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플라톤은 철학의 출발점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점차로 증대되는 체계적 다양성을 숙고하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출발점으로부터 나온 그의 윤리학, 인식론, 형이상학이 상호의존적이기에, 저 물음에 대한 그의 답변은 그의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상당한 전개를 필요로 한다.

  이 글의 목적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형상론, 개별자(특수자) 대한 설명, 형이상학 이론의 본성 자체라는 세 가지 핵심개념을 본으로 삼아 탐구하는 것이다.
  플라톤 철학 전체의 핵심은 형상들에 대한 이론이다. 이는 철학적 탐구의 목적이자 토대이다. 플라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형상의 실재를 [2쪽]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어떤 탐구에든 그러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형이상학을 다루려는 이 책이 인식론을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숙고가 최선의 삶의 방식에서 결정적 요소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인식론이 역할을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숙고를 행할 능력은 인간에게 고유하며 그 숙고는 세계가 사유가능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고정되어 있음을 전제한다. 세계는 결정론적 방식으로 일정 정도 고정되어 있으며, 플라톤의 철학은 우리가 사는 우주가 합리적으로 질서잡혀 있기에 원칙적으로 우리에게 이해가능한 것이라는 관념에서 서술된다. 
  그리스 사상가 모두가 결정론자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치개념들이다. 플라톤이 경쟁자로 삼은 소피스테스들, 비극작가들, 역사가들, 정치인들이 고정된 가치개념이라는 전제에 반대했다. 플라톤은 숙고가 불안의 원천이라 봤고,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지속성을 문제삼기 떄문이며, 그럼에도 이성에 의해 제기된 그 문제, 그러한 현상으로부터의 구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안정적이고 확정적인 형상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래서 고정성과 안정성이라는 문제가 삶의 물음에 대한 숙고의 일부이다. 플라톤은 객관적 윤리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통해 그의 논증 방법이 상호 병렬될 수 있고 상호 양립가능여부와 일관성 및 비일관성이 판단될 수 있는 확정적인 관념들과 믿음들을 선제한다는 점을 파악해냈다. 고정되고 확정된 항목들이 있기에 동일한 판단이나 진술을 두고 서로 한 사람은 긍정하고 다른 사람은 부정하는 일이 가능하다. 형상들의 원리는 이 세계와 우리의 사유 내에 고정성과 항상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그의 통찰의 정수이다. 저자는 이를 실재론이나 플라톤주의(그것이 플라톤의 것이든 아니든)의 핵심에 놓인 것으로 파악한다. 형상들은 이해를 허용하는 질서 잡힌 우주의 선제조건이다. 형상들은 고정성, 안전성, 불변성의 원칙들이다. 이 형상들은 철학적 유산들을 남겼다. 보편적, 객관적, 심-독립적 실체들로서 프레게의 sharp borders, 비트겐슈타인의 『탐구』에서의 규칙들이 그 상속자들이다. 이러한 고정된 실체들을 "속성들"이라 부르자. 형상론으로 인도하는 통찰은 속성들이 자신의 본성이나 속성들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일차적인 형이상학적 목표가 속성들 또는 형상들이 세계 내 안전성의 원천이자 원리들이라는 기반이 되는 직관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이라 간주한다. 
  [3쪽] 안정적 형상들의 반대급부로 사물들이 변화한다는 현상이 놓인다. 플라톤은 변화 역시 구제되고 설명되어야 할 현상으로 수용한다. 물리적, 물질적, 감각적 세계의 일상적 개별자들과 사건들이 이 변화하는 사물들에 속한다. 플라톤에게 자연의 영역은 형이상학적 탐구의 주제이다. 따라서 플라톤 형이상학의 이차적 목표는 물질적 세계 내 개별자들의 본성과 특징을 설명하는 것이며, 특히 어떻게 변화가 가능한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특별한 일부이다. 인간의 능력, 특히 언어와 사유 역시 그러하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이해할 때, 우리는 언어와 사유가 성립하려면 세계가 어떠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탐구 과정에서 인지적 상태들과 그 대상들의 본성을 고찰해야 한다. 형상들이 지식의 대상이자 합리적 능력의 토대이다. 다시금 형상들이 형이상학적 그리고 인식론적 탐구의 정점으로 밝혀진다. (플라톤에게 지식은 인간의 좋음 삶에 필수요소이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물음을 탐구하는 일 역시 그 정점은 형상들이다.)
  형이상학적 탐구의 유일한 통로는 인간의 인지능력과 언어능력을 고찰하는 것이다. 언어와 사유로부터 독립된 경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형이상학을 전개해 가면서 형이상학적 이론화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이러한 측면은 『파르메니데스』에서 두드러진다. 이 대화편은 '~임/있음'을 '~이라는 사유'와 동일시하는 데에 주목한다. 변증적 탐구에 형상들이 필수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선언(Parm.135b-c) 이후, 형이상학적 탐구 자체의 본성에 관련된 문제는 해당 대화편의 두 번째 부분에서 형이상학의 일부가 된다. 탐구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가정들이 전제되면서, 플라톤은 어떤 무엇이 되었든 그에 대한 진리를 담지하는 일반원칙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에 착수한다. 부분적으로 그 작업은 탐구의 특정한 형식들은 가능한 반면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플라톤은 우리가 "일반 존재론" 또는 "분석적 존재론"이라 부를 만한 것을 탐구한다. 그 목표는 제기될 수 있는 특수한 혹은 특별한 어떤 존재론이든 통제하는 일반 원칙들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좀 덜 상세한 방식으로나마 일군의 관념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도출되는 주-술, 보편-개별, 부분과 전체, 일(一)과 다(多), 동일과 차이, 내재, 분리 등을 발견하게 된다. [4쪽] 철학자가 형이상학적 탐구에 관련하여 사물들을 연구하고 검증하고 있는 한, 그는 오늘날 아마도 인식론의 일부로 간주될 무언가에 개입된다. 허나 전반적으로 일반 존재론적 설명을 추구함에 있어서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경계는 희미하다.
  하지만 플라톤에게는 경계가 불분명한 두 번째 더 특수한 영역이 있다. 일상 개별자들의 본성과 습성에 대한 설명 과정에서, 플라톤은 그의 후대인들이 "여럿에 걸친 하나(One-Over-Many)"라 부르는 추론 혹은 논증 방식을 개발한다. 우리는 여러 항목들이 유형에서 동일하다는 것을 인지한다. 얼룩말도 백마도 모두 말이다. 아리스티데스도 소크라테스도 정의롭다. 그러한 사실들로부터 플라톤은 정의, 아름다움 따위의 형상들이 있음을 추론해 낸다. 사유와 발화가 자연 탐구의 일부분인 한, 이것들 역시 여럿에 걸친 하나 논증의 주제일 것이다. 따라서, 플라톤은 지식이 형상이라 단언하며, 그 스스로 명백하게 믿음, 지각, 명사, 진술의 형상들을 인정한다. 더욱이, 그의 탐구가 사유와 발화 일반에뿐만 아니라, 특별히 형이상학적 혹은 철학적 탐구에도 필요한 것으로 보여주는 항목들은 형상들로 간주될 만하다.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테스』에서 특히 그는 그 존재이유가 사유, 언어, 형이상학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 할 만한 다수의 형상들 혹은 유들에 특수한 지위를 부여한다. 하지만, 말 자체나 혹은 네모가 형상인지 고찰함에 있어서 충족시키고자 시도하는 한 가지 필요조건은 그것들이 객관적이고 심-독립적인 실체들, 생각하는 자들이 전혀 아무도 없더라도 "존재"할 항목들이라는 것이다. 사유와 발화에 의해 요구되는 바에 관하여 그와 같은 것을 말하기는 망설여질 수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은 비 독립적이거나, 적어도 동일한 직관 방식에서 독립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길버트 라일은 그의 획기적인 저작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러한 속성들의 "공통범주적" 속성에 대한 플라톤의 인지가 그의 형상론에 혁신적인 변화를 촉발시켰다고 주장했다. 하나, 같음, 다름, 그 외 후기 대화편에 도입된 형상들과 같은 형상들의 의미를 구성함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재구성에 필수불가결한 부분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식론과 형이상학 사이의 경계를 고찰할 것, 그리고 개념적/인식론적 실재론을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부터 구별해내는 어려움들에 경계할 것을 요구한다. 플라톤의 일반 형이상학 전개를 추적함은 이 저술의 세 번째 목표이다. 


 본질의 변증법

  플라톤 형이상학의 미궁에 들어서는 여러 가지 길들이 있다. 저자는 오직 단 하나의 길만이 있다고, 즉 자신이 가고자 하는 그 길만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만, 여러 길들이 있음을 충분히 인정한다. (오히려 길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비트겐슈타인 말대로 플라톤의 미궁을 다루는 유일한 길은 들어서기를 거부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5쪽] ousia, 저자가 "본질"이라 번역하는 그것의 실을 따라 가는 것이다. 고대 형이상하겡서 이보다 더 고색창연한 관념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이 고대 ousia 탐구 중 표준전거이지만 그의 선행 사상가들 대부분이 그 관념에 관련되어 있다. 표준적으로 그리스 처학은 이오니아 자연철학으로부터 시작한다. 변화와 다양성을 담지한 현재의 우주, 자연이 어떤 단일하고 불변하는 원칙, 이를 테면 공기나 무한자"로부터" 유래되는 방식에 대한 상이한 사변적 설명들이 제기된다. 이오니아의 방법론은 경험적이고 민주적이었다. 그들은 자연세계 현상들에 대한 관찰에 근거하여 결론을 내렸다. 현상들은 이를 산출해낸 과정도 그 연원도 아니지만 당대 시민들과 관찰자들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자연세계에 대한 ㅈ식, 혹은 완벽한 지식이 가능한지 물음을 던진 최초의 사람은 크세노파네스로 보인다. 인간 지식의 한계에 대한 그의 불분명한 언급들은 차치하고, 사태에 대한 참된 진술에 대한 완벽한 지식과 우리의 통상적인 인식적 상태, dokos 사이의 구분은 신용할 만하다. 우리는 dokos 안에서 단지 외견들에만 관련될 뿐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는 오류를 불러 오는 단순한 외견들을 숨겨진 실재의 본성, 진리와 구분한다. 이오니아식 자연설명을 거부하는 점은 같지만, 두 사람은 전적으로 상이한 존재론을 내놓는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를, 파르메니데스는 고정된 실재를 주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것이 변하며 변화 자체의 방식만이 지속적이라 본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이 변화를 전면적 차원에서 기술한다. 모든 수간 모든 개별자가 장소와 속성 모두에서 변화하는 중이다. 플라톤의 개별자는 이의 먼 상속자이다. 각 순간 모든 면에서 필연적으로 변화하진 않더라도, 플라톤의 개별자는 변화의 주체이다. 플라톤의 개별자들은 본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별자가 잃지 않을 속성이란 아무것도 없다.
  개별자들은 변화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든 인식론적으로든 플라톤에게 기본적인 것은 아니다. 변화 자체가 근본적 원칙일 수도 없는데, 플라톤은 변화가 시작하고 끝나는 안정적 지점들 혹은 상태들이 있을 때에만 변화가 가지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변화가 가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그 가능성을 보장할 형이상학적 설명을 추구했다. 이 설명의 핵심은 그의 형상들, 불변하고 본질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바로 그 실체인 바의 실체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형상들을 이해하면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에게 빚을 졌다. 
  [6쪽] 불행히도, 파르메니데스의 시는 너무 수수께끼 같아 존재에 대한 그의 설명에 확신을 갖고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 두 가지 근본적으로 관련 있는 해석 문제들이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의 본성, 그리고 "is"의 본성이 그것이다. 이는 「진리의 길」 속 논증의 결정적 전제들의 특징이다. 전통적으로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보다 뒤지지는 않는 시기에 시작된 전통에 따라 파르메니데스는 수적 일원론자로 간주된다. 그의 형이상학적 우주에는 정확히 단 하나의 항목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정신, 존재, 혹은 일자일 수 있다.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와 『파르메니데스』에서 사유와 언어의 대상인 존재를 그에 대한 사유와 언어로부터 분리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플라톤의 해석대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존재/정신은 사유나 언어의 대상일 수 없다.
  다른 이들은 파르메니데스가 "유(類)" 일원론자라 주장한다. 그들은 그가 한 종류의 실체, 즉 존재만을 허용하지만 그 한 종류의 여러 실체들이 있을 수 있음을 허용한다고 본다. 플라톤을 포함하여 파르메니데스의 후대 사상가들이 자신들의 다원론적 형이상학의 전제를 변호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문제는 변화, 생성, 소멸이다.
  파르메니데스 일원론에 대한 물음은 그가 존재를 이해한 방식으로 향한다. 그 길은 그의 시에서 제시된 논증에서 그 관념이 전개되는 방식이다. 광범위한 두 노선의 해석이 존재사 "is"를 서술적 "is"로부터 구분한다. 존재적 독법은 전형적으로 파르메니데스를 수적 일원론으로 간주한다. "순수한 존재적 독해"는 「진리의 길」에서 "is"가 단순히 존재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주어에 대해서든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is'이다. 다른 어느 속성이든 허용하려면 그 주어는 어떤 종류의 다원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기동일성조차, 그것은 존재하고 또한 자기동일적이기도 해야 한다. 일단 다원론이 수용되면, 차이와 비-존재가 따라오는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후자는 파르메니데스에게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서술론자들은 일반적으로 유-일원론에 기운다. 존재자들의 다수성은 그들에 따르면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 요구받는 것이 특정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 즉 그것이 "서술적으로 단일"할 것 때문에 가능하다. 서술적으로 단일하다는 것은 예비적 존재 F가 단일한 종류에 속한다는 것, mounogenes라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유일하게 F여야 하며, 그 고유한 본성을 F로 규정하는 단일한 설명을 허용해야만 한다. 허나 존재에 관한 어떤 것도, 그 시 속 논증도 서술적으로 단일할 수 있는 항목들의 수를 제한하지는 않는다. 
  파르메니데스, 특히 그에 대한 서술론적 해석이 도입한 존재, 현존, 본질 또는 본성, 같음, 다름, 비-존재의 연계는 명백히 분리를 요구한다. 그의 후속 사상가들이 실체들의,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적 제한들을 충족시키는 것으로 주장되는 과정들에 호소하여 존재와 생성에 관련된 문제들을 제기하는 반면, 플라톤은 존재에 대한 파르메니데스의 가정들, 그리고 존재하는 것에 관한 이론화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하여 최초로 비판한다.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를 수적 일원론자로 간주하고 그의 "is"를 조재론적 노선에서 이해한다. 물론 플라톤의 의도는 변증적이고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이해의 기초를 플라톤의 해석에만 두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서술론적 해석은 플라톤의 형상들에 대한 전개방식과 유사하다. 플라톤이 그런 해석을 한 까닭은 자신의 독창성을 강조하기 위함일 수 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 시에서 "is"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차치하고, 본질이나 속성 혹은 술어들이 being에 속할 수 있는 상이한 방식들을 규정하는 노력, on이 형상인지 개별자인지 문법적 주어인지 하는 문제는,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연속될 것이다. 
  플라톤의 형상론은 그 전통에 획기적인 공헌이다. 플라톤에게 형상들은 본질의 일차적 담지자들이다. 그들의 ousia 점유는 그들의 안정성을 보장하고 그들이 자연에서 지속성의 원천이기를 허용한다. 그것들은 다른 것들이 본질들을 담지한다면 오직 ousia의 담지자일 뿐일 것이고, 그것들의 본질 점유는 어떤 방식에서 그 동일한 본질에 대한 형상의 점유에 의존할 것이다.
  이 측면에서, 본질은 플라톤의 형이상학만이 아니라 대화편들의 미로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이끄는 실이다. 단일성, 동일성, 영혼 등의 다른 속성들이나 항목들 중 보질을 선택한다는 것은 (논쟁적이나마) 그것이 특권적 지위를 갖는다는 점을 함축한다. 저자는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그것이 핵심이라 믿을 뿐만 아니라, 본질에 대한 연구가 그의 형이상학 이론 재구성에 발견적으로 가장 유용하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게서 본질이 수행하는 역할을 이해하는 노력의 과정에서, 초기 대화편에서의 최초 출현들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 특유의 탐구는 시험술이고, 그 핵심은 Ti esti 물음이다. 그 주어 자리에는 주로 윤리적 속성들이 온다. 그 물음의 답은 정의 또는 logos이다. 오늘날 전형적으로 정의는 언어적인 것으로 간주되나 플라톤에게 그것은 존재론적인 것들이다. 정의는 단어나 개념이 아닌 사물이다. 주의를 기울인다면 정의의 언어적 의미와 존재론적 의미 사이를 오갈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점은 어떤 것의 본질이나 ousia를 언어적 정의가 짚어내거나 지시한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이다.
  저자의 플라톤 형이상학 탐구는 본질에 관한 세 가지 질문들에 의해 인도된다.
  [8쪽] 무슨 항목들이 본질을 가지는가?
  명백한 후보는 형상들 또는 개별자들이다.
  두 번째 질문은 본질과 본질을 지니는 것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에 관련된다.
  본질은 그것과 동일하지 않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서술될 수 있는가?
  본질은 (언제나) 그것을 지니는 무엇이든 그것과 동일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복잡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Z. 6에서 일차적 실체는 엄밀히 말해 그 본질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성질들을 위한 자리가 없음을 암시한다. 본질은 일차적이지 않은 실체들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것들에 대해 서술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엄밀하게 말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주어에 대해 그와 동일하지 않은 본질을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은:
  본질의 존재론적 본성과 본질에 대해 우리가 알아내고 그것을 이상적인 한계에서 규정하는 방식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
  형상이 존재하는 방식으로부터 우리가 형상을 알고 정의하는 방식을 구별해낼 수 있는가? 이 물음을 구체화하는 방법은 언어적 정의의 구문론적 복잡성을 본질의 단순성 혹은 단일성에 대비시키는 것이다. 플라톤적 형상은 단순하거나 고유한 것, 여럿에 대한 하나로 간주된다. 플라톤적 형상의 단일한 본성과 그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 사이의 긴장은 후기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결합과 분리의 방법을 전개시킬 때 드러난다. 그물망 같은 혹은 "전체론적인" 결합들과 분리들의 구조는 플라톤이 형상들의 단일한 본성을 폐기했거나 본질의 개념을 이제는 형상들이 복잡한 단일자들이라는 식으로 수정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세 가지 물음들은 플라톤 형이상학에 대한 저자의 설명과 문헌 및 주제 선정을 형성한다. 저자는 여러 대화편들을 무시하고 그 대화편 내에 있는 이 저술이 다루는 형이상학적 측면들조차 무시한다. 
  저자 입장에서 볼 때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 세 물음에 대한 답변에서 출현한다. 본질의 안정된 담지자로서 형상들의 특수 형이상학이 전개된다. 형상들은 본질을 결여한 개별자들로부터 구별된다. 다음으로 형상이 본질을 지닌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이어진다. 그는 존재, 정체, 단일, 같음, 다름과 그 밖에 단순히 형상이 형상이기 때문에 어떤 형상에든 특징지어지는 속성들을 독립시킨다. 일반존재론과 형상들간의 과계들에 대한 그의 연구는 형이상학적 영역과 개념적 영역 사이의 차이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 이끈다. 여기에서 그는 결합과 분리의 방법 그리고 형상들의 엮임이라는 관념을 발전시킨다. 이것들은 거짓 진술에 대한 설명을 가능케 하고, 실질적인 유들을 의미하는 용어들로부터 자연 내에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에 부합하지 않는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용어들을 구별해내게 해준다. 우리가 말하는 바와 존재하는 것이 분리된 곳에서. 끝으로, 형상들의 엮임, 그리고 결합과 분리의 방법에 대한 설명은 그가 정의와 지식에 대한 세 번째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한다. 일반 존재론에 따라, 형상과 그 본질의 일부분존재론적 관계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동물이다" 같은 진술들은 "개념적 진리들"이다.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은 양립가능과 불가능의 관계이다. 인간과 동물이 그에 대해 서술되는 유일한 존재들은 (존재론적으로) 개별적인 인간들이다.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은 개별자들과 "그것들"에 걸친 형상들에 대한 결합과 분리에서 발견되고 드러난다. 이 새로운 무기들을 갖추고, 플라톤은 종국적으로 개별자의 본성, 그리고 개별자들과 형상들의 관계들에 대한 『티마이오스』와 『필레보스』에서의 설명을 제시할 준비를 갖춘다.
  


5장 형상들과 언어

 개괄

  모든 각각의 형상은 각기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로서 존재하며 단일하다. 이것, One-Being이 모든 형상들을 지배하는 원리이다.
  각각이 본질 그 자체인 형상은 그 형상을 예화하는 개별자들과 분리된다. 이러한 형상은 개별자에 대한 감각경험으로부터 추상되지 않는다. 형상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방법, 변증법이 필요하다.
  모든 형상들은 각기 다른 형상들과 독립적으로 탐구될 수 없다. 각 형상이 One-Being임을 확립시켜 나아가는 과정에서 Unity, Sameness, Being, Difference 등의 상이한 본성들이 발견된다. 모든 형상들 각각이 이 본성들에 참여해야만 한다. 또한 실제로 다른 것들과 사유 속에서 혹은 진술의 의미에서 차이가 나는 것들이 서로 구분된다. 따라서 결합뿐만 아니라 분리까지, 형상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된다.
  형상의 One-Being과의 결합에 이어 제기된 분리의 문제에서, 결합이 분석적이진 않더라도 필연적이기에, 그 분리는 형상들 사이의 독립적인 현존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각 형상은 모두 One-Being이다. 여기에서 각 형상은 사유의 능력을 통해 Unity와 Being 모두와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Diffrence가 필요하다. 이것들은 형상이 형상이기 위해 반드시 참여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이것들과의 분리가 독립적 현존의 의미라면, 형상들인 Unity, Being, Diffrence 중 어느 하나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나머지 둘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물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제는 플라톤의 형상들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탐구방법에서 유래할 것이다. 이전까지는 형상이 지식의 안정된 대상으로 간주되었고 변증법은 그러한 형상에 정의를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교과로 제시되었다. 이는 영혼의 불멸이나 정의로운 삶이 곧 행복한 삶이라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변증법의 본성에 대한 탐구는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교과에 대한 탐구, 또 그러한 교과들의 공통된 원칙들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의(definition) 개념의 발전에, 그리고 정의를 가능케 하는 이성적 영혼에 관련될 것이다.  
  플라톤이 새로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언어적 질서를 존재 질서로부터 구별해내는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적 탐구의 일부는 언어와 사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일을 포함하며, 그 가능성의 존재론적 토대에는 Being과 Unity가 있다.

  그러나 언어와 사유의 가능조건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이 그 자체 언어와 사유의 일부이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자기수용적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화, 유사성 등의 형이상학적 문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여러 존재론들을 다루면서 그 기저의 일반원칙들을 추적한다. 이 과정에서 주-술, 보편-개별, 부분-전체, 일-다, 동-이, 정지-운동, 참여, 분리, 사유, 언어, 이론 등의 개념들이 그 논증에 도입된다.
  언어와 존재의 상호작용에 대해 Unity, Sameness, Diffrence, Being에 관련한 결정들은 어려운 일이다. 저자는 '형상은 본질인 바의 것이다(본질로서 존재한다) '라는 자기술어화 전제로부터 형이상학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은 혼융된다. 지식이 존재한다는 그의 전제는 존재론적 함축을 지닌다. 그러나 그가 항상 개념적 혹은 '의미론적' 현상을 구제하기 위해 존재론적 항목들을 도입시키는 것은 아니다. 언어상의 모든 일반용어나 일반술어에 존재론적 대응물을 내놓지는 않는다.

  One-Being으로부터 형상의 복잡성이 귀결된다. 이는 파르메니데스주의에서 다원론으로의 이행이다. 이 다원론의 요소에 Being이 포함되고, Sameness와 Difference가 추가된다. 이 더욱 추상적인 형상들 사이의 관계가 탐구의 대상이다.
  이 관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언어는 한계가 있지만, 형상들의 관계나 Being과 참여, 본질의 본성 등에 대한 새로운 문제들을 다룰 최선의 길을 언어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하는 것뿐이다. 기존 형상들과 이 새로운 형상들 사이의 관계는 불분명하다. 개별자처럼 형상도 다른 형상에 '참여'한다면 형상들이 속성을 지니게 된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형상의 복잡성을 요청한다. 

  플라톤 후기 철학에서 형상들의 결합과 분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초중기 플라톤 철학으로부터의 큰 변화로 간주된다. 개별자와 형상 외에 언어적 술어에 대응되는 비-형상 속성들이 있다. 심지어 이 변화가 형상들에 대한 포기로 생각되기도 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차이는 플라톤의 인식론적 변화들과 언어철학적 발전들에 어울린다. 더 이상 지식은 이름과 지각적 상징들이 아니라 진술과 명제로 유비된다. 주어와 술어가 더 복잡한 사태를 반영하며 단순하고 고립된 형상들은 명사의 지시체 역할을 한다.
  저자는 형상들, 형상들 사이의 관계, 언어와 형상 사이의 관계에 적용되는 플라톤 후기 형이상학의 일부 특징들을 『소피스트』와 형상들의 엮임(symploke eidon)에 대한 탐구를 통해 다룬다. 그에 앞서 이 문제에 대한 기존 연구노선에 대한 고찰이 진행된다.

  Ryle(1939)은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 관계명제에서 추상명사가 고유명사이고 형상이 표현인 그런 실체적 형상론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명제 내 표현 요소가 아니라, 보편자들을 요소로 하여 명제를 구성하는 결합의 형식들을 모음형상이란 유비를 통해 설명하고자 하였다는 것이다. 보편자의 공통된 속성이란, 보편자가 속성을 지닐 수 없으므로, 명제의 형식적 특징들로 드러난다.
  라일은 플라톤 후기 철학 연구에 언어적 전회를 유발시켰다. 그는 형상에 관한 우리의 말과 생각 방식을 규정하는 개념들의 논리적 특성이 플라톤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이제 플라톤에게 지식은 근본적으로 명제적이며, 명제나 판단은 복합적이고, 형상들 또는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공통범주적 형상들은 판단의 형식들이며 실체적 형상들과 구분된다. 이를 실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오류이다. 실체적 형상들은 명제 내 표현들, 주어 또는 술어이다. 
  라일의 입장은 판단에 공통되며 전제되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실체적 형상들은 이전과 달리 판단 내에서 개별자들과 다른 지위를 지니지 않으며, 보편자인 한 속성을 지닐 수 없기에 서로 관계할 수도 없다.
  라일의 입장이 극단적일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형상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련하여 Being과 참여에 대해 재고하도록 한다. 형상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그에 대해 '말하는 방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라일 입장의 두 번째 특징은 참여에 대한 공격이다. 라일은 Being을 형상들의 서열에서 해방시켰다. 반면 참여는 그런 지위를 결코 할당 받은 일이 없다. 라일의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은 참여를 형상으로 간주할 경우의 무한소급을 우려하여 참여에 대한 구-관념을 폐기한 것이다. 
  라일이 제기한 소급은 형상들 사이의, 혹은 형상들과 참여들 사이의 가능한 관계로서 참여를 제거했다. 이에 대해 참여가 해당 이론의 기초전제이며, 이를 정당화하지 않는 일은 다른 경우에도 많다는 반응도 있을 수 있다. 
  또 다른 대답은 참여를 두 대상 사이의 이항관계로 본 라일과 달리, 플라톤의 경우 참여를 통해 비로소 개별자에 속성들이 주어지고, 따라서 개별자는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하나의 대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 대답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에는 적용될 수 없다. 저자는 형상이 특히 Being에 참여한다고 이야기될 수 있는 방식을 고찰할 것이고, 플라톤 후기 형이상학에서 '참여'라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행위에 앞서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도 논리적 주어가 되지도 못한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라일 소급에 대한 플라톤의 가능한 반응을 이해하기 위해, 형상이 참여한다는 사실이 단지 개별자 사례에서 대답이 제공되는 그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참여가 주어를 그 속성에 연결시키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점이 문제이다. 이 과정에서 소급을 피하기 위해 형상이 속성임을 포기할 수도, 개별자가 주어가 된다는 것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개별자와 형상이 결합한다는 점을 포기할 수도 없다. 형상을 포기하면 유명론의 입장이 되고 개별자를 포기하면 파르메니데스적 일원론이 될 것이나 두 입장 모두 플라톤의 입장은 아니다. 소급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궁극적으로 피장파장의 방식이 될 것이다. 개별자와 보편자를 포기하는 것은 소급을 겪느니만 못하다. 참여를 존재론에 포함시킴으로써 어떤 현상이 구제되는지 설명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 현상이 『소피스트』에서 제시된다.


『소피스테스』 논증의 배경

  『소피스트』는 소위 실체적 형상들이 아닌 Being, Sameness, Difference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그리고 세부적으로 다룬다. 셋 모두 판단형식으로 내세워질 수 있기에 라일의 언어적 전회에서 역할을 하지만, 특히 Being이 해석의 모든 면면을 좌우한다. 라일은 Being이 판단의 여러 형식들 내에서 계사의 사용방식으로 다루어질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Being에 대한 실체적 해석을 거부할 길을 열었다. 이어 Owen에 의해 중심문제는 플라톤이 발견해내고 독립시킨 einai 동사의 상이한 용례와 의미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그는 해당 논쟁에 사용될 용어에도 기여하였다. 그는 Be 동사를 구문론적으로 일항술어를 확정하는 완전용법 혹은 실체적용법과 이항술어를 확정하는 불완전용법으로 나누고, 여기에 상응하여 의미론적으로 전자는 존재사, 후자는 주-술 계사 또는 동일성 기호로 구분하였다. 
  Frede 또한 자신의 저술에서 해당 계사에 대해 유사한 설명을 제시한다. 저자는 존재사로서 가장 잘 이해되는 einai가 등장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로써 플라톤이 einai의 존재사적 의미를 독립시켰다고 보긴 어렵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이런 접근은 형상 Being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특히 Being에 있어서 현존의 문제를 본질이나 참여의 문제로부터 구별하게 된다. 이런 점은 분리의 문제, 그리고 Being에 대한 형상의 참여, 즉 형상의 본질(ousia) 소유라는 사실로부터 귀결되는 바에 대한 탐구에서 더욱 문제가 된다. 현존은 본질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일항 'is'의 독립은 기대되지 않는다. 
  플라톤은 언어행위의 기저에 놓이는 형상들의 본성에 대한 결론들을 도출해내기 위해 언어를 탐구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형상의 동일성과 그것의 본성이 Being이란 말로 정의되기에, Being과 Sameness의 관계를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프레데 역시 오웬처럼 언어적 계사에 주목하면서 Being과 Sameness의 참여, 그리고 그것들이 형상이라는 형이상학적 측면을 간과한다. 'Is'의 불완전용법에 여러 상이한 용례와 의미가 있다는 그의 입장은 특히 Being이 정확히 한 형상이라는 플라톤의 명백한 주장과 일치되기 어렵다. 라일 노선에서는 이것이 기존 형상에 대한 이해에서 새로운 형상 이해로의 전환에 대한 근거라 여길 수도 있지만.
 

  언어적 접근에는 두 가지 단점이 있다. 첫 번째는 megista gene에서 운동과 정지에 대한 격하이다. (라일은 운동과 정지가 판단형식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를 생략한다. 또 다른 언어적 접근에서는 운동과 정지가 Being이 운동하지도 정지하지도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 논증에서의 역할에 한정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이 논증은 동일성 진술을 서술적 진술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런 구별을 이끌어내더라도 Being이 정지한다고 '서술적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합의가 없다. 라일 입장에서는 Being이 정지한다면 실체적 형상이 되므로 문제가 된다.) 반면 모든 형상이 정지해 있으므로 Being 또한 형상으로서 정지해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엔 운동 역시 형상이기에 정지해야 한다. 그러나 운동과 정지는 결합할 수 없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igantomachia 부분에서의 결론은 모든 형상이 형상인 한에서 정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해당 부분을 통해 운동과 정지가 megista gene에 포함됨을 밝히고자 한다.
  두 번째는 『소피스트』 논증에서 참여의 역할이다. 참여는 그 논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라일은 참여를 배제시킨다. 그리고 대화편 내에서도 Being과 달리 참여는 megista gene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유는 불분명하다.
  Megista gene의 목록이 전부 나열되지 않았을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Being이 포함되었다는 점 때문에 이는 불충분한 설명이 된다. 초-중기 플라톤에게 있어서 Being과 참여는 각기 형상과 개별자의 상이한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기에는 형상들도 상호 참여를 하므로 이 역시 충분한 반론이 되지 않는다. 참여가 목록에서 배제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megista gene의 지위를 플라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symploke eidon부터 시작할 수 없다. 그 이전 기초작업에 해당하는 논의를 고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이 엮이기 위해 요구되는 형상들의 다수성, 그리고 플라톤 후기 철학에서 존재론적 진전들을 언어로 추적 가능케 해주는 언어적 도구들과 행위자들을 플라톤이 어떻게 확보하는지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 comes by both?


 『소피스테스』

 언어적 전회를 포착한 사람들은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이 도입되는 『소피스트』 236 이하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소피스트는 자신을 상(狀)-제작자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손님은 소피스트가 상 중에서 모상과 환상 중 어느 쪽을 제작하는지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상이 무엇인지, 즉 어떤 것으로 보이거나 나타나지만 그것이지는 않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혼란해 한다. 이 상 개념에 대한 문제가 이후의 논의를 촉발시킨다. 상-제작은 모든 것에 대해 지혜로운 자라는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소피스트의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다. 실제 사물의 이름을 가진 그림을 그려내는 기술자처럼, 소피스트는 말로 된 상들을 만들어낸다. 이 능력은 다시 그 이전 소피스트의 참된 정의를 파악하지 못한 여섯 가지 설명들 이후에, 반박술의 하위분류로 제시된다.
  소피스트의 특징을 드러내 줄 다중적인 정의들, 그리고 상(image)과 현상(appearance)이라는 개념은 해당 대화편의 도입부와 연결된다. 진정한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소피스트로도, 정치가로도 여겨지고 보인다. 이 이름들이 실제 유들에 대응되어 각기 셋씩인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손님은 이름마다 하나씩 그 유들도 셋이라 답한다. 그러나 그 각각을 정의하긴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소피스트에 관하여 사람들은 그 이름만 공유할 뿐, 누군가를 소피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는 각기 서로 달리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에 대한 여섯 가지 '소위' 정의들은 우리가 같은 현상을 여러 이름으로 부르는 일례이다.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언어의 유연성과 부정형성이 이러한 혼란과 거짓의 가능성을 남겨 놓는다. 여기까지 도입부의 단계들은 독자로 하여금 어떻게 언어가 세계를 표현하는 데에 실패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언어 사용자가 청자를 거짓 믿음으로 이끄는지 배울 준비를 하게 만든다. 이로써 언어, 세계, 화자라는 세 요소가 나타난다.

  소피스트를 상-제작자로 규정하기 위해서는 거짓 진술과 거짓 믿음이 어떤 식으론가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에서 나아가 to me on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이 논박되지 않고서는 소피스트를 상-제작자로 분류하여 추적을 이어나가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다. 손님은 우선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서 to me on이 불가능함을 세 가지로 논증한다. 첫째는 표현 혹은 이름의 문제이다. 표현이나 이름은 What is인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to me on은 말 그대로 what is not이므로, 이 표현 또는 이름은 어디에도 전혀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to me on을 실체, 주어로 삼을 경우이다. 그러나 to me on은 어떤 식으로도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있는 것들로써 그것을 부르거나 가리킬 수 없다. '그것'이라고 지시하거나 언급하는 것조차 그 과정에서 '한 개'라는 속성을 부여하게 되므로 아예 가리킬 수조차 없다. 나아가 세 번째로, '그것'이 지시, 언급, 사유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도 to me on을 '그것'이라 부르는 일이 되므로, to me on의 이러저러한 불가능성들을 언급할 수도 없다.
  손님은 이 세 논증들을 소피스트의 첫 번째 방벽으로 간주한다. 소피스트의 입장에서 볼 때, 일관되게 to mo on에 대해 논할 수는 없으므로, 상에 대해서도, 거짓 상에 대해서도 논할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소피스트는 오직 말로 된 상들에만 관련한다. 상을 말로 정의할 경우, 그것은 실재를 닮은, 그러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이라 규정된다. 실재의 어떤 것이 참으로 그것인 한, 상은 참이 아니다. 그러나 상은 어떤 식으로 무엇인 것으로 있어야 한다. 실재이지 않은 것(to me on)이 있어야(to onti) 한다는 것은 첫 번째 to me on 논증을 시사한다. 상이란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이어 소피스트의 다음 반박은 누군가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거짓 믿음은 which is is not, 또는 which is not is라고 믿거나 생각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이는 to me on 두 번째 논증을 시사한다. 이 두 가지 논박은 to me on 세 번째 논증을 소피스트가 피해가는 방식을 보여준다.
  세 가지 to me on 논증은 이름이 반드시 지시체를 지녀야만 한다는, 그리고 지시체는 반드시 존재하거나 어떤 식으론가 존재해야 한다는 숨은 전제를 지닌다. 이는 소피스트가 말로 된 상들에만 관여한다는 언급을 통해 이해된다. To on 이외의, to on과는 다른 것으로 정의된 상은 이름 또는 말로 된 상들로 일반화된다. 지시체가 말과 다른 한, 그리고 지시체가 to on인 한, 말은 to me on이다. 그러나 말, 나아가 상 일반은 어떤 식으론가 있어야 한다. To on이 to me on에, 또 그 역으로도 어떤 식으론가 결합이 필요하다. 이는 파르메니데스적 일원론에 대한 반발이 된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행위주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또한 이 결합을 통해 상과 말이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거짓' 말과 '거짓' 믿음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마지막 다섯 번째 논증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to on을 to me on에 가져다 붙인다는 언급이 나온다. 

  손님은 소피스트의 파르메니데스적 방어에 대해 공격으로 응수한다. 그 목표는 not-being in some manner is, being in some manner is not 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손님은 앞선 사상가들이 to on을 몇 가지로, 또 어떤 것으로 주장하는지 검토할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to me on에 대해서만큼이나 to on에 대해서도 혼란에 빠져 있으며, 저 사상가들이 to on에 대해 논하는 것을 지금 to me on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이나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손님은 우선 이원론의 입장을 고찰한다. 이 입장은 두 요소를 상정하고 양자 모두 혹은 둘 중 하나를 "Being"이란 이름으로 지시하거나 혹은 그 "Being"으로 제 3의 것인 Being을 지시할 것이다. 전자의 경우 서로 구분되는 기존의 두 요소가 모두 'is'로 똑같이 진술되어 일원론으로 귀결된다. "Being"이 하나의 이름으로 하나의 지시체를 가리킬 것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두 요소 중 어디에든 "Being"이란 이름이 붙어(X is, Y is) Being과 동일시될 것이다. 이 역시 일원론으로 귀결되며, being을 제 3의 구별되는 존재론적 요소로 수용하지 않는 한, 또한 동일화와 서술을 구분하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다.
  이렇게 귀결된 일원론에 대해 다시 고찰이 시작된다. 그 논증은 앞서의 논증 노선을 따른다. 일원론은 "Being이 하나"라고 말하며 이는 같은 것을 두 이름("Being," "One")으로 명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어떤 것이고 Being, One과 구분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일원론에서 다원론으로 귀결된다. 만일 이름이 지시체와 같은 것이라면 지시체가 이름을 가지지 않거나 이름이 지시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논증은 "the One"이라는 표현을 이름이라는 유(kind)의 차원에서 다루고, 다음으로 다시 구체적인 지시체를 가지는 개별적인 하나의 이름으로 다룬다는 점을 파악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상의 과정에서 파르메니데스적 입장을 전제하고서는 Not-Being 못지 않게 Being 또한 여러모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 나아가 첫째로, 이 논증은 서술과 동일화 진술을 구분하기에 앞서, 이름이 그 이름으로 명명되는 것과 다르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이는 상에 대한 앞선 논증과 관련된다. 다음으로 이 논증은, 존재하는 유들 중의 하나로 '이름' 역시 to on이라는 점, 그리고 이름이 명명되는 대상들인 ta onta와 다르기에, 일종의 to me on이 존재한다는 점을 확신시켜준다. 그러나 여전히 Being에 대한 통찰은 확보되지 않는다.
  존재의 수를 논하는 입장에서 이름과 onta라는 상이한 두 유들을 구분하고, 다음으로 손님은 존재가 어떠한 것들인지 논한 입장들을 검토하는 과정으로 넘어간다. 이는 이름과 그 이름의 지시체가 구분될 때 이해할 수 있는 전환이다. 이 단계에서 플라톤은 말과 사물로부터 그 사용자, 제작자, 즉 영혼 쪽으로 이행한다.  

  이 Gignatomachia 단계에서 손님은 거인족의 입장을 전적으로 물질만을 존재로 보는 입장에서 영혼이나 지식 등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순화시킨다. 이 결과 거인족의 입장은 작용하거나 받는 '능력(dynamis)'을 존재의 표지로 받아들인다.
  반대편에서 신들의 입장은 가지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들만이 Being(ousia)이란 것이다. 반면 dynamis를 공유하는 것은 Being이 아니라 genesis(생성)이다. 전자는 같은 것에 같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을 영혼을 통해 추론으로 파악하는 것이며, 후자는 매번 다른 것에 다른 식으로 감각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ousia가 가지적인 것, 즉 알려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앎이라는 작용을 받은 그 만큼 움직여진다. 
  논의에 영혼과 지식이 도입되면서, 완전한 to on에 그것들이 결여될 수 없는 한 존재는 운동해야만 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그와 동시에, 지식이 존재한다면 그 지식의 대상은 반드시 안정적이고 불변해야 하므로, 존재는 정지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존재는 운동하고 있기도 정지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 지식의 대상들과 영혼에 한정된다. 

  손님의 결론은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이든 논하면서 지식과 정신을 파괴하는 자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과 정신을 거부하는 입장은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이원론, 일원론, 거인족, 신들 네 입장 모두 '어떤 것에 대해 어떤 것'을 논하는 입장들이며, 각각의 입장에서 자신의 고유한 설명을 제시할 수 없는 입장들이다. 
  존재의 수를 논하는 입장들을 검토하여 이름을 확보하였고, 존재가 어떠한 것인지 논하는 입장들을 고찰하여 지성적 영혼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형상들의 엮임이나 not-being 문제나 모두 형상들 또는 유들의 다수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원론과 일원론에 대한 고찰의 결과 일원론도 다원론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영혼에 더해 영혼이 아는 대상들이 있고, 이름과 이름이 명명하는 사물들이 있다는 것은 이미 다수성을 함축한다. 그러나 저자는 영혼이나 이름이 'ta onta'와 다른 부류의 것들로 간주된다고 생각한다. 이제 같은 류에 속하는, 알려질 수 있고 명명될 수 있는 두 존재들이 도입된다. 앎, 말, 생각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앎을 행하는 영혼과 부동의 onta가 필요하다. 운동과 정지는 여기에서 필연적인 속성들이다. 움직이는 것과 멈추어 있는 것이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운동과 정지가 있어야 한다.
  운동과 정지 두 속성들이 있다는 것은 앞서 이원론과 같은 문제에 빠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손님은 영혼 안에서 그 둘을 구별하고 그것들의 ousia에 대한 공유에 주목함으로써, 그것들을 밖으로부터 포괄하는 Being을 제 3의 것으로 놓는다. Being, 운동, 정지는 세 가지 상이한 것들이며, Being은 그 자체의 본성에 따라서 운동하지도 정지하지도 않는다.
  '본성' 개념과 Being을 '공유'하는 속성들이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본성과 ousia에 대한 공유라는 말로 Being을 도입함으로써 손님은 운동, 정지와 구분되는 Being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이원론의 입장은 Being을 그 존재론에서 별개의 항목으로 두지 않았기에 Being을 다른 것에 대해 서술할 수도 없었다.

  Being을 분리시킬 수 있는 더 큰 이유는 gigantomachia에 있다. 그 대목에서 결론은 영혼에는 운동이, 형상에는 정지가 서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이 존재하기 위해, 'ousia에 대한 결합'이 존재하기 위해 운동과 정지는 달라야 한다. 'ousia'에 대한 결합은 곧 운동과 정지에 대해 being이 술어가 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운동과 정지는 모두 있어야 하며, 또한 그 둘과 being까지 서로 모두 달라야 한다.
  여기에서 be 동사에 대한 특수한 독해가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Being은 본성상 정지하지도 운동지도 않는다"라는 구절은 be를 존재사로 읽을 경우 이 셋이 본성상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기에 좋다. 다른 한편 Being이 지식의 대상인 한 그것에 대해 정지가 서술되어야 한다. 이는 나아가 정지와 '가장 반대되는' 운동에도 정지가 서술되어야 한다는 문제에 이르게 된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손님이 여기에서는 형상들에 대해 전혀 논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아직 'is'라는 동사에 대한 특수한 독해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우선, 영혼과 지식의 대상이란 개념을 통해 보자면 운동과 정지가 매개될 수 있다. 같은 방식에서, Being은 본성에 따라서는 아닐지라도 지식의 대상이란 측면에서 정지해 있다고 서술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운동 또한 조건부의 운동으로, 즉 형상 자체의 변화가 아닌 인식적 운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자체 본성이든 다른 형상과의 관계이든 형상으로서의 본성이든 '전환'된 것은 없다.
  이 관점을 좀 더 밀고 나아가면, 운동 역시 영혼의 인식활동에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형상에 대한 말이나 생각 또는 앎을 가능케 하는 영혼의 자기운동에 한하여, 운동은 정지와 함께 Being이라는 형상에 대해 서술될 수 있다. 운동과 정지가 함께 Being을 안정적인 지식의 대상으로 확보한다. 이 둘은 나아가 지식, 언어, onta의 다수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어 소피스트의 방벽에 맞설 무기가 되어 준다.
  이 단계에서 손님은 자신들이 not-being 못지 않게 being에 대해 혼란에 빠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의 화제 전환은 논의를 더 진전시킬 준비가 되었다는 암시라고 여긴다. 이제 손님은 같은 것을 때마다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지 묻는다. 이미 운동과 정지는 각각의 고유한 이름으로도, being이란 이름으로도 불릴 수 있지만 손님은 사람과 그의 색, 형태, 덕들과 악덕들이라는 개별자의 사례로 넘어간다. 한 사람을 까맣다든지 크다든지 하는 식으로 여러 이름들로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하나가 여럿일 수도, 여럿이 하나일 수도 없다는 전제에서 반박한다. 

  하나와 여럿의 역설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참여'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이다. '참여'는 일과 다의 문제에 특정한 측면들을 해결하였으며, 개별자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이 '참여'가 여기에서도 해법으로 등장할 것을 암시한다.
  손님은 운동, 정지, Being으로 돌아가 그것들이 서로 참여하는지 전혀 참여하지 않는지 아니면 일부는 참여하고 일부는 참여하지 않는지 묻는다. 어떤 입장이든 자신들이 존재로 내세우는 것이 존재한다는, 즉 ousia에 대한 공유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므로 참여가 전혀 없을 수는 없다. 모두 서로 참여한다면 정반대인 운동과 정지가 같아질 것이므로 이 역시 거부된다. 남은 가능성은 일부는 참여하고 일부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형상들의 엮임에 진입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철자 유비가 제시된다. 일부 철자는 서로 섞이는데 일부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 또한 모음 집단은 다른 것들을 엮어주며 자신도 다른 것들과 엮이지만 자음집단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서로 섞이고 섞이지 않는 관계를 파악하려면 전문가여야 한다. 이는 음들과 음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며, 유들에 대해서도 어떤 것이 섞이고 또 그렇지 않는지 보여줄 사람은 일종의 지식을 지녀야 한다.
  유들에 대한 결합과 분리의 지식을 가진 자는 철학자일 것이고 모음유비에 해당할 형상은 소위 megista gene일 것이다. 문제는 이 유비를 강하게 적용할 경우 발생한다. 모음 중에 어떤 음절에든 항상 필수적인 특정 모음은 없다. 다른 한편, 라일이 실체적 형상들로 간주한 소위 자음형상들의 경우, 그것들의 결합에 반드시 모음형상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또한 불분명하다. 그러나 자음철자끼리는 모음 없이 결합하여 음절을 구성하지 못한다. 형상들 사이의 매개에 모음형상과의 결합이 논리적으로 선행할 필요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일 그런 선행하는 결합이 필요하다면 모음형상은 Being이나 Sameness 같은 것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음형상 끼리의 결합에 대해서는 어느 쪽 경우도 설명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모음형상이라 할 만한 Being과 Rest는 결합하여 'Being rests'라는 의미를 지니는 참인 명제를 구성한다.
  이 유비에 관련된 또 다른 문제는 결합의 순서와 관련된다. 그리스어 알파와 윕실론을 순서대로 결합하면 의미있는 음절을 구성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형상들의 경우에도 결합 순서가 문제가 될 수 있다. Being이 Rest에 참여하는 경우와 Rest가 Being에 참여하는 경우 서로 의미가 달라진다. 플라톤은 참여 혹은 결합 관계를 비대칭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느 것이 모음형상이고 어느 것이 자음형상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Being, Sameness, Difference, Unity 까지 모음형상으로 간주하면 이 유비 구절이 더 잘 읽힌다. 또한 모든 형상을 통하여 공유하는 형상에 대한 언급도 등장한다. 이는 다른 유들이 더 많은 혹은 덜 참여한다는 규정에 뒤따른다. 논의는 그 형상들 중 megista gene를 택하고 각각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 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논의는 'megista'를 가장 널리 공유한다는, 즉 모든 형상들을 관통한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쉽지만, 실체적 형상인 운동과 정지의 경우 이 이해가 적용되기 어렵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형상들의 엮임

  Being은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 운동과 정지는 Being에 참여함으로써 마찬가지로 각자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 이로써 유들의 다수성이 확보된다. 여기에 더하여 각각이 여러 이름들로 불릴 수 있는 한, 그것들은 고유한 본성에 더하여 다른 속성들에 참여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첫째, 형상들 사이의 참여, 특히 Being에 대한 참여란 무엇인가? 두 번째는 참여를 행하는 형상들의 수와 참여의 범위(혹은 정도)이다.

  megista gene로 선택되는 유들은 우선 운동, 정지, Being이다. Megista의 의미는 이로써 수식받는 유가 더 넓은 범위까지 결합할 수록 더 크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도 있고, 논의의 이 지점에서 그 중요도에 대한 강조일 수도 있다. 세 유가 모두 megista로 칭해짐에도 운동과 정지는 서로 섞이지 않는 반면, 양자 모두 Being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한다. 이는 megista의 의미에 대한 가정을 약화시킨다. 이어서 유들은 셋이라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러나 Being이 자기 자신에 참여한다는 언급은 없다. 그것들은 상이한 세 유들이므로, 이로부터 그 각각은 자기 자신과 같고 자신 이외 나머지 둘과 다르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서 Sameness와 Difference가 논의에 등장하게 된다. 이 둘 역시 Being과의 혼합으로 인해 있는 것들이 된다.

  다음으로 Sameness와 Diffrence가 운동, 정지와 다르다는 것이 증명된다. Sameness와 Difference 모두 처음 셋과 '필연적으로 언제나' 혼합되므로, 이 둘 역시 megista gene인 듯하다.
  운동과 정지가 같음, 다름과 다르다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1) 운동과 정지 양자에 공통으로 서술되는 것은 둘 중 어느 쪽도 될 수 없다. 
  (2) 만일 그렇다면 운동이 정지하고 정지가 운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같음과 다름 양자에 관하여, 만일 변화나 정지가 그 둘 중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다른 한 쪽을 그 본래의 본성에 반대로 변하도록 강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반대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증은 운동이나 정지가 그 반대에 참여할 경우 어떤 종류의 서술이 포함되느냐에 달려 있다. 이 논증 이전의 운동과 정지가 행하는 같음에 대한 참여는 참여자의 본성을 변화시키지도, 피참여자의 본성과 같은 것이 되게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논증에서는 예를 들어, 같음이 정지와 같다면, 운동이 같음에 참여함으로써 바로 그 참여 자체로 정지에 참여하게 되어 운동이 정지하게 된다. 이 결과가 운동의 본성이 정지의 본성이 된 것이든 운동이 정지의 속성을 획득한 것이든, 두 가능성 모두 앞선 논증에서 배제되었다. 따라서 같음, 다름은 운동, 정지와 다르다.
  '(3)'에서 운동과 정지가 이름으로 사용되다 일반화 용법으로 비약한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저자는 "운동"과 "정지"라는 말이 유들을 명명하기 위해 사용되며 개별자들에게까지 일반화되는 건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둘 사이의 결합이 가능하다고까지 주장한다. 모든 형상은 형상인 한에서 정지하고 또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 논증은 테아이테토스를 향한 ad hominem 논증 또는 참여관계의 본성에 대한 얼버무림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라면 테아이테토스는 운동과 정지가 형상인 한에서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데에 동의하기에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증을 서술로부터 동일화를 구분하는 데에 실패함에 따른 논증으로 보려는 시도도 있다. 이 논증 전까지 같음과 다름은 주어와 동일시되는 일 없이 주어에 대해 서술되지만, 이 논증에서는 주어와 술어가 동일시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이 과정에서 오류보다 결론 도출에 더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Being과 Sameness가 구별된다는 점이 논증된다. 
  "만일 Being과 Sameness가 아무런 차이도 의미하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정지와 운동 양자 모두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있는 한, 이러한 방식으로 둘 모두 같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는 '자기 자신과 같음'이 '서로 같음'과 혼동되는 오류가 드러난다. '같다'라는 술어에서 생략된 부사구를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플라톤은 그 해석을 수용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첫째, 정지와 운동이 섞이지 않는다는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둘째, 같음과 being이 구별되는 개념들이라는 점이다. 자기동일성을 단언하는 것은 일종의 "Being" 주장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이는 "is" 불완전 용법을 동일성 의미를 한 축으로 갖는 것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우려할 만한 부분이다.

  이어서 끝으로 Being과 다름이 구분된다. 이 논증은 Being과 그 형상에 대해 이야기 되는 방식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으로 보인다. 프레데는 여기에서 Being과 다름의 대조로부터 출현하는 Being과 Not-Being 개념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저자는 여기에서 Being 자체와 그것의 참여에 대한 대조에 주목할 것이다.
  "있는 것들 중 일부는 그 자체로 이야기되는 반면, 다른 것들은 언제나 여타의 것들에 대해 이야기된다."
  "그런데 다름은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해 이야기된다."
  "만일 다름이 Being처럼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했다면, 다른 것들 중에서 다른 것에 대하지 않은 다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단적으로 어쨌든 다른 것은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또 다른 것에 대해 바로 그러한 것임이 귀결되었다."
  일반적으로 해석상의 첫 번째 문제는 진술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담지된 속성들뿐만 아니라 속성들의 담지자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야기되는지 여부이다. 우선 ta men, ta de 구별이 출발점이다. 특히 "Being처럼 양쪽 형상 모두에 참여"라는 구절이 문제가 된다. 
  전통적 입장은 ta men, ta de 구분을 절대적 속성들과 상대적 속성들이라는 두 종류로 나눈다. 이 경우 동사 "is"가 아닌 ta onat를 구분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Being이 양자 모두에 참여한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절대/상대 구분은 다시 두 가지 의미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단항과 다항의 논리적 차이이다. 크거나 작다는 술어는 다항술어에 속할 것이고, 반면 인간이나 말 같은 경우 단항술어가 될 것이다. 다른 구분은 존재론적 차이에 따른다. 개별자와 상들은 존재하기 위해 다른 존재들에 의존해야 하는 상대적인 술어가 될 것이다. 반면 모든 형상 각각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에 절대적인 술어가 될 것이다. 어떤 형상이든 논리적으로 상대적이라 말하는 일은 주저될 만하다. 존재론적으로는, 플라톤이 형상의 지위를 독립적인 것, 자족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것인지 물을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형상들은 Being에 대한 참여로 인해 그러한 것이 된다고 생각할 만하다. 그러나 개별자 역시 똑같은 형상에 똑같은 참여를 행하는데 그 결과는 의존적
(다른 것에 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개별자들이 being의 두 번째 형상에 참여한다거나 Being에 대한 참여보다 앞선 개별자들의 고유한 특징 때문에 Being에 참여해도 독립적 존재가 못 된다는 식의 답변은 문헌에 의해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 논의가 형상의 차원에 국한되어 있으며, onton은 형상들을 지시한다고 보는 편이 바람직하다.
  속성들에 대한 논리적 구분은 해당 속성을 포함하는 술부의 이해가능성을 기준으로 삼는다. 해당 속성만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가 가능한 명제가 성립한다면 절대적 속성, 그렇지 않고 보완을 필요할 경우 상대적 속성이 된다. 'Is'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구분이 적용될 수 있다. 완전용법 is의 경우 Being은 절대적인 것, 불완전용법의 경우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 입장은 전형적으로 형상 Being의 역할이 상이한 종류의 서술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보며 Being에 형상의 지위를 할당하길 꺼려한다. 
  그들이 'is'에 적용하는 완전/불완전과 속성에 적용하는 그것들 사이의 차이를 고찰해야 한다. 문제는 제시된 속성, 특히 Being이 완전 속성인지 불완전 속성인지 여부이다. 또한 그리스어 esti를 포함하는 구문론적 혹은 의미론적 차이가 있는지 여부가 문제이다. 그러나 "is"에 대한 그러한 구분을 수용하더라도 그렇다고 형상으로서의 Being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더욱이 일부 학자들은 두 종류의 "is"에 따라 Being의 두 형상들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구분은 상대적 서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논의들의 타당성에 호소하고 
존재사 "is"를 전제한다. 그러나 통상 개별자를 주어로 하고 속성이 술어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례와 달리, 플라톤의 형상으로 구성된 문장에서는 완전속성과 불완전속성, 완전용법과 불완전용법의 "is"를 구분하기 어렵다. 논리적으로 이해를 위해 보완이 필요한 속성일 Good itself 등은 완전용법 is와 함께 주어로 등장할 수도 있고 주부와 술부 모두에 불완전용법 is와 함께 등장할 수도 있다. 후자의 자기술어화를 고려할 때, 불완전속성이 불완전용법 "is"와 함께 구성한 문장에서 논리적 보완이 필요없는 결과까지 나온다. 이는 형상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서술적 진술이 주어로 형상을 포함할 경우, 불완전 속성은 정의되는 주어일 수도 있고 서술되는 속성일 수도 있으며 양자 모두일 수도 있다. "The Good is good."이 그러한 예이며, 이 문장은 자기-술어적으로 읽을 경우 The Good의 Goodness라는 본질을 서술하는 것이다. 이를 자기-참여적으로 읽는다면 The Good에 대해 a good thing으로서의 속성을 서술한 것이다.
  플라톤 당대에 완전/불완전이라는 속성구분을 사용할 수 있었으리란 점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단지 서술가능한 것들을 지시하기 위해 onton을 사용한 것은 과잉으로 보이고, 이 대화편에서 이런 상이한 종류의 속성들에 대해 그 논리적 특징들을 고찰하고 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는 점에서 그 구분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 해석에 반대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지지자들이 Being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Cornford는 존재사 is를 형상으로 취하지만 이를 kath' auto로도 pros allo로도 분류하지 않으며 그 이유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최근의 지지자들 역시 형상 Being 자체에 관한 문제에 대해 무시한다. Being을 정위시켜주는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또 다른 전통적 해석은 속성의 구분이 아니라 'is'에 구분에 주목한다. 이 해석은 Being의 kath' auto 방식을 존재 진술, 즉 완전용법 혹은 일항술어 is로, pros allo를 서술, 즉 불완전용법 혹은 이항술어 is로 본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존재라는 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Being은 형상의 지위에 놓이는 반면, 참여는 형상들 사이에서 확보되는 관계이기에 형상에서 제외된다. 현존을 의미하는 Being과의 참여 결과로서의 진술이 Being에 참여하는 모든 형상들 각각에 대해 kath' auto 진술이다. 반면 Being 이외의 형상들에 대한 참여 결과는 pros allo 진술이 된다. Being은 pros allo 진술의 술어가 되지 않는다.

   전통적 해석이 술어의 종류에 집중하는 반면, 최근 해석은 이에 반대한다. 이 입장에 있는 Frede는 'is'의 두 가지 용례를 통해 해당 구절을 해석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pros allo와 kath' auto는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대상에 속성이 속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들은 동사 be의 용례에 반영되며, 형상들로 간주된다. 그는 이 부분에서 두 가지 형상들이 아니라 서술의 두 가지 용법들에 상응하는 하나의 형상을 고찰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은 두 가지 상이한 의미의 서술들을 논하고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서로 다른 두 의미에 맞는 두 형상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프레데가 '형상,' '용법,' '의미'라는 말들로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어려움은 부분적으로 (Being이 참여한다고 하는) '두 유들'의 난해함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는 Being의 두 번째 형상을 가정하지 않는다. 그는 "두 가지 유들"이 정확히 하나의 형상에 결합될 전략을 세우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틀렸다.
  저자는 프레데와 being의 두 가지 방식들을 각기 being과 참여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같은 입장이지만, 크게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근본적 차이는 pros allo/kath' auto의 구분이 다르다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Being이 실체적 본성을 지닌다 믿지만, 프레데는 언어적 용법들로 모두 환원된다고 본다. 또한 pros allo/kath' auto 구분을 결정짓는 것을 저자는 being의 방식으로 본다. 저자의 입장에서 전자는 allo에 의한 속성이 지시됨으로, 후자는 자신의 본질로 존재함으로 이해된다. allo가 주어와 수적으로 구분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프레데는 주/술 사이의 수적 구분을 두고 이는 수용할 수 없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프레데에 따르면 'X  is Y'에서 첫 번째 방식의 'is'는 X와 Y의 Y-ness가 같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is'는 Y-ness의 다름을 의미한다. 이 구분은 Being과 다름이 구별되는 형상들임을 보여주고 형상들에 대한 다양한 진술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 Being의 두 가지 방식은 세 가지 서술들을 아우른다. (1) 자기-술어. (2) 이중역설(형상인 한에서 귀결되는 속성과 특정 형상으로서 지니는 속성 사이의 문제)로 귀결되는 서술. (3) 형상들에 참여하는 개별자들을 포함하는 서술.

  프레데의 is1은 정의(definition)의 "is"이다. 이는 형상이 곧 그 본질인 그러한 형상의 본질을 서술하거나, 자기-술어 서술에서 서로 동일한 실체인 주어와 술어를 연결한다. 문제는 술어가 주어-형상에 대한 정의일 경우이다. 프레데는 이 경우 "x is y"에서 x가 형상이나 개념 X를 표현하지 않는 문장들을 배제시킨다. 그 이유는 y가 형상을 지시하기 떄문이다. 저자는 이 말을 y가 Y-ness를 지시하기 때문에 항상 형상을 지시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다시, Y-ness는 X의 본질이거나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Y-ness가 X의 지시를 형상에 제한시킨다면 그 이유는 본질이 형상에만 서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X와 Y-ness가 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 이유는 형상과 그 본질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류들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확신하진 않는다. 플라톤이 종과 유를 구분하지 않았다면 분류들 역시 is1의 사례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피정의항에 대해 그 정의의 부분이 is1의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형상 인간과 형상 동물은 명백히 다른 형상들이라는 것이다. 유나 본질의 일부가 본질 자체와 같은 방식으로 서술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보자면 특히 자연종 범주들에서 개별자는 본질의 담지자로도 제일실체로도 간주된다. 따라서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고도 동물이라고도 서술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 문제시 되는 것이 물질적 개별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에게 물질적 개별자는 본질과 동일시되지 않으며, 형상들이 제일실체의 지위를 차지한다. 플라톤에게는 주어가 본질 그 자체인 주어의 본질 일부에 대한 존재론적 술어는 없다.
  언어 정의상 주어와 술어 사이의 서술관계는 주어-형상과 완전한 언어적 정의 사이의 관계와 같이 볼 수 있겠지만, 그러한 존재론적 사태는 형상의 단일성을 위협한다. 형상의 단일성을 고려하면 형상에 본질이 속하는 방식이 본질의 부분이 속하는 방식과 같을 수 없다. 여기에서 플라톤에게 언어적 서술과 존재론적 서술이 갈리는 예가 등장하는 것이다.(현대 형이상학에서, 속성 Φ와 이-것만-를 예화하는 단순한 개별자 a의 관계는 플라톤적 형상과 본질 사이의 관계에 대해 두 가지 비교점을 지닌다. 첫째, a가 
Φ만을 예화하고 Φ가 a의 구성요소가 아니듯, 형상도 단 하나의 본질만을 지니며 본질은 형상의 구성요소가 아니다. 둘째, 현대의 문제는 단순 개별자 a와 복잡한 언어적 사실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지만, 플라톤의 경우 언어적 정의의 복잡성과 본질의 단일성을 두고 혼란해 할 필요가 없다.)
  프레데의 is2는 주어를 특징짓는 것으로 보인다. 형상의 경우 그 본질과 무관하게 그것이 형상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술어들은 is2에 해당한다(ex, 정지하다). 개별자에 대한 서술은 모두 is2에 해당한다. 문제는 형상이 자기 자신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경우는 is2에도 is1에도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이다. 

  프레데를 따른다면 정의적 용법의 is와 특징 짓는 is 용법이 서로 다른 의미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고, 그렇다면 이 두 용법이 어떻게 한 형상 Being인지 설명해야 한다. 
  프레데는 플라톤이 존재사 "is"를 고립시키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 입장에서 플라톤의 형상들은 본질을 부여받았기에 비로소 존재한다. 플라톤 형이상학의 근간은 논리적 질서로도 존재론적 질서로도 본질의 소유이다.
  프레데의 입장은 자기-참여 진술과 관련하여서도 문제가 있다. Is2가 항상 제2의 형상을 필요로 한다면 자기-참여는 불가능하다. 만일 pros allo를 kath' auto 이외의 모든 술어로 본다면, 자기-참여 술어를 pros allo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프레데에 대조되는 입장은 술어에서 특정된 속성에 의해 주어가 특징 지어지는 모든 서술을 pros allo로 통합시킨다.
  프레데는 pros allo, is2의 경우 주어와 술어의 수적 분리를 주장했다. 문제는 존재사 의미를 지니는 완전용법 is를 폐기하고 나면, 주어와 다른 제2의 형상이 도입되는 pros allo의 계사와 주어와 술어가 동일한 kath' auto의 동일성 기호 모두에 불완전용법 is가 할당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프레데는 동일성 기호로서 is1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is1과 동일성 기호를 동일시하는 것은 거부한다. 동일성 기호 "is"는 개별자와 정의 기술 사이에 성립하는 반면, 프레데의 is1은 형상들의 관계에 국한되며, is1이 동일성의 의미를 갖는 것은 주-술 수적 동일성에 주목한 우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개별자와 정의 기술에 대한 언급이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동일성 주장이 Sameness에 대한 참여로 분석된다는 점이다. Sameness의 자기-참여 서술을 제외하면 모든 동일성 주장은 제2의 형상, 곧 Sameness를 포함한다. 동일성을 의미하는 is가 있다면 그건 결국 pros allo 용법이 되는 것이다.

  대조적 독해로 보자면 kath' auto는 Being에 참여한 결과이다. 그 이외의 모든 참여는 pros allo이다. 이 독해는 자기-술어와 자기-참여를 구분해줄 뿐만 아니라, Being을 실체적 형상, 그것도 megista gene 중에서 megiston genos로 만들어 준다.
  자기-참여는 자기-술어에 의존적이다. 그리고 자기-술어는 곧 Being에 대한 각 형상의 참여, 각 형상의 그 자체가 곧 자신의 고유한 본성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선되는 과제는 Being에 대한 참여, kath' auto 자기-술어 개념을 설명하는 일이다.
  
kath' auto 술어는 정의적 is라고 부를 수 있다. 대화편에서 이러한 진술은 "F(-ness) is F" 형태로 제시된다. 피정의항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kath' auto 서술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본질, 곧 정의 전체뿐이다. 정의의 부분들은 언어적으로 kath' auto 서술이 가능하다. 이는 존재론과 인식론, 존재론적 서술과 언어적 서술의 분리를 보여준다. 덧붙여, 형상은 본질을 가짐으로써 존재하고, 형상들의 세계는 정의 가능한 실체들의 세계이며 단적으로 형상들이 정의가능하다는 사실 덕분에 존재한다.
  이러한 정의적 진술들은 동일성 진술과 다르다. 후자는 주어가 형상Sameness에 대한 참여함을 포함한다. "형상 X가 자기 자신과 같다"라는 주장에서 재귀표현은 "개념적으로 선행하는" Being에 대한 참여를 통해 자신의 본질을 확보한 X가 존재할 것을 요청한다. 이것이 모든 형상에 적용될 경우, 특히 Difference와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한다. Difference 역시 본질을 가지므로, 
kath' auto is로 이 사태를 표현하면 "Difference is (Is) different."라는 정의적 진술이 나온다. 그러나 플라톤은 Difference가  언제나 pros heteron, 즉 어떤 다른 것에 대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결을 단순히 주-술 구분만으로 피할 수는 없다. Kath' auto 진술에서 술어 'is difference'는 다름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지는 반면, 서술적으로 사용된 'is difference'의 경우 그것은 Difference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 혹은 그 자신 이외의 모든 것과 다르다는 것을 주어에 대해 서술해 주는 것이다. 모든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Difference라는 형상 또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니며, 각 형상의 고유한 본성은 오직 하나씩이기에, Difference 역시 그 이외의 형상들과 구분되어 유일한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pros heteron의 의미에서 'Difference is difference'라고 서술될 수 있다. 이는 Difference가 자기 자신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Nehamas는 Difference가 여타의 형상들과 다른 이유는 그 본성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1) Difference에 참여하고, 2) 다른 것들과 공유하지 않는 특징들을 지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첫 번째 이유에는 동의하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예를 들어 Difference의 특징인 모든 것들을 관통한다는 것은 다른 megista gene로부터 Difference를 구별해 주지 않는다. 저자는 Difference가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는 것이 그것을 여타 megista gene로부터 구별해 준다고 생각한다.
  네하마스는 또한 'The Beautiful itself is not beautiful'에 대해서도, 아름다움이라는 형상이 아름다움 이외에 다른 특징들 또한 지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명제라고 주장한다. 이 입장은 Sameness와 Difference를 2차 속성으로 간주하고 있다. 둘 이상의 것들이 속성을 공유한다면 이 둘에 대해 Sameness가, 한쪽이 다른 쪽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면 Difference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Difference is difference from Difference 라는 말은 다름이라는 형상이 자기 자신과 같다는 속성을 지니고, 이것을 다름이라는 본성과 공유하지 않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주장은 마치 여타의 것들과 공유하지 않는 속성 때문에 어떤 것이 다름에 참여하는 것처럼, 그러한 공유되지 않는 속성을 지니지 않고선 다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저자는 Difference가 여느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형상이기 때문에 Difference에 참여한다고 주장한다. Difference의 자기참여에 대해 네하마스는 잘못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형상이 형상이기 위해서는 Difference에 참여해야만 하며, 이런 이유로 형상 Difference 역시 Difference, 즉 자기 자신에 참여해야 한다.
  Difference뿐만 아니라 하나, 같음 등의 형상들도 이렇듯 자기-서술과 자기-참여를 보여준다. 라일의 공통-범주적 형상들은 플라톤에게는 판단 형식들이 아니라 형상들로 간주된다. 이런 설명들에 더해 왜 Being의 형상은 있으나 참여의 형상은 없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상의 본질이 중요하다.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있다/~이다' 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형상이 본질 이외의 다른 속성들, 특히 같음과 다름을 소유하기 위해서, 각 형상의 본질이 우선이고 핵심이다. 무언가가 '그 자체로 있다/~이다'란 것은 Being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선행될 때 비로소 그 본질인 바의 형상 각각이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 다를 수 있다. 플라톤은 Being이 본질화하는 것이라 본다. Being에 참여하여 본질화된 이후에, 각 형상은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이 본질화가 형상들에 포괄적인 속성이다.
  Being에 대한 참여와 여타 형상들에 대한 참여에 시간순서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형상들의 세계는 비시간적이다. 그럼에도 Being에 대한 Being의 참여 등을 논할 때에 어려움이 있다. 첫째, Being에 대한 참여보다 앞서는 주어, 즉 형상은 논하기 어렵다. 둘째, 습관적으로 Being에 대한 참여는 다른 형상에 대한 참여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붉음이라는 형상에 참여한 것은 붉은 것이 된다. 참여주체는 참여대상에 참여함으로써 그 대상과 같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Being에 참여함으로써 being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being을 현존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각 형상이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이 된다는 쪽으로 보는 편이 더 낫다. Being에 참여하는 형상들에 공통된 점은 각각이 본질화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Being의 형상을 상정할 이유이고 어떤 식으로는 참여의 형상 자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여는 그 주체가 개별자이든 형상이든 공통된 것이다. 형상이 Being에 참여하는 경우와 그 이외의 형상에 참여하는 경우 그 차이는 관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참여 대상인 Being의 특별한 본질 때문에 발생한다. Being의 특별한 기능은 자신에게 참여하는 형상을 창조하거나, 혹은 적법화하거나, 그 주어들에게 참여 관계를 보장하는 것이다. 형상이 Being에 대한 참여 이전에는 적법한 객체가 아니었다고 이해될 경우, 그리고 Being에 의한 성격 규정이, 모든 것이 그렇게 규정되는 그러한 단일한 어떤 1차속성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면, 형상이 Being에 의해 성격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형상이 같음, 다름에 참여하여 이러한 속성들로 성격규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형상은 그것들이 형상이기 때문에 그렇게 규정된다.
  Being 이외의 자기-참여 형상들은 Being에 참여하여 개별적 본질을 확보하고, 그 본질로 인해 자신을 구성하는 특징적 속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Being의 경우 자기-참여와 자기-서술에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혹은 Being에 참여하여 각각이 하나의 being이 되는 여타의 형상들에 참여하면서, Being은 자기-참여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참여는 그 안에서 주어가 술어에 의해 명명되는 속성에 의해 성격 규정되는 기초적 개념이다. 그러나 Being에 대한 참여는 Being의 근본적인 역할 때문에 특수한 예외가 된다. 이제 Being은 형상이지만 참여는 형상이 아님을 받아들인다면, 중기에서의 두 가지 기초적인 서술 관계는 후기에 이르러 하나, 즉 참여만 남는다. Being이 형상의 지위로 승격되고 플라톤이 형상들 또한 참여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식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그로써 대상에 본질을 부여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여전히 형상들만이 Being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중기 플라톤의 Being을 보존할 수 있다. Being에 참여한다는 것은 형상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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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Beings

개괄

  후기 대화편인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트』에서도 여전히 형상들은 본질의 담지자이며 auto kath' auto on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탐구와 언어적 탐구에 대한 고찰을 통해, 변증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형상들이 각기 모두 One-Being이어야 한다는, 그리고 언어적 상과 거짓이 가능하기 위해 what is와 what is not이 무엇이며 그 둘을 언어가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확정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 추적 과정에서 존재자들의 다수성이 있어야만 하며, 그 각각이 Being과 그 외 특정 형상들에 참여함으로써 그 자체 반드시 여러 가지 것들이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 앞서 논의되었다. 저 두 대화편에서 형상들의 원칙들에 두 가지 공통된 특징들이 있다. 첫째, 형상들은 복잡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형상들은 존재자들이자 참여자들이다. 둘째, 플라톤은 언어, 사유, 형이상학적 이론화 자체에 대한 고찰이 요구하는 특수한 종류의 형상에 집중한다.
  이러한 고찰들에 비추어 저자는 플라톤이 점차 존재론적 질서와 개념적/언어적 질서 사이의 차이를 의식했다고 주장한다. 『소피스트』는 사유와 언어가 존재(what there is)를 묘사하는 데에 실패한 것, 즉 거짓이 어떻게 가능한지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하므로, 이 주장에 대한 증거가 된다. 
  이 장에서 저자는 사유의 요소들로서, 형상들이 그에 대응되지 않는 여러 종류의 개념들의 상태에 대한 플라톤의 취급을 고찰한다. 그 중에서도 우선 not-beings(me onta), 특히 다름(Difference)의 부분들이 주목받는다. 플라톤의 Not-being과 거짓에 대한 설명에 관하여 학자들은 (1) 그것들이 형상들이라거나, (2) 형상인 다름의 부분들이고 그래서 형상들 혹은 일종의 형상이라거나, (3) 다름 자체와 동일시된다거나, (4) 비-형상적 개념들 또는 속성들이라거나, (5) 어떤 종류의 2차적 실체(second-order entity)이라는 식으로 입장이 나뉜다. 저자는 다름의 부분들이 형상이 아니라 주장한다. 그것들은 개념들이며 확정된 내용을 지니지만 그것들에 참여하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들이 주어가 되지만 아무것도 그것들에 참여할 수 없다면, 이는 개념적 질서와 존재론적 질서의 분리에 대한 첫 예시가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모음과 나눔의 방법이 고찰된다. 이 방법의 진행은 피정의항에 대한 다양한 진술들로 귀결된다. 일부 진술들은 때로 형상이 대응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개념들(분할들-cuts)로 구성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인위적 창조이다. 다른 진술들은 실재 유들을 지시하며, 해당 형상이 정의의 "부분들"만이 아니라 분할 내의 모든 형상들에 관련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프레데는 피정의항에 대해 정의의 부분들이 본질 자체와 같은 방식으로 서술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다른 가능성은 예를 들어 고양이 그 자체가 특정 개별 고양이와 같은 방식으로 동물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입장은 auto kath' auto, pros allo 외에 제 3의 존재론적 관계, 다른 참여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 세 번째 관계가 실재 유들에 대응하지 않는 부분들, 분할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할당될 것이다.
  다른 한편 형상들 사이에서든 분할들 사이에서든 존재론적 관계는 없고 개념적, 자의적 관계만 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여러 나눔과 모음에서 배치되는 개념들에 의해 언급되는 형상들 사이에 존재론적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분할은 형상들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가 아니라 개념적 연결들을 그려낸다. "인간은 동물이다." 라는 진술은 형상들의 연결 때문이 아니라 모든 개별 인간들에게 인간성과 동물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참이다. 여기에서도 개념적 질서와 존재론적 질서의 구별이 드러난다. 다름의 부분이나 정의의 부분이나 확정된 내용을 지니고 형상들로부터 도출된다 하더라도 참여의 대상은 전혀 아니다. 


『소피스트』에서 Not-Being: 255e 까지의 배경.

다름의 부분들의 상태를 고찰하려면 not-being, 상, 거짓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이것들의 역할을 봐야 한다.
  거짓 진술의 가능성을 논하는 대목에서 플라톤이 소피스트를 상대로 충분한 답을 내놓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거짓과 부정을 논하는 255e8-263d는 논란이 많지만, 저자는 플라톤이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 문제의 구성은 소피스트가 상-제작자라는 규정을 반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 상이란 어떤 있지/~이지 않은 것이기에 불가능하고, 진술이란 말로 된 상이므로 진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진술이 가능하더라도, 있지/~이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거짓 진술이 불가능하다. 
  플라톤은 거짓 진술의 가능성을 Being, not, 진술이 각기 무엇인지 설명함으로써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말로 된 상인 이름, 화자인 영혼이 존재하는 유들임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형상들의 엮임을 통해 모든 isd인 것들은 또한 is not임을 보여준다. Logos의 가능성이 확보되고, 따라서 Logos가 Being에 참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언어의 부분들 중 본래 문장을 구성하게끔 결합할 수 있는 짝으로 명사와 동사가 있다. 화자는 형상들의 언어적 대응물들을 결합하여 문장을 구성한다. 거짓 진술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은, 소피스트가 참이든 거짓이든 어떤 진술을 만드는 자이고, (문장이 가리키는?)그 현상의 "요소들"은 모두 있다/~이다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논증은 영혼, 언어, 복합적인 onta의 다수성이 있다는 것에 의존하여, 어떻게 이성적 행위자가 거짓을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다름의 부분들을 나누는 데에, 그리고 거짓 진술에서의 주-술 병치에는 화자의 책임이 있다.
  논의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이러한 화자가 아니라 모든 is가 is not이기도 하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플라톤은 다원론적 존재론과 형상들의 엮임을 통해 무엇이든 존재하려면 Being과 One에 결합해야만 하고, 그 때문에 각기 여럿인 혹은 복합적인 존재들의 다수성이 필요하다. Being이 이외의 것들과 다른 한에서 그 각각은 Being이 아니다. 이를 통해 not being을 beings에, each being을 not being에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이 onta that both are and are not은 플라톤으로 하여금 어떻게 거짓을 말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거짓의 예로 제시된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진술은 해석상의 난점을 가져온다. 이 예문은 서술적 진술이다. 이 진술이 거짓인 까닭은 다음과 같다. '테아이테토스'는 물리적 개별자이고 '날고 있음'은 여러 개별자들이 공유하는 속성이다. 그런데 '날고 있음'이라는 속성은 테아이테토스에 속하는 그의 속성들로서 모든 onta와 다르므로 그에 대한 not-being이다.
  이에 대해 서술, 특히 부정적 서술은 어디에서도 고찰되지 않으며, 다름의 부분들이라는 원칙이 적용되는 것을 포함, 모든 부정적 발언은 비동일성 발언이라는 해석이 있다. 저자는 이에 반대한다. 저자는 다름의 부분들 원칙이 형상들의 비동일성 주장에서 개별자들(그리고 형상들)에 관한 부정서술로의 이행을 가져온다고 본다. 이 장에서는 그 이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거짓 진술에 대한 설명에 필요한 부분을 부정서술이 어떻게 채우는지 살펴 본다.

  『소피스트』 255e8-257a7

   일부 형상은 서로 결합하고 다른 형상들은 그렇지 않다. 형상이 형상이기 위해서는 Being에 참여해야 하며, 그렇게 형성된 논리적 주어로서의 모든 각 형상은 이어서 같음과 다름에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만 한다. 철자 유비에 비추어 보자면 Being, 같음, 다름은 모음-형상이다. 그러나 서로 섞이지 않는 형상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부족하다.
  한 형상은, 자기 자시과 관련하여서 같음에 참여함으로써, 같은 것이다(It is the same). 그러나 동시에 그 형상은, 같음에 관련하여 다름에 참여함으로써, 같은 것이 아니다(It is not the Same). 두 경우에 is와 is not은 달리 이야기된다. 적어도 이야기될 때 포함되는 형상들이라도 다르다. 이는 Being에 대한 참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형상은 Being에 참여함으로써 being이면서 being이 아니다. 즉 being과 다른, being이 아닌, not-being이다. 다름의 본성이 각각을 being과 다르게 만들어 not-being으로 만든다. "각 형상에 관련하여 being은 많지만 not-being은 셀 수 없이 많다.(256e5)"
  각 유는 Being에 참여하여 각기 being이다. 또한 각 유는 Being과 여타 beings에 참여하여 복합적이다.
 모든 각 형상에 관련하여 "많은" being들은 서술적으로, 즉 그 being들에 대한 참여 덕분에 being들이다. 반면 다름이 각 형상을 Being과 다르게 만들어 not-being으로 만들고, 이러한 다름 덕분에 각 형상에 "not-being"이 적용된다. 이를 통해 소피스트의 파르메니데스적 논증이 격파된다.
  256e5에 대해, 각 형상은 여러 속성들을 지니기에 많다(is much). 이 설명에서 서술적 "is"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오직 긍정문에서만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각 형상에 할당되는 not-being들은 다른 모든 각 형상과의 다름, 비동일성이다. 그러나 형상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언급된 곳도 없고 개별자도 논의에서 배제되기에, '셀 수 없이'는 것은 '많은'에 대조이지만 형상이 참여하는 한정된 수의 형상들을 의미한다. 
  
각 형상은 그 자체로, 즉 Being에 참여하여, 단적으로 유일하게 그 본질이다. 하지만 각 본질이 서로 다름의 이유는 아니다. 다름 때문에 다른 것이 되고 다름은 그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지닌다. 그것은 단일한 형상으로서 각 형상이 어떤 다른 형상과도 다르다는 유사한 일련의 사실들을 설명해준다. 이 일련의 부정들은 다름의 주어만 고려할 뿐 다름의 대상에는 관심 갖지 않는다. 다름은 형식상 두 형상들에 적용된다. 다름의 분할에 대해서 언급은 없고 부정 진술에 대한 실마리도 없다. 그 이유는 Being, Sameness, Difference가 모든 유를 관통하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한 형상을 고려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지의 성급한 도입과 정리를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운동과 정지가 섞이지 않는다고 동의되었다고 할 때, 이는 부정 서술 문제를 도입하도록 만들 것이다. 첫 단계에서는 not-being의 경우에서조차 각 형상은 Difference와 참여하기에, 오직 결합하는 형상들만 보여준다.
  

  『소피스트』 257a8-259b5

  반-파르메니데스적 결론은 형상들의 엮임을 전제한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1) "not-being"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것은 being에 반대되는 어떤 것(enantion ti tou ontos)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을 말하는 것뿐이다.
  (2) 어떤 것이 크지 않다는 것이 같은 크기인 것보다 오히려 작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3) 부정이 반대라고 하는 주장에 반대할 것이다. 'not'과 'non'이 명사 앞에 올 때, 그 이름과 다른,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3)에 서술이 들어온 것인지, 플라톤이 여전히 비동일성 안에서 작업 중인지 하는 것이다.
  (1)에서는 반대(ἐναντίον)에 관한 발상이 이후 논의들에 결정적이다. 앞서 비동일성 논의와 달리 여기에서는 부정되는 속성에 주목하는 동시에 주어를 특정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다. 비동일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주어와 동일하지 않은 특정 형상의 본성을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제 어떤 형상에 반대되는 무언가에 대한 개념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not"에 뒤따르는 형상에 관한 구체적인 어떤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앞서 "not-being"은 Being 자체와 그리고 다른 어느 형상과든 동일하지 않은 한에서 not-being이었다. 반면 곧장 이어지는 논의는 Being 자체에 관한 것이다. 허나 만일 (1)의 "tou ontos"가 Being 자체를 가리킨다면 논의는 이상해진다. Being 자체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Being에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배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tou ontos는 '어떤 being,' '어떤 형상'을 지시할 것이고, 반대 개념이 주어진 형상들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함축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1)은 참여대상이 아닌 실체적 형상들로 비약하는 것이다.이전에는 그런 형상에 대한 논의가 없으므로 "other than being"이 형상들 사이의 비동일성 이외에 어떤 의미인지가 문제된다.
  (2)에서 ti me mega는 반대항으로 '작음'을 가진 실체적 형상으로서 적절한 예시이다. Not-large를 말하면서 반대인 작음이나 혹은 중간, 다른 어떤 것이든 여타의 것들보다 더 선호하여 논하는 것은 아니다. 이 발언의 의미는 큼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1)에 주어는 도입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3)은 술어에 한정된다. 만일 (2)의 어떤 것(ti)이 일상적 개별자를 지시한다면, 이전 논증을 넘어설 수 있다. 형상들에 국한할 경우 not-being은 지정된 주어쪽 형상과 그 외에 어떤 형상 사이의 비동일성을 언급한다. 만일 논의가 개별자를 포함하는 쪽으로 확장된다면, 비동일성 "not"뿐만 아니라 부정서술의 "not"까지 관련한 논의도 보는 편이 타당하다. 개별자는 형상들에 참여함으로써, 즉 서술적으로 그러한 것이기에 그것들인 바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실체적 형상들은 개별자들이 참여하고 또 참여하지 않는 그러한 형상들이다. 
  개별자에 대한 논의로 생각할 때, (3)은 not-large가 해당 개별자의 large와 다른 속성 모두에 관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없는 "all"을 넣으면서 일반화할 때 위험이 있다. 제시된 주어가 지닌 속성이 Largeness와 다르다는 사실은 그것이 큰지 어떤지 여부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개별자의 속성들 중 어느 것에든 확실히 언급된 바는 없다. (2)의 예시를 통해 양립불가능성을 도입해 볼 수 있다. Not-large는 large라는 속성을 지님으로써 배제되는 여러 확정적 크기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독해는 문헌 근거가 부족하고, (3)의 일반화를 포섭하지 못하며, 제시된 확정적 속성들 중 어떤 것에 의해 규정되지 않을 수 있는지 없는지 불분명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독해가 not에 대한 선이해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즉, 어떤 것이 동시에 같은 측면에서 크고도 작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분명한 점은 "not"이 술어 F와 결합하여 의미하는 바는 F의 반대가 아니라 F와 다른 어떠한 것이란 점이다. 이 "not-F" 술어가 적용되는 주어의 범위에 개별자가 포함된다 가정하면, 이는 비동일성과는 다르다. 주어에 관하여 어떤 것을 배제하거나 주어와 다를 속성들의 잠재적 영역을 제공하는 것은 주어가 무엇이고 형상이 무엇인지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양립불가능성과 일반화를 제하면, 술어 "some(thing) other (ton allon ti)"가 설명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Not-being이 의미하는 something other에 대한 설명으로 지식에 대한 유비가 등장한다. 다름의 본성은 지식처럼 분할된다. 지식은 어떤 식으로 하나이나, 주제에 따라 여러 부분들을 지닌다. 
  다름도 마찬가지로 하나이면서 여러 부분들을 지닌다. 아름다움에 대립되는 다름의 부분이 '안-아름다움'이다. 아름답지 않다고 서술되는 주어를 불특정한 것으로(X, Y, something) 보충하여 일반화하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그 주어는 다름의 부분이다. 다름이 개별 형상에 맞세워질 때 다름의 부분이 구성되고, 역으로 not-F의 의미를 고려하면서 다름의 부분을 예상하게도 된다. 이는 하나의 논리적 과정의 두 측면이다.
  다름의 '주제'가 되는 것은 독립적인 being, 형상이다. 그런데 다름 또한 고유한 본질을 지닌 형상이므로, 이 역시 Being이며, 그 부분들 역시 being이다. 
  만일 다름의 부분들이 Not-F, Not-G 등이고 이것들이 being이자 형상이라면, 다른 형상에 대해 그러하듯 이 형상들에 대해서도 개별자가 참여하여 해당 속성을 얻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부정적 속성을 지니는 개별자들에 공통되는 존재론적 특징이 없다는 것이다. 
  다름 자체가 이 문제에 가능한 해법을 제공한다. 아마 다름은 그 자체 본래적으로 부분들로 나뉘고, 다름에 참여하는 것들은 항상 다름의 부분에 참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플라톤은 운동이 그 외 모든 형상과 다른 이유를 다름 자체에 참여 때문으로 본다.
  

  

  
  

 결론

  초중기 플라톤의 개별자는 결합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단순한 속성들의 묶음이다.
  개별자 속성다발의 결합 설명에 선행자로 형상론이 개선된다.- 덕과 덕의 부분들, 형상과 그 형상의 'pathe' 등-
  형상론의 개선으로 플라톤은 개별자 내에서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정적 진전은 전통적 형상들에 추가적으로 보완된 수학적 형상들, 그리고 용기(혹은 무한정자)이다. 이 둘이 개별자에게 구조와 안정성을 부여한다.
  - 존재의 네 가지 분류: 한정, 무한정, 혼합, 혼합의 원인. 개별자에게는 무한정한 물질적 측면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고 결합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다.
  - 무한정-물질적 요소는 기하학적 한계를 지니게 된다. 궁극적 수용자로서 그릇이 등장한다. 이 그릇이 개별자를 정위시킬 공간개념을 가능케 한다. 또한 시간 개념이 도입된다. 시공간상에 특정된 개별자의 범위 내에 속하는 속성들이 그 개별자에 한정하여 묶인다. 
  기하학적 형상이 개별자에게 시공간을 제공하고 구조와 안정성을 준다. 전통적 형상은 그 기하학적으로 한정된 형태에 질적 속성들을 부여한다. 이 결합이 개별자를 구성하며 여기에 개별자의 '본질'은 요구되지 않는다.
  일부 요소들 혹은 반대자들의 혼합물은 혼합의 형상과 달리 잘못된 혼합물일 수 있다. 같은 요소들이 상이한 수학적 한계들을 수용할 수 있다.
  용기는 이차적 질서이다. 용기는 개별자들을 기하학적 범위로 수용하고, 어떤 속성이든 받아들인다. 이는 개별자 자체에 일차적 속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기는 형상 Being에 대응한다. 용기가 개별자에 대해 그러하듯 Being은 형상에 대해 이차적 질서이다. Being에 참여함으로써 형상들은 각기 논리적 주어가 된다.
  원소적 물체가 삼각의 형태일 필연성은 없다. 다른 구조에 따라 원소적 물체가 다른 성질을 띨 가능성은 열려 있다. 따라서 원소의 구조가 원소의 성질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적 공간이나 개별자 모두 조건적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일단 구조가 성립하면 그 구조에 따른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자가 본질을 지닌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 근거는 첫째, 특정 지폐는 해당 지폐를 생산한 조폐국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부모와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이를 본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를 들어 x가 y와의 관계 r을 통해 F 속성을 지닌다면, 이 관계에 앞서 x는 본질을 지닌 어떤 무엇으로서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반론에 대한 재반박은 그 사례가 개별자 사이의 관계인 반면 플라톤은 개별자의 속성을 항상 형상과의 관계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질적 관계와 본질이 구분될 수 있다. 이는 de re 본질주의와 de dicto 본질주의 사이의 구분을 필요로 하는 논의이다. 세 번째로,조폐의 경우 지속적으로 동일시되는 물질적 개체가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 그러한 연속적인 물질적 개체가 성립하는지 불분명하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 관계를 통해 속성을 획득하기 이전의 x가 어떤 속성이든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de dicto의 영역이다. 
  후기에 이르러 플라톤의 형상들은 상호 결합한다. 특히 특정 형상들은 모든 형상들이 형상이기 위해 참여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형상들은 논리적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같음과 다름은 개별자의 논리적 지위를 확정해줄 수 있다. 이런 결합은 형상들 사이의 참여가 재귀적일 수 있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자기-참여는 여타 형상이 해당 형상에 참여한 결과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 반면 자기-서술은 본질을 나타낸다. 자기-서술은 Being에 대한 참여의 결과로 나타난다. X는 X인 바의 바로 그것이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논리적 공간에서 다른 모든 참여에 우선한다. Being은 용기와 마찬가지로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이다. 
  Being과 용기의 이러한 연결은 변화하는 현상에 항상성을 부여하는 시도와 형이상학적 이론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 시도 사이의 결합을 암시한다. 유사한 방식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과 결부된다. 운동과 정지는 탐구주체로서 자기-운동자인 영혼과 그 영혼이 탐구하는 고정되고 확실한 대상들에 연결된다. 
  하나의 형상이 여러 개별자들에 의해, 또 여러 형상들에 의해 참여받고, 다양하게 서술되면서도 단일한 본질을 지닌다. 이러한 분리 역시 앞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이다.개별자와 형상의 구분, 형상과 형상 사이의 구분, 형상인 바의 것으로서 형상과 탐구의 대상으로서 형상 사이의 구분 등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분은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합리적 숙고의 결과이다. 무언가 탐구하고 알고자 할 때 대상의 고정성과 정의항/피정의항의 본질적 단일성은 항상 요청되게 마련이다.

서론

  플라톤의 철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체계적 반성이 가능하다 여기며, 이 활동 자체가 철학이라 주장한다. 이 체계적 반성은 인식활동으로서 인식론과 결부되고, 그러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대상의 고정성이 요청된다. 대상의 고정성은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와 관련된다. 따라서 그의 윤리적 물음에 답하는 과정에서 인식론과 형이상학을 논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들을 따로 분리시키기도 어렵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우선 세계와 우리의 사유 안에 객관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안정성 없이는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식, 탐구가 가능하다는 것은 세계가 가지적이며 따라서 합리적 질서에 맞추어 안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안정성의 원천을 플라톤은 형상과 그에 대한 직관으로 본다. 형상과 직관에 대한 탐구가 그의 형이상학에 일차적 목표이다.
  안정성의 반대급부에 변화하는 경험적 현상들과 그 안의 사물들이 놓인다. 자연세계와 사물들 역시 탐구의 대상이므로, 그 안에서 안정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나 변화는 경험적 사실로서, 안정성과 함께 이 세계에서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또한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의 형이상학에 이차 목표이다.
  이제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탐구가 요청된다. 형상에 대해, 또 자연에 대해 특수한 형이상학들이 있다면 이러한 형이상학들을 가능케 하는 소위 '일반 형이상학'이 필요하다. 즉 탐구의 형식들을 지배하는 일반원칙들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며, 여기에 이르는 경로는 우리의 사유와 인식에 대한 고찰뿐이다. 
  여기에 더하여, 플라톤은 특수한 형상들을 고찰한다. 사유, 언어, 형이상학적 탐구를 가능케 하는 형상들이 있으며 그 형상들은 '여럿에 걸친 하나(One-Over-Many)'로서 공통범주적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형상들 역시 다른 형상들과 마찬가지로 심-독립적이며 객관적일 것을 요구받지만, 그것들이 사유와 언어의 가능조건이라는 점에서 이 독립성을 단언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인식론적 실재론과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구분이 요구된다.


 결론

  초중기 플라톤의 개별자는 결합의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단순한 속성들의 묶음이다.
  개별자 속성다발의 결합 설명에 선행자로 형상론이 개선된다.- 덕과 덕의 부분들, 형상과 그 형상의 'pathe' 등-
  형상론의 개선으로 플라톤은 개별자 내에서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구성할 수 있게 만들었다.
  결정적 진전은 전통적 형상들에 추가적으로 보완된 수학적 형상들, 그리고 용기(혹은 무한정자)이다. 이 둘이 개별자에게 구조와 안정성을 부여한다.
  - 존재의 네 가지 분류: 한정, 무한정, 혼합, 혼합의 원인. 개별자에게는 무한정한 물질적 측면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고 결합 때문에 갖는 속성도 있다.
  - 무한정-물질적 요소는 기하학적 한계를 지니게 된다. 궁극적 수용자로서 그릇이 등장한다. 이 그릇이 개별자를 정위시킬 공간개념을 가능케 한다. 또한 시간 개념이 도입된다. 시공간상에 특정된 개별자의 범위 내에 속하는 속성들이 그 개별자에 한정하여 묶인다. 
  기하학적 형상이 개별자에게 시공간을 제공하고 구조와 안정성을 준다. 전통적 형상은 그 기하학적으로 한정된 형태에 질적 속성들을 부여한다. 이 결합이 개별자를 구성하며 여기에 개별자의 '본질'은 요구되지 않는다.
  일부 요소들 혹은 반대자들의 혼합물은 혼합의 형상과 달리 잘못된 혼합물일 수 있다. 같은 요소들이 상이한 수학적 한계들을 수용할 수 있다.
  용기는 이차적 질서이다. 용기는 개별자들을 기하학적 범위로 수용하고, 어떤 속성이든 받아들인다. 이는 개별자 자체에 일차적 속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용기는 형상 Being에 대응한다. 용기가 개별자에 대해 그러하듯 Being은 형상에 대해 이차적 질서이다. Being에 참여함으로써 형상들은 각기 논리적 주어가 된다.
  원소적 물체가 삼각의 형태일 필연성은 없다. 다른 구조에 따라 원소적 물체가 다른 성질을 띨 가능성은 열려 있다. 따라서 원소의 구조가 원소의 성질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적 공간이나 개별자 모두 조건적 필연성을 받아들인다. 일단 구조가 성립하면 그 구조에 따른 성질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별자가 본질을 지닌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 근거는 첫째, 특정 지폐는 해당 지폐를 생산한 조폐국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며,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의 부모와 필연적으로 관계된다. 이를 본질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예를 들어 x가 y와의 관계 r을 통해 F 속성을 지닌다면, 이 관계에 앞서 x는 본질을 지닌 어떤 무엇으로서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반론에 대한 재반박은 그 사례가 개별자 사이의 관계인 반면 플라톤은 개별자의 속성을 항상 형상과의 관계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또한 본질적 관계와 본질이 구분될 수 있다. 이는 de re 본질주의와 de dicto 본질주의 사이의 구분을 필요로 하는 논의이다. 세 번째로,조폐의 경우 지속적으로 동일시되는 물질적 개체가 있지만 플라톤의 경우 그러한 연속적인 물질적 개체가 성립하는지 불분명하다.
   -두 번째 반론에 대해, 관계를 통해 속성을 획득하기 이전의 x가 어떤 속성이든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de dicto의 영역이다. 
  후기에 이르러 플라톤의 형상들은 상호 결합한다. 특히 특정 형상들은 모든 형상들이 형상이기 위해 참여해야만 하는 종류의 것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형상들은 논리적 기능을 한다. 예를 들어 같음과 다름은 개별자의 논리적 지위를 확정해줄 수 있다. 이런 결합은 형상들 사이의 참여가 재귀적일 수 있음을 함축한다. 이러한 자기-참여는 여타 형상이 해당 형상에 참여한 결과와 같은 결과를 낳는다. 반면 자기-서술은 본질을 나타낸다. 자기-서술은 Being에 대한 참여의 결과로 나타난다. X는 X인 바의 바로 그것이다.
  Being에 대한 참여는 논리적 공간에서 다른 모든 참여에 우선한다. Being은 용기와 마찬가지로 일차적인 것이 아니라 이차적인 것이다. 
  Being과 용기의 이러한 연결은 변화하는 현상에 항상성을 부여하는 시도와 형이상학적 이론 자체의 본성에 대한 탐구 시도 사이의 결합을 암시한다. 유사한 방식에서, 형이상학에 대한 탐구는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과 결부된다. 운동과 정지는 탐구주체로서 자기-운동자인 영혼과 그 영혼이 탐구하는 고정되고 확실한 대상들에 연결된다. 
  하나의 형상이 여러 개별자들에 의해, 또 여러 형상들에 의해 참여받고, 다양하게 서술되면서도 단일한 본질을 지닌다. 이러한 분리 역시 앞서의 결합과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이다.개별자와 형상의 구분, 형상과 형상 사이의 구분, 형상인 바의 것으로서 형상과 탐구의 대상으로서 형상 사이의 구분 등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분은 형이상학적 탐구에 대한 합리적 숙고의 결과이다. 무언가 탐구하고 알고자 할 때 대상의 고정성과 정의항/피정의항의 본질적 단일성은 항상 요청되게 마련이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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