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Er al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그러한 특성들은, 그것들이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i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그것의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전제하기 때문에, 시간이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그 실재성이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그 실재성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7. 해명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시간에 대한 그 이론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반론을 아주 한 목소리로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추정한다,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독자에게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Er la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蟲-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모든 사물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경험 안으로 생길 수 있는,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들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은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한다.

→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그것은 이야기된다: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

→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가르쳐 준다, 즉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그 대상들이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하나의 대상이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 대상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蟲-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고,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며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만일 내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다: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우리가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래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그것(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고유한,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蟲-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그러나 두번째 것과 관련하여서,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으로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반면에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B) 시간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내감의 형식 외의,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부재를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그 안에서 잡다가 순차를 형성하는, 그 순차는 단지 일차원이고,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이다,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을 그러나 언제나 연속하는.

→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蟲-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그 표상은,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러나 직관이다.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또한 그 명제는,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5) 시간의 무한성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다.

→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나는 그 때문에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 나는 그 때문에,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여기에서 나는 또한 덧붙인다,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보편적 운동학이, 조금도 헛되지 않은, 설명하는 것보다.

→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a) 시간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따라서 남는다,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그것들은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蟲-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2) 시간은 필연적 표상이다, 그 표상이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사람들은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우리는 단지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그러나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

→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규칙들로서 타당하다,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그리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蟲-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론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비판적 주의이다, 전적으로 아무것도,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것은,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것, 또한 공간은 사물들의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것, 그 형식이 그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 고유하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 표상들의 형식이 공간인, 그러나 그것의 참된 상관물은,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질 수 있는, 그러나 역시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 없는.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시간은 1)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왜냐하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표상할 수 있다: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

→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蟲-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Geschmack und Farben sind gar nicht notwendige Bedingungen, unter welchen die Gegenstände allein vor uns Objekte der Sinne werden können. Sie sind nur als zufällig beigefügte Wirkungen der besondern Organisation mit der Erscheinung verbunden. Daher sind sie auch keine Vorstellungen a priori, sondern auf Empfindung, der Wohlgeschmack aber so gar auf Gefühl (der Lust und Unlust) als einer Würkung der Empfindung gegründet. Auch kann niemand a priori weder eine Vorstellung einer Farbe, noch irgend eines Geschmacks haben: der Raum aber betrifft nur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schließt also gar keine Empfindung (nichts Empirisches) in sich, und alle Arten und Bestimmungen des Raumes können und müssen so gar a priori vorgestellt werden können, wenn Begriffe der Gestalten so wohl, als Verhältnisse entstehen sollen. Durch denselben ist es allein möglich, daß Dinge vor uns äußere Gegenstände sein. [A; sind Ak: seien Ke].

→ 맛과 색들은 전혀,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Die Absicht dieser Anmerkung geht nur dahin: zu verhüten, daß man die behauptete Idealität des Raumes nicht durch bei weitem unzulängliche Beispiele zu erläutern sich einfallen lasse, da nämlich etwa Farben, Geschmack etc. mit Recht nicht als Beschaffenheiten der Dinge, sondern bloß als Veränderungen unseres Subjekts, die so gar bei verschiedenen Menschen verschieden sein können, betrachtet werden. Denn in diesem Falle gilt das, was ursprünglich selbst nur Erscheinung ist, z.B. eine Rose, im empirischen Verstande für ein Ding an sich selbst, welches doch jedem Auge in Ansehung der Farbe anders erscheinen kann.

→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이다.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변양들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인 것은,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는,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타당하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Geschmack und Farben sind gar nicht notwendige Bedingungen, unter welchen die Gegenstände allein vor uns Objekte der Sinne werden können.

맛과 색들은 전혀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 맛과 색들은 전혀, 그러한 조건 아래에서 대상들이 오로지 우리에게 감관의 객체가 될 수 있는 필연적 조건들이 아니다.

Sie sind nur als zufällig beigefügte Wirkungen der besondern Organisation mit der Erscheinung verbunden.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 그것들은 단지 특수한 조합의 우연히 덧붙여진 작용들로서 현상에 결부하게 된다.

Daher sind sie auch keine Vorstellungen a priori, sondern auf Empfindung, der Wohlgeschmack aber so gar auf Gefühl (der Lust und Unlust) als einer Würkung der Empfindung gegründet.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 그래서 그것들은 또한 어떠한 선험적 표상들도 아니고, 오히려 지각에, 더욱이 좋은 맛은 지각의 한 작용으로서 감정(쾌와 불쾌)에 기초된다.

Auch kann niemand a priori weder eine Vorstellung einer Farbe, noch irgend eines Geschmacks haben: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der Raum aber betrifft nur die reine Form der Anschauung, schließt also gar keine Empfindung (nichts Empirisches) in sich, und alle Arten und Bestimmungen des Raumes können und müssen so gar a priori vorgestellt werden können, wenn Begriffe der Gestalten so wohl, als Verhältnisse entstehen sollen.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한다, 그러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 또한 그 누구도 선험적으로 한 색의 표상도, 맛의 그 어떤 표상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공간은 단지 직관의 순수한 형식에만 관계하므로, 전혀 어떠한 지각도(감각적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만일 양상들의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관계들도 또한 생성해야 한다면, 공간의 모든 본성들과 규정들은 더욱이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고 표상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Durch denselben ist es allein möglich, daß Dinge vor uns äußere Gegenstände sein.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그것이 가능하다,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 그것을 통해서만 오직,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부 대상들이라는 것이 가능하다.

[A; sind Ak: seien Ke].

 

 

Die Absicht dieser Anmerkung geht nur dahin: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이러한 의도이다:

zu verhüten, daß man die behauptete Idealität des Raumes nicht durch bei weitem unzulängliche Beispiele zu erläutern sich einfallen lasse, da nämlich etwa Farben, Geschmack etc. mit Recht nicht als Beschaffenheiten der Dinge, sondern bloß als Veränderungen unseres Subjekts, die so gar bei verschiedenen Menschen verschieden sein können, betrachtet werden.

방지하는 것,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그것들이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여겨지기 때문이다.

→ 이 주석의 장은 단지 사람들이 공간의 고수되는 관념을 매우 불충분한 예시를 사용함을 통하여 해명하기 위해 해결책을 궁리하는 것을 방지하는 의도이다. 왜냐하면 다시 말해 어떤 색들, 맛 등은 정당하게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우리 주관의 변양들로서, 더욱이 상이한 인간들에게서 다를 수 있는 변양들로서, 여겨지기 때문이다.

Denn in diesem Falle gilt das, was ursprünglich selbst nur Erscheinung ist, z.B. eine Rose, im empirischen Verstande für ein Ding an sich selbst, welches doch jedem Auge in Ansehung der Farbe anders erscheinen kann.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것은 유효하다,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 왜냐하면 이러한 경우에,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는 단지 현상일 뿐인 것은, 또한 그러한 것이 색에 대한 고려 속에서 각각의 눈에 다르게 현상할 수 있는, 예를 들어 하나의 장미는, 감각적 지성에 있어서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타당하다.

 

-蟲-

  Unsere Erörterungen lehren demnach die Realität (d.i. die objektive Gültigkeit) des Raumes in Ansehung alles dessen, was äußerlich als Gegenstand uns vorkommen kann, aber zugleich die Idealität des Raums in Ansehung der Dinge, wenn sie durch die Vernunft an sich selbst erwogen werden, d.i. ohne Rücksicht auf die Beschaffenheit unserer Sinnlichkeit zu nehmen. Wir behaupten also die empirische Realität des Raumes (in Ansehung aller möglichen äußeren Erfahrung), ob zwar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sselben, d.i. daß er Nichts sei, so bald wir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weglassen, und ihn als etwas, was den Dingen an sich selbst zum Grunde liegt, annehmen.

→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외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하지만,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즉 그것이 무(無)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어떤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Es gibt aber auch außer dem Raum keine andere subjektive und auf etwas Äußeres bezogene Vorstellung, die a priori objektiv heißen könnte. Denn man kann von keiner derselben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wie von der Anschauung im Raume, herleiten § 3. Daher ihnen, genau zu reden, gar keine Idealität zukommt, ob sie gleich darin mit der Vorstellung des Raumes übereinkommen, daß sie bloß zur subjektiven Beschaffenheit der Sinnesart gehören, z.B. des Gesichts, Gehörs, Gefühls, durch die Empfindungen der Farben, Töne und Wärme, die aber, weil sie bloß Empfindungen und nicht Anschauungen sind, an sich kein Objekt, am wenigsten a priori, erkennen lassen.

→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3.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에 속하는 것,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 같은 아무런 관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Daher diese subjektive Bedingung aller äußeren Erscheinungen mit keiner andern kann verglichen werden. Der Wohlgeschmack eines Weines gehört nicht zu den objektiven Bestimmungen des Weines, mithin eines Objekts so gar als Erscheinung betrachtet, sondern zu der besondern Beschaffenheit des Sinnes an dem Subjekte, was ihn genießt. Die Farben sind nicht Beschaffenheiten der Körper, deren Anschauung sie anhängen, sondern auch nur Modifikationen des Sinnes des Gesichts, welches vom Lichte auf gewisse Weise affiziert wird. Dagegen gehört der Raum, als Bedingung äußerer Objekte, notwendiger Weise zur Erscheinung oder Anschauung derselben.

이 부분에 있어서 A에 따르면: →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그것을 먹는다는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색들은,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고, 오히려 단지, 빛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그에 반해 공간은,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속한다.

 

 

 

  Unsere Erörterungen lehren demnach die Realität (d.i. die objektive Gültigkeit) des Raumes in Ansehung alles dessen, was äußerlich als Gegenstand uns vorkommen kann, aber zugleich die Idealität des Raums in Ansehung der Dinge, wenn sie durch die Vernunft an sich selbst erwogen werden, d.i. ohne Rücksicht auf die Beschaffenheit unserer Sinnlichkeit zu nehmen.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한다, 그 모든 것이 외적으로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그러나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 우리의 상론은 그에 따라 모든 것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그 모든 것이 외적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공간의 실재성(즉 객관적 타당성)을 교시하지만, 또한 사물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의 관념성은, 만일 그것이 이성 그 자체를 통하여 검토된다면, 즉 우리의 감성의 속성에 대한 숙려 없이 취해질 것이다.

Wir behaupten also die empirische Realität des Raumes (in Ansehung aller möglichen äußeren Erfahrung), ob zwar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sselben, d.i. daß er Nichts sei, so bald wir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weglassen, und ihn als etwas, was den Dingen an sich selbst zum Grunde liegt, annehmen.

그러므로 우리는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불구하고, 즉 그것이 무(無)라는,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어떤 것으로, 그것이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취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의 초월적 관념성에도, 즉 그것이 무(無)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감각적 실재성(가능한 모든 외적 경험에 대한 고려 속에서)을 주장한다. 우리가 모든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을 생략하자 마자, 그것을, 사물들 그 자체에게 있어서 근저에 놓이는 어떤 것으로 취한다는 것이다.

 

  Es gibt aber auch außer dem Raum keine andere subjektive und auf etwas Äußeres bezogene Vorstellung, die a priori objektiv heißen könnte.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 그러나 또한 공간 밖에 아무런 다른 주관적인 것도 아니고 어떤 외적인 것에 관련하는 표상, 선험적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표상이 있다.

Denn man kann von keiner derselben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wie von der Anschauung im Raume, herleiten § 3.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인간은 선험적 종합명제들을, 공간 안에서 직관으로부터에서와 같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도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 3

Daher ihnen, genau zu reden, gar keine Idealität zukommt, ob sie gleich darin mit der Vorstellung des Raumes übereinkommen, daß sie bloß zur subjektiven Beschaffenheit der Sinnesart gehören, z.B. des Gesichts, Gehörs, Gefühls, durch die Empfindungen der Farben, Töne und Wärme, die aber, weil sie bloß Empfindungen und nicht Anschauungen sind, an sich kein Objekt, am wenigsten a priori, erkennen lassen.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전혀 아무런 관념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그 표상이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에 속하는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 그런 이유에서 그 명제들에게, 정확히 말해서, 그 명제들이 그 안에서 공간의 표상과 부합할지라도, 성향의 순전히 주관적 특성에 속하는 것, 예를 들어, 색, 소리들과 온도의 지각을 통한 시각, 청각, 촉각 같은 아무런 관념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순전한 지각이고 직관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어떠한 객관도, 최소한 선험적으로, 인식하도록 하지 않는다.

 

 

Denn … lassen.] B; in A heißt es an dieser Stelle:

이 부분에 있어서 A에 따르면:

 

Daher diese subjektive Bedingung aller äußeren Erscheinungen mit keiner andern kann verglichen werden.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 거기에서 모든 외적 현상들의 이러한 주관적 조건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될 수 없다.

Der Wohlgeschmack eines Weines gehört nicht zu den objektiven Bestimmungen des Weines, mithin eines Objekts so gar als Erscheinung betrachtet, sondern zu der besondern Beschaffenheit des Sinnes an dem Subjekte, was ihn genießt.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그것을 먹는다는 것.

→ 와인의 훌륭한 향미는, 그에 따라 하나의 객관을 더욱이 현상으로 여기는 와인의 객관적 규정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주관에 있어서, 그것을 먹는다는 감관의 특수한 성질에 속한다.

Die Farben sind nicht Beschaffenheiten der Körper, deren Anschauung sie anhängen, sondern auch nur Modifikationen des Sinnes des Gesichts, welches vom Lichte auf gewisse Weise affiziert wird.

색들은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다, 성질들이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오히려 단지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그러한 감관이 빛에 대해 확실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 색들은, 그 물체의 직관에 달려있는 물체의 성질들이 아니고, 오히려 단지, 빛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촉발되는 시각 감관의 변화일 뿐이다.

Dagegen gehört der Raum, als Bedingung äußerer Objekte, notwendiger Weise zur Erscheinung oder Anschauung derselben.

그에 반해 공간은 속한다,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 그에 반해 공간은, 외적 객관의 조건으로서, 더욱 필연적인 방식으로 그 자체의 현상이나 직관에 속한다.

 

-蟲-

Dieses Prädikat wird den Dingen nur in so fern beigelegt, als sie uns erscheinen, d.i. Gegenstände der Sinnlichkeit sind. Die beständige Form dieser Rezeptivität, welche wir Sinnlichkeit nennen, ist eine notwendige Bedingung aller Verhältnisse, darinnen Gegenstände als außer uns angeschauet werden, und, wenn man von diesen Gegenstände abstrahiert, eine reine Anschauung, welche den Namen Raum führet. Weil wir die besonder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nicht zu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Sachen, sondern nur ihrer Erscheinungen machen können, so können wir wohl sagen, daß der Raum alle Dinge befasse, die uns äußerlich erscheinen mögen, aber nicht alle Dinge an sich selbst, sie mögen nun angeschaut werden oder nicht, oder auch von welchem Subjekt man wolle. Denn wir können von den Anschauungen anderer denkenden Wesen gar nicht urteilen, ob sie an die nämlichen Bedingungen gebunden sein, welche unsere Anschauung einschränken und für uns allgemein gültig sind. Wenn wir die Einschränkung eines Urteils zum Begriff des Subjekts hinzufügen, so gilt das Urteil alsdenn unbedingt. Der Satz: Alle Dinge sind neben einander im Raum, gilt unter der Einschränkung, wenn diese Dinge als Gegenstände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genommen werden. Füge ich hier die Bedingung zum Begriffe, und sage: Alle Dinge, als äußere Erscheinungen, sind neben einander im Raum, so gilt diese Regel allgemein und ohne Einschränkung.

→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이러한,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그 형식은)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공간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잘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제한 하에서 유효하다.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하고,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Dieses Prädikat wird den Dingen nur in so fern beigelegt, als sie uns erscheinen, d.i. Gegenstände der Sinnlichkeit sind.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 이러한 술어는 사물들에게 단지,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즉 감각의 대상들인  그러한 한에서만 첨가된다.

Die beständige Form dieser Rezeptivität, welche wir Sinnlichkeit nennen, ist eine notwendige Bedingung aller Verhältnisse, darinnen Gegenstände als außer uns angeschauet werden, und, wenn man von diesen Gegenstände abstrahiert, eine reine Anschauung, welche den Namen Raum führet.

이러한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러한 형식을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다,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순수한 직관이다, 그러한 직관이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 이러한, 우리가 감성이라 이름하는 감수성의 영속하는 형식이, 그 안에서 대상들이 우리의 외부로서 직관되는, 모든 관계들의 필연적인 조건이고, 사람들이 이러한 대상들로부터 추상할 때, (그 형식은) 공간이란 이름을 지니는 순수한 직관이다.

Weil wir die besonder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nicht zu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Sachen, sondern nur ihrer Erscheinungen machen können, so können wir wohl sagen, daß der Raum alle Dinge befasse, die uns äußerlich erscheinen mögen, aber nicht alle Dinge an sich selbst, sie mögen nun angeschaut werden oder nicht, oder auch von welchem Subjekt man wolle.

왜냐하면 우리가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잘 말할 수 있다, 공간은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 왜냐하면 우리는 감성의 특수한 조건들을 사태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사태의 현상들(의 조건들)만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공간은, 우리에게 외적으로 현상할 수 있는, 그러나 모든 사물들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현상되거나 현상되지 않을 수 있는, 혹은 또한 그러한 주어로부터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다고, 잘 말할 수 있다.

Denn wir können von den Anschauungen anderer denkenden Wesen gar nicht urteilen, ob sie an die nämlichen Bedingungen gebunden sein, welche unsere Anschauung einschränken und für uns allgemein gültig sind.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 왜냐하면 우리는 또 다른 사유하는 존재의 직관들에 대해서는, 그 직관들이 동일한 조건들에 연관되는지, 그러한 조건들이 우리의 직관을 제한하고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전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Wenn wir die Einschränkung eines Urteils zum Begriff des Subjekts hinzufügen, so gilt das Urteil alsdenn unbedingt.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 우리가 주어의 개념에 대해 판단의 제한을 덧붙인다면, 그래서 그 판단은 무조건적으로 유효하다.

Der Satz: Alle Dinge sind neben einander im Raum, gilt unter der Einschränkung, wenn diese Dinge als Gegenstände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genommen werden.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제한 아래에서 유효하다,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 모든 사물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라는 명제는, 이러한 사물들이 우리의 감성적 직관에 대한 대상들로서 취해질 때, 제한 하에서 유효하다.

Füge ich hier die Bedingung zum Begriffe, und sage: Alle Dinge, als äußere Erscheinungen, sind neben einander im Raum, so gilt diese Regel allgemein und ohne Einschränkung.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한다,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 나는 여기에 개념들에 대한 조건을 결합하고, 말한다: 모든 사물들은, 외부 현상들로서, 공간 안에서 서로 이웃하고, 그래서 이러한 규칙은 보편적으로 그리고 제한 없이 유효하다.

 

-蟲-

Schlüsse aus obigen Begriffen

이상의 개념들로부터 나오는 결론

a) Der Raum stellet gar keine Eigenschaft irgend einiger Dinge an sich, oder sie in ihrem Verhältnis auf einander vor, d.i. keine Bestimmung derselben, die an Gegenständen selbst haftete, und welche bliebe, wenn man auch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abstrahierte. Denn weder absolute, noch relative Bestimmungen können vor dem Dasein der Dinge, welchen sie zukommen, mithin nicht a priori angeschaut werden.

→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그러한 것은 남는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b) Der Raum ist nichts anders, als nur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d.i.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Sinnlichkeit, unter der allein uns äußere Anschauung möglich ist. Weil nun die Rezeptivität des Subjekts, von Gegenständen affiziert zu werden, notwendiger Weise vor allen Anschauungen dieser Objekte vorhergeht, so läßt sich verstehen, wie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vor allen wirklichen Wahrnehmungen, mithin a priori im Gemüte gegeben sein könne, und wie sie als eine reine Anschauung, in der alle Gegenstände bestimmt werden müssen, Prinzipien der Verhältnisse derselben vor aller Erfahrung enthalten könne.

→ b) 공간은,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주체의 수용성은,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선험적 직관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Wir können demnach nur aus dem Standpunkte eines Menschen, vom Raum, von ausgedehnten Wesen etc. reden. Gehen wir von der subjektiven Bedingung ab, unter welcher wir allein äußere Anschauung bekommen können, so wie wir nämlich von de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mögen, so bedeutet die Vorstellung vom Raume gar nichts.

→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Schlüsse aus obigen Begriffen

상술한 개념들로부터 결론

→ 상술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er Raum stellet gar keine Eigenschaft irgend einiger Dinge an sich, oder sie in ihrem Verhältnis auf einander vor, d.i. keine Bestimmung derselben, die an Gegenständen selbst haftete, und welche bliebe, wenn man auch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abstrahierte.

a)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는다, 그것이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그리고 그러한 것은 남는다,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 공간은 도대체 더 사물 자체에 일치하는 전혀 아무런 특성도, 혹은 그것이 그것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것에 대해서도, 즉 대상들 자체를 보장하는 사물 자체의 아무런 규정도 표상하지 않고, 사람들이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할 때 그러한 것은 남는다.

Denn weder absolute, noch relative Bestimmungen können vor dem Dasein der Dinge, welchen sie zukommen, mithin nicht a priori angeschaut werden.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러한 규정이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사물들의 현존에 대한, 그 사물의 현존에 귀속되는 절대적인 규정들도, 상대적인 규정들도, 그에 따라 선험적으로 직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b) Der Raum ist nichts anders, als nur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äußerer Sinne, d.i. die subjektive Bedingung der Sinnlichkeit, unter der allein uns äußere Anschauung möglich ist.

b) 공간은 다른 무엇도 아니다,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감성의 주관적 조건,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 b) 공간은, 단지 외간의 모든 현상들의 형식으로서, 즉, 그 아래에서 오로지 우리의 외적 직관만이 가능한, 감성의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니다.

Weil nun die Rezeptivität des Subjekts, von Gegenständen affiziert zu werden, notwendiger Weise vor allen Anschauungen dieser Objekte vorhergeht, so läßt sich verstehen, wie die Form aller Erscheinungen vor allen wirklichen Wahrnehmungen, mithin a priori im Gemüte gegeben sein könne, und wie sie als eine reine Anschauung, in der alle Gegenstände bestimmt werden müssen, Prinzipien der Verhältnisse derselben vor aller Erfahrung enthalten könne.

왜냐하면 주체의 수용성은,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도록 한다,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선험적 직관으로서,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 왜냐하면, 대상들에 대해서 촉발되는 주체의 수용성은, 이러한 객체의 모든 직관에 대한 필연적인 방식에 선행하고, 그래서 모든 실질적 지각들에 앞서서 모든 현상들의 형식이 어떻게, 따라서 심정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그 안에서 모든 대상들이 규정되어야만 하는 선험적 직관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것 자체의 관계들에 대한 원칙들을 포함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한다.

Wir können demnach nur aus dem Standpunkte eines Menschen, vom Raum, von ausgedehnten Wesen etc. reden.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 우리는 그에 따라 오로지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공간에 대해서, 연장된 본질 등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Gehen wir von der subjektiven Bedingung ab, unter welcher wir allein äußere Anschauung bekommen können, so wie wir nämlich von de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mögen, so bedeutet die Vorstellung vom Raume gar nichts.

우리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 그러한 것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그러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 우리가, 그 아래에서 우리는 오로지 외적 직관만을 획득할 수 있는, 또한 우리가 다시 말해 대상들로부터 촉발될 수도 있는, 주관적 조건으로부터 떠난다면, 공간의 대상은 전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蟲-

Er muß ursprünglich Anschauung sein; denn aus einem bloßen Begriffe lassen sich keine Sätze, die über den Begriff hinausgehen, ziehen, welches doch in der Geometrie geschieht (Einleitung Ⅴ.). Aber diese Anschauung muß a priori, d.i. vor aller Wahrnehumg eines Gegenstandes, in uns angetroffen werden, mithin reine, nicht empirische Anschauung sein. Denn die geometrischen Sätze sind insgesamt apodiktisch, d.i. mit dem Bewußtsein ihrer Notwendigkeit verbunden, z.B. der Raum hat nur drei Abmessungen; dergleichen Sätze aber können nicht empirische oder Erfahrungsurteile sein, noch aus ihnen geschlossen werden (Einleit. Ⅱ.).

→ 그것은 근원적인 직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을 넘어서는 명제들이, 기하학의 역사 속에서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끌어 내도록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은 선험적으로, 즉 우리의 안에서 대상들의 모든 지각에 앞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고, 따라서 순수하고, 감각적이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공간은 단지 세 차원만을 가진다 같은 기하학적 명제들은 모두 다 자명한, 곧 그 명제들의 필연성의 의식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명제들은 그러나 감각적 혹은 경험적 판단일 수 없고, 또 그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Wie kann nun eine äußere Anschauung dem Gemüte beiwohnen, die vor den Objekten selbst vorhergeht, und in welcher der Begriff der letzteren a priori bestimmt werden kann? Offenbar nicht anders, als so fern sie bloß im Subjekte, als die formale Beschaffenheit desselben von Objekten affiziert zu werden, und dadurch unmittelbare Vorstellung derselben d.i. Anschauung zu bekommen, ihren Sitz hat, also nur als Form des äußeren Sinnes überhaupt.

→ 이제 어떻게 외적 직관이 객체 자체에 앞서 선행하는 심정에 내재할 수 있고, 그러한 심정 안에서 후자(심성)의 개념이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그것은 명백하게 다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하게 주체 안에서, 그것 자체의 형식적 성질로서 촉발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것의 직접적인 표상 즉 직관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자리를 갖는 한에서, 그러므로 단지 전적으로 외감의 형식으로서이다.

Also macht allein unsere Erklärung die Möglichkeit der Geometrie als einer synthetischen Erkenntnis a priori begreiflich. Eine jede Erklärungsart, die dieses nicht liefert, wenn sie gleich dem Anscheine nach mit ihr einige Ähnlichkeit hätte, kann an diesen Kennzeichen am sichersten von ihr unterschieden werden.

→ 그러므로 오로지 우리의 해명만이 선험적 종합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가능성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각각의 설명 방식은, 그것이 이러한 것을 산출하지 않는, 그것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설명방식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가장 확실한 특징에 있어서 우리의 것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Er muß ursprünglich Anschauung sein;

그것은 근원적인 직관이어야 한다.

denn aus einem bloßen Begriffe lassen sich keine Sätze, die über den Begriff hinausgehen, ziehen, welches doch in der Geometrie geschieht (Einleitung Ⅴ.).

왜냐하면 한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명제들이, 그 명제들이 그 개념을 넘어서는, 기하학의 역사 속에서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끌어 내도록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그것은 근원적인 직관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 순수한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을 넘어서는 명제들이, 기하학의 역사 속에서와 같은 그러한 것을, 이끌어 내도록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Aber diese Anschauung muß a priori, d.i. vor aller Wahrnehumg eines Gegenstandes, in uns angetroffen werden, mithin reine, nicht empirische Anschauung sein.

그러나 이러한 직관은 선험적으로, 즉 우리의 안에서 대상들의 모든 지각에 앞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고, 따라서 순수하고, 감각적이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

→ 그러나 이러한 직관은 선험적으로, 즉 우리의 안에서 대상들의 모든 지각에 앞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고, 따라서 순수하고, 감각적이지 않은 직관이어야만 한다.

Denn die geometrischen Sätze sind insgesamt apodiktisch, d.i. mit dem Bewußtsein ihrer Notwendigkeit verbunden, z.B. der Raum hat nur drei Abmessungen;

왜냐하면 기하학적 명제들은 모두 다 자명한, 곧 그 명제들의 필연성의 의식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간은 단지 세 차원만을 가진다;

dergleichen Sätze aber können nicht empirische oder Erfahrungsurteile sein, noch aus ihnen geschlossen werden (Einleit. Ⅱ.).

그와 같은 명제들은 그러나 감각적 혹은 경험적 판단일 수 없고, 또 그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 왜냐하면, 예를 들어 공간은 단지 세 차원만을 가진다 같은 기하학적 명제들은 모두 다 자명한, 곧 그 명제들의 필연성의 의식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명제들은 그러나 감각적 혹은 경험적 판단일 수 없고, 또 그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

 

Wie kann nun eine äußere Anschauung dem Gemüte beiwohnen, die vor den Objekten selbst vorhergeht, und in welcher der Begriff der letzteren a priori bestimmt werden kann?

이제 어떻게 외적 직관이 심정에 내재할 수 있고, 그 심정이 객체에 앞서 스스로 선행하는, 그러한 심정 안에서 후자의 개념이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 이제 어떻게 외적 직관이 객체 자체에 앞서 선행하는 심정에 내재할 수 있고, 그러한 심정 안에서 후자(심성)의 개념이 선험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가?

Offenbar nicht anders, als so fern sie bloß im Subjekte, als die formale Beschaffenheit desselben von Objekten affiziert zu werden, und dadurch unmittelbare Vorstellung derselben d.i. Anschauung zu bekommen, ihren Sitz hat, also nur als Form des äußeren Sinnes überhaupt.

그것은 명백하게 다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하게 주체 안에서, 그것 자체의 형식적 성질로서 촉발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것의 직접적인 표상 즉 직관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자리를 갖는 한에서, 그러므로 단지 전적으로 외감의 형식으로서이다.

→ 그것은 명백하게 다름 아니라, 그것이 순수하게 주체 안에서, 그것 자체의 형식적 성질로서 촉발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그것의 직접적인 표상 즉 직관을 획득하는 것으로서, 그것의 자리를 갖는 한에서, 그러므로 단지 전적으로 외감의 형식으로서이다.

 

Also macht allein unsere Erklärung die Möglichkeit der Geometrie als einer synthetischen Erkenntnis a priori begreiflich.

그러므로 오로지 우리의 해명만이 선험적 종합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가능성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 그러므로 오로지 우리의 해명만이 선험적 종합인식으로서 기하학의 가능성을 납득할 수 있게 만든다.

Eine jede Erklärungsart, die dieses nicht liefert, wenn sie gleich dem Anscheine nach mit ihr einige Ähnlichkeit hätte, kann an diesen Kennzeichen am sichersten von ihr unterschieden werden.

각각의 설명 방식은, 그것이 이러한 것을 산출하지 않는, 그것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설명방식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가장 확실한 특징에 있어서 우리의 것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 각각의 설명 방식은, 그것이 이러한 것을 산출하지 않는, 그것이 마찬가지로 우리의 설명방식과 유사하다 할지라도, 이러한 가장 확실한 특징에 있어서 우리의 것으로부터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蟲-

4-1) Nun muß man zwar einen jeden Begriff als eine Vorstellung denken, die in einer unendlichen Menge von verschiedenen möglichen Vorstellungen (als ihr gemeinschaftliches Merkmal) enthalten ist, mithin diese unter sich enthält; aber kein Begriff, als ein solcher, kann so gedacht werden, als ob er eine unendliche Menge von Vorstellungen in sich enthielte. Gleichwohl wird der Raum so gedacht (denn alle Teile des Raumes ins Unendliche sind zugleich). Also ist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vom Raume Anschauung a priori, und nicht Begriff.

→4-1) 이제 사람들은 더욱이 각각의 개념을, 상이한 가능한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 속에서 (그 표상의 공통의 표지로서) 포함되는,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그 아래 포함하는 표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은, 그러한 것으로서, 마치 그것이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을 그 자체에 포함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그렇게 생각된다(왜냐하면 공간의 모든 부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 동시에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본래적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lautet in A : 5)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röße gegeben vorgestellt. Ein allgemeiner Begriff vom Raum (der so wohl einem Fuße, als einer Elle gemein ist,) kann in Ansehung der Größe nichts bestimmen. Wäre es nicht die Grenzenlosigkeit im Fortgange der Anschauung, so würde kein Begriff von Verhältnissen ein Principium der Unendlichkeit derselben bei sich führen.

→ A에서는 다음과 같다 : 5) 공간은 한없는 크기로 주어진 것으로 표상된다. 공간에 대한 보편적 개념(그것이 Fuße만이 아니라 Elle이기도 한)은 크기에 대한 고려 속에서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직관의 진행 속에서 무제한이 없다면, 관계들에 대한 어떤 개념도 그 자체의 무한성에 대한 원칙을 그 곁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 3.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vom Raume

§ 3. 공간에 대한 개념의 초월론적 논구

 

Ich verstehe unter einer transzendentalen Erörterung die Erklärung eines Begriffs, als eines Prinzips, woraus die Möglichkeit anderer synthetischer Erkenntnisse a priori eingesehen werden kann. Zu dieser Absicht wird erfordert, 1) daß wirklich dergleichen Erkenntnisse aus dem gegebenen Begriffe herfließen, 2) daß diese Erkenntnisse nur unter der Voraussetzung einer gegebenen Erklärungsart dieses Begriffs möglich sind.

→ 나는 초월론적 논구(라는 제목) 아래에서, 원칙에 있어서, 그로부터 다른 선천적 종합적 인식들이 통찰될 수 있는, 개념의 해명을 생각한다. 이러한 의도에 1) 실질적으로 그와 같은 인식들이 그 주어진 개념들로부터 유래할 것, 2) 이러한 인식들이 오로지 이러한 개념의 주어진 설명방식의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요구된다.

Geometrie ist eine Wissenschaft, welche die Eigenschaften des Raumes synthetisch und doch a priori bestimmt. Was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denn sein, damit eine solche Erkenntnis von ihm möglich sei?

→ 기하학은, 공간의 본성들을 종합적이고 또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학문이다. 그러면, 그에 따라 그 개념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 공간의 개념은 대체 무엇이이어야 하는가?

 

 

4-1) Nun muß man zwar einen jeden Begriff als eine Vorstellung denken, die in einer unendlichen Menge von verschiedenen möglichen Vorstellungen (als ihr gemeinschaftliches Merkmal) enthalten ist, mithin diese unter sich enthält;

4-1) 이제 사람들은 더욱이 각각의 개념을 표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 표상이 상이한 가능한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 속에서 (그 표상의 공통의 표지로서) 포함되는,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그 아래 포함하는;

aber kein Begriff, als ein solcher, kann so gedacht werden, als ob er eine unendliche Menge von Vorstellungen in sich enthielte.

그러나 개념은, 그러한 것으로서,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 않다, 마치 그것이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을 그 자체에 포함했던 것처럼.

→4-1) 이제 사람들은 더욱이 각각의 개념을, 상이한 가능한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 속에서 (그 표상의 공통의 표지로서) 포함되는,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그 아래 포함하는 표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은, 그러한 것으로서, 마치 그것이 표상들에 대한 무한한 양을 그 자체에 포함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될 수 있지 않다.

Gleichwohl wird der Raum so gedacht (denn alle Teile des Raumes ins Unendliche sind zugleich).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그렇게 생각된다(왜냐하면 공간의 모든 부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 동시에 있기 때문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은 그렇게 생각된다(왜냐하면 공간의 모든 부분들이 무한한 공간 속에 동시에 있기 때문에).

Also ist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vom Raume Anschauung a priori, und nicht Begriff.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본래적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 그러므로 공간에 대한 본래적 표상은 선험적 직관이며, 개념이 아니다.

 

lautet in A : 5)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röße gegeben vorgestellt. 

A에서는 다음과 같다 : 5) 공간은 한없는 크기로 주어진 것으로 표상된다.

→ A에서는 다음과 같다 : 5) 공간은 한없는 크기로 주어진 것으로 표상된다.

Ein allgemeiner Begriff vom Raum (der so wohl einem Fuße, als einer Elle gemein ist,) kann in Ansehung der Größe nichts bestimmen.

공간에 대한 보편적 개념(그것이 Fuße만이 아니라 Elle이기도 한)은 크기에 대한 고려 속에서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 공간에 대한 보편적 개념(그것이 Fuße만이 아니라 Elle이기도 한)은 크기에 대한 고려 속에서 아무것도 규정할 수 없다.

Wäre es nicht die Grenzenlosigkeit im Fortgange der Anschauung, so würde kein Begriff von Verhältnissen ein Principium der Unendlichkeit derselben bei sich führen.

직관의 진행 속에서 무제한이 없다면, 관계들에 대한 어떤 개념도 그 자체의 무한성에 대한 원칙을 그 곁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 직관의 진행 속에서 무제한이 없다면, 관계들에 대한 어떤 개념도 그 자체의 무한성에 대한 원칙을 그 곁으로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다.

 

§ 3.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vom Raume

§ 3. 공간에 대한 개념의 초월론적 논구

 

Ich verstehe unter einer transzendentalen Erörterung die Erklärung eines Begriffs, als eines Prinzips, woraus die Möglichkeit anderer synthetischer Erkenntnisse a priori eingesehen werden kann.

나는 초월론적 논구(라는 제목) 아래에서 개념의 해명을 생각한다, 원칙에 있어서, 그로부터 다른 선천적 종합적 인식들이 통찰될 수 있는.

→ 나는 초월론적 논구(라는 제목) 아래에서, 원칙에 있어서, 그로부터 다른 선천적 종합적 인식들이 통찰될 수 있는, 개념의 해명을 생각한다.

Zu dieser Absicht wird erfordert,

이러한 의도에 요구된다,

1) daß wirklich dergleichen Erkenntnisse aus dem gegebenen Begriffe herfließen,

1) 실질적으로 그와 같은 인식들이 그 주어진 개념들로부터 유래할 것,

2) daß diese Erkenntnisse nur unter der Voraussetzung einer gegebenen Erklärungsart dieses Begriffs möglich sind.

2) 이러한 인식들이 오로지 이러한 개념의 주어진 설명방식의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 이러한 의도에 1) 실질적으로 그와 같은 인식들이 그 주어진 개념들로부터 유래할 것, 2) 이러한 인식들이 오로지 이러한 개념의 주어진 설명방식의 전제 아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요구된다.

 

Geometrie ist eine Wissenschaft, welche die Eigenschaften des Raumes synthetisch und doch a priori bestimmt.

기하학은 학문이다, 그 학문이 공간의 본성들을 종합적이고 또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 기하학은, 공간의 본성들을 종합적이고 또한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학문이다.

Was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denn sein, damit eine solche Erkenntnis von ihm möglich sei?

그러면 공간의 개념은 대체 무엇이이어야 하는가, 그에 따라 그 개념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

→ 그러면, 그에 따라 그 개념에 대한 그러한 인식이 가능한 공간의 개념은 대체 무엇이이어야 하는가?

 

-蟲-

3) Der Raum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sagt, allgemeiner Begriff von Verhältnissen der Dinge überhaupt, sondern eine reine Anschauung. Denn erstlich kann man sich nur einen einigen Raum vorstellen, und wenn man von vielen Räumen redet, so verstehet man darunter nur Teile eines und desselben alleinigen Raumes. Diese Teile können auch nicht vor dem einigen allbefassenden Raume gleichsam als dessen Bestandteile (daraus eine Zusammensetzung möglich sei) vorhergehen, sondern nur in ihm gedacht werden. Er ist wesentlich einig, das Mannigfaltige in ihm, mithin auch der allgemeine Begriff von Räumen überhaupt, beruht lediglich auf Einschränkungen. Hieraus folgt, daß in Ansehung seiner eine Anschauung a priori (die nicht empirisch ist) allen Begriffen von demselben zum Grunde liegt. So werden auch alle geometrische Grundsätze, z.E. daß in einem Triangel zwei Seiten zusammen größer sein, als die dritte, niemals aus allgemeinen Begriffen von Linie und Triangel, sondern aus der Anschauung und zwar a priori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abgeleitet.

→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고유하고, 다양한 것들은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의 합은 그 세번째 변보다 더욱 크다는 것과 같은 근본명제들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4)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egebene Größe vorgestellt.

→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3) Der Raum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sagt, allgemeiner Begriff von Verhältnissen der Dinge überhaupt, sondern eine reine Anschauung.

3)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 공간은 추론적이거나, 혹은, 사람들이 말하듯, 전적으로 사물들의 관계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직관이다.

Denn erstlich kann man sich nur einen einigen Raum vorstellen, und wenn man von vielen Räumen redet, so verstehet man darunter nur Teile eines und desselben alleinigen Raumes.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첫째로 사람들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공간만을 표상할 수 있고, 사람들이 다양한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에 따라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단지 하나의 그리고 그 자체로 고유한 공간의 부분들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Diese Teile können auch nicht vor dem einigen allbefassenden Raume gleichsam als dessen Bestandteile (daraus eine Zusammensetzung möglich sei) vorhergehen, sondern nur in ihm gedacht werden.

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이러한 부분들은 또한 그 고유하게 총괄하는 공간에 앞서 마치 그 공간의 요소들처럼 (그로부터 합성물이 가능한)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 공간 안에서 생각된다.

Er ist wesentlich einig, das Mannigfaltige in ihm, mithin auch der allgemeine Begriff von Räumen überhaupt, beruht lediglich auf Einschränkungen.

그것은 본질적으로 고유하다, 다양한 것들이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이,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공간은 본질적으로 고유하고, 다양한 것들은 그 안에서, 따라서 또한 공간들에 대한 일반적 개념은, 단지 제한들에 근거한다.

Hieraus folgt, daß in Ansehung seiner eine Anschauung a priori (die nicht empirisch ist) allen Begriffen von demselben zum Grunde liegt.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이에 따라, 그 공간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간 자체에 대한 모든 개념들이 기초에 놓인다.

So werden auch alle geometrische Grundsätze, z.E. daß in einem Triangel zwei Seiten zusammen größer sein, als die dritte, niemals aus allgemeinen Begriffen von Linie und Triangel, sondern aus der Anschauung und zwar a priori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abgeleitet.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은 함께 더욱 크다, 그 세번째 변보다, 같은 것은 전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 그래서 또한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들, 예를 들어 한 삼각형 안에서 두 변들의 합은 그 세번째 변보다 더욱 크다는 것과 같은 근본명제들은 직선과 삼각형에 대한 보편적인 개념들로부터가 전혀 아니고, 오히려 직관으로부터 더욱이 선험적으로 서술적 확실성을 가지고 이끌려 나온다.

 

4) Der Raum wird als eine unendliche gegebene Größe vorgestellt.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 4) 공간은 주어진 한없는 크기로서 표상된다.

 

-蟲-

Er wird also als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Erscheinungen, und nicht als eine von ihnen abhängende Bestimmung angesehen, und ist eine Vorstellung a priori, die notwendiger Weise äußer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t.

→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이 아닌 것으로서 고려되고,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선험적인 표상이다.

 

In A folgt : 3) Auf di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die apodiktische Gewißheit aller geometrischen Grundsätze, und die Möglichkeit ihrer Konstruktion a priori. Wäre nämlich diese Vorstellung des Raums ein a posteriori erworbener Begriff, der aus der allgemeinen äußeren Erfahrung geschöpft wäre, so würden die ersten Grundsätze der mathematischen Bestimmung nichts als Wahrnehmungen sein. Sie hätten also alle Zufälligkeit der Wahrnehmung, und es wäre eben nicht notwendig, daß zwischen zween Punkten nur eine gerade Linie sei, sondern die Erfahrung würde es so jederzeit lehren. Was von der Erfahrung entlehnt ist, hat auch nur komparative Allgemeinheit, nämlich durch Induktion. Man würde also nur sagen können, so viel zur Zeit noch bemerkt worden, ist kein Raum gefunden worden, der mehr als drei Abmessungen hätte.

→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매번) 배울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 즉 귀납을 통한 (보편성)을 가진다.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3차원 이상을 가지는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r wird also als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Erscheinungen, und nicht als eine von ihnen abhängende Bestimmung angesehen, und ist eine Vorstellung a priori, die notwendiger Weise äußer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t.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으로서 고려되고, 선험적인 표상이다,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 그러므로 그것(공간)은 현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으로서, 그리고 현상들에 달려 있는 규정이 아닌 것으로서 고려되고, 그 필연적인 방식의 표상이 외부 현상들에 기초로서 놓여진 선험적인 표상이다.

 

In A folgt : 3) Auf di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die apodiktische Gewißheit aller geometrischen Grundsätze, und die Möglichkeit ihrer Konstruktion a priori.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 A판에 따르면 : 3) 모든 기하학적 근본명제의 자명한 확실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하며, 그것의 선험적 구조의 가능성이 그 선험적 필연성을 근거로 한다.

Wäre nämlich diese Vorstellung des Raums ein a posteriori erworbener Begriff, der aus der allgemeinen äußeren Erfahrung geschöpft wäre, so würden die ersten Grundsätze der mathematischen Bestimmung nichts als Wahrnehmungen sein.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 즉 공간의 이러한 표상이 후험적으로 습득된 개념이라면, 그 개념이 일반적 외적 경험으로부터 길어져 나오는 것이라면, 그래서 수학적 규정의 최초의 근본명제는 지각들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Sie hätten also alle Zufälligkeit der Wahrnehmung, und es wäre eben nicht notwendig, daß zwischen zween Punkten nur eine gerade Linie sei, sondern die Erfahrung würde es so jederzeit lehren.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다,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 배울 것이다.

→ 그러므로 그 표상은 지각의 모든 우연성을 가질 것이고, 두 점 사이에는 오직 하나의 곧은 선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전혀 필연적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경험은 그것을 그렇게 언제나(매번) 배울 것이다.

Was von der Erfahrung entlehnt ist, hat auch nur komparative Allgemeinheit, nämlich durch Induktion.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을 가진다, 즉 귀납을 통한.

→ 경험으로부터 차용된 것은, 또한 오직 상대적 보편성만, 즉 귀납을 통한 (보편성)을 가진다.

Man würde also nur sagen können, so viel zur Zeit noch bemerkt worden, ist kein Raum gefunden worden, der mehr als drei Abmessungen hätte.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 공간이 세 측정들(차원들) 이상을 가진.

→ 사람들은 그러므로 단지 현재 관찰된 것에 따르면 3차원 이상을 가진 공간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蟲-

Um uns hierüber zu belehren, wollen wir zuerst den Begriff des Raumes erörtern. Ich verstehe aber unter Erörterung (expositio) die deutliche (wenn gleich nicht ausführliche) Vorstellung dessen, was zu einem Begriffe gehört; metaphysisch aber ist die Erörterung, wenn sie dasjenige enthält, was den Begriff, als a priori gegeben, darstellt.

→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개념에 속하는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상론은, 그 상론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개념을 그것을 포함한다면. 형이상학적이다.

1) Der Raum ist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von äußeren Erfahrungen abgezogen worden. Denn damit gewisse Empfindungen auf etwas außer mir bezogen werden, (d.i. auf etwas in einem andern Orte des Raumes, als darinnen ich mich befinde,) imgleichen damit ich sie als außer und neben einander, mithin nicht bloß verschieden, sondern als in verschiedenen Orten vorstellen könne, dazu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schon zum Grunde liegen. Demnach kann die Vorstellung des Raumes nicht aus den Verhältnissen der äußern Erscheinung durch Erfahrung erborgt sein, sondern diese äußere Erfahrung ist selbst nur durch gedachte Vorstellung allererst möglich.

→ 1) 공간은,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위해서,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자체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2) Der Raum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a priori, die allen äußer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Man kann sich niemals eine Vorstellung davon machen, daß kein Raum sei, ob man sich gleich ganz wohl denken kann, daß keine Gegenstände darin angetroffen werden.

→ 2) 공간은,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선험적인 필연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결코, 공간이 없다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Um uns hierüber zu belehren, wollen wir zuerst den Begriff des Raumes erörtern.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 이에 관해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공간의 개념을 상론하고자 한다.

Ich verstehe aber unter Erörterung (expositio) die deutliche (wenn gleich nicht ausführliche) Vorstellung dessen, was zu einem Begriffe gehört;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것이 개념에 속하는;

metaphysisch aber ist die Erörterung, wenn sie dasjenige enthält, was den Begriff, als a priori gegeben, darstellt.

그러나 그 상론은 형이상학적이다, 그 상론이 그것을 포함한다면, 그것이 개념을,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 그러나 나는 상론(해명)을 개념에 속하는 그것의 분명한 (비록 상세하지는 않더라도) 표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 상론은, 그 상론이,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제시하는 개념을 그것을 포함한다면. 형이상학적이다.

 

1) Der Raum ist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von äußeren Erfahrungen abgezogen worden.

1) 공간은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 1) 공간은, 그 개념이 외적 경험들로부터 도출되는 감각적 개념이 아니다.

Denn damit gewisse Empfindungen auf etwas außer mir bezogen werden, (d.i. auf etwas in einem andern Orte des Raumes, als darinnen ich mich befinde,) imgleichen damit ich sie als außer und neben einander, mithin nicht bloß verschieden, sondern als in verschiedenen Orten vorstellen könne, dazu muß die Vorstellung des Raumes schon zum Grunde liegen.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때문이다,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순전히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는,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 왜냐하면 그것으로 확실한 지각이 어떤 것에 나의 외부에서 관련되기 위해서, (즉 어떤 것에, 그 안에서 내가 나를 인지하는 공간의 다른 한 지점에서,) 또한 내가 그것들을 서로 바깥에 그리고 곁에 있는 것으로서, 그에 따라 자체로 상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이한 지점에서 표상할 수 있기 위해서, 그에 대해 공간의 표상이 이미 기초에 놓여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Demnach kann die Vorstellung des Raumes nicht aus den Verhältnissen der äußern Erscheinung durch Erfahrung erborgt sein, sondern diese äußere Erfahrung ist selbst nur durch gedachte Vorstellung allererst möglich.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 그에 따라 공간의 표상은 외적 직관의 내용들로부터 경험을 통해 차용될 수 없고, 오히려 이러한 외적 경험이 스스로 오직 사유된 표상을 통해서만 처음으로 가능하다.

2) Der Raum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a priori, die allen äußer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2) 공간은 필연적 표상이다, 선험적인,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 2) 공간은, 그 표상을 모든 외적 직관들이 기초에 두는, 선험적인 필연적 표상이다.

Man kann sich niemals eine Vorstellung davon machen, daß kein Raum sei, ob man sich gleich ganz wohl denken kann, daß keine Gegenstände darin angetroffen werden.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공간이 없다는, 비록 사람들이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그 안에 어떠한 대상들도 마주쳐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잘 생각할 수 있다 할지라도 결코, 공간이 없다는 그에 대한 표상을 만들 수 없다.

 

-蟲-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Ers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1장

Von der Raume

공간에 대하여

§ 2. Metaphysische Erörterung dieses Begriffs

§ 2. 이 개념의 형이상학적 논구

Vermittelst des äußeren Sinnes, (einer Eigenschaft unsres Gemüts,) stellen wir uns Gegenstände als außer uns, und diese insgesamt im Raume vor. Darinnen ist ihre Gestalt, Größe und Verhältnis gegen einander bestimmt, oder bestimmbar. Der innere Sinn, vermittelst dessen das Gemüt sich selbst, oder seinen inneren Zustand anschauet, gibt zwar keine Anschauung von der Seele selbst, als einem Objekt; allein es ist doch eine bestimmte Form, unter der die Anschauung ihres innern Zustandes allein möglich ist, so, daß alles, was zu den innern Bestimmungen gehört, in Verhältnissen der Zeit vorgestellt wird. Äußerlich kann die Zeit nicht angeschaut werden, so wenig wie der Raum, als etwas in uns. Was sind nun Raum und Zeit? Sind es wirkliche Wesen? Sin des zwar nur Bestimmungen, oder auch Verhältnisse der Dinge, aber doch solche, welche ihnen auch an sich zukommen würden, wenn sie auch nicht angeschaut würden, oder sind sie solche, die nur an der Form der Anschauung allein haften, und mithin an der subjektiven Beschaffenheit unseres Gemüts, ohne welche diese Prädikate gar keinem Dinge beigeleget werden können?

→ 외감에 따라서, (우리의 심정의 본성의,) 우리는 우리에게 대상들을 우리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다 공간 속에서 표상한다. 그 속에서 대상의 형태, 크기 그리고 관계가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규정되거나, 규정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심정 자체를, 혹은 심정의 내적 상태를 관찰하는 내감은, 더욱이 영혼 자체에 대한 어떠한 직관도, 객체로서 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이 규정된 형식인 경우에만, 그 아래에서 그것의 내적 상태의 직관만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내적 규정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시간 관계들 속에서 표상된다. 외적으로 시간은 관찰될 수 없고, 그만큼 공간은, 우리 안에 어떤 것으로서 관찰될 수 없다. 이제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 실체(본질)인가? 그것은 단순한 규정들이거나, 사물의 내용들인가, 그러나 또한, 그 자체로 부합하게 되는 그러한 것들이, 그것들이 직관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들이, 단지 직관의 형식에만 부착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심정의 주관적 성질에 부착되어 있는, 이러한 술어가 없이는 전혀 어떠한 사물도 부여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인가?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Ers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1장

Von der Raume

공간에 대하여

§ 2. Metaphysische Erörterung dieses Begriffs

§ 2. 이 개념의 형이상학적 논구

Vermittelst des äußeren Sinnes, (einer Eigenschaft unsres Gemüts,) stellen wir uns Gegenstände als außer uns, und diese insgesamt im Raume vor.

외감에 따라서, (우리의 심정의 본성의,) 우리는 우리에게 대상들을 우리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다 공간 속에서 표상한다.

→ 외감에 따라서, (우리의 심정의 본성의,) 우리는 우리에게 대상들을 우리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대상들을 모두 다 공간 속에서 표상한다.

Darinnen ist ihre Gestalt, Größe und Verhältnis gegen einander bestimmt, oder bestimmbar.

그 속에서 대상의 형태, 크기 그리고 관계가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규정되거나, 규정할 수 있다.

→ 그 속에서 대상의 형태, 크기 그리고 관계가 다른 것들에 대해서 규정되거나, 규정할 수 있다.

Der innere Sinn, vermittelst dessen das Gemüt sich selbst, oder seinen inneren Zustand anschauet, gibt zwar keine Anschauung von der Seele selbst, als einem Objekt;

내감, 그에 따라 심정 자체를, 혹은 심정의 내적 상태를 관찰하는, 더욱이 영혼 자체에 대한 어떠한 직관도, 객체로서 주지 않는다;

allein es ist doch eine bestimmte Form, unter der die Anschauung ihres innern Zustandes allein möglich ist, so, daß alles, was zu den innern Bestimmungen gehört, in Verhältnissen der Zeit vorgestellt wird.

오로지 그것이 규정된 형식인 경우에만, 그 아래에서 그것의 내적 상태의 직관만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모든 것은, 내적 규정에 속하는(모든 것), 시간 관계들 속에서 표상된다.

→ 그에 따라 심정 자체를, 혹은 심정의 내적 상태를 관찰하는 내감은, 더욱이 영혼 자체에 대한 어떠한 직관도, 객체로서 주지 않는다; 오로지 그것이 규정된 형식인 경우에만, 그 아래에서 그것의 내적 상태의 직관만이 가능하고, 그래서, 그 내적 규정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시간 관계들 속에서 표상된다.

Äußerlich kann die Zeit nicht angeschaut werden, so wenig wie der Raum, als etwas in uns.

외적으로 시간은 관찰될 수 없고, 그만큼 공간은, 우리 안에 어떤 것으로서 (관찰될 수 없다).

→ 외적으로 시간은 관찰될 수 없고, 그만큼 공간은, 우리 안에 어떤 것으로서 관찰될 수 없다.

Was sind nun Raum und Zeit? Sind es wirkliche Wesen?

이제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 실체(본질)인가?

→ 이제 공간과 시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실질적 실체(본질)인가?

Sind es zwar nur Bestimmungen, oder auch Verhältnisse der Dinge, aber doch solche, welche ihnen auch an sich zukommen würden, wenn sie auch nicht angeschaut würden, oder sind sie solche, die nur an der Form der Anschauung allein haften, und mithin an der subjektiven Beschaffenheit unseres Gemüts, ohne welche diese Prädikate gar keinem Dinge beigeleget werden können?

그것은 단순한 규정들이거나, 사물의 내용들이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 부합하게 되는, 그것들이 직관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들이 그러한 것들이다, 단지 직관의 형식에만 부착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심정의 주관적 성질에 부착되어 있는, 이러한 술어가 없이는 전혀 어떠한 사물도 부여될 수 없는?

→ 그것은 단순한 규정들이거나, 사물의 내용들인가, 그러나 또한, 그 자체로 부합하게 되는 그러한 것들이, 그것들이 직관되지 않는다면, 혹은 그것들이, 단지 직관의 형식에만 부착되어 있는,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의 심정의 주관적 성질에 부착되어 있는, 이러한 술어가 없이는 전혀 어떠한 사물도 부여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인가?

 

-蟲-

1-1) Um deswillen ist es ratsam, diese Benennung entweder wiederum eingehen zu lassen, und sie derjenigen Lehre aufzubehalten, die wahre Wissenschaft ist, (wodurch man auch der Sprache und dem Sinne der Alten näher treten würde, bei denen die Einteilung der Erkenntnis in αλσθετὰ χαὶ νοητά sehr berühmt war), oder sich in die Benennung mit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zu teilen und die Ästhetik teils im transzendentalen Sinne, teils in psychologischer Bedeutung zu nehmen.

→ 1-1) 그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한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그 명칭을, 참된 학문인 그 설에 붙잡아 두는 것이나,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의 인식 구분이 매우 유명하였던, 옛 사람들의 언어와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 이름 안에서 사변적 철학과 공유하는 것과 감성학을 일부분 초월적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취하는 것이나 권장할 만하다.

Es muß also eine solche Wissenschaft geben, die den ersten Teil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ausmacht, im Gegensatz derjenigen, welche die Prinzipien des reinen Denkens enthält, und transzendentale Logik genannt wird.

→ 그러므로 초월적 요소론의 제 1부를 구성하는 그러한 학문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의 대립에 있어서(그 맞은 편에), 순수한 사유의 원칙을 포함하는 그러한 것이, 초월적 논리학이라 명명된다.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also werden wir zuerst die Sinnlichkeit isolieren, dadurch, daß wir alles absondern, was der Verstand durch seine Begriffe dabei denkt, damit nichts als empirische Anschauung übrig bleibe. Zweitens werden wir von dieser noch alle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btrennen, damit nichts als reine Anschauung und die bloße Form der Erscheinungen übrig bleibe, welches das einzige ist, das die Sinnlichkeit a priori liefern kann. Bei dieser Untersuchung wird sich finden, daß es zwei reine Formen sinnlicher Anschauung, als Prinzipien der Erkenntnis a priori gebe, nämlich Raum und Zeit, mit deren Erwägung wir uns jetzt beschäftigen werden.

→ 그러므로 초월적 감성학에서 우리는 처음에, 우리가 모든 것을 분류하는 것, 오성이 오성의 개념을 통하여 동시에 사유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감성을 고립시킨다. 그러므로 감각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또한, 지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순수한 직관과 현상의 순전한 형식 이외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선험적 감성을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와 동시에,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한 형식들이,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로서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과 시간, 우리는 이제 그것들의 숙고에 몰두할 것이다.

 

 

1-1) Um deswillen ist es ratsam, diese Benennung entweder wiederum eingehen zu lassen, und sie derjenigen Lehre aufzubehalten, die wahre Wissenschaft ist, (wodurch man auch der Sprache und dem Sinne der Alten näher treten würde, bei denen die Einteilung der Erkenntnis in αλσθετὰ χαὶ νοητά sehr berühmt war), oder sich in die Benennung mit der spekulativen Philosophie zu teilen und die Ästhetik teils im transzendentalen Sinne, teils in psychologischer Bedeutung zu nehmen.

1-1) 그 때문에 권장할 만하다, 이러한 명칭을 한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그 명칭을 그 설에 붙잡아 두는 것이나, 그 설은 참된 학문인데,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또한 옛 사람들의 언어와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의 인식 구분이 매우 유명하였던), 아니면 그 이름 안에서 사변적 철학과 공유하는 것과 감성학을 일부분 초월적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취하는 것이나.

→ 1-1) 그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한편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과 그 명칭을, 참된 학문인 그 설에 붙잡아 두는 것이나, (그를 통하여 사람들이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감성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으로의 인식 구분이 매우 유명하였던, 옛 사람들의 언어와 의미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될 것이다), 아니면 그 이름 안에서 사변적 철학과 공유하는 것과 감성학을 일부분 초월적 의미에서, 부분적으로는 심리학적 의미에서 취하는 것이나 권장할 만하다.

 

 

Es muß also eine solche Wissenschaft geben, die den ersten Teil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ausmacht, im Gegensatz derjenigen, welche die Prinzipien des reinen Denkens enthält, und transzendentale Logik genannt wird.

그러므로 그러한 학문이 있어야만 한다, 그 학문은 초월적 요소론의 제 1부를 구성하는데, 그것의 대립에 있어서(그 맞은 편에), 그러한 것이 순수한 사유의 원칙을 포함하는, 그리고 초월적 논리학이라 명명된다.

→ 그러므로 초월적 요소론의 제 1부를 구성하는 그러한 학문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의 대립에 있어서(그 맞은 편에), 순수한 사유의 원칙을 포함하는 그러한 것이, 초월적 논리학이라 명명된다.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also werden wir zuerst die Sinnlichkeit isolieren, dadurch, daß wir alles absondern, was der Verstand durch seine Begriffe dabei denkt, damit nichts als empirische Anschauung übrig bleibe.

그러므로 초월적 감성학에서 우리는 처음에 감성을 고립시킨다, 그를 통하여, 우리가 모든 것을 분류하는 것, 오성이 오성의 개념을 통하여 동시에 사유하는(모든 것), 그러므로 감각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 그러므로 초월적 감성학에서 우리는 처음에, 우리가 모든 것을 분류하는 것, 오성이 오성의 개념을 통하여 동시에 사유하는 모든 것을 통하여, 감성을 고립시킨다. 그러므로 감각적 직관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Zweitens werden wir von dieser noch alle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btrennen, damit nichts als reine Anschauung und die bloße Form der Erscheinungen übrig bleibe, welches das einzige ist, das die Sinnlichkeit a priori liefern kann.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또한 모든 것을, 지각에 속하는(모든 것),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순수한 직관과 현상의 순전한 형식 이외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선험적 감성을 산출할 수 있는.

→ 다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또한, 지각에 속하는 모든 것을, 분리시킨다. 그러므로 순수한 직관과 현상의 순전한 형식 이외의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선험적 감성을 산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Bei dieser Untersuchung wird sich finden, daß es zwei reine Formen sinnlicher Anschauung, als Prinzipien der Erkenntnis a priori gebe, nämlich Raum und Zeit, mit deren Erwägung wir uns jetzt beschäftigen werden.

이러한 연구와 동시에 알 것이다,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한 형식들이,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로서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공간과 시간, 우리는 이제 그것들의 숙고에 몰두할 것이다.

→ 이러한 연구와 동시에, 감성적 직관의 두 가지 순수한 형식들이, 선험적 인식의 원리들로서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다시 말해 공간과 시간, 우리는 이제 그것들의 숙고에 몰두할 것이다.

 

-蟲-

So, wenn ich von der Vorstellung eines Körpers das, was der Verstand davon denkt, als Substanz, Kraft, Teilbarkeit etc. imgleichen, was davon zur Empfindung gehört, als Undurchdringlichkeit, Härte, Farbe etc. absondere, so bleibt mir aus dieser empirischen Anschauung noch etwas übrig, nämlich Ausdehnung und Gestalt. Diese gehören zur reinen Anschauung, die a priori, auch ohne einen wirklichen Gegenstand der Sinne oder Empfindung, als eine bloße Form der Sinnlichkeit im Gemüte stattfindet.

→ 그래서, 내가 물체의 표상으로부터 오성이 생각하는 실체, 힘, 가분성 등으로서 분류하는 것을, 그로부터 직관에 속하는 것을, 불가투입성, 견고성, 색채 등으로서 분류할 때,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또한 어떤 것이, 즉 연장과 형태가 남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선험적인, 또한 감관이나 지각의 실질적 대상이 없이, 감성의 순전한 형식으로서 심정에 발생하는 순수한 직관에 속한다.

Eine Wissenschaft von allen Prinzipien der Sinnlichkeit a priori nenne 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1).

→선험적 감성의 모든 원칙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이름한다.

1) Die Deutschen sind die einzigen, welche sich jetzt des Worts Ästhetik bedienen, um dadurch das zu bezeichnen, was andre Kritik des Geschmacks heißen. Es liegt hier eine verfehlte Hoffnung zum Grunde, die der vortreffliche Analyst Baumgarten faßte, die kritische Beurteilung des Schönen unter Vernunftprinzipien zu bringen, und die Regeln derselben zur Wissenschaft zu erheben. Allein diese Bemühung ist vergeblich. Denn gedachte Regeln, oder Kriterien, sind ihren vornehmsten Quellen nach bloß empirisch, und können also niemals zu bestimmten Gesetzen a priori dienen, wornach sich unser Geschmacksurteil richten müßte, vielmehr macht das letztere den eigentlichen Probierstein der Richtigkeit der ersteren aus.

→1) 오늘날 Ästhetik 이란 단어를, 또 다른 취미비판이라 불리는 것을 그를 통해 그려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독일이 유일하다.→ 여기에, 우수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이 품었던, 이성원칙 하에서 아름다움의 비판적 평가를 이끌어내고, 그 비판 자체의 규칙들을 학문으로 내세우려는, 빗나간 희망이 근저에 놓인다.→ 단지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헛수고이다.→ 왜냐하면 고려된 규칙들, 혹은 판단의 표지들은, 그것들의 주요한 원천에 있어서 순전히 감각적인 것에 따르고, 그러므로,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 법칙들로, 더욱이 후자(감각적인 것)가 전자(고려된 원칙들, 판단의 표지들)의 정당성에 대한 유일무이한 시금석을 형성하는, 규정된 선험적 법칙들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So, wenn ich von der Vorstellung eines Körpers das, was der Verstand davon denkt, als Substanz, Kraft, Teilbarkeit etc. imgleichen, was davon zur Empfindung gehört, als Undurchdringlichkeit, Härte, Farbe etc. absondere, so bleibt mir aus dieser empirischen Anschauung noch etwas übrig, nämlich Ausdehnung und Gestalt.

그래서, 내가 물체의 표상으로부터 그것을, 오성이 그것을 생각하는 것을, 실체, 힘, 가분성 등으로서 분류하는, 그로부터 직관에 속하는 것을, 불가투입성, 견고성, 색채 등으로서 분류할 때,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또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 즉 연장과 형태.

→ 그래서, 내가 물체의 표상으로부터 오성이 생각하는 실체, 힘, 가분성 등으로서 분류하는 것을, 그로부터 직관에 속하는 것을, 불가투입성, 견고성, 색채 등으로서 분류할 때, 그래서 나에게 이러한 감각적 직관으로부터 또한 어떤 것이, 즉 연장과 형태가 남아 있다.

Diese gehören zur reinen Anschauung, die a priori, auch ohne einen wirklichen Gegenstand der Sinne oder Empfindung, als eine bloße Form der Sinnlichkeit im Gemüte stattfindet.

이러한 것들은 순수한 직관에 속한다, 선험적인, 또한 감관이나 지각의 실질적 대상이 없이, 감성의 순전한 형식으로서 심정에 발생하는 직관.

→ 이러한 것들은, 선험적인, 또한 감관이나 지각의 실질적 대상이 없이, 감성의 순전한 형식으로서 심정에 발생하는 순수한 직관에 속한다.

 

Eine Wissenschaft von allen Prinzipien der Sinnlichkeit a priori nenne 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1).

선험적 감성의 모든 원칙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이름한다.

→선험적 감성의 모든 원칙들에 대한 학문을 나는 초월적 감성학이라 이름한다.

 

1) Die Deutschen sind die einzigen, welche sich jetzt des Worts Ästhetik bedienen, um dadurch das zu bezeichnen, was andre Kritik des Geschmacks heißen.

1) 독일이 유일하다, 오늘날 Ästhetik 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그를 통해 그려내기 위해서, 또 다른 취향의 비판이라 불리는 것을.

→1) 오늘날 Ästhetik 이란 단어를, 또 다른 취미비판이라 불리는 것을 그를 통해 그려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독일이 유일하다.

Es liegt hier eine verfehlte Hoffnung zum Grunde, die der vortreffliche Analyst Baumgarten faßte, die kritische Beurteilung des Schönen unter Vernunftprinzipien zu bringen, und die Regeln derselben zur Wissenschaft zu erheben.

여기에 빗나간 희망이 근저에 놓인다, 우수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이 품었던, 이성원칙 하에서 아름다움의 비판적 평가를 이끌어내려는, 그 비판 자체의 규칙들을 학문으로 내세우려는.

→ 여기에, 우수한 분석가 바움가르텐이 품었던, 이성원칙 하에서 아름다움의 비판적 평가를 이끌어내고, 그 비판 자체의 규칙들을 학문으로 내세우려는, 빗나간 희망이 근저에 놓인다.

Allein diese Bemühung ist vergeblich.

단지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헛수고이다.

→ 단지 이러한 노력만으로는 헛수고이다.

Denn gedachte Regeln, oder Kriterien, sind ihren vornehmsten Quellen nach bloß empirisch, und können also niemals zu bestimmten Gesetzen a priori dienen, wornach sich unser Geschmacksurteil richten müßte, vielmehr macht das letztere den eigentlichen Probierstein der Richtigkeit der ersteren aus.

왜냐하면 고려된 규칙들, 혹은 판단의 표지들은, 그것들의 주요한 원천에 있어서 순전히 감각적인 것에 따르고, 그러므로 규정된 선험적 법칙들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 법칙들로, 더욱이 후자는 전자의 정당성에 대한 유일무이한 시금석을 형성하는.

→ 왜냐하면 고려된 규칙들, 혹은 판단의 표지들은, 그것들의 주요한 원천에 있어서 순전히 감각적인 것에 따르고, 그러므로, 우리의 취미판단이 그것을 표준으로 삼는 법칙들로, 더욱이 후자(감각적인 것)가 전자(고려된 원칙들, 판단의 표지들)의 정당성에 대한 유일무이한 시금석을 형성하는, 규정된 선험적 법칙들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

 

-蟲-

Die Wirkung eines Gegenstandes auf die Vorstellungsfähigkeit, so fern wir von demselben affiziert werden, ist Empfindung. Diejenige Anschauung, welche sich auf den Gegenstand durch Empfindung bezieht, heißt empirisch. Der unbestimmte Gegenstand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heißt Erscheinung.

→ 표상능력에 대한 대상의 작용은, 우리가 그 대상 자체로부터 자극받는 한에서, 지각이다. 지각을 통해 대상에 관련하는 그 직관을 감각적이라 부른다. 감각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부른다.

In der Erscheinung nennen ich das, was der Empfindung korrespondiert, die Materie derselben, dasjenige aber, welches macht, daß da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 in gewissen Verhältnissen geordnet werden kann, nennen ich die Form der Erscheinung. Da das, worinnen sich die Empfindungen allein ordnen, und in gewisse Form gestellet werden können, nicht selbst wiederum Empfindung sein kann, so ist uns zwar die Materie aller Erscheinung nur a posteriori gegeben, die Form derselben aber muß zu ihnen insgesamt im Gemüte a priori bereit liegen, und dahero abgesondert von aller Empfindung können betrachtet werden.

→ 현상 안에서 나는, 직관에 일치하는 그것을, 그 현상의 질료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현상의 다양성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구성하는 것을,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 명명한다. 여기에서, 그 안에서 지각만을 질서지우는 그것은, 그리고 확실한 형식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그것은, 반면에 그 자체로 직관일 수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이 모든 현상의 질료는 단지 후험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며, 그러나 그 현상의 형식은 그에 대해 빠짐없이 심성 내에서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며, 모든 직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Ich nennen alle Vorstellungen rein (im transzendentalen Verstande), in denen nicht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ngetroffen wird. Demnach wird die reine Form sinnlicher Anschauungen überhaupt im Gemüte a priori angetroffen werden, worinnen alle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en in gewissen Verhältnissen angeschauet wird. Diese reine Form der Sinnlichkeit wird auch selber reine Anschauung heißen.

→ 나는, 그 표상들 안에, 직관에 속하는 아무것도, 마주쳐지지 않는 모든 표상들을 순수하다고 명명한다 (초월적 오성에 있어서). 그에 따라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은 전적으로, 그 안에서 현상의 모든 다양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직관되는, 심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감성의 이러한 순수형식이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직관이라 불리울 것이다.

 

 

Die Wirkung eines Gegenstandes auf die Vorstellungsfähigkeit, so fern wir von demselben affiziert werden, ist Empfindung.

표상능력에 대한 대상의 작용은, 우리가 그 대상 자체로부터 자극받는 한에서, 지각이다.

→ 표상능력에 대한 대상의 작용은, 우리가 그 대상 자체로부터 자극받는 한에서, 지각이다.

Diejenige Anschauung, welche sich auf den Gegenstand durch Empfindung bezieht, heißt empirisch.

그 직관을, 지각을 통해 대상에 관련하는, 감각적이라 부른다.

→ 지각을 통해 대상에 관련하는 그 직관을 감각적이라 부른다.

Der unbestimmte Gegenstand einer empirischen Anschauung, heißt Erscheinung.

감각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부른다.

→ 감각적 직관의 무규정적 대상을 현상이라 부른다.

 

In der Erscheinung nennen ich das, was der Empfindung korrespondiert, die Materie derselben, dasjenige aber, welches macht, daß da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 in gewissen Verhältnissen geordnet werden kann, nennen ich die Form der Erscheinung.

현상 안에서 나는 그것을 이름한다, 직관에 일치하는 것, 그 현상의 질료라고, 그러나 그것을, 그러한 구성하는 것, 현상의 다양성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 명명한다.

→ 현상 안에서 나는, 직관에 일치하는 그것을, 그 현상의 질료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현상의 다양성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질서지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구성하는 것을, 나는 현상의 형식이라 명명한다.

Da das, worinnen sich die Empfindungen allein ordnen, und in gewisse Form gestellet werden können, nicht selbst wiederum Empfindung sein kann, so ist uns zwar die Materie aller Erscheinung nur a posteriori gegeben, die Form derselben aber muß zu ihnen insgesamt im Gemüte a priori bereit liegen, und dahero abgesondert von aller Empfindung können betrachtet werden.

여기에서 그것은, 그 안에서 지각만을 질서지우는, 그리고 확실한 형식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반면에 그 자체로 직관일 수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이 모든 현상의 질료는 단지 후험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며, 그러나 그 현상의 형식은 그에 대해 빠짐없이 심성 내에서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며, 모든 직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 여기에서, 그 안에서 지각만을 질서지우는 그것은, 그리고 확실한 형식 안에서 세워질 수 있는 그것은, 반면에 그 자체로 직관일 수 없고,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이 모든 현상의 질료는 단지 후험적으로만 주어질 뿐이며, 그러나 그 현상의 형식은 그에 대해 빠짐없이 심성 내에서 선험적으로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며, 모든 직관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Ich nennen alle Vorstellungen rein (im transzendentalen Verstande), in denen nichts, was zur Empfindung gehört, angetroffen wird.

나는 모든 표상들을 순수하다고 명명한다 (초월적 오성에 있어서), 그 표상들 안에 아무것도, 직관에 속하는 것이, 마주쳐지지 않는.

→ 나는, 그 표상들 안에, 직관에 속하는 아무것도, 마주쳐지지 않는 모든 표상들을 순수하다고 명명한다 (초월적 오성에 있어서).

Demnach wird die reine Form sinnlicher Anschauungen überhaupt im Gemüte a priori angetroffen werden, worinnen alles Mannigfaltige der Erscheinungen in gewissen Verhältnissen angeschauet wird.

그에 따라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은 전적으로 심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그 안에서 현상의 모든 다양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직관되는.

→ 그에 따라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은 전적으로, 그 안에서 현상의 모든 다양이 확실한 관계 속에서 직관되는, 심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마주치게 된다.

Diese reine Form der Sinnlichkeit wird auch selber reine Anschauung heißen.

감성의 이러한 순수형식이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직관이라 불리울 것이다.

→ 감성의 이러한 순수형식이 또한 그 자체로 순수한 직관이라 불리울 것이다.

 

-蟲-

Kritik der reinen Vernunft Ⅰ.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순수이성비판 Ⅰ. 초월적 요소론

Der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Erster Teil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초월적 요소론 제1 부문 초월적 감성학

§ 1.

 

Auf welche Art und durch welche Mittel sich auch immer eine Erkenntnis auf Gegenstände beziehen mag, so ist doch dijenige, wodurch sie sich auf dieselbe unmittelbar bezieht, und worauf alles Denken als Mittel abzweckt, die Anschauung. Diese findet aber nur statt, so fern uns der Gegenstand gegeben wird; dieses aber ist wiederum, uns Menschen wenigstens, nur dadurch möglich, daß er das Gemüt auf gewisse Wiese affiziere. Die Fähigkeit, (Rezeptivität) Vorstellungen durch die Ar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zu bekommen, heißt Sinnlichkeit. Vermittelst der Sinnlichkeit also werden uns Gegenstände gegeben, und sie allein liefert uns Anschauungen; durch den Verstand aber werden sie gedacht, und von ihm entspringen Begriffe. Alles Denken aber muß sich, es sei geradezu (directe), oder im Umschweife (indirecte), vermittelst gewisser Merkmale, zuletzt auf Anschauungen, mithin, bei uns, auf Sinnlichkeit beziehen, weil uns auf andere Weise k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통하여 항상 인식이 대상들에 속하든지, 또한 그를 통하여 인식이 대상들 자체에 곧바로 관계하는 그것은,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유가 수단으로서 목표로 하는 것은, 직관이다.→ 이러한 것은 그러나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 발생할 따름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러나 반면에, 최소한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그 대상이 심성에 확실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감수성) 표상들을 그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이, 획득하는 그 소질은, 감성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감성에 따라서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고, 오직 그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그러나 오성을 통하여 대상들이 사유되고, 그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그러나 모든 사유는, 우리에게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장이든 (직접), 혹은 우회로든 (간접), 확실한 표지에 따라서, 최후에는 직관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감성에 관계해야만 한다.

 

 

Kritik der reinen Vernunft Ⅰ.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순수이성비판 Ⅰ. 초월론적 요소론

Der 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

초월론적 요소론

Erster Teil

제1부문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 1.

초월론적 감성학 § 1.

 

Auf welche Art und durch welche Mittel sich auch immer eine Erkenntnis auf Gegenstände beziehen mag, so ist doch dijenige, wodurch sie sich auf dieselbe unmittelbar bezieht, und worauf alles Denken als Mittel abzweckt, die Anschauung.

어떠한 본성 위에서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통하여 항상 인식이 대상들에 속하든지, 그래서 또한 그것은, 그를 통하여 인식이 대상들 자체에 곧바로 관계하는,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유가 수단으로서 목표로 하는, 직관이다.

→ 어떠한 방식으로 그리고 어떠한 수단을 통하여 항상 인식이 대상들에 속하든지, 또한 그를 통하여 인식이 대상들 자체에 곧바로 관계하는 그것은,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유가 수단으로서 목표로 하는 것은, 직관이다.

Diese findet aber nur statt, so fern uns der Gegenstand gegeben wird;

이러한 것은 그러나 발생할 따름이다,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

dieses aber ist wiederum, uns Menschen wenigstens, nur dadurch möglich, daß er das Gemüt auf gewisse Wiese affiziere.

이러한 대상은 그러나 반면에, 최소한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그것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그 대상이 심성에 확실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

→ 이러한 것은 그러나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는 한에서 발생할 따름이다; 이러한 대상은 그러나 반면에, 최소한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그 대상이 심성에 확실한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Die Fähigkeit, (Rezeptivität) Vorstellungen durch die Ar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zu bekommen, heißt Sinnlichkeit.

그 소질은, (감수성) 표상들을 그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이, 획득하는, 감성이라 이름한다.

→ (감수성) 표상들을 그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과 같이, 획득하는 그 소질은, 감성이라 이름한다.

Vermittelst der Sinnlichkeit also werden uns Gegenstände gegeben, und sie allein liefert uns Anschauungen;

그러므로 감성에 따라서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고, 오직 그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durch den Verstand aber werden sie gedacht, und von ihm entspringen Begriffe.

그러나 오성을 통하여 대상들이 사유되고, 그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 그러므로 감성에 따라서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고, 오직 그 감성만이 우리에게 직관을 제공한다; 그러나 오성을 통하여 대상들이 사유되고, 그 오성으로부터 개념이 발생한다.

Alles Denken aber muß sich, es sei geradezu (directe), oder im Umschweife (indirecte), vermittelst gewisser Merkmale, zuletzt auf Anschauungen, mithin, bei uns, auf Sinnlichkeit beziehen, weil uns auf andere Weise k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그러나 모든 사유는, 그것이 곧장이든 (직접), 혹은 우회로든 (간접), 확실한 표지에 따라서, 최후에는 직관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감성에 관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 그러나 모든 사유는, 우리에게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곧장이든 (직접), 혹은 우회로든 (간접), 확실한 표지에 따라서, 최후에는 직관에,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감성에 관계해야만 한다.

 

-蟲-

 

P.S 이전 작업 http://cafe.naver.com/wahrhe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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