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in von einem Stücke konnte ich im obigen Beweise doch nicht abstrahieren, nämlich davon, daß das Mannigfaltige für die Anschauung noch vor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und unabhängig von ihr, gegeben sein müsse; wie aber, bleibt hier unbestimmt. Denn, wollte ich mir einen Verstand denken, der selbst anschauet )wie etwa einen göttlichen, der nicht gegebene Gegenstände sich vorstellete, sondern durch dessen Vorstellung die Gegestände selbst zugleich gegeben, oder hervorgebracht würden), so würden die Kategorien in Ansehung eines solchen Erkenntnisse gar keine Bedeutung haben. Sie sind nur Regeln für einen Verstand, dessen ganzes Vermögen im Denken besteht, d.i. in der Handlung,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welches ihm anderweitig in der Anschauung gegeben worden,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er also für sich gar nichts erkennt, sondern nur den Stoff zum Erkenntnis, die Anschauung, die ihm durchs Objekt gegeben werden muß, verbindet und ordnet. Von der Eigentümlichkeit unsers Verstandes aber, nur vermittelst der Kategorien und nur nur gerade durch diese Art und Zahl derselben Einheit der Apperzeption a priori zu Stande zu bringen, läßt sich eben so wenig ferner ein Grund angeben, als warum wir gerade diese und keine andere Funktionen zu Urteilen haben, oder warum Zeit und Raum die einzigen Formen unserer möglichen Anschauung sind.
→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가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직관하는 지성(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범주들은 단지, 그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즉,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직관에서 지성에 주어지는 그러한 잡다를 종합함을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 작용 속에 존립하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직관만을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이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그 이상의 근거를 제시토록 하진 않을 것이다.


Allein von einem Stücke konnte ich im obigen Beweise doch nicht abstrahieren, nämlich davon, daß das Mannigfaltige für die Anschauung noch vor der Synthesis des Verstandes, und unabhängig von ihr, gegeben sein müsse; wie aber, bleibt hier unbestimmt.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나는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 오로지 그 부문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그에 대해서, 잡다가 직관에 대해 지성의 종합에 앞서서, 그리고 그 종합과 독립적으로, 주어져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내가 위의 방식에서 도외시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지는 여기에서는 규정되지 않고 남는다.
Denn, wollte ich mir einen Verstand denken, der selbst anschauet (wie etwa einen göttlichen, der nicht gegebene Gegenstände sich vorstellete, sondern durch dessen Vorstellung die Gegestände selbst zugleich gegeben, oder hervorgebracht würden), so würden die Kategorien in Ansehung eines solchen Erkenntnisse gar keine Bedeutung haben.
왜냐하면, 내가 지성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스스로 직관하는 (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 그러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직관하는 지성(신적인 지성과 같은 어떤 것처럼, 그 지성이 주어진 대상들을 그 자신에게 표상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성의 표상을 통해서 대상들 자체를 동시에 주어지거나 또는 산출되는)을 생각한다면, 그러한 인식들과 관련하여 범주들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Sie sind nur Regeln für einen Verstand, dessen ganzes Vermögen im Denken besteht, d.i. in der Handlung,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welches ihm anderweitig in der Anschauung gegeben worden,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zu bringen, der also für sich gar nichts erkennt, sondern nur den Stoff zum Erkenntnis, die Anschauung, die ihm durchs Objekt gegeben werden muß, verbindet und ordnet.
그 범주들은 단지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 지성의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존립하는, 즉 작용 속에 존립하는, 잡다의 종합을, 그 잡다가 직관에서 지성에 다른 어디에서부터 주어지는,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러므로 지성이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직관을,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 그 범주들은 단지, 그 모든 능력들이 사유 속에, 즉,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직관에서 지성에 주어지는 그러한 잡다를 종합함을 통각의 통일로 가져오는 그 작용 속에 존립하는 그러한 지성에 대한 규칙들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그 자체로는 전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오히려 단지 인식의 재료를, 대상을 통하여 주어져야만 하는 직관만을 결합하고 질서지우는 것이다.
Von der Eigentümlichkeit unsers Verstandes aber, nur vermittelst der Kategorien und nur gerade durch diese Art und Zahl derselben Einheit der Apperzeption a priori zu Stande zu bringen, läßt sich eben so wenig ferner ein Grund angeben, als warum wir gerade diese und keine andere Funktionen zu Urteilen haben, oder warum Zeit und Raum die einzigen Formen unserer möglichen Anschauung sind.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 그러나 우리 지성의 특징에 대해서, 단지 범주들만을 가지고 오로지 곧장 이러한 방식과 그 범주들의 수를 통해서 통각의 통일을 성립시킨다는 것이 그 이상의 근거를 지시하도록 하지 않을 것이고, 왜 우리가 직접 다른 무엇도 아닌 이러한 판단들의 기능들을 가지는지, 또는 왜 시간과 공간이 우리의 가능한 직관의 유일한 형식들인지도 그 이상의 근거를 제시토록 하진 않을 것이다.

-蟲-
§ 21.
Anmerkung
주해

Ein Mannigfaltiges, das in einer Anschauung, die ich die meinige nenne, enthalten ist, wird durch die Synthesis des Verstandes als zur notwendigen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gehörig vorgestellt, und dieses geschieht durch die Kategorie¹. Diese zeigt also an: daß das empirische Bewußtsein eines gegebenen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eben sowohl unter einem reinen Selbstbewußtsein a priori, wie empirische Anschauung unter einer reinen sinllichen, die gleichfalls a priori Statt hat, stehe. - Im obigen Satze ist also der Anfang ein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emacht, in welcher ich, da die Kategorien unabhängig von Sinnlichkeit bloß im Verstande entspringen, noch von der Art, wie das Mannigfaltige zu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werde, abstrahieren muß, um nur auf die Einheit, die in die Anschauung vermittelst der Kategorie durch den Verstand hinzukommt, zu sehen. In der Folge (§ 26.) wird aus der Art, wie in der Sinnlichkeit die empirische Anschauung gegeben wird, gezeigt werden, daß die Einheit derselben keine andere sei, als welche die Kategorie nach dem vorigen § 20. dem Mannigfaltigen einer gegebenen Anschauung überhaupt vorschreibt, und dadurch also, daß ihre Gültigkeit a priori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unserer Sinne erklärt wird, die Absicht der Deduktion allererst völlig erreicht werden.
→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이것은 그러므로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경험적 직관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러하듯,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그러므로 앞선 명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오로지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통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 위해서,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을 도외시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그와 같은 통일이 범주들이 바로 전 § 20.에 따라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됨으로써,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¹Der Beweisgrund beruht auf der vorgestellten Einheit der Anschauung, dadurch ein Gegenstand gegeben wird, welche jederzeit ein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einer Anschauung Gegebenen in sich schließt, und schon die Beziehung dieses letzteren auf Einheit der Apperzeption enthält.
→ ¹그 논증은,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러한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리고 이러한 통각의 통일에 대한 주어진 잡다의 관계를 이미 포함할 것이다.


Ein Mannigfaltiges, das in einer Anschauung, die ich die meinige nenne, enthalten ist, wird durch die Synthesis des Verstandes als zur notwendigen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gehörig vorgestellt, und dieses geschieht durch die Kategorie¹.
잡다는, 그 잡다가 하나의 직관 안에,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 내가 나의 직관이라 이름하는 하나의 직관 안에 포함되는 잡다는 지성의 종합을 통하여 자기의식의 필연적 통일에 속하는 것으로 표상되고, 이러한 것은 범주들을 통하여 일어난다.
Diese zeigt also an: daß das empirische Bewußtsein eines gegebenen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eben sowohl unter einem reinen Selbstbewußtsein a priori, wie empirische Anschauung unter einer reinen sinllichen, die gleichfalls a priori Statt hat, stehe.
이것은 그러므로 가리킨다: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경험적 직관이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것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존립한다는 것.
→ 이것은 그러므로 단일한 직관의 주어진 잡다에 대한 경험적 의식이, 경험적 직관이 마찬가지로 선험적 자리를 가지는 순수한 감성 형식들 아래에서 그러하듯, 순수한 자기의식 아래에서 선험적으로 존립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 Im obigen Satze ist also der Anfang ein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emacht, in welcher ich, da die Kategorien unabhängig von Sinnlichkeit bloß im Verstande entspringen, noch von der Art, wie das Mannigfaltige zu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gegeben werde, abstrahieren muß, um nur auf die Einheit, die in die Anschauung vermittelst der Kategorie durch den Verstand hinzukommt, zu sehen.
- 앞선 명제에서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에 대해서는 되이시해야만 한다, 오로지 통일에 대해서, 그 통일이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보기 위해서.
→ - 그러므로 앞선 명제에서 순수한 지성개념들에 대한 연역의 시작이 이루어진다. 그 연역에서 나는, 범주들이 감성에 독립적으로 순전히 지성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오로지 지성을 통해 범주를로써 직관 안에 부가되는 통일에 대해서만 주목하기 위해서, 또한 잡다가 경험적 직관에 주어지는 방식을 도외시해야만 한다.
In der Folge (§ 26.) wird aus der Art, wie in der Sinnlichkeit die empirische Anschauung gegeben wird, gezeigt werden, daß die Einheit derselben keine andere sei, als welche die Kategorie nach dem vorigen § 20. dem Mannigfaltigen einer gegebenen Anschauung überhaupt vorschreibt, und dadurch also, daß ihre Gültigkeit a priori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unserer Sinne erklärt wird, die Absicht der Deduktion allererst völlig erreicht werden.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지시된다, 그와 같은 통일이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 범주들이 그에 따라 바로 전 § 20.에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되는 것,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
→ 결론적으로 감성에서 경험적 직관이 주어지는 것과 같은 방식(§ 26.)으로, 그와 같은 통일이 범주들이 바로 전 § 20.에 따라서 주어진 직관 일반의 잡다에 따라 제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무엇도 아니리라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통일의 선험적 정당성이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해명됨으로써, 연역의 의도가 처음으로 충분하게 성취된다는 것이 지시될 것이다.
 
¹Der Beweisgrund beruht auf der vorgestellten Einheit der Anschauung, dadurch ein Gegenstand gegeben wird, welche jederzeit ein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zu einer Anschauung Gegebenen in sich schließt, und schon die Beziehung dieses letzteren auf Einheit der Apperzeption enthält.
¹그 논증은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리고 이러한 후자의 관계가 이미 통각의 통일에 대해 포함할 것이다.
→ ¹그 논증은, 그를 통하여 대상이 주어지는, 항상 직관에 주어진 잡다의 종합을 수반하는, 그러한 직관의 표상된 통일성에 근거하고, 그리고 이러한 통각의 통일에 대한 주어진 잡다의 관계를 이미 포함할 것이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