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콜로퀴엄 때 너무 일 벌리지 말라는 쪽의 조언들을 한참이나 들어 놓고서는, 이번 콜로퀴엄에서도 결국 같은 종류의 지적을 받았다. 욕심 부리지 않는다고 나름 자부했었는데 말짱 꽝이었달지. 처음에는 반박술, 변증술, 분할술을 다 다루면서도 '『소피스테스』 한 권만 다루는 것이니 크게 무리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었고 이번에는 '변증술 다루려니 to on(being) 해석 문제도 좀 다루고, 자기술어화도 좀 다루고, 거짓 문제도 좀 다루고 하면 되겠지. 중심이니 끝들이니 전체니 부분들이니 하는 얘기 나오기도 하니, 이거 가지고 끼워 맞추면 그림 좀 되겠네'라고 생각했었으나... 뭐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낙관적인 인간인지라(언제부터!?) 수습도 못 할 정도로 일 벌리기 전에 적절히 지적받고 제한받아서 이 즈음에서라도 재점검해 보게 되었으면 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Owen이 symploke eidon 논문 썼고, Sayer(이름 이거 맞나?)나 Silverman, Job van Eck도 있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논문들부터 일단 추려야 하겠다. 어쨌든 잠시 잊고 있었던 '너 플라톤 왜 읽니'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다. 결국 내가 궁금한 건 애초에 문제가 뭐였는가 하는 거다. 명제논리, 술어논리, 양화, 양상, 이런저런 도구들이 등장하고 그 방법론들이 구체화되는 사이에 지금에 와서 당연시되는 것들이, 그러한 도구와 방법론들이 마련되기 이전에 어떤 점에서 문제를 일으켰고 또 그걸 해결하기 위해 어떤 사유과정을 거쳤는지, 그래서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놓쳤던 것뿐 해결되지는 않은 채로 남아있는 그런 문제들이 있지 않을까, 또 그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도 역시나 그 안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기는 하다. 플라톤 철학 안에서는 물론 독립적이기만 한줄 알았던 이데아(대놓고 이데아라고 안 하고 에이도스니 게노스니 하면서 둘러 얘기하긴 하지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든지 심지어 의존하기까지 한다는 게, 어찌 보느냐에 따라서 플라톤의 철학 전체를 발전론으로 볼지 통합론으로 볼지 이 문제까지 얽혀들 것이고, 『파르메니데스』에서 제기된 형상의 자기술어화 문제, 또 이것과 관련해서 『파이돈』에서 등장하는 세련된 원인에 대한 문제, 『에우튀데모스』에서 나오는 거짓불가능성과 모순불가능성, 『크라튈로스』에서 제기되는 언어에 대한 입장들이 다 관련될 테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정지는 운동이 아니다"와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 사이의 간극은 결국 시간과 생성의 문제가 얽혀있는지라, 이게 해결되려면 감각적 대상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지적하는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에서 등장하는 to on과 to me on, 같음(tauton)과 다름(thateron)의 얽힘을 통해 이루어지는 『티마이오스』에서의 시간과 운동이 함께 다루어져야 할 듯하고, 변증술과 분할하고 종합하는 기술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아야 변증술에 대해 가타부타 할 테니 『정치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이래저래 여전히 『소피스테스』가 결정적인 대화편이긴 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더구나 도덕이나 윤리, 가치 문제를 안 다룬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게다가 수학 얘기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일 거라는 아주 개인적인 확신도 있고=_=. 그러거나 말거나 이번 콜로퀴엄에서 한 장을 마무리해서 가져오지 말고 서론과 목차, 주요 참고문헌을 포함한 논문작성계획을 마련해 오라는 하명은 그 뜻을 풀자면 '자네 아직 준비가 안 되었군'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지금 『소피스테스』 붙들고 앉은지가 벌써 몇 해 째인데 이 지경이라니 나도 참 나다. 이전 지도교수님께서 '전체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주요 논지가 전개되는 방식을 정리해 보라'라고 하신 것도 역시나 같은 맥락일 터이다. 요컨데 문헌을 꽉 움켜쥐고 지배하질 못하고서, 게다가 연구사나 연구계획, 그에 따른 견적이랄지 뭐 그런 것도 못 잡은 채로 뭘 쓰겠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씀들이 아니시겠는가. 게다가 이번에 가져간 3장 초안 안에서만도 being에 관련해 complete와 incomplete 구분, predication과 copula 구분, existential 문제, 몇 사람 지지하지도 않는 생소한 'idia physin exein(to have its own nature)'으로서의 being 해석까지 다루려 들고 뭔가 시도되지도 않은 '중심과 끝들' 얘기를 마구잡이로 적용시키려 들지를 않나 은근슬쩍 이 두 가지로 자기술어화 문제 다 풀리는 것처럼 얘기를 하지 않나, 막 나가다 못해 이 얘기들로 초중반까지의 분할문제도 해석해 버리려 하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옛말의 전형적인 사례 아니겠나. symploke eidon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자료 조사부터. 뭐 그래도 여전히 이 짓거리가 재밌고, 그냥 욕만 먹는 게 아니라 그럴수록 조금씩 또 나아갈 구석이 보이니, 그야말로 용기를 내야만 한달까. 내용요약은 2주 남았고, 계획발표는 5주 정도 남았고, 이제 좀 차근차근 숨 좀 골라 가면서 스토아 자연학 강독도 마무리 하고, 소피스테스 단편들 마무리도 하고, 몇 주를 날려먹은 『파이드로스』도 슬금슬금 다시 시작해야 하겠다. 여전히, 평생 이렇게만 살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심정. 다만 확실히 실력이나 노력이 이 지경으로 밑바닥이어서는 가망이 없긴 없다. 더 빡세게, 더 치밀하게, 더 악착같이, 오키오키.

2. 사회성지수란 게 있다면 지금쯤 아마 난 바닥을 치지 않았을까 싶다. 학부 때는 뭔가 의리랄까, 약간은 어떤 사명감이랄까 그런 것도 더해서, 그야말로 소위 '술 먹고 으쌰으쌰'하는 것도 있고 하여 뭐 시키는 거 없어도 이래저래 사람들 챙긴답시고 귀찮게 굴고 일 벌리고 사람 모으고 이리저리 나돌아다니고 그랬는데(그래 봤자 결국 다 학회니 학생회니 그런 쪽이었지만), 군대 가서는 기왕 온 거 좀 빠릿빠릿하게 굴고 싶어서도 그렇고 귀찮은 거 싫어서라도 별 문제 안 일으키고 가끔 싸바싸바도 해가며 적당히 챙겨먹을 거 챙겨먹고 그리 살았고, 이러니 저러니 해서 학부 졸업하고 다른 곳으로 대학원을 들어가서는, 이게 다 뭔가 싶게 되었달지. 사실은 그리 살갑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그런 인간은 본래 아니고, 연구실도 안 쓰고 강의 들을 때 말고는 대학원 사람들은 교수든 선배든 거의 만날 일이 없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돈 받는 쪽으로는 시키는 일이야 하지만 전처럼 뭔가 '으아~ 의리 아니겠습니까!?' 뭐 이런 건 하게 되질 않고, 여전히 자잘한 행정업무나 때마다 찾아 뵙고 인사드릴 일도 있고 해서 사실은 그런 거 다 잘 하는 게 나쁜 일도 아니고 오히려 필요하긴 한데, 모르겠다. 전 같으면 정말 간혹가다 내 스스로도 '아차' 싶은 짓을 할 때나 듣던 지적들을 요새는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군대도 갔다 오고, 한창 막내급으로 바삐 다녀야 할 처지에 눈치도 없이 안하무인으로 왜 그러고 다니냐는 듯한 눈치 혹은 직접 그런 지적들. 앗싸리 능력이나 출중하면 그냥 싹통머리 없는 놈이겠거니 하고 아무도 안 건드리겠지만, 능력은 개뿔 바닥이나 벅벅 긁고 있는 주제에 내가 왜 이러는지. 그냥 만사 지쳤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미래조차 풍요와 안락과는 영 인연이 없고 그냥 어디 골방에서 고독사하는 결말인데(그나마 그리 죽을 방이나마 있다면 다행 아니겠나) 그런 꿈이나마 지키려면 굼뜬 머리와 썩은 몸뚱이로는 딴짓하고 한눈 팔 여지가 없다면 없는 처지인지라, 진작에 그리 했어야할 집중이란 것을 하려고 그런다는 핑계는, 뭐 그야말로 핑계이고 변명일 따름이겠지. 나중에라도 조금이나마 공부하는 삶이라는 게 기반까지는 아니더라도 흐름만이라도 잡힌 다음에는 근 2~3년 막돼먹은 새끼로 살아온 시간들을 사죄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부 때 은사님들께도, 지금 대학원 와서 뵙게 된 은사님들께도 마땅히 받으실 만큼의 감사와 존경을 못 드렸다는 건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내 탓이긴 하니. 연애를 하면 좀 말랑말랑하니 좀 그렇게 나아지려나? 음, 그럼 앞으로도 가망이 없군.

3. 물론 철학계란 게 밖에서 손가락질하고 욕하는 것과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게 학계이긴 하다. 내세울 학회와 학술지가 마련되지 못했고, 애초에 사람 자체가 적은 마당에 그나마도 세대별로 몰려 있어서 그 몰린 세대가 어느 지역으로 유학을 다녀오고 또 국내에서도 어느 학교 어느 교수 중심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느냐에 따라 주제나 방법론까지 쏠리고 흔들려서 자생력이랄까 그런 걸 말하기도 어렵고, 그게 앞으로 사정이 나아질까 하고 묻는다면 당장에 주요 문헌들에 대한 번역, 제대로 된 사전의 편찬, 그러고 나면 연구사에 대한 정리도 필요할 거고 이래저래 한참 걸려 온갖 고생 다 해야 겨우 넘을 산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그나마 어떤 자부심 덕일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게 있을지 여하간 비교적 사정이 깨끗하다면 깨끗한 편이고, 해야 할 일이 막막하리만치 많다고 해서 다들 등돌리고 있는가 하면 그 역시 아니고, 국내에서든 국외에서든 활동하고 교류하는 사람들, 그런 움직임들도 아예 없지만은 않은 마당에 '망했어, 다 망했어, 세상은 똥이야, 이히히 오줌발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생각한다. 이성과 주체의 신화에 빠져 있다느니,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전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느니, 사실 이런 얘기들은 국내의 학문연구사를 기준으로 보자면 좀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남의 얘기랄 수도 있을 듯하고. 우리 전통이 아니니 그렇긴 하지만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다행히도 딴 나라 사람들이 열심히 해준 덕분에 그들의 시행착오는 반복하지 않고 그나마 비교적 빠르게(그래봤댔자 50년 100년 얘기겠지만) 좇아갈 희망도 없지는 않고, 그럭저럭 세상을 굴러가지 않겠나. 물론 3년이 다 가도록 전공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며 서양고대철학 자체에 위기감을 느끼기는 하는데, 뭐 그래봤자 깨작 3년이기도 하고, 학부생들이 『법률』로도 졸업논문을 쓰고 『소피스테스』에다가 엘레아의 제논까지 다루는 세상이다. 나름 희망적이라면 희망적이지 않나, 하하하.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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