떤 식으론가 그의 지칭 전파 작업은 더 쉬워지는데, 그가 뉴턴에 관한 흔한 오해를 갖고 의사소통했기에 그러하다. 

  반복하자면, 나는 이론을 제시했던 것은 아닐 테지만, 기술이론가들에 의해 제시된 것보다 더 나은 그림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논할 다음 주제가 동일성 진술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진술들은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가? 그 문제는 최근의 철학 내에서 어느 정도 논란이 되어 왔다. 첫째로, [98] 모두가 기술들이 우연적 동일성 진술들을 만드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만일 이중초점렌즈를 발명한 사람이 합중국의 첫 번째 우정장관이었다는 것이 참이라면―이것들이 하나이고 같다는 것이 참이라면―그것은 우연적으로 참이다. 즉, 한 사람이 이중초점렌즈를 발명했고 또 다른 사람이 합중국의 첫 번째 우정장관이었던 것이 사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확실히 당신이 기술들을 사용해 동일성 진술들을 만들 때―당신이 'φx인 그런 x와 ψx인 그런 x가 하나이고 같다'고 말할 때―그것은 우연적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들에 대한 문제에도 흥미를 가졌다. 우리가 '샛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 또는 '키케로는 툴리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는 필연적인가 혹은 우연적인가? 더욱이, 그들은 과학 이론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유형의 동일성 진술에도 흥미를 가졌다. 예를 들어 우리는 빛을 특정 파장 범위 내 전자기 복사와, 또는 광자의 흐름과 동일시한다. 우리는 열을 분자들의 운동과 동일시한다. 소리를 공기 중 특정 종류의 파동 교란과 동일시한다. 기타 등등. 그러한 진술들과 관련하여 이하의 명제가 흔히 주장된다. 첫째로, 이들은 명백히 우연적 동일성들이다. 우리는 빛이 광자들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아냈지만, 물론 그것은 광자들의 흐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열은 사실상 분자들의 운동이다. 우리는 그 점을 알아냈지만,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여러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례들이 널려 있다는 것을 지극히 다행한 일이라 느낀다. 왜? 이 철학자들, 그들의 관점들이 막대한 문헌들에서 해설되는 그들은 일부 심리학적 개념에 관련하여 소위 '동일성 논제'라는 것을 견지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고통이 뇌나 신체, 혹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말하자면 C섬유의 자극 (그것이 무엇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특정 물질적 상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일부 사람들이 반박해 왔다. '보라, 고통과 신체의 이런 상태들 사이에 어쩌면 상관성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상이한 두 사물 사이의 우연한 상관성에 불과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99] 이러한 상관관계가 견지되었다는 그 점이 경험적 발견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으로 우리는 신체나 뇌의 이러한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상이한 두 가지 사물들이어야만 한다.'

  그럼 이런 말이 나온다. '그건 틀렸다. 모두가 우연적 동일성들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우선, 내가 앞서 언급했던 이중초점렌즈와 우정장관 사례에서처럼 우연적 동일성이 있을 수 있다. 두 번째로, 현대적 전형에 더 가깝다고 믿어지는 사례들, 이론적 동일화의 사례들, 빛과 광자들의 흐름 혹은 물과 수소와 산소의 특정 화합물 같은 동일화 사례들에서 그러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우연적 동일성들이다. 그것들은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통을 느끼는 것 혹은 붉은 색을 보는 것이 인간 신체의 특정 상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우연적 사실의 문제로서 참일 수 있고 어떤 필연성의 문제로서도 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정신물리학적 동일화들이 다른 동일성들이 우연적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연적 사실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제를 믿고 싶게끔 사람들을 이끄는 널리 퍼진 동기들이 있다. 이념적 동기 또는 단지 물리법칙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신비적 연결이라는, 상이한 종류의 사물들, 물질적 상태들, 전적으로 다른 종류에 속하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 같은 '법칙적 잔여물'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동기가 있다.

  내가 논할 주된 사항은 우선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일 것이라 추정한다. 하지만 이하에서 나는 보편적인 사례에 관해 다룰 것이다. 우선, '열은 분자들의 운동이다' 같은 특징적인 이론적 동일화들은 우연적 참이 아니라 필연적 참이라는 것인데, 물론 나는 여기에서 단지 물리적 필연성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더 높은 단계에서의 필연성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여간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리적 필연성은, 더 높은 단계에서의 필연성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앞서 판단하고 싶지 않은 문제이다. 최소한 이런 종류의 사례에 대해서는, 어떤 것이 물리적으로 필연적일 때, 항상 그것은 단적으로 필연적이라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이런 동일화들이 필연적 참으로 드러난 방식이 내게는 [100] 정신-뇌 동일성들이 필연적 참이나 우연적 참으로 드러날 수 있을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유비는 폐기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 무엇이 놓여야 할지 알기란 어렵다. 그러므로 그 둘이 실제로 다르다는 결론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알기도 어렵다.

  고유명사에 관한 더 일상적인 사례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이미 충분히 신비로운 일이다. 이에 관해 콰인과 Ruth Barcan Marcus 사이에 논쟁이 있다.[각주:14] 마르쿠스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들이 필연적이라고 말한다. 만일 누군가가 키케로는 툴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키케로'와 '툴리'를 이름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그로써 그의 믿음이 필연적 참임을 주장하는 일에 연루된다. 그녀는 '단순 표식(mere tag)'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콰인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우리는 어느 멋진 저녁에 금성에 "개밥바라기별"이란 고유명사로 표식을 붙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똑같은 행성에 다시, 어느 날 동틀녘에, "샛별"이란 고유명사로 표식을 붙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같은 행성에 두 번 표식을 붙였다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의 발견은 경험적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유명사들이 기술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다.'[각주:15] 첫째로, 콰인 말대로 우리가 같은 행성에 두 번 표식을 붙였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의 발견은 경험적인 것이었다. 콰인이 다른 책에서 제시한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사례는 같은 산을 네팔에서 본 경우와 티벳에서 본 경우, 한쪽에서는 '에베레스트 산' (당신이 들어본 그 이름)이라 불리고 다른 쪽에서는 '가우리샹카르'라고 불린다고 추정된다는 것이다. 가우리샹카르가 에베레스트라는 것은 실제로 경험적 발견일 수 있다. (콰인은 그 사례가 실제로 거짓이라 말한다. 그는 Erwin Schrödinger에게서 그 사례를 가져왔다. 당신은 파동역학의 고안자가 그런 것들을 틀렸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실수가 어디에서 유래했다고 추정되는지 알지 못한다. 누군가는 이 상황이 있었던 일이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101] 콰인이 염두에 두었던 그런 종류의 일에 대한 훌륭한 묘사이다.)

  그것에 관해서는 어떤가? 이 책 안에서 반대편에서 마르쿠스로부터의 적절한 인용을 찾고 싶었지만 위치를 특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 토론에 참석했기에, 나는 그녀가 만일 당신이 실제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사전은 그 이름들이 같은 지칭을 가지는지 여부를 당신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하리라는 관점을 옹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각주:16] 그래서 누군가는 그 사전을 살펴봄으로써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것은 참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들이 필연적이라는 관점의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들이 필연적이라는 관점은 흔히 거부되어 왔다. 러셀의 결론은 뭔가 다른 것이었다. 그는 두 이름들이 같은 지칭을 가지는지 여부에 대한 어떤 경험적 질문도 결코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일상적 이름들에 대해서는 충족되지 않지만, 당신이 당신의 고유한 감각 자료를 명명하고 있을 때,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경우에 만족된다. 당신은 말한다. '여기, 이것, 그리고 그것(같은 감각 자료를 두 지시사 모두로 지시하면서).' 그래서 당신은 경험적 조사 없이 당신이 같은 사물을 두 번 명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건들은 충족된다. 이것이 명명의 일상적 사례들에 적용되지 않을 것이기에, 일상적 '이름들'은 진정한 이름들일 수 없다.

  이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바는 무엇인가? 첫째로, 누군가가 '키케로'라는 이름을 키케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고 '툴리'라는 이름도 키케로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 수 있으며, 키케로가 툴리임을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름들 사이의 동일성 진술이 참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선험적으로 알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그렇게 표현된 해당 진술이 참이라면 우연적인 참이라는 점이 도출되진 않는다. 이것이 내 첫 번째 강연에서 내가 강조했던 바이다. 만일 당신이 선험적 추론을 통해 어떤 것을 알 수 없다면, 그것은 우연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이끄는 매우 강력한 감각이 있다. 그것은 다른 식으로 드러났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감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102] 우리가 같은 천체를 두 번, '개밥바라기별'로 그리고 '샛별'로 지칭한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말한다. 개밥바라기별은 저녁의 저기 저 별이다. 샛별은 아침의 저기 저 별이다. 실제로,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을 그러한 상황이 실제로 있는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고 가정하면서, 그렇지 않았을 가능한 상황을 기술하고자 시도해 보자. 그것은 쉬운 일이다. 누군가는 계속해서 나아가 두 상이한 별들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그리고 '샛별'이라고 부른다. '개밥바라기별' 그리고 '샛별'이라는 이름들을 우리가 도입할 때 전제된 것과 같은 조건들 하에서도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황들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지 않거나 혹은 샛별이지 않았을 상황들인가? 그런 상황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제, 물론 나는 '개밥바라기별'과 '샛별' 같은 용어들이 이름들로 사용될 때 고정 지시자들이라고 말함으로써, 그 상황들이 그런 상황들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에 연루되었다. 그 용어들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금성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그 가능세계에서도 금성은 금성이고 다른 어떤 사람이 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무엇이라 말했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기술해야 할까? 그는 금성을, 우리가 했듯, 한 경우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또 다른 경우에는 '샛별'이라고 두 번 가리켰을 수도 불렀을 수도 없다. 만일 그가 그렇게 했었더라면,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것은 그 상황에서도 참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쩌면 둘 중 어느 때에도 금성을 가리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한 번은 그가 금성을 가리키지 않았다. 그가 '샛별'이라 부른 천체를 가리켰을 때 그랬다고 하자. 그럼 그 경우 우리는 확실히 '샛별'이라는 이름이 샛별을 지칭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가 샛별을 발견했던 그 아침 그것을 봤던 바로 그 위치에서, 샛별이 거기 있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른 어떤 것이 거기 있었다고, 그리고 특정 상황 하에서 그것이 '샛별'이라고 불렸던 것이었으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샛별이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던 경우는 아니다.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실제 그것들의 이름인 것들의 이름이 아니었을 [103] 가능세계, 가능한 반사실적 상황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만일 그가 그 이름들의 지칭을 정체화 기술들을 통해 결정했다면, 우리가 사용한 바로 그 정체화 기술들을 사용했을 수조차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경우가 아니다. 왜냐하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고 주어진다면, 그런 경우는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는 매우 이상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앞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인지 여부의 질문에 대한 답이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 것이라 말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 그 둘이 같은 것이라는 우리의 발견에 앞서서, 한편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었던 가능세계가, 또 다른 한편에서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가능세계가, 그렇게 실제로 두 가능 세계들이 있지는 않은 것인가? 우선, 한 가지 의미로는 사물들이 둘 중 어느 쪽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것이 최종적으로 밝혀진 방식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사색정리는 참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르고 거짓인 것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것은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여전히 그 드러나는 방식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백하게, '~할지도 모른다(might)'라는 것은 여기에서 순전히 '인식론적'이다. 그것은 단지 우리의 현재 무지 상태 혹은 불확실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개밥바라기별-샛별 사례에서, 어떤 것은 훨씬 더 강력하게 참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 내가 가진 증거는 내가 저녁에 특정 별 혹은 특정 천체를 보고 그것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그리고 아침에 그리하고 그것을 '샛별'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을 안다. 확실히 한 사람이 저녁에 특정 위치의 특정 별을 봤을 그리고 그것을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불렀을 또한 아침에 특정 별을 봤고 그것을 '샛별'이라고 불렀을, 또한 그가 두 상이한 별들 혹은 두 상이한 천체들을 명명한다고 결론내렸을, 경험적 관찰을 통해 알아냈을 가능세계가 있다. 최소한 이 별들 혹은 천체들 중 하나는 샛별이 아니었고, 다른 식으로는 그런 식으로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참이다. 또한 그렇게 [104] 누군가가 그의 경험적 조사에 선행하여 가지고 있는 증거가 전제될 때,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정확히 같은 상황, 즉 질적으로 동일시되는 인식론적 상황에 놓일 수 있고, 두 천체가 동일시되는 일 없이 두 천체를 '개밥바라기별'과 '샛별'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 일이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 일이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점에 관련하여 둘 중 어느 방식으로든 드러났을 지도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미리 알고 있던 한에서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의미로 다른 어떤 식으로도 드러났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히, 말하자면 질적으로 같은 증거를 가지는 상황에 놓인 채로,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을 수 있을 것이다. 즉,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우리가 사용하는 그런 식으로 이 행성의 이름들로 사용되지 않고 다른 대상들의 이름들로 사용되었을 반사실적 세계에서, 누군가는 질적으로 동일한 증거를 가졌었을 수 있고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상이한 두 대상들을 명명했다고 결론내렸을 수 있었을 것이다.[각주:17]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당장 사용하듯 그 이름들을 사용하면서 선행하여 만일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이 하나이고 같은 것이라면, 다른 그 어떤 가능세계에서도 그것들이 다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을 특정 천체의 이름으로 그리고 '샛별'을 특정 천체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런 천체들의 이름들로 사용한다. 만일, 실제로, 그것들이 같은 천체라면, 어떤 다른 가능세계에서든 우리는 그것들을 그 대상의 이름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어떤 가능세계에서든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은 참일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 사항들이 참이다. 첫째,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고, 경험적으로  답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 답을 찾을 어떤 위치에도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그 이유는, 그 행성들이 같지 않더라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증거와 질적으로 구별불가능한 증거를 우리가 가질 수 있을 것이고 하늘에서 두 행성의 위치로 두 이름의 지칭을 결정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05] 물론, 저녁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 아침에 저기에서 보인 그 별이라는 것은 오직 우연적 참일 뿐인데, 샛별이 아침에 보이는 것이 아니었던 가능세계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우연적 참은 개밥바라기별이 샛별이라는 진술과 동일시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그 진술은 당신이 개밥바라기별이 저녁에 저기에서 보이는 것이라는 점 혹은 샛별이 아침에 저기에서 보이는 것이라는 점이 필연적 참이었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식으로만 동일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행성을 지적해내는 방식이 그것이라 하더라도 그것들 중 어느 쪽도 필연적 참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그로써 특정 행성을 정체화하고 이름을 부여하는 우연한 표식들이다.

 

-蟲-

  1. D. Lewis, op. cit., pp. 114-15. [본문으로]
  2. 지시적 정의에 대비해 기술로 이름의 지칭을 결정하는 오히려 더 좋은 사례는 해왕성의 발견이다. 해왕성은 특정한 다른 행성들의 궤도에서 그러저러한 차이들을 야키한 행성으로서 가정되었다. 만일 르베리에가 그 행성이 보이기 전에 그 행성에 '해왕성'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기까지 했었더라면, 그는 '해왕성'의 지칭을 방금 언급된 기술로써 고정시켰을 것이다. 그 당시에 그는 망원경을 통해서조차 그 행성을 볼 수 없었다. 이 단계에서, '해왕성이 존재한다'라는 진술과 '그러저러한 다른 행성들의 궤도에 섭동을 유발시키는 어떤 한 행성이 그러저러한 위치에 존재한다'라는 진술 사이에 선험적인 물질적 등가가 성립하고, 또한 '만일 그러저러한 섭동들이 한 행성에 의해 야기된다면, 그 섭동들은 해왕성에 의해 야기된다'라는 진술도 선험적 참의 상태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술들은 필연적 참이 아니었을 것인데, '해왕성'이 특정 행성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이름으로 도입되었기에 그러하다. 르베리에는 만일 해왕성이 100만년 더 먼저 그 궤도가 중단되었더라면, 그런 어떤 섭동도 전혀 유발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일부 다른 대상들이 그 자리에서 그 섭동들을 유발시켰을지도 몰랐다고까지도 문제없이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3. 한정 기술구에 관한 도넬란의 언급에 따르면 우리는, 일부 경우에, 대상에 대해 거짓으로 드러날지도 모르는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대상이 정체화될지도 모르고, 이름의 지칭이 고정될지도 모른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Phosphorus'의 지칭이 '샛별'로, 이후 별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 그것으로 결정된 경우가 명백한 사례이다. 그런 경우 지칭을 고정하는 기술은 명백히 어떤 의미로도 그 대상을 포착하는 것는 것으로 선험적으로 알려지지 않는데, 더욱 신중한 대체물이더라도 그러하다. 만일 그런 더욱 신중한 대체물이 가용하다면, 그것이 실제로 해당 문헌에서 의도된 의미에서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대체물이다. [본문으로]
  4. 그 명제들 중 일부는 인용부호의 사용과 관련된 세부사항들 같은 까다로운 문제들의 측면에서 엉성하게 진술되었다. (예를 들어, 명제 (5)와 (6)은 진술된 대로, 화자의 언어가 영어라고 전제한다.) 그 명제들의 요지는 명백하고, 어쨌든 그것들이 거짓이기에, 나는 그 명제들을 그대로 열거하는 데에 곤란해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5. 이름에 대한 기술다발이론은 '페아노가 수 이론에 대한 공리를 발견했다'라는 것이 오해가 아니라 사소한 참을 표현하도록 만들 것이고, 과학의 역사에 관한 여타 오해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일을 할 것이다. 그런 사례들을 인정한 일부 사람들은 내게 다발 이론을 충족시키는 동일한 고유명사들의 다른 용법들이 있다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어, 만일 우리가, '괴델은 산술의 불완전성을 증명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물론 슈미트가 아니라 괴델을 지칭하고 있다고 주장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괴델은 그 증명의 이 단계에서 대각 논법에 의존하였다'라고 말한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아마도 '누가 되었든 그 정리를 증명한 자'를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유사하게, 만일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혹은 셰익스피어)가 여기에서 염두에 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는 그 저자가 누가 되었든지 간에 문제의 구절의 저자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나? 기술구들에 대한 도넬란의 용법에 유비하여, 이것은 고유명사의 "한정적" 용법이라 불릴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 일이 그렇다면, 괴델-슈미트 이야기를 상정할 때,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했다'라는 문장은 거짓이지만, '괴델은 그 증명에서 대각 논법을 사용했다'라는 문장은 (최소한 어떤 맥락들에서는) 참이고, '괴델'이란 이름의 지칭은 애매하다. 일부 반례들이 남아있기에, [86] 기술다발이론은 일반적으로 여전히 거짓일 것이고, 그게 이 글에서 내 주요 논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넓은 사례들의 층위에 적용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어떤 애매성도 상정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때로 누군가가 '괴델'이란 이름을 사용할 때, 그의 주요 관심사는 누구든 여하간 그 정리를 증명한 사람이고, 또 아마도, 어떤 의미로는, 그가 그 사람을 '지칭'한다는 것은 참일 것이다. 나는 이 사례가 25쪽 3번 주석에서 스미스와 존의 사례와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스미스를 존으로 착각한다면, 나는 스미스가 낙엽을 쓸고 있다고 말할 때 존을 (적절한 의미에서) 지칭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미스'를 애매한 방식으로, 때로는 스미스의 이름이고 또 때로는 존의 이름인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스미스의 이름으로 일의적으로 사용한다. 유사하게, 만일 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저러한 구절을 기록하였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나는 아마도 때때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그 구절의 실제 저자를 지칭하는 데에 사용할지도 모르는데, 설령 내가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 아무런 애매성도 없을지라도 그럴 수 있다. 두 경우 모두, 나는 해당 사실들에 대해 고지받는다면, 내 본래 진술과 내가 본래 그 이름을 사용한 방식을 을철회할 것이다. 이 강연에서 '지칭물'이 이름(혹은 기술을 고유하게 충족시킴)에 의해 명명된 사물이란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거기에 아무런 혼동도 없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본문으로]
  6. 이름은 도넬란식의 의미에서 기술의 '지칭적' 용법과 결부된다고 누군가는 주장할지도 모른다는 제안이 온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괴델을 불완전성 정리의 저자로 정체화하더라도, 우리는 설령 그가 해당 정리를 증명한 적이 없다고 밝혀지더라도 그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명제 (2)-(6)은 그래서 거짓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이름은 기술을 축약시킬 것인데, 명명과정에서 기술의 역할이 프레게와 러셀이 상상한 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를지라도 그러하다. 내가 앞서 언급하였듯, 나는 지칭적 한정 기술이라는 개념에 대한 도넬란식의 정식화를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렇지만 도넬란의 그 분석이 수용된 경우라 하더라도, 작금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아야 하리란 점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칭적 한정 기술, '샴페인을 마시는 남자' 같은 그런 기술은 화자가 그 기술이 그 기술의 대상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전형적으로 철회되기 때문이다. 만일 괴델식 사기가 폭로된다면, 괴델은 더 이상 '불완전성 정리의 저자'라 불리지 않을 테지만 그러나 여전히 '괴델'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 이름은 그러므로 기술의 축약이 아니다. [본문으로]
  7. Robert Nozick이 내게 지적해주었듯, 이름의 지칭에 대한 어떤 이론이든지, 지칭 개념과 독립적으로 상술된 이론이 사용될 수 있다면, 기술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사소하게 참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런 이론이 대상이 이름의 지칭물이 되는 조건들을 제시한다면, 그 대상은 물론 이러한 조건들을 고유하게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의미로 지칭 개념을 제거하는 어떤 이론도 제시할 생각이 없기에, 해당 기술 이론의 그런 어떤 사소한 충족에 대해서도 아는 바 없고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름의 지칭 개념을 사용하는 기술은 쉽사리 사용될 수 있지만 우리가 닐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서 보았듯 순환적이다.) 그렇지만 만일 그런 어떤 사소한 충족이든 사용가능했더라면, 내가 제시했던 논증들은 해당 기술이 프레게, 러셀, 설, 스트로슨 그리고 그 기술이론의 여타 옹호자들에 의해 가정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어야만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문으로]
  8. Princeton University. [본문으로]
  9. Strawson, op. cit., p. 182 n. [본문으로]
  10. 이 사례의 본질적인 핵심들은 Richard Miller에 의해 제안되었다. [본문으로]
  11. 세례식의 지칭이 기술을 통해 고정되는 좋은 사례는 79쪽 주석 33에서 해왕성을 명명하는 사례이다. 명시적 규정에 의한 세례식 사례는 아마도 기술 개념 하에 그 또한 포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술 이론의 기본적인 적용가능성은 최초 세례식 사례에 대한 것이다. 기술들 또한 도입된 용어들이 통상 '이름들'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명명과 유사한 지시의 사례들에서 지칭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된다. '1m','섭씨 100도' 같은 용어들이 이미 사례로 제시된 적 있고, 다른 사례들도 이 강연에서 이후에 제시될 것이다. 두 가지 사항이 최초 세례식에서 기술을 통한 이름의 도입 사례와 관련하여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사용된 기술은 그 기술이 도입시키는 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라 그 이름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통상의 기술 이론가들과 차이가 난다. 둘째, 최초 세례식의 대다수 사례는 본래 기술 이론에 영감을 준 사례들과 거리가 멀다. 통상 세례자는 어떤 의미에서 그가 명명하는 대상과 안면이 있고 그 대상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명명할 능력이 있다. 이제 기술 이론의 영감은 우리가 종종 오래 전에 죽어서 그와 마주친 적이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과거 유명인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확히 우리의 관점에서 기술 이론에 의해서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사례들이다. [본문으로]
  12. 나는 그 땅돼지의 이름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 사람들 각자에게는, 나에게 그러하듯, 그 이름에 대한 나의 용법과 프랑스 황제 사이의 특정 종류의 인과적 혹은 역사적 연결이 있을 것이지만, 요청되는 유형의 연결은 있지 않을 것이다. [본문으로]
  13. 일단 우리가 이름의 지칭을 고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기술이 그 이름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나면, 기술이론은 명명이나 지칭 개념을 선전제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사용되는 기술이 그 자체로 순환적인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내가 만든 요구조건은 별개의 이야기이고 만일 기술이론이 어떤 가치라도 하여간 가지려면 결정적인 것이다. 그 이유는 기술이론가들이 각 화자가 그의 지칭을 결정하기 위해 본질적으로 최초 명명 행위에서 그가 제시하는 기술을 사용한다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명백히, 만일 그가 해당 결정을 통해, '"키케로"라는 말로 나는 내가 "키케로"라고 부르는 사람을 지칭할 것이다"라고 해서 '키케로'라는 이름을 도입한다면, 그는 이 의식을 통해 아무런 지칭도 전혀 결정하지 않은 것이다.

      모든 기술이론가들이 지칭 개념을 전부 다 제거하고 있다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일부 사람들은 일부 명시적 규정 개념 또는 초기 지칭 개념이 그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요청된다는 점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러셀은 확실히 그 점을 알았다. [본문으로]

  14. Ruth Barcan Marcus, 'Modalities and Intensional Languages' (comments by W. V. Quine, plus discussion) Boston Studie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volume I, Reidel, Dordrecht, Holland, 1963, pp. 77-116 . [본문으로]
  15. p. 101. [본문으로]
  16. p. 115. [본문으로]
  17. 세 번째 강연에 이러한 점에 대한 더 정교한 논의가 담겨 있다. 그 강연에서 그 지점의 특정 종류의 대응쌍이론과의 관계 또한 언급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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