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1a-576b : 참주정과 참주의 발생과정에 이어 그가 어떤 자이고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지 검토되어야 한다. 그에 앞서 욕구들에 대한 이전의 구별을 좀 더 진행해야 한다. 필수적이지 않은 쾌락과 욕구 중 일부는 비정상적인 것들로서, 일부 사람들에게서는 법률과 이성을 동반한 더 나은 욕구들에 억제되어 약화되거나 제거되는 반면, 몇몇 사람들에게서는 더 강하게 남는다. 이런 욕구는 꿈 속의 욕구들로, 근친과 수간과 신에 대한 간음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살해와 온갖 무지하고 파렴치한 짓들을 저지르려 한다. 건전하고 절제 있는 자는 영혼의 이성적 부분을 훌륭한 논리와 고찰로 대접하는 반면 욕구적 부분에는 과부족이 없이 하여 잠들도록 한다. 이로써 최선의 부분이 방해받지 않고 통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같은 방식으로 격정적 부분 또한 진정시킨다. 이렇듯 욕구와 격정을 진정시키고 지혜가 깃드는 부분을 움직여, 꿈속의 환영들 또한 그 비정상성이 최소화되도록 한다. 이렇듯 흉포하고 무법한 욕구가 꿈에서 드러난다. 민주정을 닮은 자는 과두정을 닮은 수전노 아비에게서 양육되는 동시에 앞서 언급된 욕구로 가득 찬 사람들과도 어울리게 된다. 그는 양쪽 기질의 중간에 자리하여 부자유스러운 삶도 무법한 삶도 아닌 민주적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자들이 자라나 그들에게서 양육된 젊은이들은 소위 자유라 하는 위법에 인도된다. 민주정을 닮은 부모와 친지들은 이 젊은이의 중간적 욕구를 지원하는 반면, 타인들은 다른 욕구들을 자극한다. 이 젊은이를 제압하기 위해 저 참주를 새우는 마술사들은 날개 달린 큰 수벌인 욕정을 그 젊은이의 다른 욕구들의 지도자로 심어 주려 한다. 이 욕정 주위로 다른 욕구들이 맴돌며 그 욕정을 키우고, 욕정은 이러한 호위 속에 미쳐 날뛴다. 이 무리가 수치를 아는 믿음과 욕구를 찾아 죽이고 쫓아낸다. 이렇게 절제를 숙청하고 젊은이는 광기로 가득 찬다. 술에 취한 자나 정신이 나가 광기에 붙들린 자 또한 참주적 생각을 한다. 참주적 인간은 천성이나 생활방식에 의해 주정뱅이이자 욕정과 충동에 휘둘리는 자이다. 이렇게 에로스가 참주로 자리한 자는 주색에 빠져 방탕해지고 가산을 탕진해 빚을 지며 그마저 다 잃고 나면 사기를 치고 강도질을 하게 된다. 그는 부모의 재산을 가져다 쓰다 제한을 받으면 부모를 속이고 부모에게서 절도를 행하며 빼앗고 폭력까지 쓰게 된다. 에로스가 참주가 된 이후에는 꿈 속에서의 욕구들이 깨어 난 이후에도 활개를 치며, 이 사람 안의 유일한 지배자로서 에로스는 그 사람을 무법자이자 무정부상태의 인간으로 만든다. 에로스는 그를 온갖 대담한 악행으로 이끌어 소란스러운 욕구들을 지배할 것이다(전쟁을 일으키는 참주와 같이.). 이런 자는 참주를 경호하거나 용병일을 할 것이나, 평화시에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 폴리스의 다수가 되어 그들이 탄생시키는 참주는 그 자신의 혼에 최강의 참주를 지닐 것이다. 이런 참주는 모국, 조국을 예속시키고 노예 삼을 것이다. 이런 자는 참주가 되기 이전까지 자신에게 아첨하는 자들만을 사귀고, 필요한 자들에게 필요한 때에는 비굴할 것이나 필요가 채워지면 토사구팽할 것이다. 그러하여 누구와도 친구가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주인노릇을 하거나 역으로 노예노릇만 하며 영원히 참된 우정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안팎으로의 분열과 갈등은 정의와 가장 반대의 것이다. 이런 자는 꿈에서나 가능할 자가 현실에 생겨난 것이며, 참주정 내에서 점점 더 그 성향이 강화될 것이다. 따라서 가장 악한 자가 가장 비참한 자로 드러날 것이다. 또한 가장 오래도록 참주 노릇을 하는 자가 가장 오래 비참할 것이다.

576c-580c : 각기 다섯 종류의 인간이 다섯 종류의 정체에 상응하여 유사하다. 또한 덕에 관련하여 폴리스와 폴리스의 관계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이다. 이제 참주정과 최선자정의 관계는 정반대의 관계이다. 참주정은 가장 비참하며 최선자정은 가장 행복하다. 이제 참주정적인 인간을 목격한 듯이 가정하여 그 처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참주정은 전체와 훌륭한 자들이 노예의 상태에 처한다. 마찬가지로 참주정적 인간은 전체가 굴종과 부자유로 가득하며 가장 훌륭한 부분들이 노예가 되고 최악이자 가장 광기어린 부분이 주인이 된다. 그 영혼 전체가 노예의 상태이다. 이러한 영혼은 원하는 바를 이룰 가능성이 가장 적다. 이러한 나라는 필연적으로 가난하며 또한 끊임없이 불만족에 시달린다. 이런 폴리스와 이런 인간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다. 또한 비탄과 신음, 통곡과 고통이 그 어느 폴리스보다도 더욱 크다. 그러나 단지 이런 영혼일 뿐만 아니라 사인에 머무르지 못하고 실제로 참주가 된 경우의 인간이 가장 비참하다. 사인이든 참주든 참주정적 영혼의 소유자는 노예뜰을 거느린 부자와 유사하다. 폴리스가 시민 개개인을 지원할 경우에는 부자가 제 노예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처자와 재산에 더해 그 가노들과 함께 고립된다면, 그는 커다란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그런 자는 노예들 중 일부에게 아첨을 하고, 또 일부를 해방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이런 자 주위로, 누구의 지배나 간섭도 허용치 않고 그렇게 하려는 자를 살해하려 드는 이웃들이 자리잡는다면, 더욱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참주는 바로 이러한 처지의 부자와 유사하다. 사인에 머무르지 못하고 참주가 되어 버린 참주정적 인간은, 병자가 제 육신과 싸우듯 내내 온갖 것들과 싸우게 된다. 그는 아첨과 굴종에 묶인 노예이며, 제 욕구들을 충족시킬 수도 없다. 그는 시기와 질투, 불신에 더해 부정의와 고독, 불경 등 온갖 악들을 수용하고 키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 가장 정의로운 자가 가장 행복하며, 이런 자는 최선자정(왕정)적인 인간이며 제 자신을 군왕으로서 다스리는 자이나, 가장 부정의한 자는 가장 비참하며, 이런 자는 가장 참주정적인 인간으로서 제 자신도 폴리스도 참주정의 방식으로 다스린다. 

580d-583a : 폴리스가 세 부류로 나뉘듯, 각 영혼도 세 부분으로 나뉜다. 영혼의 세 부분에 따라 즐거움도 셋으로 나뉜다. 하나는 배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격정을 일으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다양하나 그 중 가장 큰 것은 욕구적인 그러한 부분이다. 식욕, 색욕 따위와 이에 관련한 욕구들이 강렬하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되며, 이는 재물욕이 속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재물이 그 욕구들의 충족에 소용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부분은 재물욕의 부분 또는 이익추구의 부분이라 불린다. 반면 격정적 부분은 승리와 명성을 지향한다. 이 부분은 승리욕과 명예욕의 부분이라 불린다. 남은 부분은 교육욕과 애지의 부분이다. 이 부분들 중 어느 부분이 영혼 전체를 지배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첫 번째 세 부류가 애지의 부류, 승리욕의 부류, 이익추구의 부류로 나뉜다. 그 각각에 속하는 쾌락도 각기 고유하다. 세 부류는 각기 지혜, 명성, 이익을 저마다 최선의 것으로 삼고 여타의 것들을 경시한다. 이런 종류의 쾌락들과 그러한 삶들은 훌륭함이나 수치, 선과 악이 아닌 쾌락과 고통을 기준으로 서로 경쟁한다. 세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경험과 분별과 논리를 기준으로 판정되어야 한다. 경험으로는 애지적 부류가 가장 앞선다. 여타의 부류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욕구에 머물러 그 이상의 것을 전혀 추구하지 않지만, 애지적 부류는 여타의 쾌락을 경험하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면 명예와 관련하여서는 세 부류 모두 저마다 추구하는 바를 이루면 따라 오기에 그 경험에서 서로 다를 바 없다. 반면 지혜와 존재에 대한 관조로부터 얻는 쾌락의 경험은 애지의 부류만 취할 수 있다. 또한 분별도 애지적 부류만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셋 사이의 경쟁에 대한 판정은 논리를 기준으로 하는 바, 그것은 애지적 부류의 수단이다. 판정의 기준은 부나 이익도 아니고 명예와 승리와 용기 또한 아니다. 이리하여 영혼의 애지적 부분이 추구하는 쾌락이 최고의 쾌락이며 그러한 부분이 지배하는 삶이 가장 즐거운 삶이다. 다음으로 명예욕의 쾌락이 이익추구의 쾌락보다 고유하게 추구하는 바에 더욱 가깝기에 명예욕의 부분이 두 번째이다. 이익추구의 부분이 가장 마지막이다. 이리하여 정의로운 자는 연이어 두 차례 부정의한 자에게 승리하였다.

583b-588a : 분별을 갖춘 자의 쾌락 이외에는 진실하지도 순수하지도 못한 환영과 같은 쾌락들이다. 고통은 쾌락과 반대이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중간 상태가 있다. 이 상태는 영혼의 평정(hesychia)이다. 고통에 빠진 자는 기쁨이 아닌 평온을 최상의 쾌락으로 찬양한다. 반면 쾌락에서 벗어난 경우 평온은 괴롭다. 평온은 쾌락도 되고 고통도 되나 쾌락과 고통의 중간 것이다. 사실상 평온은 고통에 비교하여 쾌락으로 '보이고' 쾌락에 비교하여 고통으로 '보이는 것'뿐이다. 이러한 이행은 영혼에서의 변화(운동, kinesis)이다. 그리고 이 과정의 현상들은 기만적이다. 즉 이런 보이는 것들, 쾌락의 정지 혹은 고통의 정지로서 고통과 쾌락은 진정한 것들이 아니다. 향기를 맡는 것과 같은 쾌락은 이와 다르다. 그러나 쾌락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육체를 통해 영혼에 이르는 쾌락들은 고통의 정지이다. 또한 미래의 쾌락과 고통에 앞서는 기대로 생겨나는 예비적 쾌락과 예비적 고통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진실을 모르는 채 상대적으로 위치를 가늠하는 것과 같다. 아래에서 중간으로 옮겨진 자가 자신이 위에 있다 믿듯, 고통에서 해방된 자는 자신이 쾌락을 향유한다 믿고 또 쾌락을 중단당한 자는 자신이 고통에 처했다 믿는다. 허기와 갈증 등이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육체에 관련한 상태의 공허이다. 마찬가지로 영혼에 관련한 상태의 공허는 무지와 무분별이다. 그런데 진정한 충족은 식음료가 아니라 순수한 존재에 더 많이 관여하는 참된 믿음과 지식, 지성, 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같은 것에 관여하는 것, 진리에 더 관여하는 것이 존재에 더 많이 관여하는 것이다. 일반화하면 육체에 대한 보살핌보다 영혼에 대한 보살핌이 더욱 존재에 많이 관여한다. 또한 영혼 자체도 육체 자체보다 존재에 더 많이 관여한다. 즉 더 존재에 많이 관여하는 것을 더 존재에 많이 관여하는 것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이 진정한 충족이다. 이것이 더 참된 쾌락이다. 분별과 덕에 대해 경험 없는 자들은 위아래로 옮겨지며 일생을 헤매지만 중간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이들은 갈수록 지상의 주색에 빠져들고 탐욕과 불만족으로 인해 서로 죽고 죽이기까지 한다. 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채우려 하는 어리석은 짓거리이다. 이런 자들은 쾌락의 영상과 환영을 곁하여 살며 이것들에 물들어 버린다. 격정의 경우에도 성찰과 지성이 결여된 채 헛된 분노와 헛된 명예를 추구할 따름이다. 이익 추구의 욕구들과 명예욕의 욕구들은 지식과 논리에 따라 이와 함께 쾌락을 추구할 떄에 쾌락을 취할 수 있다. 따라서 영혼 전체가 애지의 부분에 순종할 때 각 부분이 추구하는 바를 성취하고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다. 반면 애지 이외의 부분이 지배할 때에는 고유한 쾌락도 찾을 수 없고 여타의 부분들도 어긋난 쾌락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 애지(철학)로부터 가장 먼, 법과 질서에서 가장 먼 것들이, 즉 애욕과 참주적 욕구가 이런 어긋남을 유발하고, 왕도적이고 절도 있는 욕구들은 이와 반대이다. 따라서 참주가 쾌락에서 가장 멀며, 쾌락에 가장 가까운 자는 군왕이다. 세 종류의 쾌락 중 진정한 쾌락은 하나이며 다른 둘은 서출이다. 참주는 과두정적 인간으로부터 시작하여 민주정적 인간 다음으로 세 번째 자리에 온다. 따라서 참주가 추구하는 쾌락 또한 과두정적인 것으로부터 세 번째에 오는 것이다. 과두정적 인간은 다시 최선자정적이며 왕도정적 인간으로부터 세 번째에 온다. 따라서 참주는 군주의 참된 쾌락으로부터 셋의 세 배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인간도 쾌락도 셋의 세 배만큼 떨어져 있으니 이를 합한 행복의 거리는 참주와 군주 사이에 729배이다. 훌륭하고 정의로운 자가 부정의하고 악한 자보다 쾌락에서 이 만큼 우세하다면, 용기와 아름다움 그리고 여타의 덕에의해서도 크게 우세할 것이다.

588b- : 본래의 논의로 돌아가면, 엄밀하게 부정의한 자이지만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자에게는 부정의를 행함이 이롭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자의 영혼을 형상화하면 여러 머리가 달린 형상에 속하는 짐승이다. 그 머리들 중에는 사나운 것도 온순한 것도 있으며 그 머리에서 이 머리들이 모두 자라날 수도 바뀔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사자의 형상을,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형상을 세운다. 이 세 형상들을 하나로 합쳐 함께 자라도록 하고, 그 외피는 한 명의 인간으로 보이도록 한다. 부정의가 이익이며 정의는 이롭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자는 제 안의 여러 머리를 한 짐승과 사자는 키우고 제 안의 인간은 굶주리게 하여 약화시키고는, 그 인간이 저 두 짐승 중 어느 쪽으로든 이끌리게 내버려 두고, 그것들이 서로 싸우며 잡아 먹게 만드는 것이다. 반면 정의가 이롭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 안의 인간이 그 인간 전체를 장악하여 여러 머리를 가진 것에서는 온순한 머리들을 키우고 사나운 것들은 막으며, 사자를 조력자로 길들여 공동으로 전체를 돌보아 서로 그리고 자기 자신과 화합하도록 만든다. 부정의가 이롭다 주장하는 자는 어느 모로 보나 무지로 인해 거짓을 고하는 자이다. 그에게는 미추에 관하여 야수들을 인간적인, 나아가 신적인 것에 종속시킴이 아름답고 온순한 것을 사나운 것에 굴종시킴은 추하다고 설득해야 한다. 나아가 아무리 대단한 황금을 얻더라도 자신의 최선의 부분을 최악의 부분에 종속시키고서는 비참할 따름이다. 이런 일은 여러 머리를 가진 짐승을 지나치게 해방시킨 탓에 일어난다. 격정적 부분과 관련하여서는 너무 풀어주면 고집스럽고 고약한 성미라 비난받고, 너무 옥죄면 비굴하고 아첨을 해댄다고 비난을 받게 된다. 영혼의 최선의 부분과 관련하여 자질이 부족한 자는 저 부분을 주인으로 삼은 최선의 인간에게 지배받아야 한다. 이는 피지배자의 이익과 나아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자체 내에서 최선의 것이 지배함이 가장 좋으나, 그렇지 못할 경우 외부의 최선을 따름이 차선이다. 교육 역시 소년들의 영혼 속에 아직 자라지 못한 최선의 정체를 대신 세워주기 전까지는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지 않다가, 그 정체가 영혼 안에 수립되면 자유롭게 하는 것이 좋다. 이제 부정의와 무절제는 결코 이로울 수 없으며, 차라리 처벌을 받아 교화되는 편이 처벌 없이 악함을 더해 가는 것보다 낫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제 영혼을 절제와 분별이 갖추어진 정의, 건강을 갖춘 아름다움이 함께하는 영혼의 상태를 실현해줄 학문에 매진할 것이다. 이에 맞추어 욕구를 절제하고 재물 또한 이에 조화롭게 소유할 것이며 자신을 더 낫게 할 명예에만 관여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어렵더라도 이론상의 폴리스에서 이는 명백하다. 지상에는 이러한 폴리스가 없을지라도 하늘에는 그러한 폴리스가 본으로서 자리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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