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동일한 관계를 통해 상이한 결과들이 도출되는가. 다른 유들이 있음에 참여함으로써 있는 것들이 되는 경우와 있음 이외의 유들이 서로 결합하여 참여 대상에 관하여 있는 것들이 되는 경우의 차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무엇에 관하여 어떠하다는 사태와 이를 가리키는 문장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지시는 일종의 모방인가. 결국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은 유들의 결합과 분리, 즉 변증술이 진술에 대해 그리고 그 이전에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인 유에 대한 정의에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지 설명으로 이어진다. 다시, 이는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 전체의 일관된 해석 가능성에 대한 탐구작업으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그 자체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오직 그 자체의 본성만을 진술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의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에 대한 진술보다도 논리적으로 선행한다. 재귀적 지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시 대상으로서의 무엇인가가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고정된 상태를 넓은 의미에서 정지(stasis)로 간주할 수 있다면, 결국 자기 동일성이 요구되는 일체의 것은 모두 정지를 전제해야만 한다. 반면 이러한 정지만을 인정할 경우 소위 '형상의 친구들'이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 이외의 다른 술어를 필요로 한다. 그 이전에 최소한 그것의 이름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이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대상은 이름에 의해 지시된다. 이러한 능동과 수동의 관계는 인식의 차원에서 설명된다. '형상의 친구들'은 무언가가 인식되기 위해서라도 그것이 반드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인식대상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은 인식된다. 그것은 인식된 것으로 변화한다. 어떤 일을 행하여 무언가로 만들 때에 그 무언가가 어떤 무엇으로 된다. 이러한 행함(poiein)과 겪음(paschein)은 능력(dynamis)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능력을 갖추어야만 한다. 그것 없이는 지시도 진술도 사유도 불가능하며 아무런 결합도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이 능력이 발휘되어 나오는 결과는 이전에 있지 않거나 무엇이지 않은 것이 이후에 있거나 무엇인 것으로 이끌리는 것, 즉 무엇이 다른 무엇으로 되는 것, ~임/있음(einai)에서 ~됨/생김(gignesthai)으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됨/생김은 운동(kinesis)이다. 대화편의 진행 순서에 따르자면 이 운동, 능력만을 인정하고 정지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다시 정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앞서 보았듯, 정지 없이는 어떤 것을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 동일시하고 고정된 것으로서 파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정지'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그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의 인식이 성립한다면, 그러한 인식작용을 통해 인식을 겪어 인식된 것으로 변화하는 한에서, 그 정지 역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운동'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그것으로서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면, 그것을 지시하고 진술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바로 그것으로서 변화하지 않고 유지된다면, 그러한 한에서 운동 또한 정지해 있어야만 한다. 신족과 거인족의 투쟁과 같은, 존재가 운동인가 혹은 정지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엘레아 출신의 손님에 의해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으로 결론내려진다. 그러나 있음, 운동, 정지라는 가장 큰(혹은 매우 중요한, megistos) 유들이 선택되고, 이것들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더 이상 이러한 운동과 정지의 의미에 대해 고찰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운동은 정지와, 정지는 운동과 가장 반대되는 것이며, 그것들 사이의 결합은 가장 불가능하다고 거듭하여 언급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가능할 것이다.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을 수 있는가? 혹은 정지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가? 나아가 정지는 인식될 수조차 없는가? 이 물음은 유들 사이의 결합활동을 지시하는 동사 '참여(metechein)'에 이어진다. 어떤 것이 다른 무엇에 참여한다는 것, 그 대상의 몫을 나누어 갖는다는 것, 그 대상을 공유한다(koinonein)는 것 역시 능동과 수동의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면, 여기에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러한 한에서 운동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정지가 운동과 결코 결합할 수 없다면, 정지는 이러한 능력을 갖출 수 없고, 정지는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될 것이며, 정지를 가리키는 이름과 정지 그 자체 사이에서도 아무런 결합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손님은 만일 운동 그 자체가 어떤 식으로 정지에 참여했었더라면, 운동을 정지한 것으로 부르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이러한 언급은 if + simple past, would + base verb, 즉 반사실적 가정문의 형태로 주어진다.(고전 그리스어 ei + imperfect indicative V., an + imperfect ind. V.의 형태이다.) 그리고 테아이테토스는 이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맞는 말씀이라 맞장구를 치고, 그 근거로 어떤 것들(혹은 어떤 경우)은 결합하는 경향이 있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내세운다. 운동과 정지는 서로 가장 반대되고 그 결합은 가장 불가능한 것이라 이야기되어 왔다. 그래서 이들 사이의 결합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라는 전제가 주어질 때, 손님의 표현이 반사실적 가정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더라도, 테아이테토스의 대답을 통해 그 반사실적 가정이 현실화될 여지를 찾을 수는 없는가? 운동과 정지의 전면적인 결합은 말 그대로 모순이다. 정지가 운동이라거나 운동이 곧 정지라고 할 사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지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을 술어로 갖는 한에서 그러한 것들에 참여하는 그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다. 운동은 운동 그 자체가 자기 자신과 같은 고유한 본성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그 점에서 그런 방식으로 또한 정지해 있을 수 있다. 문법적으로 이러한 독해를 이끌어낼 여지는 전무한가. 다른 한편 문맥을 고려하여 논증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운동과 정지 둘 사이의 결합 가능성이 배제될 수 있는가.

  운동과 정지가 각기 상호관계와 자기동일성 각각에 대해 전제된다면, 운동이 운동하는 경우와 운동이 정지하는 경우, 정지가 운동하는 경우와 정지가 정지해 있는 경우 사이의 구분이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즉 그 자체로 오직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루어지는 활동, 그런 사태를 지시하는 진술(말하자면 자기술어화)과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을 통한 서술의 구분은 결합을 통한 변화와 진술이 어떠한 종류의 무엇인지에 대한 일례가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존재를 하나로 보는 자들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 손님은 존재가 하나와 맺는 관계를 '부분들'과 '전체' 그리고 '겪음'이란 말들을 통해 설명한다. 존재는 부분들을 통해 하나를 겪어 전체가 하나가 된다. 이를 통해 '존재는 하나이다'라는 참인 진술을 얻을 수 있다. 하나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존재가 그 전체를 아울러 존재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지시될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여전히 하나이기도 하다. 만일 존재와 하나 사이의 관계가 존재와 운동, 같음과 정지 등 이후에 등장하는 '가장 거대한(아주 중요한) 유들' 사이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결합과 분리에 있어서 부분적 관계와 전체적 관계라는 구분을 얻을 수 있다. 동일한 결합이라는 활동은 그 적용 범위 혹은 그 수준에 따라 상이한 결과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진술(logos)이라는 유 그 자체는 자기 자신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그 여타의 것들이지 않다. 그것들이 아니라는 것은 곧 '~이지 않음/있지 않음(to me on)'과 결합한다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인 결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피스테스는 진술이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그것들이 결합하지 않고서는 거짓진술이 성립할 수 없고, 거짓진술을 지어내는 기술로서의 소피스테스 기술이라는 것도 말할 수 없다. 소피스테스가 거짓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거짓말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진술이라는 유가 to me on과 결합한 결과는 진술이 자기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이었지 그것이 거짓진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진술과 to me on 사이의 결합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자기 이외의 것들이지 않게 되기도 하고, 거짓진술이 되기도 한다. 같은 요소들로 같은 결합이 이루어졌는데 어째서 서로 다른 두 가지 결과들이 나오는가. 여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진술이 to me on과 결합하여 진술이 아니게 되는 경우도, 불가능한 경우로서 여전히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합의 층위, 수준은 차이를 보인다.

2. 프로타고라스 '신들에 관하여' 발제 준비. 인간은 만물에 대해, ~인 것들에 대해서는 ~이라고 하는, ~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이지 않다고 하는 척도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면 신에 대해서도 인간은 척도이지 않은가.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신들에 대해서는 ~인지도 ~이지 않은지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혹시 '만물'이 아니라 '만사'인가. 대화편 『프로타고라스』에서 정치와 정의, 염치를 논하는 프로타고라스는 인간들의 일, 즉 정치적인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서로 가르치고 또한 배운다고 말한다. 인간이 인간사에 대해 척도이다. 그렇다면 신들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다. '신화적 설명'에서 등장하는 신은 일종의 유비를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정의와 염치를 실제로 신이 준 것이 아니라, 인간 모두에게 빠짐없이 전제되어 있는 어떤 선천적 조건 혹은 능력에 대한 대강의 이해를 제공하기 위해 그런 직유를 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프로타고라스를 극단적인 상대주의자로 보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기가 어려운데, 어찌할까나. 뭐 욕심따라 갈 게 아니라 말이 되는 쪽으로 끌려 가야지. 헛바람을 조심하자.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회의주의자, 교조주의자, 상대주의자. 재미있는 삼각관계일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다시 정리해야 할 듯. 또 다른 과제는 『프로타고라스』에서 위대한 연설을 통해 추정 가능한 사회상, 그리고 그러한 사회상과 '인간척도설' 사이의 일관된 해석의 가능성. 아, '신들에 관하여' 발제 생각하다 보니 얼추 후자는 가닥이 잡힌 듯. 그런데 가닥이 잡혔다기 보다 그냥 윤철형님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_=? 뭐 배우는 입장이니 상관은 없을지도. 이걸로 논문 낼 것도 아니고.

3.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 장소 확보. 다음 주말에 분석철학 학회인지 뭔지 때문에 장소를 옮겨야 한다. 철학사상연구소 방 빌리면 되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는 교수님들 전용. 일단 메일 드려 보고,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걸로. 그런데 einai의 complete/incomplete 구분이 꽤 오랜 논쟁을 불러 일으킨 반면 gignesthai 관련해서는 왜 그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가. 무엇이 된다는 것과 무엇이 생긴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되는 것 아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순한 것들 사이의 생성과 복잡한 것들 사이의 생성, 단순한 생성을 구분하는 것 같은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이에 관련해 뭔가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지. 재밌는 건 많은데 쉬운 건 없고 뭐 그렇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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