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r berühmte … Kategorien. - B; A statt dessen:
- 저 유명한 … 범주들. - B; A는 그 대신에:

Es sind aber drei ursprüngliche Quellen, (Fähigkeiten oder Vermögen der Seele) d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en enthalten, und selbst aus keinem andern Vermögen des Gemüts abgeleitet werden können, nämlich,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Darauf gründet sich 1) die Synopsis des Mannigfaltigen a priori durch den Sinn; 2)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nldungskraft: endlich 3)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durch ursprüngliche Apperzeption. Alle diese Vermögen haben, außer dem empirischen Gebrauch, noch einen transz., der lediglich auf die Form geht, und a priori möglich ist. Von diesem haben wir in Ansehung der Sinne oben im ersten Teile geredet, die zwei andre aber wollen wir jetzt ihrer Natur nach einzusehen trachten.
→ 그러나 그것은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그것들(영혼의 소질들이나 능력들)은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거기에 근거한다.→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경험적 사용 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가진다. 그 사용은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려 한다.


Es sind aber drei ursprüngliche Quellen, (Fähigkeiten oder Vermögen der Seele) d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en enthalten, und selbst aus keinem andern Vermögen des Gemüts abgeleitet werden können, nämlich,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그러나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영혼의 소질이나 능력) 그것들이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는, 그리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
→ 그러나 그것은 세 가지 근본적 원천들이다. 그것들(영혼의 소질들이나 능력들)은 모든 경험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을 포함하고, 그 자체로 감성의 다른 어떤 능력들로부터도 파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즉,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이다.
Darauf gründet sich 1) die Synopsis des Mannigfaltigen a priori durch den Sinn; 2)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nldungskraft: endlich 3)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durch ursprüngliche Apperzeption.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그에 근거한다;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그에 근거한다: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그에 근거한다.
→ 1) 감각을 통한 선험적 잡다의 총괄(일람)이, 2) 이러한 잡다의 상상력을 통한 종합이, 끝으로 3) 이러한 종합의 근원적 통각을 통한 통일이 거기에 근거한다.
Alle diese Vermögen haben, außer dem empirischen Gebrauch, noch einen transz., der lediglich auf die Form geht, und a priori möglich ist.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가진다, 경험적 사용 이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그 사용이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는, 그리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 이러한 모든 능력들은 경험적 사용 외에 초월론적 사용 또한 가진다. 그 사용은 다만 형식에만 해당하고, 선험적으로 가능한 것이다.
Von diesem haben wir in Ansehung der Sinne oben im ersten Teile geredet, die zwei andre aber wollen wir jetzt ihrer Natur nach einzusehen trachten.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고자 한다.
→ 이러한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감각과 관련하여 위 첫번째 부문에서 서술하였다. 그러나 두번째 다른 부분은 우리가 이제 그 능력들의 본성을 통찰하고자 노력하려 한다.

-蟲-
Der erste dieser beiden berühmten Männer öffnete der Schwärmerei Tür und Tor, weil die Vernunft, wenn sie einmal Befugnisse auf ihrer Seite hat, sich nicht mehr durch unbestimmte Anpreisungen der Mäßigung in Schranken halten läßt; der zweite ergab sich gänzlich dem Skeptizism, da er einmal eine so allgemeine für Vernunft gehaltene Täuschung unseres Erkenntnisvermögens glaubte entdeckt zu haben. - Wir sind jetzt im Begriffe einen Versuch zu machen, ob man nicht die menschliche Vernunft zwischen diesen beiden Klippen glücklich durchbringen, ihr bestimmte Grenzen anweisen, und dennoch das ganze Feld ihrer zweckmäßigen Tätigkeit für sie geöffnet erhalten könne.
→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Vorher will ich nur noch die Erklärung der Kategorien voranschicken. Sie sind Begriffe von einem Gegenstande überhaupt, dadurch dessen Anschauung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als bestimmt angesehen wird. So war die Funktionen des kategorischen Urteils die des Verhältnisses des Subjekts zum Prädikat, z.B. alle Körper sind teilbar. Allein in Ansehung des bloß logischen Gebrauchs des Verstandes blieb es unbestimmt, welchem von beiden Begriffen die Funktion des Subjekts, und welchem die des Prädikats man geben wolle. Denn man kann auch sagen: Einiges Teilbare ist ein Körper. Durch die Kategorie der Substanz aber, wenn ich den Begriff eines Körpers darunter bringe, wird es bestimmt: daß seine empirische Anschauung in der Erfahrung immer nur als Subjekt, niemals als bloßes Prädikat betrachtet werden müsse; und so in allen übrigen Kategorien.
→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와 같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일 것이다.→ 오로지,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Der erste dieser beiden berühmten Männer öffnete der Schwärmerei Tür und Tor, weil die Vernunft, wenn sie einmal Befugnisse auf ihrer Seite hat, sich nicht mehr durch unbestimmte Anpreisungen der Mäßigung in Schranken halten läßt; der zweite ergab sich gänzlich dem Skeptizism, da er einmal eine so allgemeine für Vernunft gehaltene Täuschung unseres Erkenntnisvermögens glaubte entdeckt zu haben.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이 유명한 양쪽의 방법들 중 전자는 도취의 문과 출구를 열었다. 왜냐하면 이성은, 이성이 실로 이성의 측면에 대해 권한들을 가졌다면, 제한의 불확실한 선전들을 통하여 제한들 안에 자신을 붙잡아두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방법은 전적으로 회의주의에 바쳐졌다. 그 방법이 일찍이 그렇게나 보편적으로 이성으로 간주된 우리의 인식능력의 기만을 알아차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Wir sind jetzt im Begriffe einen Versuch zu machen, ob man nicht die menschliche Vernunft zwischen diesen beiden Klippen glücklich durchbringen, ihr bestimmte Grenzen anweisen, und dennoch das ganze Feld ihrer zweckmäßigen Tätigkeit für sie geöffnet erhalten könne.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 - 우리는 이제 개념들 내에서, 사람들이 인간적 이성을 이 두 절벽 사이에서 운 좋게 관철시킬 수 있는지, 이성에 규정된 한계들을 지정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이성의 유효한 활동의 전체를 이성을 위해 개방된 채로 보존할 수 있는지 연구를 구성할 것이다.

Vorher will ich nur noch die Erklärung der Kategorien voranschicken.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 이에 앞서 나는 아직 단지 범주들의 해명만을 미리 보이고자 한다.
Sie sind Begriffe von einem Gegenstande überhaupt, dadurch dessen Anschauung in Ansehung einer der logischen Funktionen zu Urteilen als bestimmt angesehen wird.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 그것들은 한 대상 일반에 대한 개념들이다. 그를 통하여 그 대상의 직관이 판단들에 대한 논리적 기능들의 개념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규정된 것으로서 통찰된다.
So war die Funktionen des kategorischen Urteils die des Verhältnisses des Subjekts zum Prädikat, z.B. alle Körper sind teilbar.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 일 것이다.
→ 그래서 범주적 판단의 기능들은, 예를 들어 모든 물체들은 가분적이다와 같은, 주어의 술어에 대한 관계의 기능일 것이다.
Allein in Ansehung des bloß logischen Gebrauchs des Verstandes blieb es unbestimmt, welchem von beiden Begriffen die Funktion des Subjekts, und welchem die des Prädikats man geben wolle.
오로지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 오로지, 양자의 개념들에 대해 어떤 것에는 주어의 기능을, 그리고 어떤 것에는 술어의 기능을 사람들이 부여하고자 하는, 지성의 순전히 논리적인 사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만 그것은 불확실한 것으로 남는다.
Denn man kann auch sagen: Einiges Teilbare ist ein Körper.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
→ 왜냐하면 사람들은 또한 약간의 가분적인 것은 물체이다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Durch die Kategorie der Substanz aber, wenn ich den Begriff eines Körpers darunter bringe, wird es bestimmt: daß seine empirische Anschauung in der Erfahrung immer nur als Subjekt, niemals als bloßes Prädikat betrachtet werden müsse; und so in allen übrigen Kategorien.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규정된다: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긜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 그러나 실체의 범주를 통하여, 내가 물체의 개념을 그 아래에 놓을 때, 그 개념은 그 개념의 감각적 직관이 경험 안에서 언제나 단지 주어로서만, 결코 순전한 술어로서가 아닌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남은 모든 범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蟲-
Der berühmte Locke hatte, aus Ermangelung dieser Betrachtung, und weil er reine Begriffe des Verstandes in der Erfahrung antraf, sie auch von der Erfahrung abgeleitet, und verfuhr doch so inkonsequent, daß er damit Versuche zu Erkenntnissen wagte, die weit über alle Erfahrungsgrenze hinausgehen. David Hume erkannte, um das letztere tun zu können, sei es notwendig, daß diese Begriffe ihren Ursprung a priori haben müßten. Da er sich aber gar nicht erklären konnte, wie es möglich sei, daß der Verstand Begriffe, die an sich im Verstande nicht verbunden sind, doch als im Gegenstande notwendig verbunden denken müsse, und darauf nicht verfiel, daß vielleicht der Verstand durch diese Begriffe selbst Urheber der Erfahrung, worin seine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sein könne, so leitete er sie, durch Not gedrungen, von der Erfahrung ab (nämlich von einer durch öftere Assoziation in der Erfahrung entsprungenen subjektiven Notwendigkeit, welche zuletzt fälschlich für objektiv gehalten wird, d.i. der Gewohnheit), verfuhr aber hernach sehr konsequent, darin, daß er es für unmöglich erklärte, mit diesen Begriffen und den Grundsätzen, die sie veranlassen, über die Erfahrungsgrenze hinauszugehen. Die empirische Ableitung aber, worauf beide verfielen, läßt sich mit der Wirklichkeit der wissenschaftlichen Erkenntnisse a priori, die wir haben, nämlich der reinen Mathematik und allgemeinen Naturwissenschaft, nicht vereinigen, und wird also durch das Factum widerlegt.
→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숙고의 결핍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경험 안에서 지성의 순수 개념들을 마주쳤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또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로써 모든 경험의 한계 밖으로 넘어서는 인식들에 대한 연구를 시도할 만큼 그렇게 일관성 없게 굴었다.→ 데이비드 흄은 후자를 행할 수 있기 위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원천을 가져야만 했다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할 것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지성이 그 자체가 지성 안에서 결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안에서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때문에 어쩌면 지성이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스스로, 그 안에서 그 지성의 대상들이 마주쳐지는 경험의 창시자일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곤경에 처해서 그 개념들을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즉 경험 안에서 빈번한 결합을 통하여 발생하고 결국에는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는 주관적 필연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습관으로부터). 그러나 그 후로, 그가 이러한 개념들과 그 개념들을 야기하는 대상들을 가지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밝혀낸 그 점에 있어서 매우 일관되게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에 대해 잘못한 그 경험적 도출은 그 자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학문적 인식의 실제성과, 즉 순수 수학과 보편적 자연과학의 인식들과 합치하도록 할 수 없고, 그러므로 사실을 통하여 반박된다.


Der berühmte Locke hatte, aus Ermangelung dieser Betrachtung, und weil er reine Begriffe des Verstandes in der Erfahrung antraf, sie auch von der Erfahrung abgeleitet, und verfuhr doch so inkonsequent, daß er damit Versuche zu Erkenntnissen wagte, die weit über alle Erfahrungsgrenze hinausgehen.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숙고의 결핍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경험 안에서 지성의 순수 개념들을 마주쳤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또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일관성 없게 했다, 그가 그로써 인식들에 대한 연구를 시도할 만큼, 그 인식들이 모든 경험의 한계 밖으로 넘어서는.
→ 저 유명한 로크는 이러한 숙고의 결핍으로부터, 그리고 그가 경험 안에서 지성의 순수 개념들을 마주쳤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을 또한 경험으로부터 이끌어 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로써 모든 경험의 한계 밖으로 넘어서는 인식들에 대한 연구를 시도할 만큼 그렇게 일관성 없게 굴었다.
David Hume erkannte, um das letztere tun zu können, sei es notwendig, daß diese Begriffe ihren Ursprung a priori haben müßten.
데이비드 흄은 인식했다, 후자를 행할 수 있기 위해서, 필연적이어야 할 것이라고, 이러한 개념들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원천을 가져야만 했다는 것이.
→ 데이비드 흄은 후자를 행할 수 있기 위해서 이러한 개념들이 그 개념들의 선험적 원천을 가져야만 했다는 것이 필연적이어야 할 것임을 인식했다.
Da er sich aber gar nicht erklären konnte, wie es möglich sei, daß der Verstand Begriffe, die an sich im Verstande nicht verbunden sind, doch als im Gegenstande notwendig verbunden denken müsse, und darauf nicht verfiel, daß vielleicht der Verstand durch diese Begriffe selbst Urheber der Erfahrung, worin seine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sein könne, so leitete er sie, durch Not gedrungen, von der Erfahrung ab (nämlich von einer durch öftere Assoziation in der Erfahrung entsprungenen subjektiven Notwendigkeit, welche zuletzt fälschlich für objektiv gehalten wird, d.i. der Gewohnheit), verfuhr aber hernach sehr konsequent, darin, daß er es für unmöglich erklärte, mit diesen Begriffen und den Grundsätzen, die sie veranlassen, über die Erfahrungsgrenze hinauszugehen.
그러나 그 자신이 전혀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지성이 개념들을, 그 개념들 자체가 지성 안에서 결합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안에서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때문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지성이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스스로 경험의 창시자, 그 안에서 그 지성의 대상들이 마주쳐지는, 일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그 개념들을 이끌었다, 곤경을 헤쳐 나아가게 된 때,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즉 경험 안에서 빈번한 결합을 통하여 발생하는 주관적 필연성으로부터, 그러한 필연성이 결국에는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는, 다시 말해 습관), 그러나 그 후로 매우 일관되게 이끌었다, 그 점에 있어서, 그가 그것을 불가능하다고 밝혀낸, 이러한 개념들과 대상들을 가지고, 그 대상들이 그 개념들을 야기하는,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 그러나 그 자신이 지성이 그 자체가 지성 안에서 결합되지 않는 개념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안에서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전혀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때문에 어쩌면 지성이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스스로, 그 안에서 그 지성의 대상들이 마주쳐지는 경험의 창시자일 수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곤경에 처해서 그 개념들을 경험으로부터 도출했다 (즉 경험 안에서 빈번한 결합을 통하여 발생하고 결국에는 객관적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는 주관적 필연성으로부터, 다시 말해 습관으로부터). 그러나 그 후로, 그가 이러한 개념들과 그 개념들을 야기하는 대상들을 가지고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밝혀낸 그 점에 있어서 매우 일관되게 하였다.
Die empirische Ableitung aber, worauf beide verfielen, läßt sich mit der Wirklichkeit der wissenschaftlichen Erkenntnisse a priori, die wir haben, nämlich der reinen Mathematik und allgemeinen Naturwissenschaft, nicht vereinigen, und wird also durch das Factum widerlegt.
그러나 그 경험적 도출은, 둘 다 잘못한, 스스로 선험적인 학문적 인식의 실제성과, 그 인식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즉 순수 수학과 보편적 자연과학의 인식들, 합치하도록 할 수 없고, 그러므로 사실을 통하여 반박된다.
→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에 대해 잘못한 그 경험적 도출은 그 자체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험적인 학문적 인식의 실제성과, 즉 순수 수학과 보편적 자연과학의 인식들과 합치하도록 할 수 없고, 그러므로 사실을 통하여 반박된다.

-蟲-
Nun enthält aber alle Erfahrung außer der Anschauung der Sinne, wodurch etwas gegeben wird, noch einen Begriff von einem Gegenstande, der in der Anschauung gegeben wird, oder erscheint: demnach werden Begriffe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ls Bedingungen a priori aller Erfahrungserkenntnis zum Grunde liegen: folglich wird die objektive Gülitgkeit der Kategorien als Begriffe a priori, darauf beruhen, daß durch sie allein Erfahrung (der Form des Denkens nach) möglich sei. Denn alsdenn beziehen sie sich notwendiger Weise und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weil nur vermittelst ihrer überhaupt irgend ein Gegenstand der Erfahrung gedacht werden kann.
→ 그러나 이제 모든 경험은, 그를 통하여 어떤 것이 주어지는 감각의 직관 외부에서,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혹은 현상하는 한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모든 경험적인식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기초에 놓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개념들로서 범주들의 그 객관적 정당성은, 그 개념들을 통해서만 경험이(사유의 형식에 따라) 가능할 것이라는 데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그래서 그 개념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기 때문인데, 단지 그 개념들에 따라서만 일반적으로 어떻든 경험의 대상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Die transz. Deduktion aller Begriffe a priori hat also ein Principium, worauf die ganze Nachforschung gerichtet werden muß, nämlich dieses: daß sie als Bedingungen a priori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erkannt werden müssen, (es sei der Anschauung, die in ihr angetroffen wird, oder des Denkens). Begriffe, die den objektiven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abgeben, sind eben darum notwendig. Die Entwickelung der Erfahrung aber, worin sie angetroffen werden, ist nicht ihre Deduktion, (sondern Illustration,) weil sie dabei doch nur zufällig sein würden. Ohne diese ursprüngliche Beziehung auf mögliche Erfahrung, in welcher alle Gegenstände der Erkenntnis vorkommen, würde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rgend ein Objekt gar nicht begriffen werden können.
→ 모든 선험적 개념들에 대한 그 초월론적 연역은 그러므로, 그것으로 전체 연구가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원칙을 갖는다. 즉 이러한 원칙이다: 그 개념들은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경험 안에서 마주쳐지는 직관일 것이거나 혹은 사유일 것이다).→ 경험의 가능성의 개관적 근거를 내놓는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에서 필연적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개념들이 발견되는 경험의 전개는 그 개념들의 연역이 아닌데(오히려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그로 인해 단지 우연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경험에 대해, 그 안에서 인식의 모든 대상들이 나타나는 이런 본질적인 관련 없이는, 좌우간에 한 객체에 그 동일한 경험의 관련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


Nun enthält aber alle Erfahrung außer der Anschauung der Sinne, wodurch etwas gegeben wird, noch einen Begriff von einem Gegenstande, der in der Anschauung gegeben wird, oder erscheint: demnach werden Begriffe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ls Bedingungen a priori aller Erfahrungserkenntnis zum Grunde liegen: folglich wird die objektive Gülitgkeit der Kategorien als Begriffe a priori, darauf beruhen, daß durch sie allein Erfahrung (der Form des Denkens nach) möglich sei.
그러나 이제 모든 경험은 감각의 직관 외부에서 포함할 것이다, 그 직관을 통하여 어떤 것이 주어지는, 그럼에도 한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그 대상이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혹은 현상하는: 그래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모든 경험적인식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기초에 놓일 것이다: folglich 선험적 개념들로서 범주들의 그 객관적 정당성은, 거기에 기초한다, 그 개념들을 통해서만 경험이(사유의 형식에 따라) 가능할 것이라는.
→ 그러나 이제 모든 경험은, 그를 통하여 어떤 것이 주어지는 감각의 직관 외부에서,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주어지는, 혹은 현상하는 한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개념을 포함할 것이다: 그래서 대상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은 모든 경험적인식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기초에 놓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개념들로서 범주들의 그 객관적 정당성은, 그 개념들을 통해서만 경험이(사유의 형식에 따라) 가능할 것이라는 데에 기초한다.
Denn alsdenn beziehen sie sich notwendiger Weise und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weil nur vermittelst ihrer überhaupt irgend ein Gegenstand der Erfahrung gedacht werden kann.
왜냐하면 그래서 그 개념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기 때문인데, 단지 그 개념들에 따라서만 일반적으로 어떻든 경험의 대상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그래서 그 개념들이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적용되기 때문인데, 단지 그 개념들에 따라서만 일반적으로 어떻든 경험의 대상이 사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Die transz. Deduktion aller Begriffe a priori hat also ein Principium, worauf die ganze Nachforschung gerichtet werden muß, nämlich dieses: daß sie als Bedingungen a priori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erkannt werden müssen, (es sei der Anschauung, die in ihr angetroffen wird, oder des Denkens).
모든 선험적 개념들에 대한 그 초월론적 연역은 그러므로 하나의 원칙을 갖는다, 그것으로 전체 연구가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즉 이러한 것: 그 개념들이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인식되어야만 하는, (그것은 직관일 것이다, 그 직관이 그 경험 안에서 마주쳐지는, 혹은 사유일 것이다).
→ 모든 선험적 개념들에 대한 그 초월론적 연역은 그러므로, 그것으로 전체 연구가 정당화되어야만 하는 하나의 원칙을 갖는다. 즉 이러한 원칙이다: 그 개념들은 경험의 가능성의 선험적 조건들로서 인식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경험 안에서 마주쳐지는 직관일 것이거나 혹은 사유일 것이다).
Begriffe, die den objektiven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abgeben, sind eben darum notwendig.
경험의 가능성의 개관적 근거를 내놓는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에서 필연적이다.
→ 경험의 가능성의 개관적 근거를 내놓는 개념들은, 마찬가지로 그런 이유에서 필연적이다.
Die Entwickelung der Erfahrung aber, worin sie angetroffen werden, ist nicht ihre Deduktion, (sondern Illustration,) weil sie dabei doch nur zufällig sein würden.
그러나 경험의 전개는, 그 안에서 개념들이 발견되는, 그 개념들의 연역이 아니다, (오히려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그로 인해 단지 우연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 안에서 개념들이 발견되는 경험의 전개는 그 개념들의 연역이 아닌데(오히려 묘사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그로 인해 단지 우연적으로 될 것이기 때문이다.
Ohne diese ursprüngliche Beziehung auf mögliche Erfahrung, in welcher alle Gegenstände der Erkenntnis vorkommen, würde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rgend ein Objekt gar nicht begriffen werden können.
가능한 경험에 대한 이런 본질적인 관련 없이, 그 관련 안에서 인식의 모든 대상들이 나타나는, 좌우간에 한 객체에 그 동일한 경험의 관련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
→ 가능한 경험에 대해, 그 안에서 인식의 모든 대상들이 나타나는 이런 본질적인 관련 없이는, 좌우간에 한 객체에 그 동일한 경험의 관련이 전혀 이해될 수 없다.

-蟲-
Entweder wenn der Gegenstand die Vorstellung, oder diese den Gegenstand allein möglich macht. Ist das erstere, so ist diese Beziehung nur empirisch, und die Vorstellung ist niemals a priori möglich. Und dies ist der Fall mit Erscheinung, in Ansehung dessen, was an ihnen zur Empfindung gehört. Ist aber das zweite, weil Vorstellung an sich selbst (denn von deren Kausalität, vermittelst des Willens, ist hier gar nicht die Rede,) ihren Gegenstand dem Dasein nach ni hicht hervorbringt, so ist doch die Vorstellung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alsdenn a priori bestimmend, wenn durch sie allein es möglich ist, etwas als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Es sind aber zwei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öglich ist, erstlich Anschauung, dadurch derselbe, aber nur als Erscheinung, gegeben wird: zweitens Begriff, dadruch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er dieser Anschauung entspricht. Es ist aber aus dem obigen klar, daß die erste Bedingung, nämlich die, unter der allein Gegenstände angeschaut werden können, in der Tat den Objekten der Form nach a priori im Gemüt zum Grunde liege. Mit dieser formalen Bedingung der Sinnlichkeit stimmen also alle Erscheinungen notwendig überein, weil sie nur durch dieselbe erscheinen, d.i. empirisch angeschauet und gegeben werden können. Nun frägt es sich, ob nicht auch Begriffe a priori vorausgehen, als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etwas, wenn gleich nicht angeschauet, dennoch als Gegenstand überhaupt gedacht wird, denn alsdenn ist alle empirische Erkenntnis der Gegenstände solchen Begriffen notwendiger Weise gemäß, weil, ohne deren Voraussetzung, nichts als Objekt der Erfahrung mölgich ist.
→ 대상이 표상을 가능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이 표상이 대상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첫번째 것은,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경험적일 따름이고, 그 표상은 전혀 선험적일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현상을 가지고 그 현상들에 있어서 지각에 속하는 것을 고려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두번째 것은, 표상 그 자체가 (왜냐하면 의지에 따르는 그 표상의 인과성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전혀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 표상의 대상을 현존에 따라 나타내지 않고, 그래서 어떤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그 표상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때, 표상을 대상의 고려 속에서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만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두 가지 조건들이 있다. 첫번째로 직관은, 그를 통하여 동일한 대상이, 그러나 단지 현상으로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두번째 것은 개념으로서, 그를 통하여 직관에 상응하는 대상이 사유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첫번째 조건, 즉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대상들이 직관될 수 있는 그 조건이 실제로 객체에 형식에 따라 선험적으로 감성 안에 기초로 놓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 조건을 가지고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호응한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이 단지 이 동일한 조건을 통해서만 현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개념 또한 조건들로서 선험적으로 선행하지 않는지 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직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일반으로서 사유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상들에 대한 모든 경험적 인식이 그러한 개념들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부합할 것이다. 그 개념들을 전제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경험의 객체로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Entweder wenn der Gegenstand die Vorstellung, oder diese den Gegenstand allein möglich macht.
대상이 표상을 가능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이 표상이 대상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 대상이 표상을 가능하도록 만들거나, 아니면 이 표상이 대상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뿐이다.
Ist das erstere, so ist diese Beziehung nur empirisch, und die Vorstellung ist niemals a priori möglich.
첫번째 것은,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경험적일 따름이고, 표상은 전혀 선험적일 수 없다.
→ 첫번째 것은, 그래서 이러한 관계가 경험적일 따름이고, 그 표상은 전혀 선험적일 수 없다.
Und dies ist der Fall mit Erscheinung, in Ansehung dessen, was an ihnen zur Empfindung gehört.
그리고 이것은 현상을 가지고 하는 경우이다, 그것의 고려 속에서, 그 현상들에 있어서 지각에 속하는.
→ 그리고 이것은 현상을 가지고 그 현상들에 있어서 지각에 속하는 것을 고려하는 경우이다.
Ist aber das zweite, weil Vorstellung an sich selbst (denn von deren Kausalität, vermittelst des Willens, ist hier gar nicht die Rede,) ihren Gegenstand dem Dasein nach nicht hervorbringt, so ist doch die Vorstellung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alsdenn a priori bestimmend, wenn durch sie allein es möglich ist, etwas als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그러나 두번째 것은, 표상 그 자체가 (왜냐하면 그 표상의 인과성에 대해서는, 의지에 따라, 여기에서 전혀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 표상의 대상을 현존에 따라 나타나지 않고, 그래서 표상을 대상의 고려 속에서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 표상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어떤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 그러나 두번째 것은, 표상 그 자체가 (왜냐하면 의지에 따르는 그 표상의 인과성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전혀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그 표상의 대상을 현존에 따라 나타내지 않고, 그래서 어떤 것을 하나의 대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그 표상을 통하여서만 가능할 때, 표상을 대상의 고려 속에서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Es sind aber zwei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öglich ist, erstlich Anschauung, dadurch derselbe, aber nur als Erscheinung, gegeben wird: zweitens Begriff, dadruch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er dieser Anschauung entspricht.
그러나 두 가지 조건들이다, 그 조건들 아래에서만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첫번째로 직관, 그를 통하여 동일한 대상이, 그러나 단지 현상으로서만, 주어지는: 두번째 것은 개념, 그를 통하여 대상이 사유되는, 그 대상이 직관에 상응하는.
→ 그러나, 그 아래에서만 대상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두 가지 조건들이 있다. 첫번째로 직관은, 그를 통하여 동일한 대상이, 그러나 단지 현상으로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두번째 것은 개념으로서, 그를 통하여 직관에 상응하는 대상이 사유되는 것이다.
Es ist aber aus dem obigen klar, daß die erste Bedingung, nämlich die, unter der allein Gegenstände angeschaut werden können, in der Tat den Objekten der Form nach a priori im Gemüt zum Grunde liege.
그러나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명백하다, 첫번째 조건, 즉 그 조건이,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대상들이 직관될 수 있는, 실제로 객체를 형식에 따라 선험적으로 감성 안에 기초로 놓는다는 것.
→ 그러나 앞서 말한 것으로부터, 첫번째 조건, 즉 오로지 그 아래에서만 대상들이 직관될 수 있는 그 조건이 실제로 객체에 형식에 따라 선험적으로 감성 안에 기초로 놓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Mit dieser formalen Bedingung der Sinnlichkeit stimmen also alle Erscheinungen notwendig überein, weil sie nur durch dieselbe erscheinen, d.i. empirisch angeschauet und gegeben werden können.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 조건을 가지고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호응한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이 단지 이 동일한 조건을 통해서만 현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이러한 감성의 형식적 조건을 가지고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호응한다. 왜냐하면 그 현상들이 단지 이 동일한 조건을 통해서만 현상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경험적으로 직관되고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Nun frägt es sich, ob nicht auch Begriffe a priori vorausgehen, als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etwas, wenn gleich nicht angeschauet, dennoch als Gegenstand überhaupt gedacht wird, denn alsdenn ist alle empirische Erkenntnis der Gegenstände solchen Begriffen notwendiger Weise gemäß, weil, ohne deren Voraussetzung, nichts als Objekt der Erfahrung mölgich ist.
이제 물어질 것이다, 개념 또한 선험적으로 선행하지 않는지, 조건들로서, 그 조건들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왜냐하면 직관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일반으로서 사유되는 것 같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리하여 대상들에 대한 모든 경험적 인식이 그러한 개념들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부합할 것이기 때문에, 왜냐하면, 그 개념들을 전제함이 없이, 아무것도 경험의 객체로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제 개념 또한 조건들로서 선험적으로 선행하지 않는지 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아래에서만 어떤 것이 직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일반으로서 사유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상들에 대한 모든 경험적 인식이 그러한 개념들에 필연적인 방식으로 부합할 것이다. 그 개념들을 전제함이 없이는 아무것도 경험의 객체로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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