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Lecture Ⅰ: January 20, 1970[각주:1] 

 

  나는 몇 사람 정도는 제목의 두 주제 사이의 어느 정도의 관계를 알아채 주길 바란다. 이 강연에서는 그런 관계들이 개진될 것이다. 오늘날 분석철학에서 지칭(reference)과 필연성을 포함한 도구 사용으로 인해, [23] 전통적으로 이런 주제들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왔던, 심신문제나 소위 '동일성 논제'에 관한 논증들 같은 다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이런 주제들에 관한 우리의 관점들은 정말로 광범위한 함축을 가진다. 이런 구도에서 오늘날 유물론은 종종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속성 동일성에서 필연적인 것이나 우연적인 것은 무엇인지에 관한 문제나 그와 같은 문제들에 연루되곤 한다. 그래서,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고자 할 철학자들에게 이런 개념들을 분명히 하는 일은 정말이지 무척이나 중요하다. 이 강연 중에 어쩌면 내가 심신문제에 관련해 좀 언급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체와 자연종에 관해서도 어느 시점에서는 논하고 싶다.

  내가 이런 문제들에 접근하는 방식은 오늘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꽤나 다를 것이다 (비록 그 방식도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고 쓰고 있던 것과 몇몇 접점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이런 비격식적인 강연에서 사람들을 놓치더라도, 용서해주길 바란다).[각주:2] 내가 가진 관점들 중 일부는 몇몇 사람들에게 명백히 틀렸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는 관점들이다. 내가 선호하는 예시는 다음과 같다 (나는 이 예시를 아마 강연에서 방어하진 않을 것이다. 도무지 아무도 설득시키지 못할 한 가지 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 사실은 공집합-공외연을 가지는-이라도 어떤 종류의 필연 문제도 아니라 [24] 우연적 사실의 문제로 공외연을 가지는 그런 특정 술어들이 있다는 것은 동시대 철학에서 흔한 주장이다. 난 그 점은 반박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제시되는 예시가 유니콘 사례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어떤 유니콘들도 전혀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하더라도, 유니콘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된다. 특정 상황에서 유니콘들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어떤 것의 사례이다. 내 식으로는 아마 어떤 유니콘도들도 있지 않을 것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바로 무슨 조건들 하에서 유니콘들이 있었을 것인지 우리가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참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설령 고고학자나 지리학자가 내일이라도 우리가 유니콘에 대한 설화를 통해 유니콘에 관하여 알고 있는 모든 점을 만족시키는 과거 동물들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일부 화석을 발견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게 유니콘이 있었을 것임을 보여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게 이 특정 관점을 방어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놀랄 만한 관점의 일례이다. (나는 실제로 이 관점에 대해 두 회기에 걸쳐 여기에서 강연한 바 있다.) 그렇게, 내 의견들 중 일부는 어느 정도 놀라운 것들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렇게 놀랍지는 않을 일부 영역에서 시작해서 이 강연의 방법론과 문제들을 소개하기로 하자.

  한 짝의 주제들 중 첫 번째는 명명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이름을 고유명사라는 의미로, 즉 한 개인이나 한 도시 혹은 한 나라 등의 이름이란 뜻으로 쓸 것이다. 현대 논리학자들이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s)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건 'φx인 x (the x such that φx)' 형식의 구들,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내(the man who corrupted Hadleyburg)' 같은 것이다. 이제, 만일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하들리버그를 타락시켰다면, 그 사람은 현대 논리학자가 이해하는 의미로 해당 기술(description)의 지시체(referent)이다. 우리는 그런 종류의 한정기술구를 포함하지 않도록, 오직 일상언어에서 '고유명사'로 불릴 그런 것들만을 포함하게끔 그렇게 '이름'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름과 기술을 포괄하는 공통용어를 원한다면, 우리는 '지시어(designator)'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25] 도넬런이 말했던 바,[각주:3] 특정 상황 하에서 개별 화자가 한정기술구를, 내가 방금 정의했던 의미에서, 그 기술구의 적절한 지칭체가 아니라, 그가 지적해내길 바라는 그리고 해당 기술구의 적절한 지칭체라고 그 화자가 생각하는, 하지만 사실은 적절한 지칭체가 아닌 그런 어떤 다른 것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을리란 점이 핵심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의 잔에 샴페인을 담고 저기에 있는 그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그가 실제로는 그저 잔에 물을 담고 있을 뿐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설령 그의 잔에 샴페인이라고는 전혀 없다 하더라도, 그리고 잔에 샴페인을 담아 가지고 있는 그 방 안의 또 다른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화자는 그가 잔에 샴페인을 담아 가지고 있던 자로 생각했던 그 사람을 지칭하기를 의도했거나(intended), 혹은 어쩌면, '지칭'의 일부 의미에서, 지칭을 했다(did).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계속 [26] '기술의 지칭체'라는 용어를 해당 한정 기술구 내의 조건들을 고유하게 충족시키는 대상이란 뜻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는 논리적 전통에서 사용되어 온 의미이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φx인 x' 형태의 기술을 지니고, φx인 그런 정확히 한 x가 있다면, 그것이 해당 기술구의 지칭체이다.

  이제, 이름과 기술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John Stuart Mill의 책 A System of Logic에는, 이름은 지시를 가지지만 함축을 가지지 않는다는 유명한 원리가 있다. 그의 예시 하나를 사용하자면, 우리가 영국의 특정한 곳을 기술하기 위해 'Dartmouth'라는 이름을 사용할 때, 그 곳은 Dart의 입구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하기로 Dart(강)가 설령 그 경로를 바꿔서 다트머스가 더 이상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이 장소를 적절하게 '다트머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며, 설령 그 이름이 그곳은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점을 시사할지라도 그리 할 수 있을 것이다. 밀의 말을 바꿔서, 아마 우리는 '다트머스' 같은 이름이 일부 사람들에게 (나에겐 아니다. 나는 절대로 이렇게 생각한 적 없다.) '다트머스'라고 불리는 어떤 장소든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함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그 이름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적어도, '다트머스'라는 이름의 에는 그렇게 명명된 도심지가 다트 강의 입구에 자리한다는 것이 부분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다트머스가 다트 강의 입구에 놓여있지 않았다고 말한 누군가는 그 자신과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Fx인 x' 형식의 모든 구가 항상 영어에서 이름 보다는 기술로 사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는 누구나,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인의 것도 제국이지도 않은 신성로마제국에 관해 들어봤으리라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에겐 국제연합이 있다. 여기에서 이런 것들이 신성로마국제연합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 불릴 수 있기에, 이런 구들이 한정기술구가 아니라 이름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일부 용어의 경우, 사람들은 그게 이름인지 기술인지 여부에 관해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신' 같은 용어는 [27] 신을 고유의 신성한 존재로 묘사하는가 아니면 그것이 신의 이름인가? 하지만 그런 경우로 우리가 반드시 골머리를 썩힐 필요는 없다. 

  이제 여기에서 나는 언어 내에서 확실히 형성되는 구분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근대 논리의 고전적 전통은 밀의 관점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프레게와 러셀 두 사람 모두, 매우 강력한 의미에서 밀이 틀렸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결론에 두 사람 각자 독립적으로 당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유명사는, 적절히 사용된다면, 단순히 축약되거나 가장된 한정기술구였다는 것이다. 프레게는 특별히 그런 기술이 이름에 의미를 부여했다고 말했다.[각주:4] 

  이제 밀의 관점에 반대하고 프레게와 러셀에 의해 채택된 대안적 관점을 선호할 이유는 실제로 매우 강력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름이 가장된 기술구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관점에 의구심을 가질지 모른다 하더라도- 어떻게 프레게-러셀 관점 혹은 그 일부 적합한 변주가 사실에 부합하지 못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프레게와 러셀의 관점을 선호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논증들의 일부 사례를 제시해 보겠다. 밀의 관점과 같은 어떤 관점에 대해서든 기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가정된 화자에 의해 사용된 이름의 지칭체가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8] 기술구 관점에 따르자면, 그 대답은 명백하다. 만일 'Joe Doakes'가 바로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람'에 대한 생략이라면, 그 누가 되었든 하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자가 고유하게 '조 도크스'라는 이름의 지칭체이다. 그렇지만, 만일 해당 이름에 그런 기술적 내용이 있지 않다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여간 사물을 지칭하기 위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인가? 그들은 아마 일부 사물들을 가리키는 입장에 있을 것이고 그래서 특정 이름들의 지칭들을 명시적으로 결정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러셀의 직접 접촉의 원리였다. 그는 소위 진정한 혹은 고유 명사가 그 원리를 충족시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물론 일상적인 이름들은 월터 스콧 같이 우리가 가능한 방식으로 가리킬 수 없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지칭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들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해당 이름의 지칭체를 그런 속성들을 만족시키는 고유한 것으로 결정한다. 예를 들어, 만일 내가 'Napoleon'이란 이름을 사용하고,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나폴레옹은 19세기 초 프랑스의 황제였다, 그는 결국 워털루에서 패배했다' 같은 어떤 것을 답할 것이고, 그 이름의 지칭체를 결정하는 고유하게 정체성(동일성)을 규정하는 기술(a uniquely identifying description)을 제공하며 그리 할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그리하여 여기에서 어떻게 지칭이 결정되는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밀은 아무 설명도 내놓지 않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더 특수화된 문제들에 기반하긴 했지만 이 역시 해당 관점을 수용할 동기를 부여해주는 부수적인 논증들이 있다. 한 가지는 때로 우리가 같은 지칭체를 가지는 두 이름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 상황을 동일성 진술로써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진부한 예시인 것 같지만) 당신은 저녁에 별을 보고 그 별이 'Hesperus(개밥바라기별)'라고 불린다. (우리가 그 별을 저녁에 그렇게 부른다. 맞나? 그 반대가 아니길 빈다.) 우리는 아침에 별을 보고 그것을 'Phosphorus(샛별)'이라 부른다. 자, 이제, 우리는 사실 그것이 별(항성)이 아니라 행성 금성이고 개밥바라기별과 샛별은 사실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29] '개밥바라기별은 샛별이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확실히 한 대상에 대해 그것이 그 자신과 동일하다고만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밝혀냈던 어떤 것이다. 매우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실제 내용이 곧 우리가 저녁에 봤던 별이 우리가 아침에 봤던 별이라는 사실이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저녁에 봤던 것이 우리가 아침에 봤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문제의 동일성 진술의 실제 의미를 제공한다. 그리고 기술구로의 분석이 이 일을 수행한다. 

  또한 우리는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했던 적이 있는지 여부를 물을 때 도대체 이름이 어떤 지칭이든 지니기는 하는지 질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질문은 이 사물(사람)이 존재했는지 여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일단 우리가 그 사물을 취하고 나면, 우리는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안다. 실제 질문은 어떤 것이든 우리가 그 이름과 결부시키는 속성들에 대해 답이 되는지 여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사례에서는, 누구든 한 사람의 그리스 철학자가 특정 작업들을, 혹은 적어도 그것들 중 적정 수의 작업들을 산출하였는지 여부이다.

  이런 논증들 전부에 답하는 것은 멋진 일일 것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일관하는 나의 방식을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게다가, 나는 내게 이번 강연들을 통해 이 질문들 모두를 농의할 시간이 없으리란 걸 꽤나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레게와 러셀의 관점이 거짓이라는 점은 꽤나 확실하다고 생각한다.[각주:5] 

  [30] 많은 사람들이 프레게와 러셀의 이론이 거짓이라고 말해왔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그 이론의 철자는 폐기했지만 취지는 유지시켰는데, 말하자면, 개념 다발이란 관념을 사용해왔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프레게와 러셀에게 명확한 문제, 즉각적으로 마음에 떠오르는 문제는 이미 프레게 자신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진정으로 고유한 이름의 경우 그 의미에 관해 의견이 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제안될 수 있다. 플라톤의 제자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 이 의미를 수용하는 누구든지 해당 진술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타게이로스에서 태어났다'의 의미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를 알렉산더 대왕의 스타게이로스인 교사로 변역한 사람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명명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유지되는 한, 이러한 의미에서의 변동들은 용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변동들은 실증과학의 체계에서 회피되어야 할 것이고 완전한 언어에서는 출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각주:6]

 

그래서 프레게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에는 모종의 느슨함이나 약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 한 가지 의미를 부여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단일 화자조차 '당신이 그 이름을 대체하고자 하는 기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사실, 그는 그에 관하여 여러가지 것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는 특수한 어떤 것이든 명백히 해당 대상의 우연적 속성을 표현한다 느낄 것이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렌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사람을 의미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였다'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동어반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렇지 않다. 그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사실, 우리가 그것이 거짓임을 발견할 수 있었을 어떤 것을 표현한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로 있음은 해당 이름[의 의미]의 일부일 수 없다. 

  [31] 이 어려움을 피하는 가장 흔한 방법은 '우리가 개별(particular) 기술로 이름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 일상언어에서 약점이 아니다. 그건 괜찮다. 우리가 실제로 이름과 결부시키는 것은 기술구들의 일군(family)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예시는 (내가 그걸 찾을 수 있다면), 가족 유사성이라는 관념이 강력한 힘을 가진 채로 도입된,  『철학 탐구』안에 있다.

이러한 예를 고려해 보자. 만일 누군가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것은 다음을 의미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철수할 때 단일 지도자를 지니지 않았다-혹은: 그들의 지도자는 모세라고 불리지 않았다-혹은: 성격이 모세에 관해 전해주는 모든 일을 성취해낸 그 어떤 사람도 있었을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모세에 관한 진술을 형성할 때,-나는 항상 그런 기술들 중 어떤 한 가지로 '모세'를 대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나는 어쩌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라는 말로 나는 성경이 모세에 관해 전해주는 일을 했던 사람을 이해하거나, 어느 정도, 그 말을 잘 취급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로 말인가? 나는 얼마나 많이 내게 거짓으로 입증되어야만 나의 명제를 거짓으로서 포기할 것인지 결정하였나? '모세'라는 이름은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 나에게 확정되고 애매함이 없는 용법을 갖춘 것인가?[각주:7]

 

이 관점에 따르면, 또한 그에 대한 표준구(locus classicus)는 고유명사에 관한 Searle의 논문인데,[각주:8] 이름의 지칭체는 단일 기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부 다발이나 일군의 기술들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 일군을 충분히 혹은 그 대다수를 충족시키는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해당 이름의 지칭체이다. 나는 이후에 다시 이 관점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일상언어의 분석으로서는 프레게와 러셀의 분석보다 상당히 더 설득력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이 이론의 모든 장점을 유지하면서 단점들을 제거해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개념다발이론이나, 단일 기술을 요하는 이론조차 가능한 관점이 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말하기로 하자. (이는 우리에게 내가 이 명명 이론을 실제로 고려하기 전에 또 다른 새로운 주제를 소개해줄 것이다.) [32] 그것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은 기술 다발 혹은 단일 기술이 실제로 이름의 뜻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월터 스콧'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러저러한  그런 사람을 의미한다.

  이제 또 다른 관점은 설령 해당 기술이 어떤 의미에서 이름의 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름의 지칭을 결정하는 것이고 '월터 스콧'이란 구가 '이러저러한 그런 사람'과, 혹은 심지어 그 기술 일군과도 (만일 어떤 것이 한 기술군과 동의어일 수 있다면) 동의어가 아니더라도, 그 일군 혹은 단일 기술은 누군가가 '월터 스콧'을 말할 때 지칭하고 있는 사람을 결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일 수 있다. 물론, 만일 우리가 월터 스콧에 관한 그의 믿음들을 들을 때 그 믿음들이 실제로는 Salvador Dali에 대해 훨씬 더 참일 듯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이론에 따라 이 이름의 지칭은 스콧이 아니라 달리일 것이다. 내가 생각에는, 명시적으로 내가 그리할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게 이름이 뜻을 가지는 일을 완전히 부정하지만 여전히 어떻게 이름의 지칭체가 결정되는지에 대해 이러한 구도를 사용하는 저자들이 있다. 핵심을 잘 짚은 사례는 Paul Ziff인데, 그는 매우 강조하며 말하길, 이름은 전혀 뜻을 가지지 않고, 이름은 어떤 의미에서 언어의 일부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어떻게 우리가 그 이름의 지칭이었던 바를 결정하는지에 관하여 말할 때, 그는 이 구도를 제시한다. 불행히도 나는 문제가 되는 구절을 지금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하는 말은 이런 것이다.[각주:9]

  [33] 이 이론을 뜻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과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이후에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이론의 매력 중 일부는 만일 그것이 이름의 뜻을 제공한다고 가정되지 않는다면 상실된다. 내가 방금 언급한 문제들에 대한 해법들 중 일부는 맞지 않거나, 최소한 명백하게 맞지는 않을 것인데, 만일 기술이 이름의 뜻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라면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눅누가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그러저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있지 않다'는 뜻으로 말하거나, 비트겐슈타인의 예시에서, '모세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저러한 일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라는 뜻으로 말했다면, 그것은 문제의 이론을 '모세'라는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뜻에 대한 이론으로 취하는 데에 의거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사실상 그렇게 의거한다). 나로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지금 직접 드러나는 것 전부가 다른 식으로 뒤집힐지도 모른다. 만일 '모세'가 '그러저러한 일을 했던 사람'과 같은 뜻이라면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저러한 일을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즉, 단 한 사람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달느 한편, 만일 '모세'가 그 어떤 기술과도 동의어가 아니라면, 설령 그 지칭이 어떤 의미에서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할지라도, 해당 이름을 포함하는 진술은 일반적으로 그 이름을 기술로 대체함으로써 분석될 수 없다. 실질적으로는 그 기술을 포함하는 진술과 동격일 수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위에 언급된 단칭 현존 진술의 분석은, 이름의 뜻에 대한 일반 이론에 대해 독립적인 어떤 특별한 논증에 의해 확립되지 않는 한, 포기되어야 할 것이다. 동일성 진술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경우든, 나는 '모세가 존재한다'가 그런 뜻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라 생각한다. [34] 그래서 우리가 그런 특별한 논증이 도출될 수 있는지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각주:10]

  이 문제에 조금이라도 더 진입하기에 앞서, 이 강연의 방법론에 중요할 또 다른 구별에 대해 말해두고 싶다. 철학자들은 참의 다양한 범주들[에 관하여], '선험적', '분석적', '필연적'-때로는 '확실한'이란 표현까지 이 집단에 포함시키며 말해 왔다. (그리고, 물론, 최근 몇 년 간 이러한 관념들의 유의미함을 두고 주목할 만한 논쟁이 있어 왔다.) 그 용어들은 종종 이러한 개념들에 응답하는 것들이 있는지 여부(whether)가 관심가는 문제인 것처럼 사용되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들 모두를 같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모두가 '선험적'과 '분석적' 사이의 구분을 만든 칸트를 (다소간) 기억한다. 그래서 이 구분은 여전히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 오늘날의 논의에서 지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만일 누구라도 있다면, 선험적인 진술 개념과 필연적인 진술 개념을 구분한다. 나는 어느 수준에서든 '선험적' 그리고 '필연적'이란 용어를 여기에서 상호대체가능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선험적'과 '필연적' 같은 용어들의 전통적인 규정들이 무엇인지 고려해 보자. 우선 선험성이라는 관념은 인식론적 개념이다. 나는 칸트로부터 유래한 전통적 규정이 이런 어떤 것으로 전개되는 것이라 추정한다. 선험적 참은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장을 떠나기에 앞서 또 다른 문제를 도입하는데, '선험적'에 대한 규정 안에 또 다른 양상성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을 어떤 경험으로부터도 독립적으로 아는 일이 가능하다는 (우리가 실제로 그것을 어떤 경험으로부터든 독립적으로 알든 알지 못하든) 뜻이다. 누구에게 가능한가? 신에게? 화성인에게? [35] 혹은 그저 우리와 같은 정신을 갖춘 사람들에게? 이를 분명하게 밝히는 일은 여기에서 문제시되는 가능성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관련하여 모두 그 작업에 고유한 것들인 수 많은 문제들을 포함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험적 참'이라는 구를 사용하기는 하되, 그 용어를 누군가가 어쨌든 사용하는 범위 내에서는, 특정 개인이나 인식자가 어떤 것을 선험적으로 알거나 그것이 참이라는 믿음을 선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형성하지 여부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일 듯하다.

  나는 선험성 관념과 관련해 야기될 문제들에 여기에서 더 이상 너무 깊게 들어가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일부 철학자들이 어떤 식으론가 이러한 규정 내의 그 양상성을 can으로부터 must로 변경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만일 어떤 것이 선험적 지식의 영역에 귀속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방식으로 경험적으로 알려질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착오이다. 어떤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지만 여전히 개별 사람들에게 경험에 기반하여 알려질 그런 진술들의 영역에 속할 수도 있다. 정말로 상식적인 예시는 이런 것이다. 계산기를 가지고 작업해 본 누구든 계산기가 이러저러한 수가 소수인지 여부에 답을 제공하리란 것을 안다. 그 누구도 해당 수가 소수라는 점을 계산하거나 증명한 적 없다. 하지만 그 계산기는 이 수가 소수라고 답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 수는 소수라고 믿는다면 물리법칙, 계산기의 구조, 기타 등등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기반하여 그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순수하게 선험적 증거에 기반하여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일 어떤 것이 되었든 좌우간 후험적인 것이 있다면) 후험적인 증거에 기반하여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필수적인 계산을 한 누군가에 의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은 '선험적으로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두 번째 개념은 필연성 개념이다. 때로 이 개념은 인식론적 방식으로 사용되고 그래서 선험적이라는 것을 뜻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때로 그것은 물리적 방식에서 사람들이 물리적인 필연성과 논리적 필연성을 구별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식론이 아니라, [36] 일부 (내가 희망하기로) 비경멸적인 의미에서 형이상학에 속하는 관념이다. 우리는 어떤 것이 참이었을지 혹은 거짓이었을지 묻는다. 자, 만일 어떤 것이 거짓이라면, 그것은 명백하게 필연적으로 참이 아니다.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그것이 달리 있었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세계는 세계가 있는 그 방식과 달리 있었으리라는 것은 가능한가? 만일 그 대답이 '아니오'라면, 세계에 관한 이 사실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만일 저 답이 '네'라면, 세계에 관한 이 사실은 우연적인 사실이다. 이 사실은 그 자체 내에서 또 그 자체에 대해 그 무엇에 대한 그 누구의 지식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모든 선험적인 것이 필연적이라거나 모든 필연적인 것이 선험적이라는 것은 확실히 철학적 논제이고, 명백한 정의상 등가의 문제가 아니다. 두 개념들 모두 모호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논제들은 두 가지 상이한 분야, 상이한 영역, 인식론적 영역과 형이상학적 영역을 다루고 있다. 이를 테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고려해 보자. 혹은 골드바흐 추측을 생각해 보자. 골드바흐 추측은 2보다 큰 짝수가 반드시 두 소수의 합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짐작건대 그것은 필연적이고, 만일 거짓이라면, 짐작건데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수학의 고전적 관점을 취하고 있고 수학적 실재성 내에서 그것은 참이거나 아니면 거짓이라고 상정한다. 

  만일 골드바흐 추측이 거짓이라면, p₁과 p₂가 모두 <n인 어떤 소수 p₁과 p₂에 대해서도, n= p₁+ p₂인 그런 2보다 큰 짝수 n이 있지 않다. n에 대한 이 사실은, 만일 참이라면, 직접 계산에 의해 검증될 수 있고, 그래서 만일 그 산술적 계산 결과들이 필연적이라면 또한 필연적이다. 다른 한편, 만일 그 추측이 참이라면, 2를 초과하는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다. 그래서 사실 그런 모든 짝수가 두 소수의 합이라 하더라도, 두 소수의 합이 아닌 그런 짝수가 있는 경우가 가능했을까? 그건 무슨 뜻일까? 그런 수는 4, 6, 8, 10, ... 중 하나여야 할 것이고, 우리가 골드바흐 추측이 참이라 가정하고 있으니, 전제에 의해, 이것들 각각이 다시금 직접 계산에 의해 [37] 두 소수의 합이라는 것이 보여질 수 있다. 그래서 골드바흐 추측은 우연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일 수는 없다. 그 추측이 가지는 진리값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 추측은 필연에 의해 그 진리값에 속한다.

  하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지금 당장 우리가 아는 한에서 그 문제가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결정해주는 수학적 증명의 부재 상황에서, 우리 중 누구도 이 문제에 관하여 둘 중 어느 방향으로든 그 어떤 선험적 지식이든 지니고 있지 않다. 우리는 골드바흐 추측이 참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로 지금 우리는 확실히 그 추측에 관하여 어떤 것이든 선험적으로 알고 있지 못하다.

  어쩌면 그것이 참인지 여부를 우리가 원칙으로는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고 주장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수를 철저히 조사할 수 있는 무한한 정신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유한 정신이 그 일을 할 수 있거나 할 수 있었을지 알지 못한다. 그 추측을 판가름해주는 아무런 수학적 증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것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거나 할 것이다. 이 문제를 판가름해줄 수학적 증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힐베르트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은 직관적 증명이라는 관념이 단일 체계 내에서의 형식적 증명에 의해 대체되지 않는 한 그 문제가 불가해한 것이라 생각해 오고 있다. 확실히 그 어떤 단일 형식 체계도 모든 수학적 문제를 판단해주지 않는다. 내가 괴델로부터 배운 바로는 그렇다. 어쨌든, 이것은 중요한 일이고,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설령 누군가가,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이라는 것이 좌우간 참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에 관해 어떤 것이든 선험적인 것을 안다는 점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심지어 내게는 몇 가지 추가적인 철학적 논증 없이는 (그것은 흥미로운 철학적 문제이다) 누군들 그것에 관해 어떤 것이든 선험적인 것을 알 수 있으리란(could) 것조차 따라나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말했던 바,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몇몇 다른 양상을 포함한다. 우리는 설령 단 한 사람도, 어쩌면 미래에 걸쳐서까지도, 골드바흐 추측이 옳은지 선험적으로 알지 못하고 알게 되지도 못한다 하더라도, 그 선험적 질문에 답하는 데에 [38] 활용될 수 있을 방법이 원칙적으로는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단언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진술들에 적용되는 '필연'과 '선험'이란 용어는 명백한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들을 연결시키는, 어쩌면 심지어 동일시하는 철학적 논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 용어가 명백히 상호교환가능하다는 점은 단순히 관찰결과가 아니라 논증이 요청된다. (나는 이후 그 둘이 사실 외연조차 동연이지 않다고, 필연적인 후험적 참들과 가능적으로 우연한 선험적 참들 양쪽 모두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 것들이 이하의 이유들에서 같은 뜻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다고 본다. 

  첫째로, 만일 어떤 것이 마침 현실세계에서 참일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세계에서 또한 참이라면, 물론 우리의 머릿속 그 모든 가능세계를 관통하여, 우리는 그 진술이 필연적이라면, 그 어떤 것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충분한 노력을 기울여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서 그 점을 선험적으로 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일은 그리 명백하게 실현가능한 것이 전혀 아니다. 

  둘째로, 그 반대로, 나는 만일 어떤 것이 선험적으로 알려진다면 그것은 필연적이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세계를 관찰하는 일 없이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 왔다고 추정한다. 만일 그것이 현실세계의 우연적 특징 일부에 의존했더라면, 어떻게 당신이 그것을 관찰 없이 알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그 현실세계는 그것이 거짓이었을 가능한 세계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는 관찰 없이 현실세계에 관해 알 방법으로서 모든 가능세계에 관하여 같은 것을 알 방법이 아닐 방법은 있을 수 없다는 논제에 달려있다. 이는 인식론과 지식의 본성에 대한 문제들을 포함한다. 그리고 물론 그 문제는 진술된 대로 지극히 모호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사소한 것도 아니다. 필연적인데 선험적이지 않은 혹은 선험적인데 필연적이지 않은 것으로 내세워지는 어떤 것의 여느 특수한 사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개념들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어떤 것이 우리가 오직 후험적으로만 알 수 있을 어떤 것이라는 데에 기반하여, 그것이 필연적 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이 사소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아는 것이다. [39] 단지 어떤 것이 어떤 의미에서 선험적으로 알려진다는 이유만으로, 알려지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라는 점이 사소해지지는 않는다. 

  철학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용어는 '분석적'이라는 것이다. 이 강연에서 이 용어에 관하여 조금이라도 더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분석적 진술의 흔한 예시는 '총각은 미혼이다' 같은 것이다. 칸트는 "황금은 황색 금속이다"라는 것을 예시로 내놓는데, 그건 내가 보기엔 평범하지 않은 사례인 바, 나는 그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분석적 진술은 어떤 의미에서 그 의미 덕분에 참이고 그 의미 덕분에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라고 규정하는 문제로 치도록 하자. 분석적으로 참인 어떤 것은 필연적이고 또한 선험적일 것이다. (이는 규정적인 종류의 진술이다.)

  내가 언급한 또 다른 범주는 확실성의 범주였다. 그 어떤 확실성이 되었든지 간에, 필연적인 것이 확실하다는 점은 분명 병백하게 사실이지 않다. 확실성은 또 다른 인식론적 관념이다. 어떤 것이 상당히 확실한 것이 아니고도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거나 최소한 합리적으로 믿어질 수 있다. 당신은 수학 책에서 증명을 읽어본 적이 있다. 당신이 그 증명을 정확한 것이라 생각할지라도, 당신은 착오를 저질렀을 수 있다. 당신은 종종 이런 종류의 착오를 범한다. 당신은 아마 계산을 잘못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예비적 방식에서 다루고자 하는 또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일부 철학자들은 본질주의, de re(실재) 양상 믿음과 필연성에 대한 단순 지지, de dicto(언표/명제적) 양상 믿음 사이를 구분한다. 이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필연성 개념을 제시해 보자.[각주:11] [40] 더 곤란한 것은, 막대한 추가적인 문제들을 만들어내는 것인데, 우리가 어느 특정한 것에 대해서든 그것이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인 속성들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지, 애초에 필연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 사이의 구분을 마련할 수나 있는지 여부이다. 필연적이거나 우연적이거나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술이나 일련의 상황(a state of affairs)뿐이다. 개별자(a particular)가 필연적으로 혹은 우연적으로 특정한 속성을 지니는지 여부는 그것이 기술되는 방식에 달려있다. 이는 아마 우리가 개별 사물을 지칭하는 방식이 기술에 의한 것이라는 관점에 밀접하게 관련된다. 콰인의 유명한 예는 무엇인가? 우리가 수 9를 고려한다면, 9는 필연적 홀이라는 속성을 지니는가? 그 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홀수인 것으로 파악되었나? 아홉이 홀이라는 것은 확실히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이고, 말하자면, 그것은 달리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9는 (태양계)행성의 수로도 못지 않게 같은 정도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만일 여덟 행성들이 있었더라면, 행성의 그 수는 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이런 생각이 든다.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했던 것은 필연이었나 우연이었나? (어떤 불가항력의 과정들에 

대한 모종의 관점을 가지지 않는 한, 그건 우연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그를 '닉슨'이라 지칭함에 관계해서만 닉슨의 우연적 속성이다 ('닉슨'이 '그러저러한 시점에 선거에서 승리했던 사람'을 의미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닉슨을 '1968년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으로 지시한다면, 물론 1968년 선거에서 승리한 사람이 1968년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필연적인 참일 것이다. 유사하게, 대상이 모든 가능 세계에서 같은 속성을 지니는지 여부는 [41] 그저 대상 자체에 달린 일이 아니라, 그 대상이 어떻게 기술되는지에 달려 있는 일이다. 그것이 주장되는 내용이다. 

  필연 개념이 그 이면에 일종의 직관을 지닐지라도 (우리는 어떤 것들은 달리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또 여타의 것들은 달리 있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개념 [필연적인 속성들과 우연적 속성들 사이의 구분이라는 개념]은 어떤 불량한 철학자에 의해 구성된 원칙일 뿐이라는 점이 문헌상으로 시사되는 일조차 있다. 그는 (내 짐작으로는) 같은 것을 지칭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던 사람이다. 나는 일부 철학자들이 이를 깨닫지 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쨌든 이 발상 [한 속성이 한 대상에게 본질적인 것이라거나 우발적인 것이라고 그 대상에 대한 기술과 독립적으로 유의미하게 주장될 수 있다는]이 아무런 직관적 내용도 지니지 않는, 그 일상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관념이라는 것은 진실과는 아주 많이 거리가 멀다. 누군가가 닉슨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패배했을 수도 있는 그 사내이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또 다른 누군가는 '아니다, 당신이 "닉슨"이라고 그 사람을 기술한다면, 그는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연히, 그를 승자로 기술하면서는, 그가 패배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참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제 여기에서 철학자인 사람, 비직관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보기에는 두 번째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두 번째 사람은 철학적 이론을 견지하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 선거의 승자는 다른 누군가였을지도 모른다. 실제 승자는, 그 선거 과정이 달랐더라면, 패자였을지도 모르고, 다른 누군가가 승자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아예 아무런 선거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승자"나 "패자" 같은 용어는 모든 가능세계 내에서 각기 일관된 대상들을 지시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닉슨"이란 용어는 바로 이 사람의 이름이다.' 당신이 닉슨이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이 필연적인지 우연적인지 물을 경우, 당신은 모종의 반사실적 상황에서, 이 사람이 실제로 그 선거에 패배했을 것인지 직관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필연적 혹은 우연적 속성이란 개념이 (사소하지 않은 필연적 속성들이 있는지 여부는 잊고 그 관념의 유의미함만 고려하자[각주:12]) [42] 아무런 직관적 내용도 지니지 않은 한 철학자의 개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틀렸다. 물론, 일부 철학자들은 어떤 것이 직관적 내용을 지닌다는 것이 그것을 선호할 증거로는 전혀 결정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은 어떤 것을 선호하는 데에 그 점이 매우 중요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실제로, 어떤 점에서는, 누군가가 무언가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더욱 결정적인 증거가, 궁극적으로 말해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우연적 속성이란 개념이 비직관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역전된 직관을 지닌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왜 이런 생각을 하였는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동기들은 여럿 있지만, 한 가지는 이런 것이다. 소위 본질적 속성들에 대한 질문이 '가능세계들을 관통하는 동일성(정체성)'에 대한 물음과 등가이리라 추정하는 것(그리고 등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닉슨이라는 사람을 상정하고 현실세계에서 닉슨이 가지는 모든 속성들을 가진 아무도 있지 않은 또 다른 가능세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다른 사람들 중, 만일 누구라도 있다면, 누가 닉슨인가? 물론 당신은 이 지점에서 동일성에 대한 모종의 기준을 제시해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동일성의 기준을 갖고 있다면, 나머지 가능세계들에서 닉슨인 사람을 찾아볼 것이다. 그러면 그 다른 가능 세계에서 닉슨이 특정 속성들을 지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잘 정의된다. 그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인지, 혹은 닉슨이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한 일부 가능세계들이 있는지 여부가 그런 개념들로 잘 정의된다는 것 역시 가정된다. 하지만, 그런 동일성 기준을 제공하는 문제는 매우 어렵다고 말해진다. [43] 수의 경우 때로는 더 쉬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경우조차 상당히 임의적이라는 점이 주장된다). 예를 들어, 수열에서의 위치가 수 9를 9이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또 다른 세계에서) 행성의 수가 8이었을 경우, 그 행성의 수는 실제 그 수와는 다른 수였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할지도 모르고, 그것은 물론 참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 수가 이 세계에서 우리의 수 9와 동일시되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유형의 대상들의 경우, 사람들, 물질적 대상들, 그런 사물들의 경우, 가능세계들을 교차하는 정체성을 위한 일련의 필요충분조건을 누군가가 제시한 바 있는가?

  실제로, 어느 경우든 정체성에 대한 선결문제를 요구하지 않는 적절한 필요충분조건들은 지극히 드물다. 수학이 가능 세계 내에서 참을 말하는 정체성 필요충분조건이 제시되는 내가 실제로 아는 유일한 경우이다. 시간의 경과 속에서 물질적 대상들 또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위한 그러한 조건들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문제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잊기로 하자. 더욱 결정적인 반박으로 보이는 것은 이것이 가능세계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잘못된 방식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이 구도에서 가능세계를 마치 외국 같은 것마냥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관찰자 입장에서 고찰한다. 닉슨은 다른 나라로 이동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그 성질들만을 제공받는다. 누군가는 그의 모든 성질들을 관찰할 수 있지만, 물론, 어떤 이가 닉슨이라는 것을 관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무언가가 붉은(혹은 푸르든 노랗든) 머리카락을 가진다는 것을 관찰하지만 어떤 것이 닉슨인지 여부를 관찰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 우리가 이전에 봤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마주하는지 속성들을 통해 설명할 방법을 가지고 있었어야 했다. 우리는 우리가 이러한 다른 가능세계들 중 하나와 교차할 때 누가 닉슨이었는지를 말할 방법을 지니고 있었어야 했다. 

  일부 논리학자들은 양상 논리에 대한 그들의형식적 취급 내에서 이 그림을 지지할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 사례는 아마 나 자신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관적으로 말해서, [44] 그것은 내게 가능세계들에 관한 올바른 사유방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가능세계는 우리가 교차할 혹은 망원경으로 바라볼 먼 나라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또 다른 가능세계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설령 우리가 빛보다 빠르게 여행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 닿지 못할 것이다. 가능세계는 우리가 그 세계에 결부시키는 기술적 조건들에 의해 주어진다. 우리가 '어떤 다른 가능세계에서 내가 이 강연을 오늘 진행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단지 내가 이 강연을 열지 않기로 결정한 혹은 다른 어떤 날에 열기로 결정한 상황을 상상한다. 물론, 우리는 참이거나 거짓인 모든 것을 상상하진 않지만, 단지 내 강연 진행에 관련되어 그런 것들만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해당 세계의 기술 총체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결정되어야 한다. 우리는 일부분을 제외하고서 실제로 상상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가능세계'이다. 왜 그 가능세계가 닉슨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세계에서 닉슨이 해당 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능세계에 대한 기술의 일부일 수 없는가? 그것은 그런 세계가 가능한 것인지 여부를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일견 그 세계는 명백히 가능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알고 나면, 이 가능세계에서 해당 선거에 패배했을 혹은 패배한 사람이 닉슨이라는 사실을 제시받는데, 그것이 그 세계에 대한 기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가능세계들'은 규정되는 것이지, 강력한 망원경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특정한 반사실적 상황에서 닉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가 바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규정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물론, 누군가가 모든 가능세계는 순전히 성질에 관련된 방식에서 기술되어야 한다는 요구를 한다면, 우리는 '닉슨이 그 선거에서 졌다고 가정해 보라'라고 말할 수 없고, 그 대신, 'Checkers라고 명명된 개를 가진, David Frye 닮은꼴인 한 사람이 특정 가능세계 내에 있고 선거에서 패배했다' 같은 어떤 말을 해야만 한다. 자, 그는 닉슨과 동일시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닉슨을 모사하였나? 사물을 고찰하는 이런 방식의 매우 명백하고도 노골적인 사례는 [45] 데이비드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counterpart theory)이지만,[각주:13] 양화된 양상에 대한 문헌에는 그런 방식이 차고 넘친다.[각주:14] 우리가 왜 그런 요구를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이 사람이 졌다고 가정해 보라'라고 말할 뿐이다. [46] 그 가능세계가 이 사람을 포함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세계에서, 그가 패배했다는 것이 전제된다. 가능성에 관한 어떤 직관이 생길지에 대한 문제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점 (이 사람의 선거 패배)의 가능성에 관한 그런 직관을 지닌다면, 그 직관은 그 점에 대한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그 가능성이 그러저러한 것을 고찰하거나 그러저러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거나 혹은 달리 질적으로 기술되는, 패배한 사람의 가능성과 동일시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을 지적할 수 있고, 사건들이 달랐다면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물을 수 있다.

  '이것이 참이라 가정해 보자. 그것은 결국 같은 일로 귀결될 것인데, 왜냐하면 닉슨이 특정 속성들, 그가 실제로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다른 속성들을 지녔을 수 있었는지 여부는 가능세계를 교차하는 정체성 기준이 닉슨은 이러한 속성들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포함하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과 등가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같은 일로 귀결되지는 않는데, 통세계 정체성 기준이라는 일상적 관념은 우리가 누군가가 닉슨이라는 것에 대한 순전히 질적인 필요충분조건을 제시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닉슨이 특정 속성을 지니지 않는 가능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면, 그 속성은 누군가가 닉슨으로 있음의 필요조건이다. 혹은 그가 그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 닉슨의 필연적 속성이다. 예를 들어, 닉슨이 실제로 인간으로 있다고 상정하면서, 우리는 그가 말하자면 무생물 대상이었을 가능한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니었기란 가능하지조차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무튼 닉슨이 존재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가 인간이거나 어쨌든 무생물 대상은 아니라는 것은 그에 관해 필연적 사실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상술할 수 있는 닉슨다움을 위한 순전히 질적인 충분조건이 있다는 어떤 요구사항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이 있어야 할까? 아마도 있어야 하리란 몇몇 논증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충분조건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개입하지 않고 필요조건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을 고려할 수 있다. [47] 게다가, 설령 닉슨이기 위한 일련의 순전히 질적인 필요충분조건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옹호하는 관점은 우리가 이러한 조건들을 닉슨이 선거에 승리하였을지 여부를 물을 수 있기 전에 발견하기를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조건들로 해당 질문을 재진술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단순히 닉슨을 고려할 수 있고 에게 다양한 제반사항이 달랐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물을 수 있다. 그래서 그 두 관점들, 사물들을 고찰하는 두 가지 방식들은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이 질문, 닉슨이 인간이지 않을 수 있었을지 여부는 제기된 질문이 인식론적이지 않은 명백한 경우라는 점을 주의하자. 닉슨이 실제로 자동기계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닉슨이 인간인지 자동기계인지 여부에 증거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지식에 관한 질문이다. 닉슨이 인간이지 않았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가 그 한 사람이라는 점을 전제하면, 후험적으로든 선험적으로든 지식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설령 이러저러한 사물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달리 무엇이 참이었을지에 관한 질문이다.

  이 책상은 분자들로 구성된다.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일까? 확실히 책상이 분자들(또는 원자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과학적 발견의 위대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것인가가 바로 이 대상이자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을 수 있었을까? 확실히 그에 대한 답이 '아니오'여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기는 한다. 어쨌든, 어떤 환경 하에서 당신이 바로 이 대상을 가지고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낼 것인지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실제 세계에서 실제로 그것이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여부와 우리가 이를 어떻게 아는지는 꽤나 상이한 질문이다. (나는 본질에 관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이후에 더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내가 논하고 있는 이름들에 대한 이론을 논의하기 위한 방법론에 필요한 어떤 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가능세계 교차적 정체성'이라는, 통상적으로 그리고 내 생각에는 어느 정도 오독되어 불리는[각주:15][48] 그 개념을, 지금 내가 만들고자 하는 구별을 명확히하기 위해 필요로 한다. 9가 7보다 더 크다는 것이 필연적인지 여부를 묻는 것과 행성의 수가 7보다 더 크다는 것이 필연적인지를 묻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왜 한편의 질문이 다른 질문보다 본질에 관하여 뭐라도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가? 이에 대한 답은 직관적으로 '자, 봐라, 행성의 수는 실제 수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9는 실제로 그것인 바의 것과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꽤나 전문용어처럼 보이는 것을 사용해 보자. 만일 어떤 것이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한 대상을 지시한다면 그것을 고정 지시자라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비고정 혹은 우연적 지시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물론 우리는 대상들이 모든 가능세계들에 존재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확실히 닉슨은 그의 부모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통상의 경우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한 대상에 본질로서 한 속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통상적으로 그 대상이 존재했을 어떤 경우에서든 그 대상에 대해 그 속성이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연적 존재에 대한 고정 지시자는 강력하게 고정된 것이라 불릴 수 있다.

  이 강연에서 내가 주장할 직관적 주장들 중 하나는 이름이 고정 지시자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름은 앞서 언급된 직관적 시험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과는 다른 누군가가 1970년 미합중국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험프리가 그랬다 하더라도), 닉슨과 다른 그 누구 단 한 사람도 닉슨이었을 리 없다. 같은 방식으로, [49] 지시자는 고정적으로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데 만일 그 지시자가 그 대상이 존재하는 어디에서든 그 대상을 지시한다면 그러하다. 덧붙여, 만일 그 대상이 필연적 존재자라면, 그 지시자는 강력하게 고정된 것이라 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1970년 미합중국의 대통령'은 특정한 사람, 닉슨을 지시한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예를 들어 험프리가) 1970년 그 대통령이었을지도 모르고, 닉슨은 대통령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지시자는 고정적이지 않다. 

  이 강연에서 나는 직관적으로 고유명사가 고정지시자라고 주장할 것인데, 그 사람(닉슨)이 대통령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그가 닉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닉슨'이라 불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고정 지시자 개념을 말이 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그보다 앞서 '통세계 정체성의 기준'을 말이 되게 만들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본말을 정확히 전도시켰다. 우리가 (고정적으로) 닉슨을 지칭할 수 있고 (특정 환경 하에서)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을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통세계 정체화'가 그런 경우에 문제가 없는 것이다.[각주:16] 반사실적 상황에 대한 순전히 질적인 기술을 요구하는 경향은 다양한 원천을 지닌다. 아마도 그 하나는 인식론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혼동, 선험성과 필연성 사이에서의 그러한 혼동이다. 만일 누군가가 필연성을 선험성과 동일시한다면, 그리고 대상들이 속성들을 고유하게 정체화함으로써 명명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그 속성들이 선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그 대상을 모든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하는 데에, 어떤 대상이 닉슨인지을 알아내기 위해 사용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에 맞서, 나는 다시 반복한다. (1) 일반적으로, 반사실적 상황에 관한 것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규정된다. (2) 가능세계는 [50] 마치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관찰하는 것처럼 순전히 질적으로 제시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반사실적 세계에서 한 대상이 지니는 속성들이 실제 세계에서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속성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을 간략하게 보게 될 것이다.[각주:17]

  '통세계 정체화'의 '문제'는 말이 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사이비-문제인가? 그에 대해 이하의 내용은 이야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이 독일과 1943년에 싸웠다는 진술은 아마도 개별자들에 관한 어떤 진술로도 환원될 수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 진술은 개인들에 관한, 역사에 걸친 그들의 행동에 관한 모든 사실의 총합을 '넘어서는' 사실은 아니다. 국가에 관한 사실들이개인들에 관한 사실들 '이상의' 사실이 아니라는 의미는 세계에 대한 기술로서 개인들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거론하지만 국가에 관한 사실들을 생략하는 기술이, 그로부터 국가에 관한 사실들이 도출되는 그러한 세계에 관한 완전한 기술일 수 있다는 관찰로 표현될 수 있다. 아마도 그와 유사하게 물질적 대상들에 관한 사실들은 그것들을 구성하는 분자들에 관한 사실들 '이상의' 사실들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실현된 가능한 상황에 대한 기술이 사람들을 가지고 주어진다면, 그 상황에서 영국이 여전히 존재하는지 여부, 또는 그 상황에 존재할 특정 국가(말하자면 존이 살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는)가 영국인지 여부를 물을 것이다. 비슷하게, 책상 T의 분자들에 대한 역사상의 특정한 반사실적 우여곡절이 주어지면, 누군가는 그 상황에서 T가 존재할지 여부를, 혹은 그 상황에서 책상을 구성할 분자들의 특정 묶음이 바로 그 똑같은 책상 T를 구성하는지 여부를 물을지도 모른다. 각각의 경우, 특정 개별자들에 대한 가능세계를 교차하는 정체성 기준을 다른 더욱 '기초적인' 개별자들에 대한 가능세계교차정체성기준을 통해 추구한다. 만일 국가(혹은 부족)에 관한 진술이 다른 더 '기초적인' 구성요소들에 관한 진술로 환원가능하지 않다면, 만일 그것들 사이의 관계에 '열린 결말' 같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확고하고 엄격한 정체성 기준을 제시하길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5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사례에서 우리는 분자들의 특정 묶음이 여전히 T를 구성할지 여부를 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몇몇 경우 그 대답이 애매할지라도 말이다. 시간에 따른 정체성 문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언급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통상적으로 '복합적인' 개별자의 확정성, 정체성에 관해 더 '기초적인' 개별자를 통해 관계한다. (예를 들어, 책상의 다양한 부분들이 교체된다면, 그 책상은 똑같은 대상인가?[각주:18])

  그렇지만 '통세계 정체화'라는 그런 개념은 일상적 정체화와 주목할 만한 차이를 가진다. 첫째, 우리가 분자들을 통해 세계를 기술하고자 시도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더욱 총체적인 개체들로 기술하는 데에는 아무런 부적절함이 없다. 이 책상이 다른 방에 놓였을지도 모른다는 진술은 그 자체로 완벽히 적절하다. 우리가 그 책상의 분자들을 통한, 혹은 더 총체적인 부분들을 통한 기술을 사용할지 몰라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개별자들이 '궁극적,' '기초적' 개별자들이라고 가정하지 않는 한, 어떤 유형의 기술도 특권적 지위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닉슨이 선거에 졌을 수도 있는지 여부를 추가적인 세부사항 없이 물을 수 있고, 통상 아무런 추가적인 세부사항도 요구되지 않는다. 둘째, 어떤 종류의 분자 총체가 이 책상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52] 필요충분조건이 가능하다는 것은 전제되지 않는다. 이 사실은 내가 방금 언급한 바 있다. 셋째, 그 시범적인 개념은 개별자들의 정체성에 대한 기준을 다른 개별자들을 통해서 다루며, 성질들을 통해 취급하지 않는다. 나는 내 앞의 책상을 지칭할 수 있고, 특정 환경 하에서 그 책상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물을 수 있다. 또한 나는 그 분자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만일 내가 각각의 반사실적 상황을 순전히 질적으로 기술하는 일이 요구된다면, 나는 오직 이러저러한 색상이나 기타 그러한 것들을 가진 책상(a table)이 특정 속성들을 지녔을지 여부만을 물을 수 있다. 문제의 그 책상이 이 책상(this table), 책상 T였을지 여부는 고려되지 않는데, 성질들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대상들에 대한 모든 지칭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종종, 만일 반사실적 상황이 닉슨에게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서 기술된다면, 그리고 만일 그러한 기술이 순전히 질적인 기술로 환원가능하다는 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신비의 '순전한 개별자,' 성질들의 기저에 놓이는 무속성의 기체가 가정된다고 이야기되곤 한다. 사정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닉슨이 그저 공화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그 뒤에 숨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닉슨이 공화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한 그가 민주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속성들 중 일부가 본질적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제외하고, 닉슨이 지닐지도 모를 다른 어떤 속성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부정하는 것은 개별자가 '성질들의 다발'에 다름 아니라는 것, 그것이 무슨 의미가 되었든 그저 그런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만일 성질이 추상적 대상이라면, 성질의 다발은 더 고차원의 추상 대상이고, 개별자가 아니다. 철학자들은 거짓 역설을 통해 정반대 관점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다. 이러한 대상들은 성질의 다발 배후에 있는가, 아니면 그 대상은 그 다발에 다름 아닌가? 어느 쪽도 아니다. 이 책상은 목재로 된 것이고, 갈색이며, 방 안에 있고, 그 외에 그러저러하다. 그 책상은 이 모든 속성들을 지니고 속성들 없이 그 속성들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하여 그 책상이 그것의 속성들의 집합이나 '다발'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도 아니고, 그 책상의 본질적 속성들의 하위집합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도 아니다. 어떻게 내가 이 책상을 그 속성들을 통하지 않고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할 수 있는지 묻지 말라. 나는 내 손에 그 책상을 잡고 있고, 그것을 지적할수 있으며, 그것이 다른 방에 있었을지도 모르는지 여부를 물을 때, [53] 나는 정의상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나는 망원경을 통해 그것을 본 이후에 그것을 정체화해야 하는 게 아니다. 만일 내가 그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면, 내가 우리 손이 녹색으로 채색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할 때, 내가 녹색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고 규정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대상의 일부 속성들이 그 대상에, 그 대상이 그 속성들을 지니지 않았을 수 없으리란 점에서, 본질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속성들은 그 대상을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런 정체화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의 본질적 속성들이 실제세계에서 그 대상을 정체화하는 데에 사용될 필요도 없는데, 더욱이 그 대상이 속성들을 수단으로 하여 실제세계에서 정체화된다면 그러하다 (지금까지 나는 그 문제를 열어두었다).

  그래서, 통세계 정체화에 대한 질문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데, 대상의 구성 부분들에 관한 질문들을 통하여 정체성에 관해 묻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은 성질들이 아니고, 문제가 되는 것은 주어진 대상과 유사한 대상이 아니다. 이론가들은 종종 우리가 가능세계를 교차하여 대상을 가장 중요한 측면들에서 주어진 대상과 유사한 대상으로 정체화한다고 말해 왔다. 반대로, 닉슨은, 그가 다른 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했었더라면, 설령 사사로이 급진적 의견을 품고 있었더라도, 마치 정치를 역병마냥 피했을지도 모른다. 핵심은, 우리가 대상에 관한 질문을 그 부분들에 관한 질문으로 교체할 수 있을 경우조차,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대상을 지칭할 수 있고 그것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지 물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현실이라 가정되는, 그 세계의 대상들이 아니라 성질들이 우리에게 인지가능한 것들인 그런) 세계들로 시작하지 않고, 그리고서 통세계 정체화의 기준에 관하여 묻는다. 반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는,  그 대상들로 시작하고, 실체 세계에서 정체화할 수 있다. 우리는 그래서 특정한 것들이 그 대상들에 대해 참이었을지 여부를 물을 수 있다.

  앞서 나는 기술에 의해 이름이 도입된다는 프레게-러셀 관점이 이름의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든 (프레게와 러셀은 이런 식으로 그 관점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54] 단지 그 이름의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서든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통상 '고유명사'라고 불릴 것을 포함하지 않고 이를 묘사할 예를 들어 보자. 누군가가 섭씨 100도는 해수면에서 물이 끓기 시작하는 온도라고 규정한다 가정해 보자. 해수면에서 압력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하게 정확하진 않다. 물론, 역사적으로, 더욱 정확한 정의가 이후에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였다고 가정해 보자. 학술자료 내에서의 또 다른 종류의 사례는 1m란 S가 파리에 있는 특정 막대 혹은 작대기인 경우 S의 길이라는 것이다. (통상 이러한 정의들에 관해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의 길이'를 '조작적' 개념으로 만들고자 시도한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관해 매우 혼란스러운 어떤 점을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그것이 1m 길이라고도 그것이 1m 길이가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고, 그것이 파리에 있는 표준 meter이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어떤 비범한 속성을 그것에 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meter법을 가지고 측정을 하는 언어게임에서 그것의 고유한 역할을 언급하는 것일 뿐이다.'[각주:19] 실제로 이건 어떤 막대가 가지기엔 무척이나 '비범한 속성'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 막대가 예를 들어 39.37in. 길이 막대라면 (나는 inches에 대해 좀 다른 표준을 가진다고 추정한다), 왜 그것은 1m 길이가 아닌가? 어쨌든, 그가 틀렸다고 그리고 그 막대가 1m 길이라고 가정해 보자. 비트겐슈타인을 괴롭히는 문제의 일부는 물론 이 막대가 길이의 표준 노릇을 하고 그래서 우리가 그 막대에 길이를 귀속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물론, 아닐지도 모르지만), '막대 S는 1m 길이이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인가? 물론 그 막대의 길이는 시간에 따라 다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정의를 1m가 고정된 시간 t0에서 S의 길이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더 정확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막대 S가 t0에서 1m 길이라는 것이 필연적 참인가? 누군가가 선험적으로 아는 모든 것은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meter의 정의이다. [55] 정의상, 막대 S는 t0에서 1m 길이이다. 이는 곧 필연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결론지을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1m'의 진술된 정의를 사용하는 자에게조차 말이다. 그는 그가 'meter'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칭을 고정하기 위해서 이 정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의 단위 같은 그런 추상적인 것에 대해서, 지칭이라는 개념은 불분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금의 취지에는 충분히 분명하다고 가정하기로 하자.) 그는 그 정의를 지칭 고정을 위해 사용한다. 그가 언표하고자 하는 특정 길이가 있다. 그는 우연적 속성으로 그것을, 말하자면 그 길이의 막대가 있다는 것을 언표한다. 다른 누군가는 같은 지칭을 또 다른 우연적 속성으로 언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설령 그가 길이에 대한 그의 표준, meter에 대한 지칭을 고정시키기 위해 이것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만일 t0에 이 막대 S에 열이 제공되었더라면, t0에 막대 S는 1m 길이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자, 그는 왜 이 일을 할 수 있는가? 부분적인 이유는 여기에서 내가 파고들길 바라지는 않는, 과학철학에서 일부 사람들의 정신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은 이것이다. 설령 이것이 그가 사용하는 유일한 길이 표준이라 할지라도,[각주:20] '1m'와 't0에서 S의 길이'라는 두 문구 사이에는 직관적 차이가 있다. 첫 번째 문구는 실제 세계에서 마침 t0에 막대 S의 길이인 특정 길이를 모든 가능세계에서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것을 의도한다. 다른 한편으로 't0에서 S의 길이'는 아무것도 고정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일부 반사실적 상황에서 그 막대는 더 길었을지도 모르고 또 일부 경우에는 더 짧았을지도 모른다, 만일 다양한 압박과 압력이 그 막대에 가해졌더라면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막대에 대해, 똑같은 물질과 길이로 이루어진 다른 어떤 막대에 대해서도 그러했을 똑같은 방식으로, 만일 일정 양의 열이 그것에 가해졌더라면, 그것이 이러저러한 길이까지 연장되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56] 그런 반사실적 진술은, 동일한 물리적 속성을 지니는 다른 막대들에 대해서도 참이기에, 이 막대에 대해서도 또한 참일 것이다. 그 반사실적 진술과 't0에 S의 길이'로서 '1m'에 대한 정의 사이에는 아무런 상충도 없는데, 그 '정의'는 적절하게 해석된다면 '1m'라는 표현이 't0에 S의 길이'라는 표현과 동의어인 것이라 말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우리가 '1m'라는 표현에 대해 '1m'는 t0에서 S의 길이가 사실상 그 길이인 그러한 길이에 대한 고정 지시자인 것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지칭을 확정한 것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S가 t0에서 1m 길이라는 것을 필연적 참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실, 특정 화환경 하에서, S는 1m 길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한쪽 지시자('1m')는 고정적이고 다른 한쪽 지시자('t0에서 S의 길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막대 S에 대한 지칭으로 미터법을 확정시킨 누군가에게 '막대 S가 t0에 1m 길이이다'라는 진술의 인식론적 상태는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선험적으로 아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만일 그가 막대 S를 '1m'라는 용어의 지칭을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했다면, 이런 종류의 '정의' (축약되거나 동의어적인 정의가 아닌)의 결과, 그는 자동적으로, 추가적인 조사 없이, S가 1m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각주:21] 다른 한편, 설령 S가 meter의 표준으로 사용된다 할지라도, 'S는 1m 길이이다'의 형이상학적 상태는 우연적 진술의 상태일 것인데, '1m'가 고정 지시자로 간주된다고 한다면 그러하다. 적절한 압박과 압력, 가열이나 냉각 하에서, S는 t0에서도 1m와는 다른 길이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물은 해수면에서 섭씨 100도에서 끓는다' 같은 그런 진술들이 유사한 상태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우연적인 선험적 참이 있다. 그렇더라도 당장의 취지에 우연적인 선험적인 것의 사례로 이 예시를 수용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57] 지칭을 고정시키는 '정의'과 유의어를 제시하는 정의 사이의 구분에 대한 그 서술이다. 

  이름의 경우에서 누군가는 이 구별을 마찬가지로 만들지도 모른다. 이름의 지칭을 기술 혹은 일군의 기술에 의해 제시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그 이름이 기술 혹은 일군의 기술과 같은 뜻이라면, 이름은 고정 지시자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똑같은 대상을 필연적으로 지시하지는 않을 것인데, (물론) 우리가 마침 우리의 기술 안에서 본질적 속성들을 사용하지 않는 한, 다른 대상들이 다른 가능세계들에서 그 제시된 속성들을 가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가장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정의로 사용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은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가장 대단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럼 물론 일부 다른 가능세계에서 그 사람은 플라톤에게서 수학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어떤 다른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였을 것이다. 다른 한편, 만일 우리가 단지 지칭물을 고정하기 위해 그 기술을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가능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체일 것이다. 그 기술의 유일한 용도는 우리가 지칭하고자 의도하는 사람을 식별해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허나 그럼, 우리가 반사실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에 결코 들어선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라고 말할 때, 우리가 '플라톤에게서 수학한,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이러저러한 글들을 쓴, 이러저러한 사람이 철학에 결코 들어선 적조차 없다'라는,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를 그런 것을 뜻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사람이 결코 철학에 들어선 적조차 없다고 가정해 보자'라는 것만 뜻하면 된다.

  일부 경우, 키터법이 고정되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술을 통해 추가로 고정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신화적 인물이 개밥바라기별을 처음 봤을 때, 그는 '나는 하늘의 저 위치에 출현하는 천체의 이름으로 "개밥바라기별"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지칭을 잘 고정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개밥바라기별'의 지칭을 그 외견상의 천체 위치로 고정시켰다. [58] 개밥바라기별이 문제의 그 당시에 그러한 위치를 지닌다는 것이 그 이름의 의미의 일부라는 점이 귀결되는가? 물론 아니다. 개밥바라기별이 일찌기 혜성에 가격당했더라면, 그 당시 다른 위치에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반사실적 상황에서 우리는 개밥바라기별이 그 위치를 점유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지, 개밥바라기별이 개밥바라기별이 아니었을 것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개밥바라기별'이 고정적으로 특정 천체를 지시하고 '저 위치의 물체'는 그 천체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다른 물체가 그 위치에 있었을지 모르거나 혹은 아무런 물체도 그 위치에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다른 아무런 물체도 개밥바라기별이었을 것이지는 않다 (또 다른 물체, 개밥바라기 별이 아닌 다른 물체가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불렸을지도 모른다 하더라도). 더욱이, 내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이름이 항상 고정 지시자라고 주장할 것이다.

  프레게와 러셀은 확실히 그에 따라 고유명사가 고정 지시자가 아니고 그 이름을 대체하는 기술과 동의어인 완전히 전개된 이론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기술이 고정 지칭을 결정하는 데에 사용되는 또 다른 이론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두 대안들은 내가 앞서 묻고 있던 그 질문들에 대해 상이한 귀결을 가질 것이다. 만일 '모세'가 '이러저러한 일을 했던 그 사람'을 의미한다면, 만일 아무도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그러저러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의 분석이기까지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 기술이 지칭을 고정적으로 확정하는데에 사용된다면, 그 기술은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다'를 통해 의미되는 바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나는 우리가 아무도 그러저러한 일을, 말하자면,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를 벗어나도록 인도한 일을 하지 않은 반사실적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으리란 점이 도출되는지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출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모세는 이집트 궁정에서 더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로 결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가 정치에도 종교에도 결코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아무도 성경이 모세에게 결부시키는 것들 중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 자체로 그러한 가능세계에서 모세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하진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59] '모세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특정 기술에 대한 존재와 고유성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과 뭔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 단칭 존재 진술에 대한 분석은 제공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이것은 의미에 대한 이론이라는 발상을 포기하고 그 생각을 내가 기술하였던 그 방식으로 지칭에 대한 이론으로 만든다면, 당신은 그 이론의 장점 일부를 포기하는 것이다. 단칭 존재 진술과 이름들 간의 동일성 진술은 어떤 다른 분석을 필요로 한다.

  프레게는 '의미'라는 용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시자의 의미를 그 지시자의 뜻인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그는 그 지시자의 의미를 그 지시자의 지칭이 결정되는 방식인 것으로 취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둘을 동일시하면서, 그는 그 둘 모두가 한정 기술구에 의해 제시된다고 가정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 두 번째 가정도 마찬가지로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았다 하더라도, 나는 첫 번째 가정을 거절한다. 기술은 지시자와 유의어로 사용될지도 모르고, 혹은 지시자의 지칭을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될지도 모른다. '의미'의 프레게식 두 가지 뜻은 일상어법에서 '정의'의 두 가지 의미에 상응한다. 그 의미들은 주의깊게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각주:22]

[60] 나는 지칭을 고정시킨다는 발상이 한 용어를 다른 용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실제로 정의하는 것에 대조적으로 어느 정도 명확한 것이기를 희망한다. 대단히 구체적인 수준으로 모든 것을 따져 들어가기에는 사실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내 생각에, 지칭의 우연성에 맞선 고정성 개념이 문제가 되는 그 차이를 구분해내는 데에 사용되지 못하는 경우들에서조차, 소위 정의로 불리는 어떤 것들은 자구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 즉 유의어를 제공하는 것보다 오히려 실제로 지칭을 고정시키기를 의도한다. 예를 들어 보자. π는 원의 지름에 대한 그 원의 원주의 비율인 것으로 간주된다. 이제, 그것은 내가 주장할 것은 그저 공허한 직관적 느낌에 다름 아니다. 내겐 여기 이 그리스어 철자가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이란 구의 축약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도 보이지 않고 π의 대안적 정의군, 그게 무슨 의미든지 간에, 그것의 축약으로 사용되는 것으로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실수, 이 경우 필연적으로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인 바로 그 실수에 대한 이름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π'와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 모두 고정지시자이고, 그래서 미터법 사례에서 제시된 논증들은 적용불가하다는 점을 주의하자. (뭐 누군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내가 제기했던 이름에 관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말했듯, 프레게와 러셀의 이론을 대체하는 유명한 근대적 이론이 있다. 그 이론은 스트로슨 같은 프레게와 러셀, 특히 러셀의 여러 관점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각주:23] [61] 그 대안은, 이름이 위장된 기술은 아니더라도 그것이 일군의 기술을 축약시킨 것이거나 어쨌든 그 지칭이 일군의 기술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질문은 이것이 참인지 여부이다. 내가 또한 말했듯, 이 대안의 더 강한 형태와 더 약한 형태가 있다. 더 강한 형태는 이름이 단순히 정의된다고, 동의어적으로, 일군의 기술로서 그리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이 일군 내에서 임의의 특정 속성을 지녔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속성들의 선언지를 지녔다는 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그가 그런 일들 중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던 어떤 반사실적 상황도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형태가 매우 설득력이 없다는 점이 명백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혹은 그렇게 말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필연'을 어떤 다른 의미에서 사용하면서 말했다. 어쨌든, 예를 들어, 고유명사에 관한 Searle의 논문에는 이런 말이 있다. 

 

같은 지점을 다른 식으로 살펴보기 위해, 우리가 이렇게 묻는다고 가정해 보자. '도대체 왜 우리는 고유명사라는 것을 가지는가?' 개별자들을 지칭하기 위해서임은 명백하다. '그렇긴 하지만 기술이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줄 수 있다'. 하지만 오직 지칭이 형성되는 모든 경우마다 동일성 조건을 특정해주는 한에서만 그러하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버리고 이를 테면 '알렉산더의 스승'이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동의했다고 가정하자. 그럼 지칭된 그 사람이 알렉산더의 스승이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참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교육에 개입했던 것은 우연적 사실이다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게 흔히 귀속되는 속성들의 논리적 총합, 포괄적 선언지를 지닌다는 사실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하더라도).[각주:24]

 

그러한 제안은, 만일 '필연'이 내가 이 강연에서 사용해 온 그런 식으로 사용된다면, 명백히 거짓이어야만 한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흔히 귀속되는 일부 매우 흥미로운 본질적 속성을 찾아냈던 게 아니라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흔히 귀속되는 것들 대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혀 행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지 모르는 것들이다. 그가 그런 일들을 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우리는 그 상황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것들을 행하지 않았던 상황으로 기술할 것이다. 이것은 기술의 경우 때때로, 누군가가, 알렉산더를 가르쳤던 사람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이 참이었을 수는 없을지라도, [62] 알렉산더를 가르쳤던 사람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는 경우 발생하는 그런 범위 구분이 아니다. 이것이 러셀의 범위 구분이다. (나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이 구분이 여기에서 참이 아니라는 점은 내게 분명해 보인다. 그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그가 교육에 개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만이 유일하게 참은 아니다.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용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영역에 들어서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에게 흔히 귀속시키는 그 어떤 성취도 이루지 않았던 반사실적 상황을 생각하면서, 여전히 우리가 그 상황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런 것들을 행하지 않았던 그런 상황이라고 말했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다는 것 역시 참이다.[각주:25] 뭐 그가 살았던 날들 같은 어떤 것들, 필연적인 것이라 더 상상되었을지도 몰랐던 것들이 있다. 어쩌면 그런 것들은 우리가 흔히 그에게 귀속시키는 것들일지도 모른다. 예외들이 있다. 어쩌면 그가 어떻게 실제로 죽었던 것보다 500년 더 그 이후까지 살았었을 수도 있었을지 상상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그건 확실히 최소한 문제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일자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없는 사람을 상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들에 대한 공허한 집합체 일부를 가질 뿐이다. 그 업적들 각각을 개별적으로만이 아니라, 이러한 속성들의 전체 선언지의 소유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단지 우연적 사실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속성들의 선언지를 가졌다는 진술은 우연적 참이다. [63] 

  누군가는, 만일 그가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을 이런 것들 중 하나를 행했던 사람으로 고정시킨다면, 어떤 의미에서 선험적으로 그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그것은 그에 대한 필연적 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예시는 선험성이 필연성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않는 경우의 사례일 것이다, 만일 이름의 집합체 이론이 옳다면 말이다. '1m'의 지칭을 고정하는 경우는 누군가가 그저 그가 이런 식으로 지칭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이 막대의 길이가 1m라는 것을 필연적 참으로 간주하지 않은 채로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매우 분명한 사례이다. 어쩌면 필연성을 함의하는 선험성에 관한 그 주장은 개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주장은 인식론에 관해 중요할지도 모르는 참인 어떤 통찰을 진술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떤 식으로는 이와 같은 사례가 일부 사람들이 오직 필연적 참만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생각하는 바의 핵심이 실제로는 아닌 사소한 반례 같은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자, 만일 모든 선험적 참이 필연적이라는 명제가 이런 종류의 반례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론가 개정될 필요가 있다. 개정되지 않은 경우 그것은 지칭의 본성에 관한 혼동으로 이끈다. 그리고 나 자신은 그것이 어떻게 개정되거나 재진술되어야 할지, 혹은 그런 개정 혹은 재진술이 가능할지 아무런 생각이 없다.[각주:26]

  [64] 그럼 이름에 대한 집합체 개념 이론이 무엇인지 진술해 보자. (실제로 그것은 훌륭한 이론이다. 내가 생각하는 유일한 결점은 아마도 모든 철학적 이론들이 모두 공통으로 가지는 것, 즉,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그 대신에 또 다른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라 의심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를 희망하는데, 그것이 이론이라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틀렸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이론은 얼마간의 명제들, 만일 당신이 그 이론이 존재진술, 동일성진술, 기타 등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자 한다면 일부 부수적인 명제들을 가진 그런 명제들로 분해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그 이론을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 더 강력한 형태로 취한다면 더 많은 명제들이 있다. 발화자는 A이다.

  (1) 모든 이름 또는 지칭 표현 'X'에 대해, 상응하는 속성 다발, 즉 A가 'φX'라고 믿는 그런 속성군 φ가 있다.

이 명제는 참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정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물론, 일부 사람들은 화자가 X에 관해 믿는 모든 것이 'X'의 지칭을 결정하는 일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오직 부분집합에만 관심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이후에 이를 다른 명제들의 일부를 개정함으로써 다룰 수 있다. 그래서 이 명제는 정의에 따라 맞다. 그렇지만 뒤따르는 명제들은 모두 내 생각에는 거짓이다. 

  (2) 그 속성들 중 하나 혹은 결합하여 그 일부는 A에 의해 어떤 개별자를 고유하게 지적해내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것은 그 속성들이 어떤 것을 고유하게 지적해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들이 그렇다고 A가 믿는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또 다른 명제는 그가 맞다는 것이다.

  (3) 하나의 고유 대상 y에 의해 φ의 대부분 혹은 편중된 대부분이 충족된다면, y는 'X'의 지칭물이다.

자, 그 이론은 'X'의 지칭물이 그 속성들 모두가 아니라면 '충분한' 만큼을 만족시키는 것이라 간주한다. [65] 명백히 A는 X에 관한 어떤 것들에 관해 틀릴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투표를 생각해 보라. 이제 문제는 이 투표가 민주적인지 아니면 속성들 사이에 모종의 불평등을 지니는지 여부이다. 모종의 경중을 따지는 일이 있으리란 것, 일부 속성들이 다른 속성들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더욱 그럴 듯해 보인다. 이론은 실제로 이러한 경중 판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특정해야 한다. 나는 스트로슨이, 내게는 놀랍게도, 명시적으로 여기에서 민주주의가 지배해야 할 것이라고, 그래서 대부분의 사소한 속성들이 가장 결정적인 속성들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고 진술한다고 믿는다.[각주:27] 물론 모종의 가중치가 있다고 가정하는 편이 더욱 그럴 듯하다.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고 말해 보자. 만일 지칭에 완전히 부적절한 어떤 속성이 있다면 우리는 가중치를 0으로 줌으로써 그 모든 권리를 박탈할 수 있다. 그 속성들은 집단의 구성원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일부 집단은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은 구성원들을 지닌다. 일부 집단은 투표권이 없는 구성원들만 지닐지도 모른다. 

  (4) 만일 그 투표가 아무런 고유한 대상도 내세우지 않는다면, 'X'는 지칭하지 않는다. 

  (5)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의 대다수를 가진다'라는 진술은 화자에게 선험적으로 알려진다.

  (6) '만일 X가 존재한다면, X는 φ의 대다수를 가진다'라는 진술은 필연적 참을 표현한다 (해당 화자의 개인적 발화에서).

 

(6)은 만일 누군가가 해당 다발이 해당 이름의 의미의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의 명제일 필요는 없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칭을 φ의 대다수를 가진 사람으로 결정하더라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φ의 대다수를 가지지 않았을 특정하게 가능한 상황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보였던 대로, 자세하게 다루진 않을 테지만, 일부 부수적인 명제들이 있다. 이것들은 '"모세가 존재한다"는 "충분한 속성들 φ가 충족된다"를 의미한다' 같은 단칭 존재 진술에 대한 분석을 제공할 것이다. [66] 해당 이론을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조차 이러한 명제들 중 일부를 가진다. 예를 들어, 명제 4에 부수명제로, 우리는 해당 화자에게 만일 충분한 φ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X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선험적으로 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오직 그가 지칭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의미에 대한 이론으로서 그 관점을 견지하는 경우에만, 만일 충분한 φ들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X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참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것은 그가 선험적으로 아는 어떤 것일 것이다. (최소한 그는 이름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안다는 가정 하에 선험적으로 그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같은 노선에 따라 동일성 진술에 대한 분석 또한 있다. 질문은, 이것들 중 어떤 것은 참인가? 만일 참이라면, 그것들은 일의 진행에 대한 멋진 그림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명제들을 논의하기에 앞서, 종종 사람들이 어떤 속성들 φ가 상관있는 것인지 특정할 때, 그들이 그것들을 잘못 특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을 언급하도록 하자. 이는 내가 그 이론에 반대하여 곧 제시할 논증들에 밀접하게 관련되었긴 하지만, 그냥 부수적인 결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예시를 고려해 보자. 그는 무엇이 상관된 속성들이라 말하는가? '누군가가 "모세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다양한 것들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이스라엘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탈출할 때 단일한 지도자를 지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의 지도자가 모세라고 불렸지 않았다거나, 성경이 모세에게 결부시키는 그 모든 일을 완수했던 사람이 그 누구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의 요지는, 만일 성경 속 이야기가 대체적으로 거짓이라면, 모세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선험적으로 안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성경의 이야기가 모세의 필연적 속성들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이런 일들 중 어떤 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았었을지도 몰랐다는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나는 만일 모세가 존재했다면, 그가 실제로 그 일들 중 일부 혹은 그 대다수를 했다는 것을 우리가 선험적으로 아는지 여부를 묻는다. 우리가 여기에서 사용할 것이 정말로 이 속성 다발인가? 물론 이런 종류의 언급에서 간과되는 구분이 있다. 성경의 이야기는 완전히 전설이었을지 몰랐거나, 현실의 개인에 대한 대체적으로 거짓인 설명이었을지도 몰랐다. 후자의 경우, 학자는 모세가 존재했을지라도 그에 대해 성경에서 말해진 것들은 대체적으로 거짓이라고 추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67] 그런 것들은 바로 이러한 학술적 영역에서 발생한다. 누군가가 예언가 그 누구도 고래나 큰 물고기에게 집어삼켜진 적 없다고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에 근거하여 요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따라나오는가? 성경의 설명이 그 어떤 개인에 대한 것도 아닌 전설로서의 설명인지 아니면 현실의 개인에게 장착된 전설로서의 설명인지 여부는 여전히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후자의 경우, 요나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흔히 그에게 결부되는 일들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따름이다. 내가 이 사례를 선택한 이유는 성경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요나가 존재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가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졌다는 설명만이 아니라 니네베에 설교를 하러 간 일이나 다른 무엇이든 성경 이야기에서 말해진 것까지 대체적으로 거짓인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것이 현실의 예언가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이유들이 있다. 만일 내가 적당한 책을 갖고 있었다면 인용으로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는 현실의 예언가였지만, 그러저러하고 그러저러했다'. 이것이 상상의 인물에 대한 순전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의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고 생각할 독립적인 이유들이 있다.[각주:28]

  [68] 이러한 예시들은 개정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것은 모두 성경이 그에게 결부시킨 그러저러하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는데, 우리는 성경이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 어떻게 아는가? 우리의 지칭 문제는 성경에서의 지칭 문제로 되돌려진다. 이는 우리가 명시적으로 포함시켜야 할 조건으로 이끈다. 

(C) 어떤 성공적인 이론에 대해서든, 설명은 순환적이지 않아야만 한다. 투표에 사용되는 속성들은 그들 스스로 궁극적으로 제거 불가능한 방식으로 지칭 개념을 포함하지 않아야만 한다. 비순환 조건이 명백하게 위반되는 사례를 들어 보자. 이어질 고유명사 이론은 William Kneale의 'Modality, De Dicto and De Re'에서 온 것이다.[각주:29] 이 논문은 내 생각에 명백한 비순환 조건 위반을 포함한다. 

 

사람들의 일상적 고유 명사들은 존 스튜어트 밀이 추정했던 것처럼 의미 없는 기호는 아니다. 누군가에게 가장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정보값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에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명백하게 하찮은 짓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히 그가 이미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개별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는 한 당신의 진술의 시작에서 당신의 '소크라테스'라는 단어 사용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각주:30]

 

여기에서 우리는 고유명사의 지칭 이론을 가진다. '소크라테스'는 그저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을 의미한다. 실제로, 물론, 어쩌면 한 사람만 '소크라테스'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고, [69] 몇몇은 그를 '소크라테스'로 부르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리 부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것은 특정 조건 하에서 고유하게 충족되는 조건이다. 어쩌면 오직 단 한 사람만이 특정한 경우에 나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렸었을 것이다. 

  닐은 누군가에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렸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다고 말한다. 어떤 관점에서는 그것이 하찮지 않다. 어쩌면 그리스인들은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가 우리에 의해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 보자. 어쨌든 나에 의해서는 그렇다.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 가정해 보자. (나는 닐이 여기에서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것이 놀랍다고 생각한다. 그리스인들이 그를 '소크라테스'라고 불렀었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최소한, 그리스어 이름은 그와 달리 발음된다. 다음 강연까지 인용의 정확성을 확인해 볼 것이다.)

  닐은 이 이론을 위한 논증을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개별자'로 분석되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달리 어떻게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지는 것이 사소한 일이라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겠나? 몇몇 경우 그것은 사소하다. 내가 추정하기로 같은 의미에서 당신은 영어의 어떤 표현의 의미에 대해서든 멋진 이론을 확보하고 사전을 편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말들이 경주에 사용된다고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것은 정보값이 있을지 모르더라도, 그에게 말들이 '말들'이라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은 사소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horse'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horses"라고 불리는 것들'을 의미하기 때문에 사실일 수 있을 것이다. 영어에서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어떤 표현의 경우든 마찬가지이다. 현자들이 '현자들'로 불린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 사소하기에, '현자들'은 '"현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을 의미할 따름이다. 이제 단적으로 이것은 실제로 아주 좋은 논증은 아니고,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라고 불린다고 말해주는 것이 왜 사소한 일인지에 대한 유일한 설명일 수도 없다. 물론, 영어에서 'is called'의 용법을 아는 누구든 해당 진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만일 'quarks'가 '어떤 것을 의미한다면 'quarks는 "quarks"라고 불린다'는 참을 표현할 것이라는 점을 안다. 그는 그것이 표현하는 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왜냐하면 그는 quark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참을 표현한다는 그의 지식은 [70] 'quarks'라는 용어의 의미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단한 분량을 할애하여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구절로부터 생기는 흥미로운 문제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여기에서 소개한 주된 이유는 지칭이론으로서 그것이 비순환 조건의 명백한 위반을 제시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소크라테스'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어떻게 우리는 그가 지칭하는 자가 누구인지 안다고 가정되는가? 그 이름의 의미를 제시하는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그러하다. 닐에 따르면, 그 기술은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추정컨데, 이것이 그렇게 사소한 것으로 간주되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취할 때 그것은 전혀 아무런 지칭 이론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묻는다. '그는 "소크라테스"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그리고 그 대답이 제시된다. '자, 그는 그가 지칭하는 그 사람을 지칭한다.' 만일 이것이 고유명사의 의미에 대한 전부라면, 아무런 지칭도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만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이 특정 이론의 경우에 그 조건은 명백히 충족되지 않았다. 충분히 놀랍게도, 그 전형은 때때로 러셀에 의해 기술적 의미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월터 스콧"이라 불리는 사람'. 명백하게 만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름의 유일한 기술적 의미가 '그러저러하게 불리는 사람', '"월터 스콧"이라 불리는 사람',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 형식의 것이라면, 이 호명 관계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실제로 지칭을 결정하는 것이고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사람" 같은 어떤 기술도 아닐 것이다.

  

 

-작성중-

  1. 이 책은 1970년 1월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세 차례 강연을 옮긴 것이다. 강연은 원고 없이 진행되었고, 지금 판본은 일부 편집이 있지만 비격식 문체는 건드리지 않았다. 각주는 대부분 추가된 것이나, 강연 때 말로 부연했던 것들도 있다.

      이런 점들을 독자들이 감안해 주길 바란다. 강연에 허락된 시간이나 비격식적 문체 때문에 피치 못하게 논증을 축약해야 했고 특정 반론들을 다루지 못하기도 했다. 특히 과학적 동일성과 심신문제를 포함한 부분에서 철저함을 희생해야 했다. 이 책에서 주장되는 관점을 완전히 표현하는 데에 본질적인 일부 주제들, 특히 존재진술과 빈-이름 논의도 생략돼야 했다. [본문으로]

  2. 주석에 추가할 기회가 있다면, Rogers Albritton, Charles Chastain, Keith Donnellan, Michael Slote (특히 Hilary Putnam을 위시하여 본문에 언급되는 철학자들에 더하여), 이 사람들이 내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바의 여러 측면에 접점을 가지는 저마다 독립적으로 표명된 관점들을 가진다는 점을 언급해야 하겠다. 올브리튼은 소위 자연종들에서 필연성과 선험성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레몬들이 과일이 아니었더라면 그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여, 나의 주의를 환기시켜주었다. (그가 내 모든 결론을 받아들여줄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다.) 나는 또한 올브리튼과 Peter Geach가 기원의 본질성에 관하여 일찌기 나눈 대화의 영향력을 떠올린다. 본문의 사과는 여전히 유효하다. 이 주석의 목록이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다. 활발한 대화로 나를 도와준 친구들과 학생들을 열거하려 시도하진 않는다. Thomas Nagel과 Gilbert Harman은 강연록의 편집에 준 도움에 대해 특히 감사 받을 만하다. [본문으로]
  3. Keith Donnellan, 'Reference and Definite Descriptions', Philosophical Review 75 (1966), pp. 281-304. 또한 Leonard Linsky, 'Reference and Referents', in Philosophy and Ordinary Language (ed. Caton),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63. 도넬런의 구분은 기술 만큼이나 이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이 누군가를 멀리서 일별하고 그를 존스라고 재인한다고 생각한다. '존스가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낙엽들을 갈퀴로 모으기'. 만일 그 먼 거리에 있는 낙엽 치우는 사람이 실제로는 스미스라면, 그들은 어떤 의미로는 스미스를 지칭하고 있는데, 설령 그 둘 모두 '존스'를 존스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본문에서, 나는 이름의 '지칭대상(referent)'을 그 이름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다. 아마도 '지칭'보다 '지시(denote)' 같은 전문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덜 호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지칭'이란 단어 사용은, 'X'가 어느 이름나 기술로도 대체될 수 있는 경우의 '"X"의 지칭대상은 X이다'라는 도식을 만족시키는 그런 것이다. 나는 도넬런에 반대하여, 도넬런의 지칭에 관한 언급이, 비록 언어행위이론에 적합할 것들이리라 하더라도, 의미론이나 진리조건에 기여하는 바가 거의 없다고 믿는 쪽으로 잠정적으로 기울어 있다. 지면의 한계로 내 관점을 옹호하기는커녕 내 말뜻을 설명할 수조차 없지만, 간략히 언급은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이름이나 기술의 지칭체를 '의미론적 지칭체'로 부르자. 이 의미론적 지칭체가 이름의 경우에는 이름지어진 그것이고, 기술의 경우에는 해당 기술을 고유하게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가 적절한 거짓 믿음을 지니는 경우라면 해당 의미론적 지칭체와는 다른 어떤 것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스미스-존스) 이름짓기의 경우에 벌어진 일이고 또한 도넬런의 '샴페인' 경우에서도 벌어진 일이다. 한편은 이름이 애매한 것이라는 어떤 이론도 요청하지 않고, 다른 한편은 러셀 기술구이론의 어떤 수정도 요청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4. 엄밀히 말하자면, 물론 러셀은 이름이 기술을 축약시키지 않고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이름'이라 부르는 것들이 기술을 축약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그것들이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러셀에 따르면, 'Walter Scott'은 기술을 축약시키기에, 'Walter Scott'은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오직 일상 언어 내에 실제로 존재하는 이름들만이 아마도 특수한 경우에 러셀이 생각하는 의미에서 화자가 '직접 접한(acquainted)' 대상을 지칭하는 데에 사용되는 'this'나 'that' 같은 지시사들일 것이다. 우리가 러셀이 하는 방식으로 사물들을 상정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러셀이 일상적으로 그리 불리는 이름들이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묘사할 수 있을 이다. 그 이름들은 강한 방식으로 의미를 지니는데, 말하자면, 정의상 이름의 지칭체가 해당 기술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인 그런 한정기술구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러셀 자신은 그의 초기 표기법으로부터 기술구를 제거하기에, 「지시에 관하여」에서 '의미'라는 관념이 허황되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것으로 보인다. 러셀의 관점을 보고하면서, 그리하여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그에게서 이탈한다. 첫째, 우리는 '이름'이 러셀의 '논리적으로 적절한(고유한, proper) 이름'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이해된 대로의 이름일 것이라 규정한다. 둘째, 우리는 기술과 그 축약을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한다. [본문으로]
  5. 내가 프레게-러셀 관점과 그 변주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오직 이름의 지칭에 대한 실질적인 이론을 제공하는 그런 변용들만을 포함시킨다. 특히, '표준 표기법'에서 '소크라테스' 같은 이름은 '소크라테스함(the Socratizer)' ('소크라테스함'이 고안된 술어인 경우) 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그리고 해당 기술은 러셀의 방법론에 의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제안은 이름에 대한 지칭이론을 의도하였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점들을 가진 언어 개선 제안을 의도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문제들은, 필요한 수정을 거쳐, 개선된 언어에 모두 적용될 것이다. 특히, '어떻게 "소크라테스"의 지칭이 결정되는가?'라는 물음은 '어떻게 "소크라테스하다"의 외연이 결정되는가?'로 이어진다. 물론 내가 콰인이 그 반대 경우를 주장한 적이 있다고 시사하는 건 아니다. [본문으로]
  6. Gottlob Frege, 'On Sense and Nominatum', translated by Herbert Feigl in Readings in Philosophical Analysis (ed. by Herbert Feigl and Wilfrid Sellars), Appleton Century Crofts, 1949, p. 86. [본문으로]
  7.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lated by G. E. M. Anscombe, MacMillan, 1953, § 79. [본문으로]
  8. John R. Searle, 'Proper Names', Mind 67 (1958), 166-73. [본문으로]
  9. 지프 식으로 이해된 이름의 지칭에 대한 기술다발 이론에 대한 그의 가장 상세한 진술은 'About God', reprinted in Philosopllical Turnings,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and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1966, pp. 94--96에 담겨 있다. 더 간략한 진술은 Semantic Analysis, Cornell University Press, Ithaca, 1960, pp. 102--05 (esp. pp. 103--04)에 있다. 후자의 구절은 우리가 직접 접하는 사물의 (전시와 세례를 사용하는) 이름이 역사적 인물의 이름과 달리 취급되어야 할 것이라는, 그 지칭이 결부된 기술들(혹은 그 다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에 그렇다는 점을 시사한다. Semantic Analysis  93쪽에서 지프는 '고유 명사에 관한 단순하고 강한 일반화(들)'은 불가능하다고, '무언가가 대체로 그러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프는 명백히 기술다발 이론이 그런 거친 진술로서는 합리적이라고, 적어도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진술하고 있다. 고유명사가 일상적으로 해당 언어의 단어가 아니고 일상적으로 뜻을 지니지 않는다는 지프의 관점에 대해서는 Semantic Analysis pp.85-89와 93-94 참조. [본문으로]
  10. 역사 속에서 개인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결정론자들은 모세가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가 했던 모든 일을 성취하는 결과를 야기했을 것이라고 잘도 주장할지 모른다. 그들의 주장은 '모세가 존재한다'라는 것의 뜻에 대한 제대로 된 철학적 이론에 호소함으로써는 반박될 수 없다. [본문으로]
  11. 그런데, 엄격하게 정의되기 전에는 개념을 도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철학에서 공통된 태도이다 (어느 정도 대중적인 엄격하다는 개념에 따라). 여기에서 나는 직관점 개념을 취급하고 있고 직관적 개념 차원에 머물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것들이 실제로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강연을 오늘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만일 그게 맞다면, 오늘 내가 이 강연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가능(possible)하다. 이와 상당히 다른 질문은 인식론적 질문, 어떻게 누구든 특정 개인이 내가 오늘 이 강연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지의 질문이다. 나는 그 경우 그가 이것을 후험적으로 안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내가 이 강연을 오늘 하게 될 것이었다는 선천적 믿음을 가지고 태어났었더라면, 그건 또 모를 일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사람들이 이를 후험적으로 안다고 상정하자. 어쨌든, 제기된 두 질문은 상이한 것이다. [본문으로]
  12. 내가 제시한 사례는 특정 속성-선거 승리-가 닉슨에게 우연적이라는 것을, 그가 어떻게 기술되는지와 독립적으로 단언한다. 물론, 만일 우연적 속성 개념이 유의미하다면, 본질적 속성 개념 또한 유의미해야만 한다. 이는 어떤 본질적 속성이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사실 내가 그게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통상적인 논증은 본질주의의 유의미성을 문제삼고, 한 대상에게 한 속성이 우연적인지 혹은 본질적인지 여부가 그 대상이 어떻게 기술되는지에 의거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관점은 모든 속성이 우연적이라는 관점이 아니다. 물론 그것은 일부 관념론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바, 모든 속성이 본질적이고 모든 관계가 내재적이라는 관점 또한 아니다. [본문으로]
  13. David K. Lewis, 'Counterpart Theory and Quantified Modal Logic', Journal of Philosophy 65 (1968), 113-126. 루이스의 멋진 논문조차 순전히 형식적인 난점에 시달린다. 양화 양상에 대한 그의 해석과 관련하여, (y)((x)A(x)⊃A(y))라는 친숙한 법칙은, 만일 A(x)가 양상 연산자를 포함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성립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y) ((x) ◇ (x ≠ y))는 만족될 수 있지만  (∃y) ◇ (y ≠ y)는 만족될 수 없다.) 루이스의 형식 모형은 상대역에 관한 그의 철학적 관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되기에, 또한 양상 속성에 대한 보편 예화의 불성립은 직관적으로 기이하기에, 이 불성립이 그의 철학적 관점이 가지는 타당성에 반대하는 추가적인 논증을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덜 심각한 형식적 난점들 또한 있다. 내가 여기에서 상세히 논할 수는 없다.

      엄밀하게 말해서, 루이스의 관점은 '통세계 정체화' 관점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가능세계들을 교차하는 유사성들이 대칭적일 필요도 이행적(transitive)일 필요도 없는 상대역적 관계를 확정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것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의 상대역은 절대로 그 어떤 것 자체와 동일하지(identical) 않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Humphrey가 선거에서 이겼을지도 모른다 (오직 그가 그러한 일을 수행한 경우라면 그 경우에만)'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Humphrey에게 발생했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 "상대역"에게 일어났을지도 모를 어떤 것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마도, Humphrey는 다른 누군가가, 그가 험프리를 얼마나 닮았든 상관 없이, 또 다른 가능세계에서 승자였는지 여부를 신경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문제는 그 두 관점 모두에 공통된다. 다른 가능세계들이 더 포괄적인 우주의 다른 차원들 같은 것이라는 가정, 그 세계들이 순전히 질적인 기술들에 의해서만 제세될 수 있다는 가정, 또한 그러므로 정체성 관계든 상대역 관계든 질적 유사성을 통해 확정되어야만 한다는 가정이다.

      여러 사람들이 내게 상대역 이론의 아버지는 아마도 라이프니츠일 것이리라고 지적해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런 역사적인 문제에 개입하진 않을 것이다. 루이스의 관점을 양자역학에 대한 휠러-에버렛 해석과 비교하는 일도 흥미로울 것이다. 나는 이 물리학에서의 관점이 루이스의 상대역 이론과 유비되는 철학적 문제로 곤란을 겪을 것이라 의심한다. 확실히 그 정신은 지극히 유사하다. [본문으로]

  14. 내가 비판하고 있는 그 관점의 또 다른 전형으로 루이스의 논문보다 더욱 철학적인 해설을 포함한 논문은 통세계 정체성에 관한 David Kaplan의 논문이다. 아쉽게도, 이 논문은 출판된 적이 없다. 그 논문은 카플란의 현재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15. 오독되었다는 것은, 해당 표현이 '통세계 정체성'의 특수한 문제로서, 우리가 또 다른 가능세계를 상상할 적에 그 혹은 그것에 관하여 우리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혹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규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는 시사를 하기 때문이다. '가능세계'라는 용어 또한 오독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외국'이란 그림을 시사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에서 때때로 '반사실적 상황'을 사용해왔다. Michael Slote는 '세계의 가능 상태(혹은 역사)'를 '가능 세계'보다 덜 오독하게 될 용어로 제안해왔다.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일부 가능세계에서, 험프리가 승리하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지 말고, 차라리 단순하게 '험프리는 승리하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가능세계들이라는 장치는 (내가 희망하기로는) 양화된 양상 논리학의 집합론적 모형이론에 관련된 한에서 매우 유용한 것이었지만, 철학적 사이비문제들과 오독된 그림들을 증진시켜왔다. [본문으로]
  16. 물론 나는 언어가 모든 대상 각각에 대한 이름을 포함한다는 점을 시사하는 건 아니다. 지시사들이 고정 지시자로 사용될 수 있고, 자유 변항이 불특정 대상들에 대한 고정 지시자로 사용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반사실적 상황을 특정할 때, 우리는 그 가능세계 전체를 기술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가 되는 부분만을 기술한다. [본문으로]
  17. See Lecture 1, p. 53 (on Nixon), and Lecture II, pp. 74-7. [본문으로]
  18. 여기에는 모종의 애매함이 있다. 상정된 책상의 부스러기, 혹은 분자가 하나씩 교체되었다면, 우리는 똑같은 책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꺼이 말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여러 조각들 달랐다면, 다른 책상을 가진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시간에 따른 정체성에 대해서도 같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정체성 관계가 애매한 경우, 그것은 비교차적(intransitive)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상대역' 개념이 (모사, 외지 세계라는 루이스의 철학적 보강물들은 없을지라도) 여기에서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엄격한 정체성이 오직 개별자들(분자들)에게만 적용되고, 그것들로 '구성된' 개별자들, 책상들에게는 상대역 관계가 적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상대역 관계는 애매하고 비교차적인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에 대한 정체성 관계가 아무런 애매함이 없고 비교차성의 위험이 소거된 궁극적이고 기초적인 개별자들의 차원에 가 닿으리라 가정하는 것은 이상주의인 것처럼 보인다. 그 위험은 보통 실천 차원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단순하게 걱정 없이 정체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논리학자들은 애매함에 대한 논리학을 고안해내지 않았다. [본문으로]

  19.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 50. [본문으로]
  20. 과학철학자들은 '1m'가 '조직개념(cluster concept)'이라는 관점에서 그 문제의 열쇠를 찾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정적으로 이하를 가정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주어진 그 '정의'는 해당 미터법을 확정짓기 위해 사용되는 유일한 표준이다. 나는 그 문제가 여전히 발생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본문으로]
  21. 그가 아는 참은 우연적이기에, 나는 규정상 분석적 참이 필연적이면서 또한 선험적이기도 하기를 요구하기에, 그 참을 '분석적'이라 부르지 않는다. 주석 63을 보라. [본문으로]
  22. 통상 프레게식 의미는 오늘날 '지칭 고정자'와 주의깊게 구별되어야만 하는 바, 뜻으로서 해석된다. 우리는 이후 대부분의 화자에게, 그들이 최초에 대상에 그 이름을 부여한 사람들이 아닌 한, 그 이름의 지칭물이 기술보다는 오히려 의사소통의 '인과적' 연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양상 논리의 형식 의미론에서, 항 t의 '의미'는 통상 (가능적 일부) 함수로서 각 가능세계 H에 H에서의 t에 대한 지칭물을 할당하는 함수인 것으로 간주된다. 고정 지시자에 대해, 그러한 함수가 상수이다. 이러한 '의미' 개념은 '뜻을 부여하는 것'이란 개념과 결부되고 지칭을 고정하는 것이란 개념과는 결부되지 않는다. '의미'의 이러한 용법에서, '1m'는 상수 함수를 그 의미로 가지는데, 그 지칭이 'S의 길이'라는, 상수 함수를 그 의미로 가지지 않는 것에 의해 고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일부 철학자들은 기술들이, 영어에서, 애매하다고, 때로 기술은 각 세계에서 그것을 만족시키는(그런 것이 뭐라도 있다면) 대상을  비-고정적으로 지시하고, 반면 때로는 그 기술을 실제로 만족하는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한다고 생각해왔다. (도넬란에게 영감을 받은 다른 철학자들은 기술이 그 기술을 만족하는 것으로 생각되거나 전제되는 대상을 때때로 고정적으로 지시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어떤 추정되는 애매함들이든 의심스럽다고 본다. [60] 나는 러셀의 범위 개념을 통해서도 이 책 25쪽 주석 3에 언급된 고려들을 통해서도 취급될 수 없는 그런 애매함들에 대해 아무런 분명한 증거도 알지 못한다.

      만일 애매성이 존재한다면, 'S의 길이'의 가정된 고정적 의미에서, '1m'와 'S의 길이'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것을 지시하고 (기능상) 같은 '의미'를 가진다.

      내포 논리의 형식 의미론에서, 우리가 한정 기술구를 각각의 세계에서 그 기술구를 만족시키는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취한다고 가정해 보자. 각 기술을 그 기술을 실제로 만족시키는 대상을 고정적으로 지시하는 용어로 전환시켜주는 연산자를 가지는 것은 유용할 것이다. 데이비드 카플란이 그런 연산자를 제안하고 'Dthat'이라 부른 바 있다. [본문으로]

  23. P. F. Strawson, Individuals, Methuen, London, 1959, Ch. 6. [본문으로]
  24. Searle, op. cit. in Caton, Philosophy and Ordinary Language, p. 160. [본문으로]
  25. '알렉산더의 스승'이 양상 맥락에서 범위 구분일 수 있다는 사실과 그 표현이 고정 지시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군가가 알렉산더의 스승이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그리고, 그런 조건에서, 알렉산더의 스승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점을 알아볼 때 양자 모두 묘사된다. 다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이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것은 참이 아닌데, 아리스토텔레스가, 2x2가 '4'라고 불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것처럼, 그렇게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대충, 일상어법은, 종종 사용과 언급을 혼동하는데, 그런 어법은 물론 누군가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렸거나 불리지 않았을지도 몰랐다는 사실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였을지도 아리스토텔레스였지 않았을지 몰랐다고 말해서 표현할지도 모른다. 이따금 나는 그런 느슨한 용법이 일상언어에 대한 현재 이론의 적용가능성에 대한 반례로 제시되는 것을 듣곤 했다. 이런 구어체는 '불가능한 임무 전담부대'의 임무 성공이 불가능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양상 법칙에 대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처럼 내 주장에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특정 조건 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를 가르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하더라도, 이런 조건은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이지 않았을 조건들이 아니다. [본문으로]
  26. 만일 누군가가 1m를 't0에서 막대 S의 길이'로 고정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t0에서 막대 S의 길이가 1m라는 것을 선험적으로 안다. 그가 이 진술을 우연적 참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히 측정 체계를 고정시킴으로써, 그가 세계에 관해 그 전까지 알지 못했던 어떤 (우연적인) 정보를, 어떤 새로운 사실배웠는가? 어떤 의미로 그는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데, S가 1m 길이라는 것이 설령 부인할 수 없이 우연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반례로부터 그 주장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모든 선험적인 것이 필연적이라고 재정식화하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말했듯, 나는 그런 재정식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아는 바가 없다. 그 재정식화는 해당 주장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 그런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고 (예를 들어, 선험을 경험독립적으로 (참이라는 것 대신에)필연적인 것으로 알려지는 것이라 정의함으로써라든지), 그 역 명제는 여전히 거짓일 것이다.

      나는 그런 재정식화를 시도하지 않을 것이기에, 일관되게 [64] '선험적' 이라는 용어를 지칭고정 '정의'로부터 그 참이 귀결되는 진술들을 선험적인 것으로 만드는 쪽으로 사용할 것이다. [본문으로]

  27. Strawson, op. cit., pp. 191-92. 스트로슨은 실제로 몇몇 화자들의 경우를 고려하고, 그들의 속성들을 모아서, (그 경중을 동격으로 취한) 민주적 투표를 상정한다. 그는 주류성이 아니라 오직 충분한 다수성만을 요구한다. [본문으로]
  28. H. L. Ginsberg, The Five Megilloth and Jonah, The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1969, p. 114: '이 이야기의 "영웅", 아미타이의 아들 예언가 요나는 역사적 유명인사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라 허구이다.' 학술적 합의는 그 책 속 요나에 관한 모든 세부사항을 사실적 토대에 기반하지도 않은 전설로 간주하는데, 그가 히브리 예언가였다는 단순 진술을 제외하고 그리하며, 이 단순진술은 고유하게 정체화해줄 리가 거의 없다. 그가 히브리인들에게 '요나'라고 불렸을 필요도 없다. 'J' 소리는 히브리어에 존재하지 않고, 요나의 역사적 존재는 우리가 그의 본래 히브리어 이름을 알든 알지 못하든 그 여부와 독립적이다. 우리가 그를 요나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그를 순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짚어내는 데에 사용될 수 없다. 요나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는 II Kings에서 그에 대한 독립적 지칭으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런 증거는 그러한 어떤 다른 지칭들의 부재 중에도 사용가능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히브리 전설은 실제 인물에 관한 것이었다는 증거. 더욱이, 요나가 실제 인물에 관한 전설이라는 진술은 이었을지도 몰랐는데, 그에 대한 아무런 증거도 없었을지라도 그러하다. 누군가는 '나치 선동의 히틀러는 존재한 적 없다'라고 말하듯 '그 책의 요나는 존재한 적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위의 인용이 보여주듯, 이 용법은 [68] 요나가 존재했는지 여부에 대한 역사가의 관점과 일치할 필요는 없다. Ginsberg는 일반 독자, 그의 진술이 이해가능한 것임을 알아볼 것이라 그가 추정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쓰고 있다. [본문으로]
  29. In Ernest Nagel, Patrick Suppes, and Alfred Tarski, Logic, Methodology and the Philosophy of Science: Proceedings of the 1960 International Congress, Stanford University Press, I962, 622-33. [본문으로]
  30. Loc. cit., pp. 629-3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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