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문기술로서의 소피스트술


『소피스트』에서의 소피스트술 정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소피스트술의 문제를 소피스트가 부당하거나 건전하지 못하다는 논리적 의미에서 나쁜 논증들을 사용하는 것이라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소피스트술은 잘못된 형식의 논증 사용에서의 어떤 특정한 안이함 또는 그런 논증을 자진해서 사용한다는 특징적 결함, 혹은 양자 모두라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오류라는 개념은 소피스트술에 대한 플라톤의 관점을 왜곡시킨다. 그 관점은 낯설고도 더욱 흥미로운 것이다. 이를 내가 논증하고자 한다. 더욱이, 아마도 더욱 흥미로운 지점이자, 그 고유한 방식에서 소피스트 정의의 혼란스러운 측면은 간과되어 왔다. 엘레아 손님은 소피스트술을 전문기술(τέχνη, Soph. 221D1-6)로 정의한다는 것이다.[각주:1] 이는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전문기술은 인지적 성취인 반면, 우리는 소피스트술이 일종의 인지적 결함(어쩌면 그 성격적 결함)으로 정의되길 기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오류 추리로서의 소피스트 개념에 발목 잡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소피스트술이 전문기술로서 정의된다는 사실을 간과해 왔기 때문이다.


전문기술자로서 소피스트 정의는 또한 플라톤 사유의 일반적 배경에 반대된다는 점에서도 놀랍다. 이 정의는 소피스트에 대한 플라톤의 고유한 생각에 대대적 수정을 가하기 때문이다. 『고르기아스』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소피스트가 기술자임을 부정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주 관심사는 소피스트가 아니라 수사술이다. 수사술이 기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는 소피스트가 기술이라는 점 또한 부정한다(462e-466a. 소피스트술은 463b6과 465c2에 등장한다.). 수사술과 소피스트술은 두 가지 의미에서 유사기술이다. 첫째로, 영혼의 진정으로 좋은 상태를 산출하지 않고 단지 좋은 상태처럼 보이는 것만을 산출한다(464a3-4). 둘째로, 기술이 아닌 요령에 불과하다. [? 아첨 얘기는? 아첨인 게 더 중요하지 않음?] 이들은 이들 스스로 산출하는 결과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수 없다.(465a2-6)[각주:2]


소크라테스는 유사기술이라는 것의 두 의미가 필연적으로 결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즉, 겉보기에만 좋은 상태를 산출할 뿐인 능력은 전문기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겉보기에 불과한 것의 원인들에 대한 체계적 이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겉보기만 좋은 상태 산출을 위한 요령을 갖더라도 그렇게 하는 기술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좋은 상태라는 것을 이해한 자는 또한 그 좋음을 설명할 줄 아는 자이며, 짐작컨데, 좋아 보이게 만들 줄도 알 것이다.[각주:3] 그래서 『고르기아스』는 좋아 보이게 만드는 기술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기술은 사물들이 실제로 어떻게 있는지에 대한 지식과 동일시될 것이다. 의학적 대상들을 좋아 보이게(혹은 나빠 보이게) 만드는 기술자는 의사이고 기하학적 대상들을 참으로 보이게 혹은 거짓으로 보이게 만드는 것은 기하학자이다.[각주:4]


『고르기아스』의 논의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소피스트술: 사물들을 특정 방식으로 "나타나 보이게" 만들지만 그런 방식으로 "있게" 만들지는 못하는 능력.

2전문기술: "나타나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있게" 만들기도 하는 능력.

결론: 소피스트술은 전문기술이 아니다.


[누구 맘대로? 전문기술에 "나타나 보이게"가 왜 들어가나? 의술에 병들게 하는 능력이 포함되지 않는 건 『국가』에 명시되지 않음? 그리고 『고르기아스』에서 아첨 계기를 빼니까 전문기술 규정에 부정적 가능성을 배제시킬 수 없게 된 거 아니냐?]


『소피스트』에서 플라톤이 소피스트술을 기술로서 재인식할 때 그는 위의 두 번째 전제를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우리가 기대할 만한 내용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지만, 대강의 생각은 충분히 드러나는 듯하다. [뭘 또 이렇게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 X로 나타나는 것, 이것은 전문기술의 대상으로서 제대로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건강처럼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임의적인 종류의 "것"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건강으로 생각되는 것은 또 다른 경우에 다른 자에게(혹은 심지어 그 자신에게) 그리 생각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런 이유에서 "건강처럼 나타나는 것"은 지식에 필요조건인 바 일반적이고 설명적인 방식에서의 이해가 불가능하다. 이는 꽤 그럴싸한 생각으로 보인다. 만일 소피스트술이 모조품 지혜의 능력이라면, 그래서 전문기술일 수 없을 것인데, 지혜라고 보이는 것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개인이 누군가 중저음의 목소리로 양자역학을 떠들면 지혜롭다고 여긴다고 해보자. 이런 개인의 임의의 특수한 성격을 활용하는 능력은 기술이 아니다.


하지만 『소피스트』에서 플라톤은 모상을 두 종류로 나눈다. 이는 경우에 따라 X로 보이는 것이 지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어떻게 그러한지 설명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각주:5] 더 정확히 말해서, 진짜 X에 대한 지식은 아닌 그런 지식에 대해 X로 보이는 것이 그 대상이 되는 일이 가능하도록 만든다. 일반화하여, 특정 상황이 관찰자의 관점을 규칙적이고 설명가능한 방식으로 왜곡시킨다는 생각이다.[각주:6] 표준적 사례는 매우 거대한 규모의 조각상을 밑에서 올려다 볼 때 우리의 관점에 의한 왜곡이다. 소피스트술의 경우, 인간은 일반적으로 지혜를 특정한 변증적 기술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간주하는 관점을 취한다. 거칠게 말해서 소크라테스적 대화 과정에서 상대방은 스스로 모순되게 만드는 반면 자기 자신은 모순되지 않는 기술이다. 하지만 일반적 인간은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잘못을 범한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지혜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갖게 된다. 이 왜곡은 임의적이거나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설명가능한 것이다. 소피스트는 그 왜곡된 관점을 이해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소피스트의 전문기술로서 "있다." 지혜처럼 보이는 것은 기술의 적합한 대상이다. 하지만 이 기술은 지혜 그 자체가 아니다. 그래서 연설을 지혜롭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에는 기술이 있는데, 그것은 연설을 지혜로운 것으로 있도록 만드는 기술은 아니다.


이 대화편이 애초에 소피스트술을 정의하는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여부가 의심받아 왔다. 또한 소피스트술을 기술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도 의심받아 왔다. 6장에서 나는 이런 대안적 해석에 대해 상세히 답할 것이다. 플라톤은 굉장히 신경써서 말하는 사람이라, 경고도 없이 그렇다고 눈에 띄는 동기도 없이 주요 화제에서 그런 핵심 용어를 그렇게 대충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건 이상한 일일 것이다. 수사술과 소피스트술이 기술인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초기 대화편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플라톤은 손님을 통해 명시적으로 이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그래서 소피스트술이 전문기술이라고 명백하게 직접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 대화편을 받아들여야 한다.[각주:7]


이제 이 정의를 해명해 보자. 특히, 이 대화편의 간과된 또 다른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소피스트가 제작하는 모상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에 대한 난관이 그것이다. 거의 무시되다시피 한 이 난관은 사실 대화편의 문제를 좌우한다. [...무시당하긴 뭘... 이 논문이 원래 2010년도 출판 예정인 책에 실릴 거였는데, 아무튼 그 즈음에 기획된 논문이다. 그럼 모상의 종류, 즉 상(eidōlon)의 하위분류로 모상(eikōn)과 가상(허상? phantasma)의 구분 문제가 그 당시까지 "거의 간과"되어왔다는 건데, 브라운, 프레데, 크레빌리가 한 작업은 뭐가 되냐? 콘포드, 아크릴, 보스톡, 블라스토스 같은 어르신들이 be 동사 문제에 천착하긴 했는데, 그런 옛날 아저씨들이 좀 간과했다고 그걸 일반화시키면 안 되는 거지. 뭐 말이 모상이라는 관점에 반대하느라고 이런 관점을 취하면서 상이나 모상, 가상 논한 사람들은 일단 제쳐둔 건가 보네.]



2. 소피스트는 가상을 만드나 모상을 만드나?


소피스트 정의의 쟁점은 가상(phantasma)과 모상(eikōn) 사이의 구분이다. 가상과 모상은 상(eidōlon)의 두 하위분류이다. 235d-236c에서 구분된 바 있다.[각주:8] 거칠게 말해서, 손님은 원본(model)의 내적 비율을 충실하게 보존하는 상과 그 비율을 의도적으로 왜곡시킨 상을 구분한다. 여기에서, 우선 나는 그 구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할 것이고, 다음으로 그 구분 자체의 의미를 설명할 것이며, 끝으로 왜 소피스트를 분류하는 방식에 관련하여 난관이 있는지 설명할 것이다.


가상과 모상 사이의 구분은 최초의 난관에 배경이 되는 것을 상대로 제시된다. 엘레아 손님과 대화상대 테아이테토스는 소피스트에 대한 단일한 설명이 아닌 여섯 가지 설명을 제시하면서[각주:9] 그 다양함에 곤란을 겪는다. 그러나 손님은 이 정의들의 다양성을 감수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이 많은 것들이 집중되는 한 점(232a4-5)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피스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은 단지 모든 소피스트들에게 그리고 오직 소피스트에게만 적용되는 정식화만이 아니라, 거기에 단일성을 부여하는 정식화이다.[각주:10]


소피스트 정의의 첫 실패로, 엘레아 손님은 재시작을 한다(232b 이하).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일단 소피스트가 모방자임에 동의한다. 소피스트의 기술은 상 제작에 속하는 기술이다. 손님은 상제작을 모상제작과 가상제작으로 구분한다.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이제 소피스트가 모상제작자 또는 가상제작자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그 둘 중 어디에 소피스트가 있는지 알아내지 못한다(235c-d, 236c-d). 첫 난관은 다음 난관을 제공한다. 소피스트는 모상을 만드는가 가상을 만드는가? 전체 분량 스테파누스 쪽수로 52쪽 중 36쪽이 이 문제를 푸는 데에 할애된다.


성공적인 마지막 정의를 정리하기에 앞서 손님은 가상과 모상에 관련한 난관을 상기시킨다(264c-d). 몇 쪽 안 지나서, 해당 난관의 해법을 제시한다.

266d9-267a1.

손님: 그러니까 상제작술에 대해서 우리 그 유로 한편은 모상적인 것, 다른 한편은 가상적인 것이 있으리란 점을 기억하세. 만일 거짓이 있는 그대로 거짓으로서 또한 있는 것들 중 어떤 한 가지 것으로 있게 마련이라고 드러난다면 말일세.

테아이테토스: 그야 그랬으니까요.

손님: 그렇다면 그리 나타나기도 했으니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도 더욱이 우리는 그 둘을 이제 논란의 여지 없는 두 형상들로 셈해 넣지 않겠나?

테아이테토스: 네.

손님: 그러면 곧장 가상적인 쪽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해 보세.


놀랍게도, 소피스트가 모상제작자가 아닌 가상제작자로 분류되어야 하는 이유에 관해 손님이 말한 것은 여기까지이다. 즉, 아무 얘기도 안 했다.


물론 손님이 소피스트를 그렇게 분류하는 게 놀랍진 않다. 소피스트는 부정적으로 묘사되어 왔고, 가상제작인 상제작의 열등한 종류로 간주되어 왔다.


더욱이, 소피스트를 가상제작 정의에 결부시키는 분명한 단초들이 있다. 가상제작자는 거대한 상들로 작업하는 경향이 있고(235d-236a) [...아, 진짜. 이게 비율 왜곡 설명하려고 도입한 특수한 사례지, 왜 가상제작자의 일반적 경향이 되냐?] 소피스트는 뭔가 큰 것을, 그걸 당신이 지혜로 생각하든(233c6) 만물로 생각하든(233e1), 아무튼 큰 걸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소피스트는 큰 걸 작아 보이게, 작은 걸 커 보이게 만든다(234d). 또한 소피스트는 어린 애들의 관점을 이용해 먹는다. 애들은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서서(234c4) 있다. 얘들이 크고 나면, 그래서 "실제 사물"에 가까워지면, 속지 않는다(234c-e). 하지만 이것들 중, 상의 비율을 왜곡시키고 그래서 그걸 좀 더 원본 같이 보이게 만드는 기술로서 가상제작의 정의와 직결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소피스트를 왜 가상제작자로 분류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구트리의 불평에 플라톤은 책임이 있다. "그건 괜찮은 논증이기가 어렵지, 소피스트 기술의 유해함에 대한 플라톤의 고질적인 확신을 상기시키기만 하는 건."[각주:11] 


소피스트가 가상제작자로 분류된 이유를 알려면 소피스트가 제작하는 상의 종류가 무엇인지에 관한 첫 번째 난관이 왜 발생하는지 분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 종류 상 구분을 더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이 구분은 비율(summetria) 개념을 가지고 도입된다. 모상은 원본 비율을 보존하는 상이다. 가상은 비율을 왜곡시키는 상이다. 그런데 닮는 데에 실패해서 그런게 아니라, 오히려 상을 더 닮아 보이게 만들려고 왜곡시키는 것이다.[각주:12] [이건 확실히 고민해 볼 문제. 비율을 왜곡시키는 것이고, 실제로 닮아 있는(be) 것은 아닌데, 그래도 어쨌든 '더' 닮아 '보이게(seems)' 된다.] 그래서 "모상(likeness)"과 "가상(appearance)"은 적절한 용어다. 모상은 실제로 원본을 닮은 것, 원본 비율과 같은 비율을 가진 것ㄷ이다. 반대로 가상은 그게 실제로 원본을 닮아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구분은 시각적 기술과 결부된다. 우선 모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235d6-e2 상제작에서 모상제작이 있는데, 원본 형태 비율과 색배치를 지키면서 상을 제작할 때 사용된다는 얘기.


예를 들어 파르테논 모상은 파르테논의 황금비를 지녀야만 한다.[각주:13]


테아이테토스는 이 언급에 놀라는데, 상 제작자는 다 그러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손님이 다음과 같이 답한다.


손님: 큰 상은 아름다운[각주:14] 원본의 참된 비율을 주면 밑에서 보면 아래는 커 보이고 먼 윗쪽은 작아 보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진실은 내팽개친 채 실제 비율이 아니라 그럴싸해 보이는 상을 만들려고 아래를 실제보다 더 작게, 위를 실제보다 더 크게 만든다는 뭐 그런 내용.


큰 작품은 제작자에게 문제를 야기하는데 그건 관찰자의 관점 때문이다. 이로 인해 원본 비율을 유지하는 상은 원본과 덜 닮아 보인다. 가상 제작자는 실제로는 원본과 덜 닮아 보이게 상을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가상 제작은 매우 대규모의 모상이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입되었다. [인정하긴 해야 하겠다. 관찰자의 관점이 원인이 되어 상이 원본과 달라 보인다는 문제가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가상 제작이 고려될 수 있다.]


플라톤은 회화 기술에서 실제 발전에 반응하여 이 구분을 잘 이끌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증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상관된 문헌 근거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직접 관련은 되지만 덜 믿을만한 것은 『킬리아데스』이다. 『건축에 대하여』 7권도 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 무대를 만들면서 이차원 평면에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했고 한 대상이 다른 대상보다 더 앞으로 가까이 있어 보이게 하려고 했다. 데모크리토스와 아낙사고라스도 이에 대해 썼다.[각주:15] 나는 이런 기술이 모상 제작보다 가상제작으로 간주되는 편이 그럴 듯하다고 본다. 첫째로, 해당 정의에 부합한다. 둘째로, 손님은 조각상을 얘기하지만, 손님은 소피스트를 거울 들고 다니는 애에도 비교한다. 거울 속 상은 평면에 있지만 깊이를 지닌 것처럼 보이는데, 이게 위의 무대 회화(?)랑 비슷하다. 어쨌든 위 두 문헌 근거에서 해당 가상 제작은 전문기술로 간주된다. [아니, 문제는 플라톤이 가상 제작을 기술로 봤느냐 안 봤느냐 하는 거지, 당대에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기술이 다른 사람들한테 기술로 인정 받든 말든 그게 근거가 되냐? 당대 일반인들은 철학이 기술이 아니라 잡담이라고 봤는데?]


모상제작자는 원본 비율 유지를 위해 원본 비율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모상의 비율은 원본 비율처럼 보여야만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비율로 있어야만 하기도 하다. 만일 모상제작자가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상을 만든다면 그는 아름다운 여신의 비율을 알아야만 한다. 모상제작은 기술이기 때문에, 요행으로 비율을 획득한들 해당 기술의 수행이 아니다.


가상 제작자는 반대로 원본 비율에 대한 지식을 요구받지 않는다. 오히려 상이 실제 가진 것과는 다른 비율로 보이는 그런 비율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가상제작의 성공 기준은 특정인에게 특정방식으로 보이는 것이고, 그래서 가상제작은 감상자가 원본 비율이라 간주할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만 필요로 한다.[각주:16] 예를 들어 만일 가상제작자가 아름다운 여신의 가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그는 아름다운 여신의 실제 비율을 알 필요가 없고, 오히려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신의 비율이라 여길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가상 제작자의 전문기술은 원본이 실제로 그런 비율을 지니지 않지만 마치 지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에 관련된 것이다. [주의. 가상이 원본의 비율을 가진 것처럼, 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가상을 통해 '원본이' 그 가상의 비율을 본래 가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흥미로운 접근. ? 아니, 내가 영어를 잘못 읽은 건가=_=?]


가상 제작자가 비율을 왜곡시키려면 원본 비율을 알긴 알아야 한다고 반론할지도 모른다.[각주:17] 내 대답은 가상제작자가 원본 비율을 왜곡하는 건 요구되지 않고, 그저 가상제작자가 원본이 지닌 것과는 다른 비율을 원본이 지닌 것처럼 보이게 모조품을 구성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상 제작자는 실제 원본 비율을 알 필요가 없다. 몇몇 경우, 가상 제작자가 그 비율을 알 것으로 기대될 수는 있으나, 그건 특수한 경우, 이를 테면 특정 인간 개인이 원본인 경우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가상제작자가 원본 비율을 알 필요는 없다. 오히려 가상 제작자는 감상자가 원본 비율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만일 감상자가 무슨 이유에서든 원본 비율을 잘못 생각한다면, 가상 제작자는 모방물이 원본의 실제 비율이 아니라 저 잘못 생각된 비율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감상자가 기대하는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원본 비율을 가진 가상을 제작한다.(x) 감상자가 기대하는 비율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실제로는 가지지 않는)' 가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고찰은 지혜에 대한 지식과 구분되는, 지혜로워 보이는 일에서의 전문기술로서 소피스트술이 성립할 여지를 시사해준다. 만일 소피스트술이 모상제작이라면, 소피스트는 당연히 지혜의 비율을 알아야 할 것이다(또한 스스로 지혜롭기도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소피스트술이 가상제작술이라면, 소피스트는 지혜의 비율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전혀 필요치 않고 스스로 지혜로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상이라는 개념은 지혜와 동일시되지 않는 그러한 소피스트의 전문기술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이 개념은 소피스트의 지식 대상을 제공하는데, 해당 지식이 지혜 그 자체와 충돌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렇게 해준다. 허나 그런 기술은 제대로 된 기술일 수 있는데, 단지 감상자들의 믿음들을 임의로 취합해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피스트는 관점에 의한 왜곡에 관하여 알고 있다.


하지만 지혜의 비율이란 게 무엇인가? 감상자의 관점이란 무엇인가? 비율, 관점, 감상자라는 개념은 회화로부터 도출된다. 이게 소피스트에 적용될 경우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이게 소피스트를 모상과 가상 둘 중 어디로 놓을지 난관에 처하는 이유이다.[각주:18] 소피스트는 화가가 아니라 연설과 진술 분야에서 일하기 때문에(232b-e, 234c), 상의 두 종류 구분이 소피스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불분명한 것이다. 특히, 말(연설, 진술, 등등)이 보존하거나 왜곡시키는 비율이란 게 무엇인지 불분명하다.



3. 잘못된 제안.

 

말이 있는 것의 비율을 왜곡 또는 보존한다 생각할 수 있다. 참인 진술은 비율을 보존하고 거짓 진술은 왜곡한다. 이 관점에서 모든 말은 상이다. 참인 진술은 모상, 거짓 진술은 가상이다.[각주:19]


이 대화편은 해당 관점을 지지하지 않는다. 반대증거를 문헌에서 찾기 전에, 그게 얼마나 이상한 관점일지부터 보자. 소피스트는 일반적으로 거짓 진술과 결부될 것이다. 하지만 소피스트는 아무 거짓 진술이나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합리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처럼 보이는 거짓 진술을 만든다. 전혀 지혜롭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수 많은 거짓 진술들이 있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는 날고 있다' 같은 것이 그렇다. [아니... 모든 말이 상이고 거짓말이 가상이라고 해서, 그게 곧장 가상 제작자로서의 소피스트가 '모든' 거짓 진술을 '무차별적으로' 제작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 상대방 논증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약화시키진 않아 줬으면 좋겠는데.]


해당 대화편은 거짓 진술을 특별히 가상과 관련시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유 전반과 관련시킨다.[각주:20] 손님이 일단 모상과 가상에 관한 어려움을 토로한 뒤, 그는 소피스트 분류 문제가 일반적으로 상과 거짓 진술의 가능성 문제 아래에 들어온다고 말한다(236e1-237a1). 이후 손님이 거짓 진술과 상의 가능성을 설명할 때, 그는 '거짓이 있다면 기만이 있고 기만이 있다면, 그럼 필연적으로 모든 것이 상, 모상과 가상으로 가득 찰 것이다'라고 말한다(260c).[각주:21] [각주에 원문 달아 놓고서 왜 이러시나. 앞서 계속 '가상(appearance)'으로 번역한 건 phantasma이고 여기는 phantasia다. phantasia는 바로 이 대화편 안에서 생각, 말, 믿음과 동류로 언급되고, 이 점에서 상의 하위 분류인 phantasma랑 아무런 설명 없이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손님이 소피스트의 첫 번째 분류를 제시할 때, 그는 다시 거짓 진술을 특별히 가상에 연관시키는 게 아니라 모상과 가상 모두에 연관시킨다(266d9-e2). 


말을 모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이건 말을 발화된 음성 기호나 기록된 기호로 생각하는 데에 기인하는 듯하다. 하지만 해당 대화편은 말을 이런 언어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는 바의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각주:22] [글쎄? "linguistic item"이랑 "which a linguistic item expresses"의 구분은 결국 model과 copy 구분 아닌가? 혹은 to on과 eidōlon 구분이거나] 예를 들어 손님은 생각과 말이 같다고 이야기한다. (263e3-5).[각주:23] 손님은 믿음(doxa)과 지각적 가상(phantasia)를 말에 결부시킨다(264a-b). 대화편 도입부에서 손님은 그저 "소피스트"라는 이름만을 공통으로 갖는 게 아니라, 그 일(ergon) 자체를 공통으로 가지는 게 목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말을 통해(218c1-5)" 성취될 것이다. 이런 언급들은 일반적으로 진술을 상으로 간주하기 어렵게 만든다.[각주:24] [왜??? '이름'은 onoma고 말은 logos, 게다가 말을 통해 사태에 합의하는 데에 이른다면 말이 사태와 사람을 매개해 줘야 할 거 아니냐? 근데 각주는 주목할 만하네. 말에서의 탐구가 어쨌든 현실(or 일, ergon)에 비해 더 모상(eikōn)에서의 탐구에 가까운 건 아니라는 얘기니까. 그런데 이거야 말 자체에 치중하는 거랑 말을 경유해 실제 사태로 나아가는 거 구분도 가능하고, 또 행위나 경험을 통한 탐구에 비해 말을 통한 탐구가 덜 현실적인 건 아니라는 얘기로 볼 수도 있고. 그리고 "있는 것들(ta onta)"을 탐구한다는 게 중요해 보인다. 뭐 엄청 결정적으로 Beer 주장을 지지해 주는 문헌 근거는 아닐 듯.]


더욱이, 철학자는 말로 작업하긴 한다. 하지만 상 개념은 철학자에 적용하긴 어려울 과장된 비유 방식으로 이 대화편에서 도입된다. 소피스트는 모든 것을 만든다고 장담하지만 실은 모든 것의 상을 만드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는 철학자가 전혀 개입할 일 없는 작업이다(233d-235a). [정말? 철학자도 우주를, 인간을, 국가를 다 다루어야 하는데? 철학자가 상의 도움 없이 이 모든 걸 다룰 수 있어? 그 상이 말(생각, 믿음과 동류인) 말고 다른 것일 수 있어?] 상을 제작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서 지극히 호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되고, 이것이 철학자가 그 어떤 종류의 상 제작에도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하리란 점을 시사한다. [별로 설득력 있지 않은데? 말을 기만에 사용했으니 소피스트의 경우에서 바로 그 사용된 말이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것이지, 이게 왜 말로 된 상 자체가 전부 완전히 부정적이라는 얘기로 넘어가냐?]


플라톤은 우리가 사물 자체를 우리의 사유를 가지고 직접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인지가 있는 것에 접하는 것에 대해 보는 것과 만지는 것으로 유비하는 핵심이 이것이라고 나는 본다.[각주:25] [아닐걸?] 그러한 사유들은 정신과 사유된 사물 사이의 매개체가 아니다. 그래서 더욱이, 그런 사유들은 상들이 아니며, 정확한 상도 아니고, 오히려 사물에 대한 매개 없는 파악이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을 사용해 플라톤적 사유라는 것을 달리 말해볼 수 있다. '사실이 이러저러하다고 우리가 말하고 또 그것을 의미할 때, 우리-그리고 우리의 의미-는 사실에 못 미치는 어딘가에 멈추는 게 아니라, "이것이 그러하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에서 사실이 우리가 말하는 바를 넘어서거나 그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는 관점을 제기한다. 말이 상이라는 가정은 비트겐슈타인이 거부하고 있는 사유의 한 형태이고, 우리와 우리의 의미가 언제나 필연적으로 "사실에 못 미치는 곳에서 멈춘다'는 생각이다. [아니, 그건 비씨 생각이고, 말해진 것이나 생각된 것이 매개물이라는 게 플라톤이 영혼을 이데아에 가져다 붙이는 그 직관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진 않잖아?]


요컨데, 우리는 『소피스트』가 모든 말을 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손님은 실제로 말하진 않아도 일부 말이 사물 자체에 대한 파악이라 시사한다. 말이 모상인지 아닌지, 소피스트의 말로 된 상 제작과 동반하는 말로 된 모상 제작이 있는지 없는지, 이 가능성은 열린 채로 남아 있다.


지금 문제와 관련해서는, 왜 이 대화편이 소피스트를 모상 제작자가 아닌 가상 제작자로 분류하는지 좀 더 봐야 한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적어도 지혜가 무엇인지에 관련하여 뭔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비율이 무엇인지에 관해 뭔가 말할 수 있게 해줄 거고, 그래서 소피스트가 그 '비율'을 보존하는지 왜곡시키는지 여부에 대해 합리적인 답을 제시하게 해줄 거다. 이 대화편이 지혜를 다루는 주요 구절은 두 가지이고, 그게 우리가 찾고 있는 것에 빛을 비춰줄 거다.



4. 지혜의 비율 (i): 반박불가능성.


인상적이게도, 지혜가 논의되는 첫 대목은 비율이 논의된 첫 대목이다. 해당 대목은 여섯 번째로 제안된 소피스트 정의를 상술한다. 이 정의에서, 소피스트는 배움을 방해하는 믿음들로부터 영혼을 정화하는 자이다(231e5-6). 이 정의는 개인의 고유한 지혜에 대한 믿음에 관련된 것이기에 소크라테스에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각주:26] 소피스트술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소피스트 활동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전개하는 철학적으로 풍부한 여담을 포함한다. 해당 여담에서 손님은 악덕과 무지에 대한 꽤나 실질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이는 영혼에 영향을 주는 두 종류의 악덕으로 표현된다(227d13). 이는 이것들에 대비되는 덕과 지혜에 대한 암시적 설명을 포함한다. 중요한 것은 지혜가 논박불가능성이고 이는 곧 개인 영혼 내의 조화로운 비율(균형)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혜가 비율과 관련된다는 의미에서 설명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래서 소피스트가 어떻게 지혜의 비율을 왜곡시키는지에 대한 설명의 방식을 예비하게 해준다. [으어, 이 부분 마음에 드네. 영혼의 균형과 원본의 비율(균형) 그리고 이에 대한 왜곡으로 소피스트 정의까지 연결.]


문제가 되는 반박불가능성은 개인이 익숙한 소크라테스적 문답법에 의해 자기모순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영혼의 상태이다. 자신의 지혜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개인을 정화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는 자는 그 개인이 정화대상이 되는 해당 개인이 지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물리학을 잘못 이해하였음을 당신에게 보여준다면, 그런데 당신은 지혜와 물리학이 관련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경우 당신은 당신의 지혜에 대한 믿음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식 방법이 전제하는 건 정화 대상 개인이 관련된 방식으로 자기 모순을 범할 때, 스스로 지혜롭지 않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 절차는 다음과 같은 익숙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230b4-8. 믿음들을 한 군데로 모아서 상충되는 걸 보여준다는 내용.


영혼 정화자는 질문 받는 자가 이 방식으로 스스로 모순을 범할 때 스스로 지혜롭지 않다고 하는 가정에 의존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게 맞다고 본다는 점을 해당 대목이 시사해준다. 자기 모순을 범한 자는 이 방식에서 지혜롭지 않다.[각주:27] 이것은 칼리클레스와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에우튀프론과 아뉘토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전제된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적 논박 하에서) 논박불가능성은 지혜의 필요조건이다. 또한 이게 지혜의 충분조건이라 볼 이유도 있는데, 이를 논증하기에 앞서, 어떻게 논박불가능성이 영혼에서의 균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설명하겠다.


균형(비율) 개념은 불균형과 함께 논의에 도입된다. 손님은 추함을 불균형의 일종으로 정의한다(228a10-11).[각주:28] 손님은 영혼의 특정 상태, 지혜에 대비되는 무지가 추함의 정의 아래에 들어온다고 논증을 전개시킨다. 균형(비율) 개념은 여기서 등장한다.


228c1-6. 화살을 쏘는데 표적을 빗맞추는 건 균형 때문인가 불균형 때문인가? (불균형 때문이다.)


손님은 무지한 영혼은 추하고 불균형하다고 결론내린다(228d4).[각주:29]


나아가 손님은 무지의 두 종류를 구분하는데, 하나는 크고 어려운 종류의 무지로 나머지 모든 무지에 대응된다. 이 무지는 뭔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생각에서의 모든 잘못이 일어난다.(229c5-6)


모든 무지는 추함의 일종이지만, 모르는 걸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는 다른 무지가 아니라 오직 이 무지 때문에 사유에서의 모든 잘못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유에서의 모든 무지의 책임이 이러한 무지에 있다. 소크라테스적 논박이 정화하는 종류의 무지가 이런 거다. 결정적으로, 이는 개인의 지혜에 대한 거짓 믿음으로 기술된다(230a7). 정화는 유사-믿음에 대한 논박을 통해 성립한다(231b6).


이로부터 우리는 영혼에서의 추함이 개인의 고유한 지식과 지혜에 대한 거짓 믿음이라고 추론해야 한다. 영혼은 이 불균형에 의해서 겨냥하는 진리를 빗맞추게 된다(228c-d). 영혼은 영혼 자신이 지식을 가졌다는 잘못된 확신 때문에 진리를 놓친다. 그래서 손님은 개인의 고유한 지혜에 대한 믿음이 그 자체로 영혼의 흉측한 불균형이라 말한다. 이는 이 논박을 통해 고유한 지혜에 대한 믿음이 정화되지 않는 한 대왕조차 행복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무식과 추함에 처한다는 주장에 의해(230d7-e4)[각주:30] 강력하게 지지된다. 추함으로부터 영혼을 정화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고유한 지혜에 대한 거짓 믿음의 제거로 이루어질 것이다.


더욱이 이 문맥은 논박불가능성이 지혜의 필요조건이며 또한 충분조건이기도 함을 보여준다. 오류의 원인은 고유한 지혜에 대한 거짓 믿음, 그 자체 영혼의 불균형인 바 그 거짓 믿음이다. 일단 고유 지혜에 대한 거짓 믿음이 제거되고 나면, 진리를 놓칠 어떤 원인도 없다. 물론 진리를 놓칠 다른 여러 다양한 이유들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엘레아 손님은 이런 거짓 믿음이 사유에서의 모든 잘못의 원인이라 말하고 있다(229c5-6). 그래서 영혼은 고유 지혜에 대한 거짓 믿음이 정화되면 진리를 포착할 것이다. 틀리게 만드는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박불가능성은 지혜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나는 논박불가능성이 지혜와 동일시된다고 제안한다. 지혜는 추정컨데 특정한 대상들에 대한 지식이고 바로 이러한 지식이 논박불가능한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아는 것이 무엇인지 문제는 다음 장에서 논한다.)


물론 이런 생각은 다른 대화편들, 특히 『국가』를 반영한다. 거기에서 소크라테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아는 필요충분조건이 마치 전투에서처럼 모든 논박에서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한다(7권 534b8-d1). 철인 통치자가 지닐 그 지식의 이름이 변증술이라는 사실(534e3)은 그들이 누군가가 논박당할 수 있는지 여부를 시험하는 대화의 전문가임을 시사한다. 즉 지혜로운 자는 누구에 의해서도 논박당할 수 없는데, 그의 의견들이 서로 상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지식을 가질 것이고 고유한 지식에 대한 거짓 믿음이라는 불균형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추정컨데, 그런 짓기을 가진 자는 아름답고 균형잡힌 자일 것이다. 모든 추한 불균형은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손님은 소크라테스식 논박을 기술하면서 지혜가 논박불가능하다는 관점을 보여준다. 그런 논박불가능성은 개인의 믿음들 사이의 관계이고, 아름답고 균형잡힌 관계이며, 그로 인해 개인이 소크라테스식 대화에서 논박당할 수 없게 되는 관계이다. 만일 소피스트가 지혜를 모방한다면, 그래서 추정컨데 이 균형을 모방한다면, 그 균형을 보존하거나 기술적으로 왜곡시킬 것이다.



5. 지혜의 비율 (ii): 형상들에 대한 지식


지혜와 논박불가능성 사이의 관계는 지혜에 반대되는 무지에 대한 유용한 기준을 제공해준다. 소크라테스식 대화에서 논박당하는 자는 누구든 지혜롭지 않다. 그런 영혼은 불균형 상태에 있다. 반대 상태는 귱형적인 것이고 그는 영혼의 균형 덕분에 논박불가능하다.


이는 아직 지혜의 비율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아니다. 지혜가 논박불가능성과 같더라도, 아직 논박불가능성이 무엇으로 구성되는지는 모른다. 논박불가능해지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또한 거짓 믿음, not-being, being과 관련한 난관들이 해결되는 중간부분의 긴 논의에서 이러한 해석을 지지해줄 언급이 없다고 반론할 수도 있다. 손님은 거짓 믿음에 관한 난관을 제시하고 not-being과 being에 관한 난관들도 제시하며, 이건 소피스트가 가상제작자인지 모상제작자인지에 관한 난관을 해결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다. 그것은 소피스트 분류 문제를 거짓 믿음, not-being, being 난관 언급 없이 설명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만족스럽지 못한 해석일 것이다.


이제 중간부분이 철학적 지혜에 대해, 논박불가능성을 제공하는 인간 영혼의 비율에 대한 설명을 포함하는 그런 설명을 제공한다는 점을 논증할 것이다. 손님은 소피스트를 추적하면서 철학자를 찾았다고 말한다(253c7-9). "지혜"라는 단어는 없더라도 여기에서 철학자가 가진 지식의 본성은 설명되고, 그 지식은 지혜이다. 대화편 도입부터 철학자와 논박은 밀접하게 묶인다. 철학자라 소개된 손님은 논박 신을 가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한다(216b6). 그래서 철학자의 지식이 논박과 관련되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중간부에서 철학자의 지식은 변증적이라고 이야기된다(253d2-3). 이는 철학자 지식의 명칭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혜롭지 못한 자를 논박할 수 있지만 누구에게도 논박을 당할 수는 없는 그런 방식의 대화를 할 능력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지식은 또한 형상들에 대한 지식으로 묘사된다. 이 지식이 논박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개인을 지혜롭게 만들어줄 방법은 무엇인가? 손님은 형상에 대한 지식이 서로 상충하는 명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는 게 내 제안이다. 손님은 사람들이 이런 것에 무지해서 모순에 빠진다고 생각하고, 반면 철학자는 그걸 아는 자로서 모순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박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의 핵심은 단지 겉보기에 불과한 모순을 진정한 모순과 구분하는 능력이다. 이 대화편은 'is'와 'is not' 사이의 모순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는 파르메니데스가 천착한 문제이다. 이 모순은 상과 거짓 믿음 가능성의 진정한 원천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not-being 문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is'와 'is not'을 반대되는 것으로, 상호배타적으로 생각함으로부터 나온다. 그 해법은 'is not'을 말하는 게 'is'에 반대가 아닌 단지 다르기만 한 것을 말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257b3-4. Cf. 258b, 258e-259a). 대화편의 중심에 있는 being과 not-being 논의는 누군가 자기모순을 겪을 때 알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예시해주는 것이다. 진정한 모순과 겉보기 모순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 어려움이 파르메니데스가 견지한 철학적 관점의 배경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소피스트라는 언급은 없다. 오히려 소피스트는 이 어려움을 악용한다.[각주:31]


대화편에 따르면 어떤 것들이 모순되고 또 모순되지 않는지 알아야 반박불가능하게 된다. 이 지식은 정확히 형상들에 대한 지식이다. 이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논리학이 아니다. 일단 인식론적으로 다른데, 성취된 바 없는 목표이다. 또한 형이상학적으로 다른데, being의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토대의 본질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각주:32] 형상에 대한 지식은 어떤 형상이 섞이고 또 섞일 수 없는지 아는 것이기에 논박불가능하게 되도록 만들어준다.[각주:33] 손님은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에 따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례를 제공한다.[각주:34] 반대로, 다른 진술들은 모순으로서 배제되는데, 그 진술들이 상호 배타적인 형상들의 혼합을 단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운동과 정지는 섞이지 않는다(252d). 이 형상들을 섞게 하는 진술은 모순이다.[각주:35]


더 나아가, 이 대화편은 not-being에 관한 혼란만이 아니라 'not'에 관한 혼란도 해명한다. 일반화하여, '부정이 반대를 의미한다'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257b9-10). 형상들의 모든 가능한 관계에 관한 지식은 그래서 모든 진정한 모순에 관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가진 자는 누구도 섞일 수 없는 형상들이 섞인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고 즉 스스로 모순을 범하지 않을 것이다. 이 지식을 결여한 자들만 무엇이 무엇에 모순되는지에 관하여 잘못할 수 있다. 


손님은 철학적 지식을 요약하면서 진정한 모순을 인지하는 능력에 상석을 내어준다. 


259c7-d7: 어떤 식으로 같은 것이 다르다느니 다른 것이 같다느니 하며 말에서 모순을 제기하며 즐기는 자의 경우 그건 참된 논박이 아니라는 내용.


"어떤 식으로(or 어떤 측면에서)"라는 규정이 강조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정화술을 연상시킨다(230b8). 이것은 이 앞선 대목이 지금 변증술 대목과 연관되는 한 방식이다. 철학적 지식은 진정한 모순은 결코 허용하지 않도록 해주는데, 서로 배제하는 그리고 배제하지 않는 형상들이 무엇인지, 또한 형상들의 다른 모든 관계들에 대한 지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요컨데, being과 not-being 문제 해법은 논박불가능성으로서의 지혜 개념과 직결된다. 이 being과 not-being 이론은 누군가 지혜롭지 않다는 걸 확정할 수 있는 시험을 넘어서는 긍정적인 무언가를 보여준다.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게 전문기술로서의 소피스트술 개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지혜에 관한 긍정적인 설명은 왜 지혜로운 자가 논박불가능한지 설명해준다. 손님은 사람들이 지혜로운 자가 논박불가능하다는 걸 안다고 가정한다. 이게 곧 그들이 스스로 논박당할 때 그들 스스로 지혜롭지 않음을 시인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게 어떻게 소피스트가 기술자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지, 특히 모상이 아닌 가상 제작에서의 전문가일 수 있다는 걸 설명하는지 보자.



6. 가상-제작 전문기술로서 소피스트술


소피스트가 모방하는 원본의 비율은 규정됐다. 그건 지혜로운 영혼의 비율이다. 그런 영혼은 논박불가능하고, 그건 형상과 그 관계를 파악한 덕분이다. 형상 간의 양립과 배타 관계들은 지혜를 구성하는 바 그 비율들이다. 철학자가 겉보기에 모순을 범할지라도 진정한 모순에는 결코 빠지지 않을 이유는 어떤 형상이 양립되고 또 안되는지 알기 때문이다. 'What is not truly is' 같은 것이 이 예시이다. 여기에서 우선 어떻게 해당 대화편이 소피스트를 모상제작이 아닌 가상제작 쪽으로 분류할 이유를 제공하는지 설명하고, 이게 해당 대화편이 소피스트술을 전문기술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을 입증한다고 논증할 것이다.


일단, 몇몇 부정적 고찰들은 소피스트가 원본 비율을 보존할 수 없고, 그래서 모상이 아닌 가상을 제작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가 지혜로운 영혼의 비율을 보존했다고, 자기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면서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그는 자신의 고유한 성정 내에서 지혜의 비율을 보존할 것이다. 그의 믿음은 완벽한 비율로 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믿음은 서로 상충하지 않을 것이다. 그 경우,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자의 모상이 아니라, 실제로 지혜로울 것이다. 지혜의 비율을 자신 안에 보존하는 자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이다. 지혜의 비율을 왜곡시켜 지혜를 모사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의 가상이지, 그의 모상이 아니다. 그래서 개인의 수단 안에 지혜의 모상이 자리할 수는 없다. 소피스트는 스스로 지혜의 비율을 지니는 게 아니라, 그가 그걸 지닌다는 인상을 기술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 논증의 한 가지 전제는 소피스트의 '도구(그가 그 안에서 작업하는 매개체)'가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해당 대화편이 소피스트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을 보여준다. Being과 not-being 문제에 앞서 일곱 번째 정의를 제시하는 첫 번째 시도에서, 소피스트는 그것들이 상들인 그러한 말을 산출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234c5). 소피스트는 한 번은 사물들을 한 번에 하나씩 모방함으로써 지혜의 상을 산출한다. 마치 화가가 한 번에 하나씩 그림을 그리듯(234b) 말이다. 이러저러한 사물의 각 모방은 각기 고유하게 성공적인 것처럼 혹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회화 유비는 그래서 소피스트의 각 말(연설)이 각기 고유하게 어떤 것을 모사한다는 점을 시사할 것이다. 추정컨데, 해당 연설이 언급하는 무엇이든 그에 관한 진리(참)를 모방할 것이다(232b-e). 예를 들어, 소피스트는 완전히 부정의한 자가 완전히 행복한 것이 마치 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도 모른다. 모든 사안들에 이러한 기술을 사용해, 포괄적으로 봐서,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것처럼 보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관점은 해당 정의의 마지막 형태에서 상당히 수정된다. 소피스트는 지혜로운 개인을 모방함으로써 지혜의 모상을 산출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개인의 믿음과 진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상충이나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 방식을 모방한다는 의미가 되는 곳에서 말이다. 각기 고유한 진술은 상도 아니고 각 진술이 저마다 하나씩 지혜로운 것처럼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소피스트의 진술 총체가 지혜로운 것처럼 나타나고, 이는 그 진술들이 서로 관련되는 방식으로 인한 것이다.


소피스트가 도입시키는 왜곡에 대한 긍정적 설명도 있다. 소피스트의 왜곡에 대한 나의 설명은 세 가지 측면을 가진다. 그것은 거짓 논박이고, 포괄(총체)적이며, 기만당하는 대화 상대자의 관점과 관련된다.


(1) 소피스트는 거짓 논박 안에서 거래를 한다. 그는 먼저 대화상대자가 무언가 하나에 대해 동의를 얻어내고, 다음으로 이것과 상호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 다른 것에도 동의를 얻어낸다. 이것이 원본 비율의 왜곡이다. 실제로는 이 두 진술들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완전히 지혜로운 자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겠지만, 진지한 철학자는 이 대화편이 파르메니데스가 그렇다고 하는 것처럼 'is'와 'is not'이 서로 배제한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그런 실수를 저지를지도 모른다. 소피스트는 진지하지만 실수하는 철학자와 다른데, 저 상호배제가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2) 소피스트는 겉보기 논박을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는 이러저러한 논박이 진정한 종류의 것이라 생각하도록 만들고자 시도할 뿐만 아니라, 소피스트가 그 어떤 사람이든, 어떤 주제에서든, 그들이 장차 무슨 소리를 하든 아무 상관없이 논박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고자 시도하기까지 한다. 소피스트는 제한 없이 온갖 다종다양한 문제에 완전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를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능력, 다른 이를 논박할 수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일 수 있는 능력이다.[각주:36] 이것은 (1)에서의 왜곡에 더해 그 이상의 추가적인 왜곡을 구성한다. 지혜로운 자의 영혼은 양립불가능한 믿음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소피스트의 영혼은 확실히 그렇지 않지만, 소피스트는 그 원본[자신의 영혼?]의 비율을 왜곡시키는데 마치 그의 영혼이 양립 불가능한 믿음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처럼 나타나게 만듦으로써 그리 한다.


(3) 손님이 상을 모상과 가상으로 나눌 때, 그는 관찰자의 시점이 가상에 기여한다고 선제한다. 이것은 소피스트에 대한 손님의 첫 번째 묘사에서도 볼 수 있다. 259c-d에서 진짜 모순을 가짜로부터 구분해내는 철학자의 능력을 묘사하며, 소피스트의 가장 흔한 희생자가 이제 막 being에 접해 본 사람들이라고 언급된다. 그들은 논박에 열광하는데, 혼란스럽고 유치한 방식으로 이제 막 논박과 지혜 사이의 친밀성에 속한 뭔가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런 묘사는 소피스트의 희생자들이 사물의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어린 애들이란 앞서의 묘사를 연상시킨다(234c3-4). 그래서 소피스트는 소피스트적 논증에 그런 애들이 갖는 관점을 써먹는다. 그런 자들은 논박불가능성이 지혜의 필요조건이고 어떤 형상들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것(예를 들어 운동과 정지)을 정확하게 보긴 했다. 그런데 이런 사항들을 혼랍스럽고 유치한 방식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소피스트에게 사로잡히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소피스트의 논박이 가짜라는 것도 소피스트의 논박 사용법이 철학자의 사용법과 분명화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도 모른다.


소피스트의 전략에서 또 다른 추가적인 측면은 가능한 한 논박자 입장에 서려고 하지 시험받으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피스트는 자신이 지혜롭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그가 논박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논박당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만일 소피스트가 결국 질문을 받게 되면, 내가 추정하기로 그는 그 겉보기 논박[겉보기 모순, 가짜 모순으로 구성된]을 꽤나 잘 빠져나갈 것이다. 대화편 내내 묘사되듯 그는 잘 도망다닌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그의 의견들이 상충할 경우에도, 그것들이 그렇다는 점을 보이기란 어려울 것이다. 소피스트가 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는 그 (겉보기) 모순 안에서 그가 눈이 밝고, 그래서 그 덫을 피해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논박당한다는 겉모습을 피하기 위해 실제로 믿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되는 대로의 것을 주워 섬겨 말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소피스트는 지혜의 모상이 아닌 가상을 산출하는데, 소피스트가 의도적으로 지혜의 비율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양립불간으한 믿음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데, 실제로 그의 믿음들이 서로 상충할 때 그렇게 보이게 만든다. 그는 모든 논박을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사실 어떤 주제로 누구에 대해서도 '진정한' 논박을 수행할 아무런 능력도 없다.[각주:37] 그리고 그는 청중의 관점을 써먹는데, 지혜와 논박에 대한 그들의 유치한 이해를 활용한다.


두 가지 중요한 반대가 있는데, 하나는 논박 개념에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전문가 개념에 관련된다.


첫 번째 반대는 소피스트술이 어떤 진술들이 겉보기로 어떤 진술들과 양립불가능한지 아는 능력만 요구받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진술들을 다른 진술들로부터 추론해내는(아니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일) 능력도 요구받는다. 이 반론은 내 해석에 대한 반박이라기 보다는 이 대화편에 들어있는 소피스트술에 대한 이론에 대한 반박이다.[각주:38] [...치사하게. 자비의 원리 모름? 플라톤의 설명을 가능한 한 정당하고 말이 되는 종류의 것으로 재구성해 주어야 할 것 아니냐? 그 재구성은 당연히 해석자 몫이고, 그럼 이 대화편에서 소피스트에 대해 설명한 것이 불충분하다는 반박은 누가 책임져야 하냐? 그 설명이 도출되는 해석을 제시한 사람, 그러니까 지금 이 경우에는 플라톤이 아니라 당신이 책임을 져야지.] 아무튼 한 가지 답변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형상에 대한 지식, 변증술이 무엇으로부터 무엇이 도출되는지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형상에 대한 겉보기 지식도 도출관계에 대한 겉보기 지식을 포함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소피스트술은 연역관계'처럼 보이는 것'에 대한 지식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연역관계를 포함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피스트는 모순되는 진술을 연역해내는 것처럼 보일 능력을 포함할 것이다. 뭐, 그냥 생각해 본 거다.


두 번째 반박은 레슬리 브라운의 반박이다.


소피스트술이 기술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건 본질적 본성, 기술이기 위한 조건조차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Brown, 'Definition', 168)


이 대화편이 아쉽게도 『고르기아스』 등에서 제기된 소피스트술이 기술 아니라는 논증에 응답하지 않는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나는 『소피스트』가 소피스트술을 전문기술로서 진지하게 정의한다고, 그리고 그런 전문기술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브라운의 해석은 자포자기식이다. 브라운도 시인하듯, 해당 대화편은 소피스트 정의를 떠맡는다. 다만 브라운은 소피스트술이 정의하기에 적절한 대상이 아니라고 본다. 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 대화편은 실패이고 무의미한 짓이다. 물론 많은 대화편들이 아포리아로 끝난다. 그것들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고 실패한다. 하지만 그 중 어느 것도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문제는 이해를 도모하는 데에 도움을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제시된 해법들은 이해 성공의 조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브라운에 따르면 『소피스트』에서는 상당히 다른 일이 일어난다. 전체 작업이 정의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는 것이 된다. 게다가 유독 이 대화편만 심지어 정직하지 못한 실패로 끝난다. 아포리아로 끝나는 다른 대화편들과 달리, 소피스트에 대한 정의가 결론으로 언명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브라운의 해석은 대가가 너무 크다.


이하 별 얘기 없음. 1) 기술자와 문외한 대비시키는 언급이 있는데 이게 브라운 쪽 지지하는 문헌근거 아니냐는 거. 그런데 아니다. 왜냐하면 소피스트를 전문기술자로 칭하는 언급이 너무 많이 나와서.


브라운은 기술의 조건으로 목적, 그리고 그 목적이 달성되게끔 혹은 실패하게 되는 원인에 대한 설명 두 가지를 꼽는다. 그런데 비어의 해석에 따르면 목적은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고, 성공 원인은 원본 비율 왜곡(거짓 논박으로 거짓 균형을 보여줌), 실패는 자신이 논박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 못할 경우.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박과 차이가 없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소피스트는 배움에 관심이 없고 '거짓 논박'과 '거짓 모순'이 핵심인 반면,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탐구의 배경으로 논박을 활용한다는 차이가 있다는 대답. 



7. 소피스트의 특징.


『파이돈』의 논증혐오자 비슷한데, 차이는 지혜로워 보이게 하는 연설과 논증을 쓰는 법에는 관심이 있다는 것. 그래도 진리를 배우기 위해 연설과 논증을 활용하는 건 아니라는 점에서는 논증혐오자 같은 애. 그리고 지혜 그 자체의 아름다운 비율이 아니라 그것의 일그러진 불균형을 영혼 안에 품은 못난이들.



[총평하자면 일단 모상과 가상의 구분으로부터 논박에 이르기까지 균형과 불균형을 중심으로 해서 전체를 통합하는 해석을 제공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자 기발한 지점으로 보인다. 다만 말이 모상이 아니라는 논증은 불충분한 듯.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소피스트가 말로 된 모상을 제작하는 측면과 논박을 수행하고 상대방에게 모순을 강제하는 측면이 비어의 해석에서는 동일시되는데, 실제로 그러한지 불분명하다. 그는 모든 주제에 대해 누구든 논박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이러저러한 말들을 지어낼 것이다. 이 말이 가상이라면, 그 가상을 통해 수행되는 작업이 모순강제라고 볼 수 있고, 이 둘은 서로 구분될 여지가 있다. 뭐 아무튼 논박을 통해서 상대방은 스스로 무지함을 시인하게 만들고 반면 자기 자신은 논박당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여 지혜로워 보이게 만든다는 해석은 전적으로 동의. 그런데 또 '가짜 논박' 혹은 '겉보기 모순' 같은 것과 이것들에 대비되는 진정한 혹은 참된 어쩌고의 구분은 잘 모르겠다. 정말 그럴까? 'is'와 'is not'의 모순은 가짜인가? 그 모순이 어떻게 사실은 모순이 아니고 양립 가능한 것인지 밝히는 과정에서 나온 해법은 어떤 측면에서는 상충하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양립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짜 모순과 진짜 모순의 대비가 있는 걸까? 아니면 모순은 그저 모순일 뿐이고, 이를 극복하느냐 그냥 거기에 머무르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아닌가? 그러니까 사실 정말로 궁금한 것은, 대체 '진정한 모순'이란 게 뭐냐는 것이다.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인가? 논리학 내에서라면 모르겠으나,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모두 고려할 때 모든 것은 각기 그 자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것들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 불리는 그 이름과 다른 것이기도 하며, 상충하고 모순되는 여러 측면이 공존하기도 하고 그것들이 서로 엄격하게 구분되기도 한다. 어떤 관점과 조건에서 어떤 식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모순은 모순대로 남고, 그걸 극복한다고 모순이 소멸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소피스트도, 일개 무지랭이도, 철학자도, 모두 같은 모순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지 않나?]


-蟲-


  1. While I originally drafted this paper some time before the appearance of L. Brown, ‘Definition and Division in Plato’s Sophist’ [‘Definition’], in D. Charles (ed.), Definition in Greek Philosophy [Definition] (Oxford, 2010), 151–71, the two papers are antitheses to one another. Brown claims, ‘Sophistry, the sophist: these are not appropriate terms to be given a serious definition . . . there is no such genuine kind as sophistry—especially not under the genus of technē, skill, art, or expertise’(Brown, ‘Definition’, 153). I attempt here to vindicate the seventh and final definition of sophistic by vindicating the claim that sophistic is an expertise. [본문으로]
  2. τέχνην δὲ αὐτὴν οὔ ϕημι εἶναι ἀλλ’ ἐμπειρίαν, ὅτι οὐκ ἔχει λόγον οὐδένα ᾧ προσϕέρει ἃ προσϕέρει ὁποῖ ’ ἄττα τὴν ϕύσιν ἐστίν, ὥστε τὴν αἰτίαν ἑκάστου μὴ ἔχειν εἰπεῖν. ἐγὼ δὲ τέχνην οὐ καλῶ ὃ ἂν ᾖ ἄλογον πρᾶγμα. Unless otherwise specified, the various translations of Plato used here are taken from J. Cooper (ed.), Plato: Complete Works [Complete Works] (Indianapolis, 1997); the translations of Aristotle are my own. All the Greek texts are from the most recent OCTs. [본문으로]
  3. This is implicit in the lines just quoted. While the knack cannot give an account of the things it works with, the expertise can do so. Thus the expertise will constitute not only an expertise of making things be good, but also of making them seem good (as a doctor is expert in persuading a patient that a certain treatment is best). This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such experts will be particularly effective. The world may, sadly, be such that making (actually) good things seem good is extremely difficult under most circumstances (e.g. because patients are simply not equipped to understand their doctor’s explanations). [본문으로]
  4. The question arises whether such an expertise would also be the expertise of making things seem to be the opposite of the way they are (make the false seem true, make the bad seem good). The Gorgias does not address that question. The Phaedrus, however, does address the question. It allows that the knowledge of how things are is an art of making things seem to be as they are and also of making things seem to be other than they are.Socrates explicitly recognizes an expertise of making things seem to be a certain way, but he emphatically denies that it is possible to have this expertise without knowing how things actually are (262 a–c). Thus there is no expertise of making things seem, say, just, without the knowledge of being just. Socrates mentions deception in the law courts just before (261 e). In a court, the speaker is assigned the role of arguing for a certain conclusion, whether true or false, not the task of determining the truth. Thus it seems likely that the expertise in question is the expertise not only of making (say) just things seem just but also of making unjust things seem just. It is sometimes thought that there is a deep difference between the Gorgias and the Phaedrus on the question of whether there is such an expertise as rhetoric. But I do not think so. The reference of ‘rhetoric’ throughout the Gorgias is fixed by the description ‘the skill that Gorgias has’. All the speakers (including Gorgias himself) assume that his skill is not philosophical knowledge but something else, so the question becomes, ‘Is there an expertise of rhetoric that is not philosophical knowledge?’ In the Phaedrus, by contrast, rhetoric is that knowledge, whatever it is, in virtue of which one has the expertise of speaking persuasively in general (261 e). Thus when the Phaedrus argues that rhetoric is philosophical knowledge, i.e. dialectic, it is not contradicting the Gorgias’ claim that Gorgias’ rhetorical ability is no art (technē). In both dialogues, we find the view that there can be no expertise of making things seem true that is not also the knowledge of how things really are. [본문으로]
  5. This is an important disagreement between Lesley Brown and me. She remarks that ‘surprisingly little mileage’ is gained from this distinction (Brown, ‘Definition’, 161–2). [본문으로]
  6. This is a further point of disagreement between Brown and me. She finds it strange, perhaps impossible, that ‘a species of imitation which proceeds from knowledge’ should have the ‘hallmark . . . that it is the production of falsehoods’ (Brown, ‘Definition’, 161). As I explain in Section 2, the very point of the distinction between likenesses and appearances is to make it possible for them to be objects of knowledge. [본문으로]
  7. 9 It is Theaetetus who first makes the assertion, and the Visitor agrees (Soph. 221d 1–6). The agreement is never questioned. [본문으로]
  8. Strictly speaking, the distinction is between two kinds of the expertise of copy-making (εἰδωλοποιική), the expertise of likeness-making (εἰκαστική) and that of appearance-making (ϕανταστική, 236 c 6–7). Notably, the expertise of copy-making is introduced as the expertise of imitation (μιμητική; 234 b 1–2, 235 c 2–3, 235 d1–2). But as the dialogue proceeds, the term ‘copy-making’ is most often used, and the term ‘imitation’ acquires a new use in the final account of what the sophist is (267 a–b). [본문으로]
  9. Summarized at 231 c–e. Conspicuously, there is no attempt to reject any proposed definition on the familiar grounds that it either counts some non-sophists as sophists or fails to count some sophists as sophists. [본문으로]
  10. One might wonder why, at the end of the dialogue, with yet another definition, we are any better off. I would speculate that there is supposed to be an asymmetry among the formulas: the final account of the sophist counts as the definition, because it explains why the earlier formulas apply to all and only sophists, but none of them explains why all the others apply. But to argue for this is a task beyond the scope of this paper. (When I say that the earlier formulas apply, I mean that they are descriptions that are true of (all and only) sophists, not that they are definitions of sophistic. Thus I do not contradict my claim, below, that the proposed definitions are incompatible (Section 5). If this is correct, these formulae would specify not definitions, but (in Aristotle’s sense) propria.) [본문으로]
  11. W. K. C. Guthrie,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 v: The Later Plato and the Academy (Cambridge, 1978) at 136, quoted in N. Notomi, The Unity of Plato’s Sophist: Between the Sophist and the Philosopher (Cambridge, 1999) at 272 n. 2. Despite contrasting himself with Guthrie, Notomi’s subsequent discussion does not shed any light on why sophists are appearance-makers, not likeness-makers (the closest he comes are his remarks at 271–2). Similarly, Rosen thinks that, ‘Since [appearances] are inaccurate copies, it is assumed that the sophist manufactures [appearances] rather than [likenesses]’ (S. Rosen, Plato’s Sophist: The Drama of Original & Image [Drama] (New Haven, 1983) at 309). But this is not right: the dialogue does not ‘simply assume’ that the sophist is an appearance-maker. It explicitly raises the question whether the sophist is an appearance-maker. The problem is to see how the dialogue has given reasons for its answer to this question. [본문으로]
  12. This important point is often misunderstood. Rosen, for instance, treats appearances (‘fantasms’ is his translation) as inaccurate copies (Rosen, Drama, 147, 170, and others). By ‘inaccurate’, he means ‘not preserving proportions’. But the proportions of an appearance differ from those of the model not in any old way, but specifically so as to appear like the model. This is a problem for Rosen’s treatment of all false statements indiscriminately as appearances. He ignores the question of what it means for speeches and statements to distort proportions so as to seem to preserve them. And his view strongly suggests that appearances are merely botched copies. In fact, the text makes clear that an appearance is a copy whose proportions make it seem more like the model than it is. A copy may well be intentionally distorted, yet not be an appearance. Giacometti’s stylized, slender statues intentionally distort the human form, but not in such a way as to appear more like human beings than they are. Thus they are not appearances in the sense of the Sophist. [본문으로]
  13. I do not know why the Eleatic Visitor also mentions the colours of the parts. Perhaps because of the practice of painting statues with extravagant, unrealistic colours, a practice also alluded to at Republic 4, 420 b–421 a. Alternatively, perhaps he has in mind a technique by which parts of a thing appear to have different colour properties from those they do have (e.g. many tiny dots of two different colours appear as a smooth field of yet a third colour). (I am indebted to Richard Sorabji for the suggestion, which has some connection with De sensu 3 (439b19 ff.).) Colour is never mentioned again in connection with appearances and likenesses. [본문으로]
  14. In 236 e 6, I read, with MSS β, T, and W (followed by Proclus and Stobaeus) καλῶν, rather than following Nicolls et al. in accepting Badham’s conjecture, κώλων, which would mean, ‘the true proportions of their limbs’. I see no compelling reason to accept the conjecture. The manuscript reading readily yields a sensible text. It merely presupposes, reasonably, that copy-makers make copies of beautiful subjects. Even if we did accept Badham’s conjecture, it would not make a difference to my argument. [본문으로]
  15. According to Vitruvius’ source, the illusion of depth was created by vanishing point perspective (supplemented, apparently, by an explanation of vanishing point perspective in terms of geometrical optics). But see the illuminating and thoughtprovoking discussion of these issues in M. Burnyeat, ‘ “All the World’s A Stage-Painting”: Scenery, Optics, and Greek Epistemology’, 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52 (2017), 33–75. Burnyeat argues persuasively that we do not have good reasons to attribute to Agatharchus the invention of vanishing point perspective, to say nothing of the analysis of vanishing point perspective in the terms of geometrical optics. Rather, argues Burnyeat, Agatharchus probably did something simpler: he created an illusion of depth by making more distant columns smaller and partly obscured. This is very similar to the technique of foreshortening. On Burnyeat’s proposal, the actual proportions of the scenery (some painted columns are shorter than others, and the same distance from the viewer) are not the proportions that the columns appear to have (all the columns appear to be the same size, but to be at different distances from the viewer). Thus this technique very neatly and straightforwardly fits the definition of an appearance by contrast with a likeness. Although Burnyeat does not mention Plato’s Sophist, his paper and mine share the thought that techniques of illusion in the visual arts, especially stagecraft, were important for Greek epistemology. Note, too, that on Burnyeat’s reconstruction of what happened with Agatharchus, Anaxagoras, and Democritus, it is crucial that Agatharchus not only created visual illusion but also that he wrote down an explanation of how he did so. This, too, fits with Plato’s distinction in the Sophist: Agatharchus distorted the proportions in an expert way (deliberately creating a certain visual impression under certain circumstances), not haphazardly. [본문으로]
  16. If this were to turn out to be unknowable (in general and explanatory terms), then this would be presumably rule out there being an expertise of the relevant kind. This problem (which I raised in Section 1) remains to be solved. I address it in Section 6. [본문으로]
  17. This is the position taken by Seth Benardete, who writes, ‘Eikastics assumes knowledge of what is perceived, phantastics knowledge of the perceiver as well’ (S. Benardete, Plato’s Sophist: Part II of The Being of the Beautiful (Chicago, 1984) at 109). (Note that Benardete speaks specifically as if all models were perceptible. If my arguments about wisdom as knowledge of forms are correct, then the sophist’s model is not perceptible.) Benardete concludes, on the same page, that appearancemaking would be superior to likeness-making, on the assumption that the appearance-maker requires all the knowledge of the likeness-maker as well as additional knowledge (of the soul, Benardete says). This seems to me to show the incorrectness of the assumption by modus tollens. [본문으로]
  18. The text says nothing explicit about why there is this impasse. At all the other impasses in the dialogue, there is some statement about what the impasse consists in (231 b–c and 232 a; 239 b–c; 245 d–e; 250 c–e). [본문으로]
  19. This view would be strongly supported by White’s translation of 266 d 9–e 2. But I think that this is a mistranslation—not an impossible translation, but one that leans against the grain of the Greek, for which see n. 13. The translation of Brann et al. seems to me better (E. Brann et al. (eds. and trans.), Plato’s Sophist: The Professor of Wisdom [Professor] (Newburyport, 1996) at 80–1). But the view does not stand or fall with that sentence alone. The view I am rejecting is explicitly espoused by Mary Louise Gill, who writes, ‘To make a statement is to produce an appearance, one that can be true or false’ (M. L. Gill, ‘Division and Definition in Plato’s Sophist and Statesman’, in Charles (ed.), Definition, 172–99 at 184). Likewise, Stanley Rosen says, ‘an accurate sketch, or [likeness], corresponds to a true statement by someone who possesses genuine knowledge. The inaccurate sketch corresponds to a false statement and is called [an appearance]’ (Rosen, Drama, 147). (Rosen does not consider true statements by people who do not have genuine knowledge.) [본문으로]
  20. This is a point of agreement between me and Brown (Brown, ‘Definition’, 161, n. 23). [본문으로]
  21. 260 c 6–9: ὄντος δέ γε ψεύδους ἔστιν ἀπάτη . . . (a 8) καὶ μὴν ἀπάτης οὔσης εἰδώλων τε καὶ εἰκόνων ἤδη καὶ ϕαντασίας πάντα ἀνάγκη μεστὰ εἶναι. [본문으로]
  22. I take this to be Rosen’s reason for saying, ‘If true statements are not [copies], then they must be “originals” in some sense. But in what sense? . . . [One possibility is that] they are themselves the originals of which they speak, in which case there is no distinction between being and discourse. This contention is made by no one’ (Rosen, Drama, 153). In a way, I make precisely this contention—but not as Rosen understands it, since he thinks of logoi as linguistic items. [본문으로]
  23. οὐκοῦν διάνοια μὲν καὶ λόγος ταὐτόν · πλὴν ὁ μὲν ἐντὸς τῆς ψυχῆς πρὸς αὑτὴν διάλογος ἄνευ ϕωνῆς γιγνόμενος τοῦτ’ αὐτὸ ἡμῖν ἐπωνομάσθη, ‘διά νοια’; Cf. Tht. 189 e–190 a. [본문으로]
  24. Further evidence comes from the Phaedo: ‘I certainly do not admit that one who investigates things by means of words is dealing with likenesses [εἰκόσι] any more than one who looks at facts’ (οὐ γὰρ πάνυ συγχωρῶ τὸν ἐν λόγοις σκοπούμενον τὰ ὄντα ἐν εἰκόσι μᾶλλον σκοπεῖν ἢ τὸν ἐν ἔργοις, 100 a 1–3; trans. Grube and Reeve, modified). [본문으로]
  25. At 254 a–b, the Visitor says that philosophers are hard to see because they are themselves ‘near’ (προσκείμενος, a 9) the forms, which are hard to ‘look at’ (ἀϕορῶντα, b1) because of their brightness. The philosopher, then, can look at the forms, unlike most people, and wants to (and can) be near them. The Visitor’s and Theaetetus’ own apprehension of forms is described in terms of seeing at 260 d–261 e. Young people are forced by experiences to touch up against beings (ἐϕάπτεσθαι, 234 d 4–6). [본문으로]
  26. It is disputed whether the definition really is intended to apply to Socrates. I believe that it is, but I will not defend that claim here, since it will play no role in my argument. [본문으로]
  27. Cf. the Visitor’s admission of proceeding in a laughable way, because of ‘being forced to say opposite things’ (τὰ ἐναντία ἀναγκαζόμενος αὑτῷ λέγειν, 241 e 5–6). If they proceed laughably, then they proceed without wisdom. [본문으로]
  28. In the context, ugliness is one kind of badness, contrasting with conflict or sedition (στάσις, 228 a 4–8). (White’s translation, ‘discord’, isn’t lurid enough. I take ‘sedition’ from Brann et al., Professor.) [본문으로]
  29. There is more to this argument than I have recounted here, but it does not bear on why the sophist is an appearance-maker. [본문으로]
  30. For further elucidation of the roles played by shame and ugliness in this passage, see the illuminating treatment of this neglected passage in M. Lott, ‘Ignorance, Shame, and Love of Truth: Diagnosing the Sophist’s Error in Plato’s Sophist’, Phoenix, 66 (2012), 36–56. [본문으로]
  31. The discussion of being and not-being also exemplifies how difficult it is even to identify your own assumptions about what you know and to realize that you do not know it (242 b–c). Theaetetus is not, by disposition, inclined to be overconfident, but still he has not realized that he was assuming he knew what being is. It thus underscores the way in which the awareness of one’s own ignorance is not an attitude that can be adopted at will, but an insight. [본문으로]
  32. There is, however, a way of conceiving logic on which knowledge of forms might turn out to be logic. If logic is construed as the knowledge of the form of propositions in general, and the entailment relations that, as a consequence, obtain between them, then perhaps the knowledge of forms is in that sense logic. For perhaps the forms are the contents of all (possible) propositions and their relations determine, perhaps, the logical form of those propositions. Obviously, this is a rather complicated matter, which I hope to pursue further in future work. [본문으로]
  33. For the capacity and incapacity to mix, see 251 d 6–7, d 8–9, e 9; 253 a 8, c 2, e 1; 254 c 5–6. [본문으로]
  34. See, for example, 256 a on change being both the same and not the same. [본문으로]
  35. In Republic 5 (454 a 1–2), Socrates warns Glaucon that they unwillingly and unwittingly slipping into ἀντιλογική, which is one of the most important traits of sophistic in the Sophist. Socrates says in the Republic that people end up doing this, rather than conversing (διαλέγεσθαι), because they are incapable of dividing things by kinds (a 4–8). Presumably, the idea there, as in the Sophist, is that it can be very hard to tell whether one is dealing with merely apparent contradiction (ἀντιλογική) or real contradiction (διαλεκτική). [본문으로]
  36. Socrates says that something like this happened to him: ‘I acquired . . . a reputation for wisdom, for in each case the bystanders thought that I myself possessed the wisdom that I proved that my interlocutor did not have’ (ὄνομα δὲ τοῦτο λέγεσθαι, σοϕὸς εἶναι· οἴονται γάρ με ἑκάστοτε οἱ παρόντες ταῦτα αὐτὸν εἶναι σοϕὸν ἃ ἂν ἄλλον ἐξελέγξω, Apology 23 a 3–5; trans. Grube and Reeve). This shows not that Socrates is a sophist, but that a sophist exploits the general tendency of people to make this kind of mistake. Cf. Aristotle, Sophistici Elenchi 1, 165a25–7: ‘It is the job of the knower himself to avoid falsities about what he knows, and to show up someone else who commits them’ (ἔργον περὶ ἕκαστον τοῦ εἰδότος ἀψευδεῖν μὲν αὐτὸν περὶ ὧν οἶδε, τὸν δὲ ψευδόμενον ἐμϕανίζειν δύνασθαι). The sophist busies himself with seeming to do the latter. [본문으로]
  37. He might sometimes manage to perform a genuine refutation, but only by chance; thus his capacity is not a capacity to produce genuine refutations. [본문으로]
  38. In fact, Aristotle makes this objection in the opening chapter of the Sophistici Elenchi (although it is merely implicit that it is an objection to the Sophist). He criticizes and tries to improve the Platonic account of false refutation when he says, ‘A refutation is the deduction to the contrary of a given conclusion. Now some [refutations] do not really achieve this, though they seem to do so for a number of reasons’ (ἔλεγχος δὲ συλλογισμὸς μετ’ ἀντιϕάσεως τοῦ συμπεράσματος. οἱ δὲ τοῦτο ποιοῦσι μὲν οὔ, δοκοῦσι δὲ διὰ πολλὰς αἰτίας, 165a2–4). Aristotle goes on to give an account of the distinction between real and false refutation that makes no mention of forms, and relies instead on the distinction between real and apparent deduction (among other thing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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