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섹스투스 엠피리쿠스가 해석한 프로타고라스와 이에 대한 논박은 무엇인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 척도설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우선, 척도는 기준을 의미하고, '만물'은 '대상들'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인간은 모든 대상들의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물질은 흐르고 있고, 그 물질 안에 나타나는 것들에 대한 설명이 내재한다. 또한 인간의 상태와 조건에 따라 그 인간에게 서로 다른 대상들이 파악된다. 나타나는 것들이 대상들이라면 그 대상들이 바로 그러한 것이라거나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의 기준은 상이한 조건과 상태에 있는 상황마다의 인간이다. 그 인간 또한 상황과 조건이 변한다는 의미에서 흐르고 있는 물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흐르고 있는 물질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어떤 대상으로 고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한 대상의 기준으로서 한 인간이 어떤 무엇이기 위해서는 그 인간 역시 다른 인간에게 그러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각자에게 나타나는 것이 각자에게 참이다. 즉 무엇에 대하여, 어떤 관계 속에서 참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주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그 형이상학적 배경을 일종의 만물유전으로 간주한다. 물질의 흐름과 변화를 통해 매번 다른 상태의 인간에게 매번 다른 대상이 나타난다. 어떤 무엇으로서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닌 대상, 나타나는 것, 현상이므로, 한 현상은 다른 현상과 비교될 수 없는 개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된다.

  그에 따르면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은 각자에게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참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거짓이다' 또한 하나의 나타난 것, 대상에 대한 믿음이므로 이는 자기논박이 된다. 다음으로 모든 믿음에는 그와 반대되는 믿음이 짝을 이룬다. 즉 한 믿음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짝을 이룬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만, 둘 모두 각기 나타나는 바의 것이자 특정한 믿음이다. 모든 나타나는 것이 참이라면 서로 모순되는 것이 동시에 참이되나 이는 불가능하다. 

2. 위 해석과 논박은 『테아이테토스』에서 플라톤의 해석 및 반박과 같은가? (혹은 플라톤의 ad hominem 전술과 관련하여,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프로타고라스 논박은 순수하게 논리적 논박인가 아니면 그 주장에 따라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에게 귀결하는 다른 사태들을 통한 ad hominem인가?)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설을 상대론으로 해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이라는 양화사를 적용해 그의 주장을 일반화시킴으로써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명제를 그 안에 개입시킨다. '인간척도설은 거짓이다'라는 명제는 '모든' 믿음이 참이라는 인간척도설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일반명제로 둔갑한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엄밀하게 적용할 경우 인간척도설은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한 상태의 어느 한 순간의 어떤 장소의 어떤 한 사람에게' 이상의 조건에 붙은 한에서 개별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여전히 '인간척도설이 거짓이라는 믿음이 어느 순간 어떤 곳에서 누군가에게는 참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1차진술과 2차진술을 구분한다면 사대론적으로 해석되는 인간척도설 자체는 메타차원의 언명으로서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상대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을 의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프로타고라스를 무오류주의자로 간주하여 행해지는 논박이라는 점에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해석과 비판은 플라톤이 『테아이테토스』에서 제시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여전히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퓌론주의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플라톤과 다른 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 같은 현상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항상 짝을 이루어 믿음의 한 쌍이 있게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두 믿음은 서로 양립 불가능한 모순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경우 여기에서 객관적으로 참인 명제와 거짓인 명제가 각기 전제되지만,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게는 이 중에 참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다. '모든 x에 대해 만일 x가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x는 거짓이다'라는 주장이 '참인 어떤 x가 있다'를 함의하는 것은 아니다. x∧~x, Tx∧Fx와 같은 양립 불가능한 쌍을 동시에 긍정하는 판단 자체가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것이 프로타고라스에 대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비판이다. 이 비판은 플라톤의 비판과 같은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제하는 진리관 역시 둘 사이에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이 이외에 플라톤의 경우,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프로타고라스나 다른 사람들이나 개나 신이나, 지각되는 것과 여겨지는 것에 있어서 마찬가지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각자가 척도라면,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주장보다 존중받을 이유는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이 귀결되었을 경우 프로타고라스의 그 주장에 약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프로타고라스라는 사람 자체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일 따름이다. 즉 ad hominem이다. 상대주의에 머무르는 한에서, 모든 믿음이 각기 일시적이고 개별적이며 비교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런 믿음을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기억하여 떠올리거나 어떤 식으로 지속시킬 방법은 없으며, 따라서 언어도 추론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이 '모든 믿음은 상대적이다'라는 메타차원의 언명에 치명적인 결함이 되는 것은 아니다. 

3.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프로타고라스 논박은 정당한가?

  일단 pros ti와 en hyle logos 사이의 관계에 따라 SE가 P를 상대론자로 본 것인지 무오류주의자로 본 것인지 해석이 갈릴 것이다. 배타적 선언문을 통한 프로타고라스 논박과 그에 앞서 hyle와 phainomena, phantasia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SE의 논박방식을 상이한 두 가지 논박들로 구분할 여지도 남는다. 다음으로 그의 논박이 회의주의를 견지하면서도 제기될 수 있는 방식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이 참이거나 혹은 거짓이며 동시에 양자 모두이지는 않다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해도, 여전히 어떤 참인 것이 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프로타고라스든 다른 누구든 어떤 자를 상대주의자로 간주하고서는 논리적 반박은 불가능하다. 조건을 추가하여 모든 개별 진술을 상대화하는 한에서 진술들 사이의 관계는 전혀 성립할 수 없으며 이 경우 모순 또한 발생할 수 없다. 단지 그러한 상대화 전략이 메타차원으로 구분되지 않고 회귀적으로 적용될 경우 자기부정으로 귀결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상대화가 개별화를 함의하는 한 '인간이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진술 또한 일반명제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조건들 하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P에 대해 그 부정으로 짝을 이룰 명제 따위는 없다. 결국 ad hominem을 통해, 그러한 상대주의는 사유나 언어나 지시조차 불가능하게 된다는 지적만이 가능할 뿐이다. 어떤 명제를 구성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객관화의 과정을 포함하며, 이는 상대주의에 위배된다. 플라톤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를 뒷받침하는 고정되지 않고 개별적이며 일시적인 사태들을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플라톤이 P를 상대주의자로 본다면 그 역시 자기논박을 P에게 적용시킬 수 없고, 이는 『테아이테토스』에서의 논의와 다른 결론이다. 뭐 어쨌든 아직 시간이 있으니 좀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걸로.

-蟲-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