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플라톤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프로타고라스는 시민의 덕(politike arete)을 가르친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민회나 법정에서 시민이라면 누구나 서로에게 조언을 한다는 점을 들어 딱히 시민의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따로 있기는 어려울 것이라 말하고, 또한 페리클레스 등 시민의 덕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제 자식들을 훌륭한 시민으로 키우는 데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덕이 가르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리라 반박한다. 이러한 두 가지 반박에 대해 프로타고라스는 신화의 형식과 논증의 형식으로 두 가지 '위대한 연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한다. 그 논의는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우선 신화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들이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dike(정의 or 정의감)와 aidos(염치)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러한 것이 없다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나약한 인간들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는 한에서 멸종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dike와 aidos를 통해 인간들은 최소한 서로 적대하거나 공동체를 파괴하지는 않게 된다. 즉,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그는 사회적, 정치적 존재로서 정치적인 일들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유지 및 존속에 필요한 이러한 소극적인 참여에서 나아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즉 가정과 폴리스의 일들을 잘 숙고하는 데에 이르기까지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 내에서 각 시민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지시와 훈계로 기본적인 규칙들을 습득하게 되고, 마치 모국어를 배우듯 학교, 시장, 법정 등 사적이거나 공적인 여러 모임들 속에서 서로를 통해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지식들을 획득한다. 각기 그 천성 혹은 재능에 따라 배우는 바가 더디거나 그 성취가 월등하다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으나, 그들이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를 스스로 깨뜨리지 않는 한에서 그들 모두는 사회 바깥의 야만인들에 비하면 훨씬 더 시민적 덕의 전문가들이고 교사들이다. 서로가 가르치고 또한 서로 배운다는 점에서 모두가 모두에게 교사이고 학생이다. 그러나 더 잘 숙고할 줄 아는 이가 있으며, 그에게 배우면 더욱 많은 것을 더욱 잘 배울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결론은 그러한 덕의 교사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다. 교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사이며, 그럼에도 그 중에서 더 나은 교사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시민의 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에 골자이다.

  그가 그리는 사회는 일종의 합의를 통해 구성되고 또한 유지되는 공동체로 생각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가 속한 공동체를 해체시킬 수 없지만, 또 다른 한편 이 공동체의 구성은 각자 본성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dike와 aidos를 통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각자 자신의 정의와 염치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 공동체를 유지시켜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모두가 이 공동체의 존속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 그들 각자는 공동체 운영에 대한 조언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서로 대화와 설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의 참임을 믿게 만들어 각자가 믿는 방향으로 공동체를 이끌어 나아가고자 한다. 그들이 서로 가르치는 일에 반대하지 않고, 또한 시민적 덕을 갖추지 않는 일은 사회 속에서 불가능한, 혹은 설령 가능하더라도 숨겨야만 하는 일이라 믿는 한에서, 그들은 서로 대등한 발언권을 지닌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와 같은 형태라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비록 프로타고라스가 자신에 대해 말하듯 그 중에서는 가정과 사회에 대해 더 나은 숙고를 지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해당 대화편의 이후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것은 자신의 말을 상대방에게 설득시키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힘에 의해 강제받거나 혹은 어떤 절대적인 법령이나 심지어 진리 때문에라도 피치 못할 방식으로 누군가의 의견에 따르게 되지 않는다. 단지 말을 듣고 그 생각을 납득하게 되면 그에 자발적으로 따를 뿐이다. 

  프로타고라스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격언인 인간척도설을, 플라톤의 해석과 달리 인식론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위의 사회상에 부합할 여지가 있다. 인간은 만물이 아니라 만사(萬事, panta bpragmata)의 척도이다. 사회적인 일들 일체는 모든 인간 개개인의 숙고 대상이며 각자의 의견은 누구의 것이 다른 누구의 것보다 더 높은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다. 모두가 모두에게 교사이고 또한 학생이며, 사회에 참여하는 자는 그 누구라 하더라도, 아무리 소양이 없고 어리석다 하더라도 일단 사회구성원인 한에서는 시민적 덕의 전문가이다. 어떤 일이 이러저러하다거나 이러저러하지 않다는 일의 기준, 척도, 전쟁을 한다든지 범죄자를 추방한다든지 세금을 거둔다든지 하는 일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은 각 해당 개인에게 참이다. 객관적으로 절대로 옳고 그른 그러한 사회적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문제는 가치상대주의로 해석할 경우 어느 정도까지 극단적인 상대주의가 구성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수사술과 설득이란 개념이다. 설령 가치상대주의라 하더라도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주장이 바뀌지는 않는다. 다만 무엇을 더 선호하고 따를 것인지 여부가 진리를 기준으로 하지 않을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더 그럴싸하게 말하는 자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도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말이 참이라고 다른 누군가가 믿는다면, 그 믿음에 대해서는 그렇게 믿은 자에게 상대적으로 참이다.

2. 『테아이테토스』에서 제시되는 플라톤의 해석에 따라 프라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인식론적 상대주의로 해석할 경우 신들에 대한 그의 언급으로 전해지는 내요을 일관되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신들에 대해 그들이 이러저러한지/있는지 혹은 이러저러하지 않은지/없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척도인 한에서, 존재하는 것들에 속하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그가 믿는 바가 곧 참이 되는 그러한 인간이 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이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등장인물로서 프로타고라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뿐만 아니라 제우스와 헤르메스, 헤라와 헤파이스토스까지 언급하고 나선다. 신들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그가 제시하는 신화적 해석이란 것은 프로타고라스 자신의 입장에 일관성있게 적용되기 어렵다. 그러나 이를 사회적인 맥락에서 이해하자면 일관된 해석의 가능성이 열린다. 인간은 사회적인 만사의 척도이다. 오직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하며 그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에 권리와 책임이 있고 그 정도에서 다른 구성원들과의 차이는 없다. 또한 그렇기에 각 개인은 해당 사회에 대해 동등한 발언권을 지니며 모두가 모두에게 가르치고 또한 배움으로써 사회를 유지, 존속시켜 나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지식, 시민적 덕의 전문가일 뿐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위대한 연설 중 전반부 신들에 대한 논의는 사회 구성의 배경을 설명함에 있어서 인간이 사회에 대해 지니는 본성적 능력의 성립 혹은 획득 과정이란 것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신화를 통한 유비라 생각한다면 이해하지 못할 바도 없다. 신들이 실제로 그러하였는지 역사적 사실을 보고할 필요는 없다. 다만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서 개개인 상호에 어떤 기여도나 능력 자체의 차이는 없다는 점이 설득되기만 한다면, 이후 논증을 통해 제시되는 위대한 연설의 후반부 논의를 이해하는 데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신들이 정말 그랬습니까?' 라고 되묻는다면 프로타고라스는 '그건 나도 알 수 없소'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신들이 주지 않았더라도 어쨌든 인간들은 사회를 꾸려 살아가며, 그 사회 밖에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 단지 그것만 전달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척도설에 대한 인식론적 해석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를 있는 그대로 신들에 대한 그의 전언과 일관되게 해석할 가능성도 검토가 필요하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주의 인식론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전제될 수 있는 존재론적 입장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을 끌어 들인다. 이 만물유전으로부터 인식론적 상대론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인식을 감각적인 것, 경험적인 것으로 제한해야 한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어떤 한 순간 어떤 한 장소의 어떤 한 개인에게 그가 느낀 바의 것이 참이다. 즉 그가 감각하는 그대로의 것이 그에게 실제로 그러저러하다. 이러한 입장에 설 경우 신들이란 감각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종류의 것들로서, 그것들이 이러한지 저러한지 여부는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이는 『소피스테스』에서 오직 손에 닿는 것들만을 믿는 자들, 거인족의 입장과 유사하다. 그저 손에 닿고 눈에 보이며 귀에 들려오는 순간순간의 것만이 나에게 사실이며 그러한 감각은 매순간 변화하기에 고정불변하게 내 감각과 무관하게 이를 테면 영혼 따위의 것 속에서만 가능한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상태나 조건에 따라 감각은 서로 다르고 각자의 감각은 결코 공유될 수 없으므로, 또한 이러한 세계에 대한 인식은 모두 상대적이다. 이 경우 결국 공통의 언어, 공통의 추론과 같은 객관적 성격의 어떠한 인식적 활동도 불가능할 것이므로, 그들은 아무말도 못하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입장이 그 논리의 내재적 측면에서 반박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플라톤 자신이 묘사하는 프로타고라스가 또 다른 대화편에서 사회 공동체의 합의나 상호에 가르치고 배우는 관습 및 전통 따위의 것들을 인정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는 언어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아니, 그 기능과 역할을 중시하기까지 한다. 또한 아이들에게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거의 주입시키는 방식으로 교육한다고 간주하며, 그것이 해당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합의된 것인 듯이 말하고 있다. 감각 경험을 통한 인식론적 상대주의에서는 이러한 합의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언어와 교육, 그리고 합의를 통해 구성된 사회 등이 가능할 정도의 여지는 남는 그러한 방식의 상대주의로 해석되지 않는 한, 인간 척도설을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것으로 전해지는 다른 입장들과 정합적으로 이해할 여지는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3.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 프로타고라스는 상대주의, 플라톤은 절대주의? 아, 모르겠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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