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4a-487a : 실재를 보는 철학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중 법과 직무의 수호자로 임명되어야 하는 것은 어느 쪽인지 탐구된다. 각각의 실재를 본으로 삼아 언제나 주목하여 선과 미, 그리고 정의에 관한 법들을 정하여 지킬 수 있는 자들은 철학자들이다. 그들은 각 실재에 대한 인식만 할 뿐 아니라 경험 또한 다른 이들에 못지 않다. 이들의 성향이 밝혀지면 이들이 인식과 경험 양면을 겸비할 수 있으며, 이들이 지도자여야 하다는 점이 합의될 것이다. 그들은 우선 생멸에 의해 헤매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서 존재를 보여주는 배움을 사랑한다. 그들은 이를 전체로서 사랑한다. 또한 그들은 거짓을 증오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진리는 지혜에 친근하여 철학자는 지혜 또한 사랑한다. 여러 갈래의 욕구 중 하나의 물길이 강해지면 다른 욕구들은 약해지는지라, 철학자는 영혼 자체의 즐거움 외에 육신의 즐거움은 약하게 된다. 모든 시간과 전 존재에 대한 관조를 품는 그 정신은 세속에 무관심하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영혼은 정의롭고 온순하며 또한 쉬이 배운다. 또한 잘 기억하며 적도를 지킨다. 이런 성품이 그를 ~인 것 각각의 이데아로 인도한다. 

487b-489d : 문답으로 조금씩 몰려 말문이 막힐 수는 있으나, 실상 어려서 철학에 접해 늦게까지 그만두지 못하고 더 오래 지속하는 자들이 이상해지고, 이들 중 그나마 가장 나은 자들도 폴리스에 무용한 자들이 된다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다. '무용한 자들이 수호자가 되지 않는 한 악이 그칠 리 없다'라는 주장은 하기 어렵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비유로 답한다. 철학자가 무용하다는 사태는 복합적인 것이다. 마치 선주가 힘은 세나 귀먹고 눈멀어 항해에 대한 앎도 그런 처지인 반면, 선원들은 서로 키를 잡겠다 싸우는 상태와 같다. 아무도 항해술을 배운 바 없으나 선주를 에워싸고 서로 자기에게 키를 넘기라 온갖 짓을 다 한다. 누군가 약이나 술로 선주를 묶고 키를 잡고선, 항해술을 몰라도 자신을 돕는 자를 배에 관해 아는 자라 칭찬하며, 그 외의 사람은 무용하다 욕한다. 천문과 기상 등이 항해술에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이런 앎들을 추구하는 자는 배에 무용한 자로 불린다. 이것이 오늘날 철학자의 처지이다. 그러나 그 무용함은 철학자 탓이 아니라 그를 사용할 줄 모르는 자들 탓이다. 다스림이 필요한 자가 다스릴 자에게 찾아가야 맞다. 정치가들이 철학자에게 찾아가 통치를 청해야 한다. 

489e-490d : 철학에 접한 자들 중 대다수의 저열함의 필연성, 그리고 그것이 철학 탓이 아님이 이야기되어야 한다. 철학자는 처음 그를 이끈 진리를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전적으로 따르거나, 철학에 전혀 관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진리를 좇는 자는 ~이라고 생각되는 많은 각각의 것에 머물지 않고 각각의 것인 바 바로 그것 자체의 본성을 그와 동류인 영혼의 부분으로 포착할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는다. ~인 것답게 ~인 것에 영혼의 그 부분이 접하여 합함으로써 지성과 진리를 낳아 앎에 이르러 참된 삶을 살고 양육되기 전까지 그 진통은 멈추지 않는다. 이를 다시 검토한 까닭은 철학에 접한 자 다수가 저열한 이유를 검토하기 위해서이다.

490e-496a : 우선 그들 다수의 전락을 검토한다. 다음으로 철학적 성향을 흉내내어 이 성향에 어울리는 일을 하는 그런 영혼들의 성향을 검토한다. 이는 넘치는 일을 하는 것이자 철학에 대한 오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철학에 걸맞는 성향을 갖춘 소수를 망치는 것들은 크고도 많다. 이 성향이 지니는 것들 하나하나가 영혼을 망치고 철학에서 떼어 놓으며, 준수함과 부, 체력과 가문 등이 또하 그리 한다. 강한 씨앗일수록 환경이 나쁠 때 더 크게 결핍을 겪듯, 최선의 성향은 잘못된 양육 상태에서 평범한 성향보다 더 크게 악해진다. 악은 좋지 않은 것보다 좋은 것에 더 반대되기 때문이다. 훌륭한 성향을 지닌 영혼은 적절한 가르침을 받으면 온갖 덕에 이르지만, 받지 못하면 그 정반대가 된다. 사적인 소피스테스들이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하는 대대적인 소피스테스들은 누구든 자신들이 바라는대로 교육시켜 만들어 낸다. 그들이 민회나 법정, 극장 따위에 모여 극단적으로 비난하고 또 칭찬하며 소란을 일으키면, 사적인 교육으로는 젊은이가 이를 버텨낼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설득하지 못한 자를 죽여 버린다. 통상 이에서 벗어난 성격은 없다. 다만 비범한 경우는 논외이다. 나아가 사적인 소피스테스들은 역시 다중의 믿음을 가르치며 이를 모두가 지혜라 부른다. 그들은 대중과 오래 지내 경험하여 배운 그 비위를 맞추는 기술을 지혜라 부르며 기술로서 체계화시켜 가르치려 한다. 그들은 대중에 맞추어 정의와 부정의를 명명하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많이 다르며, 이러한 교육은 이상한 것이다. 그들은 다중을 주인으로 삼는다. 이런 상황에서 각각 그 자체가 ~이라고 대중이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철학자가 비난 받는다. 또한 대중을 주인 삼는 개인들에게도 비난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훌륭한 성향의 영혼은 어려서부터 눈에 띄어 사람들이 이용하고자 달려든다. 사람들이 그에게 아첨하여 그는 오만해지고 그에게 지성이 없다거나 이를 지니기 위해 노예처럼 고생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전혀 듣지 않을 것이다. 그가 훌륭한 성향 덕분에 철학에 이끌리더라도, 여전히 사람들은 그를 이용하고자 하고 그와 가까이 지낼 것이다. 그리하여 철학으로 설득하려는 자들을 막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송사를 걸 것이다. 이것이 훌륭한 성향의 요소들과 여러 소위 좋은 것들이 그 영혼을 철학에서 이탈시킨다는 것이다. 폴리스와 사인에게 최대악도 최대선도 이런 성향의 영혼에서 생기며 평범한 영혼은 좋든 나쁘든 대단찮다. 이리하여 철학에 어울리는 자들이 철학은 멀리하고 철학과 가장 먼 자들과 어울린다. 이런 자들이 고아가 된 듯한 철학에 다가와 무용하다 비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아름다운 이름들과 장식들이 가득한데도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자격 없는 자들이 마치 범죄자가 신전으로 숨듯 숨어든다. 저들에 맞는 일로 인해 앉은뱅이 몸을 가지듯 그 영혼도 힘이 빠진 그런 자들이 철학을 한답시고 나대며 궤변을 쏟아댄다.

496b-497a : 이러한 이후에 극소수의 부류가 철학과 교류하는 자들 가운데 남는다. 주변에 그를 파멸시키려는 자들이 없거나 제 나라가 작아 국사를 하찮게 여길 경우이다. 혹은 다른 기술에 대한 경시나 신체의 허약함도 그리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의 신호가 그를 이끌었다. 그들은 철학의 즐거움을 알고 다중의 광기를 목격하기도 하여 저항할 수 없는 다중에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하고 피신한다. 그는 악에 가담치 않고 이곳에서의 삶에서 해방되기만을 기다린다. 그가 이룬 것이 작은 것은 아닐지라도 최대의 것 역시 아니다. 그가 어울리는 정체에서라면 개인적인 것에 더해 공공의 것도 보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철학이 비방받는 이유이다.

497b-499d : 당대 어떤 정체도 철학자에 적합치 않다. 때문에 철학자의 성향도 줄어간다. 만약 제대로 된 정체를 만나면 그 성향이나 활동 모두 다른 인간적인 것들에 비해 신적임이 드러날 것이다. 논의로 수립된 이 폴리스는 그렇다면 철학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거가 필요하다. 현재 유년기를 갓 지난 젊은이들이 가장이 되기 전까지 시기에 철학을 접해 가장 어려운 대목에서 그만둔다. 이들이 철학에 통달한 자들로 간주된다. 이 힘든 대목은 논변logos에 관련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훗날 다른 이들이 철학을 할 때 불려가면 대단한 일로 여긴다. 그러나 노년에는 다들 그만둔다. 글라우콘들의 폴리스는 이와 반대로 해야 한다. 유년기에 교육과 철학을 수용하고 육신을 보살펴 철학의 봉사자로 삼아야 한다. 혼이 원숙해지는 시기에 혼을 단련하고 이후 정치와 군사업무에서 물러나면 방목되어 철학에 전념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말이 그대로 실현된 인간도 폴리스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철학자가 무용하다고 비난받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철학자가 어떤 필연성으로 정치를 강제받기 전에는, 통치자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이 엄습하기 전에는 폴리스도 정체도 개인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그러나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렵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499e-502c : 몇몇 유난스런 자들에 의해 철학에 대한 적대가 만연했지만 철학자가 이러한 자임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대부분 비난을 멈출 것이다. 철학자는 실재를 본받고 찬탄하여 이를 닮아가는 자이다. 즉 변함없고 질서잡힌 자이며, 이를 추구하느라 인세에 관심이 없다. 그가 자신을 형성하는 데에서 나아가 그 본을 개인에도 사회에도 구현하도록 단련하게 강제한다면, 그 신적인 본을 이용하는 화가들이 폴리스의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으리라 말한다면 사람들은 받아들일 것이다. 앞서 탈색 이야기처럼 철학자는 다른 개인과 폴리스를 그림을 그리지 전 화판처럼 깨끗하게 만들 것이다. 그는 형상들, 덕들 자체와 그것의 인간 내 구현 양자에 주목할 것이다. 진리와 지혜를 사랑하는 성향은 적합한 활동들을 만나 완전히 훌륭하고 철학적으로 될 것이다. 이런 일들이 불가능하지 않으며 또한 최선임이 밝혀졌다.

502d-505a : 통치자들은 시험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앞서 합의되었다. 이제 통치자로서 철학자가 시험을 받기 위한 교과들이 무엇인지 검토되어야 한다. 일견 대립되는 듯한 민첩과 안정을 모두 겸비한 성향이 엄밀한 교육, 명예, 통치에 걸맞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들을 감당할 수 이쓴지 시험받아야 한다. 정의, 절제, 용기, 지혜에 더하여 이것들을 증명하는 궁극적인 것에 대해 각기 대응하는 교과가 있다. 

505a-506a : 선의 이데아가 최대의 배움이다. 이것으로 인해 그 이외의 것들은 유익하고 유용한 것들로 된다. 이는 우리가 충분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모두가 알고 있다. 이걸 모른다면 다른 무엇을 안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선과 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이익이 되지 못한다. 대중은 쾌락을 선이라 생각하지만 세련된 자들에게는 지혜가 선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그 지혜는 선에 대한 지혜이다. 여기에서 선이 무엇인지 합의되지 못하였다. 쾌락을 선으로 보는 자들의 문제는 악한 쾌락도 있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정의롭거나 아름답다 여겨지는 것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선택하는 반면, 선으로 여겨지는 것들에는 만족할 수 없고 선인 바의 것들을 추구하며 믿음에 만족하지 않는다. 선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의 것이자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만,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고, 그로 인해 여타의 것들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도 없는 상태이다. 최선자들인 수호자들은 그들과 다른 상태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수호자들은 선을 알고 있어야 하며, 이런 자가 다스리는 정체는 완벽하게 통치되는 것이다.

506b-509c : 선은 앎인가 쾌락인가? 이 질문에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모르는 것에 대해 아는 자로서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답한다. 앎이 결여된 믿음은 수치스러운 것이며 맹목적이다. 지성 없는 참된 믿음은 올바른 길을 가는 맹인과도 같다. 그러나 선 그 자체가 무엇인지 논의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단지 그 산물, 유사물을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목표로 다시 여러 가지 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이라 불리고 좋은 것이라 불리며 그 각각을 이러저러한 것들이라고 구별한다. 반면 미 자체, 선 자체를 말하며 저 여러 가지의 모든 것들에 관련하여서도 그 각각에 대한 이데아가 있다고 상정하여 그 이데아에 따라 각각의 것을 이러저러한 것인 바의 것이라고 부른다. 전자는 가시적이되 사유되지 않는 반면, 이데아들은 사유되되 비가시적이다. 전자는 감각되는 것들로서 감각으로써 감각한다. 그런데 감각의 경우 다른 것들과 달리 시각만은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 제 3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빛이다. 그 빛은 태양을 주인으로 한다. 그러나 시각 자체도 시각이 포함되는 눈도 태양은 아니다. 다만 눈이 태양을 닮았을 뿐이다. 그리고 눈은 태양의 넘쳐나는 것을 나나눠 가지며, 태양은 시각 자체가 아니라 시각의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시각에 의해 그 자체가 보이게 된다. 이러한 태양을 선의 이데아가 자신의 유비물로 되게 하였다. 태양이 가시적 영역에서 시각과 가시적인 것들에 대해 가지는 관계는 선의 이데아가 가지적 영역에서 지성과 가지적인 것들에 대해 가지는 관계와 유사하다. 태양이 빛을 비추어 대상을 보이게 하고 또 눈으로 하여금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처럼, 선의 이데아가 진리와 실재를 비추어 그렇게 밝혀지는 곳에서 영혼으로 하여금 지성을 갖게 만들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 영혼은 믿음만을 지니며 지성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선의 이데아는 인식과 진리의 원인이지만 그것들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보다 더 나은 것이다. 태양 자체는 생겨나는 것이 아니면서도 다른 것들을 생겨나게 하고 자라게 하며 양분을 제공한다. 그처럼 선의 이데아는 존재하는 것들을 존재하게 그리고 인식되게 해주지만 선 자체는 존재보다 더 높은 것이다.

509d-511e : 선의 이데아가 지배하는 부류와 영역은 가지적인 반면 태양의 대상과 영역은 가시적이다. 이 두 부류 각각을 상대적인 명확성과 불명확성에 따라 다시 둘씩 나눌 수 있다. 그리하여 가시적인 부류에는 또 다른 부분으로 영상이 주어진다. 이 영상이 모방하는 대상이 나머지 것들이다. 이 영상과 원본의 관계는 믿음의 대상과 인식의 대상 사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가지적 부분은 가시적 부류 중 원본을 다시 영상으로 삼아, 그 가정들에서부터 원리가 아닌 결론으로 나아가는 탐구가 속한다. 나머지 부분에서는 무가정의 원리로 나아가며, 영상으로 삼은 원본들 없이 형상들 자체를 사용하여 탐구를 진행한다. 산술과 기하는 수와 도형, 각 따위를 영상으로 삼은 원본으로서 이미 아는 것으로 가정하고 더 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여타의 것들을 거쳐,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자체에 반대되지 않음(모순 없음)을 결론으로 내린다. 여기에서 추구하는 것은 가지적 영상의 원본으로 삼는 바의 것이다. 이는 추론(사유, dianoia)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가시적 영역에서 원본의 자리에 있던 것들을 영혼은 가지적 영역에서는 모상으로 다룬다. 이와 달리 가지적 영역의 다른 부분은 이성 자체가 변증술적 논변의 능력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성은 전제들을 원리가 아닌 전제들로만 다룬다. 이는 원리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이다. 이리하여 추구하던 원리를 발견하면 이 원리에 의존하는 것들을 견지하여 귀결점들로 내려가되, 형상들만을 이용하여 형상들 안에서 결론을 내린다. 이 네 부분들에 대응하는 영혼의 상태들로서 가장 위에 이해noesis, 다음으로 추론, 그리고 확신, 다음으로 추정(짐작)이 자리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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