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리스토텔레스의 categories와 관련하여, 혹은 to on, being의 다의성에 대한 논의와 관련하여 이야기되는 것이 focal meaning이다. 결국 내가 하려는 말은 이러한 논의를 가능케 하는 발상의 단초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화편에 대해 구문론적 해석을 시도하던 20세기 중후반까지의 여러 학자들에 따르자면 to on은 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반면 이에 대한 반론으로 계사 혹은 논리적 연산자로서 to on이 어떻게 문헌에서 언급되는 그러한 종류의 본성, physis를 지닐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긍정과 부정, 연언, 선언, 양상 등이 과연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metexein, koinein 등등의 동사들은 물론 명사화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그 이론의 유효성일 수도 있겠다. 본질주의가 아직도 유효한가? 구성주의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편이긴 하다. 주워들은 바에 따르면, 정확히 조영기 선생님 입장을 내 나름대로 이해한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리철학 내에서 구성주의적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뭐 결국 그 자신의 실재론과 정합적이지 못한 탓에 폐기되는 것 아닌가 싶기는 하지만. 다른 쪽으로는 수학적 진리치의 정당화 문제라든지 그런 것도 있겠고, 그렇다고 그의 실재론에 맞추어 가자니 경험 가능한 현상들과 수학적 대상들 사이의 간극이 커서 그걸 시도하기도 뭣하고(완전한 구체라든지 경험 가능한 점 같은 것을 말하기는 좀 뭣하지 않은가). 의미들이 분화하고 상호에 결합하는 와중에서도 그 자체를 그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어떤 의미의 중심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심을 기준으로 정의가 성립하고 중심과 부분들의 결합상태에 근거하여 이를 모사하는 진술의 진리치가 확정된다는 것은 오늘날의 논의에 어디까지 적용, 아니, 그 논의에서 어느 정도까지 검증이 가능할까? 우리의 사고와 판단에 합치하는 어떤 실재, 그런 것은 단순히 '철학적 질병'이기만 한 것일까? 논리적 실재 같은 것은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일까? 플라톤이 말하려던 이데아라는 것이 그런 것이 맞기는 한 건가? to on은 불특정의 무한한 포화상태의 긍정이고 to me on은 또 역시 한정 없는 부정이다.  to me on에 못지 않게 to on에 대해서도 같은 만큼의 당혹스러움에 빠질 수밖에 없고, 양자를 동시에 헤쳐 나아가야만 한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 변증의 기술을 지니는 자가 속한 그 곳의 밝음은, 소피스테스가 속한 to me on의 어둠이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그 만큼이나, 또한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밝아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complete einai와 incomplete einai, 둘 사이의 구분과 관련하여 존재사와 계사, 다시 형상들의 결합과 분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라는 표지로서 등장하는 능동과 수동의 능력, 그 움직임, 논문을 써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모르겠어서 어찌 써야 할지 앞이 캄캄하네.

2. 『파이드로스』 초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신들린 광기를 세 차원으로 구분한다. 사제나 신관의 경우, 입교와 의식을 통한 죄의 정화, 예술가의 영감. 신은 전선하며 신으로부터 유래한 것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므로 신의 힘으로 간주되는 광증 또한 위대하고 고귀한 것이다. 초중기 사이의 여러 대화편들에 등장하는 시인과 예언가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이러한 찬사는 기이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그건 오늘날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읽는 독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다. '시인을 추방하라니! 무식한 소리!' '예술을 모르는 고리타분한 무지랭이!' 뭐 이딴 개소리들을 지껄여들 대시는데, 씨발, 좀 자세히 읽고 씨부릴 수는 없는가.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 가지고 덮어놓고 욕부터 씹어대는데 짜증이 치민다. 『국가』에서 비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도덕-윤리적 교육의 효과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 가치와 관련된 비판적 사고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치밀한 철학적 체계 내에서 반추되어야 한다. 여러 분과학문들을 익히는 것, 그 학문들 사이의 관계와 위계를 파악하는 것, 이런 것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자 아예 이로부터 멀어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철학 내에서 윤리학을 위치시키고 있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이 와중에 사회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이란 이러한 과정의 출발단계이고, 검증된 윤리적 판단들을 엄정하게 선별하여 확신의 차원에서 제공하는 방식 말고는 교육의 다른 가능성을 찾아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육의 수단에 한정하여 문학에 대해 논하는 것을 그냥 다짜고짜 문학 일반을 싸잡아 까내리는 것으로 보는 독해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애초에 그냥 안 읽고 얻어 듣고서 씨부리는 거라는 확신만 들 뿐이다. 『이온』이나 『히피아스』 등등에서는 오히려 예술의 독립성을 확보해 주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예술은 결국 학적 기술이 아니다. 이론수업으로 예술창작자를 양산해낸다는 생각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근거를 마련해준다. 예술이 학문이 아니라는 것, 그게 예술에 대한 비난이라고 이해할 여지가 어디 있는가? 결국 학문과 예술을 상호 독립적인 것으로 보는 한에서 예술에 대한 『파이드로스』에서의 찬사가 이해 가능한 것이 된다. 그것은 불가해한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들끓는 심적 충동, 일종의 광기, 그것 없는 예술은 결국 논문의 형식으로 환원될 것이다. 다시, 플라톤의 예술 비판에 대해 독단적 저평가를 내리는 자들은 학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착각을 하곤 한다. 그것이 감동을 일으키길, 어떤 적극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길, 과감한 가치판단을 동반하길 기대한다. 아, 글쎄, 모르겠다. 그런 치들이 학문의 영역에서는 영감을 논하고 치기어린 재기발랄함으로 논증의 엄밀함을 대체하려 들고 예술로 넘어가서는 창조와 반성을 혼동하여 문학비평문학이랄까 뭔가 괴이한 짓거리들을 시도한다. 모른다고 닥칠 필요는 없겠지. 나 역시도 모르는데 지껄이고 있으니. 씨발, 서로 걸지게 욕이나 뇌까리면 그만 아니겠나.

3. 여전히 뜬금없는 칭찬들에 거부감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처음 몇 번 겸손을 떨다가 고맙다느니 어쩌니 몇 마디 지껄이고 한 귀로 흘려 버린다. 내가 듣고 싶은, 혹은 필요로 하는 '긍정적 평가'는 실체를 가진 평가이다. 어떤 분석이 유효하고 타당하다든지 어디 논증이 깔끔하다든지 그런 식의 것들 말이다. 두루뭉술하고 구태의연한 칭찬들은 오히려 내 자괴감을 북돋운다. 내 상황을 봐라. 철학과랍시고 몇 년을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면서도 기초조차 못 갖춰 아직도 헤매고 있는 와중에 학위 따겠답시고 논문 쓴다고 설레발을 치는 쓰레기, 학부에 자생력을 갖춘 자발적이고 체계적인 학회를 정착시켜 놓으리라 해놓고서는 타성에 젖어 꼰대질 하는 애새끼들과 강의 듣듯(물론 강의에서도 그딴 태도가 맞는 게 아니지만) 몸뚱이만 덜렁 들고와 주둥이만 놀리는 애새끼들을 남겨둔 채 썩어가는 꼴을 멍하니 지켜볼 뿐인 퇴물 꼰대, 내 사람이니 내 새끼니 어쩌니 저쩌니 해가며 얼싸안고 꽥꽥거리던 주제에 다 잃고 다시 골방에 들어앉은 자폐증 걸린 것마냥 우중충한 젖은 장작같은 새끼, 몇이나 죽고 또 죽어 나가도 낯짝 두껍게 멀쩡히 대가리 쳐들고 살아서 돌아다니는 염치 없는 오라 지고 염병할 놈, 좋게 봐줄 구석이 없다. 그리고 결국 예상했던 지점들마다 적확한 비판과 힐난 그리고 지적질이 등장한다. 전 지도교수님께 욕먹고 현 지도교수님께 또 욕먹고 다른 선생님들께 지적받고 하나 고치려 하면 또 하나 욕먹어서 돌려막다가 인생 쫑날 판이다. 결국 나와 부대끼지 않고 나와 섞이지 않는 일정 거리 떨어진 사람들만 적당한 동정과 연민을 담아 좋은 소리 몇 마디를 적선하듯 던져줄 뿐이다. 물론 욕을 하든 칭찬을 하든 다들 나보다 한참이나 먼저 훨씬 더 나은 방식과 결과를 통해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인지라 그 평가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은 든다. 실제로 그런 지적까지도 들었고. 그러나 어쩌겠나, 결국 이 지긋지긋한 꼬라지를 가장 가까이서 썩은내 참아가며 머리털 쥐어 뜯으며 참고 버티고 끌고 가는 건 나 자신인 것을.

4. The Great Porn Experiment: Gary Wilson at TEDxGlasgow. 자, 다들 보고 야동 끊읍시다.

5. 학기와 연차로 계산되는 동네에 계속 붙어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은 까닭에 입학년도하고 출생년도를 외우고 다닐 뿐 딱히 내가 몇 해를 살았는지 헤아리고 다니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문득문득 만나는 사람들과 나이 차이를 꼽아 보게 될 때면 약간 어색한 기분을 느낀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어차피 거의 공부 관련한 얘기들만 하게 되니 나이 얘기는 피차 필요가 없고, 잘 읽고 제대로 말 전하면 위아래가 뭔 상관인가. 나이 많은 어르신들 뵈면야 그냥 끄덕끄덕 꾸벅거리면 그만이니 그것도 별 상관은 없고. 나보다 어린 사람들도 공부 말고 다른 일로는 만날 기회조차 없으니 결국 뭐가 틀렸네 맞네 뭐가 빠졌네 너무 나갔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들만 주고 받으면 그만이고. 결국 나이 얘기를 왜 해야 하나, 뭐 그런 생각에 조금 뻘쭘해진다고나 할까. 그런데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이제 나랑 뭔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고 추억을 공유할 만한 관계를 맺는다는 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것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앞으로도 운만 좋다면야 살아온 것의 곱절만큼을 더 살 수도 있는 것이겠지만 다들 취직하고 가정 꾸리고 해서 동년배들과는 더 어울려 지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 되어가고, 10년 차이, 20년 차이 넘어가면 애초에 공감대랄 것이 없어질 테고, 그럼 또 거추장스럽고 자질구레한 그 소위 '알아가는 과정' 따위를 거치느라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어려울 테고, 이래저래 대인관계와 관련해서는 참 실속 없는 인생이었지 싶다. 딱히 대단한 욕심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리 되었나. 뭐 불알친구라 할 만한 새끼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들이나 나란 놈이나 대가리 굵어지고 나서는 시덥잖은 흰소리나 쫌 하다가 취직이 어쩌니 연애가 어쩌니 그러저러한 일상다반사나 지껄일 뿐이고. 어쩌면 '도반' 같은 것을 기대했었는지도 모르겠고, 연애도 실은 좀 일찍부터 해서 오래 시간을 들여 익숙해진 사람에게 헌신하고 싶은 것이지 생짜 모르는데 형식적으로 예의 차리고 어쩌고 하고 싶은 건 아니라서, 이러니 저러니 다 그냥 글러먹었지 싶다. 아예 체념을 하기 위해 눈을 억지로 높여 보기로 했다. 키 크고 몸매 잘 빠지고 얼굴 예쁜 클럽에서 잘 나가는 부잣집 직장여성. 이 정도로 잡고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혼자 늙어 뒈질 수 있겠지. '도반'이야 뭐, 우둔한 대가리에 게으른 몸뚱아리로 구질구질하고 추레하고 비굴하게 학문 변두리 언저리에 묻혀 가는 먼지 같은 찌질이와 누가 뜻을 같이해 함께 절차탁마하려 들겠나. 이렇거나 저렇거나 씨발 좆됐지.

6. 왜 이렇게 천지사방 똥오줌 못 가리고 날뛰는 '철학도' 씹새끼들이 판을 치기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늙은 거나 어린 거나 할 거 없이. 늙은 것들이야 뒈지면 그만인데, 현실의 어려움도 파악 못하고 최소한으로 요구되는 학문의 기초도 파악하지 못한 채로 '교수가 됐으면 좋겠는데 칸트나 지젝이나 플라톤이나 공자는 이러니 저러니 하고요' 하고 씨부리는 헛바람 가득 든 풍선같은 위태로운 청춘들을 보노라면 싸대기를 갈겨서라도 정신차리게 해주고 싶다. 이거야말로 그야말로 더할나위 없이 오지랖 꼰대질인 걸 아는 까닭에 실제로는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도 않긴 하지만서도. 돈도 없고 실력도 없고 학벌도 없으면, 이 새끼들아, 끽해야 내 꼴 나는 거다. 당장에 살아남을지 그 자체도 불확실하고, 이 악물고 버텨도 당연히 교수는 물 건너 간 거고 강사도 급이 있어서 강의 하나 못 받고 길거리 나앉아 거지나 돼서, 왜 늬들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대낮부터 술 취해서 방언 터진 산발한 거렁뱅이 노숙병신들 있잖냐, 딱 그꼴 나기 십상인 거야. 그래도 너만은 괜찮을 것 같지? 막 학부논문은 천재 탄생의 신호탄 취급을 받고 석박사 논문은 학계의 판도를 뒤집고 2천년 서양철학 역사를 까뒤집고 공맹과 노장과 석가를 씹어먹다가 역사에 길이 남을 것 같냐? 그냥 니 중간 기말 과제물이나 다시 딱 각 잡고 앉아서 쳐 읽어 봐, 등신들아. 늬들 스스로 늬들 수준을 파악하지 못하면 단 한 걸음도 못 나아가는 거다. 수준이 남달랐다면 누군가는 너에게 귀띔이라도 해줬을 건데, 하다못해 '같이 다듬어서 학회에 내거나 해 보자' 소리라도 하며 도와주려고 했을 텐데, 그런 적 없으면 말이다. 씨발, 주요문헌 한 두 문장만 지나가도 오독에 빠지는 마당에 무슨 허무맹랑한 꿈들을 꾸는 건지. 이러니 철학이 힐링이니 씨발 좆소리가 나오는 거지. 구원은 종교 가서 찾아라, 좀.

7. 뭔가 더 끄적거리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이제 매일 여섯 시간씩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소피스테스』나 물고 뜯어야겠다. 그저 이런 삶이 살아있는 날까지 계속되기만을 바란다. 갈수록 이게 얼마나 크고 무거운 꿈인지 실감하게 되어 조금 지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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