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a-421c : 아데이만토스는 수호자들이 나라의 주인이면서도 불행하며 마치 용병과 같은 처지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남들은 이러한 재산을 향유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들이 가장 행복하더라도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렇더라도 지금 폴리스의 수립에서 염두에 두는 것은 특정 집단이 아닌 폴리스 전체의 행복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그러한 나라에서 정의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부정의를 알아보기 위한 처음의 의도에 부합한다. 전체 폴리스가 행복해야 한다. 앞서의 지적은 이를 테면 아름다운 조각상의 가장 아름다운 부위인 눈에 가장 아름다운 색이 자색이 아니라 검은색을 칠한다는 비난과 같다. 눈이 눈답게 해야 비로소 전체가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 더구나 다른 직군은 몰라도 수호자가 실제로 수호자인 게 아니라 단지 그렇게 여겨지기만 한다면 전체 폴리스가 파멸된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폴리스의 행복을 위한 계기를 쥐고 있다. 수호자는 폴리스 전체를 행복하게 하고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이를 이룬 뒤 각 집단은 각 성향이 제공하는 방식으로 전체 행복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 

421d-427c : 부와 빈곤이 다른 직군에 끼치는 영향이 검토된다. 부는 나태로 인해, 빈곤은 곤궁함으로 인해 상품의 질을 저하시키고 기술자 자신과 그 후계자들을 타락시킨다. 수호자들은 부와 빈곤이 폴리스에 들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한다. 전자는 사치와 변란을, 후자는 자유인답지 못함과 저급한 기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아데이만토스는 부가 전쟁을 위해 필요하지 않느냐고 반론한다. 그러나 부자와 전사가 전투를 벌인다면 전문적인 전투기술을 갖춘 전사가 훨씬 유리하다. 또한 폴리스의 수호자들은 사유 재산이 없으므로 부자인 상대 나라를 회유하여 또 다른 나라에 맞서 동맹을 맺어 싸우도록, 그리고 전리품을 그들이 가지도록 만들 수 있다. 그들은 강한 전사들 보다는 그보다 나약한 자들과 싸우고자 할 것이다.
  아데이만토스는 다시 여러 폴리스의 재화가 한 폴리스에 집중됨은 위험하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수립 중인 폴리스 외에는 '하나의 폴리스'라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든 가난한 자들의 폴리스와 부자들의 폴리스가 있고 그 안에서도 여러 폴리스들이 나뉘어 언제나 한쪽을 다른쪽에 넘기면서 더 많은 동맹과 더 적은 적을 만들 수 있다. 또한 의도된 대로 수립된 폴리스라면 명성이 아니라 실제로 가장 강한 폴리스가 될 것이다.
  이 여럿과 하나라는 것이 폴리스의 규모 결정의 기준이 된다. 폴리스는 하나로 머무를 한도까지만 성장해야 한다. 이 역시 수호자가 수호해야 하는 점이다. 이 통합을 위해 수호자의 자식도 자질에 따라 농부가 되고, 다른 집단의 후손도 우수한 경우 수호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사항들은 교육과 양육만 잘 지킨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교육은 혼인, 출산 등 모든 것을 '친구들의 것들은 공동의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양육과 교육은 훌륭한 자질을 낳고, 이 자질은 교육을 통해 선조보다 더 계발된다. 따라서 건강한 교육과 양육의 방식은 그대로 고수되어야 하고 변화를 거부해야 한다. 유희로라도 변화가 유입되면 성격과 관행에 들어가 점차로 계약을 거쳐 법률과 정체에까지 미칠 것이다. 이는 폴리스를 전복시킬 것이므로 애초에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따라서 유희도 준법적이어야 한다. 예의와 효 등은 제대로 된 교육에 부수하여 그에 걸맞게 이루어질 것이다. 상거래의 세칙들도 마찬가지로 교육에 따를 것이다. 이런 세칙들에 집중함은 환자가 잘못된 습관을 고치지 않는 경우와 같다. 여러 약들을 먹더라도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이런 폴리스는 시민들의 법개정을 금지하지만, 시민들 비위를 맞추고 아첨을 하는 자에게는 존경을 주고 중책을 맡긴다. 이런 폴리스에서 중책에 스스로 나서는 자는 자신도 남들도 참된 정치가를 모르는 처지이다. 그러나 열심히 세칙들의 개정에 매달린다. 그러나 참된 입법가는 이런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이어서 종교적 법령이 제정되는데, 이는 전통적 종교관, 전통 해설자에 따른다. 

427d-428e : 이제 폴리스가 수립되었다. 다음으로 정의와 부정의가 어디 있으며, 둘이 서로 무엇이 다르고, 행복하게 될 자가 어느 쪽을 지녀야만 하는지(실제로 어느 쪽을 지니게 되든지와 무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 폴리스는 지혜, 용기, 절제, 정의를 갖추었다. 정의를 처음 찾을 수도 있지만, 나머지 셋을 먼저 찾는다면 이 역시 남은 하나만이 정의일 것이므로 정의를 찾은 것이 된다. 그런데 이 폴리스에 가장 명백한 것은 지혜이다. 이 폴리스가 분별있기 때문이다. 분별은 앎에 의한 것이다. 이 폴리스에는 여러 앎들이 있으나, 부분적인 앎이 아닌 폴리스 전체에 걸쳐 안팎으로 숙고를 가능케 하는 그러한 앎은 완벽한 수호자들인 통치자들에게 있고 그 앎은 수호술이다. 그런데 이 집단은 여타 직군들에 비해 가장 적다. 따라서 천성에 맞추어 구성된 폴리스에서 전체의 지혜로움은 최소 집단, 그 부분과 그 지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런 지식(episteme)이 곧 지혜(sophia)이다.

429a-430c : 용기는 일종의 보전이다. 이 폴리스에서 용기는 한 집단이 폴리스에게 두려워할 것들에 대한 믿음을 보전하는 것으로서 이는 그 집단이 법을 제정하여 교육을 통해 지시한 것이다. 바탕을 잘 준비하지 못한 양모에 염색을 하면 색을 망치듯, 시가와 체육을 통한 교육 없이는 법률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폴리스의 수호자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염색된 믿음은 어떤 경우에도 탈색되지 않는다.(구체적인 믿음의 내용들은 아마도 『법률』에서.) 

430d-432a : 절제를 제쳐 놓고 정의를 먼저 찾자는 소크라테스의 제안에 아데이만토스는 절제를 확인하고 싶다고 답한다. 절제는 화음과 화성에 유사하다. 그것은 일종의 질서로서, 쾌락과 욕망에 대한 자기극복이다. 그러나 자기극복은 동시에 자신에 대한 패배이기도 한 역설적 표현이다. 이를 구분하면 이기는 경우는 나은 자신의 나은 부분이 못한 부분에 대한 승리를 말하고 지는 경우는 그 역이다. 이 폴리스는 전자에 해당하므로 자신을 이기는 나라이다. 또한 일반인들에게는 여러 욕구들이 있으나 지성과 옳은 믿음을 갖춘 추론에 인도되는 욕망은 훌륭한 성향과 훌륭한 교육을 겸비한 자들에게 있다. 이 폴리스에서는 후자의 욕구가 전자의 욕구를 제압한다. 따라서 이 폴리스는 절제있는 폴리스이다. 더 나은 자의 통치에 대해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나 같은 믿음을 견지하므로, 여기에서 절제는 양편 모두에 있다. 이것이 화음, 화성과 유사한 측면이다. 지배에 대한 합의가 절제이다. 

432b-434c : 이제 남은 하나는 그를 통해 덕에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서 바로 정의이다. 이 정의에 대한 추적은 암중모색이나 소크라테스가 그 흔적을 발견한다. 그런데 정의는 이 폴리스의 수립 초기부터 강조된 바, 각자 본성 상 본디 적합한 한 가지 직무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각자의 일을 하고 다른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정의이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실현되는 것이 정의이다. 앞서 지혜, 용기, 절제를 가능케 하고 또한 보전해 주는 것이 남은 한 가지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남은 것은 정의뿐이므로 이것이 정의인 것이다. 폴리스의 덕에 대한 기여도는 앞서 세 가지에 정의가 못지 않다. 이는 판결에서도 목표가 된다. 각자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또한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또한 직무에 있어서 여타 전문가들의 일이 뒤섞임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전사의 일, 수호의 일이 다른 것들과 섞인다면 폴리스의 파멸을 초래한다. 장인, 전사, 수호자 셋 사이의 간섭이나 교체는 최대의 해악이자 악행이다. 이 악행은 곧 부정의이다. 이제 폴리스에서 정의가 밝혀졌고 그 반대로서 부정의도 확인되었다. 

434d-444e : 이러한 정의의 형상이 개인에게 적용되어 다시금 정의임이 확인되어야 한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정의를 찾아야 한다. 정의의 형상 자체는 크든 작든 같음 이름으로 닮은 것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인간은 정의로운 폴리스와 닮았다. 폴리스의 정의는 세 부류가 각자 고유한 역할을 한 덕분이며, 이 셋의 서로 다른 상태로 지혜, 용기, 절제가 성립했다. 인간의 영혼 또한 이렇듯 세 종류들을 지닌다. 폴리스 안의 것들은 영혼에서 유래하였으므로, 폴리스 내의 종류들과 성격들은 인간 영혼에도 똑같이 있다. 그런데 학습, 분노, 쾌락에 대한 욕구를 인간의 세 부분 각각이 따로 하는지 영혼 전체가 함께 하는지 검토해야 한다. 그런데 같은 것이 같은 부분에서 같은 것에 대해 반대되는 일을 동시에 행하거나 겪기는 불가능하다. 같은 것이 정지하는 동시에 운동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가만히 서 있는 인간이 팔과 머리를 움직일 수 있고, 이 경우 일부는 정지해 있지만 일부는 운동한다고 말해야 한다. 또한 회전하는 물체 또한 일부는 정지해 있지만 일부는 운동한다고 말해야 한다. 즉 축은 기울지 않고 정지해 있지만 원둘레는 운동한다. 긍정과 부정, 인력과 척력, 능동과 수동 등 이런 종류의 것들은 모두 반대된다. 마찬가지로 원함은 당기고 원치 않음은 밀어낸다. 이러한 욕구는 갈증의 경우 음료에 대한, 허기의 경우 음식에 대한 욕구이며 각기 고유하고 서로 다르다. 차고 더움 등의 부수적인 것들이 따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어떤 성질의 것들은 어떤 성질의 것들에 대한 것인 반면, 그 자체인 것들은 그 자체인 것에 대한 것이다. 큼이 작음에 대하는 관계가 전자의 경우이다. 더함과 덜함, 배와 반, 무거움과 가벼움, 느림과 빠름, 온과 냉도 그러하다. 이것들은 상대적이다. 지식의 경우, 지식 자체는 배움 자체에 대한 것 혹은 무엇이든 대상일반에 대한 것인 반면, 특정 지식은 특정 대상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갈증도 음료 일반에 대한 갈증이다. 그러데 갈증에 처한 영혼은 음료만을 갈구한다. 이와 반대로 이끄는 것이 영혼 안에 있다면 결코 갈증에 처한 부분과 같지 않다. 이런 억제와 극복은 추론으로 생기며, 반대로 이끄는 것은 어떤 상태들이다. 전자는 영혼의 추론적 부분이고 후자는 비추론적이며 욕구적인 부분이다. 이 둘 외에 격정의 부분이 따로 있는지 혹은 앞서의 부분들 중 어느 하나인지 살펴 보아야 한다. 아데이만토스는 격정이 욕구의 일부라 짐작하나, 욕구에 대한 분노 역시 있기에 분노와 욕구를 별개이다. 격정은 이렇듯 추론에 협력하는가 하면 반대로 욕구에 협력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정의로 인한 처지에는 어떤 경우에도 분노하지 않지만 부정의로 인한 겪음에는 크게 분노한다. 이는 수립된 폴리스에서 보조자들이 통치자들에 순종하여 싸울 때 싸우고 지킬 때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재화를 생산하는 부류와 (통치자들을) 보조하는 부류 그리고 숙의 결정하는 부류 셋이 폴리스를 이루듯 영혼에도 세 번째 것으로서 격정적인 부분이 있다. 폴리스가 세 부류에 의해 지혜롭고 용기있으며 절제있게 되는 것, 그리고 정의롭게 되는 그 방식은 인간의 영혼이 세 부분을 통해 그리 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정의는 제 자신의 일을 수행함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 영혼의 각 부분이 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 정의로운 인간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영혼에서 추론적 부분이 지혜와 선견지명으로 전체를 지배하고 격정적 부분은 이에 복종하고 협력하는 것이 적합하다. 이 둘 사이의 조화는 시가와 체육의 혼화가 추론적 부분을 키우고 격정적 부분을 달램으로써 만들어 준다. 이렇게 양육되고 교육 받은 두 부분이 욕구적인 부분을 지도한다. 폴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용기 있는 인간이란 이성의 지시에 따라 두려워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믿고 그 믿음을 보전하는 자이다. 또한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지시를 내리는 부분이 영혼 전체의 이익에 대한 앎을 갖춘 자이다. 그리고 절제 있는 자는 세 부분의 우애와 화합, 그리고 지배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영혼의 소유자이다. 이런 자는 횡령, 절도, 반역, 사기 등을 결코 행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배 및 피지배에서 영혼의 세 부분이 각기 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세 부분의 내분, 상호 간섭과 전체에 대한 모반이 부정의이다. 이는 질병상태와 같은 것이다. 지배관계를 본성에 따라 확립함이 신체의 건강이고 본성에 어긋나게 확립함이 질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에서 덕은 일종의 영혼의 건강이고 악은 영혼의 질병과 추함, 허약함이다. 

445a-445e : 이제 주변의 의견과 상관없이 실제로 정의와 정의로운 행위가 이익인지 아니면 부정의가 이익인지 고찰해야 한다. 아데이만토스는 질병과 건강의 비유를 다시 언급하며 당연히 정의가 이롭고 부정의가 해롭다고 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한 가지인 반면 악은 여럿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이 중 언급할 만한 네 가지 것들을 살펴 보자고 제안한다. 정의가 하나이고 악이 여럿인 까닭은 폴리스의 방식이 여러 종류이듯 영혼의 방식들도 여럿이기 떄문이다. 그런데 정체와 영혼은 각기 그 방식이 다섯 가지이다. 지금 수립된 정체는 통치자들 중 한 사람이 특출나다면 왕도정체, 그런 자가 여럿이라면 최선자정체라 불린다. 이 둘은 한 종류이다. 여기에서는 양육과 교육이 같고, 그에 따라 법률은 바뀔 것이 없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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