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몰랐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결국 해결해야 할 숙제를 뒤로 미루기만 하다 다시 돌아왔다. 어영부영 혹은 허겁지겁 시키는 일이나 발등에 떨어진 불 따위나 신경쓰며 세월아네월아 하는 사이에 국내 대학원생의 학점이라기엔 지나치게 비루한 평점으로 그럭저럭 논자시를 통과하고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몇 차례의 강독을 마무리하고 수료학점을 이수하고 그러고서 1년을 더 지나 보냈다. 어느 사이엔가 나도 모르게 나는 학위논문을 준비하는 처지가 되어 있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석사과정 들어오던 즈음에 머리 싸매며 고민하던 문제를 놓아 버렸었나 보다. 혼잣말을 하고 넋두리를 늘어놓는 그 습관 그대로, 공유된 맥락 안에서 적당한 배려와 어느 정도의 무시 그 중간 즈음에 대충 개떡같은 말들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먹어주는 사람들 품에서 뒹굴며 내 고질병을 키우기만 하였다. 다른 이야기들이야 어찌 되었든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떠들 때엔 언제나 '못 알아 먹겠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우습게도, 처음 학부에 입학하고 철학이란 것을 하겠노라 떠들기 시작한 이후로 내내 빠짐없이 모든 선생님들께서는 내게 같은 조언을 하셨고 같은 지적을 해 주셨더랬다. 설명할 수 없다면 아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왜 문제이고 어떤 식으로 문제이게끔 되는지, 그걸 설명하지 못한다는 건 사실은 그 문제를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라고, 혼자 떠들고 싶으면 지리산이나 기어 들어가지 왜 비싼 돈 들여가며 혼잣말이나 중얼거리며 시간낭비를 하느냐고, 그 얘기만 10년이 넘도록 듣고 있는 나란 놈은 참 지겹게도 발전이란 게 없는 새끼인 게다. 변명을 하자면, 어떻게든 시간만 지나 보내면 그 와중에 나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멀쩡히 아무렇지 않은 척 꼴에 뭐 전공하고 뭐 관심있고 그러저러합니다 지껄이고 다닐 수 있었으니까, 또 앞으로도 그냥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뭐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몰랐다고 한다면 너무 양심이 없고, 말로야 늘상 다 놓치고 샛길로 겅중거리며 뛰쳐 나아가느니 돌아가더라도 제대로 한 걸음씩 디뎌 나아가는 편이 맞다고, 난 반드시 그리 살겠노라고, 주제도 모르고 떠들기야 잘도 떠들었는데 말이다. 다행이다. 더 엇나가기 전에, 더 멀리 잘못 건너가 버리기 전에,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리기 전에 발목이 붙잡혔다. 말 그대로, 혼났다. 이상한 일이긴 하다. 며칠 전 여러 선생님들 모시고 대대적으로 욕 먹기 전까지도, 지금 지도교수님께서나 이전 지도교수님께서나 같은 말씀을 하셨던 게 분명하고, 그걸 나도 알아먹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도 마음 한켠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만 하고 있을 뿐, 심지어 그 고민을 핑계로 눈앞에 떡하니 놓여 있는 당장에 해야 할 일들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하고 있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었다고 퉁치고 가기에도 뭔가 석연찮은 그런 꼬락서니이다. 철학자를 정치가라고 하기도 하고 소피스테스라고 하기도 한다. 그가 모든 일에 합당한 자라고 했다가도 어느 순간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라고 욕을 하기도 한다. 미쳤다고 했다가 가장 지혜롭다고 칭송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셋은 이름처럼 각기 실제로도 서로 다르다. 다르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각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어떤 점이 어찌 다른지 알아야 한다. 소피스테스가 무엇인지 알려면 그런 이름으로 불리우는 부류가 무슨 일을 하는 족속인지를 알면 될 것이다. 그 부류는 그 이름이 연원한 기술, 그 부류에 고유한 지식을 통해 정의될 것이다. 그 기술의 이름은 소피스테스의 기술이겠고. 그런데 그 기술로 한다고 보이는 일들이 따지고 보면 거래술이기도 하고 쟁론술이기도 하며 시험과 논박을 통한 영혼의 정화기술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냥술을 갖고 부유하고 명망있는 젊은이들을 사로잡기도 한다. 소피스테스는 사냥꾼인가? 그러면서 동시에 쟁론가이기도 하고, 또한 장사꾼이기도 한 것인가? 그러나 사냥꾼과 장사꾼과 교사가 모두 각기 또한 서로 다르게 정의된다.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이기도 한 단 하나의 기술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기술 아닌가? 그러나 소피스테스는 그 모든 것을 알고 그 모든 기술을 갖춘 것처럼 여겨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러하며 남들 또한 그렇게 만들어 주겠노라 말하고 남들로 하여금 그렇게 믿도록 만든다. 실제로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기술, 그 비슷한 기술은 회화술이다. 건축가가 아니지만 집을 만들어내고, 사냥꾼이 아니지만 사냥감을 화폭에 붙잡아 둔다. 하늘도 별도 땅도 바다도 모두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들은 진짜가 아닌 닮은꼴일 따름이다. 화가가 그러하다면 다른 한편으로 아이들의 소꿉장난도 그럴 수 있다. 아이들은 의사가 되기도 하고 왕이 되기도 하고 상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말과 몸짓으로 그렇게 따라할 뿐, 그들이 실제로 의사이고 상인인 것은 아니다. 소피스테스는 소꿉장난을 하고 있다. 그는 그가 알고 또한 가르친다고 장담하는 그런 실제의 일들을 따라하고 흉내내어 그러한 원본들의 모상들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모상도 다 같은 모상이 아니다. 어떤 모상은 원본의 비율을 그대로 본따 만들어지지만, 또 어떤 모상은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키면서 그럼에도 마치 원본과 같은 것인냥 여겨지도록 그렇게 만들어진다. 거대한 조각상이 아래로 갈수록 더 크게 보이고 위로 갈수록 더 작게 보이기에, 원본의 비율과 같은 모습을 보이기 위해 오히려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켜 위는 더 크게, 아래는 더 작게 구성되었을 때, 이 조각상은 원본의 비율을 왜곡시킨 거짓모상이다. 이제 소피스테스는 참된 모상과 거짓 모상 둘 중 어느 하나를 만드는 모사자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소피스테스가 철학자와 다르듯, 상술이 교육술과 다르듯, 원본과 모상도 서로 다를 것이다. 그런데 원본으로서의 A라는 것이 바로 그 A인 것인 한에서, 모상은 원본이지 않기에 A이지 않은 것이 된다. 원본인 A가 참으로 A라면 모상인 ~A는 거짓이 된다. 모상, 모방물은 어떤 것이 아닌 것, 참이 아닌 거짓이다. 또한 이러한 소피스테스의 모사를 통해 사람들이 갖게 되는 믿음 또한 거짓이다. 그들은 모든 것은 아는 게 아니지만 모든 것을 안다고 사람들은 믿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니라는 것, 거짓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지 않은 것,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 것이다. 모상과 거짓에는 이 두 가지가 섞여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가리킬 수조차 없다. 모상과 거짓을 말하기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이름, 그 진술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인 것이고 ~이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인 것으로서 하나이다. 그러나 정말로 하나라면 그것은 둘이 아니다. ~인 것을 부르는 '~이다'라는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는 ~인 것을 나눌 수 없다. 그러므로 ~인 것은 하나일 수 없다. 하나가 아니고 둘이라 하더라도, 그 둘은 모두 ~이다. 둘 중 어느 하나만이 ~이라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 그 둘 모두 ~이지만 ~인 것 자체는 따로 그 둘과 다르다면, ~인 것 자체는 저 둘과 마찬가지로 ~인 것일 수도 없고 저 둘과 달리 그 하나만 ~인 것일 수도 없다. ~인 것이 달리 변한다면 그것은 이전과 다르다는 그 이유로 ~이지 않게 될 것이므로 ~인 것은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식될 수 없다. 인식이 '된다'는 것은 인식되지 않았던 것이 인식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이고, 이전과는 다른 것이 된다는 것이며, 곧 ~이지 않게 된다는 것,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식될 수 없고, 같은 맥락에서 진술될 수도, 지시될 수도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것이 그 하나의 것으로 자기 자신과 동일하려면,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가 아닌 다른 무엇이라면, 그것은 그 '하나'를 겪어 그것이 되어야 하지만 멈추어 있는 것은 무언가를 겪을 수 없다. 그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이름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그것'이라는 이름조차 붙을 수 없다. ~인 것도 ~이지 않은 것도 모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모든 것이 전혀 관계맺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있어서도 뭉뚱그려져 하나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는 결합하면서 또 다른 식으로는 분리되어야 하며, 이러한 결합과 분리의 가능조건들 그 자체가 스스로 그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 조건들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 작동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는 어떻게 내가 말하거나 생각하거나 가리키고자 하는 것을 긍정하고 또한 그것을 긍정하기 위해 다른 것을 부정할 수 있는가? 그렇게 부정되는 바로 그것을 또한 어떻게 긍정할 수 있고 어떻게 긍정된 것을 통해 배제되고 부정된 것들에 비추어 바로 그 긍정된 것을 다시 부정할 수 있는가? 관계를 맺은 것이 어떻게 동시에 서로 분리될 수 있는가? 원본과 모상만이 아니라 원본과 이름도, 원본과 또 다른 원본도 어떻게 이런 이중의 관계를 성립시킬 수 있는가? 저마다 모두 그 자신 외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여타의 것들이지 않은 것이어야 하면서도 그 모든 것이 다 함께 제각기 자기 자신인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지시, 진술, 사유가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항상 그 어떤 것에 관한 것, 그것에 의존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진술이나 사유, 믿음이나 인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무엇에 관한 것도 아닌 진술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것에 관해서든 그것에 관한 진술은 그것 자체일 수 없다. 그것이 어떤 것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어떻게 거짓이 되고 또한 참이 되는가? 거짓은 그것 아닌 것을 그것이라 말하는 것, 그것에 관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참은 그것을 그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원본이 아닌 한에서 모든 모상은 거짓이어야 하지 않는가? 혹은, 원본에 관한 것인 한에서 다시 모든 모상은 참이기만 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결합과 분리만으로는 참과 거짓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소피스테스 역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세대이다. 그들이 단순한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들의 반박을 엘레아의 손님이 이유없이 재검토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그런 상황을 플라톤이 심심풀이 삼아 아무 생각없이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이 다른 어떤 것이지 않다는 것과 그 무엇이 거짓이라는 것은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어떻게 다르고 또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지금 여기까지 지껄인 이야기는, 누군가의 동의를 얻을 만한 문제제기의 과정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여전히, 나는 혼잣말만 지껄이고 있는 것인가?

2. 간단한 이야기이다. 한국에서 어떤 학문분야를 전공하고 이것을 일로 삼아 밥을 벌어먹고 살겠다고 마음 먹으면, 해야 할 일은 그냥 열심히 하고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집안이 풍족하여 돈 걱정 없이 공부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재능과 노력을 겸비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지. 반대로 대출 갚으라는 독촉이나 받으며 아침에 산 김밥 한 줄을 저녁까지 세 번에 나누어 먹거나 하루 한 끼 삼아 삼일에 걸쳐 나눠 먹게 될 수도 있다. 학원 나가고 첨삭 하고 조교일 하고 프로젝트 시다바리 하면서 이 돈 저 돈 있는대로 긁어모아 다달이 월세에 관리비에 뭐에뭐에 탈탈 털리기를 몇 달 거듭하다 자살충동에 시달릴 수도 있다. 좆나 쎄빠지게 이 악물고 버틴 것 같은데 고만고만한 바닥에서 새 공부 해 오는 사람도 안 들어오고 가르쳐줄 사람도 같이 공부할 사람도 줄어만 가는 와중에 다른 나라에서 한참이나 어린 사람들이 날고 기는 성과를 내고 곁눈질로만 봐도 부러울 정도로 신나게 열띤 토론을 해대는 걸 보면서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한 줌 정도 되는 주변의 스승들과 선배들을 보노라면, 자신이 외국이 이러네 저러네 헛소리나 지껄일 시간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잘 앞서 나아가 있는지도 보일 것이다. 거창하게 학문의 이상을 논한다면야 두 말할 나위 없이 당신은 그 학문의 역사에서는커녕 어디 동네 학술지에 비판대상으로마저도 언급될 일 없는, 학계의 해충수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지간한 실력과 운빨이 맞아 떨어져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교수가 되는 일은 당신이 로또에 당첨되는 일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더 쉽지는 않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강사나 하지, 뭐'라는 말을 쉽게 내뱉었던 지난 날을 반성하게도 되겠지. 좆도 밥도 아닌 당신을 뭐가 이쁘다고 끌어다 챙겨 남 들어갈 자리 비워다가 당신을 앉혀 주겠는가, 그게 다 돈인데. 하지만 이것도 다 당신이 살아남은 그 다음의 이야기들이다. 당신은 어느 기말 소논문에서, 어느 강독 모임에서, 또 어느 학회 뒷풀이자리에서 끊임없이 당신의 게으름과 비겁함, 그리고 모자람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알아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배워나갈 수 있겠지만, 정작 바로 그것들은 배우지 못할 것인데 왜냐하면 그건 당신이 못 배워서일 거다. 그러는 와중에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냈는지 실감하게도 되겠지. 당신보다 훨씬 더 간절하고 치열하게 당신이 하는 그 학문을 사랑하고 애달아 하는 사람들, 그러나 당신보다는 조금 더 정직하고 용감해서 더 이상 억지 부리지 않고 또 눈치도 빨라 나가라는 암시를 잘도 붙잡아 조용히 자리 털고 일어난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보일 것이다. 종종 더 끔찍하게는 당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꼴도 보게 될 거다. 물론 몇몇은 수제자 소리를 들어 가며 온갖 장학금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 받고 등재지에 논문도 올리는 일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해당 학계에 학문적으로 기여한 급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미래가 보장받는 것도 아닌 판에, 당신은 그들 뒷꽁무니나 좇고 있는 거다. 연구사에 길이 남는 꿈에서부터 국내 학계, 자신이 속한 학교, 자신이 속한 딱 그 학번대까지 내려와도 당신의 학문만을 놓고 봤을 때만 해도 당신의 앞길이 그리 밝지만은 않을 거라 미루어 짐작한다. 돈 문제는 얘기해서 뭐 하겠나?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른 일을 하더라도 당신 꼬라지는 거기서 별반 나을 것도 없을 거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애들 만큼, 대기업 입사하겠노라고 새벽영어반 다니는 애들 만큼, 같은 새벽에 물건 끊어 동대문으로, 트럭 몰고 골목골목으로, 혹은 테이블에서 테이블로 룸에서 룸으로 뛰고 또 뛰는 애들 만큼 노력하면 그 애들 만큼 힘겨운 삶을 살게 되는 건데, 당신은 그냥 책상머리 앉아서 담배나 태우고 커피나 홀짝이면서 훨씬 더 느긋하게 당신 인생을 망치고 있잖은가? 나가면 걔들한테 밟힐 일만 남은 거야. 뭐 그나마 사정이 어느 정도 되니 대학원으로 도망칠 생각이나마 했겠지. 도망친 게 아니라면, 그냥 닥치고 빡세게 할 일 하면 되는 거고. 이 와중에 당신이 전공하고 있는 학문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기를 바라기도 하고 고립에서 벗어나 여러 방향으로 소통하며 더 넓은 지평을 확인하게 되기도 바란다면, 희망만큼의 절망은 당연한 거 아닐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런 거 정말 몰라서 딴청 부리며 그 자리에 엉덩이 깔고 억지부리고 있는 건가? 아닐 거다. 다 알고도 그냥 선택한 거라면, 쓰잘데기 없는 고민들은 잠시 접어 놓아도 좋지 않을까 싶다. 정말로 절대로 안 되는 일이라면 실제로 안 될 거다. 주제넘게 당신 혼자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고민하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다. 남들이 알아서 당신을 밀쳐내고 끊어내고 떨어뜨릴 테니까, 그렇게 될 때까지는 괜히 맘고생 사서 할 필요 없다는 거다. 즐겨라. 뭐가 어찌 됐든 재밌어서 붙들고 있는 것 아닌가? 나중에 정말로 못 하게 됐을 때 구질구질하게 후회하지 말고, 할 수 있을 때 재밌게 한껏 해 보는 거다. 돈 못 벌어오는 자신이 가족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하고, 능력 없는 자신을 돌보느라 시간 낭비하는 선생님들께 미안하고, 앞길이 구만리 같은 학문에 쓰레기나 더하며 짐이나 얹어 대는 자신이 세상 앞에 미안한가? 거짓말이다. 미안하다면 관뒀겠지. 당신이 없는 양심을 쥐어짜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들기에는, 다른 힘들 일들이 쌔고 쌨다는 게 문제다. 그냥, 뒈지지만 말아라. 마음껏 즐기고 끝나면 즐거웠노라고 웃으며 축배를 들어라. 끝나지 않을 때까지는 오늘도 또 하루 살아남았다는 것에 또 축배를 들어라. 내가 대학원 가지 말라고 뜯어 말리는 새끼들의 특징은, 거기 목숨 거는 척을 한다는 거다. 실제로 걸었다면 끝날 때 뒈지면 되니 미리 뒈질 필요가 없는데, 거는 척하는 새끼들은 자꾸 지 안에서 유령을 키우니까 문제다. 눈앞의 문제에 힘들어 하고 눈앞의 문제랑 씨름해라. 그리고 바로 그 싸움이 니가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그 유희거리라는 걸 마음 속으로 인정 좀 해라. 즐겨라. BGM으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축배'를 추천한다.

3. 내 오랜 벗 둘이 결혼을 했다. 둘이 따로가 아니라 둘이 부부가 됐다. 이러저러해서 식도 안 보고 그냥 축의금 주고 인사나 하고 돌아 나왔는데, 그 잠깐의 모습을 보고 나니 문득 내가 앞으로 어떤 꼴로 살아가게 될지가 좀 더 실감이 나더라. 그 장면 어디에 나를 놓고 싶지가 않더라. 물론 진심으로 축하하고 개인적인 믿음이지만 두 녀석은 내내 재밌게 잘 살 것 같긴 하다. 자질구레한 '삶'이라는 거에 이리저리 들볶이지 않을 수야 있겠냐만, 사랑도 의리도 이래저래 종류별로 신뢰를 갖춘 두 사람이니 뒷통수 후려 갈기고 쌍욕하며 갈라서지는 않겠지. 뭔가 새 공부도 해 보겠다 할 테고, 말도 안 되는 여행을 떠나기도 할 테고, 애가 생기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이거 가르치겠다 냅두고 놀게나 하겠다 그러고 투닥거리는 것도 재밌을 테고 말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차치하고, 그냥 '결혼식'이라는 걸 보고 있노라니 내 아부지 어무이가 생각나는 거다. 연애감정도 이렇다할 신뢰도 없이 서로 이해하지도 이해받지도 못한 채로 뜻대로 풀리는 것 하나 없이 지쳐만 가는 과정. 내가 워낙 지랄 맞게 자란 탓에 나란 놈에게 기대가 없어 그러실 수도 있겠지만 어무이는 내가 결혼 안 하고 돈 안 되는 짓거리라도 나 재밌는 거 하며 낄낄거리며 살다 뒈지겠노라 말할 때마다 그거 참 맞는 말이다 해주신다. 열심히 돈을 벌어 유복한 유년기를 보내게 해주신 우리 아부지께서는 다니시던 직장이 본사로 철수하고 가져 나온 사업이 적자만 계속되고 거기 쏟아붓느라 아파트 하나 못 사놓은 탓에 노후까지 불안해진 와중에, 그 돈벌이 하나로 세웠던 자존심과 그 하나로 내게 휘둘렀던 권위와 강압의 습관만 남아, 그나마 푼돈이라도 주워 들어오는 내게 별 말씀도 못 하시면서 툭툭 지나가며 짜증을 내신다. 집안 대대로 내려놓은 더러운 기질은 얘기해 무엇 하나 싶고, 그거 말고라도 글쎄, 가정을 꾸리고 싶지도 않고 꾸릴 자신도 없다. 아부지나 어무이 만큼 돈을 벌어낼 자신도 없고, 그 아래에서 자라온 내 지난 날의 가정에 대한 애착도 딱히 없고, 효심이니 뭐니 워낙에 그런 거 없는 후레자식이기도 하거니와 그나마 한 번 거하게 했던 결심도 수포로 돌아가고 나니 지칠대로 지쳐 버리기도 했으니... 아마 남은 친구놈들도 저 생경한 장면 속으로 들어갈 테고, 그 자리마다 내 실수로 서먹해진 또 다른 친구 하나도 축하인사를 하러 오다가 어느 날엔가는 제 장면을 애들에게 들이밀 테고, 아, 그건 참 가슴 아프다. 구애인의 도를 지키기 위해 연락도 않고 얼굴도 피하고 뒷조사(?)도 않는 마당에 여전히 그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 싫을 만큼 아프다는 게, 그것도 참 구질구질하네. 뭐 구애인이고 전애인이고 나발이고 몇 번 얼굴도 못 보고 차였는데 할 말은 아니다만, 그저 나는 맨날 이 지랄이지. 딴 얘기로 샜는데, 어차피 개소리 할 요량으로 지껄이고 있는 것이니 그냥 계속 지껄이자. 그냥, 갈수록 할 얘기가 없어지리라는 막연한 느낌이랄까? 가면 갈수록 우리는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몇 번을 되풀어 추억팔이나 하다가, 지금도 몇 놈은 그런 꼴을 보여주는데 또 가면 갈수록 날 동정씩이나 하는 것들도 늘어날 것 같고, 그 호의보다도 그 삶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해 나는 화를 내게 될 것만 같고, 그렇게 내 추한 꼴 더러운 꼴 보이며 안 좋게 멀어지느니 그냥 좋을 때 조용히 꺼져 주는 것이 내 매우 즐거웠던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 대해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 나만 빠지면 다른 사람들은 그럭저럭 조금은 거리를 두고 또 조금은 함께 하면서 잘들 어울려 오래도록 보고 지내고들 살 것도 같고. 그냥,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반감만 키워오다 또 언제부턴가는 다른 방향에서 기대도 접어오며 거리를 둔 그런 삶의 방식, 그 상징물이랄지 뭐 그런 것을 봐 버린 느낌이다. 별 얘긴 아니다. 미역을 싫어하는 나와 청국장을 싫어하는 형 사이의 거리감 같은 것을 느꼈을 뿐, 내 미역에 대한 안 좋은 추억들이 미역에 대한 객관적 비판이 될 수는 없는 것임을 나 역시 잘 안다. 아마 다음, 다다음 남은 다른 친구녀석들의 결혼식에도 나는 축하의 마음을 담아 몇 푼 안 되는 축의금을 남기고 얼굴도장을 찍고 그렇게 인사를 하러 갈 게다. 지금은 생각조차 쉽지 않아도, 저 아프리라 예상되는 자리에도 난 어쨌든 가겠지. 아마도 거기까지다. 

4. 이 블로그에 정리하다 만 공부거리들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 놓고서 헛소리를 지껄이려 했으나, 마음청소도 제때제때 하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해서 그냥 씨부려 본다. 힐링캠프에서 강신주의 이야기들을 보면서, 더 이상 학자이길 자처하지 않는 사람이 그저 '철학자'란 이름 하나 쓰는 걸 갖고 나 따위가 지랄을 해댈 이유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효과적인 수사, 그의 조언이나 그 뒤에 놓인 소신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그는 참 시원하게 떠들고 있었고, 나는 그럴 재주가 없는 사람인데다, 아마도 앞으로도 영영 나는 그 길과는 상관없는 길을 갈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맥이 풀렸달까. 학부 때 다녔던 학교 선배는 그 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대학원생들을 모아 놓고 철학사 공부하는 모임을 만드느라 바쁘더라. 석사 내내 석사과정이 뭔지, 논문은 또 뭔지, 어찌 해야 하는지 고민만 하다 비효율적으로 지나 보낸 시간이 아쉽고 내버려두면 그 낭비를 반복할 다른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뭔가 만들어 놓고 싶다고, 그리 말하는 그 선배를 보노라니 좀 미안하기도 하더라. 다 팽개치고 도망나와 내 살 길 찾겠노라 해놓고서는, 심지어 그마저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나는 참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도 개새끼고 그냥 사람새끼로서도 사람이 아니라 버러지새끼고 그렇구나 싶더라. 선생님들 번역 준비 윤독 모임에 따라 들어가 뒷풀이 자리에서 선생님들 붙들고 시덥잖은 하소연이나 하느라고 새벽까지 귀찮게나 굴고, 아, 쓰레기로다. 모르겠다. 징징거리지들 말라고 하고 다니면서도 당장에 내가 칭얼거리기나 할 뿐, 어째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지. 여전히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물색없이 아무렇게나 세상에도 화가 나고 서럽고 분하고 억울한데, 그럴 자격조차 없는 새끼라는 걸 이제는 모르는 척 하기도 어려워져 버렸다. 뭘 어찌 할까. 『티마이오스』 윤독이 재개될 테고 『파르메니데스』 윤독도 시작될 테고 『필레보스』로 연구강좌도 열릴 텐데, 운도 좋게 큰 도움 받아 이래저래 읽었던 프로타고라스 관련 단편들로 대학원에서는 강의도 열릴 테고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 강독도 계속 될 텐데. 현대 영미철학도 논리철학도 수리철학도 신기하고 재밌어서 더 보려면 읽고 준비할 게 차고 넘치는데. 4월부터는 돈 들어올 구멍도 다 막히고 벌써 작년에 썼어야 할 논문은 계획이 또 밀려, 그래도 다음 학기까지는 내야 하는데. 여러 사람들이 많이도 가르쳐 주려 애를 썼던 시간들이 쌓여만 가는데 나는 왜 배우지를 못하고. 또 새벽이네. 아, 별 준 것도 없이 몇 번 얼굴이나 봤다고 그런 쓰잘데기 없는 나란 놈 그래도 안다고 아무 얘기 없이 뜬금없이 도와달란 말에 선뜻 도와준 대학원 지인들에게 술 한 잔은 사야 하는데, 꼴에 조교랍시고 들어가 도와줘야 할 것도 많았는데 제대로 도와주지도 못하는 사이에 덜컥 대학원에 들어와 고생고생 생고생 중인 또 다른 지인에게도 힘들어도 된다고, 힘들어할 그 정직함이 참 다행이라고 또 술이라도 한 잔 바쳐야 할 터인데, 아직도 찾아가지 못하고 있는 친구의 무덤에도 한 잔을 바쳐야 하고, 내 스승의 스승, 스승의 스승의 스승께서 돌아가신지 이번에는 20주기라는데 무슨 낯으로 거긴 또 찾아 가야 하나. 함께 이거 읽어 보자, 저거 읽어 보자 말 꺼내놓고서 다음 얘기 기다리고 있는 여기저기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 하는데. 이거고 저거고 다 떠나서 나같은 놈 붙들고 지켜봐 주시는 선생님들께 그래도 뭘 배우긴 배웠노라고 제자답게 졸업자격요건 겸으로 졸업논문이라도 보여 드려야 할 것인데. 인터넷에서 좆도 없는 내가 멋대로 재단하고 욕지기뱉은 사람들에게 사죄의 잔을 올려야 하는데. 내게 배신당한 후배놈들에게 절을 하고 엉덩이를 걷어 차이고 또 한 잔을 사다 바쳐야 하는 것인데. 그냥 빚만 쌓이는 게 아니라 마음 빚까지 쌓여 가니 참 사는 게 각박하구나. 이젠 대학원생이 되어버린 후배들이 아이패드 필름을 주질 않나 과방에 퍼질러 자다 깨워달라는 걸 또 와서 깨워주질 않나, 참 나란 놈 달라진 것 없이 민폐뿐인 인생이다.

5. 괜찮아. 난 틀리지 않았어. 내가 틀렸다는 그 생각만큼은 맞는 거였어. 고치고, 거쳐서, 딛고 나아가면 되는 거야. 뒈지기 전까지 사는 동안은 계속 살아낼 거야. 그럼 되는 거야. 소크라테스 형아가 그랬잖아, 뭔지도 모르는 걸 두려워 하는 건 거짓말이라고. 죽음조차 그러할진데 고작 시답잖은 자괴감 갖고 겁 집어먹긴, 무슨. 정직하고 성실하게 되돌아 나올 기회를 얻었다. 나는 멀리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제대로 걷고 싶은 거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가슴 떨리고, 두근두근 거리는데 뭘 더 바라겠나. 가끔 갑갑하면 욕도 하고 괜히 지랄병도 부리면서, 미친놈마냥 혼자 이죽거리고 낄낄거리며 갈 때까지 가 보자. 다시, 축배를 들어라.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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