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자체와 하나들 그리고 하나를 나누어 가진 것들. 개별자들은 하나라는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하나가 '된다.'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을 겪음으로써 이전까지 어떤 무엇이지 않았던 것이 비로소 바로 그 무엇인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어 'gignomai'는 become의 뜻을 지니고 우리말에서는 '있다/이다'의 구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생긴다/된다'의 두 의미로 구분되어 해석될 수 있다. 개별자는 하나에 참여하여 그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하나인 것이 되지만 이 하나라는 이데아로부터 분리될 경우 하나이지 않은 것이 된다. 하나의 인간이 사지를 지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뉘면서도 여전히 한 사람일 수 있는 까닭은 그를 하나이게끔 해주는 것과 그를 여럿이게끔 해주는 것이 따로 독립된 덕분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이란 것은 모순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 자체의 이데아는 개별자들만이 아닌 여타의 이데아들에 대해서도 관계를 맺는다. 사람, 소, 좋음, 참은 각기 한 가지의 것이며 그 각각이 아래로 여러 사람들, 소들, 좋은 것들과 참인 문장들 혹은 믿음들을 지닌다. 이러한 이데아들 각각은 하나이며 그 자체로 여럿일 수는 없다. 또한 여러 개별자들이 각자의 정의나 속성을 이데아에 의존하는 한에서도 그 관계 속에서 이데아는 하나여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자체를 제외한 여타의 이데아들은 그 자체의 본성상 하나인 것일 수도 없다.
  반대로 하나 그 자체의 이데아는 같음, 다름, 있음/임, 운동, 정지 등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 멈추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같음,' '정지'를 겪고 그것으로 변화하기 위해 또한 움직이고 작용을 받아야 하며 다른 것들에게 작용하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 그 자체를 제외한 여타의 것들로부터 구분되기 위해 이것은 여타의 것들과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조건들 혹은 상태들은 하나 그 자체의 본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것들이다. 하나는 하나이기만 할 뿐이다.
  즐거움은 여러 가지 즐거움들로 나뉜다. 육체적인 즐거움, 정신적인 즐거움, 일시적인 즐거움, 지속적인 즐거움, 큰 즐거움과 작은 즐거움과 이러저러한 즐거움들이 모두 즐거움이라는 하나의 것으로 아울러진다. 다시, 이 여러 가지 즐거움들 각각에 대해 바로 그러한 즐거움으로 명명되는 구체적으로 실현된 즐거움들이 있다. 지금 담배를 피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개소리를 싸지르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어제 잠들기 전에 느낀 즐거움과 온갖 것들의 매순간마다의 서로 다른 즐거움들이 어떤 종류의 즐거움에 속하고 그 여러 종류의 즐거움들이 다시 하나의 즐거움에 속한다. 하나에서 몇 가지의 것들로 다시 한정되지 않은 것들에까지 이데아로부터 개별자에 이르는 관계에 대한 이해 없이는 구체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이해될 수 없다. 혹은 그 이해의 확인을 구할 수 없다.
  단순한 이데아와 복잡한 이데아가 구분될 수 있다면 여기에는 상하의 구분 또한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음의 이데아는 크기가 같음의 이데아나 모양이 같음의 이데아 혹은 색이 같음의 이데아에 비해 더 넓은 외연을 지닐 것이고 수동적인 측면은 더욱 적을 것이다. 그 이데아들의 중첩에 시간과 공간 각각의 이데아가 공존할 수 있다면 구체적인 개별자들 역시 이를 테면 속성들의 다발과 같은 식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결합한 결과물로서 바로 여기 이 내가 그 순간의 것으로서 정의될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그러나 세계의 운동은 형상들의 운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같음과 다름 그리고 그 중간의 것이 결합하고 또한 수학적 비율들에 따라 한정된 뒤 그 마디들이 빈틈없이 나뉘어 일종의 계기적 연쇄를 구성한다(하하하, 개소리의 절정이다!). 그 비율들은 네 가지 원소들과 천체의 운동을 구성하고 이로부터 세계에 시간이 성립하며 이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원인과 필연과 chora에 대한 장인(혹은 제작자, Demiourgos)의 작업을 통해, 그리고 다시 이 작업을 인계받은 천체들 혹은 신들의 지속적인 개입을 통해 물질적 세계에 대한 수학적 이해의 가능성이 확보된다. 세계가 수학적이지 않다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은 걷잡을 수 없는 격류로 휘몰아칠 뿐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규칙적이며 이해 가능한 방식으로 변전한다.
  어쨌든 형상들의 상호 결합은 개별자들의 세계와 매개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필레보스』에서 그러한 매개의 방식이 제시되는가? 『소피스테스』는 형상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하고 『티마이오스』는 자연세계의 합법칙성을 설명하며 『법률』은 『국가』와 『크리티아스』의 이상국가를 지상의 시민들과 매개시킨다. 『소피스테스』에서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제시된 형상들 사이의 독립과 의존의 문제에 답을 하고 『티마이오스』에서는 개별자들의 세계를 설명하지만 『법률』에서 설득(peitho)과 확신(pistis)이 하는 그러한 매개 방식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만일 『필레보스』에서 한없이 많은 개별자들을 아우르는 일정 가짓수의 말하자면 '중간 이데아들'이 탐구되고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단순한 이데아와 복잡한 이데아들 그리고 개별자들 사이의 삼중의 관계가 탐구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이 어딘가에서는 발견되어야만 한다.
  또 다른 종류의 심각한 문제는 하나라든지 있음/~임이라든지 필연이라든지 하는 것을 다루는 방식으로 '좋음'과 '즐거움'을 탐구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지와 배설물의 이데아는 부정된 것으로 보인다(부정하지 않을 여지는 없나?). 이데아는, 이데아들은 좋은 것이고 좋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과연 인간이 지니는 어떠한 가치까지 포함된 대답이 필요한 것인가?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정치가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도덕적 가치와 같은 것이 고려되는가? 이미 자연주의적 오류에 대한 지적은 식상할 지경이다. 플라톤 당대에는 이미 자연학자들에 대한 조롱과 신화로 전해진 전통적 가치에 대한 풍자가 횡행하고 있었고 프로타고라스는 신들 따위 뭐가 어떤지 어떻지 않은지조차 모른다고까지 선언하였다. 정식화된 구분은 없을지라도 옳고 그른 것을 논하는 일과 땅을 재고 일삯을 나누는 일 사이의 단순한 차이를 지적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은 또 다른 시대착오의 오류일 것이다. 마치 하나는 좋고 둘은 나쁘며 콩은 먹지 말아야 한다는 피타고라스처럼 플라톤이 멍청한 소리를 했다고 봐야 할까? 혹은 절제와 용기와 경건 같은 것들, 좋음 그 자체와 아름다움 그 자체, 정의 그 자체만이 이데아의 자격이 있으며 저 하늘의 태양 말고 모든 빛나고 따스한 것들은 일절 진정한 이데아의 지위를 얻을 수 없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의 인식 중 대체 어떤 것들이 그렇게나 가치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물론 좋음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최소한 규범윤리학에 있어서 용의 여의주 같은 것일 터이다.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있다면 만능이라 뭐 그런 얘기이다. 객관적 가치기준의 확보는 곧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지향, 민주적인 만장일치와 같은 허황된 꿈을 실현할 근거 혹은 토대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마무지한 뻥을 치기에는, 플라톤의 성향이 그리 급진적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논리 따로, 자연 따로, 사회나 정치 또 따로 다루고 언어 따로, 교육 따로, 종교 따로 문학예술 또 따로 다루는 사람이 그 모든 작업들이 시사하는 비약과 매개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곧장 '에라 모르겠다' 하며 거대한 개뻥을 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냥 마음껏 개소리가 하고 싶어서 싸질러 보았는데 잘 모르겠다. 나는 뭔가 지금 어줍잖게 칸트식으로 플라톤을 읽으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현상의 세계만이 인식의 대상이고 그곳은 규칙과 필연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지성에 합당한 자연법칙으로 우리에게 드러날 따름이다. 자유와 도덕과 절대선은 저 너머 어딘가에, 음, 뭐, 있다고 하기도 뭐하고 뭐라고 해야 하려나. 그러나 저러나 칸트새끼가 우리 노친네한테 진공 속 비둘기마냥 푸왁하고 사지고 대가리고 내장까지 죄다 터져 버릴 거라고 욕을 했던 게 생각나네. 하지만 그가 말했던 '공기의 저항'이란 걸 무시한 건 오히려 칸트 아닌가? 말하자면 문헌학적인 마찰이라든지, 아님 지금까지 싸지른 내 개소리에서 시사되는 여러 문제들이라든지, 그런 걸 제껴놓고 '플라톤 개객끼'라 하는 게 대기권을 뚫고 솟구쳐 오른 비둘기꼬라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짱 먹는 도로의 무법자는 역시나 헤겔이려나. 다 밀어 버려! 아니아니, 사실 진짜 스페이스 도브는 학부찌질이들이겠지. 씨발, 배우는데 시간도 노력도 안 들인 걸 발만 한 번 걸쳤다 빼고서는 지가 무슨 권위자라도 된듯 읽어 본 적도 없는 외국서적들을 씨부리고 라틴어가 어쩌니 고대 그리스어가 저쩌니 씨부려대며 주제넘게 배울 것과 배우지 않을 것을 취사선택하고 조언과 충고를 꼰대질로 치부하며 끝간 데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꼬락서니라니. 딱 보니 내 꼬라지 나서 다 망해 버릴 거다. 다 죽자.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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