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쪽] 플라톤의 『소피스테스』 259e4 이하에서, 우리는 다음 문장을 읽는다.
τελεωτάτη πάντων λόγων ἐστὶν ἀφάνισις τὸ διαλύειν ἕκαστον ἀπὸ πάντων·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을 해체한다는 것은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파괴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서로간의 엮임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몇 쪽 뒤, 263a2와 8에서, 우리는 진술들(λόγοι)의 이러한 사례들을 발견한다.
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
드러나는 난점은 λόγοι의 이러한 예시들이 앞서 인용된 문장의 두 번째 부분에서 이야기되는 바를 묘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I

나는 우선 이 문제를 다룬 최근의 네 가지 시도들을 언급할 것이다.

(1) 콘포드 교수는(Plato's Theory of Knowledge, 1935, 300쪽 이하.), 인용된 문장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서, 그리고 그에 대한 자신의 주석에서, 분명하게 그 문장을 모든 λόγοι의 내용을 기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모든 각각의 λόγος 안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만일 이것이 그러한 뜻이라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λόγοι의 두 예시들과 정합적이지 못하리란 점을 깨달았다. '테아이테토스'가 형상이라거나 혹은 형상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래서 오직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이 예시들에 관련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어떤 λόγος 안에든 그에 관련된 오직 단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있다면, 분명한 의미에서 어떠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도 저 λόγος 안에 있을 수 없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선행하는 논의 전체가 εἴδη 또는 콘포드가 플라톤적인 형상으로 간주하는('그 마지막 부분은 오로지 형상들의 세계만을 다룬다.' 302쪽.) γένη의 결합, 배합, 혼합 등에 관한 것이었을지라도, 즉, ἡ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라는 구절로 정확히 기술되는 주제에 관한 것이었을지라도, 콘포드는 우리에게 그 구절이 여기에서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주1. 그는 '"함께 엮임"은 "결합함" 혹은 "혼합함"과 동의어가 아니다. [47쪽] 그것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모든 진술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형상들이 모든 담화의 의미를 구성하는 유일한 요소들이란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개별적 사물들에 관하여서도 진술들을 구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진술 각각이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을 포함해야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라고 적고 있다.(300쪽.) 그래서 플라톤이 복수형태 εἰδῶν을 잘못 사용했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지만 조금 뒤 260d7에 대한 첨언 중 콘포드는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에게 그 곳에서 εἴδη가 전혀 플라톤적 형상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eidos는 모호한 단어이다. 때로는 "실체(entity)"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302쪽.) 플라톤이 기록한 것에 관한 그런 과격한 취급의 필요성은 콘포드가 인용된 문장을 두고 그것이 플라톤에 의해 모든 λόγοι의 내용에 대한 기술을 의도하게 되었다고 가정함에 있어서 잘못하였으리란 것을 시사한다.

(2) 데이비드 로쓰 경은(Plato's Theory of Ideas, 1951, 115쪽 이하.) 그 문장이 모든 λόγοι의 내용을 언급한다고 마찬가지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콘포드의 관점과 유사한 관점을 취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가능한 한 점잖게, 플라톤이 그의 복수형태 εἰδῶν 사용이 단수형태에 대한 '과장'이라는 점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로쓰는, '그는 말하는 이나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함께 엮임에 모든 진술이 의존한다는 명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이것은 사실상 과장인데, 한 문장은 주어로서의 고유명사, 그리고 형상이나 보편자를 나타내지 않는 고유명사를 가질지도 모르기 떄문이다. 하지만 문장의 술어는 통상 형상을 나타낸다.' 라고 말한다(115쪽). 그리고 116쪽에서 로쓰는 노골적으로, 플라톤이 취하는 예시, 즉 '테아이테토스는 난다'라는 진술이 모든 진술 각각은 형상들 상호의 엮임이라는 그의 주장을 묘사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아무런 설명도 발견할 수 없고 단지 정중한 언어로 쓰여 넣어진, 플라톤이 단순한 셈에 능하지 못하다거나 그가 그의 주장을 묘사하기 위한 예시들을 잘못 선택했다는 단언만을 발견하게 된다.

(3) 최근 J. L. 아크릴씨에 의해 Bulltetin of the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 of the University of London, 2 (1955), 31쪽 이하에서 또 다른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가 주목하는) 콘포드와 로쓰의, 263a에서 제시되는 λόγοι의 예시들(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진술들)이 그보다 앞선 문장에서 플라톤에 의해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그런 어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든 설명하거나 예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대한 실패를 고려하여, 아크릴씨는 저 문장이 '모든 진술 각각이 형상들의 관계를 단언하거나 그에 관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만 한다.'(32쪽) 라고 전제한다. 오히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은 어떤 것이든 모든 진술 각각에 의해 선제된다.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도 포함하여서 말이다.' (34쪽) 달리 말해서, 우리는 모든 진술 각각에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기대하지 않는다.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은 필요-전제조건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어떤 진술에서든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의존하는 전제조건이다. [48쪽] 아크릴씨는 그의 언급 중 부정적인 부분에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옳다. 그리고 플라톤이 διά라는 단어를 가지고 어떤 종류의 선제조건을 언급하려 한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아크릴씨는 그가 이러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필요-전제조건이 되는 그 가능성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할 때 설득력이 없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같은 그런 진술에 의해 선제되는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아크릴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진술은 오직 그것이 어떤 것("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테아이테토스는 서있다")을 배제시키기 때문에만 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이다. 그 진술이 어떤 것을 배제시킨다는 말은 두 개념들("앉음"과 "앉지-않음" 혹은 좀 더 확정적으로 "앉음"과 "서있음") 사이에 양립불가능성(μηδεμία κοινωνία)이 있다는 말이다.' (34쪽.) 즉, 아크릴씨의 관점에서, '앉아 있음'이라는 말은 오직 그것이 다른 어떤 말과 양립불가능하기 때문에만 유의미하고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의 일부를 구성할 수 있다. 또한 그 말은 그가 이것을 그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여긴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단락을 플라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끝맺는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아크릴씨의 과정은 이러한 것이다.
(i) 우선, 그는 플라톤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의역한다. '일부 개념들이 어울리리란 것은 유의미하고 비-자기모순적인 진술들(참이든 거짓이든)이 존재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ii) 다음으로, 그는 일부 개념들이 어울리지 않으리란 것이 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참이든 거짓이든)이 있기 위한 필요조건임을 보여준다.
(iii) 끝으로, 그는 플라톤의 문장을 문자 그대로 인용한다 (34쪽).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나는 아크릴씨가 (ii)를 전제로 제시하는 증명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걸 믿지만, 그것은 플라톤이 이 문장을 가지고 다루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플라톤은 여기에서, 아크릴씨가 '두 개념들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이라 부르는 것의 귀결에 관해서가 아니라, εἴδη 상호간의 함께 엮임의 결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더욱이, 만일 우리가 양립불가능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을 때(예를 들어 252d. 254d 참조) 그가 했어야 하는 말을 되돌아 본다면, 우리는 그 말이 유의미한 진술들이 아니라, '두 개념들 사이의 양립불가능성'으로부터 귀결되거나 그것이 시사하는,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그런 자기-모순적 진술들이었음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 나는 아크릴씨 자신이 그걸 믿는다고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그가 덧붙이기를(34쪽), '플라톤은 인정하건데 그 점[구체적으로 말해서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무엇이 되었든 모든 진술 각각에 의해 선제된다는 것]을, [49쪽] 다른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 사용되는 테아이테토스의 사례들과의 관련 속에서 주장하지 않는다.' 라고 하기 때문이다. 

(4) 더욱 더 최근 시도는 R. S. 블럭 박사의 시도이다.("False Statement in the Sophist", J. H. S. 77 (1957) 181쪽 이하.) 블럭 박사의 해석은 복잡한 것이고 상당수의 중요한 물음들을 야기시키며, 그 중 일부는 내가 이전 논문에서 다루고자 시도하였던 것들이다. 여기에서 나는 그의 접근 방식이 불가능하거나 불만족스러운 귀결들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몇 가지 지점들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이상의 일을 할 수 없다.

(i) 블럭 박사의 첫 걸음은 콘포드와 유사한데, 그가 259e에서 언급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 은, 방금 전 얼마 간의 시간 동안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를 붙들고 있던 그 주제인 형상들의 혼합이나 결합 따위(즉 우리로부터 독립적으로, 그것들 자체 사이에서 그것들의 관계들)와 동일시될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설령 그가 곧장 이어지는 문장에서 개탄된 그 '고립'이 251e-252c에서 고찰되었던 어떤 것들이든 γένη는 결합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야만 한다'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블럭 박사는 오로지 그 συμπλοκή에 관련하는 것만이 형상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콘포드와 다르다. 콘포드는 다른 '요소들' 또한 마찬가지로 허용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었다(위를 보라.). 우리는 그 첫 번째 정의가 블럭박사가 아크릴씨의 해석에 대항해 제기하는 비판에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을 이해하려는 방식에 대한 암시임을 발견한다. 그는 아크릴씨의 해석이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ν을 단순히 형상들의 세계의 복잡한 구조를, 그 존재하는 "망" 또는 "엮인 복잡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일을 포함하고, 예상할 수 있듯, 우리가 이야기할 때 형상들을 함께 엮는 그러한 방식들을 언급하는 것으로는 간주하지 일은 포함하지 않는다' 라는 근거에서 그 해석에 반대한다.(182쪽). '259e에서 손님의 언급이 우리가 구성하는 어떤 진술에서든 우리는 사실상, 맞든 틀리든, 형상들을 함께 엮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오직 그런 식으로만 담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간주하는 것이 최선일 것으로 보인다.' 라는 말도 마찬가지로 참조하라. 이 생각, 우리가 이야기할 때 형상들을 함께 엮을 수 있다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로쓰에게서도 나타난다. 위를 보라.), 물론 그것은 부조리하고, 그러므로 블럭 박사는 암묵적으로 우리가 함께 엮는 것이 형상들의 이름들, 혹은 형상들을 나타내는(혹은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풀어내는-unpack into-') 사물들과 개별자들(테아이테토스 같은)의 이름들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블럭 박사는 절대로 그가 이러한 대입을 구성하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지적하지 않지만, 그것은 그의 해설에 내재한다. 그가 의미하는 것이 '이런 것들이 그에 대한 이름인 그러한 형상들' 혹은 '그것의 표현형 개별자들에 대해 이런 것들이 그 이름들인 그러한 형상들'일 때, '관련된 형상들'이라는 구절을 그가 사용함으로써 가장하더라도 말이다. 이러한 대입은 해당 그리스어 문헌에 의해서는 그닥 정당화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플라톤이 담화를 가능케 하는 것이 [50쪽] 형상들의 이름들을 우리가 함께 엮는 것이라고 말하고자 바랐었더라면, 그가 그리 하는 걸 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으로, 블럭 박사에 따르면, 손님의 그 문장은 엮임이 행해지는 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우리에 의해 그리 행해진다는 뜻이며, 형상들 그 자체의 그 어떠한 결합도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블럭 박사는 또한 형상들 그 자체와 그것들의 결합들이 그 사태 안에 포함된다는 것도 믿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관련된 형상들은 만일 진술이 참일 것이라면 결합해야만 한다.' 그리고 '어떤 진술이든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반드시 형상들 사이의 특정 관계를 선제해야만 한다.' 블럭 박사가 사실상 손님의 언급을 형상들 자체의 결합에 관한 어떤 것을 긍정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다음을 통해 보여진다. '우리의 담화가 형상들의 함께 엮임을 통하여 발생한다는 진술과 만일 형상들 사이의 아무런 결합도 없다면 담화는 파괴되리라는 진술은 의미를 지니는 모든 각각의 문장이 정확하게(맞게) 관련된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여기에서 '형상들의 함께-엮임'이 그것들의 이름들에 대한 우리들의 함께 엮음을 의미한다고 추정한다. 하지만 '형상들 사이의 아무런 결합도 없다'라는 것은 오직 형상들 그 자체를 언급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블럭 박사의 관점에서 259e에서 손님이 두 가지 동시적 단언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a) 우리에게 담화를[이것은 분명히 '맞든 틀리든' 행해질 수 있다.] 가능케 해주는 것은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이름들에 대한 함께 엮음이라는 것, (b) 참인 진술에서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이름들에 대한 함께 엮음을 우리에게 가능케 해주는 것은 형상들 그 자체 사이에서의 실질적인 결합이라는 것. 만일 플라톤이 이러한 단언들을 둘 중 어느 쪽이든 혹은 양자를 동시에든 구성하길 바랐다면, 그가 259e에서 우리가 읽은 그런 문장을 택했으리란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ii) 블럭 박사는 (내 생각이 맞다면) 손님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그의 해명을 진행할 때 그는 형상들에 관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확실히 손님은 그 문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것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실상 우리가 λόγοι 안에서 함께 엮는 그 동사들과 명사들이 형상들을 나타낸다는 것을 시사조차 하지 않는다. 블럭 박사는 대화편의 이 부분에서 형상들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이유들을 든다. (1) 플라톤은 소피스트들(그의 현재 적수들)을 향해 그들이 동의하지 않을 그러한 이론을 통해 참과 거짓을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일이 부적절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볼 때 매우 적절한 고찰이다. 나는 내 이전 논문에서 μέγιστα γένη 논의 전반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과 더불어 [51쪽] 부적절성에 관한 이러한 지적을 구성하였었다. 이러한 이유가 타당한 것이라면, 또한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왜 그것은 대화편의 이 지점 이전까지 작동하지 않는가?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μέγιστα γένη 논증을 통해 '소피스트'와 씨름하고 있는 것으로 자신들을 표현하였다. 두 번째로 (2), 블럭 박사는 두 형상들이 결합한다는 사실이 참인 λόγος를 필연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가능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을 파악한다. 이것은 맞는 얘기다. 해당 대화편에서 논증의 진행 과정을 보여주는 와중에, 우리는 운동이라는 형상과 존재라는 형상(οὐσία에 대한 블럭 박사의 번역어)이 결합하지 않는 한 참되게 '운동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말할 의무는 없다. 우리는 '운동이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고 말할 수 있다. 특정 형상들이 결합하리라거나 결합한다는 그 사실이 우리가 거짓 λόγος 논의를 진행할 때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블럭 박사가 말하는대로, 우리는 형상들[의 이름들]을 '부정확하게(잘못)' 함께 엮을 수 있다. 그리고 형상들 그 자체가 완전히 잘 결합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왜 그것들[의 이름들]을 부정확하게 결합하는지에 관해 아무런 방향도 제시해주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블럭 박사의 이유들 중 어느 쪽에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왜 형상들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손님의 해명에 작용하지 않아야 하는지 놀랍도록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 이유들은 그 이유들이 야기하는 물음에 답하는 데에는 완전히 무효하다. 왜 손님은 259e에서 우리가 구성하는 모든 진술 각각에서 우리가 형상들을 함께 엮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내는 수고를 감수하는가? 이 일이 거짓 λόγος에 대한 그의 해명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지 않았을 한에서, 그는 그 점을 지적하느라 자신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 그리고 우리를 잘못 이끄는 것 - 아닌가? 만일 블럭 박사가 옳다면, '우리에 의한 형상들의 함께 엮임'이라는 이 개념은 259e에서 갑작스럽게 극적으로 등장했다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고 극적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선행하는 것이나 이어지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고, 완전히 고립되고 맹목적인 것이 된다.

(iii) 만일 블럭 박사가 '함께-엮임'의 구성요소를 그 때까지 손님에 의해 고찰된 유형의 형상들에(예를 들어 'Κίνησις ἔστιν'이라는 λόγος 안에서 운동이라는 형상과 존재라는 형상의 함께 엮임) 한정했었다면, 나는 그가 꽤나 강력한 사례를, 비록 그 문맥이 여전히 그에게 결정적으로 반대되었을지라도 (57쪽 이하, 아래를 보라), 구성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그 요소들을 이런 유형의 형상들에 한정하지 않는다. 그가 말하기로, 손님의 문장은 '반드시 우리가 어떻게든 이런 유형의 둘 혹은 그 이상의 형상들에 관련된다는 가정 하에서 해석되어야만 한다. 특수한 개별적 인격들 혹은 사물들에 관한 진술들을 다룰 때에라도,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같은 진술을 다룰 때에라도 말이다.'(182쪽). 이 지점에서 블럭 박사는 그의 선행 연구자들이 직면했던 것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와 같은 λόγος에서, 물론 많이 쳐줘도 단 하나의 형상이 있거나, 오직 하나의 형상이 표현되고, 우리는 συμπλοκή를 구성하기 위해 적어도 두 형상들이 필요하다. [52쪽] '앉아 있음'은 아마도 형상으로서 통과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테아이테토스'는 형상이 아니고 형상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여기에서 블럭 박사는, D. W. 햄린씨에 의해 또 다른 관계에서 구성된 제안을 적용하여, 강한 입장을 취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우리가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가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인간이라는 형상을 앉아 있음이라는 형상과 함께 엮고 있다. …… "테아이테토스"는 그가 참여하는 모든 형상들의 목록으로 "풀리는 것(분석되는 것)"으로서 간주될지도 모른다. (182쪽). 이것은 콘포드, 로쓰, 그리고 아크릴이 고려하지 않았던 해법이다. 그들은 '테아이테토스'가 형상이 아니며 형상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난점을 해결할 어떠한 방법도 볼 수 없었다. 이 난점을 에둘러 감으로써, 블럭 박사는 이제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라는 λόγος에서 우리가 형상들의 συμπλοκή를(즉 형상들의 진정한 συμπλοκή에 대한 언어 표현을) 가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블럭 박사가 우리에게 제시한 이러한 짝으로 이루어진 συμπλοκή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첫 번째로, '테아이테토스'가 인간이라는 형상을 나타낸다는 주장은 우리에게 절망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우리는 아마도 만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면 그것을 받아들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다. '인간'이든 '앉음'이든 어떠한 형상들도 손님에 의해 언급되거나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여전히, 이것이 그 자체로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않을 터인데, 254c에서 손님이 논의의 간결함을 위해서 엄청난 수의 가용한 것들 중에서 특정 εἴδη를 선택하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앉음이 그 선택된 εἴδη에 관하여 증명되는 것에 의해 포괄된다고 주장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손님이 제시하였던 증명과정 중의 어떤 것에 의해서도 유비되지 않는다. 증명된 경우들은 전체를 전부 다 매우 규정된 방식이고, 이는 우리가 그것들을 나열한다면 분명해질 것이다.
  정지는 τὸ ὄν, θάτερον, 그리고 ταὐτόν과 결합한다(~에 참여한다, 기타 등등).
  운동은 같지 않다.
  모든 것이 θάτερον에, 그리고 ταὐτόν에 참여한다.
  
(이제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된) Θάτερον은 τὸ ὄν에 참여한다.
  Τὸ ὄν은 θάτερον (τὸ μὴ ὄν) 에 참여한다.
  요약 : Τὸ ὄν과 Θάτερον이 모든 γένη를 '관통하며' 서로를 관통한다.
혼합, 참여, 기타 등등의 이와 같은 경우들에 비교해 볼 때,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이례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최소한도 그 방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혹은 앉음)과 Τὸ ὄν, Θάτερον, 혹은 ταὐτόν의 συμπλοκή가 있었다는 것을 듣고 놀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과 앉음의 συμπλοκή는 증명된 경우들의 노선에서 두드러지게 벗어나는 것이다. 만일 손님이 259e에서 언급하면서 그때까지 언급되지 않은 구성에 속하는 συμπλοκή 혹은 그 경우들을 도입하고자 의도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가 우리에게 그의 의도에 대한 어떤 암시라도 줄 것을, 혹은 만일 이 곳이 아니라면 조금 나중의 지점에서 이 두 형상들을 호명할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그가 곧장 260a-b에서 계속해서 그가 논의해왔던 것과 같은 방식의 구성에 속하는 συμπλοκή를
, 즉 일부 εἶδος와 τὸ ὄν의 συμπλοκή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릴 때, 그가 259e에서 또 다른 구조의 συμπλοκή를 의미한다는 우리의 의구심은 믿지 못할 것으로 탈바꿈한다. 그가 염두에 둔 특수한 συμπλοκή는 λόγος와 τὸ ὄν의 경우이다. λόγος는 그가 εἶδος로도 γένος로도 기술하는 것이고(아래 56쪽을 보라.), 이것은 문맥을 고려하여 해당 구절을 읽는 누구에게든 명백하다. 인간과 앉음이라는 형상들의 도입은 기이할 뿐만 아니라 과잉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찰된 해법들 중 어떤 것도 만족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들이 해결하고자 의도한 난점이 완전히 허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난점은 단지 [54쪽] 플라톤이 말한 바에 대한 오독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오독의 주요 원인은, 내 생각에,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의 용법에 불일치하거나 혹은 적절한 설명을 구하는 데에 실패한, 그러한 εἶδος의 의미에 관한 선입견이다.
  네 가지 해석들 모두에서 우리는 유사한 사고과정을 발견한다. 우선, 259e에서 εἰδῶν을 통해 플라톤은 '형상들'(콘포드, 블럭). '형상들', 혹은 '보편자들', 혹은 '형상들을 가지고 기술되는 것들'(로쓰), '형상들', 혹은 '개념들', 혹은 '일반명사들의 의미들'(아크릴)을 의미한다는 것이 가정된다.
  두 번째로,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에 관한 그 문장은 우리에게 모든 각각의 λόγος의 내용에 관하여 어떤 것을 말해준다는 것이 가정된다. (a) 그 문장이 모든 각각의 λόγος는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포함하거나 표현한다는 것을 선언한다거나(콘포드, 로쓰, 블럭), 혹은 (b) 그것이 한 λόγος 내에서 어떠한 용어든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기 이전에 충족되어야만 하는 조건을 진술한다는 것(아크릴)이 가정된다.
  세 번째로, 그 문장이 따라서 λόγοι의 내용과 관련되기 때문에,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λόγοι의 예시들은 어떤 식으론가 앞서 λόγος의 본성에 관하여 제시된 것으로 주장된 기술 혹은 정보를 묘사하거나 적어도 그것과 화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주장된다.
  우리가 보았듯, 두 번째 전제에 관련해서 콘포드와 로쓰는 두 번째 가정과 관련하여서 견본 λόγοι가 어쨌든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을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실패하는데, 각각에서 오직 하나의 εἶδος만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블럭 박사는 매우 의문스러운 두 번째 εἶδος를 συμπλοκή를 구성하기 위해 도입한다. 그리고 아크릴씨는 한 용어가 λόγος 내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기에 앞서서 요구되는 것이 그것의 다른 것들 혹은 또 다른 것과의 συμπλοκή가 아니라, 그것의 다른 것들 혹은 다른 것과의 양립불가능성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들 중 어떤 것도 핵심 구절인 ἡ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ή에 대해 합당하지 않다. 플라톤이 실제로 말하는 바에 대한 고찰은 그의 말 속에 방금 언급된 두 가지 가정들을 위한 아무런 보장도 전혀 없음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서 세 번째 주제 하에 표현된 의무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II

그럼 플라톤은 εἴδη라는 명칭을 『소피스테스』의 이 논의에서 무엇에 적용시키는가? 나는 내가 언급했던 학자들에 의해 구성된 가정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대화편 자체 내에서 알아낼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여기에서 εἴδη라고 부르는 것의 상태에 관하여 어떠한 가정도 구성하지 않기 위해, 나는 그것들을 비결정적인 단어 '인자들'로 언급할 것이다.
  [55쪽] 관련된 그 인자들에 뭐가 되었든 어떤 명칭이 부여되기에 앞서 양립가능성과 상호 적용가능성이라는 주제에 관한 논의가 해당 대화편에서 주목할 만한 분량을 차지한다. 상호 적용가능성의 문제는 앞서 237에서 야기된다. 그리고 이후 그것은 특정 인자들이 '혼합'할 것인지, 상호적으로 '참여'할 것인지 기타 등등에 대한 물음을 통해 정식화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진술들이 허용될 수 있는 진술들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 τὸ μὴ ὂν ἔστι, τὸ ὂν οὐκ ἔστιν, 이러한 등지의 것들 말이다. (이 논의의 특별한 의도는 물론 τὸ μὴ ὄν이 다른 인자들과 양립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τό τε μὴ ὂν ὡς ἔστι κατά τι, καὶ τὸ ὂν πάλιν ὡς οὐκ ἔστι πῃ (~이지 않음이 어떤 것에 따라서는 ~이라고도, 또 되돌려 ~임이 어떤 식으로 ~이지 않다고도. 241d6)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 작업의 성공은 결국 258-259에서 선언된다. τὸ ὄν과 τὸ μὴ ὄν은 양립가능하다. 그것들은 상호적으로 '참여한다'.) 따라서 이러한 인자들이 무엇인지는, 손님이 그것들을 γένη와 εἴδη라고 부르기 시작하기 전부터조차,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들은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관한 논의에서 나타나는 인자들이다.
  여러가지 동사들과 명사들이 이러한 양립가능성과 그것의 표현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된다.
(1) 한 가지는 συμπλοκή이다. 그것은 앞서 240c1에서 등장한다. κινδυνεύει τοιαύτην τινὰ πεπλέχθαι συμπλοκὴν τὸ μὴ ὂν τῷ ὄντι. (이런 무슨 엮임에서 ~이지 않음이 ~임과 얽히는 것 같다. 그 문맥은 εἴδωλον-상, image-에 관한 논의이다. 그것은 ἀληθινόν-참된 것-이 아니고, 그러므로 ὄντως ὄν-~임다운 ~임-이 아니지만, ἔστι γε μήν πως-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실로 ~이긴 한 것이다.- 그것은 εἰκὼν ὄντως-~인 것답게 모상이다. Οὐκ ὂν ἄρα ὄντως ἐστὶν ὄντως ἣν λέγομεν εἰκόνα-그래서 ~임답게 ~이지 않음이 ~임답게 우리가 말하던 모상이다-.)
(2) 또 다른 것은 προσάπτειν이다. 241b1에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게 된다. τῷ γὰρ μὴ ὄντι τὸ ὂν προσάπτειν ἡμᾶς πολλάκις ἀναγκάζεσθαι-왜냐하면 ~이지 않음에 ~임을 적용하도록 자주 우리가 강제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λόγος ψευδής-거짓 진술-는 λόγος τά τι ὄντα λέγων μὴ εἶναι καὶ τὰ μὴ ὄντα εἶναι-어떤 점에서 ~인 것들이 ~이지 않다고 그리고 ~이지 않은 것들이 ~이라고 진술하는 그런 진술이다-. 그리고 '소피스테스'는 그러한 προσάπτειν-적용-을 금지한다.)
(3) 또 다른 것은 κοινωνία이다. 250b9에서 우리는 다음 구절을 읽는다. ἀπιδὼν αὐτῶν [στάσεως καὶ κινήσεως] πρὸς τὴν τῆς οὐσίας κοινωνίαν-그것들[정지와 운동]의 ~임과의 공유에 비추어 보면서-.
(4) 251d의 구절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용어들의 예시들을 포함한다. προσάπτειν, ἄμεικτος, μεταλαμβάνειν, ἐπικοινωνεῖν.-적용, 섞이지 않음, 나누어 잡음(c.f. metechein), 마주-함께 가짐-. πότερον μήτε τὴν οὐσίαν κινήσει καὶ στάσει προσάπτωμεν … ἀλλ᾿ ὡς ἄμεικτα ὄντα καὶ ἀδύνατον μεταλαμβάνειν ἀλλήλων … τιθῶμεν; ἢ πάντα εἰς ταὐτὸν συναγάγωμεν ὡς δυνατὰ ἐπικοινωνεῖν ἀλλήλοις; -우리가 ~임을 운동에도 정지에도 적용시키지 않고 … 오히려 섞이지 않는 것들이자 서로 나누어 잡지 못하는 것이라고 … 정할까? 아니면 모든 것들을 같은 것으로 끌어모아 서로 마주-함께 가질 수 있는 것들이라고[정할까]?
이러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용어들(μετέχειν과 σύμμειξις 등),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기술들은 그 주제에 관한 논의 내내 사용된다. 그리고 그러한 양립가능성과 양립불가능성에 관련되는 인자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의심의 가능성도 피하기 위해, 나는 다음의 목록에서 오직 γένος나 εἶδος라는 명칭들이 해당 대화편 내에서 명백하게 적용되는 그러한 인자들만을 포함시켰다. 따라서 나는 253b8, γένη라는 호칭이 [56쪽] κίνησις, στάσις, οὐσία라는, 선행하는 문맥 내에서의 주로 논의되었던 세 가지 인자들에 처음으로 적용된 행보다 더 앞서는 어떠한 언급도 그 목록 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추가적으로, 가능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나는 여기에서 다음 사항을 언급해야 한다. (a) 252s7에서 εἴδη에 대한 언급 (ὅσοι κατ᾿ εἴδη τὰ ὄντα κατὰ ταὐτὰ ὡσαύτως ἔχοντα εἶναί φασιν ἀεί - 형상들에 따라 ~인 것들은 같은 것들에 대해 마찬가지 상태인 것들이라고 언제나 말한다 - ) 은 포함되지 않는데 그것은 명백히 형상들의 친구들이 믿는 νοητὰ ἄττα καὶ ἀσώματα εἴδη(사유대상이자 비물체적인 어떤 형상들)이고, 양립가능성에 대한 논의에 관련된 인자들에 대한 언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b) 257d 이하의 구절
, τὸ καλόν, τὸ μὴ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μὴ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 τὸ μὴ δίκαιον 등이 언급되는 그 구절은 아마도 그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 것인데, 257e9 이하에서 τὸ καλόν과 τὸ μὴ καλόν이 τὰ ὄντα 중의 하나로 헤아려지기 때문이다.(258a7 이하 참조) 달리 말해서 나는 다음의 목록을 생각한다. 비록 그 언급들의 빠짐없는 목록표를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253b8 이래로 εἶδος나 γένος라고 불린 모든 인자 각각에 대한 언급을 포함시킨다.
(1) 254d4 τὸ ὄν, στάσις, κίνησις가 γένη라고 불린다. 그것들은 255c5에서 εἴδη라 불린다.
(2) 255c5 τὸ ταὐτόν이 네 번째 εἶδος로 기술된다.
(3) 255b 12-255d4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가 εἴδη로서 언급된다.
(4) 255d8 ἡ τοῦ θατέρου φύσις가 εἴδη 중에 포함된다.
(5) 258c2 τὸ μὴ ὄν이 반드시 하나의 εἶδος로서 πολλὰ ὄντα에 셈해 넣어져야 한다.
(6) 260a5 λόγος: πρὸς τὸ τὸν λόγον ἡμῖν τῶν ὄντων ἕν τι γενῶν εἶναι.-우리에게 진술이 ~인 유들 중 하나의 무언가이다라는 점에 대해서.
(7) 260d5 이하. λόγος와 δόξα. 소피스테스는 τὰ εἴδη 중 일부가 τὸ μὴ ὄν에 참여한다는 것에 동의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들 중 일부는 그렇지 않다고, 그리고 λόγος와 δόξα는 그리하지 않는 그러한 것들에 속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λόγος와 δόξα의 본성을 탐구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것들의 τὸ μὴ ὄν과의 공유를 알아볼 수 있게끔.
(8) 263d7 만일 B사본과 T사본의 독해가 적용된다면, διάνοια, δόξα, φαντασία가 γένη라 불린다.
나는 여기에서 이 목록에서 손님이 γένος 혹은 εἶδος라는 명칭을 적용하는 그 항목들 모두가 플라톤적인 형상들인지 하는 물음에 대해 아무런 의견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다른 곳에서 내가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의 의도 중 일부는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ὸ ὄν, ταὐτόν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의도에 맞게 요청되는 것은 전부, 『소피스테스』에서 이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에 εἶδος와 γένος라는 명칭들이 실제로 적용되는 그 인자들이 무엇인지 주목하는 것, 그리고 특히 λόγος가 
εἴδη 중 하나로 기술된다는 데에 주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논의에서 εἴδη와 γένη로 플라톤이 의미하는 바가 플라톤적 형상들이라는 그 믿음은, 259e5에서의 그 문장을, 손님이 명백히 λόγος를 εἶδος로 그리고 γένος로 기술한다는 사실을 간과함으로써, 오독하도록 이끌었던 한에서 관련이 있다.

III

우리는 이제 259e5에서의 그 문장,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이라는 문장의 의미를 고찰하는 일을 진행할 것이다. 그 문맥은 무엇인가? 여기에서의 사유 경로는 259d로부터 이어진다.
  손님은 결국 다른 것이 같다거나 같은 것이 다르다고 어떤 구체적이지 못한(불특정한) 방식으로 단언하는 자들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정확히 어떤 측면에서 그것들이 그러한지 말하게 되어야만 한다. 더 나아가, 그가 덧붙이기로, 모든 것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비-철학적 인간의 표지이다. 그러한 분리는 실제로 모든 λόγοι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한다.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그래서 그의 말로는 우리가 우리의 적들에게 한 εἶδος를 또 다른 것과 혼합시킨다는 것을 허용하도록 강제했던 것이 - 특히 이 점에 관해서, 이제 우리가 λόγος를 τὰ ὄντα γένη 중의 하나인 것으로서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 얼마나 적기에 이루어진 것인지 보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λόγος를 박탈당했더라면, 우리는 철학을 박탈당해야 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제 즉시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에 당도하는 일을 계속해야만 한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바로 그것의 존재를 박탈당했다면(αὐτὸ μηδ᾿ εἶναι τὸ παράπαν),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λέγειν할 수 없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박탈당했어야 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무것도 다른 아무것과도 전혀 혼합함이 없다고 인정했었더라면 말이다.
  이 이야기의 요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소피스테스'에게 어떤 식으로든 어떤 συμπλοκὴ τῶν εἰδῶν을 인정하도록 강제했다. 이 συμπλοκή는 οὐσία(혹은 τὸ ὄν)의 여타 εἴδη 혹은 γένη와의 
συμπλοκὴ를 포함한다(259a5). 따라서 λόγος와 οὐσία의 συμπλοκή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λόγος와 같은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적들에게 뭐가 되었든 아무런 μεῖξις도 발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인정해 주었다면, λόγος와 οὐσία의 아무런 μεῖξις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λόγος 같은 그런 것도 전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다행히도, 우리는 [58쪽] λόγος가 τὰ ὄντα γένη 중 하나라고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260a5). κίνησις와 στάσις처럼, 그것이 οὐσία와 서로 교통하지 않는 한 그 둘 중 무엇도 있을 수 없듯(252a2. 254d10, 256a1 참조), λόγος도 마찬가지로 οὐσία와 혼합하고 결합하는 등의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259e5에서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이라는 문장은 다음을 뜻한다. 우리는 εἴδη 서로 간의 일부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였다. 특히, 우리는 τὸ ὄν(οὐσία)이 다른 모든 εἴδη와 결합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것은 εἴδη 중 하나인 λόγος와의 결합을 포함한다. 따라서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 그 문장은 우리에게 λόγος의 내재적 특성에 관하여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이제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는 걸 보장받을 수 있다는 점만을 지적한다. 그 문장은 우리에게 한 용어가 한 λόγος 안에서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필연적인 선제조건들이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그 문장이 어떤 식으로든 λόγος의 정의인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떤 종류든 정의로 혼동하는 것은 기초적인 오류인데, 손님이 곧장 계속해서 그들이 λόγος 같은 것이 있다는 걸 보장받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왜냐하면 그들의 다음 작업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어서 말하기 때문이다.(διομολογήσασθαι τί ποτ᾿ ἐστίν, 260a7). 그리고 그들은 이 일을 즉시 진행한다. 이 언급은 손님 입장에서 만일 그가 λόγος의 정의와 유사한 어떤 것이든 언명했던 것이었다면 부조리할 것이다. 그리고 손님과 테아이테토스가 λόγος가 무엇인지 탐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소피스테스'는 τὸ μὴ ὄν이 οὐσία(τὸ ὄν)에 참여한다는 것(260d5)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강제받았다. 하지만 그는 아마도 여전히 모든 εἴδη가 τὸ μὴ ὄν에 참여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할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어떤 형상들은 그렇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고, λόγος와 δόξα는 그리 하지 않는 것들 중에 속한다고 말할 것이다. λόγος의 정의는 λόγος가 τὸ ὄν만큼이나 τὸ μὴ ὄν과도 '혼합'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과로 λέγειν τὰ μὴ ὄντα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즉 ψεῦδος, ψευδὴς λόγος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에게 입증하기 위한 그들의 시도에서 필연적인 단계일 것이다. 그 논증의 남은 부분은 내가 다른 곳에서 상술하였고, 그 설명을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 구절이 진행되는 과정(260b10에서 261c8까지)이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기에 앞서 곧장, 손님이 지금 제기된 문제가 λόγος와 τὸ μὴ ὄν 사이에 그리고 δόξα와 τὸ μὴ ὄν 사이에 어떤 결합이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예를 들어 260b10 이하, 260d7, 260e2 이하, 261c7을 보라)라고 거듭하여 진술한다는 것은 덧붙일 만하다. 덧붙여,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감당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자마자, 관련된 그 인자들은 [59쪽] 더 이상 εἴδη(or γένη)가 아니라, ὀνόματα(명사들)이다. 이 점은 손님에 의해 261d1에서 꽤나 분명해진다. 그는 앞서 그들이 εἴδη의 함께 어울림을 (그리고 γράμματα의 어울림 또한, 그것은 253a1 이하에서 εἴδη에 대한 유비로 간주되었다) 논의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낸다. 이제 그들은 계속해서 ὀνόματα의 함께 어울림을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γράμματα가 모두 함께하지는 않을 것이고, 음들도, εἴδη도 그러할 바로 그와 같이, 그렇게 이제 그들은 ὀνοματα도 모두 함께하지는(συναρμόττειν, 261d5) 않을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ὀνόματα의 결합은 εἴδη의 결합과는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이 점은 만일 우리가 다음 세 가지 상황들을 고려한다면 매우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1) 두 종류의 ὀνόματα가 구별된다. 고유 ὀνόματα (즉 인명들을 포함하는 명사들), 그리고 ῥήματα (즉 동사들).
(2) 전형적으로 불가능한 결합은 이제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가 아니라, 명사들의 나열 혹은 동사들의 나열이다 (예를 들어 βαδίζει τρέχει καθεύδει, 262b). 오직 우리가 명사와 동사를 지닐 때에만 우리는 λόγος를 산출해내는 그러한 가능한 결합을 얻게 된다 (더욱이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라는 것은 이제, 비록 거짓 λόγος이더라도, λόγος를 만들어내는 가능한 결합일 것이다). 오직 그렇게만 '함께 어울림'과 συμπλοκή - 명사와 동사의 συμπλοκή (262c) 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화편의 더 앞선 부분,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가 가능한 결합에서 제외되었던 그 논의에서의 것과는 꽤나 다른 종류의 συμπλοκή이다.
(3) 선행하는 논의에서, 만일 한 결합이 아무튼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유효한 반면, 현재 논의에서 명사와 동사의 어떤 결합이든 가능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혹은 심지어 
한 번이라도 참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는 소님에 의해 이야기되었을 때 참이지만, 언제나 참일 필요는 없고, 언제나 참이었던 것도 아니다.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는 결코 참이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참이 아닐 것이다).
  [60쪽] 나는 이 논의에서 우리가 앞선 συμπλοκή, συμπλοκή τῶν εἰδῶν이었던 그것과는 매우 다른 유형의 συμπλοκή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차이점들을 언급한다. 우리는 또한 '플라톤이 명백히 형상들에 관여하려 의도한다(314쪽)'라는 콘포드의 믿음, 그리고 그것들을 끌어 들이려 시도하는 그의 노력(313쪽, 317쪽)이 논의의 이 부분과 전적으로 불일치한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거짓 λόγος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해법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하고 그것을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317쪽.)
  요약하자면, 259e에서 그 문장은 어떤 식으로도 λόγος의 구성에 대한 정의나 묘사, 혹은 λόγος에서 사용될 어떤 중요한 구성 요소든 그것의 산출을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들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대화편의 앞선 이야기에서 모든 εἴδη에 대해 확립된 원칙을 특수한 경우(즉 λόγος)에 적용시킨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263a에서 제시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λόγοι의 내용들이 어떻게 저 문장과 정합적인지 보여줄 아무런 의무도 없다. 더구나 대화편에서 주어지는 λόγος의 정의, 즉 264d4에서 손님에 의해 주어진 정의가 있고, συμπλοκή라는 용어는 그 안에서 ㅏ타난다. συμπλέκων τὰ ῥήματα τοῖς ὀνόμασιν: '우리는 그러한 πλέγμα를 λόγος라 부른다' (그리고 262c5 ἡ πρώτη συμπλοκή를 참조하라). 하지만 이것은 εἴδη 상호의 συμπλοκή가 아니다. 그것은 동사의 명사와의 συμπλοκή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에 대하여 263a2 이하에서 제시된 
예시들은(Θεαίτητος κάθηται, Θεαίτητος πέτεται) 훌륭한 기술들이다.

IV

대화편 내에서 논증의 단계들에 대한 이하의 개괄은 이 논문에서 다루는 문제가 그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첨부된다. 그 개괄은 이러한 의도에 충분한 것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논증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위해 나는 독자제위께 이미 언급한 내 이전 논문을 언급해야만 한다.
  문제에 대한 진술. 그 문제는 236e1 이하에서 처음으로 명백하게 진술된다. ψευδῆ λέγειν이 어떻게 가능한가? ψευδῆ λέγειν은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εἶναι하는 것이다. 그것은 241a1에서 재진술된다. ψευδὴς λόγος는 λέγει τὰ μὴ ὄντα εἶναι이다. '소피스테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인데, 그것이 τὸ ὄν을 τὸ μὴ ὄν에 '적용시킴'(προσάπτειν, 241b1)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는 τὸ ὄν을 [61쪽] τὸ μὴ ὄν에 '적용'하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규준을 위반하는 것이(241d5 이하), τὸ μὴ ὄν이 어떤 식으로는 ἔστι(상동)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즉 일부 논쟁자들에 반대하여, 그러한 '적용들'이나 '결합들'이 허용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 적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251d5 이하)
(1) 1단계. γένη(혹은 εἴδη)의 일부 상호 결합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립시킨다(251e-252e). 그렇게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 것들 중에 모든 εἴδη들의 οὐσία와의 결합들이 속한다 (256d, e, 일반적 승인은 259a, b). 이는 다음을 포함한다.
(a) τὸ μὴ ὄν의 οὐσία와의 결합(257a). 
  이것의 결과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i) τὸ ὂν οὐκ ἔστιν. εἴδη의 모든 개별 사례에서만큼, 그렇게 많은 ὄν이 τὸ ὄν에 관하여 있고, 무한한 μὴ ὄν이 그것에 관하여 있다(256e5). τὸ ὄν이 그 자체로 ~이지만, 셀수 없이 여러 가지 다른 것들'이지 않다'.(257a)
  (ii) τὸ μὴ ὂν ἔστιν (256d, 최종 승인은 258b). 즉 τὸ μὴ ὄν과 같은 그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언가와 다른 것이다(257b, c). 더 보충하자면, 그것은 x인 것과 다른 것이다(257d 이하).
(b) λόγος의 οὐσία와의 결합.
  그 결과. λόγος ἔστιν(259e-260a). 즉 λόγος와 같은 그런 것이 있다. 하지만 λόγος 또한 τὸ μὴ ὄν과 결합하는가? 우리는 τὸ μὴ ὄν이 모든 ὄντα 전반에 '퍼져 있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보여주었다(260b).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것이 특별히 λόγος와 δόξα에 적용됨을 보여주어야 하고(260b-e), 달리 말해 우리는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λόγος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먼저 λόγος가 무엇인지 탐구해야만 한다.
(2) 2단계. λόγος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
  그 결과: λόγος는 명사와 동사의 결합이다.(261d-262e)
(3) 3단계. λόγος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주어)에 관하여 무언가(동사)를 말한다. λέγει τι περί τινος(262e-263a)
(4) 4단계. 우리는 각 εἶδος에 관하여 많은 ὄν이 있고, 엄청난 수의 μὴ ὄν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256e. 위의 (1) (a) (i)을 보라.). 유사하게,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여러 ὄντα와 여러 μὴ ὄντα가 있다(263b11 이하). 그러므로 λόγος는 λέγειν τὰ ὄντα περί τινος가 가능하고, λέγειν τὰ μὴ ὄντα περί τινος도 가능하다(ἕτερα τῶν ὄντων περί τινος, 263b11). 그러므로 소피스테스의 주장,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거짓 단언)은 μὴ ὄν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러므로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은 아무것도 단언하지 않는다는 뜻이라는 주장은 반박되었다. τὸ μὴ ὄν이 불완전한 구인 것으로 보여졌던 것처럼 - 그것은 τὸ μὴ ὄν-X, 즉 θάτερον τοῦ ὄντος-X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1) (a) (ii)를 보라)- 그렇게 λόγος도 마찬가지이다.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은 불완전한 구이다. 그것은 λέγειν τὸ μὴ ὄν περί τινος, 즉 λέγειν ἕτερα τῶν ὄντων περί τινος로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ἕτερα는 ὄντα 만큼 많이 있다. [62쪽] λέγει τὸ μὴ ὄν하는 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게 아니라, ἕτερα를 말하고 있으며, ἕτερα(입증되었던 것으로서)도 또한 ὄντα이다.
  259e4 이하에서의 말은 1단계 (b)에 속한다는 것, 그리고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두 가지 λόγοι들은 3, 4단계에 속한다는 것을 위의 개괄로부터 알 수 있다.

V

이 논문의 본래 목적은 처음에 진술된 그 난점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을 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충분히 평가받지 못한 중요한 지점이 포함된다는 것, 손님이 εἶδος라는 명칭을 주석가들에 의해 주로 인정되는 다섯 가지 μέγιστα γένη, 즉 정지, 운동, τὸ ὄν(254d), ταὐτόν(255c에서 추가되는), Θάτερον(255d에서 추가되고 257b에서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되는. 258c 참조보다 더 많은 인자들에 적용시킨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렇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다른 한편, 우리가 보았듯, 이러한 것들을 손님은 적어도 이하의 부분들에서 εἴδη(γένη)로 기술한다. τὸ καθ᾿ αὑτό τὸ πρὸς ἄλλο (255b 이하), λόγος (260a, d), 그리고 δόξα (260d). 내가 이미 지적하였듯, 우리는 아마도 이 목록에 τὸ καλόν, τὸ μὴ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μὴ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 τὸ μὴ δίκαιον(257d), 그리고 (만일 우리가 B사본과 T사본의 독해를 받아들인다면) διάνοια와 φαντασία(263d)를 추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다음의 물음이 야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이것들 전부가 플라톤적인 형상들로 헤아려지는 것인가? 나는 (언급된 그 논문에서) 그것들 중 일부는 그렇게 헤아려지지 않는 것이라고, 즉 τὸ ὄν,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αὐτόν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처음에 인용하였던 네 명의 주석가들에 의해서 이 물음에 어떠한 대답이 제시되는가?
  로쓰는 처음 다섯 가지 위에서 나열된 것들이 플라톤적 형상들이라고 추정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τὸ μὴ ὄν에 관련하여, 그는 (168쪽) 이것이 '진정한 형상이며, 게다가 가장 거대한 형상들 중 하나', 다름과 동일시되는 그러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τὸ μὴ καλόν 같은 부정어들의 주제에 관련하여서라도, 플라톤의 '그것들에 대한 태도는 모두 분명치 않고'(167쪽), 그는 궁극적으로 그것들이 형상이라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내린다. 그 외의 『소피스테스』에서 명명된 εἴδη에 대하여 로쓰는, 추정컨데 그가 τὸ καλόν τὸ μέγα τὸ δίκαιον을 플라톤적 형상들로 포함시킬 것 같다 하더라도, 아무런 인식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콘포드는 분명하게 그 처음 다섯 가지 것들을 플라톤적 형상들로 간주하고 (275쪽, 그리고 여러 곳에서), 257d-258c에서 언급된 '도덕적 형상들'(즉 아름다움, 정의로움)까지도 그리 간주하며 (291쪽), 추정컨데 같은 구절에서 그것들과 함께 언급되는 τὸ μέγα도 그리 간주할 것이다. 이 구절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291쪽, 주석 2.), 그는 우리에게 '"안 정의로움"은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와 다른 어떤 형상이다'라고 말해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로 형상이 아니라, 여러 형상들을 포괄하는 총괄적인 용어이다. 그는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255d) 를 그곳에서(281쪽 주석 2. 256-7쪽 참조) 형상들로 기술한다. 그의 번역에서 그가 εἴδη를 '성질들'로 번역할지라도 말이다. 260d, 손님이 λόγος와 δόξα를 εἴδη로 기술하는 곳에서, 콘포드는 번역어로 'things'를 택하고, 'eidos는 모호한 단어이고, 종종 "entity" 이상의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302쪽), '거짓에 참여할 수 있는 사유와 진술은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들과 우리가 발화하는 진술들 내에 존재하는 사유들이다.' 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 대한 그의 주석은 (260d, 302쪽 주석 1.) 그가 δόξα, διάνοια 그리고 φαντασία, (우리가 B사본과 T사본을 받아들인다면) 263d에서 
γένη로 불리는 그것들에 대해 같은 관점을 취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콘포드는 그의 형상들 목록표에 앉음(314쪽)과 날고 있음(315쪽)을 포함시킨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손님에 의해 결코 그렇게 기술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콘포드는 '테아이테토스라는, 그런 형상은 전혀 없다.' 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314쪽)
  아크릴씨와 블럭 박사는 처음 다섯 가지 것들을 진정으로 플라톤적인 형상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난다 (블럭 박사는 명백히 그리 한다). 손님에 의해 언급된 다른 εἴδη를 그들은 주목하지 않고, 그들은 손님에 의해 언급되지 않은 어떤 것들을 추가한다. 그래서, 아크릴씨는 모든 개념들 그리고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에 대응하는 형상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앉음', '앉지 않음', '서 있음'을 포함하여). 그리고 블럭 박사는 인간, 돼지, 앉음과 날고 있음이라는 형상들을 언급한다 (비록 그가 ψευδὴς λόγος에 대한 손님의 해석에서 아무런 형상들도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라도).
  만일 손님에 의해 εἴδη라고 불리는 항목들 중 일부가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면, 반면에 다른 것들은 그러하다면, 우리는 왜 이것이 그러한지에 대해 추론되고 또한 추론될 수 있는 설명을 제시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일부 항목들에 대한 콘포드의 거부는, 그가 다른 것들을 추가하는 것만큼이나, 임의적으로 보이고, 확실히 그 대화편의 문헌 내에서 아무런 정당화도 찾지 못한다. 로쓰는 그 문제의 일부만을 마주하고, 아크릴과 블럭은 그 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
  대화편 내에서 손님에 의해 사용되는 언어에 직면하여, 적용될 수 있는 차별적 원칙이 무엇인지 알기란 어렵다. 우리가 보았듯 λόγος와 δόξα가 εἴδη로 기술될 뿐만 아니라, '결합' 등과 같은 용어가 다른 εἴδη에 대해서처럼 그것들에 대해서도 사용된다. 
λόγος의 바로 그 현존이 εἴδη의 상호 συμπλοκή가 있다는 사실에 의해 성립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μεῖξις가 있다는 사실에도 의존하지만 (259e 이하) - 이 경우 λόγος의 οὐσια와의 συμπλοκή - 260b 이하에서 우리는 δόξα의 그리고 λόγος의  τὸ μὴ ὄν과의 '혼합', 그 '참여', 그 '상호관련', '결합'을 장차 증명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서 알게 된다. 255d에서 우리는 εἴπερ θάτερον ἀμφοῖν μετεῖχε τοῖν εἰδοῖν이라는 구절을 발견한다. 이 εἴδη의 쌍은 문맥이 보여주듯 τὸ καθ᾿ αὑτό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혹은 πρὸς ἕτερον)이다. 곧장, 일부 ὄντα는 전자에, 일부는 후자에 '참여'한다는 것이 시사된다 (255c).
  [64쪽] 다시, τὸ καλόν과 τὸ μὴ καλόν 그리고 257d 이하에서 언급된 다른 짝들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차별적 원칙이 무엇인지 알기는 어렵다. 이것들 중 아무것도 여기에서 εἶδος나 γένος로 기술되지도 않고, 우리가 그것들의 '참여' 등등을 듣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257e에서 
τὸ καλόν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τὸ μὴ καλόν에 마주놓이는 것은 ὄν에 대해 다시 ὄν에 맞서는 마주 놓이는 것으로 기술된다 (ὄντος δὴ πρὸς ὄν ἀντίθεσις). 그리고 τὸ μὴ καλόν은 τὸ καλόν에 전혀 못지 않게 'ὄντα 중의 하나이다(ἐστι τῶν ὄντων)'라고 진술된다. 만일 우리가 τὸ μὴ καλόν을, 예를 들어 그것이 단지 θάτερον의 '부분'이라는 근거에서(257d에서 그렇게 기술된다) 실격시킨다면, 우리가 τὸ καλόν을 (258b1에서 분명히 시사되듯) 그것이 단지 τὸ ὄν의 '부분'이라는 근거에서 실격시켜야만 하는가? <이게 뭔 개소리야, 미친 늙은이.> 만일 τὸ καλόν이 여기에서 플라톤적 형상이라면, τὸ μὴ καλόν 에 같은 자격을 부여하길 거부할 아무런 근거도 문헌이 제시하지 않는다. '안 아름다움''은 형상이 아니지만', '아름다움 자체와는 다른, 존재하는 형상들 모두에 대한 총괄적인 명칭이다'라는, 그리고 그것이 '실재를 구성하는 형상들의 전 영역의 일부'이며 '단일한 형상, 즉 아름다움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그리고 대조되는 형상들의 전체 집단'이라는 주장은(293쪽), τὸ μὴ καλόν이 τὸ καλόν에 마주하여 놓인다고, 그리고 θάτερον의 '부분'이라고, τὸ καλόν이 τὸ ὄν의 '부분'인 것처럼 바로 그렇게 그러하다고 말하는 플라톤의 문헌에 명백히 반대된다. 만일, 콘포드가 믿듯, 여기에서 τὸ καλόν이 플라톤적 형상이라면, 그리하여 『소피스테스』라는 문헌은 그에게 τὸ μὴ καλόν이 정확히 그와 같은 상태를 지닌다는 것을 믿을 것을 요구한다.
  사실상, 플라톤적 형상들이라는 자격에 합당한 후보들에 대한 콘포드의 선택은, 어떤 것들은 택하고 어떤 것들은 거부하는 누구의 선택이 되었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순전히 자의적이다.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이러저러한 후보들이 '반드시' 플라톤적 형상들이어야만 한다거나 그럴 수 '없다'고 느끼는지 여부에 대한 특정 주석가의 선입견에 의존한다. 그가 그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놓는 논증들이 무엇이든 상관 없다. 『소피스테스』에서 εἴδη로 언급되는 모든 하나하나가 플라톤적 형상이라고 주장하거나 그것들 중 아무것도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서의 선택만이 적법하다. 나는 내 앞선 논문에서 τὸ μὴ ὄν (θάτερον), ταὐτόν 그리고 τὸ ὄν이 플라톤적 형상들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들을 제공하였고, 내가 암시들은 플라톤적 형상들도 아니라는 것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단지 그것만을 기초로 하여 그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 대한 증거를 뒷받침하는 추가적인 것도 있다. 플라톤은 우리에게 이 대화편에서 그가 소피스테스의 언어적 φαντάσματα, 즉 그들이 나타내고자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못 전하거나 왜곡시키는 용어들을 다룰 것이라는 분명한 암시를 주었다(234e1 그리고 그 이하 논의에서). 그리고 그 대화편의 이어지는 주된 부분에 대한 작업과 당도하게 된 결론들이 이 점을 충분히 지지한다. 플라톤은 명백히 이러한 용어들 중 하나, 최악의 문제이자 무엇보다도 가장 위험한 것, τὸ μὴ ὄν이 어떻게 결함을 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언어적 εἰκών
, 참이고 맞는 언어적 표현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훼손되었고, 그것의 잃어버린 조각이 복원될 필요가 있다. 같은 일이 θάτερον, τὸ μὴ ὄν과 동일시되는 그것에도 적용된다. 암시적으로, 같은 것이 τὸ ὄν과 ταὐτόν에도 적용된다. 그것들도 훼손된 용어들이다. 하지만 그런 모든 언어적 φαντάσματα가, 그것들이 온전하게 복원되었을 때조차, 플라톤적 형상들에 대한 명칭들일 것이라 가정하는 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그것들이 확실히 정확한 언어적 표현들이고 더 이상 잘못 이끄는 것이 아닐 것일지라도. 이와 관련하여 콘포드에 의해 그것들 중 일부의 원천이 위치잡힌다는 것을 주목하는 일은 흥미로운 것이다. 그는 어디로부터 운동과 정지가 등장하는지 묻고 (277쪽), '그것들은 『파르메니데스』 129d에서 언급된 제논의 역설들에서 나타난 모순되는 용어들의 목록으로부터 온다. 운동(과 같은 것) 그리고 정지(와 같은 것)의 본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들에 관하여 상관된 사실은 오직 그것들이 반대되고 양립불가능하다는 것뿐이다.'라고 답한다. 그는 그것들이 아마 차라리 상징들로 대체되어도 좋았을 것이라고까지 추정한다. 나는 그가 비록 이러한 진단의 함축들을 알지 못했을지라도 그리고 계속해서 『소피스테스』에서 운동과 정지가 플라톤적 형상들이기도 하다고 추정할지라도, 그의 진단에 관련해서는 콘포드가 전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그에 따라서 τὸ καλόν이든 τὸ μέγα든 τὸ δίκαιον이든 그 본성이 소위『소피스테스』의 그런 구도에 들어 오지 않는다고 덧붙일 것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단지 그 부정들이 마주놓이기 위한 편리한 긍정형들로 도입될 따름이다. 이것들 모두 사실상 소피스테스적인 용어들이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의 용어와 그것들의 결함들 중 일부에 대한 폭로를 다루고 있고, 단지 진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고유한 입장에 대한 공격들에서 사용될 때 그 위험이 드러난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도 그리하고 있다. 플라톤이 τὸ καλόν과 τὸ δίκαιον 같은 용어들을 고안해냈다거나 독점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더욱이 부조리한 일일 것이다. 거의 어떤 그리스어 저자든 그 반대에 대한 증거를 제공할 수 있다. τὸ ὄν과 τὸ μὴ ὄν의 철학적 용법조차 최소한 파르메니데스 시기만큼은 오래 되었다. 초기대화편에서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히피아스 같은 사람과 τὸ καλόν의 의미를 논의하는 걸 발견하고, [66쪽] 우리는 만일 우리가 그런 용어들을 플라톤 말고 다른 사람들의 어휘에서 발견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소피스테스』 251b에서 언급되는 '늦게 배우는 자들'과 같은 역량에 속하는 사람들에서부터 제논 같은 더 예리한 사상가들까지 말이다. '소피스테스들'과 반박하는 자들의 활동들에 저항하면서 플라톤이 쏟은 엄청난 노력은 그 자체로 유행하였던 대화법의 횡행과 (그가 느꼈듯) 철학에 대한 위험을 시사한다. 이러한 태도의 위험성은 플라톤이 보았듯 그 피상성이었고, 실재 대신 단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었다. 플라톤 (혹은 소크라테스) 에 의해 고안되었던 것은 용어가 아니라, 실제로, αὐτὸ καθ᾿ αὑτὸ εἶδος, τὸ καλὸν αὐτὸ καθ᾿ αὑτό라는 개념, 그 용어, 그 자체의 고유한 자격으로 물리세계에 독립적으로 현존하는 실체, 오직 λογισμός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에 기저에 놓일 것을 보여주는 활동이고 그것들이 확인되었을 때 사태들에 부합하는, 필요한 곳에서의 그러한 용어의 개선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주의를 용어에 한정하는 자들에 반대하여 공격한다. 그들은 그들의 용어가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표현인지 고찰하는 데 실패하거나, 그것이 진리나 실재에 대한 믿을 만한 지표라고 믿는 - 혹은 그들이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언어적인 교묘한 수법으로 플라톤을 때려눕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내 의견으로 μετέχειν과 또한 『소피스테스』에서 '결합'과 '혼합'을 지시하는 데에 사용되는 다양한 동사들 그리고 명사들 모두는 저 두 용어들이 같은 문장에서 자기모순없이 함께 사용될 수 있다는 것 이상을 함의하지 않는다. 이미 인용한 콘포드의 구절을 사용하자면, 명명된 사물들의 '본성'은 관련이 없고,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κίνησις와 στάσις는 '혼합'되지 않을 것인데, κίνησις ἵσταται는 명백히 자기모순적이기 때문이다. τὸ μὴ ὂν ἔστιν도 똑같이 그리고 명백히 자기모순 아닌가? 파르메니데스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말들에 의해 그들이 현혹된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저 기만적인 허울을 넘어서서 어떤 더욱 견고하고 신뢰할 만한 것을 향해 뚫고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 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εἶδος나 μετέχειν 혹은 
τὸ καλόν이라는 말들을 플라톤에게서 볼 때마다 그것들이 플라톤적 형상들을 지시한다는 결론으로 비약하는 데에 맞서 우리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즉 그것이 정확히 플라톤이 교정하기 위해 『소피스테스』를 집필했던 그 오류의 형식이다. 검토되지 않은 용어를 사실들에 대한 믿을 만한 지침으로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뭐 별로 딱히 볼 만한 논문은 아니었다는 감상=_= 60년대 Phronesis 등재 논문이 이 따위라는 건 그 후 50년 가까이 축적된 연구들을 본 내가 눈이 높아졌다는 반증인가, 아니면 그냥 이 논문이 정말 쓰잘데기 없다는 얘기일까 잘 모르겠네. 토 나와.


유들의 결합(koinonia genon)이든 형상들의 상호 엮임(symploke allelon ton eidon)이든 그것이 진술(logos)의 성립조건이 되는 방식은 여러 층위이다.
1) 모든 genos가 being, sameness, difference (내 주장에 따르자면 motion, rest까지)와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그러므로 '진술(logos)'이라는 하나의 'genos' 역시 이러한 엮임 없이는 성립 불가능하다. (logos라는 genos의 성립조건)
2) 진술의 구성 요소가 되는 각각의 것들, 이름(명사, onoma)과 말(동사, rema) 역시 genos로서 1)의 엮임을 전제해야만 한다.(onoma와 rema라는 각각의 genos의 성립조건)
3) 진술의 구성 요소 각각이 가리키는 것(명사의 경우 사물이나 사태, 동사의 경우 이름이 가리키는 것에 관련된 행위 혹은 상태) 역시 형상들의 엮임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다"와 같은 진술의 경우를 보자. '테아이테토스'는 인간이라는 형상에 참여하는 개별자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형상은 동물이라는 유(genos)에 참여하고 영혼이라는 유에도, 지성, 사유라는 유들에도 참여하며 그런 식으로 엮여 있다. 또한 이 모든 것들이 유인 한에서 마찬가지로 1)의 엮임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onoma가 가리키는 pragma, rema가 가리키는 praxis라는 각 genos의 성립조건, 그리고 각 pragma와 각 praxis라는 사태 자체의 성립조건.)
4) megista gene(가장 거대한 유들, 혹은 매우 중요한 유들)에 관한 논의에서 드러나듯, 유들의 엮인 결과는 'A is B(혹은 A verb- Bs)' 형태로 진술된다. A가 B에 참여(metechein)함으로써 A is B가 성립하고, A Bs가 성립한다. 모든 진술은 명사와 동사의 결합으로 제시되므로, 진술 일반은 '명사 + 동사'라는 형상들의 엮임을 필요로 한다.(onoma와 rema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5) 4)에 이어서, 개별 진술들 각각에 대해서 특정 명사 A가 가리키는 어떤 것(real A)이 특정 동사 B(real B)가 가리키는 행위를 자신에 관하여 being인 것으로 지니는 사태, 즉 "A is B"라는 진술이 가리키는 사태는 'real A metechein real B'이다. Real A와 real B 사이의 상호 엮임이 형상들의 엮임인 경우를 고려할 때, 개별 진술 또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을 전제한다.(genos 차원에서 pragma와 praxis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그리고 개별 pragma와 개별 praxis 사이의 결합에 대한 성립조건.)
여기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포괄적인 '형상들의 엮임' 혹은 '유들의 결합'은 당연히 1) 아닌가? 나머지 경우들은 모두 1)에 함축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듯한데? 근데 왜 아크릴이고 팩이고 다들 엇나간 얘기를 하는 걸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뭐 내가 틀렸겠지. 쟤들은 박사님네들이고 나는 석사과정찌끄래기니까.

-작성중-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