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In unserer Theorie, von der wahren Beschaffenheit dieser zwei ursprünglichen Formen der Sinnlichkeit, ist beiden Schwierigkeiten abgeholfen.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 감성의 이러한 두 가지 근원적 형식들의 참된 성질에 대한 우리들의 이론 내에서, 두 가지 곤란함들이 제거된다.

 

Daß schlüßlich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mehr, als diese zwei Elemente, nämlich Raum und Zeit, enthalten könne, ist daraus klar, weil alle andre zur Sinnlichkeit gehörige Begriffe, selbst der der Bewegung, welcher beide Stücke vereiniget, etwas Empirisches voraussetzen.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더 이상,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운동의 개념 자체, 두 부분들을 결합한,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논리적으로 초월론적 감성학이 두 가지 요소들,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 외에 더 이상을 포함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분명하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감성에 관련된 개념들은, 두 부분들을 결합한 운동의 개념 자체도, 경험적인 어떤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Denn diese setzt die Wahrnehmung von etwas Beweglichem voraus.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어떤 움직이는 것에 대하여 지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Im Raum, an sich selbst betrachtet, ist aber nichts Bewegliches:

공간 안에서, 그 자체로 숙고된,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Daher das Bewegliche etwas sein muß, was im Raume nur durch Erfahrung gefunden wird, mithin ein empirisches Datum.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 그러나 그 자체로 숙고된 공간 안에서 아무것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움직이는 어떤 것은, 공간 안에서 단지 경험을 통하여 발견될 수 있는 어떤 것, 따라서 감각적인 자료여야만 한다.

Eben so kann die transzendentale Ästhetik nicht den Begriff der Veränderung unter ihre Data a priori zählen: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denn die Zeit selbst verändert sich nicht, sondern etwas, das in der Zeit ist.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 그와 같이 초월론적 감성학은 그 선험적 자료 아래에서 변화의 개념을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시간 자체는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Also wird dazu die Wahrnehmung von irgend einem Dasein, und der Sukzession seiner Bestimmungen, mithin Erfahrung erfordert.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에 대하여, 그리고 지각의 규정의 승계에 대하여, 따라서 경험에 대하여 요구된다.

→ 그러므로 그에 대해 지각은 어떻든 현존하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규정의 승계에 대한 지각, 따라서 경험이 요구된다.

 

§ 8. Allgemeine Anmerkungen zur Transzendentalen Ästhetik

§ 8. 초월론적 감성학에 대한 일반적 주해

 

Ⅰ. Zuerst wird es nötig sein, uns so dutlich, als möglich, zu erklären, was in Ansehung der Grundbeschaffenheit der sinnlichen Erkenntnis überhaupt unsre Meinung sei, um aller Mißdeutung derselben vorzubeugen.

Ⅰ. 무엇보다도 그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밝히는 것,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그것의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 Ⅰ. 모든 오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감각적 인식 전반의 근본성질에 대한 고려 속에서, 우리에게 그렇게나 명백하게, 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의 주장일 것을 밝히는 것은 필연적이게 된다.

 

-蟲-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ut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Nehmen sie die zweite Partei (von der einige metaphysische Naturlehrer sind), und Raum und Zeit gelten ihnen als von der Erfahrung abstrahierte, obzwar in der Absonderung verworren vorgestellte, Verhältnisse der Erscheinungen (neben oder nach einander);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적용된다면,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so müssen sie den mathematischen Lehren a priori in Ansehung wirklicher Dinge (z.E. im Raume) ihre Gültigkeit, wenigstens die apodiktische Gewißheit bestreiten, indem diese a posteriori gar nicht stattfindet, und die Begriffe a priori von Raum und Zeit, dieser Meinung nach, nur Geschöpfe der Einbildungskraft sind, deren Quell wirklich in der Erfahrung gesucht werden muß, aus deren abstrahierten Verhältnissen die Einbildung etwas gemacht hat, was zwar das Allgemeine derselben enthält, aber ohne die Restriktionen, welche die Natur mit denselben verknüpft hat, nicht stattfinden kann.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이,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단지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것들의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것들의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상상이 어떤 것을 형성한,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그러나 제한 없이,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발견할 수 없다.

→ 그들이 두 번째 편을 취한다면 (그에 대해 몇몇 형이상학적 물리-화학자들이 있는), 그리고 공간과 시간이 그들에게 경험에 추상되기보다는, 비록 추상함에 있어서 복잡하게 표상했다 할지라도, 현상들의 관계들에 (나란히 혹은 잇달아) 적용된다면; 그래서 그들은 수학적 학설들에게 선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예를 들어 공간 안에서)을 고려함에 있어서 그것들의 정당성을, 최소한 그 증명에 따른, 그 안에서 이러한 것이 후험적으로 결코 발견되지 않는, 정당성을 반박함에 틀림 없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선험적 개념들은 단지, 그 원천이 실제로 경험 안에서 탐색되어야 하는, 그 추상된 관계들로부터 형성한 상상력의 산물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연이 그것과 결합하는 제한 없이는 더욱이 그것의 전반을 포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Die ersteren gewinnen so viel, daß sie für die mathematishcen Behauptungen sich das Feld der Erscheinungen frei machen.

첫번째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 첫번째 학파는 수학적 명제들에게 현상들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얻는다.

Dagegen verwirren sie sich sehr durch eben diese Bedingungen, wenn der Verstand über dieses Feld hinausgehen will.

그에 반해 그들은 매우 당황한다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 그에 반해 그들은 이러한 동일한 조건들을 통하여, 오성이 이러한 영역을 넘어서고자 할 때 매우 당황한다.

Die zweiten gewinnen zwar in Ansehung des letzteren, nämlich, daß die 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ihnen nicht in den Weg kommen, wenn sie von Gegenständen nicht als Erscheinungen, sondern bloß im Verhältnis auf den Verstand urteilen wollen;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를 고려하여, 즉,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können aber weder von der Möglichkeit mathematischer Ereknntnisse a priori (indem ihnen eine wahre und objektiv gültige Anschauung a priori fehlt) Grund angeben, noch die Erfahrungssätze mit jenen Behauptungen in notwendige Einstimmung bringen.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 두번째 학파는 더욱이 후자에 대한 고려에 있어서, 즉, 그들이 대상들에 대하여 현상들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순전히 지성에 대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자 할 때, 공간과 시간에 대한 표상들이 그들에게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을 얻는다; 그러나 수학적인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하여 (그 안에서 그들에게 참되고 객관적으로 정당한 선험적 직관이 실패하는) 토대를 제시할 수도 없고, 경험명제들을 각각의 진술들과 필연적 일치로 이끌 수도 없다.

 

-蟲-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o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e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Nun sind Veränderungen nur in der Zeit möglich, folglich ist die zeit etwas Wirkliches.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이제 변화는 단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고, 따라서 시간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Die Beantwortung hat keine Schwierigkeit.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 그 답변은 아무런 난점도 없다.

Ich gabe das ganze Argument zu.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시인한다.

→ 나는 그 논증 전체를 인정한다.

Die Zeit ist allerdings etwas Wirkliches, nämlich die wirkliche Form der innern Anschauung.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 시간은 물론 현실적이다. 다시 말해 내적 직관의 현실적 형식이다.

Sie hat also subjektive Realität in Ansehung der innern Erfahrung, d.i. ich habe wirklich die Vorstellung von der Zeit und meinen Bestimmungen in ihr.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 그것(시간)은 그러므로 내적 경험과 관련하여 주관적 실재성을 가진다. 즉 나는 시간에 대한 표상을 실제로 그리고 나의 규정들을 그(시간) 안에 가진다.

Sie ist also wirklich nicht als Objekt, sondern als die vorstellungsart meiner selbst als Objekts anzusehen.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 그러므로 시간은 객관으로서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의 표상방식으로서 객관으로 여기는 것이다.

Wenn aber ich selbst, oder ein ander Wesen mich, ohne diese Bedingung der Sinnlichkeit, anschauen könnte, so würden eben dieselben Bestimmungen, die wir uns jetzt als Veränderungen vorstellen, eine Erkenntnis geben, in welcher die Vorstellung der Zeit, mithin auch der Veränderung, gar nicht vorkäme.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동일한 규정들이, 그 규정들을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인식을 줄 것이다, 그 인식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 그러나 나 스스로, 혹은 또 다른 실체가 나를, 감성의 이러한 조건 없이, 직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에게 현재 변화들로서 표상하는 동일한 규정들이, 그 안에서 시간의 표상이, 따라서 또한 변화의 표상이, 전혀 생겨나지 않을 인식을 줄 것이다.

Es bleibt also ihre empirische Realität als Bedingung aller unsrer Erfahrungen.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 그러므로 시간의 감각적 실재성이 우리의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남는다.

Nur die absolute Realität kann ihr nach dem eben Angeführten nicht zugestanden werden.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 단지 절대적 실재성만은 바로 그 제시된 것에 따라 그것(시간)에 속할 수 없다.

Sie ist nichts, als die Form unsrer inneren Anschauung¹.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 시간은 우리의 내적 직관의 형식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¹.

Wenn man von ihr die besondere Bedingung unserer Sinnlichkeit wegnimmt, so verschwindet auch der Begriff der Zeit, und sie hängt nicht an den Gegenständen selbst, sondern bloß am Subjekte, welches sie anschauet.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그것들을 직관하는.

→ 만일 사람들이 그것(시간)에 대하여 우리 감성의 특수한 조건을 제거한다면, 또한 시간의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대상들 자체에 종속하지 않고, 오히려 순전히 그것들을 직관하는 주관에 종속할 것이다.

 

¹Ich kann zwar sagen: meine Vorstellungen folgen einander; aber das heißt nur, wir sind uns ihrer, als in einer Zeitfolge, d.i. nach der Form des innern Sinnes, bewußt.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의미할 따름이다,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 ¹나는 더욱이 말할 수 있다: 나의 표상은 잇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 표상을, 시간순차 속에서, 즉 내감의 형식에 따라, 의식한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

Die Zeit ist darum nicht etwas an sich selbst, auch keine den Dingen objektiv anhängende Bestimmung.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 시간은 그로부터 그 자체인 어떠한 것이 아니고, 또한 객관적 대상들에 결부하는 조건도 전혀 아니다.

 

 

Die Ursache aber, weswegen dieser Einwurf so einstimmig gemacht wird, und zwar von denen, die gleichwohl gegen die Lehre von der Idealität des Raumes nichts Einleuchtendes einzuwenden wissen, ist diese.

그러나 그 원인들은,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리고 더욱이 그 원인들에 대해서, 그것(원인)들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것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이다.

→ 그러나, 어째서 이러한 반박이, 공간의 이념성에 대한 학설들에 반대하여 아무런 명백한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나 이구동성으로 형성되는가 하는, 그 원인들은 이러한 것들이다.

Die absolute Reaität des Raumes hoffeten sie nicht apodiktisch dartun zu können, weil ihnen der Idealismus entgegensteht, nach welchem die Wirklichkeit äußerer Gegenstände keines strengen Beweises fähig ist: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Dagegen die des Gegenstandes unserer innern Sinnen (meiner selbst und meines Zustandes) unmittelbar durchs Bewußtsein klar ist.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 그들은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자명하게 입증할 수 있음을 기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론이 그들에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외부 대상들의 현실성이 전혀 강력한 증명일 수 없다: 반면에 우리의 내감의 대상들의 실재성 (나 자신과 나의 상태) 은 직접적으로 의식을 통하여 분명하다.

Jene konnten ein bloßer Schein sein, dieser aber ist, ihrer Meinung nach, unleugbar etwas Wirkliches.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 저것(공간의 실재성)은 순전한 가상일 수 있지만 이것(내감의 실재성)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부정할 수 없이 현실적인 어떤 것이다.

Sie bedachten aber nicht, daß beide, ohne daß man ihre Wirklichkeit als Vorstellungen bestreiten darf, gleichwohl nur zur Erscheinung gehören, welche jederzeit zwei Seiten hat, die eine, da das Objekt an sich selbst getrachtet wird, (unangesehen der Art, dasselbe anzuschauen, dessen Beschaffenheit aber eben darum jederzeit problematisch bleibt,) die andere, da auf die Form der Anschauung dieses Gegestandes gesehen wird, welche nicht in dem Gegenstande an sich selbst, sondern im Subjekte, dem derselbe erscheint, gesucht werden muß, gleichwohl aber der Erscheinung dieses Gegenstandes wirklich und notwendig zukommt.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주관 안에서, 그 주관에 그 대상이 현상하는, 찾아져야만 하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 그러나 그들은 고려하지 않았다, 둘 모두, 사람들이 표상들로서 그것들의 현실성을 반박함이 없이, 현상에 속할 뿐인데도 불구하고,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을 가지는, 한 면은 그것이, 여기에서 객관 자체가 지향되는 면이고, (방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객관을 직관하지만, 그러나 객관의 상태는 바로 그에 대해서 언제나 문제거리로 남는,) 다른 한 면은, 여기에서 이러한 대상의 직관 형식으로 보이는 면이다. 그러한 것이 대상 그 자체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대상이 현상하는 주관 안에서, 찾아져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상은 현상에게 현실적이고 필연적으로 귀속한다.

 

 

Zeit und Raum sind demnach zwei Erkenntnisquellen, aus denen a priori synthetische Erkenntnisse geschöpft werden können, wie vornehmlich die reine Mathematik in Ansehung der Erkenntnisse vom Raume und dessen Verhältnissen ein glänzendes Beispiel gibt.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그것들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 그에 따라 시간과 공간은, 특히 순수 수학이 공간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빛나는 모범을 주는 것과 같이, 그로부터 선험적 종합적 인식이 만들어질 수 있는, 두 가지 인식원천이다.

Sie sind nämlich beide zusammengenommen reine Formen aller sinnlichen Anschauung, und machen dadurch synthetische Sätze a priori möglich.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 그것들은 다시 말해 둘 다 모든 감각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들로 총괄되고, 그를 통하여 선험적 종합명제를 형성할 수 있다.

Aber diese Erkenntnisquellen a priori bestimmen sich eben dadurch (daß sie bloß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sein) ihre Grenzen, nämlich, daß sie bloß auf Gegenstände gehen, so fern sie als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nicht aber Dinge an sich selbst darstellen.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것들이 현상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 그러나 이러한 선험적 인식원천들은 바로 그것을 통하여 (그것들이 순전히 감성의 조건들이라는) 그것들의 한계를 규정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현상으로, 그러나 사물 그 자체는 묘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에서, 그것들은 순전히 대상들에 대해서만 해당한다는 것이다.

Jene allein sind das Feld ihrer Gültigkeit, woraus wenn man hinausgehet, weiter kein objektiver Gebaruch derselben stattfindet.

오로지 저것만이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 오로지 저것만이, 그로부터 사람들이 나아간다면, 더 이상 그것들의 어떠한 객관적 사용도 행해지지 않을, 그것들의 정당한 영역이다.

Dies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läßt übrigens die Sicherheit der Erfahrungskenntnis unangetastet: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denn wir sind derselben eben so gewiß, ob diese Formen den Dingen an sich selbst, oder nur unsrer Anschauung dieser Dinge notwendiger Wiese anhängen.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확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실재성은 그 밖에 경험적 앎의 확실성을 침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이 사물들 그 자체에, 아니면 단지 사물들에 대한 우리들의 직관에 필연적 방식으로 결합하는지, 확실하기 때문이다.

Dagegen die, so die absolute Realität des Raumes und der Zeit behaupten, sie mögen sie nun als subsistierend, oder nur inhärierend annehmen, mit den Prinzipien der Erfahrung selbst uneinig sein müssen.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 반면에 그것, 그러니까 공간과 시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그들은 그것들을 이제 존속하는 것으로서, 혹은 단지 고유한 것으로서, 경험 자체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음에 틀림없다.

Denn, entschließen sie sich zum ersteren, (welches gemeiniglich die Partei der mathematischen Naturforscher ist,) so müssen sie zwei ewige und unendliche vor sich bestehende Undinge (Raum und Zeit) annehmen, welche dasind (ohne daß doch etwas Wirkliches ist), nur um alles Wirkliche in sich zu befassen.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 왜냐하면, 그들이 전자에 대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현실적인 것도 없이), 단지 모든 현실적인 것을 그 안에 포함하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수학적 자연 과학자의 파벌인,) 그래서 두 가지 매우 오래고 끝없는 기존의 불합리(공간과 시간)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蟲-

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Er al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Solche Eigenschaften, die den Dingen an sich zukommen, können uns durch die Sinne auch niemals gegeben werden.

그러한 특성들은, 그것들이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 사물들 자체에 부합하는 그러한 특성들은, 우리에게 감관을 통하여 또한 전혀 주어질 수 없다.

Hierin besteht also die transzendentale Idealität der Zeit, nach welcher sie, wenn man von d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abstrahiert, gar nichts ist, und den Gegenständen an sich selbst (ohne ihr Verhältnis auf unsere Anschauung) weder subsistierend noch inhärierend beigezählt werden kann.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 그러므로 이 점에서 시간의, 사람들이 감각적 직관의 주관적 조건들에 대해 도외시할 때에는 전혀 아무것도 아닌, 그리고 대상들 그 자체에(우리 직관에 대한 그것의 관계 없이) 존속하는 것으로든 고유한 것으로든 여겨질 수 없는, 초월론적 이념성이 자리한다.

Doch ist diese Idealität, eben so wenig wie die des Raumes, mit den Subreptionen der Empfindung in Vergleichung zu stellen, weil man doch dabei von der Erscheinung selbst, der diese Prädikate inhärieren, voraussetzt, daß sie objektive Realität habe, die hier gänzlich wegfällt, außer, so fern sie bloß empirisch ist, d.i. den Gegestand selbst bloß als Erscheinung ansieht: wovon die obige Anmerkung des ersteren Abschnitts nachzusehen ist.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그것의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전제하기 때문에, 시간이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그 실재성이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그 실재성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 그럼에도 이러한 이념성은, 적어도 공간의 이념성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감각의 사취와 비교 속에 존립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술어들이 고유한 현상들 자체에 대해서, 시간이, 순전히 경험적인, 즉 대상들 자체를 순전히 현상들로서 간주하는 것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전적으로 탈락하는, 객관적 실재성을 가진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첫번째 절의 상술한 주석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7. Erläuterung

§7. 해명

 

Wider diese Theorie, welche der Zeit empirische Realität zugestehet, aber die absolute und transzendentale bestreitet, habe ich von einsehenden Männern einen Einwurf so einstimmig vernommen, daß ich daraus abnehme, er müsse sich natürlicher Weise bei jedem Leser, dem diese Betrachtungen ungewohnt sind, vorfinden.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시간에 대한 그 이론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반론을 아주 한 목소리로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추정한다,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독자에게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 시간이 경험적 실재성을 가졌다는, 그러나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것을 반박하는 이러한 이론에 대해서, 나는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반론을 들어 왔다. 나는 그로부터, 이러한 고찰들이 생소한 각각의 독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발견될 수밖에 없다고 추정한다.

Er lautet also: Veränderungen sind wirklich (dies beweiset der Wechsel unserer eigenen Vorstellungen, wenn man gleich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amt deren Veränderungen, leugnen wollte).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 그것에 따르면 또한 : 변화는 실재적이다 (이것은 우리의 고유한 표상들의 변경을 증명한다, 설령 사람들이 모든 외적 직관들을, 그것들의 변화와 함께, 부정하고자 할지라도).

 

-蟲-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Die Zeit ist also lediglich eine subjektive Bedingung unserer (menschlichen) Anschauung, (welche jederzeit sinnlich ist, d.i. so fern wir von Gegenständen affiziert werden,) und an sich, außer dem Subjekte, nichts.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 시간은 그러므로 다만 우리들의(인간적인) 직관의 주관적 조건일 따름이고, (그 조건이 항상 감각적인, 즉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촉발되는 한에서,) 그리고 그 자체로는, 주관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Nichts desto weniger ist sie in Ansehung aller Erscheinungen, mithin auch aller Dinge, die uns in der Erfahrung vorkommen können, notwendiger Weise objektiv.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모든 사물들, 그것들이 우리에게 경험 안으로 생길 수 있는,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 더구나 그것(시간)은 모든 현상들의 고려 속에서, 따라서 또한, 우리에게 경험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사물들 전혀 필연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이지는 않다.

Wir können nicht sagen: aller Dinge sind in der Zeit, weil bei dem Begriff der Dinge überhaupt von aller Art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wird, diese aber die eigentliche Bedingung ist, unter der die Zeit in die Vorstellung der Gegenstände gehört.

우리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그러나 이것들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은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한다.

→ 우리는, 사물들 전반의 개념에 있어서,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고유한 조건인, 그 아래에서 시간이 대상들에 대한 표상에 속하는, 그 사물 자체의 모든 직관방식에 대해 도외시하게 되기 때문에 : 모든 사물들이 시간 중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Wird nun die Bedingung zum Begriffe hinzugefügt, und es heißt: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그것은 이야기된다:

alle Dinge, als Erscheinungen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sind in der Zeit;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so hat der Grundsatz seine gute objektive Richtigkeit und Allgemeinheit a priori.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

→ 이제 그 조건은 개념들에 덧붙여지고, : 모든 사물들은, 현상들로서 (감각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시간 중에 있다고; 그래서 그 근본명제는 훌륭하게 객관적 정당성과 선험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이야기된다.

 

Unsere Behauptungen lehren demnach empirishce Realität der Zeit, d.i. objektive Gültigkeit in Ansehung aller Gegenstände, die jemals unsern Sinnen gegeben werden mögen.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가르쳐 준다, 즉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그 대상들이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 우리들의 명제들은 그에따라 시간의 경험적 실재성을, 즉, 일찍이 우리의 감관에 주어질 수 있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객관적 타당성을 가르쳐 준다.

Und da unsere Anschauung jederzeit sinnlich ist, so kann uns in der Erfahrung niemals ein Gegenstand gegeben werden, der nicht unter die Bedingung der Zeit gehörete.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하나의 대상이 전혀 주어질 수 없다, 그 대상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의 직관은 언제나 감각적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경험 속에서 일찍이, 시간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 하나의 대상은 전혀 주어질 수 없다.

Dagegen bestreiten wir der Zeit allen Anspruch auf absolute Realität, da sie nämlich, auch ohne auf die Form unserer sinnlichen Anschauung Rücksicht zu nehmen, schlechthin den Dingen als Bedingung oder Eigenschaft anhinge.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 그에 반해 우리는, 시간은 다시 말해, 또한 우리의 감각적 직관의 형식에 대해 유의를 취하지 않고, 전적으로 사물들에게 조건 또는 특성으로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시간에 절대적 실재성에 대한 모든 주장을 반박한다.

 

-蟲-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c) Die Zeit ist die formale Bedingung a priori aller Erscheinungen überhaupt.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 c) 시간은 모든 현상 전반의 선험적 형식 조건이다.

Der Raum, als die reine Form aller äußeren Anschauung ist als Bedingung a priori bloß auf äußere Erscheinungen eingeschränkt.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 공간은, 모든 외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순전히 외적 현상들에 선험적 조건으로서 제한된다.

Dagegen weil alle Vorstellungen, sie mögen nun äußere Dinge zum Gegenstande haben, oder nicht, doch an sich selbst, als Bestimmungen des Gemüts, zum innern Zustande gehören: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dieser innere Zustand aber, unter der formalen Bedingung der innern Anschauung, mithin der Zeit gehöret, so ist die Zeit eine Bedingung a priori von aller Erscheinung überhaupt, und zwar die unmittelbare Bedingung der inneren (unserer Seelen) und eben dadurch mittelbar auch der äußern Erscheinungen.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고,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며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 그에 반해 모든 표상들은, 그것들이 단지 외적 사물들만을 대상으로 가지거나, 혹은 그렇지 않고, 여하튼 그 자체로, 심성의 규정들로서, 내적 상태에 속할 것이다: 이러한 내적 상태는 그러나, 내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 아래에서, 따라서 시간에 속하고, 그래서 시간은 모든 현상들 전반에 대하여 선험적 조건이며, 더욱이 내적인 현상들의(우리들의 영혼들의) 직접적인 조건이고 마찬가지로 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또한 외적 현상들의 조건이다.

Wenn ich a priori sagen kann: alle äußere Erscheinungen sind im Raume, und nach den Verhältnissen des Raumes a priori bestimmt, so kann ich aus dem Prinzip des innern Sinnes ganz allgemein sagen:

만일 내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말할 수 있다:

alle Erscheinungen überhaupt, d.i. alle Gegenstände der Sinne, sind in der Zeit, und stehen notwendiger Weise in Verhältnissen der Zeit.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 만일 내가 : 모든 외적 현상들은 공간 안에 있다고, 그리고 공간들의 관계들에 따라 선험적으로 규정된다고,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렇게 나는 내감의 원칙으로부터 전적으로 보편적으로 : 모든 형상들 전반, 즉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시간 안에 있고, 시간 관계들 내에서 필연적인 방식이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Wenn wir von unsrer Art, uns selbst innerlich anzuschauen, und vermittelst dieser Anschauung auch alle äußere Anschauungen in der Vorstellungs-Kraft zu befassen, abstrahieren, und mithin die Gegenstände nehmen, so wie sie an sich selbst sein mögen, so ist die Zeit nichts.

우리가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래서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내적으로 직관하는, 그리고 이러한 직관에 따라서 또한 모든 외적 직관들을 표상력 내부에서 취급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것들(대상들) 자체가 있을 것처럼, 그 대상들을 취한다면, 시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Sie ist nur von objektiver Gültigkeit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weil dieses schon Dinge sind, die wir als Gegenstände unsrer Sinne annehmen;

그것(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aber sie ist nicht mehr objektiv, wenn man von der Sinnlichkeit unsrer Anschauung, mithin derjenigen Vorstellungsart, welche uns eigentümlich ist, abstrahiert, und von Dingen überhaupt redet.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그것이 우리에게 고유한,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 시간은 단지 현상들과 관련하여서만 객관적 타당성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 감관의 대상으로서 수용하는, 사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만일 사람들이 우리의 직관의 감각에 대하여, 따라서, 우리에게 고유한, 그 표상방식에 대하여 도외시한다면, 그리고 사물들 전반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면 단지 객관적이지만은 않다.

 

-蟲-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Was aber das zweite betrifft, so könnte sie als eine den Dingen selbst anhangende Bestimmung oder Ordnung nicht vor den Gegenständen als ihre Bedingung vorhergehen, und a priori durch synthetische Sätze erkannt und angeschaut werden.

그러나 두번째 것과 관련하여서,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으로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 그러나 후자와 관련하여, 시간은 사물들 자체에 결부하는 규정 혹은 질서로서 대상들에 앞서서 그것들의 조건으로서 선행할 수 없고, 선험적인 종합명제들을 통하여 지각되고 직관된다.

Dieses letztere findet dagegen sehr wohl statt, wenn die Zeit nichts als die subjektive Bedingung ist, unter der alle Anschauungen in uns stattfinden können.

반면에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 반면에, 시간이 주관적 조건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닐 때에, 그 아래에서 모든 직관들이 우리 안에 발생할 수 있는, 이러한 후자는 매우 잘 발생한다.

Denn da kann diese Form der innern Anschauung vor den Gegenständen, mithin a priori, vorgestellt werden.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서 대상들에 대한 내적 직관의 이러한 형식이, 따라서 선험적으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B) Die Zeit ist nichts anders, als die Form des innern Sinnes, d.i. des Anschauens unserer selbst und unsers innern Zustandes.

B) 시간은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내감의 형식 외의,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 B) 시간은, 내감의 형식, 즉 우리 자신의 직관과 우리의 내적 상태의 형식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Denn die Zeit kann keine Bestimmung äußerer Erscheinungen sein;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sie gehöret weder zu einer Gestalt, oder Lage etc.;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dagegen bestimmt sie das Verhältnis der Vorstellungen in unserm innern Zustande.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 왜냐하면 시간은 외적 현상들의 어떠한 규정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형상 혹은 상황 등에 속하지도 않는다.; 반면에 시간은 우리의 내적 상태 안에서 표상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Und, eben weil diese innre Anschauung keine Gestalt gibt, suchen wir auch diesen Mangel durch Analogien zu ersetzen, und stellen die Zeitfolge durch eine ins Unendliche fortgehende Linie vor, in welcher das Mannigfaltige eine Reihe ausmacht, die nur von einer Dimension ist, und schließen aus den Eigenschaften dieser Linie auf alle Eigenschaften der Zeit, außer dem einigen, daß die Teile der erstern zugleich, die der letztern aber jederzeit nach einander sind.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부재를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그 안에서 잡다가 순차를 형성하는, 그 순차는 단지 일차원이고,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이다,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을 그러나 언제나 연속하는.

→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적 직관은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유추를 통하여 이러한 결핍을 대체할 것을 찾고, 그것을 통해 시간순서를, 그 안에서 잡다가 단지 일차원인 순차를 형성하는, 무한한 연장하는 선 안에서 표상한다. 이러한 직선의 특성들로부터 시간의 모든 특성들에 대해 추론한다. 이것만은 예외인데, 전자의 부분들은 동시적이지만, 후자의 부분들은 언제나 계기한다.

Hieraus erhellet auch, daß die Vorstellung der Zeit selbst Anschauung sei, weil alle ihre Verhältnisse sich an einer äußern Anschauung ausdrücken lassen.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 그것(시간)의 모든 관계들이 하나의 외적 직관에 드러나도록 하기 때문에, 시간의 표상 자체가 직관이리라는 것을 이로부터 또한 규명한다.

 

-蟲-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Die Vorstellung, die nur durch einen einzigen Gegenstand gegeben werden kann, ist aber Anschauung.

그 표상은,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러나 직관이다.

→ 단지 한 고유한 대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그 표상은, 그러나 직관이다.

Auch würde sich der Satz, daß verschiedene Zeiten nicht zugleich sein können, aus einem allgemeinen Begriff nicht herleiten lassen.

또한 그 명제는,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 또한,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일 수 없다는 그 명제는,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Der Satz ist synthetisch, und kann aus Begriffen allein nicht entspringen.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 명제는 종합적이고, 오로지 개념들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r ist also in der Anschauung und Vorstellung der Zeit unmittelbar enthalten.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 그것은 그러므로 시간의 직관과 표상 안에 곧바로 포함된다.

 

5) Die Unendlichkeit der Zeit bedeutet nichts weiter, als daß alle bestimmte Größe der Zeit nur durch Einschränkungen einer einigen zum Grunde liegenden Zeit möglich sei.

5) 시간의 무한성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 5) 시간의 무한성은, 시간의 모든 규정된 크기가 단지 하나의 고유한 그저에 놓여 있는 시간의 제한들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것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Daher muß die ursprüngliche Vorstellung Zeit als uneingeschränkt gegeben sein.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 그렇기 때문에 근원적인 시간 표상은 무제한한 것으로서 주어져야만 한다.

Wovon aber die Teile selbst, und jede Größe eines Gegenstandes, nur durch Einschränkung bestimmt vorgestellt werden können, da muß die ganze Vorstellung nicht durch Begriffe gegeben sein, (denn die enthalten nur Teilvorstellungen,) sondern es muß ihnen unmittelbare Anschauung zum Grunde liegen.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다.

→ 그러나 그 부분들 자체가 그로부터, 그리고 대상 각각의 크기가, 단지 규정된 제한을 통해서만 표상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체 표상은 개념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음에 틀림 없고, (왜냐하면 그 표상은 단지 부분 표상들만을 포함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분표상들에게 즉각적 직관이 기초로 놓여 있음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 5. Transzendental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 5. 시간 개념의 초월론적 해명

 

Ich kann mich deshalb auf Nr. 3. berufen, wo ich, um kurz zu sein, das, was eigentlich transzendental ist, unter die Artikel der metaphysischen Erörterung gesetzt habe.

나는 그 때문에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 나는 그 때문에, 거기에서 내가, 짧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고유하게 초월론적인, 형이상학적 해명의 항 아래에 놓은 3번을 증거로 댈 수 있다.

Hier füge ich noch hinzu, daß der Begriff der Veränderung und, mit ihm, der Begriff der Bewegung (als Veränderung des Orts) nur durch und in der Zeitvorstellung möglich ist: daß, wenn diese Vorstellung nicht Anschauung (innere) a priori wäre, kein Begriff, welcher es auch sei, die Möglichkeit einer Veränderung, d.i. einer Verbindung kontradiktorisch entgegengesetzter Prädikate (z.B. das Sein an einem Orte und das Nichtsein eben desselben Dinges an demselben Orte) in einem und demselben Objekte begreiflich machen könnte.

여기에서 나는 또한 덧붙인다,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

→ 여기에서 나는 또한, 변화의 개념과, 그와 함께, 운동의 개념이 (장소의 변화로서) 단지 시간표상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덧붙인다: 만일 이러한 표상이 선험적(내적) 직관이 아니라면, 어떤 관계도 모순되고 반대되는 빈사들에게 (예를 들어 그 자체의 장소에 그 장소의 사물이 한 장소에 있음과 있지 않음이 모두) 하나의 그리고 그 관계의 대상 안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Nur in der Zeit können beide kontradiktorisch-entgegengesetzte Bestimmungen in einem Dinge, nämlich nach einander, anzutreffen sein.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 오직 시간 안에서만 모순적-반대 규정 양자가 사물 안에서, 즉 순차적으로, 만나는 것일 수 있다.

Also erklärt unser Zeitbegriff die Möglichkeit so vieler synthetischer Erkenntnis a priori, als die allgemeine Bewegungslehre, die nicht wenig fruchtbar ist, darlegt.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보편적 운동학이, 조금도 헛되지 않은, 설명하는 것보다.

→ 그러므로 우리의 시간개념은, 조금도 헛되지 않은 보편적 운동학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험적 종합 인식의 가능성을 밝혀낸다.

 

§ 6. Schlüsse aus diesen Begriffen

§ 6. 이러한 개념들로부터의 결론

 

a) Die Zeit ist nicht etwas, was für sich selbst bestünde, oder den Dingen als objektive Bestimmung anhinge, mithin übrig bliebe, wenn man von allen subjektiv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derselben abstrahiert:

a) 시간은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따라서 남는다,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denn im ersten Fall würde sie etwas sein, was ohne wirklichen Gegenstand dennoch wirklich wäre.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그것들은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 a) 시간은, 그 자체에 대한 것일, 혹은 사물들에게 객관적 규정으로서 붙어있는, 그러한 어떤 것이 아니고, 따라서 사람들이 사물들 자체의 직관의 모든 주관적 조건들을 추상하였을 때 남는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시간은, 실질적 대상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일 어떤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蟲-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2) Die Zeit ist eine notwendige Vorstellung, die allen Anschauungen zum Grunde liegt.

2) 시간은 필연적 표상이다, 그 표상이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 2) 시간은 모든 직관에게 기초로 놓여 있는 필연적 표상이다.

Man kann in Ansehung der Erscheinungen überhaupt die Zeit selbsten nicht aufheben, ob man zwar ganz wohl die Erscheinungen aus der Zeit wegnehmen kann.

사람들은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 사람들은, 비록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현상들을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현상들에 대한 고려 속에서 전적으로 시간 자체를 극복할 수 없다.

Die Zeit ist also a priori gegeben.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 시간은 그러므로 선험적으로 주어진다.

In ihr allein ist alle Wirklichkeit der Erscheinungen möglich.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 오로지 그 안에서만 현상들의 모든 실재성이 가능하다.

Diese können insgesamt wegfallen, aber sie selbst (als die allgemeine Bedingung ihrer Möglichkeit,) kann nicht aufgehoben werden.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 이러한 것은 모두 다 탈락될 수 있지만 시간 자체는 (그 실재성의 가능성에 대한 보편적 조건으로서,) 극복될 수 없다.

 

3) Auf diese Notwendigkeit a priori gründet sich auch die Möglichkeit apodiktischer Grundsätze von den Verhältnissen der Zeit, oder Axiomen von der Zeit überhaupt.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 3) 이러한 선험적 필연성에 시간의 관계들에 대한 증명적 근본명제들의 가능성, 혹은 시간 전반에 대한 공리들이 또한 근거한다.

Sie hat nur Eine Dimension: verschiedene Zeiten sind nicht zugleich, sondern nach einander (so wie verschiedene Räume nicht nach einander, sondern zugleich sind).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 시간은 단지 1차원만을 지닌다: 상이한 시간들은 동시이지 않고, 오히려 순차이다(마치 상이한 공간들이 순차이지 않고 오히려 동시 것과 같이).

Diese Grundsätze können aus der Erfahrung nicht gezogen werden, denn diese würde weder strenge Allgemeinheit, noch apodiktische Gewißheit geben.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경험으로부터 이끌릴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강한(엄격한) 보편성도, 증명적 확실성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Wir würden nur sagen können: so lehrt es die gemeine Wahrnehmung; nicht aber: so muß es sich verhalten.

우리는 단지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그러나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

→ 우리는 단지 그것은 그러한 일반적 지각을 알려준다고 이야기하게 될 수 있을 뿐 그것이 반드시 그러해야만 한다고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Diese Grundsätze gelten als Regeln, unter denen überhaupt Erfahrungen möglich sind, und belehren uns vor derselben, und nicht durch dieselbe.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규칙들로서 타당하다,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그리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 이러한 근본명제들은, 그 규칙들의 전반적인 경험들 아래에서 가능한 규칙들로서 타당하고, 우리에게 경험들에 대해 바로잡아 주지만 경험들을 통해서는 아니다.

 

4) Die Zeit ist kein diskursiver, oder, wie man ihn nennt, allgemeiner Begriff, sondern eine reine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 4) 시간은 어떠한 논증적 개념도, 혹은, 사람들이 그것을 명명하듯이, 보편적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감성적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다.

Verschiedene Zeiten sind nur Teile eben derselben Zeit.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 상이한 시간들은 그저 단지 그것들의 시간의 부분들이다.

 

-蟲-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론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Dagegen ist der transzendentale Begriff der Erscheinungen im Raume eine kritische Erinnerung, daß überhaupt nichts, was im Raume angeschaut wird, eine Sache an sich, noch daß der Raum eine Form der Dinge sei, die ihnen etwa an sich selbst eigen wäre, sondern daß uns die Gegenstände an sich gar nicht bekannt sein, und, was wir äußere Gegenstände nennen, nichts anders als bloße Vorstellungen unserer Sinnlichkeit sein, deren Form der Raum ist, deren wahres Correlatum aber, d.i. das Ding an sich selbst, dadurch gar nicht erkannt wird, noch erkannt werden kann, nach welchem aber auch in der Erfahrung niemals gefragt wird.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비판적 주의이다, 전적으로 아무것도,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것은,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것, 또한 공간은 사물들의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것, 그 형식이 그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 고유하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그 표상들의 형식이 공간인, 그러나 그것의 참된 상관물은,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질 수 있는, 그러나 역시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 없는.

→ 반면에 공간 내에서 현상들의 초월적 개념은, 공간 내에서 직관되는 전적으로 어떤것도 사태 자체는 아니라는, 또한 공간은 사물들에게 그 자체 어떤 것으로서 고유할 형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히려 우리에게 대상들 자체는 전혀 알려지지 않는다는, 그리고 우리가 외부 대상들이라 이름하는 것은, 그 형식이 공간이고, 그것의 참된 상관물, 다시 말해 사물 그 자체는, 그를 통하여서 전혀 알려지지 않고, 알려질 수도 없으며, 그러한 것에 대해 경험 속에서는 결코 물을 수도 없는, 그러한 우리의 감성의 순전한 표상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라는 비판적 주의이다.

 

Der Transzendentalen Ästhetik Zweiter Abschnitt

초월적 감성학 제 2 장

Von der Zeit

시간에 대하여

Metaphysische Erörterung des Begriffs der Zeit

시간 개념의 형이상학적 해명

 

Die Zeit ist 1) kein empirischer Begriff, der irgend von einer Erfahrung abgezogen worden.

시간은 1)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 시간은 1) 어떻게든 경험으로부터 이끌려 나오는 그 어떤 감각적 개념도 아니다.

Denn das Zugleichsein oder Aufeinanderfolgen würde selbst nicht in die Wahrnehmung kommen, wenn die Vorstellung der Zeit nicht a priori zum Grunde läge.

왜냐하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 왜냐하면, 만일 시간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근저에 놓여 있지 않다면, 동시존재 혹은 연속들이 그 자체로 지각 안에 들어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Nur unter deren Voraussetzung kann man sich vorstellen: daß einiges zu einer und derselben Zeit (zugleich) oder in verschiedenen Zeiten (nach einander) sei.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표상할 수 있다: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

→ 단지 그것의 가정 아래에서만 사람들은: 몇몇의 것이 한 때 그리고 같은 때에(동시에) 혹은 상이한 시간들에 (순차적으로) 있으리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