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능, 돈, 노력. 셋 중 하나만이라도 갖춘 사람이라면 그가 철학을 하든 말든 난 관심 없다.
   각 조건은 다음과 같다.
   재능 : 어떤 식으로든 인정 받는 것. 학술지 등재든, 학계의 평판이든,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논증의 분석과 구성을 통해 객관적으로 입증되는 능력이겠다.
   돈 : 따로 매일 8시간 이상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도, 최소한 자기 자신, 좀 더 넓히자면 자신의 가족 생계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수준.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인간이 뭘 하든 간섭할 생각 없다. 한 세상 잘 놀다 가라.
   노력 : 정직함과 성실함, 논증적인 사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본 건 봤다고 하고 자기 생각은 자기 생각 그대로 표현하라. 모르는 걸 알기 위해 타인의 권위라든지 사회의 관습이라든지 어설픈 수사 따위의 지름길을 찾지 말고, 토씨 하나, 문장 한 줄이라도 이해가 안 되면 멈추어 서서 고민하라. 그걸 구성하고 분석하기 위해 마련된 학문의 역사로부터 도망가지 말라. 주장이라면 논거를 대고, 설명이라면 비약하지 말라.
  나머지는 보통 재능도 없고 부모 등골이나 빼먹는 거지새끼들이 노력도 없이 철학이란 이름만 붙은 거적데기를 뒤집어 쓰고서는 '철학'이 아니라 철학하는 '나'에 도취되어 지랄병 도져 발광을 해대게 마련인데, 가뜩이나 어려운 동네 쳐들어 와서 똥물 튀기지들 말고 꺼져 주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다.

2. Stanley Rosen 별세. 5월 5일이라고 뜨는데 아무튼 오늘 알게 되었다. 이렇든 저렇든 그의 저술이 내 논문 주제에 닿아 있는지라, 그러저러한 기분이랄지. 삼가 조의를 표한다. 매일, 매순간,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간다. 그 사실을 자꾸 잊어 버린다는 것도 참 기이한 일이다.

3. Peck은 왜 자꾸 쓰잘데기 없이 그리스어를 삽입해서 사람의 짜증을 돋구는가? 그냥 처음에 용어 정리하고 이후부터는 자기 번역어로 계속 서술하면 뭔가 큰 일이라도 나는가? 딱히 논증에 필요하지도 않은 원문이 자꾸 등장해서 번역해 옮기기만 힘들게 만든다. 작년에는 『소피스테스』 관련해서 서양고전학회에서 논문도 나왔고, 올해에는 서울대에서 그 대화편으로 강독이, 숭실대에서는 영역본 강독이 진행되는 듯하다. 어느 대중강연인가에서도 이 대화편에 대한 분석인지 정리인지가 과제로 주어진 듯하다. 김태경 번역, 이창우 번역 두 종류가 나와 있지만, 사실 잘 모르겠다. OCT 신판, 구판에 Bude판 등 판본도 여럿에 번역도 꽤나 많지만 실상 고전문헌학적으로 접근해서 문법 꼬치꼬치 캐물은 역서는 찾기가 어렵고, 우리말 '있다'와 '이다'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정리할 것인지에 대해 무슨 학술적 연구가 차곡차곡 쌓인 것 같지도 않고, 종류인지 형상인지 이게 후기인지 플라톤의 철학은 발전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통합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지 이러쿵저러쿵 문제는 많은데, 개인적으로는 한쪽으로 확 기운 극단적인 번역들이 여러 편 나온 뒤에야 그나마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은 표준번역이란 게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전에 플라톤 철학 전반에 대한 학설 같은 게 한국에도 좀 생겨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뭐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나는 『소피스테스』 한 귀퉁이 지엽말단만 붙들고 늘어져 학위만 받으면 그만이다. 아무래도 꼬락서니가 박사 가서도 이 대화편 붙들고 늘어지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서도, 여하간에. 학위 다 끝내고 학자 자격증(하하,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우스꽝스럽긴 한데.) 받고 나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그래도 티끌만큼은 유의미한 정리식의 논문이나마 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기대는 가져 본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도 단물이 다 빠지지 않는 대화편이니까.

4. 내일이면 어버이날이로구나. 뭐 후딱 석사 따고 나라 뜨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효도라면 효도일까나? 사실 딱히 남 좋으라고 하는 일도 아니니 면피는 안 되겠지만서도. 그나마 집돈이라도 안 축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지. 다음 주에는 스승의 날이 있구만. 기종석 선생님 이번 학기에 정년이신데 학부 애들이 뭐라도 하려나 모르겠다. 거기 대학원 다니는 후배한테 물어 보면 뭔가 얘기가 있겄지. 정암에서 얻어온 기념품용 양주나 가져다 까야 하겄다. 정암에서 이사님께 드리는 소소한 성의입니다, 뭐 이러면 되려나. 크크. 건대는 이제 고전어 강의도 없어졌고, 지시사 하나도 제대로 못 잡아낸다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시던 선생님께서 탁자 앞에 서서 안경 돌리시던 고대철학 강의도 또 다른 누군가의 강의로 바뀌겠구만. 나야 뭐 출가외인이지만서도. 한국 고대철학 1세대에 이어 2세대도 한 분, 두 분 자리에서 물러나시는데, 그간 뭐가 어떻게 쌓여 왔는지, 축적되기는 한 건지, 아직은 여전히 바닷물에 돌멩이 던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양놈과 왜놈에 기생하는 기생충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역시나 잘 모르겠다. 그래도 차곡차곡 번역들이 쌓이고 있다. 내 또래의 후속 세대 전공자들 수는 급감하고 있지만, 이 동네도 유행을 타는지 어느 때에 우르르 나왔다가 또 어느 때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하고, 뭐 그런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주워 들은 이야기인데, 일본에서는 유럽과 영미에서 서양고전학이 재고되기 시작하던 그 19세기에 자기네들도 고전문헌학을 같이 시작했으니 꿀릴 것 없다는 식의 정신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게들 생각하는지야 뭐 일본말을 안 배워 알아볼 수가 없지만(notomi 같은 양반은 종종 일본에 좋은 논문들 많은데 영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못 봐서 아쉽단 얘기도 하는 듯하더만, 역시나 잘은 모르겠고), 문제는 이런 주장도 맥락이 거세되어 있다는 거다. 유럽에서 고전학 흥할 때 배경은 낭만주의, 백과전서, 대륙관념론이 활개를 친 다음 혹은 그러던 와중을 거쳐 탈근대 담론까지 횡행하던 시기를 바탕에 깔고 있고, 해석학이니 구조주의니 뭐 많잖나? 영미권은 분석철학과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서 세계대전을 통한 유럽과의 교류 와중에 대두된 것이 고전학이라는 얘기도 있고(기억에는 아마도 휠록이 그런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반면에 일본은 그냥 시기만 겹칠 뿐 그런 배경은 없잖나. 뭐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나라에 비하면 날고 기는 동네이긴 하다만. 그러고 보니 저 대중강좌에 참고문헌으로 베나르데테(발음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모르겠다) 저술은 언급이 되는데 노토미 저술이 언급이 안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 말씀으로는 꽤나 잘 정리된 좋은 연구서라고들 하시던데, 뭐 읽어 본 바로는 딱히 흥미진진하진 않아서 역시나 잘 모르겠지만서도. 어차피 이거나 저거나 영어로 된 책들이니 후자를 추천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내가 듣는 수업도 아니고 뭐 상관 없겄지. 역시나 아쉬운 건 저 어려운 대화편에 대한 쓸 만한 국내 개론서가 없다는 것 아닐까? 길에서 나온『서양고대철학』1권에서는 3부 13장이 관련될 텐데, 최화 선생님은 좀, 음, 뭐 그냥 그렇다는 거다. 박홍규학파스러움이랄지 뭐랄지. 꽤 자주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나는 탈근대 담론이 징징거림이나 칭얼거림이고 이성에 대한 지나치게 섣부른 체념이라고 생각해 왔고, 최근에 그런 논의가 나오는 것도 같다. 누구더라, 독일에 그 M. Gabriel이었나 하는 형아(나랑 몇 살 차이 안 나더만) 책이 유행이라던데. 여하간, 역시나 주워들은 바로는 박홍규 선생님도 전쟁 경험이란 게 플라톤 해석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듯한데 그게 바람직한지 잘 모르겠다. 세계대전 겪고 대공황 겪고 이러저러해서 '아, 씨발, 세상 망했다' 이러면서 여태까지 우린 다 틀렸어, 글러먹었어, 이런 반응이 대강이나마 탈근대 담론에 적용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씨발, 한국전쟁 씨발씨발 하면서 죽음이니 절대무니 거창하게 이러저러한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것도, 학술적으로는 딱히 정당화되기 어려운 종류의 것 아니려나? 뭐 『쓰여지지 않은 철학』이었나 하는 책이 생각나기도 하고, 정말로 예술적이고 문학적인 어떤 무언가가 철학적으로 환원되거나 혹은 아예 무가치하거나 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지, 사실 이것도 유보적으로 생각할 문제이긴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대단한 문제들은 대단하신 님네들께 떠넘기고, 나는 자질구레한 짓거리들이나 하다 뒈지면 그만이지.

5. 10월 초까지 논문 완성해야 한다. 하자. 아무도 신경쓰지 않겠지만 내게는 반드시 딛고 넘어가야 할 한 걸음이다. 여전히, 정직하고 성실하게, 그것뿐이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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