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아하던 사람이 결혼을 했단다. 하하하. 이런 식상함이라니. 뭔가 너무너무 평범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숨막히는 '일상'이다. 서른 즈음의 사내새끼 누구라도 그러하듯, 나 역시도 '너의 결혼식'이나 '여전히 아름다운지' 따위를 읊조리며 술이나 마시는 찌질이가 되었다. 다만, 갈수록 장가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듯하니, 이빠진 일상이라고 해야 하려나.

2. 새벽 두어 시 즈음이던가, 왠 앳된 사내애의 고함인지 비명인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여자를 왜 떄려, 엄마를 왜 때려, 엄마 어디있어." 이런 말을 해댄다. 그래, 그런 동네였던 건 잘 알지만 아직도 '그런 동네'인 줄은 잠시 잊었네. 그랬었지. 또 어느 새벽에는 계집애 둘이서 고성을 질러댄다. 또 들어 보니, "바지 올려, 미친 년아!" "몰라, 나 오줌 눌 거야!" 그냥 그런 얘기를 들었대도 변태로 찍혀 경찰서에나 끌려갈까 두려워 신경 끄는 게 예삿일이겠지만, 왜 하필 우리 집 앞 골목에서 소변을 봐야 했던 거니. 여하간 관두라고 소리 지르기도 꼴이 우스워, 담장 너머 술 취한 여자애들 둘이 오줌을 누네 마네 실갱이 하는 꼴을 상상하며 보이지 않는 그곳으로 시선을 던지다 문득 고갤 드니, 그게 다 보일 각도에서 히죽거리고 있는 사내새끼랑 눈이 마주친다. 아, 지저분하다. 안 보이는 나와 보이는 저 새끼가 눈이 마주쳤다, 이건 억울하네. 택시운전사는 "저 빨리 가야해요"하고 애원을 하고, 늘 그런 동네. 지긋지긋하다. 그토록 달아나고 싶었던 썩은 동네에 벌써 30년째, 지랄이 풍년이다.

3. 누가 그런다. 재능이 없다고 그렇게 꼬집어 지적질하는 게 즐겁고 재미지냐고. 뭐 나한테 한 소리는 아닌데, 여하간. 그럼 어쩔까? 없는 재능 있다고 구라라도 쳐야 좋은가? 막무가내로 일단 지르고 보라고 충동질이라도 해야 옳은가? 재능이 없다는 지적은 관두라, 때려 치워라, 그런 이야기하고는 다른 문제다. 출발점을, 디디고 선 땅을, 그 밑바닥을 알려주는 거다.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걸 직시하라고 조언하는 거다. 제 현실에서 눈 돌린 채로 날뛰고 뒹구는 건 제 삶도, 제 주변 사람들의 삶도 피곤하게 만들 따름이다. 시궁창 밑바닥을 벅벅 기고 있는 제 꼬라지를 자각하고 나서도, 제가 기어 올라야 할 그 구덩이의 깊이를, 비루한 몸뚱아리를 알고도 어쨌든 끝까지 나아가 보겠다면 그거야 그저 자기 선택이 아니겠나? 그걸 누가 말리겠냔 말이지. "넌 재능이 없다," "넌 돈이 없다," "넌 학벌이 쓰레기다," 그게 다 사실이라면 말해주는 게 맞는 거다. 거기에 일말의 양심과 책임감이 있다면 그 지린내나는 썩은 진창에서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해야 기어나올 수 있을는지, 그것까지도 말을 해주어야 하는 거고. 괜찮다느니 잘 될 거라느니 꿈을 가져 보라느니 일단 뛰어 들라느니, 귀에나 달콤한 무책임한 개소리들 지껄여 놓고서는 뭔가 대단히 청춘을 위로라도 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나 좆나 어른스러운 듯, 하악하악' 이 지랄하는 새끼들은 귀싸대기를 올려맞아도 싸물고 있어라. 어떤 일이든 그 일이 좋고 즐겁고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면, 성과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버텨나갈 구석은 항상 있다. 좆나 언터쳐블(불가촉이냐...) 상위 개간지들과 삐꾸찌끄래기찌질이들 사이 두텁고 넓은 그 가운데에 숱하게 인생 맡기고 목숨 내던지며 달려들다 사라져간 익명의 아무개들, 그들 중에 하나가 되는 거다. 재능과 무관하게, 노력만으로, 업적이 아닌 최저한도의 턱걸이, 최소한의 조건을 채워가면서, 그 무영씨들을 '존경'하면서 가는 거 말이다. 그럴 생각도 의지도 없는 씹새끼들이 재능이라곤 쥐뿔 좆도 없으면서 세상을 갈아 엎겠노라고 날뛰면, 가만히 다가가 부랄주머니를 걷어 차주고서 '정신 차려라'라고 말을 해주는 거다. 무책임을 희망과 긍정 같은 알량한 가식과 위선으로 덮어 버릴 생각들 말고, 남한테 뭐라 할 거면 욕 먹을 각오부터 해라. 이제 이런 얘기도 지겹다.

4. 석사 수료에 2년 걸리고 그 이후 또 2년째, 근데 논문을 또 다음 학기로 미뤘다. 이거저거 다 벌려놓고 들쑤시고 다니면서도 석사논문 따위야 어떻게든 통과는 받을 수 있지 않겠냐, 뭐 그런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좀 가랑이 붙들고 울며불며 매달려 늘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 없다고 안 돌아갈 강의나 세미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제가 너무 주제넘었는지도. 문제들의 얼개를 잡고, 논쟁사를 정리하고, 그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도 될지, 그게 어떤 그림이 나오는 건지, 아무튼 다시 뭔가 만들어서 지도교수님께 내밀고서야 뭔가 상담을 받든 어쩌든 할 수 있을 거다. 꼴이 우습다만, 아직 내딛을 다리가 있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지금 이 상황이 안락사를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나란 놈이 폐기처분된 것일지, 이 즈음에서 억지는 관두고 다시 학원일이나 알아봐야 할지, 별 생각을 다 해 봐도 결국 지금 이 자리로 되돌아 온다. 묻고 따지고 고민하는 것 말고, 다른 걸 하면서 견딜 자신이 없다. 누가 날 죽이지 않는 한은, 이렇게 이대로 살아야 하겠어서 나는 좀 더 비집고 나아가야 하겠다. 내 처지를 내 모르는 바 아니오.

5. 논문 끝내면 『티마이오스』랑 『파르메니데스』, 『에우튀데모스』 좀 뒤적거리면서 영어 공부나 해야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해 놓고 유학 좀 알아 보고, 가능하면 박사과정 입학시험 없었으면 좋겠는데 뭐 있어도 별 수 없고, 그나마 TEPS 점수라도 받아 놓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려나, 독어 시험이야 뭐 그까이거 대충 때려 맞추면 되는 거고. 플라톤이 생각한 논리와 수리, 그게 궁금한 거다. 이걸 붙들고 늘어질 방법을 배울 길이 있을 거다. 그걸 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을 수 있을 거다. 그럼 그거나 붙잡고 평생 그걸로 노닥거리다 뒈지는 거다. 꿈처럼 행복한 이야기다. 뭐 봇따리 둘러메고 "이빨 털 테니 밥값 좀 주쇼." 하고 다니게 되는 걸 피할 길은 없겠지만, 딱히 노후 준비 없이 홀몸으로 살면야 크게 바쁠 일도 없겠고, 지금처럼 이리저리 선생님들 뵈러 다니고 또 유학 갔다 오는 게 이루어져야 할 말이겠지만 이 나라 저 나라 선생님들한테 메일도 보내고 학회에 논문도 좀 쏴 보고 하면서, PDF 찾으러 다니거나 이 도서관 저 도서관 뒤적거리면서, 이 소리 저 소리 들으면서 이것저것 궁금해 하고 또 조금은 풀기도 하면서, 제발 좀.

-蟲-

P.S. 왜 당신들이 쓰레기한테 쓰레기라 말해주지 못하는가 하면, 쓰레기는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단정짓고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쓰레기는 쓰레기대로 살아남는 방식이 있다. 난 쓰레기고, 니가 쓰레기라고 기꺼이 말해줄 생각도 있다. 너도 나도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하는 소리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