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스테스』는 철학자, 정치가, 소피스테스가 서로 다른 것들인지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인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대화의 주도자인 엘레아의 손님에 의해 그 셋은 서로 다른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각각이 그 자체로 무엇이며 여타의 것들과 어떤 식으로 다른지를 그가 규명하는 쪽으로 논의가 전개된다. 그는 우선 소피스테스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내리는 것을 목표로 하여 탐구를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소피스테스라는 부류가 소피스테스의 기술(techne)이라는 하나의 기술만으로 상술과 사냥술, 교육술을 비롯한 온갖 기술들을 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로 제시된다. 더욱이 여러 기술들인 것으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이 소피스테스술(sophistike)만으로 모든 것을 논박할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이를 다른 이에게 가르칠 수도 있다고까지 주장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님은 고유한 하나의 기술로서 다른 여러 기술들로도 여겨질 수 있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그러한 기술을 일종의 모방술로 판단한다. 그러나 모방의 결과물인 모상은 원본이 아닌 것, 참이 아닌 거짓인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가리킨다는 것은 모두 참으로 어떤 무엇인 바의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란 수도 이름도 거기에 덧붙을 수 없다.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에 따르자면 오직 있는/~인 것(to on)뿐이며 있지/~이지 않은 것(to me on)은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이 둘은 뒤섞지 않아야 한다. 모상은 그것이 모방하는 그 원본이지 않다. 그 원본이 참이라면 모상은 거짓이다. 그러나 모상은 모상인 것으로서 참으로 모상이기도 하다. 즉 모상은 to on to me on을 뒤섞은 것이다.

또한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모상을 통해 실제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음에도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고 그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준다. 그러나 거짓이란 사실, to on을 말하거나 믿지 않고 to me on을 말하는 것, to me on to on이라고 또는 to on to me on이라고 말하거나 믿는 것이다. 그러나 to me on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고 이것을 to on과 섞을 수도 없으므로, 이러한 거짓 역시 불가능하다.

더불어 상대가 거짓을 말하거나 믿는다고 논박하려는 자는 그 자신도 to me on을 언급해야 하지만, 이번에도 to me on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기에 거짓을 고하는 자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논박하려는 사람 역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모상과 거짓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to me on to on과 섞일 수 있는 방식을 증명해야 한다.

이를 위해 손님은 to on의 반대로서 전적으로 불가능한 to medamos on을 잠시 미루어 두고 to on에 대해 탐구함으로써 또 다른 to me on이 가능한지 고찰한다. 이 과정에서 to on to me on 못지 않게 여러 어려움들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모든 것 각각이 전부 to on이므로 to on 자체와 다른 어떤 것을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차가움과 뜨거움이 있는/~인 것들이라면, 이것들은 to on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to on 자체와 이것들이 다르다면, 더 이상 있는/~인 것이 아니게 되므로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또한 오직 to on뿐이라면, 그것은 오직 그 하나일 것이나 하나라는 것도 to on뿐인 경우에서는 to on과 구분될 수 없다. to on을 하나라고 말하는 일조차 이 경우에는 불가능하다. 다른 한편, to on이 참이며 앎의 대상인 한에서 변하지 않고 멈추어 있는 것이라는 주장과 오직 움직이고 작용을 주고 받는 능력을 갖춘 것만이 to on이라는 주장이 서로 대립한다. 그러나 to on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to on이 인식됨으로써 인식된 것으로 변하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반대로 to on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한다면 그것은 가리킬 수도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 바로 그 순간 곧장 다른 것이 되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to on은 다른 것들과 결합하면서도 또한 분리되기도 해야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To on과 그 이외의 것들 사이에서 결합과 분리의 관계를 알지 못하다면 to on to me on 양쪽의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철학은 물론 말도 생각도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 이러한 결합과 분리에 대한 앎을 변증술(dialetike)이라 한다. 손님은 변증술을 통하여 운동과 정지는 to on에 참여함으로써 to on인 것이 되지만 여전히 to on은 그 외의 두 가지 것들과 다른 것이자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라는 점을 밝혀낸다. 자신과 같고 그 이외의 것들과 다르다는 것은 정지와 운동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같음, 그리고 다름이, 운동과 정지가 to on에 참여하듯 그런 식으로 이 세 가지 것들의 참여 대상이 된다는 점이 드러난다. 특히 다름에 참여함으로써 각각의 것들은 여타의 것들과 다른 것이 되고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 to me on이 된다. 즉 다르다는 의미에서의 to me on to on인 각각의 모든 것들 서로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to me on은 진술이나 믿음에 섞임으로써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을 만든다. 진술은 어떤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혹은 명사, onoma)과 그 행위를 가리키는 말(혹은 동사, rema)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에 관하여 그 결합된 말이 그 대상과 다른 것을 가리킬 때 진술은 거짓이 된다. 이러한 말이 영혼 속에서 자기 자신을 상대로 이루어질 때 생각이며 그 생각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믿음이므로, 이것들의 경우에도 같은 설명이 적용된다.

이제 모상은 원본 자체와는 다른 것이지만 원본에 대하여 그것을 닮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 모상 중 말로 된 모상이 원본에 대해 원본과 다른 것을 말할 경우, 말로 된 거짓 모상, 즉 거짓말이 생겨난다. 소피스테스는 이러한 거짓말로 사람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기만적인 모방자로 규정된다.

간략히 정리한 이 대화편의 내용은 그 안에 여러 난점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to on to me on의 의미와 변증술의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진술에 대한 변증술의 관계 등은 그 자체로도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불일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이 다루고 있는 문제들에 관련된 다른 대화편들을 참고하는 일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주제적인 문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to on to me on에 관련하여 소크라테스 이전 시기의 철학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가 남긴 단편 역시 해석에 도움을 줄 것이다. 문제는 단순히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모상과 거짓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다시 변증술이 필요하다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플라톤이 이러한 대화의 배경을 설정하여 그 안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실제로 어떤 문제의식 아래에서 제기된 것인지 파악해야 한다.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증술이라는 바로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무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인지 파악되지 않는다면 역으로 이 대화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어려울 것이다. 이 대화편이 어떤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된 것인지 가늠해 보는 일은 다시 여기에서 다루어지는 핵심적인 문제들 그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불가피한 관문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을 『파르메니데스』라는 또 다른 대화편에 대한 일종의 응답으로서 간주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이 문제가 플라톤의 대표적인 이론으로 간주되는 소위 이데아론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른 한편, 이 문제가 어떤 이유에서 소피스테스를 정의한다는 배경 속에서 논의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또 다른 대화편 『에우튀데모스』를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에 앞서, 플라톤과 소피스테스 모두에게 특정 방식으로 수용된 파르메니데스 그 자신의 이론에 대해 간단히 고찰함으로써, 전체적으로 to on to me on의 문제가 어떤 것이었으며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심화, 발전되어 나아가는지에 대한 윤곽을 그려 보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대화편 내에서 변증술이 문제시되는 부분에 이르기까지 논의의 맥락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는 일 역시 필요하다. 『소피스테스』는 거듭 새로운 문제가 부각되면서 점차 내용이 심화되어 가면서 논의의 주제가 단계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이 대화편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단계별로 제기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그 문제들이 서로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이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앞서 언급한 내용상의 불일치나 각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난점이 구체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들 상호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도 어떤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는 사유를 위한 탐구의 오직 두 길만이 있다고 선언하며 그 두 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편의 길은 어떤 식으로든 있으며/~이며 또한 있지/~이지 않을 수 없다는 길이고, 다른 편의 길은 있지/~이지 않으며 또한 있지/~이지 않아야만 한다는 길이다. 후자의 길은 배움이 전무한 길인 바, 있지/~이지 않음은 생각할 수도 언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DK28 B2). 그가 말하는 두 길로서 영어 Be 동사에 해당하는 'esti'와 그 부정인 'ouk esti,' 그리고 이 동사의 부정사(einai/me-), 실체화하는 관사를 동반한 분사(to on/-me-) 등이 활용되어 파르메니데스의 시 곳곳에서 논의의 핵심주제어로 거듭 등장한다. 

'Esti'가 존재를 의미하든 계사를 의미하든 혹은 그 두 의미를 포함하거나 혼용하든 중요한 것은 오직 to on뿐이며 to me on은 결코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to on이지 않은 그 무엇도 없으며 to me on은 아무것도 아니다. 사유에 기여하는 탐구의 두 길은 따르도록 강제하는 진리의 길과 진입을 불허하는 금지된 길로 이루어지며, 이 전제를 받아들이는 한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다/있다,' 이것뿐이다. 모든 것이 '있다'거나 혹은 어떤 무엇'이다'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면, to on 이외의 것은 모든 것 이외의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이므로 to on과 구분되는 어떤 것도 말하거나 생각할 수조차 없다. To on to on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며 연속적이고 이것을 나눌 제 2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있는/~인 것은 시작도 끝도 없이 그 외부라 할 것이 전혀 아무것도 아니며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확고한 한계 내에, 즉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멈추어 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화하지 않으며 어느 방향으로도 차이가 나지 않고 하나이자 전체로서 그 자신일 따름이다. 

사유의 두 길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추론은 일견 형식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요컨데 그 추론의 방식은 분석적 혹은 연역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타당성은 전제가 참인 경우에 한하여 결론의 참을 필연적으로 보장한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 전후로 고대 그리스 자연학자들(physikoi)이 내놓은 세계에 대한 여러 주장들은 모두 그러한 확실성을 보장받지 못하였다. 하나의 물질이 희박과 농축의 원리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변한다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한한 것들이 결합하거나 분리되며 우리에게 감각된다거나 하는 입장들은 모두 변화와 운동을 받아들인 것이며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변치 않는 확고한 판단의 대상과 같은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물도, 공기도, 씨앗이나 원소 혹은 원자도 시간과 장소를 비롯한 여러 상태의 변화를 겪는 한에서 파르메니데스의 to on에 비하자면 한참이나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경험과 상식에 비추어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극단적인 그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이 진지한 탐구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결론을 따른다면 일상적인 경험세계가 전면적으로 부정되어 버린다. '이것'과 이것이지 않은 '저것'조차 구분하여 가리킬 수 없고 그것들을 지시하는 서로 다른 이름들을 가질 수도 없다. 모든 것은 바로 그것 자체'인 것'이면서 동시에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 '~이지 않음'의 결합을 가사자들, 필멸자들의 혼동된 사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파르메니데스 스스로 하나라느니 전체라느니 정지니 연속이니 하는 to on과는 다른 어떤 술어들을 to on에 덧붙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결론은 다시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다. 오직 to on뿐이며 to me on은 불가능하다. 

 


이데아론()의 문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감각되는 세계 속에서 그것들이 정말로 지속적인 변화의 와중에만 있으며 어떤 식으로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은 그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다. 무언가를 가리키는 그 바로 순간에도 가리켜진 그것은 변화하여 방금 가리킨 것과는 다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경험하는 것들을 가리키거나 말하거나 세계에 대해 어떠한 판단을 내린다. 변화의 와중에서도 어떤 것을 고정된 것으로 간주하고 지시하고 서술하며 사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경험에 기초한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같은 바람이 건강한 사람에게는 시원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동시에 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춥게 느껴질 수 있다. 혹은 신들에게 사랑받는 일이 경건한 일이라면, 신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하므로, 어떤 하나의 일이 경건한 동시에 경건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단 것과 쓴 것을 가르는 기준에서부터 경건이나 정의와 같은 가치판단의 기준에 이르기까지, 어떤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한 본이 없이는 변하지 않는 확고한 판단, 앎이란 불가능하다. 그러한 본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나 관점에 따라서 다르게, 심지어는 모순되게 보이는 여러 사물이나 사태가 그러한 본에 관련될 때, 비로소 앎이 가능하고 판단에 대한 평가가 가능해진다. 이는 단순히 인식의 문제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돌은 구를 수도 있지만 어딘가에 박힐 수도 있다. 그것은 운동하기도 하지만 정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운동과 정지는 서로 모순이다. 혹은 꽃다발을 생각해 보라. 꽃다발은 여러 송이의 꽃들로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하나'의 꽃다발이다. 그 하나의 꽃다발은 '하나'의 꽃다발이면서 동시에 '여러' 송이의 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빠른 말투를 가지면서 몸놀림이 느릴 것이다. 그는 어린이였으나 지금은 어른일 것이다. 그는 두 팔과 두 다리로 이루어진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모순되는 것들이 어떻게 동일한 것 안에 함께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플라톤이 제시하는 이데아론은 하나의 설명을 제시해준다. 그 자체로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으로서 고정불변하며 영원한 것, 그러한 것이 있고 그것의 이름으로 서술되는 여러 개별적인 것들은 바로 이것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러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돌이 구를 수 있는 것, 즉 움직이는 것인 까닭은 그것이 운동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은 또한 정지의 이데아에도 참여하며, 그러나 운동과 정지 각각은 그 자체로 서로 별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부분적으로는 운동에, 또 부분적으로는 정지에 참여함으로써 돌은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하나의 형상에 참여함으로써 한 명의 사람이지만 또한 여럿(다수)의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두 팔과 두 다리를 지니며 과거의 나이자 현재의 나이며 미래의 나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파르메니데스의 to on과 유사하다. 여러 다양성과 변화는 이데아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이데아들에 의존하는 개별물에 속하는 것이다. 이데아는 각기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일 따름이며 여타의 것들로부터 독립적이다. 변화와 생멸로부터 구분된 이데아는 철저히 자기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그것에 참여하는 개별물들이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 중에서도 어떤 무엇으로 지시되고 사유되며 서술될 수 있는 근거가 되어 준다. 또한 이러한 한에서 궁극적이고 확실한 앎의 대상은 바로 이데아이다. 이데아에 대해 앎을 가지게 된다면 이 앎은 이데아에 대한 것인 한에서 불변하고 확고한 진리에 대한 인식으로 유지된다. 이데아가 관점이나 상황 등 여타의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일이 없고 새로 생겨나거나 혹은 사라지지도 않기에, 이에 대한 인식 또한 영원한 것이 된다. 반면에 이러한 이데아에 참여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영구불변한 앎을 지닐 수 없고 단지 이러저러하게 보이거나 여겨진다는 믿음만을 가질 수 있다. 개별 사물들에 대해서 가능한 일은 그것들이 어떠한 이데아에 참여하고 있는지를, 이데아에 대한 앎을 근거와 기준으로 삼아 판단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한계가 있다.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우선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가 문제이다. 예를 들어 운동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자. 운동의 이데아는 운동 이외에 다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절대적인 것일 터이다. 그러나 정지함이 없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면 그것은 지시도 사유도 서술도 언표도 불가능하다. 가리키는 순간 다른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의 이데아는 운동이며 운동이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운동이란 것으로서 고정되어 있고 변하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정지해 있다. 또한 운동의 이데아는 자기 자신과 같은 것이어야 하며 그 외의 것들과 다른 것이기도 해야 한다. 어쨌든 운동은 정지와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운동이 운동이기만 하다면, 같음의 이데아가 따로 있고, 또한 다름의 이데아가 따로 있으며 이 이데아들이 모두 분리되어 각기 독립적이기만 하다면, 운동의 이데아가 자신과 '같다'거나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거나 하는 사태는 불가능할 것이다. 운동이란 이데아는 한 개의 이데아일 테니 '하나'라는 이데아에도 의존해야 한다. 이데아가 모두 그 자체로 독립적이라면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데아와 개별 사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인간의 이데아를 생각해 보자.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들은 바로 이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데아는 인간인가? 그것이 인간이 아니라면, 인간과는 다르고 인간이지 않은 무언가에 참여함으로써 그것에 참여한 것들이 인간이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데아론에 따르면 개별 인간들을 인간이게끔 해주는 본이 인간의 이데아이고, 개별 인간들은 그 이데아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데아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데아가 '인간이다'라는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이데아를 인간이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인간의 이데아와 개별 인간들을 모두 인간이도록 해주는 또 다른 제 3의 인간이데아 같은 것을 상정한다면, 이는 무한히 소급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과 인간의 이데아, 그리고 양쪽 모두를 인간이도록 해주는 제 3의 인간은 마찬가지로 모두 다 '인간이다'라고 판단될 것이며, 이 세 부류를 모두 인간이도록 하는 제 4의 인간이데아가 필요할 것이며, 이러한 과정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아론이 마주하게 되는 이러한 문제들에 논리적 순차를 부여할 수 있다. , 이데아들 사이의 관계가 형상과 개별물들 사이의 관계보다 우선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적인 것들은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정체성을 부여받게 되고, 그렇기에 이데아에 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 3 인간 논변'의 요지는 인간의 이데아가 인간이라는 술어를 가지게 되는, 이데아의 자기술어화 방식을 묻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 역시 이데아들이 성립하는 방식에 대한 첫 번째 물음에 포함될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테스

 

플라톤에 따르면 그 자신만이 아니라 소피스테스들도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을 그나름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두 수용의 방식은 상이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화편 『에우튀데모스』에서 에우튀데모스와 디오뉘소도로스는 어떤 무엇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어야만 하며 다른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는 입장을 통해 소크라테스를 당혹시킨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아는 자이며 아는 자는 모르는 자가 아니므로 결코 모를 수 없다는 주장이 그들에 의해 제기된다. 이에 따라 어떤 것을 아는 자는 단적으로 모든 것을 알 뿐 전혀 아무것도 모르지 않게 된다.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배워 이전과 다르게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는 일은 그 사람이 더 이상 바로 그 사람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므로 그가 존재하지 않기를, 즉 죽기를 바라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일단 어떤 무엇이거나 그러한 것으로 있는(to on ti) 것은 결코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이는 분명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에서 엿볼 수 있는 동일하고 고정된 판단의 강조와 한 종류의 것이다.

이러한 활용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소크라테스에게 두 사람은 더 진전된 재반론을 시도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들을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비판하자, 그들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불가능함을 역설한다. 거짓이란 사실(to on)이 아닌 것(to me on)을 진술하거나 믿는 것이다. 그러나 말이나 생각은 반드시 어떤 무엇인가(to on ti)에 대한 말이나 생각이어야만 한다. 즉 아무 것도 말하지 않거나(to me on legein) 사실(to on)을 말하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이는 다시 반박 불가능성의 논변으로 이어진다. 디오뉘소도로스에 따르면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달리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A란 것에 대해 서로 달리 말하고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한 사람은 A인 것(to on A)를 말하고 있을 것이며 다른 한 사람은 그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한에서 A이지 않은 것(to me on A)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있거나, 아니면 한 사람은 무언가를 말하고 있으나 다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같은 하나의 것이 같은 동시에 또한 다르기도 하기란 불가능하며, 같은 것을 말하는 한에서 서로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같은 것에 대해 한 사람은 맞고 한 사람은 틀려서 맞은 자가 틀린 자를 반박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to on은 단지 to on일 뿐이며 다른 무엇, to me on일 수는 없다는 전제는 상대의 주장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그 주장을 논박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오직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하는 동일성 명제뿐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제시한 엄격한 진리의 기준이 소피스테스들에 의해서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주장이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묵살하는 데에 활용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논박에 저항하는 자들의 논리 또한 같은 방식으로 부정당한다. 애초에 거짓이란 불가능하며, 거짓을 주장하는 자와 참을 주장하는 자가 같은 문제를 두고 서로 논박하는 일조차 또한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의 맥락

 

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테스』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논의한다. 특히나 이 대화편에서는 모든 것, 이데아와 개별 사물들을 아우르는 말 그대로의 모든 것이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형상(eidos)들을 중심으로 그 상호관계가 탐구된다. 능동이나 수동의 작용에 전제되는 운동(움직임, kinesis), 지시나 언표 및 진술과 사유뿐만 아니라 자기동일성을 위해서도 전제되어야만 하는 정지(멈춤, stasis), 그 자체 자기 자신과의 동일성(같음, tauton), 자신 이외의 것들에 대한 타자성(다름, thateron)에 더하여 존재(있음) 혹은 어떠한 무엇임(~, to on)이 서로에 참여함으로써(metechein) 공유(koinonia)를 통해 변화하고 상호에 적용되거나 적용바든 과정이 묘사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들 혹은 유(, genos)들 사이의 관계는 그것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여타의 모든 형상들과 만물에 대해서도 성립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형상들의 함께-엮임(symploke)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그것이 직면한 한계와 더불어 이해하기 위해 고찰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은 유들의 공유(koinonia) 혹은 형상들의 결합(symploke)을 곧장 다루지 않고 배경이 되는 탐구과정 속에 이 작업을 포함시킨다. 주 대화자인 엘레아 출신의 손님과 테아이테토스는 철학자와 정치가 그리고 소피스테스 사이에 발생하는 혼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를 통해 그 과정에서 위의 탐구를 수행하게 된다. 손님에 의해 고찰되는 소피스테스는 상인으로 보이는가 하면 사냥꾼으로도 보이고 또한 영혼을 정화하는 교육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상인, 사냥꾼, 교육자는 각기 고유하고 서로 다른 기술자들이다. 교육술은 사냥술과도 상술과도 다르며 나머지 두 기술 각각도 마찬가지로 다른 두 기술들과 다르다. 소피스테스가 소피스테스술이라는 하나의 기술로부터 연유한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여러 기술들, 앎들을 가진 것으로 드러난다는 이것이 문제가 된다. 그는 말로써 이러한 일들을 해내며 특히 모든 기술들에 대해 반박하고 가르치는 일이 가능하다고 자부한다. 더욱이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따른다. 그러나 한 부류의 인간이 단 하나의 기술로 모든 기술과 앎을 지니기란 불가능하다.

이 대화편에서 그가 행하는 논박은 앞서 『에우튀데모스』에서 드러난 그러한 방식의 논박이다. 손님에 의하면 그는 전적으로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것이지 않은 것(to me on ti)으로서 모상과 같은 것을 말하거나 참이지 않은 거짓을 말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말이나 생각은 to me on이 아니라 to on에 대한 것이라는 점은 두 대화편에서 공통되게 등장하는 논점이기도 하다. 그 논박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일종의 모방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방이란 그 원본~인 것이 아니라 원본~이지 않은 것, 참으로 원본 자체가 아니라 원본에 대해 거짓인 것이다. 나아가 거짓이란 ~인 것을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믿거나 진술하는 것이므로,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이지 않은 것을 논해야 한다. 그러나 ~이지 않은 것에는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고 그 수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그것을 가리킬 수조차 없다. '너는 모상을 만들고 거짓을 말한다'라고 논박하려는 자는 스스로 모상이나 거짓을, 그 안에 든 ~이지 않음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지 않음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믿더라도 그 ~이지 않음을 '그것'이라고조차 말할 수 없으므로, ~이지 않음을 논박하는 일조차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는 스스로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며 원본의 비율과 맞지 않는 허상을 모방해내 사람들에게 거짓 믿음을 심어주는 유이다. 그런데 모방된 모상, 허상이란 무엇인가? 거울이나 수면에 비친 '사람'은 참으로 사람인 것은 아니고 사람이지 않다. 참이 아니므로 거짓이고 ~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어떤 무엇이다. 참이 아니고 참으로 그 무엇이지 않으면서도 그 자체로 어떤 무엇이라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지 않음은 진술, 언표, 사유, 지시 모두 불가능하다. 더 나아가 그것에 ~인 무엇도 적용될 수 없고 그것이 ~인 무엇에 적용될 수도 없다. 그러나 모상과 허상은 ~이면서 ~이지 않고, 거짓 또한 ~인 것은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진술하거나 믿는 것이다. ~이지 않음은 결합될 수도 결합할 수도 없음이 자명하다. 그렇다면 ~임의 경우는 어떠한가? 두 길 중 남은 길은 ~임뿐이다. ~임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지 알아봄으로써 마지막 가능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이지 않음이 가능하다면 ~임 안에서의 ~이지 않음을 논할 수 있고 이로부터 모상과 거짓에 대한 설명 가능성, 나아가 소피스테스에 대한 정의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선 ~임을 수와 결합시키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라고 하거나 여럿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하나와 ~임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임이 하나다'라는 진술이 불가능하고, ~임 자체도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그것 자체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반면 ~임을 여럿이라고 말하는 경우 그 여러 가지 것들과 ~임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뜨거움과 차가움은 모두 ~인 것들이다. 그러나 뜨거움은 차가움이지 않고 그 역도 성립한다. 더욱이 그것들이 ~임과 같다면 더 이상 ~임은 여럿이 아니라 ~임 하나뿐이다. ~임은 하나일 수도 여럿일 수도 없다. ~임 자체가 아닌 모든 것이 ~이지 않은 것으로서 아무것도 아니라면 오직 ~임뿐이다. 그러나 ~임을 포함해 둘 이상의 것들을 말하는 순간 ~임 자체와 구분되는 그와 다른 어떤 것, ~이지 않은 무언가가 ~이어야만 한다. 

~임이 움직이느냐 멈추어 있느냐에 대해서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은 그것이지 않은 것이 된다. 어떤 것이 움직이고 변화한다면 그것을 그것이라고 말하고 믿는 일의 참이 보장되지 않는다. 반면에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작용도 받지 않을 것이며, 인식작용 또한 받지 않을 것이다. 이를 확장시킨다면 그것은 지시'받거나' 할 수도 없을 터이니 이름을 가질 수도 없다.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자면, 운동도 정지도 모두 각기 ~인 것이어야 하며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으므로, 이런 식으로도 ~임은 운동이기도 하고 정지이기도 하여야만 한다. ~임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들이 ~이기도 하고 ~이지 않기도 해야 하므로, 그리고 ~임 자체도 그 자체이기만 하여서는 안 되고 운동하기도 하고 정지하기도 하며 하나이기도 하고 여럿이기도 하여야만 하므로, 이러한 일들이 가능해지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 이 방식이 곧 유들의 결합방식이고 이를 알아보는 것이 변증의 기술이다.

존재가 운동이라는 것은 존재와 운동이 동일하다는 것과 의미가 다르다. 역으로, 운동은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운동이다' 혹은 '운동이 존재한다'라는 문장을 참으로 만든다. 이 결합이 불가능하다면 운동은 비존재, ~이지 않은 것이 되고 그것은 진술, 사유, 언표, 지시 모두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운동이 존재와 동일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운동이 존재한다,' '운동이 존재이다'라는 문장은 여전히 참이다. 이제 문제가 발생한다. 존재가 운동에 적용되는 경우와 운동이 존재에 적용되는 경우, 다시 말해 운동이 존재에 참여하는 경우와 존재가 운동에 참여하는 경우 그 결과는 서로 달라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의 기준이 불분명하다. 더 나아가 각 경우에서 동일성을 의미하는 '~이다'가 배제되는 과정 역시 드러나지 않는다.

각각의 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 같고 여타의 것들과 다르다. 같음과 다름이라는 이 두 유들은 모든 것과 결합한다. 그런데 운동이 존재와 다르다는 것은 운동이 존재이지 않다는 것, 운동이 ~이지/있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다름은 파르메니데스적 to me on의 대체물로서 그 의미는 유들의 결합에 한하여 볼 때 비동일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존재에서 부정을 제거하면 남는 것, 부정의 대상인 존재 혹은 ~임은 동일성을 의미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일성의 확보는 같음이라는 유와 결합함으로써 가능하다.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임과 같음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또한 ~이지 않음과 다름은 구분되는가 아니면 같은 것의 다른 두 이름들인가?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은 모든 유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최소한 모든 각각의 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구분되어야 한다. , 대상과 이름은 서로 다른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모든 것이 하나다'라는 주장이 논파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은 언표할 수도 진술할 수도 없거나 아니면 이름만 남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손님은 소피스테스가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여전히 어떤 것들은 서로 섞이고 어떤 것들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믿음과 진술에는 ~이지 않음이 섞이지 않는다고 반박하리라 예상한다. 진술이 운동이나 정지와 다른 한, 믿음이 영혼이나 하나와 다른 한에서, 진술과 믿음이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한 구절을 적용해 보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다름으로서의 ~이지 않음은 마치 큼과 크지 않음의 예를 통해 묘사된다. 크지 않음은 큼의 반대인 작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크기임까지 포함한다. 이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니, 받아들인다면 더욱 더 소피스테스의 재반박은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진술은 진술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그것이지 않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결국 진술의 전체에 걸쳐 ~이지 않음이 필수적이라고 하더라도, 거짓 진술을 성립시키는 ~이지 않음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라는 진술은 거짓 진술이다. 그 이유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테아이테토스 ~이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참인 진술이다. 그 이유는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테아이테토스가 서 있다'라는 진술은 어떠한가?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앉아 있다는 것이 존재, ~임을 말하고 있다면 '서 있다'는 것은 '앉아 있다'와 다르므로 이 역시 거짓이 될 것이다. 이 경우의 거짓은 '테아이테토스가 날고 있다'와 같은 종류의 거짓인가? 더 나아가, '테아이테토스는 사람이다'라는 진술의 경우는 어떠한가? '사람' '앉아 있다'와 서로 다르다. 이 진술은 그리하여 거짓이 되는가?

'테아이테토스' '앉아 있다'도 엄밀히 말하자면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은 그 자체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은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진술은 이름과 동사로 구성된다. 이름은 사물을, 동사는 사태는 가리킨다. 진술의 구성요소가 가리키는 것은 전부 어떤 무엇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지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술이 왜 ~이지 않음과 섞이지 않으리라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임과 다른 한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 외의 무엇과든 다른 한에서 모든 것은 ~이지 않음에 참여하지만, 그럼에도 진술이나 믿음이 가리키는 것은 지시 대상 자체이지 그 대상과 다른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 또한 아니다. Ta men ta de를 대상이 아닌 상황으로, 관점의 목적격으로 부사적으로 번역한다면 진술과 믿음은 ~이지 않음과 결합하지 않는 경우에 속할 수 있다. 이것들은 이것들 자체가 아닌 여타의 무언가에 관한 것, 그것에 의존적인 것이다. To medamos on은 대상화될 수도 없을 뿐더러 이를 대상으로 삼는 진술이나 믿음 역시 불가능하다. 이름이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과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경우는 없고 동사 역시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와 다른 행위를 가리킬 수는 없다. 이 결합 없이는 진술이 불가능하다. 『에우튀데모스』에서 논의하는 그러한 종류의 거짓 진술이나 거짓 믿음은 배제된다. 그렇다면 유들의 결합에서 비동일성을 의미하던 ~이지 않음이 어떻게 진술에서는 부정적 진술을 구성하는 요소로 작용하는가? 


문제들

 

나눔과 모음

소피스테스는 사냥꾼이자 장사꾼이면서 쟁론가이면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 하나의 기술로 동시에 여러 서로 다른 고유한 기술들인 그러한 기술은 불가능하다. 또한 단 하나의 기술을 지니고서 그 기술로서 다른 모든 기술들을 수행해내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기술이 어떻게 여러 다른 모습들로 드러나는지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소피스테스 기술에 고유한 문제가 아니다. 낚시꾼도 땅꾼도 모두 사냥꾼이다. 그러나 낚시꾼과 땅꾼은 서로 다르다. 소매상도 무역상도 자가판매상도 모두 상인이다. 그러나 소매상과 무역상과 자가판매상은 모두 서로 다르다. 소피스테스라는 하나의 유, 그 유가 지닌 단 하나의 기술이란 다른 여러 기술들과 구분되면서도 기술이라는 바로 그 점에서 그 모든 것들과 함께 모이는 그러한 것이다. 어떤 때에 모으고 어떤 때에 나누어야 제대로 된 판단이 가능한지 해명되어야 한다. 기술 일반에서 제작과 획득을 나누고 획득에서 다시 나눔을 거듭하여 사냥술에 이르면 우리는 사냥술이 무엇인지 정의하게 된다. 그러나 사냥술에서 다시 나눔을 거듭하면 육상에서의 사냥과 수중에서의 사냥이 나뉘고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둘이 하나의 같은 것에 포함되고, 그 둘을 포함한 것이 또 다른 것과 구분되면서도 또 다시 하나로 모인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다. 반면 소피스테스의 기술을 나누고 모으면서 이 문제가 새삼스럽게 제기된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논박하며 이것을 남에게 가르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실제로 불가능하지만 그렇게 여겨지게끔 만드는 기술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문제

to on뿐이며 to me on은 불가능하다. to on to me on에 엮을 수도 없고 to me on to on에 엮을 수도 없으며 애초에 to me on 자체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수도, 이름도, 지시사도 모두 ta onta이므로 그 중 어떤 것도 to me on과 결합할 수 없다. 그러나 to me on 없이는 거짓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고, 나아가 모상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다. 원본이 참으로 바로 그것인 바의 것이라면, 모상은 원본이지 않은 것, 참으로 그것이지 않은 것, 거짓인 것이다. 그런데 거짓은 ~인 것을 ~이지 않다고 혹은 ~이지 않은 것을 ~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다. 모상에도 거짓에도 to on to me on이 얽혀 있다. 뿐만 아니라 to on 자체도 그것 아닌 다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이 하나라면 하나 자체와 to on 자체는 서로 다를 것이므로, 그리고 to on이라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to on을 지시한다면 이름과 대상 역시 서로 다를 것이므로, to on 자체와 다르기에 to me on인 이러저러한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 없이는 to on도 가리키거나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to on 이외의 것들은 to on 자체이지 않은 한에서 to me on이고, to me on은 다시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으며 거기에 to on을 적용시키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이름도 하나도 모두 to on 자체는 아니기에 오직 to on 자체만이 가능하다. 그럼 다시 to on은 하나뿐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이는 앞서 보았듯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각기 따로 분리되어 있다면 to on 이외의 모든 것은 ta me onta로서 사라지고, to on과 이름마저 결합할 수 없기에 to on to on이라 할 수조차 없게 된다. 반면 모든 것이 구분 없이 결합된다면 정지인 동시에 운동이자 이름인 동시에 그 지시대상이며 그런 식으로 말할 수도 사유할 수도 없는 것만이 남는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고 어떤 경우에는 결합하지 않아야 한다. 

 

형상들의 결합

결합을 의미하는 동사로 참여(metechein), 적용(haptesthai) 등이 등장하고 결합의 요소들은 주어와 목적어로 구분되어 등장한다. 또한 결합의 결과 ~에 관하여 ~이다(epi ~ einai), ~ ~이다(A is B), ~ ~한다(A is B-ing) 등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같음과 운동의 관계를 보자면 1) 같음이 운동에 참여한다 2) 운동이 같음에 참여한다 3) 같음이 운동에 적용된다 4) 운동이 같음에 적용된다 네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1) 4)의 경우 (1)같음이 운동이다, (2)같음이 운동한다, (3)같음에 관하여 운동이 ~이다와 같이 같음에 대해 운동이 술어로 주어지는 세 경우가 가능하다. 2) 3)의 경우 주술관계가 역전된 마찬가지로 세 결과가 도출된다. 이러한 해석이 정당하다면 주술관계의 역전은 능동과 수동의 구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찾기 어렵다. 그러나 같음이 운동인 경우와 운동이 같음인 경우 사이의 구분은 가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에 관하여 ~인 것들과 ~이지 않은 것들이 수없이 많다는 묘사를 고려할 때 특히 결합 결과로서의 주어와 술어 사이의 구분이 가능한 결합방식은 더욱이 필수적인 것이다. 

유들의 결합에서는 to on에 참여하는 결과로 그 참여 주체가 to on이 된다. 그런데 운동, 정지, 같음, 다름에 참여할 경우 참여 주체는 to on의 경우에서처럼 그 대상을 술어로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이후의 묘사를 고려할 경우 그 참여 대상이 참여 주체에 관하여 ~인 것이 된다. ~임이 운동한다(to on kineitai)는 것은 ~임이 운동이라(to on estin kinesis)는 것이고 이는 ~임에 관하여 운동이 ~(ten kinesin einai epi to on) 것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결과는 to on과의 직접 결합을 통한 결과가 아니다. 만일 서양고전학회에서 제안된 해석을 따라 술어가 되는 과정이 to on 자체가 아니라 참여 대상의 to on에 참여함으로써 그 대상에 관하여(epi X) to on이 되는 과정이라면, 이는 주술관계에 불일치를 일으킨다. 운동이 같음에 참여하면 그 결과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다. 그런데 운동이 같음의 to on에 참여한다면 운동이 같음에 관하여 to on이 되는 것이고, 이는 거꾸로 같음이 운동한다는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이 해법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X einai epi Y를 일과된 해석으로 수용하지 않는다면, to on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을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름으로서의 to me on으로까지 확장시키기 어렵다. to on과의 관계에서 여타의 것들은 to on에 참여하여 ta onta가 된다. 그러나 다시 그것들은 다름에 결합하면서 to on 자체와 다른 것들이 된다. to on과 다른 한에서 그것들은 ta me onta이다. 그런데 예를 들어 운동과 같음의 관계에서, 운동은 자기 자신과 같다는 점에서 같음이다. 그런데 다시 운동이 같음과 다른 한에서 운동은 같음이지 않기도 하다. 여기에서 같음',' 같음'이지 않음'은 곧 to on tauton, to me on taouton이다. 어떤 주어에 대해 술어가 되는 것과 그 주어에 관하여 ~인 것이 되는 것이 의미가 같고, 어떤 것에 대해 부정술어가 되는 경우 또한 그것에 대해 ~이지 않은 것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조건이 없다면 유들의 결합에서 to on을 제외한 것들 사이의 결합 결과로서 나오는 주술문장이 설명될 수 없다. to on의 결합관계의 요소가 아닌데도 to on이 결합결과에 등장하는 이유가 설명되어야 하고, 그 이유는 epi X einai로 설명되며, 따라서 이 epi X einai가 유들의 결합 방식과 일관되게 설명되어야 유들의 결합이 온전히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운동과 정지가 결합할 수 있는지 없는지 불확실하다. Gigantomachia 부분을 고려한다면 변화(~이지 않은 것이 ~이 됨)를 겪는 모든 것은 운동한다. 정지도 인식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같음과 다름, to on을 겪어 그 겪은 바의 것이 되므로, 그것은 운동한다. 정지의 경우, 정지하지 않으면 동일할 수 없고 동일할 수 없다면 인식될 수 없으므로, 운동을 운동이라고 진술하고 사유할 수 있는 한에서 그것은 정지해야 한다. 나아가 만일 자기 자신과 같음이 같음의 대상이 되는 자기 자신의 정지를 필요로 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면, 운동이 운동이기 위해서라도 운동은 정지해야 한다. 그러나 유들의 결합을 논하는 부분에서 손님은 운동과 정지가 가장 반대되는 것이라 말하고, 테아이테토스도 이에 동의한다. 이후 운동이 정지한다거나 정지가 운동한다는 문장이 등장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편집들이 제안되기도 한다. 운동과 정지의 관계가 큼과 작음의 관계와 같다면, 이 둘의 결합이 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같음과 다름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모든 각각의 것은 자기 자신과 같은 한에서 같음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이 자기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른 한에서 다름과 결합해야만 한다. 이는 같음과 다름 자체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같음과 다름이 그렇기에 서로 결합한다면, 정지와 운동의 짝은 같음과 다름의 짝과 같은 경우인가, 다른 경우인가?

자기술어화의 문제 또한 발생한다. 같음은 자기 자신과 같다. 다른 모든 유들이 그러하듯 같음 자체도 자기 자신과 같아야 한다. 다름 역시 다른 모든 유들이 그러하듯 그 자신도 자신 이외의 모든 것들과 다르다. 이 경우 같음이 자신과 같다는 것과 운동이 자신과 같다는 것은 서로 다른 작용을 통한 서로 다른 결과인가? 혹은 운동이 같음에 참여하듯 같음도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참여한다고 해야 하는가? 또한 다름의 경우, 다름 그 자체가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다르다고 한다면, 다름은 자기 자신과도 다른가? to on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to on에 참여함으로써 to on이 된다. 그러나 to on은 그 자체로 to on이다. 그렇다면 다름도 그 자체로 다르고 같음도 그 자체로 같은가?

 

다름으로서의 to me on

다름으로서의 to me on에 대한 묘사는 '큼과 크지 않음'의 비유, 그리고 아름답지 않음 등에 대한 진술들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의 경우 크지 않음은 큼의 반대인 작음뿐만 아니라 같은 크기임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아름답지 않음을 아름답지 않다고 언급한다. 이 둘 모두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A는 무수히 많다. 그 중 어떤 것도 특칭되지 않는다. 아름답지 않음 또한 추함, , 움직임, 아름다움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일 수 있다. 크지 않음은 작음과 같은 크기임뿐만 아니라 개임, 날고 있음, 뜨거움 등 무수한 것들을, 큼 자체와 다른 모든 것들을 의미할 수 있다. L. Brown의 제안대로 암묵적으로 일정 범위가 제한된다고 생각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우선 그러한 제한이 주어지는 맥락이 대화에 직접 등장하는 바 없고, 일정 범위로 제한한다고 해서 불특정의 것이 갑자기 특정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검지 않음은 검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주어가 검지 않은 특정한 무엇인가를 지시할 경우 그것은 희거나 붉거나 푸를 것이다. 그러나 흼과 붉음과 푸름은 서로 다르다. 주어가 특정한 무언가를 지시하지 않을 경우 부정적 자기언급의 역설에 봉착할 수 있다. '참이지 않음은 참이지 않다'라는 진술이 참이라면, '참이지 않음'이라는 사태에 부합하는 참인 진술은 불가능하다. 참이지 않음이 참이라면 더 이상 참이 아니지 않을 것이기 떄문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음이 아름답지 않다'가 참이기에, '참이지 않음' 또한 '참이지 않다'고 진술하는 것이 참이다. 

 

형상들의 결합과 진술분석

유들의 결합에서 to me on이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라면, 이 다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각각의 것은 자기 자신과 같고 그 외의 것들과 다르다. 그러나 진술분석은 진술과 믿음에 to me on이 섞이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요청된다. 진술이 진술이고 믿음이 아니며 믿음 또한 자기 자신이고 그 외의 것이 아닌 한에서, 유들의 결합에서 드러난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 이것들에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을 설명하기 어렵다.

유들의 결합에서 밝혀지는 to me on의 의미는 on과 다른 모든 것에 더하여 서로 다른 모든 것에 부여되는 서로의 비동일성으로서의 다름이다. 반면 진술분석에서 거짓 진술에 포함되는 to me on은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의 to on 다른 것이다. 하지만 테아이테토스가 앉아 있다는 것이 참일 때 앉아 있음과 다르면서도 거짓이 아닌 테아이테토스에 대한 진술들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테아이테토스가 사람이라는 것은 '앉아 있음'과는 다르면서 또한 테아이테토스에 관하여 ~인 것이고 참일 것이다. 또한 앉아 있음과 다른 서 있음은 테아이테토스에게 거짓이 될 것이나, 테아이테토스가 일어선다면 참이 될 것이다. 날고 있음은 거짓 진술의 예시로서 거짓 진술에 대한 정의가 날고 있음과 서 있음 모두를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날고 있음이 인간이라는 유의 정의에서 배제되기 떄문에 인간인 테아이테토스에 대해 거짓이라면, 서 있음이 거짓인 이유는 설명될 수 없다. 

 

 


해석의 제안

 

~임의 수를 논하는 과정에서 손님은 파르메니데스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한다. ~임은 중심으로부터 끝들까지 균등하다. ~임은 중심과 끝들, 전체와 부분들을 지닌다. ~임이 하나라면 ~임은 부분들을 통해 하나를 겪어 그 전체가 하나이게 될 것이다. ~임이라는 유와 하나라는 유 사이의 결합관계가 이런 식으로 성립한다면, 이는 다른 유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유들의 결합이 부분들을 통해 전체에 걸쳐 이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은 중심과 끝들로 구분될 수 있다. 이런 식의 결합은 유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방식과 결과에 있어서 구분짓게 해준다. 예를 들어 운동이 존재에 적용(haptesthai)될 경우, 달리 말해 존재가 운동에 참여(metechein)할 경우 존재는 운동하게 된다. 이 경우 '존재가 운동한다'는 명제는 참이 되고 '존재가 운동이다'라는 문장 또한 참이 된다. 인식의 대상으로서 모든 대상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고 인식되기 이전의 상태로부터 인식된 이후의 상태로 변화된다는 것은 곧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선 운동과 정지 사이의 결합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갖게 된다. 작용과 수용의 능력이 있는 한에서, 결합하고 적용받는 모든 형상들은 운동에 참여한다. 또한 모든 형상들은 각기 그 자체로 자기 자신으로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정지에 참여한다. 이는 운동과 정지 각각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즉 운동은 정지에, 정지는 운동에 참여해야만 한다. 다만 이러한 상호작용은 본성의 중심, 능동적인 측면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기술어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러한 접근은 한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마련해 준다.같음의 본성의 중심은 능동적으로 '같다'라는 술어를 지닌다. 그러나 그 외의 술어들은 참여를 통해 의존적으로 얻게 되고 수동적으로 작용을 받음으로써 성립한다. 같음의 본성이 능동적으로 작용한 결과는 다른 유들이 같음에 참여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얻게되는 수동적 결과와 같다. 같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같음을 겪는 것이며 같아지는 것이다. 이는 to on이 하나를 겪어서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더 이전에 묘사되는 방식과 같다. 그렇다면 같음은 자신에게 참여하는 것들에게 능동적으로 작용하여 그것들을 같음으로 만든다. 이 능동성은 같음 자체의 중심에 오는 본성이다. 반면 같음의 부분에는 to on, 운동도, 정지도, 다름 또한 작용하며 같음은 그 부분들을 통해 여타의 것들에 참여한다. 이 능동적인 중심이 정의의 대상이 된다. 소피스테스의 기술 자체의 능동적 측면은 거짓된 모상의 제작이다. 오롯하게 그 기술 자체만으로는 사냥도 매매도 정화도 불가능하다. 운동은 그 무엇보다도 운동 그 자체이다. 그러나 운동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과 같고 다른 것들과 다르며 ~인 것이어야 한다. 테아이테토스에게 인간이라는 것은 테아이테토스의 능동적 측면이 속한 유일 것이고 이는 정의상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그러나 앉아 있음은 테아이테토스에게 정의상 필요한 능동적 측면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날고 있음 역시 정의상 배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풍에 휩쓸리거나 뜨거운 공기로 밀어 올려지는 연 위에 올라타거나 커다란 새를 잡아 타거나 해서 날고 있을 때, 그는 날고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앉아 있다는 것이 그러하듯 날고 있다는 것도 지금 여기에서 그에게 거짓일 뿐이다.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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