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엘레아 출신의 이방인은 테아이테토스에게 존재와 비존재, 혹은 규정과 무규정이 공유하는 난점을 지나치게 밝은 빛과 가늠할 수 없는 어둠에 빗대어 설명한다. 파르메니데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저마다 그것인 바의 것으로서 있고, 그렇기에 오직 있을 뿐 있었던 것도 있을 것조차 아니며 모든 것이 그 하나에 다름 아니라면, 그래서 이것과 저것을 나눌 수 없고 시공도 생멸도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면, 모든 것이 오직 있는 그 하나일 수밖에 없기에 있지 않거나 무엇이지 않은 아무것도 아예 가리키는 일조차 불가하다면, 그 하나뿐인 존재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그 이름조차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과 구분될 수 없고, 단일과 존재조차 분간할 수 없는 그 영원한 정적 속에서는 그저 긍정의 빛만 가득할 뿐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빛으로 가득 한 세계를 떠나 거기에 없는 것, 그것이지 않은 것, 그것 이외의 온갖 것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끊임없이 흘러 가는 세계에 이르러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변화하고 생멸하는 찰나의 순간을 붙잡아 매어둘 아무런 여지도 없다. 무엇인가가 또 다른 무엇인가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변화하기 이전의 것과 변화된 이후의 것이 저마다 각기 그러한 것으로 고정되어 생각되고 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정지는 변화와는 다르며 변화이지 않은 무엇이다. 그러나 변화와 정지는 모두 각기 그 자신인 바의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서 있다. 그 둘 모두가 존재이자 규정인 한편, 변화에도 정지에도 속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존재가 그 자체로 변화인 것도 정지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변화도 존재가 아니며 정지 역시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을 때 오직 그 각기 하나만으로 어떤 무엇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니, 엘레아에서 온 손님이 말하고자 한 빛과 어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자들은 변화하기도 하고 정지해 있기도 하며 제 자신과 같은 한편 그 외의 것들과는 다르기도 한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들, 그것들의 존재, 차이, 동일, 정지, 변화 각각과 그것들 서로 간의 관계를 이해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양극단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이 사유와 경험을 매개하여 앎을 확보해내는 자들이다. 그들은 진술과 진술 사이, 논리와 논리 사이를 오가며 필연과 우연을 조율해내 인식의 구조물을 쌓아 올리는 자들이다. 오직 단 하나의 답만이 나오는 두 세계, 두 개의 태양이 비추는 과도하게 밝은 지성의 세계, 빛은 단순히 긍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호한 하나의 답, 긍정의 경우에도 부정의 경우에도 그 이외의 것을 허용하지 않는 절대의 상징 같은 것이다. 지혜를 참칭하는 자들의 세계는 그 반대편에 놓인다. 그들은 진리를 뒤집어 제 자신들의 거짓을 수호한다. 거짓을 말하면서도 그러한 거짓이란 불가능하다고 말하여 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할 수 없게 만들고, 그가 허상을 내놓는다 말하면 사실이 아닌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 아무것도 아니며 자신이 무언가 내놓는다면 그것은 실상일 테고 허상을 내놓는다 비판한다면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반박한다. 그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 뒤에 숨은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그들의 변명에 앞서 행하는 덕에 대한 여러 생각과 말들과 가르침들까지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흔들리고 스러지고 또 다시 태어나는 흐름 속의 윤리를 논하며 다종다양한 편협함들에 빌붙어 강한 논변을 약하게도, 약한 논변을 강하게도 만들며 헤라클레이토스의 거죽을 뒤집어 쓰고 여러 폴리스들 사이를 떠돌아 다닌다. 그렇게 그들은 부유한 젊은이들을 사냥하고 그들을 타락시키며 불경한 자들로 만들어 더럽히고서는 그렇게 사로잡힌 젊은이들을 인질로 삼아 그들의 부모에게서 재물을 빼앗는다. 오직 존재하는 일자뿐인 세계와 그저 모든 것이 흘러가는 세계 각각을 일관되게 이해하고 또한 논증하면서 그 사이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정직한 철학자와, 질서 잡힌 것은 뒤흔들러 무너뜨리고 흘러가는 것은 억지로 막아 세움으로써 신이라도 된 듯이 제 뜻대로 거짓된 세계를 만들어대는 소피스테스, 양쪽 모두 그 진상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가 너무도 많은 것이다. 엄격한 논리의 사슬을 짊어져야 하는가 하면 손에 든 물처럼 속절없이 새어나가 버리는 사견과 수사를 포획해야만 한다. 그러나 손님은 한쪽이 밝혀지면 다른 쪽도 그 만큼, 다른 쪽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남은 한쪽도 꼭 그만큼, 함께 밝혀지거나 함께 덮혀 버리리라 말한다. 그는 양편이 같은 만큼의 어려움을 공유하기에 그 둘 사이를 잘 헤쳐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양편은 존재와 비존재의 짝인가, 아니면 정지와 변화의 쌍인가, 여기에는 아직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다. 여기까지 내 이 개소리에서 특히나 씨발 같은 부분은 소피스테스가 하는 짓거리에 대해 지껄인 대목이지.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그는 마치 파르메니데스의 추종자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혹은, 그는 마치 제논처럼 역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것을 가르치면서도 허상과 거짓이 없다는 주장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모순이다. 허상과 거짓이 없으려면 변화와 차이를 부정해야 하고, 그 결과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이며, 그러한 일자의 세계에서 논박과 설득, 교육과 정치가 설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존재와 비존재를 씨부리노라니 헤겔이 『대논리학』에서 떠드는 존재와 무와 생성이었나 그 비슷한 뭐시기와 『정신현상학』에서 지시와 보편자 사이의 관계 같은 것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언제 다시 차분히 붙잡고 곱씹을 시간이 오려나 모르겠네. 당장은 내 코가 석자라.

2. 권위는 실상 효율 때문에 유지되는 임시방편이라 믿는다. 그것 없이는 제도와 교육이 성립할 수 없다. 그건 죄다 정당하지 못할 테니까. 각자가 모두 각각의 모든 사실에 대해 똑같은 만큼의 논증을 구성해 같은 정도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같은 방식으로 믿을 것을 강요받게 될 테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통계 뽑아 확률 높게 참을 내놓는 구조, 직급, 그런 것들로 정당화하는 논증을 퉁치는 게, 그게 권위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역으로 이러한 정당화의 역할을 잘 수행해내지 못하는 권위는 따를 이유가 없다. 상사니 선배니 어른이니 뭐니 다 좆까고, 권위는 정당성의 자리를 대신하는 한에서만 효율적인 것이다. 권위에 따르고 이를 강요하는 건 권위가 제 역할을 하는지 못 하는지 검증하는 절차나 적절한 비판과 견제 없이는 무의미해진다는 얘기이겠지. 그러니 다 싫어하는 회식 자꾸 가지 말고, 술을 따르라느니 노래를 부르라느니 같이 춤을 추자느니 늙은이 서지도 앉는 좃 달고 추태 좀 그만들 부리고, 씨알도 안 먹힐 권위질 좀 관두는 게 좋지 않을까. 맡은 일을 잘 해내고 갈등 상황을 잘 조율하며 합리적 선택과 그에 따른 훌륭한 결과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면 거기에서 능력에 따른 합당한 권위가 성립할 거다. 그 능력과 성과에 따라 직급이 나뉘고 승진과 강등이 이루어진다면 합리적인 위계도 구성될 수 있을 테고, 권위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라는 것이 가능할 거다. 나이 쳐먹었다고 능사가 아니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든 낙하산을 타고 내리든 냅다 그냥 높은 자리 앉았다고 장땡이 아니라, 좀, 썅. 그나마 나 사는 동네는 묻고 따지고 하는 게 일인지라 덜하다면 덜한데, 윗자리에서 병신이 삽질하면 정말로 노답 아닌가. 군대 시절 일처리 등신같이 하던 양아치 새끼가 떠올라 갑갑하네. 무슨 군기강이니 애국이니 그런 거야 나 역시도 좆까라 마이신이고, 그냥 할 일과 시킨 일만 딱딱 끝내면 조용한 상황에서 발목 잡힌달까 걸리적거린달까 그게 정말 끔찍하게 싫어서, 반 유령취급 했었는데, 뭐 그래도 건강한 심신의 소유자였는지 별 탈 없이 전역하더만. 여차하면 나한테 총이라도 갈겼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요즘 무장탈영 사고난 딱 그 부대 딱 그 지역에서 군복무했던지라 좀 식겁했지. 권위고 나발이고 못 하면 욕 먹는 거고 잘 하면 칭찬 듣는 거고, 그러고 보면 별로 가혹행위니 뭐니 그런 것도 없었는데, 군대 갔던 게 거의 10년 정도 전이니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없던 가혹행위가 다시 생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폭행은 당연히 금지였고 얼차려, 집합, 암기강요 그런 거 실질적으로 단속해서 없애던 도중이기도 했고, 병간 상호존대도 어느 정도 시행될락 말락 하던 참이었는데, 뭐 그래봤자 군대는 감금, 고문, 시간낭비일 따름이니 이러나 저러나 싫을 수 있고, 몰라, 전역했으니 관심 없다.

3. 철학한답시고 지도 모르는 책이나 사람이나 말 몇 마디 갖고 장난질 치고 잘난 척 허세 부리면서 스승 욕 먹이고 학문 엿 먹이는 개쓰레기들이 '철학으로 질병과 기아를 극복하고 세계평화를 이룩하고 과학이니 기술이니 다 좆까고 인문학짱짱맨' 비슷한 헛소리들을 똥처럼 싸제끼는 걸 보고서 '씹새끼들, 계룡산 쳐박혀서 도나 닦아라, 씨발 것들'이라고 자꾸 넋두리를 해댔더니, 내가 계룡산 갈 일이 생겼다. 말이 씨가 되고 이게 다 업보요 카르마요 근데 또 산행 예정일에 비까지 온다 하네. 동행 예정이시던 현 지도교수님께서는 부학장이신지라 일이 바쁘셔서 못 오신다 하고, 그런데 어째 지도교수님 갈수록 바빠지시는 게 영 불안하다, 라고 하려다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내가 논문 준비 차곡차곡해서 찾아 뵈면 내칠 분도 아니신데 그저 게으른 내 잘못이고 다 내가 병신이고 머저리고 쪼다인 걸 뭐가 불안하고 걱정이고 나발이고인가 싶기도 하고, 모르겄다. 그 사이 내 친구 부부는 일본을 갔다가 부산을 갔다가 잘 놀고 돌아왔다는 것 같고, 또 다른 놈들은 내가 카톡 끊고 나니 소식을 통 모르겠고, 나는 섹스 못 한지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타의에 의한 강제적 고자상태에 직면해 있다. 10년 가까이 키우던 개가 품에서 죽던 날, 아니, 그 놈을 화장해서 그 재를 봉투에 담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정말 넓은 집에 맛있는 거 맘껏 주면서 꼬박꼬박 산책시키고 병원다니며 그렇게 키울 여력이 안 되면, 다시는 짐승 키우지 말자는 생각을 했더랬다. 연애라고 뭐 별반 다르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얘기를 듣고, 시간을 내고, 집중을 하고, 상대가 바라는대로 외모를 꾸미고 습관을 바꾸고,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의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상대가 만족할 만큼 봉사할 수 있을 게 아니라면, 그런데도 연애를 감행하는 건 그냥 '님하, 꽁씹 적선 좀, 하악하악'하는 것뿐 아닐까 싶어서, 저 열거한 노력들을 할 만큼 마음 흔들리는 사람이 당장에 있는 것도 아니라서(있었는데 차였으니-_-), 뭐 당분간은 왼손과 모니터를 현모양처 삼아야 할 듯하다. 개인적으로 매춘업에 비판적이지 않으니, 대외적으로 즐기려면 나중에 합법화 되어 있는 국가로 가서 살 생각도 있고, 뭐 범법을 저질러도 괜찮겠지, 요즘 오피니 뭐니 괜찮다더만. 『향연』에서 왜 그런 말 나오지, 몸이 아름다운 줄을 알고 이 몸이 아름다운 것과 저 몸이 아름다운 것이 다르지 않음을 알고 그렇게 아름다움이 하나인 걸 알고 나면 영혼이 정말로 아름다운 것인 줄을 알고서 나아가 아름다움 그 자체가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깨닫고 그것을 좇아 살아가는 것, 그게 인생의 바람직한 경로라고. 뭐 딱 이렇게 나온 건 아니고. 근데 난 아직 이 몸도 저 몸도 아름답다는 것까지만 알겠네. 솔직히 수려한 논리 같은 것의 아름다움이랄 것도 아예 싹 모르겠는 건 아니지만, 어지간한 중2중2함이 아니고서는 논리 갖고 사정하는 건 힘들지 않나 싶고. 그러고 보니 비트겐슈타인인가가 수학공식 떠올리며 쌌다 그러지 않았나? 아닌가? 아님 말고. 중2중2하든 좆나 개천재든 뭐 하나는 되야 저딴 변태짓도 할 텐데, 나는 좆나 범상한 장삼이사 필부필부 초동급부 어중이떠중이 찌끄래기새끼라서 못 해 먹겠네. 졸업논문!!!!!!!!!!!!!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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