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er ist nun der Ort, das Paradoxe, was jedermann bei der Exposition der Form des inneren Sinnes (§ 6.) auffallen mußte, verständlich zu machen: nämlich wie dieser auch so gar uns selbst, nur wie wir uns erscheinen, nicht wie wir an uns selbst sind, dem Bewußtsein darstelle, weil wir nämlich uns nur anschauen wie wir innerlich affiziert werden, welches widersprechend zu sein scheint, indem wir uns gegen uns selbst als leidend verhalten müßten; daher man auch lieber den innern Sinn mit dem Vermögen der Apperzeption (welche wir sorgfältig unterscheiden) in den Systemen der Psychologie für einerlei auszugeben pflegt.
→ 이제 여기가 내감의 형식에 대한 설명에서(§ 6.) 모두의 관심을 끌었음에 틀림없는 그 역설을 이해가능하도록 만드는 그 지점이다. 그 역설은 말하자면 이 내감의 형식이 또한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말하자면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촉발되는 것)대로 직관할 따름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 그 자체로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처럼 의식에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수동적인 것으로서 태도를 취해야만 함으로써,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또한 오히려 내감을 통각의 능력과 함께 (우리가 신중히 구분하는) 심리학의 체계에서 동일한 것이라 사칭하는 경향이 있다.
Das, was den inneren Sinn bestimmt, ist der Verstand und dessen ursprüngliches Vermögen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verbinden, d.i. unter eine Apperzeption (als worauf selbst seine Möglichkeit beruht) zu bringen. Weil nun der Verstand in uns Menschen selbst kein Vermögen der Anschauungen ist, und diese, wenn sie auch in der Sinnlichkeit gegeben wäre, doch nicht in sich aufnehmen kann, um gleichsam das Mannigfaltige seiner eigenen Anschauung zu verbinden, so ist seine Synthesis, wenn er für sich allein betrachtet wird, nichts anders, als die Einheit der Handlung, deren er sich, als einer solchen, auch ohne Sinnlichkeit bewußt ist, durch die er aber selbst die Sinnlichkeit innerlich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was der Form ihrer Anschauung nach ihm gegeben werden mag, zu bestimmen vermögend ist. Er also übt, unter der Benennung einer transzendentalen Synthesis der Einbldungskraft, diejenige Handlung aufs passive Subjekt, dessen Vermögen er ist, aus, wovon wir mit Recht sagen, daß der innere Sinn dadurch affiziert werde. Die Apperzeption und deren synthetische Einheit ist mit dem inneren Sinne so gar nicht einerlei, daß jene vielmehr, als der Quell aller Verbindung, auf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en überhaupt unter dem Namen der Kategorien, vor aller sinnlichen Anschauung auf Objekte überhaupt geht; dagegen der innere Sinn die bloße Form der Anschauung, aber ohn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rselben, mithin noch gar keine bestimmte Anschauung enthält, welche nur durch das Bewußtsein der Bestimmung desselben durch die transzendentale Handlung der Einbildungskraft, (synthetischer Einfluß des Verstandes auf den inneren Sinn) welche ich die figürliche Synthesis genannt habe, möglich ist.
→ 내감을 규정하는 것은 지성이고 직관의 잡다를 결합하는, 즉 하나의 통각 (그 자체에 지성의 가능성이 근거하는) 아래로 가져오는 지성의 근원적 능력이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 인간들에 있어서 지성은 스스로 그 어떠한 직관들에 대한 능력도 아니고, 만일 직관들이 또한 감성 안에서 주어진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그 지성의 고유한 직관의 잡다를 결합시키기 위해서 그 지성 자체 안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래서 잡다의 종합은 지성 그 자체에 대해서만이라면 지성이 감성 없이 의식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활동의 통일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 그를 통해 그러나 지성 스스로 감성을 그 감성의 직관에 대한 형식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잡다와 관계하여서 내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성은 상상력의 초월론적 종합의 이름 아래에서 이 활동을 그 능력이 지성인 그러한 수동적 주관에 수행한다, 우리가 그에 대해 내감은 그를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촉발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통각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내감과 전혀 다르며 오히려 모든 결합의 원천으로, 직관 일반의 잡다에 대해 범주들의 이름들 아래에서 모든 감성적 직관에 앞서 대상 일반에 관여한다. 반면 내감은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지만, 그 형식 내에 잡다의 결합이 없고, 따라서 또한 전혀 규정된 직관을 포함하지 않는데, 그러한 규정된 직관은 단지 상상력의 초월적 활동을 통하여 내가 구상정 종합이라 명명하였던 잡다를 규정하는 의식(내감에 대한 지성의 종합적 영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Hier ist nun der Ort, das Paradoxe, was jedermann bei der Exposition der Form des inneren Sinnes (§ 6.) auffallen mußte, verständlich zu machen: nämlich wie dieser auch so gar uns selbst, nur wie wir uns erscheinen, nicht wie wir an uns selbst sind, dem Bewußtsein darstelle, weil wir nämlich uns nur anschauen wie wir innerlich affiziert werden, welches widersprechend zu sein scheint, indem wir uns gegen uns selbst als leidend verhalten müßten; daher man auch lieber den innern Sinn mit dem Vermögen der Apperzeption (welche wir sorgfältig unterscheiden) in den Systemen der Psychologie für einerlei auszugeben pflegt.
이제 여기가 그 지점이다, 그 역설을, 내감의 형식에 대한 설명에서(§ 6.) 모두의 관심을 끌었음에 틀림없는, 이해가능하도록 만드는: 말하자면 이 형식이 또한 더구나 우리 자신조차, 단지 우리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우리 자신 그 자체에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의식에 제시하듯이, 왜냐하면 우리는 말하자면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처럼 직관할 따름이기 때문에, 모순되어 보이는, 우리가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해 수동적인 것으로서 태도를 취해야만 함으로써;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또한 오히려 내감을 통각의 능력과 함께 (우리가 신중히 구분하는) 심리학의 체계에서 동일한 것이라 사칭하는 경향이 있다.
→ 이제 여기가 내감의 형식에 대한 설명에서(§ 6.) 모두의 관심을 끌었음에 틀림없는 그 역설을 이해가능하도록 만드는 그 지점이다. 그 역설은 말하자면 이 내감의 형식이 또한 우리 자신조차, 우리가 말하자면 우리에게 단지 우리가 내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촉발되는 것)대로 직관할 따름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자신 그 자체로 있는 것처럼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우리에게 현상하는 것처럼 의식에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수동적인 것으로서 태도를 취해야만 함으로써, 모순되어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또한 오히려 내감을 통각의 능력과 함께 (우리가 신중히 구분하는) 심리학의 체계에서 동일한 것이라 사칭하는 경향이 있다.

Das, was den inneren Sinn bestimmt, ist der Verstand und dessen ursprüngliches Vermögen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zu verbinden, d.i. unter eine Apperzeption (als worauf selbst seine Möglichkeit beruht) zu bringen.
그것, 내감을 규정하는 것은, 지성이고 지성의 근원적 능력이다 직관의 잡다를 결합하는, 즉 하나의 통각 (그 자체에 지성의 가능성이 근거하는) 아래로 가져오는.
→ 내감을 규정하는 것은 지성이고 직관의 잡다를 결합하는, 즉 하나의 통각 (그 자체에 지성의 가능성이 근거하는) 아래로 가져오는 지성의 근원적 능력이다.
Weil nun der Verstand in uns Menschen selbst kein Vermögen der Anschauungen ist, und diese, wenn sie auch in der Sinnlichkeit gegeben wäre, doch nicht in sich aufnehmen kann, um gleichsam das Mannigfaltige seiner eigenen Anschauung zu verbinden, so ist seine Synthesis, wenn er für sich allein betrachtet wird, nichts anders, als die Einheit der Handlung, deren er sich, als einer solchen, auch ohne Sinnlichkeit bewußt ist, durch die er aber selbst die Sinnlichkeit innerlich in Ansehung des Mannigfaltigen, was der Form ihrer Anschauung nach ihm gegeben werden mag, zu bestimmen vermögend ist.
왜냐하면 이제 우리 인간들에 있어서 지성은 스스로 그 어떠한 직관들에 대한 능력도 아니고, 이 직관들은, 그 직관들이 또한 감성 안에서 주어진다면, 그럼에도 그 자체 안에 받아들일 수 없는, 말하자면 그 지성의 고유한 직관의 잡다를 결합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잡다의 종합은, 지성이 그 자체에 대해서만 간주된다면, 활동의 통일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그 활동에 대해 지성이 그러한 것으로서, 감성 없이 의식한다, 그를 통해 그러나 지성 스스로 감성을 내적으로 잡다와 관계하여서, 그 감성의 직관에 대한 형식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규정하는 능력이 있다.
→ 왜냐하면 이제 우리 인간들에 있어서 지성은 스스로 그 어떠한 직관들에 대한 능력도 아니고, 만일 직관들이 또한 감성 안에서 주어진다 하더라도 예를 들어 그 지성의 고유한 직관의 잡다를 결합시키기 위해서 그 지성 자체 안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래서 잡다의 종합은 지성 그 자체에 대해서만이라면 지성이 감성 없이 의식하는 그러한 것으로서 활동의 통일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닌 것으로 간주되고, 그를 통해 그러나 지성 스스로 감성을 그 감성의 직관에 대한 형식에 따라서 주어질 수 있는 잡다와 관계하여서 내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
Er also übt, unter der Benennung einer transzendentalen Synthesis der Einbldungskraft, diejenige Handlung aufs passive Subjekt, dessen Vermögen er ist, aus, wovon wir mit Recht sagen, daß der innere Sinn dadurch affiziert werde.
그러므로 지성은, 상상력의 초월론적 종합의 이름 아래에서, 이 활동을 수동적 주관에 수행한다, 그 주관의 능력이 지성인, 우리가 그에 대해 정당하게 말한다, 내감은 그를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고.
→ 그러므로 지성은 상상력의 초월론적 종합의 이름 아래에서 이 활동을 그 능력이 지성인 그러한 수동적 주관에 수행한다, 우리가 그에 대해 내감은 그를 통하여 영향을 받는다(촉발된다)고 말하는 것은 정당하다.
Die Apperzeption und deren synthetische Einheit ist mit dem inneren Sinne so gar nicht einerlei, daß jene vielmehr, als der Quell aller Verbindung, auf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en überhaupt unter dem Namen der Kategorien, vor aller sinnlichen Anschauung auf Objekte überhaupt geht; dagegen der innere Sinn die bloße Form der Anschauung, aber ohn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in derselben, mithin noch gar keine bestimmte Anschauung enthält, welche nur durch das Bewußtsein der Bestimmung desselben durch die transzendentale Handlung der Einbildungskraft, (synthetischer Einfluß des Verstandes auf den inneren Sinn) welche ich die figürliche Synthesis genannt habe, möglich ist.
통각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내감과 전혀 같지 않다, 저 통각은 오히려 모든 결합의 원천으로, 직관 일반의 잡다에 대해 범주들의 이름들 아래에서, 모든 감성적 직관에 앞서 대상 일반에 geht; 반면 내감은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지만, 그 형식 내에 잡다의 결합이 없이, 따라서 또한 전혀 규정된 직관을 포함하지 않는, 단지 상상력의 초월적 활동을 통하여 잡다를 규정하는 의식을 통해서만, (내감에 대한 지성의 종합적 영향) 내가 구상정 종합이라 명명하였던, 가능하다.
→ 통각과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내감과 전혀 다르며 오히려 모든 결합의 원천으로, 직관 일반의 잡다에 대해 범주들의 이름들 아래에서 모든 감성적 직관에 앞서 대상 일반에 관여한다. 반면 내감은 직관의 순수한 형식이지만, 그 형식 내에 잡다의 결합이 없고, 따라서 또한 전혀 규정된 직관을 포함하지 않는데, 그러한 규정된 직관은 단지 상상력의 초월적 활동을 통하여 내가 구상정 종합이라 명명하였던 잡다를 규정하는 의식(내감에 대한 지성의 종합적 영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