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무 힘도 없다. 아무 상관도 없다. 방관자이긴 한데 그렇다고 그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도, 책임을 면제받은 것도 아니다. 이래도 되는 건가, 하면 답은 물론 이러면 안 되는 건데 그렇다고 선뜻 뭘 어찌 할 수도 없다. 그래도 기어코 꾸역꾸역 살아남고 싶다. 다만, 기왕 산다면 좋은 삶, 올바른 삶, 살아갔고 살아왔다는 그런 실감이 있는 삶이길 바라는 것인데, 그건 좀 과한 꿈이라는 걸 이젠 진심으로 인정할 때도 된 것이려나, 잘 모르겠다. 사람을 품고 지킬 용기 같은 것이 필요하다. 나로서는 여전히, 그러려면 확신을 보장해 줄 구체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앎이거나, 혹은 돈이거나.

2. 긴장감에 대한 애증이랄까. 고대철학이란 놈은 유독 이게 문헌학인지 논증 중심의 어쨌든 철학인 건지 그게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모양새인 듯하다. 어차피 모든 정당성의 평가란 해당 논증을 담고 있는 그 문자에 즉해야만 하고, 그 안에서 허용되는 범위 밖으로 나가는 순간 평가의 권리를 상실하게 되게 마련이겠으나, 또 동시에 문장을 명제로 환원시키고 논리적 함축을 이끌어내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숨겨진 전제들을 끄집어 내어서 가능한 한 최대로 정당화시켜 놓지 않고서는 그 평가 자체의 정당성도 얻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아니, 애초에 앎이 목적이라면 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논증도 이를 평가하는 자 자신의 고유한 논증도 서로 양립불가능한 개싸움을 벌이는 게 아닌 바에야,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 재구성된 뒤에 검토되어야 이걸 수용할지 거부할지 결론이 날 테고, 그런 결론들을 따라 가야 조금이라도 앎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을 테니까. 무엇이 쓰여 있고 또 그게 뭘 말하고 있는지, 그 지반을 잃고서는 다른 방식의 철학이 불가능하다는 극단적인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상대로 한 대화가 곧 사유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따르더라도, 그게 또 웃긴 얘기이기도 한데, 플라톤을 연구하는 자들은 플라톤이 아닌 게지. 하여튼. 논증을 구성하고 이걸 다시 스스로 분석하고 재구성해서 평가하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려 들고 또 이를 거부하고 그러는 것 역시, 뭐, 그렇다는 거다. 내 자신이 부족해서도 그렇거니와 이러저러해서 문헌에 충실할 것을 강요하다시피 하는, 그런데도 그 문헌 자체가 굉장히 넓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고대철학이 재밌긴 하다. 고작해야 손에 꼽을 정도 몇 가지 문헌 맛만 보고 만 중국고대사상서들도, 고대철학 하겠노라고 결심을 하기 전에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붙들고 살았던 칸트니 헤겔이니 하는 것도, 다 각기 다른 맛이 있지만 그래서 더욱이 이 맛은 안 나는 듯. 더 낫고 못하고 이런 얘길 떠나서, 그게 왜 엄격함이 강조되거나 혹은 개인의 체험이나 공감을 요구하거나 하는 어느 한쪽으로 향하지 않고, 뭐 그런 아리까리한 구석이 있는지 생각해 보면 기하나 논리에 대한 그 뭐랄까, 경탄이랄까 경외랄까 그런 것도 있고 아직 학문이 미분되어 있던 시절의 노래와 그림과 하늘의 별들 따위가 뒤섞인 '지혜'에 대한 뭉뚱그린 희망 같은 것도 있고 뭐 그런 것 같은데, 이것도 따지고 들면 한도 끝도 없겠지. 어쨌든 문헌과 논증 사이의 줄다리기 같은 것이 몹시 즐겁단 얘기다. 다른 쪽으로는 그다지 긴장감을 즐기는 취향은 아닌데, 앎과 행동 사이 같은 것이 그렇다. 아직 아무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어쩌면 영영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렇더라도 계속해서 좀 더 많은 것을 알아가는 일은 아직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일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우리는 알지 못하는 채로 머물러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순간 모든 곳에서 해결하고 선택해야 할 문제들에 부딪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우리 각자가 행동에 나섰고 선택했으며 그렇게 역사는 쌓여 온 것 아닐까. 내 행동은 완전한 앎에 기반하지 않는 한 언제나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저질러 버린 일을 돌이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행동에 신중을 기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면서도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가장 극단적인 신중함은 결국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그러지 않았나, 일단 다 의심해 보기는 하겠는데 이게 현실에서 삶에까지 적용되어 버리면 아무것도 못 하니 일단 세상살이는 옛 성현들의 말씀이나 법규들을 따르는 정도로 해두자고. 플라톤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 저 너머 위대하고 완전한 신들이 기만을 일삼고 아랫도리를 휘두느르라 정신줄을 놓고 서로 싸움박질에 여념이 없는 것인지, 자신이 사는 나라의 법들은 틀림이 없는 것인지, 예로부터 전해져온 이러저러한 규범들은 반드시 따라야만 하며 그것이 또한 가장 최선인 그러한 것들인지, 온갖 것들을 의심하고 검토해 보면서도 일단은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전통을 공유하고 그들의 상식에서 함께 출발하고자 한다. 세상을 뒤집어 엎고 피고름이 썩어 문드러진 병든 살과 뼈를 도려내면서 새로운 세상을 불러 제끼는 것과 천하에 무도함을 한탄하며 무엇이 천명인지를 아는 날까지 몸을 감추고 엎드려 고민만 더해가는 것 사이의 어느 지점, 그 어느 지점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결국 완전히 알고 난 뒤의 행동만이 유일하게 선하고 정의로운 행동이라 믿는다. 그럴 수 없어서 행하는 차선책이 어디에 놓여야 하는지, 그런 고민이 있는 것인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것저것 온몸으로 치받아 보자고 덤벼들던 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발목이 잡혀 좌절했었고, 지금은 무력하고 비겁한 나를 향해 내 스스로 쏟아대는 혐오와 경멸을 버티기가 힘들다. 아우, 썅알.

3. 몇 시간 뒤에는 기종석 선생님 퇴임식에 갈 예정이다. 내 이전 지도교수셨던(뭐 지금도 행정적인 차이만 있을 뿐 크게 다르진 않은, 오히려 지도교수님'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랄까...) 김남두 선생님 퇴임기념강연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한 세대가 지나가고 있다. 정암에서 선생님들 윤독도 이제 몇 권 남지 않았고, 고전어 사전이니 문법서니 다른 전집들에 개념어 사전들까지, 따지고 들자면야 앞으로도 기초작업이라 할 만한 것들은 쌔고 쌨지만, 어쨌든 감회가 묘하달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소피스테스』나 되짚어 읽으며, 다음 학기 『국가』 강의 들을 준비를 하면서, 또 『향연』 듣기 전에 대략적으로나마 초벌번역이라도 하면서, 다음 학기에는 반드시 내야만 하는(통과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논문을 작업하면서, 무명연구자가 되기 위한 발버둥을 계속해야 할 듯하다. 저 스승들께 배웠던 것들이나마 나는 제대로 곱씹어 삼키고 소화해냈나, 혹은 학계는 그것을 충분히 정리하여 마무리짓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게 해서 이루고 쌓인 것이 해야 할 모든 일들에 비하자면 과연 평할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한 크기, 양을 지닌 것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노라면 여전히 철학으로 세상을 바꾸겠노라는 치들에 대한 짜증이 치밀지만, 뭐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고 품을 넓힐 필요도 있겠지. 동의할 수는 없더라도, 그것 역시 가능한 선택지들 중 하나일 테니까. 앎이 앎에서 또 다시 앎으로 이어지는 정말로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앎들의 인드라 그물 속에서는 플라톤이 양자역학에 기여하는 날도 올지 모르겠다. 그 전에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그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시간 내내 학문에 게으름과 비겁함이 없을 수만 있다면야. 그리 생각하면, 끄트머리 말단 귀퉁이 먼지나 때만도 못한 내 인생도 조금은 의미부여가 된다. 없어도 무방할 삶일지라도, 어쨌든 없지는 않은 그러한 기여는 하고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다. 딱 그만큼의 삶을 살 수 있게끔 허락을 받기 위해(그 허락을 누가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악착같이 하한선 근처에서 바둥거릴 수밖에. 그건, 참 재미있는 일이다. 다행한 일이다. 그나저나 외롭다. 살이 고프고 술이 고프고 그냥 삐끗하면 매음굴에서 아편이나 빨다 뒈질 것 같은, 그런 밤이로구나.

-蟲-

P.S. 『향연』 고전 그리스어를 모씨와 읽어 볼 요량인데 혹 생각 있는 분 계시면 연락 주심 좋고, 아님 말고. 어차피 가르쳐줄 선생님급 끼는 것도 아니니 부담없이 구경 오실 분들도 거부는 않겠음. 근데 정말 비생산적인 헛짓거리일 수는 있지.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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