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교수님이 바뀌었다. 첫 지도교수님께서는 정년퇴임을 하시느라고, 두 번째 지도교수님께서는 행정직을 맡으시기도 했고 다른 제자들도 많은지라 이래저래 날 닥달하실 시간이 없으셨던 것도 같고(본인 말씀으로는 내가 다루려는 분야나 주제에 대해 본인보다 이해나 관심이 조금이나마 나은 분이기 떄문이라고도 하셨다) 그리하여 세 번째 지도교수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일로 찾아가 뵙고 말씀을 듣다가 좀 생명의 위기랄까, 뭐 그런 걸 느끼게 되었다. 수료하고 네 학기, 그 사이에 내 논문 주제나 계획을 남들에게 설득시키지도 못했고, 2차 자료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다는 것을 납득시키지도 못했으며, 그러는 사이에 논문과 무관한 이런저런 자리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다는 건, 어쩌면 전문적인 학자로서의 자질 부족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을 하시더라. 생업을 따로 가지고 평생 취미로만 공부를 한다면야 모르겠지만, 직업 연구자로서 살려면 자신이 해야할 일을 제때에 제대로 해내야 하는 게 맞고 또 당연한 일이라는 말씀이셨다. 그 와중에, 대학원 입학 즈음에 내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허무맹랑한 논문으로 석사를 졸업하겠노라 나대던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사람이 통과를 한 것을 두고 당시에 나는 상당히 불만이었는데, 앞으로는 이쪽 분야로 전업 학자를 하지 말라는 단서를 두고 그 조건으로 졸업을 시켰다고 하시더라. 내가 지금 그 인간과 같은 취급을 받을 위기에 놓인 것이다. 아니, 이미 그 급으로 추락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결국 석사 논문 심사라는 것은 이후 연구자로 살아가도 좋다는 인증을 받는 과정이고, 그래서 평생 학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나같은 놈에게는 이 시기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는 것,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지도교수님께 그 얘기를 다시 듣고 '이런 얘기를 굳이 제가 해야 하나요?'라는 첨언까지 들으니 위기감이 고조된다. 학자로 살 수 없다면, 살 수 있을지 그것도 사실 잘 모르겠고. 애초에 주제를 선정하고 계획을 잡고 범위를 한정하고 내 능력과 내가 해야할 일의 규모를 가늠하는 것까지 모두 학자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일 텐데, 이렇게까지 내몰리고서도 읽고 쓰고 그러는 것 말고는 달리 살아갈 자신 같은 것은 없다. 물론 아직 끝이 아니고,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고, 이렇든 저렇든 내게는 아직도 빠져나가 살아남을 길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것 같아서, 좀 더 달려들어 매달릴 생각이지만서도. 매번 학당에서 뵙던 선생님께서 어느 사이에 지도교수님이 되어 버렸다. 진작에 논문부터 해결을 봤었더라면 이전 지도교수님 『고르기아스』 3학기 연속 강의도 듣고, 이번 지도교수님 대학원 『국가』 강의도 듣고, 그러면서 중간보고서, 기말보고서, 발제니 뭐니 이래저래 내게 워낙에 부족한 글쓰기 지적도 받고 그랬을 텐데, 뭐 다 뒤늦은 후회일 뿐이고. 여하간에 놓을 것 다 놓고, 학당에서 『국가』 윤독하는 날마다 매주 찾아 뵙고 상담받고 계획 검토받고 매주 혹은 격주로 자료정리한 것이나 초안 잡은 것 드리고, 진작에 했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파르메니데스』도 『티마이오스』도 『필레보스』도 모두 내게 필요하고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현실도피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 남아야 한다. 죽고 싶지는 않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이 고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문헌 자체가, 전문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애초에 쟁점이 무엇인지조차 합의가 쉽지 않을 만큼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대화편이기도 하고, 그런 연유로 석사과정에서 연구 훈련을 하기에는 그리 좋지 않은 문헌이란 얘기는, 뭐 계속 들어 왔던 것이긴 하다. 그런데 또 그렇기 때문에 이 대화편을 가지고 석사과정에서 할 수 있는 수준의 작업도 있으리라 본다. 이해에는 단계가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애초의 문제의식으로 되돌아 간다. 있는/~인 것과 있지 않은/~이지 않은 것, to on과 to me on의 문제를 이 대화편의 중심에 놓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나는 여전히 형상들의 결합이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어떻게 결합하고 또 어떻게 분리되는지, 이 방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이후에 비로소 to on과 to me on에 대해 무언가 말할 기초가 마련된다고 생각한다. 계사인지 존재사인지 진리사인지, 구문론에서 보어의 유무라든지 서술인지 동일시인지 하는 온갖 구분들을 to on에서부터 시작하여 거기에서 모두 마련해 놓고 여기에 형상들의 결합을 우겨 넣는 방식은 역시대착오이자 문헌에 밀착하지 못한 자의적 해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그런데 이걸 논하기에 앞서서, 크게 이 두 진영, 『소피스테스』를 언어철학 저술로 보는 측과 형이상학 저술로 보는 쪽의 대립이 시작하는 지점을 보여줘야 한다. 그러니까, 그 두 입장 각각이 대체 왜 발생하는지, 이 대화편에서는 무엇을 왜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 그것이 먼저고, 아마 여태까지의 지적들을 모아 보면 내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가망이나마 보이는 건 최대한 많이 쳐서 거기까지인 듯하다. 문헌 자체에서 문제는 연결고리의 문제이다. 소피스테스를 정의하기 위해 도입된 분할의 방법, 이러저러한 모든 것들과 그것들의 모상, 그 모상의 참과 거짓, 거짓이 근거하는 모상이 근거하는 to me on의 불가능성, to on이 보여주는 to me on과 같은 정도의 난제, to me on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수행되는 변증, 형상들의 결합과 분리, 다시 진술과 믿음을 구성하는 이름과 말의 결합, 이름이 가리키는 무엇과 말이 가리키는 어떠함, 각 주제마다 전개되는 방식과 제안되는 해결책이 낯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어, 다시 여러 외국어들, 또 다시 우리말 각각의 고유한 특징과 한계 그리고 다시 이것들 사이의 차이까지 이해를 가로막는다. 이런 문제를 모두 해결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겠지. 그런데 그거야 말로 내가 지금 해낼 수는 없는 정도의 어려운 일 아닌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내가 다루어야 할 문헌을 내가 장악하지 못하고 있어서 벌어지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대화편은 말과 생각이 무엇인지, 그게 어떻게 성립하고 어떤 구조를 지니는지 묻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말과 생각이 향하는 대상의 성립과 구조를 먼저 논하고, 그 대상을 모방하는 모상으로서의 말과 생각 사이의 관계를 따지고 있는 것인가, 거칠게 말하면 이게 내가 정리해야 할 연구사의 두 입장 되시겠다. 말과 생각은 어떻게 대상을 모방할 수 있는가,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해주는 대상세계는 어떤 식으로 되어먹었는가, 그 구조가 접근과 결합을 허용하는가, 과연 이런 물음들이 『소피스테스』라는 대화편을 읽으면서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물음이긴 한 건가. 그러나 저러나 지도교수님이 이제 세 분이다. 세 분 다 어쨌든 주기적으로 뵙게 되는지라, 바뀐 게 있다면 그저 숨통이 조금 더 죄인다는 정도일까나. 사실은, 만약 좌절된다면 어떤 식으로 죽어야 할까를 잠시 좀 구체적으로 생각했었다만, 죽기엔 좀 이르니까. 잡다하게 이것저것 자료랍시고 읽어 놓긴 했는데, 정리해서 쓰는 게 영 부족하다. 일단 연구서 두 권 반납일 전까지 대강이라도 정리를 해 두고, 그 사이에 생각 좀 정리하자. 내가 유들의 결합과 분리에서 부분과 전체, 그리고 중심 같은 것들에 주목한 까닭은 결국 존재사냐 계사냐, 동일성 명제냐 서술 명제냐 이런 도구들 없이, '그 자체로'와 '다른 것에 대하여'라든지 '다른 것에 관하여 ~인/있는 것'이라든지 따위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고, 그럼 이 갈림길까지 가는 과정을 제대로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하는 게 먼저고 또 맞다. 놀고 자빠져만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놓고 까이고 욕먹고 버티는 거, 들이받고 치받고 얻어 터지고 으르렁대는 거 그야말로 내 주특기 아닌가. 겁 먹지 말자. 말 그대로, 지금은 중요한 시기이고, 겁 먹으면 뒈지는 거다. 아, 죽어야 될까봐 좀 무섭긴 하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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