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영화를 봤다. '과학은 무서워, 기술은 무서워, 인간은 착해'를 뇌까리는 정신병자들로 가득 찬 영화. 논리, 수리, 전산, 통계, 자연과학과 여러 공학들 본래의 가치와 가능성에 대한 역사 속 빛나던 신념도, 이해의 한계 앞에서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딛기 위해 일생을 바쳤던 수 많은 무명씨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도 찾을 수 없고, 이해하려 들지 않았기에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심지어 비겁하게 그 무지를 윤리로 치장하려 든 쓰레기들의 자기반성도 물론 찾을 수 없는, 뻔하디 뻔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그들에게서 이성과 역사가 보장해 주고 있는 그 모든 편리를 몰수해 버리고 그냥 무인도로 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늘상 하는 말이지만, 유럽쪽이야 큰 전쟁 두 번 겪으면서 좌절할 핑계거리라도 있지, 서구학문을 수용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기능하는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하는 제 3세계 반도 씹쓰레기들은 뭐가 그리 잘나서 이성이 한계에 다다랐다느니 도구적 합리가 이러니 저러니 씨부려대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니, 유럽 새끼들도 엄살이 지나치고. 수로를 정비하고 백신을 만들고 생산량을 늘려서 지금 인구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상대적 박탈감이니 빈부격차의 심화니 하는 것들은 지식과 합리의 부산물이 아니라, 세계에 부대끼며 쉬지 않고 머리 굴려 삶을 가져다 바친 사람들에게 모든 부담을 떠넘기고 뒷짐지고 무임승차한 우리 쓰레기들의 채무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이전까지 문자와 문법의 체득이 그러했듯, 종교와 천문과 법제에 대한 접근이 그러했듯, 그리고 늘상 논리와 수학이 그래 왔듯이, 오늘날 자연과학의 여러 분야들과 그 응용들, 어느 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 전산과 통계의 분야들, 기술공학들도 그것들을 통해 밝혀진 사실의 세계 속에 사는 지적 생명체들에게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는 정당하다. 아니, 자연스럽다. 어쩌면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알기를 거부한 것 아닌가? 언제고 인류의 지난 지적 유산을 받아들이고 이어받기 녹록하였던 세대가 있었던가? 알려 하고 배우려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하는데도, 그게 귀찮고 제 자신의 밑천이 드러나는 게 쪽팔리고 겁나서, 게다가 그런 나태와 비겁을 인정하는 것조차도 싫어할 만큼 위선적이라서, 개새끼들이 가상의 괴물을 만들어댄다. 세계는 문을 두었고 우리에겐 열쇠가 있는데, 그리고 아직 갈 길이 먼데, 진리에 닿기도 전에 절멸해 버릴지도 모를 위태로운 종 주제에 제 목숨줄이자 은인이라 할 만한 지성을 불신하고 모함하는 그 거만함이야 말로, 오히려 세상 전부를 이해하는 것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 아닐까 싶다. 발가벗고 어디 무인도로 다들 꺼져 버려라. 곧 죽어도 저 복잡하고 난해한 학문들에는 손끝도 닿고 싶지 않다면, 이 악물고 사회에 참여하고 정치활동을 지속하고 그렇게 도망자들의 채무라도 갚아라. 이도저도 싫다면, 입 닥치고 죽어라. 징징거림으로 가득 찬 망상은 구더기 들끓고 똥오줌과 피고름으로 범벅된 문드러져 가는 송장보다도 끔찍하니까.

2. 김보통 작가의 웹툰 '아만자'. 보면서 떠오른 것은 어릴 적 몇 장면들이다. 학교 땡땡이 치고 마을버스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노라면, 동네에는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거나 얼굴이 변색되어 일그러졌거나 한 사람들이 많았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도 흔했고, 그들 저마다 나름대로 나와 관계가 있었다. 어느 가게에 가면 앉아 있는 아저씨, 어디 가면 꼭 인사를 하는 아줌마, 어느 반 왕따 당하는 애,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있었고 나와 모르더라도 아버지를 알거나 대고모님을 알거나 뭐 그랬다. 고등학교를 관두고, 어쩌다 보니 운 좋게 대학이란 곳에도 가고, 심지어 지금은 당시에 상상은커녕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던 대학원이란 곳에 다니고 있노라니, '장애인'이 아니라 '장애우'라느니, '병신'이나 '염병'이란 욕은 피씨하지 못하다느니(근데 '피씨하다'는 게 정확히 뭐냐?), 연민과 동정으로 대하지 말라느니 또 그러면서도 돕고 살라느니 어쩌라느니. 현실은 극적이라거나 뭐 그럴 것 없이 정말로 말 그대로 얄짤없이 현실일 따름이라서, 나는 새삼스레 동정이나 연민 같은 걸 느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차별의식을 가질 계기도 없었다. 눈앞에 그저 그렇게 펼쳐져 있는 사실들에 무슨 차등 같은 게 있을 턱이 있나. 내가 접해 본, 암환자를 소재로 다룬 여러 창작물들 대부분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작위적인 것들 일색이었다. 허무맹랑한 희망을 말하거나 세상에 둘도 없을 절망을 그리면서 펼쳐내는 온갖 망상들에 감동했던 기억은 없다. 왜 보통 그렇잖은가, '제가 저 여인을 사랑해서 죄송합니다' 어쩌고 하는 류의, 아니, 심지어는 당사자들 마저도 어느 사이엔가 도통한 신선이라도 되었는지 일개 아무개씨에서 가르침을 설파하는 영혼의 지도자처럼 여기저기 삶의 소중함을 떠들거나 꿈과 용기를 지껄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 '아만자'라는 웹툰을 보면서는 침묵할 수 있었다. 주제넘는 격한 공감을 할 것도 없었고, 비웃고 조롱할 여지도 없었다. 아, 이런 조곤조곤함이라니. 이 만화는 참 좋은 만화다.

3. 『국가』는 매일 스테파누스 2장이면 대강 강의 들을 준비는 될 듯하다. 『향연』은 한 장이면 되고. 조금씩 해둔 게 있기도 하고 또 강독이든 윤독이든 청강도 몇 차례 들어갔었으니 점점 더 속도가 붙으리란 기대도 있고. 그냥 무턱대고 논문만 붙들고 있으려니 오히려 진도를 못 빼겠어서 내린 결정이다. 기계적으로 단어를 찾고 말을 옮기면서, 그 흐름에라도 기대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더라도 곧장 논문작업에 달려들 일은 아닌 것 같고, 내용정리 먼저. 대체 내용정리만 몇 번인지. 뭐 플라톤, 플라톤, 또 플라톤인 상황이고 그래도 접근법도 그 경로도 서로 다르니 뭔가 전모를 그리는데 도움이 되거나 아니면 그냥 기분이라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어느 날 갑자기 어딘가에 고립되어 버린다면, 혹은 시한부 인생이 된다면 무얼 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한다.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플라톤 대화편 한 권 붙잡고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곧 죽게 될 처지라면, 뭐 못 잊을 지난 사랑이라도 찾아 가려나 싶기도 했지만, 혹은 정다운 친구들을 만나거나 인사드리지 못한 은사님을 찾아 뵈려나 그런 생각도 해 봤지만, 그런 건 좀 무책임한 것도 같고 별로 내키지를 않아서. 뭐랄까, 내겐 꿈이 있고, 그 꿈은 내가 이룰 꿈이 아니라 막연히 그냥 뭔지 모를,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 같은 것이라서, 나는 그게 궁금한 것이지 그걸 내 걸로 하겠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그게 뭐든 그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이 영원한 무엇일 것 같아서, 아, 말하다 보니 지나치게 거창해서 역겹네. 아무튼 보잘 것 없고 시덥잖고 쓰레기 같은 나는 차치하고, 추구할 만한 무언가와 그걸 추구한다는 그 짓거리가, 그게 참 좋아서, 이래저래 잘 사는 사람들한테 민폐 끼치는 것보다는 그저 꾸던 꿈이나 마저 꾸다 뒈지고 싶다는 거다. 가능하다면, 이 일이 허락되는 시간이 내가 뒈지는 날까지는 닿았으면 한다. 잘, 좋은 삶을 살아왔는지 가늠할 척도가 함께 해줄 좋은 사람들에 달려 있다면야, 난 역시 실패를 향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이겠다. 여기저기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이 흐릿해지고 그저 하루하루, 오늘 지금 여기에서 읽고 있는 문장이나 써 남기고 있는 넋두리들로만 있다가 사라지고 또 있다가 또 없어지고. 아마 앞으로 이전에도 없던 힘이 갑자기 번쩍 날 일도 없을 테고 갈수록 지쳐갈 것은 뻔할 테니까, 사람이 의당 사람과 맺어져 해야 할 노력을 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 그럴 엄두도 나질 않고, 그저 간간 연락이나 닿으면 내치지나 않는 정도의 관계, 그런 걸 기대한다는 건 그야말로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욕심일 따름이고, 내가 좋아 죽고 못 살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일도 없으니, 그런 건 됐고, 드문드문 이 막막하고 까마득한 어둠에 발 디딜 딱 그 만큼의 볕이라도 드는 일이 종종 있어서 그 재미로 그 낙으로 버틴다. 외롭다기 보다는 미안할 따름이다. 어렸을 때는 온갖 종류의 여러 사람들과 다 함께 어울려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하게 되는 그런 꿈을 꾼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동료는 없고 죽은 스승들과 산 스승들과 마찬가지의 선배들과 후배들과 그런 식이다. 음, 사자 돌림 친구 몇은 있어야 하는데, 낄낄.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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