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분할을 통해 나오는 것. a. 그 자체로(kath' hauto) 이야기되는 being. b. 어떤 것에 대해(pros allo) 이야기되는 being.

b-1. 유(genos, 형상-eidos) 차원에서 필연적으로 결합하는 부수적 술어 (e.g. The Being is the same) b-2. 가시적인 것들 차원에서 이야기되는 우연적으로 결합하는 부수적인 술어 (e.g. Theaetetus is sitting)

분할은 유를 대상으로(b-1) 진행되지만, 소피스트라는 유에 대해서는 사냥, 장사, 쟁론, 교육 등 현실의 소피스트 개개인이 처한 상태(b-2)가 먼저 분할되어 나온다. 그러나 정의에는 a 차원이 필요하다. 문제! The Being, The Same, The Different 등과 달리 복합적인 유로서 낚시꾼, 소피스트 등도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본질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0. 소피스트가 정의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기존 해석. 여기에서 적용되는 분할의 기술 자체가 불완전하다. Brown의 제안. 분할의 대상인 소피스트가 기술자가 아니다. + 무지한 자이며 거짓을 사용한다. 이를 테면, negative한 것은 정의되지 않는다. 소피스트는 negative하다. 소피스트는 정의되지 않는다. 그래서 소피스트는 negative하다. (순환오류?) 대화편 내에서 Not-Being의 형상이 발견되었고 그것의 본성(physis)이 무엇인지 규정되었다. 나아가 Not-Beautiful, Not-Just 등도 the Being으로 간주된다. 단지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정의되지 못한다는 것은 대화편의 서술에 부합하지 않는다.


0. 거짓을 만들어낼 줄 아는 그 앎과 거짓이 모상으로서 원본으로 삼는 바의 것 그 자체를 아는 앎은 같은 앎인가? 대상 자체를 아는 자가 그 대상의 거짓된 모상을 만들 경우. 원본의 비율을 닮은 모상과 비율을 왜곡하되 겉보기에만 원본과 닮아 보일 뿐인 모상. 본래의 비율과 '무관한' 모상을 만들어내는 경우, 즉 거짓 모상을 만들어내는 경우에 원본에 대한 앎은 기술 성립의 필요조건이 아닐 수 있다.


0. 소피스트가 젊은이를 사냥하거나 교육적인 것들을 매매하거나 쟁론하거나 상충하는 믿음들을 영혼으로부터 정화해내는 교육을 수행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으며, 때에 따라 소피스트에 대해 참되게 서술될 수 있다. 다만 소피스트가 소피스트인 한에서 그 자신의 기술로써 해내는 일로부터 내재적으로 도출되는 참인 술어들과는 구분된다. 낚시꾼의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같은 방식의 분할 '실패'가 발생할 수 있다. 낚시꾼도 잡은 물고기를 팔거나 물고기의 내장을 해체하거나 요리를 할 수도 있다. 다만 낚시꾼은 그 자신의 기술로 그러한 일들을 한다고 자부하거나 공언하지 않는다. 반면 소피스트는 자신의 기술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자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자기 자신의 기술로 '그 자체로' 이루어내는 일과 그 자신의 본질과 무관하게 부수적으로 우연히 이루어내는 일 사이의 구분 기준은 낚시꾼과 소피스트 양자에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이에 대한 논의는 완결되지 않았다. 다만 그 자체로 서술되는 것과 다른 어떤 것에 관련하여 서술되는 것, 그리고 유에 대한 서술과 가시적인 것(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서술의 구분이 사례로 제시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구분하는 방식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소피스트』에 한정하여 논해 보자면, 단순한 유와 복합적인 유와 가시적인 것 사이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한지 모두 설명될 수는 없다. 테아이테토스는 마치 여러 유들의 복잡한 결합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는 유(단순하든 복합적이든)와 달리 시간 중에 변화하는 존재자이다. 이러한 존재자의 구성과 운동은 『티마이오스』의 논의를 거치기 이전에 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복합적인 유, 단순한 유와 시간 내의 존재자 사이의 복잡성을 지닌 듯한 그러한 중간자적 유에 대한 논의는 『필레보스』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구분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 그 자체와 무한한 하나들과 그 사이의 하나들.


0. 『고르기아스』에서의 요리와 화장은 『소피스트』 논의에 비추어 볼 때에도 기술일 수 없는가? 『소피스트』에서의 분할과 『정치가』에서의 분할은 어떻게 다른가? 철학자는 the being의 밝은 영역에서 눈부심으로 인해 분간하기 어렵고, 소피스트는 the not-being의 어두운 영역에서 그 어둠으로 인해 분간하기 어렵다. Brown은 이 구분을 근거로 소피스트 분할-정의를 실패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미 『소피스트』의 결론은 중립적인 소피스트술을, 철학자도 소피스트도 공유할 수 있는 종류의 중립적인 것으로서 제시하고 있지 않나?


-蟲-

0. 『테아이테토스』

앎의 후보로서 지각이 제시되었지만 전적으로 참(앎)이기만 하거나 전혀 말할 수 없게 되는 문제에 봉착한다. 감각을 통한 지각만으로는 영혼의 인식활동을 포함할 수 없으며, 이러한 영혼의 대상을 향한 접촉 없이는 있는 것에 대한 파악이 불가능하다. 참인 믿음이 앎의 두 번째 후보로 제시된다. 앎=참인 믿음이라면, 앎과 믿음 전체의 관계는 어찌 되는가? 앎과 참인 믿음, 알지 못함과 거짓 믿음이 각기 동일하다면 믿음 중에서 거짓 믿음을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가? 어쨌든 거짓 믿음 문제가 제기되고, 이에 대한 탐구가 시도된다. 지각 논의에 한정하자면 거짓은 불가능해 보였다. (부분 없는 단순한 것에 대한 인지활동이 모두 겪는 문제 아닌가? 정말로 대상의 구조에 대한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인가?)

안다/알지 못한다 두 경우와 관련하여 착오를 통한 거짓 가능성 탐구 실패. 아는 것A와 아는 것B를 혼동하여 거짓을 믿는다면, (거짓을 믿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아는 둘 모두를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알지 못하는 것A와 알지 못하는 것B를 혼동할 수는 없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을 혼동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이 부분에서 "이상하다"는 결론을 뒷받침하는 논증이 없는가? 확인 필요) 

안다/알지 못한다 두 경우를 통한 탐구에서 있다/있지 않다 두 경우를 통한 탐구로 이행. 있지 않은 것 그 자체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있지 않은 것 취급 가능성 배제. 거짓은 있는 것들 사이에서 탐구되어야 한다. (『소피스트』도 유사. 그러나 있지 않은 것도 독립적으로 취급 불가능하고 있는 것 역시 독립적으로 취급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는 있는 것들 사이에서 있는 것 그 자체와 다른 것을 토대로 삼아 있지 않은 것이 확보된다. 어떤 식으로도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러한 있지 않은 것은 배제되었다.)

믿음/믿지 않음 두 경우를 통한 거짓 가능성 탐구가 잠시 진행된다. 구도는 안다/알지 못한다 경우와 마찬가지로 보인다. 있다/있지 않다 경우가 다른 두 경우와 독립적이라면, 앎과 믿음은 단순한 논의의 반복으로 생각된다.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사이의 착오는 불가능하다/믿는 것과 (전혀) 믿지 않는 것 사이의 착오는 불가능하다. 알지 못하는 것과 믿지 않는 것과 있지 않는 것 셋 모두 일종의 인지 영역과 같은 것으로부터 배제된 대상을 논한다는 점에서 같은 이야기인가? 있지 않은 것이 배제된다면, 같은 방식으로 알지 못하는 것과 믿지 않는 것도 함께 배제되는가?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일반적 상식이 지금 논의에서 개입될 수 있는가, 혹은 이 가능성도 거짓 가능성과 함께 부정되고 있는가? 7월 콜로퀴움 목표로.


0. 『파르메니데스』

"연습" 논증들 정리할 것. 

연습 이전 제논의 가정과 연습에서 파르메니데스의 가정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설명 필요. 연습 이전까지의 논의가 형상과 형상에 참여하는 것들, 혹은 형상들의 저 세계와 인간들의 이 세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역설들인 반면, 연습 이후 논의는 형상들 자기 자신들 사이에서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인가? 정말로 그런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러한 논의 영역의 이행이 발생하는지 설명 필요.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가 제논의 가정에 관련하여 가시적인 것들에 관련하여서는 논의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탄하였다고 말한다. 우선 이 번역 맞는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제한을 가하는 부분이 어디고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 강독 과정에서 추가 검토.


0. 『소피스트』

참의 종류가 구분되고 있는지. 있는 것들이 진짜로 있다. 실재성, 현실성, 구체성. 원본과 모상의 관계에서. 다른 한편 언어, 판단, 기타 영역에서 명제 차원의 거짓.

분할 문제. 낚시꾼 예행연습 분할은 낚시꾼의 정의에 성공한다. 반면 소피스트 분할은 여섯 차례 반복하여 서로 다른 규정들을 소피스트에 부여하게 되고, 형상 이론과 진술 분석을 거쳐 나온 거짓 가능성 증명 이후 비로소 마지막 분할이 소피스트의 정의에 이른다. 이 차이는 소피스트의 거짓 모상 제작 기술과 관련되는가? 아닐 듯. 소피스트가 사냥꾼이거나 장사꾼이거나 교육자인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정치가나 철학자도 사냥꾼이거나 장사꾼이거나 교육자일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열려 있다. 낚시꾼도 물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 때에 한하여 장사꾼에 개입한다. 여전히, 낚시꾼이 장사꾼이라는 명제가 한편으로 참이고 다른 한편으로 거짓일 수 있다면 소피스트에 대해서도 한편으로 영혼을 정화하는 교육자라는 술어가 참되게 진술될 수 있고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는 이것이 거짓일 수 있다. 문제는 필연적으로 결합하는 술어들이 있는지, 그리고 이를 기준으로 우연히 결합하는 술어들과 관련하여 각 명제들의 진리치는 어떻게 처리되는지, 본질이나 정의에 해당하는 술어 없이 분할을 통한 정의 시도가 애초에 가능한지. 유나 형상은 단순한 한에서 그 자체의 본질과 그 외의 성질들을 구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소피스트라는 유라든지 혹은 테아이테토스와 같은 한 사람까지 갈 경우 정의에 필요한 기준점이 확보될 수 있을지? 내포와 외연의 적절한 결합 등을 제안하는 최근 논문이나 앞서 언급한 소피스트의 거짓 제작 기술 관련한 해석 시도는 별로 효과적이지 못할 듯하다. 소피스트에 대한 마지막 분할 이외의 다른 모든 분할들은 정의에는 실패하나, 그것이 거짓 진술을 구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피스트가 정의상, 혹은 본질적으로 사냥꾼이거나 교육자일 수는 없다. 그런데, 거짓 모상 제작자인 소피스트는 본질적으로 제작자일 수는 있는가? 좀 더 구체화. 6월 초까지 개괄 요약 시도. 정의, 분할, 양상.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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