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a-b : 화자는 소크라테스이다. 익명의 상대에게 '어제'의 일을 전해준다. 어제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피레우스 항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벤디스 여신께 축원을 드리고 거기에서 열리는 축제를 구경했다. 그들이 구경을 마치고 돌아오는 중에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노예를 시켜 그들을 붙들었다. 

  c-328c : 폴레마르코스, 글라우콘의 형제 아데이만토스, 니키아스의 아들 니케라토스 등 몇 사람이 합류하였고, 폴레마르코스는 자기들이 머릿수가 많으니 힘으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저녁에 횃불 경주와 철야제가 구경할 만하니 머물러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폴레마르코스의 형제 리시아스와 에우튀데모스, 칼케돈의 트라시마코스와 파이아니아의 카르만티데스, 아리스토니모스의 아들 클레이토폰이 있었고,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가 제물을 바친 뒤 제관을 쓴 채로 앉아있었다.

  c-329d : 케팔로스 주위로 둘려 놓인 의자에 사람들이 앉았고,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주 들르지 않는다고 서운해 한다. 그는 나이가 들어 몸의 즐거움이 약화되어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은 그 만큼 커졌으니, 소크라테스가 자주 들러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말을 받아 케팔로스가 먼저 경험하였고 다른 이들은 아직 겪지 못한 노년의 문턱에 대해 그것이 어려운 고비인지 말해 줄 것을 청한다. 케팔로스는 노년에 이른 사람들이 젊을 적의 주색을 아쉬워하고 노인에 대한 사람들의 홀대를 한탄하며 온갖 불행이 노령 탓이라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자신은 그리 느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노년의 소포클레스가 성적 쾌락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것이 광포한 주인과 같은 것이며 그로부터 벗어난 것이 기쁘다고 말했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케팔로스는 노년이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며 그로 인한 평화를 주는 것, 광적인 주인들에게서 풀려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노령이 문제가 아니라 생활방식이 절도 있고 쉬이 만족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문제라고 말한다.

  e-330a : 소크라테스는 노령의 평안이 생활방식이 아니라 재물 덕분에 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케팔로스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말을 인용하여 반대한다. 세리포스 출신의 누군가가 그에게 그의 명성은 그 자신의 덕분이 아니라 말하자, 그가 상대에게 자신이 세리포스 출신이어도 유명할 수 없겠지만 상대가 아테네인이어도 유명할 수 없을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 지역과 마찬가지로 재물의 경우에도 그것을 갖춘 사람의 품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b-331d :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재산이 얼만큼 상속받은 것이고 또 얼만큼 불리거나 잃었는지 묻는다. 케팔로스는 조부 케팔로스 보다는 덜 가졌으나 부친 리사니아스 보다는 늘렸노라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스스로 재산을 모은 게 아니라 상속 받았기 때문에 애착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반면 스스로 번 자들은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애지중지하듯 부 이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정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재산으로 얻는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케팔로스는 노년에 이르러 저승에서 벌을 받을 일이 두려워지게 마련이라 말한다. 그리고 재산은 품성이 훌륭한 자가 재산 탓으로 인간이나 신에게 의도치 않게 거짓을 고하거나 빚을 지는 등의 잘못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훌륭한 자에게는 가장 쓸모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를 듣고서 정직함과 갚을 것을 갚는 것이 단적으로 정의인지 되묻는다. 그리고 정직하고 되갚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는 정상인 친구가 맡겼던 무기를 이후에 그 친구가 미쳐서 돌려달라 할 때에 돌려주거나 이를 곧이곧대로 밝히는 건 잘못이 아니냐는 예시를 든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단적인 정직과 갚음은 정의(正義)의 정의(定意)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d-332c : 케팔로스는 제물을 보살피기 위해 자리를 뜨면서 논의를 폴레마르코스에게 상속한다. 폴레마르코스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는 시모니데스의 언명을 지지하면서 케팔로스의 말이 맞다고 소크라테스에게 반론한다. 소크라테스는 시모니데스의 말을 의심하기는 어려우나 그 뜻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다며 논의를 이어 나아간다. 단적인 정직과 갚음은 앞서의 반례로 정의로운 것이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재차 지적하는 그에게 폴레마르코스는 친구에 대해서는 좋은 것을 돌려주고 나쁜 것은 주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말한다. 반면 적에게 갚을 것은 적에게 적절한 것, 즉 나쁜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대답을 통해 시모니데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재해석한다. 각자에게 적절한 것이 곧 갚을 것이다. 
  → 
재산의 상속과 논의의 상속. 단순한 말장난? 케팔로스의 입장이 폴레마르코스에게서 유지, 계승, 발전되는가? 이 과정에서 시모니데스의 입장은 케팔로스의 입장과 동일한 것인가?

 d-334b : 의술은 몸에 약과 음식을 주는 기술로서, 몸에 적절한 것을 주는 것이다. 조리술은 요리에 조미를 주는 기술이다. 이 구도에 따라 정의는 친구들과 적들에게 각기 이로움과 피해를 주는 것이다. 의사는 의술로써 친구의 병을 고치고 적을 병들게 할 수 있다. 선장은 항해하는 이들에게 바다의 위험에 대해 마찬가지로 친구를 이롭게 하고 적을 해롭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자가 어떤 행위, 어떤 일에서 친구와 적에게 각기 이롭게 또 해롭게 하는 자인지 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전쟁이라 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병들지 않은 자에게 의사가 소용이 없고 항해하지 않는 자에게 선장이 소용 없듯, 전쟁을 하지 않는 자에게 정의로운 자도 소용이 없는지 되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이에 반대한다.
  → 여기에서 정의(dikaiosyne)가 기술(techne)에 유비된다. 이러한 이행이 자연스러운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듯.
  평화시에 정의의 효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가 진행된다. 농사기술은 평화시에 작물의 수확에 유용하다. 제화술도 평화시 신발의 생산에 유용하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식으로 볼 때 정의는 어떤 유익함이 있는지 묻자 폴레마르코스는 약속(계약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이라 말한다. 약속은 공동으로 행하는 일들이다. 이는 바둑도 마찬가지이다. 헌데 바둑에서는 바둑기사가 정의로운 자 보다 더 좋은 상대이다. 또한 함께 건축을 한다면 건축술을 갖춘 자가 정의로운 자보다 더 유용할 것이다. 어떤 공동의 일이 정의로운 자가 유용한 영역이냐는 물음에 폴레마르코스는 금전관계라고 답한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경우에는 무엇을 사느냐에 따라 말의 경우에는 말 전문가, 배의 경우에는 조선기술자나 선장이 정의로운 자보다 유용하다. 그리하여 돈을 쓰지 않고 보관할 때에 정의로운 자가 유용하다. 돈뿐 아니라 악기의 경우에도 그것이 쓰일 때엔 그 악기에 대한 연주기술이, 무장의 경우에도 사용할 때에는 해당 무장기술이 유용하며 정의는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유용한 것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여기에 이어서 보관하고 지키는 것을 전투에서의 공격과 방어에 연결시킨다. 공격에 능한 자는 방어에도 또한 능하다. 병의 경우에도 그것을 막는 데 능한 자는 그것을 일으키는 데에도 능하다. 군대를 잘 수호하는 자는 또한 적군의 책략과 작전을 알아차리는 데에도 능하다. 이를 일반화하여 어떤 것의 유능한 수호자는 바로 그것을 잘 훔쳐낼 수도 있다. 만일 정의가 무언가 보관하여 지키는 것이라면, 정의는 다시 그 무언가를 훔쳐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의는 친구의 이익과 적의 손해를 위한 절도 기술이다. 도둑질과 거짓맹약에 능한 자가 정의로운 자이다. → 그러나 이는 애초에 케팔로스에게서 넘겨 받은 정의, 정직에 배치된다.

 c-335a : 폴레마르코스는 정의가 잘 지키는 도둑의 기술이라는 결론에 혼란을 겪고, 그럼에도 시모니데스의 언명대로 정의는 여전히 친구에게 이롭고 적에게 해롭게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고수한다. → 이는 정직과 갚음 중 전자에 대한 폐기, 후자에 대한 고수로 해석될 수 있을 듯하다. 소크라테스는 이 정의에서 친구와 적이 정확히 무엇인지 되묻는다. 그는 친구란 좋은 자로 여겨지는 자인지 혹은 그리 여겨지지 않더라도 실제로 그러한 자인지, 적의 경우에도 그가 나쁜 자로 여겨지는 자인지 혹은 그리 여겨지지 않지만 실제로 그런 자인지 묻는다. 폴레마르코스는 좋게 여겨지는 자가 친구이고 나쁘게 여겨지는 자가 적이라 답한다.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좋거나 나쁘지 않더라도 그렇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며, 이 경우 좋은 자, 즉 정의로운 자, 따라서 부정의를 저지르지 않는 자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정의가 된다. 폴레마르코스가 이를 거부하자 소크라테스는 남은 가능성을 검토한다.
  실제로 좋은 자에게 이롭게 대하고 실제로 나쁜 자에게는 해롭게 대해야 한다면, 오인한 자에게는 실제로 나쁘지만 좋게 여겨지는 자가 또한 친구인 바, 그 친구는 나쁜 자이기에 친구에게는 해를 입혀야 하고, 반대로 실제로 좋지만 나쁘게 여겨지는 자는 적이지만, 그 적은 실제로 좋은 자이기에 이롭게 해주어야 하며, 결국 친구에게는 해를 입히고 적에게는 이로움을 주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시모니데스의 언명과 정반대이다.
  폴레마르코스는 재차 친구와 적의 정의를 수정한다. 친구는 좋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좋기도 한 자이며, 반면에 적은 나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나쁘기도 한 자이다. 이 둘 중 한쪽으로 여겨질 뿐 실제로 그렇지 않은 자는 실제로 친구가 아니거나 적이 아니다. 

  b- 336a: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자가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이 적절한 일인지 고찰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적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정의로운 자가 할 만한 일이라 말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말에게 해를 입히면 그 말의 기능, 덕(arete)은 저해된다. 이 저해는 말의 덕에 관한 것이지 다른 어떤 것의 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해를 입으면 바로 그 개의 덕에서 저해된다. 인간의 경우에도 해를 입는다면 인간이 인간적인 덕에 관련하여 더욱 나빠지는 것이다. 그러나 정의는 인간의 덕이다. 시가술을 갖춘 자가 시가술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시가에 문외한으로 만들 수는 없다. 승마술을 갖춘 자가 바로 그 승마술로 누군가를 승마에 문외한이게끔 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덕으로써 인간을 덕에 관련하여 더 나쁘게 만들 수는 없다. 정의는 인간의 덕이므로, 정의는 인간을 해롭게 할 수 없다. 이는 열이 차게 할 수 없고 뜨겁게 만들 수만 있으며 건조함이 습하게 만들 수 없고 마르게 할 수만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덕이 부덕을 산출할 수는 없다. 
  → 332d에서 의술은 병을 막고 건강을 낳는 것인 동시에 건강을 막고 병을 불어넣을 수도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의술은 기술이고 여타의 기술들과 더불어 정의가 유비되는 대상이다. 정의 또한 기술이라면 그것으로 인간의 덕을 이롭게 하는 것뿐 아니라 해롭게 하는 것 역시 가능해야 한다. 비록 기술로서의 정의에 대한 고찰이 정직이란 측면에서 모순에 직면하긴 하지만, 그 결론이 정의는 기술이 아니라는 데에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술이 병을 일으키거나 수호술이 절도와 계략에 사용되거나 하는 일이 소크라테스가 이후 전개할 기술의 엄격한 정의에 부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기술 자체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그 목표를 완수해내는 앎이자 힘이다.
  정의가 정직함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적극적인 효용도 없게 되고, 친구와 적 각각에 대한 합당한 대우라면 덕이 부덕을 낳는 모순이 귀결되므로 케팔로스-시모니데스-폴레마르코스의 정의에 대한 정의는 부정된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의가 자신의 능력을 자부하는 부자들의 것이라 말한다.
  → 권력과 재물을 기준으로 놓고 볼 때 적에게서 강탈하고 우리 편에게서 증대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될 일이 없어 보인다. 이는 상대적이고 배타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종류의 이득을 중심에 놓았을 때 성립하는 정의관일 수 있다. 반면 인간의 덕, 인간이 인간다움을 기준으로 더욱 완전하고 훌륭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에 관련하여서는 친구만이 가지고 적은 가질 수 없거나 혹은 어느 한쪽이 다른 쪽으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종류의 이득을 말하기 어렵다. 또한 적은 '나쁜 자'인데 덕으로서의 정의는 실상 나쁜 자를 좋은 자로, 즉 적을 친구로 만들어 버릴 것이므로, 정의의 기능 자체가 친구와 적의 구분과 상충한다.

  

  336b-338b : 여기까지 사이사이 트라시마코스가 난입을 시도했으나 청중들에게 저지당하다가, 이야기가 멈춘 틈을 타 '야수처럼' 뛰어든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묻거나 반박만 하지 말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워 보라고 요구한다. 그와 동시에 필요한 것(to deon), 도움이 되는 것, 유익한 것, 유리한 것, 유용한 것이라고는 답하지 말라고 제한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겁에 질렸으나 트라시마코스가 논의로 인해 화를 내기 시작하던 때에서부터 그를 지켜봤기 때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대답은 황금을 찾는데 서로 양보를 할 리도 없는 마당에 그보다 더 귀한 정의를 찾는 데에 양보할 리 없다는 것, 만일 그럼에도 찾지 못했다면 자신과 폴레마르코스가 최선을 다했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했을 뿐이며, 유능한 쪽에게 혼나기 보다는 동정을 받는 게 더 합당하다는 것이다. 그러자 트라시마코스는 이러한 태도가 소크라테스의 익히 알려진 모른 척하기(eironeia)라며 이럴 줄 알았다고 비난한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지혜롭기 때문에(gar) 자신의 모른 척을 예견한 것이며, 또한 지혜롭기에(oun) 그가 자신에게 금한 것들에서 자신이 답을 찾더라도 잘못된 일이 아님을 또한 알 것이라 답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질문한 방식은 마치 12를 6의 두 배, 4의 세 배, 2의 여섯 배 등 어떤 식으로도 말하지 말고 정확히 말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금한 것 중에 진실이 있더라도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금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질문을 받은 자는 자신에게 그리 여겨지는 바의 것을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자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이 금한 것들을 제하고 이것들보다 더 나은 답을 자신이 내놓겠다고 응수한다. 그리고 이 일을 자신이 해낸다면 소크라테스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모르는 자가 아는 자에게서 받을 벌은 가르침을 받는 것뿐이라 답하지만 →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도 같은 입장이 드러난다. 트라시마코스는 벌금을 내라 하고, 주위 사람들이 대신 벌금을 내주겠다 나선다. 그러자 트라시마코스는 이 역시 소크라테스가 제 주장은 않고 대답을 논박하기만 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라 말한다.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자신이 알지 못하며 또한 안다고 주장하지도 않는 자가, 무언가 알더라도 그걸 말하지 못하도록 무서운 자에게 금지를 당한 차에,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시마코스는 알고 있다고 말하니 그가 대답을 하는 편이 맞는 일이라 회유한다. 이를 다른 사람들이 지지하며 청하자,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트라시마코스는 인기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말을 하고 싶어 했으나, 짐짓 '소크라테스가 답을 해야 한다.' 라고 고집을 피우다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고 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면서 배우기만 바라고 고마워하지도 않는다고, 이것이 그의 지혜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훌륭한 말이라 생각하는 것에는 그에 걸맞는 칭찬을 아끼지 않을 따름이라 답한다.

  c-340b : (1) 트라시마코스는 정의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말한다(εἶναι τὸ δίκαιον οὐκ ἄλλο τι ἢ τὸ τοῦ κρείττονος συμφέρον). 소크라테스는 일반인보다 강한 운동선수의 몸에 고기가 이익을 준다면, 일반인에게 고기가 이롭고 또한 정의라는 뜻은 아닐 테니, 그 뜻을 더 정확히 설명해 달라 요청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참주제든 민주제든 귀족제든 지배하는 쪽이 지배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각 지배층은 자기에게 유익한 쪽으로 입법을 하며, (1-추가) 이것을 피지배자들에게 정의로운 것으로 내세우고, 이를 위반하는 자를 범법자이자 부정의한 자라고 처벌한다고 말한다. 이제 (2) 입법을 한 지배층의 이익이 정의로운 것이다(ταὐτὸν εἶναι δίκαιον, τὸ τῆς καθεστηκυίας ἀρχῆς συμφέρον). 그런데 지배층이 더 강할 테니, 그래서 더 강한 자의 이익이 정의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한테는 이익이라 말하지 말라 해놓고 정작 트라시마코스는 이익이라 말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정의가 이익이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더 강한 자의' 이익이 정의인지 그 첨언은 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지배층이 실수하는지 묻고, 그 실수는 이익이 아닌 불이익을 입법하는 것이리라 추정한다. 반면 피지배층은 입법된 바에 따라야 하고 그것이 정의이다. 그 실수의 측면에서 보자면 더 강한 자의 불이익이 정의가 된다. 폴레마르코스가 이를 거들고 나서고, 클레이토폰이 이에 반발한다. 폴레마르코스는 지배층이 제 이익에 위배되는 바를 명하고 피지배층이 이를 따르는 것이 정의롭다는 결론을 지적하여 재차 소크라테스를 지지한다. 그러나 클레이토폰은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명을 따르는 것이 정의라는 점은 트라시마코스가 말한 것이고, 여전히 유효하다고 반론한다. 다시 폴레마르코스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정의의 규정과 더 강한 자가 제 이익에 반해 내리는 명을 피지배층이 따르는 것이라는 정의의 규정이 상충됨을 강조한다. 이 경우 더 강한 자의 이익이 그의 불이익에 비해 조금도 더 정의로운 바 없다. 이에 대해 클레이토폰은 더 강한 자의 명령이 여전히 그 자신에게 이익일 것으로 생각한 바의 것을 의도하는 한에서, 그러한 상충은 없다고 주장한다. 

  c-341b : 소크라테스는 지배층의 생각에 의도에 주목하든 말든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트라시마코스의 의도이다. 그것이 더 강한 자에게 이롭든 아니든 그에게 이롭다고 여겨지는 것이 정의냐는 물음(→ 335a에서 제기된 사실과 믿음의 문제)에 트라시마코스는 실수를 저지르는 자를 더 강한 자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누군가를 기술을 갖춘 자(혹은 '-전문가,' -tikos)라고 부르는 한에서 그러한 자는 바로 그 기술에 관련하여 실수하지 않는 자이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τὸ ἀκριβέστατον) 지배자는 실수하지 않는 자로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입법하고, 피지배층은 이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정의이고, 따라서 더 강한 자의 이익이 정의이다.(→ 339c에서 트라시마코스는 지배자가 실수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이는 de re와 de dicto 중 전자에 실수라는 사례를 종속시키고 자신의 주장은 후자의 차원으로 한정하는 전략이다.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는 '정의상'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에게 자신이 협잡질을 하는 걸로 보이냐고 묻고, 트라시마코스는 방금도 그러지 않았느냐고 대답한다. 즉 자신은 애초부터 엄격한 의미의 지배자와 현실 속의 지배자를 구분하였건만, 소크라테스가 의도적으로 이 둘을 섞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오히려 엄격한 의미의 지배자와 현실의 지배자를 구분할 계기를 마련해 준 것, 즉 트라시마코스의 정의에 대한 최초의 규정을 강화시키도록 만든 것은 소크라테스의 물음, 실수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물음이다. 더불어 이익이라 여겨지는 것과 <실제로> 이로운 것 사이의 구분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c-343a :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에 대해 재차 묻는다. 엄밀한 의사는 돈을 버는 자인가, 환자를 돌보는 자인가? 트라시마코스는 후자라 답한다. 키잡이의 경우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선원들을 통솔하는 자이지, 선원이 아니다. 여기에서, 앞서 엄밀한 의미를 현실의 사태와 구분지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키잡이를 설명하는 데에 그가 항해 중이라고 고려해서는 안 된다. 그는 그의 기술, 이를 통한 통솔에 관련하여 키잡이인 것이다. 의사는 의술로써 환자를 돌보고, 키잡이는 조타술로써 선원들을 돌본다. 어느 쪽이든 어떤 기술로든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각기 기술이 다루는 대상의 이익을 도모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술 자체는 부족함이 없기에 그 기술을 위한 또 다른 기술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엄밀한 의미에서 기술 자체가 완전한 것이라면, 그 기술의 전문가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자신의 이익을 돌볼 이유가 없다. 부족함이 없는 의술은 부족함을 지닌 현실의 몸을 돌보고, 마술은 말을 돌보며,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여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 따라서 모든 지식은 자기 자신도 아니고 더 강한 자도 아닌 부족하고 약하며 관리를 필요로 하는 것의 이익을 도모한다. 결국 조타술도 키잡이의 이익이 아닌 선원들의 이익을 도모한다.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미에서 지배자는 그 기술로써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것의 정의는 역전되었다.

  b-344c : 트라시마코스는 양과 목자도 구분 못하느냐고 반문한다. 양을 치거나 소를 치는 자들은 그 가축들의 이익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이 자신들, 그 주인들에게 주는 이익을 고려한다. 통치자들 역시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의란 피지배자 자신에겐 해가 되나 타인, 지배자에게는 이익이 되는 것이며, 부정의는 반대로 정의로운 자들을 조종하고 피지배자들은 이를 따라 저들에게 이익이 되게 행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정의로운 자는 정의롭지 못한 자보다 항상 덜 가진다. 계약의 경우, 폴리스의 일들에서 세금을 낼 때, 또 관직을 맡았을 때 모두 정의로운 자들은 손해를 감수하지만 부정의한 자들은 많은 이득을 본다. 부정의한 자는 더 많이 가지는 자, 남들을 능가하는 자들인 것이다. 가장 부정의한 것은 참주정치인 바, 이는 가장 정의로운 자들을 가장 불행하게 만든다. 또한 이것은 정의보다 강력하고 자유롭다. 그걸 남몰래 해내지 못하는 자들은 처벌을 받지만, 완전한 부정의를 저질러 사람들의 재산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까지 앗아가 버리는 자는 행복하고 축복받은 자라 불린다. 이제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인 반면, 부정의는 자신을 위한 이익이다.

  d-348b :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하찮은 일을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더 설명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설령 트라시마코스의 가정대로 가장 완전한 부정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것은 이롭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반론한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에게 말한 것을 유지하고 바꿀 때엔 밝힐 것을, 그리고 속이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선 목자의 예시를 비판한다. 그에 앞서 엄밀한 기술에 대한 논의를 고려할 때, 목자가 기른 양을 잡아 먹든 팔아 치우든 그것은 목축술에는 하등 관심거리가 아니란 점을 지적한다. 여전히 목축술은 가축의 이익을 도모할 뿐이며, 잔치를 벌일 때엔 다른 기술이 쓰일 것이고, 매매를 할 때에도 역시나 돈 버는 기술이 사용되지 목축술이 쓰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전히 통치술도 그 자체로는 통치자의 이익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이유로 자발적으로 관직을 맡는 자는 없다. 다음으로, 기술은 저마다 산출해 내는 이익이 고유하며 서로 다르다. 모든 기술이 부수적으로 돈을 벌게 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돈에 관련된 또 다른 기술로 인한 것이다. 설령 돈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돈 벌이 기술 이외의 기술들은 각기 저마다의 기능을 수행해 내고 고유한 이익을 산출해낼 수 있다. 통치술의 보상은 통치술 자체로는 통치자에게 이익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이익이 없기 때문에 강제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맡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 이 처벌도 보상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글라우콘이 그 까닥을 묻자, 소크라테스는 이를 통해 수전노 취급이나 돈 욕심 부리는 자 취급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라 답한다. 또한 훌륭한 자들은 돈도 명예도 관심이 없는데, 그런 자들은 돈을 받아 통치를 위한 고용인으로 불리는 것도 싫어하고 관직을 통해 도둑질을 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또한 스스로 나서서 남들의 지배자 노릇을 하기도 바라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의 지배자가 가능한 훌륭한 사람들의 나라가 이루어진다면 서로 지배자 자리를 거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트라시마코스가 열거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부정의한 삶이 정의로운 삶보다 낫다는 데에 반대하는지 묻고, 반대한다는 답을 듣자 어떻게 검토할지 다시 묻는다. 트라시마코스의 입장에 반론을 내놓을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서로 합의를 통해 자신의 판관이자 변론자가 되는 게 나은지. 글라우콘은 후자를 택한다.

  c-350c : 완전한 부정의는 완전한 정의보다 더 이롭느냐는 물음에 트라시마코스가 그렇다고 답한다. 그리고 탁월함과 나쁨을 각기 어찌 짝지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의는 고상한 착해빠짐, 부정의는 좋은 숙고라고 말하리라 답한다. 따라서 부정의한 자들은 분별 있고 훌륭한 자들이라 여긴다. 부정의는 탁월함과 지혜의 부류이고, 정의는 반대 부류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다른 물음을 던진다.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자를 어떤 점에서 능가하고 싶어 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올바른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정의로운 자는 부정의한 이에 대해서는 능가할 수 있다 여기고 또 그 능가함이 정의롭다 생각한다. 반면 부정의한 자는 정의로운 자를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할 만하다고 여긴다. 또 이를 위해 최대한으로 얻고자 경쟁한다. 즉 부정의한 자는 자신과 닮은 사람이든 다른 사람이든 능가하고자 한다. 트라시마코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다른 물음을 던진다. 각 기술에 능한 자들은 해당 분야에 분별 있는 자인 반면, 능하지 못한 자들은 분별 없는 자들이다. 또 각 기술자는 제 자신의 분야에서는 분별 있지만 다른 분야에는 그렇지 못하다. 이제 각 기술자는 제 분야 전문가들을 능가하고자 하지는 않으나 그 외의 문외한들은 능가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의사가 행한 제대로 된 처방을 넘어서려는 의사도 없고, 다른 수학자가 한 제대로 된 계산을 넘어서려는 제대로 된 수학자도 없다. 반면 문외한들은 전문가든 아니든 능가하려 든다. 그런데, 전문가는 지혜로운 자이다. 지혜로운 자는 훌륭한 자이다. 즉, 전문가로서, 훌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자기와 같은 사람은 능가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사람은 능가하려 한다. 반면 나쁘고 무식한 자는 같은 자도 반대되는 자도 넘어서려 한다. 부정의한 자는 전문가처럼 하지만 부정의한 자는 문외한처럼 하며, 따라서 전자가 훌륭한 반면 후자는 나쁘고 무식하다. 트라시마코스는 이에 동의하며 얼굴을 붉힌다.

  d-352c : 정의는 탁월함이자 지혜이지만 부정의는 악이며 무지임이 동의되었다. 다음으로 부정의가 정의보다 강력하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검토받는다. 무정의한 나라는 다른 나라를 부정의하게 예속시키려 들 것이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더욱 강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는 정의로운 나라가 지혜와 덕을 갖추기에 더 강하지만, 트라시마코스 입장에서는 반대이다. 그런데 공동으로 일을 행하는 집단의 경우 집단 내 상호 간에 부정의는 대립을, 정의는 동의를 성립시키므로 후자가 더욱 강하다. 이는 두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한 사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제 부정의는 개인 내에서조차 대립을 일으켜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든다. 또한 정의로운 것에 대해 적대하게 만든다. 그런데 신들은 정의롭다. 따라서 부정의는 개인이 신들에 적대하게 만든다. 더욱이 이러한 맥락에서 완전한 부정의는 자체 내에 그리고 상호 간에 어쨌든 대립과 분란을 만들어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며, 부정의한 일을 해내는 부정의한 자나 집단은 어느 정도 정의롭고 동시에 불완전하게 부정의한 것이다. 

  d-354a : 이제 정의로운 자와 부정의한 자 둘 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지 여부가 검토된다. 무엇이든 그 고유한 기능, 일은 오직 그것으로써만 가능하며 또한 가장 잘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각 기능은 그 덕과 악 또한 있다. 모든 것은 각기 그 고유한 기능에 관한 덕의 상태에서 가장 잘 발휘되고 악에 의해서는 추악하게 행해진다. 이제 영혼은 몸을 다스리고 삶을 꾸리며 숙고하고 생각하는 것이 고유한 기능이다. 그러한 혼에도 덕과 악이 있다. 정의는 덕이고 부정의는 악이다. 따라서 정의로운 혼은 좋은 삶을 살 것이고 부정의한 혼은 잘못 살 것이다. 전자는 행복할 것이고 후자는 불행할 것이다. 부정의는 정의에 비해 전혀 더 이롭지 않다. 여기에 이르자 트라시마코스는 벤디스 여신 축일에 펼쳐진 소크라테스를 위한 잔치를 마음껏 즐기라며 비꼰다.

  b-c :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가 잘 답해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으나, 만족스럽진 못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 그것이 악과 무지인지 아니면 덕과 지혜인지 하는 문제로 넘어갔고, 더 나아가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로운지 하는 이야기로 넘어간 탓이라고 자책한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그것이 덕이자 지혜인 것인지, 그걸 지닌 자가 행복한지 불행한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리라 한탄한다.

  -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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