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a-451c : 왕도정체-최선자정체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의 영혼 이외에는 나쁘고 잘못된 것들로 불린다. 이 나쁜 상태의 네 종류를 고찰하려는 찰나, 폴레마르코스가 아데이만토스에게 다른 주제를 논의할 것을 제안할지 말지 묻는다. 두 사람은 처자의 공유(koinonia) 방식이 무엇인지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립된 폴리스에 양육과 교육이 핵심이었으므로, 처자에 관한 혼인, 출산, 양육, 교육의 공유 방식이 잘못될 경우 폴리스는 망하고 잘 될 경우에만 비로소 앞서 논의된 폴리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 일이 가능하게 여겨지기도 어렵고, 그리 여겨지더라도 최선인지 의문을 생기게 할 것이라고 염려한다. 또한 그는 전통에 대해 협잡꾼이 될까 걱정한다. 대화자들이 설령 결과가 잘못되더라도 놓아주리라 다짐하자 소크라테스는 남성극에 이어 여성극을 상연하겠노라 답한다. 

451d-457c : 경비견의 경우 암수 구분 없이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이를 위해 또한 구분 없이 같은 양육과 교육을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립된 폴리스에서도 남녀구분 없이 시가와 체육이 교육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폴리스에서는 성향에 따라 각기 고유하고 서로 다른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합의되었다. 따라서 남녀의 성향이 다르다면 같은 양육과 교육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고찰은 반박 기술에 속한다. 왜냐하면 같은 성향과 다른 성향 각각의 종을 규저하지 않고 자구에 매달려 논쟁하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 같고 다른 성향은 영혼의 같고 다른 성향과 무관하다. 대머리든 아니든 제화공에 적합한 영혼은 모두 제화공의 직무를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의사와 목수의 성향차이는 앞서의 차이와 전혀 다르다. 임신과 출산의 차이는 대머리 여부와 마찬가지의 차이일 뿐이다. 성별에 따른 힘의 차이는 있더라도 직무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남녀구분 없이 직무와 관련한 성향에 따라 고유한 직무를 부여해야 하고 따라서 같은 직무를 위해 같은 양육과 교육을 제공해야 하며, 수호자들의 경우에도 남녀구분 없이 그리해야 한다. 이제 남녀수호자들은 공동으로 모든 일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으로 한 차례의 파도를 헤쳐 넘었다. 그 다음 문제는 이런 직무와 교육 법제에 뒤따르는 법률이다.

457d-461e : 남녀가 서로 공유되고 그들의 동거가 금지되며 자식 또한 공유되고 혈연관계를 알 수 없어야 한다. 우선 이것의 가능성은 차치하고 그 이후의 일들을 통치자가 어찌 정리하는지 검토하기로 한다. 통치자는 법률에 따라 지시할 것이다. 유사한 남녀들이 공동식사와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교육과정에서 함께 어울려 본성상 서로 성적 관계로 이끌린다. 그러나 무질서한 관계는 통치자가 허용하지 않는다. 또한 좋은 혈통을 남기기 위한 혼인을 고안해낼 것이다. 좋은 혈통의 암수 가축들을 적령기에 교배하듯 통치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결합시킨다. 앞서 약으로서의 거짓이 여기에서도 활용된다. 통치자들은 최선의 남녀가 최대한 관계를 자주 맺고 반대의 경우는 저열한 남녀를 짝지우며, 저자의 자식들은 양육하나 후자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지만, 이를 통치자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 혼인의 수는 폴리스의 적정 인구수를 고려하여 통치자들이 조정한다. 전공의 상으로 동침의 자유가 주어져야 하며, 뛰어난 자들의 자식들은 양육자들에게 데려가 양육하는 반면, 저열한 자식들과 불구 자식들은 숨길 것이다. 수유를 위해 산모들을 데려가되 역시 친자여부를 모르게 해야 한다. 남녀 각기 적령기(여성 20-40/남성 25-55)에는 통치자들의 조정 하에 관계하고, 이후 불임기의 남녀는 자유롭게 관계하되 근친은 피하도록 한다. 이 과정에서 설령 자식을 낳더라도 그 자식은 양육하지 않는다. 이리하여 같은 시기에 태어난 자들을 형제로, 그 부모 세대를 모두 부모로, 조부 세대 역시 모두 조부로 서로 부르게 해야 한다. 통치자가 조작한 신탁에 따라 이런 의미의 형제자매간 혼인도 가능하다. 

462a-471b : 이상의 법령을 두고, 폴리스의 최대선이 무엇이고 그에 합치하는지 또 최대악은 무엇이여 그에는 합치하지 않는지 검토해야 한다. 모두가 친족이자 자기 사람들로 여기는 이 시민들은 같은 일을 자신들의 일로 여겨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한다. 이는 손가락의 상처를 온몸과 마음이 아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폴리스에서는 통치자들이 시민들을 보수를 주는 자들로 부르며 부양해 주는 자들이라 부른다. 또 통치자들 서로를 공동수호자로 부르며 서로를 친척으로 부르고 대한다. 이 명칭뿐만 아니라 행실까지 법으로 정해 서로를 친족으로 대하도록 한다. 수호자들, 보호자들의 처자공유는 이런 식으로 고통과 쾌락의 공유를 이루고 이는 최대선이다. 개별적인 사유재산이 서로를 가르고 분열시키는 반면 이러한 공유는 공감의 상태를 이룬다. 이들은 가계로 인한 잡다한 노고로부터 자유로워지며 분쟁으로부터 벗어나고 서로 돕고 공경하게 된다. 이는 올림피아 우승자보다도 복된 삶이다. 그는 생필품을 제공받으며 최고의 영광을 누리고 그의 승리는 폴리스 전체의 승리로 취급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자식대에까지도 부양받고 상과 장지를 받는다. 앞서 밝혔듯 굳이 특정집단인 수호자들만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전체 폴리스의 행복을 추구한 것이지만, 그들은 가장 행복한 상태에 놓였다. 더 나아가 수호자들은 자식들을 전장에 함께 데려가 교육시킨다. 전장의 위험을 수호자들이 알기에 자식들은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육과 양육을 통해 이 자식들은 말을 타고 위험에서 쉽사리 도망칠 수 있다. 또한 수호자들이 전투를 하면서 걸맞지 않은 두려움과 비겁함을 보인다면 직무를 강등시키고 생포된다면 적에게 넘겨줄 것이나 반면에 공을 세운 자는 그가 남녀불문 누구에게나 사랑받도록 할 것이다. 이로써 전투에 출중한 수호자의 혈통이 더 늘어날 것이다. 또한 고기를 상으로 내려 명예를 선사할 뿐만 아니라 그 체력을 기르게 할 것이다. 그들의 적에 대해서는 그리스 폴리스들의 경우 관대하게 대하여 야만인들에게 예속되는 일은 없도록 하고 노예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전사한 시신의 무장을 탈취하거나 그 회수를 방해하는 일은 금지된다. 또한 그리스 폴리스들 사이의 전쟁에서는 토지를 유린하고 가옥을 불태우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불화에는 전쟁과 내분이 있는 바, 전자는 야만인에 대한 것인 반면 후자는 그리스인들 사이의 일이다. 즉 내분에서는 분열을 막기 위해, 장차 화해하기 위해서도, 토지유린과 가옥방화가 금지되어야 한다. 다만 내분이라는 불화의 장본인들만 적으로 삼아 그들이 처벌받게 될 때까지만 불화를 유지할 것이다. 

471c-473b : 이런 법과 이와 유사한 법이 필요하고 좋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글라우콘은 이제 다시 차치해 두었던 가능성의 문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세 차례의 파도 중 가장 큰 마지막 파도에 자신을 세운다며 한탄한다. 그는 이 논의가 정의와 부정의에 대한 탐구에서 이어진 것임을 언급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인간이 정의 그 자체와 완전히 같지 않더라도 최대한 가깝다면 만족할 것이라 말한다. 즉 일종의 본으로서 정의로운 폴리스와 정의로운 인간을 구상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인간을 본으로 그린 화가에게 그 인간이 실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탓하지는 않겠듯, 훌륭한 폴리스의 본에 대해서도 그 실현여부로 탓을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실현되지 못한다고 하여 그 폴리스가 덜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실천이 말에 비해 진실에 덜 미침을 동의한다면 폴리스의 실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이에 최대한 가깝게 폴리스가 통치될 수 있는지 찾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이 작업 이후 현재의 폴리스들은 무엇을 잘못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잘 통치되지 못하는지, 무엇이 변란을 겪어 이런 잘못된 형태로 나아가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473c-474c : 이 작은 변란이 가장 큰 파도에 관련된다. 그것은 철학이 통치의 능력과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러 성향들이 이 둘 중 어느 한 쪽으로 각기 따로 향하는 것이 저지되어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악의 종식은 없다. 이 통합이 변질되어 폴리스는 잘못 통치되는 것이다. 철학이 정치와 통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위해서는 철학자를 정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폴리스의 지도자로 되기에 적합한 성향이며, 여타의 사람들에게는 철학이 어울리지도 않고 이 지도자를 따르는 게 적합한 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474c-480a : (philo-sophia, 지혜-사랑, 철학) 누군가 무엇을 사랑한다면 그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사랑하는 것이다. 소년애에 빠진 자는 피부색이나 코의 생김새나 무엇이 어떻든 사랑하는 소년의 전부 사랑한다. 명예를 사랑하는 자 역시 어떤 지위의 명예이든 가리지 않고 사랑한다. 철학자도 그렇게 모든 지혜를 욕구한다. 그러나 이는 아무것이나 보고 듣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아니라, 진리를 관조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미와 추, 정의와 부정의, 선과 악 등 모든 형상은 각기 그 자체 하나이지만 여러 행위와 물체에 대한 공유와 상호결합을 통해 여럿으로 보인다. 구경을 좋아하는 자들은 아름다운 색, 형태, 그런 온갖 것들을 좋아하지만 아름다움 자체의 본성은 볼 수도 없고 반길 수도 없다. 그들은 아름다움 자체를 믿지 않고, 마치 꿈 속에서처럼 저 여러 아름다운 것들이 그것들이 모방하는 것 자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 자체를 믿고 여기에 참여하는 것들도 알아 이것들을 구분하는 자는 깨어있는 자이다. 후자의 사유는 앎이고 전자의 사유는 믿음에 불과하다. 전자의 사람이 항의한다면 그에게 인식하는 자에 관련하여 물어야 한다. 그는 무언가를 인식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고 있는가? 무언가 인식한다면 그것은 ~인 것이가 ~이지 않은 것인가? ~이지 않은 것은 알려질 수 없다. 완전하게 ~인 것은 완전하게 인식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은 어떤 식으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면서 ~이지 않은 것은 순전한 ~임과 아무것도 아님의 중간에 놓인다. 이것들에 순서대로 앎, 무지, 그리고 그 사이의 어떤 것으로서 믿음이 상관한다. 앎과 믿음은 상이한 능력이며 상이한 대상에 관계한다. 그런데 ~인 것들 중 한 부류로서 능력은 그 자체로 빛도 형태도 없고, 구별할 만한 점을 볼 수 없다. 그것은 그 관계하는 대상과 작용만 볼 수 있다. 같은 대상에 같은 작용을 하면 같은 능력, 다른 대상에 다른 작용을 하면 다른 능력이다. 이제 앎과 믿음 모두 능력들이나 대상과 작용은 서로 다르다. 인식의 대상은 ~임이므로 믿음의 대상은 이와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지 않음은 믿음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믿음은 무언가에 관계해야만 성립한다. ~이지 않음은 아무것도 아니며 무지를 대응시킨다. 따라서 믿음의 대상은 ~임도 ~이지 않음도 아니다. 그리하여 믿음은 앎도 무지도 아니다. 그러나 앎보다 명확하지도 무지보다 불명확하지도 않으므로 이 양극단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제 여러 아름다운 사물들은 경우에 따라 추해 보이고, 여러 정의로운 것들도 경우에 따라 부정의해 보인다. 또한 어떤 것의 두 배는 동시에 다른 것의 반이기도 하다. 가볍거나 무거운 것도 마찬가지로 반대로 보일 수 있다. 많은 것들(ta polla)은 이렇듯 ~이지도 ~이지 않지도 않으며 ~이기도 하고 ~이지 않기도 하다. 이는 대중의 관례가 맴도는 자리이다. 이제 여러 아름다운 것들은 보지만 아름다움 자체는 못 보는 자는 믿음만 가질 뿐 앎은 없는 자이다. 반면 각각 그 자체로 언제나 똑같이 같은 방식으로 한결같이 ~인 것들을 보는 자들은 인식을 하는 것이며 믿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자들이다. 이들은 믿음에 머무르는 자들과 다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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