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쪽]이 짧은 논문의 목적은 플라톤의 『소피스테스』에서 문장이란 것의 의미와 함축들을 고찰하는 것이다. 유들의 결합에 관한 부분 말미에서 손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의 분리는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제거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이 표현의 후반부에 주목할 것이며, 간결성을 위하여 이를 문장이나 진술 S라 칭할 것7이다.
  콘포드는 문장 S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우리에게 가능한 어떤 논의이든 그 현존은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 그의 주석에서 그는 이렇게 적는다. '모든 논의는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 … 그것은 형상들이 모든 논의의 의미에 유일한 요소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개별적인 사물들에 대해서도 진술들을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진술 각각이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참)이다.' 몇 행 뒤 콘포드는 S에서 플라톤에 의해 구성된 핵심은 '모든 진술이나 판단이 최소한 하나의 형상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후 그는 플라톤이 "모든 논의는 형상들의 결합에 의존한다"라고 말했다고, 즉,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개입한다고 말했다고 언급한다.(Cornford, 'Theory of Knowledge', 314쪽.)
  콘포드는 플라톤이 진술들에 '포함된' 혹은 '사용된' 형상들에 관하여 뭔가 말하고 있다고 당연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진술이 다수의 형상들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한다. [73쪽]몇 쪽 뒤 플라톤 자신의 예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명백한 실책을 플라톤에게 돌리는 일을 피하기 위해, 그는 S를 모든 진술이 형상들의 엮임을 사용하거나 포함하거나 혹은 그것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물론 형상들의 결합이라는 바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아니다, 우리가 '서로간의(ἀλλήλων)'라는 단어를 고려할 때 특히나 분명하기에. 이 단어를 콘포드는 그의 번역에서 빠뜨렸다. '논의는 형상들의 "상호" 엮임에 의존한다.' 이것이 단지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적어도 하나의 형상은 개입한다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그 누가 가정할 수 있을까? 만일 S가 어떤 logos에든 포함되는 형상들에 관하여 무언가 말한다면, 그것이 말하는 바는 반드시 형상들의 엮임이 어떤 logos에든 포함된다는 것이어야만 한다. 만일 이 후건이, 플라톤의 이후 예시들에 의해 보이듯, 명백히 거짓이라면, 우리는 S가 logoi들에 포함되는 형상들에 관하여 무언가 말한다는 가정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로쓰가 우리의 이 구절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지 간단히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기로 손님은 '모든 논의들이 말하는 자 혹은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고, 문장은 주어 역할을 할 고유명사, 형상이나 보편자를 나타내지 않는 고유명사를 지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장의 술어는 통상 형상을 나타내고, 진술들의 모든 주어들은 고유명사들을 제외하고는 형상들 또는 형상들을 수단으로 하여 기술되는 것들을 나타낸다.(W. 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1951, 115쪽.)' 로쓰는 S가 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모든 진술 각각은 최소한 두 형상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이것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지에 주목하자. 그는 S에 대한 우리의 해석에 있어서 그것이 노골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라고, 아마도 우리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로쓰는 (그의 해석에 있어서) 그것을 과장이라 부름으로써 S의 거짓을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하지만 물론 플라톤은 모든 logoi에 대해 참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259e4, 260a9). 그래서 S는 로쓰의 해석에 있어서 단지 거짓이고, 두드러지게 거짓이다. 무난한 오독은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드러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예시들에 대해 말하면서, 로쓰는 그 문장들이 S(그가 해석하는 한에서의 S)를 반박한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이 '플라톤의 주장을 실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자못 진지하게 모든 철학자들이 성격이 좋다고 단언한다면, 그리고 곧장 계속해서 내가 아는 성격 나쁜 철학자들에 대해 떠든다면, 당신은 내 예시들이 '내 주장을 실증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74쪽] 물론, S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긴 했다. 당연히 그것이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해당 진술들이 명백히 S에 대한 반박들이라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확실히 그것은 모든 진술 각각이 형상들(혹은 '형상들을 수단으로 하여 기술되는 것들'조차')을 단언하거나 그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아야 한다. 그럼 그것은 어떻게 이해되는가?
  플라톤이 형상들의 엮임을 다루기 전에 말했던 것으로 돌아가 보자. 그가 선택된 여러 형상들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던 부분이 아니라 - 이 부분은 비교적 각론의 문제이다 - 오히려 251d-252e, 형상들의 엮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함을 보여주고자 추구하는 부분으로 가 보자. 진술 S는 모든 logoi를 위한 형상들의 엮임의 필연성에 관한 뭔가를 말한다. 이를 플라톤이 그러한 엮임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추구하는 첫 번째 자리에서 사용된 논증들을 고찰함으로써 해명하는 일이 합당하다. 
  플라톤은 이 앞선 구절에서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든 형상 각각이 다른 모든 형상 각각과 결합한다. (2) 아무런 형상도 그 어떤 다른 형상과도 결합하지 않는다. (3) 형상들의 몇 쌍들은 서로 결합하는 반면, 다른 형상들은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처음 두 가능성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확정짓는다. 그리고 그것이 이어서 형상들의 엮임으로서 이야기된 이러한 형상들의 제한된 상호결합이다. 이 마지막 가능성에 대한 논증은 사실상 다른 두 가능성들을 반증하는 논증들로 구성된다.
  첫 번째 가능성은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진술들이 귀결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모순적이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ταῖς μεγίσταις ἀνάγκαις ἀδύνατον). 그래서 만일 그러한 일들이 (1)에 의해 함축된다면, (1)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일반화하면, 만일 B에 대해 A가 주장되는 진술이 자기모순적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는 형상 B와 결합하지 않음이 귀결된다. 우리는 플라톤이 '결합'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자 시도하고 있기에, 여기에서 그의 논증에 대한 타당성에 제기할 문제는 있을 수 없다. 여기까지 드러나는 것은 형상들의 상호결합에 대한 일부 제한이 일부 문장들은 자기 모순적인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시사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μηδεμία σύμμειξις-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두 부분을 가진다. 첫째,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세계의 현실, 변화, 구조, [75쪽]태에 관하여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모든 이론들은 공허하고 헛된 것일 터이다. 다원론, 일원론, 엘레아학파, 헤라클레이토스학파, 그들 모두가 'λέγοιεν ἂν οὐδέν, εἴπερ μηδεμία ἔστι σύμμειξις.' 만일 정말로 아무런 엮임도 없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2)에 대한 진술들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 진술을 함에 있어서 구성요소들은 단어들을 문장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것들은 그 고유한 주장에 모순된다. 그것들을 반박하는 데에 다른 것이 필요치도 않다. οἴκοθεν τὸν πολέμιον καὶ ἐναντιωσόμενον ἔχουσιν. 그것들은 자체적으로 적과 모순을 지닌다.
  이 점을 고찰함에서 있어서 우선, 우리는 정확히 어떻게 (2)를 주장하는 자들이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반박되어 버리는지 주목해야만 한다. 그건 물론 그들이 직접적으로 엮임을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기도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2)에 대한 진술이 필연적으로 (2)의 거짓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유사한 종류의 논증들이 다른 곳에서 플라톤에 의해 사용된다. 249c에서 그는 주장의 참이 실상 그 누구도 아무것도 아는 일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러한 주장의 특정한 진리치에 대해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조롱한다. 혹은 『소피스테스』 244를 참고하라. 오직 단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이론은 반드시 거짓이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참일 수 없다. '오직 하나만이 존재한다'는 진술은 상이한 의미들을 가진 상이한 여러 단어들이 없는 한 전혀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진술의 의미는 필요조건으로서 그 진술 자체의 거짓을 전제한다.
  '아무런 형상도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자기 논박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 의미가 일부 형상들이 결함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형상들의 결합에 관한 플라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또 다른 실마리가 있다. 어떤 진술들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형상들의 어떤 짝들이 양립불가능한 것들이라는 것의 증명으로 간주된다. 이제 특정 진술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어떤 형상들이 다른 형상들과 결합을 행한다는 것에 대한 증명으로 간주된다. 플라톤의 결론, 형상들 사이에 결합관계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형상들의 모든 쌍들 사이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어떤 문장들이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장들은 그렇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존한다. 전자는 친근성 혹은 양립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하고, 후자는 적대성 혹은 양립불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한다.
  (2)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의 첫 번째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아무런 엮임도 전혀 없다면, 사물들에 대한 철학자들의 모든 설명들은 공허할 것이다. 그것들은 전혀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을 것이다. 후자가 내가 λέγοιεν οὐδέν을 해석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이 표현은 물론 단순히 '거짓을 말하는 것'이나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진짜 진술은 전혀 아무것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 [76쪽]'뭔가를 말함에 있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내게는 여기에서 논증이 이러한 후자의 의미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만일 아무런 엮임이 없다면, 어떤 이론에 대한 아무런 진술도 의미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λέγειν οὐδέν이 단지 '거짓인 것을 말한다'를 의미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럼 (a) 그 논증은 명백히 결정적이지 못할 것이다. 대안으로서 (2)가 철학자들의 그러한 모든 이론들이 거짓임을 함축하였다고 간주한다면, 물론, 그것들은 아마도 거짓일 것이다. 플라톤 자신이 그런 이론들의 진위에 관하여 결정하기는 어렵다고 언급한다(243a2-3). (2)가 나열된 이론들의 거짓을 함의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은 그가 그러한 이론들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확고한 신봉자일 경우가 아닌 한 (2)가 거짓임을 누구에게도 전혀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b) 다시, λέγειν οὐδέν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왜 (2) - 그 어떤 형상도 결합하지 않는다 - 가 그 이론들이 거짓임을 함축해야 할지는 완전히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그 이론들은 형상들에 관한 모든 이론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세계와 그 진행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특정 형상들이 결합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아무런 형상들도 결합하지 않는다는 가정이 그의 이론을 필연적으로 거짓이도록 만들겠는가? (c) 그렇지만 만일 언급된 철학적 이론들이 사실상 형상들이 결합한다는 것을 주장한다는 것이 주장된다면, 그 결론은 플라톤의 논증이 부당하지 않고, 그러나 완전히 방향을 잃었다는 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형상들이 결합해야만 한다는 것,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이 그러하다고 말한 모든 철학자들이 틀렸으리란 것을 의미할 터이기 때문이다.
  λέγειν οὐδέν이 '거짓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플라톤의 논증이 빈약하고 불분명하며 방향성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개연성 있고 분명하며 상당히 적절한 논증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이것이 저 해석을 의심할 좋은 근거이다. 만일 우리가 그 표현을 '아무런 제대로 된 진술도 구성하지 못함, 뭐가 되었든 아무런 logos도 전달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 논증은 적절히 자리를 찾게 된다. 만일 개념들 사이의 아무런 연관도 없다면, 철학자들의 진술들(더욱이, 모든 진술들)은 단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자기-모순적 진술들이 있다는 것의 전제가 어떤 개념쌍들은 결합하지 않으리란 것인 바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의미를 지니고, 자기-모순적이지 않은 진술들이 있다는 것(참이든 거짓이든)의 필요조건은 어떤 개념들이 결합하리란 것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플라톤이 형상들의 결합이 있다고 증명하는 과정에서 구성하고 있는 핵심들이라고 제안한다. 인간의 논의는 오직 일반적 단어들의 의미들이 규정된 방식들에서 관련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들이 의미있는 문장들을 구성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규정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언어에 본질적이다. 개념들의 상호관련들(포함, 양립불가능, 기타 등등)을 입안하는 것은 변증의 작업이다.(『소피스테스』 253b-e 참조).
  [77쪽] 내게는 S에 대한 내 해석이 - 콘포드와 로쓰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그 표본적인 logoi들에 관련하여 아무런 난점도 없음을 보일 책임이 분명히 있다. 나는 '형상들의 결합 없이는 아무런 logos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언명이, 여러 logoi가 예를 들어 한 고유명사와 함께 오직 하나의 일반 명사를 포함한다는 사실에 의해 타당성을 잃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보여야만 한다. 논리학 이론에 관한 최근의 한 저술을 인용하는 것이 이 점을 분명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들 중 하나는 사건들을 보고하고 사물들이나 사람들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러한 보고들과 기술들은 다음과 같은 형식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과 같다. 그것은 무엇과 같았나? 그것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는 무언가를 기술하고, 그것에 우리가 다른 것들에 적용시키도록 준비된 단어들을 적용시킴으로써 무엇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모든 것들에 적용시킬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예외 없이 모든 각각의 것에 적용시키고자 마련한 단어(최근 대중적이며 특히 군사용어로 사용되는 특정 단어들 같은 것들)는 기술을 목적으로 해서는 쓸모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 같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은 다른 것들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두 가지 행위들이 아니라, 같은 행위의 두 측면들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반드시 경계가 그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사물들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적용가능성을 한계짓는다.
  대체로 같은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형이상학』 Γ권 4장에서, 그가 모순율을 주장하는 곳에서 구성된다. 그는 모순율이 증명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증명이 되었든 필연적으로 문제가 되는 그 원칙을 사용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신이 누군가에게 이 원칙의 필연성을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그가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말할 것이라면, 한정된 의미를 가지고 그리 할 것이라면. 왜냐하면 당신은 그에게 그가 반드시 그의 진술을 이러저러한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의도해야만 한다는 것, 최소한 하나의 다른 진술과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의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진술과 양립 가능한 진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ἀρχὴ … τὸ ἀξιοῦν … σημαίνειν γέ τι καὶ αὑτῷ καὶ ἄλλῳ. τοῦτο γὰρ ἀνάγκη, εἴπερ λέγοι τι. εἰ γὰρ μή, οὐκ ἂν εἴη τῷ τοιούτῳ λόγος, οὔτ᾿ αὔτῷ πρὸς αὑτὸν οὔτε πρὸς ἂλλον. ἂν δέ τις τοῦτο διδῷ, ἔσται ἀπόδειξις. ἤδη γάρ τι ἔσται ὡρισμένον. 원리는 적어도 그 자신에게든 다른 자에게든 무언가 의미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무언가 말하려면 이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자에게 그 자신을 향해서든 다른 자를 향해서든 진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 점을 제시한다면, 그것이 증명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무언가 규정된 것일 터이기 때문이다.1006a18-25). 플라톤에게로 돌아가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라는 진술은 오직 그것이 무언가를 제외시키기 때문에만('테아이테토스는 앉아 있지 않다'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테아이테토스는 서 있다') [78쪽]진정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진술이다. 그것이 뭔가를 제외시킨다고 말하는 것은 두 개념들('앉음'과 '앉지 않음' 혹은, 좀 더 한정적으로, '앉음'과 '서 있음') 사이에 양립불가능성이 있다고(μηδεμία κοινωνία) 말하는 것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철학자는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규칙들을 끌어낸다. 그런 관계들이 있다는 것, 그런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언어라는 게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형상들 상호간의 결합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한다.
  이 약간의 언급들은 반드시 어떻게 형상들의 엮임이 뭐가 되었든 모든 각각의 진술에 의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포함해 모든 진술들에 의해 전제되는지 보여주는 데에 충분한 것이어야만 한다. 플라톤이 그 점을 테아이테토스 예시들과 관련하여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것은 다른 주제에 대한 논의에서 사용된다. 여전히, 그것은 관련된 주제이다, 그것이 두 진술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포함하기에. 그리고 나는 만일 우리가 플라톤에게 S를 이 사례들과 부합시키길 요구했다면, 그가 위에서 대강이 제시된 그 방식으로 그리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이것은 플라톤이 S에 전적으로 조화시킬 수 없었을 logoi의 사례들을 사용하여 S를 보충한다는 가정보다는 더 그럴 듯해 보인다.
  나는 점진적으로 형상들에 관한 논의에서 개념들에 관한 논의로 진행하였고, 이것들을 사실상 일반 명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나는 플라톤의 후기 대화편들에서 변증가나 철학자에게 할당된 작업이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연구와 구성, 문장에서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이 의미를 구성하고 또 구성하지 않는지를 애매성을 해명하고 구별들을 지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어떻게 정확하게 말할지 아는 한에서 그것들에 대해 잠재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식을 지님에도, 우리가 통상 진술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단어 의미들의 관계들에 관하여 명백히 사실들을 진술함으로써, 주목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차분한 탐구를 통해 추구될 작업이라는 점을 시사하였다. 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명백히 요구하는 엄격한 여러 조건들을 추가하는 것은, 꽤나 분량을 요구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결론으로 오직 두 가지 작은 점들만을 언급할 수 있다.
  플라톤이 의심의 여지 없이 그가 앞서 기술하였던 변증술을 구현(실행)하는 『소피스테스』의 대목(254b 이하)이 있다. 그는 우선 특정 형상들(253d1-3 참조)을 구별하고, 다음으로 그것들의 관계들을 결정한다(253d9-e2 참조). 플라톤이 이 대목에서 하는 일이 너무 명백해서 반박될 수 없는 진리들에 호소하는 것이란 점을 주의하는 일이 중요하다. [79쪽]특히 언어를 아는 그 누구라도 즉각 인정해야만 하는 그러한 진리들에 대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단순한 치환 논증에 의해 being은 sameness와 다른 것으로 증명된다(255b8-c4). 만일 그것들이 다르지 않다면, 그 두 가지 것들에 대해 그 둘 모두가 현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들 둘 모두가 같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는 운동이 정지와 더불어 둘 모두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둘 모두가 같음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고 더욱이 그건 부조리할 것이다. Being이 sameness와 다르다는 변증가의 진술은 단지 우리로 하여금 명백하게(혹은 새로운 차원에서) 우리가 이미 어떤 식으로 알고 있는 단어의 의미들에 관한 사실을 보도록 해주는 것뿐이다. 변증가는 우리가 이미 그걸 가지고 말하고 있는 그 규칙들을 명시적이게 만든다.
  끝으로,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언급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비판들에 대한 탐색 이후, 파르메니데스는 계속해서 이데아론이 구조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이를 위해 대단하고도 교묘한 기술이 요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135b). '만일 이 모든 그리고 이와 유사한 반론들을 바라봄에 있어서 사물들의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면, 혹은 각 경우에서 한정적 형상을 구별하는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그의 사유를 정착시킬 아무것도 가지지 못할 것이고, 각각의 실재 사물이 언제나 같은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인 한에서 그러할 것이다. 또한 그래서 그는 의미있는 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릴 것이다.' 이 구절은 파르메니데스의 입을 통한 강력한 비판들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 그의 이데아론을 완전히 폐기할 것을 제안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건 아마도 그가 스스로 그 이론의 개정판을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이론을 버린다고 말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반면에 말이다. 어쨌든, 인용된 구절은 강력하게 그가 지금 확신하는 것이 중기 대화편들에서 구상된 형상들이, 윤리적 이념들로서 그리고 직관의 형이상학적 대상들, 그리고 아마도 신비적 통찰의 대상들로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시사한다. 그가 지금 확신하는 것은 말의 의미를 보장하는 고정된 사물들, 고정된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그 역할이 논의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그런 것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소피스테스』는 더욱이 이러한 개념들이 상호의 특정한 규정된 관계들 내에서 성립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변증가에게 개념들의 경계들과 상호관계들을 탐구하는 작업을 부과한다.


  형상들 상호의 엮임이 진술의 성립 조건이다. 이 문장의 의미를 콘포드는 '모든 진술은 적어도 하나의 형상에 관한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반면 로쓰는 이를 '모든 진술은 적어도 둘 이상의 형상들을 엮는 것이다.' 라고 해석한다. 전자의 경우 S에서는 다수의 형상들에 대해 그것도 그것들 상호의 엮임을 논하고 있으므로 그 표현이 콘포드의 해석과 갈등을 일으킨다. 이는 다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의 사례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즉 플라톤이 S와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의 사례들을 언급하면서 일관성을 잃었거나, 로쓰의 S에 대한 해석이 잘못된 것이다. 로쓰는 전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에 따르면 S는 모든 진술이 둘 이상의 형상들을 결합시킨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통해 볼 수 있듯 참이 아니다. 로쓰는 이를 과장에 의한 것이라 얼버무리고, 소극적으로 테아이테토스 사례가 S를 실증하지 않는다고만 말한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플라톤이 일관성을 잃었다는 비판에 다름 아니다.

  플라톤이 일관성을 잃지 않으면서 S가 모든 진술들에 대해 참이게끔 해석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형상들의 엮임에 대한 이전의 논의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형상들의 엮임에 관련하여 플라톤은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두 엮인다. (2) 아무것도 엮이지 않는다. (3) 일부는 엮이고 일부는 엮이지 않는다. (1)의 경우 자기모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진술이 성립하게 된다. A is B가 자기모순이며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와 형상 B는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전건이 (1)에 의해 함축된다면 (1)은 모순이므로 폐기된다. 다음으로 (2)에 관하여,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a. 무엇이 어떠하다고 말할 수 없다. b. 단어들의 결합으로서 문장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형상들이 분리된다/결합하지 않는다'는 진술 자체가 형상들의 결합을 전제하고, 따라서 자기 자신의 거짓을 전제한다. 진술의 의미는 형상들 상호의 결합에 대한 증명이다. 진술의 무의미 혹은 모순이나 논리적 불가능성은 형상들 상호 분리의 근거이다.

  개념들 사이의 연관 없이 진술은 무의미하다. 자기 모순적이지 않으면서 진리치를 갖는(참/거짓) 진술의 성립은 개념들의 결합을 전제한다. 이러한 개념 연관을 구성하는 것이 변증이다. 이제 하나의 고유명사와 더불어 단 하나의 형상만으로 구성되는 진술이(테아이테토스의 진술 사례들), 이상의 해석에 따르는 의미에서 '모든 진술에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제된다.' 라는 주장(S)과 양립가능함을 보여야 한다.

   언어는 보고나 기술을 위한 것이다. 이는 어떤 것들에는 적용되고 또 다른 것들에는 적용되지 않는 단어를 특정한 어떤 것에 적용시켜 그것들을 다른 것들과 관련시키고 또 다른 것들과는 구별해내는 행위이다. 이는 한 행위의 두 측면이다. 어떤 것에 대한 진술은 다른 것들에 대한 배제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이러한 언어 규칙은 개념들 사이의 관계에서 도출된다. 양립 불가능한 개념쌍이 있고, 그 중 한 개념을 적용시킴으로써 다른 개념이 배제된다. 이것은 언어 사용의 필요조건이다. 플라톤이 직접 S를 아크릴의 해석에 따라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 적용시키지는 않지만, 이 해석은 S를 진술들에 부합시키는 데에 유효한 해석이다. 반면 앞서 콘포드나 로쓰의 해석은 이러한 부합을 수행하기에 무리가 있다. 변증가나 철학자의 작업은 개념들의 관계를 연구하여 단어들의 결합을 통한 문장의 의미 구성 방식을 해명하는 일이다.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이러한 개념들의 관계이다. 

  변증술은 개념들의 결합과 분리를 논하고, 이는 언어 사용자 일반이 무의식 중에 전제하는 조건이다.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은 중기까지의 윤리적 이념들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이데아들을 주장하는 그 이론이 사유를 정착시킬 무언가를 구성할 것을, 고정된 사물 혹은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의 가능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을 고찰함으로써 플라톤이 이해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콘포드의 입장과 로쓰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둘 모두 여기에서 형상들의 엮임을 진술의 요소 혹은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플라톤이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은 개별자와 형상의 관계로서 이러한 해석에 배치된다. 그러나 이 사례들 역시 '모든 진술'에 포함되는 일종의 진술이며,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플라톤에 따를 경우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므로 이 사례들 역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그에 대해 참인 것으로 밝혀져야 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적인 상호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상호 결합도 아님을 문헌을 근거로 논증한 뒤, 이것이 문장의 의미가 구성되기 위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전제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개념의 결합 과정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의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이 직접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에서 주제가 되는 참과 거짓의 문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안은 플라톤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논리적 규칙은 언어의 사용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참이다. 나아가 이것은 초중기 이데아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일종의 개선된 대안으로 이해될 여지를 열어준다. 


1. ΣΥΜΠΛΟΚΗ ΕΙΔΩΝ의 기존 해석과 한계 (72-73쪽)


Τελεωτάτη πάντων λόγων ἐστὶν ἀφάνισις τὸ διαλύειν ἕκαστον ἀπὸ πάντων· διὰ γὰρ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소피스테스』 259e4-6.)


위 인용은 앞선 요약에서 to on과 to me on에 대한 문제를 변증술을 통해 극복한 이후 이어지는 손님의 말이다. To on이 to me on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모순들(ἐναντιώσεις)을 받아들여야 하며, 모든 것을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는 거부해야 한다는 논의에 이어, 손님은 “모든 것들로부터 각각의 것을 분리시키는 일은 모든 진술들의 궁극적인 파괴이다. 왜냐하면 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발언은 이어 진술(λόγος)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분석으로 두 대화자를 이끌게 된다. 

Ackrill은 해당 논문에서 인용된 구절의 후반부에 주목한다. 그는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의 성립 조건이라고 할 때에, 과연 여기에서 말하는 진술, 문장, 즉 logos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 함축들은 어떠한 것들인지를 형상들의 엮임을 통해 파악하고자 시도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선 해당 구절에 대한 기존의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들을 소개하고 검토한다. 그는 F. M. Cornford의 Plato’s Theory of Knowledge(1935), W. D. Ross의 Plato’s Theory of Ideas(1951)에서 제시된 각 해석을 검토한다.

Ackrill은“형상들 상호의 엮임으로 인해 우리에게 진술이 성립한다.”라는 문장을 논의의 간결성을 위해 S로 명명한다. Cornford에 따르면 S는 모든 진술이 형상들의 엮임에 의존한다는 의미이다. 이 의존이 오직 형상들만이 진술의 요소라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진술 각각은 반드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은 포함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참)이다. 그는 S가 지적하는 점이 '모든 진술이나 판단이 최소한 하나의 형상에 대한 사용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즉, 어떤 진술의 의미에든 최소한 하나의 형상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Cornford, 314쪽.)

그러나 Ackrill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번역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플라톤의 논의와도 일관되지 못하며, 그 해석이 문장 S 자체의 의미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우선 플라톤이 S 이후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련한 사례들은 개별자로 보이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이다. 즉 여기에서는 형상과 형상 사이의 결합이 아닌 적어도 개별자인 주어와 술부의 형상이 결합되고 있다. 또한 S에서 ‘서로 간의(ἀλλήλων)’라는 단어는 그의 번역에서 탈락되어 있다. 또한 ‘형상들의 엮임’이라는 말은 진술에서 최소한 하나의 형상을 사용한다는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따라서 S가 진술에 포함된 형상에 관한 논의라는 것은 의심스럽다.

Ackrill에 따르면 Ross는 S가 ‘모든 진술은 최소한 두 형상들을 포함한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Ackrill과 다르다. 그러나 Ross는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에 의한 형상들의 엮임을 말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S가 진술에 포함된 형상에 관한 논의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해석에 따를 경우 형상이나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를 주어로 갖는 진술 때문에 S는 거짓이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은 S을 모든 진술들에 대해 참인 것으로 말한다(259e4 ‘πάντων λόγων’, 260a9 ‘οὐδὲν … λέγειν‘). 더욱이 플라톤은 앞서 언급하였듯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을 사례로 들어 진술을 분석하고 있다. 즉 Ross의 해석에 따를 경우에도 플라톤은 일관성을 상실한다. 그럼에도 Ross는 이 비일관성을 지적하지 않고 단지 그 사례들이 S를 입증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얼버무린다. 



2. ΣΥΜΠΛΟΚΗ ΕΙΔΩΝ의 필연성(251d-252e) (74-75쪽)


S에서 논하는 형상이 진술에 사용되거나 그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경우 앞서의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S는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어야 하며, 그러한 한에서 플라톤이 자신이 제시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의 사례에도 부합해야 한다. 우선 S가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라는 점을 고찰하기 위해 형상들의 엮임이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인지 증명하는 플라톤의 논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 251d-252e에서 플라톤은 이러한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여기에서 세 가지 가능성들을 나열한다. (1) 모든 형상 각각이 다른 모든 형상 각각과 결합한다. (2) 아무런 형상도 그 어떤 다른 형상과도 결합하지 않는다. (3) 형상들의 몇 쌍들은 서로 결합하는 반면, 다른 형상들은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 처음 두 가능성들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세 번째 가능성을 확정짓는다. 형상들의 엮임은 이렇듯 형상들의 제한된 상호결합이다.

  모든 것이 서로 결합한다면 상호 모순되는 것들도 결합한다. 이를 통해 구성된 진술은 자기모순적인 진술이다. 만일 B에 대해 A가 주장되는 진술이 자기모순적이고,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형상 A는 형상 B와 결합하지 않음이 귀결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부 문장들은 자기 모순적인 진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의해 형상들의 상호결합에 대한 일부 제한이 시사된다는 것이다. 

(2)에 대한 플라톤의 반박은 두 부분이다. 첫 번째, 만일 정말로 아무런 엮임도 없다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2)에 대한 진술들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 진술을 함에 있어서 구성요소들은 단어들을 문장으로 결합시켜야만 한다. 이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첫 번째 반박은 다시 말하면 (2)에 대한 진술이 필연적으로 (2)의 거짓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249c에서 앎, 지혜, 지성과 분리된 채로 영혼이 있을 수 없다는 논증이나 244에서 to on과 하나, 혹은 하나와 그 이름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논증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2)는 필요조건으로서 그 자체의 거짓을 전제한다.

  '아무런 형상도 서로 결합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그 의미 자체가 일부 형상들이 결함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어떤 진술들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형상들의 어떤 짝들이 양립불가능하다는 점을 증명한다. 특정 진술이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어떤 형상들이 다른 형상들과 결합을 행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플라톤의 결론, 형상들 사이에 결합관계들이 있다는 것, 하지만 형상들의 모든 쌍들 사이에서 그렇지는 않다는 것은, 어떤 문장들이 의미를 가지고 어떤 문장들은 그렇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존한다. 전자는 친근성 혹은 양립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하고, 후자는 적대성 혹은 양립불가능성 개념의 현존을 전제한다.



3. ΟΥΔΕΝ ΛΕΓΕΙΝ. (75-76쪽)


(2)에 대한 첫 번째 반박은 아무런 엮임도 전혀 없을 경우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란 것이다. 여기에서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란 의미로도, 거짓을 말하리란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240d-241a. 혹은 『에우튀데모스』, 『국가』 등 참조). 그러나 이를 ‘거짓을 말함’으로 이해할 경우 우선 (2)는 252b에서 나열된 주장들이 거짓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플라톤 자신이 이 이론들의 반박 근거로서 ‘아무런 섞임도 없다’는 것을 그 이론들이 받아들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지 않기도 하다. 또한 ‘아무런 섞임도 없다’는 것이 거짓을 말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과정 또한 불분명하다. 252b의 주장들은 형상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해 논하고 있지 않다. 단지 플라톤은 형상들의 섞임이 부정될 경우 이 이론들이 어찌 되는지에 대한 결론으로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을 내세울 따름이다. 끝으로 이 주장들이 형상들의 결합을 주장하는 것들이며, 섞임이 없을 경우 이 주장들이 거짓이 된다는 뜻으로 (2)를 이해한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논증이다. (2)가 사실이라면 (2)를 부정하는 자들은 거짓이라는 식의 논증은 해당 부분의 논의 맥락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οὐδὲν λέγοιεν’이 거짓을 말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면 이는 쉽게 이해된다. 개념들이 결합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결합하지 못할 것이고 그 경우 진술이 성립하지 않을 것이므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모순적인 진술들은 결합하지 않는 개념쌍들을 전제한다. 반면 의미를 지니는(참이든 거짓이든) 진술들이 있다는 것은 개념들의 결합을 또한 전제한다. 진술은 오직 일반적 단어들의 의미들이 규정된 방식들에서 관련되기 때문에만 가능하다. 단어들의 어떠한 결합들이 의미있는 문장들을 구성하고 또 그렇지 않은지 결정하는 규정된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언어에 본질적이다. 개념들의 상호관련들(포함, 양립불가능, 기타 등등)을 입안하는 것은 변증의 작업이다.(『소피스테스』 253b-e 참조).



4. 언어의 요조건. (77-78쪽)


앞서의 논의를 통해 형상들의 엮임이 진술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을 위해 전제되는 것임이 밝혀졌다. 이제 S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 사례들에 부합한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한다.

언어는 사건을 보고하고 사물이나 사람을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언어는 어떤 것이 무엇 같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다른 것들과 비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해낸다. 이런 것들은 두 가지 행위들이 아니라, 같은 행위의 두 측면들이다. 그래서 어딘가에 반드시 경계가 그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사물들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단어의 적용가능성을 한계짓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Γ권 4장에서 모순율을 설명하면서, 한정된 의미를 가지고 무언가를 말한다면, 그 진술이 이러저러한 진술을 배제해야 하며, 최소한 하나의 다른 진술과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고 전한다. 다른 모든 진술과 양립 가능한 진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필요조건이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도 적용된다.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에서 ‘앉아 있음’은 ‘앉아 있지 않음’들, 더 정확히 말해 ‘서 있음’을 배제하는 한에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이러한 개념들 사이에 양립불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념들 사이의 관계들을 연구함에 있어서, 철학자는 언어 사용을 규제하는 규칙들을 끌어낸다. 그런 관계들이 있다는 것, 그런 규칙들이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언어라는 게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Διὰ τὴν ἀλλήλων τῶν εἰδῶν συμπλοκὴν ὁ λόγος γέγονεν ἡμῖν.



5. 결론. (78-79쪽)


플라톤이 S를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들에 직접 관련시키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후자에서 두 진술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포함하기에 두 문제는 서로 관련이 있다. 또한 S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앞서의 두 해석들보다 이 사례들에 더 잘 부합한다.

Ackrill는 자신이 형상들에 관한 논의를 점차 개념들에 관한 것으로 전개시켰고, 이것들을 일반 명사들로 취급하였다고 말한다. 이는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고 단어들 사이의 관계와 문장의 구성을 고찰하여 언어의 규칙, 조건을 해명하는 일이 변증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당화가 부족함을 시인하며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Ackrill에 의하면 254d 이하에서 플라톤은 형상들 사이의 양립가능/불가능을 검토하면서 언어를 아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리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어들의 의미 사이의 양립가능성에 대한 논의들이다. 변증가는 언어의 규칙들을 명시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데아론에 대한 비판은 중기까지의 윤리적 이념들 혹은 형이상학적 직관의 대상들로서 이데아들을 주장하는 그 이론이 사유를 정착시킬 무언가를 구성할 것을, 고정된 사물 혹은 개념들 - 일반 명사들의 의미들 - 의 가능성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소피스테스』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2. 평가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진술에 대해 수행하는 역할을 고찰함으로써 플라톤이 이해하는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사이의 관계에 대한 콘포드의 입장과 로쓰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둘 모두 여기에서 형상들의 엮임을 진술의 요소 혹은 내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플라톤이 제시하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은 개별자와 형상의 관계로서 이러한 해석에 배치된다. 그러나 이 사례들 역시 '모든 진술'에 포함되는 일종의 진술이며,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플라톤에 따를 경우 모든 진술에 대해 참이므로 이 사례들 역시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그에 대해 참인 것으로 밝혀져야 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상호 엮임이 전적인 상호분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전면적인 상호 결합도 아님을 문헌을 근거로 논증한 뒤, 이것이 문장의 의미가 구성되기 위한 논리적 법칙으로서 전제될 가능성을 제시한다. 즉 형상들의 상호 엮임은 개념의 결합 과정에서 동일률과 모순율의 구체적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규칙이 직접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사례들에서 주제가 되는 참과 거짓의 문제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제안은 플라톤에 대한 일관된 해석을 가능케 한다. 논리적 규칙은 언어의 사용을 위해 필연적으로 전제되는 참이다. 나아가 이것은 초중기 이데아론이 지니는 한계에 대한 일종의 개선된 대안으로 이해될 여지를 열어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형상들의 엮임과 진술 분석이라는 『소피스테스』에서의 두 가지 문제들이 상호에 발생시키는 일관성의 문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이는 이후 연구자들 역시 끊임없이 대안을 모색하도록 만든 『소피스테스』 연구사에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또한 그의 대안은 자신이 제기한 문제점들을 포함하여 그 이전의 해석들이 지닌 난점들을 적절히 해소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상들의 엮임’이 진술에 사용되거나 포함되는 것으로 한정된 데에서 나아가 언어의 성립 조건으로 그 해석의 여지를 확장시킨 것은 중요한 성과라 평가된다. 그가 이러한 해법을 제시하였기에 다른 문제들이 두드러진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아크릴의 논의에서 추가적인 검토 없이는 해명이 어려운 부분들이 있다. 우선 그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개별자와 보편자 혹은 보편개념의 결합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가 하나의 유라는 점에 주목할 경우, 이를 달리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소피스테스는 제작자이자 말로 된 모상에 관련하며 거짓에 또한 관련한다. 해당 대화편에서 제작, 말, 모상은 모두 유로 간주된다. 즉 소피스테스는 유들의 결합을 통해 구성되는 복합적인 유이다. Being, 같음, 다름은 그 정의에 다른 유들의 정의가 포함될 필요가 없을 것이나, 소피스테스는 여러 유들을 자신의 정의에 포함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하여 시간, 장소 등을 또한 유로서 간주할 수 있다면, 테아이테토스도 지금, 여기, 대화 등의 유들을 통해 한정어구들을 결합하여 정의할 수 있는 일종의 유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해당 대화편에서는 계속해서 유들에 대한 논의만이 이루어질 뿐 구체적인 개별자에 대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티마이오스』에서와 같이 운동, 시간, 장소, 원소들 등에 대한 논의가 제시된 것도 아니고 『필레보스』에서 제시되는 그러한 무한정자에 대한 진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크릴뿐만 아니라 그가 비판하는 콘포드나 로쓰도 마찬가지로 테아이테토스에 관한 진술을 개별자와 보편자의 결합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그것이 실제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진술의 근거’라는 표현의 불분명함에 기인한다. 아크릴은 형상들의 양립 가능성과 양립 불가능성이 진술의 성립 근거라고 주장한다. 단어들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개념들이 결합해야 하며 이를 통해서만 진술이 성립한다. 또한 동시에 한 개념이 다른 개념들을 배제하는 모순율을 통해서만 진술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이 모두는 진술의 성립근거라기 보다는 개념 자체의 성립근거이다. Megista gene를 논하는 부분에서 추론되는 바, 모든 각각의 형상은 Being, 같음, 다름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결합 없이는 어떤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 지시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진술 자체라는 유(類, genos)의 성립은 다른 모든 유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결합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진술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과정은 이와 다르다. 이 대화편에서 진술은 그 구성요소로 명사(혹은 이름, onoma)와 동사(혹은 말, rema)를 지니며, 이것은 각기 전자는 사물(pragma)을, 후자는 행위(praxis)를 가리키는 것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진술의 구조에 대한 고찰 없이는 진술의 의미가 성립하기 위한 근거를 논하기 어렵다. 아크릴은 진술의 형식적 근거와 진술의 내용이 성립하기 위한 근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진술의 두 구성요소들이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지시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 일종의 모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렇다면 단순히 모순율뿐만 아니라 원본과 모상 사이의 관계 또한 진술의 성립 근거가 될 것이다.

아크릴은 양립불가능성을 일종의 모순관계로 파악하고 이것이 수용될 경우 진술이 무의미해지는 것으로 주장한다. 그가 드는 예시는 ‘운동이 정지한다’와 같은 진술이다. 그러나 256b6-8에서 손님은 운동과 정지의 결합 가능성을 언급한다. 또한 그에 앞서 gigantomachia를 논하는 과정에서 운동과 정지는 모두 인식의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설명된다. 어떤 것이 정지해 있지 않다면 그것을 말하거나 지시하는 그 순간 그것이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므로, 사유나 진술을 위해 그 대상은 정지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지해 있기만 하다면 인식의 작용을 받아 인식된 것으로 변하는 그러한 운동조차 불가능할 것이므로, 또한 사유나 진술의 대상은 운동해야만 한다. 따라서 운동과 정지 각각이 진술되고 사유될 수 있는 한에서 그것들은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 문장 자체는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진술이나 사유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문장이 표현하는 명제의 의미는 거짓이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는 진술이 개연적으로 거짓인 반면 모순되는 주술관계의 경우 필연적으로 거짓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 후자가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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