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는데 학문이 하고 싶다면 우선 몇 가지 관문을 거쳐 보길 권한다. 우선 첫째로 당신이 한 달에 얼만큼의 시간을 투자해 얼만큼을 벌 수 있는지 계산해 봐라. 그리고 당신이 먹고 자고 쌀 공간을 실제로 찾아 봐라. 견적이 나오겠지. 그럼 다시, 얼마를 일해야 그 방을 구할 수 있는지 알아 봐라. 그리고 그 방을 구해라. 자, 이제 시작이다. 당신이 진짜로 '방'을 구했다면 거기엔 당신이 여태껏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이 없다는 걸 알게 될 거다. 컵도 접시도 없고, 화장지도 없고, 칫솔이나 비누도 물론 없거니와 인터넷도 없고 베개도 없지. 당신이 멍청하다면 먹고 자고 쌀 공간을 고시텔 따위로 잡았을지도 모른다. 그건 당신이 경제관념이 없다는 뜻이니 앞 단계를 다시 되짚도록 하자. 당신이 찾아야 할 건 최소한 전세다. 아니면 월세를 잡고 더 많은 일을 해 더 자주 더 많은 돈을 계속해서 내다 버려야 하지만, 뭐 원한다면 말리진 않겠다. 어쨌든, 방을 잡아 당분간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마련해 보라. 그 와중에 당신은 뭔가를 먹어야 할 텐데, 비위가 괜찮다면 꾸준히 중고등학교 근처 분식점을 애용할 것을 추천한다. 싸고 많으니까. 음식이 싸고 많은 일반음식점을 안다면 그것도 괜찮지. 이런 걸 알아보는 데에도 시간이 걸린다는 점은 유념하길 바란다. 자, 이게 당신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조건이고 제약이다. 하루 못해도 8시간은 일을 해야 할 거고, 거기에 이동시간으로 한 두 시간을 또 버리겠지. 잠은 일곱 시간을 채워 자겠는가? 소문으로 떠도는 그 11시부터 3시까지인가의 수면만 지킨다 하면, 보자, 밥은 안 짓는다 치고 그래도 빨래는 하고 청소도 뭐 거르자면 거를 수는 있는데 그렇다고 쓰레기를 무한정 모아둘 수는 없으니 그거 정리하는 시간이라도 들일 수밖에 없다. 이거 한 시간 정도 또 잡자. 때 되면 생필품 채워야 하니 장보는 시간도 생각하자. 연애나 교우관계는 잠시 접어두자. 왜냐하면, 남은 시간을 탈탈 털어서 당신은 '학자질'을 하고 싶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학자질이 뭔지 알 길은 없으나 어쨌든 당신은 읽고 생각해서 정리하고 써야 할 거다. 당신이 국문 논문을 한 편 읽는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가? 연구서는? 학문분야에 따라서 발로 뛰며 조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고, 혹은 자료 찾느라 여기저기 헤맬 수도 있겠고, 실험실을 들락거려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당신이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다면, 이미 제시되어 검토를 받고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는 외국의 학문적 성과들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 뭐 한국에서만 다루는 그런 학문이 있다면 축하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당신의 다른 경쟁자들은 돈이 있고 시간이 있고 게다가 어느 정도 선별을 거쳐 자격을 갖춘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외국 논문 읽는데에 드는 시간은 얼마인가?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을 하는 데에 돈이 얼마나 드는지는 계산해 보았나? 학교에 소속되어 해당 도서관에서 계약한 경로를 통해 자료들에 접근할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거기에는 등록금이 들지. 장학금을 받고 싶겠지만, 과연 앞서 말한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해 나아가는 와중에 당신이 다른 여유로운, 그러면서도 재능 있는 아이들과 다이다이 떠서 걔들을 씹어 넘기고 장학금을 겟챠>_< 할 수 있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학부나 석사나 박사 과정 중에 있다면 당신은 들어야 할 강의도 이것저것 있을 것이고 들어가야 할 세미나도 몇 개 있겠지. 이것들 각각 부과되는 과제들도 있고. 앞서 말한 논문 읽기나 잡다한 '연구'와 직결되는 경우는 확실히 드물 거다. 어머나, 졸업논문도 써야 하겠네. 뭐, 열심히 해 보자.

  어찌어찌 평타는 쳐서 가까스로 도태당하지 않고 박사 후 연구과정생이나 혹은 강사가 되었다고 해 보자. 아, 한 가지 잊은 게 있는데, 혹시 당신이 그냥 혼자 가난한 게 아니라 집안이 거지인가? 그럼 당신 가족의 생계는 어찌하나? 뭐 부모님이고 형제자매고 쌩깔 수 있다면 그나마 당신은 축복받은 가난뱅이이겠지만, 아니라면 앞서 이야기한 기본 조건에 하나 더하자. 못해도 80 정도는 가져다 바쳐야 할 거다. 4대 보험 보장되는 직장에 박혀 있다면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가족들과 당신 자신 앞으로 걸린 보험들도 좀 신경써야 하겠지. 천운에 기대어 당신에게는 아무런 사건사고도 없으리라 믿으며 산다면 뭐 그것도 말릴 수는 없지만. 그런데 운전은 하고 다닐 건가? 돈을 더 잡고, 그 예산에 맞춰 시간을 더 쓰자. 글쎄, 당신이 언제 어떻게 공부를 할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어쨌든 당신이 이제 부여받은 과제를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게 된 듯하다. 정말 그럴까? 당신이 속한 학계에는 이러저러한 학회들과 소모임들이 있을 거다. 당신은 막내급이고, 아마 모든 잡일을 하거나 아무 일도 않고서 쫓겨나거나 할 수 있을 거다. 운좋게 다른 누군가가 총대를 맨다면, 그 운을 쓴 덕분으로 당신에게는 강의자리가 오지 않겠지.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이제 신나게 아해들에게 과제를 내고 애들을 괴롭혀 보자. 그러려면 교재를 정하고, 강의계획을 짜고, 애들에게서 과제물을 받아서 채점을 하고, 그걸로 돈을 벌게 될 거다. 물론 당신이 박사 논문 주제로 잡았던 것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강의일 거다. 그래서 여기에 들이는 시간은 앞서 8시간 일하는 것과 퉁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강의를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음,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은 '살 수 없다.' 뭐 어쨌든 당신이 아직도 여전히 가난한 걸로 봐서 당신은 그리 재능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당신은 당신의 고유한 학문노정에 투자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연습을 통해 실력이 늘면 속도가 붙겠는데, 연습에도 시간이 드니까 당신은 그냥 계속 느린데다 부지런할 수도 없는 망조 들린 거북이 신세이다. 거북인데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달았어. 허리에는 타이어를 매고 말이지. 당신은 고급 스판 빤스를 입고 맞춤 운동화를 신은 터질듯한 허벅지의 근육질 토끼들과 경쟁해야 한다. 뒤쳐질 때마다 당신이 벌 수 있는 돈은 줄고, 당신이 접근할 수 있는 자료들도 줄고, 당신이 그냥 살아남기 위해서만이라도 투자해야 할 시간은 계속 늘어만 간다. 당신은 '학문'으로 경쟁해야 하는데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이 와중에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들어가는 평균비용이 얼마인지 검색해 보자.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질식사할 경우 막판에 사정한다는 것과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지나친 비약이고 과장이라며 도리질을 치는 당신이 상상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 와중에도 학자로서 학자다운 양심을 지켜가며 기어이 버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실제로 있다. 당신이 역사 속 위인들이나 세계의 유명인들을 보며 허황된 꿈을 꾸는 사이에 이 땅에서 학문 목줄이 잘려 나가지 않도록 바닥을 벅벅 기며 악착같이 들러붙은, 당신의 진짜 구원자들 말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당신이 이런 헛된 꿈을 꾸지도 못했을 테니, 어찌 보면 철천지 원수일 수도 있겠지만, 하하. 자, 불가능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다. 가능한 게 아니라 이미 실현되어 있는 삶이다. 가난하 당신이 학자이길 원하고 학문을 하고자 바란다면 가야할 길이다. 정치에, 사회에, 경제에 참여하고 싶다면, 혹은 여러 학문분과들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고 전체적이고 종합적인 통찰을 하길 희망한다면, 당신은 이 와중에 당신 전공과 무관해 보이는 온갖 학문들에도 접근해야 할 거다. 실무적인 일들에도 부딪치겠지. 당신은 돈 벌어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 쫄깃쫄깃한 긴장감을 당신이 학문을 그만두게 되는 그 순간까지 지속해야 한다. 계속 뒷덜미에 날붙이 끄트머리가 콕콕 찔러대는 기분을 느끼면서, 멀다 못해 아득할 정도로 앞서 나아가는 사람들의 잘 보이지도 않는 똥구녕이나 군침을 흘리며 바라보면서, 그러는 당신을 비웃고 손가락질하며 뒤에서 앞으로 제치고 나서는 후발주자들에게 닿지도 않을 저주나 퍼부으면서. 

  난 어쩌고 살고 있냐고? 이래저래 빌어먹고 산다. 한때 '독립이니 자주니 공허한 구호들을(UMC 가산데?)' 떠들며 저 앞서 지껄인 지랄을 몸소 체험해 보기도 했지만(검정고시 때부터 학부시절 앞머리 때까지 정도의 얘기다), 지금은 그냥 그보다 좀 못한 돈 집에 가져다 바치고 부모님 곁에서 얌전히 빌붙어 살고 있다. 그렇게 시간을 벌고, 그 시간을 갖고 이것저것 읽거나 쓰거나 가끔 이렇게 개소리 지껄이며 노닥거리기도 한다. 전공 덕분에 유뉘쿠하고도 럭쪄리한 과외자리가 종종 생겨 그걸로 잠깐 돈 좀 모으고, 이래저래 장학금 주워다 받고, 틈나는대로 주말알바나 야간알바 뛰어 가면서 근근하게 살아간다. 그래야 할 정도밖에 못 되는 재능이고, 그나마 그 정도는 되는 집구석이라(빚 물려준 것 없고, 집이 있고! 나는 차남이지롱.) 나는 몇 차례 졸업논문 계획만 갖고도 퇴짜를 맞고 그냥저냥 그래도 공부란 걸 붙잡고 버티고 있지. 뭐 나도 앞으로 어찌 될지 장담은 못 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뭘 어째야 하고 그게 얼마나 힘들지에 대해 자신을 속일 생각도 없고 딱히 엄살을 피울 생각도 없다. 그냥 내 발목에 걸린 족쇄와 등에 걸린 짐만큼 욕심을 버리고 꿈을 버리고 그러면서 놓을 것 최대한 놓아 가며 내가 붙잡고 싶은 걸 붙들고 안 놓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따름이다. 

  가난하다고 하여 왜 학문을 모르고 진리를 모르겠는가? 근데 씨발 개뿔도 모르고 좆도 아니면서 겉멋만 잔뜩 들어 지랄병해대며 여기저기 시비질 붙지 말고, 할 거면 닥치고 해라. 그리고 하다가 나가 떨어지든 어떻게든 들러붙어 버티고 섰든 이후의 일은 몸으로 보여라. '돈 없는 새끼가 학문이니 예술이니 씨부리지 말아라'라는 말에 기분이 상하고 화가 나고 당신의 사랑해 마지않는 진리가 모욕을 받은 듯하여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겠는가? 당신이 도대체 학문에 뭘 어떻게 해 주었는가 그거나 먼저 생각해 봐라. 당신이 그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당신만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훨씬 더 반짝반짝 빛날 사람들 자리 대신 차지하고 쳐자빠져서는 뭔 헛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얼마나 민폐를 끼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봐서 당신이 얼마나 구역질나게 비루한지 좀 반성해 봐라. 그래, 괜찮다. 그 따위 당신이라도(그 따위 나라도 역시) 학문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선택한 만큼의 책임감을 갖고 책임을 좀 져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돈 없다며? 아니, 정말로 정말로 돈이 없다면 내가 앞서 말한 저 처지에 쳐박혀 있을 테니, 딱히 '거지새끼 학문지랄 하지마'란 얘기가 뭔 뜻인지 모를 처지도 아닐 것이다. 누군가 밥과 반찬을 해주고 설겆이를 해주고 빨래를 해주고 분리수거를 해주고, 관리비를 대신 내든 정화조 관리비 전기세 가스비 수돗세를 내든 뭔가 해주고, 니 새끼 의료보험비를 내주고 화장지를 대주고 넌 가끔 애새끼들과 어울려 술이나 쳐먹고 인터넷에서 깔짝깔짝 영화나 보고 음악이나 듣다가 좆나 고뇌에 찬 표정으로 씨팔 인생은 뭐고 예술은 뭐고 학문은 뭐냐고 정신적으로 자위질에 몰두하다가 '아 나 좆나 지식인스러워'하고 황홀경에 빠져 찍 싸대기나 하겠지. 이런, 화내서 미안. 진짜 돈 없으면 좆나게 쥐어짜서 겨우겨우 만들어낸 하루 대여섯 시간에 일생을 걸고 읽고 쓰고 골머리를 싸매야 한다. 그래야 한다는 것뿐, 아무도 하지 말라고 할 입장은 못 된다. 아니, 하지 말라는 사람을 만나거들랑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도록 해라. 세상에 그렇게나 너를 아끼고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물론 그건 사랑이 아니라 동정과 연민과 우월의식과 조롱과 야유이겠지만, 원래 그런 거 받아먹고 사는 거다, 나와 당신 같은 개뿔도 없는 새끼들은 말이다. 아, 다 필요없고 중심과 끝들의 변증법이다, 그지깽깽이들아.(...논문이 안 써져서 지랄하는 거 맞다.)

-蟲-

P.S. 아, 미안, 이 얘기를 빠뜨렸어. 빚은 은행에 지는 거다. 사채 생각이 들거들랑 그냥 자살해. 그리고 우리에겐 개인파산과 개인회생이라는 행복한 도피처가 있지. 학문할 거니까 금융권에서 고자되는 건 괜찮다고 봐, 낄낄.

P.S. 여기에 제격인 노래 하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입금하라'. 특히 이 가사가 쫭이지. '적어도 나는 정의로웠다, 너에게는 별 의미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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