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전히 나란 새끼는 흥미본위일 뿐인지도. 정보와 논리로 날 찍어 누르는 사람들이 좋다.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나오려고 발버둥치는 게 좋다. 좀 더 바라자면, 가야하고 못 가고 있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기까지 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다. 플라톤이 좋은 건 내가 좋음의 이데아를 믿어서가 아니라, 그것에 못 미치는 모든 것들을 그 핑계로 보류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들에서 윤리와 도덕에 신뢰를 바치는 짓은 못 해먹겠단 거다. 건별로 상황마다 사력을 다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진 못하더라도 섣부른 신념의 노예 같은 건 성격상 영 내키질 않아서, 다만 더 옳은 길을 끊임없이 바랄 따름이다. 경건을 논하던 소크라테스는 "댁 마음대로 하쇼, 당신 좋을대로 답해 주겠소." 라고 비아냥거리는 에우튀프론에게 이리 말했다. "진실이 아니라면 내겐 전혀 즐거울 게 없소."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아무도 없다." 라는 신탁을 두고 아폴론이 틀린 거 아니냐며 자신의 어리석음을 증명하겠노라고 당대의 식자들을 찾아 다녔던 소크라테스를 생각하면, 사실은 좀 부러운 마음도 없잖다. 그는 아마 궁금해 미치겠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알고 싶어 죽겠고, 조금씩이나마 뭔가 알아가는 듯한 그 간질간질한 것이 좋아 죽겠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시덥잖은 것들이 못 버티고 나가 떨어져 결국 재미없게 죽었지만, 영혼을 위한 최고의 치유라 그가 믿었던 철학을 하다가 그 덕에 한 세상 신나게 꼴리는대로 살다 가는 마당에 '덕분에 즐거웠수다.' 하며 닭 한 마리까지 되갚아 바쳤으니 그야말로 아쉬울 것 없는 인생 아니었겠나. 뭐 그거야 소크라테스님씩이나 되셨으니 그리 사셨던 게고, 나는 어쩌나, 시정잡배개쓰레기로 굴러먹다 뒈지게 생겼는데. 죽기 직전에 폰 쓸 힘이 남아 있다면 국경없는의사회에 반반무많이라도 배달시키고 뒈져야 하겠다. 아, 됐고, 학위 좀. 

2. 나는 상식 선을 확보하고 그 앞으로 더 나아가 논증이 오가는 상황 속 그런 페미니즘을 보고 싶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제3세계 반도 후미진 구석탱이에 사내새끼로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 논의의 상대라는 자격 자체를 상실해 버린 것만 같다. 뭘 묻고 따지기에 앞서 그냥 하수구 시궁진창에서 쓰레기 줍기부터 시작해야 할 터인데, 여태까지도 이미 알면서 비겁했고 앞으로도 이 안락하고 쩐내 가득한 '자지의 왕국'에서 무슨 엄청난 내란을 일으킬 일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는 지금 대학원 연구실 같은 공동연구실 구석 한 켠에 골골대며 논문이나 읽고 번역이나 하고 첨삭 몇 줄 끄적거리는 매일을 보내다 볕 좋은 날 조용히 뒈지는 정도는 꿈꿔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어쨌든 너무도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결말이 되어 버렸다. 내가 배운 학문이 부정의를 묵인하거나 편드는 일을 긍정하지 않는 한에야, 지금도 어디서 죽어 나가고 있는, 살아남으면 또 살아남았다고 손가락질을 받고 내쫓기고 인두로 이마가 지져지는, 그런 사람들을 두고 저런 결말이 내게 거리낌 없이 흡족할 수야 있겠나. 그러나, 여전히, 내가 선 곳이 어디고 디딜 곳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아, 저 사람들이 내게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책임을 묻는다면 처벌을 받는 쪽으로라도 갈피가 잡힐 것이나, 아마 밖에서 보기엔 나 역시 언제 염산을 뿌리고 칼을 휘두를지 모를 의심스럽고 역겨운 무명의 시헤한남십치에 불과할 테니, 모르겠는 것이다. 글쎄, 내가 페미니스트이길 작정한다면 달라질까? 난 그런 확신과 용기가 무척이나 의심스러워서 도무지 그걸 뒤집어 쓰고 다닐 자신이 없다. 제도의 개선에 목소리와 머릿수와 표가 필요하다면 가져다 바칠 수 있고(특히 이번 기회에 진보연하는 가부장십치들의 팬티 내리기는 아주 잘 구경하였다. 다들 안녕. 니들한테 줄 표는 없다.), 자리마다 맞거나 죽을 위험이 덜한 내가 자지들에게 자지대 자지로 그러지들 좀 맙시다, 뭐 그정도 겐세이는 놓을 수 있고, 한때 푹 절어 살던 개저씨 쓰레기 농담도 많이 내려 놓았으니 조금씩 나아질지도 모르겠고. 어느 사이에 자연과학도 사회과학도 그 안의 천 갈래 만 갈래 지금의 진짜 현실을 논하는 온갖 눈들과 그림들도 모두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게 되어 버렸다. 껴서 주워듣고 싶고 이걸 알아라 저걸 배워라 그런 얘기들 들으며 버러지 취급을 받고 싶다. 먹물 찌질이는 이럴 때 개론서를 읽어야 하는 건가 하며 쿰척거리는 것이다. 근데, 여성 성노동자, 명예남성, '현모양처' 는 지금 논란 속에서 어떤 식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감을 못 잡겠다. 나는 그들이, 만약 어떤 연대란 것이 지금 필요하다면, 그 연대에 포섭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막상 '당사자'들의 상황에서는 입장이 다양하겠고 그 결들을 내가 세심히 살피겠다 나댈 수 있는 입장은 못 되니. 그런데 생각할 수록 지금 내 태도는 아마도 여성혁명 같은 것이 일어나면 결국 단두대행을 피할 수 없겠지 싶다. 그저 날이 갈수록 이래저래 수치와 죄책만 늘어간다. 감히 미안함을 품을 자격조차 없이 이런저런 전선에서 패주하다가, 그렇게 썩어 간다. 캬, 쓰레기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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