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쪽] 명제의 구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Logos와 Pragma


본 연구는 진술-형성 발화에 대한 의미론의 핵심, 즉 진리치의 담지자에 대한 정의가 무엇일지에 대한 연구에 견고한 토대를 마련한 한 연구자를 기리기 위해 저술되었다.


첫 장에서 나는 플라톤의 진술-형성 표현에 대한 의미론과 그에 포함된 몇몇 핵심개념에 대한 검토를 제시한다. 다음으로, 나는 해당 문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을 탐구한다. 이는 참으로서의 being과 거짓으로서의 not-being 개념을 포함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pragma 개념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logos가 가진 본성에 대한 고찰에서, 나는 이 개념을 onomazein(이름하다, 명명하다) 차원에서 출현하는 것으로서만이 아니라 legein(말하다) 차원에서 작용하는 방식으로서도 논의한다. 다음으로, 나는 synthesis(모음, 종합)와 dihaeresis(나눔, 분할)라는 주요 개념과 단항 함수로서 ["a monadic functor," 이 사람은 완전 용법 is를 이렇게 부르던데 이 용어의 우리말 번역을 뭐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범주적 being의 공의적 견지자인 한에서 ["syncategorematic container of categorial being," 자체적으로는 의미를 가지지 않고 10범주 중 하나 이상의 것을 보어로 취할 때 그 주어가 어느 범주로 분류되는지를 의미하게 되는 'is.' 불완전 용법 is이나 copula는 아니다.] einai의 역할을 고찰한다. 끝으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형성 발화의 성격을 규정해 보이고자 시도한다.


1. 플라톤의 진술-형성 표현 의미론.


1.1. 플라톤에서의 Logos.


플라톤에게 logos는 이름(onoma)과 한정어(rhēma)로 구성된 의미를 지니는 표현이다. 여러 대화편들에서[각주:1] logos는 언제나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묘사하는 복수의 단어로 된 표현인 것으로 나타난다. 어떤 onoma든 logos의 일부일 것이고 그래서 '이름,' 즉 실체를 지시하는 단어로 기능하거나, 아니면 rhēma 역할을 하는 경우, 또 다른 onoma에 추가되는 한정어로 기능한다.  실상, 어느 logos든 그 자체가 실체-지시적 또는 기술적 요소로서 기능하는 onomata로 구성되기에 실체를 지시하는 데에(예를 들어 'hode ho leukos anthrōpos'에서 'leukos anthrōpos' = '이 하얀 인간') [28쪽] 또는 기술적으로(예를 들어 'Sokratēs esti leukos anthōpos' = '소크라테스는 하얀 인간이다') 사용될 것이라 기대된다. 또한 onoma처럼, logos는 사물의 관념을 단지 상기시키고 그 사물을 우리나 청자의 심상 앞으로 가져온다. 기본적으로 logos가 그 구성요소들과 똑같은 기능을 지닌다는 것, 즉 논의를 위해 무언가를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기술함으로써, 마치 '논의'라는 logos의 넓은 의미에서(혹은 모든 종류의 '진술'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인 '설명(exposition)'이란 의미에서) 플라톤에 의해 logos가 적절하게 회화에 비교되었던 것처럼(Cratylus, 424d-425a),[각주:2] 사물을 가져다 놓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놀랄 필요가 없는 일이다.


플라톤의 의미론에서 logos의 본성을 모색하는 경우 그 단어의 어원을 유념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에 해당한다. 'Logos'는 어근 'leg-'에서 파생되는데 이 어근은 기본적으로 '질서잡힌 방식으로 모은다'라는 의미이다.[각주:3] 그래서 logos는 항상, 처음에 모종의 혼란이 발생한 그런 상황에서 성취되거나 혹은 성취되어야 할 '질서' 또는 '질서를 부여함'이라는 함축을 지닌다.[각주:4] 앎에 관한 플라톤의 관점에 대한 우리의 논의로부터 분명해질 것인 바(이하, nr. 1.3을 보라), logos는 관찰되는 사물들의 조화로운 구조를 인지하고자 시도할 때 거치는 그 인지적 절차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 들어서기에 앞서, 우리는 먼저 'logos'에 관한 플라톤의 관점에 관련된 오해를 다루어야만 한다. 'Logos'라는 단어가 사실상 '진술(statement)'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긴 하지만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진술'이 확실히 통상 오늘날 우리의 'S is P' 형식으로 지시되는 표현과 동일시되지 않아야 한다. 이제 플라톤의 서술에 관한 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2. 술어에 관한 플라톤의 관점.


플라톤이 진술-형성 현상을 단순한 사물 명명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틀에서, 명명(onomazein) 차원과 진술(legein) 차원 사이의 대립에 대한, Sophist 261c6 이하에서[각주:5] 플라톤이 논의하는 설명이 호출된다. 명명 차원은 그 안에서 이름들(onomata)이 세계로부터 우리의 정신 앞으로 사물을 가져오는 데에 사용되는 그러한 영역이며, 반면에 서술 차원에서 우리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완결된 진술들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logos(단지 결합된 onoma 역할을 할)는 이중적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a) logos가 이름과 한정어의 특수한 조합으로서 그에 상응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형상들의 결합을 반영하거나, (b) (결과적으로, 즉, 서술 차원에서 역할을 하는 경우) 진술-형성 표현으로서 기능하고 사실인 것 혹은 사실이 아닌 것에 관한 정보를 채워준다.


[29쪽] Logos도 명명 차원에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런 (onomata의 단순 결합물로서 그 중 하나는 onoma 위치에, 나머지는 rhēma 위치에 있는[각주:6]) logos가 진술 차원을 불러오는 logos는 아니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해당 logos가 누군가에 의해 실제로 단언된(아니면 적어도 실제로 단언될 것이라 가정은 되는) logos가 아닌 한 진술 차원에 대한 아무런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onomata 결합 구조물로서 명명차원의 logos와 진술 차원에서 이것이 사실로서 단언된 logos를 구분하고 있다. 글쎄?] 이러한 관계에서, 플라톤이 "누군가가 한정어(rhēma)를 이름과 결합시키지 않는 한, 있거나 있지 않은 무언가에 관하여 아무런 정보도 공급되지 않는다"라고, 그리고 "logos를 사용하는 자는 무언가에 관련하여 이름과 한정어를 함께 엮는 일을 완수하고 그를 통해 무언가를 진술한다"라고 명백하게 주장한다는 것이(Sophist, 262c3-5; 262d2-5)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밖에, logos인 것은 그게 실제로 누군가에 의해 내적 발화에서 사용되든 외적 발화에서 사용되는 진술 차원에서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있다.[각주:7]


그런 식으로 플라톤이 logos를 진술-형성 발화로 생각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듯 그에게 '진술'은 'S is P' 형식으로 표현된 우리에게 익숙한 진술과는 상당히 다른 본성을 지닌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logos는 항상, 정확히 한 표현으로 남아있으면서 구문론적으로 구분되는 두 요소들, 주어와 술어 같은 것으로 분해되지 않는 'more-than-one-word-expression'[각주:8]이다. 진술 차원에서 사용될 경우 logos는 실제로, Thaetetus 190a5의 표현으로 하자면, logos eirēmenos, 또는 '실제로 단언된 logos'(혹은 '확보한 것으로 이야기되는')로서 내적으로든(Theaet. 190a) 외적으로든 발화된 것이다. 그 심층구조를 고려할 때 플라톤의 진술-형성 발화는 'obtains'나 'is the case'라는 문장 함수가 선행하는 그런 pragma를 표현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리하여 'A man is righteous'라는 진술은 다음과 같이 읽혀야 한다:


'obtains : [man(인간), righteous(올바름)],'


man과 righteous가 플라톤이 dynameis(가능적인 것들)라고 부르는 것들을 표현하는 경우, 즉 초월적 형상들인 MAN과 RIGHTEOUSNESS에 참여하는 참여자들을 표현하는 경우에. 그리하여 이 진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도 읽혀야 한다.


'obtains: [man-being(인간으로-있음), righteous-being(정의롭게-있음)].'


표층 구조 문장들에서 나타나는 시제들에 관해서는(이것들에 대해서는 Sophist 262d2-3을 보라) 그것들은 단지 함수에 관련될 뿐이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이 정의로웠다'는 다음과 같이 문장전환되는 것이다:


'obtained : [man, righteous].'[각주:9]



[30쪽] 1.3. 플라톤에 있어서 Logos와 지식.[각주:10]


직전의 분석에서 플라톤에게 초월적 형상이 지식의 진정한 대상이더라도, 지식에 적합한 대상들인 것은 형상의 예화이다. 그래서 진정한 지식은 개별적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예화들(플라톤이 dynameis라고 부르는 것들)에 대한 식별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Republic VII 523e-524d와 VII 507b-c에서는 지식 개념이 상이한 dynameis에 정확하게 이름을 할당하는 일과 명시적으로 결부된다.


인지적 절차에 해당하는 기술은 플라톤에 의해 종종 '문답'으로 묘사되곤 한다. 이 문답은 정신으로 하여금 "yes, it's this" or "that"이라고 각 경우에 말함으로써 확정적 선택을 이루도록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Meno 81a-d와 Phaedo 72e-77e의 유명한 상기(anamnēsis)의 절차는 적절하게 문답하는 절차와 연결된다. 또한 Rep. VII 538d6-e3에서는 이 절차가 상당히 명시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러한 연결에 관한 가장 유명한 구절은 Theaetetus 189d7-e3, 영혼의 생각이 '네 또는 아니오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묻고 답하는 대화를 이어가는 것'으로 묘사되는 구절이다.[각주:11]


Anapherein이라는 동사가 플라톤에 의해 이와 관련된 절차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이 동사는 '일부 참여를 부합하는 초월적 형상으로 환원시킴'을 표현한다. 사실상, anapherein은 말하자면 '집으로 가져감'이고 [bring up, bring back 정도. 뭘 굳이 home까지-_-],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을 관찰된 사물이 참여하는 바[각주:12] 각각의 초월적 형상으로 돌려놓는 것이 된다. 사실, 진정한 인지 절차는 우리가 형상들의 내재적 예화들(dynameis)을 외부 세계에서 직면하는 어느 경우든 그 형상들을 인지하고 규정하려는 부단한 노력이며, 그로써, 매우 자연스럽게, 그와 같은 정도로 이러한 예화들(그리고 사례들 또는 개별 사물들)이 같은  초월적 형상들에 대한 참여자들로 인지되고 규정된다.


다른 한편, 플라톤은 자주 사물에 대한 지식을 관련된 사물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제공하는 인간의 능력과 결부시킨다. 예를 들어 Phaedo

73a9, 76b5-7를 보라. Symposion 202a5-9에서, 디오티마는 소크라테스에게 참된 의견은 그것이 지식도 아니고 무지도 아니기 때문에 설명을 제공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logos는 인지적 절차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앞선 언급의 연장선에서 logos 형식에 포함된 'being'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예를 들어


'obtains: [man-being, righteous-being].'


[31쪽] 나는 Greek 'be' 개념이 'hyparctic'이란 말로 가장 잘 규정된다고 생각한다(De Rijk 1986: 348). 이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substance'와 'subsistence'[ousia와 hypokeimenon?] 개념에 더욱 밀접하게 결부되는 '존재사' 지표에 내재된 모든 논쟁적 함축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다. 더욱이, '존재'는 매우 자주 '본질(essence)'에 대비되어 이해되는데, 본질 역시 플라톤적 사유에는 같은 정도로 이질적이다. Logos 형식은 적절하게 말하자면,[각주:13] being이 인간 정신에 의해 경험되는 것으로서(또는 각기 사변적으로 관찰되는 것으로서) '외부 세계에 시공간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경우, 외부세계에서 발견되는 몇몇 dynameis나 'being'의 양태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being의 시공간적 측면은, Charles Kahn(1973:331 이하)이 '진리사'라 부른 개념이 일부 인간의 인지적 활동이 있다는 함축을 이미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부차적인 것인 데에 반해, 우세한 것처럼 보인다.[각주:14]


'Obtains'라는 함수와 관련하여, 이것은 이중의 기능을 지닌다. 첫째로, 이 함수는 해당 logos를 통해 외부 세계의 dynameis로서 발생하기에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를 화자가 실제로 인식하고 규정한다는 것을 표현한다. 다른 한편 이 함수는 시-공간 개념의 담지자 역할을 한다: 'it obtained (or will obtain) here (or there)' 등.


[지식과 참인 믿음의 구분을 전자는 진술-형성 발화로, 후자는 긍정이나 부정 이전의 단순 명제 같은 것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닌가? 그런데 말과 생각은 각기 밖으로 또는 안으로 이루어지는 logos로 규정되고, logos는 onoma와 rhēma의 결합물로 이야기된다. 그리고 이러한 말이나 생각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doxa이며, 이러한 doxa에 감각이 개입된 것이 phantasia(인상?)이다. 즉, 긍정과 부정은 지식과 믿음의 구분에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1.4. 플라톤에 있어서 사태로서의 pragma.


의심할 여지 없이, 개별 화용론이 무엇을 다루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은 언어적 도구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리고 그것들이 무엇을 표현해 왔는가 하는 질문이다. 이런 이유로 플라톤은 Cratylus 383a에서 서론격의 질문을 던진다. 스토아학파가 이후 의미와 지시체(sēmainomenon과 tynchanon)라 부른 것들 사이의 구분에 앞서, 플라톤의 가장 오래된 대화편에서도, 소크라테스가 onoma에 의해 표시되는 대상들의 실제 본성을 확정하고자 여러 차례 시도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대상들은 pragmata나 onta('things there are')라 불리고 이 용어들은 가변적 세계에서 나타나는 '사물들'이나 정확히 그 실질적 본성들로 이해된 것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분 없이 사용된다. 후기 대화편에서도 플라톤은 외부세계의 사물에 대해 말하면서 실제로 이름을 사용할 때 지시하는 언어외적 대상의 정확한 본성을 파악하려는 지속적인 시도에 관여한다. 그의 생각에, 이 초-언어적-대상은 존재론적 하나, 궁극적으로 (PhaedoRepublic 이래로) 초월적 형상 그 자체이다. 의미론적 관점에서 이 초-언어적 대상은 이름의 함축 또는 내포('의미체')로, 그것이 사실상 제시된 이름이 정확하게 적용될 그 어떤 대상에든 관련된 일련의 개념들이다.


[32쪽] 의미가 초월적 형상(관련된 언어 표현에 의해 지시되는 것)과 동일시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상(또는 부합하는 내재적 형식이나 외부세계에서 출현하는 dynamis)이 인간 사유에 의해 그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각주:15] 


여기에서 pragma의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 질문이 생긴다. Sophist 257b-c에서 'pragma'는 외부세계 사물과 해당 표현의 의미체 모두를 구분 없이 의미하는 데에 사용된다. 또 다른 증거는 Protag., 349b3-4; Euthydemus 283e5-6; 284d1; Crat. 386a2; e1; 390e1; Phaedo 103b3; Theaet. 197e4; Soph. 218c4; 244d3; 257b9-c2이다.


'Ousia(being-ness)'에 대비되어, 'pragma'는 그와 유사한 상호 대비를 개별적인 돌에 대해 이야기되는 'being-stone'과 'being-stone' 사이에서 전달한다. 그래서 'pragma'는 무언가의 'being such-and such' (즉 this or that combination of dynameis)를 지적해내는 것처럼 보이고, 반면에 'being-ness(ousia)'는 일차적으로 사물의 being(또는 BEING에 대한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pragma'는 사유에 의해 지시되어 나온 것으로서 dynamis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해당 단어의 유사한 용례를 찾을 수 있다.


Logos와 pragma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플라톤의 진술-형성 발화에서 사실상 주요 구성요소('논증')인 logos는 언제나 특정 pragma를 표현한다.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pragma는 '사태'와 동등해진다. 그렇지만 그런('more-than-one-word-expression' 또는 '구성된 이름'으로서) logos는 다음과 같은 유형의 '사태 정식화'이다.


'being man plus being righteous,'


혹은 오히려 진술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되는 표현이다.


'man is righteous.'


차라리, 단지 'dynameis의 묶음' 또는 'being의 일련의 양태들'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Euthydemus의 유명한 예시)


'wanting-one's-darling-to-be-dead-and-gone'


(또는 'Ctesippus-wanting-Clinias-to-be-dead'). 다른 한편 단언된 logos란 [33쪽] 해당 logos를 통해 누군가가 지시된 사태를 실제로 확정하는 표현에 불과하다.[각주:16] 


이에 대한 일부 결정적 증거는 Euthydemus에서 발생하는 뜨거운 논쟁 중에 발견된다. 디오뉘소도로스는 소크라테스가 스테십포스의 연인 클리니아스가 현명한 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으로부터 그가 "그가 그 사람이 아닌 자로 되기를 그리고 더 이상 그인 자로는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따라서 "그가 죽어 없어지기를 바란다고" 악의적으로 추론한다(283c8 이하). 크테싶포스는 화를 내며 디오뉘소도로스에게 답한다. "나와 다른 사람을 그런 처지(toiouton pragma)로 몰아넣을 그 따위 생각은 어디서 얻은 거냐?"(283e5-6) "내가(우리가)-클리니아스가-죽기를-바란다"라는 "상황"을(또는 "클리니아스를-죽을-것이-나에-의해-기대되는-자로" 같은 logos를) pragma가 표현한다는 것은 충분히 분명하다.[각주:17]


동일선상에서 Theaetetus의 pragma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pragma가 "의견(doxa)"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지식"의 참된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유명한 "지식의 조각들"을 지시하는 것이 분명하다.[각주:18]



2. 진술-형성 표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론


2.1. Pragam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


진리치 담지자에 관한 연구에서 Gabriel Nuchelman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De interpr. 21b28에서 pragma가 16b23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니며, 즉 그것은 '사태(state of affairs)'라는 의미라고 보는 입장을 성공적으로 논증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른 저작들도 증거로 제시하는데, 그가 불분명하다거나 느슨하다고 여긴 pragma 용례에 대한 세부사항 몇 가지를 보완해 보고자 한다.


2.1.1. 몇 가지 문헌 근거들.


Categ. 5, 4a34-b13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logos와 doxa가 우연한 사건(예를 들어 '누군가 앉아 있다')에 관련될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동일하게 유지되는 반면, 그 진리치는 변화하는 pragma에 의존한다고 말한다(4a34-b2). "왜냐하면 pragma가 있거나 있지 않기 때문에(4b8-10) logos가 참이라 이야기되거나 거짓이라 이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pragma는 분명히 'x-being-so-and-so'를 표현한다.[각주:19] 반면 pragma의 변화는 변화하는 속성들(앉아-있음 또는 걷고-있음)으로 [34쪽]  구성되는데, 물론 그것은 전체 pragma 'x-being-so-and-so'의 변화에 부합하게 된다.


Categ. 10에서 대립의 상이한 방식들이 논의되는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긍정 또는 부정 기저에 놓인 것이 비록 긍정이나 부정 logos 자체는 아니더라도 logos가 대립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대립된다고 말한다. 더욱이 '그가 앉아 있다'라는 긍정문이 '그가 앉아 있지 않다'라는 부정문에 대립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중 한쪽의 기저에 놓인 pragma가 그 대응문의 기저에 놓인 것에 대립된다고, 'to-be-seated'가 'to-be-not-seated'에 대립된다고 말한다(12b10-6).[각주:20]


주목할 점은 두 가지이다. (1) pragma는 '긍정 또는 부정의 기저에 놓이는 것'이다. (2) 'pragma'라는 용어는 현실에 적용되든 그렇지 않든 어떤 사태를 의미하는 데에 사용되고, 그로써 그것이 실제로 단언되는 어느 경우든[각주:21] 실제로 그것이 참인지 혹은 거짓인지 여부는 문제가 되는 존재론적 상황에 달려 있다.


Categ. 11, 14a10-4에서도 이 노선을 따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에서 "만일 'Socrates-being-well(소크라테스가 건강하다)'가 'Socrates-being-sick(소크라테스가 아프다)'에 모순된다면, 그리고 그 둘 모두가 동시에 동일한 사람에게 견지되기란 불가능하다면, 그 모순쌍의 한쪽이 사실<the case>일 경우, 다른 한쪽도 마찬가지로 사실이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만일 소크라테스가 건강하다가 사실이라면, 소크라테스가 아프다가 사실이기는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Categ. 12, 14b9 이하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우선성'에 해당하는 특수한 사례를 논의거리로 가져온다. 그 사례는 'there being a man'에 속하는 상호 함축과 이에 부합하는 logos의 진리치에 관련된 것이다. 다음 인용문은 아리스토텔레스가 A와 B 사이에서의 완전한 상호교환이 언제나 성립하는 '자연적 우선성'의 사례를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대목이다.


14b9-22: "그래서 '우선'이란 이러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 그렇지만 이러한 언급된 방식들 외에 우선성의 또 다른 방식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물들 중에서, 한쪽의 being이 다른 쪽의 being을 함의하는 것이 있고, 한쪽이 어떤 식으로 다른 쪽 being의 원인인 것을 '자연적으로 우선한다'라고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례들이 있음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being-a-man(to gar einai anthrōpon)'은 그것에 관한 참인 logos와 being에 대한 함축으로서 교환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사람이라면, 그가 사람이라고 말하는 logos는 참이다. 그리고 교환적으로, 만일 그가 사람이라고 말하는 logos가 참이라면, 그는 사람으로 있다. 참인 logos는 pragma의 being에 대해 어떤 식으로도 원인이 아니지만, pragma는 어떤 식으론가 logos가 참임의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logos가 참이나 거짓이라 불리는 것은 해당 pragma가 being이거나 not-being이기 때문이다."


[35쪽] 아크릴은 그런 사례에 '상호적 존재 함축('tou einai akolouthēsis'에 대한 그의 번역)'을 논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there being a man의 존재가 there is a man이라는 참인 진술의 존재를 함축하고 또 그 존재에 의해 함축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op. cit., 112). 그의 말은 맞다. 그렇지만 그는 logos의 einai를 그것의 존재, 즉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실제로 단언되어 있음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처럼 보인다. 대신에, logos being(또는 being the case)은 단지 그 내용이 사실임을 나타낼 뿐이다.[각주:22]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einai에 대해 'being the case'라는 번역이 아크릴의 '존재'라는 번역보다 선호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Pragma'의 뜻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사태'를 표현하고 'the pragma's being'은 외부세계에서 실제로 사실인 사태를 나타내야만 한다.


De interpr. 3, 16b19-23에서 pragma는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녀야만 한다. 즉 dianoia(생각)에 의해 표시되는 사태여야 한다. 하지만 rhēma가 그 자체로 발하된 한에서 어떤 사태가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표시되지 않는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장한다. 설령 'to be' 동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더라도 einai나 mē einai조차 어느 쪽도 pragma의 표지는 아니기에 사태에 대한 어떠한 시사도 없다고 계속해서 주장한다. 예를 들어 'be-running'을 말하는 경우. 사실, 'on(being)'을 독립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아무것도 단언하지 않는다. 거기에 무언가를 추가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being)-stone, (being)-man 또는 tree-beautiful.[각주:23]


De interpr. 12, 21b19-32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사 'to be'(또는 'not to be')를 <해당 표현의 다른 요소들에> 추가함으로써 언제나 긍정(또는 부정)이 산출되는 것은 아니라고, 즉 양상문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양상문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to be' 동사가 아니라 바로 그 양식에 부정을 추가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결론은 "'being-a-man'이나 'being-a-pale-man' 같은 단언 형식들의 앞선 사례들에서 'to be'와 'not to be'가 추가되는 반면, 'pale'과 'man'은 hypokeimena pragmata(기저에 놓이는 사태들)인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여기 양상 형식에서 'to be'는 기체인 반면, 'to be possible'과 'to be admissible'은 추가되는 것들이다. 양상 사례에서[각주:24] <기체 역할을 하는 'to be'가> being-possible(가능한 것)과 being-not-possible(가능하지 않은 것)로 구분되는데, 이는 단언 사례에서 'to be'와 'not to be'가 기저에 놓이는 pragmata를 being the case(사실인 것)와 being not the case(사실 아닌 것)로 구분하는 것(21b26-32)과[각주:25] 같은 방식이다. 명백하게 'ta hypokeimena pragmata'는 21b28에서 사태를, 'to be a man'과 'to-be-a-pale-man' 각각을 가리킨다.[각주:26]


Metaph. Th.10, 1051b2-62, '참과 거짓이라는 의미에서 being'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에서 유사한 pragma 용례가 등장한다. "이런 종류의 being은 [36쪽] pragmata가 관련되는 한에서 결합됨 혹은 분리됨에 의존하기에, 그래서 분리된 것은 분리된 것으로 또 결합된 것을 결합된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누구든 진리를 취하고, 반면 그의 생각이 pragmata에 모순되는 자는 누구든 잘못을 범한다."(1051b2-5) 1051b6-9에서 추가설명이 이루어진다. "당신이 하얗게 있는 것은 우리가 당신이 하얗게 있다고 참되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하얗게 있다는, 이를 말하는 우리가 참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시, pragma는 특정 사태('your being pale')를 표현한다. 그렇지만, 앞서 외부 세계에서 발생하는 사태를, 이해되거나 생각되는 사태와는 대비되는 것으로서 의미하는 데에 사용된 pragma는 다르다. 'being combined(결합)' 또는 분리는 외부 세계의 특성으로 간주되고 정신적인 결합이나 분리 행위를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 뒤따르는 바에 따라 분명하다(1051b9-17).


Metaph. K11, 1067b18은, Metaph.가 pragma나 hypokeimenon pragma 보다는 hypokeimenon을 논한다 하더라도, 위에서 다룬 Categ. 12b15와 De interpr. 21b19에 부합할지 모른다. Hypokeimenon은 여기에서 to kataphasei dēloumenon, '긍정적(적극적) 용어로 표현되는 것'으로 정의되고, 무규정적 명사(indefinite noun, De interpr. 2, 16a30-2)로 표현되는 것에 대비된다는 것을 시사하기는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Metaph.에서 사태로 이해되는 것에 관하여 pragm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꺼리는 것처럼 보이긴 한다.



2.1.2. Pragma의 상이한 의미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작들에서 pragma를 상이한 의미로 논한다. Pragma가 Prattein('to achieve,' 'to act') 그리고 praxis ('doing,' 'action')과 의미 영역을 공유하는 것으로서 'deed' 의미로 Ethics에서(예를 들어 II3, 1105b5; IV6, 1126b12) 꽤나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정신 활동과 그 활동이 관련된 대상 사이의 구분이 있는 여러 경우에 pragma가 사용된다. Pragma는 그것을 지시하는 이름과 대비된다. Soph. El. 1, 165a6: auta ta pragmata: "사물들 그 자체, 우리가 이것들을 지시하는 언어적 수단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사물들의 영역이 단어(이름)의 영역에 대비되는 같은 책 16, 175a8을 참조하라. 또한 19, 177a31과 22, 178a26도 참조. Top. I18, 108a21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syllogism이 단어에 의해 지시되는 사물에 관련되어야지, 단지 사용된 용어에만 관련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De generat. I8, 325a17-8에서는 이론적 관점(logoi)이 그것이 상관하는 사물(pragma)에 대비된다. Physics III 8, 208a15-6에서 pragma는 De interpr. 1, 16a7-8에서도 등장하는 생각(noēsis)과 대비된다. [37쪽]  Top. VI7, 146a3-13에서 pragma는 정의 형식의 내용으로 정의되어야 하는 사물로서 to kata ton logon(말에 따른 것, 말에 대한 것)에 대비된다.


마지막 항목에서 pragma가 단순히 외부 세계의 사물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심이 그리로 정향된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Poetics 14, 1453b2-5와 1454a13-4에서 ta pragmata가 단순히 외부세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아니라 연극에서 이야기된 것으로서의 사건들, 'plot'인 그런 유사한 용법도 등장한다.


그렇지만, 정신적 활동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pragma의 의미들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Physics VIII 8, 263a17-8이 pragma가 alētheia(참)과 병치된 곳으로서 인용될 수 있다. 'pros to pragma kai tēn alētheian' = '실제 사태의 관점에서,' 즉 운동이 사실상 어떻게 발생하는지. Metaph. A3, 984a18에서 auto to pragma는 '현실 그 자체'를 의미하고 그 용법은 De anima III8, 432a4에서 일치하는 표현이 등장한다. pragma authen = 'nothing real.' Nicomachean Ethics IX 10, 1171a13-4에서는 epi tōn pragmatōn = '사물들의 측면에서' = '실제로(in practice)'가 이 용법에 근접하다.


앞서와 다른 의미는 Politics III 9, 1280a17-9와 IV 15, 1299b18, 사물(pragmata)이 개인에 대비되는 곳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종류의 대비로서 사물의 속성이나 부수적 속성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사물을 pragma로 표현하는 구절도 많다. Topics I 5, 102a19와 I 8, 103b8; Soph. El. 24, 179a28; Physics IV 14, 223b25; V 3, 226b30과 V4, 227b28; Meteor. IV1, 379a32-b1. 이 용법은 Rhetorics (I1, 1354a15-23; 1354b17; 1355a2와 19; III4, 1415b6): ta exō tou pragmatos = ''논점 외'에서 발견되는 형식과 비교될 수 있다.


형식적으로 생각으로부터 구분되는 pragma 용법은 pragma가 비록 여전히 정신적 영역의 일부일지라도 Metaph. L, pragma를 '지식'과 생각의 내적 대상 각각으로 다루는 구절에서 발견된다. "일부 경우 지식은 대상이다(to pragma); ...... 이론적 학문에서 정의와 앎이 바로 그 대상이다(to pragma);" L9, 1074b38-1075a3.


사태로 이해되는 Pragma는 Anal.Pr. II 27, 70a32, pragma가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은 좋다'라는 주장을 표현하는 곳에서 등장한다. 유사한 인식적 의미의 pragmata는 De interpr. 7, 17a38, pragmata가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구분되는 경우에서 등장한다.


[38쪽] 끝으로 Metaph.는 두 가지 유용한 전거를 제공한다. 해당 책 Delta에서 그는 pseudos('falsehood')에 관한 장을 구성하고 E 마지막 장은 '참으로서의 being과 거짓으로서의 not-being'을 다룬다. 이 두 장에서 pragma 개념은 핵심적 역할을 한다.


Metaph. D29에서 거짓의 상이한 의미들이 논의된다. Christopher Kirwan(1971:78)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사태를 지지하는 진술과 믿음을 간과하기에' 그에 의해 제시되는 분류가 놀랍다고 불평한다. Ross도 "거짓 대상이나 거짓 사실 같은 그런 사물은 분명 전혀 없다"라는 점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듯하다(344). 반면, 그는 꿈의 사례와 관련하여 곤란을 겪는데, 그는 그것이 정신 상태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놀라거나 불편해할 필요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1) hōs pramga pseudos(사물로 취급되는 거짓)이라 불리는 거짓을 (2) logos pseudēs(거짓 설명)이라 불리는 거짓과 구분되는 것으로 다룬다. (1)은 정확하게 (거짓) 사태와 관련되고 다시 하위분류 (1.1) 대각선의 통약가능함(아리스토텔레스가 '항상 거짓인 것'으로 언급하는) 또는 너의 앉아 있음(때때로 거짓인 것)과 (1.2) 약도(skiagraphia, 부정확함으로 인해 부정확하다는 의미에서 거짓)이나 꿈(어떤 것들로서 있기는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들이 연상시키는 바로 그것으로서 있지는 않은 것; 1024b23-4)으로 분할된다.


Hōs pramga pseudos 형식에서 pragma는 현실과의 관련(거짓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내에서 정신활동의 내용으로 간주되는 '사태'를 표현한다. 그래서 b25에서 pragma는 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러나 '실제 사물'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물[사태]은 그 not being <the case>(사실 아님)으로부터 그 자체 거짓이라고 불리거나 그로부터 귀결된 연상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로부터 거짓이라고 불린다." (1024b24-6). 'not being <the case> 설명(또는 사유)'은 설명이나 사유가 obtain(실현)하지 못함을 말하는 통상적인 형식임을 유념해야 한다.[각주:27]


Metaph. D29, '거짓 설명'이 논의되는 곳에서, 논의되는 것은 거짓 진술('S is P' 형식의)이 아니라 '거짓 기술'이다.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짓을 누군가에 의해 어떤 것에 잘못 부여된 사태(묘사라는 의미에서)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39쪽] Metaph. E4는 '실제 사물'이란 다른 의미로 pragma를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거짓과 참은 pragmata 안에 있지 않고(예를 들어 좋은 pragma는 참으로 있고 나쁜 pragma는 그 자체로 거짓), 사유(dianoia) 안에 있다" (1027b25-7). 그렇지만 그 대비는 실제로 결합과 분리로 구성되는 사유활동으로서 dianoia와 사유-내용(pragma)에 관련된다. 이 사유-내용은 결합과 분리 같은 활동을 통해 단언되거나 부정된다는 그 일과는 구분된다. 그래서 참과 거짓이 사유-내용 안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맞는 말이다. 사유-내용은 단언이나 부정에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사유에서 긍정이나 부정에 진리치가 의존하지 사유 내용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


Nuchelmans가 pragma란 단어의 불분명함에 대해 말한 것이 완전히 다 맞지는 않다. Pragma는 일관되게 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외부 세계에서 실제로 발생한 것이든, 생각된 것이든 상관없이. 발생한 경우, eu prattein과 kakōs prattein, 잘 한 일이나 못한 일 그 자체를 지시한다. 후자의 경우, 지각되거나 의미된 대로의 사물을 가리킨다. 존재적 용법(being-so-and-so 또는 x-being-so-and-so)과 인식적 용법('(x) conceived-of-as-being-so-and-so)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관련한 세부사항은 De Rijk (1986: 171)을 참조하라. Pragma의 이러한 이중 함축은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우세해지는 경우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문맥을 통해 정확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2.2. 아리스토텔레스에서 Logos와 일부 관련 개념


플라톤의 logos와 매우 유사하게, 아리스토텔레스적 logos도 오늘날 '진술'과 똑같지는 않고 '설명'이나 '합성된 기술적 표현'(또는 정의항)에 가까우며, 진술의 서술적 부분으로 사용된다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Metaph. D29, 1024b26-39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짓 설명(logos pseudēs)'에 관해 말하는 바에서 [40쪽] '거짓'은 'not-applying'과 동의어이고, alēthes는 'applying'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된다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De interpr. 4,16b26-8에서 잘 알려진 logos에 대한 정의에서 번역어 '설명'이나 '합성된 표현'은 '문장'이나 '진술'이 더 적절해 보이는 곳에서도 잘 작동한다. 그래서 logos=설명 공식은 16a22(kalos hippos 구), 16bl, 19a28, 19b19, 21b24 (17a11과 21a29에서 logos가 정의항이기에)뿐만 아니라 19a33에서도 성립한다: "참인 설명은 그 설명의 pragmata(즉 그 설명이 의미하는 사태)가 참인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참이다." 예를 들어 '내일 해전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것은 내일 실제로 발생하는 해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해당 pragma가 '내일 해전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표현에 의해 표현된 것으로 이해되는 사태이다.


이러한 연결은 to kathēsthai tina(누군가가 앉아 있다는 것)라는 부정사 구문이 logos라고 불리는 곳을 지시하게 될 것이다. Pragma와의 유일한 차이는 logos가 언어적 표현을 의미하는 반면 pragma는 그 내용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Kataphasis가 때때로 긍정적 logos에 대한 서술적 표현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라는 점은 '합성된 표현'으로서의 logos와 궤를 같이 한다. 아크릴은 De interpr. 12,21b3-5에서 '긍정'과 '부정'이 진술이 아니라 서술적 표현이라고 옳게 언급하였다. 다른 한편, 진술은(S=P 형식이 아니더라도) 그 안에 참이나 거짓이 들어있는 logos로 정의되는 바, apophantikos(선언적, 언명적) logos라는 용어로 표현된다(17a2-3). 그리고 이는 명백히 참도 거짓도 아닌 logos로서 기원에 대비된다. 따라서 그런 logos는 아직 진리치를 포함하지 못하며 참이나 거짓이 될 자격을 가져오는 것은 apophantikos 요소이다. 참이나 거짓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추가되어야 하는데, to einai 또는 이를 포함하는 또 다른 동사가 추가되어야 한다. 16b28-30, 21b5-10과 함께.



2.2.1.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명명과 단언


이상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명명과 단언에 관하여 몇 마디를 하도록 이끈다. 용어의 선명성을 위해 관련 용어들을 일람할 필요가 있다. Nuchelmans(1973:23-32와 색인) 참고. 


I - Logos: '합성된 표현'

    '한-단어-이상의-명칭'


[41쪽] II - pragma: 'logos(또는 이름)의 내용' = 합성된 표현에 의해 표현되는 '사태.' 존재적이거나('외부세계 내의 사태') 인식적('이해된 사태'), 또는 그 결합이다.


III - Apophainesthai: '알려지도록 만드는 것,' '무언가가 사실이라고 단언하는 것.' Categ. 7, 8b22; De interp. 5, 17al9; a27; b2-9; 11, 20b29. apophainesthai ti peri tinos에 대해서는 Bonitz, Index Arist. 88, a36-41을 보라.


   - apophansis: '무언가에 대해 무언가(pragma)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단언(선언).' De interp. 6, 17a20-26; 7, 17b5.


   - 모순의 부분(즉 kataphasis 긍정이든, apophasis 부정이든)을 포함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취급되는 경우. Anal. Post. 12, 72a11.


     apophansis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kataphasis (이하에서 kataphasis(2);) = apophansis tinos kata tinos (무언가에 대해 무언가를 긍정하는 발화)

     2. apophasis (이하에서 apophasis(2);) = apophansis tinos apo tinos (무언가에 대해 무언가를 부정하는 발화). De interp. 6, 17a25-6.


Apophansis의 정의(17a23-4: 무언가(pragma)가 성립하는지 성립하지 않는지에 관한 의미를 가진 발화된 음성구조(phōnē))를 고려하면, '무언가에 대해 무언가를'이라는 형식은 성립과 비 성립이란 용어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 Apophantikos: logos apophantikos = '진술-형성 합성 표현,' '참이나 거짓이 그 안에 들어 있는 logos'로 정의된다(De interpr. 4, 17a2-3).


     logos apophantikos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1. logos kataphatikos = '긍정 진술' = kataphasis(2)

     2. logos apophatikos = '부정 진술' = apophasis(2)

     De interpr. 4, 17a8-9


IV - Phanai = - '생각을 행함,' '의견을 가짐.' 단순히 '생각,' '파악'을 표현하는 noein에 대비되어.

                - '말함.'


[42쪽]        phanai는 이중의 의미로 나타난다.

                phanai(1): 'to have in one's thought,' 'to have before one's mind.'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단언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래서 Metaph. Th.10, 1051b24에서 참은 thigein kai phanai, 생각으로 접촉하고 파악함으로 정의된다.

                phanai(2):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함' ( = kataphanai). De interpr. 9, 18a36과 여러 곳; 12, 21b20

                phanai(2)는 자연스럽게 apophanai에 대비된다, 긍정함이 부정함에 대비되듯. 그래서 De interpr. 9, 18b2; 12, 21b20; 22b12; Anal.Post. I 4, 73b23; I11, 77a10과 여러 곳; Soph.El. 11, 171b3과 여러 곳.


이중적 phanai는 이중적 phasis와 함께 간다.


phasis:

phasis(1): '표현' (한 단어 표현이든 여러 단어로 된 표현이든.) De interpr. 4, 16b27; 5, 17a17; 12, 21b19 (tas antikeimenas phaseis = '대립되는 표현들'). Metaph. Th.10, 1051b24-5에서 phasis는 'mental expression', 'grasp'를 의미한다.

phasis(2): '단언.' 느슨하게 취급하여 '분명한 찬성이나 반대('yes'나 'no'에 개입되지 않는 단순한 생각 dianoia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Eth. Nic. VI9, 1142b13 영혼의 '내적 대화'라는 플라톤의 묘사. Theaet. 189e4-190a6 그리고 Sophist 263e3; Nuchelmans (1973: 19, 24); De Rijk (1986: 295-6; 338-9) 참조.


두 가지 phasis 모두 kataphasis와 apophasis로 하위분할된다.


kataphasis(1): '무언가에 대해 무언가를 긍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술어 표현'

apophasis(1): '무언가에 대해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술어 표현' Categ.10, 12b15; De interpr. 10, 19b7; 12, 21b3-5; Physics V1,

225a6; Metaph. K11, 1067b18;

kataphasis(2): logos kataphatikos.

apophasis(2): logos apophatikos.


Phasis와 apophasis는 함께 antiphasis(모순)을 구성한다. 모순은 '상호 반대되는 긍정 plus 부정'으로 정의된다. De interpr. 6, 17a33-4.

De interpr. 9, 18b37; 11, 21a22과 38 이하.; 14, 23b24-32; 24b7; 그리고 다른 곳; Anal. Post.I2, 72a12; Metaph.I7, 1057a34; 그리고 다른 곳.


[43쪽] Phanai처럼 phasis라는 용어도 '찬성(반대에 대비되는 것으로)'을 의미하는 데에 사용될 수 있다.


이 용어들이 명명 차원에 속하는지 아니면 진술 차원에 속하는지 여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A) 명명 차원

 - logos: '합성 표현'

 - pragma: 합성(혹은 단일 단어) 표현의 내용'

 - phasis(1): '표현' ('긍정 표현')

 - kataphasis(1): 긍정적으로 사용된 표현

 - apophasis(1): 부정적으로 사용된 표현


B) 진술 차원

 - apophansis

 - logos apophantikos - logos kataphatikos

                             - logos apophatikos

- phasis(2) - kataphasis(2)

               - apophasis(2)



2.2.2.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명제적 구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발견되는 명제적 구조를 규정하기 위해 Mohan Matthen(1983: 125-31)은 '술어적 복합체(predicative complex)'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는 이를 보편자를 개별자가 예화할 경우 그 보편자와 개별자로부터 구성된 하나의 대상이라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Metaphysics Z12에서 제안한 것과 같다. 서술적 복합체는 pragma인 듯하고 그는 이를 '개별자와 술어'로 구성되도록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문장은 서술적 복합체에 단항적 'being'이나 'not-being'을 부여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런데 서술적 복합체는 개별자와 술어를 분리시키는 계사('is')를 포함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다른 한편 이 복합체를 '술어적'이라 부르는 것은 복합체 외부에 그 대응자로서 어떤 주어가 있을 것임을 시사하고, 반면 그는 단항 함수로서 'being'과 'not-being'을 말한다. [44쪽]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logos, pragma를 포함하는 logos는 단언가능한 혹은 진술가능한 복합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진술가능 복합체(개별자 plus 속성을 포함하고 그 둘 모두에 대해 공의적 being을 포함하는)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단항 함수 'being'이나 'not-being'에 의해 '진술'될 수도 있다. 


Logos도 phasis(kata-, apo-)도 단언하거나 부정하는 발화 행위에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Metaphysics E 마지막 장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를 논하기 위해 먼저 핵심 개념 몇 가지를 살펴 본다.



2.3. logos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론에 포함된 일부 핵심 개념들


Metaphysics E4 참으로서 'what-is'와 거짓으로서 'what-is-not'에 관한 논의에서 결합, 분할, 그리고 pragma 개념이 중요하다. pragmata는 거기에서 dianoia에 대비되고 참과 거짓은 전자가 아닌 후자 안에 있다고 이야기된다. 그런 이유로 dianoia, synthesis(결합), dihairesis(분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이는 결합과 분리라는 활동, 즉 모아 생각하는 것과 따로 생각하는 것이라는 짝의 기저에 놓인 사유 과정에 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 



2.3.1. dianoia와 pragma


dianoia는 일반적으로 참되게 생각하는 능력이나 활동을 가리키는 데에 사용되고, 식별(분간)을 함축한다. 따라서 dianoia는 개념들의 결합과 분리를 다루는 문맥에서 등장한다. Metaphysics E4, K8에서 참으로서의 'what-is'가 사유를 통해 성취되는 결합에 의존한다고 이야기된다. NE V12는 이러한 dianoia 단어 용례를 제공한다. 해당 문맥에서 사유에서의 긍정과 부정은 욕구에서의 추구와 기피에 대응되고, [45쪽] 긍정과 추구 모두 'yes'에 대한 의도적 선택으로, 부정과 기피 모두 'no'에 대한 선택으로 간주된다.


Metaphysics에서 pragmata가 dianoia에 대비될 때, 후자를 단순히 생각 속에 떠올리는 것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긍정과 부정의 과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생각으로 간주하였다. 단순 파악의 경우 참은 생각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데 이 경우 참은 아무런 긍정이나 부정도 없는 단순한 접촉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긍정이나 부정의 사유과정에 대비되는 것으로서 사유 내용으로 pragmata를 이해하는 것이 곧장 외부세계 대상을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보다 적절하다.



2.3.2. Alēthes(참)와 Pseudos(거짓).


결합과 분할을 다루기에 앞서 참과 거짓을 논해야 하는데, 결합-분할이 참과 거짓이 있는 형식적 원인들로서 규정되기 때문이다(Metaph.

E4, 1027b18-22; Th.10).


Th.10, 1051b2-5: "이것[참으로서 'what is'와 거짓으로서 'what-is-not']은 사물의 측면에(epi tōn pragmatōn), 그 사물들의 결합되어 있음(synkeisthai) 혹은 분리되어 있음(dihēirēsthai)에 의존해서 분리된 것을 분리되었다고 생각하고 결합된 것을 결합되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참을 가지고, 반면 사물의 상태와 반대 상태의 생각을 가진 자는 오류에 빠진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being을 그 구성 요소들의 실제 결합으로 정의하고 그 not-being을 특정 요소들의 실제 분리되어 있음으로 정의하며, 다음으로 참되게 말하거나 거짓되게 말하는 것을 말과 외부 대상(ta pragmata) 사이의 부합으로 정의한다.


[46쪽] 그렇지만 다음 구절에서는 대상의 being에 한정하여 참이 '사실임(being the case)'을 표현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듯한 반면, 사실임을 단언(혹은 부정)하는 것은 고찰하지 않는 듯하다.


Th.10, 1051b32-5: "참으로서 'what is'와 거짓으로서 'what-is-not'은 한 경우[즉 단언과 부정의 경우]에서 만일 <logos로 지시되는 요소들의> 결합이 있다면 참이 있고 만일 그런 결합이 있지 않다면 거짓[='사실이 아님']이 있다."


내가 보기에 첫 번째 인용문은 참이 된다는 것을 통합된 한에서 참인 것이 진정으로 참인 것이라 취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또는 통합되지 않은 채로 거짓으로서 있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 있지 않은 것으로 취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만드는 듯하다. 오류에 빠지는 경우는 이것들과 다른 경로를 통한 것이다. 참은 종종 거짓으로서 있지 않은 것을 거짓으로서 있지 않은 것이라 부름으로써 참이 되고, 그런 경우 참으로서 있는 것 일부에 관련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부 거짓으로서 있지 않은 것에 관련한다. 


이러한 해석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언이나 부정 상황에서) 만일 <합성된 이름(logos)에 의해 지시되는> 요소들이 통합된다면 참(또는 '사실임')이 있고, 만일 그 요소들이 통합되지 않는다면 거짓(혹은 '사실이 아님')이 있다고 주장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참이 되는(참되게 말하는) 절차 혹은 거짓이 되는(거짓되게 말하는) 절차를 동일한 logos를 다루는 상반되는 두 가지 방식들로 보는 관점, 그리하여 단언(혹은 부정)이 관련된 동일한 logos를 향한 찬성(혹은 반대)이 되도록 하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obtains [man plus sickness]'


그리고


'does not obtain [man plus sickness],


이 둘 각각이 사례가 된다, [man plus sickness]라는 logos가 pragma(사태), 'that-the-man-is-sick'을 표현하는 경우에. 이는 pragma(또한 그 언어적 장치로서 logos)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따라서, 항상 결합의 결과일 뿐 결코 분할의 결과이지는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Alēthes와 Pseudos에 대해 추가할 언급들로, 첫째, to alēthes(to pseudos)와 to on hōs alēthes(to mē on hōs pseudos)를 구분해야 한다. 후자는 '관련된 pragma가 사실임' 또는 '사실이 아님'을 가리키고, 반면 [47쪽] alēthes(pseudos) 그 자체는 두 종류의 단언(legein)으로 정의된다(Metaph. G7,1011a26-8):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또는 있지 않은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반면 있는 것을 있다고, 있지 않은 것을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 이는 다음과 비교된다. Anal.Pr. I, 46, 52a32: "'그것은 참이다'라는 표현은 '그것이다'와 매우 근접하다." 다음과도 비교된다. Metaph. Th.l0,1051b22-3; "참이 동일하지 않기에 ...., 그래서 being 또한 동일하지 않다." Rhet. I 7, 1364b8-9에서 참은 pragmata와 병렬되며 참이 '참인 사태'라는 의미를 갖도록 한다. Methaph. D7, 1017a31-3: "'To be'와 'is'는 <관련된 pragma가>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not to be'는 참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단언이나 부정의 경우에서 같은 정도로 그러하다." De anima III8, 432all-2에서 참과 거짓은 개념들의 결합(symplokē) 또는 그런 결합과의 관련으로 불린다(De anima III 6, 430a27-8; De interpr. I, 16a12-3). 이로부터 참과 거짓은 사태(pragma)에 대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또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노선에서 to on hōs alēthes(being qua true)와 to mē on hōs pseudos(not-being qua false)는 각기 특수한 종류의 being 그리고 not-being을 기술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들은 Metaphysics (E2, 1026a35; 4, 1027b18; 0-10, 1051b1이하.; K8, 1065a21-3; 11, 1067b25; N2, 1089a28)에서, 참인 사태 그리고 거짓인 사태를 표현하는 곳에서 사용된다. 



2.3.3. Synthesis와 Dihairesis 그리고 einai(mē einai)의 역할 


앞선 해석에 따라 synthesis가 logos('결합된 이름,' 'sick man' 같은 것)를 구성하는 이름들에 의해 지시되는 요소들의 결합과 관련되리라 기대할 것이다. 결합은 logos가 성립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Logos가 단순하고 분리된 이름들에 대비되기에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 '결합'이나 '연결'은 이중적 본성을 보여준다. 첫째로 synthesis는 (논리-문법 관점에서) logos 내에서 '연결된' 이름들을 가리키고, 또한 (존재론적 관점에서) 외부세계 내 사실로서 해당 지시체들의 통합을 지시하기도 한다. 논리적 synthesis는 명명 차원에서 성취되는 결합이거나 진술 차원에서 성취되어서 명명 차원에서 성취된 것에 대한 단언(찬성)과 같은 것일 터이다.


[48쪽] Synthesis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에서 두 용례를 가진다. (1) 존재론적으로 물리적 사물에 대해 이야기되는 '결합 구조' 또는 '구성.' (2) 둘 이상의 개념들(noēmata)을 통합시키는 논리적 연산자. 후자의 의미는 0을 통해 표시하기로 한다. 이제 synthesis(0)는 특수한 두 가지 논리적 의미로서 명명 차원에서 성취되는 통합(또는 통합시키는 행위)를 의미하는 synthesis(1)과 간접적으로 외부세계의 일부로서 있는 사태에 대한 단언을 의미하는 synthesis(2) 사이에서 중립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synthesis 용례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존재론적 용법:

synthesis: '함께 어울림' 혹은 '구조를 구성함'(결합)

논리-문법적 용법:

synthesis(0): 둘 이상의 개념들을 통합시키는 정신 활동

synthesis(1): 둘 이상의 개념들을 통합시킴(통합), 명명 차원에서 logos를 만들어 냄.

synthesis(2): 진술 차원에서 logos(pragma)에 대한 단언.


Synthesis(2)는 synthesis(1)에 대한 단언(긍정)이다. 반면 dihaeresis는 synthesis(1)에 대한 부정이다.


Synthesis의 대응짝인 dihairesis는 정신활동으로서 '파편화된 구조'나 '비일관된 대상' 등의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논리-문법적 용법('분리,' '부정')은 진술 차원으로 엄격하게 제한되기에 synthesis(2)의 대응물로 작용하고, 따라서 간접적으로는 관련된 logos에 의해 지시되는 결합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진정한 단언이나 부정이 있기 위한 근간이자, 따라서 거짓과 참의 근간인 Synthesis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여러 차례 논의된다.


De intetpr. I, 16a12-8: "거짓과 참은 결합과 분리에 관련된다. 그래서 이름과 rhemata 그 자체(예를 들어 'man'이나 'pale'에 아무것도 덧붙지 않은 경우)는 통합함도 분리함도 없이 <형성되어> 있는 생각들과 같다. 왜냐하면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기 때문이다. <....> 'be' 또는 'not be'가 추가되지 않는 한, 단적으로든 혹은 시간 지시를 동반하든." [Categ. 4, 2a4-10 참조]


[49쪽] 아리스토텔레스는 synthesis(1)과 (2)를 포함하는 (0)에 대해 말하고, 반면 dihairesis는 관련된 logos로 지시되는 pragma의 부정을 표현한다. 또한 참과 거짓의 성립 조건으로서 추가가  동사 einai(mē einai)에 관련된다는 주장이 중요하다. 이 동사는 logos를 logos apophantikos로 만드는 함수로 사용되는 경우의 것을 말한다.


Einai의 이러한 기능은 Metaph. D7, 1017a31이하에서도 논의된다.


: "다시, 'be'와 'is'는 <일부 pragma가> 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반면 'not be'는 그것이 참이 아니라 거짓임을, <그리고> 단언과 부정의 경우에서 같은 정도로 <그렇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is: Scorates-being-artistic' <의미한다> 이것이 참이다['사실이다'] 또는 'is: Socrates-being-no-pale' <의미한다> <이것이> 참이라는 것, 반면 'is not: the-diagonal-commensurable' <의미한다> <이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는 apophasis가 onoma와 미규정 rhēma로 구성된 부정적 logos('Socrates-being-not-pale 같은)가 아니라, 'is not'(ouk estin)이란 부정 함수로 수행된 부정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be' 함수 관련 정보는 De anima III 6에서 단언과 부정이 기술되는 곳에서도 수집된다.


: 참과 거짓이 적용되는 곳에는 이미 <지시체들을 포함하는> 개념들에 대한 그 함께 속하여 있는 것으로서의 모종의 통합(synthesis)이 있다.

  <생략>


이 synthesis는 synthesis(1)에 해당한다. 


430b1-4: "거짓은 언제나 synthesis를 포함한다. 왜냐하면 [50쪽] 'is not: the pale being pale'의 경우에서조차, pale과 not-pale의 synthesis를 구성하였기에.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을 dihairesis로 부르는 일도 가능하다."


430b4-6: "그건 그렇지만, Cleon is pale을 단언하는 참이나 거짓만이 가능한 게 아니라 he was 또는 he will be <pale>이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각각의 모든 경우, 통합하는 것은 정신(nous)이다."



2.4. Metaph. E4. 재해석.


부수적으로 있는 것(kata symbebēkos on)을 다루는 논의에 이어서 참과 거짓이 아니라 참이란 의미에서의 being과 거짓이란 의미에서의 not-being 논의가 진행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종류의 being(not-being)이 synthesis 그리고 dihairesis와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synthesis(2)(synthesis(1)에 대한 긍정)와 그 대응물로 dihairesis(synthesis(1)의 부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다음으로 참으로서의 being과 거짓으로서의 not-being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밝혀진다.


Metaph. E4, 1027b18-23: "참으로서 있는 것과 거짓으로서 있지 않은 것은 결합과 분리에 의존하고(para synthesin esti kai dihairesin), 둘 모두 모순의 부분들의 배열과 관련된다. 참은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의 경우에 긍정의 영역을 포괄하고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의 경우 부정의 영역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반면 거짓은 이 배열에 반대와 관련된다."


단언과 부정이 logos에, 그 부분들이 통합을 구성하는 그 logos에 관련하지 단순한 용어들의 나열에 관련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밝혀진다:


Ibid. 1027b23-5: "'함께 생각함'과 '나누어 생각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함께'와 '나누어'를 통해 나는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개념들의> 단지 연쇄가 있는 게 아니라 모종의 하나인 것[=pragma]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51쪽] 그는 참과 거짓(여기에서 다뤄지는 종류의 being 아래에서)이 결합과 분리 활동에 관련된다는 사실이, 관련된 logos의 내용들인 pragmata에 의존한다는 것을 함의하지 않음을 설명한다. 물론 거짓과 참은 결합과 분리라는 활동에 의존하지만, 그 내용, pragmata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 파악(dianoetical thought에 대비하여)에 관한 한, 이는 dianoia와 무관하며, pragmata에 개입하지 않는다. 하지만 단순 파악은 이후 다음과 같이 다루어진다.


Ibid., 1027b25-9: "거짓과 참은 사유-내용(pragmata) 안에(마치 좋음이 참이고 나쁨이 그 자체로 거짓인 것처럼) 있지 않다 - 오히려 discursive thought 안에 있다. <생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적으로 'being qua truth'(그리고 'not-being qua falsehood')인 'being'이 'being-in-the-main-sense'에 대한 지금의 논의에서 빠지는 것처럼 논한다. 이제 being qua truth의 특징적인 본성이 설명된다.


Ibid., 1027b29-1028a1: "엮임과 분리는 discursive thought 안에 있고 사유-내용에 들어 있지는 않으며, 이런 의미에서의 있는 것은 근본적 의미에서의 'thing-that-is'와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가 실체적 being이나 질적 being 또는 양적 being이나 다른 어떤 것을 결합하거나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 우연적 being과 참인 한에서의 being은 제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후자의 원인은 특정한 측면에서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Kirwan(1971: 198)이 De interpr. 1, 16a9-18이 여기에 부합한다고 언급한 것은 맞다. 그는 De interpr. 1, 16a9-18가 참인 사유와 거짓인 사유에 대해('that-Callias-is-pale'이라는 생각) 논하는 반면, E4는 결합되거나 분리되는 사유가 아니라 그러한 사물(Callias와 pallor)를 논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는 잘못된 것인데, 동일한 logos가(Callias-being-pale) 단언이나 부정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52쪽] Kirwan(199)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혼동을 지적한다. 첫째로, (1) '창백한 칼리아스에 대한 사유'와 (2) '칼리아스가 창백하게 있다라고 하는 사유' 사이의 혼동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 둘 사이의 구분은 필요하지 않고 그 둘은 같은데, 단언이든 부정이든 결합이나 분리의 요소인 각 용어에 관련되는 게 아니라 동일한 logos('Callias-being-aple' = 'pale Callias'), 분할되기 보다는 단언되거나 아니면 거부되는 그 logos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53쪽] 3. Epilogue.


1. 플라톤


1.1. logos는 아직 진술-형성 발화이지 못한 이름(onoma)과 한정어(rhēma)로 구성되는 합성 표현이다.


1.2. logos는 사태(pragma), 즉 외부세계에서 일부 참여대상(dynameis)들의 실제 결합을 표현한다.


1.3. logos eirēmenos가 진술-형성 발화이다. 이것은 logos로 표현된 pragma이 실제로 사실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2. 아리스토텔레스


2.1. logos는 개념적 사태와 존재론적 사태 모두를 표현하는 onoma와 rhēma로 구성되는 합성 표현이다. 이는 '진술가능 복합체'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2.2. pragma는 사태이다.

     존재론적으로: 외부 세계의 일부로서의 사태이거나

     의미론적으로: logos를 통해 이해되고 표현되는 사태이다.


2.3. logos apophantikos('진술-형성 발화')는 실제로 진술된 logos이다(단언되었든 부정되었든).


2.4. logos는 명명 차원에서 사용되거나 진술 차원에서 (qua logos apophantikos) 사용된다. 유사하게, phasis(kataphasis, apophasis)도 이 두 차원 중 어느 한 차원에서 사용된다.


2.5. synthesis는 synthesis(1) = onoma와 rhēma를 (명명 차원에서) logos로 통합시키는 활동이거나 synthesis(2) = logos apophantikos 안에서 성취되는 그러한 통합에 대한 (진술 차원에서) 단언이고, 반면에 dihairesis는 언제나 (진술 차원에서) 그러한 통합에 대한 부정이다.


2.6. logos apophantikos의 일부를 이루는 esti는 계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 동사는 synthesis(2)의 표지이다. onoma와 rhēma는 synthesis(1)에 의해 이미 진술가능 복합체인 logos를 이루는 방식으로 통합되어 있고, 그래서 esti는 이항 계사적 함수보다는 단지 '진술가능 복합체'가 실제로 진술되고 있음에 대한 단항 표지에 불과하다.


2.7. logos apophantikos 내에서 발견되는 명제적 구조는 다음과 같이 기술될 것이다.

언어적으로: 범주적 being을 표현하는 logos(being의 열 가지 범주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것에 의해 보충어를 취하게 되는 공의적인 being)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54쪽] 단항 함수 'be' 또는 'not be'에 의해 진술된다.'

의미론적으로: logos에 의해 표현되는 pragma는 외부세계의 일부로 있는 것으로(혹은 있지 않은 것으로) (또는 '사실 (or 아닌)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와 같이 요약된 결론에 비추어, '이항 서술과 삼항 서술' 사이의 구분은 관련이 있기 어렵다. 그 언어적 차이 대신, 모든 부정 진술과 긍정 진술은 단일한 복합 논증, 즉 logos에 선행하는 단항 함수를 지닌다. 그 표층 구조에서 볼 때 형용사적 동사는 단항 함수 'be'와 logos의 rhēma 부분을 포함한다. 유사하게, 존재 동사는 단항 함수와 공의적 being, 관련된 logos의 onoma 부분과 rhēma 부분에 의해 지시되는 그러한 범주들에 의해 보완되는 도식으로 기능하는 그러한 공의적 being으로 나뉜다.


-蟲-

  1. See De Rijk (1986: 231-4, and passim). [본문으로]
  2. Ibid., 229. [본문으로]
  3. Ibid., 225-31. [본문으로]
  4. See ibid., 282 where, following Prauss (1965: 51) the close relationship between logos and dionomazein is pointed out. [본문으로]
  5. For the distinction between the onomazein level and the legein level, see Nuchelmans (1973: 14-7) and De Rijk (1986: 196-202) and below, p. 34; 45. [본문으로]
  6. See De Rijk (1986: 271-6). [본문으로]
  7. Ibid. 201-2 and 309-16. [본문으로]
  8. Ibid., 225-34. [본문으로]
  9. Plato's view of propositional structure is more fully discussed in De Rijk (1986: 306-16; 349-50; 353-4). [본문으로]
  10. For this section, see De Rijk (1986: 332-50) and the literature mentioned there. [본문으로]
  11. Cf. Mc.Dowell (1973) ad toe. and De Rijk (1986: 296 and 339). For a detailed description of the process of doxazein involved here, see Nuchelmans (1973: 19). [본문으로]
  12. See the important passages in Prauss (1965: 36; 110-22 and 191). [본문으로]
  13. By 'logos properly speaking' I refer to the unasserted logos, or the logos taken apart from its being actually asserted respectively. [본문으로]
  14. See De Rijk (1986: 348-54). I am glad to see that in an extensive and quite penetrating review article of Kahn's book my Amsterdam colleague C.J. Ruygh had arrived (in Lingua 48 (1979: 43-83) at a similar conclusion: "Ia valeur fondamentale de 'es-en grec ancien est 'etre present, etre Ia', sans specification ulterieure" (p. 78). See also his paper: 'Sur Ia valeur fondamentale de einai, Une replique", in Mnemosyne 37 (1984: 264-70). [본문으로]
  15. See De Rijk, (1986: 248-53 and 281-2). [본문으로]
  16. See De Rijk (1986: 286-7; 322-6; 350-4). Throughout the whole passage (Euthyd. 283C-286B) pragma seems to stand for a subject including the phenomenal condition(s) ascribed to it by the user of the logos. See De Rijk (1986: 285-90). [본문으로]
  17. For the context, see De Rijk (1986: 285-90). [본문으로]
  18. See De Rijk (1986: 293-302; 345). [본문으로]
  19. Cf. what Plato calls (Sophist, 261D-C) praxeis ('appurtenances'; see De Rijk, (1986: 197), n.16)), where states as well as actions may be meant; see Nuchelmans (1973: 14 and 95). [본문으로]
  20. Nuchelmans as well as Ackrill (ad loc.) have 'his sitting' where Aristotle omits the subject accusative (to kathesthai). However, Nuchelmans did notice (35) that at 12b15 Aristotle only mentions the predicate expression 'sitting' instead of the complete affirmation. One might ask why Ackrill and Nuchelmans do not render, quite in line with their translations at 12b14-6, estin anthropos (at Categ. 12, 14b16 ff.): 'he is a man' rather than 'there is a man' (their rendition ad loc .) or 'is-a-man' (which I would prefer; see below, p.OO). For the rest,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formulas is not very important, it seems. [본문으로]
  21. For this important requirement, see below, p.00. [본문으로]
  22. For this important requirement, see below, p.00. [본문으로]
  23. For this difficult passage, see Ackrill, ad loc. I hope to argue for my interpretation elsewhere. To be sure, the meaning of pragma as 'state of affairs' is not affected by the special difficulties of the passage. [본문으로]
  24. I cannot possibly make something out of the MSS reading epi tau einai (rendered by Ackrill: "in the case of 'to be'"). Besides, the important opposition between the assertoric and the modal cases which is so neatly indicated at b27-29: ep' ekeinon, entautha) is obscured at b30-2 by ep' ekeinon and epi tou einai, and therefore I would propose to read at b32: epi tou einai dynaton kai einai ou dynaton, where epi tout on is the counterpart of ep' ekeinon, and to einai dynaton kai einai ou dynaton that of to alethes. [본문으로]
  25. dihorizousai.. ..... to a/ethes. Note that here dihorizein means 'to differentiate'= 'to constitute by differentiation', rather than 'to distinguish something into different types of it'. Cf. Aristotle, Physics IV 6, 213b 24-7, where the void is said to dihorizein things' natures or to establish things' different natures. Cf. Liddell and Scott: 'to determine one to be so and so', e.g. Demosthenes XX, 158 and Sophocles, Oed. Tyr., 1083. [본문으로]
  26. Nuchelmans seems to be wrong in assuming (1973: 36) that, unlike at Categ. 12b15 (where the underlying pragmata are 'Socrates's sitting' and 'Socrates's not sitting', respectively, at De interpr. 21b28 the (two) pragmata of the (supposedly) one example, 'A man is pale' would be 'man' and 'pale'. Rather, 21b28 should be linked with 21a39-b3, where the two examples 'to-be-a-man' and 'to-be-a-pale-man' are mentioned, instead of just one example 'A man is pale', as is assumed by Nuchelmans, presumably starting from 21b28. Hence, it seems more reasonable to assume that two examples are put forward by Aristotle, and that the pragmata involved are 'to-be-a-man' and 'to-be-a-pale-man' respectively (or, if you wish, 'being-a-man', and 'being-a-pale-man')-. For that matter, at 21b28 we should rather read to men leukos < anthropos > , to de anthropos as this would be more in line with Aristotle's own examples. For a similar use of 'pragma' seeAnal.Post., e.g. I 2, 71b12; 72a2b. [본문으로]
  27. Therefore Kirwan's speaking (1971: 178-9) of an inadequate treatment of false states of affairs by Aristotle seems to be beside the point. His objecting to Aristotle that he appears to take false states of affairs as non-existent is merely due to the fact that Kirwan seems to ignore that for Aristotle, 'a state of affairs is not' equals 'is not the case' = 'does not obtain'. Besides, Kirwan seems to have forgotten that he himself had correctly noticed that here the discussion concerns states of affairs ('descriptions') rather than statements. A similar optical error has been made by Ackrill where, when commenting upon Categ. 12, 14a26 ff., he says (1963: 111-2) that "it is odd to call this a reciprocal implication of existence (his italics; that between truly saying and actual being is meant): we should not say that the existence of there being a man implies and is implied by the existence of the true statement that there is a man". Ackrill seems to ignore, indeed, that 'being ' said of a statement (rather: 'account') does not refer to its being really asserted but to its content being the case in the outside world. - For this usage in the case of doxa and logos, see Nuchelmans (1973: 17) and De Rijk (1986: 194-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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