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니 어지럽네. 그냥 이제부터는 개소리 넋두리 해 놓은 것도 남겨 두기로.

1. 소피스테스는 모든 기술들, 전문적인 앎들을 논파해낼 수 있다고 단언한다. 또한 그러한 반박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반박하는 자가 그 문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건전한 반박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데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왜 한 개인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아는 일이 불가능한가? 그것은 현실적인 한계인가 혹은 논리적 불가능인가. 유(類)의 수준에서 제화공은 제화공인 한에서 조타수일 수 없다. 만일 모든 것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다. 반면 전문적인 앎들 각각을 논파하는 개별 사례를 생각해 보면, 상호에 모순되는 주장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A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A임을 보임으로써 논파하는 자가 ~A를 주장하는 또 다른 사람에게 A를 내세워 논파를 하는 일은 가능한가? 이러한 문제들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현실적 한계를 들어 누군가가 모든 것을 아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면, 소피스테스에 대한 첫 번째 문제제기는 유효성을 상실한다. 알 수도 있다. 혹은 테아이테토스가 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문을 남겨둔 채 소피스테스의 반박술은 충분히 정당화되지 못한 저 전제를 근거로 하여 모방술로 간주된다. 너는 장군도 제화공도 목수도 아니다. 너는 기하학자도 천문학자도 아니다. 너는 예언가도 아니며 시인도 아니다. 그러나 너는 신에 대해, 정의에 대해, 씨름과 장사에 대해 논하며 너와 대화하는 모든 자들은 너에 의해 논파된다. 너는 하나이면서 여럿이자 모든 것이다. 이런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면 네가 하는 일은 마치 소꿉장난과 같은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모래로 성을 쌓고 돌멩이들을 가져다 전쟁놀이를 하듯, 너는 하늘 위의 모든 것들과 땅 아래의 모든 것들을 지어낸다. 그 어느 하나 진짜가 아니고 참이 아니다. 너는 화가나 조각가와 같이 무언가를 따라 그리고 따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을 본을 따 거대한 조각상을 세울 경우 실제 본이 되는 사람과 같은 비율로 더욱 크게 만들어진 조각상은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작아 보이고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커 보여 커다란 발에 작은 머리를 가진 기이한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반면에 이러한 왜곡을 고려하여 조각상의 위로 갈수록 그 크기를 과장하고 혹은 아래로 갈수록 이것을 축소한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그것이 실제의 비율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소피스테스, 너는 아마도 이러한 조각상을 만들어내는 조각가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조각상은 본이 되는 실제의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거짓 사람이다. 너는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소피스테스는 반문한다. 나는 거짓을 말하는 자이고 모상을 만들어내는 자인가? 그렇다면 모상이란 무엇인가? 거짓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이 아닌 것을 무엇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아닌 것, 그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소피스테스에게 거울을 바라보라고, 수면에 비친 상들을 보라고, 그림들을 보라고 닥달한다. 그러나 그는 눈과 귀를 막은 채 묻는다. 어떤 것에 대한 것이면서 어떤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울에 맺힌 상은 누구의 상도 아니다. 물에 비친 상은 무엇의 상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없다. 말은 어떠한가? 생각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그것들이 가리키고 본뜨는 그 무엇 자체인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말이나 생각이 있기는 한가? 심지어 거짓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 자체도 아니고 그 무엇을 본 뜨지도 않은 것이 바로 그 무엇을 가리키고 그와 관련하여 거짓이라 이름이 붙는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소피스테스는 파르메니데스의 뒤에 숨는다. 모든 것은 무엇인가이다. 무엇으로서 바로 그러한 것만이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애초에 무엇인 것일 수 있다. 그 외에 아무것도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가리킬 수조차도 없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 '것'이라는 이름마저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는 묻는다. 나는 불가능한 일은 가능하게 하는 자인가? 아니다. 말과 생각과 그림과 수면에, 거울에 비치는 상들과 땅에 드리우는 그림자 각각을 모두 그 자체로 무엇이라 말할 수 있다. 모상은 원본과의 관계와 따로 떼어 놓은 이후에도 그 나름의 규정성을 갖는다. 그림자를 그림자라 부르는 일은, 그리고 그 그림자를 어떤 무엇의 그림자인 것으로 그러나 그 무엇 자체는 아닌 것으로 부르는 일은, 그리 생각하고 가리키는 일은 가능하다. 좀 더 정확히 너를 정의하자면, 너는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켜 그려내고 조각해내는 사기꾼이다. 소피스테스는 그 말을 일부분만 받아들인다. 좋다.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에 대해 말도 하고 생각도 하며 그것을 따라하기도 하고 본을 떠 모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말도 생각도 그림자도 모두 그 나름대로 무엇인가이며 자기 자신과 동일하고 다른 것들과 다른 의미있는 것들이라면, 거짓은 무엇인가? 말은 그 자체로 무엇인 어떤 것에 대한 것이며 또한 이러한 관계로 따로 떨어져서도 나름대로의 뜻을 가진다. 생각 또한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대한 나름의 무엇인가이다. 여기에 무엇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 들어 오는가? 거짓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지 않은 것을 무엇으로, 무엇인가를 또 무엇 아닌 것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말도 생각도 그것들이 관계하는 모든 것들도 저마다 모두 무엇이지 무엇 아니지 않다. 왜곡된 비율이란 무엇인가? 과장과 축소를 겪은 조각상이든 원본의 비율을 그대로 따른 조각상이든 그 각각은 조각상이지 않은가? 그 조각상들이 본으로 삼은 누군가는 또한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사람 아닌가? 어디에 거짓이 있는가? 오직 진실뿐이다. 모두가 참이다. 다시 파르메니데스의 뒤로 숨은 소피스테스는 말한다. 무엇 아닌 것, 그것은 불가능하다. 무엇인 바의 것, 그 무엇임, 오직 그것뿐이다. 아무런 틈도 남지 않는다.

2. 소크라테스는 정치하는 인문주의자이다. 아테네 인문정신의 뒷받침 없이 당대 이전까지 유래가 없던 민주주의의 그 눈부신 발전을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플라톤에 의해 묘사되는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까지 당대 자연철학자들의 논설들을 탐구했다. 당대의 산술과 기하와 천문은 수학적 계산을 통해 그릇된 전제마저 정당화시킬 정도로 정교했다. 그들의 논리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에 대해, 다시 보편자와 개별자의 관계에 대해, 무한과 극한과 수렴과 발산에 대해 감지하고 고찰하는 데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이러한 기존 학설들에 대한 수용은 비단 소크라테스에 국한되어 있던 것이 아니다. 소피스테스로 분류되는 일단의 연설가들, 교육자들, 그들 또한 이러한 지식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논리적 형식으로 뒷받침되지 않고 자연에 대한 당대의 관찰결과들에도 부합하지 않는 사회적, 정치적,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전통의 신념들에 의문을 던진다. 질문은 파괴적이다. 아무도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가치기준을 정당화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없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좋은가? 이에 대해 모두의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은 없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가면을 쓴 플라톤은 반문한다. 과연 어떤 객관적 기준 없이 개별적 관찰과 추론의 진리가 보장될 수 있는가? 만일 한 마리의 개를 향해 '저것은 개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참일 수 있다면, 그것을 참으로 만드는 근거와 기준이 있을 것이다. 만일 살인이 나쁜 것이고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면, 여기에 대해서도 어떤 근거와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 판단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토대 없이는 우리는 아무런 판단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근거가 되는 기준이다. 물론 우리는 모른다. 좋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옳음의 궁극적인 기원이 무엇인지, 그러한 것이 정말로 있기는 한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제화공이, 시인이, 예언가가 옳고 그름을 논한다. 수사학과 논리학을 등에 업은 자들이 이에 대해 온갖 역설들을 만들어내며 되묻는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답이 없음을 확인한다.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되풀이하여 말한다. 나는 대중을 상대로 민회에 나서서 말하지 않는다. 나는 한 개인으로서 또 다른 한 사람을 향해 나 자신의 무지를 가지고 묻는다.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시험한다. 시험을 통과하는 자에게서 나는 배울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 나은, 좋은, 올바른 삶을 살 것이다. 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그는 정치하는 인문주의자인가? 그는 정말로 철학학이 아닌 철학함을 보여주고 있는가?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것은 정치적인 것인가? 그리고 인문과 정치의 결합은 그렇게 간단하고 선명하게 도식화될 수 있는가? 그는 무엇이 옳고 좋고 아름다운지에 대해 단 한 번도 직접적으로 단언한 일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것을 말할 수 있는 신적인 지혜에 닿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을 사실판단의 지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매개해야 할 그 커다란 간극 역시 해결하지 못하였다. 병사로 전장에 나아가 전투를 수행하고, 제비뽑기로 선출된 지위를 맡아 의무를 다하는 과정에서 그는 한 개인으로서 반성한다. 왜 폴리스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폴리스의 명령은 대중의 명령인가 혹은 그 도시의 법이 정하는 명인가? 인문학의 지적동력은 민주화를 촉발시키지 않는다. 무역의 중심이자 소단위 폴리스들의 연합으로서 부의 축적이 가능하였고 사회안정이 용이하였던, 그리고 노예제를 통한 노동과 학술 및 정치의 분업이 가능하였던 사회에서 노동을 담당한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그 작은 사회단위 각각에서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에, 정말로 플라톤의 인문정신과 소피스테스들의 수사학적 선전활동들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는가? '좋은' 민주주의라면 거기에는 그 구성원들 각각의 올바른 정치적, 윤리적 판단이 가능한 정도의 인식수준이 요구될 것이고 그렇다면 인문학의 부흥이 요구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했듯 올바른 가치판단 자체가 이미 문제시된다. 그리고 설령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경험적으로 검토된 전통적 가치들과 사회적 통념들을 기초로 상식적인 수준의 윤리를 체득하고 산술과 기하와 천문을 거치며 오랜 시간 추론의 형식적 절차를 익혀 분과학문들의 위계와 질서를 파악하고 그 근저에 숨겨진 공통의 원리를 고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이후에, 만일 정말로 가능하다면, 윤리적 판단의 근원적 토대, 객관적 기준을 직관하고, 그 이후에도 이 모든 교육의 성과를 가지고 실제 정치사회에서 실무를 통해 훈련을 거친 자들만이 비로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이게 『국가』에서 수호자로서의 철학자가 거쳐야 하는 교육이자 그에게 요구되는 실천의 조건이다. 그래서 '좋은' 민주주의에서는 사실 여러모로 민주주의 자체가 필요치 않다. 모두가 철학자라면 판단에 상이함이 없을 것이고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모두가 비효율적으로 정치에 얽혀들 이유가 없다. 다른 한편 저 모든 과정을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빠짐없이 거친다는 것은 각각의 능력차도 사회적 분업의 필요성도 고려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물론 대중교육, 의무교육이 강화되면서 근 20년 가까운 교육이 개별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에게 시행되고, 전문연구자 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시민사회 구성원을 양성해 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미국식 대학교육은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매개를 고려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된 점은 법과 정치에 대한 현대의 이해이다. 즉, 플라톤과 그의 대변자로 등장하는 대화편 속 인물 소크라테스,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서의 이야기이다. 소피스테스들의 경우에서 보이듯, 논리적 형식과 적절한 수사에 대한 훈련이 윤리적 판단에서 산출해내는 결론은 답 없음이다. 그 답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오늘날 훌륭한 민주시민의 태도이기도 하다.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작태는 소통이 불가능한 일방적 폭력으로 귀결할 따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최소한의 합의점으로서 법이라든지 시장경제 내에서의 '이익'이라든지 하는 여러 기준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자연권'이니 '인권'이니 하는 것까지도 암암리에 전제되고 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인문정신은 이러한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소피스테스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결론으로서 '답 없음' 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따져 물을 수 있고 반성할 수 있으며 좀 더 검토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민주주의가 어느 지점에선가 타협하는 바로 그 상식적인 한계를 따져 물으리란 점에서 적어도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의 친구라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뭐 이 나라에서야 그나마의 상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차에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도 우스운 얘기이긴 하겠다. 실천이 함께하는 학문이란 학문의 이상적 상태가 아닐까 한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엄밀함과 정직함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괴리를 감내해낼 필요도 있다고 본다. 그 간극에서 비약해 버리면 학문과 무관한 실천이 남을 뿐이지 않나. 다행히도 개인은 학자이기만 하지도 않고 사회인이기만 하지도 않은지라 그 둘 사이를 넘나들며 살아갈 수 있다. 학문의 제 역할을 다 해낼 때까지 개인은 그저 양쪽을 바쁘게 오가며 두 가지 책무 모두에 충실하게 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무책임한 소리이긴 하다만.

3. 한 두 걸음 정도 앞서 가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 연구자에게는 좋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 보면 아예 내 길과 동떨어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딱히 실감할 수 없을 만치 능력이나 조건에서 차이가 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 어느 중간 즈음의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말로야 건대 스승님들, 서울대 스승님들, 정암 스승님들 그리고 여기저기 선배들 얘기를 하면서 혹은 인터넷에서 만난 제도권 안팎의 연구자들을 언급하며 '학문한다고 굶어 죽는 건 아니네, 10년 뒤까지는 버티는 사람이 있네, 20년 뒤에는 저렇게 버티고 사시네' 뭐 이런 생각을 입밖에 내곤 하지만, 당장에 학위논문에 쩔쩔매고 조교일 하며 첨삭 하나마다 자괴감 한 번씩 떠올리게 되고 이제는 습관이 될 법도 한 강독준비도 모래 씹듯 어렵고 불편한 마당에 이런저런 일들 다 거치고 무사히 살아남은 사람들을 보며 위안을 삼는다는 게 정말로 와닿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종종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나 대충 타협하고 적당히 넘어가며 이리저리 빠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정직하고 성실한 길이 어렵기는 하지만 어쨌든 끝까지 이 악물고 버티면 넘지 못할 정도의 고비는 없는 것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나 자신이 잘 하느냐 못 하느냐, 그 결과가 어떻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긴 하다. 학계에도 사회에도 아무런 기여가 없는 짓을 한다는 건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일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면 어쨌든 경제적으로도 제한이 생기고 연구환경도 유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재능 못지 않게 사람들이 기피하거나 미처 주목하지 못해 방치된 고단한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뚝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학문이란 것을 더 넓게, 더 길게 볼 필요가 있고 자신의 한계를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일 필요도 있다고 본다. 몸으로 부대끼며 견디고 버티는 것, 미련하게 들이미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히 필요한 일일 수 있다. 타협하지 않고 정직과 성실을 끝끝내 지킨다면 물론 재능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그 길은 더디고 고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에 사람이 필요하고 손 하나가 아쉬운 길들이 차고 넘친다. 강상진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의 해석을 기다리는 문헌들은 차고 넘친다.' 옛 선배 하나는 칸트 전공하겠다고 독일 갔다가 지도교수 면담 때 이런 일을 당했더랜다. 독일에서 그간 나온 칸트 관련 논문들, 연구서들, 주석서들을 연구실 한 가득 쌓아 놓고, '여기에 뭘 또 더하겠다고?'라고 물었더래나 뭐래나. 그러나 그 사이에 칸트와 칸트 연구자들이 시대적 한계로 인해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정보들도 끊임없이 쌓이고 있고, 국내에 소개되지 못한 중요한 연구서들도 수두룩하고, 어떻게 그것을 교육할지, 어떤 부분에 접목시킬지, 무엇을 받아들이고 또 비판할지, 일들은 여전히 많기만 하다. 플라톤에 대한 연구가 200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이어지는 이유 중에 하나도 그 비슷할 것이다. 물론 두렵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나만 뒤쳐지고 나만 부족해서 결국 나만 쫓겨나는 것 아닌가 겁이 나고 불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 뒤에는 분명 일종의 오만도 숨어 있다. 내가 좀 더 나을 수도 있으리라는, 더 훌륭하고 뛰어나서 남들의 눈에 띄고 좋은 평가를 받을 그런 결과를 내놓을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학문이라면, 지난 학문의 역사들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여지가 있다. 학문의 진행이 그 위에 또 쌓이고 쌓이며 조금씩 나아간다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그러나 빈틈을 채우고 성긴 곳들을 메우고 다져가며 무명씨로 잊혀져간 숱한 연구자들 없는 학문의 역사를 생각하기란 그야말로 불가능하다. 어렵고 힘들지만 버텨야 하는 지점, 그렇지만 자신의 한계 내에서 감당할 수 있는 지점을 정확히 판단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속도와 높이를 기준으로 한 익숙한 평가에 물들어 버리면 자기 자신의 자리도 그 자리에서 전체에 대한 조망도 모두 잃어 버릴지도 모른다. 괜찮다. 모두가 너를 버려도 학문은 기다리고 있다. 그걸로 충분하다. 막말로 못 해내면 내쳐지면 그만이다. 그렇다고 해서 목이 잘리는 것도 심장이 먿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 자신에게 하는 말들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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