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쪽] 내 목적은 이 어렵고도 중요한 구절의 완전한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특수한 문제를, 콘포드('Plato's Theory of Knowledge'에서)와 로빈슨('Plato's Parmenides')에 의해 이루어진 일부 언급들을 살펴 보면서, 논의하는 것이다. 우선 해당 구절에 대해 매우 간략하고 논증적이지 않은 개괄을 제시하는 편이 유익할 것이다. 플라톤은 개념들(eide, gene, ideai)이 특정한 규정된 방식들로 관련된다는 것,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251d-252e)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을 추구한다. 다음으로(253) 그는 철학자에게 이러한 관계들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임무를 부과한다. 철학자는 반드시 개념들의 전 영역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유-종 구조에서든 다른 방식으로든, 어떻게 상호연결되는지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확보해야만 한다. 플라톤은 이제 그러한 철학작업의 일례를 제시한다. 『소피스테스』에서 이미 언급된 문제들에 상당히 관련된 일부 개념들을 선택하여 그는 우선(254-5) 그것들이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정짓고, 다음으로(255e-258) 그것들이 상호에 대해 맺는 그 관계들을 해명한다. 이러한 관계들을 발견하고 진술하려는 시도는 ὄν과 μὴ ὄν이라는 복잡한 관념들에 빛을 비추고 플라톤으로 하여금 피상적인 사상가들에 의해 제기된 특정한 난제들과 역설들을 하찮은 것들로 차치할 수 있게 해준다(259). 그는 끝으로(259e) 만일 도대체 logos가 있다면 개념들이 상호에 한정된 관계들 내에 있다는 것에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있다고 언급한다. διὰ γὰρ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왜냐하면 형상들 상호 간의 엮임으로 인하여 logos가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당 대목은 논의의 시작이었던 핵심을 재천명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251d-252e). Συμπλοκὴ εἰδῶν이 있으며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내가 논의하고자 하는 문제이다. 이 구절에서 플라톤의 성과들 중 하나가 '계사의 발견' 혹은 한편으로 동일성 진술들에서 사용되고 다른 한편에서 한정 진술들에서 사용되는 그러한 'ἔστιν의 애매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그 물음은 플라톤이 우리가 방금 언급한 그러한 구절들에서 기술할 법한 철학전 진전을 이루었는가 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특별한 구절들은 전혀 대단히 강조되는 바 없다. 그래서 플라톤이 (혹은 다른 누구라 하더라도) 계사를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건 의심할 나위 없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가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기는 했는가? 그가 동사 ἔστιν의 그 다양한 역할들을 상술하거나 드러냈는가? 그의 선행자들과 동시대인들 중 다수가 그 단어의 상이한 용법들을 혼동함으로써 기이한 결론들에 당도하였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이한 용법들을 해명함으로써 응답했는가? 이런 것들이 실질적인 물음들이다. 다시, 단지 플라톤이 '애매성'을 의미하는 아무런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혹은 그가 아무 곳에서도 'ἔστιν이라는 단어는 때로는 …를 의미하고 때로는 …를 의미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데에 근거하여 그가 ἔστιν의 애매성을 인지했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현학적인 오해가 될 것이다. 만일 그가 실상 어떤 맥락에서 어떤 방식으로 또 다른 맥락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단어의 의미를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분석한다면, 그리고 만일 이 일이 진지한 철학적 구명(
究明) 내에서 일어난다면, 그가 '애매성을 인지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상당히 옳은 일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소한 지점들을, 이와 반대로, 주제가 되는 오직 근본적인 물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만 언급한다. 

  플라톤이 적어도 몇 가지 다른 용법으로부터 ἔστιν의 존재사적 용법을 식별해낸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동의된다(예를 들어 Cornford, p.296). 그가 어떻게 이 일을 행하는지는 256a1에서 κίνησις에 대한 그의 언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ἔστι δέ γε διὰ τὸ μετέχειν τοῦ ὄντος(그런가 하면 τὸ ὄν에 참여함-몫을 나누어 가짐-으로 인해 ~이다/있다). 이 διά는 κίνησις ἔστιν이라는 증명을 이끌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이전에 문제 없이 동의되었고 κίνησις와 τὸ ὄν 사이의 연결을 확정짓기 위해 사용되었다(254d10). 그것은 왜 κίνησις ἔστιν인지 그 이유를 이끄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 의해 기술되는 추가적 상태로 귀결되는 어떤 사건이나 상태를 언급하지 않는다. Διά를 통해 도입되는 단어들은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서 사용되는
, 즉 존재사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 ἔστιν에 대한 확장 혹은 '분석'을 제시한다.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는 존재사적 ἔστιν에 대한 그 철학자의 등가 표현이다. 하지만, 보게 될 것처럼, 그것은 다른 용법들 내에서 ἔστιν에 대한 그의 분석이 아니다. 그래서 그 존재사적 의미는 식별된다.  

  그 철학자의 정식화(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는 κίνησις ἔστιν에서 ἔστιν의 의미를 해명하는 동시에, 또한 압축된 구어적 정식화에서는 불분명한 그 진술된 사태의 구조를 분명하게 해주고, 특정한 연결이 두 개념들 사이에서 단언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그 철학자의 정식화는 두 개념들의 이름들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정합성을 지시하는 단어, μετέχει, 그 자체로 형상의 이름이 아니라 이름지어진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 단어 또한 포함한다. 

  Ἔστιν의 또 다른 두 가지 의미들, 계사와 동일성 기호로서의 의미들이 남아 있다. 이 의미들의 동화가 그 어떤 참인 비-동일성 진술들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이 역설로부터 그 기능(능력)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ἔστιν의 그 두 용법들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명백한 입증(demonstration)이다. '입증'이란 말로 내가 의미하는 바는 '증명(proof)'이 아니라 '전시(exhibition)' 또는 '표출(display)'이다. [2쪽] 역설을 해독해낼 방법은 그 역설이 발생하는 혼동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내놓는 것이다. Ἔστι의 서로 다른 두 용법들에 주의를 끌 수도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지적할 수도 있으며, 아마도 그 둘 사이를 혼동하도록 하는 가장 경미한 유혹마저도 제거하기 위해 대안적 표현 방식들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256a10-b4에서, κίνησίς ἐστι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이다/같다), κίνησις οὐκ ἔστι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이지 않다/같지 않다)이라는 한 쌍의 진술들을 플라톤이 어떻게 다루는지 고찰해 보자. 우리는 양자 모두를 단언하고자 하지만 이것들은 모순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실제로 염려해야 할 일은 아니다(οὐ δυσχεραντέον). 왜냐하면 우리는 두 진술 모두에서 ὁμοίως(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진술들에 대한 분석(다시금 διά에 의해 도입되는)은 각 경우에서 단언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여줄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적절히 이해할 경우 그것들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음을 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첫 번째 진술의 의미는 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ταὐτοῦ(운동이 같음에 참여한다)이다. 두 번째 진술은 κίνησις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πρὸς ταὐτόν(운동은 같음에 대해 다름에 참여한다)를 의미한다.

  두 진술들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에서 본질적인 핵심들은 이런 것들이다. (1) ἔστιν이 계사로 사용되는 경우 그것은 철학자의 형식에서 μετέχει에 의해 대체된다. (2) οὐκ ἔστιν에 대한 철학자의 형식은, 그 ἔστιν이 계사가 아니라 동일성-기호일 경우, (οὐ μετέχει가 아니라)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πρός …이다. 두 진술들에 대한 재정식화에서 플라톤은 명명된 두 개념들을 단지 연결하는데에 쓰이는 ἔστιν(계사)과 동일성(혹은 타자성) 개념을 표현하는 ἔστιν(혹은 οὐκ ἔστιν)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어떤 것이 동일성(혹은 타자성) 개념에 들어간다(falls under)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논의전개를 프레게의 논문 'Über Begriff und Gegenstand'의 한 구절에 비견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녹색이라거나 포유류라는 것만큼이나 그것이 알렉산더 대왕이라고, 혹은 숫자 4라고, 혹은 행성 비너스(금성)라고도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프레게가 지적하는 바 'is'의 두 가지 상이한 용법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마지막 두 가지 사례들에서 그것은 계사로서, 단지 진술에 대한 동사 기호로서만 기능한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어 단어 ist는 종종 단순한 인칭 어미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dies Blatt ist grün-그 잎은 푸른 것이다-과 dies Blatt grünt-그 잎은 푸르다-) <주석 4.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185b28도 떠오른다 : οἱ δὲ τὴν λέξιν μετερρύθμιζον, ὅτι ὁ ἄνθρωπος οὐ λευκός ἐστιν ἀλλὰ λελεύκται, οὐδὲ βαδίζων ἐστὶν ἀλλὰ βαδίζει. "어떤 이들은 그 표현 방식을 전환한다, '그 사람은 흼이다'가 아니라 '희어졌다', '걷는 것이다'도 아니고 '걷는다' 라고.> 우리는 여기에서 어떤 것이 한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고, 문법적 술어가 이 개념을 대신한다. 다른 한편 위 세 가지 예시들(알렉산더 대왕, 숫자 4, 금성)에서 "is"는 산술에서, 등식을 표현하기 위한, "equals(같다)"라는 기호(등호)처럼 사용된다. … "샛별은 금성이다"라는 문장에서 "is"는 명백히 단순한 계사가 아니다. 그 내용은 술어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그래서 "금성"은 술부 전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샛별은 금성에 다르지 아니 하다(the morning star is no other than Venus)." 앞서 "is"라는 그 한 단어에서  함축되었던 것은 여기에서 네 가지 개별적인 단어들로 제시되며, "is no other than"에서 "is"는 이제 실제로 단순한 계사이다. 여기에서 서술되는 것은 그래서 금성이 아니라 금성에 다르지 아니이다. 이런 단어들은 개념을 대신한다.'

  프레게는 어떤 것이 한 개념 아래에 들어감을 이야기함으로써 계사를 설명한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μετέχειν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프레게는 동일성의 ἔστιν을, 해당 구절에서 'is'가 단순하게 계사이고('그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 …') 'no other than …'이 개념을 대신하는 'is no other than'으로 확장시킨다. 플라톤은 
동일성의 ἔστιν을, μετέχει가 계사의 역할('아래에 들어간다')을 하고 ταὐτόν(혹은 θάτερον)이 개념을 명명하는 경우에서, μετέχει ταὐτοῦ …로 (그리고 οὐκ ἔστιν을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로) 확장시킨다. 그가 수행하는 분석들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내게는 플라톤이 전혀 프레게에 못지 않게 명백하게, 'is'의 의미들을 구별하고 해명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이 『소피스테스』 251-9에서 하는 일들 중 한 가지가 계사와 동일성 기호 사이의 구별이라는 주장은 다음 고찰에 의해 뒷받침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별이 ὀψιμαθεῖς(늦게 배우는 자들, 251b)에 대항해 우리가 면역력을 갖도록 하기 위해 요청되는 바로 그것이며, 플라톤은 그의 논의가 이 양반들을 제자리에 데려다 놓는 것이라 간주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로빈슨은 이러한 고찰이 무슨 힘이든 지닌다는 걸 부정한다(p. 174). '플라톤은 확실히 그의 결합(Communion, κοινωνία)이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가 그 논박 방식이 그들이 한정을 동일성과 혼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귀결되지 않는다. 문헌 내에서 그가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귀결'하지 않는다는 건 확실히 로빈슨 말이 맞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정확히 어떻게 플라톤이 그 스스로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했다'고 간주하였는지에 관련하여 일정부분 합리적인 제안을 구성할 자격이 있거나 차라리 그럴 의무가 있다. 만일 256a10-b10에 대한 상기 해석이 건전하다면, 저 구절은 늦게 배우는 자들의 오류를 노출시킨다. 그들은 모든 각각의 'is'를 동일성-기호로 이해한다. 그리고 플라톤 자신이 저 구절에서(혹은 다른 어딘가에서) 도출된 구별을 그 늦게 배우는 자들에 대항한 결정적인 대항수단으로 간주했다고 추론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욱이, 만일 어떻게 플라톤이 그가 늦게 배우는 자들과 그들의 역설을 처리했다고 생각했는지에 관련하여 '다른' 합리적 제안이 구성될 수 없다면, 이 사실은 256a-b에 대해 그 안에서 그 역설에 대해 직접 관련되고 파괴적인 중요한 핵심을 발견하는 그러한 해석을 지지하는 논거일 것이다.

  이제 형상들 사이에 결합이 있다는 그의 증명에 의해(251d-252e) 플라톤이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논박한다는 것이, ὄν과 μὴ ὄν에 대한 이후의 대화에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그가 스스로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
 제안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3쪽] 그가 결합이 있다고 증명하는 데에 사용하는 논거들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251e7-252b7) 이런 것이다. 만일 아무런 결합도 없다면 철학자들과 자연학자들은 그들의 다양한 관점들을 제기하면서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λέγοιεν ἂν οὐδέν). 이 귀결절이 거짓이며 엠페도클레스와 여타의 사람들이 의미있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하게 '상정(assumed)'된다. 하지만 물론 이 상정은 정확히 늦게 배우는 자들이 그들의 역설을 주장하면서 부정할 바의 것이다. 또한 그것에 기반한 논증은 명백히 그들에게 좋지 않다. 결합에 대한 플라톤의 두 번째 논증은(252b8-d1) 아무런 결합도 없다는 이론이 그 자체의 거짓을 함의하지 않고서는 진술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늦게 배우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으로서의 그 논증은 다음과 같은 것일 터이다. 당신은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 참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진술 - '오직 동일성 진술들만 참일 수 있다' - 은 동일성 진술이 아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의 이론에 비추어 당신의 이론은 거짓이다. 이제 이 논증은 확실히 가공할 만한 것이며 늦게 배우는 자들을 쉽사리 입다물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1차 진술(개별 진술, 원소)과 2차 진술(진술 일반, 집합)을 구별해내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그 주장 자체에 대한 반박으로서 그것은 물론 피상적이고 불충분하다. 그 주장은 농짓거리하는 늙은이들뿐만 아니라 진지한 사상가들 그들 스스로 이론적 근거들을 강제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여겨지는 바의 것을 주장할 의무가 있다고 느낀 자들에 의해서도 개진되었기 때문이다. 로빈슨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p.175) : '그런 더욱 책임감있는 사상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히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고, 만일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무엇이든 그 모든 담화는,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 역설까지 포함하여, 불가능해질 것이다." 이 사상가들은 이미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즉각 모든 사유와 발화를 파괴할 수 없다는 추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제는 당신이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훌륭한 이유를 아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그 논증 내에서 오류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들은 그 논증이 거짓이어야만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오류가 무엇인지 보기를 원한다. 이제 그러한 사상가들에게는 플라톤의 결합이라는 원칙에 대한 증명은 전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우리가 "인간은 좋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다른 식으로는 어떠한 사유도 소통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기 떄문이라는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심지어 어떤 반대논증에도 주목하지 않고, 하물며 우리에게 그것이 어디에서 잘못되어 가는지 보여주지도 않는다.'

  나는 로빈슨이 제시한 이유들에서, 플라톤의 결합 증명이 그 역설정 주장을 (설령 그 주장에 대항해 그 증명 내의 두 번째 논증이 타당하다 할지라도) 만족스럽게 처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데에 동의한다. 상당히 진지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역설을 수용하도록 이끄는 오류나 혼동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구절 (251d-252e)은 늦게 배우는 자들과 그들의 역설에 대한 반박에서 플라톤이 말해야 하는 것 전체일 수 없다. 물론 그는 어딘가에서 그 기저에 놓이는 오류를, 그 역설이 세워진 부실한 토대들을 드러낸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기로 그는 예를 들어 앞서 논의된 구절에서, ἔστιν의 두 가지 상이한 용법들 즉 계사로서의 용법과 동일성-기호로서의 용법을 분명하게 구별함으로써, 그리고 어떻게 그 두 용법들이 관련되는지 보여줌으로써 이 일을 수행한다.

  이제 콘포드에게로 돌아가 보자. 그는 계사가 '형상들에 관계들에 대한 플라톤의 도식 내에서 그 어디에도 있을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p.279). 결합하는-'섞는'- 것으로 형상들 사이의 관계는 대칭적 관계이다. 그래서 그 관계는 한정 서술에서 주술관계, 즉 계사에 의해 지시되는 관계로서 같은 것일 수 없다(pp.256-7, 266).

  첫 번째는 매우 일반적인 지적이다. '연결되어 있는' 혹은 '결합되어 있는' 관계는 대칭적 관계이다. 하지만 물론 사물들이나 인격들이 결합되거나 연결될 여러 상이한 '방식들'이 있다. 그리고 이 방식들 중 다수가 비대칭적 관계들을 포함한다. 사람들의 한 집단, 한 가족의 구성원들에 대해, 그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 '어떻게' 서로서로 연결되는지 말하길 원한다면, '~의 아버지,' '~의 질녀' 같이 대칭적 관계들을 대신하지 않는 그러한 표현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이제 콘포드에 의해 철학자의 작업이 플라톤에 따르자면 '형상들의 계층구조를 명확하게 식별하고 그 연계된 구조를 다루는 것'이라는 점이 동의된다(pp. 263-4). 철학자가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구성하는 모든 진술 각각은 형상들 사이의 어떤 연결이나 결합을 단언할 것으로 기대될 것이다. 그리고 '결합'은 덧붙여 대칭적 관계이다. 하지만 물론 철학자는 각 경우에 존재하는 결합의 '종류'를 구체화하지 않고서는 아마도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어떤 비대칭적 관계들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가능한 '형상들의 지도'로부터의 작은 견본을 고찰해 보자.
                   Virtue
Justice Courage Wisdom Temperance
여기 제시된 구조는 철학자에 의해 기술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는 '반드시' 비대칭적 관계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위 도표에서 'Virtue'라는 단어와 'Justice'는 단지 서로 가까운 것만이 아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 '아래'에 있다. 유사하게, Virtue와 Justice는 단지 연결된 것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특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Justice는 Virtue'의 일종'이다.

  [4쪽] 그래서 만일 '형상들의 세계'에 대한 복합적 구조가 기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대칭적 관계들이 적용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어떤 것은 플라톤이 쉽사리 간과할 수 있었을 만한 것도 아니다. 확실히 그가 철자들과 음들을 가지고 묘사하는 비유(253a-b)는, 그에 따르자면, 변증가가 형상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들을 단언하는 것으로 만족하리라는 생각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f'와 'g'가 'i'의 도움으로 서로 부합하여 영단어를 구성하는지 말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분명하게 그 철자들이 그 안에서 취해질 수 있는 그 '질서'를 구체화하여야만 한다. 'gif'는 단어가 아니고, 'fig'는 단어이다. C장조 음계는 단지 이러저러한 음들이 아니라 특정 질서 속에서의 이러한 음들이다. 철자법이나 음계 혹은 형상들에 대한 사태들을 진술하는 데에 사용하는 어떤 용법들이 되었든지 간에, 어떤 비대칭적 관계가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만일 콘포드의 관점이 맞고 모든 철학자의 진술 각각이 형상들의 대칭적 '혼합'에 대해 말했다면, 철학자는 환원불가능한 방식으로 비대칭적인 진리들을, 예를 들어 Justice는 Virtue의 일종이라는 등의 진리를 절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콘포드의 관점이 옳은지 의심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소피스테스』가 철학자는 유들과 종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해야 하리라고 시사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그러한 관계들을 탐색하지는 않고, 그래서 『소피스테스』에 대한 적합한 해석은 그런 일들을 한켠으로 미루어 놓고 어떻게 플라톤이 그가 실제로 고찰하는 관계들을 전시하여 나아가는지에 집중해야 할 것이라
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그럼 플라톤이 구성하는 결합에 대한 진술들 중 일부를 살펴 보도록 하자.
 
  우선적으로, '운동이 존재한다'. (나는 콘포드의 번역을 유지한다. '변화'가 더 나을 것이다.) 콘포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p. 256) : '"운동이 존재한다"는 형상 운동이 형상 존재와 혼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p. 279) :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는 "운동이 존재한다"와 등가로 간주된다.' 또 (p. 278) : '("혼합"에 의해) 만들어진 그 관계는 계사의 의미가 아니다. … 우리는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라고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언급들을 한꺼번에 취하면 부조리해진다. 만일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운동이 존재한다'를 의미한다면,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는 반드시 '존재가 운동한다'를 의미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만일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존재가 운동과 혼합된다'와 등가라면, '운동이 존재한다'는 반드시 '존재가 운동한다'와 등가여야만 한다. 명백히 플라톤은 이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문제는 대칭적 관계를 제안하는 '혼합' 은유에 대한 콘포드의 주장에서 그렇지 않은 다른 관계들을 배제에 대한 것이다. '운동이 존재한다'가 등가인 어떤 것은 '운동이 존재와 혼합된다'가 아니라(대칭적인 것으로서의 '혼합'), '운동이 존재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존재에 참여한다'(비대칭적인 것으로서의 '~에 참여함')이다. 콘포드의 언급은 그가 그의 해설에 '~에 참여한다'와 같은 어떠한 비대칭적 표현들도 (설령 플라톤의 해설이 이러한 은유들로 빼곡하다 하더라도) 들여놓지 않으리란 이유로 부조리에 빠진다.
  
  두 번째로,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 이제 이것은 추가적으로 '정지는 운동과 다르다'와 등가이다. 하지만 '결합'에 관한 어떤 추론이든 묘사하기에 앞서 우리는 반드시 그 진술을 그 '분석된' 형태로, 변증가의 용어로 전환해야만 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얻는다. '운동은 정지로부터(~에 대해, pros) 다름과 결합한다'. <'pros'가 thateron에 부수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pros 'ti'가 딸려온다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여타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pros alla panta)'라고도 할 수 있고, 이 경우에 다름은 하나와 하나를 제외한 모든 것 혹은 무한정한 것 사이의 연결이다.>문제는 이 형식에서 '~과 결합한다'가 대칭적 관계를 대신하는 것으로 취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그렇게 간주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정지로부터 다름이 운동과 결합한다'에 등가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첫 번째 진술에서 언급된 '결합'은 명백히 한편으로는 운동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지로부터 다름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고 기술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는 '정지로부터 다름이 운동과 결합한다'가 기술적인 방식으로 말해서 정지로부터 다름이 움직인다는 것이라고 간주해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가 '운동으로부터 다름이 움직인다'와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앞서에서와 같이, '~과 결합한다'를 대칭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취함으로부터 부조리가 귀결한다. 만일 '운동이 정지로부터 다름과 결합한다'가 운동이 정지와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면 (명백히 그러하듯이), '~과 결합한다'는 여기에서 반드시 '혼합'이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에 참여함,' '아래에 들어감')를 표현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고찰들은, 그리 말해도 좋다면, 여전히 매우 일반적이고 너무 많은 외삽과 '해석'을 포함한다. 나는 이 비평에 얼마나 많은 무게가 실릴지 장담하지 못한다. 플라톤이 『소피스테스』 251-9에서의 해석의 매우 긴장된 부분을 작성할 때 어떤 합리적이고 정합적인 무언가를 염두에 두었다고 추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콘포드의 설명이 재고를 통해 버거운 난점들 혹은 부조리들로 이끈다면 이것은 그에 대항하는 '직관적으로(prima facie)' 건전한 비평이다. (설령 결국 콘포드의 설명이 받아들여지게 되더라도 그 결점들이 플라톤의 논의 - 콘포드에 의해 해석된 것으로서 - 내에서 숨김없이 드러나야 할 것임은 받아들일 만한 것일 터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실제 용어에 대한 더 면밀한 검토로 향하는 일은 확실히 필연적이다.

  플라톤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말하면서 엄청나게 다양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그것들 중 몇몇(예를 들어 συμμείγνυσθαι, 혼합됨)은 자연스럽게 '~과 연결되어 있음'이라는 다소 비규정적인 대칭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다른 것들, μετέχειν 처럼, 좀 더 규정적인, 비대칭적인 관계를 표현할 것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들도 있다. 콘포드는 이 기대가 만족된다는 것을 부정하고 플라톤이 '참여함'을 '혼합'이나 '결합'이라 불리는 상호적 관계로부터 구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pp. 296-7). 그는 이 점을 관련된 모든 구절들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를 통해 지지하지는 않는다. 형상들 사이의 것으로서 '참여'가 대칭적 관계라는('혼합' 처럼, 따라서 계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5쪽] 그의 명시적인 논증은 255d 한 구절, 존재가 τὸ καθ᾿ αὑτό (그 자체)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여타의 것에 대하여) 모두'에 참여한다' 라고 이야기되는 구절에 의존한다. 콘포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p. 256) : '그래서 유적 형상은 종적 형상에 참여하기를(혼합되기를) 그 종적 형상이 유적 형상에 참여하는 것에 전혀 못지 않다.' 그리고 255d4에 대한 그의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이 형상들 모두를(구체적으로 τὸ καθ᾿ αὑτό 와 τὸ πρὸς ἄλλο) '포함'하는, 존재라는 것이 양자 모두'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는 점에 주목하라. 이것은 "참여"가 형상들의 경우에서 대칭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들 중 하나이다.' 나는 콘포드가 여기에서 시사하는 다른 대목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255d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로 콘포드의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언급들
, 형상들 사이에서 견지되는 하나의 유일한 관계로서 대칭적 '혼합'에 대한 그의 주장에 대한 매우 부적절한 정당화이다.

  칼 뒤르는 그의 논문 'Moderne Darstellung der Platonischen Logik'에서 플라톤에 의해 『소피스테스』 251-9에서 사용된 다양한 용어들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한 의미들을 할당하였지만, 완전한 정당화 같은 어떤 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더욱 유용한 것은 데이비드 로쓰에 의한 다음의 검토이다 : '플라톤은 κοινωνία, κοινωνεῖν, ἐπικοινωνεῖν, ἐπικοινωνία, προσκοινωνεῖν을 두 가지 상이한 구조들 내에서 사용한다 - 소격과 함께(250b9, 252a2, b9, 254c5, 256b2, 260e2) 그리고 여격과 함께(251d9, e8, 252d3, 253a8, 254b8, c1, 257a9, 260e5). 전자의 용례에서 그 동사들은 "나누어 가짐"을 의미한다; 후자에서 그것들은 "~과 결합함" 혹은 "~과 통함"을 의미한다.' 나는 로쓰가 '비록 플라톤이 그 두 상이한 구조들을 사용하더라도, 그는 그것들 사이의 차이에 어떤 중요성도 덧붙이는 것 같지 않다'라고 추가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플라톤은 그 두 구조들을 무분별하거나 대체가능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구절들의 두 집단들 사이의 비교는 하나의 분명한 결론을 내놓는다 (나는 κοινωνία γενῶν 에 대한 주요 대목에 들어가지 않는 250b9와 260e2 그리고 e5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다). 소격을(예를 들어 θατέρου) 지배하는 κοινωνεῖν은 언급된 사실이 어떤 형상이 이러저러하다(예를 들어 ~과 다르다 …)는 것(계사로서)인 곳에서 사용된다. 즉, 그것은 어떤 것이 또 다른 것 '아래에 들어간다'는 사태를 표현하는 데에 사용된다. 다른 한편으로 여격 구조는 형상들의 연결에 대한 상당히 일반적인 언급들 내에서 발생하며, 형상들의 어떤 특수한 쌍에 대한 것으로서 아무런 규정된 사태도 진술되고 있지 않은 경우에 발생한다. 물론 이는 - 일상적인 그리스어 용례가 시사하는 바 - 플라톤이 의식적으로 κοινωνεῖν을 두 가지 상이한 방식들로 사용한다는 것을 확신케 한다. 종종 그것은 '연결'의 일반적인 대칭적 관념을 표현하고, 때로는 그것이 규정된 비대칭적 관념, '나누어 가짐'을 표현한다.

  동사 μετέχειν이나 명사 μέθεξις는 『소피스테스』 251-9에서 열 세 차례 등장한다. 이것들 중 하나는 255d4에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콘포드의 논증에서 그에 의해 사용된 구절이다. 하지만 다른 열 두 경우들 모두에서 'A-ness μετέχει B-ness'에 의해 표현된 사실이 A-ness is(계사) B, 그리고 절대로 B-ness is(계사) A는 아님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τὸ ὂν μετέχει θατέρου …는 존재가 …과 다르다는 사태를 정식화한다. 그것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 즉 τὸ ἕτερον 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에 의해 표현되는 사태를 표현하는 데에 등가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이 모든 경우에서 μετέχειν을 사용하는 방식은 그가 그것으로써 대칭적 관계를 의도하였다고 믿기 매우 어렵게 만든다.

  공개적으로 다섯 가지 선택된 유들 사이의 특정 관계들에 대한 진술에 바쳐진 구절, 255e8-257a11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여기에서의 목표는 규정적 사실들을 신중하게, 철학적 용어로 진술하는 것이다. 단지 유들 사이에 연결들이 있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중 일부인 것을 정확히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이 구절에서 (256b9), 개념들의 연결에 대한 순전히 일반적인 언급에서 (εἴπερ τῶν γενῶν συγχωρησόμεθα τὰ μὲν ἀλλήλοις ἐθέλειν μείγνυσθαι, τὰ δὲ μὴ : 만일 정말로 우리가 유들 중 일부는 서로 혼합하려 하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동의한다면.) 
콘포드가 선호하는 은유가 한 차례 등장한다. 그리고 여격을 지배하는 κοινωνία가 똑같이 구체적이지 않은 문맥에서 한 차례 등장한다.(256b9. εἴπερ ἔχει κοινωνίαν ἀλλήλοις ἡ τῶν γενῶν φύσις. : 만일 유들의 본성이 상호에 공유/결합을 지닌다면.) 사용된 다른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소격을 지배하는 κοινωνία가 한 차례 등장하고(256b2) 명명된 두 형상들(κίνησις와 θάτερον) 사이에 견지되는 규정적 관계를 진술하는 데에 사용된다. 진술된 사실은 운동이 ~과 다르다는 것이고, 다름이 운동한다는 게 아니다. μεταλαμβάνειν이 해석 논쟁이 있는 한 구절에서 한 차례 등장한다(256b6). 하지만 그 동사의 의미는 분명하다. 만일 κίνησις μεταλαμβάνει στάσεως (운동이 정지에 참여한다) 라고 말하는 것이 참이라면 κίνησίς ἐστι στάσιμος (운동은 정지하는 것이다)라고도 옳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μετέχειν (혹은 μέθεξις) 은 다섯 차례 등장하며(256a1, a7, b1, d9, e3), 각 경우에서는 첫 번째 형상이 두 번째 형상 아래에 들어가는 명명된 두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표현한다. 그래서 255e8-257a11 대목에서의 실질적인 작업은 모두, 특정 형상들 사이의 실질적 관계들에 대한 설명들 모두, μετέχειν, μεταλαμβάνειν, 그리고 κοινωνεῖν (with genitive) 이라는 용어들에 의해 행해지며, 즉, 콘포드가 그렇게나 단호히 배제하였던 '~에 참여함'이라는 비대칭적 은유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에 참여한다'라는 것의 역할은 플라톤의 용어에서 명백하다: 추상명사, 한 개념의 이름을 지배하는 '~에 참여하다'는 그 추상명사에 상응하는 형용사를 지배하는 'is'(계사)로 구성되는 일상적 언어 표현에 등가이다.

  일부 용어들에 대한 플라톤의 용법에 대한 이러한 검토는, 비록 철저함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내 생각에 '혼합' 은유가 플라톤의 뜻에 대한, 그리고 μετέχειν과 그 변형들인 μεταλαμβάνειν 과 κοινωνεῖν (소격을 지배하는)이 플라톤에 의해 μείγνυσθαι의 단순한 대체물들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정짓는 안전한 단서라는 콘포드의 주장을 의심하기에는 충분하다. 255d, 콘포드가 활용하는 그 구절에서 μετέχειν이 예외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인정될 것이다. 하지만 한 구절이 다른 모든 여러 구절들보다 과장되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

  요약하자면, 나는 첫 번째로, 
플라톤의 철학적 언어에서 μετέχειν과 그 변형들이 일상 언어에서 계사의 역할에 상응하는 역할을 지닌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다양한 진술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플라톤이 계사 (μετέχει …)와 동일성 기호(μετέχει ταὐτοῦ) 그리고 존재사로서의(μετέχει τοῦ ὄντος) ἔστιν들 사이의 차이를 밝힌다는 것 - 그리고 밝히려 한다는 것 - 을 논증하고자 시도하였다.

내용 요약.

  → 251-259까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개념들은 특정하게 규정된 방식으로 관련되며 이 관계를 발견하는 것이 철학자의 작업, 변증이다. 그 일례로 megista gene가 선택되어 그것들이 모두 서로 다르다는 것이 확정되고, 다음으로 이것들의 상호관계가 해명된다. 이를 통해 to on과 to me on에 대한 해석의 관점이 마련되고 이와 관련된 여러 역설과 난점이 해소된다. 이는 logos의 성립을 위한 필연적 조건이다.   → 위 대목에서 플라톤이 계사를 발견했거나 estin의 동일성 진술과 한정 진술 사이에 나타나는 애매성을 인식했는지, 그 문제에 진전을 이루었는지가 문제이다. 그가 그 애매성을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맥락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그 뜻을 해석, 설명, 분석하며, 이것이 진지한 철학적 구명 과정에서 이루어지므로 그는 이 애매성을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존재사, 그리고 계사와 동일성-기호.

 → 플라톤은 estin의 존재사적 용법을 식별해낸다. 예를 들어 dia metechein tou ontos라는 표현은 존재사 estin을 분석한다. 이는 다른 용법들과 구분된다.  → 존재사로서의 estin을 metechei tou ontos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상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metechein이 등장한다.  → 존재사 외에 다른 두 의미는 계사와 동일성이다. 이 의미들의 동화는 동일성 진술이 아닌 참인 진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역설은 두 의미 사이의 차이를 입증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 '운동은 같음이다/같다'와 '운동은 같음이지 않다/같지 않다'는 둘 다 estin을 포함하고 하나는 긍정, 다른 하나는 부정으로 양립 불가능하여 모두 동시에 단언하면 모순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둘은 각기 metechei tautou와 metechei thaterou pros tauton이라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 전자는 계사로서의 estin으로서 metechei로 대체된다. 반면 후자는 동일성 기호로 간주되어 그 부정이 metechei thaterou pros ti 로 대체된다. 이제 계사와 동일성/타자성 사이의 구분이 해명된다. 동시에 어떤 것에 참여한다는 표현을 통해 어떤 것이 어떤 개념 아래에 들어간다는 사태를 보여준다.  

계사와 동일성-기호의 관계.

→ 프레게는 is(estin/ist)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is+보어 형태가 하나의 동사로 대체될 수 있는 경우이다. '이것은 푸른 것이다'는 '이것은 푸르다'로 바뀌어도 의미가 같다. 여기에서 is는 무엇이 어떤 개념(술어) 아래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반면 '샛별은 금성이다'와 같은 진술의 경우 is는 단순히 대체될 수 없다. '샛별은 금성에 다르지 아니하다'로 바꿀 경우 여기에서의 is가 비로소 단순 계사이다.  → 프레게는 단순계사로서 is를 '개념 하에 들어간다'로 파악하고, 동일성 is를 개념이 포함되어 확장된 계사로 간주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역할을 metechei에 부과한다. 그리고 이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개념을 통해 이 metechei를 확장시킨다. 이 과정에서 동일성의 경우 목적어는 tauton, 동일성 부정의 경우 thateron이 된다. → 플라톤은 유들의 결합을 통해 늦게 배우는 자들을 논박한다. 그들은 is를 동일성 기호로 이해하지만, 동일성 기호는 플라톤이 제시하는 결합을 통해 단순한 계사와 개념이라는 요소들로 분석된다.   → 오직 동일성 진술만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결합의 필연성을 말하여 논박하는 방식은 (1) 결합 없는 말이 의미가 없다는 것, (2) '동일성 진술만이 참이다'라는 진술 자체도 결합이라는 것 두 가지이다. 그러나 (2)는 정당한 논박이 아니다. 동일성 진술만이 참이라는 논증 내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주장 자체의 오류가 제시되어야 한다.  → estin의 두 용법들을 구분하고 둘 사이의 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위 주장의 오류가 지적될 수 있다. 

계사와 비대칭적/대칭적 관계.

 → 콘포드는 형상 사이의 관계가 대칭적이므로 계사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 그러나 결합의 방식은 다양하고, 그러한 결합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변증이며 철학자의 작업이라면, 철학자는 다양한 결합 방식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비대칭적 관계도 고려해야만 한다.  → 콘포드의 주장과 달리 플라톤이 제시하는 비유들(철자들, 음들)이 비대칭적이기도 하고, 콘포드에 따를 경우 플라톤의 철학자는 환원불가능한 비대칭적 진리들을 표현할 수도 없다.

  → 비대칭적 관계는 유종관계를 연상시키지만, 그것이 직접 탐구되지는 않으므로 플라톤이 말하는 결합 자체만 놓고 검토해야 한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 '운동이 존재한다'는 '운동이 존재에 참여한다'로 대체될 수 있으며 콘포드식으로는 '운동과 존재가 혼합된다'이다. 콘포드식으로 이는 다시 '존재가 운동한다'와 등가이다. 그러나 이는 플라톤의 의도가 아니다.  →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는 '운동이 정지에 대한 다름에 참여한다'이고 이는 콘포드에 따르면 '정지에 대한 다름이 운동에 참여한다'이다. 콘포드에 따라 이 경우 '운동은 정지와 다르다'가 '정지에 대한 다름(혹은 '정지와 다르다는 것')은 움직인다'와 등가가 된다. →  이 과정에서 지나친 외삽이 있으므로 문헌근거를 좀 더 보강해야 한다.  → 콘포드는 to on이 그 자체인 것과 여타에 대한 것 모두에 참여한다는 점을 형상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의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언급하는 구절 외에는 비대칭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구절 또한 많다.   → 로쓰는 관계를 의미하는 단어가 소격을 지배할 경우 '나누어 가짐'을, 여격을 지배할 경우 '결합함, 통함' 등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는 전자가 특정한 비대칭적 관계를, 후자가 일반적 대칭적 관계를 의미한다는 뜻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 콘포드가 대칭적 관계의 근거로 드는 단어 '혼합'은 그가 제시하는 구절 외에 모두 비대칭적 환원불가능한 관계를 의미한다. 플라톤에게 존재가 다름에 참여한다는 것은 다름이 존재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이다.   → megista gene를 검토하는 255e8-257a11 사이에 등장하는 관계들은 개념들의 일반적인 연결을 언급하는, 콘포드가 지시하는 구절을 제외하면 모두 비대칭적 관계를 의미한다. '추상명사 F에 참여한다'라는 것은 'is 형용사'라는 일상적 표현과 등가이다.  → 콘포드가 지시하는 구절이 예외적이긴 하나 일반적 언급이고 다른 더 많은 구절들이 그의 주장에 맞지 않는다.

  
  1. 아크릴에 따르면 존재사 is는 metechein tou ontos 의 결과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경우에서 metechein F-ness(-genitive)는 is F의 형태로 드러난다. 문제는 후자의 진술에서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to on이 아닌 경우에도 여전히 그 결과로서 is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계사 is가 어떻게 등장할 수 있는가? 여기에 더하여 X metechein tou ontos의 결과는 단순히 there is X일 뿐만 아니라 X is a Being 이기도 하다. 이 둘의 차이가 전혀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전자의 경우 X의 성격이나 상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으나 후자에서는 X가 'X이다'라는 그 자신의 성격이 제외될 수 없다. 그렇다면 굳이 존재사를 따로 떼어 생각할 이유 또한 불분명하다. X의 본성을 그러저러한 것으로 긍정하는 것이 to on과의 결합을 통해 가능한 일이라고 한다면, 여전히 to on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도 to on이 계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에 그런 것들과 무관하게 
'existence'가 독립적으로 그 당시에 이야기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리한 일, 혹은 강하게 말하자면 역시대착오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2. 운동이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은 다름에 참여하기 떄문이다. 정지가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은 같음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 '운동이다/운동이 있다'라는 진술이 가리키는 사태에서만 유독 dia의 의미가 부가적이고 설명적이어야 하는가? 앞서의 문제제기에 따라 metechein tou ontos의 결과와 metechein F(to on을 제외한)의 결과는 다름에도 거기에는 여전히 is가 등장한다. 아크릴은 metechein을 도구 삼아 estin의 다의성을 설명하려 하지만, 이 과정에서 metechein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3. 대칭적 관계와 비대칭적 관계에 동일한 하나의 동사가 사용되기도 하고,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니는 여러 단어들이 또한 그렇게 두 가지 의미 모두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해명되어야 한다. 아크릴은 metechein + genitive 문장을 '~ 아래에 들어간다'로 해석하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에 비추어 그러한 해석을 부여할 뿐,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결과가 나오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설명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실상 『소피스테스』에서 손님이 마주하는 역설을 해결할 길도 확인하기 어렵다. 왜 metechein이 비대칭적으로 이해되는지 모르는 한에서 X metechein Y와 Y metechein X의 구분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 이 과정을 poiein과 paskein의 구도로, 따라서 gignomai(변화를 포함하는 의미에서)의 과정으로 생각한다면 해결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paskein은 의존적인 사태인 반면 poiein은 자발적이고 독립적일 여지가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할 듯하다. 이는 X의 본성, X의 전체, X의 부분들 등의 표현들과 더불어 metechein이 지시하는 사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여지를 마련해 준다. X가 Y에 metechein한다는 것은 Y가 X를 poiein하고 X가 Y에 의해 paskein되는 사태와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무엇이 되었든 어떤 것은 그것 자체로서 자기 자신의 성격, 본질을 기본으로 한다. 즉 같음이 자기 자신과 같거나, 다름이 여타의 것들과 다르거나, 운동이 운동하거나 정지가 정지하거나 혹은 to on esti 등의 사태들에서는 각기 자기술어화를 통해 이런 결과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상호 결합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혹은 '그 자체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상호, 즉 다른 것에 대한 결합이 필요하고 이는 수동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같음은 정지에 의해 정지가 되고, 정지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들'을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같음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같은' 것으로서 '정지'해 있고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으로서 다름의 작용을 받는 식으로 '운동'하지 않는 한, 그 같음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발화하거나 사유할 아무런 방법도 없고 그것을 가리킬 이름조차 없게 된다. 본질적인 중심과 부수적인 극단들을 부분들로 가지는 전체,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가 난관을 피하기 위해 요구받았던 조건들이다.

  4. megista gene 사이의 결합은 같거나 다르다는 단순한 결과를 낳는다. 반면 진술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여러 술어들이 참이고 또 이것들과 다르고 서로 또 다른 여러 가지 술어들이 거짓이기도 하다. 참인 부정진술도 있고 거짓인 긍정진술도 있다. 특히 megista gene 사이의 결합관계는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거기에서 묘사된 바로 그런 방식의 결합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전혀 알 수도 가리킬 수도 없다. 반면 과연 테아이테토스는 필연적으로 날지 못하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혹은, 날아다닌다고 하여 테아이테토스가 테아이테토스가 아니게 되는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두 경우 모두에서 is와 is not이 같은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 is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바탕으로 유들의 결합이라는 사태와 이름과 동사의 결합이라는 진술, 두 구조 사이의 차이를 통해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는 쪽이 더 건전한 것으로 보인다. metechein이 계사를 의미하고 

  5. 다름의 부분들이 나뉘어 들어가는 것은 특정 X가 특정 Y와 다르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X는 ~X인 불특정의 일반에 대해서도 다르다. 아크릴은 아무런 설명 없이 '운동과 다름,' '정지와 다름' 등 특정한 다름'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to me on은 어떤 식으로 설명되는가? 그는 다름으로서의 to me on만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to on과의 결합을 부정하는, 불가능한 to me on, to on과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to me on, to on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to me on이 모두 달리 이해될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들 중 어느것으로도 만족스럽게 거짓을 정의할 수 없다.

  6. 늦게 배우는 자들이나 혹은 진지한 고찰을 통해 그들과 같은 주장을 하는 자들이 정말로 동일성 명제만이 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가? A, B, C라는 나열, 호명도 가능하다. 보어 없는 is는 'it is the case,' 'it's true,' if X, then Y. X is. therefore Y (양화 없이, 혹은 전칭으로) 등으로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사실상 to on과의 결합이 상정되지만 표면적으로는 오직 분리만을 주장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다. 늦게 배우는 자들이든 진지한 자들이든, 그들에 대한 언급 이후로 제시되는 것은 결합과 분리에 관한 세 가지 가능성들이다. 

  7. 동일성 기호와 계사를 구분하는 것이 '늦게 배운 자들'에 대해 정당한 논박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ad hominem 아닌가?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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