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4a-517a : 교육과 교육부족에 관하여 또 다른 비유가 제시된다. 입구와 같은 넓이의 동굴 끝 벽을 향해 죄수들이 사지와 목이 결박되어 있다. 입구와 죄수들 사이를 가로 질러 길이 나 있고, 그 길보다 더 입구에 가까운 쪽에 불이 있다. 가로지른 길과 죄수들 사이에는 담이 쳐져 있다. 저 길을 지나는 자들이 머리 위로 자연물들이 아닌 여러 제작물들 따위를 이고 다니면, 불이 그것들을 비추어 동굴 끝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지나는 자들은 소리를 내거나 잠자코 있거나 한다. 이들은 그림자와 들려오는 소리만 파악할 수 있으며, 그것들을 이러저러한 것들이라 믿고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이다. 이 결박에서 풀려나 저 불빛을 보게끔 강요당한다면, 고통스러울 것이며 저 제작물들 자체를 눈이 부셔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저 제작물들이 이전의 그림자보다 더 실재에 가깝다 하더라도, 그는 거꾸로 그림자들이 저 제작물들보다 더 실재라 여전히 믿으려 할 것이다. 더욱이 동굴의 불 자체를 보도록 강요한다면 더욱 고통스러워 하며, 그 자신이 볼 수 있는 그림자들로 달아나 그 그림자들이 더 실재라 생각할 것이다. 그를 억지로 이끌어 동굴 밖 빛 아래로 끌어낸다면 고통스러워 하고 화를 낼 것이다. 동굴 밖에서도 같은 순서로 그림자, 다음으로 이러저러한 상들, 그 다음 실물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하늘을 우선 밤에 별과 달을 본 이후에야 낮에 태양과 빛을 볼 수 있게 된다. 가장 마지막에 태양 자체를 보게 되고, 이를 보고서 태양이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고, 그간 본 모든 진리의 원인이 태양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동료 죄수들 사이에서 그림자를 더 잘 분간하고 그 움직임을 더 잘 예측하는 자가 부와 명성을 얻더라도 부러워할 리 없고, 그런 처지에 놓이느니 무슨 짓을 겪더라도 그리 살지 않는 쪽을 택한다. 이제, 그가 다시 갑작스럽게 본래의 동굴 끝으로 돌아간다면, 눈이 어둠으로 가득 차 분간할 수 없고 벽의 그림자들을 다른 죄수들보다도 훨씬 덜 알아볼 것이다. 죄수들은 그를 비웃을 것이고, 그가 동굴 밖에서 본 것들을 가소롭게 여길 것이다. 또한 그들을 해방시켜 위로 이끌려는 자를 죽이려 들 것이다.

517b-519b : 속박된 동굴은 가시적 영역에 대한 유비이다. 감옥 속의 불빛은 태양에 비유되고, 올라감(anabasis)과 그 높은 곳에서의 관조(thea)가 가지적 영역과 그를 향해 올라가는 길(anodos)에 비유된다. 그 궁극 목적은 선의 이데아를 보는 것이며, 이후 모든 옳고 아름다운 것의 원인이 이것임을, 가시적 영역에서 빛과 빛의 주인을 낳고, 가지적 영역에서는 스스로 주인으로서 진리와 지성을 제공하는 것임을, 또한 무슨 일이든 지혜롭게 수행하려면 이 선의 이데아를 보아야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인세에 개의치 아니하게 된다. 오로지 저 선의 이데아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가 인세의 어둠 속에서 당황하고 저 이데아를 전혀 모르는 자들과 논쟁하며 우스운 꼴을 보이게 된다. 이처럼 빛에서 어둠으로 향한 경우, 그리고 역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향한 경우 둘 모두 혼란을 낳고, 따라서 이를 보고 현명한 자는 그것이 어느 쪽 경우에 해당하는지 살피려 한다. 이를 고려할 때 교육이란 마치 시력이 전무한 눈에 시력을 부여하듯 그런 식으로 영혼에 지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각 영혼의 능력과 각자가 이해하는 바에 사용하는 수단을, 어둠에서 빛으로 몸 전체를 전향하듯, 그렇게 생멸로부터 존재로 전향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 교육은 존재 중에서도 가장 밝은 선의 이데아를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여타의 덕들은 습관과 단련을 통해 이후에 생겨나지만 현명함의 덕은 발생이 아니라 방향이 문제이다. 이로부터 생멸과 동류인 것들을 제거하여야 한다.

519c-521b : 어둠에 머무는 자들은 목표를 갖지 못하기에, 빛에서 어둠으로 온 자들은 여전히 인세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지복의 섬(makaron nesoi)으로 이주한 줄로 착각하여 인세에 관여하지 않으려 들기에 폴리스를 다스릴 수 없다. 폴리스를 수립 중인 우리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선의 이데아를 향한 오르막길로 이끌 뿐만 아니라, 그 이후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고 다시 죄수들 곁으로 내려가지 않으려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이것은 훌륭한 철학자들을 해하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우선 이 폴리스의 법은 폴리스 내의 한 집단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잘 살도록, 전체가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그런 식으로 시민들을 설득하고 강제한다. 또한 철학자들이 태어나고 그렇게 되도록 양육받은 것은 폴리스에게 진 빚이며, 그러한 폴리스이기 때문에 그렇게 철학자들로 자라날 수 있었다. 이 폴리스의 교육은 공과 사, 폴리스에 대한 정치와 선의 이데아에 대한 관조 모두를 목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다시 내려가야 한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면 가시적 영역을 다른 죄수들보다 훨씬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원본과 모상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통치를 위해 서로 싸우며 꿈 속을 헤매는 다른 폴리스들과 달리 제대로 된 폴리스는 통치를 가장 덜 열망하는 곳이 된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되면 이 폴리스의 철학자들은 자기들끼리 순정한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노고를 함께 하고자 할 것이다. 이는 정의로운 자들에게 정의로운 일을 지시하는 것이다. 통치의 대가로 통치 이전에 통치보다 나은 삶을 제공할 경우 앞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폴리스가 가능하다. 통치를 업신여기는 삶을 사는 자들은 철학자이며, 철학자는 최선의 통치를 위한 일들에 관하여 가장 잘 아는 자들이기도 하다. 이들로 하여금 통치를 하도록 강제함으로써 통치를 위한 경쟁 또한 억제된다.

521c-526c : 지하에서 신들로 향하듯 교육을 통해 철학자를 만들고 빛으로 이끄는 과정이 검토될 차례이다. 이것은 혼의 전환(psyches periagoge)이며, 이것이 진정한 철학, 존재를 향해 올라가는 길이다. 이런 교육은 수호자들을 위한 것이고, 수호자들은 전사들이기에 이 교육 역시 전사들에게 무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앞서 제시된 체육과 시가는 지금 추구하는 그 교육이 아니다. 전자는 생멸에 관계된 것이며, 후자는 체육에 상관된 것으로서 조화와 규범을 형성해 주지만 정작 혼의 전환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필요한 교육은 모든 기술과 모든 사유와 지식이 공통으로 이용하는, 가장 우선되는 교육이다. 그것은 수와 계산이다. 이는 또한 전술에도 사용되므로 전사들인 수호자들에게 유용하기도 하다. 이러한 수와 계산에 관련하여 본디 직관과 존재로 이끄는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은 감각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감각 중 어떤 것은 직관을 촉발시키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다. 전자는 반대되는 감각들로 동시에 이행하는 것이다. 대상을 감각이 그 대상인지 그와 반대되는 것인지 밝히지 않을 때 이러한 촉발이 일어난다. 그러나 후자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약지부터 중지까지 세 손가락에 대해 시각은 그것들이 각기 손가락이라 영혼에 전한다. 그것들의 위치나 순서, 색이나 형태와 무관하게 손가락은 손가락이며, 손가락이 손가락에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손가락들의 크고 작음은 위치나 순서에 따라 달리 보인다. 인지는 중지보다는 크지만 동시에 약지보다는 작다. 또 각 손가락은 부위에 따라 단단하기도 하고 물렁하기도 하여 서로 상이하다. 같은 것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동시에 또한 상대적으로 무거운 경우 또한 가능하다. 이런 감각들은 혼으로 하여금 계산과 직관을 촉발시킨다. 각기 전달된 것들이 통틀어 둘로 계산된다면, 전달된 양편은 또 각기 서로 다른 하나씩의 것들이다. 이 경우 혼은 그것들을 독립된 것들로, 그렇지 않다면 통합된 것으로 이해할 것이다. 시각은 큼과 작음을 독립된 것들로 구분하지 않는다. 반면 혼은 이것들을 서로 다른 별개의 독립된 것들로 간주하기 때문에 감각으로부터 전달된 것들에 대해 혼란을 겪고 계산을 진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작음이 무엇인지, 그러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손가락이 손가락으로 보이는 감각은 직관과 계산을 촉발시키지 않는 쪽이고, 크면서 작거나 단단하면서 부드럽거나 한 대립되는 것들의 동시적 감각은 직관과 계산, 사유를 촉발시키는 쪽이다. 수(arithmos)와 하나(一, hen)는 후자에 속한다. 절대적으로 하나인 것도 없지만 하나이지 않은 것도 없고 가시적 영역의 일체의 것들이 그렇게 감각되기에 하나는 영혼을 당혹시키고, 사유를 촉발시키며, 탐구를 강요하고, 하나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묻도록 만든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고찰로 이끌고 그렇게 방향을 전환시켜주는 교과이다. 하나가 이렇기 때문에 모든 수가 같은 상태에 놓이고, 다시 산술과 수론은 모두 수에 관련된 것으로서 진리로 인도하는 것들일 것이다. 이 교과를 법으로 정하여, 거래나 매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직관만으로 수들의 본성을 고찰하게 될 때까지 지속시켜야 한다. 이는 생성에서 진리와 존재로 영혼 자체를 방향전환(metastrophe)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교과는 수들 자체를 논하게 만든다. 이 경우 하나 자체는 엄밀하게 하나여서 결코 어떠한 부분도 포함되지 않으며, 이러한 단일성이 수들 각각 그 자체에 포함되므로 모든 수가 서로 같고 그 안에 아무런 부분도 없다. 이런 수들 자체를 논함으로써 직관을 사용하도록 영혼이 강제를 받게 된다.

526d-528e : 다음으로 필요한 교과는 기하학이다. 이 역시 앞서와 마찬가지로 군사적 목적에 부합하는 동시에, 영혼의 방향전환에 기여한다. 기하학 내에서 작도나 합 등의 용어들은 구체적 실천을 뜻하는 듯하지만 사실 그 전체 교과는 앎을 위해 추구될 뿐이다. 즉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그려내거나 이전에 떨어져 있던 것을 합하여 새로운 크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기하학의 목적은 아니다. 기하학은 그것인 채로 영원한 바의 것들을 다룬다. 세 번째 교과 후보로 천문학이 거론된다. 글라우콘이 이 학문을 두고 농업과 항해 및 전술에 대한 기여를 다시 언급하자, 소크라테스는 그런 첨언이 대중을 두려워하기 떄문에 나온 것이라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이 교과들을 통해 각 영혼의 어떤 기관이 완전히 정화되어 진리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문학과 기하학 사이에 평면기하와 입체기하의 구분이 생략되었기에 입체 기하가 세 번째 교과 후보로 거론된다. 이런 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어려운 이러한 교과들이 세간에 무시되어 왔기 때문이고, 또한 이 교과의 감독자가 드물며 생기는 일 역시 쉽지 않고 그 교과를 탐구하는 자들이 쉬이 거만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폴리스 전체가 함께 감독하고 또한 존중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을 문제이다. 이제 다시 네 번째 교과로서 천문학이 제정된다. 

529a-531c : 오늘날(당대)의 천문학은 비록 고개를 하늘을 향하더라도 실상은 영혼으로 하여금 아래를 보도록 만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to aoraton)에 관련된 교과가 아닌 한 영혼을 위로 향하게 할 수 없으며,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들 중 어느 것에도 인식은 없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빠름과 느림이 참된 수와 참된 도형의 상호 관계 내에서 운동하며, 그 안에서 그 안의 존재들을 운동시킨다. 이러한 운동은 이성과 추론에 의해 파악되며 시각에 의해서는 파악되지 않는다. 천체는 이에 관련한 배움을 위한 본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훌륭한 예술작품에서 비율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 기하학자에게는 헛되어 보일 것처럼, 천체도 최대한 훌륭하게 구성되었겠지만 그것이 언제나 한결같으며 조금도 이탈하지 않으리라 믿는 자는 기하학자에게 우스워 보일 것이다. 기하학에서 도형들을 이용하고 그려진 도형들에 천착하지 않듯, 천문학에서도 천체들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이용해야 한다. 문제는 이동(phora)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에 관하여 눈은 천문학에 맞추어지듯, 귀는 화성학에 맞추어진다. 화성을 가능케 하는 운동(enarmonios phora)에 관한 화성학은 천체의 운동에 관한 천문학과 자매관계이다. 이 경우에도 음 또는 음들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협화음들 내의 수들을 찾는다. 그러나 어떤 수가 협화음이고 아닌지, 무슨 이유로 각기 그러한지 더 소급하여 올라가진 않는다. 

531d-532e : 이상의 네 가지 교과들이 상호 공동이자 동류인 관계를 이루고, 그리하여 어떻게 서로의 근친성이 성립하는지 그 결론이 나온다면 선의 이데아를 파악하는 데에 이것들이 기여할 것이다. 이 교과들은 변증술의 서곡이다. 변증술은 설명(logos)을 주고 받는 것이며, 이것이 알아야만 하는 것을 알게 될 조건이다. 이는 감각을 사용하지 않고 진술(설명)을 통해 각각의 것인 바 그 자체를 향해 출발하여, 선인 바의 것 그 자체를 지성에 의한 직관 그 자체로써 파악하기 전까지 지속하는 과정(여정, poreia)이다. 이 모든 교과들은 영혼의 최선의 부분이 결박에서 풀려나 존재들 중 최선의 것을 관조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진 것이다. 글라우콘은 이전 교과들을 자세히 논했듯 변증술 역시 그 힘의 특성과 유형들, 방법들을 논할 것을 요구한다. 

533a-534a : 소크라테스는 여기서부터 더 이상 비유가 사용될 수 없다고 답한다. 이전의 교과들을 거친 자에게 변증술은 무언가를 보여줄 것이다. 교과는 각각의 것인 바 그 자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거나, 사람들의 믿음과 욕망 그리고 제작과 유지를 다룬다. 반면 앞의 네 교과들은 존재에 관하여 가정들을 이용하여 접근하되 설명을 해내지 못한다. 무언가에 대해 시작(원리, arche)도 모르는 것이고 끝도 중간항들도 모르는 것으로 짜여진 그러한 일치는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변증적 탐구방법은 확싱성을 위해 원리 자체로 나아가며 가정들을 폐기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의 교과들을 이용하여 위로 이끈다. 이 교과들은 엄밀히 말해 지식이 아니며, 의견보다 명료하지만 인식보다 불분명한 추론이다. 이제 인식, 추론, 확신, 추정이 차례로 나뉜다. 이 중 뒤의 둘은 믿음, 앞의 둘은 직관이다. 믿음은 생멸에 관계되지만 직관은 존재에 관련한다. 존재와 생멸의 관계는 직관과 믿음의 관계와 같다. 다시 이관계는 지식과 확신의 관계와 같고 또한 추론과 추정의 관계와도 같다. 믿음과 직관의 각 대상이 다시 둘씩 나뉘는 것에 대해서는 긴 논의가 필요하다.

534b-536b : 각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자가 변증술에 능한 자이고, 설명 못하는 한은 지성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선의 이데아를 설명하고 이에 맞서는 논박을 모두 논파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선의 이데아를 아는 것이 아니며, 이를 모른다면 여타의 좋은 것들도 알지 못한다. 이런 상태는 무리수의 선분처럼 비이성적이기에 정치를 맡길 수 없다. 또한 변증술은 다른 교과들의 가장 위에 놓인다. 이러한 교육을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 이러한 교육은 쉬이 배우고 잘 기억하며 인내를 갖춘 영혼에 배정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 철학을 건드려 철학에 대한 오명이 생겨난 것이다. 또한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양면에 걸쳐 근면해야 한다. 자타에 무관하게 자발적 거짓에 공히 분노하되 본의가 아닌 거짓과 무지에는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 앞서 밝힌 네 가지 덕들에서도 알맞은 자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건전한 자들을 이러한 교과로 양육한다면 정의 자체도 나무라지 않을 것이며 폴리스와 그 체제가 보전될 것이다.

536c-537d : 통치자는 나이가 많은 자를 선출하지만, 교육은 어려서부터 받아야 한다. 변증술에 앞서는 것으로 법으로 정해진 일체의 예비교육은 유년기에, 영혼이 굴종을 배우지 않도록 강제 없이 교육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예비교육은 놀이의 형태여야 한다. 여기에 더해 전장에서의 일까지 포함하여 그 과정에서 가장 능숙한 자를 선발해야 한다. 체육이 필수적인 2~3년, 육체의 피로로 학문에 대한 태도가 드러나는 기간이 끝난 뒤에 이런 자를 선별한다. 이 떄 이들은 20세이며, 그들에게 큰 명예를 선사해야 한다. 이제 그들로 하여금 그간 배운 여러 교과들을 모아 그 상호 친근성과 존재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갖게 해야 한다. 이것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변증술적 자질에 대한 증명이다. 이런 자들 중 그러한 자질이 가장 뛰어나고 학문에 굳건하며 전쟁과 법적 의무에서도 확고한 자들을 그들이 서른이 될 때 다시 선별하여 다시 더 큰 명예를 선사하고, 변증적 논변의 힘으로 시험하여 존재 자체를 향해 진리와 더불어 나아가는지 확인해야 한다.

537e-540c : 그러나 변증술을 행하는 자들은 무법으로 점철될 위험이 있다. 마치 자신이 입양된 처지임을 뒤늦게 알고 양부모와 그 친척들 멀리하게 되는 것처럼, 변증술을 행하는 자들은 이전까지 그들이 확신을 가졌던 아름다움이니 선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이 사실상 그 반대로 알고 있던 것들과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그러한 것들은 아님을 알게 되면 그에게 주입되었던 기존의 교육들을 불신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나고 자란 폴리스의 법과 질서를 어기려 들 것이다. 이러한 위험을 피학시 위해 변증에 접근하는 방식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따라서 어린 사람들이 반박에 심취하는 일이 없도록 변증을 접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반면 나이 든 자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변증을 활용할 것이다. 따라서 변증을 배울 자들은 예의바르고 견실해야 한다. 이런 자들이 변증에 몰두할 시기는 체육에 몰두할 시기의 두 배 정도, 5년이다. 그 이후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일을 강제받아야 한다. 전쟁에서 지휘를 하고 관직을 맡아 경험을 쌓도록 하면서, 이 과정에서도 흔들림없이 진리를 추구하는지 시험받아야 한다. 이 실무기간은 15년이다. 이 과정을 무사히 거쳐 나온 자들 중 모든 면에서 가장 훌륭했던 자들로 하여금 이제 선 자체를 보도록 강제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번갈아 이를 본으로 삼아 폴리스와 개인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그들은 철학으로 시간을 보내다 차례가 오면 정치를 하고 통치자 노릇을 하며 사람들을 교육시켜 자신들을 대신할 폴리스의 수호자들로 만든다. 그 이후에야 그들은 지복의 섬으로 떠나고, 남은 자들은 피티아에게 물어 그들을 수호신으로 삼거나 혹은 그에 값하는 자들로 받들어야 한다. 이는 남녀 성별과 무관하다. 

540d-541b : 여기까지의 논의는 희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렵더라도 가능한 일이며 또한 이 방식 말고 다른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일은 진정한 철학자들이 통치자들로서 세속의 명예를 경멸하고 옳은 것과 그로 인한 명예만을 가장 존중하며 정의를 가장 중시하고 받들어 키워 폴리스에 질서를 부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시민들을 10세 이상 모두 시골로 내보내고 그 영향으로 부터 벗어난 자식들을 넘겨 받아 이전까지 논의한 법과 양식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이리하여 최선의 폴리스와 그 체제, 또 이를 닮은 인간과 그 영혼에 대해서 충분히 논의되었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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