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Von der Einteilung der transzendentalen Logik in die Transzendentale Analytik und Dialektik

Ⅳ. 초월론적 논리학에 대한 초월론적 분석학과 변증학으로의 구분에 대하여

 

In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isolieren wir den Verstand, (so wie oben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die Sinnlichkeit) und heben bloß den Teil des Denkens aus unserm Erkenntnisse heraus, der lediglich seinen Ursprung in dem Verstande hat. Der Gebrauch dieser reinen Erkenntnis aber beruhet darauf, als ihrer Bedingung: daß uns Gegenstände in der Anschauung gegeben sein, worauf jene angewandt werden können. Denn ohne Anschauung fehlt es aller unserer Erkenntnis an Objekten, und sie bleibt alsdenn völlig leer. Der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also, der die Elemente d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 vorträgt, und die Prinzipien, ohne welche überall kein Gegenstand gedacht werden kann, ist die transzendentale Analytik, und zugleich eine Logik der Wahrheit. Denn ihr kann keine Erkenntnis widersprechen, ohne daß sie zugleich allen Inhalt verlöre, d.i. alle Beziehung auf irgend ein Objekt, mithin alle Wahrheit. Weil es aber sehr anlockend und verleitend ist, sich dies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se und Grundsätze allein, und selbst über die Grenzen der Erfahrung hinaus, zu bedienen, welche doch einzig und allein uns die Materie (Objekte) an die Hand geben kann, worauf jene reine Verstandesbegriffe angewandt werden können: so gerät der Verstand in Gefahr, durch leere Vernünfteleien von den bloßen formalen Prinzipien des reinen Verstandes einen materialen Gebrauch zu machen, und über Gegenstände ohne Unterschied zu urteilen, die uns doch nicht gegeben sind, ja vielleicht auf keinerlei Weise gegeben werden können.

→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우리는 (위에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감성을 그렇게 하였듯이) 지성을 고립시키고 우리의 인식들로부터 그 자신의 원천을 다만 지성 안에서만 가지는 순전한 지성의 부분만을 빼낸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인식의 사용은 사용의 조건으로서: 우리에게 직관 중에 거기에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이 주어진다는 것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직관 없이는 우리의 모든 인식에게 객관이 부족하고, 그 인식은 그리하여 완전히 공허하게 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인식의 요소들과 그러한 것들 없이는 결코 어떠한 대상도 생각될 수 없는 그러한 원칙들을 개진하는 초월론적 논리학의 부분은 초월론적 분석학이자 동시에 진리의 논리학이다.→ 왜냐하면 그 인식이 동시에 모든 내용을, 즉 좌우간 객관과의 모든 관련을, 따라서 모든 진리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어떠한 인식에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오로지 유일하게 그것만이 또한 우리에게만 거기에 저 순수한 지성개념들이 적용될 수 있는 실질(객관)을 손 안에 쥐어줄 수 있을 오로지 이런 순수한 지성인식들과 근본명제들을 사용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고도 미혹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순수 지성의 순전히 형식적인 원칙들에 대한 공허한 궤변들을 통하여 실질적 사용을 형성하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 구별 없이 판단하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In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isolieren wir den Verstand, (so wie oben in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die Sinnlichkeit) und heben bloß den Teil des Denkens aus unserm Erkenntnisse heraus, der lediglich seinen Ursprung in dem Verstande hat.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우리는 지성을 고립시킨다, (위에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감성을 그렇게 하였듯이) 그리고 우리의 인식들로부터 순전히 지성의 부분만을 빼낸다, 그 부분이 그 부분의 원천을 다만 지성 안에서만 가지는.

→ 초월론적 논리학에서 우리는 (위에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감성을 그렇게 하였듯이) 지성을 고립시키고 우리의 인식들로부터 그 자신의 원천을 다만 지성 안에서만 가지는 순전한 지성의 부분만을 빼낸다.

Der Gebrauch dieser reinen Erkenntnis aber beruhet darauf, als ihrer Bedingung: daß uns Gegenstände in der Anschauung gegeben sein, worauf jene angewandt werden können.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인식의 사용은 그것에 기인한다, 그 사용의 조건으로서: 우리에게 직관 중에 대상들이 주어진다는 것, 거기에 그 대상들이 적용될 수 있는.

→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인식의 사용은 사용의 조건으로서: 우리에게 직관 중에 거기에 적용될 수 있는 대상들이 주어진다는 것에 기인한다.

Denn ohne Anschauung fehlt es aller unserer Erkenntnis an Objekten, und sie bleibt alsdenn völlig leer.

왜냐하면 직관 없이는 우리의 모든 인식에게 객관이 부족하고, 그 인식은 그리하여 완전히 공허하게 남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직관 없이는 우리의 모든 인식에게 객관이 부족하고, 그 인식은 그리하여 완전히 공허하게 남기 때문이다.

Der Teil der transzendentalen Logik also, der die Elemente d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 vorträgt, und die Prinzipien, ohne welche überall kein Gegenstand gedacht werden kann, ist die transzendentale Analytik, und zugleich eine Logik der Wahrheit.

그러므로 초월론적 논리학의 부분은, 그 부분이 순수한 지성인식의 요소들과 원칙들을 개진하는, 그러한 원칙들 없이는 결코 어떠한 대상도 생각될 수 없는, 초월론적 분석학이고, 동시에 진리의 논리학이다.

→ 그러므로 순수한 지성인식의 요소들과 그러한 것들 없이는 결코 어떠한 대상도 생각될 수 없는 그러한 원칙들을 개진하는 초월론적 논리학의 부분은 초월론적 분석학이자 동시에 진리의 논리학이다.

Denn ihr kann keine Erkenntnis widersprechen, ohne daß sie zugleich allen Inhalt verlöre, d.i. alle Beziehung auf irgend ein Objekt, mithin alle Wahrheit.

왜냐하면 그 부분은 어떠한 인식에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인식이 동시에 모든 내용을, 즉 좌우간 객관과의 모든 관련을, 따라서 모든 진리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 왜냐하면 그 인식이 동시에 모든 내용을, 즉 좌우간 객관과의 모든 관련을, 따라서 모든 진리를 상실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어떠한 인식에도 모순될 수 없기 때문이다.

Weil es aber sehr anlockend und verleitend ist, sich dieser reinen Verstandeserkenntnisse und Grundsätze allein, und selbst über die Grenzen der Erfahrung hinaus, zu bedienen, welche doch einzig und allein uns die Materie (Objekte) an die Hand geben kann, worauf jene reine Verstandesbegriffe angewandt werden können: so gerät der Verstand in Gefahr, durch leere Vernünfteleien von den bloßen formalen Prinzipien des reinen Verstandes einen materialen Gebrauch zu machen, und über Gegenstände ohne Unterschied zu urteilen, die uns doch nicht gegeben sind, ja vielleicht auf keinerlei Weise gegeben werden können.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고도 미혹스럽기 때문에, 오로지 이런 순수한 지성인식들과 근본명제들을, 그리고 스스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사용하는 것, 오로지 유일하게 그것만이 또한 우리에게만 실질(객관)을 손 안에 쥐어줄 수 있을, 거기에 저 순수한 지성개념들이 적용될 수 있는: 그래서 지성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순수 지성의 순전히 형식적인 원칙들에 대한 공허한 궤변들을 통하여 실질적 사용을 형성하는, 그리고 대상들에 대해서 구별 없이 판단하는, 그 대상들이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없는.

→ 스스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서 오로지 유일하게 그것만이 또한 우리에게만 거기에 저 순수한 지성개념들이 적용될 수 있는 실질(객관)을 손 안에 쥐어줄 수 있을 오로지 이런 순수한 지성인식들과 근본명제들을 사용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매우 매혹적이고도 미혹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지성은 순수 지성의 순전히 형식적인 원칙들에 대한 공허한 궤변들을 통하여 실질적 사용을 형성하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아마도 어떤 방식으로부터도 주어질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해서 구별 없이 판단하는 위험에 빠질 것이다.

 

-蟲-

Eine sophistische Kunst, seiner Unwissenheit, ja auch seinen vorsätzlichen Blendwerken den Anstrich der Wahrheit zu geben, daß man die Methode der Gründlichkeit, welche die Logik überhaupt vorschreibt,nachahmete, und ihre Topik zu Beschönigung jedes leeren Vorgebens benutzte. Nun kann man es als eine sichere und brauchbare Warnung anmerken: daß die allgemeine Logik, als Organon betrachtet, jederzeit eine Logik des Scheins, d.i. dialektisch sei. Denn da sie uns gar nichts über den Inhalt der Erkenntnis lehret, sondern nur bloß die formalen Bedingungen der Übereinstimmung mit dem Verstande, welche übrigens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gänzlich gleichgültig sein; so muß die Zumutung, sich derselben als eines Werkzeugs (Organon) zu gebrauchen, um seine Kenntnisse, wenigstens dem Vorgeben nach, auszubreiten und zu erweitern, auf nichts als Geschwätzigkeit hinauslaufen, alles, was man will, mit einigem Schein zu behaupten, oder auch nach Belieben anzufechten.

→ 그러한 궤변적인 방식은 사람들이 논리학 전반이 지시하는 철저성의 방식을 모방하고 논리학의 총체론을 각각의 공허한 사칭의 변명에 이용함으로써 그의 무지에게, 또한 그의 의도적인 기만들에 진리의 도료를 입히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확실하고 가용한 경고로서 그것을 주의할 수 있다: 도구라고 여겨지는 보편적인 논리학은 언제나 가상의 논리학, 증 변증적인 것이라고.→ 왜냐하면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에게 인식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단지 그 밖에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무관한 조건들, 지성과의 일치에 대한 형식적 조건들만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상의 논리학 자체를 최소한 그 사칭에 따르자면 그의 지식들을 펼치고 넓히기 위해서 수단(도구)으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부당한 요구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몇 가지 가상을 가지고 주장하거나 원하는 대로 논박하는 수다 외에 다른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함에 틀림 없다.

 

Eine solche Unterweisung ist der Würde der Philosophie auf keine Weise gemäß. Um deswillen hat man diese Benennung der Dialektik lieber, als eine Kritik des dialektischen Scheins, der Logik beigezählt, und als eine solche wollen wir sie auch hier verstanden wissen.

→ 그러한 가르침은 철학의 품위에 어떤 식으로도 걸맞지 않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변증학의 이러한 명칭을 변증적 가상의 비판으로서 논리학에 고려해 넣었고,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도 또한 여기에서 그 명칭을 이해된 것으로 알고자 한다.

 

 

 

Eine sophistische Kunst, seiner Unwissenheit, ja auch seinen vorsätzlichen Blendwerken den Anstrich der Wahrheit zu geben, daß man die Methode der Gründlichkeit, welche die Logik überhaupt vorschreibt, nachahmete, und ihre Topik zu Beschönigung jedes leeren Vorgebens benutzte.

그러한 궤변적인 방식은, 그 가상의 무지에게, 또한 그 가상의 의도적인 기만들에 진리의 도료를 입히는, 사람들이 철저성의 방식을, 논리학 전반이 지시하는, 모방함으로써, 그리고 논리학의 총체론을 각각의 공허한 사칭의 변명에 이용함으로써.

→ 그러한 궤변적인 방식은 사람들이 논리학 전반이 지시하는 철저성의 방식을 모방하고 논리학의 총체론을 각각의 공허한 사칭의 변명에 이용함으로써 그의 무지에게, 또한 그의 의도적인 기만들에 진리의 도료를 입히는 것이다.

Nun kann man es als eine sichere und brauchbare Warnung anmerken: daß die allgemeine Logik, als Organon betrachtet, jederzeit eine Logik des Scheins, d.i. dialektisch sei.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확실하고 가용한 경고로서 그것을 주의할 수 있다: 보편적인 논리학은, 도구라고 여겨지는, 언제나 가상의 논리학, 증 변증적인 것이라고.

→ 이제 사람들은 하나의 확실하고 가용한 경고로서 그것을 주의할 수 있다: 도구라고 여겨지는 보편적인 논리학은 언제나 가상의 논리학, 증 변증적인 것이라고.

Denn da sie uns gar nichts über den Inhalt der Erkenntnis lehret, sondern nur bloß die formalen Bedingungen der Übereinstimmung mit dem Verstande, welche übrigens in Ansehung der Gegenstände gänzlich gleichgültig sein; so muß die Zumutung, sich derselben als eines Werkzeugs (Organon) zu gebrauchen, um seine Kenntnisse, wenigstens dem Vorgeben nach, auszubreiten und zu erweitern, auf nichts als Geschwätzigkeit hinauslaufen, alles, was man will, mit einigem Schein zu behaupten, oder auch nach Belieben anzufechten.

왜냐하면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에게 인식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단지 지성과 일치에 대한 형식적 조건들만을 가르쳐준다, 그 조건들이 그 밖에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무관한; 그래서 그 부당한 요구는, 그 가상의 논리학 자체를 수단(도구)으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그의 지식들을, 최소한 그 사칭에 따라서, 펼치고 넓히기 위해서, 수다 외에 다른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함에 틀림 없다, 모든 것을, 사람들이 원하는, 몇 가지 가상을 가지고 구장하는, 혹은 원하는 대로 논박하는.

→ 왜냐하면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에게 인식의 내용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히려 단지 그 밖에 대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무관한 조건들, 지성과의 일치에 대한 형식적 조건들만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가상의 논리학 자체를 최소한 그 사칭에 따르자면 그의 지식들을 펼치고 넓히기 위해서 수단(도구)으로서 사용하고자 하는 부당한 요구는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몇 가지 가상을 가지고 주장하거나 원하는 대로 논박하는 수다 외에 다른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함에 틀림 없다.

 

Eine solche Unterweisung ist der Würde der Philosophie auf keine Weise gemäß.

그러한 가르침은 철학의 품위에 어떤 식으로도 걸맞지 않다.

→ 그러한 가르침은 철학의 품위에 어떤 식으로도 걸맞지 않다.

Um deswillen hat man diese Benennung der Dialektik lieber, als eine Kritik des dialektischen Scheins, der Logik beigezählt, und als eine solche wollen wir sie auch hier verstanden wissen.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변증학의 이러한 명칭을, 변증적 가상의 비판으로서, 논리학에 고려해 넣었고,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는 또한 여기에서 그 명칭을 이해된 것으로 알고자 한다.

→ 그 때문에 사람들은 변증학의 이러한 명칭을 변증적 가상의 비판으로서 논리학에 고려해 넣었고, 그러한 것으로서 우리도 또한 여기에서 그 명칭을 이해된 것으로 알고자 한다.

 

-蟲-

Weil aber die bloße Form des Erkenntnisses, so sehr sie auch mit logischen Gesetzen übereinstimmen mag, noch lange nicht hinreicht, materielle (objektive) Wahrheit dem Erkenntnisse darum auszumachen, so kann sich niemand bloß mit der Logik wagen, über Gegenstände zu urteilen, und irgend etwas zu behaupten, ohne von ihnen vorher gegründete Erkundigung außer der Logik eingezogen zu haben, um hernach bloß die Benutzung und die Verknüpfung derselben in einem zusammenhangenden Ganzen nach logischen Gesetzen zu versuchen, noch besser aber, sie lediglich darnach zu prüfen. Gleichwohl liegt so etwas Verleitendes in dem Besitze einer so scheinbaren Kunst, allen unseren Erkenntnissen die Form des Verstandes zu geben, ob man gleich in Ansehung des Inhalts derselben noch sehr leer und arm sein mag, daß jene allgemeine Logik, die bloß ein Kanon zur Beurteilung ist, gleichsam wie ein Organon zur wirklichen Hervorbringung wenigstens zum Blendwerk von objektiven Behauptungen gebraucht, und mithin in der Tat dadurch gemißbraucht worden. Die allgemeine Logik nun, als vermeintes Organon, heißt Dialektik.

→ 그러나 인식의 순전한 형식은 아무리 그 형식이 논리적 원칙들과 일치할지라도 실체적인(객관적인) 진리를 인식에게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결코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앞서서 먼저 논리학 외에 근거 있는 문의를 이끌어 오고, 그 후에 관련한 전체에서 논리적 법칙들에 따라 조사한 것의 이용과 결합만으로, 그러나 더 낫게는, 그 대상들을 단지 그에 따라서만 시험해 보는 것 없이, 단순히 논리학만 가지고는 아무도 대상들을 판단함 너머로, 그리고 좌우간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인식들의 내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허하고 부족함에도 약간은 유혹하는 어떤 것이 우리의 모든 인식들에 지성의 형식을 주는 매우 그럴듯한 방법으로 유지된다. 평가에 대한 규준인 그러한 보편적 논리학은, 마치 객관적 주장들에 대한 실질적인 산출에 대한 도구가 최소한 기만에라도 사용되듯이, 그리고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오용된다.→그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허위의 도구로서 변증학이라 불린다.

 

So verschieden auch die Bedeutung ist, in der die Alten dieser Benennung einer Wissenschaft oder Kunst sich bedienten, so kann man doch aus dem wirklichen Gebrauche derselben sicher abnehmen, daß sie bei ihnen nichts anders war, als die Logik des Scheins.

→ 또한 옛 사람들이 학문이나 방법의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던 그 의미는 상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 명칭의 실질적 사용으로부터 그 명칭이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상의 논리학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다.

 

 

 

Weil aber die bloße Form des Erkenntnisses, so sehr sie auch mit logischen Gesetzen übereinstimmen mag, noch lange nicht hinreicht, materielle (objektive) Wahrheit dem Erkenntnisse darum auszumachen, so kann sich niemand bloß mit der Logik wagen, über Gegenstände zu urteilen, und irgend etwas zu behaupten, ohne von ihnen vorher gegründete Erkundigung außer der Logik eingezogen zu haben, um hernach bloß die Benutzung und die Verknüpfung derselben in einem zusammenhangenden Ganzen nach logischen Gesetzen zu versuchen, noch besser aber, sie lediglich darnach zu prüfen.

그러나 인식의 순전한 형식은, 아무리 그 형식이 논리적 원칙들과 일치할지라도, 여전히 결코 충분하지는 않다, 실체적인(객관적인) 진리를 인식에게 그것에 관하여 형성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논리학만 가지고는 아무도 나아갈 수 없다, 대상들을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좌우간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그것들에 앞서 먼저 논리학 외에 근거 있는 문의를 이끌어 오는 것, 그 후에 관련한 전체에서 논리적 법칙들에 따라 조사한 것의 이용과 결합만으로, 그러나 더 낫게는, 다만 그에 따라서만 그 대상들을 시험해 보는 것.

→ 그러나 인식의 순전한 형식은 아무리 그 형식이 논리적 원칙들과 일치할지라도 실체적인(객관적인) 진리를 인식에게 형성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결코 충분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래서 앞서서 먼저 논리학 외에 근거 있는 문의를 이끌어 오고, 그 후에 관련한 전체에서 논리적 법칙들에 따라 조사한 것의 이용과 결합만으로, 그러나 더 낫게는, 그 대상들을 단지 그에 따라서만 시험해 보는 것 없이, 단순히 논리학만 가지고는 아무도 대상들을 판단함 너머로, 그리고 좌우간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 너머로 나아갈 수 없다.

Gleichwohl liegt so etwas Verleitendes in dem Besitze einer so scheinbaren Kunst, allen unseren Erkenntnissen die Form des Verstandes zu geben, ob man gleich in Ansehung des Inhalts derselben noch sehr leer und arm sein mag, daß jene allgemeine Logik, die bloß ein Kanon zur Beurteilung ist, gleichsam wie ein Organon zur wirklichen Hervorbringung wenigstens zum Blendwerk von objektiven Behauptungen gebraucht, und mithin in der Tat dadurch gemißbraucht worden.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은 유혹하는 어떤 것이 매우 그럴듯한 방법으로 유지된다, 우리의 모든 인식들에 지성의 형식을 주는, 사람들이 그 인식들의 내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허하고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보편적 논리학이, 그 논리학이 평가에 대한 규준인, 마치 객관적 주장들에 대한 실질적인 산출에 대한 도구가 최소한 기만에라도 사용되듯이, 그리고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오용된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인식들의 내용에 대한 고려 속에서 공허하고 부족함에도 약간은 유혹하는 어떤 것이 우리의 모든 인식들에 지성의 형식을 주는 매우 그럴듯한 방법으로 유지된다. 평가에 대한 규준인 그러한 보편적 논리학은, 마치 객관적 주장들에 대한 실질적인 산출에 대한 도구가 최소한 기만에라도 사용되듯이, 그리고 따라서 실제로 그렇게 오용된다.

Die allgemeine Logik nun, als vermeintes Organon, heißt Dialektik.

그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허위의 도구로서, 변증학이라 불린다.

→그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허위의 도구로서 변증학이라 불린다.

 

So verschieden auch die Bedeutung ist, in der die Alten dieser Benennung einer Wissenschaft oder Kunst sich bedienten, so kann man doch aus dem wirklichen Gebrauche derselben sicher abnehmen, daß sie bei ihnen nichts anders war, als die Logik des Scheins.

또한 그 의미는 상이하다, 그 의미에 옛 사람들이 학문이나 방법의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던,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 명칭의 실질적 사용으로부터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다, 그 명칭이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가상의 논리학 이외에.

→ 또한 옛 사람들이 학문이나 방법의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던 그 의미는 상이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럼에도 그 명칭의 실질적 사용으로부터 그 명칭이 옛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상의 논리학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확실하게 추측할 수 있다.

 

-蟲-

Denn, was diesen widerspricht, ist falsch, weil der Verstand dabei seinen allgemeinen Regeln des Denkens, mithin sich selbst widerstreitet. Diese Kriterien aber betreffen nur die Form der Wahrheit, d.i. des Denkens überhaupt, und sind so fern ganz richtig, aber nicht hinreichend. Denn obgleich eine Erkenntnis der logischen Form völlig gemäß sein möchte, d.i. sich selbst nicht widerspräche, so kann sie doch noch immer dem Gegenstande widersprechen. Also ist das bloß logische Kriterium der Wahrheit,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den allgemeinen und formal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war die conditio sine qua non, mithin die negative Bedingung aller Wahrheit: weiter aber kann die Logik nicht gehen, und den Irrtum, der nicht die Form, sondern den Inhalt trifft, kann die Logik durch keinen Probierstein entdecken.

→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되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인데, 지성이 동시에 그 지성의 보편적 사유법칙들, 따라서 그 자체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지들은 단지 진리의 형식만을, 즉 사유 전반의 형식만 관계하고, 전적으로 정당한 한에서만 그러하며,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비록 인식이 논리적 형식에 완전히 적합할는지는 몰라도, 즉 그 자체로 모순은 아닐지라도, 그 인식이 또한 여전히 대상에 모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순전히 논리적 표지, 말하자면 인식이 지성과 이성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원칙들과 이루는 일치는 필수적 전제 조건, 따라서 모든 진리의 부정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 이상 논리학이 나아갈 수는 없고,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마주치는 오류를 논리학은 어떠한 시금석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다.

 

Die allgemeine Logik löset nun das ganze formale Geschäfte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in seine Elemente auf, und stellet sie als Prinzipien aller logischen Beurteilung unserer Erkenntnis dar. Dieser Teil der Logik kann daher Analytik heißen, und ist eben darum der wenigstens negative Probierstein der Wahrheit, in dem man zuvörderst alle Erkenntnis, ihrer Form nach, an diesen Regeln prüfen und schätzen muß, ehe man sie selbst ihrem Inhalt nach untersucht, um auszumachen, ob sie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positive Wahrheit enthalten.

→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지성과 이성의 전(全) 형식적 업무를 그것의 요소 안으로 풀어내고, 그것이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칙들로서 드러낸다.→ 논리학의 이러한 부분은 그 때문에 분석학이라 불릴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이 그것들 자체를 그것의 내용에 따라 탐구하기 전에 그것들이 대상들을 고려했을 때 긍정적 진리를 포함하는지 어떤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식을 그것의 형식에 따라 이러한 법칙들에 있어서 증명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적 시금석이다.

 

 

Denn, was diesen widerspricht, ist falsch, weil der Verstand dabei seinen allgemeinen Regeln des Denkens, mithin sich selbst widerstreitet.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되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인데, 지성이 동시에 그 지성의 보편적 사유법칙들, 따라서 그 자체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모순되는 것은 거짓이기 때문인데, 지성이 동시에 그 지성의 보편적 사유법칙들, 따라서 그 자체와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Diese Kriterien aber betreffen nur die Form der Wahrheit, d.i. des Denkens überhaupt, und sind so fern ganz richtig, aber nicht hinreichend.

그러나 이러한 표지들은 단지 진리의 형식만을, 즉 사유 전반의 형식만 관계하고, 전적으로 정당한 한에서만 그러하며,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 그러나 이러한 표지들은 단지 진리의 형식만을, 즉 사유 전반의 형식만 관계하고, 전적으로 정당한 한에서만 그러하며,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Denn obgleich eine Erkenntnis der logischen Form völlig gemäß sein möchte, d.i. sich selbst nicht widerspräche, so kann sie doch noch immer dem Gegenstande widersprechen.

왜냐하면 비록 인식이 논리적 형식에 완전히 적합할는지는 몰라도, 즉 그 자체로 모순이 아닐지라도, 그 인식이 또한 여전히 대상에 모순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비록 인식이 논리적 형식에 완전히 적합할는지는 몰라도, 즉 그 자체로 모순은 아닐지라도, 그 인식이 또한 여전히 대상에 모순될 수 있기 때문이다.

Also ist das bloß logische Kriterium der Wahrheit,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den allgemeinen und formal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war die conditio sine qua non, mithin die negative Bedingung aller Wahrheit: weiter aber kann die Logik nicht gehen, und den Irrtum, der nicht die Form, sondern den Inhalt trifft, kann die Logik durch keinen Probierstein entdecken.

그러므로 진리의 순전히 논리적 표지, 말하자면 인식이 지성과 이성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원칙들과 이루는 일치는 필수적 전제 조건, 따라서 모든 진리의 부정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 이상 논리학이 나아갈 수는 없고, 오류를, 그 오류가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마주치는, 논리학은 어떠한 시금석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다.

→ 그러므로 진리의 순전히 논리적 표지, 말하자면 인식이 지성과 이성의 보편적이고 형식적인 원칙들과 이루는 일치는 필수적 전제 조건, 따라서 모든 진리의 부정적 조건이다: 그러나 그 이상 논리학이 나아갈 수는 없고,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을 마주치는 오류를 논리학은 어떠한 시금석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없다.

 

Die allgemeine Logik löset nun das ganze formale Geschäfte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in seine Elemente auf, und stellet sie als Prinzipien aller logischen Beurteilung unserer Erkenntnis dar.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지성과 이성의 전(全) 형식적 업무를 그것의 요소 안으로 풀어내고, 그것이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칙들로서 드러낸다.

→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지성과 이성의 전(全) 형식적 업무를 그것의 요소 안으로 풀어내고, 그것이 우리 인식의 모든 논리적 평가의 원칙들로서 드러낸다.

Dieser Teil der Logik kann daher Analytik heißen, und ist eben darum der wenigstens negative Probierstein der Wahrheit, in dem man zuvörderst alle Erkenntnis, ihrer Form nach, an diesen Regeln prüfen und schätzen muß, ehe man sie selbst ihrem Inhalt nach untersucht, um auszumachen, ob sie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positive Wahrheit enthalten.

논리학의 이러한 부분은 그 때문에 분석학이라 불릴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적 시금석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식을, 그것의 형식에 따라, 이러한 법칙들에 있어서 증명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그것들 자체를 그것의 내용에 따라 탐구하기 전에, 결정하기 위해서, 그것들이 대상들을 고려했을 때 긍정적 진리를 포함하는지 어떤지를.

→ 논리학의 이러한 부분은 그 때문에 분석학이라 불릴 수 있고, 바로 그 점에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이 그것들 자체를 그것의 내용에 따라 탐구하기 전에 그것들이 대상들을 고려했을 때 긍정적 진리를 포함하는지 어떤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인식을 그것의 형식에 따라 이러한 법칙들에 있어서 증명하고 평가해야만 하는 진리에 대한 최소한의 부정적 시금석이다.

 

-蟲-

Wenn Wahrheit in der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besteht, so muß dadurch dieser Gegenstand von andern unterschieden werden; denn eine Erkenntnis ist falsch, wenn sie mit dem Gegenstande, worauf sie bezogen wird, nicht übereinstimmt, ob sie gleich etwas enthält, was wohl von andern Gegenständen gelten könnte. Nun würde ein allgemeines Kriterium der Wahrheit dasjenige sein, welches von allen Erkenntnissen, ohne Unterschied ihrer Gegenstände, gültig wäre. Es ist aber klar, daß, da man bei demselb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Beziehung auf ihr Objekt) abstrahiert, und Wahrheit gerade diesen Inhalt angeht, es ganz unmöglich und ungereimt sei, nach einem Merkmale der Wahrheit dieses Inhalts der Erkenntnisse zu fragen, und daß also ein hinreichendes, und doch zugleich allgemeines Kennzeichen der Wahrheit unmöglich angegeben werden könne. Da wir oben schon den Inhalt einer Erkenntnis die Materie derselben genannt haben, so wird man sagen müssen: von der Wahrheit der Erkenntnis der Materie nach läßt sich kein allgemeines Kennzeichen verlangen, weil es in sich selbst widersprechend ist.

→ 만일 진리가 인식과 그 대상의 일치 속에서 존립한다면, 그를 통하여 이러한 대상이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 인식이 충분히 다른 대상들에 유효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만일 그 인식이 관련되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이제 진리의 보편적 표지는 모든 인식들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들에 대한 구분 없이, 정당할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곁에서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것의 객체에 대한 연관을) 도외시하고, 진리가 직접 이러한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에, 인식의 이러한 내용의 진리에 대한 표지에 따라 묻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조리할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하고도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의 표지가 제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인식의 내용을 그것의 소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 인식의 진리에 대하여 소재에 따라서는 그것에 어떠한 보편적인 표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Was aber das Erkenntnis der bloßen Form nach (mit Beiseitesetzung alles Inhalts) betrifft, so ist eben so klar: daß eine Logik, so fern sie die allgemeinen und notwendigen Regeln des Verstandes vorträgt, eben in diesen Regeln Kriterien der Wahrheit darlegen müsse.

→ 그러나 순전한 형식에 따라서 인식에 (모든 내용들에 대한 무시와) 관련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 논리학은, 그것이 지성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을 개진하는 한, 바로 이러한 법칙들 안에서 진리의 표지들을 명시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Wenn Wahrheit in der Übereinstimmung ein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besteht, so muß dadurch dieser Gegenstand von andern unterschieden werden; denn eine Erkenntnis ist falsch, wenn sie mit dem Gegenstande, worauf sie bezogen wird, nicht übereinstimmt, ob sie gleich etwas enthält, was wohl von andern Gegenständen gelten könnte.

만일 진리가 인식과 그 대상의 일치 속에서 존립한다면, 그를 통하여 이러한 대상이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인식이 대상과, 그것에 인식이 관련되는, 일치하지 않는다면, 비록 그 인식이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충분히 다른 대상들에 유효할 수 있는.

→ 만일 진리가 인식과 그 대상의 일치 속에서 존립한다면, 그를 통하여 이러한 대상이 다른 것으로부터 구분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비록 그 인식이 충분히 다른 대상들에 유효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만일 그 인식이 관련되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인식은 허위이기 때문이다.

Nun würde ein allgemeines Kriterium der Wahrheit dasjenige sein, welches von allen Erkenntnissen, ohne Unterschied ihrer Gegenstände, gültig wäre.

이제 진리의 보편적 표지는 그것이 될 것이다, 모든 인식들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들에 대한 구분 없이, 정당할.

→ 이제 진리의 보편적 표지는 모든 인식들에 대하여, 그 인식의 대상들에 대한 구분 없이, 정당할 것이 될 것이다.

Es ist aber klar, daß, da man bei demselb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Beziehung auf ihr Objekt) abstrahiert, und Wahrheit gerade diesen Inhalt angeht, es ganz unmöglich und ungereimt sei, nach einem Merkmale der Wahrheit dieses Inhalts der Erkenntnisse zu fragen, und daß also ein hinreichendes, und doch zugleich allgemeines Kennzeichen der Wahrheit unmöglich angegeben werden könne.

그러나 명백하다, 그것, 사람들이 그 곁에서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것의 객체에 대한 연관을) 도외시하고, 진리가 직접 이러한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조리할 것이다, 인식의 이러한 내용의 진리에 대한 표지에 따라 묻는 것이, 그리고 그러므로 충분한, 그리고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의 표지가 불가능하게 제시될 수 있다는 것이.

→ 그러나 사람들이 그 곁에서 인식의 모든 내용을 (그것의 객체에 대한 연관을) 도외시하고, 진리가 직접 이러한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에, 인식의 이러한 내용의 진리에 대한 표지에 따라 묻는 것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부조리할 것이고, 그러므로 충분하고도 또한 동시에 보편적인 진리의 표지가 제시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Da wir oben schon den Inhalt einer Erkenntnis die Materie derselben genannt haben, so wird man sagen müssen: von der Wahrheit der Erkenntnis der Materie nach läßt sich kein allgemeines Kennzeichen verlangen, weil es in sich selbst widersprechend ist.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인식의 내용을 그것의 소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말해야만 할 것이다: 인식의 진리에 대하여 소재에 따라서는 그것에 어떠한 보편적인 표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우리가 위에서 이미 인식의 내용을 그것의 소재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 인식의 진리에 대하여 소재에 따라서는 그것에 어떠한 보편적인 표지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 모순이기 때문이다.

 

Was aber das Erkenntnis der bloßen Form nach (mit Beiseitesetzung alles Inhalts) betrifft, so ist eben so klar: daß eine Logik, so fern sie die allgemeinen und notwendigen Regeln des Verstandes vorträgt, eben in diesen Regeln Kriterien der Wahrheit darlegen müsse.

그러나 순전한 형식에 따라서 인식에 (모든 내용들에 대한 무시와) 관련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매우 분명하다: 논리학은, 그것이 지성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을 개진하는 한, 바로 이러한 법칙들 안에서 진리의 표지들을 명시해야 한다는 것.

→ 그러나 순전한 형식에 따라서 인식에 (모든 내용들에 대한 무시와) 관련하는 것은, 바로 그래서 : 논리학은, 그것이 지성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을 개진하는 한, 바로 이러한 법칙들 안에서 진리의 표지들을 명시해야 한다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蟲-

Ⅲ. Von der Einteilung der allgemeinen Logik in Analytik und Dialektik

Ⅲ. 일반 논리학에 대한 분석과 변증으로의 구분에 대하여

 

Die alte und berühmte Frage, womit man die Logiker in die Enge zu treiben vermeinte, und sie dahin zu bringen suchte, daß sie sich entweder auf einer elenden Diallele mußten betreffen lassen, oder ihre Unwissenheit, mithin die Eitelkeit ihrer ganzen Kunst bekennen sollten, ist diese: Was ist Wahrheit? Die Namenserklärung der Wahrheit, daß sie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sei, wird hier geschenkt, und vorausgesetzt; man verlangt aber zu wissen, welches das allgemeine und sichere Kriterium der Wahrheit einer jeden Erkenntnis sei.

→ 사람들이 그로써 논리학자들을 그들이 고약한 변증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거나, 그들의 무지를, 따라서 그들의 전체 기술의 자만을 알아차려야만 하는 궁지로 몰아세운다고 오산했던, 그리고 그들을 거기로 끌어오도록 탐색했던 고금의 물음은 이러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의 이름 그대로의,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일치일 그 뜻이 여기에서 선사되고 전제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것이 각각의 인식에 대하여 진리의 보편적이고 확실한 표지일지 알기를 바란다.

 

Es ist schon ein großer und nötiger Beweis der Klugheit oder Einsicht, zu wissen, was man vernünftiger Weise fragen solle. Denn, wenn die Frage an sich ungereimt ist, und unnötige Antworten verlangt, so hat sie, außer der Beschämung dessen, der sie aufwirft, bisweilen noch den Nachteil, den unbehutsamen Anhörer derselben zu ungereimten Antworten zu verleiten, und den belachenswerten Anblick zu geben, daß einer (wie die Alten sagten) den Bock melkt, der andre ein Sieb unterhält.

→ 사람들이 무엇을 이성적인 방식으로 물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은 이미 사려나 통찰의 훌륭하고 필연적인 증거이다.→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불합리할 때, 그리고 불필요한 답변들을 요구할 때 그 질문은 그 질문을 제기한 그 사람의 부끄러움 외에도, 때론 그것의 부주의한 청자들을 불합리한 답변들로 유혹하고 (옛 사람들이 말하듯) 한 사람은 염소젖을 짜고, 다른 한 사람은 체로 받치는 우스운 광경을 주도록 하는 결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Ⅲ. Von der Einteilung der allgemeinen Logik in Analytik und Dialektik

Ⅲ. 일반 논리학에 대한 분석과 변증으로의 구분에 대하여

 

Die alte und berühmte Frage, womit man die Logiker in die Enge zu treiben vermeinte, und sie dahin zu bringen suchte, daß sie sich entweder auf einer elenden Diallele mußten betreffen lassen, oder ihre Unwissenheit, mithin die Eitelkeit ihrer ganzen Kunst bekennen sollten, ist diese: Was ist Wahrheit?

고금의 물음, 사람들이 그로써 논리학자들을 궁지로 몰아세운다고 오산했던, 그리고 그들을 거기로 끌어오도록 탐색했던, 그들이 고약한 변증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거나, 그들의 무지가, 그러므로 그들의 전체 기술의 자만을 알아차려야만 하는 것, 그것은 이러한 물음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 사람들이 그로써 논리학자들을 그들이 고약한 변증에 마주칠 수밖에 없었거나, 그들의 무지를, 따라서 그들의 전체 기술의 자만을 알아차려야만 하는 궁지로 몰아세운다고 오산했던, 그리고 그들을 거기로 끌어오도록 탐색했던 고금의 물음은 이러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Die Namenserklärung der Wahrheit, daß sie nämlich die Übereinstimmung der Erkenntnis mit ihrem Gegenstande sei, wird hier geschenkt, und vorausgesetzt; man verlangt aber zu wissen, welches das allgemeine und sichere Kriterium der Wahrheit einer jeden Erkenntnis sei.

진리의 명의, 그것이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일치일, 여기에서 선사되고, 전제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기를 바란다, 어떤 것이 각각의 인식에 대하여 진리의 보편적이고 확실한 표지일지.

→ 진리의 이름 그대로의, 즉 인식의 대상과 인식의 일치일 그 뜻이 여기에서 선사되고 전제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것이 각각의 인식에 대하여 진리의 보편적이고 확실한 표지일지 알기를 바란다.

 

Es ist schon ein großer und nötiger Beweis der Klugheit oder Einsicht, zu wissen, was man vernünftiger Weise fragen solle.

그것은 이미 사려나 통찰의 훌륭하고 필연적인 증거이다, 아는 것, 사람들이 무엇을 이성적인 방식으로 물어야 하는지.

→ 사람들이 무엇을 이성적인 방식으로 물어야 하는지 안다는 것은 이미 사려나 통찰의 훌륭하고 필연적인 증거이다.

Denn, wenn die Frage an sich ungereimt ist, und unnötige Antworten verlangt, so hat sie, außer der Beschämung dessen, der sie aufwirft, bisweilen noch den Nachteil, den unbehutsamen Anhörer derselben zu ungereimten Antworten zu verleiten, und den belachenswerten Anblick zu geben, daß einer (wie die Alten sagten) den Bock melkt, der andre ein Sieb unterhält.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불합리할 때, 그리고 불필요한 답변들을 요구할 때, 그 질문은 가진다, 그 사람의 부끄러움 외에도, 그 질문을 제기한, 때론 결점을, 그것의 부주의한 청자들을 불합리한 답변들로 유혹하는, 우스운 광경을 주도록 하는, (옛 사람들이 말하듯) 한 사람은 염소젖을 짜고, 다른 한 사람은 체로 받치는.

→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불합리할 때, 그리고 불필요한 답변들을 요구할 때 그 질문은 그 질문을 제기한 그 사람의 부끄러움 외에도, 때론 그것의 부주의한 청자들을 불합리한 답변들로 유혹하고 (옛 사람들이 말하듯) 한 사람은 염소젖을 짜고, 다른 한 사람은 체로 받치는 우스운 광경을 주도록 하는 결점을 지니기 때문이다.

 

-蟲-

Daher ist weder der Raum, noch irgend eine geometrische Bestimmung desselben a priori eine transzendentale Vorstellung, sondern nur die Erkenntnis, daß diese Vorstellungen gar nicht empirischen Ursprungs sein, und die Möglichkeit, wie sie sich gleichwohl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beziehen könne, kann transzendental heißen. Imgleichen würde der Gebrauch des Raumes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uch transzendental sein: aber ist er lediglich auf Gegenstände der Sinne eingeschränkt, so heißt er empirisch. Der Unterschied des Transzendentalen und Empirischen gehört also nur zur Kritik der Erkenntnisse, und betrifft nich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hren Gegenstand.

→ 그런 이유로 공간도, 그것의 선험적인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론적 표상은 아니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표상들이 전혀 경험적 원천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은 초월론적이라 부를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 것에서 대상들 전반에 대한 공간의 사용 역시 초월론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만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그것은 경험적이라 부른다.→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구분은 그러므로 단지 인식의 비판에만 속하고, 그것들의 대상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는 관련하지 않는다.

In der Erwartung also, daß es vielleicht Begriffe geben könne, die sich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mögen, nicht als reine oder sinnliche Anschauungen, sondern bloß als Handlungen des reinen Denkens, die mithin Begriffe, aber weder empirischen noch ästhetischen Ursprungs sind, so machen wir uns zum voraus die Idee von einer Wissenschaft des reinen Verstandes- und Vernunfterkenntnisses, dadurch wir Gegenstände völlig a priori denken. Eine solche Wissenschaft, welche den Ursprung, den Umfang und die objektive Gültigkeit solcher Erkenntnisse bestimmete, würde transzendentale Logik heißen müssen, weil sie es bloß mit d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u tun hat, aber lediglich, so fern sie auf Gegenstände a priori bezogen wird, und nicht, wie die allgemeine Logik, auf die empirischen so wohl, als reinen Vernunfterkenntnisse ohne Unterschied.

→ 그러므로 어쩌면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관계할지도 모르는 개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 속에서, 순수하거나 감각적인 직관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순수한 사유의 작용들로서, 따라서 그러나 경험적인 원천도 감성적인 원천도 아닌 그 개념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그를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사유하는 순수한 지성인식과 순수한 이성인식의 학문에 대한 이념을 그에 대해 더 앞서서 마련한다.→ 그러한 인식들의 기원과 한계와 객관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그러한 학문은 초월론적 논리학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학문은 순전히 지성과 이성의 원칙들에만 관계하고, 그러나 단지, 그 학문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보편적 논리학과 같이 순수한 이성인식과 구분도 없이 경험적인 것들에도 관련하지는 않는 한에서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Daher ist weder der Raum, noch irgend eine geometrische Bestimmung desselben a priori eine transzendentale Vorstellung, sondern nur die Erkenntnis, daß diese Vorstellungen gar nicht empirischen Ursprungs sein, und die Möglichkeit, wie sie sich gleichwohl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beziehen könne, kann transzendental heißen.

그런 이유로 공간도, 그것의 선험적인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론적 표상은 아니고, 오히려 단지 인식이다, 이러한 표상들이 전혀 경험적 원천이 아니라는, 그리고 가능성은, 그 가능성이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하는, 초월론적이라 부를 수 있다.

→ 그런 이유로 공간도, 그것의 선험적인 어떠한 기하학적 규정도 초월론적 표상은 아니고, 오히려 단지 이러한 표상들이 전혀 경험적 원천이 아니라는 인식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선험적으로 경험의 대상들에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은 초월론적이라 부를 수 있다.

Imgleichen würde der Gebrauch des Raumes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uch transzendental sein: aber ist er lediglich auf Gegenstände der Sinne eingeschränkt, so heißt er empirisch.

그와 마찬가지 것에서 대상들 전반에 대한 공간의 사용 역시 초월론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만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그것은 경험적이라 부른다.

→ 그와 마찬가지 것에서 대상들 전반에 대한 공간의 사용 역시 초월론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감관의 대상들에 대해서만으로 제한되고, 그래서 그것은 경험적이라 부른다.

Der Unterschied des Transzendentalen und Empirischen gehört also nur zur Kritik der Erkenntnisse, und betrifft nicht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hren Gegenstand.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구분은 그러므로 단지 인식의 비판에만 속하고, 그것들의 대상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는 관련하지 않는다.

→ 초월론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의 구분은 그러므로 단지 인식의 비판에만 속하고, 그것들의 대상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는 관련하지 않는다.

 

In der Erwartung also, daß es vielleicht Begriffe geben könne, die sich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mögen, nicht als reine oder sinnliche Anschauungen, sondern bloß als Handlungen des reinen Denkens, die mithin Begriffe, aber weder empirischen noch ästhetischen Ursprungs sind, so machen wir uns zum voraus die Idee von einer Wissenschaft des reinen Verstandes- und Vernunfterkenntnisses, dadurch wir Gegenstände völlig a priori denken.

그러므로 기대 속에서, 어쩌면 개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그 개념들이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관계할지도 모르는, 순수하거나 감각적인 직관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순수한 사유의 작용들로서, 따라서 그 개념들을, 그러나 경험적인 원천도 감성적인 원천도 아닌, 우리가 우리에게 순수한 지성인식과 순수한 이성인식의 학문에 대한 이념을 그에 대해 더 앞서서 마련한다, 그를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사유하는.

→ 그러므로 어쩌면 선험적으로 대상들에 관계할지도 모르는 개념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 속에서, 순수하거나 감각적인 직관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순수한 사유의 작용들로서, 따라서 그러나 경험적인 원천도 감성적인 원천도 아닌 그 개념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그를 통하여 우리가 대상들을 완전히 선험적으로 사유하는 순수한 지성인식과 순수한 이성인식의 학문에 대한 이념을 그에 대해 더 앞서서 마련한다.

Eine solche Wissenschaft, welche den Ursprung, den Umfang und die objektive Gültigkeit solcher Erkenntnisse bestimmete, würde transzendentale Logik heißen müssen, weil sie es bloß mit den Gesetze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zu tun hat, aber lediglich, so fern sie auf Gegenstände a priori bezogen wird, und nicht, wie die allgemeine Logik, auf die empirischen so wohl, als reinen Vernunfterkenntnisse ohne Unterschied.

그러한 학문은, 그것이 그러한 인식들의 기원과 한계와 객관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초월론적 논리학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학문은 순전히 지성과 이성의 원칙들에만 관계하고, 그러나 단지, 그 학문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보편적 논리학과 같이 순수한 이성인식과 구분도 없이 경험적인 것들에도 관련하지는 않는 한에서만.

→ 그러한 인식들의 기원과 한계와 객관적 정당성을 규정하는 그러한 학문은 초월론적 논리학이라고 불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학문은 순전히 지성과 이성의 원칙들에만 관계하고, 그러나 단지, 그 학문이 대상들에 선험적으로 관련되는 한에서만, 그리고 보편적 논리학과 같이 순수한 이성인식과 구분도 없이 경험적인 것들에도 관련하지는 않는 한에서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蟲-

In diesem Falle würde es eine Logik geben, in der man nicht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abstrahierte; denn diejenige, welche bloß die Regeln des reinen Denkens eines Gegenstandes enthielte, würde alle diejenigen Erkenntnisse ausschließen, welche von empirischem Inhalte wären. Sie würde auch auf den Ursprung unserer Erkenntnisse von Gegenständen gehen, so fern er nicht den Gegenständen zugeschrieben werden kann; da hingegen die allgemeine Logik mit diesem Ursprunge der Erkenntnis nichts zu tun hat, sondern die Vorstellungen, sie mögen uranfänglich a priori in uns selbst, oder nur empirisch gegeben sein, bloß nach den Gesetzen betrachtet, nach welchen der Verstand sie im Verhältnis gegen einander braucht, wenn er denkt, und also nur von der Verstandesform handelt, die den Vorstellungen verschafft werden kann, woher sie auch sonst entsprungen sein mögen.

→ 이러한 경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 논리학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전히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유의 법칙들을 포함한다면, 그 논리학은 경험적 내용에 대한 것일 모든 그러한 인식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그 원천이 대상들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 대상들로부터 우리의 인식들의 원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와 반대로 보편적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원천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히려 최초로 선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혹은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표상들을 순전히 법칙들에 따라 평가하고, 만일 지성이 사유한다면 그러한 것에 따라 지성이 그 표상들을 상호간에 연관 속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그 형식이 표상들에 마련될 수 있는, 그로부터 그 표상들이 또한 보통 발원될 지성형식에 대해서만 논한다.

 

Und hier mache ich eine Anmerkung, die ihren Einfluß auf alle nachfolgende Betrachtungen erstreckt, und die man wohl vor Augen haben muß, nämlich: daß nicht eine jede Erkenntnis a priori, sondern nur die, dadurch wir erkennen, daß und wie gewisse Vorstellungen (Anschauungen oder Begriff) lediglich a priori angewandt werden, oder möglich sein, transzendental (d.i. die Möglichkeit der Erkenntnis oder der Gebrauch derselben a priori) heißen müsse.

→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모든 후속하는 판단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이 충분히 눈앞에 지녀야만 하는 주해를 한다. 즉: 각각의 선험적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확실한 표상들이 (직관들이나 개념) 다만 선험적으로 응용된, 혹은 가능한 것을 초월론적(다시 말해 인식의 가능성이나 그 자체의 선험적 사용)이라 불러야만 한다.

 

 

In diesem Falle würde es eine Logik geben, in der man nicht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abstrahierte; denn diejenige, welche bloß die Regeln des reinen Denkens eines Gegenstandes enthielte, würde alle diejenigen Erkenntnisse ausschließen, welche von empirischem Inhalte wären.

이러한 경우 논리학이 있게 될 것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 왜냐하면 그 논리학은, 순전히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유의 법칙들을 포함한, 모든 그러한 인식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적 내용에 대한 것일.

→ 이러한 경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인식의 모든 내용을 도외시하지 않는 논리학이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순전히 대상에 대한 순수한 사유의 법칙들을 포함한다면, 그 논리학은 경험적 내용에 대한 것일 모든 그러한 인식들을 배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Sie würde auch auf den Ursprung unserer Erkenntnisse von Gegenständen gehen, so fern er nicht den Gegenständen zugeschrieben werden kann; da hingegen die allgemeine Logik mit diesem Ursprunge der Erkenntnis nichts zu tun hat, sondern die Vorstellungen, sie mögen uranfänglich a priori in uns selbst, oder nur empirisch gegeben sein, bloß nach den Gesetzen betrachtet, nach welchen der Verstand sie im Verhältnis gegen einander braucht, wenn er denkt, und also nur von der Verstandesform handelt, die den Vorstellungen verschafft werden kann, woher sie auch sonst entsprungen sein mögen.

그것은 또한 대상들로부터 우리의 인식들의 원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 원천이 대상들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 이와 반대로 보편적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원천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히려 표상들을, 그것들이 최초로 선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혹은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순전히 법칙들에 따라 평가하고, 그러한 것에 따라 지성이 그 표상들을 상호간에 연관 속에서 사용한다, 만일 지성이 사유한다면, 그리고 그러므로 단지 지성형식에 대해서만 논한다, 그 형식이 표상들에 마련될 수 있는, 그로부터 그 표상들이 또한 보통 발원될.

→ 그것은 또한, 그 원천이 대상들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는 한, 대상들로부터 우리의 인식들의 원천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와 반대로 보편적 논리학은 이러한 인식원천들과 아무런 관계도 없고, 오히려 최초로 선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혹은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표상들을 순전히 법칙들에 따라 평가하고, 만일 지성이 사유한다면 그러한 것에 따라 지성이 그 표상들을 상호간에 연관 속에서 사용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것은 단지 그 형식이 표상들에 마련될 수 있는, 그로부터 그 표상들이 또한 보통 발원될 지성형식에 대해서만 논한다.

 

Und hier mache ich eine Anmerkung, die ihren Einfluß auf alle nachfolgende Betrachtungen erstreckt, und die man wohl vor Augen haben muß, nämlich: daß nicht eine jede Erkenntnis a priori, sondern nur die, dadurch wir erkennen, daß und wie gewisse Vorstellungen (Anschauungen oder Begriff) lediglich a priori angewandt werden, oder möglich sein, transzendental (d.i. die Möglichkeit der Erkenntnis oder der Gebrauch derselben a priori) heißen müsse.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주해한다, 그것의 영향을 모든 후속하는 판단들에까지 미치는, 그리고 사람들이 충분히 눈앞에 지녀야만 하는, 즉: 각각의 선험적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것,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확실한 표상들이 (직관들이나 개념) 다만 선험적으로 응용된, 혹은 가능한, 초월론적(다시 말해 인식의 가능성이나 그 자체의 선험적 사용)이라 불러야만 한다.

→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모든 후속하는 판단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사람들이 충분히 눈앞에 지녀야만 하는 주해를 한다. 즉: 각각의 선험적 인식이 아니라, 오히려 단지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인식하는, 확실한 표상들이 (직관들이나 개념) 다만 선험적으로 응용된, 혹은 가능한 것을 초월론적(다시 말해 인식의 가능성이나 그 자체의 선험적 사용)이라 불러야만 한다.

 

-蟲-

Sie handelt von der Aufmerksamkeit, deren Hindernis und Folgen, dem Ursprunge des Irrtums, dem Zustande des Zweifels, des Skrupels, der Überzeugung usw.; und zu ihr verhält sich die allgemeine und reine Logik wie die reine Moral, welche bloß die notwendigen sittlichen Gesetze eines freien Willens überhaupt enthält, zu der eigentlichen Tugendlehre, welche diese Gesetze unter den Hindernissen der Gefühle, Neigungen und Leidenschaften, denen die Menschen mehr oder weniger unterworfen sind, erwägt, und welche niemals eine wahre und demonstrierte Wissenschaft abgeben kann, weil sie eben sowohl als jene angewandte Logik empirische und psychologische Prinzipien bedarf.

→ 그것은 주의, 그 주의의 장애물과 결과, 오류의 원천, 회의(懷疑)와 가책과 확신 등의 상태에 대하여 논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논리학의 관계는 자유 의지 전반의 순전히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법칙을 포함하는 순수한 도덕이 이러한 법칙을 인간들이 대체로 예속되는 심정과 경향 그리고 열정들의 장애 아래에서 고려하는 본래의 윤리학에 대하는 것(관계)과 같고, 그러한 것(윤리학)은 결코 참이자 입증된 학문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저 응용된 논리학과 똑같이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원칙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Ⅱ.Von der Transzendentalen Logik

Ⅱ.초월론적 논리학에 대하여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et, wie wir gewies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d.i. von aller Beziehung derselben auf das Objekt, und betrachtet nur die logische Form im Verhältnisse der Erkenntnisse auf einander, d.i. die Form des Denkens überhaupt. Weil es nun aber sowohl reine, als empirische Anscahuungen gibt, (wie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artut,) so könnte auch wohl ein Unterschied zwischen reinem und empirischem Denken der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가 확신하듯이 인식의 모든 내용들, 다시 말해 객체에 대한 그 인식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하며, 인식들 상호간의 관계들에서 단지 논리적 형식만을, 다시 말해 사유 전반의 형식만을 평가한다.→ 이제 그것은 순수한 직관들만이 아니라 경험적 직관들까지도 주기 때문에, (초월론적 감성학이 입증하듯이,)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사유와 경험적 사유 사이에서 구별이 마주쳐질 수 있다.

 

 

 

Sie handelt von der Aufmerksamkeit, deren Hindernis und Folgen, dem Ursprunge des Irrtums, dem Zustande des Zweifels, des Skrupels, der Überzeugung usw.; und zu ihr verhält sich die allgemeine und reine Logik wie die reine Moral, welche bloß die notwendigen sittlichen Gesetze eines freien Willens überhaupt enthält, zu der eigentlichen Tugendlehre, welche diese Gesetze unter den Hindernissen der Gefühle, Neigungen und Leidenschaften, denen die Menschen mehr oder weniger unterworfen sind, erwägt, und welche niemals eine wahre und demonstrierte Wissenschaft abgeben kann, weil sie eben sowohl als jene angewandte Logik empirische und psychologische Prinzipien bedarf.

그것은 주의, 그 주의의 장애물과 결과, 오류의 원천, 회의(懷疑)와 가책과 확신 등의 상태에 대하여 논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논리학의 관계가 순수한 도덕이, 그 순수한 도덕이 자유 의지 전반의 순전히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법칙을 포함하는, 본래의 윤리학에 대해, 그 윤리학이 이러한 법칙을 심정과 경향 그리고 열정들의 장애 아래에서, 그것들에 인간들이 대체로 예속되는, 고려하는 것과 같고, 그러한 것은 결코 참이자 입증된 학문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저 응용된 논리학과 똑같이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원칙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 그것은 주의, 그 주의의 장애물과 결과, 오류의 원천, 회의(懷疑)와 가책과 확신 등의 상태에 대하여 논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보편적이고 순수한 논리학의 관계는 자유 의지 전반의 순전히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법칙을 포함하는 순수한 도덕이 이러한 법칙을 인간들이 대체로 예속되는 심정과 경향 그리고 열정들의 장애 아래에서 고려하는 본래의 윤리학에 대하는 것(관계)과 같고, 그러한 것(윤리학)은 결코 참이자 입증된 학문을 내놓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저 응용된 논리학과 똑같이 경험적이고 심리학적인 원칙들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Ⅱ. Von der Transzendentalen Logik

Ⅱ. 초월론적 논리학에 대하여

 

Die allgemeine Logik abstrahieret, wie wir gewiesen, von allem Inhalt der Erkenntnis, d.i. von aller Beziehung derselben auf das Objekt, und betrachtet nur die logische Form im Verhältnisse der Erkenntnisse auf einander, d.i. die Form des Denkens überhaupt.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가 확신하듯이 인식의 모든 내용들, 다시 말해 객체에 대한 그 인식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하며, 인식들 상호간의 관계들에서 단지 논리적 형식만을, 다시 말해 사유 전반의 형식만을 평가한다.

→ 보편적인 논리학은 우리가 확신하듯이 인식의 모든 내용들, 다시 말해 객체에 대한 그 인식의 모든 관계를 도외시하며, 인식들 상호간의 관계들에서 단지 논리적 형식만을, 다시 말해 사유 전반의 형식만을 평가한다.

Weil es nun aber sowohl reine, als empirische Anscahuungen gibt, (wie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dartut,) so könnte auch wohl ein Unterschied zwischen reinem und empirischem Denken der Gegenstände angetroffen werden.

이제 그것은 순수한 직관들만이 아니라 경험적 직관들까지도 주기 때문에, (초월론적 감성학이 입증하듯이,)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사유와 경험적 사유 사이에서 구별이 마주쳐질 수 있다.

→ 이제 그것은 순수한 직관들만이 아니라 경험적 직관들까지도 주기 때문에, (초월론적 감성학이 입증하듯이,) 그래서 또한 마찬가지로 대상들에 대한 순수한 사유와 경험적 사유 사이에서 구별이 마주쳐질 수 있다.

 

-蟲-

In der allgemeinen Logik muß also der Teil, der die reine Vernunftlehre ausmachen soll, von demjenigen gänzlich abgesondert werden, welcher die angewandte (obzwar noch immer allgemeine) Logik ausmacht. Der erstere ist eigentlich nur allein Wissenschaft, obzwar kurz und trocken, und wie es die schulgerechte Darstellung einer Elementarlehre des Verstandes erfordert. In dieser müssen also die Logiker jederzeit zwei Regeln vor Augen haben.

 1) Als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sie von allem Inhalt der Verstandeserkenntnis, und der Verschiedenheit ihrer Gegenstände, und hat mit nichts als der bloßen Form des Denkens zu tun.

 2) Als reine Logik hat sie keine empirische Prinzipien, mithin schöpft sie nichts (wie man sich bisweilen überredet hat) aus der Psychologie, die also auf den Kanon des Verstandes gar keinen Einfluß hat. Sie ist eine demonstrierte Doktrin, und alles muß in ihr völlig a priori gewiß sein.

→ 그러므로 보편적 논리학에서는 순수 이성론을 형성해야 할 그 부분이 응용된 (비록 여전히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논리학을 형성하는 부분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다.→ 비록 짧고 건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성의 요소론의 표준적인 제시를 요구하기에 전자가 고유하게 오로지 학문이다.→ 이러한 것 안에서는 그러므로 논리학자들은 항상 두 가지 법칙들을 눈앞에 가져야만 한다.

→ 1) 보편적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지성인식의 모든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지성의 대상들의 차이를 도외시하며, 그리고 사유의 순수한 형식 외에 다른 무엇과도 관계해서는 안된다.

→ 2) 순수한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어떠한 경험적 원칙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때때로 납득하듯이) 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길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지성의 표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증명된 이론이며,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충분히 선험적으로 확실함에 틀림없다.

 

 Was ich die angewandte Logik nenne, (wider die gemeine Bedeutung dieses Worts, nach der sie gewisse Exerzitien, dazu die reine Logik die Regel gibt, enthalten soll,) so ist sie eine Vorstellung des Verstandes und der Regeln seines notwendigen Gebrauchs in concreto, nämlich unter den zufälligen Bedigungen des Subjekts, die diesen Gebrauch hindern oder befördern können, und die insgesamt nur empirisch gegeben werden.

→ 내가 응용된 논리학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에 따라 그것이 순수 논리학이 그것에 법칙을 부여하는 확실한 훈련들을 포함해야 할 이러한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 반하여) 그래서 그것은 실제로, 즉 이러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그리고 모두 단지 경험적으로만 주어지는 그러한 주관의 우연적 조건들 아래에서, 지성의 표상이자 그것의 필연적 사용의 법칙들이다.

 

 

 

In der allgemeinen Logik muß also der Teil, der die reine Vernunftlehre ausmachen soll, von demjenigen gänzlich abgesondert werden, welcher die angewandte (obzwar noch immer allgemeine) Logik ausmacht.

그러므로 보편적 논리학에서는 그 부분이, 순수 이성론을 형성해야 할, 그것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다, 응용된 (비록 여전히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논리학을 형성하는.

→ 그러므로 보편적 논리학에서는 순수 이성론을 형성해야 할 그 부분이 응용된 (비록 여전히 보편적이라 할지라도) 논리학을 형성하는 부분으로부터 전적으로 분리된다.

Der erstere ist eigentlich nur allein Wissenschaft, obzwar kurz und trocken, und wie es die schulgerechte Darstellung einer Elementarlehre des Verstandes erfordert.

전자가 고유하게 오로지 학문이다, 비록 짧고 건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성의 요소론의 표준적인 제시를 요구하기에.

→ 비록 짧고 건조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지성의 요소론의 표준적인 제시를 요구하기에 전자가 고유하게 오로지 학문이다.

In dieser müssen also die Logiker jederzeit zwei Regeln vor Augen haben.

이러한 것 안에서는 그러므로 논리학자들은 항상 두 가지 법칙들을 눈앞에 가져야만 한다.

→ 이러한 것 안에서는 그러므로 논리학자들은 항상 두 가지 법칙들을 눈앞에 가져야만 한다.

 

1) Als allgemeine Logik abstrahiert sie von allem Inhalt der Verstandeserkenntnis, und der Verschiedenheit ihrer Gegenstände, und hat mit nichts als der bloßen Form des Denkens zu tun.

1) 보편적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지성인식의 모든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지성의 대상들의 차이를 도외시하며, 그리고 사유의 순수한 형식 외에 다른 무엇과도 관계해서는 안된다.

→ 1) 보편적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지성인식의 모든 내용들을 도외시하고, 지성의 대상들의 차이를 도외시하며, 그리고 사유의 순수한 형식 외에 다른 무엇과도 관계해서는 안된다.

 

2) Als reine Logik hat sie keine empirische Prinzipien, mithin schöpft sie nichts (wie man sich bisweilen überredet hat) aus der Psychologie, die also auf den Kanon des Verstandes gar keinen Einfluß hat.

2) 순수한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어떠한 경험적 원칙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때때로 납득하듯이) 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길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지성의 표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 2) 순수한 논리학으로서 그것은 어떠한 경험적 원칙들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들이 때때로 납득하듯이) 심리학으로부터는 아무것도 길어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리학은 지성의 표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Sie ist eine demonstrierte Doktrin, und alles muß in ihr völlig a priori gewiß sein.

그것은 증명된 이론이며,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충분히 선험적으로 확실함에 틀림없다.

→ 그것은 증명된 이론이며, 모든 것은 그 안에서 충분히 선험적으로 확실함에 틀림없다.

 

 

 Was ich die angewandte Logik nenne, (wider die gemeine Bedeutung dieses Worts, nach der sie gewisse Exerzitien, dazu die reine Logik die Regel gibt, enthalten soll,) so ist sie eine Vorstellung des Verstandes und der Regeln seines notwendigen Gebrauchs in concreto, nämlich unter den zufälligen Bedigungen des Subjekts, die diesen Gebrauch hindern oder befördern können, und die insgesamt nur empirisch gegeben werden.

  내가 응용된 논리학이라 명명하는 것은, (이러한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 반하여, 그에 따라 그것이 확실한 훈련들을, 순수 논리학이 그것에 법칙을 부여하는, 포함해야 할,) 그래서 그것은 실제로 지성의 표상이자 그것의 필연적 사용의 법칙들이다, 즉 주관의 우연적 조건들 아래에서, 그 조건들이 이러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그리고 그 조건들이 모두 단지 경험적으로만 주어지는.

→ 내가 응용된 논리학이라 명명하는 것은 (그에 따라 그것이 순수 논리학이 그것에 법칙을 부여하는 확실한 훈련들을 포함해야 할 이러한 용어의 일반적 의미에 반하여) 그래서 그것은 실제로, 즉 이러한 사용을 방해하거나 촉진시킬 수 있는, 그리고 모두 단지 경험적으로만 주어지는 그러한 주관의 우연적 조건들 아래에서, 지성의 표상이자 그것의 필연적 사용의 법칙들이다.

 

-蟲-

Die allgemeine Logik ist nun entweder die reine, oder die angewandte Logik. In der ersteren abstrahieren wir von allen empirischen Bedingungen, unter denen unser Verstand ausgeübet wird, z.B. vom Einfluß der Sinne, vom Spiele der Einbildung, den Gesetzen des Gedächtnisses, der Macht der Gewohnheit, der Neigung etc. mithin auch den Quellen der Vorurteile, ja gar überhaupt von allen Ursachen, daraus uns gewisse Erkenntnisse entspringen, oder untergeschoben werden mögen, weil sie bloß den Verstand unter gewissen Umständen seiner Anwendung betreffen, und, um diese zu kennen, Erfahrung erfordert wird. Eine allgemeine, aber reine Logik, hat es also mit lauter Prinzipien a priori zu tun, und ist ein Kano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aber nur in Ansehung des Formalen ihres Gebrauchs, der Inhalt mag sein, welcher er wolle, (empirisch oder transzendental). Eine allgemeine Logik heißt aber alsdenn angewandt, wenn sie auf die Regeln des Gebrauchs des Verstandes unter den subjektiven empirischen Bedingungen, die uns die Psychologie lehrt, gerichtet ist. Sie hat also empirische Prinzipien, ob sie zwar in so fern allgemein ist, daß sie auf den Verstandesgebrauch ohne Unterschied der Gegenstände geht. Um deswillen ist sie auch weder ein Kanon des Verstandes überhaupt, noch ein Organon besondrer Wissenschaften, sondern lediglich ein Kathartikon des gemeinen Verstnades.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순수한 논리학이거나 또는 응용된 논리학이다.→전자에서 우리는 그 아래에서 우리의 지성이 영향을 받는 모든 경험적 조건들, 예를 들어 감각의 유입, 상상의 유희, 기억의 규칙들, 습관의 힘, 경향 등 그러므로 또한 편견의 원천들까지도, 그로부터 우리에게 확실한 인식들이 생기는, 또는 위조될지도 모르는 모든 사태들 전반을 도외시한다. 위조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 사태들이 그것의 사용의 확실한 상황들 아래에서 순전히 지성에만 관계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경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하나의 보편적인, 그러나 순수한 논리학은 그러므로 순수한 법칙들과 선험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지성과 이성의 표준이지만, 단지 지성 사용의 형식들과 관련해서 지성이 바라는 (감각적이거나 초월론적인) 내용일지 모른다.→그러나 보편적 논리학은 그 논리학이 주관적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 우리에게 심리학을 가르쳐주는 지성의 사용 법칙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그리하여 응용된 논리학이라 부른다.→그러므로 그 논리학은 비록 그것들이 보편적인 한에서일지라도 대상들의 구분 없이 지성사용에 적용되는 경험적 원칙들을 가진다.→ 그 때문에 보편적 논리학은 또한 지성 전반의 표준도 아니고, 특수한 학문들의 도구도 아니며, 오히려 다만 일반적 지성의 정화일 따름이다.

 

 

Die allgemeine Logik ist nun entweder die reine, oder die angewandte Logik.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순수한 논리학이거나 또는 응용된 논리학이다.

→보편적 논리학은 이제 순수한 논리학이거나 또는 응용된 논리학이다.

In der ersteren abstrahieren wir von allen empirischen Bedingungen, unter denen unser Verstand ausgeübet wird, z.B. vom Einfluß der Sinne, vom Spiele der Einbildung, den Gesetzen des Gedächtnisses, der Macht der Gewohnheit, der Neigung etc. mithin auch den Quellen der Vorurteile, ja gar überhaupt von allen Ursachen, daraus uns gewisse Erkenntnisse entspringen, oder untergeschoben werden mögen, weil sie bloß den Verstand unter gewissen Umständen seiner Anwendung betreffen, und, um diese zu kennen, Erfahrung erfordert wird.

전자에서 우리는 모든 경험적 조건들을 도외시한다, 그 아래에서 우리의 지성이 영향을 받는, 예를 들어 감각의 유입, 상상의 유희, 기억의 규칙들, 습관의 힘, 경향 등 그러므로 또한 편견의 원천들까지도, 모든 사태들 전반을, 그로부터 우리에게 확실한 인식들이 생기는, 또는 위조될지도 모르는, 왜냐하면 그 사태들이 그것의 사용의 확실한 상황들 아래에서 순전히 지성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경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전자에서 우리는 그 아래에서 우리의 지성이 영향을 받는 모든 경험적 조건들, 예를 들어 감각의 유입, 상상의 유희, 기억의 규칙들, 습관의 힘, 경향 등 그러므로 또한 편견의 원천들까지도, 그로부터 우리에게 확실한 인식들이 생기는, 또는 위조될지도 모르는 모든 사태들 전반을 도외시한다. 위조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 사태들이 그것의 사용의 확실한 상황들 아래에서 순전히 지성에만 관계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것들을 알기 위해서 경험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Eine allgemeine, aber reine Logik, hat es also mit lauter Prinzipien a priori zu tun, und ist ein Kanon des Verstandes und der Vernunft, aber nur in Ansehung des Formalen ihres Gebrauchs, der Inhalt mag sein, welcher er wolle, (empirisch oder transzendental).

하나의 보편적인, 그러나 순수한 논리학은, 그러므로 순수한 법칙들과 선험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지성과 이성의 표준이지만, 단지 지성 사용의 형식들과 관련해서, 내용일지 모른다, 지성이 바라는, (감각적이거나 초월론적인).

→하나의 보편적인, 그러나 순수한 논리학은 그러므로 순수한 법칙들과 선험적으로 관계해야 하고, 지성과 이성의 표준이지만, 단지 지성 사용의 형식들과 관련해서 지성이 바라는 (감각적이거나 초월론적인) 내용일지 모른다.

Eine allgemeine Logik heißt aber alsdenn angewandt, wenn sie auf die Regeln des Gebrauchs des Verstandes unter den subjektiven empirischen Bedingungen, die uns die Psychologie lehrt, gerichtet ist.

그러나 보편적 논리학은 그리하여 응용된 논리학이라 부른다, 그 논리학이 주관적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 지성의 사용 법칙들에 대하여, 그 법칙들이 우리에게 심리학을 가르쳐주는,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그러나 보편적 논리학은 그 논리학이 주관적 경험적 조건들 아래에서 우리에게 심리학을 가르쳐주는 지성의 사용 법칙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게 될 때 그리하여 응용된 논리학이라 부른다.

Sie hat also empirische Prinzipien, ob sie zwar in so fern allgemein ist, daß sie auf den Verstandesgebrauch ohne Unterschied der Gegenstände geht.

그러므로 그 논리학은 경험적 원칙들을 가진다, 비록 그것들이 보편적인 한에서일지라도, 대상들의 구분 없이 지성사용에 적용되는.

→그러므로 그 논리학은 비록 그것들이 보편적인 한에서일지라도 대상들의 구분 없이 지성사용에 적용되는 경험적 원칙들을 가진다.

Um deswillen ist sie auch weder ein Kanon des Verstandes überhaupt, noch ein Organon besondrer Wissenschaften, sondern lediglich ein Kathartikon des gemeinen Verstnades.

그 때문에 보편적 논리학은 또한 지성 전반의 표준도 아니고, 특수한 학문들의 도구도 아니며, 오히려 다만 일반적 지성의 정화일 따름이다.

→ 그 때문에 보편적 논리학은 또한 지성 전반의 표준도 아니고, 특수한 학문들의 도구도 아니며, 오히려 다만 일반적 지성의 정화일 따름이다.

 

-蟲-

Die Logik kann nun wiederum in zwiefacher Absicht unternommen werden, entweder als Logik des allgemeinen, oder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Die erste enthält die schlechthin notwendigen Regeln des Denkens, ohne welche gar kein Gebrauch des Verstandes stattfindet, und geht also auf diesen, unangesehen der Verschiedenheit der Gegenstände, auf welche er gerichtet sein mag. Die Logik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enthält die Regeln, über eine gewisse Art von Gegenständen richtig zu denken. Jene kann man die Elementarlogik nennen, diese aber das Organon dieser oder jener Wissenschaft. Die letztere wird mehrenteils in den Schulen als Propädeutik der Wissenschaften vorangeschickt, ob sie zwar, nach dem Gange der menschlichen Vernunft, das späteste ist, wozu sie allererst gelangt, wenn die Wissenschaft schon lange fertig ist, und nur die letzte Hand zu ihrer Berichtigung und Vollkommenheit bedarf. Denn man muß die Gegenstände schon in ziemlich hohem Grade kennen, wenn man die Regeln angeben will, wie sich eine Wissenschaft von ihnen zu Stande bringen lasse.

→ 논리학은 이제 또 다시 보편적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또는 특수한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이중의 의도로 기획될 수 있다.→ 전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생기지 않는, 사유의 전적으로 필연적인 법칙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들의 상이함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관계한다.→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은 대상들에 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모종의 방식에 대한 법칙들을 포함한다.→ 저것은 사람들이 기초논리학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이러저러한 학문의 수단이라 부를 수 있다.→ 후자는 대부분 학문들의 예비학으로 학교들에서 사전 제공되고, 비록 그러한 것들이 인간 이성의 노정에 따라 늦는 것일지라도 만일 학문이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그리고 단지 후자의 손이 그 학문의 교정과 모범을 필요로 한다면 가장 먼저 그것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 실현되는지 법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대상들을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Die Logik kann nun wiederum in zwiefacher Absicht unternommen werden, entweder als Logik des allgemeinen, oder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논리학은 이제 또 다시 이중의 의도로 기획될 수 있다, 보편적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또는 특수한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 논리학은 이제 또 다시 보편적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또는 특수한 지성사용에 대한 논리학으로서 이중의 의도로 기획될 수 있다.

Die erste enthält die schlechthin notwendigen Regeln des Denkens, ohne welche gar kein Gebrauch des Verstandes stattfindet, und geht also auf diesen, unangesehen der Verschiedenheit der Gegenstände, auf welche er gerichtet sein mag.

전자는 사유의 전적으로 필연적인 법칙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생기지 않는,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에 관계한다, 대상들의 상이함을 보지 않고, 그것에 그것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 전자는 그러한 것들이 없다면 어떠한 지성의 사용도 생기지 않는, 사유의 전적으로 필연적인 법칙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상들의 상이함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을 보지 않고 이러한 것들에 관계한다.

Die Logik des besondern Verstandesgebrauchs enthält die Regeln, über eine gewisse Art von Gegenständen richtig zu denken.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은 법칙들을 포함한다, 대상들에 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모종의 방식에 대한.

→ 특수한 지성사용의 논리학은 대상들에 대해 올바르게 사유하는 모종의 방식에 대한 법칙들을 포함한다.

Jene kann man die Elementarlogik nennen, diese aber das Organon dieser oder jener Wissenschaft.

저것은 사람들이 기초논리학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이러저러한 학문의 수단이라 부를 수 있다.

→ 저것은 사람들이 기초논리학이라 부를 수 있고, 이것은 이러저러한 학문의 수단이라 부를 수 있다.

Die letztere wird mehrenteils in den Schulen als Propädeutik der Wissenschaften vorangeschickt, ob sie zwar, nach dem Gange der menschlichen Vernunft, das späteste ist, wozu sie allererst gelangt, wenn die Wissenschaft schon lange fertig ist, und nur die letzte Hand zu ihrer Berichtigung und Vollkommenheit bedarf.

후자는 대부분 학문들의 예비학으로 학교들에서 사전 제공되고, 비록 그러한 것들이, 인간 이성의 노정에 따라, 늦는 것일지라도, 가장 먼저 그것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만일 학문이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그리고 단지 후자의 손이 그 학문의 교정과 모범을 필요로 한다면.

→ 후자는 대부분 학문들의 예비학으로 학교들에서 사전 제공되고, 비록 그러한 것들이 인간 이성의 노정에 따라 늦는 것일지라도 만일 학문이 이미 충분히 준비되었다면, 그리고 단지 후자의 손이 그 학문의 교정과 모범을 필요로 한다면 가장 먼저 그것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Denn man muß die Gegenstände schon in ziemlich hohem Grade kennen, wenn man die Regeln angeben will, wie sich eine Wissenschaft von ihnen zu Stande bringen lasse.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상들을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법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 실현되는지.

→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학문이 실현되는지 법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사람들은 대상들을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蟲-

Wollen wir die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Vorstellungen zu empfangen, so fern es auf irgend eine Weise affiziert wird, Sinnlichkeit nennen; so ist dagegen das Vermögen, Vorstellungen selbst hervorzubringen, oder die Spontaneität des Erkenntnisses, der Verstand. Unsre Natur bringt es so mit sich, daß die Anschauung niemals anders als sinnlich sein kann, d.i. nur die Art enthäl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Dagegen ist das Vermögen, den Gegenstand sinnlicher Anschauung zu denken, der Verstand. Keine dieser Eigenschaften ist der andern vorzuziehen. Ohne Sinnlichkeit würde uns kein Gegenstand gegeben, und ohne Verstand keiner gedacht werden.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Daher ist es eben so notwendig, seine Begriffe sinnlich zu machen, (d.i. ihnen d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beizufügen,) als seine Anschauungen sich verständlich zu machen (d.i. sie unter Begriffe zu bringen). Beide Vermögen, oder Fähigkeiten, können auch ihre Funktionen nicht vertauschen. Der Verstand vermag nichts anzuschauen, und die Sinne nichts zu denken. Nur daraus, daß sie sich vereinigen, kann Erkenntnis entspringen. Deswegen darf man aber doch nicht ihren Anteil vermischen, sondern man hat große Ursache, jedes von dem andern sorgfältig abzusondern, und zu unterscheiden. Daher unterscheiden wir die Wissenschaft der Regeln der Sinnlichkeit überhaupt, d.i. Ästhetik, von der Wissenschaft der Verstandesregeln überhaupt, d.i. der Logik.

→ 우리는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심성의 수용성을,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촉발 되는 한에서, 감성이라 이름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에 반해 표상들 자체를 산출하는 능력 또는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우리의 본성은 당연히 직관이 감각적인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즉 단지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촉발되는 그 방식을 포함할 뿐이라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에 반해 감각적 직관의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이러한 특성들 중 어떤 것도 더 나은 것은 아니다.→ 감성 없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성 없이는 어떠한 것도 사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그런 이유로 그것의 개념들을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 (즉 개념들에 대상을 직관 안에서 함께 결합하는 것,) 또한 그것의 직관들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즉 그것들을 개념들 아래로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능력들, 혹은 소질들 모두 그것들의 능력들을 맞바꿀 수 없다.→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다.→ 그저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으로부터만 인식은 발생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들의 일부를 뒤섞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은 각각의 것들이 다른 하나로부터 세심하게 분류하고, 구분해야 할 중대한 이유를 가진다.→ 그 때문에 우리는 감성 전반의 법칙들에 대한 학문들, 즉 감성학을, 지성법칙들 전반에 대한 학문, 즉 논리학과 구분한다.

 

 

Wollen wir die Rezeptivität unseres Gemüts, Vorstellungen zu empfangen, so fern es auf irgend eine Weise affiziert wird, Sinnlichkeit nennen;

우리는 심성의 수용성을,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촉발되는 한에서, 감성이라 이름하고자 한다;

so ist dagegen das Vermögen, Vorstellungen selbst hervorzubringen, oder die Spontaneität des Erkenntnisses, der Verstand.

그래서 그에 반해 능력은, 표상들 자체를 산출하는, 또는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 우리는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심성의 수용성을,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촉발 되는 한에서, 감성이라 이름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에 반해 표상들 자체를 산출하는 능력 또는 인식의 자발성은 지성이다.

Unsre Natur bringt es so mit sich, daß die Anschauung niemals anders als sinnlich sein kann, d.i. nur die Art enthält, wie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우리의 본성은 당연히 필요로 한다, 직관이 감각적인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즉 단지 그 방식을 포함할 뿐이라는 것,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촉발되는.

→ 우리의 본성은 당연히 직관이 감각적인 외에 다른 무엇일 수 없다는 것, 즉 단지 우리가 대상들로부터 촉발되는 그 방식을 포함할 뿐이라는 것을 필요로 한다.

Dagegen ist das Vermögen, den Gegenstand sinnlicher Anschauung zu denken, der Verstand.

그에 반해 능력은, 감각적 직관의 대상을 사유하는, 지성이다.

→ 그에 반해 감각적 직관의 대상을 사유하는 능력은 지성이다.

Keine dieser Eigenschaften ist der andern vorzuziehen.

이러한 특성들 중 어떤 것도 더 나은 것은 아니다.

→ 이러한 특성들 중 어떤 것도 더 나은 것은 아니다.

Ohne Sinnlichkeit würde uns kein Gegenstand gegeben, und ohne Verstand keiner gedacht werden.

감성 없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성 없이는 어떠한 것도 사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 감성 없이 우리에게는 어떠한 대상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지성 없이는 어떠한 것도 사고될 수 없게 될 것이다.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Daher ist es eben so notwendig, seine Begriffe sinnlich zu machen, (d.i. ihnen d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beizufügen,) als seine Anschauungen sich verständlich zu machen (d.i. sie unter Begriffe zu bringen).

그런 이유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의 개념들을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 (즉 개념들에 대상을 직관 안에서 함께 결합하는 것,) 또한 그것의 직관들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즉 그것들을 개념들 아래로 가져오는 것).

→ 그런 이유로 그것의 개념들을 감각적으로 만드는 것, (즉 개념들에 대상을 직관 안에서 함께 결합하는 것,) 또한 그것의 직관들을 지성적으로 만드는 것 (즉 그것들을 개념들 아래로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Beide Vermögen, oder Fähigkeiten, können auch ihre Funktionen nicht vertauschen.

두 가지 능력들, 혹은 소질들 모두 그것들의 능력들을 맞바꿀 수 없다.

→ 두 가지 능력들, 혹은 소질들 모두 그것들의 능력들을 맞바꿀 수 없다.

Der Verstand vermag nichts anzuschauen, und die Sinne nichts zu denken.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다.

→ 지성은 아무것도 직관할 수 없고, 감관은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다.

Nur daraus, daß sie sich vereinigen, kann Erkenntnis entspringen.

그저 그로부터,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 인식은 발생할 수 있다.

→ 그저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는 것으로부터만 인식은 발생할 수 있다.

Deswegen darf man aber doch nicht ihren Anteil vermischen, sondern man hat große Ursache, jedes von dem andern sorgfältig abzusondern, und zu unterscheiden.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들의 일부를 뒤섞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은 중대한 이유를 가진다, 각각의 것들이 다른 하나로부터 세심하게 분류하고, 구분해야 할.

→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들의 일부를 뒤섞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은 각각의 것들이 다른 하나로부터 세심하게 분류하고, 구분해야 할 중대한 이유를 가진다.

Daher unterscheiden wir die Wissenschaft der Regeln der Sinnlichkeit überhaupt, d.i. Ästhetik, von der Wissenschaft der Verstandesregeln überhaupt, d.i. der Logik.

그 때문에 우리는 감성 전반의 법칙들에 대한 학문들, 즉 감성학을, 지성법칙들 전반에 대한 학문, 즉 논리학과 구분한다.

→ 그 때문에 우리는 감성 전반의 법칙들에 대한 학문들, 즉 감성학을, 지성법칙들 전반에 대한 학문, 즉 논리학과 구분한다.

 

-蟲-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Zweiter Teil

Die transzendentale Logik

초월론적 요소론

제 2 부문

초월론적 논리학

Einleitung

Idee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서론

초월론적 논리학의 이념

Ⅰ.

Von der Logik überhaupt

Ⅰ.

논리학 전반에 대하여

 

 

Unsere Erkenntnis entspringt aus zwei Grundquellen des Gemüts, deren die erste ist, die Vorstellungen zu empfangen (die Rezeptivität der Eindrücke), die zweite das Vermögen, durch diese Vorstellungen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Spontaneität der Begriffe); durch die erstere wird uns ein Gegenstand gegeben, durch die zweite wird dieser im Verhältnis auf jene Vorstellung (als bloße Bestimmung des Gemüts) gedacht. Anschauung und Begriffe machen also die Elemente aller unsrer Erkenntnis aus, so daß weder Begriffe, ohne ihnen auf einige Art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noch Anschauung ohne Begriffe, ein Ereknntnis abgeben können. Beide sind entweder rein, oder empirisch. Empirisch, wenn Empfindung (die die wirkliche Gegenwart des Gegenstnades voraussetzt) darin enthalten ist: rein aber, wenn der Vorstellung keine Empfindung beigemischt ist. Man kann die letztere die Materie der sinnlichen Erkenntnis nennen. Daher enthält reine Anschauung lediglich die Form, unter welcher etwas angeschaut wird, und reiner Begriff allein die Form des Denkens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Nur allein reine Anschauungen oder Begriffe sind a priori möglich, empirische nur a posteriori.

→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천들로부터 발원한다. 그것들의 첫번째 것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번째 것은 이러한 표상들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개념들의 자발성) 능력들이다; 전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를 통하여 이러한 것(대상)이 저 표상과의 관계 속에서 (심성의 순전한 규정으로서) 사고된다.→ 직관과 개념들은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그래서 개념들도, 그 개념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직관 없이는, 또한 직관도 개념들 없이는,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 지각이 (그 지각이 대상의 실질적 현전을 전제하는) 그 안에 포함될 때 감각적이다: 그러나 그 표상에 아무런 지각도 섞이지 않을 때는 순수하다.→ 사람들은 후자를 감성적 인식의 요소들이라 이름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순수한 직관은 다만 그 아래에서 어떤 것이 직관되는 그러한 형식만을 포함할 따름이고, 순수한 개념은 오로지 대상 전반을 사유하는 형식일 뿐이다.→ 하지만 순수한 직관들이나 개념들만이 선험적일 수 있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저 후험적일 수 있다.

 

 

Der transzendentalen Elementarlehre

Zweiter Teil

Die transzendentale Logik

초월론적 요소론

제 2 부문

초월론적 논리학

Einleitung

Idee einer transzendentalen Logik

서론

초월론적 논리학의 이념

Ⅰ.

Von der Logik überhaupt

Ⅰ.

논리학 전반에 대하여

 

Unsere Erkenntnis entspringt aus zwei Grundquellen des Gemüts, deren die erste ist, die Vorstellungen zu empfangen (die Rezeptivität der Eindrücke), die zweite das Vermögen, durch diese Vorstellungen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Spontaneität der Begriffe);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천들로부터 발원한다, 그것들의 첫번째 것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번째 것은 능력들이다, 이러한 표상들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개념들의 자발성);

durch die erstere wird uns ein Gegenstand gegeben, durch die zweite wird dieser im Verhältnis auf jene Vorstellung (als bloße Bestimmung des Gemüts) gedacht.

전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를 통하여 이러한 것(대상)이 저 표상과의 관계 속에서 (심성의 순전한 규정으로서) 사고된다.

→ 우리의 인식은 심성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천들로부터 발원한다. 그것들의 첫번째 것은 표상들을 받아들이는 것(인상들의 수용성)이고, 두번째 것은 이러한 표상들을 통하여 대상을 인식하는 (개념들의 자발성) 능력들이다; 전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고, 후자를 통하여 이러한 것(대상)이 저 표상과의 관계 속에서 (심성의 순전한 규정으로서) 사고된다.

Anschauung und Begriffe machen also die Elemente aller unsrer Erkenntnis aus, so daß weder Begriffe, ohne ihnen auf einige Art korrespondierende Anschauung, noch Anschauung ohne Begriffe, ein Ereknntnis abgeben können.

직관과 개념들은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그래서 개념들도, 그 개념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직관 없이는, 또한 직관도 개념들 없이는,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

→ 직관과 개념들은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인식의 요소들을 이룬다, 그래서 개념들도, 그 개념들에게 고유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직관 없이는, 또한 직관도 개념들 없이는, 인식을 제공할 수 없다.

Beide sind entweder rein, oder empirisch.

양자는 모두 순수하거나 감각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 양자는 모두 순수하거나 감각적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Empirisch, wenn Empfindung (die die wirkliche Gegenwart des Gegenstnades voraussetzt) darin enthalten ist: rein aber, wenn der Vorstellung keine Empfindung beigemischt ist.

감각적이다, 지각이 (그 지각이 대상의 실질적 현전을 전제하는) 그 안에 포함될 때: 그러나 순수하다, 그 표상에 아무런 지각도 섞이지 않을 때.

→ 지각이 (그 지각이 대상의 실질적 현전을 전제하는) 그 안에 포함될 때 감각적이다: 그러나 그 표상에 아무런 지각도 섞이지 않을 때는 순수하다.

Man kann die letztere die Materie der sinnlichen Erkenntnis nennen.

사람들은 후자를 감성적 인식의 요소들이라 이름할 수 있다.

→ 사람들은 후자를 감성적 인식의 요소들이라 이름할 수 있다.

Daher enthält reine Anschauung lediglich die Form, unter welcher etwas angeschaut wird, und reiner Begriff allein die Form des Denkens eines Gegenstandes überhaupt.

그런 이유에서 순수한 직관은 다만 형식만을 포함할 따름이다, 그 형식 하에서 어떤 것이 직관되는, 그리고 순수한 개념은 오로지 대상 전반을 사유하는 형식일 뿐이다.

→ 그런 이유에서 순수한 직관은 다만 그 아래에서 어떤 것이 직관되는 그러한 형식만을 포함할 따름이고, 순수한 개념은 오로지 대상 전반을 사유하는 형식일 뿐이다.

Nur allein reine Anschauungen oder Begriffe sind a priori möglich, empirische nur a posteriori.

하지만 순수한 직관들이나 개념들만이 선험적일 수 있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저 후험적일 수 있다.

→ 하지만 순수한 직관들이나 개념들만이 선험적일 수 있고, 감각적인 것들은 그저 후험적일 수 있다.

 

-蟲-

Es ist auch nicht nötig, daß wir die Anschauungsart in Raum und Zeit auf die Sinnlichkeit des Menschen einschränken; es mag sein, daß alles endliche denkende Wesen hierin mit dem Menschen notwendig übereinkommen müsse, (wiewohl wir dieses nicht entscheiden können,) so hört sie um dieser Allgemeingültigkeit willen doch nicht auf Sinnlichkeit zu sein, eben darum, weil sie abgeleitet (intuitus derivativus), nicht ursprünglich (intuitus originarius), mithin nicht intellektuelle Anschauung ist, als welche aus dem eben angeführten Grunde allein dem Urwesen, niemals aber einem, seinem Dasein sowohl als seiner Anschauung nach (die sein Dasein in Beziehung auf gegebene Objekte bestimmt), abhängigen Wesen zuzukommen scheint; wiewohl die letztere Bemerkung zu unserer ästhetischen Theorie nur als Erläuterung, nicht als Beweisgrund gezählt werden muß.

→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들이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파생되었기 (파생적 직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근원존재에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Beschluß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초월론적 감성학의 맺음말

 

Hier haben wir nun eines von den erforderlichen Stücken zur Auflösung der allgemeinen Aufgabe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wie sind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nämlich reine Anschauungen a priori, Raum und Zeit, in welchen wir, wenn wir im Urteile a pirori über den gegebenen Begriff hinausgehen wollen, dasjenige antreffen, was nicht im Begriffe, wohl aber in der Anschauung, die ihm entspricht, a priori entdeckt werden und mit jenem synthetisch verbunden werden kann, welche Urteile aber aus diesem Grunde nie weiter, als auf Gegenstände der Sinne reichen, und nur für Objekte möglicher Erfahrung gelten können.

→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인 공간과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어떤 것과 마주치지만,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Es ist auch nicht nötig, daß wir die Anschauungsart in Raum und Zeit auf die Sinnlichkeit des Menschen einschränken;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하는 것;

es mag sein, daß alles endliche denkende Wesen hierin mit dem Menschen notwendig übereinkommen müsse, (wiewohl wir dieses nicht entscheiden können,) so hört sie um dieser Allgemeingültigkeit willen doch nicht auf Sinnlichkeit zu sein, eben darum, weil sie abgeleitet (intuitus derivativus), nicht ursprünglich (intuitus originarius), mithin nicht intellektuelle Anschauung ist, als welche aus dem eben angeführten Grunde allein dem Urwesen, niemals aber einem, seinem Dasein sowohl als seiner Anschauung nach (die sein Dasein in Beziehung auf gegebene Objekte bestimmt), abhängigen Wesen zuzukommen scheint;

그것은 있을지 모른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한다는 것,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그것들이 파생되었기 때문에 (파생적 직관),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그러므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근원존재에,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으로서;

wiewohl die letztere Bemerkung zu unserer ästhetischen Theorie nur als Erläuterung, nicht als Beweisgrund gezählt werden muß.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 우리가 직관방식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 감성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다; 모든 유한한 사유하는 존재는 이 점에서 인간과 필연적으로 일치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을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것들은 이러한 보편적 가능성에 속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성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바로 그것들이 근원적이지 않고 (근원적 직관) 파생되었기 (파생적 직관)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은 제시된 토대로부터만 그것의 현존만이 아니라 그것의 직관에도 결코 따르지 않는 (그 직관이 그것의 현존을 주어진 객체에 대한 관계 속에서 규정하는) 근원존재에 의존적 본질을 일치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지성적 직관이 아니다; 비록 우리의 감성 이론을 위한 후자의 견해는 논거로서가 아니라 단지 해명으로서 헤아려져야만 하지만 말이다.

 

Beschluß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초월론적 감성학의 맺음말

 

Hier haben wir nun eines von den erforderlichen Stücken zur Auflösung der allgemeinen Aufgabe der Transzendentalphilosophie: wie sind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초월론적철학의 보편적 과제의 해결을 위해 필수적인 부문들에 대한 한 가지 것을 가진다: 어떻게 선험적 종합 명제들이 가능한가?

nämlich reine Anschauungen a priori(, Raum und Zeit, in welchen wir, wenn wir im Urteile a pirori über den gegebenen Begriff hinausgehen wollen, dasjenige antreffen, was nicht im Begriffe, wohl aber in der Anschauung, die ihm entspricht, a priori entdeckt werden und mit jenem synthetisch verbunden werden kann, welche Urteile aber aus diesem Grunde nie weiter, als auf Gegenstände der Sinne reichen, und nur für Objekte möglicher Erfahrung gelten können.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 공간과 시간이, 그 안에서 우리가,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그것을 마주치는,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직관 안에서, 그 직관이 그것에 상응하는,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그리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 즉 순수한 선험적 직관들인 공간과 시간은 그 안에서 우리가 선험적 판단에서 주어진 개념을 넘어서고자 할 때, 개념 안에서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하는 직관 안에서 선험적으로 드러날 수 있고 저런 것과 종합적으로 결합될 수 있는 어떤 것과 마주치지만, 그러나 그러한 판단들이 감관의 대상들에 미치는 이외에 이러한 근거에서 결코 더 나아가서 유효할 수는 없고, 단순히 가능한 경험의 객체에 대해서만 유효할 수 있다.

 

-蟲-

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Ⅳ. In der natürlichen Theologie, da man sich einen Gegenstand denkt, der nicht allein für uns gar kein Gegenstand der Anschauung, sondern der ihm selbst durchaus kein Gegenstand der sinnlichen Anschauung sein kann, ist man sorgfältig darauf bedacht, von aller seiner Anschauung (denn dergleichen muß alles sein Erkenntnis sein, und nicht Denken, welches jederzeit Schranken beweiset) die Bedingungen der Zeit und des Raumes wegzuschaffen.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 대상이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사람들은 면밀하게 그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그것의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을.

→ Ⅳ. 자연신학 내에서 사람들은 우리에게만 직관의 어떠한 대상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상이 그것 자체에게도 전혀 감각적 직관의 그 어떠한 대상일 수도 없는 대상을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면밀하게, 모든 직관으로부터 (왜냐하면 그와 같은 것은 인식이어야만 하고, 언제나 한계를 입증하는 사유가 아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건들을 소거하는 것에 대해 숙고하게 된다.

Aber mit welchem Rechte kann man dieses tun, wenn man beide vorher zu Formen der Dinge an sich selbst gemacht hat, und zwar solchen, die, als Bedingungen der Existenz der Dinge a priori, übrig bleiben, wenn man gleich die Dinge selbst aufgehoben hätte:

그러나 그런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에 앞서 형성하였다면,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에, 그것들이,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는,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denn, als Beidngungen alles Daseins überhaupt, müßten sie es auch vom Dasein Gottes sein.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양자를 사물 그 자체의 형식들으로 만들었다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사람들은 이러한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러한 것들이, 비록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를 지양했다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사물들의 실존의 조건들로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현존 전반의 조건들로서, 그것들은 신의 현존에 대한 것으로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s bleibt nichts übrig, wenn man sie nicht zu objektiven Formen aller Dinge machen will, als daß man sie zu subjektiven Formen unserer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Anschauungsart macht, die darum sinnlich heißt, weil sie nicht ursprünglich, d.i. eine solche ist, durch die selbst das Dasein des Objekts der Anschauung gegeben wird (und die, so viel wir einsehen, nur dem Urwesen zukommen kann), sondern von dem Dasein des Objekts abhängig, mithin nur dadurch, daß die Vorstellungsfähigkeit des Subjekts durch dasselbe affiziert wird, möglich ist.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그 형식들이 그를 통해 감각적이라고 불리는,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다.

→ 만일 사람들이 그것들을, 사람들이 그것들을 우리의 내적직관방식만이 아니라 외적직관방식에도 또한 주관적 형식들로 하는 것으로서, 모든 사물들의 객관적 형식들로 하려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를 통해 그 형식들은 감각적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본래적, 즉 그것들 자체를 통해 직관의 객체의 현존이 주어지는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가 이해하는 한, 본질에 부합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객체의 현존에 의존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단지 그로부터, 주관의 표상력이 바로 그것을 통하여 촉발된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蟲-

Dieser geschieht aber nicht nach unserem Prinzip der Idealität aller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en; vielmehr, wenn man jenen Vorstellungsformen objektive Realität beilegt, so kann man nicht vermeiden, daß nicht alles dadurch in bloßen Schein verwandelt werde. Denn, wenn man den Raum und die Zeit als Beschaffenheiten ansieht, die ihrer Möglichkeit nach in Sachen an sich angetroffen werden müßten, und überdenkt die Ungereimtheiten, in die man sich alsdenn verwickelt, indem zwei unendliche Dinge, die nicht Substanzen, auch nicht etwas wirklich den Substanzen Inhärierendes, dennoch aber Existierendes, ja die notwendige Bedingung der Existenz aller Dinge sein müssen, auch übrig bleiben, wenn gleich alle existierende Dinge aufgehoben werden; so kann man es dem guten Berkeley wohl nicht verdenken, wenn er die Körper zu bloßem Schein herabsetzte, ja es müßte so gar unsere eigene Existenz, die auf solche Art von der für sich bestehenden Realität eines Undinges, wie die Zeit, abhängig gemacht wäre, mit dieser in lauter Schein verwandelt werden; eine Ungereimtheit, die sich bisher noch niemand hat zu Schulden kommen lassen.

→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동시에,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또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에게서 그가 물체를,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이 시간처럼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이러한 물체와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Dieser geschieht aber nicht nach unserem Prinzip der Idealität aller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en;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vielmehr, wenn man jenen Vorstellungsformen objektive Realität beilegt, so kann man nicht vermeiden, daß nicht alles dadurch in bloßen Schein verwandelt werde.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nicht가 중복된 듯)는 것을.

→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모든 감각적 직관들의 이념에의 우리의 원칙에 따라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욱이, 만일 사람들이 저 표상형식들에 객관적 실재성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순전한 가상으로 변화되(지 않)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Denn, wenn man den Raum und die Zeit als Beschaffenheiten ansieht, die ihrer Möglichkeit nach in Sachen an sich angetroffen werden müßten, und überdenkt die Ungereimtheiten, in die man sich alsdenn verwickelt, indem zwei unendliche Dinge, die nicht Substanzen, auch nicht etwas wirklich den Substanzen Inhärierendes, dennoch aber Existierendes, ja die notwendige Bedingung der Existenz aller Dinge sein müssen, auch übrig bleiben, wenn gleich alle existierende Dinge aufgehoben werden;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그리고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동시에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또한 남는다,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so kann man es dem guten Berkeley wohl nicht verdenken, wenn er die Körper zu bloßem Schein herabsetzte, ja es müßte so gar unsere eigene Existenz, die auf solche Art von der für sich bestehenden Realität eines Undinges, wie die Zeit, abhängig gemacht wäre, mit dieser in lauter Schein verwandelt werden;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의 그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그가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그것이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시간과 같이,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이것과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

eine Ungereimtheit, die sich bisher noch niemand hat zu Schulden kommen lassen.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 왜냐하면 만일 사람들이 공간과 시간을, 그것들의 가능성이 그에 따라 사태 그 자체에서 마주치게 되어야만 하는 특성들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그 안으로 사람들이 휩쓸려드는 그 모순을 숙고한다면, 동시에, 실체들이 아닌, 실질적으로 실체들에 고유한 어떤 것도 아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하는 것인 두 가지 끝이 없는 것들이, 모든 것들의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어야만 하고, 설령 모든 실존하는 사물들이 지양된다 할지라도 또한 남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훌륭한 버클리에게서 그가 물체를, 더욱이 우리들의 고유한 실존이 시간처럼 없는 것(아닌 것)의 존속하는 실재성 그 자체에 그러한 방식으로 의존하는 것으로 보이게 될 물체를 순전한 가상으로 격하시켰을 때, 이러한 물체와 함께 진짜 가상으로 변하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곡해하지 않을 수 있다. 불합리,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과실을 범하지도 않았음에도.

 

-蟲-

Ⅲ. Wenn ich sage: im Raum und der Zeit stellt die Anschauung, so wohl der äußeren Objekte, als auch die Selbstanschauung des Gemüts, beides vor, so wie es unsere Sinne affiziert, d.i. wie es erscheint; so will das nicht sagen, daß diese Gegenstände ein bloßer Schein wären. Denn in der Erscheinung werden jederzeit die Objekte, ja selbst die Beschaffenheiten, die wir ihnen beilegen, als etwas wirklich Gegebenes angesehen, nur daß, so fern diese Beschaffenheit nur von der Anschauungsart des Subjekts in der Relation des gegebenen Gegenstandes zu ihm abhöngt, dieser Gegenstand als Erscheinung von ihm selber als Objekt an sich unterschieden wird. So sage ich nicht, die Körper scheinen bloß außer mir zu sein, oder meine Seele scheint nur in meinem Selbstbewußtsein gegeben zu sein, wenn ich behaupte, daß die Qualität des Raums und der Zeit, welcher, als Bedingung ihres Daseins, gemäß ich beide setze, in meiner Anschauungsart und nicht in diesen Objekten an sich liege. Es wäre meine eigene Schuld, wenn ich aus dem, was ich zur Erscheinung zählen sollte, bloßen Schein machte¹.

→ Ⅲ. 내가 :공간과 시간 안에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직관을,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는 것처럼, 곧 그것이 현상하는 것처럼, 표상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그래서 나는 내가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주장할 때,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일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¹.

 

¹Die Prädikate der Erscheinung können dem Objekte selbst beigelegt werden, in Verhältnis auf unseren Sinn, z.B. der Rose die rote Farbe, oder der Geruch; aber der Schein kann niemals als Prädikat dem Gegenstande beigelegt werden, eben darum, weil er, was diesem nur in Verhältnis auf die Sinne, oder überhaupt aufs Subjekt zukommt, dem Objekt für sich beilegt, z.B. die zwei Henkel, die man anfänglich dem Saturn beilegte. Was gar nicht am Objekte an sich selbst, jederzeit aber im Verhältnisse desselben zum Subjekt anzutreffen und von der Vorstellung des ersteren unzertrennlich ist, ist Erscheinung, und so werden die Prädikate des Raumes und der Zeit mit Recht den Gegenständen der Sinne, als solchen, beigelegt, und hierin ist kein Schein. Dagegen, wenn ich der Rose an sich die Röte, dem Saturn die Henkel, oder allen äußeren Gegenständen die Ausdehnung an sich beilege, ohne auf ein bestimmtes Verhältnis dieser Gegenstände zum Subjekt zu sehen und mein Urteil darauf einzuschränken; alsdenn allererst entspringt der Schein.

→ ¹현상의 술어(빈사)는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을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두 고리.→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반면에,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Ⅲ. Wenn ich sage: im Raum und der Zeit stellt die Anschauung, so wohl der äußeren Objekte, als auch die Selbstanschauung des Gemüts, beides vor, so wie es unsere Sinne affiziert, d.i. wie es erscheint;

Ⅲ. 내가 말한다면: 공간과 시간 안에 직관을 표상한다고,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그렇게 우리의 감관을 촉발한다, 곧 그것은 현상한다고;

so will das nicht sagen, daß diese Gegenstände ein bloßer Schein wären.

그것은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 Ⅲ. 내가 :공간과 시간 안에 외적 객체만이 아니라 심성의 자기직관도 또한 둘 모두를, 직관을, 우리의 감관을 촉발하는 것처럼, 곧 그것이 현상하는 것처럼, 표상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러한 대상들이 순전히 가상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Denn in der Erscheinung werden jederzeit die Objekte, ja selbst die Beschaffenheiten, die wir ihnen beilegen, als etwas wirklich Gegebenes angesehen, nur daß, so fern diese Beschaffenheit nur von der Anschauungsart des Subjekts in der Relation des gegebenen Gegenstandes zu ihm abhöngt, dieser Gegenstand als Erscheinung von ihm selber als Objekt an sich unterschieden wird.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 왜냐하면 현상 안에서 언제나 객체들은 그 현상들 조차도 우리가 그 객체들에 부여하는 현실적인 주어진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특성이 그저 주관의 직관방식에 대해서만 주어진 대상과의 관련 속에서 그 대상에 부착되는 한에서, 현상으로서 이러한 대상이 객관 그 자체로서 동일한 그것으로부터 구분된다.

So sage ich nicht, die Körper scheinen bloß außer mir zu sein, oder meine Seele scheint nur in meinem Selbstbewußtsein gegeben zu sein, wenn ich behaupte, daß die Qualität des Raums und der Zeit, welcher, als Bedingung ihres Daseins, gemäß ich beide setze, in meiner Anschauungsart und nicht in diesen Objekten an sich liege.

그래서 나는 아니라고 말한다,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인다고, 내가 주장할 때,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그러한 것,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 그래서 나는 내가 공간과 시간의 성질이 내가 그에 따라서 공간과 시간을 세우는 그것들의 현존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객관들 자체 안이 아니라 나의 직관방식 안에 놓는다고 주장할 때, 물체들이 순전히 나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혹은 나의 정신이 그저 나의 자기의식 안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Es wäre meine eigene Schuld, wenn ich aus dem, was ich zur Erscheinung zählen sollte, bloßen Schein machte¹.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 만일 내가 그로부터,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¹.

→ 만일 내가 현상에 포함시켜야 하는 어떤 것으로부터 순전히 가상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나의 고유한 책임일 것이다¹.

 

¹Die Prädikate der Erscheinung können dem Objekte selbst beigelegt werden, in Verhältnis auf unseren Sinn, z.B. der Rose die rote Farbe, oder der Geruch;

¹현상의 술어(빈사)는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aber der Schein kann niemals als Prädikat dem Gegenstande beigelegt werden, eben darum, weil er, was diesem nur in Verhältnis auf die Sinne, oder überhaupt aufs Subjekt zukommt, dem Objekt für sich beilegt, z.B. die zwei Henkel, die man anfänglich dem Saturn beilegte.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에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두 고리,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 ¹현상의 술어(빈사)는 우리의 감관에 대한 관계 속에서 객관 자체에 부여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미의 그 붉은 색, 또는 향기; 그러나 가상은 결코 술어로서 대상에 부여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가상이 이러한 것을 단지 감관에 대한 관계 안에서, 혹은 전적으로 주관에 따라 귀속되는 객관에 그 자체로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것들을 사람들이 토성에 처음에 부여한 두 고리.

Was gar nicht am Objekte an sich selbst, jederzeit aber im Verhältnisse desselben zum Subjekt anzutreffen und von der Vorstellung des ersteren unzertrennlich ist, ist Erscheinung, und so werden die Prädikate des Raumes und der Zeit mit Recht den Gegenständen der Sinne, als solchen, beigelegt, und hierin ist kein Schein.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 전혀 객관 그 자체에가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주관에 대한 관계들 속에서 마주치는 것이고 전자의 표상으로부터 불가분한 것, 그것은 현상이고, 그래서 공간과 시간의 술어(빈사)는 정당하게 감관의 대상들에 그러한 것으로서 부여되며, 이 점에서 어떤 가상도 아니다.

Dagegen, wenn ich der Rose an sich die Röte, dem Saturn die Henkel, oder allen äußeren Gegenständen die Ausdehnung an sich beilege, ohne auf ein bestimmtes Verhältnis dieser Gegenstände zum Subjekt zu sehen und mein Urteil darauf einzuschränken; alsdenn allererst entspringt der Schein.

반면에,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 반면에, 이러한 대상들의 주관과의 규정된 관계에 대해 보지 않고 나의 판단을 그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내가 장미 자체에 붉음을, 토성에 고리들을, 혹은 모든 외적 대상들에 연장 자체를 부여한다면; 그리하여 무엇보다도 가상이 발생할 것이다.

 

-蟲-

Alles, was durch einen Sinn vorgestellt wird, ist so fern jederzeit Erscheinung, und ein innerer Sinn würde also entweder gar nicht eingeräumt werden müssen, oder das Subjekt, welches der Gegenstand desselben ist, würde durch denselben nur als Erscheinung vorgestellt werden können, nicht wie es von sich selbst urteilen würde, wenn seine Anschauung bloße Selbsttätigkeit, d.i. intellektuell, wäre. Hiebei beruht alle Schwierigkeit nur darauf, wie ein Subjekt sich selbst innerlich anschauen könne; allein diese Schwierigkeit ist jeder Theorie gemein. Das bewußtsein seiner selbst (Apperzeption) ist die einfache Vorstellung des Ich, und, wenn dadurch allein alles Mannigfaltige im Subjekt selbsttätig gegeben wäre, so würde die innere Anschauung intellektuell sein. Im Menschen erfodert dieses Bewußtsein innere Wahrnehmung von dem Mannigfaltigen, was im Subjekte vorher gegeben wird, und die Art, wie dieses ohne Spontaneität im Gemüte gegeben wird, muß, um dieses Unterschiedes willen, Sinnlichkeit heißen. Wenn das Vermögen sich bewüßt zu werden, das, was im Gemüte liegt, aufsuchen (apprehendieren) soll, so muß es dasselbe affizieren, und kann allein auf solche Art eine Anschauung seiner selbst hervorbringen, deren Form aber, die vorher im Gemüte zum Grunde liegt, die Art, wie das Mannigfaltige im Gemüte beisammen ist, in der Vorstellung der Zeit bestimmt; da es denn sich selbst anschauet, nicht wie es sich unmittelbar selbsttäitg vorstellen würde, sondern nach der Art, wie es von innen affiziert wird, folglich wie es sich erscheint. nicht wie es ist.

→ 언제나 현상인 한에서 감관을 통해 표상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 달리, 그것의 직관이 순전히 자발성, 즉 지성적이라면, 전혀 정리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거나, 아니면 대상인 주관을 통하여 단지 현상으로서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모든 모든 어려움은 단지, 어떻게 주관 자체가 내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가, 그것에 기인한다; 오직 이러한 어려움만이 각 이론에 보편적이다.→ 그것 자체의 의식존재(통각)는 나에 속하는 단일한 표상이다. 그리고 만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모든 잡다들이 주관 안에 자발적으로 주어진다면 내적 직관은 지성적일 것이다.→ 인간에 있어서 이러한 의식은 잡다들에 대한 주관 안에서 앞서서 주어지는 내적 지각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자발성 없이 심성 안에 주어지는 그 방식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성이라 불러야 한다.→ 능력 자체가 의식될 때, 그것은, 심성 안에 놓인 것으로, 찾아내야(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능력은 심성을 자극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방식에서만 그것 자체의 직관이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서 심성 안에 기초로 놓이는 직관의 형식은 잡다가 심성 안에 함께하는 방식을 시간의 표상 안에서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곧장 자발적으로 표상되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것과 같은, 그러므로 그것이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그것이 현상하는 것과 같은, 그 방식에 따라서 직관하기 때문이다.

 

 

Alles, was durch einen Sinn vorgestellt wird, ist so fern jederzeit Erscheinung, und ein innerer Sinn würde also entweder gar nicht eingeräumt werden müssen, oder das Subjekt, welches der Gegenstand desselben ist, würde durch denselben nur als Erscheinung vorgestellt werden können, nicht wie es von sich selbst urteilen würde, wenn seine Anschauung bloße Selbsttätigkeit, d.i. intellektuell, wäre.

모든 것은, 감관을 통해 표상되는, 언제나 현상인 한에서, 전혀 정리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거나, 아니면 주관, 그것의 대상인, 그것을 통하여 단지 현상으로서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할 것과 달리, 그것의 직관이 순전히 자발성, 즉 지성적이라면.

→ 언제나 현상인 한에서 감관을 통해 표상되는 모든 것은, 그 자체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 달리, 그것의 직관이 순전히 자발성, 즉 지성적이라면, 전혀 정리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거나, 아니면 대상인 주관을 통하여 단지 현상으로서만 표상될 수 있을 것이다.

Hiebei beruht alle Schwierigkeit nur darauf, wie ein Subjekt sich selbst innerlich anschauen könne;

이와 관련하여 모든 모든 어려움은 단지 그에 기인한다, 어떻게 주관 자체가 내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가;

allein diese Schwierigkeit ist jeder Theorie gemein.

오직 이러한 어려움만이 각 이론에 보편적이다.

→ 이와 관련하여 모든 모든 어려움은 단지, 어떻게 주관 자체가 내적으로 직관할 수 있는가, 그것에 기인한다; 오직 이러한 어려움만이 각 이론에 보편적이다.

Das Bewußtsein seiner selbst (Apperzeption) ist die einfache Vorstellung des Ich, und, wenn dadurch allein alles Mannigfaltige im Subjekt selbsttätig gegeben wäre, so würde die innere Anschauung intellektuell sein.

그것 자체의 의식존재(통각)는 나에 속하는 단일한 표상이다, 그리고, 만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모든 잡다들이 주관 안에 자발적으로 주어진다면, 내적 직관은 지성적일 것이다.

→ 그것 자체의 의식존재(통각)는 나에 속하는 단일한 표상이다. 그리고 만일 오직 그를 통해서만 모든 잡다들이 주관 안에 자발적으로 주어진다면 내적 직관은 지성적일 것이다.

Im Menschen erfodert dieses Bewußtsein innere Wahrnehmung von dem Mannigfaltigen, was im Subjekte vorher gegeben wird, und die Art, wie dieses ohne Spontaneität im Gemüte gegeben wird, muß, um dieses Unterschiedes willen, Sinnlichkeit heißen.

인간에 있어서 이러한 의식은 잡다들에 대한 내적 지각을 요구한다, 주관 안에서 앞서서 주어지는 것, 그리고 그 방식을, 어떻게 이러한 것이 자발성 없이 심성 안에 주어지는지, 이러한 구분을 하기 위해서, 감성이라 불러야 한다.

→ 인간에 있어서 이러한 의식은 잡다들에 대한 주관 안에서 앞서서 주어지는 내적 지각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자발성 없이 심성 안에 주어지는 그 방식을 구분하기 위해서 감성이라 불러야 한다.

Wenn das Vermögen sich bewüßt zu werden, das, was im Gemüte liegt, aufsuchen (apprehendieren) soll, so muß es dasselbe affizieren, und kann allein auf solche Art eine Anschauung seiner selbst hervorbringen, deren Form aber, die vorher im Gemüte zum Grunde liegt, die Art, wie das Mannigfaltige im Gemüte beisammen ist, in der Vorstellung der Zeit bestimmt;

능력 자체가 의식될 때, 그것은, 심성 안에 놓인, 찾아내야(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그것은 그것을 자극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방식에서만 그것 자체의 직관이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의 형식은, 그것이 앞서서 심성 안에 기초로 놓이는, 방식을, 어떻게 잡다가 심성 안에 함께하는지, 시간의 표상 안에서 규정한다.

da es denn sich selbst anschauet, nicht wie es sich unmittelbar selbsttäitg vorstellen würde, sondern nach der Art, wie es von innen affiziert wird, folglich wie es sich erscheint. nicht wie es ist.

왜냐하면 그 자체가 직관하기 때문이다, 곧장 자발적으로 표상되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방식에 따라서,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것과 같은, 그러므로 그것이 현상하는 것과 같은. 그것이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 능력 자체가 의식될 때, 그것은, 심성 안에 놓인 것으로, 찾아내야(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능력은 심성을 자극해야만 한다. 그리고 오로지 그러한 방식에서만 그것 자체의 직관이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서 심성 안에 기초로 놓이는 직관의 형식은 잡다가 심성 안에 함께하는 방식을 시간의 표상 안에서 규정한다. 왜냐하면 그 자체가, 곧장 자발적으로 표상되는 것처럼이 아니라, 오히려 내부로부터 촉발되는 것과 같은, 그러므로 그것이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그것이 현상하는 것과 같은, 그 방식에 따라서 직관하기 때문이다.

 

-蟲-

Ⅱ. Zur Bestätigung dieser Theorie von der Idealität des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Sinnes, mithin aller Objekte der Sinne, als bloßer Erscheinungen, kann vorzüglich die Bemerkung dienen: daß alles, was in unserem Erkenntnis zur Anschauung gehört, (also Gefühl der Lust und Unlust, und den Willen, die gar nicht Erkenntnisse sind, ausgenomme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se enthalte, der Örter in einer Anschauung (Ausdehnung), Veränderung der Örter (Bewegung), und Gesetze, nach denen diese Veränderung bestimmt wird (bewegende Kräfte). Was aber in dem Orte gegenwärtig sei, oder was es außer der Ortveränderung in den Dingen selbst wirke, wird dadurch nicht gegeben. Nun wird durch bloße Verhältnisse doch nicht eine Sache an sich erkannt: also ist wohl zu urteilen, daß, da uns durch den äußeren Sin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vorstellungen gegeben werden, dieser auch nur das Verhältnis eines Gegenstandes auf das Subjekt in seiner Vorstellung enthalten könne, und nicht das Innere, was Objekte an sich zukommt. Mit der inneren Anschauung ist es eben so bewandt. Nicht allein, daß darin die Vorstellungen äußerer Sinne den eigentlichen Stoff ausmachen, womit wir unser Gemüt besetzen, sondern die Zeit, in die wir diese Vorstellungen setzen, die selbst dem Bewußtsein derselben in der Erfahrung vorhergeht, und als formale Bedingung der Art, wie wir sie im Gemüte setzen, zum Grunde liegt, enthält schon Verhältnisse des Nacheinander-, des Zugleichseins, und dessen, was mit dem Nacheinandersein zugleich ist (des Beharrlichen). Nun ist das, was, als Vorstellung, vor aller Handlung irgend etwas zu denken, vorhergehen kann, die Anschauung, und, wenn sie nichts als Verhältnisse enthäl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nämlich dieses Setzen seiner Vorstellung, mithin durch sich selbst affiziert wird, d.i. ein innerer Sinn seiner Form nach.

→ Ⅱ. 외감과 마찬가지로 내감의 이념성에 대한 이러한 이론의 증명으로, 따라서 감관의 모든 객체는, 순전한 현상들로서, 다음과 같은 관찰을 주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 안에서 직관에 속하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인식들은 아닌 쾌와 불쾌의 감정, 그리고 의지를 제외하고,) 직관 안에서 장소 (넓이), 장소의 변화 (운동), 그리고, 그것들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규정되는 (움직이는 힘) 법칙들의 순전한 관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장소 안에서 그 자리에 있을 어떤 것, 또는 장소변화의 외부에서 사물들 자체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은,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이제 순전한 관계들을 통하여 또한 사태 자체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외감을 통하여 순전한 관계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또한 단지 주관에 대한 대상의 관계만을 그것의 표상 안에 포함할 수 있다고, 그리고 객관 자체에 부합하는 내적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내적 직관도 바로 그러하다.→ 그 안에서 외감의 표상들이, 우리가 우리의 심성을 채우는 고유한 질료를 형성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우리가 이러한 표상들을 놓는, 그 자체가 그 표상들의 의식존재에 경험 안에서 선행하는, 그러한 시간이, 우리가 그것들을 심성 안에 놓는 방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기초에 놓인다. 시간은 이미 계기존재, 동시존재, 그리고 계기존재를 가지고 동시에 있는 것(지속하는 것의)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 이제 표상으로서 그것은 좌우간 사유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행위에 앞서, 직관은 선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직관의 형식은, 그것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심성 안에 놓이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심성이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즉 그것의 표상의 놓음을 통하여, 그에 따라 그 자체를 통하여 촉발되는,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의 내감에 따르는 그 방식 외에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없을 것이다.

 

 

Ⅱ. Zur Bestätigung dieser Theorie von der Idealität des äußeren sowohl als inneren Sinnes, mithin aller Objekte der Sinne, als bloßer Erscheinungen, kann vorzüglich die Bemerkung dienen:

Ⅱ. 외감과 마찬가지로 내감의 이념성에 대한 이러한 이론의 증명으로, 따라서 감관의 모든 객체는, 순전한 현상들로서, 관찰을 주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daß alles, was in unserem Erkenntnis zur Anschauung gehört, (also Gefühl der Lust und Unlust, und den Willen, die gar nicht Erkenntnisse sind, ausgenomme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se enthalte, der Örter in einer Anschauung (Ausdehnung), Veränderung der Örter (Bewegung), und Gesetze, nach denen diese Veränderung bestimmt wird (bewegende Kräfte).

모든 것은, 우리의 인식 안에서 직관에 속하는, (그러므로 쾌와 불쾌의 감정, 그리고 의지를, 그것들이 인식들은 전혀 아닌, 제외하고,) 순전한 관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직관 안에서 장소 (넓이), 장소의 변화 (운동), 그리고 법칙들, 그것들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규정되는 (움직이는 힘).

→ Ⅱ. 외감과 마찬가지로 내감의 이념성에 대한 이러한 이론의 증명으로, 따라서 감관의 모든 객체는, 순전한 현상들로서, 다음과 같은 관찰을 주요하게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인식 안에서 직관에 속하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전혀 인식들은 아닌 쾌와 불쾌의 감정, 그리고 의지를 제외하고,) 직관 안에서 장소 (넓이), 장소의 변화 (운동), 그리고, 그것들에 따라 이러한 변화가 규정되는 (움직이는 힘) 법칙들의 순전한 관계들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

Was aber in dem Orte gegenwärtig sei, oder was es außer der Ortveränderung in den Dingen selbst wirke, wird dadurch nicht gegeben.

그러나 장소 안에서 그 자리에 있을 어떤 것, 또는 장소변화의 외부에서 사물들 자체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은,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 그러나 장소 안에서 그 자리에 있을 어떤 것, 또는 장소변화의 외부에서 사물들 자체 안에서 작용하는 어떤 것은, 그것을 통하여 주어지지 않는다.

Nun wird durch bloße Verhältnisse doch nicht eine Sache an sich erkannt:

이제 순전한 관계들을 통하여 또한 사태 자체도 인식되지 않는다:

also ist wohl zu urteilen, daß, da uns durch den äußeren Sinn nichts als bloße Verhältnisvorstellungen gegeben werden, dieser auch nur das Verhältnis eines Gegenstandes auf das Subjekt in seiner Vorstellung enthalten könne, und nicht das Innere, was Objekte an sich zukommt.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판단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외감을 통하여 순전한 관계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또한 단지 주관에 대한 대상의 관계만을 그것의 표상 안에 포함할 수 있다고, 그리고 내적인 것은, 객관 자체에 부합하는, 아니라고.

→ 이제 순전한 관계들을 통하여 또한 사태 자체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외감을 통하여 순전한 관계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 또한 단지 주관에 대한 대상의 관계만을 그것의 표상 안에 포함할 수 있다고, 그리고 객관 자체에 부합하는 내적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Mit der inneren Anschauung ist es eben so bewandt.

내적 직관도 바로 그러하다.

→ 내적 직관도 바로 그러하다.

Nicht allein, daß darin die Vorstellungen äußerer Sinne den eigentlichen Stoff ausmachen, womit wir unser Gemüt besetzen, sondern die Zeit, in die wir diese Vorstellungen setzen, die selbst dem Bewußtsein derselben in der Erfahrung vorhergeht, und als formale Bedingung der Art, wie wir sie im Gemüte setzen, zum Grunde liegt, enthält schon Verhältnisse des Nacheinander-, des Zugleichseins, und dessen, was mit dem Nacheinandersein zugleich ist (des Beharrlichen).

그 안에서 외감의 표상들이 고유한 질료를 형성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심성을 채우는, 오히려 시간이, 그 안에 우리가 이러한 표상들을 놓는, 그 자체가 그 표상들의 의식존재에 경험 안에서 선행하는, 그리고 방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우리가 그것들을 심성 안에 놓는, 기초에 놓인다, 이미 계기존재, 동시존재, 그리고 그것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계기존재를 가지고 동시에 있는 것의 (지속하는 것의).

→ 그 안에서 외감의 표상들이, 우리가 우리의 심성을 채우는 고유한 질료를 형성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우리가 이러한 표상들을 놓는, 그 자체가 그 표상들의 의식존재에 경험 안에서 선행하는, 그러한 시간이, 우리가 그것들을 심성 안에 놓는 방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기초에 놓인다. 시간은 이미 계기존재, 동시존재, 그리고 계기존재를 가지고 동시에 있는 것(지속하는 것의)의 관계들을 포함한다.

Nun ist das, was, als Vorstellung, vor aller Handlung irgend etwas zu denken, vorhergehen kann, die Anschauung, und, wenn sie nichts als Verhältnisse enthäl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die Form der Anschauung, welche, da sie nichts vorstellt, außer so fern etwas im Gemüte gesetzt wird, nichts anders sein kann, als die Art, wie das Gemüt durch eigene Tätigkeit, nämlich dieses Setzen seiner Vorstellung, mithin durch sich selbst affiziert wird, d.i. ein innerer Sinn seiner Form nach.

이제 그것은, 표상으로서, 좌우간 사유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행위에 앞서, 선행할 수 있다, 직관은, 그리고, 그것이 관계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직관의 형식은, 그것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심성 안에 놓이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 방식 외에, 심성이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즉 그것의 표상의 놓음을 통하여, 그에 따라 그 자체를 통하여 촉발된다,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의 내감에 따라.

→ 이제 표상으로서 그것은 좌우간 사유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든 행위에 앞서, 직관은 선행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관계들 외에 다른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는다면, 직관의 형식은, 그것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 심성 안에 놓이는 한에서가 아니라면, 심성이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즉 그것의 표상의 놓음을 통하여, 그에 따라 그 자체를 통하여 촉발되는, 다시 말해 그것의 형식의 내감에 따르는 그 방식 외에 다른 그 무엇일 수도 없을 것이다.

 

-蟲-

Wäre das letzte, so könnte niemals ein allgemein gültiger, noch weniger ein apodiktischer Satz daraus werden: denn Erfahrung kann dergleichen niemals liefern. Ihr müßt also euren Gegenstand a priori in der Anschauung geben, und auf diesen euren synthetischen Satz gründen. Läge nun in euch nicht ein Vermögen, a priori anzuschauen; wäre diese subjektive Bedingung der Form nach nicht zugleich die allgemeine Bedingung a priori, unter der allein das Objekt dieser (äußeren) Anschauung selbst möglich ist; wäre der Gegenstand (der Triangel) etwas an sich selbst ohne Beziehung auf euer Subjekt: wie könntet ihr sagen, daß, was in euren subjektiven Bedingungen einen Triangel zu konstruieren notwendig liegt, auch dem Triangel an sich selbst notwendig zukommen müsse? denn ihr könntet doch zu euren Begriffen (von drei Linien) nichts Neues (die Figur) hinzufügen, welches darum notwendig an dem Gegenstande angetroffen werden müßte, da dieser vor eurer Erkenntnis und nicht durch dieselbe gegeben ist. Wäre also nicht der Raum (und so auch die Zeit) eine bloße Form eurer Anschauung, welche Bedingungen a priori enthält, unter denen allein Dinge für euch äußere Gegenstände sein können, die ohne diese subjektive Bedingungen an sich nichts sind; so könntet ihr a priori ganz und gar nichts über äußere Objekte synthetisch ausmachen. Es ist also ungezweifelt gewiß, und nicht bloß möglich, oder auch wahrscheinlich, daß Raum und Zeit, als die notwendigen Bedingungen aller (äußern und innern) Erfahrung, bloß subjektive Bedingungen aller unsrer Anschauung sind, im Verhältnis auf welche daher alle Gegenstände bloße Erscheinungen und nicht für sich in dieser Art gegebene Dinge sind, von denen sich auch um deswillen, was die Form derselben betrifft, vieles a priori sagen läßt, niemals aber das Mindeste von dem Dinge an sich selbst, das dies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en mag.

→ 만약 후자라면, 그로부터 그 어떤 보편적으로 정당한, 더욱이 명증적인 명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전혀 이끌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 안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고, 이것에 당신들의 종합적 명제들이 근거할 것이다.→ 이제 당신들 안에 선험적으로 직관하는 능력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주관적 조건은 동시에 그 아래에서 이러한 (외적) 직관 자체의 객체만이 가능한 보편적 선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대상(삼각형)은 당신들의 주관과 관련함이 없이 어떤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당신들은 어떻게, 당신들의 주관적 조건 안에 삼각형을 작도함이 필연적으로 놓인다는 것, 또한 삼각형 자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당신들은 또한 당신들의 개념(세 직선에 대한)에 대해, 그것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대상에 관련되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형)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들의 인식 이전에 그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간(그리고 또 역시 시간)이 당신들의 직관의, 그것들 아래에서 사물만이 당신들에게 이러한 주관적 조건들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외적 대상들일 수 있는 선험적 조건들을 포함하는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면; 당신들은 전적으로 선험적으로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외적 객체에 대해 종합적으로 형성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이 모든 (외적 그리고 내적) 경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우리의 모든 직관의 순전히 주관적인 조건들이라는 것은 순전히 가능한 것만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혹은 개연적이지도 않고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관계 속에서 그런 이유로 모든 대상들은 순전한 형상들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 자체에 주어진 사물들은 아니다. 그 사물들에 대해 그것이 또한 그 때문에, 그것의 형식에 관한 것은,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말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현상들에 기초로 놓일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것조차 전혀 말하도록 하지 않는다.

 

 

Wäre das letzte, so könnte niemals ein allgemein gültiger, noch weniger ein apodiktischer Satz daraus werden:

만약 후자라면, 그로부터 그 어떤 보편적으로 정당한, 더욱이 명증적인 명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

denn Erfahrung kann dergleichen niemals liefern.

왜냐하면 경험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전혀 이끌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 만약 후자라면, 그로부터 그 어떤 보편적으로 정당한, 더욱이 명증적인 명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은 그와 같은 것들을 전혀 이끌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Ihr müßt also euren Gegenstand a priori in der Anschauung geben, und auf diesen euren synthetischen Satz gründen.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 안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고, 이것에 당신들의 종합적 명제들이 근거할 것이다.

→ 그러므로 당신들은 당신들의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 안에 부여해야만 할 것이고, 이것에 당신들의 종합적 명제들이 근거할 것이다.

Läge nun in euch nicht ein Vermögen, a priori anzuschauen;

이제 당신들 안에 능력은 없을 것이다, 선험적으로 직관하는;

wäre diese subjektive Bedingung der Form nach nicht zugleich die allgemeine Bedingung a priori, unter der allein das Objekt dieser (äußeren) Anschauung selbst möglich ist;

이러한 형식의 주관적 조건은 동시에 보편적 선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그 아래에서 이러한 (외적) 직관 자체의 객체만이 가능한;

wäre der Gegenstand (der Triangel) etwas an sich selbst ohne Beziehung auf euer Subjekt:

대상(삼각형)은 당신들의 주관과 관련함이 없이 어떤 것 그 자체일 것이다:

wie könntet ihr sagen, daß, was in euren subjektiven Bedingungen einen Triangel zu konstruieren notwendig liegt, auch dem Triangel an sich selbst notwendig zukommen müsse?

당신들은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신들의 주관적 조건 안에 삼각형을 작도함이 필연적으로 놓인다는 것, 또한 삼각형 자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 이제 당신들 안에 선험적으로 직관하는 능력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주관적 조건은 동시에 그 아래에서 이러한 (외적) 직관 자체의 객체만이 가능한 보편적 선험적 조건은 아닐 것이다; 대상(삼각형)은 당신들의 주관과 관련함이 없이 어떤 것 그 자체일 것이다: 당신들은 어떻게, 당신들의 주관적 조건 안에 삼각형을 작도함이 필연적으로 놓인다는 것, 또한 삼각형 자체에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denn ihr könntet doch zu euren Begriffen (von drei Linien) nichts Neues (die Figur) hinzufügen, welches darum notwendig an dem Gegenstande angetroffen werden müßte, da dieser vor eurer Erkenntnis und nicht durch dieselbe gegeben ist.

왜냐하면 당신들은 또한 당신들의 개념(세 직선에 대한)에 대해 그 어떤 새로운 것(도형)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대상에 관련되어야만 하는, 이것은 당신들의 인식 이전에 그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당신들은 또한 당신들의 개념(세 직선에 대한)에 대해, 그것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대상에 관련되어야만 하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형)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들의 인식 이전에 그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어지기 때문이다.

Wäre also nicht der Raum (und so auch die Zeit) eine bloße Form eurer Anschauung, welche Bedingungen a priori enthält, unter denen allein Dinge für euch äußere Gegenstände sein können, die ohne diese subjektive Bedingungen an sich nichts sind;

그러므로 공간(그리고 또 역시 시간)이 당신들의 직관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면, 선험적 조건들을 포함하는, 그것들 아래에서 사물만이 당신들에게 외적 대상들일 수 있는, 그 대상들이 이러한 주관적 조건들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so könntet ihr a priori ganz und gar nichts über äußere Objekte synthetisch ausmachen.

그래서 당신들은 전적으로 선험적으로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외적 객체에 대해 종합적으로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공간(그리고 또 역시 시간)이 당신들의 직관의, 그것들 아래에서 사물만이 당신들에게 이러한 주관적 조건들에 있어서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외적 대상들일 수 있는 선험적 조건들을 포함하는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면; 당신들은 전적으로 선험적으로 그리고 전혀 아무것도 외적 객체에 대해 종합적으로 형성할 수 없다.

Es ist also ungezweifelt gewiß, und nicht bloß möglich, oder auch wahrscheinlich, daß Raum und Zeit, als die notwendigen Bedingungen aller (äußern und innern) Erfahrung, bloß subjektive Bedingungen aller unsrer Anschauung sind, im Verhältnis auf welche daher alle Gegenstände bloße Erscheinungen und nicht für sich in dieser Art gegebene Dinge sind, von denen sich auch um deswillen, was die Form derselben betrifft, vieles a priori sagen läßt, niemals aber das Mindeste von dem Dinge an sich selbst, das diesen Erscheinungen zum Grunde liegen mag.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그리고 순전히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혹은 개연적이지도 않다, 공간과 시간이, 모든 (외적 그리고 내적) 경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우리의 모든 직관의 순전히 주관적인 조건들이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 그런 이유로 모든 대상들은 순전한 형상들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 자체에 주어진 사물들은 아니다, 그 사물들에 대해 그것이 또한 그 때문에, 그것의 형식에 관한 것은,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말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것조차 전혀, 그것이 이러한 현상들에 기초로 놓일.

→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이 모든 (외적 그리고 내적) 경험의 필연적인 조건으로서, 우리의 모든 직관의 순전히 주관적인 조건들이라는 것은 순전히 가능한 것만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혹은 개연적이지도 않고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다. 관계 속에서 그런 이유로 모든 대상들은 순전한 형상들이고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 자체에 주어진 사물들은 아니다. 그 사물들에 대해 그것이 또한 그 때문에, 그것의 형식에 관한 것은, 많은 것들을 선험적으로 말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러한 현상들에 기초로 놓일 사물 그 자체에 대한 최소한의 것조차 전혀 말하도록 하지 않는다.

 

-蟲-

Es ist kein anderer Weg, als durch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beide aber, als solche, die entweder a priori oder a posteriori gegeben sind. Die letztern, nämlich empirische Begriffe, imgleichen das, worauf sie sich gründen, die empirische Anschauung, können keinen synthetischen Satz geben, als nur einen solchen, der auch bloß empirisch d.i. ein Erfahrungssatz ist, mithin niemals Notwendigkeit und absolute Allgemeinheit enthalten kann, dergleichen doch das Charakteristische aller Sätze der Geometrie ist. Was aber das erstere und einzige Mittel sein würde, nämlich durch bloße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a priori, zu dergleichen Erkenntnissen zu gelangen, so ist klar, daß aus bloßen Begriffen gar keine synthetische Erkenntnis, sondern lediglich analytische erlangt werden kann. Nehmet nur den Satz: daß durch zwei gerade Linien sich gar kein Raum einschließen lasse, mithin k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ihn aus dem Begriff von geraden Linien und der Zahl zwei abzuleiten; oder auch, daß aus dreien geraden Linien 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es eben so bloß aus diesen Begriffen. Alle eure Bemühung ist vergeblich, und ihr seht euch genötiget, zur Anschauung eure Zuflucht zu nehmen, wie es die Geometrie auch jederzeit tut. Ihr gebt euch also ein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von welcher Art aber ist diese, ist es eine reine Anschauung a priori oder eine empirishce?

→ 그것은 개념들을 통해서나 또는 직관들을 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런 방식도 아니다; 그러나 둘 모두 선험적으로나 혹은 후험적으로 둘 중 하나인 그러한 것으로서만 주어진다.→ 후자, 즉 경험적 개념들은 그 개념들이 근거하는 경험적 직관들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의 모든 명제들의 성격이 또한 그러한 것과 같은 필연성이나 절대적 보편성을 전혀 포함할 수 없는 그러한 오로지 순전히 감각적인, 즉 경험명제 외에는 어떠한 경험명제도 줄 수 없다.→ 그러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 될 것, 즉 순전한 개념들을 통해서나 선험적인 직관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인식들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순전히 개념들만으로부터는 전혀 아무런 종합적 인식들도 획득될 수 없고, 오히려 다만 분석적인 명제들만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저: 두 직선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공간도 둘러싸도록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어떠한 형태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명제를 취하자. 그리고 직선과 2라는 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하고자 시도해 보자; 아니면, 세 직선으로부터 하나의 형태가 가능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찬가지로 순전히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시도해 보자.→ 당신들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당신들은 기하학이 또한 매번 그러한 것처럼 그대들의 도피처로 직관을 취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당신들은 그러므로 직관 안에서 대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에 대하여 이러한 것이, 그것이 순수한 선험적 직관이거나 경험적 직관인가?

 

 

Es ist kein anderer Weg, als durch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그것은 다른 아무런 방식도 아니다, 개념들을 통해서나 또는 직관들을 통하는 것 이외의;

beide aber, als solche, die entweder a priori oder a posteriori gegeben sind.

그러나 둘 모두, 그러한 것으로서, 선험적으로나 혹은 후험적으로 둘 중 하나로만 주어진다.

→ 그것은 개념들을 통해서나 또는 직관들을 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런 방식도 아니다; 그러나 둘 모두 선험적으로나 혹은 후험적으로 둘 중 하나인 그러한 것으로서만 주어진다.

Die letztern, nämlich empirische Begriffe, ingleichen das, worauf sie sich gründen, die empirische Anschauung, können keinen synthetischen Satz geben, als nur einen solchen, der auch bloß empirisch d.i. ein Erfahrungssatz ist, mithin niemals Notwendigkeit und absolute Allgemeinheit enthalten kann, dergleichen doch das Charakteristische aller Sätze der Geometrie ist.

후자, 즉 경험적 개념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그 개념들이 근거하는, 경험적 직관들, 어떠한 경험적 명제도 줄 수 없다, 오로지 그러한 것 외에는, 또한 순전히 감각적, 즉 경험명제이고, 그에 따라 전혀 필연성이나 절대적 보편성을 포함할 수 없다, 기하학의 모든 명제들의 성격이 또한 그러하듯이.

→ 후자, 즉 경험적 개념들은 그 개념들이 근거하는 경험적 직관들과 마찬가지로, 기하학의 모든 명제들의 성격이 또한 그러한 것과 같은 필연성이나 절대적 보편성을 전혀 포함할 수 없는 그러한 오로지 순전히 감각적인, 즉 경험명제 외에는 어떠한 경험명제도 줄 수 없다.

Was aber das erstere und einzige Mittel sein würde, nämlich durch bloße Begriffe oder durch Anschauungen a priori, zu dergleichen Erkenntnissen zu gelangen, so ist klar, daß aus bloßen Begriffen gar keine synthetische Erkenntnis, sondern lediglich analytische erlangt werden kann.

그러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 될 것, 즉 순전한 개념들을 통해서나 선험적인 직관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인식들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분명하다, 순전히 개념들만으로부터는 전혀 아무런 종합적 인식들도 획득될 수 없고, 오히려 다만 분석적인 명제들만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은.

→ 그러나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 될 것, 즉 순전한 개념들을 통해서나 선험적인 직관들을 통해서, 그와 같은 인식들에 도달하는 것은, 그래서, 순전히 개념들만으로부터는 전혀 아무런 종합적 인식들도 획득될 수 없고, 오히려 다만 분석적인 명제들만이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Nehmet nur den Satz: daß durch zwei gerade Linien sich gar kein Raum einschließen lasse, mithin k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ihn aus dem Begriff von geraden Linien und der Zahl zwei abzuleiten;

그저 명제를 취하자: 두 직선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공간도 둘러싸도록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어떠한 형태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는, 그리고 직선과 2라는 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하고자 시도해 보자;

oder auch, daß aus dreien geraden Linien eine Figur möglich sei, und versucht es eben so bloß aus diesen Begriffen.

아니면, 세 직선으로부터 하나의 형태가 가능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찬가지로 순전히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시도해 보자.

→ 그저: 두 직선을 통해서는 전혀 어떠한 공간도 둘러싸도록 하지 못하고, 그에 따라 어떠한 형태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는 명제를 취하자. 그리고 직선과 2라는 수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그것을 연역하고자 시도해 보자; 아니면, 세 직선으로부터 하나의 형태가 가능하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마찬가지로 순전히 이러한 개념들로부터 시도해 보자.

Alle eure Bemühung ist vergeblich, und ihr seht euch genötiget, zur Anschauung eure Zuflucht zu nehmen, wie es die Geometrie auch jederzeit tut.

당신들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당신들은 그대들의 도피처로 직관을 취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기하학이 또한 매번 그러한 것처럼.

→ 당신들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당신들은 기하학이 또한 매번 그러한 것처럼 그대들의 도피처로 직관을 취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Ihr gebt euch also einen Gegenstand in der Anschauung;

당신들은 그러므로 직관 안에서 대상을 갖는다;

von welcher Art aber ist diese, ist es eine reine Anschauung a priori oder eine empirishce?

그러나 그러한 방식에 대하여 이러한 것이, 그것이 순수한 선험적 직관이거나 경험적 직관인가?

→ 당신들은 그러므로 직관 안에서 대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에 대하여 이러한 것이, 그것이 순수한 선험적 직관이거나 경험적 직관인가?

 

-蟲-

Nehmen wir aber dieses Empirische überhaupt, und fragen, ohne uns an die Einstimmung desselben mit jedem Menschensinne zu kehren, ob auch dieses einen Gegenstand an sich selbst (nicht in Regentropfen, denn die sind denn schon, als Erscheinungen, empirische Objekte,) vorstelle, so ist die Frage von der Beziehung der Vorstellung auf den Gegenstand transzendental, und nicht allein diese Tropfen sind bloße Erscheinungen, sondern selbst ihre runde Gestalt, ja so gar der Raum, in welchen sie fallen, sind nichts an sich selbst, sondern bloße Modifikationen, oder Grundlagen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das transzendentale Objekt aber bleibt uns unbekannt.

→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인 것 전반을 취하고, 우리에게 각각의 인간들의 감관과 그것의 일치를 돌아봄 없이, 비록 이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를 (빗방울들 속에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로 이미, 현상들로서, 감각적 객체들이기 때문에,) 표상할지 묻는다면,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초월적이고, 이러한 물방울들만이 순전한 현상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둥근 모양 자체도, 그렇게 더욱이 그 안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공간도, 그 자체인 어떤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저 변화들, 혹은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원료이고, 그러나 그 초월적 객체는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Die zweite wichtige Angelegenheit unser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ist, daß sie nicht bloß als scheinbare Hypothese einige Gunst erwerbe, sondern so gewiß und ungezweifelt sei, als jemals von einer Theorie gefordert werden kann, die zum Organon dienen soll. Um diese Gewißheit völlig einleuchtend zu machen, wollen wir irgend einen Fall wählen, woran dessen Gültigkeit augenscheinlich werden und zu mehrer Klarheit dessen, was § 3. angeführt worden, dienen kann.

→ 우리의 초월론적 감성학의 두번째 중대한 관심사는, 그것이 순전히 가상의 가정으로서 일치된 허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이론에 대하여 요구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하는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확실성을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한 상황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 상황에서 그것의 정당성이 명백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의 더 많은 명확함을 위해 § 3.에서 제시된 것을 사용할 수 있다.

 

Setzet demnach, Raum und Zeit seien an sich selbst objektiv und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Dinge an sich selbst, so zeigt sich erstlich: daß von beiden a priori apodiktische und synthetische Sätze in großer Zahl vornehmlich vom Raum vorkommen, welchen wir darum vorzüglich hier zum Beispiel untersuchen wollen. Da die Sätze der Geometrie synthetisch a priori und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erkannt werden, so frage ich: woher nehmt ihr dergleichen Sätze, und worauf stützt sich unser Verstand, um zu dergleichen schlechthin notwendigen und allgemein gültigen Wahrheiten zu gelangen?

→ 그런 이유에서, 공간과 시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사물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리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최초로 드러난다: 그 양자로부터, 우리가 그에 대해 특히 여기에서 예시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선험적으로 자명하고 종합적인 명제들이 엄청난 수에서 특히 공간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에서 기하학의 명제들은 선험적으로 종합적이며 자명한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당신들은, 그와 같은 전적으로 필연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실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디에서 그와 같은 명제들을 취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성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Nehmen wir aber dieses Empirische überhaupt, und fragen, ohne uns an die Einstimmung desselben mit jedem Menschensinne zu kehren, ob auch dieses einen Gegenstand an sich selbst (nicht in Regentropfen, denn die sind denn schon, als Erscheinungen, empirische Objekte,) vorstelle, so ist die Frage von der Beziehung der Vorstellung auf den Gegenstand transzendental, und nicht allein diese Tropfen sind bloße Erscheinungen, sondern selbst ihre runde Gestalt, ja so gar der Raum, in welchen sie fallen, sind nichts an sich selbst, sondern bloße Modifikationen, oder Grundlagen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das transzendentale Objekt aber bleibt uns unbekannt.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인 것 전반을 취하고, 묻는다면, 우리에게 각각의 인간들의 감관과 그것의 일치를 돌아봄 없이, 비록 이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를 (빗방울들 속에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로 이미, 현상들로서, 감각적 객체들이기 때문에,) 표상할지라도,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초월적이고, 이러한 물방울들만이 순전한 현상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둥근 모양 자체도, 그렇게 더욱이 공간도, 그 안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그 자체인 어떤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저 변화들, 혹은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원료이고, 그러나 그 초월적 객체는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감각적인 것 전반을 취하고, 우리에게 각각의 인간들의 감관과 그것의 일치를 돌아봄 없이, 비록 이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를 (빗방울들 속에서가 아니라,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로 이미, 현상들로서, 감각적 객체들이기 때문에,) 표상할지 묻는다면, 대상에 대한 표상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초월적이고, 이러한 물방울들만이 순전한 현상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둥근 모양 자체도, 그렇게 더욱이 그 안에서 빗방울들이 떨어지는 공간도, 그 자체인 어떤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저 변화들, 혹은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원료이고, 그러나 그 초월적 객체는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Die zweite wichtige Angelegenheit unser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ist, daß sie nicht bloß als scheinbare Hypothese einige Gunst erwerbe, sondern so gewiß und ungezweifelt sei, als jemals von einer Theorie gefordert werden kann, die zum Organon dienen soll.

우리의 초월론적 감성학의 두번째 중대한 관심사는, 그것이 순전히 가상의 가정으로서 일치된 허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리라는 것, 일찍이 이론에 대하여 요구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하는.

→ 우리의 초월론적 감성학의 두번째 중대한 관심사는, 그것이 순전히 가상의 가정으로서 일치된 허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찍이 이론에 대하여 요구될 수 있는 것으로서, 도구로서 사용되어야 하는 매우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것이리라는 것이다.

Um diese Gewißheit völlig einleuchtend zu machen, wollen wir irgend einen Fall wählen, woran dessen Gültigkeit augenscheinlich werden und zu mehrer Klarheit dessen, was § 3. angeführt worden, dienen kann.

이러한 확실성을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한 상황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 상황에서 그것의 정당성이 명백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의 더 많은 명확함을 위해, § 3.에서 제시된 것을, 사용할 수 있다.

→ 이러한 확실성을 충분히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든 한 상황을 선택하고자 한다. 그 상황에서 그것의 정당성이 명백하게 될 수 있고 그것의 더 많은 명확함을 위해 § 3.에서 제시된 것을 사용할 수 있다.

 

Setzet demnach, Raum und Zeit seien an sich selbst objektiv und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Dinge an sich selbst, so zeigt sich erstlich:

그런 이유에서 가정해 보자, 공간과 시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사물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리라고, 그렇게 최초로 드러난다:

daß von beiden a priori apodiktische und synthetische Sätze in großer Zahl vornehmlich vom Raum vorkommen, welchen wir darum vorzüglich hier zum Beispiel untersuchen wollen.

그 양자로부터 선험적으로 자명하고 종합적인 명제들이 엄청난 수에서 특히 공간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에 대해 특히 여기에서 예시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 그런 이유에서, 공간과 시간이 그 자체로 객관적이고 사물 그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들이리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최초로 드러난다: 그 양자로부터, 우리가 그에 대해 특히 여기에서 예시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선험적으로 자명하고 종합적인 명제들이 엄청난 수에서 특히 공간으로부터 나온다.

Da die Sätze der Geometrie synthetisch a priori und mit apodiktischer Gewißheit erkannt werden, so frage ich:

여기에서 기하학의 명제들은 선험적으로 종합적이며 자명한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묻는다:

woher nehmt ihr dergleichen Sätze, und worauf stützt sich unser Verstand, um zu dergleichen schlechthin notwendigen und allgemein gültigen Wahrheiten zu gelangen?

당신들은 어디에서 그와 같은 명제들을 취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성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그와 같은 전적으로 필연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실들에 도달하기 위해.

→ 여기에서 기하학의 명제들은 선험적으로 종합적이며 자명한 확실성을 가지고 인식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묻는다: 당신들은, 그와 같은 전적으로 필연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사실들에 도달하기 위해 어디에서 그와 같은 명제들을 취하는지, 그리고 우리의 지성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蟲-

WIr unterscheiden sonst wohl unter Erscheinungen, das, was der Anschauung derselben wesentlich anhängt, und für jeden menschlichen Sinn überhaupt gilt, von demjenigen, was derselben nur zufälliger Weise zukommt, indem es nicht auf die Beziehung der Sinnlichkeit überhaupt, sondern nur auf eine besondre Stellung oder Organisation dieses oder jenes Sinnes gültig ist. Und da nennt man die erstere Erekenntnis eine solche, die den Gegenstand an sich selbst vorstellt, die zweite aber nur die Erscheinung desselben. Dieser Unterschied ist aber nur empirisch. Bleibt man dabei stehen, (wie es gemeiniglich geschieht,) und sieht jene empirische Anschauung nicht wiederum (wie es geschehen sollte) als bloße Erscheinung an, so daß darin gar nichts, was irgend eine Sache an sich selbst anginge, anzutreffen ist, so ist unser transzendentaler Unterschied verloren, und wir glauben alsdenn doch, DInge an sich zu erkennen, ob wir es gleich überall (in der Sinnenwelt) selbst bis zu der tiefsten Erforschung ihrer Gegenstände mit nichts, als Erscheinungen, zu tun haben. So werden wir zwar den Regenbogen eine bloße Erscheinung bei einem Sonnregen nennen, diesen Regen aber die Sache an sich selbst, welches auch richtig ist, so fern wir den letztern Begriff nur physisch verstehen, als das, was in der allgemeinen Erfahrung, unter allen verschiedenen Lagen zu den Sinnen, doch in der Anschauung so und nicht anders bestimmt ist.

→ 우리는 보통 현상들 아래에서, 그 현상들의 직관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것을, 그리고 각각의 인간 감각 전반에 대해 유효한 것을, 그 안에서 그것이 감성 전반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이러저러한 감각의 특수한 상태 또는 구성에 대해서만 정당한 그 현상들에 단지 우연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것으로부터, 잘 구분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은 전자의 인식을, 대상 그 자체를 표상하는 그러한 것으로, 그러나 후자는 단지 그 대상의 현상만을 표상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단지 감각적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기에 멈추어 서고, 저런 감각적 직관을 다른 한편 순전한 직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듯이), 그래서 그 안에서, 사태 자체에 관계된 무엇이든 전혀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는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초월론적 구분은 상실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하여 또한,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도 (경험세계 내에서) 그것의 대상들에 대한 가장 깊은 연구에까지 현상 외의 다른 무엇과도 관련하지 않을지라도,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가 무지개를 여우비가 내릴 때의 단순한 현상이라 말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비를 사태 그 자체로도 말한다. 그러한 것이, 우리가 후자의 개념을 오로지 물리적으로만 이해하는 한에서, 보편적 경험 내에서, 모든 상이한 상황들 아래에서 감각들에,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다른 식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는 한에서, 또한 옳다.

 

 

WIr unterscheiden sonst wohl unter Erscheinungen, das, was der Anschauung derselben wesentlich anhängt, und für jeden menschlichen Sinn überhaupt gilt, von demjenigen, was derselben nur zufälliger Weise zukommt, indem es nicht auf die Beziehung der Sinnlichkeit überhaupt, sondern nur auf eine besondre Stellung oder Organisation dieses oder jenes Sinnes gültig ist.

우리는 보통 현상들 아래에서 잘 구분한다, 그것을, 그 현상들의 직관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것을, 그리고 각각의 인간 감각 전반에 대해 유효한 것을, 그것으로부터, 그 현상들에 단지 우연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것으로부터, 그 안에서 그것이 감성 전반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이러저러한 감각의 특수한 상태 또는 구성에 대해서만 정당한.

→ 우리는 보통 현상들 아래에서, 그 현상들의 직관에 본질적으로 부속하는 것을, 그리고 각각의 인간 감각 전반에 대해 유효한 것을, 그 안에서 그것이 감성 전반의 관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이러저러한 감각의 특수한 상태 또는 구성에 대해서만 정당한 그 현상들에 단지 우연한 방식으로 부합하는 것으로부터, 잘 구분한다.

Und da nennt man die erstere Erekenntnis eine solche, die den Gegenstand an sich selbst vorstellt, die zweite aber nur die Erscheinung desselben.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은 전자의 인식을 그러한 것으로 말한다, 대상 그 자체를 표상하는 것으로, 그러나 후자는 단지 그 대상의 현상만을 표상하는 것으로.

→ 그리고 여기에서 사람들은 전자의 인식을, 대상 그 자체를 표상하는 그러한 것으로, 그러나 후자는 단지 그 대상의 현상만을 표상하는 것으로 말한다.

Dieser Unterschied ist aber nur empirisch.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단지 감각적일 뿐이다.

→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단지 감각적일 뿐이다.

Bleibt man dabei stehen, (wie es gemeiniglich geschieht,) und sieht jene empirische Anschauung nicht wiederum (wie es geschehen sollte) als bloße Erscheinung an, so daß darin gar nichts, was irgend eine Sache an sich selbst anginge, anzutreffen ist, so ist unser transzendentaler Unterschied verloren, und wir glauben alsdenn doch, DInge an sich zu erkennen, ob wir es gleich überall (in der Sinnenwelt) selbst bis zu der tiefsten Erforschung ihrer Gegenstände mit nichts, als Erscheinungen, zu tun haben.

사람들은 거기에 멈추어 선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고 저런 감각적 직관을 다른 한편 순전한 직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듯이), 그래서 그 안에서 전혀 아무것도, 사태 자체에 관계된 무엇이든, 마주치지 않는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초월론적 구분은 상실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하여 또한,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을 믿는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도 (경험세계 내에서) 그것의 대상들에 대한 가장 깊은 연구에까지 현상 외의 다른 무엇과도 관련하지 않을지라도.

→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은 거기에 멈추어 서고, 저런 감각적 직관을 다른 한편 순전한 직관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그리해야 하듯이), 그래서 그 안에서, 사태 자체에 관계된 무엇이든 전혀 아무것도 마주치지 않는다고 간주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초월론적 구분은 상실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하여 또한, 비록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서도 (경험세계 내에서) 그것의 대상들에 대한 가장 깊은 연구에까지 현상 외의 다른 무엇과도 관련하지 않을지라도,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한다는 것을 믿는다.

So werden wir zwar den Regenbogen eine bloße Erscheinung bei einem Sonnregen nennen, diesen Regen aber die Sache an sich selbst, welches auch richtig ist, so fern wir den letztern Begriff nur physisch verstehen, als das, was in der allgemeinen Erfahrung, unter allen verschiedenen Lagen zu den Sinnen, doch in der Anschauung so und nicht anders bestimmt ist.

그리하여 우리가 무지개를 여우비가 내릴 때의 단순한 현상이라 말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비를 사태 그 자체로도 말한다, 그러한 것이 또한 옳다, 우리가 후자의 개념을 오로지 물리적으로만 이해하는 한에서, 보편적 경험 내에서, 모든 상이한 상황들 아래에서 감각들에,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다른 식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는 한에서.

→ 그리하여 우리가 무지개를 여우비가 내릴 때의 단순한 현상이라 말하긴 하지만, 그러나 이러한 비를 사태 그 자체로도 말한다. 그러한 것이, 우리가 후자의 개념을 오로지 물리적으로만 이해하는 한에서, 보편적 경험 내에서, 모든 상이한 상황들 아래에서 감각들에, 그럼에도 직관 안에서 다른 식이 아니라 그렇게 규정되는 한에서, 또한 옳다.

 

-蟲-

Dagegen enthält die Vorstellung eines Körpers in der Anschauung gar nichts, was ein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zukommen könnte, sondern bloß die Erscheinung von etwas, und die Art, wie wir dadurch affiziert werden, und diese Rezeptivität unserer Erkenntnisfähigkeit heißt Sinnlichkeit, und bleibt von der Erkenntnis des Gegenstandes an sich selbst, ob man jene (die Erscheinung) gleich bis auf den Grund durchschauen möchte, dennoch himmelweit unterschieden.

그에 반해 물체의 표상은 직관 안에서 아무런 것도 전혀 포함하지 않을 것이다, 대상 그 자체에 수반할 수 있을,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한 순전한 현상만을, 그리고 그 방식을, 우리가 그를 통하여 자극되는,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능력의 이러한 수용성이 감성이라 불리우며, 대상 그 자체의 인식에 대하여 남는다, 사람들이 저것(현상)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이.

→ 그에 반해 물체의 표상은 직관 안에서, 대상 그 자체에 수반할 수 있을 아무런 것도 전혀 포함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어떤 것에 대한 순전한 현상만을, 그리고 우리가 그를 통하여 자극되는 그 방식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능력의 이러한 수용성이 감성이라 불리우며, 사람들이 저것(현상)을 밑바닥까지 꿰뚫어 본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큰 차이가 나는 것이 대상 그 자체의 인식에 대하여 남는다.

 

Die Leibniz-Wolffische Philosophie hat daher allen Untersuchungen über die Natur und den Ursprung unserer Ereknntnisse einen ganz unrechten Gesichtspunkt angewissen, indem sie den Unterschied der SInnlichkeit vom Intellektuellen bloß als logisch betrachtete, da er offenbar transzendental ist, und nicht bloß die Form der Deutlichkeit oder Undeutlichkeit, sondern den Ursprung und den Inhalt derselben betrifft, so daß wir durch die erstere die Beschaffenheit der Dinge an sich selbst nicht bloß undeutlich, sondern gar nicht erkennen, und, so bald wir unsre subjektive Beschaffenheit wegnehmen, das vorgestellte Objekt mit den Eigenschaften, die ihm die sinnliche Anschauung beilegte, überall nirgend anzutreffen ist, noch angetroffen werden kann, indem eben diese subjektive Beschaffenheit die Form desselben, als Erscheinung, bestimmt.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그에 따라 우리 인식들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전적으로 부당한 관점을 지닌다, 그 안에서 그 철학이 지성적인 것에 대한 감성의 차이를 순전히 논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 차이가 명백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명료함이나 불분명함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과 내용에 관계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자를 통하여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을 그저 불분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특성을 제거하자마자, 표상된 객관이 본성들과, 그 본성들이 그 객관에게 감각적 직관을 부가하는, 어디에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고, 마주쳐질 수조차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주관적 특성은 객관의 형식을, 현상으로서, 규정한다.

→ 라이프니츠-볼프 철학은 그에 따라 우리 인식들의 본성과 근원에 대한 모든 연구들에, 그 안에서 그 철학이 지성적인 것에 대한 감성의 차이를 순전히 논리적인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전적으로 부당한 관점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차이가 명백하게 초월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명료함이나 불분명함의 순전한 형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과 내용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전자를 통하여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을 그저 불분명한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주관적 특성을 제거하자마자, 표상된 객관이 그 객관에게 감각적 직관을 부가하는 본성들과 어디에서도 전혀 마주치지 않고, 마주쳐질 수조차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주관적 특성은 객관의 형식을 현상으로서 규정한다.

 

-蟲-

Wenn wir diese unsre Anschauung auch zum höchsten Grade der Deutlichkeit bringen könnten, wo würden wir dadurch der Beschaffeneit der Gegenstände an sich selbst nicht näher kommen. Denn wir würden auf allen Fall doch nur unsre Art der Anschauung d.i. unsere Sinnlichkeit vollständig erkennen, und diese immer nur unter den dem Subjekt ursprünglich anhängenden Bedingungen, von Raum und Zeit; was die Gegenstände an sich selbst sein mögen, würde uns durch die aufgeklärteste Erkenntnis der Erscheinung derselben, die uns allein gegeben ist, doch niemals bekannt werden.

→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인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서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aß daher unsere ganze Sinnlichkeit nichts als die versorrene Vorstellung der Dinge sei, welche lediglich das enthält, was ihnen an sich selbst zukömmt, aber nur unter einer Zusammenhäufung von Merkmalen und Teilvorstellungen, die wir nicht mit Bewußtsein auseinander setzen, ist eine Verfälschung des Begriffs von Sinnlichkeit und von Erscheinung, welche die ganze Lehre derselben unnütz und leer macht. Der Unterschied einer undeutlichen von der deutlichen Vorstellung ist bloß logisch, und betrifft nicht den Inhalt. Ohne Zweifel enthält der Begriff von Recht, dessen sich der gesunde Verstand bedient, eben dasselbe, was die subtileste Spekulation aus ihm entwickeln kann, nur daß im gemeinen und praktischen Gebrauche man sich dieser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in diesem Gedanken, nicht bewußt ist. Darum kann man nicht sagen, daß der gemeine Begriff sinnlich sei, und eine bloße Erscheinung enthalte, denn das Recht kann gar nicht erscheinen, sondern sein Begriff liegt im Verstande, und stellet eine Beschaffenheit (die moralische) der Handlungen vor, die ihnen an sich selbst zukommt.

→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분석하지 않는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포함할 것이라는 것은, 감성과 현상에 대한,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개념의 날조이다.→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법의 개념은 의심할 바 없이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을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에 대해 사람들은,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Wenn wir diese unsre Anschauung auch zum höchsten Grade der Deutlichkeit bringen könnten, wo würden wir dadurch der Beschaffenheit der Gegenstände an sich selbst nicht näher kommen.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 우리가 이러한 우리의 직관을 또한 명료성의 가장 높은 단계로 가져 올 수 있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우리가 그를 통하여 대상들 자체의 성질에 더 가까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Denn wir würden auf allen Fall doch nur unsre Art der Anschauung d.i. unsere Sinnlichkeit vollständig erkennen, und diese immer nur unter den dem Subjekt ursprünglich anhängenden Bedingungen, von Raum und Zeit; was die Gegenstände an sich selbst sein mögen, würde uns durch die aufgeklärteste Erkenntnis der Erscheinung derselben, die uns allein gegeben ist, doch niemals bekannt werden.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이러한 감성이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 그 현상이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경우에서 오로지 우리의 직관방식, 즉, 언제나 단지 주관 아래에 근원적으로 수반하는 조건들인 이러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건들 아래에서만 우리의 감성만을 완전히 인식할 것이고; 대상들 자체가 무엇일지, 우리에게, 오로지 우리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그것들의 현상에 대한 개선된 인식을 통하여서는 또한 전혀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Daß daher unsere ganze Sinnlichkeit nichts als die verworrene Vorstellung der Dinge sei, welche lediglich das enthält, was ihnen an sich selbst zukömmt, aber nur unter einer Zusammenhäufung von Merkmalen und Teilvorstellungen, die wir nicht mit Bewußtsein auseinander setzen, ist eine Verfälschung des Begriffs von Sinnlichkeit und von Erscheinung, welche die ganze Lehre derselben unnütz und leer macht.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포함할 것이다,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과 나누어 놓지 않는, 감성과 현상에 대한 개념의 날조이다,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 그런 이유로 우리의 전체 감성은 사물의 복잡한 표상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고, 그것이 다만, 그것들에게 그 자체로 부합할 것을, 그러나 단지, 그것들을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분석하지 않는 특징들과 부분표상들에 대한 축적 아래에서만 포함할 것이라는 것은, 감성과 현상에 대한, 그에 대한 전체 학설을 헛되고 공허하게 만드는, 개념의 날조이다.

Der Unterschied einer undeutlichen von der deutlichen Vorstellung ist bloß logisch, und betrifft nicht den Inhalt.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 분명한 표상에 대한 불분명한 표상의 구분은 순전히 논리적이고, 내용과 관계맺지 않는다.

Ohne Zweifel enthält der Begriff von Recht, dessen sich der gesunde Verstand bedient, eben dasselbe, was die subtileste Spekulation aus ihm entwickeln kann, nur daß im gemeinen und praktischen Gebrauche man sich dieser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in diesem Gedanken, nicht bewußt ist.

법의 개념은,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의심할 바 없이 동일한 것을,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 건전한 지성이 사용하는 법의 개념은 의심할 바 없이 섬세한 사변이 그로부터 전개할 수 있는 동일한 것을 포함한다. 단지 그 보편적이고 실천적 사용에 있어서 사람들이 이 사유 속에서 이러한 잡다한 표상들을 의식하지 못한다.

Darum kann man nicht sagen, daß der gemeine Begriff sinnlich sei, und eine bloße Erscheinung enthalte, denn das Recht kann gar nicht erscheinen, sondern sein Begriff liegt im Verstande, und stellet eine Beschaffenheit (die moralische) der Handlungen vor, die ihnen an sich selbst zukommt.

그에 대해 사람들은 말할 수 없다,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 그에 대해 사람들은, 보편적 개념이 감각적이라고, 그리고 순전한 현상을 포함한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법은 전혀 현상할 수 없고, 오히려 지성 안에 놓이는 개념이기 때문이며, 그것 자체에 수반하는 행위의 특성(도덕적인)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蟲-

Wir haben also sagen wollen: daß alle unsre Anschauung nichts als die Vorstellung von Erscheinung sei: daß die Dinge, die wir anschauen, nicht das an sich selbst sind, wofür wir sie anschauen, noch ihre Verhältnisse so an sich selbst beschaffen sind, als sie uns erscheinen, und daß, wenn wir unser Subjekt oder auch nur die subjektive Beschaffenheit der Sinne überhaupt aufheben, alle die Beschaffenheit, alle Verhältnisse der Objekte im Raum und Zeit, ja selbst Raum und Zeit verschwinden würden, und als Erscheinungen nicht an sich selbst, sondern nur in uns existieren können. Was es für eine Bewandtnis mit den Gegenständen an sich und abgesondert von aller dieser Rezeptivität unserer Sinnlichkeit haben möge, bleibt uns gänzlich unbekannt. Wir kennen nichts, als unsere Art, sie wahrzunehmen, die uns eigentümlich ist, die auch nicht notwendig jedem Wesen, obzwar jedem Menschen, zukommen muß. Mit dieser haben wir es lediglich zu tun. Raum und Zeit sind die reinen Formen derselben, Empfindung überhaupt die Materie. Jene können wir allein a priori d.i. vor aller wirklichen Wahrnehmung erkennen, und sie heißet darum reine Anschauung; diese aber ist das in unserm Erkenntnis, was da macht, daß sie Erkenntnis a posteriori d.i. empirische Anschauung heißt. Jene hängen unsrer Sinnlichkeit schlechthin notwendig an, welcher Art auch unsere Empfindungen sein mögen; diese können sehr verschieden sein.

→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였다.→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이러한 방식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고,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전자를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그러나 후자는 여기에서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것,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Wir haben also sagen wollen:

우리는 그러므로 말하고자 하였다:

daß alle unsre Anschauung nichts als die Vorstellung von Erscheinung sei: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daß die Dinge, die wir anschauen, nicht das an sich selbst sind, wofür wir sie anschauen, noch ihre Verhältnisse so an sich selbst beschaffen sind, als sie uns erscheinen, und daß, wenn wir unser Subjekt oder auch nur die subjektive Beschaffenheit der Sinne überhaupt aufheben, alle die Beschaffenheit, alle Verhältnisse der Objekte im Raum und Zeit, ja selbst Raum und Zeit verschwinden würden, und als Erscheinungen nicht an sich selbst, sondern nur in uns existieren können.

사물들은, 그것들을 우리가 직관하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다(라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

→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직관은 현상에 대한 표상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우리가 직관하는 사물들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것들을 직관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의 관계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 외에 그렇게 그 자체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주관 또는 단지 감관 일반의 주관적 성질만이라도 지양한다면, 그 모든 성질,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객관의 모든 관계들, 심지어 공간과 시간 그 자체도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그리고 현상으로서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단지 우리 안에 현존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하였다.

Was es für eine Bewandtnis mit den Gegenständen an sich und abgesondert von aller dieser Rezeptivität unserer Sinnlichkeit haben möge, bleibt uns gänzlich unbekannt.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 대상들 자체와 관련한 사정에 대한 것과 우리의 감성의 이러한 모든 수용성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남는다.

Wir kennen nichts, als unsere Art, sie wahrzunehmen, die uns eigentümlich ist, die auch nicht notwendig jedem Wesen, obzwar jedem Menschen, zukommen muß.

우리는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지각하는, 그 방식은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 우리는 그것들을 지각하는 우리에게 특유한, 또한 각 존재자에게, 각 인간들에게는 필연적일지라도, 필연적으로 부합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우리의 방식 이외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Mit dieser haben wir es lediglich zu tun.

우리는 단지 이러한 것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 우리는 단지 이러한 방식과 관계가 있을 따름이다.

Raum und Zeit sind die reinen Formen derselben, Empfindung überhaupt die Materie.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다,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 공간과 시간은 그것의 순수한 형식이고, 지각 전반은 그 질료이다.

Jene können wir allein a priori d.i. vor aller wirklichen Wahrnehmung erkennen, und sie heißet darum reine Anschauung;

이것들을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diese aber ist das in unserm Erkenntnis, was da macht, daß sie Erkenntnis a posteriori d.i. empirische Anschauung heißt.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성하는 것, 그것들이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

→ 전자를 오직 우리만이 선험적으로, 즉, 모든 실질적인 지각에 앞서 인식할 수 있고, 그것들은 그런 이유로 순수직관이라 불린다; 그러나 후자는 여기에서 후험적 인식, 즉, 감각적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형성하는 것, 우리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다.

Jene hängen unsrer Sinnlichkeit schlechthin notwendig an, welcher Art auch unsere Empfindungen sein mögen;

전자는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diese können sehr verschieden sein.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 전자는, 우리의 지각이 어떠한 종류이든 우리의 감성에 단적으로 필연적으로 속한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잘 구분될 수 있다.

 

-蟲-

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더 이상,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운동의 개념 자체, 두 부분들을 결합한,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공간 안에서, 그 자체로 숙고된,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에 대하여, 그리고 지각의 규정의 승계에 대하여, 따라서 경험에 대하여 요구된다.

→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 8. 초월론적 감성학에 대한 일반적 주해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Ⅰ. 무엇보다도 그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밝히는 것,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그것의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蟲-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ut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적용된다면,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tu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이,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단지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의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것들의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상상이 어떤 것을 형성한,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그러나 제한 없이,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발견할 수 없다.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첫번째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그에 반해 그들은 매우 당황한다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를 고려하여, 즉,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蟲-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o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e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시인한다.

→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동일한 규정들이, 그 규정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인식을 줄 것이다, 그 인식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e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그것들을 직관하는.

→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미할 따름이다,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그러나 그 원인들은,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리고 더욱이 그 원인들에 대해서, 그것(원인)들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것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다.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 안에서, 그 주관에 그 대상이 현상하는, 찾아져야만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현상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오로지 저것만이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s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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