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라톤 『에우튀프론』의 독자들은 전형적으로 에우튀프론의 경건(εὐσέβεια)에 대한 다섯 가지 정의 시도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적 검토에 주의를 집중한다 (1) 경건은 누구든지 부정의를 저지른 자에 맞서 소송을 거는 일이다(5d-6e), (2) 경건은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다(6e-9d), (3) 경건은 모든 신들에 의해 사랑받는 것이다(9e-11b), (4) 경건은 신들이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산물을 산출하도록 봉사하는 올바름의 부분이다(11e-14b), (5) 경건은 기원과 제사의 기술이다(14b-15c). 그러나 이러한 논증적 사건들이 그 대화의 명백한 철학적 실체를 아주 잘 구성한다 할지라도 , 만일 우리가 그것들과 더불어 그 대화의 전반적인 의미까지 모두 충분히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대화의 참가자들을 몰아가는 그 복잡한 동기들을 또한 신중하게 철저히 검토 해 마땅하다. 플라톤 자신이 이런 종류의 검토를 유발시키길 바란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는 이상하게 복잡하고 긴 극적 도입부를, 거칠게 말해서 그 대화편 길이의 3분의 1에 달하는 그런 도입부(그 주제들이 연이은 경건으로의 탐구를 끊임없이 알리는)를 내놓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 도입부의 가장 혼란스럽고 아직 논의가 덜 된 요소들 중 하나를 꽤 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에우튀프론의, 그가 그의 아버지를 그의 아버지가 저질렀다고 그가 상상하는 그런 종류의 살인들에 수반되는 μίασμα - 더러움 -  때문에, 그리고 공정한 정의가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고소함에 있어서 정당화된다는, 그 단언이다(4b7-c3). 이 논문에서 나는 이러한 호소에 대한, 에우튀프론이 생각되어 왔던 것보다 더욱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진보적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나 또한 『에우튀프론』이 간접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법률적 변호의 역할을 하는 방식을 새로이 조명하는 한 가지 새로운 설명을 주장하고자 한다.

2) 『에우튀프론』의 도입부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첫번째 부분은 곧 있을 소크라테스의 공판을 소개하는 것이고 두번째 부분은 에우튀프론 자신의 송사를 상술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내 의도에 맞추어 나는 다음과 같이 가정하는 위험을 감수하고자 한다. 이 첫번째 부분와 뒤따르는 부분에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동기들을 에우튀프론과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완전히 고결하며, 『변론』의 소크라테스에 의해 공언된 동기들(예를 들어 『변론』 22e-23b, 29c-31c)과 동일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그것,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앎의 탐구(15c-16a)가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이 사업이 그 자체로 즐겁고 (주장컨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복'; 『변론』 41c3-4) 경건할 뿐만 아니라, 경건이 '남은 삶을 더욱 나은 삶이도록' 허용하리라는 것을(15e7-16a4), 특히 그것의 지속이 불경의 습격에 의해 위협받을 것임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3b-d, 5a-c, 12e, 15e-16a).

3) 자연스럽게, 일부 주석가들은 철면피스러운 위선과 뒤엉킬 그러한 표현들을 발견했다. 존 베버스루이스에 따르자면 예를 들어 허세가 심하고 답답하며 패륜아에 '나치청년단에서도 꽤나 잘 나갔을' 광신교도로서 에우튀프론의 전형적인 성격은 그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검토가 실제로 얼마나 모욕적이고 모자란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주목으로부터 주의를 떼어 놓았다. 우리가 이야기하게 되는 소크라테스는 처음에 적합한 정의에 대한 그의 기이한 원리를 가지고 에우튀프론을 압도하고(5c-d, 6d-e) 다음으로 이해가 아닌 단지 문자적 동의에 불과한 것을 바탕으로 궤변적으로 그를 두들긴다. 그러나 이러한 비평은 즐거울지는 모르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러므로 에우튀프론의 영혼을 불경하고 부정의하며 위선적으로 외면한 죄가 있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는다(베버스루이스, 184). 오히려, 베버스루이스께는 죄송하게도 (176, 184), 그것은 대화편 말미에서 법정 소환 전에  에우튀프론이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고, 그래서 그로써 그가 그의 잘못 세워진 소송을 몰수당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도록 플라톤이 일조하는 데에 가장 극적으로 효과적으로 보인다(후기 전통이 그러하듯이; D.L.2.29).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전략은 에우튀프론이 잠재적으로 행위방식을 훼손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만류함으로써 에우튀프론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친족들에게 유익하다. 이 모든 것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지금 초점을 맞추려는 에우튀프론이다.

4) 플라톤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소크라테스와 에우튀프론의 우연한 만남보다 5년 앞서 에우튀프론의 소작인 중 하나(ὁ πελάτης)가 그의 가문 노예들 중 하나(ὁ οἰκέτης)를 술에 취해 홧김에 죽였다. 에우튀프론의 아버지는 그 살인자를 묶었고 구덩이에 내던졌다. 그리고 - 그 일꾼이 살인자였기 때문에 - 아테네 종교적 조언가들(ἐξηγηταί) 중 하나로부터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조언을 기다리는 동안 그 살인자를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그 일꾼은 배고픔과 추위로 죽었다. 이에 대하여 에우튀프론이 이제 아르콘 바실레우스 앞에 에우튀프론의 아버지에 대하여 살인죄로 소송을(δίκη φόνου) 가져오는데, 그의 아버지와 그 자신(그리고 짐작컨데 그의 친족들) 모두를 그가 이런 종류의 부정의한 죽임을 곁에 있으면서 본 μίασμα에 대해서 정화하기 위해서이다(4b-e). 소크라테스는 당연히 이 이야기에 놀란다. 그 자신의 아버지에게 소송을 걸음으로써 에우튀프론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데(μαίνεσθαι, 4a1), 왜냐하면 남을 위해 가족을 고소한다는 것은(만일 실제로 불가능하지 않다면; 아래를라) 가장 드문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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