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5a-598d : 이렇게 수립된 폴리스는 시가와 관련하여 특히 제대로 수립된 것이다. 영혼의 종들이 나뉜 점을 감안할 때 시 중에서 모방적인 것은 거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럿에 관하여 각기 하나의 형상을 가정해 왔듯, 이번에는 침상과 식탁에 관하여 각기 그 이데아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각 가구의 장인은 이 이데아를 보면서 침상들과 식탁들을 만든다. 그러나 이데아 자체를 만들지는 못한다. 다른 한편, 이런 각 장인이 만드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수공예가 또한 있다. 이 자는 이런 것들에 더하여 천지간 또 그 너머의 모든 것도 만들어낸다. 그는 소피스테스이다. 이런 제작자는 어떤 식으로는 성립 가능하고 또 어떤 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거울을 비추든 그림을 그리든 하여, 비록 ~인 바의 것들(ta onta)은 아니라도 ~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phainomena)'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도 침상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진정한 침상이 아닌 침상으로 보이는 것을 제작해내는 것이다. 나아가 침상 제작자 역시, 침상인 바의 바로 그것인 형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침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인 바의 바로 그것을 만들지 않는 한, 그는 그것인 바의 것(to on)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것(toiouton)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완전히 ~인 것이라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제 신이 만드는 것이라 말할 본래적 침상이 있고, 다음으로 목수의 침상이, 끝으로 화가의 침상이 있다. 이에 따라 신, 목수, 화가가 각각을 관할한다. 신은 필연적으로든 그리 원했기 때문이든 침상인 것 자체를 하나만 만들어냈다. 설령 신이 침상인 것 자체를 두 개 만들었더라도, 그 두 침상들이 가지는 형상으로서 침상인 것 자체가 나타날 것이다. 이에 따라 신은 창조자이다. 이제 목수는 침상의 장인이고 화가는 침상의 모방자이다. 모방자는 본질로부터 세 번째 것의 제작자이다. 비극 작가와 모든 모방자가 이러한 화가와 같다. 화가는 또한 진실이 아니라 보이는 바의 것을 보이는대로 모방한다. 모방자는 실재의 작은 부분, 그것도 영상을 다루며, 여러 장인들을 그려줄지라도 그 기술들에는 전혀 정통하지 못하다. 그러나 잘 모방한 그림으로 어리석은 자들을 속일 수는 있다. 만일 누군가 모든 제작술을 알고 각자의 모든 앎들을 전부 아는 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모방자에 속은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이는 지식과 무지 그리고 모방을 분간하지 못한 탓이다.

598e-603b : 비극의 경우에도 비극 시인은 모든 기술, 모든 덕과 악덕과 인간사 전부, 나아가 신들의 일까지 죄다 알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알지 못한다면 시를 지을 수 없으리란 이유에서이다. 이런 말을 전하는 자들은 화가에 속은 어리석은 자들과 마찬가지이다. 시로 짓는 것은 현상들이지 실재들이 아니며 그것은 실재로부터 세 번째로 놓이는 것이다. 만일 시인이 모방대상과 영상(모방의 결과) 모두 만들 수 있다면, 그는 후자에 천착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둘 다 아는 자라면 전자에 더욱 매진할 것이다. 저 호메로스조차, 여타의 것들은 차치하고라도 가장 중대하고 훌륭한 문제, 전쟁과 정치, 교육에 관하여서 두 번째에 오는 제작자이지 못하고 진실에서 세 번째로 동떨어진 모방자이다. 그가 지휘를 한 전투도 없고 법을 제정해준 나라도 없으며 교육시킨 제자들도 없다. 그가 실제로 앎을 지녔더라면 실제로 행동을 하여 더 많은 업적과 명예를 성취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시인은 모방자이며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모방대상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자들이나 그들의 운율, 리듬, 선법을 두고 그들이 주제에 관하여 잘 논하였다 떠든다. 이런 시들은 이 음악적 색채들이 제거되면 경시될 것들에 불과하다. 모방자는 실재를 전혀 모르며 그 현상에 대해서만 안다. 예를 들어 고삐와 재갈의 경우, 화가는 이를 그리나 그것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모르고 그 쓰임도 알지 못한다. 이는 말 타는 기술을 갖춘 자에 비하면 그 제작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에 각기 이처럼 사용하는 기술과 제작하는 기술, 모방하는 기술이 있다. 모든 것 각각의 덕과 아름다움과 옳음은 그 쓰임새에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사용 경험이 많은 자가 해당 제작물을 평가할 수 있고 이를 제작자에게 알려줄 수 있다. 사용자는 지식을 갖고 제작자는 그에게서 들어 옳은 확신은 가지나 지식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모방자는 지식도 옳은 확신도 없으며 모방대상의 미와 악에 관하여 알 수도,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다. 그저 무지한 자에게 아름다워 보일 것으로 모방할 따름이다. 시인은 모방대상을 모르고, 진지하게 임하는 게 아니라 장난을 노는 것이며, 어떤 운율로 꾸미든 모방자일 따름이다. 그 모방이란 것이 지닌 능력은, 마치 시각에 대해 원근이나 매질, 색채와 음영에 따른 착시와 같은 일을 영혼에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해법은 측정과 계산 그리고 계량이다. 이를 통해 현상이 지배하는 대신 계산된, 측정된, 계량된 것이 지배하게 된다. 이는 영혼에서 논리적 부분의 기능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의해 측정된 똑같은 것을 두고 동시에 상반되게 현상하는 것으로 여겨질 경우가 있다. 이러한 측정과 어긋나는 판단은 영혼의 다른 부분에 속할 것이다. 이 중 논리적 부분이 영혼의 최선의 부분이다. 반면 이에 반대하는 부분은 미천한 부분이다. 모방술은 이렇듯 분별과 멀리 떨어진 부분에, 진실과 멀리 떨어진 모방으로써 교제하며 미천한 것들끼리 동료가 된다. 

603c-608b : 시에 대한 회화의 유사성 이외에 시 자체의 사유(추론)을 고찰해야 한다. 시라는 모방술은 행위들과 이에 대한 평가, 또 이에 따른 마음의 상태들을 모방한다고 한다. 이 경우 인간은 시각에서 똑같은 것을 두고 상반된 믿음들로 내분을 겪듯 행위들에 대해 영혼에서 자신과 내분을 겪게 된다. 그러나 훌륭한 자는 불행을 수월하게 견뎌낼 것이다. 그를 괴로움에 저항하도록 지시하는 것은 이성과 법이고 그 방향으로 이끄는 것은 감정이다. 법은 불운의 선악이 불분명하고 인세는 중대한 것이 아니며 괴로움은 시급한 판단을 지연시킨다고 가르친다. 이성이 최선이라 입증한 길을 따라 최대한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이 영혼에 습관화되어야 한다. 반대로 고통과 비탄, 그에 대한 기억으로 인도하는 부분은 비이성적이고 나태와 비겁에 친근한 것이다. 후자에 따라 분노가 일어나므로 쉽사리 분노하는 성격은 여러 머리를 지닌 욕구에 따르는 것이기에 다채로운 모방을 수용한다. 반면 분별을 갖춘 차분한 성격은 동일성을 유지하며, 이를 모방하는 것도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이 부분과 먼 모방자로서 시인은 다채로운 성격을 모방한다. 시인은 결국 진리에 비해 하찮은 것들을 만들고, 하찮은 영혼의 부분에 어울리며, 그와 닮아간다는 점에서 화가와 같다. 시인이 이런 식으로 최악의 부분을 강화하고 이성적 부분을 파괴시키며 개인의 영혼 안에 악한 정체를 발생시키기에 그는 추방되어야 한다. 또한 비극에서의 비탄과 장광설을 사람들이 동정하고 몰입하며, 이 상태를 유지시키는 자를 훌륭한 시인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비탄에 빠지는 것보다 의연하게 대처하는 쪽이 더욱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이와 반대되는 일을 내세우는 시인이란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니다. 관객은 스스로 지나치게 울거나 웃는 일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시의 상연을 보며 그리하는 것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이 과정에서 욕구를 키우고 이성을 약화시키게 된다. 이 외의 모든 욕구들에 대해서도 시를 통한 모방은 같은 작용을 한다. 호메로스의 시 중에서도 훌륭한 자들에 대한 찬양만을 수용하고, 그 이외의 쾌락을 주는 시가들은 거부해야 한다. 시와 철학 사이의 오랜 대립이 있어 왔으나, 앞서의 비판을 극복하는 시라면 수용될 수도 있다. 시가 쾌락만이 아니라 폴리스의 정체와 인간 생활을 위해 이롭다는 것을 밝힌다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는 없다. 다만 이러한 변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는 추방되어야 하며, 명예든 재물이든 관직이든, 아니면 적어도 시에 의해서는 덕에 무관심해져서는 안 된다. 

608c-613e : 이제 덕에 대한 최대의 보상과 포상이 언급되어야 한다. 모든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생애만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에 걸쳐 불사하는 영혼과 관련하여 이것이 고찰된다. 파멸과 몰락을 가져오는 것은 악이나 보전과 이익을 주는 것은 선이다. 몸에는 병이, 청동이나 쇳덩이에는 녹이, 그렇듯 모든 것에는 각기 악과 질병이 있다. 그런 악과 질병은 그것이 붙은 것 전체를 해체하여 파멸시킨다. 선도, 악도 선도 아닌 것도 이러한 파멸을 불러오지는 않는다. 이제 어떤 것에 고유한 악이 그 어떤 것을 악한 상태에 처하게는 만드나 파멸시키지 못한다면, 그 어떤 것의 파멸이란 불가능할 것이다. 영혼의 경우 여러 악덕들이 있으나, 그것들로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음에 이르는 경우는 없다. 또한, 육신의 경우 곡식의 악화가 육신의 파멸을 직접 초래하는 게 아니라 육신의 악화를 초래하여 이 육신의 악화가 육신의 파멸을 부르듯, 육신의 악화가 영혼의 악화를 야기하지 않는 한 육신의 악화가 영혼의 파멸을 초래하지도 못한다. 따라서 육신을 아무리 해체시켜 파괴한들 영혼이 그 때문에 파괴되는 일은 없다. 부정의가 살인자를 만들고 그가 처벌을 받아 사형당하더라도, 그것은 악덕이 영혼을 파멸시키는 사례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악덕을 갖춘 자는 활발하게 만드는 반면 다른 자들을 죽이는 것뿐이다. 그리하여 영혼은 언제까지고 영혼인 채로의 것이다. 영원히 영혼인 바의 것이라면 그것은 불사의 것이다. 그것이 불사이기에 생성도 소멸도 영혼에는 없다. 또한 그것이 영원하다면 그것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것 역시 아닐 것이다. 영혼이 육체에 의해 오염된 현실이 아닌 순수한 상태의 영혼을 고려해야 한다. 인세의 영혼은 해신 글라우코스처럼, 풍랑에 부서지고 해초와 따개비들로 뒤덮여 본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이 여러 모습으로 보이지만, 본래는 단일한 것이다. 그 영혼은 신적이며 불멸하고 영원한 것과 동류이다. 그것이 무엇을 알게 되고 또 어떤 교제를 갈구하는지 알기 위해 영혼의 애지(철학)를 고찰해야 한다. 정의의 보상과 무관하게, 특권적 자유를 주는 기게스의 반지나 하데스의 두건을 가지든 말든 정의가 그 자체로 영혼을 위한 최선의 것임은 이미 밝혀졌다. 이제 이 정의와 여타의 덕들에 대해 인간들에게서 그리고 신들에게서 받는 보상이 논의된다. 앞서 부정의한 자가 정의롭게 여겨지기도 한다는(dokein) 점이 양해되었으나, 실상은 정의로운 자가 정의롭다는 평판(doxa) 또한 얻게 된다. 실제로 정의롭다는 것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좋은 것들도 제공하며, 참된 정의를 지닌 자를 기만하지도 않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를 신들이 모를 리도 없다. 따라서 신들이 정의로운 자를 사랑하며, 그에게 최선의 것들을 선사한다. 생전이든 사후이든 그에게 생기는 불운마저 결국은 좋은 일로 귀결될 것이다. 덕을 실천하여 신을 닮으려는 자가 신들에게서 홀대받을 리 없기 때문이다. 반면 부정의한 자에게는 사정이 이와 반대일 것이다. 또한 인간들에게서는 정의로운 자가 결국 생애의 끝에 이르러 완주를 해낸 선수와 같이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반면 부정의한 자들은 그 정체가 탄로나 조롱당하며 추방되거나 고문을 당할 것이다. 

614a-616a : 이런 현세의 보상과 처벌은 사후의 보상에 비하면 하잘 것 없다. 이 사후의 이야기는 에르라는 용감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그는 전장에서 전사하였다 되살아나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다른 영혼들과 함께 신비한 장소에 이르렀다. 그 곳에는 대지와 천상 양쪽으로 한쌍씩 마주보는 구멍들이 나 있었다. 그 구멍들 사이에서 심판자들이 심판을 한다. 심판을 통해 정의로운 자는 하늘의 오른쪽 구멍으로, 부정의한 자는 왼쪽 구멍으로 보냈다. 남은 두 구멍 중 땅 쪽에서는 먼지를 뒤집어쓴 영혼이 올라왔고, 하늘 쪽에서는 순수한 영혼이 내려왔다. 오랜 여정을 마친 듯한 그 영혼들은 초원에 야영을 하며 서로 다른 쪽의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지하에서 온 자들은 비탄을, 천상에서 온 자들은 찬탄을 나누었다. 그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의 생애를 100년으로 잡아 선행에도 악행에도 그 열 배의 값을 치르거나 받는다 한다. 그리하여 이 여정은 1000년이 걸린다. 그런데 대참주 아르디아이오스는 겪을 일들을 오르는 입구에서 다른 참주들과 큰 악행을 저지른 사인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은 오르려 해도 그 입구가 대노하고 그 곁의 불과 같은 자들이 끌어내려 내던지고 고문하여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그는 타르타로스로 추락할 것이었다.

616b-620d : 여정을 마치고 야영하던 그들은 여드렛날에 초원을 떠나 이른 곳에서 그들은 천구와 대지를 관통한 기둥 같은 빛줄기를 보았다. 하루를 더 나아가 빛에 이르러 보니 그 끈의 끝들이 하늘에서 뻗쳐 전체 회전을 매어 주고 있었다. 그 끝들에서 아낭케 여신의 방추가 뻗쳐 연결되어 모든 회전을 운동시켰다. 전체 돌림추는 여덟 개로 서로 끼워 맞춰져 있었다. 전체는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나 그 안의 일곱 원들은 반대로 회전하며 아낭케의 무릎에 머무르고 있었다. 각 원마다 세이렌들이 앉아 하나의 음을 내어 전체 소리가 화음을 이루었다. 이를 빙 둘러 같은 거리에서 아낭케의 딸들인 운명의 여신들, 즉 과거의 라케시스와 현재의 클로토, 미래의 아트로포스가 앉아 화음에 맞춰 노래하고 있었다. 클로토는 방추 바깥 둘레를 오른손으로 돌리다 멈추기도 하고, 아트로포스는 왼손으로 안쪽 둘레를 그리하였으며, 라케시스는 두 방향 것들을 각각의 손으로 교대로 그리하였다. 영혼들은 먼저 라케시스에게로 나아가야 했다. 대변자가 라케시스의 무릎에서 제비와 삶의 본을 들어 말하길, 필멸자들의 새 주기의 시작이라 하였다. 또한 그들은 제비를 통해 필연적으로 동반할 삶을 택하게 될 것인 바, 첫 번째 제비를 뽑은 자가 처음으로 선택하게 된다고 하였다. 덕은 주인이 없어 귀히 여기는 자 더 갖고 경시하는 자 덜 갖게 되며 그 책임은 선택한 자의 것이지 신의 탓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제비를 뽑은 자들 앞에 삶의 본들이 놓였는데 영혼의 수보다 본들의 수가 더 많았다. 본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의 삶도 있었기 때문이다. 참주의 삶도 거지의 삶도 남성의 삶도 여성의 삶도 있으며 외모, 건강, 명성의 여러 갈래들도 있었다. 혼의 성향은 없었으니 삶에 따라 그 성향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선택을 위해 유익한 삶을 분간해내고 최선의 것을 택할 수 있도록 하는 학문이 있다면 이를 가장 중히 여겨야만 한다. 여러 조건들을 따져 혼을 더 정의롭게 만드는 삶은 선이며 더욱 부정의하게 만드는 삶은 악이라는 고려와 함께 더 나은 삶과 더 못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학문이 중요하다. 대변자는 덧붙여, '마지막 순서의 사람에게도 그가 이성적으로 선택하며 진지하게 산다면 만족할 만한 삶이 있다'라고 하였다. 첫 번째 영혼은 최고의 참주 신분을 선택하였으나 그 안에 자식을 잡아먹는 운명이 섞여 있음을 몰랐고, 이를 알고서는 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운과 신들을 탓하였다. 하늘에서 온 영혼, 훌륭한 정체에서 철학을 추구하였던 자들은 고된 일들로 단련된 적이 없어 이런 실수를 한다. 반면 땅에서 올라온 영혼은 스스로 고생하고 타인의 고생도 목도하여 신중하다. 이리하여 대다수의 영혼들에 좋고 나쁨의 역전이 이루어진다. 인세에 염증을 느낀 영혼들은 짐승의 삶을 택하기도 하였으나, 오디세우스는 사인의 삶을 찾아 헤매다 결국 찾아냈고, 그가 첫 번째 순서였더라도 이 삶을 택했으리라 했다고 한다. 

620e- : 모든 영혼이 삶을 선택한 뒤 다시 라케시스에게로 나아갔다. 라케시스는 각자 선택한 다이몬을 그 삶의 수호자로 동반시켰다. 각 다이몬은 각자의 영혼을 클로토에게 인도하여 운명을 확인받았다. 그리고 다시 아트로포스에게 가서 되돌리 수 없는 운명의 실로 인도하였다. 이로부터 아낭케의 옥좌 아래로 나아가 레테(망각)의 평야로 이끌었다. 영혼들은 아멜레테스(무관심) 강에서 야영을 하였고, 그 물을 마시고서 모든 것을 잊게 되었다. 밤중에 천둥과 지진이 일고 모두가 출생을 향해 흩어져 옮겨졌다. 이를 믿는다면 구원받을 것이며 망각의 강을 잘 헤쳐 나아가 영혼을 더럽히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영혼이 불사이며 모든 선악을 견딜 수 있다 믿으며 이 모든 논의를 납득한다면, 자신과도 신들과도 친구가 되기 위해 윗길을 향해 분별과 정의를 추구하며, 잘 살게 될 것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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