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은 문장, 거짓, 비-존재에 관한 자신의 성숙된 관점을 보여준다. 이 과점은 오늘날 존재론과 언어철학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Crivelli는 1) 『소피스테스』에서 문장, 거짓, 비-존재에 관련하는 논증들을 정확히 재구성하고, 2) 그것들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서론에서 그는 『소피스테스』에서 호출된 주요 문제들과 그 해법들에 대한 개관을 제시하고 그가 우선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사용될 방법론에 대한 논의를 제공한다.


0.1 『소피스테스』에 의해 호출된 주요 문제들과 그에 대한 해법들.
  목적과 구조. 
『소피스테스』의 공언된 목표는, 핵을 둘러싸는 틀을 통해 그물망으로 된 구조를 지닌 그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 틀(216a1-236d4, 264b11-268d5)은 분할의 방법을 통해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 핵(236d-264b10)은 거짓에 관련된 일부 난점들을 드러내고 해소시킨다.
  틀과 핵 사이의 연결은 직접적이다. 소피스테스의 정의는 소피스테스가 거짓연설을 하며 그렇게 거짓믿음을 불어넣는 자로 기술되는 그런 방식으로 시도된다. 이 기술
(記述)은 거짓 역설과 충돌하며 그 기술에 대한 반박의 방식으로 제시된다. 거짓 역설은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불가능성을 결론으로 갖는 논증의 일종이다. 이렇게 귀결되는 다른 형태의 논증들도 있다.
  
『소피스테스』의 핵(236d5-264b10)은 난관에 봉착하는 부분(236d5-251a4)과 구성적인 부분(251a5-264b10)으로 나뉜다. 난관의 부분은 여러 난점들을 예행연습한다. 다시 이 부분이 두 요소로 나뉜다. 1) (236d5-242b5) 비-존재, 모상, 거짓말과 거짓믿음에 대한 문제들을 다룬다. [p.2] 2) (242b6-251a4) 존재의 문제가 비-존재의 문제에 필적함이 인정된다. 구성적 부분도 두 요소로 나뉜다. 1) (251a5-259d8) '차이' 개념에 기초하여 부정적 서술에 대한 분석이 주어지고, 이에 기반하여 역설로부터 자유로운 비-존재에 대한 설명이 전개된다. 2) (259d9-264b10) 비-존재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거짓말과 거짓믿음에 대한 설명에 적용시킨다.

  『소피스테스』가 호출하는 주요 문제는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가능한 방식에 대한 것이다. 거짓 역설은 거짓말과 거짓믿음 불가능 주장에 근거를 제시한다.
  
『소피스테스』에서 거짓역설의 주된 형태는 다음과 같다.
   [1]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3] 따라서 거짓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제 [2]를 뒷받침하는 보조논증은 다음과 같다.
   [2.1]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2.2]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은 어떤 것이든 말하지 않음을 함축한다.
   [2.3] 어떤 것이든 말하지 않음은 말함이라는 행위의 미완수를 함축한다.
      [2] 따라서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짓믿음의 불가능성 논증도 위와 마찬가지이다.

  플라톤을 포함하여 대다수 철학자들은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불가능성 주장에 반대하며, 거짓말과 거짓믿음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이라는 상식적 관점에 따른다. 거짓불가능에 대한 그들의 반박은 거짓불가능을 지지하는 근거들에 대한 반박에 기초한다. 그 반박은 통상 전제 [2],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공격한다.('말'을 다루는 것으로 유비를 통해 '믿음'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현대 전략. 일부 현대 철학자들은 [2]에 대한 지지논증의 전제 [2.1]을 공격한다. 거짓과 관련된 의미에서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무엇이든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는 한에서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인 것(to be)'의 존재사 용법과 진리사 용법의 구분에 의존한다. [p.3] 이 현대적 전략에 따르면 어떤 것들은 ~이면서(존재하면서) 또한 ~이지 않다(참이 아니다). 여기에서 특수한 존재론적 범주가 있다고 전제된다. 그것은 말이나 믿음 또는 생각 따위의 활동 또는 진술이 통합된 대상으로 삼는 존재자들의 범주, 즉 명제이다. 모든 명제는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지만, 그 중 일부 명제들은 참이라는 점에서 ~인 반면 다른 명제들은 거짓이라는 점에서 ~이지 않다.

  플라톤의 전략. 플라톤도 [2]에 반대하여 무엇이지 않은 것을 말함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 역시 [2.1]에 반대하여 거짓에 관련된 의미에서 ~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어떤 것이든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는 의미에서 무엇인 것을 말하지 않음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근거도 수용한다. 그러나 이 입장을 시행하기 위한 플라톤의 전략은 현대의 전략과 매우 다르다.
  플라톤은 존재사와 진리사의 구분에 의존하지 않고, 명제에 호소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플라톤의 해법은, 거짓말을 하는 자가 어떤 것에 대하여 ~이지 않은 것(what is not)을 그것에 대해 ~인 것(to be)으로 말하는 데에서 ~이지 않은 것을 말한다고 가정한다. 발화행위에 대해 명제와 같은 단일화된 대상은 없다. 발화행위를 수행할 경우, 누군가 x라고 말한다는 그런 단일한 x는 전혀 없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라는 참인 문장을 발화한다고 해서, 테아이테토스가-앉아-있다-라고 하는 것 또는 날고-있는-테아이테토스 같은 발화행위의 대상 같은 단일한 것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 '명제'라고 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명제의 진리치를 구분하는 것은 거짓 역설의 해법일 수 없다는 지적인 듯. 그런데 플라톤이 그렇게 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긍정문을 가지고 발화행위를 수행할 때, y에 대해 x를 ~인 것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x와 y가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라고 말하면, '앉음'이라는 유(類)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서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고 말하면, '낢(飛)'이라는 유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서 ~인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발화행위는 상이한 두 가지 것들을 목표로 삼는다.
  플라톤은 만일 오류를 일으킬 정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거짓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 발화자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를 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명제를 포함하는 근대적 전략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발화행위의 통합된 대상으로서 명제를 피할 경우, '낮이라면 밝다(if it is day it is light)'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p.4] 그 설명은 '낮이라면-밝다(If-it-is-day-it-is-light)'라는 명제에 대한 발화행위를 수행하는 것과 같다. 이 사례에 어떻게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을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적용될지 알기 어렵다.

  이러저러하지 않음(not being so-and-so)과 부재(不在). 플라톤이 극복해야 할 문제는 거짓역설의 계기가 되는 것과 유사한 어려움이다. 플라톤은 거짓을 말한다는 것이 어떤 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인 것으로 말하는 경우의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라 전제하므로, y에 대해 x이지 않다는 것에서 x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거짓을 말하는 것이 비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귀결됨을 피하지 못한다면 거짓은 말할 수 없게 된다.
  플라톤은 x에 대해 x이지 않은 경우 x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님을 보여야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부정에 대한 분석
, 즉 x가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이 분석은 x가 이러저러하지 않은 경우, x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저러함'을 'y에 대해서'로 대체함으로써, 플라톤은 자연스럽게 이러한 결론을 구해낸다.
  플라톤의 부정 분석은 '다름' 개념에 호소한다. x가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것은 x가 그러한 모든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부정이 부재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 부정 분석을 거짓에서 어떤 역할을 행하는 그 ~이지 않음에 적용시켜 보자. x가 y에 대해서 ~이지 않다는 것은 x가, y에 대해 ~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is not 'about y' → is not so-and-so.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문장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낢을 ~인 것으로 말하지만, 낢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에 대해 ~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거짓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사실로부터 낢이 부재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이러한 해명은 부정을 부재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차단한다.

[p.5] 부정적 거짓 명제에 기초한 반론. 플라톤은 어떤 것에 대해 그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말하는 경우에 ~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부정적인 거짓 문장에 기초한 반론의 여지를 남겨둔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지 않다.' 라는 문장의 경우, 그것이 거짓인 이유는 앉음이 그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 문장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앉음이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함으로 거짓을 말함이 기술되기 위해서는, 그 설명이 모든 거짓진술을 포괄해야 한다.

  두 가지 응답을 이에 맞서 플라톤이 사용할 수 있다. 첫 번째는 그 설명이 긍정적 문장에만 적용된다고 하는 것이다. 허나 부정적 거짓 진술을 말하는 자는 ~이지 않음을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것에 대해 ~인 것을 ~이지 않은 것으로 말한다. 
  두 번째는 부정적 문장 역시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 ~이라고 말한다는 전제에 의존한다. 부정적 진술을 하는 자가 어떤 것에 ~이라고 귀속시키는 것은 부정적 유(-類, negative kinds)이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라는 문장을 말하는 자는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앉아-있지-않음'이라는 부정적 유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 거짓을 진술하는 자를 포함 거짓진술을 하는 자는 모두 어떤 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p.6]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라는 문장은 거짓이다. '앉아 있지 않음'이라는 유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인 모든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유. 플라톤의 두 번째 응답은 부정적 유를 도입시킨다. 그러나 현대 철학자들 다수가 이를 거부한다. 부정적 유들 중 어떤 것들은 완전히 이질적인 '아무것도 공통되지 않는' 사물들을 포괄할 것이다. 앉아 있지 않음은 낢이나 걸음뿐만 아니라 식물, 돌, 도형, 형상들을 모두 포함할 것이다. 
  이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은 '다름의 부분들'로서의 부정적 유들이라는 해명이다. 이 해명은 지식과 다름 사이의 유비에 기초한다. 모든 유들 각각에 대해 그것에 상응하는 지식의 한 부분이 있다. 이러한 지식과 마찬가지로 모든 유들 각각에 상응하는 다름의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아름다움이라는 유에 상응하는 다름의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 부분은 아름다움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과 다르다. 즉 모든 아름다운 것과 다르다. 이 유의 이름이 '아름답지-않음'이다. <그러나 유의 일부분이 형성되는 과정은 유와 유의 결합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아름답지 않음은 다름이 아름다움과 결합함으로써 생겨난다. 다름은(존재가 그 자체로도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도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항상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 속에서 진술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더해 아름답지 않다는 진술의 주어가 되는 x도 필요하다. 부정적 유는 'x가 y에 대해서 다른 것이다'에 포함되는 x, y, 다름 셋 중 어느 것도 아니다. 이 경우, Brown의 지적대로, '아름답지 않음'에서의 그 부정이 아름다움이라는 척도 내에 한정되어야 하는 이유는 지식의 일부분이 대응물을 갖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  다름의 부분이 부정적인 유이다. 아름다움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과 다름, 그러한 다름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아름다움 아래에 들어가지 않는 모든 것들이고 오직 그것들뿐일 따름이다. 이것들은 통합된 것이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식의 부분들이 각기 통합된 유라는 것 역시 부정해야 한다. 이는 부정적 유 아래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 그리고 오직 그것들만이 공유하는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p.7] 부정문으로든 긍정문으로든 거짓을 말하는 자는 어떤 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을 그것에 대해 ~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법을 도입하더라도 플라톤의 설명은 서술적 문장에 국한된다. '비-내린다(It is raining).'나 '경기가 벌어지면 팀이 폴커 역할을 할 것이다(If the match takes place then Tim will play Volker<일단 'will' 때문에 미래시제 문제를 지적하는 것 같은데, 팀인지 폴커인지 뭔지 나도 모르겠다. 이 번역 맞는 건가...>).' 

  다름과 반대. 플라톤은 이러저러하지 않은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려는 경향이 왜 생기는지 설명한다. 이를 주장하는 자는 거짓말과 거짓믿음의 가능성을 부정해야 한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부정을 반대와 결부시키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들은 종종 이러저러하지 않은 것이 이러저러한 것들의 조건과 반대인 조건 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아름답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추하다는 말로 이해하고 화를 낸다. 어떤 행위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해당 행위가 금지된다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를 이러저러한 것이지-않음(is-not so-and-so, 부정이 is를 한정한다는 점을 강조.)에 적용하면, 이러저러한 것임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뜻이므로, 이러저러한 것이지-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 난점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은 부정을 반대와 결부시키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부정의 짝은 반대가 아니라 다름이다. x가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것은 그것이 이러저러한 것들과 반대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그 모든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난점은 플라톤 또한 받아들이는, 존재한다는 것이 이러저러함(being so-and-so)의 부분, 즉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관점에 의존한다. [p.8] 이는 계사(copula)가 존재사적 의미(existential import)를 지닌다는 관점으로도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관점은 잘못 취해진 것으로 반박될 수 있다. 날개달린다는 것이 날개달리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고 시인이라는 것이 시인이 행위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이유로 '페가수스는 날개 달렸다'거나 '호메로스는 시인이다'라는 것이 거짓이라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제시된 두 예문들이 거짓이라면, 방식의 문제가 아닌 현존의 부정, 즉 부재 자체가 거짓의 이유라는 이야기이다. 반면 예문이 참이라면, 존재사적 의미가 함축되었다는 이유로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지적일 것이다.> 플라톤은 모든 문장 각각은 반드시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이 추정상의 반례들을 묵살할 것이다. 그는 존재하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못하는 문장처럼 보이는 단어들의 조합형태는 실제로 문장이 아니라고, 최소한 진리치를 결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페가수스, 날개달림, 호메로스, 시인 각각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점이 전제된다. 아니, 내가 전제하는 것인가?> 현존하지 않는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사문장들을 플라톤이 어찌 다루는지는 불명확하다. 어쨌든 저 예문들은 문장처럼 보인다. 그의 입장이 프레게 등의 현대 언어철학자들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존재에 관한 문제들. 『소피스테스』에서 거짓역설의 주된 형식은 논란이 되는 전제에 의존하는 논증이다. ~이지 않은 것을 말함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화편의 주요 난제는 비-존재에 관한 난점에 의존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존재 또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를 이전 사상가들과의 가상대화를 통해 구체화한다. 그들은 다원론자들과 일원론자들, '거인들(감각되는 물체들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신들(가지적 형상들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그들 모두 플라톤에 의해 시험을 받는다. 그는 그들에게 '존재(being)'라는 단어의 의미를 묻는다. 문답의 귀결은, 변화와 정지 모두 존재한다 하더라도, 존재 자체는 변화와 정지 양자 모두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존재는 '그 고유한 본성에 의해' 정지해 있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추론된다. 이로부터 나아가 존재가 정지해 있지도 않고 변화하지도 않는다는 점이 추론된다. 그 논증은 참에서 출발하여 거짓으로 종결된다. 따라서 이 논증은 타당하지 않다. 이 부당성에 대해 플라톤이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문헌적으로 잘 드러난다.

언어적 용법들 사이의 구분. 플라톤은 앞서 존재, 변화, 정지에 대한 논증의 부당성을 언어적 용법들을 구별함으로써 드러낸다. [p.9] 그 구별은 서술적 문장들이 이해될 방식들에 관련된다.
  만일 'φ'가 하나의 유를 의미한다면, 'σ is (a) φ'는, 'σ'에 의해 지시되는 실체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를 예화한다는 '일상적' 독해를 지닌다. σ와 φ는 각기 고유명사와 보편명사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설명은 부정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σ is not (a) φ'는, 'σ'에 의해 지시되는 실체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를 예화하지 않는다는 '일상적' 독해를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
σ'와 'φ' 모두 유들을 의미한다면, 'σ is (a) φ'는 '일상적' 독해뿐만 아니라 '정의적' 독해 또한 지닌다. 이 독해에 따르면 그 문장은 'σ''에 의해 지시되는 유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와 동일시될 경우 참이다. 부정의 경우, 'σ is not (a) φ'는 'σ''에 의해 지시되는 유가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와 다를 경우 참이다.
  '변화는 정지이다'라는 문장은 '일상적' 독해에서 참인데 변화라는 유가 정지라는 유를 예화하기 때문이다(모든 유는 정지해 있으니까). 그러나 이 문장은 '정의적' 독해에서 거짓이다. 변화라는 유는 정지라는 유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변화는 정지이지 않다'를 참으로 만든다. '변화는 같음이다/이지 않다,' '변화는 다름이다/이지 않다,' '변화는 존재이다/이지 않다(is/is not a being)' 모두 긍정의 경우 '일상적' 독해에서, 부정의 경우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다. 더 나아가, 'φ'가 의미하는 어떤 유든 존재라는 유와 다르다면, 'Being is not (a) φ'는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다. 이를 통해 플라톤은 'being is not'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존재, 변화, 생성에 관한 앞선 논증의 유사-타당성을 설명할 수도 있다. 존재가 변화하지도 정지해 있지도 않는다는 것은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지만, '일상적' 독해에서는 거짓이다. (존재는 정지를 예화한다.) 이 논증의 유사-타당성은 '정의적' 독해에서 '일상적' 독해로의 전이에 있다.
  긍정적 서술 문장이 '정의적' 독해에 따라 이해될 경우, 그것은 그 주어표현(본성이나 본질을 가지려면 유여야만 한다.)에 의해 지시되는 실체의 본성이나 본질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제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p.10] 문장에 대한 '정의적' 독해는 동일성 진술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문장들에 대한 독해에 가깝다. 그러나 그 둘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좋음은 『국가』에서 가장 높게 칭송받는 유이다.'라는 문장은 동일성 진술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독해에 비추어 참이지만 '정의적' 독해에 따르자면 거짓이다. '
『국가』에서 가장 높게 칭송받음'이란 기술이 좋음을 적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상 가능적인 어떤 성격을 지시할 뿐이기에 유와 유 사이의 동일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긍정적 서술문장은 '정의적' 독해에 따를 경우 본질이나 본성을 기술한다.> 

존재의 방식들 사이의 구분. '일상적' 독해와 '정의적' 독해 사이의 구분은 특정 논증들의 타당성 사이에서 유시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화편의 핵심에서 특히 중요한 특정 유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플라톤이 내놓는 다른 논증들의 타당성 또한 보여준다. 이를 통해 처음에 부당해 보였던 논증들의 타당성이 드러난다. 허나 이 구분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존재 방식의 구분을 산출하는 데에 있다. 이는 특히 감각적 개별자들과 유들이 존재하는 방식들 사이의 구분을 내놓는다.
  문장 '
σ is (a) φ'에서 'σ'가 감각적 개별자를 의미하고 'φ'는 유를 의미할 경우, 어떠한 유도 감각적 개별자이지 않기에, φ에 의해 지시되는 유는 주어진 감각적 개별자와 다르다. 따라서, 술부가 유를 지시하고 주부가 주어진 감각적 개별자를 의미하는 곳에서 '~은/는 ~이다(to be)'를 포함하는 참인 긍정 서술 문장은 감각적 개별자와 다른 어떤 것을 도입시킨다. 이는 감각적 개별자들의 존재가 언제나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된다. 이제 'σ'와 'φ' 모두 유를 의미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σ is (a) φ'는 '정의적' 독해에서 참이다. 따라서, 이 경우 술부가 한 유를 지시하고 주부가 주어진 유를 지시하는 경우 'to be'를 포함하는 참인 긍정 서술 문장은 주어진 유와 다른 어떤 것도 도입시키지 않는다. 이는 유들의 존재가 '그 자체로서' 있다는 주장에 근거가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감각적 개별자들의 경우, 'to be'의 서술적 용법은 언제나 그 개별자들과는 다른 어던 것을 포함하는 것이 정확한 적용이다. 유들의 경우, 'to be'의 서술적 용법은 어떤 다른 것을 가져오지 않고도 정확히 적용될 것이다. [p.11]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감각적 개별자들은 오로지 그것들의 어떤 다르 것들과의 관계를 포함함으로써만 존재자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유들은 그들 자신 스스로 존재자의 지위를 얻는다. 존재사는 'to be'의 서술적 용법의 한 측면 또는 그 구성요소이다. 이런 이유로 존재의 상이한 방식들은 'to be'를 포함하는 서술적 문장들의 상이하 유형들 속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0.2 방법론
  근사-주석. 대화-형식을 통해 소개된 주제들과 개념들 사이의 밀접한 상호연관은 일부 주제와 개념을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시켜 검토함으로써 다루는 일을 어렵게 만든다. 만일 이런 종류의 작업이 시도된다면, 고찰 과정에서 문제들에 대한 이해에 본질적인 일부 요소가 간과된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 글은 『소피스테스』의 대화 전개에 병렬적으로 전개된다. 거의 연속 주석(running commentary<이 따위 번역어밖에 없나?>)의 형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사선택이 이루어진다. 대화편에서 드러나는 모든 주제와 개념이 같은 정도로 논의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언어철학적 접근을 중시하였다(포괄적인 의미에서는 존재론적 문제들도 다루었다.). 특히 현대 언어철학자들이 제기할 만한 문제들을 중시하였고, 이에 대해 플라톤의 가능한 답변을 고려해 보았다. 이는 그가 실제로 말한 바로 그 말을 역사적으로 엄밀하게 재구성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해석과 문헌학적 고찰을 철학적 정신에 입각하여 결합시킨다.
  플라톤의 입장을 넘어서려는 시도도 있다. 그의 관점일 것으로 취한 바를 그가 예상하지 않은 지평까지 전개시킨다. 이러한 전개는 '철학사'가 '개념사'와 달라지는 그러한 방식들 중 한 가지 것이다. 플라톤에 대해 논할 때에는 이를 분명히 할 것이다.
  이 연구의 접근법에서 또 다른 특징은 논증에 대한 천착이다. 특정한 핵심 논증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분석하는 데에 많은 주의가 기울여진다. 저자는 플라톤이 합당히 지지하였을 논증들이, [p.12] 설령 건전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타당한 것인 경우, 개선되는 해석을 목표로 한다. 플라톤은 비루한 논증을 그의 등장인물들을 전시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플라톤에게 귀속되는 논증들의 질은 이따금 경쟁하는 해석들 사이의 평가기준이 되기도 한다.

편향된 관점? 일부 주석가들은 저자가 현대 언어철학이라는 유리한 고지에서 플라톤에게 접근한다는 정직한 고백에 불편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접근을 분석적 철학자들이 플라톤의 문헌을 그들의 해석에 맞게 왜곡시킴으로써 변질시킨다는 근거로 간주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저자의 응답은 문헌에 대한 해석 없는 접근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해석은 관점과 구체적 물음들을 포함한다. '본래의 문헌'을 완전히 '중립적' 방식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발상은 망상이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자신의 관점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고자 노력하는 것, 그리고 여러 대안적 접근들이 간으하다는 점을 자각하는 것이다. 가능한 한 가장 신뢰할 만한 '사진'을 제공하려는 자들조차 특정 주제와 발상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형식적 부록. 이 연구의 마지막 부분은 기호논리학의 형식적 설정에서 표혀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이 플라톤이 어느 지점에 서는지(적어도 이전 장들에서 도출된 문헌에 기초한 검토에 따라 어디에 서는지)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모호하지 않은 표현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형식적 표현은 다른 방식으로 간과될 수 있었을 그 이론의 약속들을 밝힐 수 있게 해줄 것이다(혹은 없는 약속을 만들어내는 일을 피하게 해줄 것이다).
  이 기호논리학적 정리는 해석적 연구의 결과들에 대한 압축적 요약이라 요점정리의 자연스러운 자리인 말미에 놓인 것이다. 기호 논리학 모르면 무시해도 좋다.(...중심 논증들 인공언어로 다 번역해서 증명 검토한 건데, 여기 올릴지는 좀 더 생각해 보고-_-)


[p.13] 1장 정의된 소피스테스

『소피스테스』에서 진술된 목표는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분할의 방법이 적용되는데 이는 1.2절에서 다룰 것이다. 플라톤은 분할 방법에 기초한 소피스트에 대한 여섯 기술들을 쏟아 붓는다. 각 기술은 적어도 일부 소피스테스들이 공유하는 특정 특성들에 초점을 맞춘다. 1.3절은 소피스테스와 현상(phenomenon)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소피스테스에 대한 여섯 기술은 그를 여러 기술(技術, techne)들을 지닌 것으로 현상한다. 이것이 현상 개념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새로운 성격규정의 출발점이다. 소피스테스의 본질(ousia? physis? 어쨌든 영어는 essence)은 정확하게는 실상 그가 결여하고 있는 기술들을 가진 것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 개념과 그에 연관된 거짓 개념은 난제를 산출해낸다. 이 난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소피스테스는 '정의를 통한 포획'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


1.1 대화편의 인물들과 과업
소피스테스를 정의하는 과업. 『소피스테스』는 『테아이테토스』의 마지막 말에서 이어진다. 소크라테스가 바실레우스 관아에 가 봐야 하겠다며 그들이 헤어지는 그 자리에서 내일 다시 보자 말하고 『테아이테토스』가 끝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테오도로스가 그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 말대로 자신들이 왔노라고 말하며 대화가 시작된다. 소피스테스의 극중 시기가 기원전 399년, 즉 소크라테스가 죽은 그 해임을 시사하는 것이자, 『테아이테토스』의 토론자들이 『소피스테스』의 토론자들에 포함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테오도로스, 테아이테토스, 소크라테스와 동명이인인 젊은이, 그리고 익명의 젊은이들과 또 한 사람이 있다.
  테오도로스는 엘레아로부터의 방문자를 대동하였다. 테오도로스는 그 손님을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무리에 속한 사람들 중 하나로 소개한다(216a3). 그리고 대단히 철학적인 자라고도 말한다(216a4). 이 언급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철학자를 알아보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고찰하도록 만든다. 신들이 종종 스스로 인간을 가장하여 들키지 않고 지상을 떠돌듯(216c4-6), 신적인 인간인 철학자들 또한 그렇기에 쉽사리 확인될 수 없다(216b8-216c1). 철학자들은 종종 정치가로, 때로는 소피스테스로 보이며, 어떤 때에는 완전히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16c8-216d2). 여기서 '가장(disguise)'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한다. 흥미롭게도 가장을 행하는 자는 바로 철학자이다. 이후에는 소피스테스가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일 것이다. 주석.5. Cf. Wolff(1991), 20. 이 대화편에서 대화자들은 부재하는 자들을 종종 문답을 통해 가장한다. 239c9-240c6 손님이 소피스테스를 대신하여 묻는 장면, 243d6-244b5 테아이테토스가 다원론자들을 대신하여 답하는 장면, 2446b244d13 테아이테토스가 일원론자를 대신해 답하는 장면, 246e2-248a3 테아이테토스가 거인족을 대신해 답하는 장면, 248a4-248e6 테아이테토스와 손님이 형상의 친구들을 대신해 답하는 장면.
  철학자들은 쉽사리 소피스테스 그리고 정치가와 혼동될 수 있기에, 소크라테스는 손님에게 철학자, 소피스테스, 그리고 정치가에 관한 엘레아의 입장(관점)을 묻는다(216d3-217a4, cf. Plt. 257a3-5). 소크라테스는 특히 엘레아인들이 '소피스테스,' '정치가,' '철학자'라는 그 이름이 셋이듯 그 유들 또한 셋이라 생각하는지 궁금해 한다(217b1-2). 손님은 엘레아에서 그 세 이름들에 상응하는 구별되는 세 유들이 있다고 답하고, 곧장 그 세 유들을 정의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 경고한다(217b1-4). 그는 그것들을 정의하는 일을 받아들인다. 그는 혼자 떠들기 보다는 대화자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 작업을 할 것이다. 이 전체 작업의 첫 번째 동반자로 테아이테토스가 선택된다. 첫 작업은 정의의 방식으로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소피스테스, 정치가, 그리고 철학자. 이 세 이름들에 부합하는 서로 구별되는 세 유들이 있다는 점은 이 대화편에서 논증되지 않는다. 플라톤 당대 이 세 이름들이 같은 교육의 종사자들을 지시하는지 다른 교육의 종사자들을 지시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이 주제에 대한 엘레아의 입장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이런 논쟁 때문일 것이다.
  [p.15] 소피스테스와 정치가에 대한 정의들로 인도하는 논의들은 동명의 대화편 『소피스테스』와 
『정치가』에서 보고된다. 플라톤은 철학자에 대한 정의를 목표로 할 세 번째 대화편일 『철학자』는 집필하지 않았다. 주석.8. Lauer (1966), 146; Frede (1996b), 149-51; Notomi (1999), 24-5; M. L. Gill (2010), 174) 등의 일부 주석가들은 세 번째 대화편이 기획되지도 않았으리라 믿는다. Davidson (1993), 114에 따르면 설령 '여러 이유로 […] 『필레보스』가 『철학자』라 불릴 수 없을지라도,' 그 대화편에 대해 저 집필되지 않은 대화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할 근거들이 있다.'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는 철학자에 대한 정의를 염두에 두고 착수된다.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는 단지 철학자로 보이는 것과 진정한 철학자를 구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1.2 분할의 방법
플라톤의 분할의 방법에 대한 개관. 분할의 방법은 유들을 유들로 '분할'함으로써 정의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주석.10. Moravcsik (1973a) 327-8. 플라톤은 분할 방법의 '교과서적 서술'을 제공하지 않는다(그에 근사한 것은 Phlb. 16b5-18d2이다). 주석.11. Sph. 253d1-253e3은 전통적으로 분할 방법을 기술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cf. Conford (1935), 266-8; Lauer (1966), 155; Berman (1996), 28-9; Fattal (1991), 155-6. 일부 주석가들은 최근 해당 구절의 두 번째 부분(253d5-253e3)이 분할 방법에 관련한다는 점을 부정했다: cf. Trevaskis (1967), 120-3; Gómez-Lobo (1977), 36-47; Bordt (1991), 523-4. 여기에서는 플라톤의 파편적인 언급들과 그의 시행에 기반하여 거칠게 성격규정하도록 한다.
  유를 나눈다는 것은 (1) 분할되는 그 유에 직접 종속되고, (2) 짝으로 분해되며, (3) 나뉘어지는 그 유를 소진하는(완전히 채우는) 둘 또는 그 이상의 한정된 수의 유들로 규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cf. Sph. 219a8-219c9), 기술이라는 유는 제작적 기술과 획득적 기술이라는 두 유들로 나뉜다. 이 두 유들은 (1) 기술 유에 직접 종속되고(왜냐하면 그 둘 모두 기술 유에 종속되며 어느 하나도 기술 유에 종속되는 어떤 유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2) 분해되며(양자 모두에 들어가는 아무것도 없기에), (3) 기술 유를 완전히 채운다(기술 유에 들어가는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저 둘 중 어느 하나 아래에 들어가기에).
  만일 유 F를 정의하고 시도하고 있다면, F가 종속하는 유 G를 규정함으로써 시작한다. 만일 G가 F와 동연인 유들로 분할될 수 있다면, 이 분할을 시행하고 그 과정은 종결된다. 그 대신 만일 G가 그렇게 분할될 수 없다면, F가 그 중 하나에 종속하는 그런 유들로 분할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유를 가지고 G에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이 작업은 F가 그 중 하나와 동치인 유들에게로 한 유가 분할되는 단계에 당도할 때까지 반복된다.[p.16] F에 대한 정의는 F가 종속하는 것으로서 발견된 유들과 F와 동치인 유를 연달아 언급함으로써 확보된다.
  분할 방법에 대한 이 거친 묘사의 중심 개념은 종속이라는 개념이다. 종속을 정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적당한 외연적 포함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모든 유들 F와 G에 대하여, G가 F가 포함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다른 것을 제외시킬 경우 F는 G에 종속한다. 종속은 적당한 외연적 포함보다 강한 의미이다. 설령 모든 유 F와 G에 대해, 오직 G가 F가 포함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다른 것들을 배제시키는 경우에만 F가 G에 종속한다 하더라도, 그 역은 거짓이다. 유 F가 유 G에 종속한다는 것은, 그 추가적인 필요조건이 F에 대해 제기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참되게 그리고 적합하게 G가 언급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정의에서 분할의 방법을 활용하는 데에 대한 마지막 문단의 설명이 상정하는 형이상학적 전제들은 언급할 만하다. 만일 유 F가 유 G에 종속한다면, F는 G가 분할될 수 있는 유와 동치이거나 F가 그런 어떤 유에 종속한다.

변증으로서 분할의 방법. 분할의 방법은 플라톤의 후기 철학에서 점차 더욱 중요해진다. 『고르기아스』(454d1-455a2, 463e3-466a6), 『국가』(5.454a-9) 등에서 등장하고, 『파이드로스』(265c8-266c1, cf. 271c10-271d5, 277b5-8)에서는 변증과 동일시된다. 그 방법은 『크라튈로스』(424b7-425c8), 『소피스테스』, 『정치가』, 『필레보스』에서 사용된다. 

  <파이드로스』 265c-266c까지 인용. 뤼시스 연설 이후 에로스에 대해 논하면서 그 종류를 나누는 논의로 들어간다. 자연스러운 마디에 따라 형상들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고, 거기서 에로스(사랑)이라는 이름을 나누어 가지는 것들 중 광기가 들어간다는 걸 발견한다는 논의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이런 분할과 종합에 대한 애호가라 자처한다. 그는 이런 걸 할 줄 아는 자가 변증가라 말한다.>

분할의 방법이 유들을 다루기에, 그 방법과 변증의 동일시는 『국가』에서의 변증교육(cf. 7.532a1-532b5)을 선명하게 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분할 방법의 일부 특성들:

(1) 분할에 의해 도달한 유들은 임의로 선택되지 않는다. 반드시 유들의 객관적 관절을 따라야만 하며 '어떤 부분도, 마치 못난 도살자마냥 부숴 버리지' 않아야만 한다(Phdr. 265e1-3).주석.16. philip (1966), 346.
(2) 『정치가』(262a3-264b6)에서 플라톤은 분할에서 소규모 종들을 해당 유 내의 여분에 대비시켜 고립시키는 일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동물을 인간과 (야생)짐승으로 나누면 안 된다. 이 경우 인간이나 짐승이나 동물의 부분일 뿐 그 '종'은 아니다. 유의 모든 각 종은 그 유의 부분이지만, 모든 부분이 종은 아니다. 유들을 나눌 경우 언제나 획득되는 부분들이 또한 종들이기도 한 한에서 행해야 한다. 
주석.17. Trevaskis (1967), 126; Cavini (1995), 131.
[p.18] (3) 같은 유가 하나 이상의 방식으로 분할될 수 있다. 일례로, 
『소피스테스』(219a8-219c9)에서 기술은 제작기술과 획득기술로 나뉘지만, 『정치가』(258b7-258e7)에서는 지식이 실천적 지식과 순수하게 인지적 지식으로 나뉜다.(기술techne과 지식episteme은 같은 유인 듯하다. cf. Sph. 257c7-257d3 그리고 Plt. 258b7, 258d5.)
(4) 때로 분할은 둘 이상의 종속하는 종들로 이끈다. 그 수는 가능한 최소이며 한정되어야 한다. (cf. Plt. 287c3-5; Phlb. 16c10-16e2)
(5) 분할의 방법은 다수의 목적을 갖는다. (5.1) 유들을 정의하는 데에 기여한다. (5.2) 분류들을 산출한다.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정의될 유가 종속하지 않는 분지들은 분할되지 않는다.  분류를 위한 분할 방법의 사용이 린나이우스의 방법론 이후의 계통도 구축에서 사용되는 철학적으로 흥미롭지 않은 활동으로 간주될 필요는 없다. 분류는 특정 주제 영역들의 개념적 구조를 밝혀줄 것이다. (5.3) 분할 방법은 애매성을 제거하는 데에 사용된다. (5.4) 분할 방법은 지적 능력을 증진시키는 활동으로서 수행된다.
(6) 분할은 분할 불가능한 유들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만일 분할이 정의를 목표로 한다면, 오직 정의될 한 유만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고려된다. 만일 분할이 분류를 목표로 한다면, 아무런 종속하는 유도 포함하지 않는 유들만이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된다.
(7) 초기 대화편들에서 플라톤은 정의가 설명력을 가져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만일 '이러저러함'이 경건을 정의한다면, 이러저러한 것임은 반드시 그 어떤 경건한 것이든 왜 경건한지 설명해야만 한다. [p.19] 정의들을 산출하기 위해 분할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이러한 설명 요구를 충족시키는지, 어떻게 그리하는지는 불분명하다.
(8) 변증가는 분할의 일부 분지가 사소한지 여부를 개의치 않는다. 변증은 직면한 유들에 의해 촉발되는 감정적 반응들을 무시한다.(cf. Sph. 226e8-227b6)
(9) 변증가는 명칭에 개의치 않는 것이 허용된다. 분할을 통해 지목된 분지가 무명이라면, 변증가는 그대로 내버려 두거나(cf. Sph. 220a1-3; 225b13-225c6; 226d5; 267a10-267b2) 신조어를 도입한다. (cf. Sph. 220c7-8; 222c9-222d2; 223d6-9; 224b4-224c3; 225a9-12; 267d4-267e3; Plt. 261e1-7)
(10) 플라톤은 종종 분할을 종합의 역순과 결부시킨다(cf. Phdr. 265c8-266c1). 분할이 단일 유로부터 출발하여 둘 또는 그 이상의 종속 유들에 당도하는 반면, 종합은 여러 특수한 사례들(감각적 개별물들이든 개념적 유들이든)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포괄하는 단일 유에 도달한다. 분할에 앞서 종합이 수행될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 한 유를 둘 혹은 그 이상의 종속 유들로 분할하기 위해서, 분할될 일반 유를 규정해야만 한다. 이 규정은 종합에 근거할 것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의해 제시되는 분할의 예들 중 어느 것도 사전 종합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분할이 출발점으로 삼는 유는 언제나 즉각적인 직관 같은 것에 의해 규정되는 듯하다. 플라톤의 시행은 대신에 종합이 분할 기간 내에 전개된다는 것을 밝혀준다. 유 F가 분할되어 나올 둘 또는 그 이상의 유들을 기대하고 있을 때, 종종 F의 여러 구체적 사례들을 종합하고 그로써 F가 분할되어 나올 그 유들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Sph. 219a10-219c1; 219cc-9; 222c3-222d2; 226b2-226c9; 226e5-227a10; 267a10-267b2; Plt. 258c3-258e7)
(11) 분할의 방법은 플라톤 후기 철학의 성공적 측면이었다. 스페우싶포스는 분할의 방법을 통해 동물과 식물에 대한 분류학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p.20] (11.2)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분할 방법을 비판하며, 또한 자신의 생물학 저술을 이 방식으로 채운다. (11.3) 에피크라테스는 그의 희극에서 플라톤과 아카데미아 학파 사람들이 분할의 방법을 사용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는 비-철학자도 분할의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플라톤의 주목할 측면 중 하나라 여겼다는 것이다.

정의와 분류. 질문에 대한 답은 진리치와 적절성으로 평가된다. 특정 대상의 위치에 대한 물음에는 그 대상의 위치를 답하는 것이 참이며 또한 적절하다. 다른 위치를 답한다면 거짓이나 적절하며, 그 대상의 고유한 크기나 형태를 답한다면 참이지만 부적절하다. 이 질문에 다른 대상에 대해 위치 이외의 상태나 조건을 답한다면 거짓이자 부적절한 것이 된다. 
  [p.21]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도 유사한 점이 지적될 수 있다. 진리치와 적절성이 각기 모두 이야기될 수 있다.
  위치에 대한 질문은 위치선망 내의 정위를 요구한다. 질문에 포함된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를 구체화시키라는 요구이다. '그것은 어떠한가?'라는 물음은 질적인 선망에서의 정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근본적인 존재론적 분류에서 그것이 존재하는 그 계층들의 선망에서 정위를 요구한다. 그 물음에 답하는 것이 어떤 것을 정의하는 일이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정의들이 내적으로 분류들과 연결되는 까닭을 알 것이다. 또한 동일한 절차로서 분할이 분류와 정의 양자 모두를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치 물음에 대해서도 그 대답의 구체성과 정보량이 다를 수 있고,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그렇게 여러 방식으로 답할 수 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컵은 책상 위에 있고 또한 내 방 안에 있으며 대한민국에 있다는 식이다.> 이 정보량은 진리치와 적절성에 이은 세 번째 평가 척도이다.
  저자는 플라톤이 정의와 분류를 연계시킬 때 품은 생각도 이와 유사하다고 본다. 플라톤에게는 분류와 정의 모두 그 배후에 실재를 그 접합부에서 분할시키는 동일한 활동이 자리한다. [p.22] 그 근거는 플라톤이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 라는 물음과 '그것은 어떠한가(poion)?'라는 물음의 차이를 언급한다는 것이다(cf. Men. 71b3-4, 87b3).

소피스테스에 대한 여섯 가지 서술.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 분할의 방법을 도입하기 전에 대화자들은 먼저 낚시꾼을 정의 대상으로 삼아 이 방법을 연습한다(218c5-221c5). 그들은 이 방법을 소피스테스에 적용하여 여섯 가지 상이한 서술들을 얻는다(221c-232a7). 첫째로 부유한 명망가 자제들을 사냥하는 사냥꾼, 다음으로 말과 교육의 무역상, 또한 이러한 것들의 도매상, 그리고 자체제작판매자, 여섯 번째로 쟁론가라는 서술들이 확보된다. 여섯 번째로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논박을 통해 영혼을 허위의 지식으로부터 정화시키는 교육자로 보이게 된다.
  이 여섯 가지 서술들로 인해 테아이테토스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231b9). 소피스테스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보인다). 여섯 서술들은 각기 소피스테스의 본성을 규정하는 듯이 보이지만, 만일 소피스테스가 소피스테스의 기술이라는 하나의 기술로서 정의될 수 없다면, 그를 다른 기술자들로부터 구별해낼 수 없고, 그것은 정의라 할 수 없다. 그는 하나의 기술을 지닌 자로서 하나의 본성으로써 정의되어야 한다. 즉 여섯 서술들 중 어느 것도 참된 정의가 아니다. 이제 이 모든 기능들이 수렴되는 단 하나의 소피스테스술이라는 것을 찾아야 하나, 이러한 일은 어려워 보인다. 

[p.23] 현상적 전지(全知). 그들은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로 복귀하기에 앞서 이전의 여섯 서술들 중 대표적인 한 가지 것을 다시 검토하기로 한다. 그것은 반박술(antilogike)이다. 그들은 반박술의 전문가이며 다른 이들에게도 그것을 가르친다고 자부한다. <왜 반박술이 가장 대표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증이 대화편 내에 등장하는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Paolo 역시 따로 논증하는 바 없다. 대화편에서 이 이후의 부분을 논증으로 수용한다면, 다른 이들과 싸워 이기는 듯이 보임으로써 상대방이 무지를 시인하게 만들고 젊은이들을 사냥하며 또한 돈을 버는 모든 것이 논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결과들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이 다루는 주제는 단적으로 '모든 것들'이다. 천지만물에 현세와 내세, 신과 미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장인들의 각 기술 전부를 또한 다룬다.
  이로부터 논의의 다음 단계에 현상적 지식(doxastike episteme)이 도입된다. 그 누구도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왜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 없는지에 대한 논증이 대화편 내에서 불분명하다. 여기에서도 Paolo는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다. 구체적 개별자의 경우라면 episteme는 명제적 지식이 된다. 그러나 모든 명제적 지식을 개별적인 한 인간이 지닌다는 것과 관련된 논의를 대화편 내에서 찾기는 어렵다. 반면 '유(genos)'로서의 인간을 두고 말하자면, 그는 의사이거나 조타수이거나 하는 식으로 고유한 기술에 따라 그 정체성을 갖게 된다. 이 경우 모든 기술들의 전문가로서 하나의 유라는 것은 정의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유형(genos)의 인간이든 모든 기술들 각각 전부에 대한 전문가일 수 없다. 이 경우 episteme는 실천적 지식까지 함의할 것이다. 아마도 후자가 좀 더 대화편의 맥락 내에 위치시키기 용이할 것이다.> 그러나 소피스테스는 귀족 자제들에게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믿도록 만든다. 소피스테스가 그렇게 믿도록 만들었기에 젊은이들이 그들에게 돈과 몸을 바치며 따르는 것이다. 소피스테스가 실제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고, 또한 그러면서도 젊은이들에게는 그가 그렇게 보이므로, 결국 소피스테스는 아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것으로서 현상적 지식의 담지자이다(doxastike episteme에서 doxastikos는 여겨지거니 믿어진다는 한정을 주는 의미와 그러한 믿음이나 현상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의미 모두를 포함한다. 믿음을 만들어내는 지식, 지식으로 믿어지는 것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이제 소피스테스의 본질은 그가 실상 결여하고 있는 기술들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는 바로 그것이다.

조형적 모방과 언어적 모방. 조형 모방물을 산출해내는 기술과 소피스테스의 기술 사이의 유비를 도입하는 본(paradeigma, 233d3)을 통해 문제는 분명해진다. 조형적 모방을 행하는 자들은 모든 것의 모방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모방물들이 원본이며 또한 그 모든 원본들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믿도록 만들 수 있다. 언어적 모방자로서 소피스테스 또한 참인 문장들의 모방물들을 만들어 사태들의 진리로부터 동떨어진 어린 자들을 기만한다. 속은 자들은 소피스테스가 그의 모방물들이 참인 문장들이라고, 그리고 모든 참인 문장들을 자신이 만들 수 있다고 젊은이들이 믿도록 만든다(234b5-234d1). [p.24] 거짓 문장이 그 듣는 이들에게 모방의 원본인 참인 문장과 혼동되는 까닭은 전자가 후자를 모방한다는 그 사실 때문이다. 
  몇 가지 개념적 도구를 도입하자. 모든 모방은 어떤 것을 모방한다. 이것은 '인지적 기만(cognate deception)'과 결부된다. 인지적 기만은 모방물을 원본으로 간주하는 거짓 믿음을 청자에게 주입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기만은 두 종류이며 그와 함께 두 가지 모방물들이 있다. (1) '특수 모방'은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를 모방한 조각상 같은 것이다. 그것이 모방하는 대상에 대한 물음의 답은 고유명사이다. 이 경우의 인지적 기만은 잘못된 동일시이다. (2) '보편 모방'은 밀납 사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모방하는 대상을 물으면 일반 명사구로 답하게 된다. 이 경우의 인지적 기만은 잘못된 기술이다.
  거짓 문장들이 참인 문장들을 모방하는 것으로 간주될 경우 일반 모방이 작용하고 있다. 밀납 사과를 '사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과 같이, 특정 거짓 문장이 참인 문장을 모방할 때에, 기만 당하는 쪽에서는 바로 그 거짓 문장을 '참인 문장' 일반에 속하는 개별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동일시가 아니라 잘못된 기술이다.
  여기에서 '명제적 거짓'이라는 개념은 (그로써 거짓인 것으로 불리는 것은 문장이나 믿음 또는 명제이다) '존재론적 거짓' 개념과 (기만적으로 이러저러한 것에 대해 그것이 거짓으로 이러저러하다는 경우) 연결된다. 거짓 문장을 참인 문장으로 간주하도록 기만하는 거짓 문장은, 거짓 참 문장이다. <앞의 거짓은 명제의 내용, 뒤의 거짓은 명제의 참이라는 속성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상(eidolon), 모상(eikon), 현상(phantasma). 이어서 모방에 관련된 일종의 분류가 이루어진다(235b8-236d4). 소피스테스의 기술은 모방술의 일종인 바, 모방술은 모방물(mimema) 또는 상(eidolon)을 만들어 낸다. 이 상은 다시 원본을 닮은 모상과 [p.25] 원본을 닮지는 않았으나 닮은 것으로 보이는(phainetai) 현상으로 나뉜다. 원본의 비율과 채색을 따르는 조각이 모상이라면 원본의 비율과 색채를 왜곡함으로써 보는 자의 입장에서 원본에 닮은 것으로 여겨지도록 만들어진 것이 현상이다. 상의 이러한 두 종류가 나뉘듯 모방술 역시 둘로 나뉘는 것이다.
  모상과 현상 사이의 구분은 그것들이 유발하는 인지적 기만과 관련된다. 전자의 경우 인지적 기만은 모방물이 원본의 일부 특성들을 지님으로써 이루어진다. 현상의 경우 그것은 원본의 일부 특성을 지닌 것처럼 보임으로써 기만을 이루어낸다. 여기에서는 기만당하는 자에게 추가적인 거짓이 개입된다. 즉 해당 현상은 그것이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원본의 일부 특성들을 실제로는 결여하고 있다. 모상이 원본의 일부 특성을 지닌다는 참, 사실에 근거하는 것과는 상반된다. 모상과 현상 모두 일차적으로 거짓이며, 현상의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거짓에 기초한 거짓인 것이다. 현상이 원본이라는 명제적 거짓에 더하여, 현상이 원본의 일부 특성들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는 존재론적 거짓이 추가된다.
  참 문장을 모방한 거짓 문장의 발화자는 청자가 그 거짓 문장을 참인 것으로 믿게 만들고자 한다. 그러한 기만의 일부는 참인 문장의 일부 특징들을 포함하는 거짓 문장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다른 경우 그 기만은 참인 측면을 포함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만 할 뿐 실제로는 원본과 아무런 특성도 공유하지 않는 거짓 문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에서 말로 된 모상이, 후자에서 말로 된 현상이 나온다. [p.26] 주석.47. Gulley (1962), 149; Bluck (1963), 59; Tilghman (1969), 160 등은 참인 문장이 모상, 거짓인 문장이 현상이라 간주한다. 그러나 Paolo는 이것이 오류라 주장하며, Szif (1998), 402; Brown (2010), 161이 이 관점이 오류라는 근거로 제시된다. <나는 Bluck 등이 맞다고 본다. 일례로 유들의 결합 (논리적 순서로서)이전에 진술(logos)는 성립할 수 없고, logos의 구성요소인 명사는 사물을, 동사는 사태를 '지시'한다는 해당 대화편의 논의를 무시할 수 없다.>

탐구자들이 면한 난점들. 이 지점에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한다. 우선 소피스테스를 모상제작자로 분류할지 모방제작자로 분류할지 문제가 된다(236c9-10, cf. 235d2-3과 264c7-9). 두 번째로는 소피스테스가 반박을 제시하는 지점이 되는 그 유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236d1-4).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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