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월 15일에 이런 행사가 있다.

  올해로 26회째라는 건국대학교 철학과 프로메테우스 제전. 이런저런 부침이 있었고 학과제에서 학부제를 거쳐 다시 학과제로 전환되는 동안에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이어져 온 나름 크게 열리는 행사이다. 학과 교수님들이 직접 학회 지도를 위해 시간을 내시고 학부생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1년 공부를 탈탈 털어 나름 논문 형식을 갖춰 학술지를 만들고, 또 학회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도 춤, 노래, 연극 등 여러 방식으로 한 해 동안의 학교생활 정리하듯 놀아제끼는 마당이랄지. 문화제는 꾸준히 이어져 왔던 반면에 학술제는 한동안 열리지 않다가 03년도에 98학번 선배들 주도로 서양철학사 공부하는 모임이 소규모로 재개시켜서 04년도부터 동양고전강독, 서양철학, 독일어강독, 서양철학사, 동양철학사 각기 학회들 생기면서 규모가 커졌고 학술제가 커지면서 문화제가 좀 위축되다가(학부제랑 진입생, 다전공생, 전과생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다른 일도 좀 많아서 그랬다고는 하는데 잘 모르겠고) 나 졸업하면서부터 문화제랑 학술제 균형이 다시 좀 맞추어져 가는 듯. 학부생활의 반 이상은 저 학회, 학술제랑 엮여 있는 나로서는 매년 저 행사가 이어지는 걸 보는 게 나름 감회에 젖게 되는 일인데, 뭐 어설프게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졸업한 선배 나부랭이가 괜히 가봤자 꼰대질밖에 더 되겠나 싶어 몇 년 정도는 안 가고 있다. 이번에는 학생회장이고 학회장이고 죄다 나랑 좀 연이 깊다면 깊은 사람들이라, 또 동기놈들 본지도 오래 됐는데 이번에는 다들 얼굴 비추는 듯해서 갈까 말까 고민 중. 학술제, 문화제 끝나면 철학과 창립 50주년 기념행사가 이어진다는데, 외부 사람들 가면 공짜로 밥이랑 술 주고 거창하게 소개도 시켜주고 그럴 테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가 봐도 좋을 듯. 나는 내일 논문계획발표 결과부터 봐야 하겠다. 이러고 있으려니 내가 '학위논문'이란 것을 써 본 일이 정말로 없는 놈이구나 싶다. 학사논문은 논문이라기 보다 '저 그래도 고대그리스어로 문헌 읽고 쓴 거에요' 뭐 자랑하는 일기나 감상문 수준이었겠고. 이 모양이니 선배로서 낯부끄럽기도 하고 해서 이래저래 공부고 학교생활이고 열심히 애쓰는 사람들 보러 가기가 저어되기도 하는구만.


  『뤼시아스』, 『향연』, 『파이드로스』, 『필레보스』가 말하자면 죄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이게 앎에 대한 사랑을 거쳐서 아름다움 그 자체와 지상에서의 아름다움이 현상하는 방식, 아름다움과 좋음과 관계, 좋음이 다른 이데아들과 맺는 관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플라톤의 철학 내에서는 가치판단, 지향성, 온갖 문제와 관련하여 핵심적인 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좇으며 애쓰는 그것이 무엇이고 왜 그렇게 되는지, 의지와 욕망의 문제도 얘기될 수 있고 정의와 행복이 어떤 관계에 놓이는지에 대해서도 이 사랑이란 것이 문제의 근간을 이룰 수 있을 듯하다. 내가 학부시절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추태 중 하나로 기억하는 몇몇 대학연합의 어떤 학술제도 주제가 '사랑'이었더랬지. '철학사에서는 사랑에 대해 논한 바를 찾을 수가 없어서'라는 말을 해서 이 사람들이 뭘 믿고 학술제를 하겠다고 하는 건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던 기괴망측한 만담회였는데, 뭐 어쨌건 솔직히 중세를 거치면서 뭔가 신의 사랑 말고는 학술적인 연구주제로 사랑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걸고 거론된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긴 하다. 그래도 고대 그리스부터 헬레니즘 시기까지는 꽤나 날리는 주제였건만, 쩝. 뭐 그러거나 말거나 서울대에서 할 예정인 저 학술대회가 무슨 대단한 성과를 내리라는 기대는 전혀 들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해 볼 만한 시도이지 않나 싶기는 하다. 욕망, 욕구, 의지, 기대, 가치, 도덕, 숱한 갈래로 나뉘어 버린 사랑이란 것에 대해서도 사실 철학보다는 다른 분야들이 더 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더 그럴듯한 논리로 각기 고유한 주장들을 펼치는 시대에, 철학의 자기 한계를 절감하기에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전에도 말했지만 이쪽에서 내보일 패가 없는 마당에 다른 분야에서 철학이란 걸 굳이 거들떠볼 필요나 느낄지 의구심이 들어서, '이 안에서 백날 우물안 개구리 씨름질을 해봤자 노답이구나' 뭐 이런 현실인식이라도 공유되면 좋은 일 아니겠나. 문제는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수장께서 이 좁디 좁은 한국 서양고대철학계의 원로이시고, 3부 좌장은 또 내 지도교수님이시라는 것. 뭐 '눈치껏 알아서 기어 나와' 이런 분위기는 아닌지라 딱히 강요받을 일도 없겠지만 어쨌든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 역시 그러거나 말거나 내 논문계획 평가가 더 중요한 문제겠지만. 혹시 궁금한 사람 있으면 가서 구경해 봐도 좋지 않을까 해서 한 번 올려 본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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